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와 서명운동으로 바뀌는 건 없다
 버마 민주화 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위해


세계에서 현재까지 비민주적 정권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국가들 중 가장 높은 국제적 관심을 끌고 있는 나라 중 하나가 버마(미얀마)일 것이다. 1988년 민주화 요구 시위 실패 이후 서슬 퍼런 군사정권에 외로이 투쟁하는 민주주의 지도자 아웅산 수치(Aung San Suu Kyi)의 용기에 국제사회는 주목했고, 그녀가 독립 운동가이자 국부(國父) 아웅산 장군의 혈육이라는 사실에 국내외 시선은 그녀에게 정통성을 부여했다.
 
아웅산 수치와 그녀의 동지들이 정권에 의해 영어(囹圄)상태에 들어간 뒤 국내적으로 지루하리만큼 정권에 대한 공개적 저항의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다가 드디어 2007년 8월 유가 인상에 항의하는 승려들의 비폭력 가두시위가 발생했다. 서구 언론에 의해 "샤프란 혁명"(Shaffron Revolution)으로 명명된 이 시위는 국제사회의 압력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유혈진압으로 막을 내렸다. 국외에서 활동하는 버마출신 민주화 운동가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조국의 민주화를 낙관했으나 그 결과는 허무하리만큼 군사정권의 일상으로 회귀했다.
 
  정치권력을 유지하려는 버마 군부의 의지가 강력하고 또 그 의지에 따른 사회 통제력이 견고하기 때문에 정권에 도전할 국내세력이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지난 10여 년간 버마 군부의 정치행태를 관찰한 결과에 따르면 정권의 공고한 억압체계는 군사정권 유지에 부분적으로만 인정된다. 규모와 파괴력 면에서 미약하지만 정권을 향한 공개적인 저항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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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2007년 8월 유가 인상에 항의하는 승려들의 비폭력 가두시위가 발생했다. 서구 언론에 의해 "샤프란 혁명"(Shaffron Revolution)으로 명명된 이 시위는 국제사회의 압력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유혈진압으로 막을 내렸다. ⓒhttp://ko-htike.blogspot.com 

필자의 견해에 따르면 버마 민주화 운동이 지리멸렬한 부침(浮沈)을 거듭하는 근본적 이유는 거시적 차원에서 국내세력과 국외세력의 소통 부재에 있다. 바꾸어 말하면 버마 민주화를 지원하는 국제 NGO들과 국외 체류 민주화 운동가들의 운동 노선과 정책이 버마 군사정권의 즉각적인 반응을 유도할 만큼 파괴적이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 주장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내세력의 권력 공백을 지적할 수 있다. 1988년 시위와 1990년 총선 이후 군부는 민주화 운동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들어감에 따라 민주화 운동가들은 신변상의 문제로 외국으로 도피했고, 군사정권의 만행을 세계에 고발하며 국외 체류 민주화 운동의 조직화에는 성공했다. 2007년 말에 필자가 만난 방콕 주재 한 민주화 운동가에 따르면 태국에만 약 4만 명가량의 민주화 운동가가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바꾸어 말하면 이들의 이탈은 국내적으로 군부에 대항할 수 있는 제도의 약화를 의미하며, 군부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손쉽게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통제가 가능하다. 희생을 치르지 않고 민주주의를 달성하겠다는 무임승차자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란다.
 
둘째, 국내에서 이탈한 민주화 운동가들의 분열과 국내세력과의 허약한 연대를 지적할 수 있다. 국외에서 활동하는 민주화 운동가들은 국민민주연합(NLD) 당원 이외에 독자적 정당이나 노동자·학생연합과 같은 소규모 단체, 개인 활동가 등으로 나눠지는데, 각 단체들 간의 배타적 갈등 구도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NLD는 1990년 총선에서 승리했고, 미국이 합헌정부로 인정하는 정당이라는 이유에서인지 민주화 운동을 하는 기타 단체나 활동가들의 운동을 부정하는 경향이 높다. 또한 소규모 단체들은 생성과 소멸의 단계를 반복하는데, 신변과 생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임시방편적 전략이기도 하지만 한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면 세속적인 성공을 했으며 이는 곧 불교에서 말하는 좋은 업(業)을 쌓았다는 것과 동일시하는 버마인들의 습성이 강력히 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고국의 민주화 이전에 운동의 주도권을 두고 각축을 벌이는데 더 열중하며 그 과정에서 각 기구 간 배타성이 나타난다.
 
국외 체류 운동가들의 대립과 분열은 버마 국내세력과의 연대에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2007년 반정부 시위에도 보았듯이 버마 국내세력들이 국외 운동가들과 공동으로 운동을 전개한 증거를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쎄잉윙(Sein Win) 박사와 같이 국외적으로 명망 있는 민주화 운동가들은 언론과의 인터뷰에 집중하며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킬 뿐이었다. 실제로 필자가 버마에서 만난 청년 운동가들은 국외에서 활동하는 운동가들이 국내세력과 어떠한 연대도 꾀하지 않는 것에 대해 큰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이러한 운동 구조로는 정권을 퇴진시키기 힘들다는 평가를 내렸다. 중국, 인도, 태국, 최근 들어서는 러시아까지 군사정권과 경제적 교류를 유지하며 정권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국외 체류 운동가들은 버마 투자 금지, 관광 금지와 같은 요구사항에 20년째 천착하고 있는 사실도 재고될 필요가 있다. 현실을 직시하는 탄력적인 운동 노선과 국내세력과의 연대 모색이 필요하다.
 
셋째, 버마의 민주화를 지원하는 한국 NGO로 눈을 돌리면 이들의 가치편향적인 시각을 지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버마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는 NGO가 한국에만 30여개 이상 주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들은 공통적으로 군사정권 퇴진, 인권탄압 중단과 같은 원론적인 수준에서 군사정권을 압박하고 있다. 즉 정작 버마의 군부통치가 다른 국가들에 비해 장기간 지속되는 이유에 대한 지적 고민을 한다거나 버마를 방문하여 현지 사정에 대한 이해를 도모해야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버마 군사정권을 타도의 대상으로만 정의내릴 뿐이지 어떠한 전략을 동원할 것인가 고민하지 않는 것은 한국 NGO뿐만 아니라 국제 NGO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며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 각 NGO들은 버마 출신 운동가들의 보조적인 역할 이외에도 현지 상황을 직시할 수 있는 가치중립적인 태도를 배양해야하며, 이를 바탕으로 버마의 민주화를 지원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일부 국제사회의 노선 변경이 필요하다. 알다시피 버마는 26년간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국제관계의 틀 속에서 정권의 공고함을 유지했던 국가이다. 따라서 경제봉쇄와 같은 고전적인 수단을 동원한 고립정책이 버마의 체제변동에 영향력을 끼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버마를 국제사회로 유인할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체제변동에 특효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군사정권의 고립을 주장하는 NLD의 내부 목소리도 변화되어야 마땅하다. 창당 이후 지난 20여 년간 NLD의 정강과 노선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온 자들은 당외 세력보다 당내 세력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외 체류 운동가들과 NLD의 요구사항이 다소 중첩된다는 사실은 여전히 버마 민주화 운동의 주류는 NLD의 몫으로 보인다.
 
필자는 최근 몇 년간 개인적 관심에 의거 버마 내 조직화되지 않은 민주화 운동가들과 교류하며 버마 미래의 새로운 희망을 보았다. 민주화 운동가들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국외로 떠난 상황에서도 혁명정신의 계보를 잇는 청년 운동가들이 군부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미래의 정치질서에 대한 고민을 나누며 세력 확대를 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국제사회가 버마의 민주화를 지원할 수 있어도 정작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발전시키는 장본인은 버마 국민이라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지 않고 있었다.
 
이제 버마 민주화를 촉구하는 국제사회, 국제 NGO, 국외 주재 민주화 운동가들은 단선적인 경로에만 치중하던 민주화 운동의 노선을 변경하여 버마 국내세력에 대한 화답이 필요할 때가 되었다. 즉 버마 문제에 대한 국제적 지원과 관심을 요구하는 규탄,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는 서명운동보다 현실적이고 실행 가능한 대안으로서 버마 현지와 교류할 수 있는 연대를 모색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일 것이다. 이를테면 투자 철수가 아니라 민간 분야의 투자 확대 요구, 공정여행을 통한 버마인들의 인식 제고와 같은 활동은 NGO가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고 본다. 국외 체류 민주화 운동가들도 헤게모니의 각축장에 휘말리지 말고 국내세력과 교류하며 시행착오를 거치며 현지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노선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겠다. 버마 국내세력도 더 이상의 국외 퇴장을 지양하며 지하세계에서 조직화와 연대를 꾀하여야 하며, 민주적 의사결정에 취약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군부의 폭압적인 만행에 민초를 대신해서 승려가 길거리로 나선지 1년이 지났다. 이제 버마의 민주화를 위한 새로운 지평이 필요할 때이다. 버마 국내세력-국외 체류 민주화 운동가-국제 NGO간의 공조체제가 이뤄질 경우 버마의 민주화는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올 것이다.


장준영/한국외대 교양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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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아시아 사람들

거리를 걷거나 지하철을 타다 보면 예전보다 자주 아시아 이주자들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생활 속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아시아 이주자들의 수는 우리 사회에서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과연 한국이라는 사회 안에서 우리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그들을 어떻게 포용하고 연대해야 할 것인가.

10월 24일 참여연대에서 김이선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을 모시고, 아시아 포럼 일곱 번째 시간인 ‘이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아시아 사람들’을 주제로 아시아 시민사회와 이주민들과 연대해야 할 방향에 대해 논의했다.

