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다문화 시대에 적절히 대처하고 있는가?


다문화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관한 논의가 무성하다. 학자들은 다문화 연구에 뛰어들고 정책적 대안을 건의하며 사회적 성찰과 각성도 요구하고 있다. 많은 대학에서 다문화 관련 연구소가 설립되었고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일반인이나 다문화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과 훈련을 시행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대학 스스로는 다문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과 몽골을 비롯한 아시아 출신 유학생들이 급증하고 있어서 대학도 이미 다문화 시대에 들어섰건만 유학생들을 위한 제도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머지않아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 대학에 대거 진학하게 되면 대학 내의 다문화 현상은 더욱 뚜렷해질 텐데 이에 대비하기 위한 논의도 진행되지 않고 있다.

방치되는 아시아계 유학생들

먼저 아시아계 유학생 급증의 문제를 이야기해보자. 전북대의 경우만 보아도 2009년도 4월 기준으로 760명의 외국인학생이 재학 중인데 2년 전에 비해 거의 다섯 배나 늘어났다. 국적별로 보면 중국인(569명), 몽골인(85명), 네팔인(24명) 등의 순으로 아시아계 학생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필자가 강의하는 모든 과목에 중국인 유학생들이 수강하고 있고 몽골과 미얀마 출신 유학생도 더러 포함되어 있다. 한국어능력시험의 최소기준을 통과한 학생들이지만 한국어로 이루어지는 학부수준의 전공강의를 따라올 수가 없다. 대학원생일지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강의를 충분히 알아듣지 못하고 교수가 강의노트를 제공해 주어도 시험답안지를 반 페이지 이상 채울 수가 없다. 발표식 수업이어서 유학생들도 예외 없이 발표하는데 그 질이 현저히 낮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도 잘 전달되지 않는다. 따라서 수업은 파행을 겪고 유학생들은 자괴감에 빠지곤 한다. 대학은 이런 문제를 방관하고 있으며 오히려 국제화 지수가 높아진다는 사실을 즐기고 자랑하고 있다.

물론 유학생 스스로의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한국인 학생들과 적극적으로 사귀고 언어교육원에서 한국어강의를 계속 수강할 것을 권하곤 한다. 그래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 아이들이 고학년이 되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경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대학이 마련하는 해법은 영어로 진행되는 강의를 늘이는 방법이다. 그러나 아시아계 유학생들은 일반적으로 영어보다 한국어를 더 잘하기 때문에 영어강의 확대는 불충분한 해법이다. 다행히 최근에 우리 대학에서는 멘토(mentor) 제도를 도입했다. 한국학생과 유학생을 맺어주고 한국학생이 외국인학생을 도와주는 대가로 봉사학점을 부여받는 식이라고 한다. 그런데 유학생들은 멘토 제도가 별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한다. 멘토의 전공전문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글쓰기지도센터(writing center)를 설치하자고 제안한다. 대학교 단위의 센터이되 학과별 1인의 한국인 박사과정생을 현장지도자로 둔 네트워크로서의 센터를 설립한다. 그리고 외국인학생들의 전공수업관련 한국어 읽기, 쓰기, 말하기를 구체적으로 지도 지원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그 담당자인 한국인학생은 장학금으로 보상을 받는다. 현장지도자의 근무시간이 공지되고 유학생들은 그 시간 중에 개별적으로 약속을 잡고 대면지도를 받을 수 있도록 한다. 한국어 능력이 고도로 요구되는 인문사회계에서 먼저 추진되어야 할 것이고, 대학교가 선뜻 나서지 않으면 단과대학이 먼저 추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센터는 전공학습에 곤란을 겪거나 더 나은 논문 쓰기를 원하는 한국인 학생들이나 조만간 대학에 진입하는 다문화가정 학생들에게도 유용할 것이다. 아시아계 유학생들에 대한 학습지원이 한국인학생들에 대한 학습지원을 겸하게 되는 셈이다.

