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강들의 '그들만의 잔치' : 소수민족의 권리는 누가 보장할 것인가?
발칸반도의 국가들은 대부분 산악지형이라 각지의 고립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있으며, 농산물과 광산물의 수출을 주로 하는 취약한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각 공화국에 분포하는 소수 이민족 집단에 대한 다수 민족의 적대행위가 심각한 국제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발칸반도는 동서양 양쪽으로부터 계속 수많은 침략을 받았으며, 세르비아인, 알바니아인, 마케도니아인, 슬로베니아인, 그리스인, 터키인 등 다양한 민족이 분포하고 있어 국가통합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지정학적으로 유라시아남단과 유럽의 경계선에 위치해 있어 이지역에 대한 세력확장이 동서에서 끊임없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발칸반도는 과거 알렉산드로 대왕시절에는 대부분 통합되어 있었으나 로마인들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이후로 로마, 오스만 투르크 등 외부세력의 지배를 받았으며, 특히 19세기에 러시아가 오스만 투르크제국을 물리친 이후 이 지역에서 민족간의 대립과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이에 대한 유럽의 견제 등 열강의 세력다툼이 그치지 않으면서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오스만 투르크제국이 점차 쇠퇴하는 가운데 그리스의 독립전쟁(1821∼1826) 이후 두 차례의 전쟁을 겪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발칸전쟁(Balkan Wars)은 1912년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그리스, 몬테네그로 사이에 발칸동맹(Balkan League)이 형성되어 오스만 투르크제국과 오스만 투르크지역의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의 독립을 위한 전쟁이었습니다. 이 결과로 오스만 투르크는 청년 투르크당의 쿠데타로 터키로 바뀌게 되었고, 유럽지역의 영토를 발칸동맹제국에 넘겨주었습니다. 두 번째 발칸전쟁은 1차 발칸전쟁의 영토분배를 둘러싸고 대립이 심화된 가운데 1913년 불가리아가 세르비아와 그리스를 공격하면서 일어났는데, 불가리아의 패전으로, 불가리아는 도브루자를 루마니아에게 할양하고, 마케도니아를 그리스와 세르비아에게 넘겼으며 카바라 일대를 그리스에 양도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워 팽창정책을 펼친 러시아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고,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국가인 오스트리아에게는 위협이었습니다. 결국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제를 세르비아 청년이 암살하는 사건을 계기로 1914년 오스트리아-독일 동맹과 영국-프랑스-러시아간의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발칸반도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소위 민족자결원칙에 따라 몇 개의 독립국이 탄생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때에 그 대부분이 독일의 침략을 받았고, 전후에는 남쪽의 그리스를 제외한 지역에 구소련의 영향하에 불가리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유고슬라비아 등의 국가들이 탄생하였습니다.
유고슬라비아의 붕괴와 마케도니아(Macedonia)
19세기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투르쿠제국 등 열강들의 지배를 받았던 구유고연방지역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등의 지역을 포함한 다민족국가인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 형성되었고, 1929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국명을 바꾸어 절대군주국가가 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이탈리아와 독일에 합병되기도 하였는데 공산당 중심의 인민해방군이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였고, 전쟁 이후에는 구소련의 도움을 받아 전국토를 장악하여 인민해방군 원수였던 티토가 수상에 임명되어 1945년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정식으로 출범하였습니다.
서로 다른 민족의 융화정책에 성공하여 안정적 발전을 하던 유고연방은 1980년 티토의 사망과 동유럽국가들의 민주화 물결 속에서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등 4개 공화국이 독립을 선언, 연방체제가 무너지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공화국이 1992년 4월 신유고슬라비아연방을 결성하였습니다. 이 신유고연방 역시 2003년 2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라는 국가연합으로 새롭게 출범하여 해체되었습니다.
구유고연방의 설립이전에는 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고, 경제적으로도 안정적이었던 크로아티아는 자신을 중심으로한 발칸반도지역의 통합을 추구하였고, 세르비아의 경우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의 영향을 받아 대세르비아주의를 바탕으로 크로아티아를 포함하여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인들은 아우르는 범슬라브족 국가의 건설을 추구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발칸반도내에서 헤게모니를 둘러싼 갈등은 구유고연방의 설립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 티토는 세르비아의 민족주의가 연방공화국내의 다른 민족들과 상충되는 것을 막고자 각 민족의 독자적인 권리를 인정하고 소수민족에 대한 평등권을 보호하기 위해 알바니아인들의 대학설립과 언어사용을 인정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정책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교를 신봉하고 역사적으로 유럽과 유대감을 가지고 있는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의 북서부지방과 그리스정교 또는 이슬람교를 믿고,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등의 남부지역의 차이는 쉽게 해소되지 않았고, 갈등의 불씨가 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티토의 사망이후 세르비아의 민족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었고, 각 민족들도 독립국으로 연방을 탈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케도니아(그리스에 같은 지명이 있다는 이유로 그리스가 반대하여 구유고슬라비아 마케도니아공화국으로 불리기도 합니다)는 남슬라브계통의 마케도니아인(65%)과 알바니아인(23%), 터어키인(4%) 등의 민족으로 이루어진 국가입니다. 마케도니아인은 주로 그리스정교 계통인 마케도니아 정교를 믿고, 알바니아인들은 이슬람교를 믿고 있습니다.
