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에서의 인종주의와 헤게모니

6월 24일 아시아대안교류회(ARENA),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등이 주최한 국제워크샵 <아시아에서 인종과 헤게모니의 연계>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렸습니다.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인종이라는 개념이 헤게모니로서 아시아와 서구사회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한 국가 내에서도 어떤 비극을 만들었는지 접해봅니다. 국제연대위원회 인턴의 후기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해게모니로서 작용하는 인종주의

첫 번째 세션은 지난 1차 워크숍 내용에 대한 간략한 설명으로 시작되었다. 인종의 문제를 헤게모니(위계적, 패권적 권력)와 연관짓는 이야기였다. 권력관계에서의 인종문제, 비서구 사회인 아시아에서 인종문제를 적용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인종’이란 식민지 시대 서구에서 고안해낸 개념이다. 식민지시대는 끝났어도 비(非)노동 계급으로 대변되는 백인이 존재한다. 이들의 우월적 사고와 육체노동 계급으로 인식되는 유색인종에 대한 멸시의 시선은 식민지시대의 유산이다. 이러한 대비는 우리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인종이 헤게모니, 즉 권력관계 하에 놓여 있다는 말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서구 열강은 비서구인들을 차별하기 위해 인종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인종이 헤게모니의 지배하에 있다는 현대적 근거는 인종이 외부인들을 이해하는 기제로서 작동하는데 있다. 예를 들면 저개발 국가를 이해할 때 우리는 그 나라의 낮은 경제발전 수준을 두고 ‘흑인들은 원래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섣불리 판단한다는 것이다. 이는 서구적인 관점이다.
 
다음으로 말레이시아 인권운동가 Francis Loh의 기조연설이 있었다. Loh는 글로벌 사회에서 다민족(Multi-Ethnic)국가는 점점 보편적인 현상이 되어가는 추세라고 했다. 그러한 만큼 인종문제를 직시하고 고정관념을 타파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식민지 시대에는 인종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이용해서 다수종족을 ‘분할지배’했다. 분할지배는 소수 열강이 다수 종족을 지배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정당화 전략이다. 소수 열강은 인종에 따라 다수 종족을 나누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에 따른 고정관념을 무의식적으로 주입시켰다. Loh는 자국에서 활동할 당시 ‘말레이시아인은 게으르다’는 편견을 깨뜨리고 ‘그렇지 않다. 말레이시아인은 근면하며 국가에 충성할 수 있다’는 새로운 인식을 외국인에게 심어주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이민사회에서 답습되는 인종차별

두 번째 세션에서는 ‘서유럽의 이민과 인종주의의 경험: 아시아에서의 실천적 함의’라는 주제로 독일의 교육전문가 Silke Baer의 발표가 있었다. 그녀는 먼저 유럽에서의 이민 사회의 동향을 간략히 소개하고 이민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소개했다. 언론에서조차 백인이 아닌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즉, 유럽에서는 이민자를 배제하는 분위기가 강해 정부에서도 이 문제를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청소년들조차 부모의 선입견을 그대로 답습해 왜곡된 사고방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독일 청소년들은 우파 극단주의, 백인 우월주의 등의 왜곡된 Culture-Code에 노출되어있다.

교육전문가들은 ‘청소년 문화는 인종적 구분 없이 모든 국적의 청소년들이 향유할 수 있다’는 문화적 특성을 이용해 그들에게 다가갔다. 청소년들의 주 관심사인 힙합, 그래피티, 스케이트 보드 등을 이용해 인식 제고 교육을 하는 것이다. 독일 청소년들은 문화적 의식교육을 통해 반(反)인종 차별주의를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다. 차별이 아닌 연대의식을 배우며 서로를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정체성을 버리는 이민자 가족들

Francis Loh와 Silke Baer 두 분의 전문가에게 궁금한 것을 묻는 시간이 이어졌다. 먼저 Loh에게는 ‘말레이시아에서는 인종차별과 관련하여 이민자 문제의 실태가 어떠한지’를 묻는 질문이 있었다. Loh는 관리감독이 어려운 사각지대의 불법 이민자문제가 심각하다고 했다. 현지인을 밀어낼 정도로 상당수의 이민자들이 넘어오는데도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전혀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또 다른 참가자는 Silke Baer에게 이민자들이 자아 존중감, 정체성 형성에 어려움을 겪지는 않는지에 대해 질문했다. Silke Baer는 이민자들의 정체성 문제는 꽤 복잡한 양상을 보이는데 다수 이민자들은 자국의 정체성을 버리고 독일의 헤게모니를 스스로 택하려 한다고 답했다. 예를 들어 독일에 온 쿠르드족의 경우, 부모들이 자녀를 아랍학교보다는 독일학교에 보내고 싶어하며 자녀가 유럽사회에 동화되기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유럽 청소년들 사이에서 인종차별이 지배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이 있었다. 유럽 청소년들은 힙합, DJ 등을 통해 기존 어른세대로부터 오는 억압을 해소하기도 한다. 반면 억압의 잘못된 해소방법으로 내면에 무의식적인 외국인 혐오증을 싹틔우기도 한다고 Silke Baer는 지적했다. 유럽, 특히 독일에서는 세대 간 갈등이 심해서 젊은이들이 사회적으로 통합되기 어렵다고 한다. 독일 젊은이들은 본인이 소외되고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열등감의 탈출구로서 ‘극단적 백인 우월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백인 극단주의가 잘못된 사상이라고 인식하게 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에게는 ‘학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반인종주의 교육, 문화교류 경험, 다른 인종의 아이들과 한 팀을 이루게 하는 학습과정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인종적 사회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Silke Baer는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높은 위치를 차지하려고만 하고 서로 연대(Solidarity)를 이루려하지는 않는 것 같아 애석하다고 답변을 마쳤다.

종족갈등에 따른 스리랑카의 비극

세 번째 세션에서는 싱가폴 인류학자 Darini Rajasingham을 모시고 ‘스리랑카에서의 인종과 갈등’이라는 주제로 토론이 열렸다. 타밀인과 스밀인 간 종족 갈등의 근본원인은 그들의 종족적 정체성과 식민주의의 차별적 사고에 있다는 것이다. 두 집단은 생물학적 차이는 없으나 언어적 차이로 인해 문화-종교적으로 심하게 차이가 벌어졌다. 이 격차는 식민지 시대가 끝난 이후에도 좁혀지지 않았다. 배타적 정체성은 스리랑카가 근대국가로서 자리잡아가는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서로간의 다른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이 끊임없이 발발해온 것이다. 사실 타밀 반군에 대한 타격은 문제해결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소수민족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들을 이해하고 포용하려는 노력은 물론이고 권력의 분권화와 자치, 식민주의적 유산에서 탈피하려는 노력 등이 필요하다고 Darini Rajasingham은 힘주어 말했다.  

 ‘인종과 헤게모니’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였지만 각 분야 전문가들의 의견, 토론을 들으며 인종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하게 된 시간이었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인종이라는 개념, 그리고 그 기저에 깔린 패권주의적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오늘날에도 남아있는 식민지 시대의 유산, 그 인종주의적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다문화시대에 발맞추어 인종을 새롭게 정의하고 서로 연대하고 포용하는 일이다.

박서현 국제연대위원회 인턴

[참고] 국제워크샵<아시아에서 인종과 헤게모니의 연계>프로그램 내용
일시: 2009년 6월 24일 오전 9.30 - 오후 6.30
장소: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
공동주최 : 아시아대안교류회(아레나), 에버트 재단(FES),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Session I 
지구적, 지역적 맥락에서 “인종”을 정의하기 / 이대훈
(기조 발표) 인종이 아시아에서의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에 적당한 개념인가?  / Francis Loh
 
Session II 
서유럽의 이민과 인종주의의 경험: 아시아에서의 실천적 함의/ Silke Baer
토론: Francis Loh, 엄정민
 
Session III.
스리랑카에서의 인종과 갈등/ Darini Rajasingham
토론: Neng Magno, 허오영숙
 
Session IV.
서구 식민주의 및 경제 발전과 아시아의 인종주의 / Banajit Hussain
토론: Mohiuddin Ahmad, 마웅저
 
Special Session
인종주의 폭력: 대응방식과 실천적 훈련 프로그램 / Harald Weilnboe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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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노동조합으로부터 온 편지
이명박 대통령 한인공장 방문 유감

지난 3월 6일부터 8일까지 이명박 대통령 부부가 인도네시아를 국빈방문한지 열흘이 지난 뒤에 인도네시아독립노조연합(GSBI: Gabungan Serikat Buruh Indonesia) 위원장 얀띠(Emelia Yanti MD. Siahaan)로부터 이메일 편지를 한 통 받았다. 그 내용은 대통령 일행의 한국인 소유 공장 방문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는 것이었다.