김이선 연구원은 아시아 지역 내에서 이루어지는 이주에 대한 구조와 동향을 먼저 언급했다. 국제이주의 지형에서 아시아는 송출지역이다. 즉 아시아는 인구가 많은 중국과 인도와 같이 자국의 노동자를 타국으로 보내는 비율이 높은 지역이다. 특히 아시아 내 송출지인 남아시아는 인구가 급증하고 세계적인 경제 재구조화 과정을 통해 경제적 기회가 제한되게 된다. 그래서 아시아 내 이주 목적지인 일본, 싱가포르, 한국 등 경제성장으로 시장이 확대되고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고 있는 나라로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이주하기 시작한다.

이주를 하게 되는 대부분의 이유는 일자리를 얻어 돈을 벌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주를 하는 데 있어서 중개구조 상의 문제 때문에 이주 준비 단계에서부터 사기로 인한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목적지에서의 제도적 보호책이 부재하여 목적지의 고용자가 이를 이용해 이주 노동자를 착취하는 경우가 만연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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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참세상


미등록 이주자의 경우, 불법체류의 신분이기 때문에 그나마 있는 제도적 보호에서도 제외되어 최소한의 인권도 보장받지 못한다. 각국 정부는 미등록 이주자에 대해 강력한 대처를 하거나 해당 국가와의 외교적 관계를 고려하여 간헐적으로 온정적 조치를 취하고 있다.

이주의 특징 중 하나는 ‘이주의 여성화’ 라고 하였다. 여성 이주의 첫 번째 증가 원인은 ‘돌봄 노동’ 과 ‘성 산업’ 등 여성 이주자의 수요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선진국 페미니즘의 실패를 여성 이주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는 경우인데, 즉 선진국의 ‘돌봄의 공백’을 사회적 가치를 재구성해 해결하기 보다는 국가 밖으로 전가해 저개발 국가 출신의 여성들이 선진국 여성들의 재생산 역할을 대신 수행하는 것이다.

두 번째 증가 원인은 ‘결혼’ 이다. 목적지 내 특정 계층 남성들이 결혼하지 못하면서 노동 이주에 대한 대안으로서 결혼 이주를 택한 송출국 결혼 여성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제 결혼이 상업화 되면서 국제결혼 과정상의 사기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상대 가족과의 관계 형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가족외부와의 관계는 공백 상태가 되는 문제들이 심각하게 발생하고 있다. 또한 결혼 이주 여성의 상당 부분이 인신매매적인 성격을 갖고 있어 쉽게 성적 착취 피해자로 전락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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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한겨레

김이선 연구원은 한국인들이 결혼 이주 여성에 대한 인식을 측정한 최근의 설문내용을 언급하였다. 결혼 이주 여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확산되고 있고 많은 한국인들이 이주민들도 사회적 지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을 한국 사회의 주체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인식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이는 한국인이 아시아에서 이주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포용력이 모자란 것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김 연구원은 이주민에 대해 한국인들의 표면적 수용성을 뛰어넘어 이주민들을 완전한 한국 사회의 주체로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서 초국가적인 시민사회의 네트워크의 마련과 시민사회와 정부의 노력이 둘 다 필요함을 강조하며 강의를 마쳤다.

정리: 오연주 참여연대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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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인도의 9.11, 그리고 야만
인도 민주주의가 실패해온 이유

 
9.11 하면 많은 이들은 2001년, "악마 같은 이슬람" 사람들이 비행기를 낚아채 세계무역센터 건물을 들이받아 3000명을 죽인 폐허더미의 장면부터 떠올릴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범죄로서 전인류에 대한 범죄라고까지 할 수 있다.
 
물론 9.11 테러 사건이 인류에 대한 범죄이긴 했지만, 여기서 내가 기억나는 것은 오래 전 1998년에 파키스탄의 정치가이자 활발한 혁명이론가였던 에크발 아마드(Eqbal Ahmad)가 했던 말이다. 그는 당시 미국에 거의 빌다시피 서아시아에 대한 간섭과 만행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면서, 마치 9.11 사태로 인한 전세계적 재앙을 예견하는 듯했다. 그리고 실제로 9.11 테러의 현장이 그랬다. 생생한 재난의 장면으로 의해 순식간에 중동 국가들은 다 같은 "야만적인 무슬림"으로 치부됐으며, 민주주의와 테러 퇴치라는 명목으로 어마어마한 폭격을 받아 쓸려버렸다.
 
지금 나는 미국식 신제국주의 모델을 재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2001년 9.11 사태의 희생을 불경스럽게 하지 않으면서도 근대사에서 잊혀진 몇 가지 다른 중요한 9.11 사건을 살펴보고자 한다.
 
칠레에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이 라 모네다에 탱크로 밀고 들어가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이끄는 대단히 인기 있던 민주 정권을 붕괴시킨 것 또한 9월 11일 아침이었다. 그것은 남아메리카 역사상 가장 피 튀기는 쿠데타였고, 3000명의 시민이 학살당했다. 이후 피노체트의 독재 치하에서 사형되거나 실종된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칠레 국립체육관은 강제수용소로 바뀌었고, 그곳에서 살해된 수천 명 가운데 대중가수였던 빅토르 하라는 손가락이 모두 잘렸으며, 기타를 치라는 명령을 받고 피범벅이 된 손 바닥으로 기타를 쥐어 들자 바로 총살됐다.
 
오늘날 사람들이 이 또 다른 '9.11사태'를 누가 일으켰는지 알기 위해 갑자기 역사학도가 될 필요는 없다. 여전히 '야만적'인 정권을 민주화시키는 것을 중요한 정책으로 삼고 있는 콘돌리사 라이스 국무장관이 일하고 있는 미국 정부가 바로 피노체트 쿠데타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십 년 전 당시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아옌데 대통령이 국민의 지지와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면서 미국 회사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보인 데 대해 "자국민들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스스로 공산주의의 길로 가려는 나라를 옆에서 빤히 보고만 있을 수 없다. 그들 스스로의 결정에 맡겨두기에는 너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라고 좌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기억에서 사라진 9.11은 또 하나 있다. 1906년 남아프리카에서 간디(Ghandi) 의해 최초로 발생한 WMD 사건이다. 여기서 WMD는 대량파괴무기를 뜻하는 'weapons of mass destruction' 이 아니라 'weapon of mass disobedience' 로서, 사티야그라하라고 불리는 인종차별과 식민지화에 대한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말한다. 훗날 간디가 밝혔지만, 남아프리카 정부의 간섭을 꺾고 인도 대륙의 주권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한 사티야그라하 운동이 바로 9월 11일 일어났다. 이로써 다른 영연방 식민지 국가들에도 반 식민화 운동이 비폭력적으로 퍼져나갔고, 1960년대에는 키신져와 라이스와 부시의 나라 미국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선도할 시민권 운동의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여기 전세계에 알려지지 않고 잊혀진 또 하나의 9.11이 있다. 50년 전인 1958년 9월 11일, 간디가 활동했던 바로 그 시대에 인도 대통령은 국회의 '군특수권한법안'에 동의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한 이 법은, 식민지 시대에 영국이 인도의 독립 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군특수권한 조례'를 재현한 것이다. 인도의 북-동부 지역의 대부분은 이 법안으로 의해 군대 통치를 받고 있다. '군특수권한법'은 사실상 무력 통치인 현 상황을 민주 정부의 합법통치가 이루어 지고 있는 것처럼 위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오늘날, 군사권이 강한 동북지역은 연 평균 1000명 가량의 민간인이 살해되고 있다.
 
군특수권한법 설명에 구체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인도 동북지역의 다른 9월 사건을 언급하겠다. 1948년, 새롭게 독립한 인도의 북동부에 위치한 왕후국 마니푸르(Manipur)는 보통선거를 통해 민주의회를 구성했다. 이는 아시아 최초였고, 인도 주정부가 세워지기도 전에 이뤄진 것이었다. 하지만 의회는 오래가지 않았고, 인도는 곧 마니푸르 왕후와 통합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1949년 9월 21일 합병 당일에는 마니푸르의 민주의회의 합법적 동의를 받지 않은 군사적 조치가 강행됐고, 이어서 10월 12일에는 인도육군 일개 대대가 마니푸르 수도에 진입했다. 3일 후인 10월 15일, '합병 조약'이 발효되면서 보통선거를 통해 구성된 국회가 속절없이 해산되고 말았다. 일순간 마니푸르는 헌법에 민주의회까지 갖춘 자주국가에서, 민주주의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최고 지방 행정관들과 군 출신 주지사들이 통치하는 인도 뉴델리(New Delhi) 의 행정 하에 속하게 되었다.
 
다시 1958년 군특수권한법으로 돌아와 보자. 그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군특수권한법은 6장 내외의 법률로서, 아마 2억의 인구를 통치하기 위한 세상에서 가장 짧은 법률일 것이다. 이 법은 동북지역에서 군사활동을 규정지으며, 동북 지역의 '혼란 구역' 내에서 인도군 당국과 장병들에게 특별 권한을 부여한다. 그러나 이 법은 '혼란 구역'을 정확히 명시하지 않는다. 4조a항은 "어떤 군 장교, 준위, 하사관이든 그가 공공 질서 유지에 적합하다고 판단할 시, 그러한 내용에 해당하는 경고를 한 후에는, 발포하거나 기타 무력을 사용하여 저지하도록 허용하며, 심지어 살상하는 것도 허용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4조b항은 군 당국이 판단하기에 주거물을 비롯한 어떠한 건물이든, 그 안에서 무장 공격을 "행할 가능성이 있는", 또는 "어떠한 혐의를 받고 있는 수배자든" 은신처로 사용했던 건물을 파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4조c항은 "이성적으로 곧 명백한 범죄를 저지를 의심이 가는 자"에 대해서 "필요한 어떠한 무력"을 사용해서 영장 없이 체포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이런 조항은 무분별한 체포의 근간이 됐고 엄청난 무력 남용과 많은 민간인이 사살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북동부와 같이 문화적, 지리적으로 외딴 곳에 위치한 지역의 군인들은 대개 '이성적'인 근거 없이 무력을 사용한다. 마지막 조항인 6조에는 "이 법안에 명시되어 있는 권한으로 시행되거나 예비된 어떠한 행동으로 인해, 이 법안에 명시된 사람은 어떠한 법적 처벌, 절차를 거치지 아니한다"고 규정되어, 모든 군인사에게 법적 면제권을 부여한다.
 
