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아씨,
지난 번에 얘기하려던 것을 여기에다 씁니다. 향아씨가 충분히 양해하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 얘기는 6년간의 타국 생활에 대한 신나는 회고라기보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제 모습에 관한 고백임을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국제단체에서 일을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태국 방콕에 도착했던 게 1999년이었으니 벌써 8년 전의 일이네요. 그동안 그곳도 많이 변했겠죠. 방콕은 인구 약 8만명의 우주방주와 같이 큰 도시지요. 길 위에는 차와 주인없는 거리의 개들이 사람들과 함께 넘쳐나고,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국수를 말아파는 사람들이 지나는 큰길 옆으로는 비싼 브랜드옷과 귀금속으로 치장한 비대한 거인마냥 버티고 선 쇼핑센터들도 많죠. 가난하게 산다 할지라도 결코 생활을 허투루하지 않고 가꾸고 멋낼 줄 아는 태국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방콕은 그 규모와 위치의 다른 도시들보다 물가가 싸서 국제단체를 위시해 월급이 나름대로 짱짱한 외국계나 국제 회사에 고용된 이들에게는 천국과 같은 곳이 아닐까 싶어요. 당시 현지의 많은 가난한 노동자들은 한 달 오륙천바트도 안되는 돈으로 생계를 꾸려가야 했지만 외국계 회사나 좀 돈을 버는 이들은 보통은 한달에 십이만바트도 넘는 돈을 받으며 살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이와 같은 혜택은 상당히 많은 국제단체들이 방콕에 주재하려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 또 많은 NGO 활동가들이 방콕을 찾아오는 이유가 되기도 하지요.
그런 천국같은 곳에도 제게는 매일매일 맞닥뜨려야했던 작은 지옥이 있었어요. 어느 거리마다 지키고 앉아 동냥을 하고 있던 걸인들... 태국 각지는 물론, 이웃해있는 나라들인 캄보디아, 라오스, 버마 등지에서까지 온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메트로폴리탄답게 방콕의 걸인들은 정말 각지에서 흘러들어온대요. 개중에는 타의에 의해 인신매매되어 강제구걸을 하는 이들도 많다고 현지 친구가 말해 준 적이 있지요. 걸인들은 도시의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특히 육교에서 흔히 만날 수가 있었어요. 제가 일하던 단체의 사무실도 하루에 한 번은 꼭 육교를 건너야 되는 곳에 위치해 있었죠. 버스에서 내려 사무실로 향하는 길에 한결같이 웅크리고 앉아 있던 걸인. 저는 때로는 동전 몇 닢을 나눠주기도 하고 때로는 그저 고개를 푹숙인 채 앞을 지나쳐 가기도 했는데, 어느 때건 마음이 편치가 않았어요. 걸인들은 그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쇼핑센터 앞이든, 버스정류장 근처든, 식당 앞이든, 가는 곳 어디에나 있었죠. 매일매일, 집회가 있던 날이건, 회의가 있던 날이건, 쇼핑을 하러 가는 날이건, 영화를 보러가는 날이건, 아무일도 없던 날이건, 집밖에만 나가면 어김없이 만났던 그들. 그리고, 그들과 크게 다를 것 없이 살아야 하는 상황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고층빌딩에서 호화롭게 일하는 이들과 유엔 사무실에서 일하는 고위급 국제관료들의 삶과 닮아가고 있는 듯 했던 내 삶을, 그 속에서 커져가는 괴리감이 주는 긴장과 외로움을 저는 견뎌낼 수가 없어졌지요. 그래서 결국, 1년 반 만에 그곳을 떠나고 말았고, 저의 방콕생활은 그렇게 파경에 이르렀답니다. 향아씨는 늘 제게 고생했다고 위로해 주곤 했지만, 이제 고백하지만 저는 위로받을 일을 채 해보지도 못하고, 그저 주변부에서 불편한 마음으로 어슬렁거리다가 그곳을 도망쳐 나왔던 거예요.
이런 주변자 의식은 방콕을 떠나 말레이시아의 쿠알라 룸푸르에서 지냈던 4년여 동안에도 별로 고쳐지질 못했죠. 말레이시아에서는 일과 함께 공부도 하고, 친구들도 많이 있어서 그만큼 생활의 반경과 깊이가 태국에 있을 때와는 달랐었는데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어요. 제가 어쩔 수 없었던 주변성이었죠. 늘 ‘외국인’이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다녀야 해서 그 사회 깊숙이 참여하고 관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조차 느껴질 때가 많았답니다.
