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는 반세기 가량 법치 부재의 군사정권 치하에 있다. 한때 버마는 아시아의 선진국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1962년 ‘버마식 사회주의’를 내건 군부가 쿠테타로 집권하면서 버마는 정치, 경제적으로 추락해 인권 부재의 최빈국이 되었다.

버마 군사정부는 지난 2008년에 자신들의 불법 통치를 합법화하기 위해 헌법을 일방적으로 통과시켰고, 자신들이 공표한 일정에 따르면 올해 하반기에 총선을 치루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선거 일정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반면 버마 민주진영은 선거 보이콧을 기본으로 하면서 공정선거 감시운동의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대안없는 선거’가 버마인들의 인권을 개선시킬 수 있을지 극히 회의적일뿐이다.

주지하다시피 버마 국민들이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자유권과 사회권 모두를 상실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이제 버마와 인접한 타이 국경 도시 메솟은 인권 부재의 조국을 등지고 탈출하는 버마인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자신들의 협력기구인 아세안(ASEAN)에 버마를 가입시키려고 했을 때 서방 국가들은 인권의 이름으로 이를 반대했다. 그러나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이른바 ‘아세안 방식’(ASEAN way)에 따라 버마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였다. 이때의 ‘아세안 방식’이란 내정불간섭을 기본으로 하는 것으로 버마 인권문제는 버마 당사국의 문제이기 때문에 서방 국가들처럼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설사 인권을 거론하더라도 버마를 소외시키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버마를 아세안의 일원으로 끌어들여 개방도를 높이는 것이 인권 개선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포용노선을 ‘건설적 관여’(constructive engagement)라고 일컫는데, 우리 언어로 표현하자면 ‘햇볕정책’이다.

버마 인권문제에 관여하는 국제인권기구와 아시아 인권단체들은 서방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건설적 관여 정책에 대해 반대하면서 경제봉쇄와 외교적 제재를 요구해왔다. 이러한 국제연대운동의 결과 아세안 회원국 정부내에서 ‘건설적 관여’와 차별화된 ‘유연한 관여’(flexible engagement)라는 새로운 외교 개념이 제기되었다. ‘유연한 관여’의 핵심은 아세안 회원국 중 어느 특정 국가의 국내정책이 다른 회원국들에게 부정적인 여파를 미칠 경우 아세안에서 이 사안을 공개적이고 집단적인 토론에 부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상대로 ‘유연한 관여’는 그 자체가 아세안의 불간섭주의 규범에 반한다는 이견에 부닥쳤다.

이러한 ‘아세안 방식’의 변화 조짐은 아세안 회원국 정부만이 아니라 입법부에도 영향을 미쳐 ‘버마문제를 생각하는 아세안 의원연맹’(AIPCM)이 만들어졌다. 마침내 이같은 부드러운 압박 속에서 버마 군사정부는 예정되었던 아세안 의장직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듯 주변 국가들의 압박 수위가 조금씩 높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마 군사정부가 요지부동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방의 제재가 버마 군사정부와 민주화세력 사이의 교착국면을 민주화세력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끌어내기보다는 모든 문제를 외세 탓으로 돌리는 군부내 강경파의 득세만을 초래하였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1990년 선거혁명의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폭력을 수단으로 권력 이양을 거부한 버마 군사정부는 국면전환용으로 경제개방이라는 카드를 꺼냈다. 투자유치와 교역확대를 통해 대내적으로는 악화일로에 있는 경제를 반전시키고 대외적으로는 경제실리 중심의 외교노선을 취하는 주변국들과의 관계 강화를 통해 국제사회로부터의 고립을 피하자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다.

반면 버마 군사정부의 변신 시도에 대해 1990년 선거혁명의 주역인 민족민주동맹(NLD) 지도자 아웅 산 수지는 국제사회를 향해 버마에 민주주의가 회복될 때까지 군정이 희망하는 투자를 유보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렇듯 국제인권단체들과 서방국가들의 제재 전략은 아웅 산 수지를 위시한 버마의 민주인사들의 요구와 일치하고 있다. 

버마 민주 인사인 아웅 모 조는 1988년 8-9월에 걸쳐 진행되었던 반군부 민주화 투쟁에서 민주진영이 취했던 이상주의적 정치 전략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현실주의 노선의 중요성을 지적한 바 있다. 이제 버마 민주 진영은 민주주의로 향한 중대국면이 될 수도 있는 올 하반기 선거 국면을 앞두고 타협인가, 대결인가, 아니면 이 양자를 어떻게 혼합할 것인가, 전략적 선택을 앞에 두고 있다.

