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후기] 중동 북아프리카 현대사의 두 개의 키워드
                 - 석유와 미국
중동 북아프리카 민주화 혁명의 오늘과 내일



4월 12일, ‘중동 북아프리카 민주화 혁명의 오늘과 내일’의 두 번째 시간으로 ‘중동 북아프리카 현대사의 두 개의 키워드-석유와 미국’이라는 주제로 강의가 열렸습니다. 특별히 이번 주는 KBS <세계는 지금>의 안주식 PD가 리비아 취재 현장을 생생히 전달해 주었습니다. 곧 이어 구정은 기자가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석유와 미국이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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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공습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 안주식 PD

먼저 취재경로에 대해 얘기하겠다. 리비아는 튀니지와 이집트 사이에 있다. 리비아를 중간으로 나누면 서쪽으로 트리폴리, 동쪽에 내가 다녀온 벵가지가 있다. 국토면적은 큰데 사람이 별로 없고 해변에만 인구가 밀집해 있다. 또 트리폴리를 중심으로 카다피가 머물며 정부군을 주군시키고 있다. 벵가지를 중심으로 반군이 국가위원회 임시정부를 만들었다. 동서를 가르는 지역에는 상호공방이 이뤄지고 있다.


1. 왜 벵가지가 반군의 중심이 됐을까?

리비아의 동부와 서부의 부족은 다르다. 카다피는 동부 부족을 중심으로 특혜를 주어 온 반면, 서부 부족은 박해를 받아왔다. 벵가지는 왕정 때 도시가 부흥했던 곳이며 반카다피 성향이 짙다. 이 곳 벵가지에서 처음 시위가 벌어졌다. 광장에서 데모가 시작되고 바로 무력투쟁으로 발전했다.
튀니지, 이집트와 다른 것은 군부의 선택이었다. 리비아 군은 철저하게 카다피에 종속되어 있고 용병이 바로 시위를 진압하면서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벵가지 시민이 무기창고를 급습해 무장을 하고 트리폴리까지 진격했다. 내가 리비아에 들어갔을 때는 카다피군이 재정비하여 벵가지 반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이다.


2. 어떻게 분쟁지역을 취재하나

저널리스트들 사이에 ‘국경이 열렸다’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것은 저널리스트들이 한 명이 들어가서 안 죽었다는 얘기다. 최초로 들어간 사람이 CNN기자다. 접경지역에 있는 사람이 차량을 제공하고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장사를 하게 된다. 그 일대에 통역해주는 사람들로 난전이 이뤄진다. 시장이 형성되는 셈이다. 주로 코디네이터가 생겨 차량을 제공해준다.


3. 왜 싸우나?

대부분 반군은 비조직적이고 비계획적이었다. 쉽게 정리하면 ‘카다피가 부정부패가 심한데 왜 나한테는 한푼도 돌아오지 않느냐. 그런데 왜 때리기까지 하느냐?’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경제가 어려워서 무언가를 해보려하면 관료주의가 극심해서 뭘 못하게 하고, 억울하다고 한 마디 하면 때리는 것에 대한 반감이 심하다. 

반군에게는 정부군이 진격해왔을 때 물자를 수송하고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 석유항을 점령하는 것이 중요했다. 즉 아즈다비아 점령이 중요했다. 반군 입장에서 아즈다비아가 함락되면 벵가지가 포위되고, 대규모 학살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들어간 후에 아즈다비아가 함락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군이 미디어 센터를 제공해줬는데 거기서 빠져나가지 않으면 죽을 상황이었다. 저널리스트로서 어디까지 취재를 하는 것이 맞는지를 고민하기도 했다. 나는 일단 나가기로 했다. 거기에 알자지라 방송과 CNN만이 남아서 취재를 계속했다.


4. 비행금지구역과 개입의 문제

아즈다비아 함락 다음 날 비행금지구역이 설정됐다. 반군은 무기고에서 빼온 총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상황이었고 정부군의 무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비행금지구역으로 지정되지 않았으면 반군은 다 죽을 수도 있었다. 시민도 비행금지구역이 설정되길 원했다. 서방은 근접 포격을 하고 대규모 군사시설은 미사일로 폭격했고, 벵가지 주변도 폭격했다.

여기에서 R2P(Responsibility to Protect 국민보호책임)라는 개념을 두고 논란이 있다. 2005년에 유엔정상회의에서 채택된 이 개념은 코소보와 르완다 대학살이 재현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이 이라크에 개입할 때는 ’인도적 개입‘이라는 용어를 썼다. 유엔은 '인도적 개입'이라는 용어가 오염되어서 새로운 뭔가가 필요했다. R2P원칙의 적용은 내전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 내전이면 서로 무장 세력끼리의 싸움이므로 외부에서 개입할 수 없다. 리비아의 무장반군은 시민이냐 아니냐가 논란이 됐다. 그러나 리비아의 반군은 제대로 된 조직체계가 없는 시민이다. 현장에서도 느꼈지만 명백히 시민이라는 판단이 든다.


