안녕하세요? 국제연대위원회입니다. 이라크전쟁에 대해 반전여론이 전세계적으로 들끓고 있는 가운데 미국의 최대 노조연합인 미국 노동총연맹산업별회의(AFL-CIO)도 이라크전을 반대한다고 밝혔습니다. 과거 베트남전을 지지했던 보수적 입장인 이 산별회의는 결의안을 통하여 후세인의 무장해제는 이루어져야 하지만,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 못하는 일방적 방식으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중동지역에 병력을 추가배치하는 등 전쟁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습니다. 차량 10부제 운행, 기름값의 연 이은 인상 등, 이미 이라크 전쟁은 한국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북한에 대한 군사행동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미국 국방부가 북한의 핵시설에 대한 군사공격을 비밀리에 계획하고 있고 이같은 계획을 여러 경로를 통해 우리 정부에도 통고했다고 합니다. 점차 다가오는 전쟁의 그림자... 따스한 봄햇살이 전쟁의 섬광으로 바뀌는 영화같은 악몽은, 영화로 충분합니다. 오늘은 체첸인들의 독립투쟁입니다.

뿌리깊은 반러시아 정서

체첸(Chechen : 원어는 체체니아)민족은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 카프카스(Kavkaz : 영어로는 코카서스 Caucasus)산맥 일대에 6000여 년 전부터 유목생활을 하며 살았습니다. 15세기이후 오스만제국과 페르시아 왕국의 영향으로 이슬람을 받아들였고, 이슬람 문화와 집단공동체 문화는 이들 체첸민족의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타입(taip)이라는 공동체 문화와 공동체 대표들의 모임인 종족회의를 통해 정치가 이루어졌습니다. 카프카스 지방은 지리적으로 동서와 남북을 이어 문화와 상품을 연결해주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미국 대륙이나 북해유전과 맞먹는 180억∼350억 배럴 규모의 석유 매장량에다 천연가스까지 가득한 축복받은 땅임에도 불구, 포화가 그치지 않는 지역입니다(체첸뿐만 아니라 국경을 접하고 있는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공화국과 터키 등은 각 국가들간의 반목과 분쟁이 있습니다).

러시아와의 끈질긴 저항의 역사는 16세기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8세기말부터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졌는데 특히 19세기 중반에는 뛰어난 이슬람교 지도자 이맘 샤밀(Imam Shamil)의 지휘 아래 격렬한 투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1859년 샤밀이 체포되면서 저항은 약화되기 시작하여 결국 1864년 러시아 황제에게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엄청난 인적·물적 희생을 치뤘고, 체첸민족의 강한 저항때문에 현재의 수도인 그로즈니(러시아어로 "무서운"이라는 뜻)를 포함한 북카프카스지역에 30만명의 군을 투입해야만 했습니다. 물론 체첸인들의 피해도 상상을 초월했는데, 1860년 체첸지역의 인구는 터키 등지로의 피난과 러시아 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1820년대 초기의 4분의 1로 변했습니다.

러시아 혁명기에는 모든 소수민족들에게 자결권과 전통 존중을 약속한 볼셰비키들과 협조하면서 반혁명 운동의 격퇴에 공헌했지만, 레닌 정부로부터 받은 것은 독립이 아닌 자치권뿐이었습니다. 1917년 '북카프카스 민족 산악 공화국'의 설립이 진압된 이후 1919년 다시 '다게스탄 공화국'을 수립하였지만 1921년 러시아 혁명군에 의해 해체되면서 구소련에 편입되었습니다. 러시아 혁명이후 민족문제는 혁명의 성패를 좌우하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들은 민족주의를 정당한 이데올로기 내지는 감정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으로 여겨 혁명초기에 소수민족의 정치적 독립과 주권국가의 수립을 적극 지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소련연방의 구성이 완료되어 가던 스탈린 시기에 제정된 당시의 헌법에 나타난 소련 연방제도의 특징은 중앙집권적 단일국가였습니다.

스탈린은 민족문제에 있어서도, 소련은 사회주의의 조국으로 약소민족의 해방자이기 때문에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거나 소련에 적대적이 되어서는 안되며, 사회주의를 희망한다면 소련의 노선에 충실히 따를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시베리아 지역의 고려인들을 포함한 소수민족들은 국민경제의 사회주의화와 공업화 및 농업집단화 과정에서 강제 이주와 사회주의로의 통합을 위한 소수민족 말살정책 속에서 철처한 러시아 동화정책을 강요받았습니다.

