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다문화 시대에 적절히 대처하고 있는가?


다문화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관한 논의가 무성하다. 학자들은 다문화 연구에 뛰어들고 정책적 대안을 건의하며 사회적 성찰과 각성도 요구하고 있다. 많은 대학에서 다문화 관련 연구소가 설립되었고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일반인이나 다문화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과 훈련을 시행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대학 스스로는 다문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과 몽골을 비롯한 아시아 출신 유학생들이 급증하고 있어서 대학도 이미 다문화 시대에 들어섰건만 유학생들을 위한 제도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머지않아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 대학에 대거 진학하게 되면 대학 내의 다문화 현상은 더욱 뚜렷해질 텐데 이에 대비하기 위한 논의도 진행되지 않고 있다.

방치되는 아시아계 유학생들

먼저 아시아계 유학생 급증의 문제를 이야기해보자. 전북대의 경우만 보아도 2009년도 4월 기준으로 760명의 외국인학생이 재학 중인데 2년 전에 비해 거의 다섯 배나 늘어났다. 국적별로 보면 중국인(569명), 몽골인(85명), 네팔인(24명) 등의 순으로 아시아계 학생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필자가 강의하는 모든 과목에 중국인 유학생들이 수강하고 있고 몽골과 미얀마 출신 유학생도 더러 포함되어 있다. 한국어능력시험의 최소기준을 통과한 학생들이지만 한국어로 이루어지는 학부수준의 전공강의를 따라올 수가 없다. 대학원생일지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강의를 충분히 알아듣지 못하고 교수가 강의노트를 제공해 주어도 시험답안지를 반 페이지 이상 채울 수가 없다. 발표식 수업이어서 유학생들도 예외 없이 발표하는데 그 질이 현저히 낮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도 잘 전달되지 않는다. 따라서 수업은 파행을 겪고 유학생들은 자괴감에 빠지곤 한다. 대학은 이런 문제를 방관하고 있으며 오히려 국제화 지수가 높아진다는 사실을 즐기고 자랑하고 있다.

물론 유학생 스스로의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한국인 학생들과 적극적으로 사귀고 언어교육원에서 한국어강의를 계속 수강할 것을 권하곤 한다. 그래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 아이들이 고학년이 되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경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대학이 마련하는 해법은 영어로 진행되는 강의를 늘이는 방법이다. 그러나 아시아계 유학생들은 일반적으로 영어보다 한국어를 더 잘하기 때문에 영어강의 확대는 불충분한 해법이다. 다행히 최근에 우리 대학에서는 멘토(mentor) 제도를 도입했다. 한국학생과 유학생을 맺어주고 한국학생이 외국인학생을 도와주는 대가로 봉사학점을 부여받는 식이라고 한다. 그런데 유학생들은 멘토 제도가 별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한다. 멘토의 전공전문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글쓰기지도센터(writing center)를 설치하자고 제안한다. 대학교 단위의 센터이되 학과별 1인의 한국인 박사과정생을 현장지도자로 둔 네트워크로서의 센터를 설립한다. 그리고 외국인학생들의 전공수업관련 한국어 읽기, 쓰기, 말하기를 구체적으로 지도 지원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그 담당자인 한국인학생은 장학금으로 보상을 받는다. 현장지도자의 근무시간이 공지되고 유학생들은 그 시간 중에 개별적으로 약속을 잡고 대면지도를 받을 수 있도록 한다. 한국어 능력이 고도로 요구되는 인문사회계에서 먼저 추진되어야 할 것이고, 대학교가 선뜻 나서지 않으면 단과대학이 먼저 추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센터는 전공학습에 곤란을 겪거나 더 나은 논문 쓰기를 원하는 한국인 학생들이나 조만간 대학에 진입하는 다문화가정 학생들에게도 유용할 것이다. 아시아계 유학생들에 대한 학습지원이 한국인학생들에 대한 학습지원을 겸하게 되는 셈이다.

지방대를 쇄도할 다문화가정의 아이들

이어서 다문화사회의 대표주자처럼 인식되는 국제결혼가정의 학생들을 대학이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의 문제이다. 다문화가정이 집중되어 있는 지방 국립대의 경우 더욱 진지하게 고려해야 하는 사안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2년전 필자가 면접관으로 참여했던 법학전문대학원의 입시면접에서 이 문제가 제기된 바 있다. 대학입시에서 다문화가정의 학생들에게 가산점을 부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법률가 지망생들은 이구동성으로 가산점을 부여해야 한다고 답했고 그 근거로 그들이 취약계층에 속하기 때문이라는 논리를 펼쳤다. 다문화가정이라고 해서 반드시 취약계층에 속하는 것인지 단지 다문화가정의 아이라는 이유로 우대받는 것이 형평성에 맞는 것인지에 대한 고려가 없을뿐더러 그 아이들이 남다른 장점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는 사고는 아예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불쌍하니까 도와줘야 한다는 실망스러운 논리였다. 아직 대학차원의 논의는 없었지만 십중팔구 일단 논의를 시작하면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 불쌍한 것인가 아닌가에 관한 논의로 흐를까봐 걱정이 된다.

대학의 다문화적 전환이란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할 논의방향은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문화 가정의 학생들이 입시에서 가산점을 부여받는다면 그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대학의 교육과 한국의 발전에 필요한 인재들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아시아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학생들에게 가산점을 부여한다는 안을 내보자. 그렇다면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 혜택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그 혜택은 그들이 지닌 취약성이 아니라 수월성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다. 다문화가정 출신이 아닌 학생이라도 아시아언어를 구사할 능력이 있다면 아울러 우대를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러한 남다른 능력이 국가적으로 필요한 능력이란 점에 동의할 수 있다면 당연히 가산점제도도 공정한 제도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 문제는 자연스레 우리가 아시아 언어능력 수준을 평가할 만한 제도를 갖추고 있는가이다. 불행하게도 상당수의 아시아언어에 대한 평가시스템을 마련하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당면한 과제는 다양한 아시아언어에 대한 전국적이고 주기적이고 공정한 평가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다. 다문화 현상을 고려하는 대학들은 지금 이런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어서 대학은 현재의 교과과정을 검토하고 개편할 준비를 해야 한다. 한국의 대학은 아시아의 각 지역에 대해 얼마나 가르치고 있는가? 아시아계학생들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지 오래인 미국의 대학들은 아시아관련 강좌들이 일찍이 인기를 끌어왔다고 한다. 우리의 대학은 부모의 고국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는 학생들과 그런 친구들을 이해하려고 따라오는 학생들의 학습동기를 채워줄 과목들을 마련하고 있는가? 우리의 대학들은 다문화의 해법은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수준을 높이는 것이라는 원론적 구호를 반복하는 수준을 넘어서 실질적으로 아시아의 이웃나라들에 관한 지식을 습득한 인력들을 배출할 수 있는 교과과정을 마련하고 있는가? 답은 부정적이다. 중국과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지역에 관한 강의가 거의 부재한 실정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는 동남아시아 지역에 관한 정치학, 인류학, 역사학 강의가 개설되어 있다. 그러나 국내 대부분의 대학에서 동남아에 관한 인문사회 강좌를 찾아보기 어렵고, 두 개 외국어대학을 제외한 대학들에서 동남아 언어를 배울 수 있는 과목이 개설되어 있지 않다. 특히 지방 국립대의 사정은 거의 불모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도 다문화적 전환의 대상이다

대학의 다문화적 취약성은 지금까지 열거한 것들 외에도 무수히 많을 것이다. 무슬림 학생들은 기숙사식당이 돼지고기를 금기시하는 무슬림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고 불평한다. 필자가 가르치는 대학생들이 주관하는 각종 축제와 행사가 허다하지만 국제주간이나 아시아주간처럼 외국인학생들이 쉽게 참여하고 한국학생들이 타문화를 즐길 수 있는 문화행사를 찾아보기 어렵다. 문제는 많지만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풀어가야 할 것이다. 그 방향은 유학생이나 다문화가정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성원 모두에게 교육적 효과를 줄 수 있는 제도를 고안하는 것이면 더욱 좋겠다.

