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국제연대위원회입니다. 올해 3월부터 세계무역기구(WTO)의 도하개발의제의 농업협상이 본격적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이를 앞두고 농림부가 향후 2년간 협상 실무책임자를 모집하려 했지만, 단 한 명의 지원자도 없었다고 합니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경제특구지정 등 세계화의 공세 속에서 지혜를 모아야 할 이때, 참으로 씁슬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주에 이어 세계의 분쟁지역 중 오늘은 첫 번째로 인도-파키스탄의 분쟁을 살펴 보겠습니다.

카슈미르(Kashmir) 지역 분쟁의 서막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이자 히말라야 산맥의 끝자락에 K-2봉이 우뚝 서 있고, 카라코람 산맥의 만년설이 펼쳐진 카슈미르. 영국의 록그룹 레드 제플린이 찬사를 보내기도 한 카슈미르는 아름다운 숲들과 호수, 초원과 사막이 어우러져 비경을 이루고 있어 '동양의 스위스'라 불리우는 곳입니다. 풍부한 수자원을 이용, 농업과 목축업이 발달하였고, 특히 카슈미르(cashmere) 모직은 유명합니다.

현재 인구는 인도와 파키스탄 지역을 합쳐 약 1300만명에 달하며, 전체 주민 가운데 약 77%가 이슬람교도이고, 나머지는 힌두교와 불교·시크교 등입니다. BC 3세기 마우리아 왕조를 거쳐, 서기 500년경에는 파키스탄 북부 탁실라를 중심으로 불교 문화가 꽃피었던 곳이며, 11세기부터 이슬람 왕조가 흥망을 거듭하다 19세기 영국이 인도를 점령하면서 카슈미르도 영국의 간접 통치를 받았습니다. 당시 카슈미르에는 560여개 국가들이 있었고, 이들 왕국은 소수 힌두교계(22%)임에도 불구하고 지역 주민의 대부분(77%)인 이슬람교도들을 탄압하며 영국의 식민 지배에 협력하였습니다.

1947년 영국으로부터 인도가 독립할 당시 인도는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독립하였고, 특히 이 과정에서 각 지방의 자율적 결정에 따라 인도 또는 파키스탄으로 편입하도록 하였습니다. 당시 카슈미르 지역은 번왕국이 통치하였는데, 번왕국의 하리 싱(hari Singh, 힌두교)은 파탄(북방족속이라는 의미)인들이 카슈미르 지역으로 침입하는 사건 속에서 위협을 느껴, 절대다수의 이슬람교도가 원하는 파키스탄 귀속이 아닌 1947년 10월 26일 국민투표를 전제로 인도로의 편입을 결정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카슈미르지역의 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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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분쟁

1947년 10월 카슈미르의 이슬람 무장부족 집단이 파키스탄의 지원 아래 수도인 스리나가르(Srinagar) 점령을 시도하자, 인도는 즉각 군대를 파견하여 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인도의 네루 수상은 주민투표에 따라 카슈미르의 장래를 결정하겠다고 약속했고, 유엔에 이 문제가 상정되어 1948년 8월 정전합의가 이뤄지고, 1949년 1월부터 정전협정이 발효되었습니다. 이때 카슈미르에 대하여 인도가 카슈미르 지방의 2/3를, 파키스탄이 나머지 1/3을 분할점령하고, 이를 경계하는 통제선(Line of Control)이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유엔 결의안은 '인도령 잠무 카슈미르가 인도와 파키스탄 중 한 곳을 선택할 때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주민투표를 통해 결정해야 한다'고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엔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은 전쟁후에도 자국점령 카슈미르가 독립정부임을 주장하였고, 1951년 인도의 네루 수상은 잠무 카슈미르의 '특별 지위'를 규정하는 헌법 370조항을 신설하고, 1957년 이 지역을 인도 연방의 하나로 편입해 버렸습니다.

1964년 네루의 사망후 인도의 정국혼란을 기화로 파키스탄은 인도 점령 카슈미르에서 비정규전을 감행하여 그해 12월 카슈미르 지역을 공격하였고, 1965년 4월에는 쿠츠(Rann of Kutch)지역에서 양측간 충돌이 빈번히 발생하였고, 결국 1965년 9월 통제선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2차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 전쟁은 구소련의 중재로 1966년 1월 타시켄트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1971년,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하는 과정에서 파키스탄의 세력약화와 난민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인도가 개입하여 3차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이 전쟁은 1972년 심라(Simla)협정으로 전쟁이 종료되면서, 지금의 통제선이 확정되었습니다.