5. 주권을 침해했나 안했나

80년 광주항쟁과 북한 사례를 비교해 볼 수도 있다. 광주와 북한문제 사이에 리비아 문제가 있다. 광주항쟁 당시 유엔이나 미국이 한국정부에 경제제재를 했다면 정부가 시민을 공격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카다피가 유엔이나 미국의 경제제재에 대해 콧방귀를 뀔 인물이라는건 국제사회가 다 알고 있었다. R2P는 시민이 요구해야 한다. 북한은 시민이 요구하지 않으므로 적용되지 않는다. 북한의 민주화를 이루려면 북한 내부에서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집단이 있어야 한다. 리비아에서는 시민의 목숨을 구했으니 리비아에서의 R2P는 정당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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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북아프리카 역사와 석유와 미국에 대해: 구정은 기자

오늘은 중동의 역사를 살펴보겠다. 그러나 20세기에 한정해서 설명하겠다. 16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오스만쿠르크가 이 일대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20세기는 이것이 쪼개져 나가는 과정이다. 그 사이 서구열강들이 식민지를 차지하고 다시 독립하면서 중동지역의 20세기 역사가 만들어졌다.
 
다음은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 역사에 핵심이 되는 사실이다.

1. 아랍의 국가수립은 굴절되어 독재로 이어졌다.
2. 북아프리카는 반제국주의 투쟁을 해서 힘들게 독립했다.
3.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 이 지역 역사를 꼬이게 했다.
4. 이란은 맥락이 다르다
5. 현재 큰 국가인 사우디 아라비아는 20세기 역사에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1. 중동의 역사

1914년 1차 대전이 일어났는데 모두가 오스만 땅을 나눠서 땅따먹기를 했다. 터키는 거대제국이었는데 입장이 바뀌었고 1915년에 오스만이 무력화됐다. 2차 대전 후 카다피가 리비아를 집권하기까지 미국이 점령국 행세를 했다.

중동은 나세르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이 지역의 영웅이다. 카다피도 '나세르 키즈'를 자칭할 만큼이다. 나세르의 범아랍사회주의가 그에게도 영향을 크게 미쳤다.

1960년대는 독재체제의 틀이 만들어졌다. 이라크에서는 알 바크르 대통령이 취임하고 2년 후에 사담 후세인이 취임했다. 1969년에는 카디피가 리비아를 장악하고 그의 독재체제는 석유 민족주의로 간다. 1970년에는 이집트의 나세르가 사망하고 알 사다트 대통령이 당선됐다. 시리아에서는 알 아사드가 쿠테타로 집권했다. 10년 동안 아랍공화국으로 합쳐졌다가 다시 갈라지고 1971년에는 아랍에미레이트연합이 출범했다. 1973년에는 중동전쟁이 발생했고 1979년에 아라크 후세인이 대통령이 되고 몰락하기 전까지 자기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미국과 거래했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 미국에 영향을 끼쳤다.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을 보면 냉전시대에 이란이 미국에 미친 영향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련의 아프간 침공도 중요하다.


2. 중동에 대한 미국의 개입과 석유

중동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이해하려면 석유의 특징을 이해해야 한다. 석탄, 구리, 은, 금은 전세계적으로 나온다. 그러나 석유는 1)지리적 편중성이 강하다. 2)또 채굴 비용이 커서 대규모로 투자를 해야 생산할 수 있다. 3) 석유는 (생산) 탄력이 없어 독식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미국이 석유 때문에 중동지역의 독재정권을 지지해 주었고 이 지역이 민주화되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석유산업을 국유화한 것이 이 지역의 민족주의로 이어졌다.

이라크 전쟁의 모든 이유가 석유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일부는 석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노암 촘스키가 지적했듯이 미국의 중동 석유 이권이 유럽과 아시아의 재정을 떠받치는 역할을 한다. 이는 냉전 이래 미국의 세계패권전략의 일환이다.

중동 독재국가는 세금이 없고, 에너지가 무상이고 교육도 무상이다. 모두 석유 수입에 기반하고 있다. 중동 독재자들은 시민들에게는 반발이 없을 정도로만 최소한의 석유 이익을 나눠주고 나머지는 자기의 이익으로 챙긴다. 석유수출은 시민들에게 최소한의 당근이기는 하지만 중동나라들은 자원을 팔아 기득권의 이익을 챙기고 산업은 정체된 ‘자원의 덫’에 걸리게 되었다.



Q & A 안주식 PD.구정은 기자와 수강생과의 대화

Q. 리비아에서 반군과 시민군은 어떻게 구분하나?

A. 안주식 : 준정부 체제를 갖추느냐 안 갖추느냐가 관건이다. 리비아 사태는 중동전문가 누구도 예측 못 한 형태로 '조직이 없는 운동'이다. 10여 년 전부터 재야단체가 꾸준히 활동은 했다. 대표적으로 이슬람 브라더스(형제단)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반정부적 행동을 할 역량을 갖추지는 못했다.