요컨대 대학은 다문화에 제대로 대처하자고 정부와 사회에게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다문화적인 고려를 충분히 하고 있는 것인지 물어야 할 것이다. 대학의 다문화 연구자들은 초등과 중등 과정의 교육에 대해 검토하고 조언하는 수준에 족해서는 안 되고 대학 자체의 교과과정을 검토하고 개혁함으로써 대학을 다문화 시대의 책임 있는 주체로 전환시키는 일을 병행해야 할 것이다. 또한 다문화 관련 활동을 전개하는 다양한 사회단체들이나 아시아연대를 추구하는 시민단체들에게도 대학의 각종 제도와 교육과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개선책을 제기함으로써 대학의 다문화적 전환을 촉진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부탁하고 싶다.

전제성 (전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 이 글은 [열린전북] 2010년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Posted by 영기홍
,


5.18기념재단은 2000년에 광주인권상 시상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국제연대를 추진한지 10년 만에 국내에서 가장 포괄적인 국제연대 프로그램을 갖춘 단체가 되었다. 해마다 아시아 인권운동단체의 대표에게 상금과 함께 수여하는 광주인권상 뿐만 아니라, 아시아 인권단체들에게 운영자금을 지원하고, 국제인턴활동가를 장기간 받아들이고 또한 보내는가 하면, 아시아 활동가들을 초청하여 인권문제에 관한 단기연수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고, 5.18 피해자가족들을 모시고 아시아 인권단체들을 방문하고, 아시아와 국내의 인권운동가들과 학자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대규모 토론회인 광주아시아포럼을 5월에 개최하는 등 프로그램의 다양성과 규모의 측면에서 단연 국내 최고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물론 그 적실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필자는 그간의 국제연대가 양적인 성장과 실험의 과정이었고 이제 그렇게 10년이 흘렀으니 그 적실성을 따질 때가 되었다고 본다.
 
 
5.18의 국제적 의미는 무엇인가?

재단의 국제연대활동은 최근 한국 시민사회운동단체들이 그러하듯이 아시아연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덕분에 상당수 아시아인권운동가들에게 5.18이란 시간과 광주라는 공간이 친숙해 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공감하는 5.18과 광주는 무엇인가? 그것은 국가폭력에 맞선 광주시민들의 용감한 저항과 시민정신, 그리고 아주 특별한 것으로 그 역사의식이다. 국가폭력의 잔혹성은 아시아의 도처에 서려있다. 폭력에 맞서는 결사항전도 각지에서 전개된 바 있다. 그리고 적지 않은 곳에서 그러한 용감한 저항은 민주화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국가폭력을 과거에 묻어두지 않고 진상을 조사하고 가해자들의 책임을 묻고 피해자들을 보상하고 나아가 기념하고 교육하는 ‘기억의 정치’를 지속시켜온 경우는 드물다.

광주를 찾은 아시아의 활동가들은 아르헨티나나 남아공까지 멀리가지 않아도 가까운 한국에서 5.18기념재단 사업과 같은 선례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기쁨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국가폭력과 반폭력 항쟁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광주처럼 진실을 찾고 정의를 구현하고 그것을 기억하고 교육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표하곤 했다. 바로 그것이 5.18이라는 시간과 광주라는 공간이 이웃나라에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분투하는 활동가들에게 매력적인 이유이다.

몇 년 전 5월에 광주를 찾을 때 톨게이트에 “민주주의와 인권의 도시, 광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는 글귀를 본 적이 있다. ‘민주주의’와 ‘인권’이란 용어가 5.18정신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맥이 빠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일반개념으로 넓혀가면서 5.18의 선명하고 구체적인 내포가 흐려져서는 안 될 것이다. ‘5.18 다운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국가폭력에 대한 항쟁, 폭력피해자들에 대한 연대, 그리고 (인도네시아 인권운동단체들의 구호로 표현하자면) “망각에 대한 저항”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국제연대도 5.18의 이러한 핵심을 잃지 않고 오히려 그 특수성이 더욱 빛을 발하는 방향의 연대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아시아의 인권운동가들이 한국 사회운동에 바라는 바는 각양각색이고 종종 추상적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5.18과 관련된 희망사항은 하나의 구체적인 요구로 집약된다.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피해자보상, 기념사업으로 이어지는 국가폭력에 대한 진실과 정의의 추구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5.18기념재단의 국제연대는 아시아 각지의 역사 속에 가해진 국가폭력의 진상을 조사하고, 반폭력 시민저항행동의 역사를 발굴하며, 책임자처벌과 기념사업 추진의 방안을 공동 모색하는 연대활동을 핵심으로 삼자고 제안한다. 그것은 5.18의 근본성격에 기반을 두는 활동이어서 뿌리가 튼실한 동시에 아시아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들에 도전하는 옹골찬 기획이기도 하다. 아시아의 역사는 국가폭력에 의한 ‘학살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묻어두고 앞으로 나아갈 것만을 재촉하는 ‘불처벌의 역사’를 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치부를 끈질기게 들추고 따지는 전위로서 5.18기념재단이 우뚝 서기를 바라며 그것이 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에 광주가 기여할 수 있는 길이라고 믿는다.

국제연대를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얻을 것인가?

오늘날 우리는 복잡한 이웃효과 속에서 살고 있다. 캄보디아의 국가폭력은 광주에 대한 국가폭력을 자극했을 것이고 필리핀의 민주화는 한국의 민주화가 임박했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이웃한 아시아의 민주옹호세력들과 연대해야 한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위한 국제연대를 기획하고 추진할 때 우리는 자칫 자민족중심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고 결과적으로 비현실적이고 비효과적인 국제연대활동을 낳을 수 있다.

한국의 민주화는 한국의 특수한 맥락 속에서 이루어졌듯이 타국의 민주화는 그 나름의 맥락 속에서 추진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활동가들은 일반적으로 이웃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 지식이 부족하면 독특한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리되면 적절한 연대의 매개를 찾을 수 없게 된다. 자민족중심주의는 역사적 단계에 맞지 않는 제안으로 연결될 수 있다. 민주화에 막 돌입한 나라에서 과제로 떠오르는 것은 어떻게 정당을 결성하고 선거를 치르고 의회를 구성하며 그 의회의 견제를 받는 새로운 민주국가를 여하히 건설할 것인가 인데, 그런 나라의 활동가들에게 의정감시를 어떻게 함께 할 것인가를 논제로 꺼내면 황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한국 활동가들은 근원적 갈등에 대한 감각이 결여되어 있다.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종교간, 종족간 갈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곤 하는 상황에 처해있지만 우리는 이에 대한 첨예한 인식을 결여하고 있다.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민족중심주의에 빠지지 않는 국제연대를 모색할 방법은 무엇인가? 그 출발은 진지한 경청과 세련된 대화이다. 아시아로부터 인턴들이 파견되고 단기연수생이 방문하고 발표자들이 온다. 그들에게 듣고 배워야 한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우리의 경험을 일반화하는 방식으로 함부로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일반화는 과거 서양의 근대화 이론가들이나 작금의 신자유주의자들이 취하는 위험한 태도이다. ‘우리나라의 60-70년대랑 비슷하다’는 식의 생각과 발언도 금해야 한다. 그들은 우리의 길을 그대로 따를 것이고 우리는 그들의 미래에 관한 답을 갖고 있다는 착오적이고 오만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세련된 대화를 해야 한다. 세련된 대화란 겸손하고 느긋하게 예의를 지켜가며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곤경에 처한 지역에 대하여 배우고  열심히 길을 찾는 친구들을 얻고 국경을 초월하여 함께 맞서야 하는 과제를 간파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국제연대활동을 추진하는데 배움이 없다면 효과도 적고 아깝다는 생각도 들게 될 것이다.