아세안의 불간섭주의 규범은 서구 열강으로부터의 오랜 식민주의 경험, 이에 따른 반(反)서구 정서와 무관하지 않다. 물론 국가권력은 이러한 반서구 정서를 정권안보 차원에서 이용했다. 그렇지만 버마문제를 두고 아세안 내부에 일정한 변화 기류가 감지되고 있듯이 국제사회의 압박과 동남아시아 시민사회의 성장은 불간섭주의 전통을 조금씩 허물어뜨리고 있다.

최근 한국-아세안 협력의 필요성이 일층 강조되고, 한국과 버마의 경제협력 논의가 진전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우리 시민사회는 ‘네거티브 방식’의 제재와 ‘포지티브 방식’의 개방 유도를 혼합한 전략의 가치에 대한 심사숙고와 함께 아시아 시민사회, 버마 민주세력과 더 많은 대화, 더 많은 연대를 해야 할 것이다.

  박은홍(성공회대 아시아NGO정보센터 소장)

* 이 글은 2010.6.25 서남포럼에 게시된 글입니다.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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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인도의 9.11, 그리고 야만
인도 민주주의가 실패해온 이유

 
9.11 하면 많은 이들은 2001년, "악마 같은 이슬람" 사람들이 비행기를 낚아채 세계무역센터 건물을 들이받아 3000명을 죽인 폐허더미의 장면부터 떠올릴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범죄로서 전인류에 대한 범죄라고까지 할 수 있다.
 
물론 9.11 테러 사건이 인류에 대한 범죄이긴 했지만, 여기서 내가 기억나는 것은 오래 전 1998년에 파키스탄의 정치가이자 활발한 혁명이론가였던 에크발 아마드(Eqbal Ahmad)가 했던 말이다. 그는 당시 미국에 거의 빌다시피 서아시아에 대한 간섭과 만행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면서, 마치 9.11 사태로 인한 전세계적 재앙을 예견하는 듯했다. 그리고 실제로 9.11 테러의 현장이 그랬다. 생생한 재난의 장면으로 의해 순식간에 중동 국가들은 다 같은 "야만적인 무슬림"으로 치부됐으며, 민주주의와 테러 퇴치라는 명목으로 어마어마한 폭격을 받아 쓸려버렸다.
 
지금 나는 미국식 신제국주의 모델을 재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2001년 9.11 사태의 희생을 불경스럽게 하지 않으면서도 근대사에서 잊혀진 몇 가지 다른 중요한 9.11 사건을 살펴보고자 한다.
 
칠레에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이 라 모네다에 탱크로 밀고 들어가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이끄는 대단히 인기 있던 민주 정권을 붕괴시킨 것 또한 9월 11일 아침이었다. 그것은 남아메리카 역사상 가장 피 튀기는 쿠데타였고, 3000명의 시민이 학살당했다. 이후 피노체트의 독재 치하에서 사형되거나 실종된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칠레 국립체육관은 강제수용소로 바뀌었고, 그곳에서 살해된 수천 명 가운데 대중가수였던 빅토르 하라는 손가락이 모두 잘렸으며, 기타를 치라는 명령을 받고 피범벅이 된 손 바닥으로 기타를 쥐어 들자 바로 총살됐다.
 
오늘날 사람들이 이 또 다른 '9.11사태'를 누가 일으켰는지 알기 위해 갑자기 역사학도가 될 필요는 없다. 여전히 '야만적'인 정권을 민주화시키는 것을 중요한 정책으로 삼고 있는 콘돌리사 라이스 국무장관이 일하고 있는 미국 정부가 바로 피노체트 쿠데타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십 년 전 당시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아옌데 대통령이 국민의 지지와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면서 미국 회사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보인 데 대해 "자국민들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스스로 공산주의의 길로 가려는 나라를 옆에서 빤히 보고만 있을 수 없다. 그들 스스로의 결정에 맡겨두기에는 너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라고 좌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기억에서 사라진 9.11은 또 하나 있다. 1906년 남아프리카에서 간디(Ghandi) 의해 최초로 발생한 WMD 사건이다. 여기서 WMD는 대량파괴무기를 뜻하는 'weapons of mass destruction' 이 아니라 'weapon of mass disobedience' 로서, 사티야그라하라고 불리는 인종차별과 식민지화에 대한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말한다. 훗날 간디가 밝혔지만, 남아프리카 정부의 간섭을 꺾고 인도 대륙의 주권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한 사티야그라하 운동이 바로 9월 11일 일어났다. 이로써 다른 영연방 식민지 국가들에도 반 식민화 운동이 비폭력적으로 퍼져나갔고, 1960년대에는 키신져와 라이스와 부시의 나라 미국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선도할 시민권 운동의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여기 전세계에 알려지지 않고 잊혀진 또 하나의 9.11이 있다. 50년 전인 1958년 9월 11일, 간디가 활동했던 바로 그 시대에 인도 대통령은 국회의 '군특수권한법안'에 동의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한 이 법은, 식민지 시대에 영국이 인도의 독립 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군특수권한 조례'를 재현한 것이다. 인도의 북-동부 지역의 대부분은 이 법안으로 의해 군대 통치를 받고 있다. '군특수권한법'은 사실상 무력 통치인 현 상황을 민주 정부의 합법통치가 이루어 지고 있는 것처럼 위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오늘날, 군사권이 강한 동북지역은 연 평균 1000명 가량의 민간인이 살해되고 있다.
 
