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하얀 아오자이를 입은 여고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일시에 하교를 하는 모습은 불그스레한 노을을 배경으로 학이 무리지어 날아가는 착각을 일으키는 매혹이었다. 불과 십 오년 전 호치민 시내에서 매일 같이 연출되던 이 장면은 사라졌다. 형형색색의 유니폼과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바닷물을 가르는 새우 떼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이리저리 얽혀 나름의 질서를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다.

호치민의 외양은 매일매일 변신하고 있다. 개방초기 길거리를 수놓던 씨클로(xich lo)는 시에서 발급한 번호판을 달고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 꽃이나 껌을 팔기위하여 끈질기게 진로를 방해하던 소년, 소녀들은 관광객의 편의를 위하여 어디론가 증발되었다. 식민시대, 전쟁, 그리고 사회주의 강성개혁(hard reform)시대를 상징하던 수많은 건물은 근대화를 상징하는 고층건물에 밀려 매일 역사의 저편으로 자취를 감추고 있다. 백화점에 넘쳐나는 명품 진열대를 보고 있으면 이곳이 불과 십여 년 전 안경, 모자, 신발까지 절도의 표적이 되던 빈곤의 땅이었음을 망각한다.

이러한 변화를 보고 성장주의자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도이머이(Doi Moi)라고 통칭되는 개혁개방정책 이후 매년 평균 7-10%의 성장을 가능하게 한 정부의 정책방향 그리고 국민의 높은 교육열과 근면함에 경의를 표한다. 역사학자들도 베트남의 저력을 새삼 강조한다. 베트남이 캄보디아 내전을 포함해서 중국과의 큰 전쟁에서 자주 승리했을 뿐 아니라 전쟁에는 져본 적이 없는 천하강적 미국에게 1패의 전적을 안긴 유일한 나라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숫자와 외양만 보면 베트남에 관한 이들의 평가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베트남은 성장하고 있고 앞으로도 성장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에 분명하다.

하지만 베트남의 외형적 성장 뒤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 이다. 베트남의 현재는 미래에 대한 예견을 유보하게 하는 여러 가지 모순을 안고 있다. 이러한 모순이 해결되거나 해소될 수 있을지, 아니면 새로운 변화에 대한 요구를 폭발시킬지 두고 볼 일이다. 베트남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안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베트남의 미래를 가장 어둡게 만들고 있는 것은 나날이 벌어지고 있는 빈부격차이다. 베트남에서 한국인이라고 부를 자랑하거나 현지인을 업신여기다가는 망신을 당할 수 있다. 웬만한 자가용을 가지고 있다고 거들먹거리다가는 벤츠와 BMW에서 내리는 베트남인을 보고 머쓱해진다. 일부 공산당 간부와 관료들 그리고 신흥기업가들은 서울의 강북에 맞먹는 가격의 집을 수십 채 가지고 자녀를 비싼 국제학교에 보내거나 아예 미국유학을 보낸다. 나이트클럽에는 수백 달러하는 위스키를 여러 병 시켜 놓고 매일 파티를 즐기는 젊은이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반면 베트남에서 가장 임금이 높은 호치민의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150달러 정도이다. 더욱이 미숙련노동자들은 최저임금을 조금 넘는 돈으로 생활을 한다. 이들이 아이 둘을 낳고 가족을 이루고 살려면 한 달에 400-500 달러는 필요한데, 현재의 임금으로는 부부가 모두 공장노동을 해도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다. 이런 현실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결혼을 하지 않거나,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지 않거나, 숙련노동자가 되어 임금을 더 받는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물가는 나날이 치솟으며 이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결과적으로 노동자가 호소할 곳은 파업 밖에 없다. 베트남의 주요 공단에서 매년 여러 차례 파업이 불길처럼 번지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외자기업의 경영자들도 노동자의 파업이 “떼를 쓸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다만 파업이 일어나면 주동자와 요구조건이 명확하지 않아 협상이 쉽지 않다는 점을 불만스러워 한다. 이처럼 베트남에서 와일드 캣(wildcat)이 일반화되고 있는 것은 노동자들이 기존 노동조합을 불신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파업을 감행하면서도 일자리를 잃거나 경찰의 주목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빈부의 격차가 커지고 노동자의 생활이 힘들어지는 만큼 베트남의 미래는 불투명해지고 있다. 한편으로 현재와 같은 산업구조로는 조만간 안정적 경제성장이 흔들릴 것이다. 물가가 오르고, 노동자의 생활이 힘들어지고,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이 늘어나면 자연히 노동집약적 산업이 감내할 수 있는 임금수준을 넘어설 것이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노동집약적 외국공장들이 앞을 다투어 떠나고 산업 공동화가 일어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산업구조를 고도화하려는 체계적인 노력이 없이 베트남의 미래는 없다.

다른 한편으로, 베트남의 미래가 불투명해질수록 노동자들의 정치적 요구가 거세질 것임에 분명하다. 베트남은 노동자의 나라이며 사회주의 국가이다. 현재는 성장을 볼모로 설득하고 강한 공안(公安)의 힘을 동원하여 노동자의 불만을 잠재우고 있지만 앞으로도 노동자들이 국가이념과 현실 사이의 모순을 용인할지는 불투명하다. 빈부의 격차가 큰 사회주의국가 그리고 노동자가 가장 못사는 노동자국가에서 어떤 정치가 일어날지 두고 볼 일이다.

베트남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해석이 단기적인 수치와 사건에 의해 예단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몇몇 국영회사가 부도가 나거나 주식시장이 요동친다고 비관에 빠지고, 역으로 베트남에 쏟아지는 외자나 높은 성장률을 보면서 낙관하는 것은 단견이다. 베트남은 향후 5-10년 안에 산업구조조정에 성공할 수 있을지 그리고 빈부격차를 줄이고 노동자의 삶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에 성패가 달려있다. 베트남의 저력을 믿으면서도 불안감을 감출 수 없는 것은 베트남의 지도자들과 외국자본이 모두 이런 정치경제적 현실보다 당장 눈앞의 이익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회의가 들기 때문이다.  
           

    채수홍(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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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인권의 역사적 시험대,

무니르 독살 형사소송의 ‘마지막 비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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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전 인도네시아 국가정보원(BNI) 부원장 묵디 뿌르워쁘란조노(Muchdi Purwoprandjono)
오른쪽: 인권변호사 무니르 사이드 탈립(Munir Said Thalib)

지난 4월 5일에 자카르타의 대검찰청 앞에서 인도네시아 청년들이 구속도 두렵지 않다며 천막을 치고 철야시위를 벌였다. 검찰에 대한 그들의 요구사항은 인권변호사 무니르 사이드 탈립(Munir Said Thalib)의 독살 배후 용의자인 전 국가정보원(BIN) 부원장 묵디 뿌르워쁘란조노(Muchdi Purwoprandjono)에 대한 마지막 법적 행동을 조속히 취하라는 것이었다. ‘용맹’과 ‘총명’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 무니르는 노동운동, 국가폭력반대운동, 과거사청산운동, 안보기관개혁운동에 헌신함으로써 수하르토 독재의 몰락과 민주주의 진전에 기여하였고, 꼰뜨라스(Kontras)와 임빠르샬(Imparsial) 같은 선명한 주창형 운동단체를 조직적 유산으로 남겨 인도네시아 최고의 인권운동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런데 2004년에 9월 7일에 암스테르담행 인도네시아 국영항공기 안에서 사망하였고, 네덜란드당국의 부검결과 그 사인이 치사량을 훨씬 웃도는 독극물 섭취로 밝혀졌다.

서른아홉 해의 삶이 이렇게 마감된 뒤 6년이 넘도록 인도네시아 시민사회단체들은 국제적 관심과 지지를 받으며 살인자들을 찾아 처벌해줄 것을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진상규명활동과 추모활동을 전개하는 한편으로 법적 경로도 밟아왔는데,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성과도 있었다. 독극물을 음료에 투입했다는 조종사 뽈리까르뿌스 쁘리얀또(Pollycarpus Priyanto)가 우여곡절 끝에 대법원 재심의까지 거쳐 20년형을 언도받고 반둥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를 보안요원으로 항공기에 탑승토록 허용하는 공문을 위조하여 발송한 세 명의 국영항공사 직원들도 실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올해 2월에는 국영항공사가 무니르 유족에게 우리 돈 4억원 이상을 보상해야 된다는 대법원 판결도 얻어냈다. 최고의 법률적 승부는 독살의 공범이자 배후에 대한 형사소송이었다. 심증이 가는 여러 권력자들 중에서 증거가 발견된 묵디 한 명만을 대상으로 삼은 소송이었지만, 역시 만만치 않았다.