이 분쟁으로 1989년부터 1999년까지 약 7만명 사망, 17만5천명의 난민이 발생하였습니다. 작년에는 양측의 공방전이 가열되는 가운데 인도는 '테러와의 전쟁'을 강조하며 전쟁태세를 강화함으로써 핵전쟁의 위기를 초래하기도 하였습니다. 아직도 이 지역은 통제선을 중심으로 양국가에서 포격전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1980년대 들어 인도령 카슈미르에서 인도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잠무 카슈미르 해방전선(JKLF)'이 결성되면서 이지역의 갈등은 한층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이들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지원을 받으며 인도군에 대한 테러를 벌이면서 '주민들의 자유로운 투표를 통해 잠무 카슈미르의 미래를 결정할 것'을 인도에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인도는 자치정도는 허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고, 파키스탄은 이들의 투쟁을 지지하지만 분리 독립 대신 파키스탄으로의 편입을 원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역패권을 둘러싼 갈등 : '힘의 정치' 지향

카슈미르지역은 비옥한 토지와 수력자원의 이용가능성이 높은 지역입니다. 특히 이 지역의 지형을 이용한 수력발전은 파키스탄의 공업화를 위해 중요한 요소입니다. 따라서 파키스탄이 카슈미르 문제에 양보하지 않는 원인 중의 하나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군사적 충돌을 부추킨 것은 과거 냉전시대에 지역패권을 둘러싼 갈등이었습니다. 즉, 카슈미르 분쟁은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회교권 국가들의 지원과 중국, 소련, 미국 등의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인도와 파키스탄에 대한 군사원조로 무력경쟁이 지속되었던 것입니다. 파키스탄과 인도, 모두 핵보유 국가(미국의 연구기관에 의하면 인도는 65기, 파키스탄은 40기 가량의 핵탄두를 가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이들 모두 핵확산 금지조약 가입을 거부하고 있습니다)이고, 미사일 개발 등 대량살상무기의 개발에 서로 경쟁적입니다.

파키스탄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2차 대전이후 남아시아에서 거의 유일한 친미정권이었던 파키스탄은 1980년대 후반까지 미국의 막대한 군사원조를 받았습니다.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을 둘러싼 인도-파키스탄의 3차 전쟁은 소련과 인도의 개입 속에서 치뤄진 전쟁이었고, 더욱이 1979년 이란의 혁명과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은 미국에게 파키스탄의 중요성을 부각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군사원조를 바탕으로 파키스탄은 핵무기 개발계획을 추진하였고, 미국은 이를 묵인 및 지원하는 정책을 취하였습니다(핵확산에 대한 이러한 미국의 자의적인 태도에 대해서는 뉴스레터 33호 참조). 탈냉전 이후에도 1997년 파키스탄은 핵무기제조능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공개 선언하였고, 1998년 지하 핵실험을 하기도 하였으며, 1998년 지대지 미사일 '가우리' 발사 실험을 시작으로 작년에는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사거리 1천 500∼2천km의 미사일 실험 발사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인도의 외교정책은 기본적으로 비동맹주의입니다. 그러나 1959년 중국과 인도간의 국경분쟁 이후 외교정책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카슈미르 지역은 인도-파키스탄-중국의 국경을 이루는 지역에 위치하여 인도-중국의 영토분쟁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중국은 영국이 설정한 맥마흔(McMahon) 라인을 불평등 조약으로 간주하여 이를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1959년 티베트 라사에서 발생한 폭동에 대한 인도의 군사적 개입에 대하여 1962년 중국은 군사적으로 대응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미국이 1971년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시도하자(이른바 '핑퐁외교'), 소련과 일종의 안보조약인 '평화·우호·협력조약'을 체결하고 친소정책을 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도는 1974년 5월, 지하핵실험을 통해 세계에서 6번째의 핵보유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8년 5월 3차례의 지하핵실험에 이어 사정거리 50㎞의 단거리미사일을 실험 발사하였습니다. 1999년에 카슈미르의 카길지역에서 벌어진 대규모 포격전 이후 2000년에는 12억 달러의 보병전투장비 증강계획을 결정하는 등 무력경쟁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분쟁의 '방치'와 인권의 실종

