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국제연대위원회입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언론보도도 치열합니다. 한가지 주목할 점은 과거 걸프전 때만 하더라도 CNN방송을 여과없이 통역방송을 하였는데, 이번에는 카타르에서 보내는 아랍위성방송인 알-자지라(al-jazeerah)의 보도내용을 별도로 방송하여 정보에 대한 접근에 많은 개선이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인터넷이 큰 역할을 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이를 바탕으로 한 지구촌에서 일고 있는 한결같은 반전열풍의 결과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반전열기에도 불구하고 지난 3월 26일부터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회의에서 뉴욕주재 선준영 한국 유엔대사가 이라크 침공에 대하여 '불가피한 조치'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등 망언을 하여 물의를 빚고 있습니다. 또한 현재 제네바에서 열리고 있는 유엔 제 59차 인권위원회도 그다지 '인권'적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27일 이라크전쟁의 결과로 인한 인권과 인도적 상황을 논의하기 위한 특별회의가 상정되었지만, 한국을 포함하여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해 온 프랑스와 독일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은 지난 1999년 코소보사태 당시 인권위가 특별회의를 개최했던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스스로 '직무유기'를 하지 말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발칸반도의 분쟁 중 코소보(Kosovo)분쟁을 알아봅니다.

발칸반도 제국들의 흥망성쇄 : 유고슬라비아의 붕괴와 분쟁의 발발

구유고연방은 1980년 티토의 사망과 동유럽국가들의 민주화 물결 속에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를 선두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등 4개 공화국이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1991년 슬로베니아가 무력충돌 끝에 독립한 이후, 크로아티아지역에서도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간의 분쟁이 발생하였고, 유럽의 경제제재 압력으로 1992년 크로아티아도 독립하였습니다. 크로아티아는 유럽의 게르만 계통 인종이고 종교도 카톨릭이며, 구유고연방이전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지역입니다.

한편 이러한 독립에 자극받은 보스니아공화국도 1992년 독립투표를 통하여 독립선언을 하였습니다. 4백여만명의 공화국인구는 회교도(44%), 크로아티아계(17%), 세르비아계(33%)로 구성되어 있는보스니아의 독립에 대하여 세르비아계가 강력히 반발하고,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가 자민족 보호를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면서부터 분쟁이 심화되었습니다. 세르비아 민병대의 '인종청소'가 극에 달하자 무역봉쇄, 해외자산 동결조치에 이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공습이 시작되었습니다. 엄청난 폭격 이후 수많은 평화협상의 진행으로 회교-크로아티아 연방이 51%의 영토를 갖고 49%를 세르비아계 공화국이 갖는 영토분할을 통해 20만명의 사망자를 내고 3백여 만명의 난민을 양산한 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이 1995년 독립하였습니다.



배타적 민족주의에 의한 탄압과 저항의 폭발

코소보지역은 현재 알바니아인의 조상인 일리리아인(Illyrians)들이 살았으며, 오스만 투르크의 침입이전에는 세르비아인들이 이주하여 세르비아 왕국을 건설하고 그리스 정교의 문화를 꽃피우는 세르비아인들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였습니다. 1300년대 오스만 투르크의 진출로 이슬람으로 개종한 알바니아인들이 코소보지역으로 이주하였고 19세기에 알바니아인들의 독립투쟁에도 불구하고 1912년 1차 발칸전쟁의 결과로 코소보지역은 세르비아세력에게 넘어갑니다. 이로 인하여 1940년대까지 약 50만의 알바니아인들이 터키 등지로 쫓겨났고, 약 18,000세대의 세르비아인들이 이주하였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연방의 탄생으로 코소보지역은 구유고연방의 세르비아공화국에 편입되게 됩니다.

