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 <우리 안의 아시아, 우리가 꿈꾸는 아시아>  

아시아.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지역이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정서적으로는 '남미' 못지않게 먼 곳으로 여겨지곤 하는 곳이다. 또 엄연한 지역의 일원인데도 동질감을 은연 중 부담스러워 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최근 언론에서도 국내·외 문제를 '아시아'와 연관시켜 다루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은 낮기만 하다.
 
그러나 작지만 꾸준히, 국내에서도 아시아에 대한 관심과 고민이 넓어지고 있다. 투자와 노동시장, 관광의 대상으로만 여겨지던 아시아 지역을 놓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관심을 갖자는 움직임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특히 시민운동 영역에서 아시아 지역과의 '연대'를 모색하는 일이 눈에 띠게 늘어났다.
 
최근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가 발행한 <우리 안의 아시아, 우리가 꿈꾸는 아시아>(해피스토리 펴냄)는 아시아 지역 문제에 눈을 돌리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읽어봐야 할 필독서라 할 수 있을 듯하다. 이 책은 지난 해부터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홈페이지와 <프레시안>에 연재됐던 '아시아 생각' 칼럼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아시아를 연구하는 학자, 활동가 등 25명의 필자가 참여했다.
 
전통적인 이분법, 그리고 근대화론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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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안의 아시아, 우리가 꿈꾸는 아시아>(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엮음, 해피스토리 펴냄) ⓒ프레시안 



"아시아를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새로운 활동거소로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이 점차 세를 얻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런 주장들에서 한 가지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관점은 안과 밖, 국내와 국제, 우리와 세계를 가르는 전통적인 이분법이다."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는 책머리에서 아시아에 대한 국내의 시각이 변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도 '여전히' 변치 않는 관점을 지적한다. 그는 "한국에 이미 들어와 있는 이주노동자가 100만 명을 헤아리고, 공장과 공사판과 식당과 지하철에 '우리'와 구분되지 않는 얼굴의 '외국인'들이 넘쳐 나는 현실, 한국 기업들의 역내 해외투자가 이미 국내 투자를 훨씬 상회하는 현실 속에서 과연 '이분법'이 가능한 관점일까?"라고 묻는다.
 
 전제성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비판은 더욱 적나라하다.
 
 
 "Pride of Asia(아시아의 자랑)! 이 구호는 2002년 월드컵 당시 광주경기장에서 한국과 스페인이 8강전을 벌일 때 붉은악마 응원단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던 카드섹션의 구호였다. (…) 그런데 월드컵 이외의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아시아의 이익과 명예를 대표하고 아시아 나라들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는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아시아를 대표한다는 의미보다는 서양의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은 욕망이 더 강한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볼 만하다."
 
 전제성 교수는 이 같은 의식이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아시아연대' 담론에서도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봐야 한다고 주문한다. 그는 "일반인들이 한국의 축구나 골프가 세계무대에 나선 것을 자랑하듯 한국 사회운동가들도 한국의 민주화와 개혁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며 "그러나 아시아 각국의 사회운동에 대해 공부하고 배우려는 태도를 겸비하지 못한다면 아시아 연대 담론은 근대화론의 한국판 변종을 낳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분법에 대한 성찰은 좀 더 적극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박진영 전 아시아여성위원회 프로그램 간사는 "한국의 운동은 아시아의 이웃들과 나눌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고 자문하며 아시아 연대에서 한류를 만들어간다면 어떤 방식이 되어야 할지 구체적 사례로 제시한다.
 
 "인도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 그날을 우리는 볼 수 있을까?"
 
  '사회적 아시아', 우리가 지향해야 할 '아시아주의'
 
 
 '아시아를 향한 성찰', '오늘의 아시아', '아시아 연대를 위하여' 등 세 부로 나뉘어 있는 책에는 각각 이처럼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 사회의 현실을 보여주는 글도 실려 있다. 필자들은 중국, 베트남, 동티모르, 필리핀, 인도네시아, 네팔, 버마(미얀마) 등 우리가 흔히 여행지, 혹은 투자지로만 인식하고 있는 지역의 생생한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을 연구와 답사를 통해 알려준다.
 
 끝으로 조희연 성공회대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연구소 소장은 책 말미에 '사회적 아시아'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제안한다. 그가 제시한 단어 '사회적 아시아'는 곧 이 책에 참여한 필자들이 말하려는 바를 집약해 나타낸 말이기도 하다.
 
 "한국 및 아시아의 민주진보세력이 지향해야 하는 아시아주의가 있다면, 그것은 아시아를 민주적 공동체와 사회적 공동체로 사고하는 것이어야 한다. (…) 한국의 민주진보운동이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성찰적 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우파의 국가주의와 편협한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것인 동시에 자신을 국가주의와 편협한 민족주의를 넘는 운동으로 재구성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라고 본다."  
   

 강이현/프레시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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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시위 사수, 인도네시아에서는? 

이명박 정부와 촛불집회의 팽팽한 대결이 장기간 지속되는 가운데 폭력에 관한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그렇지만 내가 학습대상으로 삼는 인도네시아의 실상에 비추어보면 한국의 시위대는 놀라울 정도로 평화를 지켜내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사람들이 대규모로 결집한 곳에서 폭력행동이 발생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시위현장 뿐만 아니라 경기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인도네시아 친구들은 한국에서 대규모 집회나 축구 응원이 평화적으로 전개되는데 대하여 놀라움을 표하곤 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외환위기로 물가가 폭등하자 이에 항의하는 집단행동이 곳곳에서 발생했는데 그 규모가 커지자 약탈, 방화, 강간이나 살인이 수반하는 극단적 폭력사태로 번져나갔다. 민주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각지에서 종족간의 균열이 인명과 재산을 앗아가는 수평적인 집단폭력이 발화했다. 마을 사람들이 도둑을 잡아 집단적으로 뭇매를 때리거나 불태워 죽이는 일도 허다하게 발생하였다.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이 건물과 승용차를 파괴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에서는 군중과 폭력이 근친의 관계로 간주되고, 상류층은 물론이고 중산층까지도 대체로 군중동원에 대한 공포를 지니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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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네시아의 실상에 비추어보면 한국의 시위대는 놀라울 정도로 평화를 지켜내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프레시안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하는 대중폭력은 여러 가지로 설명된다. 우선 가장 오래된 설명은 말레이계의 종족적 특성이 원래 그렇다는 것이다. 현지어 "아묵"(amuk)이라는 말은 정신을 잃을 정도의 발작상태를 가리키는 말인데 유럽식민주의자들이 이 단어를 영어사전에 올리면서 국제어가 되었다. 현지인들이 아묵 상태에서 행하는 폭력행동을 유럽인들이 열대의 이국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였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현지인들의 아묵은 평소의 인내심과 아주 대조적이었기 때문에 더욱 인상적으로 보였던 것 같다. 6백여 년 전에 인도네시아 자바의 스마랑(Semarang)에 원정을 왔던 명나라 쩡허(鄭和)의 사관도 현지인들의 높은 인내심과 강한 폭력성을 모순적 현상으로 특이하게 보아 각별히 기록해두었다고 한다. 높은 인내심과 강한 폭력성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평소에 너무 참기 때문에 폭발적으로 의사표현을 한다는 식으로 인내와 폭력을 연결시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다른 한편에 군중폭력을 체제 탓으로 돌리는 해석들도 있다. 돌발적인 폭력을 통해 요구를 표출하는 행동은 장기간 지속된 폭압적인 체제에서 온건한 의사표출의 자유도 주어지지 않았고, 폭력적인 해법을 일삼는 체제로부터 폭력적인 해법만 전수받았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근자에 유력한 가설은 아묵 현상을 유발하려는 음모와 책동이 있다는 설이다. 시위현장에서 시위대의 일원처럼 행세하면서 폭력을 남보다 앞서 행사하는 외부인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그들은 주로 "선동가"를 뜻하는 외래어를 차용한 "쁘로보까또르"(provokator)라는 용어로 지칭된다. 이를테면 1998년 5월에 벌어진 일련의 폭력사태들은 머리카락이 짧고 건장한 체격의 낯선 사람들이 시위대 속에서 먼저 폭력을 행사하면서 집단폭력이 시작되었다는 증언들이 나오고 이들이 특전대 소속이었을 것이라는 구체적인 음모설이 제기된 바 있다. 지방에서 벌어진 종족분쟁들도 작은 시비와 다툼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역시 외부인의 소행이고 신생민주정부의 개혁을 방해하려는 구체제 지지자들이 배후에 있다는 음모론이 나돌았다. 노동자들의 가두시위에서도 마찬가지 음모설이 작동하는데, 지방정부나 지방의회에 찾아가서 최저임금을 올려달라고 대규모로 시위를 벌이면 작업복을 입은 낯선 이들이 나타나 폭력행동을 선동하면서 기물을 앞서서 파괴하곤 한다고 노동조합 간부들이 주장하였고, 지방관구사령부가 관할 지역의 주요 회사들의 작업복을 골고루 보관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주장도 들어본 바 있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시위가 심각한 폭력을 동반하면 경찰이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언론은 '폭동'이라고 보도하고 시위지도부를 구속하는 '3박자' 대응이 이어지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규모가 큰 군중결집을 두려워하고 보통 사람들의 집단적 의사표현을 신뢰하지 않는 수평적인 공포와 불신을 일반인들이 갖게 되고 국민들이 직접행동을 통해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보다 강력한 국가와 군부가 질서를 잡아줄 것을 기대하는 공권력 의존성이 사람들의 뇌리에 자리 잡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군중폭력은 인도네시아에서 사회운동을 전개하는 이들에게는 각별한 고민꺼리일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러하니 인도네시아의 사회단체들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규모 시위를 기획하지 않는다.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러나 대규모 시위가 불가피하다면 자율검색을 시행하거나 안전요원을 배치하는 해법을 취한다. 자율검색의 대표적인 예가 1998년 5월에 수하르토를 끌어내린 국회의사당 시위로서 대학생들이 의회정문에서 수상한 이들의 진입을 막은 경우였다. 그런데 노동자와 빈민들의 진입을 막은 경우를 들어 자율검색이 대학생들의 우월감과 군중공포를 드러낸 비연대적 행동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반면에 시위대 중에 일부가 안전을 관리하는 임무를 띠는 자율적 안전관리는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져 일반적으로 수행되고 있다. 또 하나의 지혜는 즐겁게 시위하는 것이다. 특이한 분장, 보디페인팅, 퍼포먼스가 시위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고 사진기자들의 집중조명을 받곤 한다. 국제노동절시위도 지방 단위에서 공연, 경연, 집단놀이 등을 통해 카니발 형식으로 전개되곤 한다. 자율적인 안전관리나 집단놀이형 시위는 우리보다 인도네시아가 '선배'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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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의 지혜는 즐겁게 시위하는 것이다. 특이한 분장, 보디페인팅, 퍼포먼스가 시위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고 사진기자들의 집중조명을 받곤 한다." ⓒ프레시안 