체첸은 스탈린에 의해 체첸 공산당의 지도부가 '분리주의' 혐의로 강제추방과 10만명이 체포, 일부가 처형되었으며, 이로 인한 저항 역시 12만명이 학살당하면서 진압되었습니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체첸이 독립을 위해 독일군에 협력하였으나 독일이 패전하자 이를 빌미로 러시아는 1944년 약 40만명이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지역으로 강제이주를 시켰습니다. '강제 이주'라고 말하지만 이 과정에서 40만명이 되는 체첸민족 중 약 30%가 기아와 대규모로 계획적인 학살을 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1957년 흐루시초프에 의해 귀향할 수 있었지만, 이미 체첸지역의 경제는 러시아에 지배당하였고, 당 조직도 러시아인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대러시아 독립전쟁이 몇 세대의 생활현실이 되어 침략자에 대한 적개심은 일상적 정서가 되었습니다. 특히 1990년대의 체첸 저항의 주요 지도자들이 이때 강제이주당한 카자흐스탄 등지에서 자란 사실은 체첸인들의 급진적인 반러 성향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소련의 붕괴 이후 독립운동의 전개

구소련연방이 해체되고 1991년 10월 체첸공화국에서도 선거가 실시되어 전민족회의를 결성하여 모든 부족 공동체를 통합한 두다예프(Dudaev)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체첸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과거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러시아 중앙정부에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경제봉쇄 정책과 체첸에 대한 영유권을 고수한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일년에 300만톤의 석유를 생산할 수 있는 유전을 보유하고 있는 체첸지역에 대한 경제적 이유와 소수민족의 독립 움직임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옐친 지도부의 속셈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이 지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수도 그로즈니에 병력을 파견하였지만, 옐친을 견제하는 의회의 반대로 3일 만에 병력을 철수시켰습니다. 이후 러시아는 반두다예프 세력을 규합하여 친러정권을 새우려했지만 이것이 실패하자, 1994년 12월 11일 체첸에 대한 전면공격을 시작하여 러시아군이 수도 그로즈니를 함락시켰습니다. 이 전쟁으로 희생된 사람이 약 3만명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1996년 휴전협정을 통해 체첸의 지위 논의를 2001년까지 유보하기로 합의하면서 1차 전쟁은 막을 내렸고 1997년 선출된 마스하도프 체첸 대통령은 전후 복구에 주력하며 러시아와 유연한 관계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바샤예프(Shamyl Basayev) 등 강경파를 주축으로 한 민병대는 1998년 신생 독립국 '체첸-다게스탄 광화국'의 건설을 선포하였습니다.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러시아는 1999년 모스크바와 상페테스부르크에서의 의문의 아파트 폭발사건을 '체첸인의 테러'로 몰아붙여 지금까지 지속되는 제2차 침공을 감행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저항군들은 수도를 포기하고, 산악지역으로 거점을 옮겨 게릴라전을 계속 수행하고 있습니다. 2000년 2월 수도 그로즈니를 점령한 러시아는 '체첸 대테러작전'의 1차 완료를 선언하고 단계적 철수를 발표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체첸지역을 장악한 러시아의 군사적 성공은 1차 체첸과의 전쟁에서 손상된 '러시아의 자존심'을 회복하였고, 국내 정치적으로 푸틴 현 러시아 대통령의 '인기몰이'도 성공하여 푸틴의 당선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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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땅에 살기 위하여...

두차례에 걸친 러시아의 침공과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소탕작전으로 러시아 군인들은 11,000여명의 사망자와 12,000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매일 10∼20여명의 병사들이 죽어가고 있으며, 러시아는 전쟁비용으로 매달 100백만달러를 지출하였습니다. 체첸 국가구제위원회에 의하면 1999년 이후 20,000∼40,000명이 사망하였고, 400,000명의 체첸인들이 난민과 강제 이주민으로 전락하였으며 잉구쉬근처의 난민캠프에 180,000명이 살고 있습니다. 체첸이외의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이들 난민들은 '대테러 작전'에 의해 난민으로써의 지위가 유명무실할 정도로 인권침해를 받고 있습니다. 구소련지역에서 태어난 체첸 난민 아동들은 출생신고가 거부되고 있으며 교육과 의료에 대한 접근도 거의 불가능한 실정입니다. 전쟁범죄 또한 만연해 있는데, 2000명이 넘는 민간인이 실종되었고, 대량학살에 의한 무덤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러시아 군에 의한 불법처형, 고문, 강간도 자행되고 있습니다.

