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노동운동가 파우지 압둘라(Fauzi Abdullah)를 추모하며
인도네시아의 독보적인 노동운동가 파우지 압둘라(Fauzi Abdullah)가 영면한 지 1년이 지났다. 2009년 11월 27일 밤, 파우지는 생산직노동자출신의 아직 젊은 부인 드위 뿌리완띠(Dwi Priwanti)와 아홉 살 난 아들을 남겨놓고 예순의 나이에 눈을 감았다. 노동인권신장에 생애의 절반을 바친 그의 업적을 기려 인도네시아 최고의 인권상 얍티암힌(Yap Thiam Hien) 상이 수여되기 한 달 전이었다. 일찍이 당뇨를 앓았고 2005년 초에는 몸의 왼쪽이 마비되었지만 세상을 등지기 1주일 전까지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필자는 그를 인도네시아의 현대노동운동가 중에서 단연 최고의 인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파우지는 1949년에 아랍계이주민 사업가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형제들이 모두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파우지만이 ‘빨갱이’로 취급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다. 국립인도네시아대학교(Universitas Indonesia) 영문과에 재학할 때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의 『페다고지』(Pedagogy of the Oppressed)를 읽고 감명을 받은 것이 투신의 계기였다고 후배들은 증언한다. 파우지의 노동운동경력은 1978년에 당시 인도네시아 최대의 인권옹호민간단체인 자카르타 법률구조재단(LBH: Lembaga Bantuan Hukum)에 인턴활동가로 참여하면서부터 시작되었고, 1980년부터는 재단의 정식 활동가로서 10년간 활약하면서 독보적 능력과 접근법을 선보이게 된다.
재단은 특성상 변호사들이 주력이었고 당연히 무료법률자문이 활동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파우지는 법적 전문성 없이 재단에서 근무했다는 점에서 독특했다. 흥미롭게도 파우지의 약점은 강점이 되었다. 파우지는 노동자의 미래가 법적인 자문이 아니라 조직화에 달려있다고 믿었고, 조직화의 전략은 현장의 노동자들로부터 나온다고 보았다. 그래서 파우지는 법률지식을 설파하는 대신에 노동자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 책상너머로 노동자들을 대하는 변호사들과 달리 파우지는 노동자들과 같은 높이로 앉아서 커피와 담배를 즐기며 토론의 꽃을 피우곤 했다고 한다. 파우지는 노동자들과의 대화가 정말 즐거웠고 그들로부터 현장의 사정,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조직화의 지혜를 배웠다고 회고하였다. 노동자들로부터 배우고자 했던 점, 이것이 바로 파우지의 위대한 점이었다. 필자는 지금까지도 인도네시아에서 파우지 외에 이런 태도를 지닌 노동운동가를 만난 적이 없다.
파우지는 노동자들이 변호사나 지식인들의 슬하를 떠나 스스로 조직할 수 있는 날을 바랐고 그런 날을 앞당기고자 했다. 그래서 수하르토 체제·하에서 해고자 출신들이 비정부단체(NGO)를 조직하도록 후원했고, 민주화 과정에서는 수도권지역노동조합(Serikat Buruh Jabotabek)을 결성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민주화 직후 노동귀족들이나 노동운동가들에 의한 '하향식' 노조연맹들이 우후죽순처럼 설립되어 노동운동이 사분오열될 때, 파우지는 현장노동자들이 주도권을 갖는 '상향식' 노조연맹의 건설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아울러 노동운동이 공장의 담을 넘어서 다른 부문의 사회운동과 광범하게 연대해야 한다고 믿었고, 스스로도 그 일익을 담당하여 1997년에 인도네시아사회변혁협회(INSIST) 창설에 가담하였고, 사망할 때까지 실종및폭력피해자위원회(KONTRAS)의 연대회의 의장직을 수행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파우지는 노동운동이 기록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결성한 것이 스다네노동정보센터(LIPS: Lembaga Informasi Perburuhan Sedane)였다. 스다네는 센터가 위치한 동네의 명칭이다. 이 센터를 통하여 도처에 흩어진 노동관련 자료를 조사하고 수집하고 인도네시아 유일의 노동운동 전문잡지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파우지는 오래전부터 노동자교육센터의 설립을 꿈꿨다. 단순한 교육 공간이 아니라 노동자들끼리 모여서 경험과 지혜를 교류할 수 있고 멀리서 온 노동자들이 쉬어갈 수 있는 숙소까지 겸하는 그런 공간을 마련하고 싶다고 했다. 땅까지 사 두었지만 건축비를 구하지 못해서 그의 마지막 꿈은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파우지는 한국 시민사회와 일찍이 연관되었다. 1990년대 중반에 한국의 NGO들이 한인투자기업 노동인권침해 문제를 모니터링하면서 부터였다. 1996년에 파우지를 발표자로 서울에 초청한 당시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위원장 신윤환 교수는 파우지가 전국노동자대회를 참관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각지에서 노동조합의 깃발을 가져온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일사분란하게 율동을 섞어가며 노동운동가요를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은 언제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라더니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수하르또 독재 치하에서 국가의 지도감독을 받는 어용노조만이 활개 칠 때였다.