검찰은 사건 전후에 묵디와 뽈리 간 41건의 휴대폰 통화기록을 핵심 증거로 제시하였지만, 2008년 12월 31일 남부자카르타지방법원은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묵디에게 무죄를 선고하였고, 대법원도 2009년 6월에 묵디의 손을 들어주었다. 적지 않은 수의 증인들이 불출석한 파행 재판이었고, ‘애국자’ 묵디를 위한 ‘어깨들’의 위협적인 지지시위도 있었다. 판사들이 매수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고, 소송을 이끌었던 시나가(Cirus Sinaga) 검사는 광범한 부패사건의 연루자로 조사를 받는 처지가 되었다. 새로운 증거를 제시해야만 법률적으로 마지막 단계인 대법원 재심의를 요청할 수 있기에, 묵디의 법적 단죄는 무산되고 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무니르의 유족과 동료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경찰이 묵디의 혐의를 입증할 새로운 증거들을 확보하고 있으며, 가장 결정적인 증거가 뽈리와 묵디 사이의 통화 녹음테이프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대검찰청이 “학습하는 중”이라거나 “때를 기다리는 중”이라는 애매한 표현을 흘리며 ‘마지막 무기’의 사용을 주저하고 있어서, 대검찰청 앞에서 철야시위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묵디는 동티모르와 이리안자야(현 파푸아)처럼 악명 높고 험난한 ‘분쟁지역’의 야전에서 경력을 쌓았고 수하르토 체제 말기에 특전단(KOPASSUS) 사령관으로 복무한 전도유망의 장성 출신이다. 그러나 특전사령관 재임 시 민주화운동가들에 대한 조직적 납치를 지휘한 것으로 무니르에 의해 지목된 바 있고, 결국 ‘임무해제’ 명령을 받아 소장계급을 끝으로 퇴역해야만 했다. 이로 인해 무니르에 대한 묵디의 원한이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추정한다. 그러나 묵디는 국정원 부원장으로 영전되면서 민주화 이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군 출신과 민간 출신 후보의 대결로 압축된 2004년 대통령 직접선거 때는 역설적이게도 군 출신 유도요노(Susilo Bambang Yudhoyono)와 맞붙은 민간 출신 메가와띠(Megawati)의 편에서 선거를 도왔으며, 바로 이 때 무니르 독살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음모가설은 안보기관을 넘어서 민간정치부문의 실력자들까지 포괄하는 중층적인 양상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묵디는 독살배후로 제소된 뒤에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정치에 가담하여 대인도네시아운동당(Gerindra)의 부총재를 역임하더니, 최근에는 말년을 이슬람정치에 헌신하겠다며 통일개발당(PPP)에 입당하여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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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하르토체제 말기에 납치된 13인의 민주화운동가


지난 4월 7일에 콘트라스와 국제이행기정의센터(ICTJ)는 수하르토 체제 종식이후 13년간 추구된 이행기 정의(transitional justice)의 역정을 평가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민주화 초기에 여러 희망찬 시도들이 있었지만, 구세력과의 타협적 시기를 거쳐, 최근에는 아예 꽉 막힌 시기를 맞이하게 되는 허탈한 과정을 기록하였다. 그 동안 인권침해사건과 관련된 고위급 장성들이 단 한 명도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았으며, 민주화운동가납치사건의 지휘자인 묵디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민주화 이후에 정치적으로 더 활동적이다. 대표적으로 1999년 동티모르 철수 시 발생한 군부폭력의 책임자인 위란또(Wiranto) 장군, 1998년 5월 반화인 집단폭력의 책임자 쁘라보오(Prabowo) 장군이 정부통령선거에 후보로 출마한 바 있고, 차기 대선에도 출마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과거사가 정리되지 않은 탓에 2014년 인도네시아 대선의 전망도 따라서 회귀적이다. 이로써 진실은 무력하고 정의는 강자의 편이라는 국민적 학습이 지속된다.

이런 정황에서 무니르 사건 형사소송은 인도네시아 인권의 ‘역사적 시험대’로 부각된다. 과연 특전사령관과 국정원부원장을 역임한 국가폭력의 핵심인물을 감옥으로 보낼 수 있을 것인가? 인도네시아 인권운동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도전에 나섰고, 지금 그 장도의 막바지에 서 있다. 무니르는 과거사 청산운동의 중핵이었고 현재도 그러하다. 무니르는 수하르토 독재의 국가폭력에 과감하게 맞서면서 전국적 ‘스타’가 되었고, 과거에 갇힌 각종 국가폭력사건들을 되불러내고, 국가폭력의 ‘성채’인 안보기관의 개혁운동에 돌입하였다. 역사를 위해 투쟁하다 스스로 역사가 되었으며,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을 옹호하다가 자신이 피해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반국가폭력의 화신이다. 고위급이 연루된 살인이라는 위키리크스(Wikileaks)의 폭로, 무니르를 거리명칭으로 삼겠다는 네덜란드정부의 발표, 거액의 민사배상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판결, 심지어 묵디의 화려한 정치행보까지도 무니르에 대한 기억을 재생시키고 영웅적 서사를 재구성시킨다. 그러니 무니르가 아니라면 누가 할 수 있으랴? 아니 무니르라면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번이 마지막 전투이다. 무니르는 생전에 묵디의 군복을 벗겼지만 감옥에 가두지는 못했고, 그래서 묵디의 복수가 가능했던 것이라고 동료들은 한탄한다. 무니르는 생전에 실패한 것을 사후에 성사시킬 수 있을까? 과연 ‘죽은 무니르’가 ‘산 묵디’를 결박시킬 수 있을 것인가? ‘시작은 있지만 결말이 없다’는 냉소로 얼룩진 인도네시아 인권침해의 역사와 법치의 비극이 이번 소송에서 단 한번이라도 깨끗이 마무리되는 선례를 남길 수 있을까? 이 ‘역사적 한 판’의 끝을 보려면 지금은 우선 대검찰청의 행동을 재촉해야만 한다. 대검찰청이 대법원에 재심의 요청서를 보냄으로써 반국가폭력의 화신 무니르가 유족과 동료들을 이끌고 마지막으로 ‘출전’할 수 있도록 ‘혈로’를 열어주어야 한다. 나는 인도네시아의 민주화에 열광했고 민주주의 진전을 축하해온 연구자로서 인도네시아 민주주의의 수치인 불처벌(impunity)의 악순환을 돌파하는 대역사를 진정 목도하고 싶다.  


전제성(전북대 정치외교학과 부교수)

* 이 글은 서남포럼 뉴스레터(2011.4.12)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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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조기총선과 정국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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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서는 금년 5월 첫째 주에 의회가 해산된 후 6-7월경 조기총선이 개최될 예정이다. 현재 선거법 수정안이 의회에 상정돼 독회가 진행 중인데 이 절차가 끝나면 정치일정은 더 확실해 질 것이다.
 
원래 현 민주당 정부 임기는 금년 12월까지이나 탁씬 친나왓(Thaksin Shinawatra) 전 총리를 지지하는 프어타이당(Puea Thai Party)과 레드셔츠는 그동안 조기총선을 실시해 정국불안을 해소할 것을 강력히 주장해 왔었다. 하지만 아피씻 총리는 조기총선이 불리하다고 판단해 거부해 왔다. 이런 태도는 2010년 4월 반정부시위를 촉발시킨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김홍구 부산외대 교수

얼마 전까지 탁씬 지지세력들은 조기총선을 실시하면 금방 재집권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상황은 바뀌어 가고 있는 것 같다.

프어타이당은 차기 총리후보조차 정하지 못한 채 당내 파벌투쟁에 시달리고 있다. 민주당(Democrat Party)은 이미 현 총리인 아피씻을 후보로 내세웠지만 프어타이당은 전 상무부 장관 밍콴(Mr. Mingkwan Saengsuwan)을 지지하는 세력과 탁씬의 막내 여동생 잉럭(Ms. Yingluck Shinawatra)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어져 총리후보를 정하지 못하고 있다. 프어타이당 핵심인물 찰름(Chalerm Yoobamrung)은 밍콴이 총리 후보로 거론되는 것을 못 마땅히 여겨 의원직을 사퇴해 버렸다. 프어타이당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는 레드셔츠 세력은 지난 5월 반정부시위가 강제 진압 된 후 지도부 9명이 장기간 구속되었다가 보석으로 석방되는 과정에서 반정부운동의 탄력을 상당부분 상실했을 뿐 아니라 빈번한 시위로 적어도 방콕에서는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외에 프어타이당의 고민거리는 민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품짜이타이당(Bhumjaithai Party)으로부터 비롯된다. 품짜이타이당은 2008년 12월 탁씬 계열의 팔랑쁘라차촌당(Phak Palang Prachachon)이 선거법 위반 혐의로 해산되었을 때 탁씬의 오른팔이라고 불렸던 네윈(Newin Chidchob)이 탈당해서 만든 정당으로 민주당 연립정부 구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더구나 프어타이당과는 동북부 지역의 표밭까지도 겹치고 있다. 민주당 정권 출범 후 프어타이당을 탈당해서 수 명의 의원들이 품짜이타이당으로 입당한 경우도 있었으며 몇차례간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동북부 지역 내 프어타이당의 가장 막강한 경쟁세력으로 부상돼 말 그대로 눈에 가시 같은 존재가 되었다.