지방대를 쇄도할 다문화가정의 아이들

이어서 다문화사회의 대표주자처럼 인식되는 국제결혼가정의 학생들을 대학이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의 문제이다. 다문화가정이 집중되어 있는 지방 국립대의 경우 더욱 진지하게 고려해야 하는 사안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2년전 필자가 면접관으로 참여했던 법학전문대학원의 입시면접에서 이 문제가 제기된 바 있다. 대학입시에서 다문화가정의 학생들에게 가산점을 부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법률가 지망생들은 이구동성으로 가산점을 부여해야 한다고 답했고 그 근거로 그들이 취약계층에 속하기 때문이라는 논리를 펼쳤다. 다문화가정이라고 해서 반드시 취약계층에 속하는 것인지 단지 다문화가정의 아이라는 이유로 우대받는 것이 형평성에 맞는 것인지에 대한 고려가 없을뿐더러 그 아이들이 남다른 장점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는 사고는 아예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불쌍하니까 도와줘야 한다는 실망스러운 논리였다. 아직 대학차원의 논의는 없었지만 십중팔구 일단 논의를 시작하면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 불쌍한 것인가 아닌가에 관한 논의로 흐를까봐 걱정이 된다.

대학의 다문화적 전환이란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할 논의방향은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문화 가정의 학생들이 입시에서 가산점을 부여받는다면 그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대학의 교육과 한국의 발전에 필요한 인재들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아시아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학생들에게 가산점을 부여한다는 안을 내보자. 그렇다면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 혜택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그 혜택은 그들이 지닌 취약성이 아니라 수월성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다. 다문화가정 출신이 아닌 학생이라도 아시아언어를 구사할 능력이 있다면 아울러 우대를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러한 남다른 능력이 국가적으로 필요한 능력이란 점에 동의할 수 있다면 당연히 가산점제도도 공정한 제도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 문제는 자연스레 우리가 아시아 언어능력 수준을 평가할 만한 제도를 갖추고 있는가이다. 불행하게도 상당수의 아시아언어에 대한 평가시스템을 마련하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당면한 과제는 다양한 아시아언어에 대한 전국적이고 주기적이고 공정한 평가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다. 다문화 현상을 고려하는 대학들은 지금 이런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어서 대학은 현재의 교과과정을 검토하고 개편할 준비를 해야 한다. 한국의 대학은 아시아의 각 지역에 대해 얼마나 가르치고 있는가? 아시아계학생들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지 오래인 미국의 대학들은 아시아관련 강좌들이 일찍이 인기를 끌어왔다고 한다. 우리의 대학은 부모의 고국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는 학생들과 그런 친구들을 이해하려고 따라오는 학생들의 학습동기를 채워줄 과목들을 마련하고 있는가? 우리의 대학들은 다문화의 해법은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수준을 높이는 것이라는 원론적 구호를 반복하는 수준을 넘어서 실질적으로 아시아의 이웃나라들에 관한 지식을 습득한 인력들을 배출할 수 있는 교과과정을 마련하고 있는가? 답은 부정적이다. 중국과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지역에 관한 강의가 거의 부재한 실정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는 동남아시아 지역에 관한 정치학, 인류학, 역사학 강의가 개설되어 있다. 그러나 국내 대부분의 대학에서 동남아에 관한 인문사회 강좌를 찾아보기 어렵고, 두 개 외국어대학을 제외한 대학들에서 동남아 언어를 배울 수 있는 과목이 개설되어 있지 않다. 특히 지방 국립대의 사정은 거의 불모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도 다문화적 전환의 대상이다

대학의 다문화적 취약성은 지금까지 열거한 것들 외에도 무수히 많을 것이다. 무슬림 학생들은 기숙사식당이 돼지고기를 금기시하는 무슬림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고 불평한다. 필자가 가르치는 대학생들이 주관하는 각종 축제와 행사가 허다하지만 국제주간이나 아시아주간처럼 외국인학생들이 쉽게 참여하고 한국학생들이 타문화를 즐길 수 있는 문화행사를 찾아보기 어렵다. 문제는 많지만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풀어가야 할 것이다. 그 방향은 유학생이나 다문화가정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성원 모두에게 교육적 효과를 줄 수 있는 제도를 고안하는 것이면 더욱 좋겠다.

요컨대 대학은 다문화에 제대로 대처하자고 정부와 사회에게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다문화적인 고려를 충분히 하고 있는 것인지 물어야 할 것이다. 대학의 다문화 연구자들은 초등과 중등 과정의 교육에 대해 검토하고 조언하는 수준에 족해서는 안 되고 대학 자체의 교과과정을 검토하고 개혁함으로써 대학을 다문화 시대의 책임 있는 주체로 전환시키는 일을 병행해야 할 것이다. 또한 다문화 관련 활동을 전개하는 다양한 사회단체들이나 아시아연대를 추구하는 시민단체들에게도 대학의 각종 제도와 교육과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개선책을 제기함으로써 대학의 다문화적 전환을 촉진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부탁하고 싶다.