티토의 민족융화정책에 힘입어 1974년 자치를 인정받아 알바니아어의 사용과 대학설립 등이 가능해졌습니다. 정치적 권리의 신장에도 불구하고, 코소보지역의 비옥한 토지와 금, 은, 석탄 등 풍부한 자원은 이 지역을 마치 식민지로 인식하게 되는 배경이 되어 연방정부에 대한 알바니아인들의 반감은 더욱 증폭되었습니다. 1981년에는 완전한 공화국지위를 요구하는 알바니아인들의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여 수천명의 대학생들이 체포되었고 수만명이 감옥에 갇히는 등, 코소보지역과 알바니아인들에 대한 탄압은 갈등의 씨앗을 심고있었습니다.

1980년대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알바니아계 학생시위와 1988년 대규모 시위와 1989년의 광부노동자들의 파업 등에 참가했던 785,000여명이 수백킬로미터를 맨발로 걸어 감옥에 끌려 가는 등 알바니아인들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는 가운데, 1989년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은 '대세르비아 건설'이라는 민족주의적 기치아래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하였습니다.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 1993)에 따르면 그 결과는 이렇습니다. 알바니아어의 사용을 금지하였고, 판사들은 전부 세르비아인들로 교체되었으며, 오직 알바니아인들의 일간지와 텔레비젼, 라디오 방송이 금지되었고, 알바니아인들에게는 대학과 도서관 출입이 금지되었으며, 23,000명의 알바니아 학생들은 그들의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습니다. 152,000명의 알바니아인들이 직장에서 쫓겨났고 36,000명의 세르비아인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으며, 주립 아파트에 거주하던 알바니아인들은 그들의 권리를 상실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많은 알바니아인들이 서유럽으로 건너가 난민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수가 1990-1995년 사이에 400,000명(코소보 전체인구는 약 200만이며 90%가 알바니아인입니다)에 달했습니다.

한편 세르비아계 난민들을 코소보지역에 정착시키면서 탄압과 갈등이 더해갔습니다. 코소보는 인구밀도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크로아티아계 세르비아인들이 이미 15,810명이 정착(1995년)하는 등 밀로셰비치는 적어도 100,000명의 세르비아인들을 이주시켰습니다. 밀로셰비치의 코소보 '식민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문화적 역사적 유산들의 청산까지 포함되었습니다. 유네스코의 보호아래 있는 유물들이 박물관에서 철거되었고, 대신 세르비이아계의 정통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와 같은 세르비아인들의 횡포에 맞서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은 1991년 독립헌법 채택에 이어 1992년 마침내 코소보공화국을 선포하였고, 알바니아계와 세르비아계 간의 빈번한 무력충돌이 발생하였습니다. 1995년 보스니아 분쟁의 평화협정에도 코소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등 국제사회로부터도 소외되자 1993년에 창설된 코소보해방군(Kosovo Liberation Army: KLA)을 통하여 1996년부터 무장투쟁을 본격화하였으며, 이에 대해 세르비아도 코소보 해방군에 대한 전면적인 소탕작전을 감행하였습니다. 충돌이 계속되던 중 1998년 2월말 코소보에서 세르비아공화국 경찰이 살해당하는 사건을 계기로 분쟁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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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토의 공습과 억지 평화의 한계 : 또 다시 고조되는 긴장

사태가 확대되자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은 군사개입 및 경제제재의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대화를 촉구하였지만, 신유고연방은 국제사회의 개입 및 코소보의 분리독립을 거부하면서 공세를 강화하고, 대대적인 '인종청소'를 하였습니다. 100여만명의 알바니아인들이 실향민이 되거나 난민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유엔은 무기금수 조치를 취하고, 유럽연합 등과 함께 평화협상을 진행하였지만 1999년 프랑스 랑부예에서 열린 코소보평화협상이 결렬된 이후 미국특사의 협상도 실패하였습니다. 러시아와 중국은 유엔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함을 강조하면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의한 군사개입을 반대하였지만, 미국 등 서방국가들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의 표결이 무산될 것을 우려하여 유엔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 나토를 통하여 공습을 개시하였습니다. 공습과 함께 계속된 협상을 통해 즉각적인 군사행동중단, 군, 경찰을 포함한 준군사조직의 철수, 유엔 평화유지군파견 및 임시정부 수립 등을 내용으로 한 협상안을 결국 유고가 받아들여 사태는 일단락되었습니다.

