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6년 9월 19일 타이에서 일어난 쿠테타는 타이가 이제 민주주의를 차근 차근 뿌리내리고 있다고 믿고 있던 국제사회를 경악시켰다. 당시 쿠테타의 주역들은 탁신의 부패와 그의 분열주의 정치, 헌법상 보장된 독립기관에 대한 침해, 군주제에 대한 위협 등을 들어 자신들의 반(反)헌정적 행위를 정당화하였다. 손티 분야랏글린 육군총사령관을 의장으로 하는 <입헌군주제하의 민주개혁평의회>는 한때 ‘국민헌법’으로까지 격찬을 받던 1997년 헌법을 폐기하였다. 그해 10월 1일에 임시헌법이 공포, 시행되고 전 육군총사령관 수라윳 출라논 추밀원 의원이 과도 수상으로 취임했다.

쿠테타는 1992년 시민항쟁으로 훼손된 군의 자존심과 이들의 정치 개입을 일거에 회복시켰다. 또한 쿠테타를 통해 보수주의자들과 존왕주의자들은 권력 게임의 규칙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군부에 의해 수상직에 임명된 수라윳 장군은 국왕이 제시한 ‘자족경제’ 개념이 정부 경제정책의 기조가 될 것임을 선언하였는데, 이것은 기업가 정신의 제고를 강조하는 탁신의 경제정책과 대조를 이루었다. 특히 수라윳 과도정부는 군부 엘리트와 존왕주의자들로 채워졌다. 그들 중 많은 수가 과거 1991년 쿠테타로 집권한 군사정부에 연루되었던 인물들이었다.
  
결국 탁신정부의 와해를 바랬던 중산층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군부와 보수적 존왕주의자들에게 맡겼다. 그들은 탁신을 지지하고 또 그에게 표을 던진 빈민, 농민들이 아직 민주주의를 누릴만한 시민의식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보았다. 반탁신운동을 이끌었던 보수주의자들은 탁신퇴진운동을 남들이 낸 세금으로 혜택을 받고 그 대가로 탁신을 지지하고 있는 빈민들과의 계급전쟁으로 보았다. 이러한 반탁신운동을 통해 외견상 왕실은 전례없이 강력해졌고 군부와 관료들은 과거 그들이 누렸던 특권을 되찾게 되었다.
 
특히 왕실과 군의 관계가 보다 돈독해졌다. 2006년 쿠테타 이후 군과 왕실에 연을 맺고 있던 보수주의자들이 공직에 임명되었다. 군부가 임명한 과도의회는 2007년도 군 예산을 50% 증액시켰다. 2007년 신헌법에 따라 민정이양이 이루어졌지만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은 계속되었다.  2006년 9월 쿠데타를 국왕이 승인하자 인터넷 사이버 공간에 국왕을 비판하는 글이 오르기 시작했고, 정부당국은 이들에게 최고 15년형에 처해질 수 있는 왕실모독죄를 적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실을 비난하는 인터넷 사이트가 증가하자 정부당국은 이들 사이트 폐쇄에 나섰다. 2008년에는 저명한 원로 사회운동가인 술락 시와락이 왕실모독죄로 입건되었다. 왕립 출라롱껀대 짜이 응빠껀 교수는 왕실을 비난한 저서를 발간했다는 이유로 입건되자 영국으로 피신하였다.

일찍이 타이에서 사회운동과 정당정치가 만개했던 초유의 시기는 1973년 10월 14일 민주혁명과 그 결과로서의 1974년 헌정체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4년 헌정체제’는 군부를 비롯한 우익의 반발로 파국을 맞았다. 1992년 5월 시민항쟁을 계기로 ‘74년체제’의 개혁성을 발전시킨 새로운 개혁적 헌법을 구상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제정된 헌법이 1997년 헌법이고, 시민사회의 의사를 수렴한 가운데 제정되었다는 점에서 ‘국민헌법’으로까지 불렸다. 그리고 ‘97년체제’ 하에서 타이 최초의 정책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 탁신의 타이애국당이 집권할 수 있었다.

급기야 다양한 친서민 정책을 편 탁신의 포퓰리즘은 타이애국당이 민주헌정 사상 최초로 연립없이 단독 집권을 가능하게 했고, 동시에 ‘다수의 횡포’가 절정에 이르렀다. 결국 ‘다수의 횡포’에 따른 배제의 정치가 국가폭력과 인권침해 사례의 증가로 이어지자 일부 시민사회진영은 존왕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탁신 퇴진운동에 나섰다. 친서민정책을 통해 농촌에 절대적 지지기반을 갖고 있던 탁신은 이에 대해 의회해산과 선거로 맞섰다. 결국 수의 게임에 자신이 없는 반탁신진영은 쿠테타까지 ‘초대’하였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현 집권세력인 민주당은 쿠테타를 암묵적으로 지지하였다.  
 
탁신 지지세력으로 분류되는 ‘붉은 셔츠’는 오늘날 정국혼란의 근본 원인을 2006년 9월 쿠테타로 본다. 이들은 현 아피싯 정부가 군부로부터 독립적이라고 보고 있지 않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1997년 헌법의 복원을 주장하면서 수의 게임에 자신이 없는 현 아피싯 정부를 향해 의회해산과 총선실시를 압박하고 있다. 그러나 탁신을 부패한 독재자, 교활한 포퓰리스트로, 탁신을 지지하는 서민들을 포퓰리즘에 현혹된 집단으로 보는 지식인과 중산층 중심의 ‘노란 셔츠’의 저항 역시 만만치 않다.  

흔히 민주주의를 갈등의 제도화라고 표현한다. 타이 사례는 이러한 갈등의 제도화에 이르는 아시아 민주주의의 힘겨운 여정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박은홍(성공회대 아시아NGO정보센터 소장)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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