5.18을 근본정신으로 삼는 국제연대가 자선사업처럼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아시아 각국의 인권운동은 대체로 우리보다 국제연대의 역사가 길고 국제화도 앞서 있다. 그래서 세계 각지로부터 지원의 손길이 닿고 있다. 우리도 그들처럼 원조를 제공하는 것으로 족한가? 그러기에는 우리의 지원은 규모가 조촐하고 반면에 우리의 열망은 더 깊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간의 금품으로 큰 시혜를 준 것처럼 행동하거나 할 바를 다 한 것처럼 자족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국가폭력의 피해와 그에 맞선 줄기찬 저항의 경험을 그들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힘이고, 그것이 우리가 그들과 연대하는 이유라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폭력피해자들, 그 가족들, 그들을 옹호하며 진실과 평화를 추구하는 아시아의 활동가들과 진정한 친구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국제연대로부터 얻고자 하는 보상이어야 한다.
 

전제성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이 글은 5.18재단에서 발행하는 잡지인 <주먹밥> 29호(2010년 가을호)에 실린 글입니다.


Posted by 영기홍
,

부패스캔들, 수사는 하지만 해결은 없다?

인도네시아 2009년은 선거의 해였다. 1998년 민주화 이행 이후 세 번째로 맞는 국회의원선거와 2004년 최초 직선제 대통령 선거 이후 두 번째 대통령 선거가 진행되었다. 우선 인도네시아 민주주의는 세계적 차원에서 인구 및 국토면적에 비추어보았을 때 인도, 미국에 이어 지구상에 존재하는 세 번째로 큰 민주주의 국가의 위상을 갖는다. 또한 인도네시아 민주주의는 여타 다른 동남아 국가와 비교해 보았을 때 민주주의 이행과 공고화의 상대적인 성공사례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민주주의가 20세기 후반을 지나 모든 국가에서 ‘따라 가야할’ 정치체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편성을 갖고 있지만, ‘어떤’ 민주주의 정치체제이어야 하느냐라는 맥락에서 특수한 측면도 갖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 결사체민주주의, 심의민주주의 등등의 ‘어떤’ 민주주의냐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인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민주주의 논의에서 쉽게 간과되었던 지점은 ‘사회문화적 토양과 역사적 경험’의 요소이다. 민주주의가 정치체제(political regime)라는 측면에서, 정치체제란 국가와 시민사회 관계의 법제도적 표현인 것이다. 그러나 기존 논의에서는 법과 제도를 잉태하는 사회문화적 기초에 대한 인식이 매우 많이 결여되어 있다. 예를 들면, 서구적 경험에서 ‘개인자유의 우선성’이라고 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와 선택적 친화성을 갖고 있다면, 가족 및 종교, 마을 공동체성을 우선시하는 아시아적 경험은 서구와는 다른 민주주의 형태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특수한 사회문화적 기초에 바람직한 ‘어떤’ 민주주의 유형이냐를 논하기 이전에, 오히려 현실에서는 비민주주의 정치체제로부터 이행한 국가들에서 민주주의를 진전 또는 심화시키기 어려운 현실적 제약조건들에 부딪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새롭게 형성된 민주주의 법.제도와 시민 의식 및 인식 사이의 괴리현상이라든가, 민주주의 기대와 정당정치현실 사이의 지체현상이라든가, 민주주의를 지탱하기 위한 경제적 조건의 문제 등등 현실적 제약요소들이 많이 존재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문제의 핵심이 되는 것 중의 하나는 권위주의적 정치유산으로서 구(舊)체제 지배엘리트 지속성으로 만들어진 정치적 관행의 문제일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1998년 민주화 이행 이후 인도네시아 정치체제는 ‘과두제적(oligarchic)’ 민주주의로서 그 한계를 지적받고 있다. 고전적 정치이론에 의하면 ‘과두성’과 ‘민주성’이 한 체제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 모순적으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제3의 민주화 물결이후 제3세계 민주주의는 법과 제도는 민주적 요소를 갖고 있으나, 구체제 지배엘리트의 견고성, 지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민주적 요소’와 ‘권위주의적 요소’가 혼재한 상태의 정치체제의 특징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소재 데모스(Demos: Center for Democracy and Human Rights Studies) 단체는 실증적 연구를 통해, 과거 권위주의체제의 지배엘리트들이 민주화를 통해 공적인 제도 영역 내에서 정치세력화를 성공함으로써, ‘과두제 민주주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하자면, 인도네시아에 적용된 ‘과두제 민주주의’란 민주적 정치기구들이 지배엘리트에 의해 포획된 체제를 말한다. 이러한 과두제 민주주의로 인해 민주주의 심화를 제약시키는 요소 중의 하나는 ‘부패구조청산’의 어려움이다. 제3세계 신생민주주의 국가가 민주주의로서 지속가능한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부패구조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의 문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반부패와 민주주의는 상관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제와 다당제 의회민주주의에 기초한 인도네시아의 경우, 작년에 있었던 총선과 대통령 선거 정치과정을 통해 공직자들의 충원 절차를 민주적으로 이루어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올해 2010년 초반은 2009년 조용한 총선과 대통령 선거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정세가 전개되었다. 작년 두 번째 대통령 직선제로 대통령 유도요노(Susilo Bambang Yudhoyono)와 부통령 부디오노(Boediono) 정부가 지지율 59.44%로 올해 출범하였으나, 집권 100일 만에 매우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경험하였던 것이다. 자카르타를 시위로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일명 센츄리 은행(Bank Century) 스캔들로 명명된 부패스캔들이다. 이 사건은 2008년 미국발 세계경제위기의 여파로 부실 경영을 겪고 있는 센츄리 은행에 6.7조 루피아(7조 달러)의 공적자금을 긴급지급한 일로서, 이러한 결정에는 유도요노의 핵심측근 세력인 부통령 부디오노와 재정부 장관(Menteri Keuangan)이었던 스리 물리아니(Sri Mulyani)가 있었다. 당시 부디오노는 인도네시아 중앙은행 총재였고, 스리 물리아니는 재정안정위원회(KSSK: Komite Stabilitas Sistem Keuangan) 위원장으로 긴급자금을 지원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공적 자금을 지원할 만큼 센츄리 은행이 위기 상태였는가, 또 센츄리 은행의 부실이 인도네시아 경제위기에 미치는 영향이 과연 그렇게 컸을까, 그리고 그 공적 자금 규모의 면에 있어서도 너무 크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의혹의 핵심은 이 돈이 2009년 선거를 위해 현 집권당인 민주당(Partai Demokrat) 선거자금으로 흘러들어간 것이 아니냐는 주장에 있었다. 또한 그 책임선이 유도요노 대통령에게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국회 안과 밖에서 정치적 공방이 강도 높게 진행되면서, 국회 내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조사된 바 있다. 정부의 부패스캔들로서 국회 내 유도요노 정부의 반대 정치세력과 국회 밖 유도요노 반대 정치세력은 정치적 공세를 가했었다. 그러나 현재 이 사건은 작년 12월부터 약 4개월간의 뜨거운 정치적 공방으로 인해 대통령 탄핵 담론까지 형성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재정부 장관인 스리 물리야니가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장관직을 하차한 것 외에는 뚜렷한 사건 처리 없이 국회에서 법원으로 넘어간 사건이 되었고, 2010년 8월 이 사건은 정치적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인도네시아 민주주의 측면에서 센츄리 은행 부패 스캔들을 통해서 지적하고 싶은 내용은 민주화 이행 이후 2002년 부패방지위원회(KPK: Komisi Pemberantasan Korupsi)가 만들어지고, 인도네시아는 ‘반부패 개혁’ 이슈를 국가적 차원에서 다루어왔고, 정치 이슈화하기도 하였지만 뚜렷한 민주적 해결 없이 매번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점이다.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권력구조 안에서 부패스캔들이 논의되고, 조사되고, 수사되지만 사건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앞에서 지적된 인도네시아 민주주의의 과두제성 때문일 확률이 높다. 민주적 기제와 기구들이 지배엘리트에 의해 포획되었기 때문에, 일정정도는 법과 제도에 따라 논의, 조사, 수사는 되지만, 물론 미흡한 논의, 미흡한 조사와 수사이겠지만, 결과적으로 판결, 심판, 집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화 이행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인도네시아 부패방지위원회의 위력과 역할이 저조해진다는 것은 역으로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도네시아를 비롯하여 제3세계 신생민주주의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심화, 확대발전시키기 위해서 지배엘리트의 비순환성 즉, 구엘리트의 지속성, 구지배엘리트에 의한 민주적 기구의 포획성으로 표현되는 민주주의의 과두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관건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인식, 제도, 토양 등 매우 다양한 요소들의 상호결합으로 만들어진 정치적 결과물이기 때문에, 비약적인 변화보다는 점진적인 변화과정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점진적인 내용적 변화를 위해서라도 ‘누구나에게 인정된’ 정통적인 민주적 법과 제도의 형식적 틀의 강화와 보전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최경희(한국동남아연구소 선임연구원)