이른바 인도적 개입(humanitarian intervention)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미봉책에 불과하였습니다. 나토의 무차별 공습과 오폭으로 인하여 엄청난 민간인 피해가 발생하였고, 정치적으로도 뚜렷한 해결을 보지 못한채 유엔의 관장하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차후 코소보의 지위를 논의한다는 선에서 그쳐 갈등의 핵심부분은 그대로 남겨진 상태였습니다. 현재 코소보는 2001년 총선을 실시한 이후 2002년 이브라힘 루고바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상당한 자치권이 부여되었지만, 유엔 행정기구가 사법, 국방, 외교부문을 여전히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2003년 2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라는 국가연합의 출범한 가운데, 유엔 코소보행정기구의 대표는 아직 코소보의 최종 지위를 협의하기에는 이르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최종적으로 독립을 원하는 많은 코소보내 알바니아인들의 반발이 거세 코소보문제는 새롭게 긴장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유엔 행정기구는 '최종 지위'를 말하기에 앞서 지켜야할 원칙들을 제시하였는데, 세르비아 난민들의 귀환, 소수자를 위한 운동의 자유, 베오그라드(세르비아 수도)와의 대화, 민주적 기구들의 형성과 사법체계의 확립 등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세르비아 난민의 경우 약 200,000명의 난민중 단지 6,000명이 떠났을 뿐이며, '인종청소'를 벌였던 베오그라드와 대화를 시작한다는 것 역시 어려운 문제입니다. 또한 코소보 지역의 세르비아인들은 알바니아인들의 독립논의에 맞서 코소보 지역은 세르비아-몬테네그로 연방에 귀속되어야 하며, 자신들도 알바니아인들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나서 갈등이 급속히 표면화되고 있습니다.



오래 지속되는 재앙

유엔 전쟁범죄조사단은 2천여구의 유해를 발굴한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나토의 공습이후 자행된 세르비아인들의 '인종청소'는 유럽 안보 협력기구(OSCE)가 발표한 보고서에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1999년에 발간된 이 보고서에 의하면 마을 주민들에게 공포감 조성을 위해 어린이를 의도적으로 살해하는가 하면, 경찰관을 포함한 4명이 임산부를 성폭행을 가하여 태아가 유산되거나 유방이 절단당하고, 심지어 열차 내에서 부모가 보는 앞에서 어린이들이 사지가 절단되는 사건들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유엔아동기금(UNICEF)과 유엔난민청, 유럽안보협력기구(OSCE)가 2002년에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보스니아와 코소보, 마케도니아 주둔 평화유지군이 매춘 여성들의 가장 큰 고객이며 매춘을 목적으로한 인신매매가 기승을 부려 1997년 17만5천여명의 여성이 중동부 유럽과 러시아에서 매매됐으며 이중 3분의 1이 18세 미만 소녀였습니다.

유엔환경계획(UNEP)조사단이 2001년에 밝힌 바에 따르면, 나토의 공습을 받은 코소보 8개 지역에서 방사능 오염 징후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미국이 공습당시 열화우라늄탄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열화우라늄탄은 원자력발전소나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원료를 위해 천연 우라늄을 농축하는 과정에서 생긴 우라늄찌꺼기로 만든 무기입니다. 우라늄 파편이 사람 몸 속에 들어가는 경우 납처럼 체내에 축적되어 각종 암을 발생시키고, 유전자를 변형시켜 기형아를 출산하거나 불임 내지 조산하게 하는 등 인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더욱이 우라늄 파편은 수 킬로미터까지 날아가 주변 지역을 방사능으로 오염시키고, 토양은 물론 지표수와 지하수까지 오염시키게 되어 그 피해가 심각합니다.