이 '군 특수권 법안'이 군사행위에 대해 제공하는 법적 보호 때문에 인도국군에 의한 인권침해는 반복됐다. 그 유형에는 강간, 여성 추행, 민간인을 향한 발포, 작대기와 고춧가루를 이용한 항문 고문과 같은 극한의 고문, 그리고 기타 법에 명시되지 않은 사항들도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가장 의아한 점은 야만적이고 가혹한 군사 통치 법안이 민주국가로 알려진 인도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 해답은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인도대륙 중 동북지역은 영연방이 마지막으로 식민지화한 지역이다. 하지만 식민화 이후 동북지역은 곧 제국의 최전선이 됐다. 동북의 아삼 지역 평원을 지나 구릉지대에 위치한 이곳은 행정권이 제한적으로 미치는 곳으로서 많은 부분 영국의 지배를 수용한 전통 족장들에게 통치가 맡겨졌다. 당시 왕후국이었던 트리푸라와 마니푸르는 속국으로 간주되어 인도 중앙정부 주재관들의 간접 조종을 받았다. 약탈적인 구릉지역의 부족들은 이웃한 버마 왕국의 공격적 성향을 흡수하기 위한 완충지대로 관리되었다. 초기의 식민지 행정관들은 그 언덕 지역을 "악마와 도깨비가 득실거리는 공포의 땅 같다"고 입을 모았다.
 
버라드(S.G. Burrard) 대령이 쓴 <인도 서베이 기록: 북동지역 전선의 탐험, 제4권>은 영국인의 시각에서 이 지역을 미지와 기지, 원시와 문명 사이에 지리적 대비가 강하게 나타난 지역으로 기술하고 있다. 식민지들의 지리적 이미지는 각 곳의 원주민들의 이미지로 표현됐다. 예를 들면, "아삼 사람들은 사납고 야만적인 성격을 가졌다. 그들은 전쟁을 좋아하고 복수심이 강하며 잔인하고 술수가 많다. 아직 인류애의 부드러움은 아삼 사람들의 형체에 녹아있지 않은 듯하다"고 묘사했다. 뿐만 아니라 식민지 행정관들도 아삼 너머 지역 사람들은 성격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유럽이나 인도 중심부와는 확연히 달라, 그 지역은 불가피하게 식민 계획에서 제외됐고, 그 결과 이 지역은 야만의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아삼 너머 구릉 지역의 야만적인 역사는 오늘날 식민 해방 후 인도에서 그 원시성이 가장 강하게 남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많은 학자와 국제 단체, 그리고 인도 정부는 그 지역을 "군사적 통치 질서"가 군림하며, 불순분자들이 사는 낙후 지역으로 꼽는다.
 
이 같은 시각들이 존재하는 것은, 영국으로부터 권한을 인도 받은 인도정부의 엘리트들의 무지 때문이 아니라, 인도 국민들 인식 자체에 커다란 '공백'이 있기 때문이다. 이 공백은 인도 역사교과서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교과서의 지도에는 아삼 부근 야만 지역이 커다란 공터로 나와있다. 이것은 마치 예전 고대 중국에서 자기 나라에 알려지지 않은 곳은 여백으로 처리해 아예 존재 자체를 알리지 않은 것과 유사하게, 인도 역사교과서에는 아삼 부근지역의 유례를 가르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다윈의 사회진화론의 신화와 전세계를 비 문명화된 절반으로 보는 인종주의적 편견과 유사하게 인도 국민들의 상상 속에서 이 지역은 아리안족의 문명과 지역 우수성에 비쳐 볼 때 낙후되고 가장 이질적인 곳으로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군특수권한법과 같은 정책에 의해서 동북지역이 변화할 수 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인도 국민 의식에 존재하는 이 '공백'와 인종적 차이는 인도 정부의 '통합 거부'에 대한 우려와 인도의 팽창주의 정신이 혼재되어 빚어낸 것이다. (인도는 건국부터 식민 통치 당시까지도 서아시아로 뻗어나가는 민족주의 개척정신을 품어왔다) 불만분자의 봉기와 무력이 북동지역의 특성으로 자리매김 하기 이전부터, 그리고 그 지역에 분리파의 아우성이 들리기 오래 전부터 인도정부 지도자들은 통일이 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50년 11월 7일, 초대 내무장관이 네루 총리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 내용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동북전선의 불명확한 상태와 티베트, 중국에 대한 현지인의 친밀감은 앞으로 우리와 중국 사이에 중대한 도전 요인이 될 것이다. 북방 또는 동북방에 대한 접근은 부탄, 시킴, 그리고 아삼의 다아질링과 부족을 포괄한다. 그러나 이 지역 사람들은 인도에 대한 헌신이나 충성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 북방과 동북지역에서 우리의 전선을 강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행정적 조치들은 네팔, 시킴, 다아질링과 접경 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당시 인도주재 미국 대사 찰스 보울스는 인도인들이 인도-네팔 평화우호조약 체결을 미국이 양대 대륙(미국과 유럽) 사이에 맺은 훨씬 광범위한 조약들보다 대단하게 보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라고 이야기 했다.
 
인도의 민주정치체제가 군사보안당국에 의존한 동북정책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군사주의적 사상에 민주주의가 편승하는 것을 의미한다. 국민들 내부의 서로 다른 차이점을 존중할 수 있는 사회적 기초가 형성되지 않다면 인도의 민주주의는 전혀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북동지방 문제는 인도 본토의 민주진보진영에 중대한 도전이기도 하며, 과거에 늘 인도가 민주주의에 실패했던 원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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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노지트 후세인/ARENA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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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국가의 인권과  민주화의 자취를 찾아서
아시아 인권옹호자 전기 중심으로

올해는 유엔이 인권옹호자선언 (UN Declaration on Human Rights Defenders)을 채택한지 1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를 기념해 국제연대위원회는 버마,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를 중심으로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활동한 아시아 인권옹호자의 삶을 조명해 보는 기획 연재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아시아 인권옹호자의 일대기를 통해 살펴보는 각 국의 인권 상황과 민주화의 자취는 아시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새롭게 아시아를 만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멀고 먼 버마 민주화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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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민 코 나잉 (Min Ko Naing)
연혁 : 1962 ~ 현재
국가 : 버마 (Burma)
분야 : 민주화 운동





폭력적인 통치, 버마 군부독재의 시작


1948년, 버마는 무려 100년이 넘는 영국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루게 된다. 그렇지만 정치 지도자들의 권력투쟁과 영국의 분리 통치 정책의 고수로 버마는 내전에 휩싸이게 된다. 이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진압하던 과정에서 군대와 지휘관들이 정치적으로 큰 세력이 되었고 1962년 3월 군총사령관 네윈이 국민에 의해 선출된 우누 수상이 이끄는 정권을 쿠데타로 장악하면서 버마에서는 인권 유린과 군부 독재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네윈 군부는 버마식 사회주의를 내걸고 버마사회주의정책당의 일당지배체제만을 인정하고 경제적으로도 대부분의 사기업과 그 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였다. 그 결과 버마에서 민주주의는 사라져 버렸고 군부의 부정부패가 팽배하였으며 과거 아시아의 쌀창고라고 불리던 버마는 국민들이 인권탄압과 가난, 경제 붕괴로 고통 받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버마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네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던 1962년부터 학생과 노동자들의 지하 조직을 주축으로 한 민주화 투쟁은 80년대까지 꾸준하게 이어져왔다. 80년대에 들어 심각한 경제난이 버마를 덮치자 1987년 군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버마의 화폐 가치를 취소해 버렸고 이에 분노한 버마 국민들은 1988년 8월 8일 군부에 저항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8888시위이다. 그러나 군부는 버마 국민들이 총 봉기한 8888시위를 무자비한 총격과 살상으로 진압하였다. 전국적인 시위로 버마의 불안정한 상황이 계속되고 전국 각지의 시위를 연계여 이끌 지도력이 없었던 틈을 타 1988년 9월 18일 서마웅 장군은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킨다. 새로운 군부는 민주적 총선거로 권력을 이양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버마의 국민들은 새로운 쿠데타와 군부를 믿지 않았고 거센 시위와 저항, 폭력적인 진압, 수 천 명에 달하는 버마 국민들의 희생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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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88 항쟁 당시 버마 승려들의 시위 모습 ⓒ버마 정치범 지원모임(appb.org)

군부에 맞서기 위한 여러 단체들이 조직되었고 ‘전 버마 학생연합(The All Burma Federation of Student Unions; ABFSU)의 대표였던 민꼬 나잉(Min Ko Naing)’과 학생들은 평화적인 학생운동을 통해 군부의 통치에 대항하였다. 1988년 9월에는 주요 민주화 활동가들이 모여 ‘민족민주연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을 창설하였다. 아웅산 수지(Aung San Suu Kyi) 여사 등 NLD의 주요 지도자들을 모두 체포하고 민꼬 나잉과 같은 활동가들마저 체포하는 등 심한 제재 속에서 1990년 군부가 약속했던 총선거가 실시됐고 그 결과 NLD는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군부는 정권 이양을 실천하지 않았다.