마케도니아 지역은 발칸전쟁 이후 독립하지 못하고 인접국가들의 영토확장의 목표가 되어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 3국으로 분할되었다가 1918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이후 유고슬라비아연방에 편입되었습니다. 이후 유고슬라비아연방 하에서 마케도니아인이 처음으로 민족으로 인정받아 스스로 공화국을 형성하여 구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 내의 1개 공화국이 되었다가 1991년 국민투표에서 95%가 공화국의 주권확립을 지지함으로써 독립하였는데, 이때 알바니아민족들의 동등한 권리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자 코소보 자치주(알바니아인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음)와의 통합을 요구하면서 자치확대 및 분리독립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분쟁이 시작되었습니다(코소보 분쟁은 다음주에 다룰 예정입니다).
세기의 끝과 시작을 전쟁으로 맞이한 마케도니아
간헐적으로 테러 등 무장활동이 지속된 가운데 1999년 20세기 마지막 전쟁인 마케도니아와 인접한 세르비아의 코소보지역에서 분쟁이 발생하였고, 많은 알바니아계 난민이 마케도니아로 유입되어 폭력사태가 빈번히 일어났으며, 2001년 2월에 알바니아계 반군인 민족해방군(National Liberation Army: NLA)이 무력을 사용하여 제2의 도시 테토보를 근거로 하여 무장투쟁을 본격화하면서부터 분쟁이 격화되었습니다. 이에 발칸반도에서의 분쟁확산을 우려한 유럽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를 중심으로 코소보지역의 국경을 봉쇄하여 코소보지역 알바니아 무장세력과의 연계를 차단하고, 마케도니아 정부를 지지하자 마케도니아 정부군은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무장충돌이 계속 일어나는 가운데 나토의 중재안을 반군이 받아들여 휴전에 들어갔고, 반군은 나토의 감시하에 무장해제를 실시하였습니다.
2001년 8월에는 알바니아계 민주번영당(PDP: Party of Democratic Prosperity)과 알바니아 민주당(DPA: Democratic Party of Albanians), 슬라브계 집권여당인 마케도니아 국제혁명기구(VMRO: Internal Macedonian Revolutionary Organization)-민족연합민주당(DPMNE: Democratic Party of Macedonian National Unity), 야당인 사회민주동맹(SDMA: Social Democratic Alliance of Macedonia, 전공산당 후신) 등 양측을 대표하는 4개 정파 지도자들과 보리스 트라이코프스키 대통령이 소수 알바니아인 권리 보호와 평화유지군 파병을 골자로 하는 평화협정에 서명하여 공식 서명, 유혈분쟁을 매듭짓는 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평화협정의 주요내용은 ▲ 마케도니아에서 슬라브계를 유일한 헌법상 국민으로 규정하는 조항삭제, ▲ 알바니아계 인구 20%이상 지역에서 알바니아어의 제2공용어 채택, ▲ 알바니아어 교육에 국가 재원 투입, ▲ 알바니아계 다수 거주지역에 알바니아계 경찰 관료 임명 등 광범위한 수준의 자치허용, ▲ 정부 및 경찰 조직과 헌법재판소에 비례대표에 의한 알바니아계 참여, ▲ 알바니아계 반군 무장해제를 감시할 나토군 파병 등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영국, 독일을 비롯한 나토의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어 무장해제를 실시하여 총 3천875점의 소총과 박격포, 곡사포, 그리고 탱크 1대를 나토에 반환하였고, 마케도니아의 알바니아계 반군 지도자 알리 아흐메티는 2001년 9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무기회수작전 종료에 때맞춰 반군조직의 해체를 공식 선언하였습니다. 2개 슬라브계 정당과 2개 알바니아계 정당으로 구성된 마케도니아 의회도 평화협상안의 내용이 포함된 헌법개정안에 대하여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습니다.
국제적십자의 2001년 보고서에 의하면 이번 분쟁으로 70,000명 가량의 실향민이 발생하였고, 약 80,000명의 알바니아인들은 난민으로 전락하거나 경제적, 정신적 피해를 입었습니다. 2001년말 이들의 숫자는 2만명의 실향민들과 만명의 마케도니아 난민들이 있는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마케도니아에서의 분쟁은 뿌리깊은 차별때문이었습니다. 2000년 통계에서 전체 경제인구 중 알바니아계 비중은 10% 미만입니다. 전체인구에서 알바니아인이 차지하는 비율 23%에 비해 지나치게 낮은 비중이며 공권력 기관인 경찰과 정규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1%로 더욱 낮습니다. 더욱이 정치권에서는 슬라브계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강성 정치인들의 존재와 알바니아인들이 요구하는 자치, 분리독립이라는 목표에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갈등은 잠재되어 있는 형태입니다.
20세기 서구와 러시아 열강들이 벌인 '그들만의 잔치'로 시작하여 냉전시대에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하에서 숨죽였고, 냉전 이후 역사적으로 누적된 민족문제들은 결국 한세기를 전쟁으로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강대국들은 과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지금은 유럽의 안전만을 지키고자 소수민족의 권리는 철저히 무시당하였습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국제사회의 안전보장체제인 유엔의 실효성에도 심각한 회의가 제기되는 지금, 이들을 지킬 수 있는 '방패'는 지구촌에 평화를 사랑하는 시민사회의 끊임없는 행동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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