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하얀 아오자이를 입은 여고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일시에 하교를 하는 모습은 불그스레한 노을을 배경으로 학이 무리지어 날아가는 착각을 일으키는 매혹이었다. 불과 십 오년 전 호치민 시내에서 매일 같이 연출되던 이 장면은 사라졌다. 형형색색의 유니폼과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바닷물을 가르는 새우 떼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이리저리 얽혀 나름의 질서를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다.

호치민의 외양은 매일매일 변신하고 있다. 개방초기 길거리를 수놓던 씨클로(xich lo)는 시에서 발급한 번호판을 달고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 꽃이나 껌을 팔기위하여 끈질기게 진로를 방해하던 소년, 소녀들은 관광객의 편의를 위하여 어디론가 증발되었다. 식민시대, 전쟁, 그리고 사회주의 강성개혁(hard reform)시대를 상징하던 수많은 건물은 근대화를 상징하는 고층건물에 밀려 매일 역사의 저편으로 자취를 감추고 있다. 백화점에 넘쳐나는 명품 진열대를 보고 있으면 이곳이 불과 십여 년 전 안경, 모자, 신발까지 절도의 표적이 되던 빈곤의 땅이었음을 망각한다.

이러한 변화를 보고 성장주의자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도이머이(Doi Moi)라고 통칭되는 개혁개방정책 이후 매년 평균 7-10%의 성장을 가능하게 한 정부의 정책방향 그리고 국민의 높은 교육열과 근면함에 경의를 표한다. 역사학자들도 베트남의 저력을 새삼 강조한다. 베트남이 캄보디아 내전을 포함해서 중국과의 큰 전쟁에서 자주 승리했을 뿐 아니라 전쟁에는 져본 적이 없는 천하강적 미국에게 1패의 전적을 안긴 유일한 나라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숫자와 외양만 보면 베트남에 관한 이들의 평가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베트남은 성장하고 있고 앞으로도 성장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에 분명하다.

하지만 베트남의 외형적 성장 뒤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 이다. 베트남의 현재는 미래에 대한 예견을 유보하게 하는 여러 가지 모순을 안고 있다. 이러한 모순이 해결되거나 해소될 수 있을지, 아니면 새로운 변화에 대한 요구를 폭발시킬지 두고 볼 일이다. 베트남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안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베트남의 미래를 가장 어둡게 만들고 있는 것은 나날이 벌어지고 있는 빈부격차이다. 베트남에서 한국인이라고 부를 자랑하거나 현지인을 업신여기다가는 망신을 당할 수 있다. 웬만한 자가용을 가지고 있다고 거들먹거리다가는 벤츠와 BMW에서 내리는 베트남인을 보고 머쓱해진다. 일부 공산당 간부와 관료들 그리고 신흥기업가들은 서울의 강북에 맞먹는 가격의 집을 수십 채 가지고 자녀를 비싼 국제학교에 보내거나 아예 미국유학을 보낸다. 나이트클럽에는 수백 달러하는 위스키를 여러 병 시켜 놓고 매일 파티를 즐기는 젊은이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반면 베트남에서 가장 임금이 높은 호치민의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150달러 정도이다. 더욱이 미숙련노동자들은 최저임금을 조금 넘는 돈으로 생활을 한다. 이들이 아이 둘을 낳고 가족을 이루고 살려면 한 달에 400-500 달러는 필요한데, 현재의 임금으로는 부부가 모두 공장노동을 해도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다. 이런 현실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결혼을 하지 않거나,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지 않거나, 숙련노동자가 되어 임금을 더 받는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물가는 나날이 치솟으며 이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결과적으로 노동자가 호소할 곳은 파업 밖에 없다. 베트남의 주요 공단에서 매년 여러 차례 파업이 불길처럼 번지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외자기업의 경영자들도 노동자의 파업이 “떼를 쓸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다만 파업이 일어나면 주동자와 요구조건이 명확하지 않아 협상이 쉽지 않다는 점을 불만스러워 한다. 이처럼 베트남에서 와일드 캣(wildcat)이 일반화되고 있는 것은 노동자들이 기존 노동조합을 불신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파업을 감행하면서도 일자리를 잃거나 경찰의 주목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빈부의 격차가 커지고 노동자의 생활이 힘들어지는 만큼 베트남의 미래는 불투명해지고 있다. 한편으로 현재와 같은 산업구조로는 조만간 안정적 경제성장이 흔들릴 것이다. 물가가 오르고, 노동자의 생활이 힘들어지고,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이 늘어나면 자연히 노동집약적 산업이 감내할 수 있는 임금수준을 넘어설 것이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노동집약적 외국공장들이 앞을 다투어 떠나고 산업 공동화가 일어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산업구조를 고도화하려는 체계적인 노력이 없이 베트남의 미래는 없다.