군부는 민주화의 길을 열겠다고 약속했지만 여전히 버마 국민과 민주 지도부, 인권 활동가들에 대한 탄압과 독재는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향한 버마 국민들의 열망도 2007년의 대규모 민주항쟁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식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왕들의 정복자'  민 꼬 나잉

민꼬 나잉은 1962년 버마의 수도 양곤에서 U Thet Nyunt와 Daw Hla Kyi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은 1980년대 양곤 미술과학 대학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당시 그의 전공은 동물학이었지만, 학교생활 동안 그는 시를 읽고 쓰며 풍자만화를 그릴 수 있었던 미술동아리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는 또한 대학시절, Thingyan(물 축제) 기간 동안 전통 Than Gyat(공연) 대회에 참가한 공연단의 멤버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공연단은 버마의 군부정권에 의한 자유와 민주주의의 억압을 풍자하는 단막극을 공연하였다. 1985년 버마의 경제적 상황에 대한 불안이 짙어지자, 나잉과 그의 동료들은 차후에 일어날 정치적 폭동을 예상하고 비밀리에 지하 학생연합을 조직하였다.

그의 원래 이름은 Paw U Tun 으로, ‘왕들의 정복자’라는 의미의 민꼬 나잉이란 이름은 1988년 군사정권을 비판하는 포스터와 전단에 서명하기 위한 필명으로 그와 동료 학생들에 의해 채택되었다. 1988년 8월 28일 나잉은 전국적인 규모의 '전 버마 학생연합'을 조직하여 평화적 수단으로 불법적인 군사정권에 맞서기로 결의, ‘8888 시위’에 크게 기여하였다. 시위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가 정부를 규탄하고 민주주의를 부르짖었다. 나잉의 연설, 공약, 시는 동료 학생들과 버마 시민들을 감동시키며, 그는 군사정권에 대항하여 평화적 시위를 독려하는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재 ‘국가평화발전평의회’로 알려져 있는 군사정권에 의해 시위대는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그후 수천 명의 학생들과 사람들이 국경으로 탈출하여 무장투쟁을 시작하였지만, 그는 탈출을 거부하고 버마에 남을 것임을 천명하였다. 학생운동은 전적으로 비폭력 평화운동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나잉은 군사정권의 감시를 피해 이리저리로 숨어 다니면서도, 군사정권의 5명 이상 집회 금지에 대한 시민 불복종 운동을 조직하는 등의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결국 1989년 3월 24일에 다른 학생들과 함께 체포되어 긴급사태적용법 5조에 따라 20년 형을 선고받았다. 긴급사태적용법 5조는 반란을 선동하여 법, 평화, 안정을 해친다는 명목으로 정치범들을 구속하는데 자주 사용되던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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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화운동 단체 '88 세대'의 활동 모습. 오른쪽 두번째가 민꼬나잉 씨 ⓒbinamojo.org

1993년 1월, 나잉은 일반 사면에 의해 10년으로 감형 받게 되고, 국제사면위원회에 의해 양심수로 선정된다. 국제사면위원회에서는 그의 석방을 위해 활발한 석방 캠페인을 펼쳤는데, 국제사면위원회에 따르면 그는 수감 초기에 심각하게 고문을 당하고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고 한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심문 과정에서 물속에서 쓰러질 때까지 서있기를 강요받았고 그 결과 왼쪽 다리의 감각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고 한다. 2004년 11월 19일, 나잉은 15년간의 투옥생활 끝에 풀려나게 된다.
그러나 그가 석방된 지 불과 2년 후인 2006년 9월 말에 그는 다른 학생 지도자 4명과 함께 다시 수감된다. 단순 조사 차원에서 구류한 것이라고 군사정권은 주장했지만, 나잉과 4명의 학생 지도자들은 흔히 군사정권이 ‘국내 소요, 불안정, 테러리즘’이라고 말하는 명목에 대한 우려로 인해 구속된 것이 확인되었고 이로 인해 나잉의 체포에 대한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2006년 10월 10일부터 18일까지 버마에서는 두 번째 수감생활 중이던 나잉과 그 외의 모든 정치범들의 석방을 촉구하기 위한 캠페인이 열렸다. 8888시위 당시에 체포되지 않았던 남아있는 88세대 학생들에 의해서 조직된 이 캠페인은 ‘White Expression’이라고 불렸는데, 참가자들이 모두 하얀색 옷을 입고 모든 정치범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기 때문이다. 또한 88세대 학생들은 군사정권을 압박하기 위해 서명운동을 벌였고 이 서명운동에는 Ludu Daw Amar와 Zarganar와 같은 유명한 예술가들도 동참하였다. 여론의 극렬한 비난과 나잉의 즉각적인 석방 요구에 의해 정부 당국은 2007년 1월 11일 그를 다시 풀어주었다.  
 
버마의 독립기념일인 2007년 1월 4일에는 그의 88세대 학생 그룹이 모여 표현의 자유를 체험하도록 사람들을 독려하기 위한 ‘Open Heart’ 캠페인을 펼쳤다. 또한 이들은 2007년 3월 11일부터 5월 20일까지 ‘White Sunday’ 캠페인을 벌였다. 정치범의 가족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매주 일요일 양군의 정치범 가족들을 방문하는 캠페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평화 시위 조직을 주도한 혐의로 2007년 8월 21일 자정에 다른 학생 그룹 리더들과 함께 체포되어 현재 구속 수감된 채 재판를 받고 있는 중이다. 군사정권의 치료 제공 거부로 극심한 고통 속에 실명의 위기에 처한 그는, 지난 2008년 9월 9일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다. “You can sentence us to a thousand years in prison for our political activities, but we will continue to defend ourselves in accordance with the law. Nobody can hide from justice.” (버마군부는 우리의 정치적 활동을 탄압할 수 있지만 우리는 법에 따라 우리 자신을 보호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정의를 무시할 순 없다)

버마 민주화를 위한 국제 사회의 움직임   

국제사면위원회와 같은 국제적인 인권단체의 발표에 의하면 현재 버마에는 나잉과 비슷한 이유로 감금되어 있는 정치범들이 20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2007년 5월엔 태풍이 버마를 덮쳐 150만 명의 국민이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도 군부는 국제 사회의 경고를 무시하고 국민투표를 강행하여 신헌법을 통과시켰다. 그후 8, 9월 승려들이 주축이 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당초 시위는 군사정권이 하룻밤 사이에 디젤 값을 2배, 천연가스 값을 4배로 인상하는 등 경제 파탄에 대한 불만이 원인이었다. 그러나 승려들이 구심점이 되며 무능력한 군정에 대한 반대, 민주화를 요구하는 항쟁으로 확산됐다. 88년 이후 최대 규모인 10만여 명의 승려와 시민들이 참여한 2007년 9월 샤프란(승려복을 상징하는 선황색) 민주항쟁을 통해 민주화 열망이 다시 피어올랐지만, 군부의 탄압으로 대규모 유혈사태를 빚으며 최소 2백여 명이 희생당하고, 1만여 명이 강제로 연행, 구금되었다.

세계 곳곳에서 버마의 민주화를 열망하는 버마 민중들의 노력은 샤프란 민주항쟁 1주년을 맞은 지금도 여전히 타오르고 있지만 이에 반해 지난 20여 년 간의 버마 군부독재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처나 한국 정부의 대응은 미미한 실정이다. 1997년 인권유린을 이유로 미국이 경제봉쇄를 단행하였지만, 중국과 인도 같은 일부 열강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버마 군부를 도와 그들은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다. 한편, 지난해 유엔 이브라힘 감바리 특사가 미얀마 군정의 평화시위에 대한 유혈진압 사태 직후에 버마를 방문, 탄 슈웨 군정 최고 지도자와 민주 진영 지도자인 수치 여사 등을 면담하고 국가화해를 촉구했다. 그러나 그후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해, 가택연금 상태에 있는 아웅산 수지 여사는 군부에 대한 저항과 무기력한 국제 사회의 평화 중재 방안에 대한 실망의 표시로 올해 8월 중순부터 한 달 간 단식에 들어가 지난 8월 말 감바리 특사와의 만남을 거부하였다. (미국은 루비와 비취 등 미얀마산 보석의 국내 수입을 금지하고, 미얀마 지도자의 재산을 동결하는 것을 골자로 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유럽연합도 비자 발급 중지와 자산 동결, 무기 금수 등 기존의 제재조치 외에 목재와 보석류, 금속, 광물 등의 수입 금지 조치를 추가로 내렸다. 그러나 미얀마가 가입한 동남아국가연합(ASEAN) 회원국들은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고수하며 제재에 소극적인 자세를 나타냈다.) 군부는 최근 아웅산 수지 여사에 대한 가택연금 조건을 일부 완화했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올 연말에 미얀마를 방문, 교착상태에 빠진 정치상황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한국에서도 버마의 군부독재 상황과 민주화운동에 대한 관심이 커진 상태고, 지난 9월 25일 8명의 버마민주화운동가들이 2000년 난민지위 신청 이후 8년에 걸친 법정공방 끝에 난민지위를 인정받기도 했지만, 여전히 버마에 대한 투자와 한국 기업의 방위산업물품 제조 플랜트 건설 등을 통해 버마 군부를 간접적으로 돕고 있는 등 버마의 민주화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이 부족한 상태이다.