임시정부인 국가위원회도 체계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일부 흥분한 시민이 친카다피 측을 축출해서 고문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위원회가 주도한건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국가위원회가 통제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리비아 반군은 군사체계를 갖지 않고 시민연합으로 움직이고 있다. 앞으로가 문제다. 리비아 반군세력에서 유일하게 무기를 쓸 줄 아는 집단이 이슬라미스트들이다. 정치체제가 와해된 상황에서 그나마 무장투쟁은 극단주의자들인 것이다. 알카에다와 비슷한 일부세력들이 국가위원회의 무장 군사훈련에 역할을 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앞으로 체계적으로 무장집단화될 가능성이 있고 그때는 내전이라 불러야 한다. 그렇게 되면 국제사회의 개입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그렇지 않다.


Q.  리비아 시위대는 주로 남자인데 여자들의 역할이 있었나? 여성의 지위는 어떻게 될 것인가?

A. 안주식 : 중동지역은 내외를 많이 한다. 물론 참여가 있었고 여성들만 따로 모여있기도 하고 남성들이 보호를 하기 위해 둘러싸고 있어서 언론에 잘 보여지지 않은 측면도 있다.
벵가지는 젊은 청년 위주다. 이집트는 투표할 때도 남녀 따로 한다. 현재 중동은 베이비붐 세대인 30세 이하가 60%로 젊은 층이 높다. 어느 전문가는 ‘이들이 데모할 나이가 되어서 이번 시위가 일어났다’고 한다. 이들 가운데는 직업 없이 30세가 된 사람이 많다. 리비아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비해서 국제화 수준이 높고 일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 수준이 높다. 여성들의 자각도 높았다.  

구정은: 리비아는 굉장히 보수적이어서 여성의 역할이 다른 나라보다 적다. 가부장제가 뿌리 깊어서 거의 여성이 안 보였다. 이집트는 1920년부터 여성운동이 활발해 최초 여성연맹이 있었는데 근래에 이슬람화가 진행되면서 사라졌다. 사우디에서는 이슬람주의자들이 돈을 주고 배우, 밸리댄서에게 히잡을 쓰고 텔레비전에 나와 자신들의 과오를 반성하게 하고 있다. 최근에는 여성에 대한 억압이 심해졌다. 페미니스트들을 탄압하고 이슬람식으로 행동하게 한다. 이란에서 여성에 대한 억압사례들이 많지만 1997년에 부통령이 나오는 등 많은 여성의 활동이 있었다. 이란의 혁명은 여성이 이끄는 운동이라고 한다.

이번 시위를 통해 여성의 지위가 높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혁명을 주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직화된 세력이 이슬람조직세력이다. 여성의 입장에서는 독이 될지 약이 될지 모르겠다. 미완의 혁명이 될 가능성이 높다.


Q. 반군이 조직화가 되지 않았을 때 노동조합이 시민진영이었을 것 같은데 어떤가?

A. 구정은: 조직화되어 움직이면 정치다. 조직화가 되지 않은 움직임이기에 혁명이다. 무슬림형제단은 1920년 대에 만들어진 근대 최초의 조직으로 이번 시위에서도 조직적으로 움직인 면이 있다. 조직되어 움직이면 혁명이 아니다.

안주식 : 이집트 민주화 시위를 봤을 때 군부가 중심이었다. 튀니지도 마찬가지였다. 이집트의 경우는 군부가 무바라크를 버린 형국이다. 이집트는 리비아와 다르게 군부엘리트 체제가 정치의 상당부분을 차지해 왔고 이를 계속 보장받고 있다. 대신 무바라크를 물리쳐 주겠다는 약속이 정치지도부 사이에 있었다. 이집트에서는 제2의 무바라크가 군부에서 나올 것이다. 리비아는 노동조합같은 조직력을 갖고 있는 세력이 없다. 산업구조가 달라 노동자 조직이 있을 수 없다.

Q. 중동지역 젊은이의 시위가 일자리와 관련이 있나?

A. 구정은 : 88만원은 우리 산업구조의 문제이다. 중동은 근대산업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와는 다르다. 경제구조 자체가 직업을 갖기 힘들게 되어 있다. 공무원이 제일 많다. 석유를 팔아서 나눠주는 구조로 되어 있어 공장은 아예 없다. 카다피가 일자리를 만들어 나눠줬지만 어느 순간까지만 유지되고 인구는 폭발하는 시점에 도달했다. 

안주식 : 중동의 산업은 역사가 다르다. 중동은 갑자기 돈이 생기고 인구가 늘어났지 그 전에는 인구가 없다. 교역만 있지 산업을 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다. 중동은 애당초 다르다. 노동집약 농업이 가능했던 데가 아니다. 유목민이 교역하거나 유목 활동을 통해서 먹고 살았다. 최근에 석유 때문에 인구가 폭발했고, 또한 인구의 절반이 외국인이다.