*이 글은 프레시안 [아시아생각]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Posted by 영기홍
,


버마는 반세기 가량 법치 부재의 군사정권 치하에 있다. 한때 버마는 아시아의 선진국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1962년 ‘버마식 사회주의’를 내건 군부가 쿠테타로 집권하면서 버마는 정치, 경제적으로 추락해 인권 부재의 최빈국이 되었다.

버마 군사정부는 지난 2008년에 자신들의 불법 통치를 합법화하기 위해 헌법을 일방적으로 통과시켰고, 자신들이 공표한 일정에 따르면 올해 하반기에 총선을 치루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선거 일정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반면 버마 민주진영은 선거 보이콧을 기본으로 하면서 공정선거 감시운동의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대안없는 선거’가 버마인들의 인권을 개선시킬 수 있을지 극히 회의적일뿐이다.

주지하다시피 버마 국민들이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자유권과 사회권 모두를 상실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이제 버마와 인접한 타이 국경 도시 메솟은 인권 부재의 조국을 등지고 탈출하는 버마인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자신들의 협력기구인 아세안(ASEAN)에 버마를 가입시키려고 했을 때 서방 국가들은 인권의 이름으로 이를 반대했다. 그러나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이른바 ‘아세안 방식’(ASEAN way)에 따라 버마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였다. 이때의 ‘아세안 방식’이란 내정불간섭을 기본으로 하는 것으로 버마 인권문제는 버마 당사국의 문제이기 때문에 서방 국가들처럼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설사 인권을 거론하더라도 버마를 소외시키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버마를 아세안의 일원으로 끌어들여 개방도를 높이는 것이 인권 개선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포용노선을 ‘건설적 관여’(constructive engagement)라고 일컫는데, 우리 언어로 표현하자면 ‘햇볕정책’이다.

버마 인권문제에 관여하는 국제인권기구와 아시아 인권단체들은 서방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건설적 관여 정책에 대해 반대하면서 경제봉쇄와 외교적 제재를 요구해왔다. 이러한 국제연대운동의 결과 아세안 회원국 정부내에서 ‘건설적 관여’와 차별화된 ‘유연한 관여’(flexible engagement)라는 새로운 외교 개념이 제기되었다. ‘유연한 관여’의 핵심은 아세안 회원국 중 어느 특정 국가의 국내정책이 다른 회원국들에게 부정적인 여파를 미칠 경우 아세안에서 이 사안을 공개적이고 집단적인 토론에 부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상대로 ‘유연한 관여’는 그 자체가 아세안의 불간섭주의 규범에 반한다는 이견에 부닥쳤다.

이러한 ‘아세안 방식’의 변화 조짐은 아세안 회원국 정부만이 아니라 입법부에도 영향을 미쳐 ‘버마문제를 생각하는 아세안 의원연맹’(AIPCM)이 만들어졌다. 마침내 이같은 부드러운 압박 속에서 버마 군사정부는 예정되었던 아세안 의장직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듯 주변 국가들의 압박 수위가 조금씩 높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마 군사정부가 요지부동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방의 제재가 버마 군사정부와 민주화세력 사이의 교착국면을 민주화세력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끌어내기보다는 모든 문제를 외세 탓으로 돌리는 군부내 강경파의 득세만을 초래하였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1990년 선거혁명의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폭력을 수단으로 권력 이양을 거부한 버마 군사정부는 국면전환용으로 경제개방이라는 카드를 꺼냈다. 투자유치와 교역확대를 통해 대내적으로는 악화일로에 있는 경제를 반전시키고 대외적으로는 경제실리 중심의 외교노선을 취하는 주변국들과의 관계 강화를 통해 국제사회로부터의 고립을 피하자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다.

반면 버마 군사정부의 변신 시도에 대해 1990년 선거혁명의 주역인 민족민주동맹(NLD) 지도자 아웅 산 수지는 국제사회를 향해 버마에 민주주의가 회복될 때까지 군정이 희망하는 투자를 유보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렇듯 국제인권단체들과 서방국가들의 제재 전략은 아웅 산 수지를 위시한 버마의 민주인사들의 요구와 일치하고 있다. 

버마 민주 인사인 아웅 모 조는 1988년 8-9월에 걸쳐 진행되었던 반군부 민주화 투쟁에서 민주진영이 취했던 이상주의적 정치 전략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현실주의 노선의 중요성을 지적한 바 있다. 이제 버마 민주 진영은 민주주의로 향한 중대국면이 될 수도 있는 올 하반기 선거 국면을 앞두고 타협인가, 대결인가, 아니면 이 양자를 어떻게 혼합할 것인가, 전략적 선택을 앞에 두고 있다.

아세안의 불간섭주의 규범은 서구 열강으로부터의 오랜 식민주의 경험, 이에 따른 반(反)서구 정서와 무관하지 않다. 물론 국가권력은 이러한 반서구 정서를 정권안보 차원에서 이용했다. 그렇지만 버마문제를 두고 아세안 내부에 일정한 변화 기류가 감지되고 있듯이 국제사회의 압박과 동남아시아 시민사회의 성장은 불간섭주의 전통을 조금씩 허물어뜨리고 있다.

최근 한국-아세안 협력의 필요성이 일층 강조되고, 한국과 버마의 경제협력 논의가 진전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우리 시민사회는 ‘네거티브 방식’의 제재와 ‘포지티브 방식’의 개방 유도를 혼합한 전략의 가치에 대한 심사숙고와 함께 아시아 시민사회, 버마 민주세력과 더 많은 대화, 더 많은 연대를 해야 할 것이다.

  박은홍(성공회대 아시아NGO정보센터 소장)

* 이 글은 2010.6.25 서남포럼에 게시된 글입니다.

Posted by 영기홍
,

 

2010년 버마 군부 총선거에 대한 한국의 역할 모색


• 주제 : 2008년 제정된 버마 신헌법과 버마 총선거의 문제점 및 국제사회의 협력
• 발제 : 아웅 뚜 Aung Htoo (버마변호사 협의회 사무총장)
• 토론 : 장준영 박사(버마 전공), 김종철(변호사, 법무법인 소명)
• 일시 : 2010년 6월 17일(목), 오후 3시 ~ 6시
• 장소 :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11층)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웅 뚜 변호사의 발제요약>

2008년 신헌법에 기반한 총선은 받아들일 수 없다.

버마 군부는 2010년에 총선을 시행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2008년 헌법은 태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큰 결함을 가지고 있다. 먼저는 헌법이 이해 당사자들의 합의 없이 초안되었고, 둘째 인구의 69%가 헌법의 세부조항을 모르는 상태로 발표되었으며, 셋째 UN이 SLORC(SPDC의 전신)와 SPDC(국가평화발전위원회:군부단체)측이 저지른 수많은 반인권적 행위에 대해 헌법 445조로 면죄를 약속하고 있다. 그리고 2008년 헌법에 따르면 국가 기구의 구조가 왜곡된다는 점이다. 의회, 행정부, 군재판소, 사법재판소보다 상위에 국가안보위원회(NDSC: National Defense and Security Council)가 있어 모든 하위 조직을 지휘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현재의 가혹한 법률 하에서는 자유선거가 불가능하다.