한국의 시민사회단체들은 한국에 머물고 있는 버마 활동가들과 함께 버마 민주화를 위한 ‘프리버마’캠페인을 매주 화요일 종각(서울)에서 벌이고 있으며 다양한 국내외 연대활동을 통해 버마군부의 인권탄압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정리 : 최유미, 김연재 (국제연대위원회 자원활동가)

참고 사이트
참여연대 버마 성명 http://blog.peoplepower21.org/International/40118
프리버마캠페인(인권실천시민연대) http://www.hrights.or.kr/
NLD 한국지부 http://www.nldla.or.kr/
버마행동(Burma Action Korea) http://cafe.daum.net/mmw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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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민주화를 위한 안보 개혁 10년
인도네시아 시민사회의 전략과 도전

인구 2억 2천 2백만 명, 1,890,754 평방 킬로미터의 군도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는, 1998년 이후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투쟁을 벌여왔다. 1998년 여러 정치 조직과 시민 단체들은 수하르토 정권이 32년 동안 자행한 가장 억압적인 조치들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을 펼쳤다.  인도네시아의 누적된 정치적, 경제적 위기와 정권에 의해 자행된 대규모의 인권 폐해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민주 정권의 수립을 위한 노력을 가속화 시켰다.

1966년 수하르토가 권좌를 움켜진 후 몇 년 동안 주로 수면 아래에서 활동하던 민주 개혁 운동이 1997년 동남아사아 경제 위기를 계기로 수면 위로 부상했다. 이러한 계기로 인도네시아 대학생들은 독재 정권의 무능력에 대항하고자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그 결과 1998년 5월 수하르토가 대통령직을 사임하게 되고, 개혁 체제(Reformation Order)라 불리는 새로운 시대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개혁의 성과와 진척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인도네시아 안보 개혁과 시민사회
1998년 5월 정권 교체 이후 인도네시아 사회는 몇가지 변화를 맞이했다. 법률 개정과 정부권력을 통제하기 위해서 사법 관할 밖의 기관들을 편성하고, 정부의 의사 결정에 참여하기 위한 시민들에게 열린 공공 정치 공간을 마련했다. 그러나 여전히 정부는 이러한 다양한 정책들을 이행하고, 감독, 평가하는데 있어 부족해 보였다. 비록 국군, 경찰, 국회, 심지어 대통령 내각과 국방부가 안보 개혁을 위해 노력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안보 개혁 과정이 전반적으로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인도네시아 시민사회단체들은 입을 모은다.

인도네시아 시민사회 단체들의 역할을 보면 안보 분야 개혁에 대한 담론 구성, 정책 지원, 정책 집행에 따른 책임성과 투명성 촉진, 권력남용에 대한 감시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해내고 있다. 그러나 안보개혁은 시민사회의 노력에도 불과하고 이렇다 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안보개혁을 위한 시민사회의 움직임
2000년부터 시민사회단체들의 안보 개혁에 대한 지지는 높아져서 여러 관계자들과 연대하기 시작했다. 또한 정치적 문제가 아닌 기술적인 측면에서 안보분야 개혁을 위한 방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민사회단체들은 인도네시아의 정부에 따라 편파적인 방향으로 움직였다. 일부  인도네시아 시민사회는 안보 개혁 의제들을 정부의 인권유린 행위에 영향을 주는 반테러 의제로 보기도 하고 미국과 같은 나라와의 군사적 협력으로 보기도 했다. 또한 중앙 엘리트와 지방 엘리트들의 실용주의 노선으로 접근해 입장에 따라 혼선을 일으키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현재 인도네시아의 시민 단체들은 국내 안보 공공기관들의 개혁 저항과 정부의 정치적 모호성, 엘리트 집단의 개혁 의지 부진에 시달리고 있다. 수실로 밤방 요도요노(Susilo Bambang Yudhoyono) 대통령은 2004년 당선된 후, 인도네시아 군부 (Indonesian National Military - Indonesian Police) 체계하의 민주적 통치 질서를 세우기보다는 군부의 내부자들을 포섭하기에 급급하다.

지금까지 언급한 정부의 행보를 보면 시민 단체들이 안보분야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의제들과 전략을 통해 풀어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난 1997-1998년 동안 대부분의 단체들이 안보분야의 근본적인 개혁 문제에 집중해왔던 것과는 달리 현재는 각 시민사회단체들은 특정 안보 정책과 이슈를 선점해 전략을 짜나가야 한다.
 
어찌 보면 인도네시아는 지금 민주화로 넘어가는데 중대한 시점에 놓여 있다. 긍정적 가능성은 안보 개혁을 통해 민주화가 촉진되는 것이고, 부정적 가능성은 안보 개혁에 따르는 피로와 현기증이 생길 것이라는 것이다.

무프티 마카리마
( 사무국장/ Institute for Defense Security and Peace Studies, 인도네시아 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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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민주화의 과거, 현재, 미래 

책을 표지만으로 평가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책을 서두만 읽고 마지막 장의 내용을 예측할 수는 없다. 의사 또한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효과적인 치료방법을 강구하기 위해서는 겉으로만 드러나는 환자의 증세만을 봐서는 안된다.
 
오늘날 이라크의 상황은 위와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이라크인들이 수십 년간 독재 정권, 부당한 위계질서로 고통 받아야 했던 원인은 어느 특정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종교, 인종, 문화 등의 여러 사회적 측면에서 국민들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권리를 모두 박탈 당했기 때문이다.
 
1920년도에 구 영연방 제국이 이라크에서 석유를 발견하자 영국은 그곳에 유전회사를 건립했다.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회사 수익의 95퍼센트를 영국, 프랑스, 미국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영국은 그 후 1932년에 이라크 왕정을 설립해 이라크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영국은 그 후 권력을 이라크 수니 엘리트 파에게 넘겼다. 수니 엘리트 파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요르단 왕족들과 혈연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때부터 이라크 시민사회는 수 차례 엘리트 파로부터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힘겹게 싸워왔다. 이라크 국민들은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실권을 얻으려 했으나 그들의 노력은 매번 막대한 영국 군비가 지원되는 왕정의 군부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라크 왕정은 1958년 발생한 군사 쿠데타에 의해 막을 내렸다. 왕정이 소멸하고 나서 권력은 정예 군부로 넘어갔다. 군부는 수십 년간 민주화와 시민참여의 출범을 막아왔다. 오랜 세월, 서양세계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라크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군사 수니 정권까지 이라크 정부는 이라크 국민들을 사회적 부정의로 일관했고 기본권인 정치권조차 짓밟아왔다. 그 동안 서양국가들은 이라크인들의 수난에는 아무 관심도 두지 않았다.
 
1991년 사담 후세인이 자신의 야망을 위해 서양에 비협조하고 쿠웨이트 유전을 공략했을 때, 서양 국가들은 연합을 형성하여 쿠웨이트 해방을 이야기 하며 이라크에 전쟁 선포를 단행했다. 이는 그 동안 후세인의 군대가 수 천명의 이라크 민간인들을 죽이고 수 백 명의 이라크인들이 후세인의 탄압을 피해 이란과 터키로 피난갔을때 서양국가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2차 걸프전 직후 유엔과 서양국가들이 이라크에 가한 경제재제는 이라크 군부의 횡포와 더불어 이라크 국민들의 고통을 배가시키는 것이었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많은 이라크인들은 서양의 공격에 맞서 싸우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서양으로부터 이라크 독재정권을 보호하기를 거부한 것이었다. 이라크 인들은 이라크 정권 붕괴를 기대했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희망으로 여겼다.
 
오늘날 이라크는 외세 주둔의 긴 역사, 복잡한 정계 역사, 여러 소수 민족들과 그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로 인해 이라크 국민들은 제대로 이들의 의사를 사회적으로 표명하지 못하고 사회참여의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이러한 이라크 내부 상황과 문제뿐만 아니라 점차 거세지는 주변국들의 관심과 참견은 이라크가 스스로 성장하는 것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장기간의 군사 독재를 겪은 탓에 대부분의 이라크 인들은 한 가지 목소리를 내고 한 가지 이념만을 내세우는 유일당의 당론을 교육 받아 왔다. 이러한 교육은 이라크인들이 민주주의에 일체 노출되지 못하고 사회활동을 전혀 하지 못하게 했다.
 
이라크인들의 민주주의와 사회참여에 대한 인식의 부재는 후세인의 독재정권이 무너졌을 때 외부 간섭 없이 국민 스스로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했다. 오히려, 시아파와 수니파, 그리고 나머지 이라크 소수 민족들 사이에는 공포와 복수심만이 퍼져갔다.
 
이라크의 과반이 넘는 시아파는 그들이 새 국가의 운영을 도맡을 차례라고 여겼다. 한편 수니-아랍 파는 과거 그들의 전통에 따라 이라크를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소수민족으로서 쿠르드인들은 지난 역사의 소수민족 차별과 민족말살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민족의 안전을 보장받아야 할 입장에 놓여 있다.
 
새로운 이라크의 건설을 위해서는 종교, 민족, 문화에 상관 없이 모든 이라크인이 동등하게 사회 건설에 참여하고 실질적으로 민주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길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라크는 건강한 경제와 평화적인 민주정치를 이룩하기 위해서 교육과 인재양성에 대한 지원과 연대가 필요하다. 한국의 시민 사회가 이러한 역할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이라크에 우호적인 협력을 해나갔으면 한다. 더불어, 이라크 역시 아시아의 한 일권으로서, 아시아권 국가들의 국제 연대가 절실하다. '도움이 필요한 때의 친구야 말로 진정한 친구' 라는 격언이 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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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샴/대학원생·성공회대 MAINS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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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해가는 전쟁의 의미
 
 
인도차이나 반도에 속하는 베트남은 꽤 작고 평범한 나라다. 베트남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오늘날 전세계인들은 베트남이란 나라의 이름도 잘 몰랐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베트남전은 베트남의 정체성과도 일치하는 의미로 받아 들여진다. 베트남인들에게 베트남전은 어떤 의미일까? 자랑스러운 전쟁이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전쟁에서 이어지는 평화의 의미를 생각할까?
 
