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해(2008년) 3월부터 시작된 <아시아 포럼>을 통해서 아시아인의 ‘삶의 세계’와 만난 짜릿한 경험들을 잊을 수 없다. <포럼>의 화두를 연 라미경 교수의 “인간안보의 관점에서 본 아시아 연대”(2008년 3월 8일)는 기존의 국가중심적 국제정치학의 터널 뷰(tunnel view)로부터 터널 밖의 눈부신 세계에 관심을 돌리게 한 ‘방향 전환’의 첫 단추였다.
뒤이은 조영희 교수의 “동남아시아의 초국가적 환경문제-메콩강 하류유역을 중심으로”(2008년 7월 25일)는 아시아인의 삶의 세계를 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메콩강은 티벳 고원에서 발원하여 중국의 운남을 거쳐 라오스, 태국, 미얀마와 캄보디아 그리고 베트남에 이르는 말 그대로 국가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초국가적 하수로서 농업과 어업에 의존하는 이곳 유역민들에게는 오래 전부터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 이 지역에는 95개 이상의 다양한 민족들이 공존하고 있으며, 동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빈곤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메콩강 하류지역은 인간안보의 문제가 추상적인 개념의 문제가 아닌 실제상황으로서 볼 수 있고 또 만질 수 있는 현장으로 다가왔다.
이와 더불어 허창덕 교수의 “21세기 광역질병 : 현황과 과제”는 아시아인의 삶의 문제가 바로 우리들 자신의 삶과 직결되어 있음을 잘 보여준 또 다른 사례였다. 허 교수는 현대세계의 3대 질병이라 할 수 있는 후천성 면역 결핍증(HIV/AIDS),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SARS), 조류 독감(AI)의 세계적 감염 경로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사스와 조류독감의 감염중심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아시아 지역이고 우리와 이웃한 아시아 국가라는 점을 밝혀주었다.
동아시아 삶의 문제를 연대하는 새로운 공동체로
또 ‘아시아적 삶의 세계’와 관련하여 흥미를 끈 발표는 윤재민 박사의 “인터넷과 아시아 연대”(20008년 11월 21일)였다. 여기서 윤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동아시아는 전지구화, 민족주의의 폐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이다. 그것은 단순히 지리적 공동체를 뛰어넘는 새로운 연대의 공동체이다. 이를 위해 동아시아 지역은 국민국가 단위로만 생각하고 행위했던 틀을 벗어나는 문명론적 차원에서의 변화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변화를 위해서는 이 지역인들이 국경 안팎의 서로 다른 지역의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삶의 자세를 반성하며 동아시아인의 삶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감수성 계발이 필요하다.(p.6)
필자는 윤 박사가 위에서 언급한 것 가운데 특히 ‘전지구화, 민족주의의 폐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를 현상학에서 말하는 ‘삶의 세계’로, 다시 말하면 ‘이념의 옷’(Ideenkleid)으로 덧입혀지기 이전의 전과학적인 ‘삶의 세계’로의 복귀로, 그리고 ‘삶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감수성’이라는 표현을 이러한 ‘삶의 세계의 소박성에 대한 민감성’에 대한 은유로 재해석하고 싶다.
‘삶의 문제’에 대한 관심의 촉구는 <아시아 포럼>의 성과를 중간 점검하는 자리(2008년12월17일)에서도 화두가 되었다. 이재현 박사(국제 연대 위원회 실행위원)는 이 자리에서 “초국가적 문제라는 것의 본질은 바로 인간의 직접적인 삶에 영향을 주는 문제, 인간의 생존에, 그 질적 문제에 직접 영향을 주는 문제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밝히면서 “빈곤”의 문제가 이와 같은 문제들 중에서 가장 고전적인 예에 속한다고 피력했다.(p.4) 그리고 해가 바뀐 2009년 <아시아 포럼>의 첫번째 모임에서(3월26일), 그는 ‘아시아인의 삶을 위협하는’ 초국가적 인간안보의 문제로서 5가지를 손꼽았다: 1.난민문제, 2.영유권 문제, 3.해상안전과 해적문제, 4.마약문제, 5.인신매매문제. 이어서 그는 이러한 문제들이 다시 ‘초국가적 범죄’문제로 연결된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범죄에 대한 “이해[는] 단순히 범죄라는 시각을 넘어서 왜 그들이 그 문제에 연관될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보다 주목할 대목은 바로 뒤에 이어진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이었다: “더불어 문화적, 종교적 상대성과 관용의 시각 그리고 그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관점은 중동, 동남아에서 일어나는 [각종] 테러는 인간생명을 위협하는 범죄로[만] 낙인 찍는 오류를 만들어내기 쉽다.”(p.6)
(범죄나 예방을 넘어선) 삶에 대한 이해와 배려의 정책이 절실
아시아가 새로운 연대의 공동체로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문화적 종교적 상대성과 관용의 시각, 다른 삶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관점은 단지 국가간의 테러나 범죄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필자는 김성천 교수의 “이주아동의 인권현황과 시민사회의 과제”(2009년 7월 9일)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때마침 쏟아진 장마비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여든 고등학생, 중등학교 교사들, 그리고 여러 시민단체와 학내외의 인사들로 본관 2층 대회의실은 시작부터 이미 만석이 되었다. 김 교수의 발표는 한마디로 ‘이주아동의 기본적인 삶은 보호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주아동이란 한국에 온 외국인 노동자의 자녀(이들은 부모와 같이 살기 위해 본국에서 관광비자로 입국하였다.) 또는 이들 사이에서 출생한 아동으로서 2008년 3월 현재 약 2~3만 명이 한국에 거주하고 있다. 이주노동자가족의 아동들은 대부분이 미등록 신분으로서 기본적인 생계보장, 학업, 보건, 사회관계 형성의 권리와 혜택을 누릴 수 없는 열악한 상황에 있다. 특히 이 아동들은 부모와 함께 살 권리가 보장되어 있지 않다. 그 일부 아동의 경우, 부모의 강제출국으로 한국에 남아 생활하게 되는 문제도 있다. 한편으로 이 아동들은 한국에서 태어났거나 어려서부터 한국에 장기 체류했기 때문에 본국에 송환되었을 때 전혀 적응할 수 없는 실정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에서 장래에 희망을 갖고 살 수 있는 공식생활이 없기 때문에 그대로 머물 수도 없는 절망적 상황에 놓여있다. 여기서 김성천 교수는 “’체류자격’이라는 낡은 기준에서 탈피하여” 아동의 삶의 관점에서 정책의 틀이 다시 짜여져야 한다고 말을 맺는다.
끝으로 필자는 <아시아 포럼>을 통해서 모처럼 일깨워진 ‘삶의 세계’에 대한 관심이 더욱 심화되고, 확장되고, 다원화되고, 치열하기를 기대한다. 이러한 ‘관심’으로 열린 시민적 ‘삶의 세계’는 다시금 시민운동의 정체와 침체를 깨뜨릴 새로운 활력소가 될 것이다.
일찍이 “유럽과학의 위기”를 외쳤던 후설(E. Husserl)은 인간의 모든 프로젝트(project)는 ‘삶의 세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지금 그의 말이 아시아인의 몸에, 마음에, 그리고 그들이 사는 땅과 바다와 하늘에서 메아리치고 있는 것 같다.
<아시아 포럼> 제6회 에너지 위기와 시민사회의 과제
- 발제: 전가림/ 호서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 일시: 2009년 9월 17일(목) 오후 4시, 경희대학교 본관 2층 대회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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