Q. 중동지역에서 정치와 종교지도자의 관계는 어떠한가?

A. 구정은 : 근대국가는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면서 탄생했다. 그러나 이슬람 종교 자체가 독특한 면이 있다. 무슬람형제단은 불법이었는데 살아남았다. 종교주의자들이 학교와 병원을 꾸리기 때문이다. 탈레반도 학교와 병원을 쥐고 있다. 그래서 이들의 뿌리가 매우 광범위하고 깊다. 중동에서 종교는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구조이다. 종교는 하나의 정치 주체로 중동 사회에 들어와 있다. 그 속에서 온건주의자와 극단주의자의 성향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지역의 민주화는 종교와 같이 가야 한다. 아랍권에서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
 

강좌 기록 및 후기: 국제연대위원회 인턴 장유진


다음 강의
4월19일(화) 민주화 혁명 이후 중동 북아프리카는 어디로?
강사: 구정은(경향신문기자)


*2강 강의자료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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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후기]중동 북아프리카의 현실과 재스민 혁명의 의미
중동 북아프리카 민주화 혁명의 오늘과 내일


참여연대는 4월 한 달 동안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의 민주화 혁명에 대해서 강좌를 엽니다. 최근 중동의 반정부 시위는 튀니지에서 청년의 분신으로 시작해 이집트, 리비아,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으로 퍼져가고 있습니다. 이 강의는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지역과도 같았던 중동 아프리카 지역의 변화양상과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강의는 중동 현장의 경험이 많은 구정은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가 맡았습니다. 4월5일, 첫 강의에서는 중동 북아프리카의 현실과 재스민 혁명의 의미에 대해 짚어봤습니다.


리비아 사태에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바람으로: 사회자 주은경

이 강의를 기획한 것은 이집트 혁명이 승리를 이루면서 중동지역의 ‘프랑스 혁명’이 되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있어서였다. 구정은 기자는 문화일보의 국제부 거쳐 지금은 경향신문 국제부기자로 있다. 교수보다 오히려 현장에 강한 강사라 좋은 시간이 될 것 같다. 중동 북아프리카의 혁명을 배움으로써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방법이나 한국인이 국제사태에 갖고 있는 감수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강의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리비아 사태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강좌의 시작: 구정은 기자

나는 중동 북아프리카의 역사를 전공한 것도 아니고 살아본 것도 아니다. 단지 10년 동안 일하다보니 이 지역 뉴스를 남보다 관심을 갖고 살펴보게 됐다. 지금은 이 지역에 많은 애정과 문화적 매력을 느끼고 있다. 비록 민주화에서 뒤쳐져 있지만 아픔을 최소화하면서 발전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크다. 이 지역 상황은 지금도 진행형이어서 강의가 끝나는 4월 말이면 어떤 상황이 될지 모른다. 진행되는 걸 보면서 같이 공부한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일단은 중동 아프리카의 지리를 머릿속에 넣어두는 것이 필요하다. 보통 중동 북아프리카라고 하면 터키와 이란은 빼고 생각한다. 오늘은 북아프리카 쪽에 초점을 두겠다. 앞으로 이어지는 2,3강은 걸프 지역에 초점을 둘 것이다. 최근은 리비아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리비아는 이집트 옆에 위치한다. 리비아는 민주화 시위가 지속되어 지금은 내전상황이다.

1. 튀니지는 민주화 혁명이 아닌 시민혁명, 그리고 SNS(소셜네트워크)

일단 튀니지 혁명에 대해 알아보겠다. 이것을 민주화 혁명이라고 볼 것인지 시민혁명으로 볼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아직까지 민주화라는 결과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시민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람들은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지금까지 이런 혁명을 볼 수 없었다’라는 말을 하는데, 여기에는 중동사회가 가부장적이고 억압적이라 저항적이지 않다고 보는 서구적인 사고가 들어가 있다. 중동 북아프리카가 민주화에서 후진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종교나 아랍의 문화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나 이곳은 지금 역사적인 혁명의 시기를 겪고 있다.

‘튀니지는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의 SNS 혁명'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또한 중동 지역에는 '알자지라'라는 24시간 위성방송을 하는 방송국이 있는데 시위현장을 마치 CCTV처럼 생중계한다. 아랍어를 쓰는 국가 모두가 이 방송을 보기 때문에 이번 혁명 과정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기존에 존재하던 분노와 억압의 강도가 셌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므로 시민의 분노와 SNS의 역할이 합쳐져 촉발됐다고 볼 수 있다.

2. 무바라크 시절 이집트와 중동 지역의 혁명

이 지역은 공통점이 있다.

