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고향 네팔에서 NGO석사과정 취득을 위해 한국행을 결정하기까지 참으로 많은 고민을 했다. 그때만 해도 고등 교육을 위해 한국행을 하는 경우가 아주 드물었기 때문에 결정은 더 어려웠다. 하지만 짧은 기간동안 한국이라는 나라가 이루어 놓은 사회, 문화, 정치적 발전, 특히 급속한 경제 발전의 원동력을 이해하기 위한 내 열정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공부에 매진하는 동안 나는 한국의 시민사회를 가까이에서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이해하기로 결심했다. 몇몇 시민단체에서 일하면서 겪은 경험들은 내게는 경이로운 체험이었다. 나는 한국의 시민단체가 이곳의 민주주의, 경제적 평등, 인권, 평화, 정의, 법치에 미치는 영향에 놀라기도 하고, 매혹되기도 했다. 네팔의 시민사회도 이곳과 같았으면!

한국의 시민사회를 공부하면서 나는 문득 한국의 활동가들에 의해 ‘아시아 시민사회’가 형성된다면 어떨까 하는 꿈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와, 그렇다면 아시아인들에게 참 기쁜 소식이 될텐데!

하지만 나의 이런 행복한 꿈에 곧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꿈을 실현하기 위한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했을 때 그 앞에 가로 놓여있는 장애물들에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먹구름과 절망 속에서 빛과 작은 희망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나의 이런 현실적인 깨달음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하였다. 아시아 연대를 이해하는 데 있어 일반 사람들과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위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사실 나의 이 같은 시각이 한국인들에게는 그리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에서 시민활동가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보탬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나에게는 한국 사람들이 과거의 눈으로 아시아 국가를 바라보고 분석하는 문화가 아시아 시민사회를 이룬다는 목적에 있어 큰 방해물이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설사 이것이 사실일지라도 드러내놓고 말하기 민감한 부분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많은 한국인들은 정치적으로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심각하게 미국화, 일본화, 중국화되어 있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요지는, 우리가 아시아인들에게 아시아 연대를 주장하고 이 정신을 확대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독립적이고 우리만의 독창적이고 인간적인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아시아의 지도를 넓혀야 하고, 동아시아를 넘어서 다른 국가들도 이 지도에 포함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실제로 동아시아 국가만이 아시아에서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시아 지역에 대한 그들의 연대를 넓히기 위하여 가난한 아시아 국가의 사람들에게 공적, 비공적 개발원조와 고용 지원 제공을 더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를 통한 한국의 아시아 지역에 대한 국가적 이익과 전략 문제에 대해선 논외로 하고, 나는 이보다는 우리 안에서 다른 사람을 보는 태도와 관점을 바꾸기 위해 애쓰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고 싶다. 단지 몇 번의 회의와 모임에서 아시아 연대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 자신도 한국에서 편견과 인종차별을 느낄만한 상황에 여러 번 놓인 적이 있다.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마다, 한국 사람들은 내 옆에 앉아서 가기를 꺼려하고 먼 거리를 가면서도 기꺼이 서서 가기를 선택한 듯 보였다. 이것은 나에게 모욕감을 주는 행동이다.

좀 망설여지기는 하지만, 여기에 덧붙여 내가 이곳 대학에서 느꼈던 쓰디쓴 경험을 공유하고 싶다. 서방국가 출신의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들을 때, 정말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몇몇 교수들이 - 한국사회에서 가장 지성인으로 꼽히는 - 서구에서 온 학생들 위주로 수업을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마치 강의실에는 아시아 출신 학생들이 한명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 많은 아시아 학생들이 이 같은 경험을 했고 또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런 교수들이 아시아의 연대나 협력에 대해 더욱 자주 열을 올린다는 것이다.

이주민 노동자로서 살아가는 아시아 사람들은 많은 한국 산업에서 착취당하고, 학대당하며 그들의 노동권도 누리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그들에게 좋은 사람들인지 깨닫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게 더 낫다고 본다.

'아시아 시민사회' 건설을 주창하는 한국 활동가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다른 아시아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기 전에 사람 사이에 차별을 없애고 국가들 사이에 커져가는 대립을 끝내고 공통의 적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적을 저지하기 위한 효과적인 전략 수립 여부야말로 아시아 시민사회를 향한 우리의 전진에 있어 하나의 평가 기준이 될 것이다.

이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긴급한 것은, 한국 일반 시민들이 서구가 아닌 아시아에 속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일이다. 한국의 시민사회 활동가들이 이를 위해 더욱더 열심히 노력할수록 아시아 시민 사회를 형성하는 일은 그 앞에 많은 도전 과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 국적과, 지역, 문화, 인종, 언어와 상관없이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인간으로서 포옹해보자! 편견없이 서로를 바라보자! 조건 없는 인류애를 실천해보자! 민족적 우월감이나 계급제도(카스트제도), 배척과 불처벌, 부정부패로부터 아시아 지역을 결집시켜 보자! 한국산 자동차와 전자제품, 핸드폰, TV만 수출할 것이 아니라, 조화롭고 평화롭고 민주적인 아시아를 위해 창조적인 생각과 도움의 손길도 수출해보자!

이러한 것들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아시아 시민사회가 진정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아시아 연대를 위해 우리 삶 깊숙이 박혀 있는 위선의 본능을 뿌리뽑아보자!

지번 바니야(아주대 국제대학원 NGO학과 학생)
Posted by 영기홍
,

내가 만난 인도네시아 여성운동가



처음으로 쓰는 이 칼럼에서 오늘은 인도네시아 여성운동가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작년 ‘언론자유상’을 수상한 가디스 아리비아(Gadis Arivia)를 지난 주에 다시 만났다. 그는 현재 인도네시아국립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근무하고 있으며 프랑스에서 석사학위를 하고 인도네시아국립대 철학과에서 페미니즘으로 박사학위를 했다. 내가 그녀를 알게 된 것은 1998년 대학원 석사과정시절에 있을 때 그녀가 창간하고 편집자로 있는 [여성 저널](Journal Perempuan)이라는 페미니즘 저널을 발간하는 단체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되면서부터였다.

1990년대 중반 그의 집 뒤편의 조그만 통나무 집 서재에서 탄생한 Jurnal Perempuan은 여성문제에 대한 논의가 전무한 상황에서 토론의 장을 만들어보자는 소박한 의도로 시작되었다. 그렇게 시작이 소박했던 잡지가 이제는 인도네시아의 대표적인 여성 계간지가 되었고 여성문제를 연구하는 사람은 한번쯤 거쳐가는 곳이 되었다. 처음에는 여성문제에 대한 논의를 철학에서 시작하였지만 지금은 정치, 인권, 종교, 빈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여성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녀의 활동은 여성문제를 토론하는 데에 국한되지 않았다. 수하르토 집권이 종말로 치닫던 1999년 초에 그녀는 여성운동가들을 조직하여 [걱정하는 어머니들의 모임](Suara Ibu Perduli)을 결성하였다. 자카르타와 주변 지역의 여성단체들과 함께 만들어진 이 조직은 경제위기로 인한 생활고에 대처하기 위하여, 특히 저소득층과 슬럼가의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더 나아가서는 경제 문제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는 정부의 무능력을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일반 시민들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하여 그를 비롯한 여성 활동가들은 자카르타 시내에서 시위를 하였고 이로 인해 경찰에 연행되어 재판을 받는 등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조직은 여전히 자카르타 슬럼지역 여성들의 자립을 위해 공동체 조직을 설립하고 혼자 설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단체로 건재하고 있다.