인도네시아에서 집단의사의 평화적 표현을 위한 노력은 운동권만의 일은 아니었다. 1999년 6월에 44년만의 자유총선거를 앞두고 인도네시아의 한 일간지는 동부 자바의 수라바야(Surabaya)시가 폭동이 가장 강력하게 발생할 만한 화약고로 지목하였다. 그런데 의외로 사소한 시비만 있었을 뿐 폭동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과 자긍심이 가득한 시민들 덕분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당시 인도네시아의 민주화를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민주사회에 대한 기대로 집단폭력이 자제되었을 것이라는 해석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자긍심에 대해서는 약간의 부연이 필요할 것이다. 수라바야는 2차대전 종전이후 승전국으로 복귀하는 서양식민주의 세력을 목숨을 걸고 격퇴한 역사적인 도시라서 '영웅의 도시'로 불리어왔으며 시민들도 직선적이지만 자존심이 강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 자긍심 강한 시민들이 집단폭력으로 도시가 상처받는 일을 막아냈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1998년 5월로 다시 돌아간다면, 평화적인 대중시위의 선명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전국이 폭동으로 얼룩질 때, 족자카르타(Yogyakarta)시에서도 역사상 최대의 시민이 참여하는 시위가 벌어졌지만 군중폭력은 발생하지 않았다. 수하르토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민들 앞에 족자카르타의 술탄이 나타나서 시민의 뜻을 대통령에게 전달하겠다고 약속하고 시위대와 함께 행진을 하였다. 전통적 종교적 권위를 지닌 술탄이 책임을 지고 사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하였기 때문에 시민들은 평화적으로 시위를 전개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수하르토가 물러났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촛불시위를 보면서 연상된 인도네시아의 집단시위 풍경이었다. 이런 이야기가 팽팽한 대결 국면 속에서 지친 우리 시민들에게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기회가 되었기를 바란다. 한국에 대한 함의 따위는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고 독자들의 몫으로 남긴다. 다만 인도네시아의 대중시위 현장에서는 전투성을 증대시키는 능력보다 평화를 지켜내는 능력이 더 결정적인 관건이고 평화시위를 사수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더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를 성사시키는데 기여할 것이라는 소견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전제성(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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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여기, 아시아에서 우리, 아시아를 꿈꾸다
이식된 오리엔탈리즘과 패권적 민족주의를 넘어 한국 시민사회의 아시아
연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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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엮음/ 해피스토리
정가 12,000원 [바로 구입하기]


국내에 거주하는 아시아계 이주민이 1백만 명에 달하고 해외여행을 떠나는 한국인의 85%가 아시아로 향하고 있다. 최근 들어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한국인들의 생각 속에 ‘아시아’는 미국이나 유럽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고, 생김새와 피부색이 비슷한 ‘아시아인’들은 서구인들보다 더 낯선 이방인으로 머물러 있을 뿐이다.

한 예로 우리는 아시아의 향신료 산지를 장악하기 위해 세계일주를 한 마젤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마젤란을 죽여 필리핀에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아시아인 라푸라푸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거의 없다. 또한 서구로부터 이식된 오리엔탈리즘으로 인해 우리가 아시아에 대해 갖고 있는 관점은 정실주의, 부패, 빈곤, 독재, 미개발, 덜 문명화된 지역 등 부정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아시아계 결혼이주 여성이 늘어나면서 생겨난 신조어 ‘코시안’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우리’와 ‘아시아’를 애써 구분짓고 외국인 배우자의 국적에 따라 아이를 특정화, 대상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껏해야 우리는 ‘아시아 최초’나 ‘아시아 최고’라는 수식어에서나 ‘아시아 속 한국’을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가 펴낸 『우리 안의 아시아 우리가 꿈꾸는 아시아』는 먼저 한국과 아시아를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우리 안의 아시아를 재인식하고 그것을 진정한 ‘우리’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참여연대 홈페이지에 2006년 6월부터 연재된 ‘아시아 생각’ 칼럼을 모은 이 책은 이식된 오리엔탈리즘, 패권적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와 인권이 고르게 보장되는 ‘사회적 아시아’를 향한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은 아시아에 대한 우리의 편협한 사고를 꼬집는 1부 ‘아시아를 향한 성찰’, 현재 아시아 각국이 처해있는 현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2부 ‘오늘의 아시아’, 시민사회의 아시아 연대를 모색하는 3부 ‘아시아 연대를 위하여’로 구성돼 있다. 필진으로는 조희연 성공회대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연구소 소장, 조효제 성공회대 NGO대학원 교수를 비롯해 국내 아시아 지역 연구자, 활동가, 아시아 출신 유학생 등 25명이 참여했다.

목차

[들어가며] 아시아에 주목해야 할 이유 -조효제
1부 아시아를 향한 성찰

○ 아시아의 자존심? -전제성
○ 우리에게 보이는 아시아는 정말 아시아인가? -이재현
○ 한국에서 친구 사귀기 -유완또
○ 국경과 국적에 갇힌 인권 -이재현
○ 인공의 도시, 차이나타운 -백지운
○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이재현
○ ‘메이드 인 코리아’ 낙인의 진짜 이유는… -이재현
○ 신부 사오는 사회 -박이은실
○ 지자체의 국제결혼지원사업을 반대하는 이유 -이재현
2부 오늘의 아시아
○ 아세안, 공동체 버리고 FTA 택하려나 -이성훈
○ 가야 할 길 먼 동티모르의 ‘독립’ -최재훈
○ 징기스칸의 아시아, 몽골의 민주주의 -김은경
○ ‘금권민주주의’가 불러온 태국의 쿠데타 -박은홍
○ 베트남 사회주의와 노동력 부족 현상 -채수홍
○ 필리핀의 공공연한 정치적 살해 -정법모
○ 내가 만난 인도네시아 여성운동가 -정은숙
○ 중국, 그 배반의 이름으로 -김도희
○ ‘조직’ 대신 ‘시민’ 만든 일본 시민사회 -한영혜
○ ‘야만의 시대’에 갇힌 버마, 가스 개발에 눈먼 한국 -박은홍
○ 새로운 네팔을 향한 기회와 도전 -지번 바니야
○ 네팔 총선 국제 선거감시단 활동기 -차은하
○ 필리핀 남부 통근철도사업 이주지역 이야기 -정법모
○ 너무 깊게 드리워진 수하르토의 그림자 -김은경
○ 경제회생 포퓰리즘…한국도 태국,필리핀 전철 밟나 -박은홍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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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체가 나를 부끄럽게 했다

비행기에 탑승하고서야 자카르타까지 7시간이나 걸리는 걸 확인하였다. 목적지가 어디든 몇 시간이 걸리든 별로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뭔지 모르게 피곤하기만 한 한국에서의 일상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했다. 이렇게 허둥지둥 시작한 인도네시아 방문은 일주일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7시간의 지루할 수 있는 비행시간은 오히려 안락한 휴식이 되어 주었다.
 
한밤중에 자카르타에 도착해 짐을 찾아 세관을 나가려고 하는데, 경찰인지 세관원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박스로 싼 짐을 질질 끌어 내며 뭔가를 요구한다. 어쩌란 말인가 싶어 귀를 기울였더니 결국은 돈을 내라는 애기다. 언젠가 남의 애기를 인용해서 인도네시아의 부패문제를 민주주의와 인권의 걸림돌로 지적한 적이 있었는데, 그 사실을 생생하게 눈 앞에 두고도 그냥 무기력하게 공항을 빠져 나왔다. 뭔가 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자괴감이 한 순간 스치고 지나갔다. 마중 나오기로 한 차는 한참이 지났는데도 오질 않는다. 몇 대의 담배를 피우고 한국에서는 한 가닥씩 하는 일행들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펴 보았다. 모두가 이 상황을 얼마큼은 받아 들이고 있는 듯 하였다. 달리 방도가 없으니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얼마를 더 기다린 후에 차가 도착하고 일행은 공항 근처 호텔에서 하루 밤을 묵게 되었다. 로비에서부터 아늑하게 뻗어 있는 긴 복도를 좌우로 몇 번 돌아서야 겨우 방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가라오케인지 나이트클럽인지 모를 시설이 방과 한 층에 있었다. 클럽 앞에는 한 가지로 유니폼을 입고 어려 보이는 여성 종업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공항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성 종업원들의 미소를 외면한 채 무기력하게 지나쳤다. 일행 중에 과격한 페미니스트가 있었다면 그렇게 무기력하지는 않았을까? 인도네시아에서의 첫날밤은 우리 일행의 정체성과 한계를 분명하게 설명해 주었다. 지금의 생각이지만 뭔가 하지 않는 것이 이유야 어찌되었든 잘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싶다. 내가 보편적이라 믿었던 것들이 어떤 사람에게는 이상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여행하는 동안 여러 차례 느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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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쓰나미로 인해 마을 한 가운데까지 7㎞를 밀려와 정박한 산만한 화물선박. ⓒ김신