이명박 대통령 부부는 3월 7일 오후에 한인투자 ‘최고의 기업들’ 중에 하나라며 보고르(Bogor)의 의류공장을 방문하였다. 한국인 소유의 이 공장은 2천여 명의 현지인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주문자상표부착방식으로 Le Coq Sportif를 비롯한 유명회사의 스포츠의류를 제작하여 유럽시장에 수출하는 기업이다. 그 공장에서 대통령 일행은 약 한 시간 반 동안 사장을 만나고 생산품을 소개받고 작업장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노동조합활동가 얀띠는 이 회사가 “결사의 자유 위반과 기진맥진한 작업조건에 있어서 최고의 기업”이라며 대통령의 방문에 유감을 표하는 성명서를 세계도처의 활동가들과 학자들에게 발송했다.

2003년에 이 회사는 노동조합이 결성되자 많은 수의 노동자들을 해고시켜서 국제소비자운동단체들로부터 항의서한을 받았던 기업이었다. 인도네시아 노사관계를 조사하고 있던 필자도 사건 발생 직후에 그 소식을 현지에서 소상하게 들은 바 있다. 당시에 필자가 만났던 해고자들의 진술에 따르면, 이 회사의 경영자는 노조가 결성되자 노조간부 4명에게 가택대기 처분을 내렸고 이에 항의하는 파업이 발생하자 168명을 집단 해고하였다. 노조원들은 사장과의 직접 협상, 해고자 원직복직, 인사과장 해고, 노동조합 인정 등 4개항을 요구하였으나, 공장장은 “사장과 만나자는 것은 대통령을 만나자는 것”이라는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해고자들은 지역노조의 도움을 받아 영문으로 항의성명서를 작성하여 해외각지로 발송했다. 이에 호응하여 깨끗한 옷 입기 캠페인(CCC; Clean Clothes Campaign), 노동권콘소시엄(Workers’ Rights Consortium) 등 유력한 국제소비자운동단체들이 홈페이지 전면에 이 기업 사례를 소개하고 항의서한을 보내는 운동을 전개하자 기업의 이미지 손상은 물론이고 한국인의 국제적 이미지까지 손상시킬 것이 우려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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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 인도네시아를 국빈방문중인 이명박 대통령은 한인 투자 의류업체를 방문했다. ⓒ뉴시스

그런데 이 회사의 상황은 “그 후 여러 해가 지났지만 나아진 것이 없다”고 얀띠는 주장하였다. 이 회사는 생산목표량을 채우지 못한 노동자는 그것을 완수할 때까지 잔업수당 없이 남아서 일해야 하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으며, 2007년에도 바이어들에게 작업조건에 관한 편지를 보냈다는 이유로 두 명의 노조간부를 해고한 바 있고, 회사에 존재하는 두 노조에 대한 편의제공을 달리하여 상대적으로 전투적인 노조를 차별하는 등의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얀띠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편지를 끝냈다. 제품의 질이 향상되고 수출 물량이 증대하여 그 기업이 찬사를 받는다면 그 제품을 생산해낸 현지 노동자들이 마땅히 칭송받아야 되지 않겠는가? 만약 그 기업이 결사의 자유를 비롯한 노동권을 침해하는 기업이라는 점을 알았더라도 한국의 대통령은 이 한국인 기업가를 여전히 자랑스러워하고 칭송했을까?  

이명박 대통령은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신아시아 외교’를 천명하였다. 아직 그 내용이 명료하지는 않지만, 현지 한인기업 방문 사례를 통하여 새로운 아시아 외교의 편향성을 우려할만한 징표를 읽어낼 수 있다. ‘추한 한국인’ 이미지가 제기되던 1990년대 중반이래로 지난 10여 년간 한국의 시민사회운동단체들은 한국인의 해외투자기업에서 벌어지는 인권침해실태를 모니터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덕분에 현지사회에 대하여 한국인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개선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고 국내적으로는 자원의 이용과 경제적 이익에만 골몰하지 말고 그곳에 사는 이웃들을 생각하자는 의식을 확산시켰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런 노력은 한국외교 일선에 공유되지 않았었나 보다. ‘국가의 편에서’ 현지의 유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외교상의 간단한 기술을 제안하자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잊지 말고 추가하라고 권하고 싶다. ‘기업의 편에서’ 방문 후보로 추천되는 그 현지 한인기업이 인권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는가? 이런 식의 질문이 ‘신아시아외교’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가 되기를 바란다.


전제성(열린전북 편집위원,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이 글은 [열린전북 5월호]에 기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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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인권 활동가 룩샨을 만나다
 

4월 21일 스리랑카 인권 활동가 룩샨 페르난도(Rukshan Fernando)가 지학순 정의평화상 수상차 한국에 왔다. 그는 짧은 일정에도 스리랑카의 내전상황을 알리기 위해 한국 시민단체들을 방문했다. 4월 24일 참여연대에 찾아온 륙산과 시민활동가들이 모여 조촐한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 참석한 국제연대위원회 자원활동가 장우식군의 글을 통해 그를 만나본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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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샨 페르난도(Rukshan Fernando)씨는 스리랑카의 Law & Society Trust라는 NGO 단체에서 ‘분쟁 중 인권문제’를 다루는 프로그램의 책임자이다. 2007년부터 이 단체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그는, 내전 중인 스리랑카의 인권유린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키고 현지의 인권유린 현황을 조사하는 역할을 했다. 또 계속적으로 인권운동가와 인권단체들을 연결시켜주며 인권운동가들에 대한 교육도 담당해왔다. 현재 그는 UN을 비롯한 국제기구들을 통해서 스리랑카의 인권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26년간 지속되고 있는 스리랑카의 내전은 국제적으로도 잘 알려지지 않은 내전이다. 1948년 외세로부터 독립한 이후, 다수 종족인 싱할리족이 소수 종족인 타밀족을 차별하여 스리랑카는 심각한 종족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지배권을 장악한 싱할리족은 인도 남부에서 이주해온 타밀족의 모든 참여의 기회를 박탈하였다.

1956년 싱할리족이 “오직 싱할리어”를 스리랑카의 공식언어로 할 것을 주장하면서 타밀족의 분노를 사게 된다. 이 분노는 곧 폭동으로 번지게 되었다. 일부 세력은 1983년 LTTE(타밀 타이거)라는 무장테러 조직을 결성하여 싱할리족의 소수족 차별에 맞서 저항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1천여 명의 타밀족이 학살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이후 타밀타이거와 싱할리 정부군의 충돌로 지금까지 약 10만 명이 사망하였다. 이 내전으로 수십만 명이 고향을 떠나 피난민이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 구금, 고문을 당하고 행방불명되거나 심지어 암살을 당하는 등 온갖 형태의 인권유린이 스리랑카에서 일상화되었다.
 
룩샨 페르난도씨는 현장에서 보고 들은 인권유린 사례를 모두 조사하여 국내외 국제기구에 이를 알리는 활동을 열정적으로 해왔다. 특히 그동안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난민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체포, 구금, 살해, 행방불명 등의 인권유린을 반대하는 운동을 해왔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싱할리족뿐만 아니라 타밀족들도 경계하는 것으로 룩샨 씨는 현재 두 종족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

그의 헌신적인 활동을 인정하여, 지학순 정의평화기금은 4월 21일 제12회 ‘지학순 정의평화상’ 시상식을 열어 그에게 상을 수여했다. 지학순 정의평화상은 민주화와 평화, 인권운동에 헌신한 고 지학순 주교(1921~93)의 뜻을 기려 1997년 제정된 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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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을 위해 잠시 한국을 방문한 룩샨 페르난도씨는 몇몇 시민단체 분들과 함께 참여연대를 방문하였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를 통해 스리랑카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비극적인 상황을 생생히 전해들을 수 있었다. 룩샨 페르난도씨에 의하면 비록 미미한 수준에 그칠지라도 UN의 인권 모니터링 작업과 타밀지역에 대한 인도적 물자지원은 절실하다고 한다. 정부군과 타밀타이거 사이의 분쟁으로 인해 수많은 난민들이 인권을 유린당하고 심지어 학살당하는 현실 때문이다.