출판간행물등록법(1992)은 중앙등록위원회라는 기구를 통해서 정부가 검열할 자료만을 사용할 수 있게 하고, 국가보안법(1975)은 '체제전복적'이라는 이유로 정당과 조직을 해산할 수 있다. 전자거래법(2004)은 인터넷과 핸드폰으로 오가는 정보의 내용이 국가에 해롭거나 법질서를 해치는 경우에는 처벌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처벌규정 505(B)조항은 대중이 공포를 느끼도록 하는 사람을 처벌할 수 있게 함으로써 지난 2007년 승려들이 일으킨 샤프란 혁명때 핵심활동가들을 처벌하는 규정으로 쓰였다.

현 선거제도는 소수민족을 전혀 대표해 주지 못한다.

현 선거제도인 일등당선제는 40%를 차지하는 버마의 다양한 소수민족을 제대로 대표할 수 없다. 비례대표제와 같은 선거제도나 쿼터제도가 도입되어야 한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올해 예정된 선거는 유사민간정권을 통해 군부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고 본다.


<장준영 박사의 토론>

NDSC의 경우 비상시국에 발동되는 기구로 아웅뚜 변호사의 말처럼 상시기구가 아니라고 이해하고 있다. 총 11석으로 구성된 NDSC는 대통령, 부통령(2), 국민의회 의장, 민족의회 의장, 군 총사령관, 군 부총사령관,국방장관, 외교장관, 내무장관, 국경장관 등 총 11인으로 구성되며, 이 가운데 6명이 군부인사이다.

헌법 제10장은 정당의 최고 목적을 다음의 3대 원칙 즉, "연방의 분열 금지, 국가연대의 분열금지와 통치권의 영속화"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정당해산권이 헌법재판소에 있는 한국과는 달리 선거위원회에 있다.

지금은 민주운동 진영은 90년에 있었던 선거에서 민주화 진영의 승리를 인정해 달라는 것이며, 그들은 이번 총선을 통해 그것이 무효화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그러나 점진적인 민주주의의 과정을 생각할 때 꼭 선거를 거부해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종철 변호사의 토론>

버마 군부는 민주주의로 가는 로드맵을 7단계로 계획하고 이 가운데 4단계를 헌법의 재정, 5단계를 신헌법을 바탕으로 총선을 실시하는 것이다. 헌법의 내용을 보자면 전국민주연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NLD)과 소수민족을 배제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
또한 국회의원 25%를 현역군인으로 구성하도록 하고 있고 헌법을 개정하기 위해서는 의회에서 75%의 국회의원의 찬성을 받도록 하고 있다. 즉, 군부의 영향력을 그대로 살려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질의>

1. 긴 민주화의 과정에서 장기적 계획이 있는가?
2. 총선을 거부하는 것이 최선일까?
3. 헌법을 개정하는 것은 정권교체 이후에 가능하지 않을까? 헌법을 바꾸고 선거를 하자는 것은 실효성이 없어보인다.
4. 선거자체가 갖는 학습성이 있으므로 선거를 통해 시민의식을 일깨우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5. 버마 내에 조직화된 시민이 존재하는가?


<아웅 뚜 변호사의 종합적 대답>

먼저는 이번 선거를 분명히 거부해야 한다. 선거거부가 현실성이 없어졌을때 우리가 할 일은 군부로 하여금 '정당의 3대 원칙'이 아닌 다른 원칙을 가진 정당이 활동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

우리는 6가지 전략을 가지고 있다.

1. 법치의 회복 2. 정치사범 사면운동 3. 사법부와 군법원의 독립 4. 시민사회를 성장시키기 위한 노력 5. 외국에서 NLD를 대화의 파트너로 인정하고 정당성을 인정한다는 싸인을 계속 보내줄 것 6. 버마가 실질적 연방정부로 세워지도록 할 것

버마 문제에 한국에 계신 분들이 이렇게 깊은 관심을 보여주어 감사하다.



Posted by 영기홍
,




지난 5월 10일 필리핀 대선에서 코라손 아키노 전대통령의 아들 아키노 3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번 선거는 여러 가지 면에서 1986년 대선 당시 마르코스 독재정권에 대항하여 민주후보로 나섰던 코라손 아키노 여사의 모습과 그녀를 지지하던 필리핀 국민들의 열정을 생각나게 한다. 당시 아키노 여사는 화려한 정치적 경륜을 바탕으로 필리핀 민주주의를 꽃피울 지도자로서가 아니라, 독재정권에 맞서다 암살당한 니노이 아키노의 유업을 물려받은 아내로서 민주세력의 구심점으로 등장한 것이었다. 대통령으로서 그녀의 업적은 보잘 것 없다. 진보세력을 제도권으로 통합시키는데 실패함으로써 개혁의 추진력을 상실하였고, 전통적 지배계층의 복귀를 막지 못함으로써 과두체제를 부활시켰다. 토지개혁법과 같은 민주적 개혁법안들은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으며, 사회적 불만의 고조는 8차례나 되는 군부쿠데타 시도의 빌미를 제공했다.

그러나 아키노 여사에 대한 필리핀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 그리고 필리핀 민주주의에 대한 그녀의 상징성은 퇴임과 더불어 더욱 빛났다. 아름다운 뒷모습을 남기고 떠나는 그녀의 의연한 모습에서 필리핀 국민들은 민주적 지도자의 진실한 모습을 발견했다. 비록 권력의 자리는 아닐지라도 국가지도자로서 그녀의 위상은 변함이 없었다. 2001년 부패하고 무능한 에스트라다 대통령을 현직에서 끌어 내릴 때에도, 2004년 대선에서 부정을 저지른 아로요 대통령에게 도덕적 책임을 물어 퇴임을 요구할 때에도 그녀는 항상 그 중심에 있었다. 이처럼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던 그녀가 지난해 8월 1일 오랜 지병으로 사망했다. 국민적 애도의 물결은 그녀의 상징색인 노란색으로 전국을 물들였다. 필리핀 민주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아키노 여사를 떠나보내는 필리핀 국민들의 아쉬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키노 여사가 떠난 지난해 8월은 다가올 대선을 앞두고 잠재후보들 사이에 선거경쟁이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때만 해도 아키노 3세는 후보로 거론조차 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키노 여사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그는 단숨에 유력한 대선후보로 부상했다. 아직 출마를 선언하기도 전에 각종 여론조사에서 80%에 달하는 지지율을 나타냈다. 대통령감으로서 아키노 3세의 자질과 능력은 선거 캠페인 내내 논란이 되었다. 그가 가진 지난 12년간의 정치경력은 그다지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되었다. 지주가문이자 전직대통령의 아들로서 자신의 고향에서 하원의원 3차례 당선된 것은 필리핀 정치현실에서 ‘땅 짚고 헤엄치기’보다 쉬운 일이다. 그리고 2007년 상원의원에 당선된 후 3년 동안 그는 이렇다 할 정치적 업적이나 지도력을 보여준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국민후보’로서 필리핀 민주주의와 코라손 아키노 여사의 상징인 노란색의 물결 속에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아키노 3세는 어머니 아키노 여사에게 향했던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적 열정을 담은 그릇이었다. 부부에 이어 모자로 이어지는 아키노 가문의 민주적 상징성은 또 다른 반민주적 지도자로 낙인찍힌 아로요 대통령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아로요 대통령은 재임기간 내내 부정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이란 오명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가족들의 끊임없는 이권개입 사건으로 부패한 지도자라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 주었다. 또한 임기 중 발생한 수많은 정치적 암살사건들은 인권을 유린하는 대통령이라는 의혹을 국내외 인권단체들로부터 지속적으로 받아 왔다. 아로요 대통령의 재임 중 사건들에 대한 진상조사와 처벌은 차기정권의 숙제임을 많은 국민들이 요구하고 있다. 이를 대비하여 아로요 대통령은 이번 선거에서 자신의 고향 하원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됨으로써 정치적 방어막을 세워 놓았다. 그리고 새로 소집될 제15대 의회에서 하원의장에 출마할 것이라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아로요 대통령의 권력에 대한 끝없는 집착과 이기적인 모습은 아키노 여사의 그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그의 아들 아키노 3세를 ‘국민후보’로 만들었던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필리핀 국민들의 끝없는 열정을 의심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열정을 제도적 틀 안에서 실현시키는 데는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는 필리핀 정치의 제도적 틀 자체가 과두체제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아키노 3세의 당선을 두고 『상상의 공동체』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진 베네딕 앤더슨은 그가 우연히 “과두정치가문의 아들이라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보여준 것이 없다”고 하면서, 이는 단지 “과두정치의 복귀”라고 평가했다. 앤더슨은 필리핀의 이러한 정치현실이 ‘공적 지식인’(public intellectual)의 부재에 기인한다고 역설했다. 즉 필리핀 국민들로 하여금 지혜롭게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도록 선도할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지식인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필리핀 국민들은 능력과 비전으로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적 열정을 실현시킬 지도자를 선택했다기보다는 단순히 불만스러운 현 정권과 대비되는 이미지를 찾아 결집한 것이었다. 어찌되었든 부모로부터 필리핀 민주주의의 상징성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아들 아키노가 많은 사람들의 염려를 불식시키고, 형식만이 아닌 실질적 민주주의에 목말라하는 필리핀 국민들의 열망을 진심으로 받들고 실천함으로써 어머니 아키노보다 더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는 대통령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김동엽 HK연구교수 (부산외국어대학교, 동남아지역원)