"모든 것이 한순간 엉망…그런 것이 전쟁이었어요"
 
필자는 베트남전 당시 군인이었던 베트남 작가 반 레이가 베트남전에 대해 한 말을 잊을 수 없다. 필자도 참석한 한 좌담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쟁이라는 개념을 정의할 수 없습니다. 그냥 폭탄이 거리에 떨어지고 끔찍하게 터지면 논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거리로 도망치고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논으로 뛰어 내려갔어요.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엉망이 되었지요. 그런 것이 전쟁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전쟁이 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의 기억에 베트남전은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는 것이었다.
 
베트남의 교과서 내용을 살펴보면, 베트남전은 '베트남인들이 나라를 위해 미군에 대항하고 결국 이들을 쫓아낸 전쟁'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또 베트남이 미군을 이겼기 때문에 지금까지 독립을 유지하고 자유로운 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베트남인들은 작은 베트남이 '골리엇' 미국을 이겼다고 자랑하고 있다. 심지어 대학생들도 미국을 이길 수 있는 나라는 베트남 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베트남전을 아주 성스럽게 본다.
 
베트남인들은 교과 과정을 통해 베트남 군인들의 공헌과 베트남전의 승리에 대한 내용을 배우고 호치민을 통한 군인들의 모습을 미화해 갔다. 베트남전이 끝난 1975년 4월 30일, 베트남인들은 베트남전에 대해 승리만을 이야기 하고 전쟁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거나 언급하기를 꺼렸다.
 
그러나 1986년 도이모이(Doi Moi·개혁개방정책) 후에 '글라스노스트'(경제개방)이라는 개념이 베트남에 들어오게 된다. 외부 세계로부터 들어온 새로운 문물을 접한 베트남인들의 생각이 자유롭고 다양해졌다. 이때부터 전쟁의 다른 면에 대한 언급이 시작됐고, 그 중에서 작가, 소설가, 화가등 예술가들은 작품을 통해 베트남전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 슬픔, 비판등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작곡가 찐공션(Trinh Cong Son)의 반전 노래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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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곡가 찐공션(Trinh Cong Son) 

베트남전쟁의 어두운 이면을 반영하는 노래는 일찍이 찐공션 작품에서 나왔다. 찐공션은 베트남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하고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작곡가이다. 사람들은 이 작곡가의 인간애와 철학을 칭찬하고 존경한다.
 
찐공션이 부른 사랑 노래, 반전 노래 등은 베트남뿐만 아니라 인접 아시아 국가에서도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찐공션의 노래 중 반전 노래는 전쟁 속에서 인간이 겪는 고통과 아픔을 잘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필자가 중요하게 보는 것은 작가 찐공션이 전쟁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시름과 괴로움을 관찰하고 묘사만 한 것이 아니라 그는 직접 민간인들이 당한 수난을 이해하는 내용의 감동적인 노래들을 많이 창작했다는 점이다. 베트남전 동안에 찐공션의 반전곡은 남베트남의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고 평화를 위한 투쟁의지를 높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당시 남베트남의 정권은 찐공션의 곡들을 부르는 것을 금지시켰고 심지어 북베트남의 정권도 찐을 싫어했다. 그의 노래에서는 베트남전을 내전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베트남 정부는 독립 후에도 오랜시간 찐공션의 곡을 국내에서 유통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리고 외국으로 이민간 베트남 사람들도 계속해서 찐공션의 곡들을 비판하고 경멸했다.
 
하지만 1980년부터 찐공션은 작곡을 다시 시작했고 베트남의 새로운 제도들을 칭찬하는 노래를 지었다. 그때부터 베트남 정부는 찐공션을 감시하는 일을 그만두었고 찐공션의 노래를 사람들이 다시 부를 수 있게 허락했다. 배트남 사람들은 찐공션의 반전곡을 통해 전쟁의 끔찍한 이면을 떠올리고 평화의 가치를 더욱 소중하게 여길 수 있게 되었다.
 
소설가 바오닌(Bao Ninh)의 <전쟁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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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의 슬픔> 

바오닌(Bao Ninh)은 베트남의 작가이면서 베트남전 당시 군인이었다. 그는 참전 중 전쟁의 끔찍하고 야만스러운 상황을 목격했고, 이를 모아 <전쟁의 슬픔>이라는 소설을 써냈다.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나오는 '끼엔'이라는 인물은 베트남전에 참전한 군인이다. 끼엔은 종전이 된 후에도 전쟁의 슬픈 단면을 명확하게 기억하고 "군인, 총, 탱크-이는 베트남인에게 아주 평범한 것들이다. 전쟁은 별일이 아니다. 전쟁은 평범한 것이다. 그런데 평화는? 평화는 아주 특별한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는 게다가 "그리고 전쟁에서 이기는 편을 보는 것은 (…) 정의가 이겼다고 하지만 잔인하게도 죽음과 폭력도 이긴 것"이라는 나레이션을 하게 된다.
 
1989년에 이 소설은 처음으로 베트남 작가협회의 '신작품지'에 나왔다. 나중에 소설의 이름은 <사랑의 운명>으로 바뀌었고, 이는 베트남 문학계에서 가장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1991년에 몇명의 작가들이 경멸적으로 이 책을 비판했고, <사랑의 운명>은 사회적으로 핫이슈가 되었다.
 
베트남 사람들의 비판을 한 몸에 받았던 이 책은 외국에서는 아주 좋은 평가를 받았다. 2003년 무렵 이 소설에 대한 외국의 평가와 국내 평가의 차이가 커지자 베트남인들은 다시 이 책을 찾아 보게 되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일어난 전쟁은 베트남의 한 시대를 공고히 차지한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시대의 바람이 베트남 전체를 사로 잡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쟁에 대한 인식도 변해가고 있다. 많은 베트남인들은 더 이상 베트남전을 성스러운 전쟁으로 보지 않는다. 오늘날 베트남인들은 전쟁이 주었던 아픔, 고통, 시름, 괴로움 등을 더 많이 이해하고 있고 더 이상 전쟁이 아름다운 승리가 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또 그들은 베트남전 후에 남아있는 많은 희생자, 피해자, 다이옥신으로 오염된 땅 등의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베트남인들은 여전히 '전쟁은 평범한 것이고 평화는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베트남인들에게 베트남전의 영향은 오랜 세월 계속될 듯 하다.  
   


투엔 응웬 응옥뗀 / 대학원생·성공회대 MAINS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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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운 병마보다 더 무서운 치료비로 고통 받는

버마 노동자 윈나잉우씨께

한국 사회의 따스한 온정과 희망의 불씨를 나누어주세요.

윈나잉우씨는 고향의 가족들과 단란하게 살아갈 날을 꿈꾸며 한국의 가장 열악하고 힘든 곳에서 오랫동안 열심히 일해 온 버마 이주노동자입니다.

하지만 고단한 노동과 열악한 생활로 인해 척추 결핵이라는 큰 병을 얻었고, 척추뼈가 삭아가는 무서운 고통으로 그의 몸과 마음은 갈수록 쇠잔해졌습니다. 다행히 2008년 7월 어렵사리 서울아산병원에서 두 차례의 큰 수술을 받았지만, 이제는 건강을 회복하는 일보다 3천만원이 넘는 치료비를 마련해야만 하는 걱정에 밤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물론 3천만원은 엄청나게 큰 돈이지만 한 사람의 목숨과는 감히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의 오랜 피땀에 빚지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의 관심과 사랑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십년지기 버마 친구, 윈나잉우씨를 도와주세요.

후원계좌 국민은행 665901-01-32055 아시아인권문화연대(이란주)
부천의 이주노동자 상담소 아시아인권문화연대와 버마행동한국이 함께 윈나잉우씨를 돕고 있습니다. 도움을 주실 분은  032-684-0244  로 연락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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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나잉우씨 부부 십년 만에 낯선 땅 한국에서 남편을 재회한 아내 먀먀우씨.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을 달랠 새도 없이 병원에서 생활하며 남편 곁을 지켰던 그녀 역시 심장병을 앓고 있는 환자입니다.  ⓒ 아시아인권문화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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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올림픽, '안전'올림픽 되나

베이징올림픽은 녹색올림픽, 환경올림픽, 인문올림픽을 구호로 내세워 세계에 중국의 새로운 면모를 과시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최근 '안전올림픽'이 이번 올림픽의 가장 중요한 화두의 하나로 등장하고 있다. 과연 베이징올림픽이 큰 탈 없이 치러질 수 있을 것인가가 국제사회는 물론이고 중국정부에게도 가장 커다란 관심사로 되고 있다.
 
베이징올림픽이 안전 문제와 연관되기 시작한 것은 3월 티베트 지역에서 대규모시위가 발생한 이후의 일이다. 최근에는 신쟝지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조직이 테러 가능성을 위협하고 나서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재 중국 내에서 더욱 커다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연이어 발생하고 있는 민중들의 시위이다. 21세기에 들어서 집단행동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2005년에만 7만 건이 넘게 발생한 바 있다. 지방정부의 개발을 위한 토지수용과 과도한 세부담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 노동분쟁 지속적인 증가 등이 중요한 원인이었다.
 
그런데 최근 한 달 사이에 주민들과 정부 사이의 대규모 충돌이 연이어 발생하며 올림픽을 앞둔 중국정부를 긴장에 몰아넣고 있다. 지난 6월 28일 궤이저우성의 웡안현에서 수만 명의 주민들이 지방정부청사를 공격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7월 1일에는 상하이시에서 경찰과 시시비비를 다투던 한 시민이 경찰서를 공격하여 6명의 경찰이 사망하였다. 7월 17일 광동성 회이저우시 보뤄현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경찰과의 충돌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7월 19일 위난성 멍렌현에서 수백명이 참가한 격렬한 시위에 경찰이 발포하여 2명이 사망하였고, 21일에는 위난성의 쿤밍시에서 테러로 추정되는 버스 폭발사고로 3명이 사망하였다.
 