전제성 (전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 이 글은 [열린전북] 2010년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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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시위 사수, 인도네시아에서는? 

이명박 정부와 촛불집회의 팽팽한 대결이 장기간 지속되는 가운데 폭력에 관한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그렇지만 내가 학습대상으로 삼는 인도네시아의 실상에 비추어보면 한국의 시위대는 놀라울 정도로 평화를 지켜내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사람들이 대규모로 결집한 곳에서 폭력행동이 발생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시위현장 뿐만 아니라 경기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인도네시아 친구들은 한국에서 대규모 집회나 축구 응원이 평화적으로 전개되는데 대하여 놀라움을 표하곤 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외환위기로 물가가 폭등하자 이에 항의하는 집단행동이 곳곳에서 발생했는데 그 규모가 커지자 약탈, 방화, 강간이나 살인이 수반하는 극단적 폭력사태로 번져나갔다. 민주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각지에서 종족간의 균열이 인명과 재산을 앗아가는 수평적인 집단폭력이 발화했다. 마을 사람들이 도둑을 잡아 집단적으로 뭇매를 때리거나 불태워 죽이는 일도 허다하게 발생하였다.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이 건물과 승용차를 파괴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에서는 군중과 폭력이 근친의 관계로 간주되고, 상류층은 물론이고 중산층까지도 대체로 군중동원에 대한 공포를 지니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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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네시아의 실상에 비추어보면 한국의 시위대는 놀라울 정도로 평화를 지켜내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프레시안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하는 대중폭력은 여러 가지로 설명된다. 우선 가장 오래된 설명은 말레이계의 종족적 특성이 원래 그렇다는 것이다. 현지어 "아묵"(amuk)이라는 말은 정신을 잃을 정도의 발작상태를 가리키는 말인데 유럽식민주의자들이 이 단어를 영어사전에 올리면서 국제어가 되었다. 현지인들이 아묵 상태에서 행하는 폭력행동을 유럽인들이 열대의 이국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였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현지인들의 아묵은 평소의 인내심과 아주 대조적이었기 때문에 더욱 인상적으로 보였던 것 같다. 6백여 년 전에 인도네시아 자바의 스마랑(Semarang)에 원정을 왔던 명나라 쩡허(鄭和)의 사관도 현지인들의 높은 인내심과 강한 폭력성을 모순적 현상으로 특이하게 보아 각별히 기록해두었다고 한다. 높은 인내심과 강한 폭력성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평소에 너무 참기 때문에 폭발적으로 의사표현을 한다는 식으로 인내와 폭력을 연결시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다른 한편에 군중폭력을 체제 탓으로 돌리는 해석들도 있다. 돌발적인 폭력을 통해 요구를 표출하는 행동은 장기간 지속된 폭압적인 체제에서 온건한 의사표출의 자유도 주어지지 않았고, 폭력적인 해법을 일삼는 체제로부터 폭력적인 해법만 전수받았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근자에 유력한 가설은 아묵 현상을 유발하려는 음모와 책동이 있다는 설이다. 시위현장에서 시위대의 일원처럼 행세하면서 폭력을 남보다 앞서 행사하는 외부인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그들은 주로 "선동가"를 뜻하는 외래어를 차용한 "쁘로보까또르"(provokator)라는 용어로 지칭된다. 이를테면 1998년 5월에 벌어진 일련의 폭력사태들은 머리카락이 짧고 건장한 체격의 낯선 사람들이 시위대 속에서 먼저 폭력을 행사하면서 집단폭력이 시작되었다는 증언들이 나오고 이들이 특전대 소속이었을 것이라는 구체적인 음모설이 제기된 바 있다. 지방에서 벌어진 종족분쟁들도 작은 시비와 다툼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역시 외부인의 소행이고 신생민주정부의 개혁을 방해하려는 구체제 지지자들이 배후에 있다는 음모론이 나돌았다. 노동자들의 가두시위에서도 마찬가지 음모설이 작동하는데, 지방정부나 지방의회에 찾아가서 최저임금을 올려달라고 대규모로 시위를 벌이면 작업복을 입은 낯선 이들이 나타나 폭력행동을 선동하면서 기물을 앞서서 파괴하곤 한다고 노동조합 간부들이 주장하였고, 지방관구사령부가 관할 지역의 주요 회사들의 작업복을 골고루 보관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주장도 들어본 바 있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시위가 심각한 폭력을 동반하면 경찰이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언론은 '폭동'이라고 보도하고 시위지도부를 구속하는 '3박자' 대응이 이어지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규모가 큰 군중결집을 두려워하고 보통 사람들의 집단적 의사표현을 신뢰하지 않는 수평적인 공포와 불신을 일반인들이 갖게 되고 국민들이 직접행동을 통해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보다 강력한 국가와 군부가 질서를 잡아줄 것을 기대하는 공권력 의존성이 사람들의 뇌리에 자리 잡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군중폭력은 인도네시아에서 사회운동을 전개하는 이들에게는 각별한 고민꺼리일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러하니 인도네시아의 사회단체들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규모 시위를 기획하지 않는다.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러나 대규모 시위가 불가피하다면 자율검색을 시행하거나 안전요원을 배치하는 해법을 취한다. 자율검색의 대표적인 예가 1998년 5월에 수하르토를 끌어내린 국회의사당 시위로서 대학생들이 의회정문에서 수상한 이들의 진입을 막은 경우였다. 그런데 노동자와 빈민들의 진입을 막은 경우를 들어 자율검색이 대학생들의 우월감과 군중공포를 드러낸 비연대적 행동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반면에 시위대 중에 일부가 안전을 관리하는 임무를 띠는 자율적 안전관리는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져 일반적으로 수행되고 있다. 또 하나의 지혜는 즐겁게 시위하는 것이다. 특이한 분장, 보디페인팅, 퍼포먼스가 시위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고 사진기자들의 집중조명을 받곤 한다. 국제노동절시위도 지방 단위에서 공연, 경연, 집단놀이 등을 통해 카니발 형식으로 전개되곤 한다. 자율적인 안전관리나 집단놀이형 시위는 우리보다 인도네시아가 '선배'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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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의 지혜는 즐겁게 시위하는 것이다. 특이한 분장, 보디페인팅, 퍼포먼스가 시위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고 사진기자들의 집중조명을 받곤 한다." ⓒ프레시안 