[걱정하는 어머니들의 모임]의 시위는 당시만 해도 일반 대중이 독재 정권에 반대하여 거리에 나서길 꺼려하던 상황에서 ‘어머니’들의 단합된 용기를 보여주는 것이었고, 중산층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빈곤층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는 계급간 연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최근에 그녀가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포르노금지법에 대한 반대 운동을 벌이면서부터 였다. 인도네시아의회에서 이슬람정당인 '정의복지당'의 지지로 포르노금지법이 논의되었다. 포르노금지법은 포르노를 금지시키는 것이 주 내용이 아니라, 여성을 억압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데, 예를 들어 여성은 공공장소에서 노출의상을 입을 수 없으며, 이슬람 여성들은 질밥(머리카락을 가리는 스카프)을 써야 하고 밤에 외출을 금지하는 등의 조항을 담고 있다.

그래서 여성의 사회경제 활동이 자유로운 인도네시아 사회에 큰 논란을 일으켰고, 여성단체들은 이 법안에 반대하는 연대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거리에 나서 시위를 하고, 직접 자신의 이름으로 은행계좌를 열어 포르노금지법에 반대하는 사람들로부터 모금을 시작하여 신문에 직접 3천명의 지지자 이름과 왜 포르노금지법에 반대하는가에 대해 전면 광고를 싣기도 하였다. 신문광고를 내는 생각은 일본 오키나와에서 열린 회의에 참가했다가 현지 단체들의 활동방법을 보고 배운 것이라고 한다. 그녀는 항상 생각이 열려있다. 어디에 가든 배울 것을 찾고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다.

그녀는 노출 의상을 입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가 나서서 여성이 어떻게 행동하고 옷을 입어야 하는지 관리한다는 것은 인권의 침해이며 국가의 월권행위라고 강조한다. 인도네시아는 이슬람 국가가 아니라 세속적(secular) 국가이고 이러한 국가의 정체성(identity)을 지키는 것은 그녀와 같은 시민들의 힘이라고 그녀는 굳건히 믿는다.

그녀의 자그만 체구를 보면 어디에서 그만한 힘이 나오는지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그녀는 이 땅의 어머니로서 자식들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독재와 경제위기로 인한 빈곤에 대항해서 싸우기도 하고 여성 인권을 위해 여성 단체들과 연대하여 포르노 금지법에 대항하여 싸우기도 한다. 계급이 다르고 분야가 달라도 넓은 의미의 인권을 위해 함께 연대하고 투쟁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인도네시아 여성운동이 고립되지 않고 역동적으로 지속되는 비결을 발견할 수 있다.

정은숙(위스컨신대 정치학과 박사과정, 인도네시아 국제정치전략연구소 객원연구원)
Posted by 영기홍
,
향아씨,

지난 번에 얘기하려던 것을 여기에다 씁니다. 향아씨가 충분히 양해하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 얘기는 6년간의 타국 생활에 대한 신나는 회고라기보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제 모습에 관한 고백임을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국제단체에서 일을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태국 방콕에 도착했던 게 1999년이었으니 벌써 8년 전의 일이네요. 그동안 그곳도 많이 변했겠죠. 방콕은 인구 약 8만명의 우주방주와 같이 큰 도시지요. 길 위에는 차와 주인없는 거리의 개들이 사람들과 함께 넘쳐나고,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국수를 말아파는 사람들이 지나는 큰길 옆으로는 비싼 브랜드옷과 귀금속으로 치장한 비대한 거인마냥 버티고 선 쇼핑센터들도 많죠. 가난하게 산다 할지라도 결코 생활을 허투루하지 않고 가꾸고 멋낼 줄 아는 태국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방콕은 그 규모와 위치의 다른 도시들보다 물가가 싸서 국제단체를 위시해 월급이 나름대로 짱짱한 외국계나 국제 회사에 고용된 이들에게는 천국과 같은 곳이 아닐까 싶어요. 당시 현지의 많은 가난한 노동자들은 한 달 오륙천바트도 안되는 돈으로 생계를 꾸려가야 했지만 외국계 회사나 좀 돈을 버는 이들은 보통은 한달에 십이만바트도 넘는 돈을 받으며 살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이와 같은 혜택은 상당히 많은 국제단체들이 방콕에 주재하려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 또 많은 NGO 활동가들이 방콕을 찾아오는 이유가 되기도 하지요.

그런 천국같은 곳에도 제게는 매일매일 맞닥뜨려야했던 작은 지옥이 있었어요. 어느 거리마다 지키고 앉아 동냥을 하고 있던 걸인들... 태국 각지는 물론, 이웃해있는 나라들인 캄보디아, 라오스, 버마 등지에서까지 온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메트로폴리탄답게 방콕의 걸인들은 정말 각지에서 흘러들어온대요. 개중에는 타의에 의해 인신매매되어 강제구걸을 하는 이들도 많다고 현지 친구가 말해 준 적이 있지요. 걸인들은 도시의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특히 육교에서 흔히 만날 수가 있었어요. 제가 일하던 단체의 사무실도 하루에 한 번은 꼭 육교를 건너야 되는 곳에 위치해 있었죠. 버스에서 내려 사무실로 향하는 길에 한결같이 웅크리고 앉아 있던 걸인. 저는 때로는 동전 몇 닢을 나눠주기도 하고 때로는 그저 고개를 푹숙인 채 앞을 지나쳐 가기도 했는데, 어느 때건 마음이 편치가 않았어요. 걸인들은 그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쇼핑센터 앞이든, 버스정류장 근처든, 식당 앞이든, 가는 곳 어디에나 있었죠. 매일매일, 집회가 있던 날이건, 회의가 있던 날이건, 쇼핑을 하러 가는 날이건, 영화를 보러가는 날이건, 아무일도 없던 날이건, 집밖에만 나가면 어김없이 만났던 그들. 그리고, 그들과 크게 다를 것 없이 살아야 하는 상황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고층빌딩에서 호화롭게 일하는 이들과 유엔 사무실에서 일하는 고위급 국제관료들의 삶과 닮아가고 있는 듯 했던 내 삶을, 그 속에서 커져가는 괴리감이 주는 긴장과 외로움을 저는 견뎌낼 수가 없어졌지요. 그래서 결국, 1년 반 만에 그곳을 떠나고 말았고, 저의 방콕생활은 그렇게 파경에 이르렀답니다. 향아씨는 늘 제게 고생했다고 위로해 주곤 했지만, 이제 고백하지만 저는 위로받을 일을 채 해보지도 못하고, 그저 주변부에서 불편한 마음으로 어슬렁거리다가 그곳을 도망쳐 나왔던 거예요.

이런 주변자 의식은 방콕을 떠나 말레이시아의 쿠알라 룸푸르에서 지냈던 4년여 동안에도 별로 고쳐지질 못했죠. 말레이시아에서는 일과 함께 공부도 하고, 친구들도 많이 있어서 그만큼 생활의 반경과 깊이가 태국에 있을 때와는 달랐었는데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어요. 제가 어쩔 수 없었던 주변성이었죠. 늘 ‘외국인’이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다녀야 해서 그 사회 깊숙이 참여하고 관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조차 느껴질 때가 많았답니다.