1) 종교는 이슬람교이고, 언어는 아랍어라는 점 2) 근대 이전까지 아랍지역이었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영토로 한 나라였던 점, 즉 광범위한 공통의 역사 3) 30-40년간의 독재정권을 겪으며 형성된 계층갈등의 심화 그리고 4) 산업 성장 기반이 없고, 외부 의존적이라는 점 이다.

이집트는 이 지역에서 중요한 나라이다. 이집트에서는 아랍연맹사무총장, 노벨상 수상자, 유엔총장 등이 나와 국제적으로 힘이 있는 국가이지만, 팔레스타인을 누르고 자국민을 억압하면서 버텨 왔다. 통계는 없지만 1/3이 유형, 무형의 미국원조로 살아간다. 독재가 지속되다 보니까 미국에도 무바라크 정권이 짐스러운 시점이었고, 시민의 힘이 압도적으로 드러나자 무바라크는 미국이 버리는 카드가 됐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미국에 달렸다’는 건 믿을 말이 못된다. 오히려 시민의 손에 달렸다. 그것이 진정한 권력 투쟁이고 이집트는 지금으로선 시민이 이긴 상태다.

지금 중동은 2차대전이 끝난 것보다 더 큰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이들은 자기들 손으로 혁명을 만들어 가고 있다. 프랑스 혁명만큼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이번 혁명은 시대를 앞서 가는게 아니라 마무리하는 혁명이라는 큰 의미가 있다. 20년 전 냉전시대가 끝나면서 사라졌어야 할 미국의 패권을 등에 업은 독재정권이 중동이라는 특수성과 석유의 이익 때문에 지속되어 온 것이다. 지금 카다피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고 있는 형국이다. 정치적 패러다임으로 봤을 때 이미 끝났다는 의미이다.

3. 리비아의 시민혁명

카다피가 어떻게 정권을 잡게 되었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상황이 진행될 가능성이 있는지를 살펴보겠다. 카다피는 20대 때 쿠데타로 집권한 후 42년간 권좌에 있었다. 그는 카다파 족이어서 카다피가 됐다고 한다. 그는 60-70년대 이집트 낫세르의 영향을 많이 받아 아랍사회주의와 부족주의 성격을 띄는 범아랍주의 성향이 강하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카다피의 패션이 체게바라와 비슷하고 사회주의적 성격을 보여주는 패션을 고수한다는 점이다.

리비아는 이슬람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국영으로 운영되는 영역이 많다. 또한 리비아는 70년 대 대의민주주의가 아닌 ‘자마리아’ 즉 인민공화국이라고 선언한 바가 있다. 독특한 점은 카다피와 그의 측근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다피는 직책이 없다는 점이다. 이때까지 카다피는 권력을 잡은 후 시민에게 고문, 감금은 했지만 처음 집권과정에서 사람을 많이 죽이진 않았다. 미국도 카다피를 두고 막무가내이지만 실용주의라고 인정했다. 또한 그는 석유자원을 팔아서 아랍권을 통합하려 했고 역내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이런 기반을 통해 그는 40년간 정권을 이어 올 수 있었다. 그는 석유를 팔아 번 돈으로 대외정치에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계속 보여왔지만 이집트만큼 국제정치에 영향을 미치기는 어려웠다.

카다피는 이슬람 사회주의를 내세우면서 반미제국주의 투쟁을 진행해 왔다. 미국과의 관계가 최악일 때는 레이건 대통령 때였다. 이란의 팔레비왕조가 무너지면서 미국의 중동전략에 혼란이 왔다. 미국이 이라크를 시켜서 이란을 침공하게 만들 때 카다피는 이란을 지지했다. 이것 때문에 레이건 때 양국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카다피를 ‘중동의 미친개’라고 불렀다. 그 때부터 카다피 전복공작을 시작하게 됐다. 사실 이런 사건들이 없었다면 크게 그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테러사건의 배후였다는 이유로 트리폴리가 공습당하면서 그의 수양딸이 죽었고 90년대 말에는 중동에서는 영향력이 없어서 아프리카주의로 전환했다.

그는 정서적으로 문제가 생긴게 아니가 싶을 정도로 돌출행동을 많이 했다. 아프리카 왕같은 옷을 입고 나오기도 하고, 아프리카연합의 의장국을 맡으면서 부족장을 모아놓고 자신을 왕중왕으로 일컫거나, 외국에 순방가면서 천막을 지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카다피와 서방과의 관계를 보면 그는 영국의 전 총리인 블레어와는 친하게 지냈다. 3년 전 총리직 그만두기 전에 리비아 유전개발권을 따 줄 정도로 친했다. 그리고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과도 가까웠다. 리비아에서 카다피가 잘못한 게 있다면 이번에 혁명이 발발한 후 전투기까지 띄워서 사람을 죽인 것이다. 미국이 석유 이익 때문에 편을 들어 주고 싶어도 국내에서 표가 깎여서 그렇게 못하는 상황이다. ‘앞으로 리비아는 어디로 갈 것인가?’는 국민의 힘에 달렸다.