 잠을 자는 둥 마는 둥하고 제법 차가운 열대의 새벽 공기를 쐬면서 다시 공항으로 가서 수마트라 섬 최 북부의 아체주로 향하였다. 공식일정이 시작된 것이다. 4시간이 걸려 도착한 아체주 공항은 시골 간이역을 연상시켰다. 공항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냥 나왔다. 쓰나미때 이곳 공항까지 바닷물이 넘쳐 그나마도 공항이 제 기능을 못해 구호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아직 아침인데도 5월의 뜨거운 열기는 피부를 찔러대며 파고들었다. 자카르타와는 다르게 공기는 신선하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상쾌하다. 무엇보다 담배 파는 가게직원이 없어 안달하는 일행에게 피우던 담배를 갑 채로 가지라고 권하는 공항직원들의 여유로움과 친근함이 자카르타와는 사뭇 다르다. 또 택시 호객과 전화카드를 팔려고 젊은 상인들이 진을 치고 있던 자카르타 공항과는 달리 이곳 공항입구는 망고를 팔러 나온 농부 몇 사람과 택시기사 한둘이 전부다. 망고를 팔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자기네끼리 깎아 먹고 노닥거리고 있다. 일행은 마중 나오기로 한 차를 기다리다 망고 한 바구니를 샀다. 노란 속살을 나누어 먹으면서 노닥거리는 사이 차가 도착했다. 역시 두 시간을 기다렸다. 아체의 첫인상은 마중 나오기로 한 차를 두 시간 기다린 것을 빼고는 사람도 공기도 그리고 일행들의 분위기도 모든 것이 자카르타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다.
 
숙소가 분명히 호텔인데 한참을 달려도 호텔은 고사하고 여인숙도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쓰나미가 다 휩쓸어 버린 것인가라고 의아해하고 있는데, 눈앞에 3층의 꽤 괜찮은 호텔이 갑자기 나타났다.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이곳에 호텔이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현지에서 우리 일행의 이동과 프로그램에 대해서 간사역할을 해준 단체는 SIRA(Central Information Referendum of Aceh)인데, 아체주 부지사가 된 나자르(37세)를 대표로 해서 중앙정부와의 분쟁 당시 자치획득을 위해서 주민투표를 추진해왔고, 지금은 정당으로서 변형과정을 거치고 있는 반정당적 성격을 띄고 있었다. 누구와도 영어가 통하지 않은 관계로 SIRA에 대한 많은 애기는 들을 수 없었다. 다만 한국의 경험에 비추어 정치를 하기에는 너무나 순박한 사람들이고 20~30대의 젊은 청년들로 리더십을 구성하고 있으며 어떤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빈곤과 복지가 주요 관심사라는 점이다. 그리고 당원 중에 여성과 노인 심지어 중년의 남성은 단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SIRA뿐 만 아니라 몇 개의 현지 NGO를 방문했을 때도 거리에서도 시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30년 넘는 분쟁으로 수 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그나마도 쓰나미가 휩쓸어 버린 아체의 현실이다. 굳이 쓰나미 피해 현장을 찾아 다닐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성들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이슬람법을 주법으로 삼고 있는 아체의 문화적 요인도 있었겠지만, 전쟁과 재해의 피해자는 언제나 사회적 약자그룹에게 더 가혹한 것이니 남성보다는 여성이 젊은이 보다는 노인의 피해가 심각했으리라. 이러한 사실은 예정에 없던 노동절행사에 동원되었을 때 더욱 더 실감이 났다. 겨우 50여명이 노동절행사를 갖고 있었다. 쓰나미가 파괴한 것은 단순히 자연환경과 삶의 터전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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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체의 노동절 행사 ⓒ김신 

쓰나미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들어온 국제기구, NGO들이 저마다 내건 영문단체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거의 문맹의 상태에서 우리 일행은 스스로의 자치권을 포기한 채 SIRA의 안내에 따라 먼저 나자르 부주지사와 간담회를 가졌다. 부주지사는 과거의 아픈 기억을 자치권 속에서 풀어내는 것을 과제로 안고 있었다. 지난 30여 년 간의 투쟁의 역사를 민주주의의 역사로 정착하고 과거 분리독립세력을 평화의 세력으로 사회화하여 과거의 상처가 민주적 자치권 속에서 인권과 평화의 문화로 거듭나는 아체인의 삶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일행에게 아체인들은 투쟁에 집중한 나머지 한번도 민주적 삶을 살아 보지 못해 민주주의를 피상적으로 알 뿐이라며 한국과의 민주주의 교육 교류를 제안하였다. 순간 부끄러워졌다. 민주주의가 제도만을 애기하는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의 삶 속의 민주주의 애기라면 오히려 아체의 상황이 좋아 보였다. 가부장적이고 이기적인 권위주의가 가정, 직장, 여타 사회 활동을 지배하고 있는 한국에서의 일상에 익숙한 나에게 직원이 있는데도 단체대표가 길거리 상인과 사소한 흥정을 하고 운전기사와 수행직원이 있는데도 고위공무원이 시장에서 산 점심을 담은 비닐봉투를 흔들고 다니고 상인들 간의 사소한 시시비비에 끼어드는 모습은 뭔가 역할이 잘못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새로웠다.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 학력, 무엇보다 나이와 상관없이 자유롭게 주제를 공유하고 뭔가를 토론하는 모습은 여행 내내 자주 볼 수 있었다. 아체인은 태생문화적으로 민주적일 수 밖에 없다는 어느 동남아학자의 말이 생각난다. 그 태생적 문화가 무엇인지는 아직까지 분명하지 않지만….
 
쓰나미 피해 재건현장과 30년 넘게 지속된 오랜 분쟁의 희생자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사회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쓰나미가 파괴한 아체주의 자연환경과 삶의 터전은 국제사회의 원조로 상당부분 복구되고 있거나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다만 마을 한 가운데까지 7㎞를 밀려와 제 멋대로 정박한 산만한 화물선박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안내자는 성룡이 기금을 내서 중국정부가 재건했다는 성룡마을로 우리 일행을 데리고 갔다. 중국식 건축물로 마을 정문을 세우고 거기에 중국어로 "중국과 인도네시아의 우의촌" 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옆으로는 홍보용 비석을 세워 뭐라 장황하게 새겨놓고 있었다. 정문에 들어서자 우뚝하게 세워진 이슬람사원이 눈에 띄었다. 저 멀리 인도양의 수평선에서도 알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지대에 재건된 마을은 5000여 가구는 되어 보였다. 아체의 전형적인 가옥구조 양식을 띄어 빨간색 지붕과 아이보리색 벽으로 지워진 보기 좋게 일률적인 크기와 모양의 가옥들이 장관이었다. 마을 앞으로는 인도양이 내려다 보이고 주변으로는 녹색의 열대 자연이 펼쳐져 있고 마을 끝까지 시멘트로 포장된 잘 정돈된 차도가 지그재그로 엎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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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룡이 기금을 내서 중국정부가 재건했다는 성룡마을. ⓒ김신 

마을은 차도를 따라 형성되었는데, 언뜻 어느 휴양지에 온 기분이었다. 마을까지 차로 오면서도 급경사가 힘들었는데 입구에서 내려 마을에 들어서자 얼마 못 가 주저 앉게 되었다. 어찌 된 일인지 마을 어디에도 사람이 없었다. 마을 입구에서 몇 가지 생필품을 파는 가게 주인과 아이들 서너 명을 본 게 사람의 전부다. 가게 주인에 의하면 교통수단은 없는데 생계를 꾸릴 수단은 멀리 있어서 주민들이 새벽에 나가 저녁 늦게 집에 들어오기도 하고 아예 일터가 가까운 곳에 간이 숙소를 마련하고 산다고 한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학교도 없고, 시장도 없고, 병원도 없어서 이주된 주민들이 다시 원래 살던 곳으로 많이들 빠져나가고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갈 곳이 마땅한 건 아닌데, 이 마을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떠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굳이 주거권에 대한 개념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잘못된 이주정책의 전형적 모습이다. 이주하게 될 주민들의 의견은 들어나 봤을까? 이렇게 만들어진 마을과 사회시설이 아체에 몇 개나 될까? 가게주인도 곧 마땅한 생계거리를 찾아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막막하게 허공을 주시하며 눈시울만 붉혔다. 그 시선을 따라 가보니 하늘은 구름이 한 점 없이 파랗기만 했다.
 
우리 일행도 이제 아체를 떠날 채비를 해야 했다. 도착하자 마자 일그러지기 시작한 일정에 따라 원래의 일정표 상의 순서와 시간은 오간 데 없어지고 그냥 모든 걸 SIRA에 맡긴 채 진행한 이틀간의 아체 여행을 마무리하고 공항으로 향하였다. 자카르타로 가는 비행기가 두 시간 늦게 출발한다고 한다. 왜 모든 게 두 시간인지 모르겠다. 이쯤 되자, 우리 일행 누구도 이것을 문제라고 느끼거나 이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두 시간이 오히려 반가웠다. 아체에서의 이틀 동안 비록 좋아하지 않는 생선을 주식으로 강요당하고, 가끔은 코코넛으로 배를 채워야 했고, 자치정부 수립 이후의 사회 상황을 현지인의 설명 없이 스스로 알아서 살펴 봐야 했지만, 가끔씩 먹여주는 아체 커피의 향긋함에 느긋해 지고, 아무런 경고 없이 데려다 준 해변가, 파도와 바람이 아니면 누구도 침범해보지 못했을 것 같은 백사장에서 누리던 잠깐의 휴식을 생각하면 나의 선택권과 자치권은 싸 그리 무시되었지만 모든 것이 다 그걸로 그만이다.
 