2002년 겨울 러시아의 한 극장에 체첸 결사대가 난입하여 인질극을 벌이다 러시아의 강경진압으로 엄청난 희생을 치루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체첸 결사대의 일부는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과부들이었습니다. 무고한 시민을 희생시킨 테러는 정당화될 수 없지만 1990년대 이후에만도 15만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한 전쟁과 200년이 넘는 러시아의 탄압과 민족말살정책 역시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체첸민족의 독립투쟁을 해결하는 첫 걸음은 바로 체첸민족의 자결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점령군의 철수와 평화협상은 이를 바탕으로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러시아는 소수민족에 대한 제국주의적 자세를 버려야 할 것이며, 국제사회는 푸틴정권의 범죄적 체첸 정책을 방관해서는 않될 것입니다. 권력과 다수에 의한 광기와 폭력의 역사였던 20세기. 새로운 밀레니엄을 다시 한번 그와 같은 역사로 되풀이할 수는 없습니다. 평화를 만드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바로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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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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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국제연대위원회입니다. 지난 26일 인사동 문화마당에서는 500여 시민과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는 반전평화 국제공동행동의 날 집회가 열렸습니다. 전쟁반대평화실현공동실천 주최로 진행된 이날 집회는 서울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독일, 이탈리아, 덴마크, 네덜란드, 스페인, 멕시코, 인도 등 전세계에서 각각 개최되었습니다. 이라크 공격이 미 의회의 승인을 얻은 가운데 다시한번 전운이 감도는 이때, 그리고 북한의 핵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지금 한반도의 장래 역시 불투명한 상태입니다. 무력이 아닌 대화와 외교로서 해법을 찾아야겠습니다. 오늘은 반세계화 투쟁의 흐름을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WTO 반대행동 : 1999년 시애틀

1999년 11월 31일 시애틀에서의 WTO 반대행동은 지불유예선언이라는 '모라토리엄(Moratorium) 선언문'이 인터넷을 통해 배포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선언문은 "자유무역체제가 민주주의·인권·노동권·환경·문화 등 인류 삶에 미친 영향에 대한 포괄적이고 충분한 조사·평가가 선행되기 전까지는 뉴라운드 출범이 유보(Moratorium)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더 많은 자유화·개방화'를 위한 어떠한 추가적인 자유무역 및 투자협상도 거부하며, 이것의 연장선에서 "어떤 새로운 이슈가 WTO에 편입됨으로써, 그것의 영향력과 권한이 확대되는 것"에도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 호소문에 전세계 80개국, 1300여개 이상의 사회운동단체들이 동참하였습니다. WTO 회의가 열렸던 시애틀은 야간통금과 비상사태가 선포된 상황에서 수백명이 체포되는 등 인권 및 환경단체, 노조 등 각국 비정부기구(NGO)로 구성된 수만명의 시위대들이 WTO반대 시위를 벌였습니다.