그런 주변자 의식 혹은 주변자 감수성 때문이었을까요. 저와 가장 가까운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거리에서 일상적으로 보게 되는 노동자들, 저와 같은 동네에 단체로 모여 살고 있던 이주노동자들, 가끔 소식을 접하게 되는 농민들을 만날 때 한국에서 이와 같은 이들을 만날 때 느껴지던 강한 유대감과 함께라는 감정이 별로 생겨나지 않았던 거예요. 그 사실을 문득 깨달았을 때 저는 제가 그러고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처음엔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지요. 그들과 저 사이에서 좁혀지지 않던 그 거리감에 당황해 하면서 그곳을 떠나던 2005년 7월, 바로 그 순간까지 도대체 제가 왜 그런걸까 답답했었어요.

한국으로 돌아와 지내던 어느 날, 신영복 선생님의 ‘입장’에 관한 강연을 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신영복 선생님께는 죄송스럽게도 저는 그날 그 ‘입장’이라는 말이 지난 6년간의 제 모습을 돌아보게 한 힘에 취해 강연에는 몰입하지 못한 채 상당시간을 저 자신의 상념에 골몰했습니다. 저와 방콕의 걸인들, 저와 쿠알라 룸푸르의 노동자들과 이주노동자들은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었을까하는 질문이 먼저 떠오르더군요. 그날 가진 상념의 시간 이후 저는 제가 자문하던 질문을 바꿔보기로 했습니다. 왜 제가 그들과 같은 입장에 있다는 느낌을 덜 갖게 되는 것일까를 묻는 대신, 제가 그들과 같은 입장이 아니라고 느끼게 하는 그 기제가 도대체 무엇일까를 묻기로 했죠.

이제와 생각해 보니 제게 필요했던 것은 어쩌면 ‘공감’이었던 것 같아요. 동정과 달리 공감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같은 이해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같은 입장’이라는 감수성이 아닐까 싶어졌어요. 서로 같아서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는 것이 연대라면, 공감은 서로 달라 보이는 서로들의 입장이 사실은 한 토대에 발을 딛고 있음을 깨닫게 해서 더욱 단단하게 연대할 수 있게끔 마음의 길을 터주는 연대의 또 다른 이름은 아닐런지요.

이제 모국으로 돌아와 다시금 ‘내부인’이 된 저는 한국사회 안의 수많은 ‘외부인들’, ‘주변인들’을 보며 제가 갖고 있는 ‘내부인 감성’은 실은 많은 거짓말들로 만들어진 바탕 위에 부실공사된 건물마냥 세워져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성별, 학벌, 부, 성 정체성 등에 기반해 뻔뻔하게 난무하는 차별뿐만 아니라 연고지, 가문, 외모, 나이 등에 기반해 은근히 자행되는 차별 속에서 저는 제가 절대 이 사회의 주류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종종 그 사실을 망각할 때 저는 제 입장을 잊고 잃어, 스스로가 이 사회에서 함께 살고 있는 장애인들, 이주노동자들, 노동자들, 여성들 등과 같은 주변인들 중 하나임을 잊고서 결국 누구와 연대해야 하는지 조차 잊게 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향아씨, 향아씨가 고민하던 것처럼 저도 한동안 우리가 이 땅의 주류가 되는 날까지 싸우며 살아야겠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이 땅에 주류, 비주류라는 관념자체가 없어질 수 있도록 싸우며 살아야겠다고 해야 할지 망설인 적이 있었습니다. 주류들이 가지고 누려왔던 그 기득권을 저 또한 한번쯤 누려보고 싶은 욕망이 있어서였을것 같아요. 문득문득 여전히 그런 욕망이 솟구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향아씨에게 했던 이 고백을 잘 기억할게요.

*글쓴이 주: 이 글은 '향아씨'라는 가상의 인물에 대한 말걸기를 통해 특정인이 아닌 모두에게 말걸기를 하는 글입니다. 얼마 전 있었던 여수 출입국관리소 사건은 저에게 '구별짓기'와 '편나누기'의 폭력성과 우리 모두 더불어 잘 살기 위해 필요한 '공감'과 '연대'에 대한 더없는 갈증을 상기시키고, 저 스스로의 발자취에 대한 반성의 시간을 다시 한 번 갖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칼럼은 지극히 개인적인 고백체로 쓰여졌음을 이 글의 형식으로 인해 읽으시기가 불편하신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박이은실(성공회대 노동대학 담임,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Posted by 영기홍
,
이번 여수 출입국관리사무소의 화재로 숨진 분들의 명복을 빌면서, 참담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화재의 원인이야 어찌되었든, 그런 위급한 순간에 수용자들을 제대로 탈출시키지 못한 출입국 관리소의 한심하기 짝이 없는 관리 상태와 구조 체계의 미비를 강력히 비난하며, 하루속히 적절한 대응책을 세울 것을 강력히 촉구하는 바이다.

그러나 일개 출입국관리소의 수용시설에 대한 개선과 몇몇 책임자에 대한 징계 등은 미봉책에 불과할 것이다. 출입국 관리소와 기타 불법외국인 노동자의 수용시설 전반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인권유린의 문제를 이번 기회에 근본적으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외국인 노동자는 이미 우리 사회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그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한국에 들어왔지만, 이제 우리 경제는 그들의 노동력 없이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그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들이 우리 경제구조에서 차지하고 있는 부분을 내국인 노동력으로 대체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국내에서 누구도 그 역할을 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국내에서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한, 노동자로서 누려야 하는 최소한의 권리를 국가는 보장해야 한다.

최근 외국인 노동자를 들여오는 방법이 산업연수생 제도에서 고용허가제로 바뀌었고 이는 이전보다 진일보한 정책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여전히 개선되고 있지 않은 부분은 바로 불법 이주노동자에 대한 우리 정부의 정책과 우리 사회의 싸늘한 시선이다. 그리고 이런 정책의 부재와 사회의 무관심이 이들에 대한 인권 유린이 계속 자행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많은 나라들이 불법 이주노동자의 입국과 체류를 용납하지 않는다. 불법체류자의 문제는 주권국가의 국경과 주권 보호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는 그런 불법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단속과 수용이 얼마나 합법적으로 인권을 존중하면서 행해지는가라는 문제이다.

형법상 범죄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단속과 검거가 행해지고, 수용기간 중에도 일상적으로 폭언, 폭력과 강압이 행사되며, 외부와 연락을 하거나 자신의 법적 권리에 대해서 적절한 조언을 구하지도 못하는 것이 불법 이주노동자 인권의 현주소이다. 그리고 이런 일상적인 인권유린이 자행되는 데는 불법 이주노동자들을 단속하고 수용하고 본국으로 송환하는 모든 과정과 절차에 대한 법적 규정들이 너무 모호하고 포괄적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한다. 이런 법적 미비점으로 인해 불법 노동자들은 법률의 자의적 해석, 관리자 개인판단에 의한 임의적 처분 등의 인권 유린에 노출된다.

인권이란 가치에는 국경도 국적도 없다. 한국인이 외국의 감옥이나 수용시설에서 이런 비극적인 일을 당했다고 가정하면 온 나라가 떠들썩한 이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나라 국민이 아니고, 이주노동자라는 이유로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자행되고 있는 그들에 대한 인권유린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정부의 재발방지 대책과 법적 보완은 물론이고 우리 시민 한사람 한사람의 각성이 요구된다.