그런 주변자 의식 혹은 주변자 감수성 때문이었을까요. 저와 가장 가까운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거리에서 일상적으로 보게 되는 노동자들, 저와 같은 동네에 단체로 모여 살고 있던 이주노동자들, 가끔 소식을 접하게 되는 농민들을 만날 때 한국에서 이와 같은 이들을 만날 때 느껴지던 강한 유대감과 함께라는 감정이 별로 생겨나지 않았던 거예요. 그 사실을 문득 깨달았을 때 저는 제가 그러고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처음엔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지요. 그들과 저 사이에서 좁혀지지 않던 그 거리감에 당황해 하면서 그곳을 떠나던 2005년 7월, 바로 그 순간까지 도대체 제가 왜 그런걸까 답답했었어요.
한국으로 돌아와 지내던 어느 날, 신영복 선생님의 ‘입장’에 관한 강연을 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신영복 선생님께는 죄송스럽게도 저는 그날 그 ‘입장’이라는 말이 지난 6년간의 제 모습을 돌아보게 한 힘에 취해 강연에는 몰입하지 못한 채 상당시간을 저 자신의 상념에 골몰했습니다. 저와 방콕의 걸인들, 저와 쿠알라 룸푸르의 노동자들과 이주노동자들은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었을까하는 질문이 먼저 떠오르더군요. 그날 가진 상념의 시간 이후 저는 제가 자문하던 질문을 바꿔보기로 했습니다. 왜 제가 그들과 같은 입장에 있다는 느낌을 덜 갖게 되는 것일까를 묻는 대신, 제가 그들과 같은 입장이 아니라고 느끼게 하는 그 기제가 도대체 무엇일까를 묻기로 했죠.
이제와 생각해 보니 제게 필요했던 것은 어쩌면 ‘공감’이었던 것 같아요. 동정과 달리 공감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같은 이해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같은 입장’이라는 감수성이 아닐까 싶어졌어요. 서로 같아서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는 것이 연대라면, 공감은 서로 달라 보이는 서로들의 입장이 사실은 한 토대에 발을 딛고 있음을 깨닫게 해서 더욱 단단하게 연대할 수 있게끔 마음의 길을 터주는 연대의 또 다른 이름은 아닐런지요.
이제 모국으로 돌아와 다시금 ‘내부인’이 된 저는 한국사회 안의 수많은 ‘외부인들’, ‘주변인들’을 보며 제가 갖고 있는 ‘내부인 감성’은 실은 많은 거짓말들로 만들어진 바탕 위에 부실공사된 건물마냥 세워져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성별, 학벌, 부, 성 정체성 등에 기반해 뻔뻔하게 난무하는 차별뿐만 아니라 연고지, 가문, 외모, 나이 등에 기반해 은근히 자행되는 차별 속에서 저는 제가 절대 이 사회의 주류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종종 그 사실을 망각할 때 저는 제 입장을 잊고 잃어, 스스로가 이 사회에서 함께 살고 있는 장애인들, 이주노동자들, 노동자들, 여성들 등과 같은 주변인들 중 하나임을 잊고서 결국 누구와 연대해야 하는지 조차 잊게 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향아씨, 향아씨가 고민하던 것처럼 저도 한동안 우리가 이 땅의 주류가 되는 날까지 싸우며 살아야겠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이 땅에 주류, 비주류라는 관념자체가 없어질 수 있도록 싸우며 살아야겠다고 해야 할지 망설인 적이 있었습니다. 주류들이 가지고 누려왔던 그 기득권을 저 또한 한번쯤 누려보고 싶은 욕망이 있어서였을것 같아요. 문득문득 여전히 그런 욕망이 솟구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향아씨에게 했던 이 고백을 잘 기억할게요.