비행기 창 밖으로 보이는 아체의 산과 바다 강줄기를 사진을 찍듯 눈 속에 담았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다음에 다시 오게 된다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유럽의 시티플래너들이 아체에서 그 플랜리란 것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것이 진실로 바른 길이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김신/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국제사업단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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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여기, 아시아에서 우리, 아시아를 꿈꾸다
이식된 오리엔탈리즘과 패권적 민족주의를 넘어 한국 시민사회의 아시아 연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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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거주하는 아시아계 이주민이 1백만 명에 달하고 해외여행을 떠나는 한국인의 85%가 아시아로 향하고 있다. 최근 들어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한국인들의 생각 속에 ‘아시아’는 미국이나 유럽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고, 생김새와 피부색이 비슷한 ‘아시아인’들은 서구인들보다 더 낯선 이방인으로 머물러 있을 뿐이다.

한 예로 우리는 아시아의 향신료 산지를 장악하기 위해 세계일주를 한 마젤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마젤란을 죽여 필리핀에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아시아인 라푸라푸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거의 없다. 또한 서구로부터 이식된 오리엔탈리즘으로 인해 우리가 아시아에 대해 갖고 있는 관점은 정실주의, 부패, 빈곤, 독재, 미개발, 덜 문명화된 지역 등 부정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아시아계 결혼이주 여성이 늘어나면서 생겨난 신조어 ‘코시안’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우리’와 ‘아시아’를 애써 구분짓고 외국인 배우자의 국적에 따라 아이를 특정화, 대상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껏해야 우리는 ‘아시아 최초’나 ‘아시아 최고’라는 수식어에서나 ‘아시아 속 한국’을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가 펴낸 『우리 안의 아시아 우리가 꿈꾸는 아시아』는 먼저 한국과 아시아를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우리 안의 아시아를 재인식하고 그것을 진정한 ‘우리’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참여연대 홈페이지에 2006년 6월부터 연재된 ‘아시아 생각’ 칼럼을 모은 이 책은 이식된 오리엔탈리즘, 패권적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와 인권이 고르게 보장되는 ‘사회적 아시아’를 향한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은 아시아에 대한 우리의 편협한 사고를 꼬집는 1부 ‘아시아를 향한 성찰’, 현재 아시아 각국이 처해있는 현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2부 ‘오늘의 아시아’, 시민사회의 아시아 연대를 모색하는 3부 ‘아시아 연대를 위하여’로 구성돼 있다. 필진으로는 조희연 성공회대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연구소 소장, 조효제 성공회대 NGO대학원 교수를 비롯해 국내 아시아 지역 연구자, 활동가, 아시아 출신 유학생 등 25명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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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들어가며] 아시아에 주목해야 할 이유 -조효제

1부 아시아를 향한 성찰

○ 아시아의 자존심? -전제성
○ 우리에게 보이는 아시아는 정말 아시아인가? -이재현
○ 한국에서 친구 사귀기 -유완또
○ 국경과 국적에 갇힌 인권 -이재현
○ 인공의 도시, 차이나타운 -백지운
○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이재현
○ ‘메이드 인 코리아’ 낙인의 진짜 이유는… -이재현
○ 신부 사오는 사회 -박이은실
○ 지자체의 국제결혼지원사업을 반대하는 이유 -이재현

2부 오늘의 아시아

○ 아세안, 공동체 버리고 FTA 택하려나 -이성훈
○ 가야 할 길 먼 동티모르의 ‘독립’ -최재훈
○ 징기스칸의 아시아, 몽골의 민주주의 -김은경
○ ‘금권민주주의’가 불러온 태국의 쿠데타 -박은홍
뛰는 경제, 기는 정치 속의 베트남 -이한우
○ 베트남 사회주의와 노동력 부족 현상 -채수홍
○ 필리핀의 공공연한 정치적 살해 -정법모
○ 내가 만난 인도네시아 여성운동가 -정은숙
○ 중국, 그 배반의 이름으로 -김도희
○ ‘조직’ 대신 ‘시민’ 만든 일본 시민사회 -한영혜
○ ‘야만의 시대’에 갇힌 버마, 가스 개발에 눈먼 한국 -박은홍
○ 새로운 네팔을 향한 기회와 도전 -지번 바니야
○ 네팔 총선 국제 선거감시단 활동기 -차은하
○ 필리핀 남부 통근철도사업 이주지역 이야기 -정법모
○ 너무 깊게 드리워진 수하르토의 그림자 -김은경
○ 경제회생 포퓰리즘…한국도 태국,필리핀 전철 밟나 -박은홍

3부 아시아 연대를 위하여

○ 한국 시민사회의 동아시아 연대운동 -전제성
○ 입으로는 ‘아시아 연대’ 외치지만… -지번 바니야
○ 공감은 연대의 또다른 이름 -박이은실
○ 아시아 연대의 한류 -박진영
○ 내가 생각하는 아시아 연대 -제시카 우마노스 소토
○ ‘천국보다 낯선’ 티베트의 잔인한 봄 -나현필
○ 중국과 티베트, 한국의 민족주의 -이대훈
○ 우리의 인권좌표를 넓혀라 -차은하
○ 대상에서 주체로! 아시아 이주민의 위상전환 -전제성
○ 생각을 바꾸는 ‘천원’을 아십니까 -박영선
○ 언어와 연대 : 아시아 이주민들로부터 아시아 언어를 배우자 -전제성

[나오며] ‘사회적 아시아’를 향한 상상 -조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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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기억의 도시가 되려는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설레임처럼 새로운 지역을 간다는 것은 미지에 대한 호기심으로 마음의 밑바닥에서 전해져오는 떨림이 있다. 특히나 평소에 가보고 싶던 곳이라면 더욱 그렇다. 지난 가을에 갔던 타이베이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위치한 지우펀(九份)은 금광이 있던 곳으로 일제 강점기 일본인의 감시 하에 굴욕을 당하던 채광 노동자들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사금 한 조각이라도 몰래 빼낼까 감시하던 광산주들은 야간작업을 마치고 귀가하는 그들의 몸수색을 위해 은밀한 부분까지 거울을 비춰가며 모욕을 주었다.
 
 타이완이 해방되고 광산이 폐광된 이후 지우펀은 잊혀 졌지만 허우샤오셴이 이곳을 배경으로 <비정성시(非情城市)>를 찍으면서 다시 사람들의 기억으로 돌아왔다. <비정성시>는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또 다시 국민당의 통치하에서 한 가족이 당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을 느린 선율로 보여주었던 영화다. 여기서 귀머거리이며 벙어리였던 문청역의 양조위가 뿜어내는 눈빛은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었던 지우펀에 가보고 싶은 욕망을 일으켰다.
 
 그러나 직접 가본 지우펀은 내가 상상하던 곳이 이미 아니었다. 이제는 폐쇄된 지난 시절의 극장 간판만이 이곳이 <비정성시>를 잉태한 지역이었음을 암시하고 있을 뿐 계단으로 이어진 주택들은 이제는 물건을 파는 상점으로 변해 조잡한 상술이 거리 곳곳을 술렁대고 있었다. 카페에 앉아 항구를 바라보며 차를 마시는 수많은 젊은 연인들에게 이곳은 더 이상 타이완의 비극을 가진 역사의 장소가 아니었다. 너무나 보고 싶던 사람을 직접 만나고 나서 '차라리 만나지 말 것을…' 하고 후회하듯이 현실 속에 생생한 지우펀은 내가 기대했던 그곳이 아니었다. 이럴 때 난 내 기억에 배반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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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던가. 지난 4월 중간고사 기간을 이용해 윈난(雲南)성을 가기 전, 나는 또 다시 얼마나 가고 싶었던가를 생각하며 베이징에서 비행기에 오를 때부터 약간의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비행기를 많이 타봤지만 윈난으로 가는 남방항공은 유달리 비틀거리며 요동을 치며 아슬아슬하게 고도 1840미터의 성도(省都)를 향해 날아갔다.
 
사계가 모두 봄(四季如春)과 같다는 쿤밍, 구름으로 둘러싸인 곳, 수많은 소수민족이 살아가는 곳, 이상향 샹그릴라가 있는 곳…. 윈난을 수식하는 미사여구는 다양하게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의 관심은 옥룡설산의 눈 녹은 물이 흐르는, 한옥건물이 즐비한 고성 마을로 불리는 리장(麗江)에 있었다. 리장에 가고 싶었던 건, 이곳이 강진으로 세상에 알려져서도,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윈난에 살고 있는 60여만 명의 20여개 소수민족 중에서 모계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티벳족의 혈통을 가진 머쒀(摩梭)족, 자신들의 문화와 문자(東巴文)를 유지하면서 검은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는 나시(納西)족의 삶을 보고 싶어서였다.
 
2400m높이에 펼쳐진 산과 들판은 이렇게 높은 곳에 이렇게 평화로운 정경이 존재한 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지게 했다. 그러나 높이나 해발, 이것은 과연 누구를 중심으로 한 것일까. 여기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에게 리장은 바로 평지가 아닐까. 머쒀족이 사는 루구(瀘沽)호는 기회가 없어서 못 갔지만, 리장 곳곳에서 나시족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터전에서 나시족 몇몇은 집에서 만든 물건을 내다 팔며, 몇몇은 공원에서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해주면서 살고 있었다. 리장 중심에 위치한 극장에서는 여수금사(麗水金沙)라는 제목으로 리장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소수민족 공연을 하고 있었고, 화려하게 치장한 무용수들이 나시족이 유지하고 있는 전통 혼례관습을 무대에서 보여 주었다. 쏟아지는 박수소리를 들으며 그들의 일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구경거리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것을 나시족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리장이 여행 오는 사람들로 넘쳐나면서 그들이 거주하던 한옥은 거의 모두 상점으로 변해버렸다. 이제 리장은 아름다운 물이 굽이굽이 마을을 돌던 검은 얼굴빛을 가진 민족의 터전이 아니라 지우펀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상점과 물건을 흥정하는 군상들, 밤이면 떠들썩한 음악과 비트에 몸을 맡기고 흥청거리는 젊은이들의 도시가 되었다. 자본의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자본의 힘에 흔들거리는 옛 기억의 장소들을 볼 때마다 불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현실의 리장은 지우펀과 마찬가지로 내가 기대했던 그곳이 아니었다. 하나 둘씩 실망을 안기는 기대의 장소들처럼 지우펀과 리장도 이제 사라진 기억의 도시가 되어버릴 것 같다.