프어타이당의 전신격인 타이락타이당 때부터 위력을 발휘했던 대중영합주의 정책도 효력이 떨어지고 있다. 민주당 정부에서도 금년 초 소위 쁘라차윗정책(서민복지정책)을 발표해 민심 잡기에 나섰기 때문이다. 프어타이당은 이 같은 정책을 대중영합주의 정책의 복사판이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민주당과 뚜렷이 차별화된 정책을 선보이지 못하고 있다.

총선에서 프어타이당이 원내 제1당이 돼도 집권하기 위해서 넘어야 할 산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프어타이당 주도 연정에 참여할 영향력 있는 군소정당들이 극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이다. 더 중요한 것은 군부와의 갈등이다. 프어타이당은 2010년 5월 반정부 시위진압 책임을 놓고 군부와의 사이가 틀어 질 대로 틀어져 있다. 그래서 벌써부터 프어타이당이 집권할 경우 또 다시 군사쿠데타가 발생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군부 실세인 육군사령관 쁘라윳(Prayuth Chan-ocha)장군은 2006년 쿠데타의 주역이며 반 탁씬 강경파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프어타이당의 집권을 두고 볼 리 없다는 것이다. 사실상 지금까지 태국에서 군부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민간정권이 성공한 적은 없다. 2008년 선거를 통해서 탁씬이 지지하는 팔랑쁘라차촌당이 집권한 후 총리직에 올랐다가 통산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난 싸막(Samak Sundaravej)총리와 쏨차이 (Somchai Wongsawat)총리는 비근한 예가 되고 있다.



총선정국을 앞두고 민주당은 프어타이당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에 있는 듯 하다. 민주당은 얼마 전 헌법개정을 추진해 민주당에 유리한 선거구도를 만들어 가고 있다. 헌법 개정안에 따르면 기존 선출직 의원 400명과 비례대표 의원 80명은 각각 375명과 125명으로 그 수가 조정되었다. 독회 중에 있는 개정 선거법이 의회를 통과할 경우에 전국 적으로 25개 선거구가 축소되는데 그 중 16개 선거구가 프어타이당 우세지역인 북부 및 동북부 지역에 속해 있기 때문에 민주당에게 유리하다. 뿐 만 아니라 이 지역 선거구가 축소되면서 정당득표수가 감소하면 프어타이당의 비례대표 의원수도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그 동안 민주당이 우세했던 보궐선거나 지방선거의 결과도 총선 승리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작년 9월 Abac Poll에서 전국 4,31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총선 관련 여론조사에서 전체 응답자 중 50.7%가 민주당을 지지했으며 프어타이당은 33%의 지지를 얻었다. 지역별로는 탁씬의 텃밭인 동북부 지역에서 프어타이당이 49%의 지지를 얻었으며 민주당은 32%를 얻었다. 북부지역은 민주당 44%, 프어타이당 42%의 지지율을 보였다. 이 외 중부 및 남부 지역은 절반 이상이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선거결과를 점치기에는 아직 많은 변수들이 도사리고 있다. 특히 선거는 정서적 측면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본격적인 선거 국면에 들어서는 지난 5월 시위 강제진압에 대한 효과적인 정치적 쟁점화와 이에 대한 동북부와 북부지방의 민심의 향배가 가장 중요한 변수들이 될 것이 틀림없다.

민주당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몇 가지 악재도 상존한다. 가장 큰 문제는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품짜이타이당과의 갈등이다. 품짜이타이당은 민주당 연립정부에 참여한 이래 정당의 이해관계에 따라 민주당과 잦은 갈등을 빚어 왔다. 더구나 얼마 전 연립정부 내 제 2당인 품짜이타이당은 제3당인 찻타이팟타나당(Chart Thai Pattana Party)과 정치적 동맹관계를 선언했다. 그 의미는 총선 후 구성될 연립정부에서 정치적 협상력을 제고하려는 것이다. 양 당의 정치적 동맹관계는 현재 연립정권을 구성하고 있는 민주당에 대한 압력이 될 수도 있고 프어타이당에 대해서는 연립정부 구성 가능성을 열어 놓은 것이 될 수 도 있다.

민주당의 총선 승리와 집권 가능성에 새로운 변수는 PAD(The People's Alliance for Democracy 국민민주주의연대)와의 갈등에서도 나타난다. PAD는 2008년 12월 민주당 정권 탄생의 일등공신이었지만 태국과 캄보디아 국경분쟁 해결방안을 놓고 강경입장을 고수하면서 민주당을 곤경에 빠뜨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PAD를 모태로 하고 있는 새 정치당(New Politics Party)에게 총선 불참을 촉구하는 동시에 총선이 실시된다면 투표거부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고 있다. 정치권을 불신하고 있는 PAD는 국가의 부정부패 등이 척결될 때까지 국왕에 의해 선출된 총리 및 내각 구성을 요구한다. 하지만 현재 PAD는 총선참여를 주장하고 있는 새 정치당과 갈등을 빚으면서 내분상태에 있으며 과거와 같은 정치적 영향력도 축소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변이 없는 한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과 프어타이당은 제1당이나 제2당이 될 것은 분명해 보이나 어떤 정당이 군소정당과의 연립정부 구성에 성공할 것인지는 아직까지 예측불허이다. 문제는 선거후에도 정국불안은 지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태국은 고질적인 빈익빈 부익부문제, 이념적 갈등, 지역적 갈등으로 분열돼 있다. 그동안 잠복해 있던 이런 문제가 표면화되는 데 원인을 제공한 탁씬에 대한 국왕, 관료, 군부를 비롯한 기득권층의 부정적 시각도 변화의 기미가 없다. 정치적 갈등 시 중재자 역할을 한 고령의 푸미폰 국왕의 역할도 기대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번 총선은 2007년 12월 총선 후 처음 치러지는 선거라는데 의미가 있다. 총선을 통해 국왕이나 군부 쿠데타 같은 외부적 영향력에 의해 정치적 위기를 해결하곤 했던 비민주주의 방식에서 탈피해 정당과 의회를 중심으로 한 게임의 규칙이 적용되는 예측 가능한 정치로 진일보 한다면 그 의의는 과소평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김홍구 (부산외국어대학교 태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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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특사단, 국가정보원, 그리고 ‘신아시아외교’


인도네시아 대통령 특사단 숙소 잠입사건의 대한민국 국가정보원 관련설로 인하여 최근에 국회에서 정보위가 개최되었고 의원들의 발언과 언론의 보도태도에 관한 논쟁이 일고 있다. 의문을 제기하는 언론 보도와 해명을 촉구하는 의원들의 발언에 대하여, 국익을 위해서는 자꾸 들추려 하지 말고 덮어주어야 한다는 주장들이 일각에서 강한 어투로 등장하였다. 그런데 덮어주자는 주장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비현실적이라는데 있다. 우선 당사자인 인도네시아 정부가 한국 정부에게 해명을 요청해놓은 상태라 설득력 있는 답변을 내놓아야 한다. 게다가 국정원 관련설은 이미 국내 일간지와 티비 톱뉴스로 전 국민에게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현지 언론은 물론이고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는 ‘영광’을 누렸기 때문에, 덮어주자는 주장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비현실적인 바램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정원이 부인도 시인도 않는 전략은 오히려 관련성을 시인하는 것으로 읽혀질 것이다.

덮어주자는 이들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크게 문제를 삼지 않고 있다는 점을 주장 근거의 하나로 제시하였다. 물론 인도네시아 정부는 국민들에게 별 일 아니라고 설명하였다. 인도네시아 언론과 야당의 문제제기에 대하여 특사단장이었던 경제조정정관, 우리로 따지면 경제부총리인 하따 라자사(Hatta Rajasa)는 도난당한 군사기밀이 없고, 심지어 침입자들은 자기 객실로 착각하고 실수로 들어온 이들이라고 발표하였다. 산업부장관의 보좌관 방이 침입 당했으므로 군사기밀은 도난당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침입자가 자기 방으로 알고 잘못 들어온 손님이라는 설명은 명백한 거짓이다. 침입자의 해명을 단순히 옮긴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나중에 거짓말이라고 지탄받을 수도 있는 브리핑을 하면서까지 인도네시아 정부는 한국 정부를 봐주고 있다.

