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국제연대위원회입니다. 미국과 영국, 스페인 3국은 17일 이라크 무장해제를 위한 군사행동을 승인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채택 노력을 포기하고 결의안을 철회하였습니다. 전쟁이 임박한 것 같습니다. 유례없었던 지구촌 시민사회의 반전노력에도 불구하고, 국제법을 위반하면서까지 그들은 그들만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승인 없는 무력사용은 국제법위반입니다). 또한 지구촌의 다양한 문제를 가장 포괄적으로 논의하고 다룰 수 있는 유엔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오늘은 갈등으로 유엔의 중재노력이 실패했던 나라 소말리아를 찾아보겠습니다.

독재정권의 성립

아프리카 대륙 동쪽 끝에 위치한 소말리아 민주공화국(Somalia Democratic Republic)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 가운데 하나이며(미국이 1인당 GDP : 36,158불인 반면 소말리아는 1인당 600불에 불과합니다), 목축과 농경이 경제의 큰 비중을 차지하며 경제의 상당부분은 원조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국가들 중에서 드물게 거의 단일민족국가를 유지하고 있으며, 소말리아족이 전국에 걸쳐 거주고, 같은 언어와 종교(이슬람)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말리아는 10세기경부터 아라비아 반도의 이슬람교도가 들어와 해안 각지에 토후국을 건설하였고, 19세기에 들어와서 아덴만 연안은 오스만투르크에게 지배되었고, 인도양 연안은 무스카트 오만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수에즈운하의 개통 이후 영국은 아덴만 연안을 영국령 소말릴란드로 만들고 내륙은 영국령 에티오피아에 편입시켰고(1886년), 이탈리아는 인도양 연안지역을 차지하고(1989년) 서부는 프랑스가 점령하면서 3등분되었습니다. 이후 영국령을 제외한 지역은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에 편입되었습니다(1936년).

제2차 세계대전 중 현재의 소말리아지역 전체가 영국군의 군정을 받았고, 1950년부터 과거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는 유엔의 신탁통치(이탈리아가 통치)를 실시한 이후, 1960년 영국령 소말릴란드의 독립과 함께 같은 해 7월 1일 합병, 유럽식 의회민주주의를 도입한 소말리아 공화국이라는 통일국가가 수립되었습니다. 독립 후에는 지부티지역, 에티오피아 동부, 케냐 북동부까지 소말리족이 거주하는 지역은 통합되어야 한다는 정책(Pan-Somalism)에 따라 에티오피아 동부에 대해서는 특히 국경의 새로운 확정과 그에 따른 영토의 반환을 강경하게 요구하고, 1964년 초부터 양국간에 교전이 있었습니다.

1969년 셰르마르케 대통령이 암살된 이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모하메드 시아드 바레(Mohamed Siad Barre) 장군의 군사정권이 수립되어 최고혁명평의회가 실권을 장악, 국명을 소말리아 민주공화국으로 개정하였습니다. 사회주의 정책을 표방한 바레정권은 소수자와 여성의 지위향상과 같은 문화적 측면과 건강, 교육 등 전반적인 사회 기본시설의 근대화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1974년 범소말리아주의(Pan-Somalism)에 따른 에티오피아와의 전쟁 과정에서 에티오피아를 지원한 소련에 반발하여 1980년대에는 서방세력으로부터 개발원조와 군사적 원조를 받았습니다. 이후 미국의 원조를 받아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을 계속하여 냉전시대의 대리전을 수행하였습니다. 이처럼 바레정권은 에티오피아와의 전쟁비용 지출과 함께 국제통화기금(IMF)의 경제자유화정책의 실패, 부정부패와 친족등용주의(nepotism) 등으로 인하여 붕괴의 길을 겪게 되었습니다. 자기 부족 위주의 정책을 펼치며 22년간 장기집권하자 이에 반발하는 부족들이 각기 정치파벌을 형성하고 무장투쟁을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통일이후 남부지역 출신의 정권이 정치, 사회적 체계가 상이하였던 북부지방에 대한 차별정책과 이들이 겪은 상실감, 에티오피아 전쟁으로 인한 북부지역의 피해 등으로 인하여 소말리아 북부지역의 부족들과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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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파벌의 대두와 분쟁의 격화