다른 한편으로, 베트남의 미래가 불투명해질수록 노동자들의 정치적 요구가 거세질 것임에 분명하다. 베트남은 노동자의 나라이며 사회주의 국가이다. 현재는 성장을 볼모로 설득하고 강한 공안(公安)의 힘을 동원하여 노동자의 불만을 잠재우고 있지만 앞으로도 노동자들이 국가이념과 현실 사이의 모순을 용인할지는 불투명하다. 빈부의 격차가 큰 사회주의국가 그리고 노동자가 가장 못사는 노동자국가에서 어떤 정치가 일어날지 두고 볼 일이다.

베트남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해석이 단기적인 수치와 사건에 의해 예단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몇몇 국영회사가 부도가 나거나 주식시장이 요동친다고 비관에 빠지고, 역으로 베트남에 쏟아지는 외자나 높은 성장률을 보면서 낙관하는 것은 단견이다. 베트남은 향후 5-10년 안에 산업구조조정에 성공할 수 있을지 그리고 빈부격차를 줄이고 노동자의 삶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에 성패가 달려있다. 베트남의 저력을 믿으면서도 불안감을 감출 수 없는 것은 베트남의 지도자들과 외국자본이 모두 이런 정치경제적 현실보다 당장 눈앞의 이익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회의가 들기 때문이다.  
           

    채수홍(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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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지구의 날 선언문]
 
핵 없는 지구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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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4월 22일(금)은 지구의 날입니다.
 
지구의 날은 1970년 처음 미국에서 개최된 이래 올해로 41주년을 맞고 있으며, 한국의 지구의 날 역사도 벌써 21년이 되어갑니다. 지구의 날은 이제 전 세계 192개 나라, 2만여 개의 NGO와 10억 명이상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말 그대로 범세계적인 환경 캠페인의 날로 발전하였습니다.
 
이러한 지구의 날의 발전은 어쩌면 날로 심각해져만 가는 지구 환경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인류의 의식과 생활방식 변화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공감대가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는 증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에서는 1990년 이후 매년 시민, 환경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지구의 날 행사 개최하고, 무분별한 환경 파괴와 개발 지상주의로부터 하나뿐인 지구를 지키기 위한 시민 인식과 생활의 변화를 호소함과 동시에 정부 정책의 친환경적 전환을 촉구하여 왔습니다.
 