군특수권한법 설명에 구체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인도 동북지역의 다른 9월 사건을 언급하겠다. 1948년, 새롭게 독립한 인도의 북동부에 위치한 왕후국 마니푸르(Manipur)는 보통선거를 통해 민주의회를 구성했다. 이는 아시아 최초였고, 인도 주정부가 세워지기도 전에 이뤄진 것이었다. 하지만 의회는 오래가지 않았고, 인도는 곧 마니푸르 왕후와 통합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1949년 9월 21일 합병 당일에는 마니푸르의 민주의회의 합법적 동의를 받지 않은 군사적 조치가 강행됐고, 이어서 10월 12일에는 인도육군 일개 대대가 마니푸르 수도에 진입했다. 3일 후인 10월 15일, '합병 조약'이 발효되면서 보통선거를 통해 구성된 국회가 속절없이 해산되고 말았다. 일순간 마니푸르는 헌법에 민주의회까지 갖춘 자주국가에서, 민주주의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최고 지방 행정관들과 군 출신 주지사들이 통치하는 인도 뉴델리(New Delhi) 의 행정 하에 속하게 되었다.
 
다시 1958년 군특수권한법으로 돌아와 보자. 그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군특수권한법은 6장 내외의 법률로서, 아마 2억의 인구를 통치하기 위한 세상에서 가장 짧은 법률일 것이다. 이 법은 동북지역에서 군사활동을 규정지으며, 동북 지역의 '혼란 구역' 내에서 인도군 당국과 장병들에게 특별 권한을 부여한다. 그러나 이 법은 '혼란 구역'을 정확히 명시하지 않는다. 4조a항은 "어떤 군 장교, 준위, 하사관이든 그가 공공 질서 유지에 적합하다고 판단할 시, 그러한 내용에 해당하는 경고를 한 후에는, 발포하거나 기타 무력을 사용하여 저지하도록 허용하며, 심지어 살상하는 것도 허용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4조b항은 군 당국이 판단하기에 주거물을 비롯한 어떠한 건물이든, 그 안에서 무장 공격을 "행할 가능성이 있는", 또는 "어떠한 혐의를 받고 있는 수배자든" 은신처로 사용했던 건물을 파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4조c항은 "이성적으로 곧 명백한 범죄를 저지를 의심이 가는 자"에 대해서 "필요한 어떠한 무력"을 사용해서 영장 없이 체포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이런 조항은 무분별한 체포의 근간이 됐고 엄청난 무력 남용과 많은 민간인이 사살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북동부와 같이 문화적, 지리적으로 외딴 곳에 위치한 지역의 군인들은 대개 '이성적'인 근거 없이 무력을 사용한다. 마지막 조항인 6조에는 "이 법안에 명시되어 있는 권한으로 시행되거나 예비된 어떠한 행동으로 인해, 이 법안에 명시된 사람은 어떠한 법적 처벌, 절차를 거치지 아니한다"고 규정되어, 모든 군인사에게 법적 면제권을 부여한다.
 
이 '군 특수권 법안'이 군사행위에 대해 제공하는 법적 보호 때문에 인도국군에 의한 인권침해는 반복됐다. 그 유형에는 강간, 여성 추행, 민간인을 향한 발포, 작대기와 고춧가루를 이용한 항문 고문과 같은 극한의 고문, 그리고 기타 법에 명시되지 않은 사항들도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가장 의아한 점은 야만적이고 가혹한 군사 통치 법안이 민주국가로 알려진 인도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 해답은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인도대륙 중 동북지역은 영연방이 마지막으로 식민지화한 지역이다. 하지만 식민화 이후 동북지역은 곧 제국의 최전선이 됐다. 동북의 아삼 지역 평원을 지나 구릉지대에 위치한 이곳은 행정권이 제한적으로 미치는 곳으로서 많은 부분 영국의 지배를 수용한 전통 족장들에게 통치가 맡겨졌다. 당시 왕후국이었던 트리푸라와 마니푸르는 속국으로 간주되어 인도 중앙정부 주재관들의 간접 조종을 받았다. 약탈적인 구릉지역의 부족들은 이웃한 버마 왕국의 공격적 성향을 흡수하기 위한 완충지대로 관리되었다. 초기의 식민지 행정관들은 그 언덕 지역을 "악마와 도깨비가 득실거리는 공포의 땅 같다"고 입을 모았다.
 