파벌의 대두는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에서 피해가 심했던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먼저 형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78년 소말리아 청년연맹의 바레정권에 대한 저항이 실패로 돌아가자 리비아의 재정지원하에 에티오피아지역에서 소말리아구원민주전선(Somali Salvation Democratic Front: SSDF)이 만들어졌습니다, 1981년에는 북부지역에서 이샤크족이 중심이 되어 소말리아 민족운동(Somali National Movement: SNM)을 결성하여 게릴라전을 펼쳤으나, 1988년에 북서부의 두지역을 통제하다가 정부군에게 무자비하게 진압을 당했습니다. 중부 및 남부지방에서도 각 부족별로 파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는데, 1989년에는 오가덴부족(Ogadeni clan)으로 구성된 소말리아애국운동(Somali Patriotic Movement: SPM)이 결성되어 케냐와 인접한 남부지역에서 활동을 하였고, 1990년 하비야종족(Hawiye clans)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통일소말리아 회의(United Somali Congress: USC)는 중부지역에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파벌들의 무장투쟁으로 인하여 1990년에 이르면 수도 모가디슈(Mogadishu)를 포함한 많은 지역들이 이미 어떠한 세력으로부터도 통제가 불가능했으며, 결국 1991년 바레정권은 통일소말리아회의가 주도한 쿠데타로 붕괴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최대 파벌로 성장한 바레 정권 때 군장성을 지낸 무하마드 파라 아이디드(Mohamed Farah Aidid), 모하메드(이후 마디Mahdi파로 변경), 아토 등이 임시정부를 수립, 알로 마디 무하마드(Alo Mahdi Mohamed)를 임시대통령으로 세웠지만, 통일소말리아회의의 의장인 아이디드를 지지하는 세력과 무하마드를 지지하는 세력간의 전투가 발생하였고, 이는 대부분 이 두세력을 지지하는 지역무장세력들의 대립으로 확대되어 소말리아는 다시 무정부상태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1991년, 소말리아는 가뭄으로 인해 국민의 과반수가 넘는 500만명이 기아와 질병에 직면하여 죽음의 땅으로 변하고 수많은 난민이 발생하였습니다.



유엔의 실패와 머나먼 평화의 길

반군과의 무력충돌과 가뭄으로 인해 발생한 수백만 명의 난민과 기아문제에 대하여 유엔에서는 1992년 12월 소말리아 구호활동을 위한 결의안을 채택, 유엔평화유지활동단(United Nations Operation on Somalia: UNOSOM)을 설치하고, 6개의 유엔기관 및 30여개의 구호단체들이 인도적 지원을 수행하였고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정부상태의 소말리아에서 원조제공은 방해되었고, 강탈되거나 공격을 받기도 하여 구호품의 극히 일부분만이 필요한 사람에게 전달되어 국제사회의 인도적 지원이 시작된 후로도 하루에 3,000명이 기아로 사망하는 사태에 이르렀습니다. 유엔의 구호활동 보호를 위해 1992년 12월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 통합군(United Task Force: UNITAF)을 파견하고, 유엔사무총장은 소말리아 파벌들간의 평화협정을 추진하였지만, 최대 군벌세력인 아이디드파는 유엔에 의한 국민화해회의의 개최에 반대하고, 미군에 의한 무장해제 요구를 거부하여 무장충돌은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1993년 유엔은 인원이 대폭 증가된 2차 유엔평화유지활동단을 파견에도 불구하고 아이드파 군대에 의해 평화유지군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미군은 아이드파 주요 거점에 대한 폭격을 하였지만 소말리아 사태가 해결 조짐을 보이지 않자 결국 유엔평화유지활동단의 활동을 실패라고 규정하고 단계적인 철수를 시작하였습니다. 1995년 유엔군의 철수가 완료되자 아이디드파는 수도권을 장악하고 아이디드가 일방적으로 대통령 취임 및 신정부 수립을 선언하였으나 1996년 사망하였고, 정전을 모색하는 회의가 수 차례 개최되었지만 매번 각 파벌간의 이해 상충으로 결렬되었습니다.

북부지역이 소말리랜드(Somaliland)로 독립을 선언하였고, 북동지역은 푼랜드(Puntland)가 독립을 선언하고 정부기능을 수행하는 가운데 2000년 3월, 지방 파벌과 원로, 여성그룹들이 평화정착과 새로운 정부수립을 위해 모인 이후 과도의회(Transitional National Assembly: TNA)가 만들어졌습니다. 이 성과로 대통령과 수상의 임명이 이루어져 과도정부(Transitional National Government: TNG)가 출범하였습니다. 과도정부는 정부 직위를 각 부족에 골고루 분배하는 정책을 추구하는 등 현재의 무정부 상태 해소와 부족간 화합, 평화 정착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아직 아이디드파가 신정부를 인정하고 있지 않고, 소말리랜드의 독립요구도 거세며, 과도정부는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 충분한 경찰력 및 군대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현재 소말리아는 2002년부터 각 파벌들이 모여 케냐에서 평화협상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2002년 10월 소말리아 파벌들이 케냐에서 열리는 평화회의 기간중에 적대행위를 금지하는 협정을 체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3월 16일에도 9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당하는 등 폭력사태는 올해까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북부지방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던 소말리아랜드는 이 평화회담에 참가하지 않고 있습니다.