또한 그는 UN의 인권기구들이 별다른 저항 없이 스리랑카 정부군의 요구에 따라 순순히 학살현장을 외면하고 국외로 도피한 점에 대해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의 NGO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은 그는 몇 가지 부탁의 말을 전했다. 대국민 캠페인들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스리랑카의 참상을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특히 종교 지도자들의 지지를 요청했다. 또한 언론의 기사화를 통해 스리랑카의 현지 상황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했다.

룩샨 자신이 스리랑카 내 주요 세력인 싱할리족임에도 불구하고 살해의 위협까지 감수하며 활동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는 가톨릭 신자로서의 믿음을 실천하기 위해서일 뿐이라고 답했다. 어떠한 이해관계 없이 순수한 인간애를 실천하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희망을 볼 수 있었다.

현재 스리랑카의 내전은 5월 18일 타밀반군 최고 지도자가 사살되면서 종식되었다. 그러나 타밀족 난민 문제 등 스리랑카에는 새로운 과제가 남게 되었다. 륙산의 또 다른 행보가 예상된다. 그에게 응원을 보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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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의 '5·18'은 끝나지 않았다


최근 버마 군사정부가 가택연금 상태에 있던 아웅산 수지를 투옥함에 따라 유엔(UN)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비난이 거세지고 있다. 그녀는 현재까지 13년 동안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다.

2007년 9월 이른바 '샤프론 혁명' 이후 버마 사회는 겉으로 너무나 고요하게 보였다. 그렇지만 샤프론(saffron) 즉, 황색의 가사(袈裟)를 입은 승려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시민들의 대대적인 저항과 그에 따른 수 많은 희생자를 낸 '샤프론 혁명' 이후에도 버마 사회 안에서는 테러 통치의 합법화를 꾀하는 군사정부에 저항하는 시민사회의 '조용한 투쟁'이 진행되었다.

특히 국제사회의 거센 비난에도 불구하고 버마 군사정부는 이른바 민주주의로 향한 '7단계 로드맵'에 따라 2008년에 신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쳐 이를 통과시키고 내년 2010년 총선을 예정해놓고 있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듯이 신헌법은 의석의 25%를 군부에 할당하도록 명시하고 있기에 사실상 군부의 특권을 제도화한 군정체제의 연장이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물론 현 군사정부는 이를 개발과 통합을 요하는 버마 상황을 고려한 '규율 민주주의'의 한 형태로 정당화하고 있다.

지난해 통과된 신헌법은 아웅산 수지를 비롯한 버마 안팎의 민주화세력을 배제한 채 만들어졌다. 이 때문에 작년 5월 신헌법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 때 민주화세력은 '반대' 기표 운동을 벌였다. 마침 국민투표를 앞두고 태풍으로 인한 재난이 전국을 뒤덮었는데도 군사정부는 어수선한 상황을 틈타 국민 투표를 강행하였다. 국제 인권단체들은 국민투표가 공포와 불공정한 절차 속에 치루어졌다고 비난하였다. 심지어 주민들 사이에서는 이미 찬성에 기표된 용지를 받았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군사정부는 유권자의 99%가 참여하여 92%가 신헌법을 찬성했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을 비롯한 민주진영은 신헌법에 대한 승인 여부, 다음 단계로 군부가 계획하고 있는 2010년 총선 참여 여부를 두고 고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제헌의회의 성격을 갖는 국민의회가 공정하게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신헌법 기초 작업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던 민족민주동맹을 비롯한 민주진영으로서는 내년 총선에 참여할 경우 그동안의 정치적 입장을 한번에 부정해버리는 꼴이 되는 것이고, 참여하지 않을 경우 선거 보이코트가 가져올 수 있는 정치적 손실을 감수해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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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5일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의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벌어진 미얀마 민주화 촉구 시위에 참여한 한 미얀마 난민이 그녀가 속한 단체의 깃발 앞에 서 있다. ⓒAP=뉴시스



이 같은 맥락에서 민족민주동맹은 10여년만에 열린 총회에서 내년 총선 전 모든 정치범에 대한 무조건적 석방, 2008년 신헌법에 대한 재검토, 국제사회 감시 하에서의 자유롭고 공정한 총선 등이 보장된다면 선거에 참여할 수 있음을 공표하였다. 이러한 결정은 민족민주동맹을 비롯한 버마 민주진영이 그동안 주장해온 '진정한 대화' 주장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런만큼 현재로서 군사정부가 민족민주동맹의 요구에 귀기울일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가택연금 해제 시한을 남겨놓고 아웅산 수지를 투옥한 것도 총선과 관련된 민족민주동맹의 메시지에 대한 무시 전략의 일환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지난 4월 6일 1988년 8월 8일 민주항쟁을 이끌었던 주역들 중심으로 구성된 '88세대 학생조직'은 군사정부에 대해 인권존중과 민주적 개혁을 요구하였다. 이들은 모든 정치범들의 석방, 진정한 정치적 대화 재개, 2008년 신헌법 재검토 등을 요구하는 민족민주동맹에 대한 지지도 공표하였다. 이는 버마 국내외에 있는 대다수 민주인사들의 공통된 의견이기도 하다.

올해 3월 27일 유엔인권이사회 역시 버마 국민들의 인권과 기본적 자유를 지속적으로 유린하는 버마 군사정부를 비난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유엔 인권특별보고관에 따르자면 현재 버마 안에는 16명의 언론인과 블로거들을 포함해 2100명의 정치범이 있다. 지난 해 10월과 12월 사이에는 약 400명의 정치범이 선고를 받았다. 600여 명의 정치범들은 그들 주거지에서 거리가 먼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정치범들은 고문 등 부당처우를 받는 것이 다반사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지난 3월 13일 망명한 버마 민주인사들 중심으로 구성된 정치범지원연합회(AAPP), 버마민주주의포럼(FDB) 등이 즉각적인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운동은 166개 버마 망명 조직과 국제연대조직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웅산 수지의 가택연금 시한 연장 여부가 결정되는 5월 말까지 88만8888명의 서명을 받아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 서명 명단은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에게 전달될 예정이다.

이렇듯 버마 정치범석방을 촉구하는 국제연대운동이 진행되는 가운데 '88세대 학생조직' 지도자로서 현재 옥중에 있는 민꼬나잉 의장이 2009년 광주인권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1989년에 군부에 의해 체포되어 15년형을 살고 2004년에 출옥한 바 있다. 출옥 당시 민꼬나잉은 "나는 감옥에 있는 동안 나의 여행이 어둡고 험하지만 결코 나 혼자가 아닌 나의 동지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고, 또 그러기에 이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고 토로하였다. 그러나 그는 '샤프론 혁명'의 배후자로 몰려 2008년에 다시 65년 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현재 버마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대열에 끼여 있다. 전체 인구의 75%가량이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유아사망율도 1000명당 76명이나 되고 상당 수의 어린이들이 영양실조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2007년 '샤프론 혁명' 역시 이러한 생존의 위기 속에서 표출된 아래로부터의 저항이었다. 이 대대적인 저항은 그간 진행된 '조용한 투쟁'의 집중적 분출이었다.

그러기에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 빈곤의 경제 속에서 아웅산 수지, 민꼬나잉을 위시한 민주인사들에 대한 정치적 박해를 중단하지 않고 2010년 총선을 치룰 경우 현 군사정부는 국민대중의 전면적인 도전을 또다시 받을 수 있다. 1988년 민주항쟁과 1990년 선거혁명, 그리고 2년 전 '샤프론 혁명'을 이끌어낸 버마 시민사회의 저력을 보더라도 이러한 전망은 충분하다.

여기에다가 한국 시민사회가 국제사회와 더불어 적극적인 관심과 연대를 보탤 때 버마에서 반세기 가까이 존재한 군정은 종식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버마에서 반복되고 있는 '5·18'을 끝내는 길이다.