지난 걸프전의 참상보고에서 열화우라늄탄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어린이의 사진이 공개되기도 하였는데, 이와 같은 열화우라늄탄의 사용은 지난 걸프전에도 사용되어 이른바 걸프전 증후군을 일으켰는데, 코소보 공습도 마찬가지로 미군이 열화우라늄탄을 사용한 보스니아나 코소보에서 복무했던 이탈리아, 벨기에, 네델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체코의 병사 18명이 백혈병을 비롯한 암으로 사망했으며, 프랑스 병사 4명과 벨기에 병사 4명은 백혈병에 걸리는 등 '발칸증후군'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번 이라크 침공에도 이와 같은 열화우라늄탄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걸프전과 코소보 공습에서 충분한 실험으로 더욱 '명중률'이 높아진 미사일과 함께. 오래 지속되는 재앙,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전쟁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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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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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국제연대위원회입니다. 미국과 영국, 스페인 3국은 17일 이라크 무장해제를 위한 군사행동을 승인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채택 노력을 포기하고 결의안을 철회하였습니다. 전쟁이 임박한 것 같습니다. 유례없었던 지구촌 시민사회의 반전노력에도 불구하고, 국제법을 위반하면서까지 그들은 그들만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승인 없는 무력사용은 국제법위반입니다). 또한 지구촌의 다양한 문제를 가장 포괄적으로 논의하고 다룰 수 있는 유엔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오늘은 갈등으로 유엔의 중재노력이 실패했던 나라 소말리아를 찾아보겠습니다.

독재정권의 성립

아프리카 대륙 동쪽 끝에 위치한 소말리아 민주공화국(Somalia Democratic Republic)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 가운데 하나이며(미국이 1인당 GDP : 36,158불인 반면 소말리아는 1인당 600불에 불과합니다), 목축과 농경이 경제의 큰 비중을 차지하며 경제의 상당부분은 원조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국가들 중에서 드물게 거의 단일민족국가를 유지하고 있으며, 소말리아족이 전국에 걸쳐 거주고, 같은 언어와 종교(이슬람)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말리아는 10세기경부터 아라비아 반도의 이슬람교도가 들어와 해안 각지에 토후국을 건설하였고, 19세기에 들어와서 아덴만 연안은 오스만투르크에게 지배되었고, 인도양 연안은 무스카트 오만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수에즈운하의 개통 이후 영국은 아덴만 연안을 영국령 소말릴란드로 만들고 내륙은 영국령 에티오피아에 편입시켰고(1886년), 이탈리아는 인도양 연안지역을 차지하고(1989년) 서부는 프랑스가 점령하면서 3등분되었습니다. 이후 영국령을 제외한 지역은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에 편입되었습니다(1936년).

제2차 세계대전 중 현재의 소말리아지역 전체가 영국군의 군정을 받았고, 1950년부터 과거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는 유엔의 신탁통치(이탈리아가 통치)를 실시한 이후, 1960년 영국령 소말릴란드의 독립과 함께 같은 해 7월 1일 합병, 유럽식 의회민주주의를 도입한 소말리아 공화국이라는 통일국가가 수립되었습니다. 독립 후에는 지부티지역, 에티오피아 동부, 케냐 북동부까지 소말리족이 거주하는 지역은 통합되어야 한다는 정책(Pan-Somalism)에 따라 에티오피아 동부에 대해서는 특히 국경의 새로운 확정과 그에 따른 영토의 반환을 강경하게 요구하고, 1964년 초부터 양국간에 교전이 있었습니다.