팔려 가는 아이들

수십년간의 분쟁과 무정부상태의 지속은 소말리아인들의 생활을 파탄시켰습니다. 유니세프(UNICEF)는 소말리아 어린이들이 세계에서 가장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다고 발표하기도 하였는데, 유엔에 따르면 현재 소말리아의 어린이들이 수천명이 유럽으로 '밀수출'되었다고 밝혔습니다. 절망적인 삶에 직면하여 소말리아에서 미래가 없는 많은 부모들이 그들의 아이들을 수천달러를 받고 국제 아동밀매조직에게 팔고 있으며 이들은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국가들로 '수출'된다고 합니다. 밀수업자들은 매달 수도 모가디슈로부터 250명 이상의 어린이들을 밀수출한다고 합니다. 2-3세의 유아를 포함하여 대부분 10대인 이 아동들은 복지혜택을 위한 사기에 이용당하기도 하며, 매춘과 노동에 상당수가 이용당하며, 국제 범죄조직의 손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분쟁이 해소된 지역에서 조차도 빈곤과 교육, 건강 등의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어 있어 이와 같은 '밀수출'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팔려간 아이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심각한 정체성의 혼돈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식수로 쓸 수 있는 물을 사용가능한 인구는 전체의 28%에 지나지 않으며, 교육은 13.8%만이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심각한 식량위기를 보였던 몇몇 지역은 다행히 강우량이 많아져 1995-2001년보다 식량생산이 80%가 증가한 최고의 풍년을 맞기도 했지만, 남부지역의 식량위기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국제사회의 평화유지 노력도 실패한 소말리아. 1992년 미국중심의 다국적군이 펼쳤던 작전명은 희망회복작전(Operation Restore Hope)였습니다. 이들에게 평화정착과 안정된 생활이라는 미래는 희망에 불과한 것일까요?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하는 미국이 내건 모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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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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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국제연대위원회입니다. 현재 세계무역기구(WTO)의 새로운 라운드인 도하의제(Doha Agenda)에 대한 협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농업분야와 함께 교육, 문화가 포함된 서비스 분야의 협상안을 3월말까지 제출토록 시한이 잡혀있어, 전교조 등 38개 시민사회단체로 이뤄진 'WTO 교육개방 음모 분쇄를 위한 공동투쟁본부(이하 공투본)'가 각계 시민사회단체와 더불어 교육개방 저지를 위한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3월 13일 교육개방 및 서비스협상에 반대하는 국제연대행동의 날에 이어 3월 15일에는 WTO 교육개방음모분쇄와 교육공공성쟁취를 위한 범국민대회를 개최할 예정입니다. 오늘은 잘 알려진 르완다의 비극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

아프리카 중앙 키부호수 옆에 위치한 조그마한 나라 르완다. 국토의 대부분이 고산지대여서 경작지는 국토의 40%정도이고 경제는 낙후되어 있어 90%이상이 농업을 차지하고 있고, 르완다 인구의 10%가 투치(Tutsi)족이며 후투(Hutu)족이 90%정도를 차지하고 있고, 소수민족으로 트와족이 있습니다.

15세기경 유목민족이던 투치족이 남하하여 후투족을 지배하는 왕국을 세웠습니다. 이후 19세기말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르안다 부룬디(르완다와 부룬디의 통합) 식민지로 편입되었다가 1차 세계대전 이후 1919년부터 르완다 지역은 벨기에가 위임통치를 하게됩니다. 1925년 통치기본법이 시행됨에 따라 국왕 및 추장에 의한 전통적 지배체제가 근대화되었지만, 독일이나 벨기에는 모두 르완다의 군주제도와 지배계층인 소수 민족 투치족의 지배를 그대로 유지하였습니다. 효과적인 식민통치를 위해 투치족과 후투족을 차별하는 정책을 실시하여 투치족을 우대하고, 그들을 교육시켜 식민 통치의 말단 관료 집단으로 삼은 것입니다. 투치족은 1959년 후투족의 폭동전까지는 농업에 필요한 관개지역의 대부분을 소유했으며, 추장의 95퍼센트, 관료의 88퍼센트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르완다는 제2차 세계대전 후 1946년에는 벨기에의 신탁통치령으로 바뀌었다가 1959년 국왕의 사망 이후 후투족의 폭동으로 투치족 약 8만 명이 국외로 빠져나갔으며, 마지막 군주인 키게리 1세도 망명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1961년 6월, 유엔신탁통치이사회의 감시로 실시된 주민투표와 총선거에서 후투족의 정당인 공화민주운동당(MDR: Movement Democratic Republic)이 승리하여 자치정부를 수립하였고 1962년 유엔의 신탁통치가 종결되어 르완다공화국으로 독립하게되었습니다. 이후 1973년 후투족 출신의 주베날 하비야리마나(J. Habyarimana)의 쿠데타로 국가개발혁명운동이 단일정당이 되어 1당 지배를 1980년대말까지 하게됩니다.