그 내밀한 속내야 정확히 알 수 없다. 우선 문화적인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인도네시아, 그 중심의 자바 문화는 불편한 감정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문제가 있어도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덕목으로 삼고 있어서 외교적으로도 그렇게 대처했을 수 있다. 물론 실제로는 심히 불편할 것이다. 다른 설명은 양국관계의 맥락 속에서 찾아질 수 있다. 이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다른 기회로 만난 국립인도네시아대학 총장의 말은 이러했다. “한국과 인도네시아 관계는 친구 같은 관계이므로 심각한 외교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구밀라르 총장의 표현처럼, 인도네시아와 한국 관계는 무역관계가 호혜적이고 수지 균형이 맞으며, 자본과 노동의 상호이동이 긴밀하고, 지역적 차원에서 ‘동아시아공동체’(East Asian Community)를 함께 만들어가고 있으며, 지구적 차원에서는 G20도 같이 참여하는 ‘절친’ 관계이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정부는 한국을 “전략적 동반자”라고 부르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인도네시아 정부는 절친 관계를 망치지 않고자 친구의 실수를 덮어주려고 애쓰는 중이라고 해석할 있다. 그렇다면 실수를 저지른 친구는 상대가 봐준다 하여 잘되었다며 은근슬쩍 넘어가야할 것인가? 오히려 그런 너그러운 친구에게는 더욱 더 실수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국정원을 그만 흔들라는 입장과 국정원을 추궁하는 입장 사이에 흥미로운 공통점도 엿보인다. 국정원 비판의 상당한 부분은 그 내용이 국정원의 후진성과 무능에 관한 것이다. ‘그만 흔들자’와 ‘더 따지자’ 양 측이 다 국익의 기반에서 현실주의적으로 국제관계를 바라본다. 그러다보니 국정원의 업무범위나 규범의 문제는 도외시한다. 또한 관심이 국정원 쇄신에 국한되면서 이번 사건의 더 넓은 배경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은 소홀했던 것 같다.



이번 기회에 현 정부가 ‘신아시아외교’(New Asia Initiative)라고 명명한 외교정책의 기조가 점검되어야 할 것이다. 신아시아외교가 처음에는 번영, 평화, 진보의 새로운 아시아를 만들어 가는데 한국이 주도적으로 기여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은 아시아 이웃을 자원 확보나 상품 시장의 대상으로만 활용하려는 노선으로 귀착되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생긴다. 원자력발전소나 군용비행기를 어떻게든 팔아야만 한다는 생각에 휩싸여 ‘친구’의 등도 치는 게 혹시 우리 정부 신아시아외교의 본색이냐는 의문이다.

아시아 개도국에 대한 외교도 시민적 감시대상에 포함되어야 한다. 국회를 통한 대의제적 점검에 만족하지 말고 각 분야별 시민사회단체들이 정부의 외교를 직접 모니터링하고 주기적으로 평가하는 자리를 만들자고 제안하고 싶다. 대한민국의 대외원조가 어디로 얼마나 어떻게 지원되는지에 대한 모니터링과 평가활동은 이미 몇 해 전에 시작되었다. 이런 모니터링 활동에 군사, 안보, 경제 외교와 동아시아지역협력 관련 외교도 포함시키자. 주로 남북관계나 한미-한일관계 위주로 사회적 관심과 문제제기가 편향되어 왔기에, 그 밖의 외교는 ‘나머지 외교’로 사회적 압력 없이 자유롭게 수행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아시아외교 분야에서도 정부의 책임성(accountability)을 증대시킬 수 있도록 모니터하고 압력을 가하는 ‘참여적 국제관계’의 필요성과 방법론이 사회적으로 많이 논의될 수 있기를 바란다.
   
 

전제성(전북대 정치외교학과 부교수)

* 이 글은 서남포럼 뉴스레터(2011.03.14.)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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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의 이슬람과 민주주의


말레이시아에서는 2009년 정부가 기독교인들이 성경에 ‘알라’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성경 1만권을 압수한 적이 있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기독교인들의 ‘알라’ 사용에 격분한 강경 무슬림인 들을 달래기 위해 위와 같은 조치와 기독교인들의 ‘알라’ 사용을 금지하였다. 하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에 대해 문제제기와 소송을 한 결과 2009년 말 쿠알라룸프 고등법원에서는 기독교인들의 ‘알라’의 단어 사용을 허용하는 판결을 내렸다. 사태는 진정 되는 듯하였으나 정부가 이 판결에 대해 항소하여 일단 판결 효력이 정지 된 상태이다. 또한 이 판결에 격분한 이슬람 신자들에 의해 일부 교회는 폭탄테러, 시설물 파괴와 같은 공격을 당하였다.

말레이시아는 다민족 다종교 사회이고 헌법에는 종교의 자유에 관련된 조항(헌법 11조)이 명시 되어있는데도 불구하고 정부가 직접 나서서 특정 종교를 옹호하고 타종교를 억압하는 행위를 한다는 사실은 내게 충격적 이었다. 과연 말레이시아에서 이슬람의 정치적 의미는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우선 말레이시아는 종족과 종교 간의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특히 이슬람교와 말레이계와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다. 말레이계는 영국식민지가 되기 이전인 15세기부터 이슬람교를 믿어왔다. 또한 식민지배가 끝난 후 건국한 연방 말레이시아는 국교를 이슬람교로 정하였으며 헌법에는 말레이인 종족의 경우에는 태어날 때부터 이슬람교를 믿도록 제정하였다.(헌법 160조)

헌법에 종교의 자유가 명시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교도인 경우에는 종교적인 부분은 민간법정이 아닌 이슬람 법정에 의해서 샤리아법(이슬람법률)에 의해 판단하게 되어 있어 이슬람교도라면 실질적으로 개종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슬람교에서는 개종하는 것을 중죄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는 민간법정에 기독교로 개종한 사실을 인정받으려했으나 결국 이슬람 법정에 의해 인정받지 못한 리나(Lina Joy)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말레이인들은 곧 이슬람교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말레이종족과 이슬람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말레이시아에서 이슬람종교는 말레이계 선거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정치적인 수단으로도 사용된다. 매번 총선 때마다 이슬람화가 주된 선거 쟁점으로 형성되어왔다. 말레이계 정당인 통일말레이국민조직(United Malay Nation Organization; UMNO, 이하 UMNO)과 야당 측 말레이계 정당인 범말레이시아이슬람당(Parti Islam Se-Malaysia, 이하 PAS)은 늘 이슬람화를 지지하는 무슬림들의 표를 얻기 위해 경쟁을 벌여왔다.

하지만 이런 이슬람화의 진행은 말레이시아의 소수민족들을 위협하고 있다. 사실 UMNO는 말레이인들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 동시에 오랫동안 정권을 잡아왔던 여당연합 국민전선(Barisan National, BN)의 구성원으로서 다른 종족 정당과도 공생해야 하기 때문에 극단적 이슬람화의 주장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정권에 대한 실망으로 말레이인들의 PAS에 대한 지지가 점점 늘어나자 이를 의식한 UMNO는 이슬람화를 내세우며 말레이계의 지지를 얻으려 하였다.

UMNO 전당대회는 말레이시아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회의로 실질적인 정책이 논의되는 장으로 그 중요성이 상당하다. 그런데 교육부장관이자 청년조직의 장인 히샤무딘 후세인은 2005년, 2006년, 2007년 세 차례 연속으로 말레이 전통 칼을 흔들며 “말레이계 헤게모니에 도전하는 소수종족들은 없애겠다."는 과격한 발언을 하였다. 이는 UMNO가 이슬람화 강화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것이다.

야당인 PAS는 해외의 이슬람근본주의 세력과의 결탁 또는 유착하였다는 의심을 받을 정도로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상 최대의 정치적 목표로 표방하고 있고 이슬람 근본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매번 선거 때마다 이슬람교도들에게 종교적인 위안에 호소하는 방법으로 지지를 얻으려 한다. 실제로 과거 말레이시아 한 주에서 집권에 성공했던 PAS의 부총재는 약속했던 강력한 이슬람화 정책을 추진하기위해 이슬람형법(hudud) 실시를 강력히 주장한 사례도 있다.

이렇듯 말레이계 정당들은 선거에서의 승리를 위해 이슬람을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정당들의 경쟁적인 이슬람화 강화 선거 전략이 계속 된다면 세속국가인 말레이시아 내의 소수민족들의 목소리는 점점 힘을 잃게 되어 갈 것이다. 말레이시아는 입헌 군주국으로서 실권은 국민이 선출한 의회와 총리가 쥐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이다.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여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면 말레이시아에서도 비이슬람교의 소수민족을 위한 정치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레이시아 내에는 약 30%의 비 이슬람교도들이 살고 있다. 정당들의 경쟁적인 이슬람화로 인해 이들이 외면 받는 정치적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정당들은 이슬람화의 주장을 자제하고 비 이슬람교도들도 배려하여 말레이시아의 모든 종교, 종족들이 차별받지 않는 민주주의국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길 바란다.