카슈미르 지역에 대한 분쟁 해결책으로 파키스탄은 유엔 결의에 따라 주민들의 투표로 주민들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인도는 1972년 3차 전쟁이후 체결된 협정에 따라 쌍무협상으로 해결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국제사회가 이 문제에 개입하는 데 반대하고 있고, 인도와 파키스탄은 모두 카슈미르 독립을 위한 이른바 '제 3의 선택'에는 모두 반대하고 있습니다. 핵무기와 대량살상무기의 기술이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전되면서 결국 강대국들도 통제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렇듯 카슈미르 분쟁이 '방치'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카슈미르 지역은 인권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는 지역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곳에서의 무장 군인들의 폭력과 살인, 고문, 인권유린, 건물파괴 등은 법(TADA : Terrorist and Disturbed Areas Act)에 의해 합법화 되어있는 실정입니다. 또한 국제사면위원회 에 따르면 인도의 공공안전법(Public Safety Act)은 카슈미르지역의 정치적 반대에 대한 탄압과 인권유린의 근거가 되고 있고, 1990년에서 2000년까지 경찰이나 무장한 준군사조직에 의해 끌려간 후 실종된 실종자들이 1000명에 이른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더욱이 9.11 테러 이후 전세계적인 군사주의의 발흥은 인도 사회 내부에서도 영향을 미쳐 구자라트 학살(구자라트 지역에서는 2천여명의 무슬림이 학살당했고, 수 천명의 여성이 강간 당했습니다)을 비롯한 각종 종교·인종 분쟁을 일으키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정권유지를 위한 내부정치의 이용목적으로, 혹은 지역패권의 유지를 위한 목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분쟁은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입니다. 카슈미르 지역 주민들의 무고한 희생을 방지하고 실종된 인권은 회복할 길이 없는 것일까요? 작년 2월 구자라트 학살 당시 민주적인 행동을 주장하고 나선 시민들과 비종교주의 단체들이 구자라트 학살 확대 저지와 인도-파키스탄 국경에 배치한 70만 대군을 철수케 한 점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지난 1월 18일, 한국을 포함하여 워싱톤을 비롯 전세계에서는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공동행동의 날을 가졌습니다(이날 행사는 미국의 반전네트워크인 평화를 위한 연대(United for Peace)와 국제ANSWER가 제안하였고, 아시아에서는 아시아평화연대가 조직하였습니다). 이처럼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영향력을 키워갈 때 분쟁과 갈등을 잠재울 수 있는 이성이 회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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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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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국제연대위원회입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북핵 문제가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평화적 해결을 위한 북-미 양국의 적극적인 자세와 한국 정부의 세심한 노력을 촉구합니다(188개 시민사회단체들은 SOFA개정과 전쟁반대와 평화를 위해 연대의 촛불을 피워 올리자는 신년 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기자회견내용보기). 오늘 우리는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분쟁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분쟁의 개괄적 이해

역사적으로 보면, 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의 분쟁은 크게 식민지 청산과 1, 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과정에서 발생한 분쟁, 이와 함께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전쟁이 있습니다. 그리고 독립국가 건설과정에서 이데올로기와 인종, 종족, 민족간 갈등에 의한 분쟁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 독립국가 전쟁 2차 대전후 프랑스, 영국, 포르투칼, 네델란드 등 유럽의 식민지 국가들, 즉 아프리카와 중동, 아시아지역의 국가들의 독립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1946년의 인도차이나반도, 1947년 마다가스카르, 1952년 튜니지아, 1954년 알제리, 1955년 카메룬, 1957년 서부사하라 등에서의 분쟁이 여기에 속합니다.


▲ 식민지 유산 및 전후처리과정에서 발생한 분쟁들

독립국가 건설과 함께 전후처리과정에서 파생된 국경의 문제 등 전후처리와 식민 유산의 문제 등으로 인하여 촉발된 분쟁들로서 이란-이라크 및 이라크-쿠웨이트 전쟁, 방글라데시 내전, 터키내 쿠르드족 분리운동 등이 그것입니다.


