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 사회의 경솔함을 보여주는 일들이 많았다. 미디어법 처리에 대한 헌재의 결정에 대한 태도가 그랬고, 루저소동이 그랬다. 판결문 어디에도 ‘유효’라고 적시도 하지 않았음에도,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헌재가 ‘유효결정’을 내렸다고 당리당략적으로 접근한 일부 언론과 정당들의 태도가 조금은 경솔했다. 미디어법 처리절차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면서도 무효 확인을 기각한 헌재의 태도를 삼권분립차원에서 해석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하여 ‘헌재놀이’를 시작한 네티즌들의 태도도 조금은 경솔했다. 처음부터 정치권이 헌재의 결정을 존중하고 미디어법을 재논의하기 위한 공론장을 시작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특히, 정치권 자신이 스스로 풀어야 할 숙제를 사법부에 떠넘겨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정치의 사법화’를 자제해야 한다는 자성을 시작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진지한 대화와 성찰의 공론장
루저 소동도 마찬가지다. 이번 사건은 외모가 상품화되는 천박한 자본주의적 정신이 방송이라는 공공영역에 침투한 우리시대의 일그러진 자화상임에 틀림이 없다. 우선 방송사와 제작자가 자성할 일이다. 그리고 루저라고 말한 여대생을 비난하고 사생활까지 까발린 일부 네티즌들도 분노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조금은 경솔했다. 위에서 지적한 두 가지 사건들은 모두 나와 생각이 다른 타인들에 대한 존중과 숙의熟議가 부족하여 문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후 타인과 함께 살기 위한 진지한 대화와 성찰의 공론장을 필요로 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사회에는 타인을 부정하는 경솔함도 있지만 그것에 대비되는 진지한 대화와 성찰 및 숙의의 시간도 함께 자라나고 있어 희망을 주고 있다. 단적인 예가 지난 2008년부터 경희대학교 인류사회재건연구원과 한국의 대표적인 시민단체인 참여연대 국제위원회가 공동으로 기획하고 개최해온 <아시아포럼>이다. 특히, 올해 11월 19일(목)에 열린 <2009연중기획 아시아포럼 : 종합토론>은 2008년과 마찬가지로 지난 1년 동안 <아시아포럼>에서 다뤄왔던 많은 주제와 토론 내용을 종합하고 정리하는 시공간으로 기획되었다. 이 포럼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지난 2년 동안 <아시아포럼>에 꾸준히 참여하거나 관심을 갖고 사랑해주었던 많은 분들의 열정과 헌신이 있었기에 자라나고 유지될 수 있었다. 특히, 필자 역시도 지난 시간 동안 관객으로만 쭉 참여해 오다가 올해 9월에 열린 ‘에너지 위기와 시민사회의 과제’에 사회자를 맡는 영광을 얻게 되어 기뻤다.
1강(3월) _ 초국가적 인간안보 문제와 아시아
2강(4월) _ 해적과 해양 테러리즘
3강(5월) _ 태국 국경거주 버마 난민들의 적응양상과 과제
4강(6월) _ 탈북여성의 제3국 체류현황 및 과제
5강(7월) _ 이주아동의 인권현황과 시민사회의 과제
6강(9월) _ 에너지 위기와 시민사회의 과제
7강(10월) _ 아시아의 식량위기와 시민사회의 대응
8강(11월) _ 종합토론
갈수록 늘어나는 초국가적 문제들
<아시아포럼>은 지난 2008년에 아시아지역에 살고 있는 시민들에게 생활과 생존의 문제로 다가오고 있는 초국가적인 문제인 인간안보, 황사와 쓰나미와 같은 자연재해 문제, 그리고 마약, 인신매매와 같은 초국가적인 범죄, 사스와 조류독감 등과 같은 광역질병, 이주노동을 이슈로 다뤄왔다. 그리고 올해는 <국경, 아시아, 시민사회>라는 대 주제를 가지고 인간안보, 해적과 해양 테러리즘, 버마 난민문제, 탈북여성의 문제, 이주아동문제, 에너지위기, 식량위기를 다루어 왔다. 아마도 <아시아포럼>이 추구했던 것은 아시아의 초국가적인 문제를 깊이 인식하는 가운데, 그 해법을 찾기 위한 시민사회의 역할과 연대의 모색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1년 동안 <아시아포럼>의 취지는 얼마나 채워졌을까? 우리가 느끼고 확인했던 사항들 그리고 지적되고 고민되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우선 첫째로 확인해야 할 것은 초국가적인 이슈와 문제에 대응하는 아시아 시민사회의 수준과 능력에 대한 객관적인 진단이다. 이 문제는 포럼 때마다 매번 고정적으로 나온 질문들이다. 많은 토론자들은 아세안국민회의(APA ASEAN People’s Assembly), 아시아시민사회연대회의(SAPA Solidarity for Asian People’s Advocacy) 등 아시아시민사회도 존재하지만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아시아 지역에 대한 관심에 비해 초국가적 이슈나 문제에 대해 연대와 공동협력사업의 진전은 매우 더디다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한국 시민사회는 ‘아시아 바로 알기’, ‘아시아 제대로 알기 수준의 착한여행(Asian Bridge)’이 주종이라고 그 한계를 지적한다.
연대의 발걸음 더딘 한국 시민사회
둘째로 한국 시민사회가 초국가적인 아시아 문제에 대해 더딘 대응을 보여주는 배경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지적이 있을 수 있겠지만, 많은 토론자들은 아시아 지역과 아시아 시민사회에 대한 충분한 정보접근과 인식 부족 그리고 한국이 곧 아시아 지역이라는 인식과 정체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왜 아시아로 시각을 돌려야 하나? 왜 아시아인가? 이러한 지적은 그동안 <아시아포럼>에서도 많이 나온 이야기이다. 왜 국내 문제도 힘겨운데 아시아의 초국가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고 초국가적으로 연대해야 하는 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들이다. 아마도 이 근본적인 물음은 이후 <아시아포럼>이 지속적으로 채워야 할 또 다른 과제일 것이다.
필자는 이 같은 물음에 대해 한나 아렌트로부터 약간의 힌트를 얻었다. 미국의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저서 『인간의 조건』에서 고대 그리스 시민들이 살아갔던 공적인 삶의 공간이었던 폴리스에 대해서, 폴리스는 단순히 지리적이고 물리적인 도시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말과 행위를 통해 자신의 개성을 드러냄으로써 열리고 발생하는 사람들의 ‘조직화된 기억체’라고 하였다. 즉, 폴리스는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 말과 행위를 통해 공감으로 열리는 인식의 공동체로서 일종의 공론장 또는 휴먼 네크워크의 공간이다. 따라서 페르시아 침공 문제에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여 스파르타, 테베 등의 폴리스들이 거대한 연합체를 맺어 대처한 ‘델로스 동맹’은 오늘날로 보면 미국의 연방제보다도 더 느슨하고 자율적 수준의 자유로운 ‘도시공동체 네트워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아렌트의 폴리스에 대한 설명과 침공 문제에 대응하는 ‘델로스 동맹’의 예는 오늘날 아시아의 초국가 이슈와 문제에 대응하는 국가와 시민사회의 대응으로 확대하여 ‘아시아’, ‘아시아연대’, ‘아시아포럼’ 등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컨셉을 독도영유권ㆍ일본과거사ㆍ동북공정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의 시민단체들이 동북아역사재단과 함께 2007부터 2009년까지 지속하고 있는 ‘세계NGO역사포럼’에 적용해 설명해보면 더욱 풍부하게 그것이 나아갈 방향성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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