Posted by 영기홍
,
아피싯 민주당 정부가 상원의 중재와 국제사회의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 요구를 모두 일축하고 방콕시내 중앙부를 장악하였던 ‘레드 셔츠’를 유혈진압 하였다. 정부는 레드 셔츠를 테러리스트로 몰아가는 선전전을 계속하면서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지식인들을 포함해 표적이 되는 인물들에 대한 체포와 수색을 하고 있다. 이렇듯 공안정국을 만들면서 아피싯 정부는 평화의 도래를 공언하고 있지만 누구도 타이의 앞날을 낙관하지 않는다.

국가가 대화와 타협이 아닌 폭력을 수단으로 인민의 저항을 압살했을 때 당장 그것이 질서와 안정을 가져올 것처럼 비추어질지 몰라도 ‘패배한’ 인민은 새로운 저항을 준비한다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

이번 이른바 ‘레드 셔츠’의 저항을 두고 많은 얘기가 있을 수 있다. 전통에 대한 근대의 저항, 엘리트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민주주의의 저항, 도시-중산층 동맹에 대한 농촌-빈민층 동맹의 저항 등등.

주지하다시피 레드 셔츠의 주장은 1997년 헌정체제로의 회귀에서부터 조기 총선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스트럼이 폭 넓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점은 민주주의를 선거민주주의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전 수상 탁신을 몰아냈던 이른바 ‘옐로우 셔츠’는 선거를 민주주의의 필수요건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6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현 집권세력인 민주당 역시 쿠테타를 용인하고 선거 결과에 불복한 옐로우 셔츠를 후원하고 레드 셔츠의 조기총선 요구에 소극적으로 대응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선거를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번 유혈진압으로 2006년 9월 쿠테타 이후 ‘반쿠테타’와 ‘반탁신’으로 분열된 타이 시민사회진영의 골은 깊어질대로 깊어졌다. 반탁신운동으로부터 시작해서 군사 쿠테타를 지지하고 2007년 12월 선거 결과에 따른 친탁신세력의 재집권을 왕실과 군대의 힘에 의존하면서 피플파워당 내각을 ‘직접행동’으로 무너뜨린, 1973년 민주항쟁과 1976년과 1991년 쿠테타에 맞섰던 시민사회운동 지도자들의 생각은 무엇인가?

이들 반탁신 시민사회운동 지도자들의 ‘급진민주주의’는 세계화와 부도덕한 ‘자본독재’에 반대하기 위해서는 존왕주의자들과도 제휴할 수 있다는 다분히 편의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탁신계 피플파워당을 궁지로 몰기 위해 타이-국경지대에 위치해 있는 힌두사원 영유권 분쟁을 부추기는데도 앞장섰다. 이들의 편의주의적 발상이 국수주의를 선동하는 양상으로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타이의 위기는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단계에 있는 아시아 국가들에게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민주주의는 공정한 선거 결과에 승복하는 문화에서부터 시작된다. 독재하에서의 정치적 표현이 거리의 투쟁을 불가피하게 했다면 민주주의로의 전환은 1인 1표의 위력을 보여주게 된다. 그러나 존왕주의자들과 제휴한 시민사회진영의 ‘급진민주주의’는 선거에서 표현된 농촌 유권자들의 표를 무시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들은 한때 의회의 70%는 임명제, 나머지 30%는 선출제로 하자는 희한한 발상까지 하였다.

또한 ‘신정치’를 내세우는 이들의 ‘급진민주주의’는 이율배반적이다. 이들은 탁신 집권 시기에 타이 남부 무슬림지역에서 벌어진 인권침해 문제를 비난했지만 2006년 쿠테타 이후 들어선 군정 치하에서, 그리고 아피싯 민주당 치하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타이 남부지역폭력사태와 관련하여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특히 일부 시민사회진영 지도자들은 2006년 9월 쿠테타 직후 민주주의의 파수꾼 역할을 하겠다고 군정에 협력한 변을 늘어놓았지만 타이 남부 무슬림들을 위해 인권변호를 해주던 솜차이 변호사 실종문제조차 제대로 의제화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그저 1997년 헌법을 휴지조각으로 만든 군사정변 주모자들의 들러리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현재 왕실모독죄로 해외에 피신해 있는 쭐라롱껀대 짜이 응파껀 교수는 탁신정부의 독선, 인권침해를 비판하면서도 탁신의 타이애국당이 역대 어느 정당도 시도하지 않았던 정책정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음을 강조한 바 있다. 쿠테타를 지지한 시민사회운동진영을 신랄하게 비난한 그는 탁신의 포퓰리즘을 넘어설 수 있는 대안적 진보정당의 조직화를 역설해왔다. 예컨대 탁신을 총과 탱크가 아닌 투표로 심판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논지였다. 다수정으로서의 민주주의는 분명히 소수자에게 폭력적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선거에서 패한 소수자가 다음 선거에서 다수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는 점에서 최적의 정치제도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주목하자는 것이다.

현재의 타이 위기는 타이 사회가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기 위한 성장통인지도 모른다. 타이 사회는 탁신의 집권을 계기로 카리스마 있는 정치 지도자의 통치, 즉 막스 베버(Max Weber)의 ‘지도자 민주주의’를 처음으로 경험해보았다. 그러나 이번 레드 셔츠의 저항 과정에서 ‘지도자’ 탁신의 역할은 거의 없었다. 이제 레드 셔츠는 탁신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지도자를 찾아야 한다. 군부와 왕실과 자본에 의존하지 않는 명실상부한 대중정당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왕실모독죄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짜이 응파껀 교수의 꿈이다.

   

      박은홍(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 이 글은 2010.5.25 서남포럼에 실린 글입니다. 박은홍 교수는 국제연대위원회 아시아연대 분야 실행위원입니다.



Posted by 영기홍
,
[간담회후기]

태국 민주주의 위기로부터 아시아는 무엇을 배울 것 인가?
-왜 태국에서는 시위와 쿠데타가 반복되는가?


 

5월 13일을 기점으로 태국 정부군이 시위대에 강경진압을 시작하면서 다시 국제 뉴스의 전면을 채우고 있다. 이 날 참여연대 3층에서는 태국간담회가 열렸다.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인 성공회대 박은홍교수와 태국에 위치한 포럼아시아(Forum Asia)에서 일한 한국인권재단의 이성훈이사가 발제를 맡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박은홍교수의 발제>

박은홍교수의 발제는 민주주의 정치원리에서 본 태국 시위 세력의 특성을 분석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현 태국시위는 크게 두 세력이 대립하고 있다. 한 쪽은 반탁신세력이자 왕정을 지지하고 윤리정치를 내세우는 ‘노란셔츠’, 즉 민주주의민중연대(People’s Alliance for Democracy:PAD)이다. 다른 한 쪽은 친탁신, 1997년 헌법수호, 선출된 권력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붉은셔츠’, 즉 반독재민주연합전선(the United Front for Democracy Against Dictatorship:UDD)이다.
 