시애틀 반대행동 이후 지속되는 반세계화 행동 : 2000년

20세기의 마지막 해를 시애틀에서 반세계화 행동으로 장식한 지구촌 시민사회의 국제연대는 2000년에도 이어졌습니다. 주요 반세계화 행동을 보면 ▲ 1월 세계경제포럼(WEF)에 맞선 다보스행동, ▲ 2월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총회에 맞선 방콕행동, ▲ 4월 IMF/세계은행 연차총회에 맞선 워싱턴행동, ▲ 9월 세계경제포럼(WEF)에 맞선 멜버른행동, ▲ 9월 IMF/세계은행 연차총회에 맞선 프라하행동 등이 있었습니다.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는 세계경제포럼에 맞춰 스키복장을 하고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 등으로부터 버스를 타고 온 39개국의 150개 조직들로 구성된 환경, 인권운동 단체들은 법원의 시위금지 결정에도 불구하고 천 여명이 시위를 벌였으며, 세계경제포럼을 밀실 담합이라고 비판하면서 수백만명의 인구에 영향을 줄 수십억달러짜리 거래가 밀실에서 성사됐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이어 2월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총회에 앞서 세계 55개국 의원, 1백여개의 NGO 회원들은 8-9일 방콕에서 별도 회의를 열고 선진국 중심의 세계화와 개발도상국의 이익을 침해하는 무역자유화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IMF와 같은 국제기구들이 개발도상국 정부의 역할과 시민들의 민주화운동을 침해하는데 반대한다고 밝히면서 각국의 민주화운동을 존중하는 국제관리기구를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2000년 4월 16일 워싱턴 시위의 주요 슬로건은 'IMF/세계은행 폐쇄, 구조조정 강요 반대'였습니다. 워싱턴 시위는 미국 시민들이 최초로 IMF/세계은행의 만행을 고발하는 장이었으며, IMF/세계은행의 구조조정에 반대하여 격렬히 행동해온 제3세계 민중들과의 연대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계기였다는 점에서 크나큰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번 4·16 워싱턴 행동에 참가한 제3세계 시위자들은, 대부분 이번 시위를 주도한 '50년이면 충분하다'(50yers is enough) 네트워크와 연계를 맺고 있는 제3세계 NGO 및 사회단체 활동가들이었습니다. 또한 물론 미국 노총의 입장은 WTO에 대한 입장은 무역-노동의 연계 속에서 WTO에 대한 개혁(선)이었지만 미국 노총 산별회의(AFL-CIO)가 이번 워싱턴의 'IMF 해체/구조조정 반대 행동'에 참여한 것도, 그들의 과거 모습과 비교해볼 때 상당한 진전이었습니다(AFL-CIO는 2년 전(前)만 하더라도 클린턴 행정부의 IMF에 대한 180억불 지원 정책을 지지했었습니다).

9월에는 노동조합, 환경보호 단체 소속원 등 세계화 반대론자 수천명이 11일 세계경제포럼(WEF) 회의가 열리는 호주 멜버른의 한 호텔 밖에서 각국 참석자들의 출입을 봉쇄하며 `WEF는 살생단체' 등의 구호를 외치며 인간사슬을 만들고, 회의장에 들어가려는 각국 대표단을 저지했고 일부 시위대는 호텔 벽과 대표단 차량 등에 페인트를 퍼붓는 등 과격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역시 같은 9월에 인권 및 환경 운동가, 무정부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극우파 스킨헤드 등이 포함된 사회단체 5천-1만명이 "경제테러 즉각 중단"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연차총회가 열리고 있는 체코 수도 프라하에서 대규모 항의시위를 벌였습니다.



프라하 반대행동 이후 지속되는 반세계화 행동 : 2001년 이후

2001년의 경우, 캐나다 퀘벡에서 열린 미주정상회담을 계기로 반세계화 행동이 계속되었습니다. 회담 개막시간을 연기할 정도로 격렬한 시위를 벌인 이번 반세계화 시위에는 좌파 막시스트와 무정부주의자부터 환경단체, 노동단체, 인권단체 등이 참여, 이번 회담의 주요 의제중 하나로 오는 2005년 출범을 목표로 하는 미주자유무역지대(FTAA) 창설반대를 외쳤습니다. 특히 퀘벡행동은 `FTAA 반대'같은 단체들이 정상회담이 열리는 3일 동안 미국과 캐나다 전역에서 FTAA의 출범에 반대하는 시위를 동시다발적으로 벌였습니다. 이들은 FTAA 같은 서반구 자유무역지대의 창설은 "자유무역지대 합의는 지역사회의 요구를 희생시켜 수출극대화를 지향하는 것"이라면서 민주주의, 인권, 평등, 단합, 환경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기울일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리고 2000년 7월에는 G8정상회담에 대항하기 위해 이탈리아 제노아에서도 30만 명의 시위대가 모였습니다. 이탈리아의 청년공산주의 재건파, 녹색당연합 활동가, 프랑스의 트로츠키주의자, 독일의 반파시스트 운동가, 친이민 정책 운동가, 영국의 후진국 부채탕감 운동가, 유전자 변형 농작물 반대 농민운동가까지 다양한 세력들이 참가하였습니다. 한편, 제노아에서의 시위와 더불어 브라질과 그리스 등에서도 세계화에 반대하는 연대시위가 벌어졌습니다. 브라질 상파울루에서는 20일 수천명의 노조원들과 "무토지운동"소속 활동가들이 반세계화 시위에 동참, 시가행진을 벌이면서 미주지역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의 중단을 요구했고,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이탈리아 당국의 불허로 제노바행이 좌절된 수천명의 반세계화 시위대가 시내 중심지에 모여 이탈리아 정부를 맹렬히 성토했으며 약 400명의 그리스 공산당원들은 이탈리아 대사관앞으로 몰려가 항의시위를 벌였습니다.

