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적 시민으로 성장하기


디스 이즈 아프리카(T. I. A)

하늘이 땅을 덮었다. 턱까지 차오르게 하는 무더운 열기는 땀을 내게 하지 않아 왠지 견딜만하다. 거리에 넘쳐나는 폭스바겐, 벤츠와 아우디의 차량은 이젠 식상하다. 길가 새까맣게 한두 명 혹은 무리 지어 걷는 흑인들의 뒷모습만이 눈길을 끈다. 버스라고 찾아볼 수 없는 거리에 가끔 지나가는 폐차위기의 봉고는 쌩쌩히 달린다. 흑인들을 잔뜩 싣고. 저것이 바로 자가용이 없는 흑인들을 위한 택시라고 하는 것이리라.

나는 이곳에서 자전거를 배웠다. 첫 나들이의 설렘과 달리 두려움이 먼저 엄습하는 것을 보면 이젠 제법 이곳의 실상이 독해가 되고 있는 듯하다. 허리를 깊이 숙여 간단한 숄더백을 크로스로 메고 자전거를 타고 제법 속도를 내보는데 흠칫 본능적으로 내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것이 있어 돌아봤더니 총에 맞은 시체다. 흥건한 아스팔트 위의 적색의 그것은 저녁 땅거미가 지는 어스름께에도 치워지지 않고 있었다. T. I. A , This is Africa.


평등한 희망을 꿈꾸며

아프리카, 겨울이 없을 거라는 예상을 깨고 겨울은 혹독하다 못해 잔인하다. 오늘도 운동화도 없이 맨발로 온 아이들, 한겨울에도 얇디얇은 옷에 구멍이 숭숭 난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아이들은 꿈, 그 희망이라는 것조차 사치처럼 보였다. 인종차별이 가장 심한 나라, 남아공의 현실을 목도한 나에겐 차라리 잔인했다. 백인과 흑인들의 뼛속깊이 자리한 분리와 차별은 소리 없는 전쟁이다. 총성만 없었지 그들 사이에서는 언제나 희생이 따르고 승자와 패자가 있었으며 상처로 인한 보복의 역사가 대를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희망은 값없이 갖는 거라 생각했지만 희망조차 공평하게 갖지 못하고 극과 극을 달리는 흑인들의 삶을 보면서 난 내가 가진 것을 환원 아니 나누고 싶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평화 공부를 시작했다. 평화라 함은 전쟁의 부재가 아니라 누구나 소박한 희망하나 공평하게 꾸는 것 아닐까. 희망조차 거세되어지는 상황이 갈등이고 전쟁이리라. 아프리카의 경험은 생각의 부유함, 평등한 희망을 꿈꾸게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아프리카의 잔상이 늘 나의 뇌에 맺혀있었기에 나눔과 평화의 공존에 기여할 수 있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ODA(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공적개발원조)는 정부 및 지방정부를 포함한 공공기관이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과 복지증진을 주목적으로 하여 개도국 또는 국제기구에 공여하는 증여와 차관을 의미한다. 마침 작년 여름 ODA유럽기관의 해외탐방에 오르게 되었다. 경희대 르네상스문명원에서 장학금을 받아 영국, 노르웨이, 스웨덴에서 ODA의 실상을 경험했다. 하지만 현실은 내가 생각한 ‘나눔’이라는 순수함에 기초하지 않았다. 대부분 해외원조는 역사적으로 식민지관계에 놓은 나라와의 현대판 연결고리요 명분이었고, 해외에 묻힌 천연자원이라는 파이를 나눠먹기 위한 보이지 않은 도움이라고 하는 탈의 각축이었다.

내가 현실에서 목도한 야누스 같은 모습은 줄이고 서로 공존을 목적으로 하는 나눔은 불가능할까? 희망은 있었다. 참여연대 ODA펠로우십 모집. 국가의 정책적 차원도 중요하지만 시민의 높은 사회참여인식과 의지,

이것을 표현할 통로가 있다면 ODA의 본의인 나눔의 실현은 가능하리라. 그런 의미에서 한국시민운동의 모체인 참여연대는 작은 희망이었다. 민주화 운동은 ‘문민정부’를 배태했지만, 집권 초기의 개혁적 시도가 과거 기득권층의 반발로 유야무야되던 시기에 참여연대 창립회원들은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권력 감시운동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생활 곳곳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가장 먼저 인식한 선구자가 아니던가. 국민의 참여의식을 자극하고 시민의 정치사회적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실천하는 단체라는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희망이라고 느껴졌다.


주체적?창조적 시민으로 성장하는 과정

참여연대 ODA펠로우십에 참여하는 8명은 한 달 동안 1주일에 1번씩 국내 전문가들을 통해 ODA 교육을 받았다. 그동안 받은 교육처럼 단순한 강의가 아니었다. 강의 중간과 마무리 시점에는 쏟아지는 질문과 토론으로 ODA를 해부해나갔다. 정의, 현실 점검, 이후 방향을 고민하는 한 달이 지나고 참여자들은 2주에 1번씩 과제를 수행한다. 우리가 관심 있는 분야를 선정해서 각자 발표를 하고 토론을 통해 질문을 주고받으며 의견을 수렴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마치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듯 사람은 사람을 통해서 배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ODA라는 급속한 국제적 관심의 흐름에 뛰어든 한국의 원조 현황에 참여연대는 뒤에서 창조적이고 주체적인 생각을 가지고 안전밸브 역할을 할 수 있는 시민들을 매주 수요일마다 교육하고 있었다.

부여된 과제가 때로는 대학원의 과제만큼 부담스럽다. 교육 초기에는 수동적으로 배우기만 하겠다는 생각과는 달리 언제나 한 사람 한 사람을 중심에 놓는 참여연대의 방식은 무언의 책임감과 성실성을 요구하기에 근 두 달이 되었는데도 참 쉽지 않은 과정이다. 하지만 난 시민으로서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도 성숙해져갔다. 언제나 모범생이라는 소리를 듣고, 질문하는 것 의문을 다는 것이 때로는 선생님께 죄송한 일이라고 생각해오던 나는 이젠 손을 들어 이렇게 말한다. “제 생각에는……”

우리의 모임은 언제나 저녁 10시를 넘긴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참여연대 건물을 바라보며, ‘잘 자라라 희망아’하고 인사를 한다. 언제나 쉽지 않은 이 모임은 대중에 묻혀있지만 주체적인 생각을 가진 시민으로 살아가는 ‘희망’을 갖게 했다.

이글은 참여사회 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김정임 (참여연대 펠로우십,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생)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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