한편, 1959년 국왕의 사망이후 후투족과 투치족간의 경쟁은 계속되어 1963년에는 강제추방된 부룬디의 투치족이 르완다를 기습공격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르완다 내부의 투치족 1만 명을 살해하고, 10만명의 난민이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우간다 및 르완다 북부지역에 분포하였던 투치족은 르완다 애국전선(Rwandese Patriotic Front : RPF)을 결성하였고, 1990년부터 분쟁은 본격화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유엔이 개입하여 1993년 아루샤 평화협정을 성사시켜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과도정부를 구성하기로 하는 등 사태의 진정기미가 보였지만, 하비야리마나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후투족 강경파들이 1994년 대통령이 탑승한 비행기를 로켓포로 공격하여 사망하자 걷잡을 수 없는 대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임시정부는 자이레(현재 콩고)로 피신하였고, 아루샤협정이행을 감시하기 위한 유엔 르완다 지원단을 포함하여 정부인사들이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르완다 애국전선은 이 혼란을 계기로 다시 르완다 진입을 시작하였습니다. 정부군, 대통령 경호대 및 정부측 민병대들에 의해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대량학살이 자행되었으며, 르완다 애국전선이 점차 점령지역을 확대하자 투치족의 보복을 두려워한 후투족이 1994년 4월 8일 하루동안 28만명의 난민들이 탄자니아로 피난하였습니다. 르완다 애국전선은 수도 키갈리를 포함하여 르완다 지역을 점령하고 민족단결정부(Government of National Unity)를 선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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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의 원인 : 빈곤과 환경파괴가 주범이었다

1959년 설립된 후투족의 혁명정부는 사회주의정책을 실시하면서 부모의 땅을 자식들이 동등하게 분배받는 토지보유제를 실시했습니다. 하지만 북부의 부유한 후투족들은 이를 이용하여 토지소유를 더욱 넓혔고, 농민들은 더 보잘 것 없는 땅, 가파르고 산성화가 진행된 땅으로 내몰렸습니다. 작물들은 잘 자라지 못한 데다 폭발적인 인구증가는 토지의 분배가 더욱 작은 지분으로 줄어드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부족한 경지를 늘리기 위해 야산을 계단식 농경지로 개발하였고, 이로 인하여 홍수가 났을 때 산이 담당해야할 조절기능이 전혀 발휘되지 못하고, 오히려 거대한 양의 토사가 흘러내려 피해를 더 심각하게 만들었습니다. 1989년에 르완다에서 경작가능한 땅의 50%는 경사가 10도 이상이었는데, 1990년까지 침식으로 인해 해마다 8천헥타르의 땅이 씻겨 나갔고(이 면적에서는 4만명의 식량이 생산됩니다), 계속되는 경작으로 토지는 더욱 황폐해지면서 작물생산은 격감하였습니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농촌 사정은 더욱 악화되었고 특히 대부분의 가난한 농부들이 살고 있던 남부에서는 후투족 정권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어 갔습니다, 이러한 후투족의 분열을 활용하고자 했던 투치족의 공세와 더불어 1980년대 세계 커피시장의 붕괴로 르완다의 커피 수출단가가 1970년대에 일인당 60달러이던 것이 1991년에는 13달러로 추락하는 등, 1990년대 르완다의 농민들은 빈곤과 전쟁으로부터 협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속되는 정치불안과 더불어 책임과 장기적 정책이 없는 환경·토지정책은 고질적인 빈곤을 더욱 심화시켰으며 사회불안의 골은 깊어져만 갔던 것입니다(환경연합 발행 "함께 사는길" 1월호 참조). 즉 지속가능하지 못한 환경보전이 빈곤을 가중시켰으며, 이로 인한 사회불안을 각 정치세력이 이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엔,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대량학살의 광기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유엔의 조사에 따르면 대량학살이 있었던 1994년 9월, 인구 790만명이 500만명으로 감소되었고, 80∼100만명이 희생당했으며, 200만명의 난민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우리가 작년 월드컵때 광화문에 모인 인원이 몇 달만에 사망한 것입니다!). 유엔은 대량학살 이후 대규모 긴급구호와 기금모금을 통해 난민들의 귀향사업과 난민촌지원사업을 실시하였는데, 1994년 당시 7억 6,200만불이 인도적 지원에 사용되었습니다.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에 따르면 2003년 3월 현재 탄자니아에는 1000여명 정도의 르완다 난민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들은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과 탄자니아 정부의 협의아래 르완다 이외의 지역을 포함하여 재정착할 수 있을때까지 난민촌에 남을 수 있다고 밝혔고, 유엔 세계식량기구(World Food Programme: WFP)는 지난달부터 두달간 갱생프로그램(rehabilitation programme)에 들어간 사람들에 대하여 1,493톤의 식량을 지원키로 르완다 화해와 통합을 위한 위원회(the national commission for unity and reconciliation in Rwanda)와 합의하였습니다.