인도네시아에서 집단의사의 평화적 표현을 위한 노력은 운동권만의 일은 아니었다. 1999년 6월에 44년만의 자유총선거를 앞두고 인도네시아의 한 일간지는 동부 자바의 수라바야(Surabaya)시가 폭동이 가장 강력하게 발생할 만한 화약고로 지목하였다. 그런데 의외로 사소한 시비만 있었을 뿐 폭동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과 자긍심이 가득한 시민들 덕분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당시 인도네시아의 민주화를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민주사회에 대한 기대로 집단폭력이 자제되었을 것이라는 해석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자긍심에 대해서는 약간의 부연이 필요할 것이다. 수라바야는 2차대전 종전이후 승전국으로 복귀하는 서양식민주의 세력을 목숨을 걸고 격퇴한 역사적인 도시라서 '영웅의 도시'로 불리어왔으며 시민들도 직선적이지만 자존심이 강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 자긍심 강한 시민들이 집단폭력으로 도시가 상처받는 일을 막아냈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1998년 5월로 다시 돌아간다면, 평화적인 대중시위의 선명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전국이 폭동으로 얼룩질 때, 족자카르타(Yogyakarta)시에서도 역사상 최대의 시민이 참여하는 시위가 벌어졌지만 군중폭력은 발생하지 않았다. 수하르토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민들 앞에 족자카르타의 술탄이 나타나서 시민의 뜻을 대통령에게 전달하겠다고 약속하고 시위대와 함께 행진을 하였다. 전통적 종교적 권위를 지닌 술탄이 책임을 지고 사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하였기 때문에 시민들은 평화적으로 시위를 전개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수하르토가 물러났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촛불시위를 보면서 연상된 인도네시아의 집단시위 풍경이었다. 이런 이야기가 팽팽한 대결 국면 속에서 지친 우리 시민들에게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기회가 되었기를 바란다. 한국에 대한 함의 따위는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고 독자들의 몫으로 남긴다. 다만 인도네시아의 대중시위 현장에서는 전투성을 증대시키는 능력보다 평화를 지켜내는 능력이 더 결정적인 관건이고 평화시위를 사수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더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를 성사시키는데 기여할 것이라는 소견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전제성(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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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여기, 아시아에서 우리, 아시아를 꿈꾸다
이식된 오리엔탈리즘과 패권적 민족주의를 넘어 한국 시민사회의 아시아 연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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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거주하는 아시아계 이주민이 1백만 명에 달하고 해외여행을 떠나는 한국인의 85%가 아시아로 향하고 있다. 최근 들어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한국인들의 생각 속에 ‘아시아’는 미국이나 유럽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고, 생김새와 피부색이 비슷한 ‘아시아인’들은 서구인들보다 더 낯선 이방인으로 머물러 있을 뿐이다.