박은홍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블로그에서는 이번 달 24일까지 버마 정치범 석방 촉구 서명 운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참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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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한국식으로 주면 된다? '관계'부터 고민하라
권력 관계를 넘어 발전 담론의 장으로

얼마 전 학과에서 국제개발 분야 전문가와의 대화 시간을 마련했다. 이 자리에서 리차드 마닝(Richard Manning) 전 경제협력기구 개발원조위원회 (OECD/DAC) 위원장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마닝 전 위원장은 유엔 새천년개발목표 (Millennium Development Goals, MDGs)의 기초를 형성한 논의의 중심에 있었으며, 한국의 OECD/DAC 가입 등 소위 '신흥 원조국 (emerging donors)'의 활동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왔다.

그는 1965년 영국 국제개발부(당시 국제개발청) 직원으로 시작해 2003년 DAC 위원장에 이르기까지, 직접 담당했던 개발 사업과 정책을 중심으로 지난 활동 경험을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여러 사례들을 관통하는 핵심 교훈은 현지의 자원과 지식을 존중하고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지 사정과 역사를 충분히 인지하고 반영하지 못한 원조 사업과 정책은 높은 비용과 적은 효과에 만성적으로 시달리게 된다는 것이다.

'현지' 중심으로의 사고 전환의 중요성을 실감한 것은 지난 2007년 여름, 필리핀에서 석사 논문 현장 연구를 할 때였다. 한국 정부가 차관을 지원한 마닐라 철도 사업으로 인해 발생한 강제 이주 문제를 연구하면서 필리핀 사회 구성원들을 다양하게 만나 개발원조 사업과 정책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경험을 했던 것이다.

철로변 주민들은 한국 정부가 주민들과 직접 연계하여 이주 문제 해결에 나서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고, 필리핀 시민사회단체들은 한국 정부가 개발원조 사업의 부정적 영향에 대해 책임있게 대응하기를 촉구했다. 필리핀 정부 관료들은 한국 정부의 지원이 여러 개발 사업에 필수적임을 인정하면서도 재원 부족과 외채 부담에 시달리고 있는 필리핀의 입장에서는 원조 관계에서 실질적인 협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음을 토로하기도 했다.

원조 관계에 대한 여러 목소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개발원조 전문가인 마닐라 대학 교수의 이야기였다. 필리핀 개발원조의 향방을 묻는 질문에 그는 "우리는 외부인들이 우리에게 어떤 것이 맞는 발전 방향이다, 아니다라고 제시하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필리핀 발전 방향은 필리핀 사람들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필리핀 정부가 무능하고 문제가 있다면 필리핀 국민들이 정부를 바로 잡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한국 정부의 개발원조 정책에 초점을 두고 연구를 진행하면서 늘 '우리가 무엇을 더 해줄 수 있을까'를 고민했기에, 이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지난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가장 주목 받는 국가 중 하나로 한국보다 경제 발전 정도가 훨씬 앞서 있었다. 이후 독재 등 정치적 혼란과 경기 침체를 겪으며 현재에 이르렀지만, 경제 규모 면에서 높아진 우리의 위상이 그들의 발전 문제에 대해서까지 우위를 점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우리의 발전 경험에서 배우고자 하는 부분이 있는 만큼 우리도 그들의 발전 경험과 문제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훈들은 국제개발 분야의 '지식과 권력 관계'에 대한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와 맥을 같이 한다. 비판적인 개발 논의, 소위 후기 개발 (post-development) 논의는 현재 추진되고 있는 발전 방식이 서구식 근대화를 바람직한 지향점으로 상정한 하나의 담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간주한다. 이에 따르면, 발전이란, '무엇을 발전으로 볼 것인가'라는 담론에 대한 지배권을 '누가' 갖고 있느냐에 좌우된다. 즉, 발전이 어떤 이상적인 상태를 의미한다면, 그것이 '누구에 의해' 정의된, 그리고 '누구를 위한' 발전인지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담론을 둘러싼 권력 관계는 발전 문제의 핵심 사안이다.

권력 관계의 관점에서 볼 때, 국제 개발원조 분야는 다자·양자 개발원조기구 (이후 국제원조기구)의 이해 및 조직적 생존 문제를 축으로 운영되는 하나의 '산업'에 비유된다. 이 속에서 개발 사업 및 정책 집행자들은 현장에서 사람들이 진정 필요로 하는 것과 그들이 그 필요를 충족하는 데 가장 적합하게 생각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다고 (혹은 더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을 고수하는 것으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이러한 기술·관료주의는 국제원조기구와 개발도상국 정부 간 관계에도 만연해 있었다. 국제원조기구들은 '정치, 경제적 제도 변화'를 원조의 조건(conditionality)으로 제시하여 개발도상국 정부가 이를 지키도록 강제하는 방식으로 개발도상국의 거시 발전 틀을 정하는 데 강력하게 개입해왔다. 1980년대 세계은행 (World Bank) 및 국제통화기금 (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이 추진한 구조조정 (structural adjustment) 프로그램들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이러한 개입주의가 한 국가의 자주권을 침해하고 해당 기구들의 이익을 직·간접적으로 충족시키는 소위 '신식민주의(neo-colonialism)'와 다르지 않다는 비판이 점차 제기되기 시작했다. 또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큰 발전 효과 없이 오히려 개발도상국의 정치, 사회, 경제적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평가에 따라 원조 효과성(aid effectiveness) 제고 논의가 부각되면서, 그 일환으로 새로운 원조 관계도 함께 모색되기 시작했다. 이에, 개발도상국 정부가 바람직한 국가 발전 계획을 제시하면 국제원조기구가 이를 지원해 주는 방식이 새롭게 제안되었다. 이러한 변화들이 최근 양자간 개발원조의 기조 담론을 형성한 파리선언(Paris Declaration)에서 개발도상국의 오너십(ownership), 양자간 파트너십 (partnership) 등의 핵심 안건으로 반영된 것이다.

'지식과 권력'을 중심으로 형성된 복잡한 원조 관계에 대한 성찰은 최근 OECD/DAC 가입을 앞두고 정부, 학계 및 시민사회에서 활발하게 이뤄지는 공적개발원조 (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ODA) 논의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OECD/DAC 중심으로 형성된 선진 체제와 담론에 맞춰 한국 ODA 정책과 제도를 정비하는 것은 분명 중요한 과제다. 그러나 OECD/DAC 가입이 소위 '선진 원조국 클럽'에 가입하는 상징으로서 더욱 조명된다면, 이는 자칫 파리선언의 핵심 안건인 '수요자 중심'으로의 원조관계 변화를 놓치는 격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최근의 논의가 우리의 원조 철학, 우리의 원조 제도와 정책뿐 아니라 상호 간의 '원조 관계 만들기'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궁극적으로 원조 관계가 지향해야 할 바는 '발전이란 무엇인가'를 함께 논의할 수 있는 담론의 장을 여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기존의 정치·외교적 관계를 토대로 하는 ODA가 이처럼 동등하고 이상적인 관계 형성을 모색하는 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면, 특히 시민사회의 논의는 다소 과감하게 ODA 논의의 틀을 벗어나 발전 담론의 장을 형성하는 데 집중해볼 것을 권하고 싶다. 그럼으로써, 그들과 우리가 함께 생각하는 발전의 방향은 무엇인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폭넓은 성찰과 깊이 있는 모색이 이뤄지기를 기대해본다.