▲ 종족, 인종, 민족, 종교 갈등에 의한 분쟁들

1963년 사이프러스의 그리스, 터키 민족갈등, 1948년 버마, 1950년 인도네시아, 1959년 티벳, 1959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오는 이라크 내 쿠르드족 갈등, 1967년 나이지리아, 1983년 스리랑카의 타밀분쟁, 너무나 악명높은 이스라엘-파키스탄, 소말리아, 르완다 등이 인종, 민족간의 갈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종교문제로는 인도의 카슈미르 지역, 인도-파키스탄, 레바논 내전, 방글라데시 등의 지역에서 분쟁이 있었습니다.


▲ 이데올로기에 의한 분쟁

냉전시대에는 독립국가 건설과정과 이후 집권세력과 반대세력간의 정치투쟁에서 무엇보다도 이데올로기적 갈등이 강하게 작용하였습니다. 콜롬비아, 앙골라, 알제리, 멕시코, 인도네시아, 이란 내분, 필리핀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분쟁은 하나의 원인으로만 규정하기에는 상호 복합적으로 얽혀있습니다. 즉,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내부적으로 봉합되어 있던 종족, 인종, 종교, 민족의 문제들이 신생 국가권력을 둘러싼 투쟁의 과정에서 혼합되었던 것입니다. 국경분쟁 역시 종교, 민족, 식민지유산의 원인이 섞여 있습니다. 인도의 독립과정에서 발생한 인도-파키스탄의 문제는 식민지 유산과 종교, 국경 등이 얽혀 있었고, 동남아시아 대부분의 분쟁국가들이 정치권력과 이데올로기, 종교, 인종이 혼재된 갈등의 양상이었습니다. 즉, 스리랑카는 자치를 요구하는 힌두교의 타밀족과 지배세력이었던 불교의 싱할라족 간의 갈등이었습니다. 중동과 아프리카는 2차 대전후 "땅따먹기"를 끝낸 식민지 모국들이 철수하면서 제멋대로 그어놓은 국경에 대한 갈등과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강대국의 패권유지를 위한 독재정권 혹은 반대세력에 대한 끊임없는 지원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우리 나라의 경우처럼 신생국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이루어진 식민지 유산과 전후처리과정에서 발생된 것이며, 냉전시대에 독립국가 건설의 문제에서 정치적 갈등은 곧 이들을 후원하는 강대국들의 대리전이였기 때문에 식민지 유산과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내란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 하겠습니다.


중부 및 동부 유럽의 경우

한편, 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이후 등장하게되는 민족주의는 동부 및 중부유럽에서 민족국가의 형성 역사와 사회주의 시절 내부정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19세기 중부 및 동부유럽은 민족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한 국가내에 다양한 민족들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유럽의 화약고라 불리는 발칸지역에서는 1894년(세르비아인들의 폭동)에서 1912-1913년(발칸전쟁)까지 오토만제국이 제거되고 6개의 작은 독립 민족국가들이 탄생하였고, 중부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이후와 1919년 베르사이유조약 이후 발칸왕국(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가 된 세르비아)과 7개의 새로운 민족국가(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발트3국 핀란드) 가 탄생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국가와 민족이 일치하지 않는 '불완전한 민족국가'가 형성되어 소수민족은 증가했고, 특히 발칸에서는 소수민족을 제거하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전쟁, 추방과 학살, 대량 이민 또는 인구의 교환 등의 결과로 국경이동이 빈번히 일어났고 이는 민족간의 갈등을 고조시켰습니다.

전쟁 이후에 중부유럽의 몇몇 나라에서는 소수민족이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되었는데, 이는 국경의 이동(헝가리 1919년)이나 인구의 이동(체코 1945년) 또는 두 방법의 결합(폴란드 1945년)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모든 발칸의 국가들과 슬로바키아는 다수의 소수민족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주의화 이후 이 지역에서는 소련의 패권/ 일국사회주의에 대한 반발과 더불어 민족문제가 대두되었으며, 루마니아에서 헝가리인들의 이주, 폴란드에서 민족적 숙청 등 민족문제가 다양하게 표출되었습니다.