한편,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1995년 르완다 대량학살에 대한 국제형사특별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Rwanda: ICTR)를 만들어 책임자 기소와 처벌을 시작하여 50명이 넘는 관련자를 체포하여 현재 13건이 종료되었고 62건이 아직 재판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대량학살관련 행위자는 4백여명으로 추정되었지만, 군 고위인사 등 해외로 빠져나간 사람들이 있는 등 활동의 한계로 인하여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이를 계기로 국제형사재판소; International Criminal Court: ICC)의 창설논의가 활성화 되었습니다). 분쟁의 후유증은 이외에도 물과 식량의 부족, 생활시설들의 결여 등 보건/의료 분야의 어려움과 더불어 말라리아, 에이즈, HIV등 질병도 르완다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유엔이 추정 집계한 전세계의 에이즈 환자는 2000년말 현재 3610만명인데, 전체 환자중 70%가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지역에 살고있습니다. 르완다의 경우 아홉명중 한명꼴로 HIV(AIDS : Acquired Immunodeficiency Syndrome를 유발하는 바이러스) 감염자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서구 제국주의 역사는 유죄 : 피흘리는 인류의 고향 아프리카

서구의 노예무역과 식민지배로 피흘렸던 아프리카는 여전히 그 후유증으로 고통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를 분할 통치했던 서구는 식민지 지배를 쉽게 하기 위해 종족간의 경쟁, 적대감 등을 이용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과정에서 서구 열강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그어놓은 국경선은 다양한 종족이 분포하고 있는 아프리카에서 통합된 발전을 꾀하기 어렵게 만들었으며, 균형잡힌 발전계획과 정책을 세우기에는 식민모국과의 관계 속에서 여전히 불균형적인 산업구조가 지속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냉전 하에서 미국과 소련은 영향력 확장을 위해 종족간의 경쟁을 이용하여, 아프리카 대륙은 사분오열되어 장기적인 개발전망이 불투명하게 된 것입니다.

1993년 아루샤 휴전협정이후 유엔은 2,500명의 평화유지군을 르완다로 파견하였는데, 평화유지군은 대량학살이 발생하기 3개월 전부터 대량학살의 조짐에 대한 경고와 실질적인 지원요청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출했었으나 서구와 미국은 이를 무시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1991년 소말리아에서 발생한 무력분쟁에 대해 미국은 1992년 12월 다국적군을 구성하여 안정적 식량보급을 비롯한 구호 및 내전 종식을 위한 소말리아 내 평화유지활동에 들어갔는데, 소말리아에는 미국계 석유회사가 네 곳을 석유 시추 중이었습니다. 탈냉전이후 철저한 이해관계에 따른 선·택·적·인·도·적·개입의 한 예입니다.

식민지 정책으로 인하여 산업발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까닭에 아프리카 대부분의 국가들은 많은 외채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자국민의 보건/ 의료/ 교육 등에 써야될 예산이 외채의 이자의 연체료를 물기도 벅찰 지경입니다(이 분야의 예산보다 연체료 등에 대한 지불이 평균 3배에 이르고 있습니다). 르완다 역시 1995년 현재 1인당 소득 310달러(미국의 1.5%)에 1인당 외채가 122달러에 이르고 있습니다. G8, 다보스 포럼 등에서는 개발원조를 강조하지만 정작 말잔치에 불과하고 2002년에 열린 유엔 개발원조재원회의에서도 유엔 밀레니엄 정상회의에서 합의한 바 있는 선진국 GNP의 0.7% 지원은 미국 등의 반대로 삭제되었습니다(한국의 개발원조 규모도 GDP의 0.1%에 못 미치고 있습니다).