한 예로 우리는 아시아의 향신료 산지를 장악하기 위해 세계일주를 한 마젤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마젤란을 죽여 필리핀에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아시아인 라푸라푸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거의 없다. 또한 서구로부터 이식된 오리엔탈리즘으로 인해 우리가 아시아에 대해 갖고 있는 관점은 정실주의, 부패, 빈곤, 독재, 미개발, 덜 문명화된 지역 등 부정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아시아계 결혼이주 여성이 늘어나면서 생겨난 신조어 ‘코시안’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우리’와 ‘아시아’를 애써 구분짓고 외국인 배우자의 국적에 따라 아이를 특정화, 대상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껏해야 우리는 ‘아시아 최초’나 ‘아시아 최고’라는 수식어에서나 ‘아시아 속 한국’을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가 펴낸 『우리 안의 아시아 우리가 꿈꾸는 아시아』는 먼저 한국과 아시아를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우리 안의 아시아를 재인식하고 그것을 진정한 ‘우리’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참여연대 홈페이지에 2006년 6월부터 연재된 ‘아시아 생각’ 칼럼을 모은 이 책은 이식된 오리엔탈리즘, 패권적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와 인권이 고르게 보장되는 ‘사회적 아시아’를 향한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은 아시아에 대한 우리의 편협한 사고를 꼬집는 1부 ‘아시아를 향한 성찰’, 현재 아시아 각국이 처해있는 현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2부 ‘오늘의 아시아’, 시민사회의 아시아 연대를 모색하는 3부 ‘아시아 연대를 위하여’로 구성돼 있다. 필진으로는 조희연 성공회대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연구소 소장, 조효제 성공회대 NGO대학원 교수를 비롯해 국내 아시아 지역 연구자, 활동가, 아시아 출신 유학생 등 25명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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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들어가며] 아시아에 주목해야 할 이유 -조효제

1부 아시아를 향한 성찰

○ 아시아의 자존심? -전제성
○ 우리에게 보이는 아시아는 정말 아시아인가? -이재현
○ 한국에서 친구 사귀기 -유완또
○ 국경과 국적에 갇힌 인권 -이재현
○ 인공의 도시, 차이나타운 -백지운
○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이재현
○ ‘메이드 인 코리아’ 낙인의 진짜 이유는… -이재현
○ 신부 사오는 사회 -박이은실
○ 지자체의 국제결혼지원사업을 반대하는 이유 -이재현

2부 오늘의 아시아

○ 아세안, 공동체 버리고 FTA 택하려나 -이성훈
○ 가야 할 길 먼 동티모르의 ‘독립’ -최재훈
○ 징기스칸의 아시아, 몽골의 민주주의 -김은경
○ ‘금권민주주의’가 불러온 태국의 쿠데타 -박은홍
뛰는 경제, 기는 정치 속의 베트남 -이한우
○ 베트남 사회주의와 노동력 부족 현상 -채수홍
○ 필리핀의 공공연한 정치적 살해 -정법모
○ 내가 만난 인도네시아 여성운동가 -정은숙
○ 중국, 그 배반의 이름으로 -김도희
○ ‘조직’ 대신 ‘시민’ 만든 일본 시민사회 -한영혜
○ ‘야만의 시대’에 갇힌 버마, 가스 개발에 눈먼 한국 -박은홍
○ 새로운 네팔을 향한 기회와 도전 -지번 바니야
○ 네팔 총선 국제 선거감시단 활동기 -차은하
○ 필리핀 남부 통근철도사업 이주지역 이야기 -정법모
○ 너무 깊게 드리워진 수하르토의 그림자 -김은경
○ 경제회생 포퓰리즘…한국도 태국,필리핀 전철 밟나 -박은홍