지구의 날이 한국에서 개최된 지 20년이 넘었지만 현재 우리가 직면한 환경위기 해결은 여전히 요원한 과제인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한반도의 젖줄인 4대강에서는 삽질이 멈추질 않고 있고, 지난겨울 우리는 전국각지에서 구제역으로 인해 수백만의 생명이 차디찬 땅 속에 산채로 묻히는 참상을 목도하였습니다. 특히, 한 달 전 옆 나라 일본에서 일어난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로 누출된 방사능 피해에 대한 국민들의 우려와 위기감이 갈수록 높아지고만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로 인한 우리나라의 방사능 피해는 심각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의 핵발전소는 안전하다.’는 말만을 앵무새처럼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의 이런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대기 중에서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누출된 방사능 물질이 검출되고, 이어 방사능비가 내리는가 하면 국내에서 생산된 채소에서도 방사능 물질이 검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수명 연장이 결정된 고리 원전 1호기가 고장으로 1달간 가동 정지되는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국민들의 불신은 오히려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사고 이후 핵발전소를 운영하고 있는 주요국가에서 핵발전소 폐쇄, 핵발전 정책에 대한 전면 재검토라는 발표가 나오는 시점에서도 정부는 후쿠시마 핵발전소처럼 수명이 다한 국내 핵발전소에 대한 수명연장을 결정하고 신규 핵발전소 건설과 함께 추가적인 핵발전소 부지선정 작업을 강행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와 25년 전 일어난 일임에도 여전히 핵발전소 반경 30km에 대한 영구적 폐쇄가 이루어지고 있는 체르노빌 사고로 인해 분명해진 것은 세계 어디에도 안전한 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계는 지금 이번 사고를 단지 일본에만 국한된 피해가 아닌 향후 수십 년간 지속될 지구적 재앙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와 그 피해는 현재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미 21기의 핵발전소를 운영함으로서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핵발전 밀도를 보이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추가적인 핵발전소 건설을 통해 앞으로 20년 뒤에는 최대 40기의 핵발전소를 운영하겠다는 것이 과연 지금 합당한 정책인지? 다시 한 번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핵발전소 추가 건설만이 대안이라는 일방적 정책 발표와 추진보다는 독일이 17기의 핵발전소에 대한 단계적 폐쇄와 에너지 수급 정책 전환을 추진하고 있는 사례를 통해 우리의 대안을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정부의 핵 발전 정책 전환을 요구합니다. 우선 수명이 다한 핵발전소의 수명 연장에 대한 전면 재검토와 핵발전소 추가건설을 기본으로 한 국가에너지기본계획 및 국가 온실가스 감축계획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과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정책을 결정할 것을 정부에 요청합니다.
 
관련 전문가들에 의하면 우리나라 전체 발전량에서 이미 수명 연장을 결정했음에도 기기 고장으로 전면적인 점검에 들어간 고리 1호기와 수명 연장 결정을 앞두고 있는 월성 1호기가 차지하는 비율이 2%정도 된다고 합니다. 2%의 전기를 아낀다면 적어도 노후 핵발전소의 수명 연장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에너지 사용 비중이 가장 높은 산업계와 에너지 산업의 책임 있는 대응과 고통분담은 물론 에너지 사용을 줄이기 위한 우리 사회 전반의 변화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시민 여러분, 방사능 피해라는 불안에 떨면서도 지금의 안락하고 편리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핵발전소 건설이 필요하다는 결정에 찬성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조금은 불편하지만 나부터 내 가정부터 에너지 절약을 통해 다음 세대에게 핵 위험으로 부터 안전한 지구를 물려주시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해답은 위기 때마다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하며 고통을 분담해왔던 우리나라 국민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진행형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해결을 위해서는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다는 경고가 외신보도를 통해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기자회견에 참여하고 있는 시민, 환경, 사회단체와 정당은 앞으로 우리나라에 미칠 수 있는 방사능 피해에 대한 감시와 시민들에 대한 객관적 정보 제공 및 국내외 방사능 피해에 대한 모니터링을 진행할 것입니다. 아울러, 핵발전 정책 전환을 위한 대안 마련 활동과 함께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한 에너지 절약 실천과 같은 대시민 캠페인을 전개해 나갈 것입니다.
 