빈곤타파, 지속가능한 개발, 질병극복 등 유엔이 설정한 밀레니엄 목표는 새로운 세기에 지구촌이 나아가야할 방향입니다. 이것은 전쟁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전쟁은 이를 재생산할 뿐입니다. 서구 선진국들은 최빈국들에 대하여 책임있는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자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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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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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국제연대위원회입니다.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공격이 고조되는 가운데 최근 9.11테러 희생자 가족모임인 평화로운 내일(September 11 Families for Peaceful Tomorrows) 소속 회원들이 이라크를 방문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지난 1991년 걸프전 당시 오폭으로 어린이 52명, 여성 261명 등 403명이 희생된 알이미리야지역을 방문하여, 지역 희생자 가족들과 만남을 가졌습니다. 이 지역은 미국이 군사작전기지로 오해하여 폭탄을 투하했던 곳으로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의 뜻으로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편견을 버리고,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들이 같은 이유로 또다시 이라크를 방문하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은 아시아 분쟁지역 중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을 살펴보겠습니다.

인도네시아의 아체(Aceh)분리운동

7세기부터 14세기경까지 인도네시아의 주요지역을 장악했던 슈리비자야 왕국이 인도네시아지역의 통합의 시초였습니다. 슈리비자야왕국은 각 지역 부족의 자치를 인정하면서 무역권을 독점하여 이를 통해 모든 부족을 다스렸습니다. 그후 인도네시아지역은 영국, 네델란드, 포르투갈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습니다. 아체지역은 인구 4백만명의 수마트라 서북쪽에 위치한 자치주입니다. 원래 이슬람 율법 국가를 표방한 독립국으로, 네델란드의 식민지 하에서도 강력하게 독립투쟁을 벌였던 지역입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네덜란드는 종족 및 지역별로 독립을 약속하면서 인도네시아 연방정부와 협상을 하였는데, 이 통합과정에서 아체지역은 자치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바족(전체 인구의 45%)을 중심으로 한 인도네시아에 편입됨으로써 독립의 꿈은 무산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자치주로의 승격을 요구해온 아체지역주민들의 반발로 7년여의 분쟁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분쟁의 결과로 아체지역은 이슬람율법과 전통관습 및 교육에 대한 자율권을 획득하는 특별지구로 지정되었지만, 1966년 수하르또가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강한 통합정책과 경제개발을 추진하면서 갈등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아체지역의 아룬(Arun)지방의 액화천연가스(LNG)는 인도네시아의 심각한 경제위기를 타개할 수 있었던 계기였습니다. 1977년 생산에 들어간 아룬유전으로부터 얻은 연평균 21억 달러의 국가수익은 1980년대 연평균 7%의 경제성장을 이룩하도록 한 발판이 되었으며, 수하르또를 '개발의 아버지'로 추앙받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경제개발과정에서 아체지역주민들은 소외되었습니다. 아체지역의 개발은 1975년 이래로 중앙정부의 주도아래 이 지역에 이주시키기 시작한 자바인들을 생산현장에 투입시켰고(1991년까지의 자바 이주민 숫자는 당시 아체 인구의 약 3%인 10만 5천명이었음), 이 지역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수익에 비해 아체지역에 돌아오는 것은 극히 미비하였습니다. 1997년의 경우 약 26억 달러(30조 루삐아)의 외화를 벌여들였지만, 아체주에 할당된 연간 예산은 수입의 0.34 %인 약 1021억 루삐아였습니다. 또한 아체지방의 산림자원이 주면적의 3/4인 413만 ha 산림이 그 동안 19개의 수하르또 측근 기업에 의해 무차별 벌목되어, 산간지방에서 얻은 수확물로 생계를 유지해오던 지역주민들에게 많은 타격이 되었으며, 1995년과 1996년에 약 1000억 루삐아 이상의 재산손실을 가져온 대홍수의 원인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경제적 수탈로 인하여 1976년 자유아체독립운동(GAM) 단체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무장투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하여 낮에는 정부군의 반군공격, 밤에는 아체 독립주의자들의 습격 등 살육전이 반복·지속되고 있습니다. 무장투쟁과 더불어 1998년 자유아체독립운동은 아체 전체 인구의 40%에 해당하는 약 150만 명의 주민이 모여 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요구하는 집회를 개최한데 이어 1999년 자유아체독립운동은 아체주의 수도 반다아체에서 대규모 평화집회를 열었습니다. 1999년 집회에서는 하루에만 100명이 넘는 비무장 민간인들이 죽고 수백명이 총상을 입는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인권유린은 수하르또 시절부터 비롯되었는데, 1990년 7월 붉은 그물작전(OJM: Operasi Jaring Merah)으로 명명된 토벌로 아체지역의 민간인에 대한 살인, 방화, 강간 등 인권유린은 극심하였으며, 특히 1995년 수하르또 사위인 쁘라보오의 특전사(꼬빠수스) 사령관 재임 시에 파견된 예하 부대의 만행은 극에 달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만행으로 1976년부터 작년까지 12만명이 숨졌고, 폭력의 희생자와 실종자를 위한 아체위원회(The Aceh Commission for Disappearances and victims of violence)에 의하면 2002년 1월부터 11월 동안 1,307명이 살해되었고 1,806명이 고문당했으며, 1,186명이 체포 또는 자의적 구금을 당하였으며, 몇몇 시체로 발견된 377건의 실종사고와 46명의 여성들이 성추행을 당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위원회에 의하면 이 통계는 90년대 말 이후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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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아체지역에 대하여 분쟁종식을 위한 평화협정이 2002년 12월에 체결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 정부와 자유아체운동(GAM) 대표들은 ▲ 적대관계 청산, ▲ GAM 무장해제, ▲ 정부군 철수, ▲ 자치선거 실시, ▲ 유엔 감독관 파견 등에 합의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평화협정 체결 즉시 모든 적대행위를 중단하며, 자유아체운동은 모든 무기를 국제 감시인단이 관할하는 병영에 넘기고, 공수부대 및 경찰기동여단을 포함한 대다수 정부군을 아체에서 철수시키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체지역은 오는 2004년 자유롭고 공정한 지방선거를 실시해 중앙정부로부터 광범위한 자치권을 넘겨받고, 공동안보위원회를 설립해 치안상황을 감시하기로 하였습니다. 협정의 체결에는 스위스 인권단체 앙리 뒤낭 센터 등 국제사회의 노력도 기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12월 9일의 평화협정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다시 폭력사태가 발생하는 등 갈등과 긴장은 전혀 사라지고 있지 않습니다. 폭력의 희생자와 실종자를 위한 아체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1월 9일 이 평화협정을 지지하는 평화집회가 개최되었는데, 대부분의 시민사회단체들은 인도네시아 치안당국의 제지로 집회장소에 도착하지 못하였고, 각 지역에서 집회장소로 가기를 원하는 현지 주민들에 대하여 인도네시아 군대가 발포하여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또한 수명의 주민들이 구타로 인한 심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들 부상자는 대부분 20대로서 17세 청소년도 포함되었습니다. 평화협정에는 적대행위 중지와 시민사회의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였지만, 인도네이사 정부는 평화적 대화보다는 여전히 군사적 접근을 취하고 있습니다.