참여연대 인턴 7기 최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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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아세안 의장국 인도네시아에 거는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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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가 올해의 ASEAN(동남아국가연합) 의장국이 되었다. 지난 1월 12일에 작년 의장국 베트남으로부터 리더십을 인수받는 의례를 치렀고 바로 이어서 아세안외무장관회담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앞으로 정상회의를 포함하여 300회 이상의 다양한 정부 간 회의가 인도네시아에서 개최된다. 한국정부도 아세안대화상대국으로서 또한 아세안+3과 동아시아정상회의 회원국으로 수십 차례의 관련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인도네시아를 방문하게 될 것이다. 우리 언론이 논평은 고사하고 단신도 내주지 않았지만, 인도네시아의 아세안 의장국 수임은 동남아시아의 인권 신장과 민주 진전을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는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 아세안 심볼 -


아세안 의장국은 국명의 알파벳 머리글자 순서로 수임하므로 올해는 브루나이 차례이지만 일찍이 재작년 4월에 인도네시아가 2011년 의장국을 자원하고 나서서 먼저 하게 된 것이다. 아세안 전체의 절반이 넘는 인구와 광대한 군도에 펼쳐진 영토 덕분에 인도네시아는 아세안의 중심적 위상을 실질적으로 인정받아 왔는데, 공식적 의장국까지 브루나이와 캄보디아를 제치면서 먼저 수임하려 할 만큼 인도네시아의 상황인식은 급박했다. 2015년 ‘아세안공동체’의 역사적인 출범이 목전에 다가왔는데 숙제가 한 참 밀려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당면한 과제를 “People-Centered ASEAN”(국민 중심의 아세안) 형성으로 압축 표현하고 있다. 진정한 공동체를 실현하려면 ‘국가 연합’이 아니라 ‘국민 연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인권 신장과 참여의 제도화가 필요하다는 시각을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이 일찌감치 분명히 하였고, 외무장관 마르띠 나딸레가와도 같은 노선에 입각하여 여러 가지 실행계획을 이번 외무장관회의에서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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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도네시아 외무장관 마르띠(로이터) -


마르띠 외무장관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들을 존중하는 풍토의 조성을 위하여 시급한 당면과제로서 아세안인권위원회(AICHR: ASEAN Intergovernmental Commission on Human Rights)의 내실화를 거론하였다. 2009년에 출범한 아세안인권위원회는 효과적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지만, 아세안인권선언(ASEAN Human Rights Declaration)이 제정되면 합의된 기준을 갖고 체계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면서, 인도네시아정부는 아세안인권선언이 올해 통과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아세안재단(ASEAN Foundation)의 3년 임기 소장에 임명된 마까림 위비소노의 면모 역시 인도네시아의 기획에 부합한다. 위비소노는 유엔의 인권위원회 의장과 경제사회이사회 의장을 역임한 베테랑 외교관으로 국제기구의 인권관련업무 경험을 바탕으로 인도네시아의 아세안 청사진을 실현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아울러 마르띠 장관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이주노동자 권리보호 문제도 중요한 의제로 제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은 송출국의 입장에서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는 수입국의 입장에서 협의에 나서게 될 것이다. 미얀마 인권문제에 대해서도 미국, 캐나다, 유럽연합에게는 별반 효과가 없는 경제제재를 중지하도록 요구하고 미얀마(버마)정부에게는 아웅산 수찌를 포함한 모든 세력의 화해와 국민통합의 과정을 시작하도록 요구한다는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학계, 언론, 시민사회의 의견을 듣고 함께 논의하는 다양한 포럼을 결성함으로써 아세안을 더욱 개방시키자는 의견도 피력하였다.  

 
         


어느 때보다 열의가 높으니 그 귀추가 주목된다. 아세안인권선언은 올 해 제정될 수 있을지, 아세안인권위원회는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물적 인적 지원을 받게 될 것인지, 합의한 인권기준을 위배한 회원국의 처벌까지 가능해 질 것인지, 국제적으로 지탄받는 미얀마 인권 침해문제가 완화될 수 있을 것인지, 이에 따라 아세안의 전통적 운영원리인 내정불간섭원칙은 어느 정도로 약화될 수 있을지, 일종의 ‘인권외교’ 덕분에 인도네시아의 인권수준도 따라서 향상될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한 점이 아주 많다.


그런데 아세안 인권체제 제도화를 위한 인도네시아 정부의 열정은 벌써 냉소적인 반응에 부닥치고 있다. 지역 차원에서나 국내 상황으로나 한계가 뚜렷해 보이기 때문이다. 아세안 회원국들의 정치체제는 다양하다. 미얀마는 군부독재, 베트남과 라오스는 일당지배체제, 브루나이는 술탄왕정체제이다.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는 민주주의 형식을 갖추었지만 정치적 경쟁이 실질적으로 제한되고 있다. 필리핀 민주주의는 최근에 나아지고 있지만 태국의 민주주의는 퇴행하였다. 따라서 일부 회원국들은 아세안의 인권체계를 강화하려는 인도네시아의 노력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을 수 있고 심지어 부당한 간섭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인도네시아가 동남아 최고의 민주주의 수준을 자랑한다 하더라도, 군인들이 파푸아 섬의 민간인들을 고문하여 국제적인 지탄을 받은 최근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여전히 내부적으로 심각한 인권침해가 자행되고 가해자들이 엄벌에 처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인도네시아가 강도 높은 인권기준을 제시할 수 없고 회원국이 인권선언을 위배하더라도 처벌보다는 설득이라는 외교적 방식을 취할 것이라는 예상은 충분한 근거를 지닌다. 그러나 관찰자든 실천가든 공히 흥미진진한 점은 정부 정책과 관료적 언술이 만드는 기회구조에 관한 것이다.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정치적 약속과 실제의 차이는 비판적 개입의 여지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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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카르타의 아세안 사무국 -


동남아 민주주의의 기수 인도네시아가 역내 인권신장을 향한 깃발을 올렸다. 아세안의 지도적 중심국가로서 ‘아세안시민권’을 만들어보겠다는 창대한 기획과 책임 있는 자세에 대해 진심으로 지지와 박수를 보내주자. 그리고 어떻게 진행되는지 열심히 관찰하자. 무엇보다도 이런 호기를 이용하여 아세안 운영이나 회원국의 인권문제에 관한 요구와 해법을 적극적으로 제안하자. 동남아 이웃나라들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염려하는 이들에게 약속과 실제의 차이를 기회로 활용하는 실천적 지혜가 각별히 필요하다 하겠다. 올 해는 아시아 민주연대의 진전에 있어서 중요한 해로 기억될 것이니까.

전제성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부교수)


 * 이 글은 서남포럼 뉴스레터(2011.02.10)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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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노 대통령의 중고 외제차 구입 파문을 통해 본 필리핀 민주주의


최근 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 (Benigno Simeon Cojuangco Aquino III) 필리핀 대통령이 사비로 중고 고급 외제 자동차를 구입해 구설수에 올랐다. 아키노 대통령은 정치∙사회 개혁에 대한 필리핀 민중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당선되었기에 그의 이번 중고 고급 승용차 구입 파문은 필리핀 민중에게 적지 않은 실망을 안겨주었다. 지난 대선 당시 필리핀 민중이 아키노 대통령에 걸었던 기대를 고려할 때 그의 이번 처신이 부적절했음은 분명하지만 문제는 이번 사건이 단 한 번의 경솔한 실수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필리핀 민중에 대한 배신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것 인지 이다.

민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당선된 대통령들이 당선 이후 민중을 저버리는 행위는 필리핀 민주정치 역사에 있어 그리 드물지 않다. 필리핀은 1987년 민주화 이후 현재까지 총 4번의 대선을 치렀고, 전임 대통령인 아로요 대통령을 제외한 라모스와 에스트라다, 아키노 대통령 모두 민중의 커다란 지지를 기반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라모스와 에스트라다 대통령은 당선 이후 대선 당시 약속했던 특권 계층에게 유리한 정치∙사회 구조를 개혁하는데 잇따라 실패함으로써 필리핀 민중을 좌절케 했고, 특히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극빈층으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배우 출신의 에스트라다의 경우 임기를 반도 채우지 못한 채 횡령 혐의로 중도 사퇴를 함으로써 민주주의에 대한 필리핀 민중의 무력감을 증폭시켰다.    