국제연대위원회


Posted by 영기홍
,
지난 11월 15일 오전 10시경, 번화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늘 조용하고 한적하던 태국 주재 한국 대사관 앞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50여명의 시위대가 민주노총의 깃발을 앞세우고, 태국어와 영어로 된 피켓을 들고 구호를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다.

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계 기업의 횡포와 부당노동행위에 맞서 노동자들이 해외 주재 한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는 것은 아주 낯선 풍경은 아니다. 그런데, 웬 민주노총 깃발? 사정인즉, 이들은 자신들의 사안이 아니라, 국제연대, 구체적으로는 2006년 11월 15일로 예정된 민주노총의 총파업 투쟁을 지지하고, 한국 정부의 노동 운동 탄압에 항의하는 시위를 조직한 태국 노동자들이었다.

“노조 탄압 중지하라, ILO 권고를 즉각 이행하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를 인정하라, 수감된 노동운동가들을 석방하라”

대사관에서 나온 담당자는 회의 참석 차 방콕에 갔다가, 그 집회에 참석할 수 있었던 민주노총 산하 모 연맹 부위원장과 멱살잡이 비슷한 몸싸움을 하고, 상대의 명함은 요구하지만, 자신의 성명조차 밝히기를 거부했다.

집회는 한국의 대통령의 사진을 태우는 것으로 절정에 달했다. 화장(火葬)이 일반적인 장례 문화인 태국에서 사진을 불에 태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 지 그 대사관 관계자가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에 대해 매우 불쾌해 했다.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쓸데없는 내정 간섭이라는 단어가 들리기도 한 듯하고. 이날의 집회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항의서한을 전달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월차 휴가는 없고, 대부분 일당으로 임금이 지급되는 태국의 노동 관행을 고려할 때, 이들 노동자들은 한국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을 지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반나절, 혹은 하루치의 임금을 기꺼이 포기하고 그 자리에 모인 것이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대사관 앞으로 모여들게 만든 것일까? 집회를 준비했던 “민주 노조 연대 (Alliance of Democratic Trade Unions)”의 의장 소묫 프룩사카셈석(Somyot Pruksakasemsuk)은 간단하게 정리한다. “우리의 힘은 작고 약하지만, 한국의 노동 운동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다. 한국의 노동 운동이 잘 싸워서 좋은 사례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예들은 우리한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노동자들의 의식에 그리고 대정부 교섭에서....”

위의 이야기는 태국의 노동 운동 속에 한국의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이는 다른 나라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의 운동은 특히 노동운동은 강력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전투적인 운동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 공통된 인식이다. 이에 따라, 한국의 운동 세력에 대한 기대 역시도 크게 나타나고 있다. 실제, 태국의 한 활동가는 “한국의 노동운동이 아시아 노동 운동을 전략이든, 실천이든, 재정이든, 도덕이든 모든 면에서 리드해야 하고, 그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까지 말한다. 많은 부분 논쟁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한국의 운동에 대한 기대를 보여주는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운동은 아시아의 이웃들과 나눌 준비가 되어 있는가?

객관적인 조건은 형성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한류가 그것이다. 한류의 열풍이 거세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동아시아든, 동남아시아든 한국에서 왔다고 소개하면, 보통 나오는 이야기는 한국의 영화, 드라마 혹은 연예인 이야기이고, 이는 남아시아까지 서서히 번져가고 있다. 자본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이러한 한류에서 자본주의의, 더 나아가 제국주의의 냄새를 맡기란 어렵지 않다. 한국 드라마 혹은 영화가 얼마에 팔렸네, 한국 드라마의 유행 이후 해당 국가에서 한국 상품이 얼마 더 팔렸네 주판알 튕기는 소리가 들리는 한편에서는, 뛰어난 한국의 문화 상품들이 아시아 각국의 안방을 점령하고 있다는 문구가 버젓이 받아들여지고 있으니 말이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다른 나라와 경쟁하고 상품 수출하는데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는데 무슨 말이 많으냐고 한다면, 정치관, 경제관, 세계관의 차이로 받아들이고 더 이상 논쟁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 한 것은 이러한 성격의 한류에 대해 한국의 소위 진보적인 세대들도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기존의 흐름에 대응하는 카운터의 흐름을 만들지 않는다면, 한국의 진보적 세력들 역시도 기존의 한류가 생산해 내고 있는 한국과 이웃 나라에 대한 편협한 인식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즉,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며, 그 속에서 이윤을 얻는 생산자로서의 한국과 단순 수용자, 소비자로서의 이웃 나라라는 이분법적인 도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아시아 연대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한국이, 특히 한국의 진보 세력이 아시아 이웃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에 있어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아시아 연대에서 한류를 만들어 간다면 그 내용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선,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 노동자, 여성 등 한국의 주변화된 집단의 목소리로부터 연대가 시작되어야 한다. 그 목소리가, 이웃의 주변화된 목소리와 만날 때, 그것은 큰 울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생산자와 소비자의 이분법에서 탈피하여, 연대하고자 하는 상대가 필요한 것들을 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한국과 아시아의 이웃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아닌, 연대의 쌍방이며,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나누는 관계일 것이다.

멍석은 깔렸다. 그 위에서 어떻게 노느냐 하는 것은 아시아 연대를 고민하는 자들의 몫이다.

*사족

최저임금에 준하는 임금을 받으면서, 얼굴도 모르는 먼 나라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을 지지하기 위해 하루치의 임금을 기꺼이 포기한 태국 노동자들의 연대의 마음을 우리는 언제 배우고 실천할 수 있을까? 인도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 현대 자동차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 그 날을 우리는 볼 수 있을까?
박진영(전 아시아여성위원회 프로그램 간사)
Posted by 영기홍
,
베트남의 노동시장은 도이머이(혁신) 정책을 시행한 이래 가장 큰 변화를 맞고 있다. 그 동안 베트남은 값싸고 말 잘 듣는 노동력이 풍부한 곳으로 인식되어 왔다. 불과 3-4년전 만 하더라도 다국적 기업의 공장에서 일을 하기위해 연줄을 동원하고 소개비까지 지불하려는 인력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호치민과 같은 대도시나 인근에 위치한 일부 노동집약적 공장에서 인력 부족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직률도 증가하고 있다.

동시에 대도시 공장노동자의 불만은 개방정책 이래 최고조에 달해 있다. 베트남 노동조합은 다가오는 음력설에 역사상 가장 많은 파업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베트남은 이제 값싸지만 말 잘 안 듣는 노동력마저 부족한 곳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지도 모른다.