1969년 셰르마르케 대통령이 암살된 이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모하메드 시아드 바레(Mohamed Siad Barre) 장군의 군사정권이 수립되어 최고혁명평의회가 실권을 장악, 국명을 소말리아 민주공화국으로 개정하였습니다. 사회주의 정책을 표방한 바레정권은 소수자와 여성의 지위향상과 같은 문화적 측면과 건강, 교육 등 전반적인 사회 기본시설의 근대화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1974년 범소말리아주의(Pan-Somalism)에 따른 에티오피아와의 전쟁 과정에서 에티오피아를 지원한 소련에 반발하여 1980년대에는 서방세력으로부터 개발원조와 군사적 원조를 받았습니다. 이후 미국의 원조를 받아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을 계속하여 냉전시대의 대리전을 수행하였습니다. 이처럼 바레정권은 에티오피아와의 전쟁비용 지출과 함께 국제통화기금(IMF)의 경제자유화정책의 실패, 부정부패와 친족등용주의(nepotism) 등으로 인하여 붕괴의 길을 겪게 되었습니다. 자기 부족 위주의 정책을 펼치며 22년간 장기집권하자 이에 반발하는 부족들이 각기 정치파벌을 형성하고 무장투쟁을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통일이후 남부지역 출신의 정권이 정치, 사회적 체계가 상이하였던 북부지방에 대한 차별정책과 이들이 겪은 상실감, 에티오피아 전쟁으로 인한 북부지역의 피해 등으로 인하여 소말리아 북부지역의 부족들과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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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파벌의 대두와 분쟁의 격화

파벌의 대두는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에서 피해가 심했던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먼저 형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78년 소말리아 청년연맹의 바레정권에 대한 저항이 실패로 돌아가자 리비아의 재정지원하에 에티오피아지역에서 소말리아구원민주전선(Somali Salvation Democratic Front: SSDF)이 만들어졌습니다, 1981년에는 북부지역에서 이샤크족이 중심이 되어 소말리아 민족운동(Somali National Movement: SNM)을 결성하여 게릴라전을 펼쳤으나, 1988년에 북서부의 두지역을 통제하다가 정부군에게 무자비하게 진압을 당했습니다. 중부 및 남부지방에서도 각 부족별로 파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는데, 1989년에는 오가덴부족(Ogadeni clan)으로 구성된 소말리아애국운동(Somali Patriotic Movement: SPM)이 결성되어 케냐와 인접한 남부지역에서 활동을 하였고, 1990년 하비야종족(Hawiye clans)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통일소말리아 회의(United Somali Congress: USC)는 중부지역에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파벌들의 무장투쟁으로 인하여 1990년에 이르면 수도 모가디슈(Mogadishu)를 포함한 많은 지역들이 이미 어떠한 세력으로부터도 통제가 불가능했으며, 결국 1991년 바레정권은 통일소말리아회의가 주도한 쿠데타로 붕괴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최대 파벌로 성장한 바레 정권 때 군장성을 지낸 무하마드 파라 아이디드(Mohamed Farah Aidid), 모하메드(이후 마디Mahdi파로 변경), 아토 등이 임시정부를 수립, 알로 마디 무하마드(Alo Mahdi Mohamed)를 임시대통령으로 세웠지만, 통일소말리아회의의 의장인 아이디드를 지지하는 세력과 무하마드를 지지하는 세력간의 전투가 발생하였고, 이는 대부분 이 두세력을 지지하는 지역무장세력들의 대립으로 확대되어 소말리아는 다시 무정부상태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1991년, 소말리아는 가뭄으로 인해 국민의 과반수가 넘는 500만명이 기아와 질병에 직면하여 죽음의 땅으로 변하고 수많은 난민이 발생하였습니다.



유엔의 실패와 머나먼 평화의 길

반군과의 무력충돌과 가뭄으로 인해 발생한 수백만 명의 난민과 기아문제에 대하여 유엔에서는 1992년 12월 소말리아 구호활동을 위한 결의안을 채택, 유엔평화유지활동단(United Nations Operation on Somalia: UNOSOM)을 설치하고, 6개의 유엔기관 및 30여개의 구호단체들이 인도적 지원을 수행하였고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정부상태의 소말리아에서 원조제공은 방해되었고, 강탈되거나 공격을 받기도 하여 구호품의 극히 일부분만이 필요한 사람에게 전달되어 국제사회의 인도적 지원이 시작된 후로도 하루에 3,000명이 기아로 사망하는 사태에 이르렀습니다. 유엔의 구호활동 보호를 위해 1992년 12월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 통합군(United Task Force: UNITAF)을 파견하고, 유엔사무총장은 소말리아 파벌들간의 평화협정을 추진하였지만, 최대 군벌세력인 아이디드파는 유엔에 의한 국민화해회의의 개최에 반대하고, 미군에 의한 무장해제 요구를 거부하여 무장충돌은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1993년 유엔은 인원이 대폭 증가된 2차 유엔평화유지활동단을 파견에도 불구하고 아이드파 군대에 의해 평화유지군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미군은 아이드파 주요 거점에 대한 폭격을 하였지만 소말리아 사태가 해결 조짐을 보이지 않자 결국 유엔평화유지활동단의 활동을 실패라고 규정하고 단계적인 철수를 시작하였습니다. 1995년 유엔군의 철수가 완료되자 아이디드파는 수도권을 장악하고 아이디드가 일방적으로 대통령 취임 및 신정부 수립을 선언하였으나 1996년 사망하였고, 정전을 모색하는 회의가 수 차례 개최되었지만 매번 각 파벌간의 이해 상충으로 결렬되었습니다.