*글쓴이 주: 이 글은 '향아씨'라는 가상의 인물에 대한 말걸기를 통해 특정인이 아닌 모두에게 말걸기를 하는 글입니다. 얼마 전 있었던 여수 출입국관리소 사건은 저에게 '구별짓기'와 '편나누기'의 폭력성과 우리 모두 더불어 잘 살기 위해 필요한 '공감'과 '연대'에 대한 더없는 갈증을 상기시키고, 저 스스로의 발자취에 대한 반성의 시간을 다시 한 번 갖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칼럼은 지극히 개인적인 고백체로 쓰여졌음을 이 글의 형식으로 인해 읽으시기가 불편하신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지난 번에 얘기하려던 것을 여기에다 씁니다. 향아씨가 충분히 양해하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 얘기는 6년간의 타국 생활에 대한 신나는 회고라기보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제 모습에 관한 고백임을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국제단체에서 일을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태국 방콕에 도착했던 게 1999년이었으니 벌써 8년 전의 일이네요. 그동안 그곳도 많이 변했겠죠. 방콕은 인구 약 8만명의 우주방주와 같이 큰 도시지요. 길 위에는 차와 주인없는 거리의 개들이 사람들과 함께 넘쳐나고,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국수를 말아파는 사람들이 지나는 큰길 옆으로는 비싼 브랜드옷과 귀금속으로 치장한 비대한 거인마냥 버티고 선 쇼핑센터들도 많죠. 가난하게 산다 할지라도 결코 생활을 허투루하지 않고 가꾸고 멋낼 줄 아는 태국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방콕은 그 규모와 위치의 다른 도시들보다 물가가 싸서 국제단체를 위시해 월급이 나름대로 짱짱한 외국계나 국제 회사에 고용된 이들에게는 천국과 같은 곳이 아닐까 싶어요. 당시 현지의 많은 가난한 노동자들은 한 달 오륙천바트도 안되는 돈으로 생계를 꾸려가야 했지만 외국계 회사나 좀 돈을 버는 이들은 보통은 한달에 십이만바트도 넘는 돈을 받으며 살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이와 같은 혜택은 상당히 많은 국제단체들이 방콕에 주재하려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 또 많은 NGO 활동가들이 방콕을 찾아오는 이유가 되기도 하지요.
그런 천국같은 곳에도 제게는 매일매일 맞닥뜨려야했던 작은 지옥이 있었어요. 어느 거리마다 지키고 앉아 동냥을 하고 있던 걸인들... 태국 각지는 물론, 이웃해있는 나라들인 캄보디아, 라오스, 버마 등지에서까지 온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메트로폴리탄답게 방콕의 걸인들은 정말 각지에서 흘러들어온대요. 개중에는 타의에 의해 인신매매되어 강제구걸을 하는 이들도 많다고 현지 친구가 말해 준 적이 있지요. 걸인들은 도시의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특히 육교에서 흔히 만날 수가 있었어요. 제가 일하던 단체의 사무실도 하루에 한 번은 꼭 육교를 건너야 되는 곳에 위치해 있었죠. 버스에서 내려 사무실로 향하는 길에 한결같이 웅크리고 앉아 있던 걸인. 저는 때로는 동전 몇 닢을 나눠주기도 하고 때로는 그저 고개를 푹숙인 채 앞을 지나쳐 가기도 했는데, 어느 때건 마음이 편치가 않았어요. 걸인들은 그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쇼핑센터 앞이든, 버스정류장 근처든, 식당 앞이든, 가는 곳 어디에나 있었죠. 매일매일, 집회가 있던 날이건, 회의가 있던 날이건, 쇼핑을 하러 가는 날이건, 영화를 보러가는 날이건, 아무일도 없던 날이건, 집밖에만 나가면 어김없이 만났던 그들. 그리고, 그들과 크게 다를 것 없이 살아야 하는 상황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고층빌딩에서 호화롭게 일하는 이들과 유엔 사무실에서 일하는 고위급 국제관료들의 삶과 닮아가고 있는 듯 했던 내 삶을, 그 속에서 커져가는 괴리감이 주는 긴장과 외로움을 저는 견뎌낼 수가 없어졌지요. 그래서 결국, 1년 반 만에 그곳을 떠나고 말았고, 저의 방콕생활은 그렇게 파경에 이르렀답니다. 향아씨는 늘 제게 고생했다고 위로해 주곤 했지만, 이제 고백하지만 저는 위로받을 일을 채 해보지도 못하고, 그저 주변부에서 불편한 마음으로 어슬렁거리다가 그곳을 도망쳐 나왔던 거예요.
이런 주변자 의식은 방콕을 떠나 말레이시아의 쿠알라 룸푸르에서 지냈던 4년여 동안에도 별로 고쳐지질 못했죠. 말레이시아에서는 일과 함께 공부도 하고, 친구들도 많이 있어서 그만큼 생활의 반경과 깊이가 태국에 있을 때와는 달랐었는데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어요. 제가 어쩔 수 없었던 주변성이었죠. 늘 ‘외국인’이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다녀야 해서 그 사회 깊숙이 참여하고 관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조차 느껴질 때가 많았답니다.