필리핀 무슬림의 독립운동

필리핀 남부지역의 민다나오(Mindanao)와 술루(Sulu)지역은 원래 필리핀에 속하지 않는 독립된 이슬람국가였습니다. 한때 마닐라가 있는 루손(Luzon)섬까지 세력을 확대했던 이슬람 세력은 스페인의 통치가 시작된 16세기 중엽이후 필리핀 남부의 민다나오지역으로 이주하여 기독교로의 개종을 강요하는 식민통치에 끊임없이 대항하였습니다. 필리핀 남부 무슬림들에 대하여 스페인은 300여년에 걸쳐 정복을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이후 미국의 식민통치(1898-1946)에서도 기독교화와 필리핀 내로의 통합정책이 추진되었습니다. 미국은 무슬림 거주지에 많은 기독교인을 이주시켰는데, 이와 같은 정책은 필리핀인들의 우월함을 조장함과 동시에 무슬림에 대한 차별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여, 미국이 통치하던 1930년대부터 독자적인 국가수립의 요구가 제기되었습니다.

분리독립운동은 1960년대부터 본격화되었습니다. 이는 1950년대 이후 필리핀정부가 민다나오섬의 모로인(Moro 말레이-인도네시아 인종 그룹으로 민다나오와 술루 군도를 중심으로 하는 필리핀 남부지역에 거주하는 이슬람교도들을 일컫는 총칭) 거주지로 가톨릭교도인 필리핀인들을 대량 이주시켰기 때문인데, 이 정책을 실시하게 된 배경에는 루손섬의 토지문제가 있었습니다. 식민지시대부터 유지된 대토지소유제로 인하여 농민의 불만이 쌓였고, 농지개혁은 대지주계급에 의해 좌절되었습니다. 이러한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농민들을 민다나오섬으로 이주시켰지만, 이지역은 공동체적 토지 소유제도가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필리핀인의 이주와 함께 근대적 소유권이 도입되면서 모로와 이주자 사이에는 토지 이용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는 분리독립운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특히 1971년 필리핀 정부군의 학살을 계기로 분쟁은 모로와 필리핀 정부의 대결로 확산되었습니다.