각 세력은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을까? ‘노란셔츠’는 탁신의 부패와 독선을 혐오하고 국왕의 권위를 숭상한다. 내부 구성원들의 정치적 뿌리를 보면 왕정주의자들과, 군사정권 아래에서 반독재운동을 하던 사람들과 학생운동지도부가 포함된 레디컬(radical) 그룹이 포함되어 있는 좌우동거의 성격을 띄고 있다. 반면 ‘붉은셔츠’는 친탁신세력이자 쿠테타를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 강하다. ‘붉은셔츠’내 특히 친탁신계에도 반독재.학생운동, 사회운동에 몸 담았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갖는 정치원리는 어떤 것인가? ‘노란셔츠’는 ‘좋은 쿠데타(good coup d’éㅇ호tat)라는 이름으로 선거나 민주주의로 정치적 문제가 해결이 안되면 쿠데타로 문제를 해결해도 좋다는 입장이다. 반면 ‘붉은셔츠’는 상대적으로 선거민주주의를 절대옹호하며 어떤 쿠데타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본다.
 
이러한 시민사회의 분열양상은 단순히 탁신이라는 정치지도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넘어, 근본적으로 ‘태국의 시민사회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지금 태국인들은 ‘최소의 민주주의, 최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합의가 필요한 시기이다. 판단하기로는 절차 민주주의에 대한 합의로부터 민주주의를 키워나가야 한다고 본다.
 
덧붙여 시위대를 분리시키고 있는 주제 중의 하나는 ‘지구화(세계화)’이다. 지구화를 찬성하는 탁신정권은 FTA를 추진하고 자유무역을 권장하는 일종의 지구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측면이 있다. 반면 반탁신세력 중에는 물질만능주의를 경계하는 불교문화 옹호론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탁신의 지구화 순응전략에 반대하는 입장을 갖고 있다.
 


<이성훈 이사의 발제>

인권위 이성훈 이사는 태국 사회의 4대 지배블록은 군부, 왕족, 자본가, 관료로 파악하였다. 이들 가운데서도 군부와 왕족변수가 현 상황을 가장 복잡하게 만드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시민사회에서 드러나는 입장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고 보았다. 시위과정에서 나타나는 국가폭력을 비판하고 생명권 존중의 입장을 표명하는 집단, 시위대 양쪽 진영에 대해 뚜렷이 양비론적인 집단, 그리고 어느 한 쪽에 속한 집단으로 보았다. 그리고 모든 정치적 혼란은 쿠데타를 인정하면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정치를 정치로 해결하지 못하고 사법부가 들어오는 상황은 좋지 않아 보인다는 지적을 하였다.
 
 
<토론>


현 사태의 분석을 넘어, 현실적인 연대와 선택의 문제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사회자인 박진영 팀장은 태국에서 온 소식에 의하면 노동운동과 시민운동까지도 모두 이분화되어 연대를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양쪽이 연대할 수 있는 중간 영역을 만들어 낼 수는 없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더불어 차은하 간사는 태국 상황에 대해서는 국가의 폭력이나 생명권과 같은 일차적인 문제만 다룰 수 있을 뿐, 실제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과는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답을 얻기 어려운 것 같다고 하였다.
 
박은홍교수는 다수결의 원리를 따르는 민주주의의 양면성을 지적했다. 절차로서의 민주주의가 수의 게임에 따른 다수의 지배이기에 분명히 폭력성이 있지만 소수가 다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기에 최적의 제도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바, '노란셔츠'의 선거 결과 불복종운동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안착을 어렵게 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시민사회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먼저 묻고 답을 얻어야 할 것이라는 말로 마무리하였다. 


Posted by 영기홍
,


지난 2006년 9월 19일 타이에서 일어난 쿠테타는 타이가 이제 민주주의를 차근 차근 뿌리내리고 있다고 믿고 있던 국제사회를 경악시켰다. 당시 쿠테타의 주역들은 탁신의 부패와 그의 분열주의 정치, 헌법상 보장된 독립기관에 대한 침해, 군주제에 대한 위협 등을 들어 자신들의 반(反)헌정적 행위를 정당화하였다. 손티 분야랏글린 육군총사령관을 의장으로 하는 <입헌군주제하의 민주개혁평의회>는 한때 ‘국민헌법’으로까지 격찬을 받던 1997년 헌법을 폐기하였다. 그해 10월 1일에 임시헌법이 공포, 시행되고 전 육군총사령관 수라윳 출라논 추밀원 의원이 과도 수상으로 취임했다.

쿠테타는 1992년 시민항쟁으로 훼손된 군의 자존심과 이들의 정치 개입을 일거에 회복시켰다. 또한 쿠테타를 통해 보수주의자들과 존왕주의자들은 권력 게임의 규칙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군부에 의해 수상직에 임명된 수라윳 장군은 국왕이 제시한 ‘자족경제’ 개념이 정부 경제정책의 기조가 될 것임을 선언하였는데, 이것은 기업가 정신의 제고를 강조하는 탁신의 경제정책과 대조를 이루었다. 특히 수라윳 과도정부는 군부 엘리트와 존왕주의자들로 채워졌다. 그들 중 많은 수가 과거 1991년 쿠테타로 집권한 군사정부에 연루되었던 인물들이었다.
  
결국 탁신정부의 와해를 바랬던 중산층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군부와 보수적 존왕주의자들에게 맡겼다. 그들은 탁신을 지지하고 또 그에게 표을 던진 빈민, 농민들이 아직 민주주의를 누릴만한 시민의식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보았다. 반탁신운동을 이끌었던 보수주의자들은 탁신퇴진운동을 남들이 낸 세금으로 혜택을 받고 그 대가로 탁신을 지지하고 있는 빈민들과의 계급전쟁으로 보았다. 이러한 반탁신운동을 통해 외견상 왕실은 전례없이 강력해졌고 군부와 관료들은 과거 그들이 누렸던 특권을 되찾게 되었다.
 
특히 왕실과 군의 관계가 보다 돈독해졌다. 2006년 쿠테타 이후 군과 왕실에 연을 맺고 있던 보수주의자들이 공직에 임명되었다. 군부가 임명한 과도의회는 2007년도 군 예산을 50% 증액시켰다. 2007년 신헌법에 따라 민정이양이 이루어졌지만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은 계속되었다.  2006년 9월 쿠데타를 국왕이 승인하자 인터넷 사이버 공간에 국왕을 비판하는 글이 오르기 시작했고, 정부당국은 이들에게 최고 15년형에 처해질 수 있는 왕실모독죄를 적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실을 비난하는 인터넷 사이트가 증가하자 정부당국은 이들 사이트 폐쇄에 나섰다. 2008년에는 저명한 원로 사회운동가인 술락 시와락이 왕실모독죄로 입건되었다. 왕립 출라롱껀대 짜이 응빠껀 교수는 왕실을 비난한 저서를 발간했다는 이유로 입건되자 영국으로 피신하였다.

일찍이 타이에서 사회운동과 정당정치가 만개했던 초유의 시기는 1973년 10월 14일 민주혁명과 그 결과로서의 1974년 헌정체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4년 헌정체제’는 군부를 비롯한 우익의 반발로 파국을 맞았다. 1992년 5월 시민항쟁을 계기로 ‘74년체제’의 개혁성을 발전시킨 새로운 개혁적 헌법을 구상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제정된 헌법이 1997년 헌법이고, 시민사회의 의사를 수렴한 가운데 제정되었다는 점에서 ‘국민헌법’으로까지 불렸다. 그리고 ‘97년체제’ 하에서 타이 최초의 정책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 탁신의 타이애국당이 집권할 수 있었다.