핵 없는 지구를 꿈꾸는 시민여러분의 관심과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2011년 4월 21일

 
한국환경회의
일본대지진,핵사고피해지원과핵발전정책전환을위한공동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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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후기] 중동 북아프리카 현대사의 두 개의 키워드
                 - 석유와 미국
중동 북아프리카 민주화 혁명의 오늘과 내일



4월 12일, ‘중동 북아프리카 민주화 혁명의 오늘과 내일’의 두 번째 시간으로 ‘중동 북아프리카 현대사의 두 개의 키워드-석유와 미국’이라는 주제로 강의가 열렸습니다. 특별히 이번 주는 KBS <세계는 지금>의 안주식 PD가 리비아 취재 현장을 생생히 전달해 주었습니다. 곧 이어 구정은 기자가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석유와 미국이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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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공습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 안주식 PD

먼저 취재경로에 대해 얘기하겠다. 리비아는 튀니지와 이집트 사이에 있다. 리비아를 중간으로 나누면 서쪽으로 트리폴리, 동쪽에 내가 다녀온 벵가지가 있다. 국토면적은 큰데 사람이 별로 없고 해변에만 인구가 밀집해 있다. 또 트리폴리를 중심으로 카다피가 머물며 정부군을 주군시키고 있다. 벵가지를 중심으로 반군이 국가위원회 임시정부를 만들었다. 동서를 가르는 지역에는 상호공방이 이뤄지고 있다.


1. 왜 벵가지가 반군의 중심이 됐을까?

리비아의 동부와 서부의 부족은 다르다. 카다피는 동부 부족을 중심으로 특혜를 주어 온 반면, 서부 부족은 박해를 받아왔다. 벵가지는 왕정 때 도시가 부흥했던 곳이며 반카다피 성향이 짙다. 이 곳 벵가지에서 처음 시위가 벌어졌다. 광장에서 데모가 시작되고 바로 무력투쟁으로 발전했다.
튀니지, 이집트와 다른 것은 군부의 선택이었다. 리비아 군은 철저하게 카다피에 종속되어 있고 용병이 바로 시위를 진압하면서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벵가지 시민이 무기창고를 급습해 무장을 하고 트리폴리까지 진격했다. 내가 리비아에 들어갔을 때는 카다피군이 재정비하여 벵가지 반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이다.


2. 어떻게 분쟁지역을 취재하나

저널리스트들 사이에 ‘국경이 열렸다’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것은 저널리스트들이 한 명이 들어가서 안 죽었다는 얘기다. 최초로 들어간 사람이 CNN기자다. 접경지역에 있는 사람이 차량을 제공하고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장사를 하게 된다. 그 일대에 통역해주는 사람들로 난전이 이뤄진다. 시장이 형성되는 셈이다. 주로 코디네이터가 생겨 차량을 제공해준다.


3. 왜 싸우나?

대부분 반군은 비조직적이고 비계획적이었다. 쉽게 정리하면 ‘카다피가 부정부패가 심한데 왜 나한테는 한푼도 돌아오지 않느냐. 그런데 왜 때리기까지 하느냐?’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경제가 어려워서 무언가를 해보려하면 관료주의가 극심해서 뭘 못하게 하고, 억울하다고 한 마디 하면 때리는 것에 대한 반감이 심하다. 

반군에게는 정부군이 진격해왔을 때 물자를 수송하고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 석유항을 점령하는 것이 중요했다. 즉 아즈다비아 점령이 중요했다. 반군 입장에서 아즈다비아가 함락되면 벵가지가 포위되고, 대규모 학살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들어간 후에 아즈다비아가 함락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군이 미디어 센터를 제공해줬는데 거기서 빠져나가지 않으면 죽을 상황이었다. 저널리스트로서 어디까지 취재를 하는 것이 맞는지를 고민하기도 했다. 나는 일단 나가기로 했다. 거기에 알자지라 방송과 CNN만이 남아서 취재를 계속했다.


4. 비행금지구역과 개입의 문제

아즈다비아 함락 다음 날 비행금지구역이 설정됐다. 반군은 무기고에서 빼온 총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상황이었고 정부군의 무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비행금지구역으로 지정되지 않았으면 반군은 다 죽을 수도 있었다. 시민도 비행금지구역이 설정되길 원했다. 서방은 근접 포격을 하고 대규모 군사시설은 미사일로 폭격했고, 벵가지 주변도 폭격했다.