김도희(한신대학교 중국지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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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빈민운동의 결실, 홈리스 센터


2008년 4월 9일은 태국에서 방콕 노이의 철로주변에 노숙자 쉼터가 문을 여는 날이었다. 태국에서 첫 번째로 문을 여는 노숙자 쉼터의 이름은 '스윗 와트누 홈리스 센터'였다. 태국의 홈리스단체 및 빈민단체들이 지속적으로 철도청이나 사회복지부에 지속적으로 요구하여 완성된 시설에 빈민들은 작년에 작고한 빈민운동가 '스윗 와트누'의 이름을 사용되길 원했다. 태국 최대 명절인 송크란 직전에 있었던 개관식에 스님들은 물을 부어 축복했고, 방콕 부시장, 사회복지부 관계자 등을 비롯한 200여 명이 운집했다.
 
미디어에는 이날 참석한 명망가들이나 정부의 지원사업이라는데 의미가 있겠지만, 주민들에게는 빈민지역 주민운동단체들이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직접 참여하여 얻어낸 성과라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가지는 날이었다. 방콕 시내의 공원이나 광장에 산재되어 있는 노숙자에 대해서 쫓아내거나 보호 시설에 수용하던 기존의 국가 정책과는 달리, 금번 노숙자 쉼터는 60여 명이 머무르면서 쓰레기 수거나 막노동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장소로 이용하는 곳이다. 방콕 시내에만 1500명 이상이 넘는 노숙자를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공간이지만 제2, 제3의 센터를 개관하기 위한 교두보로서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빈민이나 노숙자들을 범죄자나 사회의 골칫거리로 치부하는 국가 권력에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던 빈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요구할 수 있게끔 의식과 태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스윗 와트누라는 인물을 '빈민의 대통령'이라 칭한 이유는 이러한 환경의 변화 때문이다. 스윗과의 인연으로 행사에 참여한 한 일본인 홈리스 대표는 자신들의 홈리스센터는 감옥과 같은 곳이었지만, 이 센터는 집과 같은 곳이라고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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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윗 와트누 홈리스 센터' ⓒ정법모

  철길 근처 장기임대 승인 얻어낸 태국 빈민들
 
방콕 시내를 가로지르는 철길 근처에는 어느 개발도상국과 마찬가지로 빈민들이 많이 살고 있다. 1961년 시행된 국가 경제 및 사회 개발 계획 이후에 시골 지역에서 터전을 잃은 빈민들이 대도시로 많이 유입되었고 공유지인 철길 주변이나 다리 밑에 많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주로 도심에서 쓰레기 수집이나 거리 청소, 건설 노동자, 운전기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사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기피하는 일이나 구석진 일들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태국 정부는 '불법침입자'(trespassers)로 규정하고 이들을 도심에서 쫓아내는데 주력해 왔다.
 
빈민운동단체 COPA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전국에 3750개 (513만 명)의 슬럼 지역이 존재한다고 하는데, 최근 태국이 경제 성장하면서 이들에 대한 강제 철거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대략 위에 언급한 지역 중 445개 지역이 철거 중이나 철거 공시를 받은 상태라 한다. 과거 국가 기관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도심 밖으로 쫓기거나 빈민용 공공 주택으로 내몰려야 했던 빈민들도 1980년대 후반부터는 새로운 협상 방법을 시도하기 시작하였다. 사유지나 공유지에서 빈민들이 집합적인 행동을 통해 그 지역에 대한 업그레이드 작업을 맡으면서 저임대의 장기임대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이들은 본인들이 새로운 주택 및 동네 설계를 하여 정부로부터 승인을 얻고 사회복지단체로부터 후원을 받아 직접 주택 건축에도 참여하게 된다.
 
어느 국가에 있는 빈민들과 마찬가지로, 도시 빈민들은 도시 중심이나 도심 변두리에서 자신들의 직업을 찾을 수 있으며 도시의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았을 때만, 비공식부문 직업이나 쓰레기 수거 등의 일을 할 수 있다. 이들을 도시에서 떼어내는 것은 단순히 거주지역을 이동하는 의미뿐 아니라 그들의 삶을 위협하는 것을 의미한다. 태국의 슬럼지역 주민조직의 연합인 '4개 지역 슬럼 네트워크'(Four Region's Slum Network)는 태국 철도청과의 오랜 투쟁과 협상 이후 여러 지역에서 장기임대에 대한 승인을 얻어 내었다. 태국 철도청이 이 지역들은 개인 사업가나 상법 용도로 임대해주던 것과는 달리 2000년 이후에는 집합적인 빈민들의 요구에 응해주기 시작했다.
 
총전체 32000 헥타아르의 철도청 소유의 부지 중 8000 헥타아르에는 도시빈민들이 주거하고 있으며, 이들 인구는 1만7000가구에 이른다. 이들은 효율적이고 성공적인 협상을 위하여, 철도주변 빈민지역을 단계적으로 구분하여 협상하기 시작하였다. 즉 2000년 9월, 약 2년간 언론을 통해 압력을 행사하고 정부기관이나 거리에서의 시위를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지속적으로 알려온 이후, 빈민조직들은 철도청과의 협상 자리에서, 철로에서 20m 이내 지역, 40m 이상 떨어진 지역으로 구분하여 각기 다른 대책을 주장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만들어 냈다. 40m 이상 떨어진 지역은 30년간의 장기계약, 20m에서 40m 지역은 3년간의 임대 및 개발 계획 진행 이전에 원래 거주지역에서 5㎞ 이내에 이주지역을 제공받을 약속을 받는 것, 그리고 20㎞ 이내 지역은 역시 원래 거주지역에서 5㎞ 이내에 있는 이주지역을 보장받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정부기구가 원칙에 합의했다고 해서 그 약속이 곧바로 실행되거나 정부가 적극적으로 집행하는 것과는 다르다. 여전히 주민조직의 집합적인 요구가 있었을 때 이러한 노력들이 실행에 옮겨지며, 범죄자 취급하던 노숙자에 대해서 처음으로 문을 연 노숙자 쉼터도 빈민조직들의 지속적인 요구와 협상에 의해서 이루어진 성과였다.
 
  적극적인 의사 관철, 자금 마련 나선 태국의 빈민운동
 
짧은 기간이었지만 태국의 빈민 지역 내의 주민조직활동은 필리핀에서의 빈민운동과는 또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필리핀에서의 주민조직운동이 의사결정이나 자금 마련에 있어서 다소 NGO에 의존적인 측면을 보인 방면, 태국 주민조직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시켰으며,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자금 마련도 훨씬 적극적이었다.
 
특히 본인들 마을에 대한 계획을 직접 세우고, 당면 과제가 해결한 이후로도 조직이 지속적으로 타빈민지역 문제나 국가적 사안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물론 한 나라의 경제적 발전 수준에 차이가 있다는 점이 중요한 이유가 되겠지만, 경제적 수준이 높은 나라에서도 자발적, 지속적인 주민운동이 실현되지 못하는 사례를 보면, 태국의 빈민운동에서 여러 가지 시사점들을 얻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이 된다.

정법모 (필리핀대학 인류학 박사과정)

<참고> 스윗 와트누의 생애 (COPA 활동가 Ake가 작성한 글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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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법모



촌부리 주의 시골 지역에서 태어났던 스윗 와트누는 군사 독재 시기였던 1971년과 1972년을 대학에서 보내면서 사회 정의나 사회 변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973년 대학 3학년이던 체게바라, 마오쩌뚱, 호치민 등의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면서 학생운동에 관여하기 시작하여1973년 10월 14일 있었던 독재자 축출을 위한 시위에 학생회장으로 참가하였다. 하지만 민중시위를 통해 얻어낸 민주화시기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1976년 다시 군부에 의한 비민주적 통치가 시작되었다. 교육학을 전공하고 1975년부터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그는 여전히 학생운동이나 농민운동에 관련하다 1976년 복귀한 군사독재에 반대하던 학생들을 유혈진압했던 이후, 학교를 그만두고 정글에 들어가 무장투쟁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중간에 많은 학생들이 산에서 내려와 도시로 돌아갔으나 그는 1980년까지는 총창산에서 1985년까지는 춤포주에서 부사령관으로 있으면서 무장투쟁을 계속하였다. 산에서 내려온 후, 1987년에는 두앙 프라테엡 재단에서 일을 하면서 NGO 단체인HSF(Human Settlement Foundation)과 함께 슬럼지역에서의 주민조직 USDA(United Slum Development Association)의 결성을 도왔다. 그 이후 복지 서비스나 지역개발사업을 하던 두앙 프라테엡 재단보다 주민들의 정치적 역량 강화를 추구하던 HSF 일을 1987년부터 맡게 되었다. 매일같이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사람들과 친화 관계를 맺고 일을 하면서 주민들을 조직하고 그들로 하여금 사회문제를 분석할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성실하고 근면한 그의 조직화 방법외에 탁월한 정부부서와의 협상력으로 말미암아 여러 빈민 조직운동들이 성공적인 성과를 내기 시작하였다. 겸손하면서 예의바른 태도 외에 논리적이고 예리하게 상대를 설득하는 힘이 대외 협상에서 좋은 효과를 낳게 하였다. 1998년 USDA뿐 아니라 여러 지역의 주민조직들이 합세하여 4개지역 슬럼네트워크가 결성되었고 스윗은 창시 때부터 이 조직의 자문위원으로 일을 했었다. 슬럼지역 주민 운동에 노숙자들을 포함시켰으며, 도시빈민 뿐만 아니라 농민 그리고 태국 전역에 있는 빈민들을 연계시키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전국 빈민들의 연합 결성체였던 '빈민위원회'(Assembly of the poor)의 자문위원이었으며, 빈민운동들을 아시아 국가나 국제적으로 활동을 교류하게 하는 역할을 맡았다.
 