3부 아시아 연대를 위하여

○ 한국 시민사회의 동아시아 연대운동 -전제성
○ 입으로는 ‘아시아 연대’ 외치지만… -지번 바니야
○ 공감은 연대의 또다른 이름 -박이은실
○ 아시아 연대의 한류 -박진영
○ 내가 생각하는 아시아 연대 -제시카 우마노스 소토
○ ‘천국보다 낯선’ 티베트의 잔인한 봄 -나현필
○ 중국과 티베트, 한국의 민족주의 -이대훈
○ 우리의 인권좌표를 넓혀라 -차은하
○ 대상에서 주체로! 아시아 이주민의 위상전환 -전제성
○ 생각을 바꾸는 ‘천원’을 아십니까 -박영선
○ 언어와 연대 : 아시아 이주민들로부터 아시아 언어를 배우자 -전제성

[나오며] ‘사회적 아시아’를 향한 상상 -조희연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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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명절이 되면 전국 곳곳에서 아시아 외국인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들을 위한 행사가 개최되고 있고 올 추석도 거르지 않았다. 10년 전만해도 우리는 아시아로부터 온 외국인들이 왠지 거북하여 거리를 두거나 서먹서먹해 했지만 지금은 서로 상당히 가까와진 느낌이 든다. 이렇게 우리는 아시아 이주민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는 과정에 있다.

1990년에 2만 명이 못되던 우리나라 외국인노동자가 2004년 말에 42만 명을 넘어섰다. 출신국가별로 보면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리핀, 태국, 방글라데시, 몽골, 우즈베키스탄, 파키스탄, 스리랑카 순으로 이어지는 아시아 사람들이다. 한편 국제결혼은 1993년 전체 혼인신고의 1.6%에 불과했지만 2005년에는 13.6%로 늘어났다. 농어촌지역 혼인은 국제결혼인 경우가 35.7%나 된다고 한다.

이러한 아시아 이주노동자와 결혼이민자여성의 한국러시와 그에 대한 한국사회의 책임의식은 백여 개에 달하는 외국인노동자 및 이주민인권운동단체들을 출현시켰다. 처음에 우리는 이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다양한 아시아인들과 공존할 수 있게끔 우리 사회가 다문화적으로 재편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문화다양성이 곧 글로벌 시대의 경쟁력이라는 논리까지 제기되고 있다. 아시아 이주자들이 우리를 부담스럽게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를 풍요롭게 해주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다다른 것이다. 참 멋있는 발상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러한 생각을 실천할 수 있을까? 생각만 전환적으로 한다고 될 일은 아닌 듯하다. 우리를 다문화적으로 만드는 기획은 명절 때마다 아시아인들에게 한복을 입히고 한과를 먹고 한국예절을 배우는 자리를 만드는 것으로는 달성되기 어렵다. 물론 한국을 알게 하는 일은 이들에게 즐거운 일이자 꼭 필요한 일이므로 계속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들의 위상을 교육과 실천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재조정하는 기획 또한 즐겁고 꼭 필요한 일이다.

그들이 사회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며 의문을 품는 이들도 있겠지만 일부 단체들이 이미 선례들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외국인노동자센터는 외국인노동자와 한국인이 함께 아시아문화를 학습하는 소모임을 결성하였는데, 외국인노동자들이 자기 나라의 문화, 언어, 예절, 종교를 다른 나라 출신의 외국인들과 한국인들에게 가르치는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또 다른 외국인노동자단체에서는 아시아 소식을 아시아 각국의 언어로 게시하는 웹사이트를 만들었는데 그 사이트의 내용을 채우는 이들이 바로 외국인노동자들이다. 외국인노동자로 구성된 밴드가 외국인노동자의 고통과 희망, 연대의 필요성을 노래하여 우리 민중문화운동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의 기획과 실천이다.

우리를 아시아의 다양한 문화로 이끌고 그 속에 담긴 풍요로운 지혜로 인도하는 교사가 바로 이주노동자들과 결혼이주여성들인 것이다. 이러한 발상을 실현하려면 우리의 아시아 친구들을 수동적 수혜대상에서 능동적 기획주체로 인식하고 역할을 부여하는 기획, '그들을 위한 자리'인 동시에 '우리를 위한 자리'여서 '함께 하는 자리'로 만드는 기획과 실천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이 글은 [열린전북]에 실린 글입니다.
전제성(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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