여기에서 R2P(Responsibility to Protect 국민보호책임)라는 개념을 두고 논란이 있다. 2005년에 유엔정상회의에서 채택된 이 개념은 코소보와 르완다 대학살이 재현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이 이라크에 개입할 때는 ’인도적 개입‘이라는 용어를 썼다. 유엔은 '인도적 개입'이라는 용어가 오염되어서 새로운 뭔가가 필요했다. R2P원칙의 적용은 내전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 내전이면 서로 무장 세력끼리의 싸움이므로 외부에서 개입할 수 없다. 리비아의 무장반군은 시민이냐 아니냐가 논란이 됐다. 그러나 리비아의 반군은 제대로 된 조직체계가 없는 시민이다. 현장에서도 느꼈지만 명백히 시민이라는 판단이 든다.


5. 주권을 침해했나 안했나

80년 광주항쟁과 북한 사례를 비교해 볼 수도 있다. 광주와 북한문제 사이에 리비아 문제가 있다. 광주항쟁 당시 유엔이나 미국이 한국정부에 경제제재를 했다면 정부가 시민을 공격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카다피가 유엔이나 미국의 경제제재에 대해 콧방귀를 뀔 인물이라는건 국제사회가 다 알고 있었다. R2P는 시민이 요구해야 한다. 북한은 시민이 요구하지 않으므로 적용되지 않는다. 북한의 민주화를 이루려면 북한 내부에서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집단이 있어야 한다. 리비아에서는 시민의 목숨을 구했으니 리비아에서의 R2P는 정당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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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북아프리카 역사와 석유와 미국에 대해: 구정은 기자

오늘은 중동의 역사를 살펴보겠다. 그러나 20세기에 한정해서 설명하겠다. 16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오스만쿠르크가 이 일대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20세기는 이것이 쪼개져 나가는 과정이다. 그 사이 서구열강들이 식민지를 차지하고 다시 독립하면서 중동지역의 20세기 역사가 만들어졌다.
 
다음은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 역사에 핵심이 되는 사실이다.

1. 아랍의 국가수립은 굴절되어 독재로 이어졌다.
2. 북아프리카는 반제국주의 투쟁을 해서 힘들게 독립했다.
3.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 이 지역 역사를 꼬이게 했다.
4. 이란은 맥락이 다르다
5. 현재 큰 국가인 사우디 아라비아는 20세기 역사에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1. 중동의 역사

1914년 1차 대전이 일어났는데 모두가 오스만 땅을 나눠서 땅따먹기를 했다. 터키는 거대제국이었는데 입장이 바뀌었고 1915년에 오스만이 무력화됐다. 2차 대전 후 카다피가 리비아를 집권하기까지 미국이 점령국 행세를 했다.

중동은 나세르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이 지역의 영웅이다. 카다피도 '나세르 키즈'를 자칭할 만큼이다. 나세르의 범아랍사회주의가 그에게도 영향을 크게 미쳤다.

1960년대는 독재체제의 틀이 만들어졌다. 이라크에서는 알 바크르 대통령이 취임하고 2년 후에 사담 후세인이 취임했다. 1969년에는 카디피가 리비아를 장악하고 그의 독재체제는 석유 민족주의로 간다. 1970년에는 이집트의 나세르가 사망하고 알 사다트 대통령이 당선됐다. 시리아에서는 알 아사드가 쿠테타로 집권했다. 10년 동안 아랍공화국으로 합쳐졌다가 다시 갈라지고 1971년에는 아랍에미레이트연합이 출범했다. 1973년에는 중동전쟁이 발생했고 1979년에 아라크 후세인이 대통령이 되고 몰락하기 전까지 자기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미국과 거래했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 미국에 영향을 끼쳤다.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을 보면 냉전시대에 이란이 미국에 미친 영향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련의 아프간 침공도 중요하다.