민주화 이후 25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필리핀의 민주주의는 엘리트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갖는다. 하지만 필리핀을 포함한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거의 대부분이 간접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현대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의 엘리트주의적 성격을 띠는 것은 불가피하다. 문제는 필리핀의 민주주의가 민중 중심이 아닌 전통 기득권 세력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는데 있다. 필리핀 민중은 이에 대항하여 왜곡된 정치∙사회 구조 개혁을 약속한 신 엘리트 계층 대권 후보들을 잇따라 당선시킴으로써 민중이 주인이 되는 민주사회에 대한 그들의 열망을 지속적으로 표출하였다. 이번 아키노 대통령의 선출은 역대 필리핀 대통령들의 계속된 배신에도 불구하고 필리핀 민중들이 민주정치에 대한 희망을 여전히 잃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필리핀의 역대 정치사를 고려할 때 혹시나 아키노 대통령 역시 결국에는 필리핀 민중을 저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많은 필리핀 민중은 아키노 대통령만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기대를 갖고 있다. 그러한 기대의 저변에는 아키노 대통령이 역사적으로 필리핀의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온 가문 출신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다. 아키노 대통령의 아버지인 니노이 아키노는 마르코스 독재 정권 당시 유력한 민주화 야당 후보로써 필리핀 민주화를 위해 몸을 바친 대표적인 필리핀 민주화 인사였으며, 아키노 대통령의 어머니인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 역시 필리핀 민주화 이후 초대 대통령을 지내면서 필리핀 민주주의의 제도적 기반을 닦은 필리핀 민주화의 상징적 인물로 여겨진다. 필리핀 민중은 필리핀 민주화에 이와 같이 커다란 공헌을 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키노 대통령 역시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필리핀 민주주의의 실질적 발전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이 아키노 대통령은 당선 직후 대통령 직속으로 사법개혁위원회를 발족시키는 등의 일련의 부정부패 척결을 위한 제도 개선을 실시함으로써 필리핀 민중에게 정치 개혁에 대한 분명한 의지를 천명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정치 개혁에 대한 의지가 남은 임기 5년 동안에도 계속 지속될 수 있는 지의 여부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민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당선된 역대 필리핀 대통령들 모두 정치∙사회 개혁에 대한 그들의 공약을 끝까지 완수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기존의 특권 계층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아키노 대통령의 이번 중고 고급 외제 승용차 구입 파문이 필리핀 민중에게 적지 않은 실망감을 가져다 준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로 인해 아키노 대통령에 대한 기대와 열망을 버리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아키노 대통령은 필리핀의 민주주의를 위해 일생을 바친 부모님을 지켜보며 성장했다. 민중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아키노 대통령에게 정치 개혁에 대한 그리고 필리핀 민주주의 발전에 대한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아키노 대통령이 필리핀 민중의 바람을 충족시키고 필리핀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높이 끌어올릴 수 있을지 앞으로 남은 그의 임기 5년이 주목된다.

참여연대 7기 인턴 김동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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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노동운동가 파우지 압둘라(Fauzi Abdullah)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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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지 압둘라(Fauzi Abdullah)


인도네시아의 독보적인 노동운동가 파우지 압둘라(Fauzi Abdullah)가 영면한 지 1년이 지났다. 2009년 11월 27일 밤, 파우지는 생산직노동자출신의 아직 젊은 부인 드위 뿌리완띠(Dwi Priwanti)와 아홉 살 난 아들을 남겨놓고 예순의 나이에 눈을 감았다. 노동인권신장에 생애의 절반을 바친 그의 업적을 기려 인도네시아 최고의 인권상 얍티암힌(Yap Thiam Hien) 상이 수여되기 한 달 전이었다. 일찍이 당뇨를 앓았고 2005년 초에는 몸의 왼쪽이 마비되었지만 세상을 등지기 1주일 전까지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필자는 그를 인도네시아의 현대노동운동가 중에서 단연 최고의 인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파우지는 1949년에 아랍계이주민 사업가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형제들이 모두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파우지만이 ‘빨갱이’로 취급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다. 국립인도네시아대학교(Universitas Indonesia) 영문과에 재학할 때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의 『페다고지』(Pedagogy of the Oppressed)를 읽고 감명을 받은 것이 투신의 계기였다고 후배들은 증언한다. 파우지의 노동운동경력은 1978년에 당시 인도네시아 최대의 인권옹호민간단체인 자카르타 법률구조재단(LBH: Lembaga Bantuan Hukum)에 인턴활동가로 참여하면서부터 시작되었고, 1980년부터는 재단의 정식 활동가로서 10년간 활약하면서 독보적 능력과 접근법을 선보이게 된다.

재단은 특성상 변호사들이 주력이었고 당연히 무료법률자문이 활동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파우지는 법적 전문성 없이 재단에서 근무했다는 점에서 독특했다. 흥미롭게도 파우지의 약점은 강점이 되었다. 파우지는 노동자의 미래가 법적인 자문이 아니라 조직화에 달려있다고 믿었고, 조직화의 전략은 현장의 노동자들로부터 나온다고 보았다. 그래서 파우지는 법률지식을 설파하는 대신에 노동자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 책상너머로 노동자들을 대하는 변호사들과 달리 파우지는 노동자들과 같은 높이로 앉아서 커피와 담배를 즐기며 토론의 꽃을 피우곤 했다고 한다. 파우지는 노동자들과의 대화가 정말 즐거웠고 그들로부터 현장의 사정,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조직화의 지혜를 배웠다고 회고하였다. 노동자들로부터 배우고자 했던 점, 이것이 바로 파우지의 위대한 점이었다. 필자는 지금까지도 인도네시아에서 파우지 외에 이런 태도를 지닌 노동운동가를 만난 적이 없다.

파우지는 노동자들이 변호사나 지식인들의 슬하를 떠나 스스로 조직할 수 있는 날을 바랐고 그런 날을 앞당기고자 했다. 그래서 수하르토 체제·하에서 해고자 출신들이 비정부단체(NGO)를 조직하도록 후원했고, 민주화 과정에서는 수도권지역노동조합(Serikat Buruh Jabotabek)을 결성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민주화 직후 노동귀족들이나 노동운동가들에 의한 '하향식' 노조연맹들이 우후죽순처럼 설립되어 노동운동이 사분오열될 때, 파우지는 현장노동자들이 주도권을 갖는 '상향식' 노조연맹의 건설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아울러 노동운동이 공장의 담을 넘어서 다른 부문의 사회운동과 광범하게 연대해야 한다고 믿었고, 스스로도 그 일익을 담당하여 1997년에 인도네시아사회변혁협회(INSIST) 창설에 가담하였고, 사망할 때까지 실종및폭력피해자위원회(KONTRAS)의 연대회의 의장직을 수행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파우지는 노동운동이 기록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결성한 것이 스다네노동정보센터(LIPS: Lembaga Informasi Perburuhan Sedane)였다. 스다네는 센터가 위치한 동네의 명칭이다. 이 센터를 통하여 도처에 흩어진 노동관련 자료를 조사하고 수집하고 인도네시아 유일의 노동운동 전문잡지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파우지는 오래전부터 노동자교육센터의 설립을 꿈꿨다. 단순한 교육 공간이 아니라 노동자들끼리 모여서 경험과 지혜를 교류할 수 있고 멀리서 온 노동자들이 쉬어갈 수 있는 숙소까지 겸하는 그런 공간을 마련하고 싶다고 했다. 땅까지 사 두었지만 건축비를 구하지 못해서 그의 마지막 꿈은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파우지는 한국 시민사회와 일찍이 연관되었다. 1990년대 중반에 한국의 NGO들이 한인투자기업 노동인권침해 문제를 모니터링하면서 부터였다. 1996년에 파우지를 발표자로 서울에 초청한 당시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위원장 신윤환 교수는 파우지가 전국노동자대회를 참관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각지에서 노동조합의 깃발을 가져온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일사분란하게 율동을 섞어가며 노동운동가요를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은 언제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라더니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수하르또 독재 치하에서 국가의 지도감독을 받는 어용노조만이 활개 칠 때였다.  

필자는 파우지를 1998년 8월에 처음 만났다. 한인투자기업의 노동인권침해 문제를 조사하러 자카르타를 방문했을 때였고, 인도네시아 노동문제를 이해하려면 파우지부터 만나야 한다는 주변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만나보니 파우지는 명성과 달리 수수한 복장에 친절하고 겸손하고 나이나 성별에 따른 차별이 없는 일관된 사람으로 보였고 열심히 듣고 진지하게 답하는 사람이었다. 그 후 계속된 만남과 토론에서도 파우지는 한결같았다. 마지막으로 그를 직접 대한 것은 2001년 5월에 노동운동에 관한 1년 반의 현지조사를 마치고 귀국인사를 위해 보고르(Bogor)의 자택을 찾았을 때였다. 당시 파우지는 늦장가에다 아들 라이한(Raihan)까지 얻어서 행복한 한 때를 누릴 때였다. 그 후 파우지를 다시 만날 수 없었지만 그가 설립한 단체 활동가들과의 접촉과 토론이 계속되었고 그 때마다 파우지는 안부인사를 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파우지의 영면은 인도네시아 현대노동운동사에 대한 기억과 현장노동자들이 그에게 들려준 지혜의 손실이기도 하다. 만날 때마다 파우지는 조사여행을 통해 노동자들로부터 새로 배운 바를 들려주곤 했다. 마지막 만남 때의 이야기는 술라웨시섬 넝마주이들의 조직화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노동자들의 지혜를 사랑한 파우지는 그렇게 해서 얻게 된 자신의 지혜와 전략에 대해서는 정작 책 한 권 남기지 못했다. 필자는 파우지에게 인도네시아 노동운동의 역사, 혼탁 그 자체인 작금의 노동운동, 후배들에게 들려줄 전략과 권고에 관하여 글을 쓸 것을 강권한 바 있다. 그 때 파우지는 정말 진심으로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만든 단체에 딸린 네 명의 활동가들이 월급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 만만치 않은 현실의 고충에 대해 토로했다. 그렇게 파우지는 떠나갔다. 만약 그가 책을 썼다면 인도네시아의 노동운동과 인권운동에 관한 역사적 이해는 물론이고 미래의 전진을 위한 귀중한 토착적 안내서가 되었을 텐데 정말 안타깝다.