이집트는 인구의 97%가 국토의 3%에 모여 살고 있다. 반면 리비아는 전체가 사막이고, 사람들이 흩어져 살기 때문에 결집된 시민의 힘이 없다. 지금 리비아는 카다피가 있는 상태에서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으면 카다피를 축출할 방법이 없다. 가장 좋은 방향은 인명피해가 최소화 되는 선에서 카다피가 멈추는 것이며, 리비아인의 힘으로 민주적인 새로운 정부를 꾸리는 것이다. 반군은 전력이 큰 게릴라군이 아니기 때문에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지상군 투입은 못 하기 때문에 현 상황이 유지될 것이다. 그렇다고 다시 카다피가 장악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4. 인도적 개입, 해야 한다 vs 말아야 한다

인도적 개입을 두고 국제적으로 논란이 많다. 왜냐하면 군사행동이 목숨을 빼앗는 전례들이 많기 때문이다. 옳으냐 그르냐는 결과를 중심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코소보는 인구가 밀집된 도시였다. 공습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서 누가 학살자인지 학살받는 사람인지 구분이 안 됐고 악천후까지 겹쳐 실패했다. 코소보 사태에 대한 군사적 개입에 대해 좌파지식인은 개입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한다.

반면 90년대 시에라리온이 절망의 땅이 되어버렸을 때 영국군이 개입했고 이는 성공적이었다. 군벌세력을 몰아내는데 성공했고 학살의 주범인 라이베라 대통령을 잡아서 국제전범재판에 붙였다. 그 후 라이베리아에서는 여성대통령이 당선되었고 결과도 그런대로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인도적 개입이 성공하지 못한 다른 케이스들이 더 많이 있다. 90년 대 이라크는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고 10년 간 엠바고를 실시했는데, 이라크의 어린이와 병든 사람들이 죽는 결과를 낳았다. 지금도 죄를 저지른 당사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징벌을 주는 집단징벌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유엔의 금수조치 책임자였던 사무차장이 금수조치를 반대하는 일까지 생겼다. 90년대 르완다는 300만명이 학살됐는데도 국제사회가 개입하지 않았다. 왜 그런지 알 수 없다. 또한 90년대 아프간 내전에도 개입하지 않았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인도적 개입’이라는 명분으로 이행됐다. 이라크에는 알카에다도 없었고 대량살상무기도 없었는데 인도적 개입이라고 용어를 붙여, 결국 인도적 개입이라는 말만 오염시켜 놨다.




Q & A: 구정은 기자와 수강생과의 대화

Q. 혁명 후는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나? 시민의 힘이라고 하는 데 시민의 힘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을까?

A. 한국의 386 세대가 시민의 힘을 의심하는 경향이 더 강하다. 동시에 그들은 미국의 힘을 믿는다. 이라크 전이 개시되기 전 몇 달 전부터 세계 곳곳에서는 반전시위를 비롯한 움직임이 많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유명한 교수나 학자,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반대해 봤자지’ 하는 회의론이 대세였다. 시민들의 움직임이 미국이 일으킨 전쟁을 막지는 못했지만, 건전한 시민들의 반대가 있었기 때문에 이라크의 사상자를 줄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국제사회가 반대하는 이라크전쟁을 했고, 이 과정에서 미군들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많았지만, 만약 모두가 전쟁에 무관심했다면 더 심하게 사상자를 냈을 것이다. 미군 측에서 오폭 사고를 내면 시민들이 민간인학살이라고 크게 반발하면서 공습자체를 많이 바꿨다. 그것이 바로 시민의 힘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시민의 힘은 작용을 한다.
 
지난 30년 동안 민주화를 이루지 못한 이집트의 경우, 부시 전 대통령은 중동민주화를 원했는데 오바마는 무바라크를 끌어안았지만 이집트 국민의 힘에 밀려 무바라크를 버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시민의 힘은 결정적인 순간에 보이는 것 같다. 중동에 있는 사람들은 이집트를 싫어한다. 매춘부, 사기꾼 등이 이집트를 묘사하는 단어이다. 이집트인들은 부패한 정권 밑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시민들 뼈 속 깊이 부패했기 때문이다. 지금 시민혁명 이후 집권한 이집트 총리는 1년 간 교통부장관을 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주변에는 노벨화학상을 받은 저명한 물리학자와 나사에서 근무한 과학자 지식인 그룹이 그 주변에 있다. 이집트에서는 시민사회가 축적한 힘이 현 상황에서도 이집트가 아수라장이 되지 않게 하고 있으며, 군부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Q. 과연 인도적 개입이라는 명분하에 타국민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옳은가?

A. 인도적 개입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나 원론적이라는 문제가 있지만 원칙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죽여도 되는 정권은 없다. 인권을 넘어서는 주권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실제적인 군사행동은 또 다른 인명피해를 가져오는 것이다.