그런 주변자 의식 혹은 주변자 감수성 때문이었을까요. 저와 가장 가까운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거리에서 일상적으로 보게 되는 노동자들, 저와 같은 동네에 단체로 모여 살고 있던 이주노동자들, 가끔 소식을 접하게 되는 농민들을 만날 때 한국에서 이와 같은 이들을 만날 때 느껴지던 강한 유대감과 함께라는 감정이 별로 생겨나지 않았던 거예요. 그 사실을 문득 깨달았을 때 저는 제가 그러고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처음엔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지요. 그들과 저 사이에서 좁혀지지 않던 그 거리감에 당황해 하면서 그곳을 떠나던 2005년 7월, 바로 그 순간까지 도대체 제가 왜 그런걸까 답답했었어요.
한국으로 돌아와 지내던 어느 날, 신영복 선생님의 ‘입장’에 관한 강연을 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신영복 선생님께는 죄송스럽게도 저는 그날 그 ‘입장’이라는 말이 지난 6년간의 제 모습을 돌아보게 한 힘에 취해 강연에는 몰입하지 못한 채 상당시간을 저 자신의 상념에 골몰했습니다. 저와 방콕의 걸인들, 저와 쿠알라 룸푸르의 노동자들과 이주노동자들은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었을까하는 질문이 먼저 떠오르더군요. 그날 가진 상념의 시간 이후 저는 제가 자문하던 질문을 바꿔보기로 했습니다. 왜 제가 그들과 같은 입장에 있다는 느낌을 덜 갖게 되는 것일까를 묻는 대신, 제가 그들과 같은 입장이 아니라고 느끼게 하는 그 기제가 도대체 무엇일까를 묻기로 했죠.
이제와 생각해 보니 제게 필요했던 것은 어쩌면 ‘공감’이었던 것 같아요. 동정과 달리 공감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같은 이해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같은 입장’이라는 감수성이 아닐까 싶어졌어요. 서로 같아서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는 것이 연대라면, 공감은 서로 달라 보이는 서로들의 입장이 사실은 한 토대에 발을 딛고 있음을 깨닫게 해서 더욱 단단하게 연대할 수 있게끔 마음의 길을 터주는 연대의 또 다른 이름은 아닐런지요.
이제 모국으로 돌아와 다시금 ‘내부인’이 된 저는 한국사회 안의 수많은 ‘외부인들’, ‘주변인들’을 보며 제가 갖고 있는 ‘내부인 감성’은 실은 많은 거짓말들로 만들어진 바탕 위에 부실공사된 건물마냥 세워져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성별, 학벌, 부, 성 정체성 등에 기반해 뻔뻔하게 난무하는 차별뿐만 아니라 연고지, 가문, 외모, 나이 등에 기반해 은근히 자행되는 차별 속에서 저는 제가 절대 이 사회의 주류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종종 그 사실을 망각할 때 저는 제 입장을 잊고 잃어, 스스로가 이 사회에서 함께 살고 있는 장애인들, 이주노동자들, 노동자들, 여성들 등과 같은 주변인들 중 하나임을 잊고서 결국 누구와 연대해야 하는지 조차 잊게 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향아씨, 향아씨가 고민하던 것처럼 저도 한동안 우리가 이 땅의 주류가 되는 날까지 싸우며 살아야겠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이 땅에 주류, 비주류라는 관념자체가 없어질 수 있도록 싸우며 살아야겠다고 해야 할지 망설인 적이 있었습니다. 주류들이 가지고 누려왔던 그 기득권을 저 또한 한번쯤 누려보고 싶은 욕망이 있어서였을것 같아요. 문득문득 여전히 그런 욕망이 솟구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향아씨에게 했던 이 고백을 잘 기억할게요.
*글쓴이 주: 이 글은 '향아씨'라는 가상의 인물에 대한 말걸기를 통해 특정인이 아닌 모두에게 말걸기를 하는 글입니다. 얼마 전 있었던 여수 출입국관리소 사건은 저에게 '구별짓기'와 '편나누기'의 폭력성과 우리 모두 더불어 잘 살기 위해 필요한 '공감'과 '연대'에 대한 더없는 갈증을 상기시키고, 저 스스로의 발자취에 대한 반성의 시간을 다시 한 번 갖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칼럼은 지극히 개인적인 고백체로 쓰여졌음을 이 글의 형식으로 인해 읽으시기가 불편하신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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