(최나래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개발학 박사 과정)


 
2009년 광주국제평화포럼
한국 ODA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한 시민사회의 도전:
모니터링, 시민교육 그리고 입법 활동

행사 일정
○ 일시: 2009년 5월 16일(토) ~ 17일(일)
○ 장소: 518기념문화관 민주홀
○ 주최: 국제연대위원회

세부 프로그램

2009년 5월 16일(토)


10:30∼12:00 세션 1 국제사회의 ODA동향과 시민사회의 참여
발제 ① 국제 ODA 메카니즘과 시민사회의 역할: Antonio Tujan Jr. (Reality of Aid 위원장)
발제 ② 아시아 시민사회 ODA 감시활동 -인도네시아 CGI 중심으로: Donatus Klaudius Marut (International NGO Forum on Indonesian Development 사무처장)

13:30∼17:00 세션 II 국가 별 시민사회의 모니터링 주요 사례
발제 ① 일본-인도네시아 ODA 감시활동 사례: Koshida Kiyokazu (Network for Indonesian Democracy, Japan 멤버)
발제 ② 메콩-WATCH 감시 활동 사례: Premrudee Daoroung (Towards Ecological recovery and Regional Alliance 공동대표)
발제 ③ 한국의 ODA 정책 감시 활동 사례: 한재광 (ODA Watch 실행위원)

2009년 5월 17일(일)

10:00∼12:00 세션 III ODA 시민교육 현황과 과제
사회: 이태주 (ODA Watch 대표)

발제 ① 한국의 ODA 시민교육 현황과 과제: 이상백 (한국국제협력단 민간협력팀)
발제 ② 영국의 세계시민교육 정책과 프로그램: DFID 와 OXFAM를 중심으로: 박선영 (동서대학교 교수)
발제 ③ 외국 ODA 시민교육 사례를 통해 본 한국의 시민교육의 방향: 송진호 (한국YMCA전국연맹 기획실장)

13:00∼17:00 세션 IV 한국 대외원조기본법에 대한 시민사회의 역할과 과제
시민사회단체연대회, 서울환경운동연합, 에너지정치센터, 해외원조단체협의회,
ODA Watch, 한국YMCA전국연맹, 참여연대 외 ODA 관련 분야 연구자, 활동가과 함께 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블로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문의: 국제연대위원회 차은하 간사, 02-723-5051, silverway@pspd.org
- http://blog.peoplepower21.org/Internatio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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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사태에서 나타난 시민사회의 갈등

얼마 전 친 탁신 세력 "붉은 셔츠"의 시위로 방콕 일대에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군 진압작전 중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공식 발표에 따르면 2명이 사망하고 100명이 훨씬 넘는 인명이 부상 당했다.

이 과정에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태국 시민사회의 입장이다. 지금까지 태국에서 군과 민간인이 충돌하는 수 차례의 유혈 사태가 발생할 때마다 시민사회는 한목소리로 군과 정부에 책임을 추궁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그 주된 이유는 시민사회의 중요 세력들이 이미 "붉은 셔츠"로 불리는 독재저항 민주주의 연합전선(UDD)과 "노란 셔츠" 부대 국민민주주의연대(PAD)로 나뉘어져 각각 제편들기 정치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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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친 탁신 세력 "붉은 셔츠"의 시위로 방콕 일대에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군 진압작전 중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AP=뉴시스

PAD는 2005년 초 언론재벌 쏜티 림텅꾼이 중심이 되어 만든 반 탁신 연합세력이다. PAD의 1, 2기 지도부에는 다양한 시민사회 운동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전국공기업노동조합 사무총장 쏨싹 꼬싸이쑥, 민주주의진흥위원회 위원장 피폽 통차이, 빈민회의 고문 쏨끼얏 퐁파이분, 태국전력공사 노조위원장 씨리차이 마이응암, 태국철도공사 노조 임원인 싸윗 깨우완, 여성과 헌법 대표 말리랏 깨우까 등이다. 또 1992년 5월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싸란유 웡끄라짱 같은 인물도 있다. 이외에도 전국노동조합연맹, 불교단체 싼띠아쏙, 변호사, 연예인, 청소년그룹 등이 PAD에 참여하고 있다.

UDD는 2006년 9월 쿠데타 발생 후 이에 반대해서 생겨난 친 탁신 지지 세력이다. UDD에도 시민사회 운동가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은 1992년 5월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학생 대표 짜뚜펀 프롬판, 1976년 쿠데타 후 끝까지 투쟁한 '카오빠 (산에 들어가서 끝까지 투쟁했던 시위대 그룹)' 중 일인인 웽 또찌라깐, '독재가 싫은 토요일의 사람들(끌룸콘완싸오 마이아오파뎃깐)' 창설자이자 대변인 위푸탈랭 팟타나푸미타이등이 있다. 북부와 동북부의 농민단체, 방콕의 노동자·택시기사단체 등도 주요세력으로 참여하고 있다.

PAD를 지지하는 시민사회운동세력들은 탁신 정권을 농촌 유권자들의 무지를 악용한 부패한 포퓰리즘 정권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포퓰리즘 정책에 매수당한 농민과 빈자들은 민주주의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투표권을 제한해야 하며, 의회의 70%는 임명직으로 하고 30%만 선출직으로 구성할 것을 주장한다.

이들은 탁신의 부정부패와 마약과의 전쟁이나 남부 무슬림 분리주의 운동을 무력진압 함으로써 발생한 인권유린 사태를 강력하게 비난했지만, 2006년 9월 쿠데타를 지지했고 2007년 개악된 헌법을 만드는 데도 앞장섰다. 그 주요 내용은 임명상원제도의 일부 부활, 정당정치와 의회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관료체제와 사법부의 권한을 강화시키는 등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것들이다. 개악된 헌법으로 치러진 2008년 선거 후 탁신이 지지한 팔랑쁘라차촌 당(PPP)이 압승을 거둔 후에는 막무가내식으로 정부청사와 수완나품 국제공항을 점거한 채, 군부와 사법부 지지를 받아 두 명의 총리를 쫓아내기도 했다.

대의민주주의 원리를 부정하고 법치를 무시하는 "탱크 리버럴"이라고 비난받기도 하는 이들은 주로 군부, 관료, 방콕을 중심으로 한 중산층, 왕정지지 기득권세력들과 이해를 같이한다.

UDD를 지지하는 시민사회운동세력들은 포퓰리즘 정책을 통해서 농민과 빈자를 보호하고 엘리트 민주주의, 낡은 관료주의 세력을 청산하고 일부 특권층이 아닌 모든 국민이 주인이 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을 주장한다. 이들은 국왕을 정치적으로 선점해 버린 PAD에 의해 공화정 추진세력으로 몰리고 있다.

표방하는 가치만으로 보면 UDD를 지지하는 시민사회운동세력들이 더 민주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들은 탁신이 포퓰리즘 정책을 추진하면서 저지른 인권유린과 사회운동탄압 사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부정부패에 대해서도 그것은 태국정치에 항상 있었던 것이고, 모든 정치인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탁신만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는 옹색한 입장을 보인다. 이들은 북부와 동북부 농민과 도시 빈민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PAD와 UDD에 속해 있는 각각의 시민사회운동세력들은 이번 유혈사태뿐 아니라 이후 부각되고 있는 중요한 정치적 이슈들에 대해서도 상이한 입장을 보인다. 이들은 정치개혁, 헌법개정, 새로운 총선 실시 문제 등에 대해 정파적 이해관계에 묶여 설득력 있는 독자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시민사회운동세력의 분열과 정치화는 태국 민주주의의 발전의 한계성을 노출시키고 있다고 하겠다.

김홍구 부산외대 태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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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물 축제'에 초대합니다.

 

버마의 새해는 4월 둘째 주라고 합니다.
버마인들에게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의 물 축제를 통해 새해를 맞이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오는 일요일, 한국에서도 버마인들과 함께 하는 물 축제인 띤잔(Thingyan) 축제가 열릴 예정입니다. 한국의 많은 시민들도 함께 참여하셔서 즐겁고 뜻깊은 시간을 함께해 보십시오.

 

        <버마 물 축제 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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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시 : 2009년 4월 19일(일요일)
           낮12시 부터 오후 5시까지
장 소  : 석왕사


교통편 : 1호선 인천 방향 전차 타고 소사역에서 하차 - 소사역 1번 출입구에서 9, 60, 95번 버스를 타시고 - (소사역 - 성가병원 입구 - 석왕사) 석왕사 정류장에서 하차


 

버마의 민간 신앙에 따르면 따자민 (Thagyarmin) 이라는 천왕이 새해 전 3일 동안 인간 세계를 방문한다고 합니다. 버마인들이 믿는 하늘의 왕인 ‘따자민’은 신화 속 인물로서 불교뿐만 아니라 버마인들의 일상에도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는 새해에 내려와서 사람들에게 종교와 영혼의 의무에 대해 일깨워줌으로써 인간을 돕고 지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버마인들에게 새해는 지난 한 해 동안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고 앞으로의 더 나은 인생을 기대하는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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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화. 그러나 그 정신은 불교이다.