이러한 사태가 발생한 이유는 모두 다르지만 많은 경우 이미 존재하고 있던 사회적 불만들이 경찰과 공권력의 부당한 처사를 계기로 촉발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7월 1일 사건의 경우 5명의 경찰이 사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론에서는 경찰의 불법적, 혹은 부당한 저치들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도 매우 높다. 이러한 현상들은 중국에서 정부와 시민들 사이에 얼마나 큰 긴장관계가 존재하며 사회적 불만이 얼마나 넓게 확산되어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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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베이징올림픽이 큰 탈 없이 치러질 수 있을 것인가가 국제사회는 물론이고 중국정부에게도 가장 커다란 관심사로 되고 있다. 전세계 누리꾼들은 티베트 사태 등과 관련해 올림픽을 치르는 중국 정부를 비판하는 글과 이미지를 제작해 공유하고 있다. ⓒ프레시안 

그런데 우리는 중국에서 이처럼 사회적 불만이 확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정치적으로 매우 안정되어있는 역설적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즉 현재 중국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지식인들의 운동과 중국공산당 사이의 갈등, 그리고 최고지도부 내의 권력갈등 등 정치적 안정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요인들이 찾아보기는 힘들다. 정치적 안정과 사회적 불안이 기묘하게 동거하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의 정치사회적 상황은 '거시적 안정, 미시적 불안'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정치적·이념적 측면에서는 갈등이 억제되고 안정적 국면으로 유지하고 있으나 인민들의 생활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문제들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과 분쟁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기묘한 공존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사회적 불안, 특히 일반 민중들의 불만을 정치적 도전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하는 중국공산당의 통치전략이 지금까지 주효하고 있다는 점을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중국의 지도부는 과도기적 발전단계에서 사회적 불안요인들을 단기간 내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당면한 상황에서 가장 역점을 두는 것은 미시적 불안 요인들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며 이러한 불안요인이 거시적 차원의 불안과 혼란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핵심정책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첫째, 안정적인 경제성장이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공산당은 사회주의 이념의 통합력이 약화됨에 따라 통치정당성을 경제적 실적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 중국은 현 지도부가 출범한 2003년 이후 다시 고도성장 국면에 진입하면서 정치·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데 비교적 유리한 경제적 환경을 확보할 수 있었다.
 
둘째, 시장경제로의 전환과정에서 빈부격차의 증가와 사회적 갈등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데 현 지도부는 '인민본위(以人爲本)'과 '조화사회(和諧社會)를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내세우며 중국공산당이 다수 인민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것에 대한 신뢰를 확보하기 노력하였다. 물론 이러한 전환이 모든 경제, 사회정책에 전면적으로 반영될 수는 없었지만 상징성이 높은 몇 가지 사회정책을 통해 그 효과를 극대화시켰다. 2004년에 결정된 농업세의 점진적 축소 및 폐지 정책이 대표적 사례이다.
 
셋째, 통치방식의 변화이다. 중국공산당과 중앙정부의 신뢰를 제고하기 위해 지도부들의 국민들의 삶의 현장에 밀착하는 이미지를 강화하고, 국민적 관심이 모아진 주요 돌발사건에 대해 신속하고 직접적인 개입을 시도하였다. 후진타오, 원자바오는 최고지도부로 선출된 직후부터 빈곤지역에 대한 현지시찰을 활발하게 진행하였다. 이를 통해 중국의 최고지도부들은 여러 사회적 문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문제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지방정부의 독직과 잘못된 정책결정으로부터 자신들의 권위와 위신을 보호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웡안현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한 이후에도 원앙현의 당서기 등이 파면시키는 것을 통해 지방주민들의 불만을 가라앉히고자 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정책들은 언제까지 효과를 발휘하고 정치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베이징올림픽이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 직접적인 답을 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사회적 불만과 갈등은 구조적 문제와 연관된 것이고 그 해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베이징올림픽이 중국정부가 기대하는 것처럼 중화민족의 단결과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지위 향상을 과시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이면에 존재하는 그림자까지 잘 보여주는 계기가 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중국의 변화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양면적 측면은 당분간은 피하기 힘든 현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미래로 나아가는가에 있다. 외부에서는 중국에 존재하는 그림자들을 쉽게 없앨 수 있다는 성급한 기대보다는 인내심을 가지고 중국의 변화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중국정부도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사회적 현실에 대해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대응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중국 내의 민중들과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기 위해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남주(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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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의 저주가 비켜간 나라, 몽골 

그 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네
 
몽골-푸르다 못해 시린 하늘, "드넓은" 이란 말이 담아 내기에는 부족한, 카메라 렌즈 저 밖으로 한도 끝도 없이 펼쳐지는 초원의 나라, 그리고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는 양떼들. 딱 이것이 몽골로 떠나는 비행기안에서 조차 내가 가지고 있던 몽골에 대한 이미지의 전부였다.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을까? 물론이다. (이 질문이 몽골 국민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용서를 바란다.) 몽골에서 온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칭기스칸 이래 역사에서 사라진 듯한 몽골이 이주노동자의 모습으로, 다문화가정의 모습으로, 혹은 유목주의를 외치며 울란바타르 시내를 휘젓는 한국인들을 상대로 다시 한국인들에게 나타났을 때, 이들의 사라진 역사, 사라진 삶의 모습이 머리 속에 도저히 그려지지 않았다. 게르와 흐미로 대표되는 여행사 가이드에 나오는 박제화된 몽골인의 모습이 아니라, 그야말로 살아 꿈틀대면서 삶의 고단함에, 역사의 질곡에 몸부림치는 몽골인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이 살고 있었다. 울란바타르 공항에서 호텔로 가는 길에서, 그리고 다음 날부터 이어지는 일정 속에서 몽골은 NGO의 나라로, 빈곤과 부패, 여성문제와 민주주의로 끊임없이 싸우는 나라로 등장했다.
 
자원의 저주가 비켜간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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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영 





1990년 우리 식으로 따지자면 데모 몇 번하고 싱겁게(?) 체제 전환에 성공한 이 나라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스탈린식 통치체제가 그렇게도 허약했단 말인가? 단순히 '허약한 국가-강한 시민사회' 식의 도식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1921년 혁명에 성공한 이래, 몽골의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초이발산과 몽골의 후르시쵸프, 안드로포프 등으로 인식되는 체덴발의 장기집권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허약한" 국가로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된다. 게다가 체제 전환이전까지만 해도 몽골에서는 이렇다 할 시민사회라고 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한가지 의심할 수 있는 것은, 혁명이 외부로부터, 그리고 위에서 이식되었기 때문에 외부적 요인이 붕괴되면 한번의 가격에도 일순간에 붕괴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나의 의문을 스티븐 피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그는 먼저 구 소비에트 블록에서 민주주의로의 전환과정을 거쳤다가 다시 권위주의 내지 일인 독재로 나아가는 중앙 아시아 국가들과 몽골을 비교하면서 민주주의로의 성공적 전환을 막는 요인들이 무엇인지를 열거하고 이들 요인들의 부재로 인해 몽골 민주주의가 상대적으로 성공적인 안착을 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먼저, 우리의 상식과는 반대로 몽골은 다른 중앙 아시아 국가와 비교해 봤을 때, 상대적으로 자원빈국(?)속한다. 지금이야 국제원자재가격이 급등했기 때문에 몽골에 대한 관심이 이전보다 많이 늘어났지만, 몽골은 카자흐스탄처럼 미국, 러시아, 중국 등이 탐 낼 만큼 거대한 유전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투르크메니스탄처럼 세계 제 3위의 천연가스 매장량을 기록하고 있지도 않다. 바로 이런 점이 몽골이 상대적으로 강대국의 개입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요인이다. 게다가 지정학적 중요성도 그리 크지 않아서 미국이나 러시아가 무조건적으로 미는 독재자나 권위주의 정권이 부재하다는 점도 역설적으로 몽골의 민주화에 기여하였다고 본다.
 
결국, 빈곤에 허덕이는 몽골인들의 염원과는 반대로 이러한 상대적 자원빈곤이 몽골의 민주화와 민주주의로의 전환에 기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카스트로와 같은 위상을 갖는 인물이 체제 전환시점에서 몽골에서는 부재하였다는 점 역시 몽골로서는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독립의 아버지, 민주화의 기수와 같은 위상을 갖는 인물이 계속 집권하고 있다면, 이는 여러 포스트 공산주의 국가에서 보듯이 권위주의로 회귀하는데 중심적인 행위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고, 민주주의를 제도화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몽골의 민주주의로의 전환은 "부재"로부터 가능했다고 하는 역설이 가능해진다. 카자흐스탄의 석유와 투르크메니스탄의 천연가스가 자원의 저주를 불러와 정치계급의 부패와 국가기구의 왜곡을 가져왔다면, 몽골은 이러한 자원의 상대적 부재로 그나마 체제전환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최근의 국제원자재 가격의 급등과 캐나다 등 외국자본과의 합작으로 인한 유전개발 결과에 따라 몽골 민주화의 미래는 여전히 불안하다고 할 수 있다. 제발, 자원의 저주에 걸리지 않기를. 몽골인들이 바라는 자원이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동사무소와 선관위, 그리고 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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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의 투표소. ⓒ이주영




이번 몽골 프로그램에서 우리의 관심은 단연 선거였다. 선거 시기에 맞춰서 이 프로그램을 추진한 이유 중의 하나가 선거시기에 사회적, 정치적 갈등이 어떻게 표출되는지, 그리고 선거에서의 시민단체의 역할은 어떠한지를 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번 선거에서 선거감시단을 구성한 6개의 시민단체 중 몇몇을 방문한 결과, 우리는 몇 가지 몽골 사회가 안고 있는 특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랜 사회주의 정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제도화라는 측면에서 국가기구의 미비함은 시민단체가 국가의 역할을 대신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지방에서 이주한 사람들의 경우, 울란바타르 시 주민등록청에 등록을 해야 하는데, 여기에 대한 홍보와 안내 역할 및 주민등록청 직원에 대한 교육을 시민단체가 많이 하고 있었다. 이렇게 시민단체가 주민등록에 집중하는 이유는 바로 주민등록 문제가 한편으로는 시민의 선거권을 제약하고 선거를 왜곡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시골 이주민들이 몇 푼의 주민등록비를 내지 못해 선거권을 행사하지 못하거나, 매표 행위, 이중 유권자 등록 등으로 선거 부정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더구나 한 선거구에서 무더기로 유령 선거인 명단이 나온 것은 그만큼 주민등록 문제와 선거인 명부 관리문제가 이번 선거의 투명성을 가르는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국가의 역할이 있고 시민단체의 역할이 따로 있는데, 왜 시민단체가 국가의 역할을 하느냐라고 하는 우리 방문단의 의문은 몽골과 같은 체제 전환국가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한 오만한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었다. 도대체 한 줌의 선관위원이 뭘 할 수 있겠는가?
 