구소련에서는 잘알려진 강제이주를 통한 민족문제해결이 갈등의 원인이었습니다. 현재도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는 체첸민족은 러시아 혁명 당시 볼셰비키에 협력하였지만, 독립하지 못하고 자치권을 얻었습니다. 그나마도 스탈린 집권기에는 농업 협동화와 같은 강압적인 통합 속에서 점차 의미를 잃어갔고, 체첸 공산당의 지도부가 분리주의혐의로 끌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1937∼38년대에 일어난 체첸지역에서의 대규모 저항을 스탈린 군대는 약 12만명을 학살하며 진압하였습니다.

또한 2차 대전 당시 독립을 위해 독일에 협조한 '배반'의 댓가로, 1944년에 중앙아시아와 카자흐스탄으로의 강제이주 과정에서 40만명이 되는 체첸민족 중 약 30%가 기아와 계획적인 학살로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이러한 점에서 공산주의는 공산주의 이후에 구소련과 동유럽에서 민족갈등과 소수민족 문제가 전면에 재등장하는 데 기여한 셈입니다).



탈 냉전이후 지속되는 분쟁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tockholm International Peace Research Institute : SIPRI)에 의하면 2001년 대규모 무력분쟁이 24건 발생하였으며, 이중 3분의 2는 아시아 및 아프리카에서 일어났다며, 냉전 종식이래 12년간 이같은 추세가 지속되고있다고 밝혔습니다. 연구소가 밝힌 대규모 분쟁은 최소 1개 국가의 정부가 개입된 무력충돌로 연간 1천명 이상의 사망자가 생겨난 형태를 말합니다. 과거 소련과 미국의 냉전체제 하에서 저강도 분쟁(low-intensity conflict)의 형태로 발생하였던 지역분쟁은 여전히 탈냉전 이후에도 발생하고, 지속되고 있습니다(저강도 분쟁이란 강대국의 핵무기의 존재 때문에 규모가 큰 전쟁을 피하고, 강대국의 자기 진영에게 유리한 국제정세를 조정하려는 의도로 치루어지는 분쟁의 형태를 의미합니다). 이후 냉전체제의 종식, 즉 절대적 억제자의 부재는 이러한 저강도 분쟁이 증가하게 되고, 2차 대전 이후 냉전체제 속에서 잠재되어 있던 갈등이 지역적으로 폭발하게 되는 계기였습니다. 즉, 미국과 구소련이 냉전시대에 그러했던 것과는 달리 제 3세계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위한 경쟁을 벌리지 않는 것이 저강도 분쟁 증가의 가장 중요한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강도 분쟁에 대한 '위협과 이익의 불일치'(threat-interest mismatch)는 전반적인 개입보다는 강대국의 이해에 따라 선택적인 개입을 택하고 있어 갈등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있습니다.

더욱이 9.11이후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이 무력사용에 면죄부를 주면서 이스라엘의 '미국 따라하기'와 이로 인한 테러의 악순환과 인도 카슈미르지역의 긴장, 발리 폭탄테러 등으로 인하여 갈등의 해결에 대해 무력적 방법을 선호하게 되는 군사주의의 발흥이라는 국제정세도 평화적 문제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미국의 아프카니스탄 공격에 이은 이라크 공격 준비 등 '위협(테러)과 이익(석유, 패권)의 일치'를 위한 고강도 전쟁을 추구하고 있어 더욱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서글픈 역사, 희망없는 삶 : 강대국이 짓밟은 미래

분쟁문제를 보면서 우리가 묵과할 수 없는 사실은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인 국경문제, 독립국가 형성과정에서 강대국의 지원과 이후 독재정권에 대한 비호 등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다수의 분쟁문제들이 과거 유럽과 미국, 구소련의 책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진국들의 해결노력이 미흡하다는 것입니다. 선진강대국들은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선택적 개입을 하고 있어 분쟁지역들에서는 삶은 여전히 내일이 없는 삶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분쟁에 따라 벌어지는 대량학살, 강간, 청소년의 무장, 난민발생 등 인간파괴는 참혹하기 그지없습니다.