이렇게 ‘아시아의 지혜’가 사라지고 있다. 한국의 시민사회에서 ‘아시아연대운동’이 활발한데, 우리의 경험과 지혜를 알리는 것을 넘어서, 작은 자금이나마 보태서 아시아 시민사회의 경험과 지혜도 기록될 수 있도록 독려하고 후원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그렇게 만들어진 한 권의 책으로 인도네시아의 젊은 세대들이 배우고 우리도 따라서 배우는 기회를 갖게 된다면 얼마나 멋진 일일까? 파우지 사망 1주기를 넘긴 자카르타에서 그와 나눈 추억과 그가 없는 오늘의 상실감을 적어보았다.     

전제성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부교수)


* 이 글은 서남포럼 뉴스레터(2011.01.10)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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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산 수치가 직면한 두 가지 과제

미얀마 총선이 예상대로 군부 쪽 정당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고, 아웅산 수치가 해금되었다. 지난 총선은 2008년 신헌법에 토대를 두고 있다. 민족민주동맹과 국제사회는 이미 2008년 신헌법 처리를 무효라고 주장했기에, 이 신헌법에 근거한 총선을 거부한 것은 일관된 정치노선이었다.
문제는 2008년 신헌법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미얀마 군부는 민족민주동맹의 압승으로 끝난 1990년 5월 선거를 무시했다. 이 때문에 민족민주동맹은 줄곧 1990년 5월 선거 결과에 대한 인정을 요구했다. 미얀마 군부는 모르쇠 전략으로 한치의 양보도 없이, 아웅산 수치를 비롯한 미얀마 민주인사들을 지속적으로 박해했다. 특히 2007년에는 거리에 나선 승려들과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민주주의의 외침을 군홧발로 짓밟은 1988년의 비극이 반복된 것이다.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회원국들은 불간섭주의와 포용을 통한 변화라는 명분을 내걸고 미얀마와 손을 잡았다. 서방은 이를 ‘독재자 클럽’이라는 구태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동남아 국가들의 인권의식의 한계로 받아들였다. 1962년 군부 쿠데타를 계기로 시작된 ‘버마식 사회주의’ 노선을 두고 논란도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1960년대에 주목받던 아프리카 사회주의처럼 식민지 역사로부터 얻은 정신적 외상과 무관하지 않은 비자본주의 실험이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아프리카 사회주의 실험이 그러했듯이 ‘버마식 사회주의’의 고립노선은 정치·경제적으로 파국을 맞았다.

현재 미얀마 군부는 과거 두 개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나는 미얀마를 오랫동안 분할지배해 종족간 반감을 증폭시켰던 제국주의의 교활함이다. 다른 하나는 독립 직후 종족간 내전에 따른 ‘실패 국가’의 경험이다. 물론 이런 해석은 미얀마 군부에 지나치게 관대한 것일 수 있다. 미얀마 군부야말로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또 국가통합이란 이름으로 과거 제국주의 못지않은 잔인한 짓들을 반복해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제사회는 미얀마 군부에 압박을 가했고, 아웅산 수치를 비롯한 미얀마 민주인사들도 헌신적 투쟁을 했다. 그러나 미얀마 군부는 어떠한 균열 조짐도 없이 요지부동의 모습을 보였다. 그렇기에 서방 일각에서는 미얀마에 대한 제재 일변도의 대응이 갖는 효력에 의문을 제기했다. 워낙 고립된 상황에 있던 미얀마라 경제제재의 효과가 미미할뿐더러 오히려 군부의 단합만을 고취했다는 것이다.

7년 만에 해금된 아웅산 수치는 요지부동의 군부를 움직여야 하는 중차대한 과제를 안고 있다. 해금과 동시에 아웅산 수치는 군부와의 대화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대화 제의는 그동안 누차 있었던 것이라 새로운 정치전략으로 보는 것은 속단이다. 하자가 많은 집권 군부세력으로서는 아웅산 수치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극단적으로 그의 자유를 다시 박탈할 수 있다. 그렇기에 아웅산 수치는 미얀마 사회가 활력을 되찾도록 하기 위해서도 자신의 자유를 소중히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 그동안 제기됐던 정치인 아웅산 수치에 대한 다음과 같은 건설적 비판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하나는 군부를 강온파로 분열시키기 위해서도 형식적 대화 제의가 아닌 실질적 대화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웅산 수치의 외국기업들에 대한 ‘투자 유예 요청’은 대화노선과 상충하는 대결노선이었다. 다른 하나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보다 오히려 미얀마의 변화를 유도해낼 수 있는 지렛대를 더 많이 갖게 된 중국, 아세안 회원국들에 좀더 진지하게 다가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포장된 서방 강대국들의 일방주의와, 불간섭주의란 이름으로 포장된 식민주의 경험국들의 국가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인권 패러다임을 아웅산 수치에게 기대해본다.


박은홍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자료제공: 한겨레 201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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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권의 날에 생각하는 달리트의 인권 
 
인권은 인간이기 때문에 누구나 갖게 되는 보편적이며 절대적으로 보호 받고 누릴 수 있는 권리다. 쉽게 말해, 사람다운 대접을 받을 권리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너무 많은 이웃들이 기본적인 사람대접을 못 받고 있다. 필자는 오늘(12월 10일) ‘세계인권의 날’을 맞아 민주주의 국가로 자주 거론되는 우리 이웃 국가, 곧 유엔 상임이사국이 될 인도의 많은 이들, 특히 흔히 불가촉 천민(접촉만 해도 오염이 된다고 믿어 이들과는 접촉도 하지 말라는 천민들)이라고 불리는 달리트들을 기억하고 싶다.
 
1950년에 제정된 인도의 헌법에 의하면, 다른 모든 인도인들과 마찬가지로 달리트들은 평등한 권리를 누리도록 법과 제도로 보호받고 있다. 1955년에는 불가촉 천민제 범죄법을 제정, 공포함으로써 달리트에 대한 불가촉 접촉의 여러 사회적, 문화적 행태의 차별행위를 범죄화했다. 또 1989년에는 이 달리트들에 대한 차별과 인권침해, 만행 등을 예방, 금지시키는 법안을 제정해 시행하고, 달리트들에 대한 차별적 특별 혜택(교육, 직업, 정치 대표권 등에 대한 특별 비례 대표권을 부여하는 정책) 등도 인도 정부는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세계 달리트 인권연대 네트워크’의 보고서를 보면, 매일 3명의 달리트들이 살해당하고 4채의 가옥이 불에 타고 최소한 3명의 달리트 여성들이 강간을 당한다. 또 인도만이 아니라 남아시아의 모든 나라들에서 비슷한 만행의 희생자가 되고 있는 달리트의 수가 2억 6천만 명이나 된다. 해당 국가들의 헌법과 여러 입법, 행정 조치에도 불구하고 또 많은 국제 인권 조약들의 비준을 통한 범 국제적 보호 의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달리트들이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현실이다.

불가촉천민, 달리트의 현실
              
인도에서 가장 억압받는 사람들인 달리트들이 살고 있는 인도의 시골 마을의 현실이 우리에겐 낯설고 멀기만 느껴질 수 있다. 도시 문화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우리에게 토지 소유를 금지당해 역사적으로 농노로, 무지한 소작농, 농촌의 한 농업 노동자들로 일생을 마감하는 많은 달리트들의 이야기가 한 사극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들의 열악한 경제적 위치와 대대로 물려받은 극심한 빈곤 때문에 생계의 기본적 필요(결혼 비용, 교육비, 병원비)를 해결하지 못해 빚을 얻고, 그 빛과 산더미처럼 불어난 이자 때문에 대대로, 2, 3세대가 노예 상태의  노동자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무슨 영화같이 들릴 수도 있다.
 
남아시아의 현실 가운데에서 계급, 신분과 성별, 계층의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달리트 여성들에 대한 ‘사람’ 대접은 더 소설 같은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른다. 달리트이기 때문에, 빈곤의 가장 소외된 바닥 계층이기 때문에, 여성이기 때문에, 폭력과 성폭행, 비인간적 대우(나체 차림으로 마을을 돌게 해 그 사회에서 달리트 여성의 종속적 지위를 상기시키게 하는 처벌), 굴욕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 많은 달리트 여성들의 하루 하루의 삶이 2, 3중 차별의 희생자로, 또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달리트들에게 보복하는 전체 달리트 공동체의 가장 쉬운 희생양이 되고 있는 많은 남아시아 달리트 여성들의 현실은 우리에게 소설보다도 더 먼 이야기처럼 들린다.