2. 중동에 대한 미국의 개입과 석유

중동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이해하려면 석유의 특징을 이해해야 한다. 석탄, 구리, 은, 금은 전세계적으로 나온다. 그러나 석유는 1)지리적 편중성이 강하다. 2)또 채굴 비용이 커서 대규모로 투자를 해야 생산할 수 있다. 3) 석유는 (생산) 탄력이 없어 독식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미국이 석유 때문에 중동지역의 독재정권을 지지해 주었고 이 지역이 민주화되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석유산업을 국유화한 것이 이 지역의 민족주의로 이어졌다.

이라크 전쟁의 모든 이유가 석유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일부는 석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노암 촘스키가 지적했듯이 미국의 중동 석유 이권이 유럽과 아시아의 재정을 떠받치는 역할을 한다. 이는 냉전 이래 미국의 세계패권전략의 일환이다.

중동 독재국가는 세금이 없고, 에너지가 무상이고 교육도 무상이다. 모두 석유 수입에 기반하고 있다. 중동 독재자들은 시민들에게는 반발이 없을 정도로만 최소한의 석유 이익을 나눠주고 나머지는 자기의 이익으로 챙긴다. 석유수출은 시민들에게 최소한의 당근이기는 하지만 중동나라들은 자원을 팔아 기득권의 이익을 챙기고 산업은 정체된 ‘자원의 덫’에 걸리게 되었다.



Q & A 안주식 PD.구정은 기자와 수강생과의 대화

Q. 리비아에서 반군과 시민군은 어떻게 구분하나?

A. 안주식 : 준정부 체제를 갖추느냐 안 갖추느냐가 관건이다. 리비아 사태는 중동전문가 누구도 예측 못 한 형태로 '조직이 없는 운동'이다. 10여 년 전부터 재야단체가 꾸준히 활동은 했다. 대표적으로 이슬람 브라더스(형제단)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반정부적 행동을 할 역량을 갖추지는 못했다.

임시정부인 국가위원회도 체계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일부 흥분한 시민이 친카다피 측을 축출해서 고문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위원회가 주도한건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국가위원회가 통제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리비아 반군은 군사체계를 갖지 않고 시민연합으로 움직이고 있다. 앞으로가 문제다. 리비아 반군세력에서 유일하게 무기를 쓸 줄 아는 집단이 이슬라미스트들이다. 정치체제가 와해된 상황에서 그나마 무장투쟁은 극단주의자들인 것이다. 알카에다와 비슷한 일부세력들이 국가위원회의 무장 군사훈련에 역할을 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앞으로 체계적으로 무장집단화될 가능성이 있고 그때는 내전이라 불러야 한다. 그렇게 되면 국제사회의 개입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그렇지 않다.


Q.  리비아 시위대는 주로 남자인데 여자들의 역할이 있었나? 여성의 지위는 어떻게 될 것인가?

A. 안주식 : 중동지역은 내외를 많이 한다. 물론 참여가 있었고 여성들만 따로 모여있기도 하고 남성들이 보호를 하기 위해 둘러싸고 있어서 언론에 잘 보여지지 않은 측면도 있다.
벵가지는 젊은 청년 위주다. 이집트는 투표할 때도 남녀 따로 한다. 현재 중동은 베이비붐 세대인 30세 이하가 60%로 젊은 층이 높다. 어느 전문가는 ‘이들이 데모할 나이가 되어서 이번 시위가 일어났다’고 한다. 이들 가운데는 직업 없이 30세가 된 사람이 많다. 리비아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비해서 국제화 수준이 높고 일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 수준이 높다. 여성들의 자각도 높았다.  