이러한 변화에는 몇 가지 복합적 원인이 있다. 베트남은 고공비행을 거듭하고 있는 경제성장률과 국제무역기구(WTO) 가입 덕택에 외국자본이 앞 다투어 들어오고 있다. 외국자본이 붕따우-바지아나 메콩델타와 같은 농어촌지역에 공장을 건설하면서 대도시에 집중되었던 노동력이 분산되고 있다.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대도시로 이주하던 농촌의 노동력이 고향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대도시에서 비싼 생활비를 지불하며 생활하던 노동자가 귀향하는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급속히 팽창하고 있는 서비스-유통 부문의 임금상승도 공장노동의 매력을 감소시키고 있다. 전문 인력이 필요한 금융부문은 물론이고 우후죽순처럼 늘어가는 점포들이 공장노동에 상응하는 임금을 지불하는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인 주재원들은 이전과 달리 웃돈을 주어도 능력 있는 운전기사와 가정부를 찾기가 쉽지 않다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베트남 대도시 공장에서 인력난이 시작되고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더딘 임금상승 때문이다. 비약적인 경제성장과 세계시장에의 급속한 편입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대도시 공장노동자의 임금은 7-8년 전에 비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실질임금은 계속 하락하고 있다. 더딘 임금상승은 노동력 부족은 물론이고 파업의 결정적 원인이 되고 있다.

요즘 한국에서 장기간 이주노동자로 일하다 귀국한 베트남인을 면담하고 있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한국인 업주의 부당노동행위에 익숙한 필자를 당혹시키는 것은 이들이 한국에 다시 가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들이 진정으로 그리워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이다. 임금이 한국의 십분의 일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베트남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많은 이주노동자를 보면서 베트남 사회주의의 현 주소를 묻게 된다. ‘노동자의 국가’를 자처하는 베트남이 언제까지 저임금을 유지할 수 있으며 이것이 정당한 것인가에 대해 물음을 던져 볼 시점이 왔다.

베트남을 들락거린 지 10년이 넘었지만 하루가 다르게 변모해가는 호치민의 거리를 걷고 있노라면 상념에 빠지곤 한다. 수많은 주검 위에 세워진 베트남 사회주의는 이미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들은 무엇을 위해 지난한 전쟁을 벌인 것일까? 베트남의 일상은 이미 시효가 지나버린 이런 질문을 되씹어보게 한다.

채수홍(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교수)
Posted by 영기홍
,
아시아연대활동에서 ‘언어의 장벽’은 빈번히 지적되어 왔다. 시민운동단체의 회의석상에서 어떤 노장 활동가가 아시아연대를 하려면 아시아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활동가가 육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렇지만 연대와 언어에 관한 이러한 도전적 주장을 접할 때 활동가들의 가장 흔한 반응은 아마도 “영어도 못하는데...”라는 회의론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은 영어부터 하고 아시아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잘못된 단계론에 입각해 있으며 아시아인들끼리 만나 영어로 소통할 때 나타나는 소외와 우스꽝스러움과 엘리트중심성에 대한 무의식에다가 모든 좋은 것은 영어권으로부터 온다는 사대주의적 경향까지 깔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반응이다. 최근 한국 사회운동에 새로운 키워드로 부상하는 ‘아시아연대’가 지정학적인 요인만으로도 한 때 유행으로 그치지 않을 장기슬로건이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수행되는 활동이라는 생각에 이르면 아시아언어의 학습은 그다지 황당한 주장이 아니라는 판단도 가능하다. 언어는 단지 기술적인 수단이 아니라 생활과 문화를 이해하는 통로가 된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어떻게 가능하냐”는 질문이 뒤따를 것이다. 아시아언어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중국어와 일본어 이외의 아시아언어를 가르치는 곳은 일부 외국어대학교밖에 없다는 비관적 여건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건국 이래 대한민국이 요즘처럼 아시아언어를 배우기 좋은 인구적 환경을 갖춘 적이 없었다는 낙관적 여건도 지적해야 한다. 약간만 노력한다면 외국인노동자나 국제결혼이주여성들로부터 일부 대학에서만 가르치는 아시아언어를 배울 수 있다. 활동가들과 단체회원들이 아시아언어를 이주민들로부터 배운다면 이주민들의 사회적 역할과 사회자본이 증대하는 또 다른 좋은 효과가 잇따를 것이다. 적지 않은 사회운동단체에서 아시아의 활동가를 초청하는 인턴십이나 교육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는데 그들로부터 아시아의 언어를 배울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초빙된 외국인활동가가 우리사회에 무언가 기여한다는 자부심도 갖게 될 것이다.

아시아언어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상당한 능력자가 존재하는 중국어와 일본어 영역을 논외로 하고 관심을 갖고 배울 필요가 있는 중요한 언어로 말레이인도네시아어를 추천한다. 동아시아의 4개국(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부르나이)에서 사용되는데다가 편리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동남아전문가인 신윤환 교수는 동아시아지역협력의 발전도상에서 공용어가 선정될 필요성을 지적하면서 말레이인도네시아어가 가장 강력한 후보언어임을 주장하며 말레이어의 위력과 미덕을 논리적으로 제시한 바 있다. ‘동아시아공동체’라는 국가주도 지역통합체를 염두에 두고 제기한 주장이지만 사회운동의 아시아연대에 적용해도 될 만한 내용이므로 아래의 글을 읽도록 권하고자 한다. 공동체의 상상과 실질적인 형성에 있어서 언어는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말레이인도네시아어를 ‘동아시아공동체’의 공식 언어로>

- 국제학술대회 “동아시아공동체 정체성함양 워크숍” 발표문(2005년 1월 30일)

- 신윤환(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권고하는 바

1. 아세안+3 또는 동아시아 정상회담은 적절한 시기에 말레이인도네시아어(앞으로는 '말레이어'라 칭함)를 동아시아공동체의 공용어로 선포해야 한다.

2. 동아시아공동체가 실현될 때 말레이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기 위한 준비로서, 아세안+3의 학술 공동체가 말레이어를 지역의 언어로 만들기 위해 연구하고 촉진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맡아야 한다.

3. 동남아시아의 국가들, 특히 말레이어가 쓰이는 세 국가(싱가포르를 포함하면 네 국가)는 말레이어의 지역별, 지방별 차이점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표준적인 말레이어를 만드는 데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

4. 동북아시아 국가들은 이 계획의 성공이 동북아인들의 전폭적인 지지에 달려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동북아 사회에서 말레이어를 대중화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영어는 왜 동아시아 공동체의 공식 언어가 될 수 없는가

5. 영어는 대부분의 동아시아인들에게 외국어로서, 동아시아의 문화를 표현할 수도 없고 동아시아의 통합성과 정체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낼 수도 없다. 만일 동아시아공동체가 영어를 유일한 공식 언어로 채택하거나 그냥 그렇게 되도록 놔둔다면 그것은 자기 부정이나 다를 바 없는 일이다. 어떠한 동아시아의 언어도 공식 언어로서의 역할을 영어보다는 더 낫게 수행할 수 있다. 그 언어는 적어도 일부분의 동아시아 문화를 담고 있을 것이며, 다른 동아시아 언어들에 연관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6. 영어는 말레이어를 포함하여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공식 언어 중 하나가 될 수는 있겠지만 '유일한' 공식 언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아세안+3 또는 동아시아공동체의 공식 언어들은 단 하나가 될 수도 있고 여러 가지가 될 수도 있다. 유럽연합의 사례와 같이, 동아시아공동체의 회원국 언어 모두를 공식 언어로 지정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런 다언어 정책은 동아시아의 통합을 위한 상징적인 의미는 지니겠지만, 강한 동아시아 정체성과 응집력을 만들고 증진시키는 데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중국어도 공식 언어의 후보에는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식 언어가 실제로 쓰이려면, 말레이어와 영어만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다.