심지어 범죄자를 신고하러 간 경찰서에서까지 모욕과 폭행, 강간 등의 성폭행을 당하는 달리트 여성들에 대한 인권 침해는 가장 많이, 자주 방치되어온 대표적 인권 침해 사례들이다. 많은 경우에, 사법부는 달리트 여성을 보호하는 법률을 집행하는데 실패했고, 2006년 인도 국가범죄국의 보고서에 따르면, 달리트 여성의 학대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유죄 판결율은 단지 5.3%였다. 그 뿐만이 아니다. 매년 수천 명의 달리트 여성들이 데바다시 (Devadasi) 또는 조기니(Jogini) 라는 제도의 명목으로 매춘을 강요당하고 있다. 이 제도는 소위 카스트제도의 신성한, 종교적인 실천이란 이름으로 어린 달리트 여학생들을 강제로 착출, 힌두 사원에 소속된 공공 매춘부로 전락시켜 젊은 달리트 여성들의 체계적인 성적 학대와 착취를 강요하고 있다. 이는 달리트 여성들의 속박에 종교적으로 신성시하도록 강요된 매춘부 제도를 통해 달리트 여성들과 매춘을 묶어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우위를 시행하고자 하는 지배적인 카스트 계급에 의해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진압의 수단이기도 하다.
 
달리트인들의 저항을 막는 보복 만행

그런데 무엇보다 시급한 달리트들의 인권 과제는 그들에 대한 보복 만행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들의 권리를 행사하거나 학대와 착취 행위에 대해 저항하려고 할 때, 그들은 현 인도 사회의 계층 구조를 유지하고자 하는 높은 계급의 주민(high Caste)에 의해 매우 잔인하고 때로는 집단적이며 아주 적대적인 저항에 직면하고 있다. 따라서, 인도 곳곳에서 그들의 억압에 저항하는 달리트들이 늘어나면서, 달리트들에 대한 만행과 인권 침해도 같이 늘어가고 있다.

높은 계급의 주민(high Caste)들은 토지 이용, 시장 및 고용에 대한 기회 제공, 심지어는 식수에 대한 통제와 압력 등으로 달리트들이 사람대접 받기를 주장하지 못 하도록, 아니, 아예 꿈도 꾸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보복하고 있다. 모든 기회로부터 달리트들을 잘라 완전한 사회 보이콧을 하려 할 뿐 아니라 좀 더 나은 사람 대접을 요구하는 달리트들의 주장에 대해 살인, 갱 강간, 약탈과 방화로 대응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2008∼2009년 6개월 사이에 봄베이를 수도로 둔 마하라스트라 주에서만 많은 달리트 인권 운동가들이 죽어 가야만 했다.

택시 운전사로 넉넉지는 않지만 온 가족의 생계를 걱정없이 꾸리던 사헤브라오 존다일(Sahebrao Jondhale)씨는 달리트에게 어울리지 않는 택시 운전을 한다는 ‘죄목’으로 2008년 7월 16일에 자기 차안에서 억울하게 차와 함께 화재의 잿더미가 되어야 했고, 학력은 낮지만 뛰어난 달리트 공동체의 젊은 리더로 활발하게 활동한 결과 1995년 이후 고향 마을 인 잠케드(Jamkhed) 마을의 지역 자치회 회장으로 선출돼 활동하던 바반 미샬(Baban Mishal)씨는 그 지역 유지인 높은 신분의 카일라시 자다브(Kailash Jadhav)씨의 부정 부패사건을 폭로한 대가로 32살이 되던 2008년 7월 5일에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당했다. 카드키 갓 (Khadki Ghat) 마을에서 마을 이장으로 알하던 판두랑 와그마레(Pandurang Wagmare)씨가 그 군에서 일어나는 행정의 실태에 대해 높은 계급 사람들의 무능을 비판하다 그의 집과 다른 달리트들이 살고 있는 온 마을이 보복 방화의 희생이 되었는가 하면 자기들보다 높은 상류 계급의 젊은이들의 음란 발언에 응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8살 된 소녀와 그의 언니는 2009년 1월 19일 동네 한 복판에서 구타와 성폭행을 당했다. 한 달리트 청소년은 그보다 상위 계급의 여학생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 해 2월 그보다 높은 계급 마을 사람들에게 무자비하게 살해당했다. 이런 사례들은 수없이 많다.
 
헌법과 수많은 입법 조치가 달리트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있다지만, 사실 이러한 법률의 구현에 대한 정치적 의지 부족과 나약한 법 집행 실천 노력 때문에 이러한 달리트들에 대한 보복적 인권 침해는 거의 처벌이 되지 않고 있다. 그런 추세를 보면 이런 보복적 만행은 더 끔찍한 형태로 더 무자비하게 앞으로도 계속 증가될 전망이다.

달리트 인권해방을 위한 우리의 연대 과제
 
이러한 현실에 대해 어떤 이들은 달리트들의 인권 침해를 가능하게 만든 인도의 카스트 제도가 인도 사회의 아주 오래된 문화적, 종교적 전통이며, 태어나면서부터 되물림하는 이 불평등으로부터 해방할 수 있는 기회 제공조차 허락하지 않는 제도 속에서, 그리고 그 해방을 위해 노력하는 마음의 자유조차 방지하도록 만든 인도의 힌두 종교 전통 때문에 당장은 실현가능하지 않는 인권 과제라고 일축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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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국희망재단 제공

그렇게 우리 스스로 우리의 무관심과 무행동을 정당화 시키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민주국가인 인도가 유엔의 상임 이사국이 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왠지 인도는 가난한 개발 도상 국들의 이변을 대변해 줄, 그래서 그 국가들에서 살고 있는 가난한 많은 서민들에게 친근한 정부의 역할을 해 줄지도 모른다는 착각까지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자기 나라에 살고 있는 5명 중의 한 명인 달리트의 사람으로의 기본권, 살 권리도 보장해주지 않는 정부가 과연 우리 인류의 평화와 정의, 민주주의를 수호할 자격이 있는가라고 묻고 싶다.
 
인도라는 대국이 가진 정치력, 잠재적 경제력, 시장의 가능성에 주눅들지 말고 우리 모두, 평등과 차별 금지의 보편적인 원칙에 따라 달리트들의 사람으로 살 권리 보호를 위한 기존 국제, 국내 모든 법적, 행정 조항의 이행을 보장하라고 목소리를 높일 때이다. 유엔 상임 이사국의 자격을 논하기 전에 1억 7천만 명(거기에 약 4천만 명으로 추산되는 기독교와 이슬람 종교로 전향한 달리트들까지 포함하면 약 2억 1천만 명)의 달리트들에 대한 조직적인 권리 침해와 범죄에 대한 근본적 해결 방안의 모색과 예방 및 정책 구현이 우선 되어야 한다. 그 정책 입안에는 역사적으로 체계적으로 부의 균등 분배에서 철저히 소외당하고 있는 달리트 공동체들의 개발 및 고용에 대한 정책과 그들에 대한 역사적인 불공평을 완화, 수정하도록 설계된 구체적 인권 보장 정책이 필요하다. 기존의 국제 인권 원칙과 의무를 기반으로 하되 인도 사회에 적합한 ‘사회문화적 토양과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법과 제도, 그리고 그 사회 문화적 기초에 대한 인식을 기본으로 한 일반 및 특별 입법 보완 대책과 행정적 구현 및 정책 집행에 대한 구체적 실천대책이 중요하다.

한국 시민사회에서도 달리트 인권에 관심을 갖고 연대를 표하는 움직임들이 점차 늘고 있다. 지난 2010년 3월 제13회 지학순정의평화상 수상자로 자노다얌(Janodayam)이라는 인도 달리트인권운동 단체가 선정되었다. 인도 첸나이 지역 오물청소 달리트를 대변하며 달리트 공동체 인권과 개발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이 단체는 그간의 노력의 결과, 손으로 오물을 처리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며 달리트 아동교육에 힘을 쏟고 있다. 자노다얌의 사무총장인 예수마리안(Yesumarian)은 이날 상을 받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아마 그의 뇌리 속엔 그간 달리트 인권해방을 위해 힘 쏟았던 숱한 세월과 달리트공동체 사람들의 모습이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는 인도 사회조차 관심을 주지 않는 달리트 인권문제에 대해 한국인들의 따뜻한 관심과 격려에 감동했으며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이러한 국제적 연대와 지원 아래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더 힘을 얻고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기초적 권리를 다시 찾기 위해 살아갈 것이라고 미래를 얘기했다.

우리 모두 무관심한 이웃이 아니라, 또 세계 인권의 날 하루 동안 보여주는 반짝 관심이 아닌, 강하게 남아프리카 아파르트헤이트 인종차별 투쟁 때 그랬던 것처럼 인도의 카스트 계급 차별 글로벌 투쟁에 참여하기 위해 함께 국제 사회를 촉구하며 지속적인 연대를 결의할 때다.
 

곽은경(이크미카 팍스 로마나 사무총장, Pax Romana ICMICA/MIIC)

* 인도 달리트인들을 위한 작은 실천하기(인도 달리트 어린이들이 차별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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