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국제연대위원회입니다. 미국과 영국, 스페인 3국은 17일 이라크 무장해제를 위한 군사행동을 승인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채택 노력을 포기하고 결의안을 철회하였습니다. 전쟁이 임박한 것 같습니다. 유례없었던 지구촌 시민사회의 반전노력에도 불구하고, 국제법을 위반하면서까지 그들은 그들만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승인 없는 무력사용은 국제법위반입니다). 또한 지구촌의 다양한 문제를 가장 포괄적으로 논의하고 다룰 수 있는 유엔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오늘은 갈등으로 유엔의 중재노력이 실패했던 나라 소말리아를 찾아보겠습니다.

독재정권의 성립

아프리카 대륙 동쪽 끝에 위치한 소말리아 민주공화국(Somalia Democratic Republic)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 가운데 하나이며(미국이 1인당 GDP : 36,158불인 반면 소말리아는 1인당 600불에 불과합니다), 목축과 농경이 경제의 큰 비중을 차지하며 경제의 상당부분은 원조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국가들 중에서 드물게 거의 단일민족국가를 유지하고 있으며, 소말리아족이 전국에 걸쳐 거주고, 같은 언어와 종교(이슬람)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말리아는 10세기경부터 아라비아 반도의 이슬람교도가 들어와 해안 각지에 토후국을 건설하였고, 19세기에 들어와서 아덴만 연안은 오스만투르크에게 지배되었고, 인도양 연안은 무스카트 오만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수에즈운하의 개통 이후 영국은 아덴만 연안을 영국령 소말릴란드로 만들고 내륙은 영국령 에티오피아에 편입시켰고(1886년), 이탈리아는 인도양 연안지역을 차지하고(1989년) 서부는 프랑스가 점령하면서 3등분되었습니다. 이후 영국령을 제외한 지역은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에 편입되었습니다(1936년).

제2차 세계대전 중 현재의 소말리아지역 전체가 영국군의 군정을 받았고, 1950년부터 과거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는 유엔의 신탁통치(이탈리아가 통치)를 실시한 이후, 1960년 영국령 소말릴란드의 독립과 함께 같은 해 7월 1일 합병, 유럽식 의회민주주의를 도입한 소말리아 공화국이라는 통일국가가 수립되었습니다. 독립 후에는 지부티지역, 에티오피아 동부, 케냐 북동부까지 소말리족이 거주하는 지역은 통합되어야 한다는 정책(Pan-Somalism)에 따라 에티오피아 동부에 대해서는 특히 국경의 새로운 확정과 그에 따른 영토의 반환을 강경하게 요구하고, 1964년 초부터 양국간에 교전이 있었습니다.

1969년 셰르마르케 대통령이 암살된 이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모하메드 시아드 바레(Mohamed Siad Barre) 장군의 군사정권이 수립되어 최고혁명평의회가 실권을 장악, 국명을 소말리아 민주공화국으로 개정하였습니다. 사회주의 정책을 표방한 바레정권은 소수자와 여성의 지위향상과 같은 문화적 측면과 건강, 교육 등 전반적인 사회 기본시설의 근대화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1974년 범소말리아주의(Pan-Somalism)에 따른 에티오피아와의 전쟁 과정에서 에티오피아를 지원한 소련에 반발하여 1980년대에는 서방세력으로부터 개발원조와 군사적 원조를 받았습니다. 이후 미국의 원조를 받아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을 계속하여 냉전시대의 대리전을 수행하였습니다. 이처럼 바레정권은 에티오피아와의 전쟁비용 지출과 함께 국제통화기금(IMF)의 경제자유화정책의 실패, 부정부패와 친족등용주의(nepotism) 등으로 인하여 붕괴의 길을 겪게 되었습니다. 자기 부족 위주의 정책을 펼치며 22년간 장기집권하자 이에 반발하는 부족들이 각기 정치파벌을 형성하고 무장투쟁을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통일이후 남부지역 출신의 정권이 정치, 사회적 체계가 상이하였던 북부지방에 대한 차별정책과 이들이 겪은 상실감, 에티오피아 전쟁으로 인한 북부지역의 피해 등으로 인하여 소말리아 북부지역의 부족들과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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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파벌의 대두와 분쟁의 격화

파벌의 대두는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에서 피해가 심했던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먼저 형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78년 소말리아 청년연맹의 바레정권에 대한 저항이 실패로 돌아가자 리비아의 재정지원하에 에티오피아지역에서 소말리아구원민주전선(Somali Salvation Democratic Front: SSDF)이 만들어졌습니다, 1981년에는 북부지역에서 이샤크족이 중심이 되어 소말리아 민족운동(Somali National Movement: SNM)을 결성하여 게릴라전을 펼쳤으나, 1988년에 북서부의 두지역을 통제하다가 정부군에게 무자비하게 진압을 당했습니다. 중부 및 남부지방에서도 각 부족별로 파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는데, 1989년에는 오가덴부족(Ogadeni clan)으로 구성된 소말리아애국운동(Somali Patriotic Movement: SPM)이 결성되어 케냐와 인접한 남부지역에서 활동을 하였고, 1990년 하비야종족(Hawiye clans)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통일소말리아 회의(United Somali Congress: USC)는 중부지역에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파벌들의 무장투쟁으로 인하여 1990년에 이르면 수도 모가디슈(Mogadishu)를 포함한 많은 지역들이 이미 어떠한 세력으로부터도 통제가 불가능했으며, 결국 1991년 바레정권은 통일소말리아회의가 주도한 쿠데타로 붕괴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최대 파벌로 성장한 바레 정권 때 군장성을 지낸 무하마드 파라 아이디드(Mohamed Farah Aidid), 모하메드(이후 마디Mahdi파로 변경), 아토 등이 임시정부를 수립, 알로 마디 무하마드(Alo Mahdi Mohamed)를 임시대통령으로 세웠지만, 통일소말리아회의의 의장인 아이디드를 지지하는 세력과 무하마드를 지지하는 세력간의 전투가 발생하였고, 이는 대부분 이 두세력을 지지하는 지역무장세력들의 대립으로 확대되어 소말리아는 다시 무정부상태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1991년, 소말리아는 가뭄으로 인해 국민의 과반수가 넘는 500만명이 기아와 질병에 직면하여 죽음의 땅으로 변하고 수많은 난민이 발생하였습니다.