버라드(S.G. Burrard) 대령이 쓴 <인도 서베이 기록: 북동지역 전선의 탐험, 제4권>은 영국인의 시각에서 이 지역을 미지와 기지, 원시와 문명 사이에 지리적 대비가 강하게 나타난 지역으로 기술하고 있다. 식민지들의 지리적 이미지는 각 곳의 원주민들의 이미지로 표현됐다. 예를 들면, "아삼 사람들은 사납고 야만적인 성격을 가졌다. 그들은 전쟁을 좋아하고 복수심이 강하며 잔인하고 술수가 많다. 아직 인류애의 부드러움은 아삼 사람들의 형체에 녹아있지 않은 듯하다"고 묘사했다. 뿐만 아니라 식민지 행정관들도 아삼 너머 지역 사람들은 성격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유럽이나 인도 중심부와는 확연히 달라, 그 지역은 불가피하게 식민 계획에서 제외됐고, 그 결과 이 지역은 야만의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아삼 너머 구릉 지역의 야만적인 역사는 오늘날 식민 해방 후 인도에서 그 원시성이 가장 강하게 남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많은 학자와 국제 단체, 그리고 인도 정부는 그 지역을 "군사적 통치 질서"가 군림하며, 불순분자들이 사는 낙후 지역으로 꼽는다.
 
이 같은 시각들이 존재하는 것은, 영국으로부터 권한을 인도 받은 인도정부의 엘리트들의 무지 때문이 아니라, 인도 국민들 인식 자체에 커다란 '공백'이 있기 때문이다. 이 공백은 인도 역사교과서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교과서의 지도에는 아삼 부근 야만 지역이 커다란 공터로 나와있다. 이것은 마치 예전 고대 중국에서 자기 나라에 알려지지 않은 곳은 여백으로 처리해 아예 존재 자체를 알리지 않은 것과 유사하게, 인도 역사교과서에는 아삼 부근지역의 유례를 가르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다윈의 사회진화론의 신화와 전세계를 비 문명화된 절반으로 보는 인종주의적 편견과 유사하게 인도 국민들의 상상 속에서 이 지역은 아리안족의 문명과 지역 우수성에 비쳐 볼 때 낙후되고 가장 이질적인 곳으로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군특수권한법과 같은 정책에 의해서 동북지역이 변화할 수 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인도 국민 의식에 존재하는 이 '공백'와 인종적 차이는 인도 정부의 '통합 거부'에 대한 우려와 인도의 팽창주의 정신이 혼재되어 빚어낸 것이다. (인도는 건국부터 식민 통치 당시까지도 서아시아로 뻗어나가는 민족주의 개척정신을 품어왔다) 불만분자의 봉기와 무력이 북동지역의 특성으로 자리매김 하기 이전부터, 그리고 그 지역에 분리파의 아우성이 들리기 오래 전부터 인도정부 지도자들은 통일이 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50년 11월 7일, 초대 내무장관이 네루 총리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 내용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동북전선의 불명확한 상태와 티베트, 중국에 대한 현지인의 친밀감은 앞으로 우리와 중국 사이에 중대한 도전 요인이 될 것이다. 북방 또는 동북방에 대한 접근은 부탄, 시킴, 그리고 아삼의 다아질링과 부족을 포괄한다. 그러나 이 지역 사람들은 인도에 대한 헌신이나 충성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 북방과 동북지역에서 우리의 전선을 강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행정적 조치들은 네팔, 시킴, 다아질링과 접경 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당시 인도주재 미국 대사 찰스 보울스는 인도인들이 인도-네팔 평화우호조약 체결을 미국이 양대 대륙(미국과 유럽) 사이에 맺은 훨씬 광범위한 조약들보다 대단하게 보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라고 이야기 했다.
 
인도의 민주정치체제가 군사보안당국에 의존한 동북정책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군사주의적 사상에 민주주의가 편승하는 것을 의미한다. 국민들 내부의 서로 다른 차이점을 존중할 수 있는 사회적 기초가 형성되지 않다면 인도의 민주주의는 전혀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북동지방 문제는 인도 본토의 민주진보진영에 중대한 도전이기도 하며, 과거에 늘 인도가 민주주의에 실패했던 원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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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노지트 후세인/ARENA 활동가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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