필자는 파우지를 1998년 8월에 처음 만났다. 한인투자기업의 노동인권침해 문제를 조사하러 자카르타를 방문했을 때였고, 인도네시아 노동문제를 이해하려면 파우지부터 만나야 한다는 주변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만나보니 파우지는 명성과 달리 수수한 복장에 친절하고 겸손하고 나이나 성별에 따른 차별이 없는 일관된 사람으로 보였고 열심히 듣고 진지하게 답하는 사람이었다. 그 후 계속된 만남과 토론에서도 파우지는 한결같았다. 마지막으로 그를 직접 대한 것은 2001년 5월에 노동운동에 관한 1년 반의 현지조사를 마치고 귀국인사를 위해 보고르(Bogor)의 자택을 찾았을 때였다. 당시 파우지는 늦장가에다 아들 라이한(Raihan)까지 얻어서 행복한 한 때를 누릴 때였다. 그 후 파우지를 다시 만날 수 없었지만 그가 설립한 단체 활동가들과의 접촉과 토론이 계속되었고 그 때마다 파우지는 안부인사를 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파우지의 영면은 인도네시아 현대노동운동사에 대한 기억과 현장노동자들이 그에게 들려준 지혜의 손실이기도 하다. 만날 때마다 파우지는 조사여행을 통해 노동자들로부터 새로 배운 바를 들려주곤 했다. 마지막 만남 때의 이야기는 술라웨시섬 넝마주이들의 조직화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노동자들의 지혜를 사랑한 파우지는 그렇게 해서 얻게 된 자신의 지혜와 전략에 대해서는 정작 책 한 권 남기지 못했다. 필자는 파우지에게 인도네시아 노동운동의 역사, 혼탁 그 자체인 작금의 노동운동, 후배들에게 들려줄 전략과 권고에 관하여 글을 쓸 것을 강권한 바 있다. 그 때 파우지는 정말 진심으로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만든 단체에 딸린 네 명의 활동가들이 월급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 만만치 않은 현실의 고충에 대해 토로했다. 그렇게 파우지는 떠나갔다. 만약 그가 책을 썼다면 인도네시아의 노동운동과 인권운동에 관한 역사적 이해는 물론이고 미래의 전진을 위한 귀중한 토착적 안내서가 되었을 텐데 정말 안타깝다.
이렇게 ‘아시아의 지혜’가 사라지고 있다. 한국의 시민사회에서 ‘아시아연대운동’이 활발한데, 우리의 경험과 지혜를 알리는 것을 넘어서, 작은 자금이나마 보태서 아시아 시민사회의 경험과 지혜도 기록될 수 있도록 독려하고 후원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그렇게 만들어진 한 권의 책으로 인도네시아의 젊은 세대들이 배우고 우리도 따라서 배우는 기회를 갖게 된다면 얼마나 멋진 일일까? 파우지 사망 1주기를 넘긴 자카르타에서 그와 나눈 추억과 그가 없는 오늘의 상실감을 적어보았다.
* 이 글은 서남포럼 뉴스레터(2011.01.10)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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