새해 전날까지 3일 동안 치러지는 버마 물 축제는 멋진 이야기들과 흥겨운 음악, 그리고 민간 신앙으로 넘쳐 나지만 그 정신은 불교의 것입니다. 따자민은 인간들이 부처의 뜻에 따라 살고 있는지를 감독하기 위해 인간 세계에 내려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만약 그동안 사람들이 부처의 뜻에 따르기를 게을리했다면, 이 시기에 그들은 자신의 죄를 속죄하고 선행을 합니다. 더불어 새해에는 더 잘 살 수 있도록 소원도 빌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바삐 움직이면서 보시를 하고 선행을 베풉니다. 보시할 돈이 없는 사람들도 노인들에게 물을 끼얹어주고 몸을 닦아 주거나 샴푸로 머리를 감겨 주는 등 봉사를 행합니다.


물 축제에 담겨진 정신

물 축제 기간에 버마인들은 깨끗한 한 해를 소망하는 의미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향기 나는 물을 뿌리며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재미있게 노는 것만이 다는 아니지요. 노인들에게 봉사를 하는 등 신성한 선행의 의무도 다하면서 더 완전하고 풍성한 기쁨을 누리는 것이 물 축제에 담긴 진정한 정신입니다.  물 축제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선행을 베풀고자 절이나 수도원을 찾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바닥을 쓸고 수도원 건물을 청소하고 승려들이 먹을 보시 음식을 만드는 등의 봉사활동을 자진해서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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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행사


축제 기간 동안 버마의 길거리에서는 대규모의 수련 행사를 알리는 천막이 곳곳에 세워집니다. 수련 행사는 버마에서 가장 중요한 새해 행사 중 하나입니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현금이나 현금에 준하는 것을 기부하는데 돈이 없으면 봉사를 해도 됩니다. 이렇게 수련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봉사자들과 단체들이 있기 때문에 불교를 믿는 가정의 자녀가 수련을 받지 않은 채로 성인이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련의식

 

수련의식은 불교를 믿는 가족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수련의식 기간동안 남자 아이들은 수도원에서 일주일 이상 머물게 되는데 머리를 삭발하고 승려복을 입고서 보시 그릇을 들고 돌아다니면서 수련활동을 합니다. 부모들은 자기 아들을 수련 의식에 보내는 것을 큰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식을 보내는 것은 자신들의 육신과 피를 부처님의 법 안으로 보내는 것과 같기 때문이지요. 아들이 없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자식을 대신 보내어 이 중요한 의식을 치르기도 합니다. 이 의식은 자신을 부처의 법 안으로 던지는 행위이기 때문에 수련을 받는 본인에게도 매우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 수련자는 잠시 동안이지만 이 기간만큼은 세속의 기쁨을 포기하고 금욕과 절제의 삶을 살게 됩니다. 수련을 받지 않은 자는 결코 완전한 인생을 살 수 없다고 믿는 버마인들은 자식을 수련시키는 것은 부모의 당연한 의무라고 말합니다.

함께 해요 :)

오는 4월 19일 일요일 낮 12시부터 5시까지 석왕사 앞으로 오시면 버마인들의 물 축제를 여러분도 즐기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 친구, 연인과 함께 서로 물을 뿌려주며 시원한 물줄기에 지난 해의 묵은 것들을 날려보내고 다시금 새로운 마음으로 2009년을 소망해보는 건 어떨까요?

신나는 음악과 춤, 시원한 물줄기, 그리고 버마의 독특한 전통문화도 더불어 체험할 수 있는 띤잔 축제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정리: 박서현 (국제연대위원회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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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ene Fernandez- 말레이시아, 인권 운동가, (1946- )

전 지구적 차원에서 볼 때, 말레이시아처럼 무슬림들로 하여금 꾸란(Qur'an)과 하디쓰(Hadith)의 규범과 원칙을 따르게 하고자 강권적인 권력을 행사한 나라는 그리 흔치 않다. 말레이시아는 다소 독특한 방식으로 이슬람을 경험한 나라이다. 1957년 영국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한 이후 말레이시아에서의 ‘이슬람’은 정치적, 문화적 맥락에서 권력관계를 재편할 수 있는 주요 대안으로 인식되었으며, 특히 1970년대 초반 이슬람부흥운동의 전개 이후에는 말레이시아 정치, 문화의 핵심 이데올로기이자 정치적 상징으로 부상하였다.
 

말레이시아의 헌법에는 국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면 정부 당국이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얼마든지 제한할 수 있다는 법규정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국내 치안법 (ISA: Internal Secuirty Act)이다. 이는 재판 없이도 구금할 수 있는 법조항으로써,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는 경찰법, 공무원들의 활동을 제한하는 공무원 비밀법, 인쇄출판의 자유를 구속하는 인쇄출판법 등 기본적으로 시민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제약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소 80명 이상의 시민들이 이슬람 급진주의 단체와 관련이 있거나 회원이라는 이유로 기소되었으며 20명 이상의 구류 명령이 갱신되었고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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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ene Fernandez는 극빈층, 이주노동자, 국내 노동자, 매춘부들, 에이즈 환자들의 권리 향상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권운동가이다. 비록 “악의적인 뉴스 날조”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아 1년간의 수감생활을 겪었지만 그녀는 지금도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아이린은 1946년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났다. 그녀에겐 세 명의 자녀가 있고, 그 외에도 돌보는 몇 명의 아이들이 있다. 그녀의 인권 활동은 고등학교 교사 재임시절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일어난 ‘청년 기독교 노동자 운동(Young Christian Workers Movement)'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1970년에는 교사 생활을 접고 상근 청년 노동자들을 위한 상근 조직책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1972년부터 75년까지 YCW의 말레이시아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YCW의 국제위원회의 회원으로서 73년부터 75년까지 활동하였다.

1976년, 아이린은 ‘페낭 소비자 협회(Consumers Association of Penang-CAP45)'에 가입하여 소비자 교육 관련 업무를 맡았고, 중학교 학생들에게 기본 필수품과 소비자 안전, 환경보호에 관한 교육 등을 담당할 수 있는 소비자 클럽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또한 농촌 여성들을 위한 소비자 프로그램도 시작했는데, 이것은 모유 먹이기 운동과 네슬레(Nestle) 불매 운동과도 관련이 있었다. 1986년에는 여성 폭력 근절에 관한 캠페인을 주도하였다. 이 캠페인은 많은 여성 단체들이 생겨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중 하나는 “모든 여성들의 행동(All Women's Action Society)"이라는 단체인데, 아이린은 5년 동안 이 단체의 회장을 맡았으며 ‘모든 여성들의 행동’은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여성단체로 성장하였다. ‘가정폭력 법’, ‘성추행 법령’ 그리고 성폭행에 관한 법안의 개정은 ‘모든 여성들의 행동’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같은 해에 아이린은 ‘아시아 태평양 여성 법과 발전(Asia Pacific Women Law and Dvelopment-APWLD46)'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이 지역 단체는 여성 변호사와 여성 운동가를 모아 동아시아 지역의 여성관련법을 짚어보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그녀는 10년 이상 아시아 태평양의 여성법 발전분야에서 리더로서 활동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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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부터는 그녀는 ‘농약(살충제) 활동 네트워크(Pesticide Action Network)47'의 의장직을 맡아왔는데, 농약 사용을 근절하고 유전자변형 생물 금지와 인류건강 그리고 종자의 통제 회복을 지향하는 캠페인을 펼치면서 지속 가능한 농업발전을 위해서 노력해왔다. 아이린은 또한 1991년에 쿠알룸프에서 지금도 운영 중인 ’테나가니타 단체(Tenaganita organization)'을 설립하였다. 테나가니타 단체는 300만 명이 넘는 말레이시아의 이주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설립된 단체이다. 많은 이주 노동자들이 말레이시아 정부의 이주노동자 정책 선전에 의해 밀려 들어왔다. 이들은 현재 말레이시아의 경제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주노동자들은 원하지 않는 핍박과 탄압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테나가니타’는 15명의 스태프와 150명의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되어있는데, 이러한 문제들을 기록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또한 HIV에 감염된 매춘부 여성들을 위한 준 거주지를 제공하고 이주자들과 서민 노동자들의 건강, 교육, 인권 등에 관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이웃 국가들의 단체들과 노동자들을 위한 법률, 보건 지식과 사전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협력하고 있다. 2005년에 ‘테나가니타’는 논란이 되고 있는 말레이시아 정부의 100만 명 이상의 이주노동자 추방 계획을 부각시켰다.