또한 탈냉전이후 새롭게 분출된 분쟁지역들은 경제적으로도 매우 낙후된 지역이기 때문에 국제사회의 도움이 절실한데, 빈곤퇴치를 위한 유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진국의 개발원조는 턱없이 부족하기만 합니다. 또한 경제적으로 이들을 옥죄고 있는 외채문제나, 몇몇 국가에 가해지고 있는 경제제재조치들이 가져오는 문제는 날로 심각해져가고 있습니다. 현재 또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는 이라크에서는 유엔의 경제봉쇄로 인하여 매달 4500-6000명씩 5살 미만 아동이 죽어가고 있다고 유엔아동기금과 세계식량농업기구가 밝혔습니다. 걸프전 이후 10년 동안 60-70만명의 5살 미만 어린이들이 사망하였고, 다른 연령대의 사람들을 포함할 경우 사망자수는 200-300만에 달할 것이라고 현지 조사자들이 밝혔습니다. 이러한 참상의 직접적인 이유는 걸프전 당시 파괴된 각종 시설이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의 경제제재로 복구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역금수 조치로 주민생활의 필수품들이 제때 공급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지구에서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국가들의 공동기구인 유엔이었습니다. 그동안 유엔은 난민구호, 평화유지활동, 선거감시 등 분쟁해결과 분쟁으로 인한 난민문제 등의 해결을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상임 안보리 5개국의 기득권으로 인하여 유엔은 그동안 강대국에 의해 도구적으로 이용되거나, 그 본래의 임무를 다하는데 많은 제약을 가져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만으로 우리는 유엔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현재 이러한 인권과 평화 문제를 지속적으로 다루어온 국제기구로서, 그리고 유일하게 국제사회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기구로서 유엔의 강화를 위해 지구촌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유엔 속에서 더욱 커져야 할 때입니다. 다음주부터는 지역별 분쟁현황을 알아보겠습니다.


관련사이트

지역분쟁국, 지역원인발발시기
아시아동아시아네팔내분정쟁, 이데올로기1996
버마분쟁민족/ 정쟁/ 마약1949
인도네시아분리분리/이데올로기/종교/식민유산1975
필리핀 내전종교/이데올로기/민족/분리1969
서남아시아미국-아프간이데올로기/종교

2001
방글라데시종교/민족/분리/식민유산

1974
스리랑카영토/종교/민족/분리/식민유산

1983
아프카니스탄정쟁/종교/종족/개입

1978
인도종교/분리/식민유산/종족

1947
카슈미르영토/종교/민족/패권/식민유산

1947
중동

이란



/이라크

이란종교/이데올로기/정쟁/민족

1963
이란-이라크영토/패권/민족/종교/정쟁/식민유산

1969
이라크-쿠르드영토/개입/패권 추구

1998
걸프전민족/분리/정쟁/종교/이데올로기

1959
이라크-쿠웨이트영토/식민유산/탈냉전/패권

1973

이스라엘



/기타

이스라엘-시리아영토/식민유산/탈냉전/패권

1948
팔레스타인민족/영토/종교/분리/식민유산

1948
터키-쿠르드민족/분리/식민유산

1922
레바논종교/정쟁/민족/식민유산/개입1958













북부수단민족/종교/정쟁/분리/식민유산/이데올로기

1956
알제리종교/이데올로기/정쟁

1989
차드정쟁/종교/민족/식민유산

1966
대호수지역르완다민족/정쟁/식민유산

1963
부룬디민족/정쟁/식민유산

1965
우간다민족/정쟁

1971
콩고정쟁/분리/민족/식민유산/개입

1960
케냐민족/정쟁

1978
앙골라이데올로기/정쟁

1975

서/동부



아프리카

소말리아정쟁/민족/종교/식민유산

1991
나이지리아정쟁/민족/분리/식민유산/종교/종족/지역/독재

1967
라이베리아정쟁/민족

1989
시에라레온민족/정쟁/식민유산

1985
유럽마케도니아민족/탈냉전/정쟁

2000
북아일랜드분리/종교/민족

1969
코소보민족/분리/탈냉전

1992
CIS-중앙아시아러시아-체첸분리/종교/탈냉전

1991
미주멕시코민족/정쟁/이데올로기

1991
과테말라정쟁/이데올로기1962
니카라과

정쟁/이데올로기1928
아이티

개입/정쟁1991
엘살바도르정쟁/이데올로기1979
페루정쟁/이데올로기1969
페루-에콰도르 국경분쟁영토1941
포클랜드영토/식민유산1982
콜롬비아정쟁/이데올로기

1964
자료출처 : 한국 국방연구원 세계의 분쟁과 전쟁
양영미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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