북부지역이 소말리랜드(Somaliland)로 독립을 선언하였고, 북동지역은 푼랜드(Puntland)가 독립을 선언하고 정부기능을 수행하는 가운데 2000년 3월, 지방 파벌과 원로, 여성그룹들이 평화정착과 새로운 정부수립을 위해 모인 이후 과도의회(Transitional National Assembly: TNA)가 만들어졌습니다. 이 성과로 대통령과 수상의 임명이 이루어져 과도정부(Transitional National Government: TNG)가 출범하였습니다. 과도정부는 정부 직위를 각 부족에 골고루 분배하는 정책을 추구하는 등 현재의 무정부 상태 해소와 부족간 화합, 평화 정착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아직 아이디드파가 신정부를 인정하고 있지 않고, 소말리랜드의 독립요구도 거세며, 과도정부는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 충분한 경찰력 및 군대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현재 소말리아는 2002년부터 각 파벌들이 모여 케냐에서 평화협상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2002년 10월 소말리아 파벌들이 케냐에서 열리는 평화회의 기간중에 적대행위를 금지하는 협정을 체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3월 16일에도 9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당하는 등 폭력사태는 올해까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북부지방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던 소말리아랜드는 이 평화회담에 참가하지 않고 있습니다.



팔려 가는 아이들

수십년간의 분쟁과 무정부상태의 지속은 소말리아인들의 생활을 파탄시켰습니다. 유니세프(UNICEF)는 소말리아 어린이들이 세계에서 가장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다고 발표하기도 하였는데, 유엔에 따르면 현재 소말리아의 어린이들이 수천명이 유럽으로 '밀수출'되었다고 밝혔습니다. 절망적인 삶에 직면하여 소말리아에서 미래가 없는 많은 부모들이 그들의 아이들을 수천달러를 받고 국제 아동밀매조직에게 팔고 있으며 이들은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국가들로 '수출'된다고 합니다. 밀수업자들은 매달 수도 모가디슈로부터 250명 이상의 어린이들을 밀수출한다고 합니다. 2-3세의 유아를 포함하여 대부분 10대인 이 아동들은 복지혜택을 위한 사기에 이용당하기도 하며, 매춘과 노동에 상당수가 이용당하며, 국제 범죄조직의 손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분쟁이 해소된 지역에서 조차도 빈곤과 교육, 건강 등의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어 있어 이와 같은 '밀수출'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팔려간 아이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심각한 정체성의 혼돈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식수로 쓸 수 있는 물을 사용가능한 인구는 전체의 28%에 지나지 않으며, 교육은 13.8%만이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심각한 식량위기를 보였던 몇몇 지역은 다행히 강우량이 많아져 1995-2001년보다 식량생산이 80%가 증가한 최고의 풍년을 맞기도 했지만, 남부지역의 식량위기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국제사회의 평화유지 노력도 실패한 소말리아. 1992년 미국중심의 다국적군이 펼쳤던 작전명은 희망회복작전(Operation Restore Hope)였습니다. 이들에게 평화정착과 안정된 생활이라는 미래는 희망에 불과한 것일까요?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하는 미국이 내건 모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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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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