7. 동아시아공동체의 건설은 시민사회와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기반을 쌓아야 한다. 단지 국가끼리 혹은 엘리트끼리의 공동체로는 부족하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는 지도자들의 의사 소통도 영어에 의존해서는 힘든 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계속 영어만을 공통 언佇?사용한다면, 평범한 동아시아 사람들끼리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실현되더라도 어마어마한 시간이 들 것이다.

8. 동아시아의 문명과 서구의 문명, 특히 영미 문명은 거의 관련이 없기 때문에 동아시아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는 것은 무척이나 머리 아프고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다. 지금까지 이 절망적인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동아시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돈과 에너지를 소비해 왔는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해 왔는지 생각해 보라.

9. 영어는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배우기가 무척 힘든 언어이다. 문법은 복잡하고, 스펠링은 불규칙적이며, 용법은 천차만별이다. 이 언어는 프랑스어나 독일어, 스페인어 같은 다른 국제화된 유럽의 언어들과 비교하더라도 배우기가 훨씬 힘들다.

10. 국제어로서 영어를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에스페란토와 같은 인위적인 언어들도 역시 우리의 고려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이런 언어들도 서구적인 가치와 관념, 문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에스페란토 단어의 70% 이상이 그 뿌리를 서구의 언어에 두고 있다.

11. 우리는 2004년 7월 6일-8일에 아프리카연합이 스와힐리어를 조직의 공식 언어로 채택하기로 한 역사적인 결정을 지지하고 그 결정에서 배워야 한다. 스와힐리어 사용 인구의 숫자와 비율은 말레이어보다 더 적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말레이어의 장점

12. 오늘날 아시아에서 쓰이는 수천 가지의 언어와 수십 가지의 국어 중, 말레이어는 배우기 쉬우며, 어휘가 풍부하고, 화자들끼리의 평등함을 보장해 준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또한 말레이어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사용하고 있고, 동아시아 전체로 보아도 중국어 다음 가는 사용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13. 말레이어는 오늘날 세계에서 사용되는 중요한 언어들 중에서('가장' 배우기 쉽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외국인이 배우기에 상당히 쉬운 편에 속한다. 몇 달만 학습하면 외국인도 말레이어가 모국어인 사람들과 섞여 생활할 수 있다.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들이 상대방과 대화할 때 그 상대방이 말레이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을 눈치 채면 곧바로 영어 사용을 중단하고 말레이어로 바꾸는 것을 많이 지켜보아 왔다.

14. 말레이어는 그 역사를 통해 모든 주요 문명으로부터 지식과 지혜, 미적 가치가 담긴 새로운 단어와 표현들을 풍부하게 받아들여 왔다. 현대 말레이어와 인도네시아어에는 인도어, 중국어, 아랍어, 포르투갈어, 네덜란드어, 영어에서 빌려온 단어들이 넘친다. 말레이어는 과학기술의 발달에도 계속 적응해 나갈 것이다.

15. 말레이어는 평등한 언어이다. 자바어나 일본어, 한국어와 달리 말레이어에는 계급, 정치적 지위, 나이, 성별을 불문하고 존댓말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조도 남녀 가릴 것 없이 같다.

16. 영어나 다른 서구의 언어들과는 달리, 말레이어는 전쟁과 분쟁이 아닌 평화와 화합의 언어로, 제국주의와 착취가 아닌 교류와 협력의 언어로, 지배와 헤게모니가 아닌 다문화적인 공존의 언어로 발달해 온 역사를 갖고 있다.

17. 말레이어가 아세안+3나 동아시아공동체의 공식 언어로 제안된다면 반대에 부딪칠 가능성이 가장 적으며 동아시아 국가들로부터 만장일치의 합의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아세안 내에서라면, 말레이어와 인도네시아어의 사용자가 워낙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제안에 다른 국가들이 찬성 입장을 표하기를 꺼려할 것이다. 아세안이 동북아시아를 끌어안으며 확장세를 보이고 있는 이 때, 말레이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하는 것은 동북아시아와 중국에 대해 어느 정도 균형을 잡는 역할을 할 수 있다.

18. 동아시아 인구의 3분의 2가 사용하고 있으며 엄청나게 많은 표의 문자(한자)를 보유하고 있는 중국어도 공식 언어로 고려될 만하다. 그러나 정치적인 가능성에 대해 생각한다면, 중국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하는 것은 말레이어를 채택한 다음에나 가능할 것이다. 중국어가 동아시아 공동체의 유일 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장벽을 극복해야만 한다. 첫째는 배우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둘째는 중국의 지배력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말레이어와 중국어가 같이 공식 언어로 채택되더라도, 중국어에 비해 말레이어가 훨씬 배우기 쉽기 때문에 말레이어만이 실제 쓰이는 언어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문법과 용법, 말씨의 단순함

19. 말레이어는 문법이 단순하고 발음하는 데 큰 힘이 들지 않으므로 배우기가 쉽다. 에스페란토는 일반적인 언어보다 "네 배"나 배우기가 쉽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말레이어는 에스페란토보다도 몇 배나 배우기가 쉽다.

20. 영어와 달리, 말레이어의 단어들은 스펠링대로 읽고 읽히는 대로 쓰면 된다.

21. 대륙부 동남아의 언어들(베트남어, 태국어 등)이나 중국어와는 달리, 말레이어에는 성조가 없다. 영어와 달리 음절에 대한 강세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다.

22. 대부분의 다른 언어들과는 달리, 말레이어의 동사에는 시제나 주격에 따른 어미의 변화가 없다. 자동사와 타동사의 변화는 있지만 간단하고 규칙적이다.

23. 말레이어의 명사는 복수로 변할 때 불규칙 형태를 띠지 않는다. 어느 명사나 복수로 만들고 싶으면 그 명사를 두 번 연속 말하면 된다. 그렇게 동사와 형용사, 부사를 복수형으로 만드는 것은 원래의 단어에 시적이고 다채로우며 때로 어느 한 부분을 강조하는 의미를 더해 준다.

24. 말레이어의 어순은 고정되어 있다기보다는 유동적인 편이다. 주어와 술어의 위치가 바뀌어도 되고 구(phrase)는 어느 자리에나 들어갈 수 있다. 보통 문장의 앞부분에 중요한 단어나 구가 온다. 그러나 형식적인 문어체에는 엄격한 규칙과 문법이 있어 의사소통이 혼란될 염려가 없다.

25. 구어에서는 완전한 문장을 갖추어 말하는 경우가 오히려 드문 편이다.

말레이어의 역사와 언어 지도

26. 말레이어는 한 지역의 언어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으며, 근세로부터 동남아 전역에서 모여든 무역상들의 의사소통에 쓰였다. Anthony Reid에 의하면, "마젤란의 수마트라인 노예가 1521년 중부 필리핀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을 때 필리핀 사람들이 곧바로 그 말을 이해했을 가능성이 크고, 또한 거의 200년 후에, 민다나오에서 말레이어를 배운 Dampier의 영국인들이 그것을 베트남 최남부에 있는 Puolo Condore에서 써먹었을 수도 있다."*

27. 신생국의 공식 언어로서의 말레이어의 경쟁력은 말레이어의 한 부류가 국어로 인가된 아세안의 네 국가, 즉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와 인도네시아어를 사용 언어로 인정한 동티모르에서 이미 충분히 입증되었다.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 동티모르에서는 인구의 소수만이 말레이어를 모어로 사용한다는 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자바어, 싱가포르에서는 중국어, 동티모르에서는 테툼어가 더 널리 쓰인다.