구정은: 리비아는 굉장히 보수적이어서 여성의 역할이 다른 나라보다 적다. 가부장제가 뿌리 깊어서 거의 여성이 안 보였다. 이집트는 1920년부터 여성운동이 활발해 최초 여성연맹이 있었는데 근래에 이슬람화가 진행되면서 사라졌다. 사우디에서는 이슬람주의자들이 돈을 주고 배우, 밸리댄서에게 히잡을 쓰고 텔레비전에 나와 자신들의 과오를 반성하게 하고 있다. 최근에는 여성에 대한 억압이 심해졌다. 페미니스트들을 탄압하고 이슬람식으로 행동하게 한다. 이란에서 여성에 대한 억압사례들이 많지만 1997년에 부통령이 나오는 등 많은 여성의 활동이 있었다. 이란의 혁명은 여성이 이끄는 운동이라고 한다.

이번 시위를 통해 여성의 지위가 높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혁명을 주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직화된 세력이 이슬람조직세력이다. 여성의 입장에서는 독이 될지 약이 될지 모르겠다. 미완의 혁명이 될 가능성이 높다.


Q. 반군이 조직화가 되지 않았을 때 노동조합이 시민진영이었을 것 같은데 어떤가?

A. 구정은: 조직화되어 움직이면 정치다. 조직화가 되지 않은 움직임이기에 혁명이다. 무슬림형제단은 1920년 대에 만들어진 근대 최초의 조직으로 이번 시위에서도 조직적으로 움직인 면이 있다. 조직되어 움직이면 혁명이 아니다.

안주식 : 이집트 민주화 시위를 봤을 때 군부가 중심이었다. 튀니지도 마찬가지였다. 이집트의 경우는 군부가 무바라크를 버린 형국이다. 이집트는 리비아와 다르게 군부엘리트 체제가 정치의 상당부분을 차지해 왔고 이를 계속 보장받고 있다. 대신 무바라크를 물리쳐 주겠다는 약속이 정치지도부 사이에 있었다. 이집트에서는 제2의 무바라크가 군부에서 나올 것이다. 리비아는 노동조합같은 조직력을 갖고 있는 세력이 없다. 산업구조가 달라 노동자 조직이 있을 수 없다.

Q. 중동지역 젊은이의 시위가 일자리와 관련이 있나?

A. 구정은 : 88만원은 우리 산업구조의 문제이다. 중동은 근대산업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와는 다르다. 경제구조 자체가 직업을 갖기 힘들게 되어 있다. 공무원이 제일 많다. 석유를 팔아서 나눠주는 구조로 되어 있어 공장은 아예 없다. 카다피가 일자리를 만들어 나눠줬지만 어느 순간까지만 유지되고 인구는 폭발하는 시점에 도달했다. 

안주식 : 중동의 산업은 역사가 다르다. 중동은 갑자기 돈이 생기고 인구가 늘어났지 그 전에는 인구가 없다. 교역만 있지 산업을 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다. 중동은 애당초 다르다. 노동집약 농업이 가능했던 데가 아니다. 유목민이 교역하거나 유목 활동을 통해서 먹고 살았다. 최근에 석유 때문에 인구가 폭발했고, 또한 인구의 절반이 외국인이다.


Q. 중동지역에서 정치와 종교지도자의 관계는 어떠한가?

A. 구정은 : 근대국가는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면서 탄생했다. 그러나 이슬람 종교 자체가 독특한 면이 있다. 무슬람형제단은 불법이었는데 살아남았다. 종교주의자들이 학교와 병원을 꾸리기 때문이다. 탈레반도 학교와 병원을 쥐고 있다. 그래서 이들의 뿌리가 매우 광범위하고 깊다. 중동에서 종교는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구조이다. 종교는 하나의 정치 주체로 중동 사회에 들어와 있다. 그 속에서 온건주의자와 극단주의자의 성향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지역의 민주화는 종교와 같이 가야 한다. 아랍권에서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
 

강좌 기록 및 후기: 국제연대위원회 인턴 장유진


다음 강의
4월19일(화) 민주화 혁명 이후 중동 북아프리카는 어디로?
강사: 구정은(경향신문기자)


*2강 강의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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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사실을 왜곡하고 괴담을 유포하고 있나