 빈민들의 정치의식을 고양하는데 힘을 기울였던 그는, 태국에 1992년 군사정권이 다시 들어섰을 때 이 체제에 반대하는 운동에도 관여했다. 이 당시 그는 빈민들에 대해서, 슬럼지역 주미들이 더 이상 자신들의 배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서거나 당면문제만을 푸는 것을 위해서만 투쟁하지 않는다는 점에 뿌듯해 했다고 한다. 일례로 태국 내 민주화 운동을 위해 결성된 '민주화를 위한 슬럼조직(Slum Organization for Democracy)'에는 500 여 명의 슬럼 지역 주민이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빈민조직을 태국내 민주화운동조직인 CPD(Campaign for Popular Democracy) 활동과 연계하는 것도 스윗의 활동이었다. 스윗은 CPD에서 활동하면서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으나 2005년부터는 대안적 진보 정당을 결성하는데 노력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민중들의 대중 정당을 만드는 데에는 여러 영역에서 흩어져서 움직이는 대중운동을 집결할 필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보정당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은 탁신정부의 비민주적 통치로 인한 퇴진운동을 위한 참여 때문에 연기되었다. 스윗은 민주화를 위한 인민연합(People's Alliance for Democracy)에 빈민섹터를 대표하여 참여하게 되었고 탁신이 하야한 이후 스윗은 다시 빈민 섹터로 돌아와 진보정당을 결성하기 위한 노력에 매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2007년 3월 11일 농민 지도자 세미나에 참여했다 돌아오던 중 갑작스럽게 심장질환으로 인하여 5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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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27일 올림픽 성화봉송을 놓고 일부 젊은 중국인들과 다양한 한국인 그룹 사이에 충돌이 있었고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한국에 체류하던 젊은 중국인들이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집단적 애국주의 광기를 표현했고 그 반발로 반중국 여론이 일고 있다. 중국 대사관이 조직적으로 개입한 것이 확인되었고 한국 검찰까지 나섰다. 차이나타운에 발길이 줄고 중국인에 대한 배타적 태도가 훨씬 많이 눈에 띠었다. 수면 밑에서 티베트에 관한 논쟁이 번져나가고 있다. 며칠 지났으니 몇 가지 주제를 짚어보고 깊이 생각할 거리를 찾아보았으면 한다.
 
'올림픽과 티베트 문제를 연계시킨 것은 정치적이고 잘못된 일인가?'
 
한국 사회에서는 티베트에서의 심각한 인권침해에 대해 이제야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니 오히려 뒤늦은 감이 있고, 이 상황을 베이징 올림픽과 연계시키기로 한 것은 피해 당사자인 티베트 망명 그룹과 독립운동 그룹의 결정이므로 존중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도시빈민 철거문제와 노태우 정권의 문제점을 외국에서 상당히 문제제기했지만 이것이 올림픽을 공격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한 나라 정부가 올림픽을 이용해서 독재나 인권침해를 가리고자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정치적 음모에 가깝다고 할 것이고 중국 정부가 이러한 비난에서 그리 자유롭다고는 볼 수 없다. 이는 인권단체들만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올림픽에 참여하는 운동선수들도 주최국 정부의 정당성과 인권 수준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런 것이 오히려 올림픽의 정치화를 막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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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징 올림픽 성화가 도착한 지난 달 27일 오전 서울 올림픽 공원에서 한국내 거주하는 중국인들이 올림픽을 축하하는 집회를 갖고 있다. ⓒ뉴시스 

'현재 국제정치 역학을 고려해서 중국 정부를 좀 배려해주고 외세에 대한 피해의식을 고려해 주어야 하지 않는가? 또 대국인 중국을 지나치게 자극하면 원하는 결과의 반대를 얻는 역효과를 내는 것 아닌가?'
 
결국 조심해라라는 경고인데, 역효과를 얻을 것이라고 확증할 만한 근거가 별로 없는 우려일 뿐이다. 그 만큼 중국 사회의 애국주의 광풍이 무섭다는 반증일 것이다. 히틀러가 등장할 때 어려운 상황의 독일을 좀 더 배려해 주었어야 했는지, 서구 열강과 경쟁해서 아시아의 자부심을 얻고자 했던 일본제국을 좀 더 배려해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이스라엘의 만행도 배려하고 조심해서 비판한다? 식민지 피해 경험 때문에 그렇다는 것은 피해의식이 특정한 광기와 결합되면 더 공격적인 태도로 변한다는 점에서 중국 변호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피해의식은 파시스트들도 잘 쓰는 상품이다. 소수 집단의 인권과 자결권을 보장하라는 외부의 관심에 대해서 중국 사회에서 어떤 역효과가 난다면 그 역효과는 중국의 정치와 권력구조 그리고 대중문화의 산물일 것이다.
 
'중국 점령 이래 생활 조건이 더 좋아졌고 중국 정부가 끝까지 불허할 텐데 티베트가 꼭 독립할 필요가 있나? 독립한다고 티베트인들의 생활과 민주주의, 인권 이런 문제가 해결될까? 중국에 남아서 협상하는 것이 더 낫지 않나?'
 
이건 강자의 어법이다. 제국주의자들의 어법이다. 한국도 일본 강점 덕분에 근대화되었고 잘 살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어법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인권이나 민주주의 기준보다 친중국 정서를 더 중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일단 티베트인들에게 말할 자유, 결사할 자유, 행동할 자유부터 주고 나서 그 다음에 이 질문을 하던지 말던지 하면 된다. 앞뒤가 바뀌었다. 그만 죽이고 그만 고문하고 그만 투옥하고 물어야 한다. 티베트 독립이나 더 높은 자치는 절대 안된다는 중국 정부의 체계적인 선동과 세뇌를 중단한 다음에 물어야 한다. 티베트인들은 원래 야만적("봉건적")이었으니 중국이 해방시켜주었다는 선동을 중단한 다음 물어도 된다. 고문하고 학살한 것에 대해서 사과도 하고 반성도 한 다음 물어도 늦지 않다. 그리고 나서도 티베트 사람들이 대부분 중국에 남겠다고 하면 별 문제 없지 않겠는가. 그럴 리 없으니 탄압하는 것이겠지만.
 
'미국과 친미반중국 세력이 티베트 인권 문제를 중국때리기에 악용하는 것은 어찌해야 하나?'
 
이것은 중요한 문제다. 일부 중국 시위대의 폭력 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다. 한국 사회에 티베트 인권운동 그룹들이 이 문제에 잘 대처해야 한다. 일단 미국 정부와 친미반중국 세력의 정치음모적 접근은 잘못되었다고 시민사회 내부에서 강한 질타가 있어야 한다. 세계적으로 인권문제에 미국 정부가 개입하면 골치아파진다. 조폭이 자선사업을 하는 꼴이랄까. 이럴 때 인권 단체들은 이중의 비판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즉 미국 정부의 접근과 일부 기독교세력을 포함한 반중국 세력의 접근에 대해서 호된 비판을 가하는 동시에 티베트 문제를 제기함으로서 이 문제에 정면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중국때리기 방식의 접근을 비판하지 않으면서 티베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위험하다. 인권문제를 제기할 윤리적 자격이 중요하다. 중국 시위자에 대해서 엄벌을 요구하며 일종의 보복을 설파하는 것도 매섭게 비판해야 한다. 한국에서 반중국 민족주의 선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패권국가적 접근,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당파적 접근, 민족주의적 접근에 대해 항상 비판을 유지하면서 모든 인권 문제를 불편부당하게 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구더기 무서워 장 안 담글 수는 없으니. 서구가 한 짓은 더 한데 뭘 그러냐고 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인권의 영역에서는 답변할 가치가 없다.
 
어떻게 해야 하나?


27일 종각에서 광화문으로 행진한 비교적 합리적인 티베트 인권 행진에서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부 사람들이 동북공정과 티베트 점령이 같은 것이라며 한국도 언젠가 티베트 처럼 당할 것처럼 선동한 것이나, 어떻게 한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저런 난동을 펴는지 분개하는 모습은 이해가 가는 면도 있지만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러한 정서의 연장선상에서 지금 국내 체류 중국인들에 대한 반감이 다양하게 표시되고 있는데 이건 큰 문제다. 이것인 중국 정부가 외세에 대한 피해의식을 앞세워 탄압과 인권침해를 정당화하는 것과 같은 논법이다. 한국의 민족주의를 동원해서 중국을 비판하겠다는 것인데 이 길로 가면 모두 망한다. 인권과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런 집단적 피해의식을 그만 동원해야 한다. 모든 형태의 민족주의에 경계령을 내려야 한다. 집단의 피해를 앞세우는 순간 독재자, 파시스트, 민족주의자, 군부 보통 이런 사람들이 미소를 짓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민족을 생각하게 하는 집단 호칭을 국어에서 싹 빼고 생각하고 말하자. '중국인들'이라고 하지 말고 '일부 폭력행위자'라고 말하자. '감히 남의 나라 수도에서 이런 일이..' 하면서 분개하는 대신 '평화적 시위에 폭력을 행사하다니'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이 한국을 얕보니까'라고 말하지 말자. 그런 중국과 한국은 인격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인들은...'이라는 주어를 가급적 피하자. 애국주의 광기와 관련되어서 주 책임은 중국 정부이므로 '애국주의 교육에 피해자인 중국인들', '정부의 세뇌공작으로 편견을 갖게 된 중국 청년들은' 하면서 이해할 수 있다. 중국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이렇게 국민이나 민족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는 걸 피하면 더 많은 진실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한국도 마찬가지 - '강부자' 내각과 한나라당에게 하나의 나라가 없듯이 원래 하나의 나라에 한 나라는 없다.