미수아리(Nur Misuari)가 이끄는 모로 민족 해방전선(MNLF : The Moro National Liberation Front)은 모 조직인 무슬렘독립운동(MIM)의 무장단체로써 리비아, 말레이시아,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등 회교권 국가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약 30년 동안의 무장투쟁 과정에서 정부군과 모로 민족해방전선측의 사망자는 1971부터 현재까지 12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1976년 리비아의 중재로 필리핀 정부와 모로 민족해방전선 간에 트리폴리 협정(Tripoli Agreement)이 체결되어 이슬람 지역 14개주와 9개시가 '민다나오 자치지역(ARMM : Autonomous Region in Muslim Mindanao)'으로 지정되었는데, 주민투표 결과 결국 4개주만이 자치지역에 포함되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 위축되던 분리독립운동세력은 투쟁방식과 관련한 노선갈등으로 1984년 강경파 하심(Salamat Hashim)이 이끄는 1만∼1만 5천명 규모의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LF : Moro Islamic Liberation Front)이 형성되었고, 1천 5백명 정도의 극렬 무장단체인 아부사야프(Abu Sayyaf) 집단도 등장하였습니다.

필리핀 무슬림들의 분리 독립운동에 대한 평화적 해결모색은 1986년 필리핀 2월 민중혁명(Peoples power)이후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분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1996년 9월 2일 마닐라의 대통령궁에서 라모스 대통령과 모로 민족해방전선(MNLF)의 미수아리 의장은 내전을 종식시키고 민다나오 지역의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평화와 개발을 위한 남부 필리핀 평의회(The Southern Philippine Council for Peace and Development, SPCPD)구성 등 평화 협정을 체결하였습니다. 평화협정의 주요 내용은 ▲ `평화 및 개발 특별지역' 지정(1976년 트리폴리 협정에 명시된 민다나오 회교지역 14개주와 9개시를 특별지역으로 선포), ▲ 평화와 개발을 관장할 한시 기구로써 `남부 필리핀 위원회' 설치, ▲ 일부 모로 민족해방전선 요원의 군경 전환, ▲ 지역 치안을 담당할 보안군 설치 등이었습니다. 한편 2001년에는 필리핀 정부와 이슬람 최대 반군단체인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LF)이 공식 휴전협약에 서명했습니다. 말레이시아의 중재로 이뤄진 휴전협정은 1996년 모로민족해방전선(MNLF)과 체결한 것과 마찬가지로 남부 필리핀에서 어느 정도의 자치를 인정한다는 합의를 구체화하였으며, 휴전 이행, 이슬람지역과의 관계정상화 방안, 보안, 사면 문제 등이 휴전협정의 주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슬람세력 중 극렬 무장단체인 아부사야프(Abu Sayyaf)는 아직 무장투쟁을 지속하고 있고, 폭탄테러와 군대의 소탕작전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지금까지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2002년 10월에는 아부사야프를 추적하던 필리핀 정부군이 반군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아 7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했고, 12월에는 필리핀 남부 마긴다나오주의 다투 피앙시 시장이 폭탄테러를 당했으며, 올해 1월에도 벌어진 정부군과 이슬람 분리주의자들간의 충돌로 최소한 반군 28명이 숨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더욱이 필리핀의 경우 '테러와의 전쟁'을 빌미로 필리핀에 다시 주둔하기 시작한 미군이 있어 이 지역에서의 군사적 긴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의 분리독립운동은 종교와 민족(종족)간의 갈등으로 볼 수 있지만, 빈곤과 소외 등 경제적인 원인과 무장투쟁과 진압과정에서 자행되었던 인권유린, 정치적 탄압이 더욱 구체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구의 식민지쟁탈로 인하여 자의적인 영토분할과 억압적인 식민통치는 분쟁의 씨앗을 만들었으며, 독립과정에서 지역주민들의 요구가 좌절되고, 독재정치에 의한 탄압은 분쟁을 더욱 키웠습니다.

최근 양 지역 모두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분쟁을 종식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폭력은 악순환되고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 지역들에 진정한 평화가 정착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단지, 국제사회가 함께 마음을 기울인 노력으로 마련한 평화협정을 바탕으로 평화가 정착될 수 있기 위한 국제사회의 감시와, 지원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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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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