급기야 다양한 친서민 정책을 편 탁신의 포퓰리즘은 타이애국당이 민주헌정 사상 최초로 연립없이 단독 집권을 가능하게 했고, 동시에 ‘다수의 횡포’가 절정에 이르렀다. 결국 ‘다수의 횡포’에 따른 배제의 정치가 국가폭력과 인권침해 사례의 증가로 이어지자 일부 시민사회진영은 존왕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탁신 퇴진운동에 나섰다. 친서민정책을 통해 농촌에 절대적 지지기반을 갖고 있던 탁신은 이에 대해 의회해산과 선거로 맞섰다. 결국 수의 게임에 자신이 없는 반탁신진영은 쿠테타까지 ‘초대’하였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현 집권세력인 민주당은 쿠테타를 암묵적으로 지지하였다.  
 
탁신 지지세력으로 분류되는 ‘붉은 셔츠’는 오늘날 정국혼란의 근본 원인을 2006년 9월 쿠테타로 본다. 이들은 현 아피싯 정부가 군부로부터 독립적이라고 보고 있지 않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1997년 헌법의 복원을 주장하면서 수의 게임에 자신이 없는 현 아피싯 정부를 향해 의회해산과 총선실시를 압박하고 있다. 그러나 탁신을 부패한 독재자, 교활한 포퓰리스트로, 탁신을 지지하는 서민들을 포퓰리즘에 현혹된 집단으로 보는 지식인과 중산층 중심의 ‘노란 셔츠’의 저항 역시 만만치 않다.  

흔히 민주주의를 갈등의 제도화라고 표현한다. 타이 사례는 이러한 갈등의 제도화에 이르는 아시아 민주주의의 힘겨운 여정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박은홍(성공회대 아시아NGO정보센터 소장)


 

Posted by 영기홍
,

버마(미얀마) 속담에 "방금 판 우물에서는 깨끗한 물을 기대할 수 없다"는 표현이 있다. 첫 술에 배가 부를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일은 정해진 순서와 원리원칙이 따른다는 교훈이다. 버마 군부는 작년 국군의 날(3.27)을 맞아 이 속담을 언급하며 군부가 지향하는 "규율민주주의"도 정해진 중간단계가 성숙될 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국민에게 훈시했다. 우물의 '수질'이 마실 수 있을 정도로 정화되었다고 판단했는지 모르겠지만 군정 최고지도자는 금년 독립기념일(1.4)을 기해 금년 내 총선을 실시할 것이라고 천명했고, 마침내 지난 8일부터 5일에 걸쳐 선거와 관련된 5개의 법령을 국영언론을 통해 공표했다. 연방선거위원회법(Union Election Commission Law), 정당등록법(Political Parties Registration Law), 상원선거법(Amyotha Hluttaw Election Law), 하원선거법(Pyithu Hluttaw Election Law), 지방의회선거법(Region Hluttaw or State Hluttaw Election Law) 등이 그것인데, 이로서 구두로만 서약한 총선실시는 구체화의 수순을 밟는 첫 단계에 진입했다.

4월부터 군부는 군 수장의 처조카인 뮌스웨(Myint Swe) 제 5특별작전국장을 수장으로 하는 과도정부(caretaker)를 구성하여 본격적인 선거체제에 돌입할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기 시작했다. 출마지역까지 확정 받은 중앙부처 고위 관료는 해당직위 만료일을 6월로 통보받았고, 아웅산수찌(Aung San Suu Kyi)의 가택연금 해제 예상일이 11월이라는 정부 인사의 언급을 배경으로 했을 때 총선은 9월 말에서 10월경에 치러질 가능성이 높다. 숫자 11을 맹신하는 군정 지도자가 어떻게 점성술사의 점괘를 받드느냐에 따라 선거일은 결정될 것이다.

국내외 정당, 민주화운동집단과 이해관계를 가진 국제사회는 곧 선거법에 대한 평가와 비판이 쏟아냈다. 그 중 가장 이목을 끄는 대목은 아웅산수찌의 총선 입후보 여부, 선거위원회 구성의 적절성 등 주로 참여와 경쟁에 바탕을 둔 민주성의 원칙으로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복역 중인 자는 상하원 선거법 각 제 4장 7조 2항, 제 5장 10조 1항에 따라 총선에 입후보를 할 수 없고, 선거권도 없으며, 정당등록법 제 2장 10조 5항에 따라 정당원으로도 등록될 수 없다. 1989년 공표된 선거법과 달리 금번 선거법에서는 외국인에게만 국한되었던 입후보 및 선거권 제한기준이 직계 자손까지 확대되어 군부의 외국인혐오증(xenophobia)은 더욱 확대되었다. 독소조항은 외국인과 결혼한 버마 민주화의 상징인 아웅산수찌를 겨냥한 것이 틀림없지만 약 2,200명에 달하는 정치범도 총선 입후보에서 배제될 전망이어서 반군부세력의 공백이 한 층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번 총선을 통해 1990년 총선 결과는 유효하지 않을 전망이기 때문에 국민민주주의연합(NLD)이 국제사회에서 누렸던 정통성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전 대법원 부원장이자 군법무관을 지낸 우 떼잉쏘(U Thein Soe)를 위원장으로 하는 17인의 선거위원회는 퇴역 장교, 재판관, 교수, 대사 등 친정부 인사로만 구성되어 선거관리의 중립은 훼손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NLD는 선거에 참가하기 위해 정당등록을 할 것인지를 논의 중에 있는데, 3월 27일 공식 입장을 밝힐 것으로 알려졌다. NLD도 내부적으로 아웅산수찌 파벌과 띤우(Tin U)를 중심으로 하는 퇴역군인 파벌로 양분되어 있는데, 전자는 총선 참여를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오는 5월 7일이 총선을 위한 정당등록 만료일인데, NLD가 정당등록을 하더라도 군부의 정치탄압은 그 수위가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NLD의 내부결정은 존중되어야 마땅하지만 과거처럼 강경노선만을 고집할 경우 정치권에서 완전히 배제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의회민주주의시기(1948-1958, 1960-1962) 총리와 부총리를 역임했던 우 누(U Nu)와 우 쪼응에잉(U Kyaw Nyein)의 여식(女息)들이 창당한 민주당(Democratic Party)의 행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태국 내 망명정치가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민주당은 군부가 조직한 정당의 정권창출을 기정사실로 수용하지만 원내에 진입한 후 협상을 통해 연정을 수립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군부도 USDA를 단일정당으로 창당하지 않고, 공무원을 중심으로 한 전문가 집단, 기업인, 변호사, 의사 등 신흥엘리트 집단, 소장파 군 인사로 구성된 군부 집단 등으로 세분화하여 총선 이후 합당이나 연정의 단계를 거칠 것으로 보인다. 단일정당으로 총선에 참가하여 대패한 1990년 총선의 교훈이자 다당제에 입각하여 공정한 선거가 치러졌다는 평가를 위한 전략적 획책이기도 하다.

정치개혁이라는 우물을 파서 민주주의라는 정수(淨水)를 국민에게 공급하려한다면 양질의 식수를 제공할 입지를 선정하고 토양을 훼손시키지 않는 도구를 사용해야 할 것이다. 만약 용수가 넉넉하지 않은 땅이면 다른 장소를 물색해야 할 것이며, 식수가 나오지 않으면 그 이유를 역으로 조사하여 식수가 솟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군부가 우물을 파기 위해 선정한 터와 도구는 이미 오염되었고, 거기서 샘솟는 우물은 군부의 건강을 책임지지 못할 것이다. 몇 번에 걸친 정화를 하더라도 우물의 질은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은 자신의 건강을 해치울 샘물을 강압적으로라도 마셔야하는가? 아니면 우물이 정화될 도구나 기술, 새로운 터를 선정할 수 있도록 제안하여야 할 것인가? 썩은 물을 파는 현실에 수수방관하는 것이 더 서글프지 않은가.

장준영(부산외대 미얀마어과 강사)





Posted by 영기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