이대훈(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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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지붕, 네팔에도 봄이 오기를

4월10일은 네팔에 의미있는 날이었다. 239년에 걸친 네팔의 왕정을 끝내고 공화정을 출범시키기 위한 네팔의 첫 제헌의회 선거가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 의미만큼이나 국제 사회로부터 네팔의 제헌의회 선거는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UN 반기문 사무총장은 네팔의 제헌의회 선거가 공정하고 민주적으로 치러지기를 요청하고 미국의 전 대통령 지미 카터는 총선을 참관하기 위해 네팔을 방문했다. 28개 국제기구와 비정부기구(NGO)는 네팔 총선에 약 900명의 선거 감시단을 파견했고 네팔 시민사회에서도 선거 자원활동가와 민간 부정선거 감시요원을 조직해 네팔이 선거를 통해 거듭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필자는 아시아 지역에 선거감시단을 파견하는 네트워크 조직 ANFREL(Asian Network for Free Elections)을 통해 국제 선거감시단으로 약 열흘간 활동을 하고 돌아왔다. ANFREL은 1997년에 설립한 이후 지난 10년간 스리랑카, 태국,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파키스탄 등 많은 아시아 국가의 민주주의를 강화하고자 노력해왔다. 국제 선거감시단을 파견하는 것뿐 아니라 시민교육, 선거 개혁을 위해 활동하는 시민 단체들의 역량을 강화하는 노력도 함께 하고 있다. 이번 네팔선거에는 약 25 나라의 아시아 국가를 비롯해 남아프리카공화국, 호주, 캐나다의 시민단체가 참여하였고 약 20명의 장기 선거감시단과 80명의 단기 선거감시단으로 나누어 100명이라는 큰 규모로 조직되었다.
 
ANFREL은 감시단을 파견하기 전 선거 감시단의 역할과 주의점들을 교육시켰다. 당시 네팔 의회당과 마오공산당 간의 갈등이 첨예하여 종종 폭력사태로 나타나고 있어서 파견 전 긴장감이 꽤 높았다.
 
  민주화의 첫걸음을 내딛는 네팔
 
현재 네팔은 74개의 정당이 난립해 있다. 그러나 네팔국민회의당(NC)과 마르크스 레닌 주의자 연대인 네팔공산당(UML), 마오 반군이 만든 네팔공산당(Maoist)가 주요 3대 정당으로 꼽힌다. 이번 총선에서는 국민회의당과 공산당간의 대결구도로 예상되었다. 절대왕정 국가였던 네팔은 1990년 입헌군주제가 도입되면서 정치상황이 급변하였다. 그러나 1996년 마오공산당의 무장봉기로 내전에 빠지게 된다. 네팔정부는 마오공산당과 10년의 내전을 치루면서 갈등이 증폭되고 많은 서민들의 삶도 피폐해졌다. 다행히도 2006년 11월 네팔정부와 마오공산당은 공동 임시정부를 구성해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총선에 합의하게 된다. 그러나 유혈사태는 아직도 진행되고 있었다. 따라서 총선시기에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자 하는 당간의 갈등은 증폭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파견된 지역은 안나푸르나의 출발지로 유명한 포하라(Pakhara)와 근접한 타나후(Tanahu)라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3개의 선거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한 선거구에선 국민회의당과 마오공산당의 각 후보가 개인적 영향력도 비등하게 높았고 각 정당에서 이 지역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높아 당원 간의 마찰이 자주 있었다. 선거일을 앞두고 선거관리위원회는 여러 준비로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산간지역이 많고 도로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이곳에선 선거물품을 옮기는 것에도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선거관리인단을 만나 면담을 하자 그는 네팔의 선거 준비로 겪는 애로 사항을 들려주었다. 네팔은 자동차로 이동이 어려울 정도로 험한 오지들이 많아서 나귀를 이용해 선거물품을 이동시키기도 한다고 했다. 특히 이곳의 문제는 외지인들의 접근이 어려워 당, 특히 마오공산당에 의해 장악된 지역이 많다고 했다. 이것은 그만큼 공정한 선거를 치루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형사 콜롬보가 되어라. 국제 선거감시단으로 지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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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팔 국민들이 투표절차를 밟고 있다.  


국제 선거감시단의 역할은 어느 정도 정형화 되어 있다. 총선 전에 얼마나 선거단이 준비를 잘 하고 있는지, 투표자들이 자유 의사에 의해 선거에 참여하고 정치적 발언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지, 공정 선거를 위한 외압 및 폭력 사태는 없는지 등 정보를 직접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수집하는 것이다. 선거감시단은 이를 꾸준히 언론이나 국제사회에 알려서 네팔정부가 좀 더 공정한 선거 환경에서 선거를 준비하고 각 정당들이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안정적 선거 환경을 유지하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감시단으로서 정치적 개입은 절대 금지 되어 있다. 절대적으로 선거 준비 인원이 부족한 나라에서 국제 선거감시단은 안정적 선거 환경을 제공하고 정치적 불안을 최소화하는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되었다.

필자는 방글라데시에서 선거 감시활동을 했던 FEMA(Free Election of Monitoring Alliance) 멤버와 선거감시활동을 시작했다. 필자가 방문했던 대부분의 지역은 우리에게 호의적이었고 이들이 이번 선거를 통해 사회 변화를 얼마나 이루고 싶어하는지 설명해 주었다. 근 9 년 만에 이루어지는 선거로서 많은 네팔인들은 이번 선거를 통해 지금의 불안정한 네팔 정세가 나아지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특히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기대가 묻어났다. 네팔은 오랜 정치적 갈등과 무능으로 사회 발전이 많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회기반시설이 아직도 매우 취약하여 우리가 머물렀던 타나후에서도 전기나 물이 끊어지기가 일수였다. 거리를 다녀보아도 가로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며 도로 역시 매우 낙후되어 있었다. 그래서 지형이 험해 접근이 어려운 일부 지역은 특정 정당의 정치적 통제를 받기 쉽다고 한다. 실제로도 산악지역의 마을에 들어가 보면 사람들이 외국인으로서 우리들을 경계하고 그들의 정치적 발언도 거의 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는 국제 선거감시단으로 선거 감시활동이 매우 필요한 지역에 들어간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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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선거감시단이 현지 선거 감시 단체들과 면담하는 모습

둘말리(Dumali)는 타나후에서 중심 도시였다. 이 곳을 방문했을 때 오전임에도 마을의 몇몇 남성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들에게 다가가 '라마스떼(네팔어 인사)' 인사를 건네며 선거에 대한 기대 등을 물어보았다. 이들은 매우 유쾌하게 선거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며 이 마을에서는 별 문제 없이 잘 지낸다고 전했다. 또한 이번에 첫 선거를 하기위해 카투만두에서 온 마을 청년의 수줍은 미소가 기억에 남는다. 소수 정당의 후보자도 만날 수 있었는데 자신의 당의 자부심을 여과없이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 자리에는 여성들도 있었는데 가족간이나 여성들끼리 선거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나누지 않아 남성들 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실제로 선거일 이른 아침에는 남성보다 많은 여성들이 투표를 위해 나와 있었고 많은 여성들이 자원활동가로 선거 준비며 부정선거 감시 활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시장에 가보면 특정 정당을 상징하는 깃발을 흔들며 다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발언이 있으면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이에 맞서서 "NC, NC(네팔국민회의당)"하고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필자가 접한 사건 중에는 국민회의당을 지지하는 군중 버스가 지나가자 거리에서 돌멩이가 날아와서 차에 타고 있는 당원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다. 군중 속에서 발생한 사건인 만큼 경찰도 범인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같은 장소에서 국민회의당 지지자들은 점심 식사를 하고 있는 마오공산당 지지당원을 보복 폭행하는 사고가 있었다. 이렇듯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서야 별 문제 되지 않는 광경들이 이곳에서는 자칫 긴장을 유발할 수 있는 사건으로 번질 수 있어 사소한 것 하나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지역 선거 단체 및 언론, 경찰관은 주요한 사건 정보를 기민하게 얻을 수 있는 창고였다. 산악지역이 많은 반면 열악한 도로 사정으로 접근이 어려운 지역이 많았는데 이러한 경우 현지 단체를 통해 매우 빠르게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필자가 담당한 지역의 정치구도나 상황도 좀 더 정확하게 들을 수 있었다. 또한 네팔에 평화 프로세스를 정착하기 위해 들어와 있는 UN 및 여러 나라에서 파견한 국제 감시단과의 협조는 효율적으로 감시활동을 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당원간의 폭력 사태가 있었다는 보고를 받았을 경우 직접 그곳을 방문해 정황을 파악해 보기도 했고 보복 폭력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이면 그곳에 대한 일정을 여러 국제 감시단과 공조하며 주시하기도 했다.
 
  긴장된 하루, 그러나 평화로운 선거 D-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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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여성들이 선거 활동에 참여했다.


타나후 지역은 선거 당일 평화롭게 진행이 되었다. 오히려 이른 아침부터 기다란 줄을 서서 들뜬 마음으로 투표용지를 받고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활기찼다. 우리나라와 같이 효율적인 시스템이 아닌 상황이어서 사람이 일일이 복잡한 선거 명단을 찾아보고 안내하고 혹시나 모를 무력 충돌을 막기 위해 파견된 경찰들이 나와 있었다. 네팔의 선거 시스템은 CA시스템으로 지지 후보와 지지 당을 따로 투표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많은 노인들이 이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대부분 젊은이들은 라디오나 TV를 통해 이 시스템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네팔은 선거 부정을 막기 위해 선거 당일 모든 차량이 통제된다. 자동차가 있으면 당원을 각 선거구로 파견시켜 부정 투표를 일으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도로 길을 따라 선거구로 가는 진풍경을 나았다. 인상적인 것은 여성의 참여가 매우 높았다는 것이다. 필자가 다닌 지역은 약 55~60%의 투표율이 나타났는데 여성의 참여가 조금 높거나 비등하게 나타났다.
 