리비아의 경우는 군사시설에만 폭격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그러나 북한정권에도 인도적 개입을 해야 하나? 평양 같이 인구가 밀집한 곳은 일반인들이 수 천명, 수 만명이 죽는 것이 뻔한 사실이다. 사건 하나하나에 따라 달라 ‘옳다 그르다’하기 어렵다. 지금까지는 리비아에 대해서는 군사개입을 했어야 하는 상황이라는 평가가 많다. 벵가지 공습 함락 때 카다피 군에 타격을 주면서 민간인 거주구역이 아닌 곳에 폭격하는 것은 합당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점은 국제법을 연구하는 분들도 혼란스러워한다.

Q. 중동 지역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십 수년 전에 국제부에 갔을 때 막내였고 선배들이 미국과 유럽을 담당했다. 국제부에서 일하다가 사회부로 옮겼다가 다시 2001년 다시 국제부로 갔을 때 9.11이 터졌고 역시 막내였다. 그때 또 중동을 맡아서 공부를 하면서 출간된 책을 섭력하였다.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 실크로드 그런 것들을 좋아했고 문화적 매력도 느꼈다. 막내라서 중동 아프리카 지역을 맡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어느새 인생의 중심이 되었고, 국제정세 역시 지금에 와서는 유럽은 어떤 영향도 없고 변수도 아닌 상황이 되었다.

2001년 후반 9.11 이후부터는 날마다 집에 가면서 이라크 가는 생각을 했다. 요르단에 한국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했는데 어느 날 비자가 나왔다. 사담후세인이 국민투표를 한 적 있는데 이 때 해외기자초청을 하면서 바로 다음날 요르단으로 갔다. 이라크에 들어가 있다가 최후통첩 때 요르단으로 나와서 이라크전을 보았다. 나야 달랑 나오면 그만이지만 남아 있는 사람은 죽을 수도 있었다. 인생에 가장 마음이 아픈 부분이었다. 그 다음에는 관심사가 아프리카로까지 넘어갔다.

Q. 중동 아프리카 지역에서 미국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

A. 그들은 미국을 굉장히 싫어한다. 이 지역은 미국의 위선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독재정권인 무바라크 정권을 밀어주었고, 이라크 전쟁을 통해서 미국의 위선은 극명하게 드러났다. 역사가 7000년이나 된 세계 최초의 국가이자 문명이 중첩된 국가인 이라크에 대해 미국은 오만하기까지 했다. 미국은 한국 전쟁 때 남한을 지원했고 한국은 미국을 상대로 돈을 벌기도 하는 가까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중동에게는 그렇지 않다. 필요성을 인정하는 정도이지 미국을 옹호하는 것은 중동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다.

첫 강좌를 듣고서: 국제연대위원회 인턴 장유진

우연히 몇 해 전 세바스티앙 살가도 사진전을 보게 됐습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미국중심의 동북아 정세만 공부하던 때,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우리와는 상관없어 보이는 지구 반대편에서 고통 받는 이들에게 관심을 갖게 했고, 참여연대의 중동 북아프리카의 강의를 듣는 계기가 됐습니다. 구정은 기자의 생생한 강의는 이 지역의 상황을 ‘학문적 성찰의 눈’이 아닌 ‘기자의 예리한 눈’으로 현장의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받았습니다. 특히 체험담과 그 지역사람들의 시각에 대한 설명은 책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이어서 값졌습니다. 지도자의 성향이나 국민성 등 체험한 사람에게만 나오는 소소한 일화들이 많아 흥미로웠습니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왜’라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됐습니다. 좀 더 깊이 있는 내용으로 이어질 두 번째 강의가 기대됩니다.


강좌 기록 및 후기: 국제연대위원회 인턴 장유진


다음 강의
4월5일(화) 중동 북아프리카의 현실과 재스민 혁명의 의미
강사: 구정은(경향신문기자), 안주식(KBS 피디)


*1강 강의자료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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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을 자행하는 카다피 정권을 강력 규탄한다


튀니지를 시작으로 아랍권 전역을 휩쓸고 있는 민주화 시위는 민중을 억압하는 독재는 결코 권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진리를 다시금 확인시켜 주고 있다. 압제에 맞서 분연히 일어나 싸우고 있는 아랍 민중들의 위대한 투쟁에 경의를 표하며 아랍의 독재자들은 즉각 민중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리비아 카다피 정권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1000명이상의 학살은 지금까지 발생한 아랍지역 시위대에 대한 진압 중에서도 최악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양심과 상식에 비추어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심각한 범죄이다. 시위대를 향해 전투기까지 동원해 무차별 학살하는 것도 모자라 카다피는 TV를 통해 “시위대를 청소”하라는 끔찍한 선동을 하고 있다. 정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용병까지 동원하여 수백 명, 수천 명을 죽이겠다고 공언하면서, 이것을 리비아의 통합을 지키기 위한 순교자적 행위로 포장하는 카다피의 광기는 분노를 넘어 우리를 경악케 하고 있다.
카다피 정권은 즉각 학살을 중단하고 시위대와 권력 포기를 전제로 대화에 나서야 한다. 언론의 자유로운 취재 및 희생자들에 대한 구호에도 즉각 나서야 할 것이다. 카다피 정권이 저지른 범죄는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며 독재기간동안 축재한 재산은 리비아 민중들을 위해 쓰여 져야 할 것이다.