1995년 아이린은 이주 노동자들의 학대에 관한 보고서를 발행하였다. 그녀는 영양실조, 신체적 성적 학대 그리고 노동자들이 겪는 끔찍한 환경 등으로 보고서 내용을 분류했고 많은 노동자들이 생을 마감하는 이주자 수용소 현장을 고발하였다. 이주 노동자에 관한 연구에서는 300명 정도의 이주노동자들과의 인터뷰를 포함시켰다. 이에 당황한 정부는 수용소에서 여러 가지 의학적인 상황으로 인하여 사망했다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1996년 3월 아이린은 악의적인 거짓기사를 발행한 죄로 체포되어 기소되었다. 그녀의 재판은 말레이시아 역사상 가장 긴 재판으로 기록되었는데, 그녀에게 도움을 되어야 할 많은 증인들이 추방당하였다. 2003년에결 국 그녀는 유죄판결을 받고 1년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이후 그녀는 300번도 넘게 법정에 서게 된다. 그녀는 현재 보석으로 풀려 나와 항소를 진행 중이다. 보석으로 풀려 나왔지만, 그녀의 여권은 압수당하고 그녀의 선거 출마는 금지되었다. 재판기간 동안, 테나가니타는 정부의 관리들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고 불시 단속을 당하였다. 그리고 HIV에 감염된 여성들과 아이들을 위한 준 거주처 기금은 모두 정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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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린은 협박과 학대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그녀의 활동제한과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희석을 거부하고 나섰다. 그녀는 절대로 폭력을 사용한 적도 옹호한 적도 없고 언제나 개방적이고 법의 테두리 내에서 활동해 왔다. 그녀는 2005년 여성과 이주민, 가난한 근로자에 대한 폭력에 용기 있게 맞선 것에 대해 The Right Livelihood Award를 받았다.


http://www.commondreams,org/archive/2008/01/04/6173/

http://en.wikipedia.org/wiki/Irene_Fernandez

http://www.google.com/search?hl=en&um=1&sa=1&q=Irene+Fernandez&btnmeta%3Dsearch%3Dsearch=Search+the+Web

정리: 이경철 (국제연대위원회 자원활동가)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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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이상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만 얘기할 순 없다

지난 2월 23일 아시아에서 개최되는 많은 국제 회의중 유일하게 아시아 애드버커시(advocacy) 활동가들이 조직해서 만든 모임인 Solidarity For Asian People's Adcocacy(이하 SAPA)에 참석했다. 2008년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는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초국가적인 이슈를 국내에 소개하고 티베트의 평화 및 버마 민주화를 위한 연대 활동을 했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와 한국의 지리적 거리만큼, 뜨거웠던 한국의 촛불 거리에서 아시아는 아직 먼 나라 이야기였다. 아시아 활동가들을 만난다면 그 거리감을 좁힐 방법들을 찾을 수 있을까? 한국 사회에서 아시아 시민사회의 연대활동을 직접적으로 접하기는 쉽지 않은지라 기대감을 가지고 방콕행 비행기에 올랐다.

SAPA 는 2006년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 등 30개의 동남아시아 시민사회·인권 애드버커시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당시 동남아시아는 아세안(ASEAN)을 중심으로 국가간 협력과 교류가 확대되어 가는 시기였다. 이러한 정부간 교류가 활발해지자 아세안 가입 국가들의 시민사회들은 더욱 활발한 연대와 협력을 모색하게 되었다. 따라서 아세안지역 인권, 노동, 평화, 이주노동 분야에서 애드버커시 활동을 하는 활동가들은 자발적으로 모여 정보를 교류하면서 스스로의 역량을 키우는 자리로 네트워크를 활용했다.

현재 SAPA는 동북아시아를 포함해 아시아지역 60여개 비정부기구(NGO)의 100여 명의 시민사회 활동가들로 구성된 가장 큰 아시아 시민활동가 네트워크로 성장했다. 올해 3회를 맞는 SAPA는 아시아 각국의 지역 이슈를 논의하고 공동의 의제와 애드버커시 전략을 모색하는 단계에 있다. 내가 참석한 이번 모임은 SAPA의 회원단체 뿐만 아니라 아시아 시민사회활동가들에게 열린 자리로서 2009년 SAPA가 다룰 의제와 전략을 논하는 자리였다.

최근 아세안 시민사회의 핫이슈는 아세안에 인권 기구(Human Right Body)를 신설하는 것이다. 인권기구 설립은 2007년 아세안 헌장에 언급되어 있고 아세안 국가간에도 설립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 과정에 시민사회는 인권기구 설립을 위해 아세안의 논의 과정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SAPA의 아세안(ASEAN)과 남아시아(South Asia) 워킹그룹은 아세안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큰 축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아세안에 시민사회의 공동의 개입전략을 찾고자 열띤 논쟁이 펼쳤다.

반면, 몽골, 중국, 한국, 일본, 대만으로 구성된 동북아시아 워킹그룹(Working Group on North East Asia)은 각 시민사회의 공동의 의제를 찾는 것부터 논의가 시작됐다. 동북아시아 시민단체의 경우는 아세안과는 달리 SAPA 모임에 참여하는 NGO 단체도 적었을 뿐만 아니라 네트워크도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올해는 약 10개의 시민단체가 모여 각 나라별 주요 이슈를 소개했다. 한국은 최근 표현의 자유 침해, 자유무역협정(FTA) 등 통상 무역문제를 제기하고 몽골은 황사와 같은 환경 문제와 여성의 인권 침해 문제를 논했다. 중국은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를 주요하게 제기했으며 표현의 자유 침해 문제에 대한 인식은 적어 보이기까지 했다.

몽골과 중국은 이주민을 송출하는 국가이고 일본과 한국은 이주민을 주로 수입하는 국가이기 때문에 이주민 문제를 접근하는 방향이 달라 공통점을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논의가 진전될수록 서로의 문제를 발견하고 문제간의 연결 고리를 파악해 가는 시간이었다. 동북아시아 시민사회의 연대 활동은 서로의 다른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고 정보를 교류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때라고 여겨졌다.

아시아 시민사회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SAPA는 효율적인 애드버커시 활동전략을 공유한다. 올해는 유엔 애드버커시 활동을 주요한 전략으로 소개했다. 대부분 독재정권의 성격이 강한 아세안 국가들은 국가인권위원회가 있어도 재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이 다반사이다. 아세안도 각 회원 국가간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운영이 되다보니 아세안 시민사회가 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활동을 국내에서 하기에는 운신의 폭이 매우 좁다. 이러한 현실에서 대부분의 아세안 인권 활동가들은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를 활용하여 애드버커시 활동을 하거나 서방세계의 국제 인권단체들의 지지를 받아 자국의 변화를 꾀하는 우회적 방법을 쓰고 있다. 반면 한국은 1987년 민주화를 국내에서 이룬 경험을 가지고 있어서 시민·사회운동의 역량이 강한 편으로 재정과 역량이 많이 투여되는 국제 애드버커시 활동은 상대적으로 소홀히해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한 면에서 서방세계의 물적, 인적지원을 쉽게 받을 수 있는 아세안 지역이 한국보다는 국제연대를 하는 토대가  훨씬 풍부하고 다양했다.

한국의 인권 현실이 한해가 다르게 후퇴되어 감을 개탄하고 있지만 SAPA의 논의를 살펴보면 한국이 더 이상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만을 이야기할 위치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아세안 시민사회는 한국의 이주민 정책방향이 각 송출국인 아시아 국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한국 시민사회의 활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또한 내재적으로 민주화를 이룬 한국의 시민사회진영이 성공적으로 수행해 왔던 성과들을 그들과 논하고 아시아 시민사회의 담론과 역량을 넓히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기대했다.