28. 인도네시아의 성공 사례는 특히 본받을 만하다. 인도네시아가 독립 이후 말레이어를 국어인 '바하사 인도네시아'로 채택한 이후 60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말레이어 사용 인구는 몇 백만에서 2억 이상으로 늘었다. 그 전에 인도네시아에서 말레이어는 리아우(Riau) 지역과 해안가에 뿌리를 둔 소수 언어에 불과했다. 단지 정부의 정책만으로 '바하사 인도네시아'는 급속히 전국적으로 퍼질 수 있었다. 쉬운 언어라는 타고난 장점이 이만큼의 성공을 이끌어 낸 중요한 요인이었다. 비교해 볼 때, 필리핀에서의 영어나, 그보다는 낫지만 싱가포르에서의 영어가 인도네시아에서의 '바하사 인도네시아'만큼 성공했는지는 의문이다.

29. 2차대전이 막 끝났을 무렵, 말레이어 사용 인구는 다 합쳐 봤자 천만 명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3억 명이 사용하고 있다. 말레이어는 2차대전 이후 세계에서 가장 빨리 퍼진 언어 중 하나이다. 지금 말레이어 사용 인구는 중국어, 영어, 힌디/우르두어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다.

30. 태국, 필리핀, 캄보디아, 베트남 등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에도 말레이어에 가까운 언어를 사용하는 몇몇 소수민족들이 있다. 몬-크메르어와 베트남어도 말레이어가 속한 오스트로네시안 언어군에 속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언어 체계는 동남아 국가들에서 짧은 시간 내에 말레이어를 대중적인 외국어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31. 만 명이 넘는 중국계 인구가 말레이어를 사용하는 국가에 뿌리박고 살거나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Chinese Malay" 혹은 "Baba Malay"라 불리는 그들끼리의 말레이어를 발전시켜 왔다. 지금은 일본인, 한국인 체류자들도 만 명이 넘는다. 이러한 동아시아인들은 말레이어를 동북아에 옮기고 퍼뜨리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32.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는 많은 수의 아랍인과 인도인의 자손, 이민자들, 사업가들이 자주 방문하거나 거주하고 있다. 이 두 나라의 무슬림 인구는 서아시아(중동)보다 더 많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문화는 인도, 아랍 세계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접촉과 전통은 말레이어가 동아시아의 경계를 넘어 진정한 아시아의 언어로서 아시아 전체에 퍼져 나가고, 미래에는 지구촌의 언어로 발돋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전망

33. 하나 이상의 동아시아 공용어를 갖는 것은 강한 동아시아 정체성을 만들어내고 증진하며, 언젠가는 동아시아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34. 말레이어를 공용어로 인정하는 것은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통합에 놓인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차이를 좁히고 메우는 데 기여할 것이다.

* 번역: 서지원 (오하이오 주립대 박사과정)

전제성(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Posted by 영기홍
,
올 7월 새로 이전, 개장한 인천시립박물관에 ‘김보섭의 화교 이야기’라는 사진전이 열렸다. 사실 여기에 전시된 사진들은 김보섭의 새 작품들은 아니다.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주최하는 국제 심포지엄 ‘화교, 세계화의 주역’(2006.10.20)을 위해 지난 1995년에 전시했던 사진들을 다시 모아 전시한 것이다. 글로벌 시장경제 속에 중국이 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오랫 동안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었다고 할까 더 솔직하게는 다소 천시되기까지 해 왔던 화교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떠오르고 있다. 이른바 화교경제권, 화교네트워크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화교가 경제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한국에서, 동북아의 허브라는 경제적 목표 하에, 각 지역 지자체들이 화교경제 유치에 혈안이 되고 있다. 그런 맥락 속에서, 인천뿐 아니라 부산, 목포, 대구에서까지, 화교는 지역문화의 콘셉트로 새삼스레 ‘발견’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다시 불려나온 십여 년 전의 사진들을 둘러보면서, 마음 한 켠에 어딘가 씁쓸했다. 10년 전 작품전시회 도록 『청관(淸館)』발문에 쓰여 있듯이, 그의 사진은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오마쥬’이지, 세계 경제를 주름잡는다는 화상네트워크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금간 시멘트 벽, 녹슬은 함석 지붕, 오래된 미닫이 문, 때묻은 부엌……. 그 빛바랜 동네, 주름 패인 노인들의 얼굴은 시간의 풍화를 묵묵히 버텨 온 그들의 가난한 삶의 역정을 소리없이 전해준다. 한 때 제물포항의 대외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했다는 이 청국 거상(巨商)의 후손들은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의 패배라는 시련을 거치면서, 중화제국의 몰락과 함께 쇠잔해 갔다. 사진 속 회색 동네, 한 때 번영과 활력으로 들썩였던 청관 거리는 간데없고, 그들의 고된 삶의 흔적만 덩그마니 남아 있다.

그런데 이런 몰락한 청상(淸商)의 이야기가 그의 작품전의 전부는 아니다. 사진전의 매력은 그것을 바라보는 한국인 작가 김보섭의 시선에 있었다. 이국 땅에서 평범하고 고요하게 진행되는 그들의 일상 속에서 작가가 찾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더 나아가 작가는 인천 화교들의 고향인 산동성까지 찾아가 그들의 삶의 뿌리를 담고 싶어했다. 한국의 이국인이자 유일한 소수민족인 화교를 다룬 그의 작품들을 보면, 그들의 주름진 삶 구석구석에 ‘우리’가 묻어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의 고되고 해맑은 삶의 자국은 우리의 삶 속에 패인 주름이다. 낯선 복장과 생활 소품들을 한 이국인의 표정은 어느 틈엔가 친숙하고 편안한 이웃이 되어 인천인의 생활세계로 귀환한다. 그들은 우리가 겪었던 세월을 함께 겪어왔던 것이다. 식민이라는 시련의 세월을 그들도 같은 땅에서 우리와 함께 거쳤고, 전쟁, 분단, 냉전의 어두운 터널을 우리와 같게 혹은 다르게 공유해 왔다. 시간에 풍화되어 화석화되어가는 옛 청관에 대해 작가가 갖는 애잔한 심경은 그저 타인에 대한 동정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연민이기도 하다.

요사이 차이나타운을 살리자는 논의가 활발해진 것은, 지역 내 화교 주민들에게 여러 모로 반가운 소식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논의들이 혹 지역 내 화교를 대상화하고 소외시키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최근 지역문화론이 지역경제 발전을 위한 도구로 동원되면서, 지역 내에 살아있는 문화적 숨결들을 오히려 덮어버리지는 아닐지. 당연히 차이나타운을 살리기 위해서는 화교 상권을 살려야 하고 그런 면에서 경제논리를 떠날 수 없다. 다만 거기에 결락되어선 안 되는 것은, 차이나타운은 화교가 이 땅을 자신의 고향으로 삼기 위한 정신의 안식처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화석화되어가는 청관의 역사를 복원하고 그것이 지역 내 생활 속에서 자유롭고 발랄하게 숨쉴 수 있게 해야 한다. 요즘 자주 회자되는 문화혼종성(hybridity)은 사실 어려운 말이 아니다. 차이나타운은 인공도시가 되어서는 안 된다. 화교의 삶의 이야기를 복원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과 하나로 뒤얽혀 흘러 온 여정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흔적을 기억하는 것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의 정체성(identity)을 만들어나가는 일이다.