건설족과 광산족이 지배하는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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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영 






인민혁명당과 민주당은 태생부터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인민혁명당이 구 공산당의 후신이라면, 1990년 몽골 민주화시기 민주화를 추동 했던 세력들이 이합집산하면서 만든 정당이 민주당이다. 물론 여기에는 민주연합이 중간에 매개되어 있긴 하지만, 민주연합의 정책 실패가 가져온 결과 인민혁명당이 재집권에 성공하면서 탄생한 것이 민주당이기 때문에 두 집단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큰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민혁명당과 민주당의 공약을 들여다 보면 거의 큰 차이를 발견하기 힘들다. 우리 나라 건설족들이 아파트 건설로 국가 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고 있는 것만큼이나, 몽골에서는 광산 개발에 대한 기대가 크다. 그래서 인민혁명당이나 민주당은 광산개발로 나온 이윤을 국민들에게 돌려준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게다가 울란바타르 시내 외곽에 위치한 게르지역에 아파트를 짓겠다는 공약 역시 두 당이 별 차이가 없다. 한 마디로 인민혁명당과 민주당은 공약만을 놓고 본다면, 우리 나라 정당들이 장터에서 시장 상인들이 가격 흥정하듯이 경쟁적으로 지난 대선에서 목표 경제 성장률을 높여 부른 것처럼, 한 쪽이 100만 투그릭을 제시하면 다른 한 쪽에선 150만 투그릭을 주민들에게 돌려 주겠다고 하는 식으로 대동소이하다고 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이들은 시장 개방과 신자유주의를 지향한다는 측면에선 같다고 할 수 있고, 단지 얼마나 속도를 내느냐 하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다. 시장 개방과 사유화에 더 열성적으로 밀어붙인다는 면에서 몽골 민주당은 우리가 생각하는 식의 진보적인 정당 내지 자유주의적인 정당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부패에 관한 국민들의 인식 역시, 인민혁명당이나 민주당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식으로 비록 제 2정당이긴 하지만 그리 고운 시선을 받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래왔고, 지금도 벗어나고 있지 못한 개발론적 사고에서 몽골 국가와 정치인들이 벗어나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보다 몇 배나 척박한 환경에서 생태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진행되는 밀어붙이기 식의 개발은 그 몇 배로 인간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감안할 때, 자연의 복수는 이미 시작된 셈이다. 점점 더 심해지는 황사와 수자원의 고갈은 이제 몽골인들만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지속 가능한 개발, 그것은 몽골에서는 단순히 이미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한 국가들이나 내세우는 배부른 소리가 아니라 많은 유목민들의 생존권이 걸린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 생존권은 바로 인권인 것이다.
 
도대체 한 선거구에서 세 명의 입후보자를 내는 정당이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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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 총선의 투표 용지. ⓒ이주영





몽골 방문 며칠 째 계속 드는 의문중의 하나는 왜 한 선거구에서 인민혁명당이 세 명의 후보자를 내는가 하는 것이다. 지난 번까지 소선구제였다가 이번에 중선거구제로 바뀌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고는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비용과 성과를 생각해 보면 납득이 되지 않았다. 예컨대, 인구수에 따라 두, 세 명의 입후보자를 뽑는다 하더라도 한 정당에서 여러 명의 후보자를 내면 그 후보자들끼리도 경쟁을 하게 되는 구조이고 그렇게 되면 정당에서 선거에 쏟아 부을 수 있는 자원이 분산되면서 다른 정당과의 경쟁에 불리해 질 수도 있는 것이다.
 
선거라는 게 될만한 사람 한 사람에게 모든 자원을 쏟아 부으면서 총력전을 펼쳐도 될락 말락한다는 게(물론 경합지역에서는) 내가 이때까지 갖고 있었던 상식이었다. 이런 상식에 위배되는 현실이 주는 퍼즐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끙끙거리면서, 한 정당(시민의 의지당) 선거사무실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팀이 방문한 지역의 선거홍보담당자가 분노에 차서 하는 말 한마디가 바로 나의 의구심을 일소해 버렸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올해부터 바뀐 선거구제 때문에 인민혁명당을 위시한 거대 정당들이 한 선거구에서 한 정당에서 나온 후보자들만 뽑아야지 그 투표가 유효하다고 선전해 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거대 정당들은 손쉽게 의석 수를 늘릴 수 있는 반면, 여러 명의 의원을 뽑는 거대 지역구에서는 이런 정당들의 악선전에 중소정당들은 맥을 못 출수 밖에 없는 현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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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영



1992년 아버지 부시의 정책 실패에 대해 민주당 세력을 결집하고자 클린튼이 들고 나온 캐치 프레이즈가 바로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이다. 이 말은 15년의 세월을 돌고 돌아 작년 한국의 대선을 휘젓더니, 불과 몇 개월 뒤 몽골 사회를 그야말로 혼란에 빠뜨렸다.
 
7월 2일 인민혁명당사 앞에서 시작된 부정 선거 항의 시위는 밤이 되면서 폭동으로 발전하면서 그 성격이 바뀌었다. 때마침 각 정당과 시민단체와 함께 선거 평가 간담회를 열고 있던 우리는 참석하기로 했던 정당 관계자들이 부정 선거에 항의하면서 속속 불참을 통고해 와서 난감해 하던 중이었다. 간담회를 끝내자 마자 달려간 인민혁명당사 앞에는 이미 2,3천명의 시민들이 몰려와 시위를 벌이면서 돌을 투척하고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시위는 정치적인 것이었고, 화염병 대신 페트병을 던지는 그들의 시위가 필자의 눈에는 너무나 평화적으로 보였다. 밤으로 접어들면서 공항(!) 텔레비전 화면에 비치는 시위의 모습은 시위가 더 이상 시위에 머물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스포츠 경기 중계하듯이 시위 장면을 계속 보여주면서 사태 진행을 중계하는 TV 화면(그 때까지만 해도 시위 장면에 대한 텔레비전 방영이 중단되진 않았다)에 펼쳐진 모습은 바로 몽골의 불안한 미래, 그것이었다.
 
토요타와 폐차 직전의 한국산 중고차가 공존하는 나라, 한국산 중고 학원 버스를 그대로 시내버스로 쓰면서 전국민의 40퍼센트가 빈곤선 이하에서 살고 있는 나라, 실업과 인플레이션에 허덕이는 나라가 바로 몽골의 또 다른 모습이다. 자유화 이후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몽골이 그나마 하이퍼 인플레이션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유가와 세계 곡물가격에 취약한 경제구조하에서 올해의 유가 및 곡물가 직격탄은 그대로 경제에 고스란히 반영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충격은 바로 몽골 최대의 백화점 앞에 있던 홈리스 아이들의 손바닥에, 지나가던 차량에 돌을 던지던 시위대의 분노에 담겨있는 것이다.
 
3 H를 기억하며 몽골 여행을 마무리하다
 
우리의 사소한 말, 질문 하나하나에도 다른 아시아인들은 상처를 받을 수 있고, 무례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오랜 동안 국제사업을 해온 분들의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사업을 할 때에는 3가지 H를 명심해야 한다고 일깨워 준 분의 말이 생각난다. Humble(겸손하고), Humane(인간적이고), Humor(아무리 어렵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상황에서도 유머 감각을 잃지 말라는 것)이 그것이다.

몽골의 각 단체와 정당 선거 사무소를 방문하면서, 한편으로는 나의 호기심에 찬 악의없는 질문이 그 곳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만하게 비쳐질 수도 있었겠다는 반성을 해본다. 국가의 역할이 따로 있고, 시민단체의 영역이 따로 있다고 굳게 믿고 있던 나에게 시민단체가 국가의 역할을 대신하고 그걸 스스로의 성과로 내세우는 모습은 의아하다 못해, 국가가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도록 시민단체가 비판하고 강제하지 않고 시민단체의 정체성과 자기 위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닌 가 하는 식으로 까지 나아갔다. 그리고 그러한 나의 모습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모습이기도 했던 것을 잠시 잊어버리고 무의식중에 오만한 생각을 가지지 않았나 반성해 본다. 여러 가지 힘든 측면도 있었지만, 나에게 겸손함을 일깨워진 값진 여행이었다
 
이번 여행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공감여행-민주주의 교류협력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올해 선거가 예정된 아시아 국가를 방문하여 그 사회를 이해하고 네트워킹을 구축함으로써 사회 교류의 장을 확대해 나가고자 하는 것이 이번 여행의 취지였다.  
   
 
 

  이주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국제사업단 전문위원)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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