  5시 선거가 끝나고 정리하는 시간은 이날 가장 중요하게 감시해야할 부분이었다.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투표함을 보자기로 꽁꽁 싸는 것은 물론 비 선거 용지 수와 투표자 수가 총 선거자 수와 같은지 맞춰보는 작업이 복잡하게 진행되었다. 투표함을 정리하는 와중에 감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투표 용지를 일부러 훼손하거나 허용되지 않은 선거 용지가 투표함에 포함돼 부정행위가 일어 날 수 있기 때문에 선거가 끝났다고 모든 선거 감시 활동이 마무리 되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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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선거감시단이 네팔 여성들과 선거 참여에 대한 주제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선거가 끝난 직후 각 마을은 술렁거렸다. 특히, 국민회의당과 마오 공산당 당원의 대립이 있는 지역은 저녁 늦게까지 개표소에 사람들이 무리지어 남아 있어서 혹시나 무력충돌은 없을까 긴장되는 시간이었다. 선거다음날 크고 작은 사고는 있었으나 네팔 정부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평화적으로 선거가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였고 국제사회도 이를 환영했다. 필자가 귀국한 후 4월 21일 외신에 따르면, 240개 선거구 중 237곳의 개표가 마무리된 현재, 마오주의공산당(CPN-M)이 전체 의석의 절반인 120석을 확보하고 네팔국민회의당(NC)과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내건 네팔공산당(UML)은 각각 37석, 32석을 얻어 마오공산당이 압승하고 있다고 한다. 마오공산당의 앞날이 여러 정세 속에서 쉽지는 않겠지만 네팔의 진정한 변화와 안정을 가져오길 기대해 본다.

 (차은하/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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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대에서 1년간 아시아 NGO연구과정을 마치고 참여연대에서 한 달 동안 인턴으로 활동했다. 한국어를 잘 못해 사람들과의 교류가 다소 어려웠지만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소중한 경험으로 남을 것이다.

한국인을 직접 사귀면서 한국에 대한 인상도 많이 바뀌었다. 한국인들은 수줍으면서도 친절하고 공손했다. 한국인의 수줍음은 아마도 언어장벽 때문이라고 생각되지만 이런 점이 내게 큰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때로는 그저 미소나 목례를 교환하는 것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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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2월, 참여연대 제14차 총회에서 제시카

성공회대에서 공부할 당시, 동네에서 여러 친구들을 사귀었다. 중국음식을 배달하던 친구, 동네 세탁소를 운영하던 친구, 조그마한 가게를 운영하던 이웃 아저씨와 아줌마도 있었다. 이들과는 쉬운 영어와 한국어, 손짓으로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하루는 세탁소 아주머니와 10 여분 동안이나 더듬더듬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헤어질 때쯤 서로를 잘 이해했다는 충만한 느낌은 인상적이었다. 그와의 대화는 즐거웠다. 그는 지금쯤 내가 필리핀으로 돌아가리란 것을 떠올릴 것이다.

이런 개인적인 경험을 말하는 이유는 언어 장벽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돕는 것에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아시아 연대는 무엇이고 어떻게 가능한가. 이 질문과 동시에 떠오르는 것은 ‘아시아란 무엇인가?’, 즉 아시아의 정체성이다. 아시아 연대는 아시아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공부한 아시아 활동가 중에는 아시아라는 정체성마저도 서양 제국주의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이라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아시아의 정체성을 말할 때 먼저 우리는 각 아시아 국가들이 갖는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다양성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광범위한 개념이지만, 어떻게 하면 아시아 연대를 할 수 있는지 아시아 활동가의 한 사람으로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중심으로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아시아의 민주주의 과제

아시아 민주주의 모델은 여전히 개념을 만들어가는 단계에 있다. 서양의 민주주의 모델은 실패작으로 보이고, 아시아는 선거 민주주의와 굿 거버넌스에 관해서 순탄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여전히 많은 국가들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소수 엘리트 민주주의가 행해지고 있으며 일반인들은 선거공간에서나 그들의 목소리를 내는 수준이다. 시민들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약속하는 공약은 시종일관 깨지거나 힘을 가진 정치인들에 의해 방향이 바뀌기도 한다.

말레이시아는 아직도 민주적인 선거시스템을 이루기 위해 투쟁하고 있으며 반면, 필리핀, 한국, 인도네시아, 태국은 민주적인 선거체계로 전환되었다. 물론 그 선거개혁은 미완성이고 정치 개혁은 더욱 그렇다. 중국의 민주주의는 그들의 모델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관망하는 정도이다. 싱가폴이나 브루나이 같은 국가는 시민 사회 단체의 정치적 압박을 받지 않고 있는데 이는 시민의 자유라는 화려한 수사보다는 경제적 안정이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가져온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시아 각국에서 진정한 민주적 변화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계급제도는 철폐되어야 하고 동시에 개혁에 대한 전체론적 접근이 필요하다. 대다수의 빈민과 소외된 자들의 이익을 대표하지 못하는 자들이 계속 선출되는 이상, 현실은 매우 어두울 것이다. 높은 선거비용과 일부 특권층을 위해 작동되는 선거는 불공평한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민주적인 선거체계를 갖추지 못한 국가의 유권자는 부패한 정치가에게 투표권을 행사하기 쉽다. 불균등한 민주적 권리가 작용하는 선거의 장은 오직 엘리트와 힘을 가진 자에게만 유리할 뿐이다. 설령 일반 국민들이 투표에 의해 그들의 의사를 표명하더라도 소수의 정치적 기득권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결과를 바꿀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민주적인 정부가 정착한지 20년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많은 과제가 남아 있으며 민주적 변화의 움직임은 위협받고 있다. 민주적인 시민참여가 이어지지 못한 채 시민참여는 오히려 견제 받고 있다. 민주적인 정부 체계의 작동원리인 ‘견제와 균형’은 결여되어 있거나 매우 미미한 수준이다. 태국이나 필리핀의 활동가의 경우는 권력감시자로서의 과제와 동시에 급변하는 정치적 환경 앞에서 활동가 집단의 독자적인 의사결정이나 전략수립을 유보한 채, 공동대응을 해야 하는 때도 많다. 또한 진보세력의 분열도 문제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엘리트권력에게 힘을 더해주는 셈이다.
 

인권이 왜 중요한가

사회운동단체와 NGO가 인권에 주목하는 이유는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인권유린과 폭력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40년대 서부식민지에 대항하는 해방운동, 60년대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전평화운동, 70년대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진행된 독재권력에 대항하는 민주화 운동이 이어져왔다. 이러한 운동의 역사가 말해주는 시대적 책무를 민주주의와 인권존중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지도자들이 이해하고 따르도록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많은 아시아 국가의 정부는 인권에 대해 서구적 개념으로 파악한다. 즉, 아시아적 가치를 존중하기 보다는 오히려 해체시켜 재정립해야 할 것으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여전히 진행 중인 인권과 아시아의 가치관 논쟁에 대한 내 의견은 이렇다. 

인권의 핵심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아시아의 가치와 문화에서 인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정부가 정치적 신념이나 민족, 성적선호, 자유로운 표현과 연대활동을 이유로 국민을 죽이고 있다면 인권은 실종된 것이다. 아시아는 아시아가 갖는 핵심적인 가치에서 인권을 물려받았다. 다만 문제는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에 있는 몇몇 소수에 의해 인권의 가치가 잘못 해석되는데 있다. 인간 존중의 가치를 왜곡하는 것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잡으려는 욕망 때문이며, 인권침해를 정당화하는 변명으로서의 서부의 개념을 만들어간다고 생각한다.

사회운동가들은 인권신장과 보호를 위해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국가의 민주주의 상황은 인권옹호활동을 지체시키고 복잡하게 만든다. 많은 국가에서 인권침해를 교묘하게 벌이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론 무장저항단체가 인권 학대를 범하는데도  비난없이 그냥 넘어가고 있다. 이는 인권활동을 하는 활동가들이 받는 중요한 도전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정부가 이미 서명하고 비준한 인권 협정과 조약에 책임을 지도록 지속적인 활동을 해야 한다. 시민들은 더 많이 알고, 주장하고, 자신의 인권을 최대한 향유해야 하며, 이를 위한 우리의 노력도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부의 몫이다. 이것은 여전히 정부의 책임이고 시민사회단체와 NGO도 감시하고 대안을 제시하면서 힘을 보태야 한다.  즉, 정부 시스템과 정치영역이 올바로 기능하도록 압력을 가해야 하는 것이다. 시스템들이 제대로 기능할 때, 비 정부 기구와 사회 단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우리의 노력은 국민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는 데 있어 더 많은 결실을 맺을 것이다.  

아시아 활동가로서 우리는 각자의 나라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동시에 버마 같은 다른 아시아 국가의 민주주의 투쟁에 연대하고 지지해야 한다. 단순한 연대성명이 아닌 의미 있고 전략적인 정치적 지지로 격려했던 지난 경험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직접 대면을 통해서만 회의하고 교류하던 시절은 지났다. 이제 우리는 웹사이트와 전자우편으로 국경을 넘어 지속적으로 교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각종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연대활동의 전부는 아니다. 연대란 구체적인 실천과 행동으로 이어질 때 가능하고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아시아에서의 진정한 연대를 바란다면 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보다 많은 독창성과 지속성과 인내심으로 함께 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 제시카 우마노스 소토 (참여연대 인턴, 성공회대 아시아NGO학 석사)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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