올해에도 9월 워싱턴에서 열리는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 연차총회에 때맞춰 반세계화 행동이 지속되었습니다. 국제금융기구 해체를 주장하는 반자본주의집합(Anti-Capitalism-Coalition : ACC)은 9월 27일 오전부터 미국 정부의 환경 정책에 반대하는 자전거 시위와 대기업의 비윤리적 행위에 반대하는 거리행진을 벌였고, `세계 정의를 위한 집결'(MGJ)측도 IMF-세계은행 연차총회가 진행되는 동안 건물을 둘러싸고 스크럼을 짜고 시위를 벌였습니다. 시위대들은 또 조지 W. 부시 대통령 행정부의 환경정책을 비난하는가 하면 이라크전 반대를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반세계화운동 흐름의 특징

이처럼 1990년대말부터 지속되어온 반세계화 행동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즉, 초국적 금융자본의 주도로 증가되는 투기성과 불안정성의 증대, WTO 체제, 양자간 다자간 투자협정 및 자유무역협정 등을 통한 각종 자유화 정책 강요, 3세계의 외채위기와 구조조정 등에 대한 반대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타겟은 주로 세계화를 이끄는 국제기구나 모임들, 즉 G8 정상회담, 세계경제포럼(WEF), IMF와 세계은행, WTO가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세계화의 물결은 '저항의 세계화'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즉, 세계화가 가져온 문제들은 다양한 층위에서 문제를 야기했고, 이로 인하여 저항의 세계화 역시 다양한 이슈들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반대라는 공통의 이해를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구조조정에 따른 실업증대, 실질임금하락, 빈곤층의 확대, 보호받지 못하는 여성과 아동, 무역자유화에 따른 식량안보의 위협, 규제완화에 따른 환경파괴, 인종 및 외국인 노동자의 문제 등은 인권의 문제일 뿐만아니라 여성, 환경 등 다양한 이슈로 파급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성, 환경, 인권 등 이슈중심으로 활동해왔던 세력들이 '세계화 반대' 동맹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동안 모였던 수많은 시위대들은, 전통적인 좌파세력(노동운동 및 좌파정당)에서 진보적 교회운동, 인권운동, 평화운동, 도시/농촌공동체 및 원주민운동, 여성운동조직, 청년 및 장년 조직, 에이즈인권활동가, 보건의료운동, 장애우 단체, 소비자운동 그리고 환경/생태운동까지 실로 다양했습니다.

다음으로, 남반구 NGO 및 사회운동 세력들 간의 연대가 강화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국제적인 연대행동은 북반구 NGO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최근 남반구 사회운동 및 대중운동 세력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지역에 기반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함으로써, 그 지형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두차례 브라질에서 열렸던 세계사회포럼은 그 상징적인 예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반세계화 행동은 크게 두가지로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UN(및 그 산하기구들)을 활용한 자본의 국제적 통제 전략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체제로부터의 '이탈' 전략입니다. 전자는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의 NGO포럼에서처럼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UNCTAD에 무역관련 협상 기능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후자의 경향은 일국적 차원의 통제 권한 회복과 급진적 민주주의를 강조하면서, '농업'협정을 포함하여, '필수서비스, 문화, 생명특허' 등을 WTO 체제로부터 제외시키고자 하는 흐름으로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반세계화 운동은 지구촌 시민사회의 강력한 국제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중요한 사례일 것입니다. 즉, 저항의 세계화를 통하여 초국적 자본의 이해를 저지할 수 있다는 사례를 남김으로서 우리에게는 일국의 차원을 넘어서는 지구적 지평의 안목을 성숙시키고, 다양한 계층, 계급과 이슈들이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연대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 주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다음주에는 이러한 장외 반세계화 행동에 도화선이 되었던 다자간 투자협정 반대운동과 외채탕감운동 등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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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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