한국의 많은 건설사가 리비아에 진출해 있는 등, 그동안 한국과 리비아는 밀접한 경제협력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최근에는 권력실세인 대통령의 친형이 굴욕을 감수하면서 카다피와 면담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도 한국 언론에 소개된 바 있다. 현지 교민 및 건설노동자의 안전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중대한 인권범죄에 대해서 성명서 하나 발표하지 못하는 한국정부의 무원칙한 외교는 매우 실망스럽다. 중대한 인권범죄에 분노하는 국제사회의 요구에 동참하는 것은 건설수주액으로 대표되는 경제성과보다 우위에 둘 수 있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2월 24일 오전에 ‘글로벌 코리아‘국제학술회의에서 최근 아랍지역의 민주화 시위를 언급하며 “장기독재의 지속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발언했다면, 당장 리비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살에 대해 한국정부가 취할 수 있는 조치를 다하는 것이 같은 회의에서 “민주국가의 정부는 국민의 인권을 존중한다”고 한 발언과 합치되는 행동일 것이다. 민주국가의 정부가 존중해야할 인권의 내용과 범위에 대해서는 민주국가의 정부수반인 이명박 대통령이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산유국 리비아에서 벌어진 민주화 시위로 인해 주가지수는 떨어지고 유가는 상승하고 있다. 아랍 민중들의 민주화 시위가 확산될수록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안정적인 석유확보란 명분으로 국민들을 억압해온 아랍지역의 독재정권들을 묵인해온 소위 서방 선진국들은 지금도 죽어가고 있는 아랍민중들에게 답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와 인권은 석유보다 위에 있는 가치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한국사회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자원확보와 외화획득이란 이름으로 아랍민중들에 대한 고려 없이 진행되어온 각종 프로젝트에 대하여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면 카다피의 학살에 대한 한국사회의 침묵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한국 시민사회는 그 어떤 변명으로도 학살에 대해 동의 수 없으며 학살을 자행하는 독재정권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카다피 정권은 즉각 학살을 중단하고 퇴진하라!

2010년 2월 24일
국제민주연대/군인권센터/민주노동자연대/다산인권센터/다함께/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쟁없는세상/장애인정보문화누리/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진보네트워크센터/참여연대/천주교인권위원회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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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사태, 한국정부는 ‘자원’과 ‘국익’을 넘어 ‘인권’과 ‘민주주의’를 우선에 놓고 대응해야

튀니지발 민주화 혁명의 바람이 리비아의 카다피 독재정권을 흔들고 있다. 그러나 지금 국민들의 목숨을 건 저항에 직면한 카다피 정권은 광기에 찬 무자비한 학살에 나서고 있다. 전투기까지 동원해 평화적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했고 이미 수백명의 민간인들을 살상했다. 앞으로 더 많은 살상이 우려된다. 우리는 국민들을 상대로 저지르고 있는 이 같은 만행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카다피 정권은 피의 학살을 중단하고, 즉각 퇴진해야 마땅하다. 참여연대는 독재 권력에 맞서고 있는 리비아 국민들의 정당한 저항 행위를 적극 지지한다.

국제사회는 이미 규탄의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주요 국가들이 카다피의 폭력진압을 규탄했고 유엔인권이사회도 12개국 이사국의 요청에 따라 반인도적 범죄 문제를 다룰 특별 회기를 열 예정이다. 무수한 국제 NGO들이 유엔에 서한을 보내 리비아 카다피 정권의 학살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각국 정부와 시민들은 리비아 시민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연대해야 할 책무가 있다. 우리는 국제 NGO들과 유엔 인권이사회의 이같은 노력을 지지한다.

그러나 아직 한국 정부는 이렇다 할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대신 오늘 정부는 리비아 민주화 시위로 인해 국내외 금융시장에 미칠 영향과 현지 진출기업에 미칠 영향 등을 점검하는 관계장관회의를 연다. 급등하는 유가 등 예상되는 파장을 검토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5.18 학살에 대한 단죄와 독재에 저항했던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갖고 있는 한국이 국제사회가 비난해마지 않는 카다피 정권의 살육전에 대해 침묵해서는 안된다. 한국이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이라면 제네바에서 오늘 열리는 인권이사회 특별 회기에서 행동에 나선 리비아인들을 지원하고, 학살을 즉각 중단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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