한국 정부도 속내는 다를지라도 '국제사회 기여외교'를 이야기 하는데 시민사회 진영은 현실적으로 어느 지점에 서있는지 짚어보게 된다. 한국 시민사회 내부에서 아시아의 인권과 민주화, 아시아 담론과 전략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논하고 있는지. 아시아 지역차원에서 한국 시민사회의 역할을 얼마나 심도 있게 고민했는지, 오히려 아시아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답보상태에 있었던 것은 아닌지. 현실적인 한계라는 핑계로 아시아연대 활동을 소홀하지는 않았는지 여러 질문이 떠오른다. 최소한 활동가인 내가 어느 정도 애정을 가지고 아시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시간이었다.

차은하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간사

참여연대와 경희대 인류사회재건연구원은 오는 26일부터 11월까지 매달 1회, 총 8회에 걸쳐 아시아인의 생존과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초국가적 문제를 논하는 '아시아 포럼'을 개최한다.

인간 안보, 해양 테러리즘, 난민, 탈북 여성, 에너지, 식량 위기 등 다양한 문제가 논의될 예정이며, 이번 행사를 후원하는 <프레시안>과 참여연대 홈페이지를 통해 발제문이 소개된다.

포럼의 구체적인 일정은 다음과 같다.

2009년 연속기획 아시아 포럼 <국경, 아시아, 시민사회>

1회: 초국가적 인간 안보 문제와 아시아
발제: 이재현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일시: 2009년 3월 26일(목) 오후 4시 30분, 경희대학교 본관 2층 대회의실

2회: 아시아 해양 영유권 문제와 시민사회의 대응
1부: 아시아 해양 도서영유권 분쟁과 시민사회의 과제
발제: 강성호 경희대학교 인류사회재건연구원 객원연구원
2부: 해적과 해양 테러리즘
발제: 라미경 순천향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
일시: 2009년 4월 16일(목) 오후 4시, 경희대학교 본관 2층 대회의실

3회: 태국 국경거주 버마 난민들의 적응양상과 과제
발제: 이상국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연구교수
일시: 2009년 5월 7일(금) 오후 4시, 서울 COEX

4회 : 탈북여성의 제3국 체류현황 및 과제
발제: 이금순 통일연구원 북한인권연구센터 선임연구위원
일시: 2009년 6월 11일(목) 오후 4시, 경희대학교 본관 2층 대회의실

5회: 이주아동의 인권현황과 시민사회의 과제
발제: 김성천 중앙대학교 아동복지학과 교수
일시: 2009년 7월 9일(목) 오후 4시, 경희대학교 본관 2층 대회의실

6회: 에너지 위기와 시민사회의 과제
발제: 전가림 호서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일시: 2009년 9월 17일(목) 오후 4시, 경희대학교 본관 2층 대회의실

7회: 아시아의 식량위기와 대응
발제: 김병률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미래정책연구실장
일시: 2009년 10월22일(목) 오후 4시, 경희대학교 본관 2층 대회의실

종합토론: 아시아 국경지대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한국시민사회의 연대
일시: 2008년 11월 19일(목) 오후 4시, 경희대학교 본관 2층 대회의실

문의: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02-723-5051)
silverway@pspd.org
blog.peoplepower21.org/international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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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의 '민주주의 재건하기'
- 다시 생각하는 민주주의


이미 여러 갈등을 마주하고 있는 네팔에서는 정당들 사이에 또 하나의 힘겨운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새 헌법을 제정하는 데에 있어 따라이(Terai) 자치 문제와 바람직한 연방제 구조에 대한 것이다.

한편, 이는 다른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로도 여겨져 왔다. 과거 중앙권력은 오랜 세월 많은 인종집단과 네팔의 카스트 계급을 지배했고, 때문에 연방제를 통해 중앙으로부터 이런 권력을 제거하고, 지역차원에서 삶의 질 향상과 공정한 분배를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방제가 어떻게, 그리고 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 조사는 거의 발견할 수 없다. 나는 새 헌법이 시민 참여를 보장하고 권익을 보호하고 증진할 수 있는지 최소한의 확신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를 위한 어떤 준비도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주요 정당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헌법을 통한 발전된 형태의 민주주의와 지속적인 평화구축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네팔공산당이 단일정당 독재로 가지 않고,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겠다고 한 그들의 약속을 지키리라 생각한다). 이 목표를 위해 첫째로 어떤 이유로 네팔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한 세심한 조사와 분석, 평가가 필요할 것이다. 이미 존재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객관적이고 철저한 평가 없이 앞으로 다가올 민주주의가 성공적일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1990년 서구 형태의 자유 민주주의를 채택한 이래 네팔은 현재 더 나은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역사적 순간에 서있다. 그러나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할 지에 대한 질문에 정당들은 답하지 못하고 있다.

사무엘 헌팅턴은 냉전의 종식은 '역사의 종말'을 위한 조건과 서구 형태 민주주의의 승리를 낳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유 민주주의 모델이 적절한 환경과 실행 속에서 번창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많은 사회과학자들은 냉전 후 자유주의 관점에서 제기되었던 좁은 의미의 자유 민주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들은 자유 민주주의는 이상을 성취하지 못했고, 따라서 도전에 부딪쳤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또한 서양에서 이식된 민주주의가 세계 곳곳의 다른 문화와 사회에 적합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는 네팔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를 네팔에 도입했을 때, 자본의 세계화 앞에서 신자유주의 시장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초래된 것(몇몇 긍정적인 면들을 제외하고)은 낮은 수준의 민주주의였고, 정치는 단순한 게임의 수준에 머물렀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초기의 낙관론은 나라가 민주화에 접어들면서 시작된 정부와 네팔공산당의 갈등의 심화 속에서 사라져 갔다. 하지만 단순히 이 현상만이 과거의 민주주의 실패 또는 결점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원주민 그룹의 문제를 제기하는데 실패했고, 권력정치는 이를 방치하며 커져가고 있다. 그리고 공공정책을 형성하고 실행하는데 일반시민의 참여를 포함하는 전통적인 민주주의의 능력에 대한 의구심이 여전히 존재한다.

네팔의 선출된 대표들은 시민의 삶과 사회에 관련된 일들에 대해 폭넓은 대중의 참여 없이 모든 것을 자신들이 결정했다. 결과적으로 네팔은 평등, 정치적 자치권, 책임, 경제적 평등 등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채 처음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물론 행정·입법·사법의 분리, 자유공정 선거, 그리고 자유로운 정치 정당, 자유로운 기관들의 연합 등 시민사회의 성장과 함께하는 긍정적인 면들이 있다. 그러나 네팔과 같은 나라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엘리트에 의한 권력정치가 아니라, 소외된 사람들의 이익, 소수그룹, 젠더 이슈 등을 위한 정치적 평등을 기본으로 하는 대중정치로 이해되어야 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과거에 수행되었던 기관 개혁과 정책 실행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평가해야하는 시점에 와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존재하는 민주주의 자체가 나라를 위해 적합한지를 평가하고, 그렇지 않다면 어떠한 형태의 민주주의가 적합할지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이다. 이렇게 민주주의의 형태와 생각을 재언급하는 나라가 네팔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런 흐름은 세계 곳곳에서 '다시 생각하는 민주주의', 또는 '급진적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발견된다.

네팔은 정책결정과정에서 더 넒은 시민참여가 이루어져야 하고, 공공이슈에 대한 시민의 역할 또한 확신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신중하고 지속가능한 민주주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이전 관심은 엘리트 권력정치에,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한 전제조건들의 확인과 실행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시민의 삶과 관련된 이슈에 최대한의 시민참여를 보장하는 데에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네팔의 민주주의, 개발, 평등 그리고 평화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들 중 하나는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문화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네팔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대부분 개념적이고 규범적으로 한정되어 왔다. 이는 우리의 초점이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문제와, 정확한 조건과 민주주의에 대한 다른 대안을 무시하는, 특수하고 제한된 형태의 민주주의를 위한 선행조건을 찾아내는데 맞추어졌기 때문이다. 참된 민주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 우리의 정치적, 학문적 전문가들은 민주주의를 넓히고 굳건히 하는 대안적 장치들의 힘과 요소들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의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시민운동 세력(People's Movement II)에 의해 조직되고 창조된 행동중심은 네팔에서 민주주의를 사회화하는 데 유용할 수 있다. 정치세력들, 시민사회, 학계, 언론 그리고 다른 관계자들의 참여를 바탕으로 이 의제에 대한 담론은 네팔에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기초를 건설하는데 필수적일 것이다.


 

지반 바니야 / 서강대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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