유엔의 실패와 머나먼 평화의 길

반군과의 무력충돌과 가뭄으로 인해 발생한 수백만 명의 난민과 기아문제에 대하여 유엔에서는 1992년 12월 소말리아 구호활동을 위한 결의안을 채택, 유엔평화유지활동단(United Nations Operation on Somalia: UNOSOM)을 설치하고, 6개의 유엔기관 및 30여개의 구호단체들이 인도적 지원을 수행하였고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정부상태의 소말리아에서 원조제공은 방해되었고, 강탈되거나 공격을 받기도 하여 구호품의 극히 일부분만이 필요한 사람에게 전달되어 국제사회의 인도적 지원이 시작된 후로도 하루에 3,000명이 기아로 사망하는 사태에 이르렀습니다. 유엔의 구호활동 보호를 위해 1992년 12월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 통합군(United Task Force: UNITAF)을 파견하고, 유엔사무총장은 소말리아 파벌들간의 평화협정을 추진하였지만, 최대 군벌세력인 아이디드파는 유엔에 의한 국민화해회의의 개최에 반대하고, 미군에 의한 무장해제 요구를 거부하여 무장충돌은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1993년 유엔은 인원이 대폭 증가된 2차 유엔평화유지활동단을 파견에도 불구하고 아이드파 군대에 의해 평화유지군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미군은 아이드파 주요 거점에 대한 폭격을 하였지만 소말리아 사태가 해결 조짐을 보이지 않자 결국 유엔평화유지활동단의 활동을 실패라고 규정하고 단계적인 철수를 시작하였습니다. 1995년 유엔군의 철수가 완료되자 아이디드파는 수도권을 장악하고 아이디드가 일방적으로 대통령 취임 및 신정부 수립을 선언하였으나 1996년 사망하였고, 정전을 모색하는 회의가 수 차례 개최되었지만 매번 각 파벌간의 이해 상충으로 결렬되었습니다.

북부지역이 소말리랜드(Somaliland)로 독립을 선언하였고, 북동지역은 푼랜드(Puntland)가 독립을 선언하고 정부기능을 수행하는 가운데 2000년 3월, 지방 파벌과 원로, 여성그룹들이 평화정착과 새로운 정부수립을 위해 모인 이후 과도의회(Transitional National Assembly: TNA)가 만들어졌습니다. 이 성과로 대통령과 수상의 임명이 이루어져 과도정부(Transitional National Government: TNG)가 출범하였습니다. 과도정부는 정부 직위를 각 부족에 골고루 분배하는 정책을 추구하는 등 현재의 무정부 상태 해소와 부족간 화합, 평화 정착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아직 아이디드파가 신정부를 인정하고 있지 않고, 소말리랜드의 독립요구도 거세며, 과도정부는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 충분한 경찰력 및 군대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현재 소말리아는 2002년부터 각 파벌들이 모여 케냐에서 평화협상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2002년 10월 소말리아 파벌들이 케냐에서 열리는 평화회의 기간중에 적대행위를 금지하는 협정을 체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3월 16일에도 9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당하는 등 폭력사태는 올해까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북부지방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던 소말리아랜드는 이 평화회담에 참가하지 않고 있습니다.



팔려 가는 아이들

수십년간의 분쟁과 무정부상태의 지속은 소말리아인들의 생활을 파탄시켰습니다. 유니세프(UNICEF)는 소말리아 어린이들이 세계에서 가장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다고 발표하기도 하였는데, 유엔에 따르면 현재 소말리아의 어린이들이 수천명이 유럽으로 '밀수출'되었다고 밝혔습니다. 절망적인 삶에 직면하여 소말리아에서 미래가 없는 많은 부모들이 그들의 아이들을 수천달러를 받고 국제 아동밀매조직에게 팔고 있으며 이들은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국가들로 '수출'된다고 합니다. 밀수업자들은 매달 수도 모가디슈로부터 250명 이상의 어린이들을 밀수출한다고 합니다. 2-3세의 유아를 포함하여 대부분 10대인 이 아동들은 복지혜택을 위한 사기에 이용당하기도 하며, 매춘과 노동에 상당수가 이용당하며, 국제 범죄조직의 손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분쟁이 해소된 지역에서 조차도 빈곤과 교육, 건강 등의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어 있어 이와 같은 '밀수출'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팔려간 아이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심각한 정체성의 혼돈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식수로 쓸 수 있는 물을 사용가능한 인구는 전체의 28%에 지나지 않으며, 교육은 13.8%만이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심각한 식량위기를 보였던 몇몇 지역은 다행히 강우량이 많아져 1995-2001년보다 식량생산이 80%가 증가한 최고의 풍년을 맞기도 했지만, 남부지역의 식량위기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국제사회의 평화유지 노력도 실패한 소말리아. 1992년 미국중심의 다국적군이 펼쳤던 작전명은 희망회복작전(Operation Restore Hope)였습니다. 이들에게 평화정착과 안정된 생활이라는 미래는 희망에 불과한 것일까요?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하는 미국이 내건 모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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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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