백지운(인천문화재단, 연세대 중문과 강사)
Posted by 영기홍
,
한국에서 생활하며 공부하는 건 아주 멋진 경험이다. 고향에서는 결코 체험할 수 없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해주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를 여행한다는 것 자체가 책이나 대학에서 배울 수 없는 지식을 얻게 해준다.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 생활 양식을 직접 배우며 경험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 한 번 시작하면 쉽게 그칠 수 없기도 하다. 그래서 2년간의 유학을 계획하며 한국에 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오래 머물기도 한다.

그러나 어려운 점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오랜 기간 외국에 체류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위협이라 하면 아마도 문화 충격일 것이다. 1958년 인류학자 칼베로 오베르그에 의해 최초로 정의된 '문화 충격'이란 완전히 새로운 문화적 환경에 처한 인간이 느끼는 장기간의 심리적 스트레스를 뜻한다. 예를 들어 내가 경험한 문화 충격은 한국에서 친구를 사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친구가 되는 과정이 다른 나라와는 다르기 때문에 친구를 사귀는 게 어렵다.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친구 관계가 고등학교 또는 그 전의 학교 동창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유일한 예외는 대학 신입생 때라고 할 수 있다. 아는 친구 한 명이 대학에서 1학년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데, 이미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여학생이 수업을 듣는 이유가 궁금했다고 한다.

"재미없지 않아?"

"친구 사귀려고 있는 거예요."

공부를 하기 위해 수업을 듣는 게 아니라는 이런 류의 태도는 대학 신입생들 사이에서 매우 보편적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나이와 상관없이 쉽게 친구를 사귄다. 스스로를 직접 소개하며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소개로 사람을 만나거나 아니면 같은 반 또는 같은 모임에 속해 있다는 상황에 의해 사람을 사귀는 게 일상적이다.

이러한 점은 한국인들이 처음 만나는 사람들을 대할 때 보이는 어색한 모습에서 역력히 찾아볼 수 있다. 생전 처음 만난 한국인이 나에게 불쑥 "어느 나라에서 왔어?"라고 묻는 경우는 셀 수조차도 없다.

하지만 "안녕", "어떻게 지내"라고 묻는다거나 "버스가 언제 올까", " 요즘 날씨가 좀 이상하다 그렇지?" 와 같은 말을 건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왔다고 대답을 하면 그 뒤 연결되는 질문이 없거나 대화를 계속하려는 노력도 없이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갑작스럽게 끝나고 만다.

물론 한국인 친구를 사귀는 게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친구 사귀기가 많이 힘들고 친구의 친구라던가 선생님이었다던가 하는 인맥을 통해야 수월해진다는 거다. 이 같은 차이의 원인이 무엇일까 궁금하지만 이것은 사회학 박사 논문의 주제로 다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로선 그 차이를 인정할 뿐이다.

* 유완또(Yuwanto)는 인도네시아 중부 자바의 주도 스마랑(Semarang)에 있는 디뽀네고로(Diponegoro) 국립대 정치학과 교수다. 한국정치로 논문을 쓰기 위해 서강대 국제대학원에 유학한 지 4년 되었으며, KBS 국제방송국에서 자신의 한국체험을 인도네시아어로 방송하는 일도 하고 있다.
유완또(인도네시아 교수, 한국 유학생)
Posted by 영기홍
,
필자의 지난 칼럼처럼 이번에도 TV이야기로 시작을 할까 한다. 바보상자인 TV가 필자에게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도구가 되니 기특한 일이다. 얼마 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방영한 “노예할아버지”, “노예청년” 등의 내용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 방송 후 누리꾼들이 “노예할아버지”, “노예청년”, 그리고 유사하게 “노예어린이집” 등에 관한 이야기와 동영상을 여기저기에 퍼 날랐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학대한 사람들에게 분노를 느꼈고, 이들의 “인권”이 이처럼 유린되도록 방치한 행정당국에 대한 질타도 이어졌다. 무엇이 누리꾼들을 이렇게 바쁘게 만드는가?

한사람의 인간으로 최소한 지켜져야 할 인간 존엄성과 인권이 유린되었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분노는 지극히 정당하다. 흔히 하는 말로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데, 경제적 능력의 차이, 학력의 차이, 연령의 차이, 성별의 차이, 지역의 차이를 막론하고 누구나 동등한 인간으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데 시비를 걸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우리나라도 이제 국가인권위원회도 생기고, 사회적으로 인권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고조되면서 나 자신에 대한 인권 침해나 국내에서 일어나는 인권유린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난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하루가 다르게 높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 고조되는 인권에 대한 관심이 우리나라에서는 국경과 국적이라는 울타리를 넘기는 아직 힘겨운 모양이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국내에도 국경을 넘는 인권문제, 외국의 인권문제에 대해서 걱정하고 행동하는 시민단체들이 다수 있고, 이 시민단체들의 활동을 지지하고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개인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확산의 범위는 아직 그리 넓지 않은 것 같다.

국내에서 또는 “우리나라 사람”을 대상으로 일어나는 인권유린과 차별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의 생각으로 떨쳐 일어나 비난을 하면서도 국내에 있는 많은 이주노동자의 인권문제, 그리고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권 유린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눈을 감아버리거나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 자신부터 생각해 볼 문제다. 다양한 핑계로 인권외교에 미온적인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많은 개인적 차원의 인권에 대한 관심도 국경을 넘는 순간, 국적이 달라지는 순간 한없이 약해지는 것 같다.

우리가 생면부지의 노예할아버지, 나와 사돈에 팔촌에 구촌에 무촌(?)도 아닐 것 같은 노예청년의 인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들이 한국인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들도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인권이란 단어는 말 그대로 인간으로서 가지는 최소한의, 당연한 권리다. 그리고 인간은 어디에 살건 모두 같은 인간이다. 인간이라는 명칭에는 국경도 국적도 없다. 인권에도 국경과 국적이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우리의 인권에 대한 관심과 행동이 대한민국이라는 민족국가, 한국인이라는 국적에 매어 있을 단 하나의 이유도 필자는 찾을 수 없다.

우리의 인권에 대한 관심과 인식을 국경과 국적으로부터 해방시키자. 우리의 해방된 인권에 대한 관심과 인식은 전 세계 도처에서 지금 이 시각에도 자행되고 있는 더 큰 규모의, 더 악랄한 인권유린에 눈을 뜰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순간에도 버마(미얀마)에는 300만명에 달하는 난민이 고통받고 있고, 7만명의 소년병이 가혹한 훈련과 억압에 시달리고 있으며, 군에 의한 강제노동과 성매매, 성범죄(성범죄 피해자의 30%는 바로 살해된다고 한다)가 일상적으로 자행된다. 그리고 지구상에 버마처럼 “인간”이 고통당하고 있고, 인권이 유린되는 나라는 얼마든지 있다. 이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눈물 흘리고 아픔을 나누기 위해서 국경과 국적에 갇힌 우리의 인권에 대한 관심을 자유롭게 풀어놓아야 하겠다.

이재현(한국동남아연구소 선임 연구원,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Posted by 영기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