사실 왜곡과 색깔론 동원하는 정치인과 우익언론의 한심스런 행태 개탄스러워
자정능력 상실한 동아일보, 사과하고 정정해야


일본 후쿠시마 핵사고로 많은 국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는 가운데 지난 9일,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의원총회에서 “방사능 불안감을 조장하는 불순한 좌파세력이 있다”며 ‘일본대지진, 핵사고 피해지원과 핵발전 정책 전환을 위한 공동행동’(이하 공동행동)을 지목하여 비판하였다. 김무성 대표는 어제(4월 11일) 한나라당 최고위원회 회의에서도 “국내 방사능 유입가능성이 낮은데도 일부단체에서 이를 과장해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 비판했다.

이러한 가운데 동아일보는 지난 9일 “방사능 괴담세력, 북 핵실험 때는 뭘 했던가”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참여연대를 포함한 공동행동이 “사실을 왜곡 과장해 국민을 불안에 빠뜨리고 자신들의 주장이 틀려도 책임을 느끼기는커녕 억지를 되풀이하는 세력”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공동행동 참가단체 중에 광우병대책회의에 참가했던 단체들이 있다며 광우병 괴담에 이어 방사능 괴담을 주도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나아가 “공동행동의 핵심세력”이 북한이 핵실험 할 때 “북한을 두둔하는 행태를 보였으며 북의 주장을 그대로 옮기기도 했다”까지 주장했다.

참으로 어이가 없고 개탄스러운 일이다. 정부 주장에 문제점을 제기하면 괴담 취급하고 색깔론을 들고 나오는 정치인이나 우익신문의 행태는 분노를 넘어 안쓰러운 마음까지 들 정도이다. 기본적인 사실 확인도 없이 상습적으로 색깔론을 들고 나오는 행태가 병적인 수준에 가깝다는 인상마저 든다. 특히 동아일보는 최소한의 사실관계 확인도 없이 공동행동이 사실을 왜곡, 과장하고 괴담을 유포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정작 동아일보야 말로 사실을 왜곡하고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있다.

공동행동은 사실을 왜곡한 적도, 괴담을 유포한 적도 없다. 공동행동은 정부의 안일한 방사능 방재대책과 말바꾸기에 대해 비판하고, 사전예방 차원에서 방사능 물질 유입에 대한 만반의 대비를 정부에 촉구했다. 정부 주장과는 달리 방사성 물질의 국내 유입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였으며, 이는 이미 정부 스스로 전국에 퍼져 있는 방사성 물질의 수치를 매일 발표하고 있는 상황에서 알 수 있듯이 사실로 드러났다. 방사성 물질의 유입 경로에 대해서도 정부가 주장하는 편서풍 경로가 아니라 북극을 통해서 한반도로 내려올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듯이, 해외 기상 전문기관의 예측에 따른 정부의 비상조치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동행동의 입장이 사실을 왜곡하고 괴담을 유포한 것이라면 동아일보는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국민들의 방사능 불안은 오히려 정부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크다. 당초 정부는 일본 원전사고가 최악의 상황으로 전개되어도 ‘편서풍’ 때문에 한국은 안전하다는 주장만 되풀이하다, 방사능 물질이 다른 경로로 유입된 것으로 확인된 뒤에는 극미량이어서 안전하다고 말을 바꾸었으며 초동대처 역시 미흡하기 짝이 없었다. 국민 대다수가 이번 일본 방사성 물질 유입에 대한 정부의 주장을 불신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런데도 여당 원내대표나 유력 일간지라 자랑하는 신문이 정부의 안일하고 소극적인 대응은 외면하고 ‘좌파 불순세력’ 운운하며 그 책임을 공동행동에 전가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국가적인 불행이 아닐 수 없다.

동아일보 사설이 북한 핵실험에 대한 “공동행동 핵심세력”의 입장을 언급한 부분 또한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이다. 현재 공동행동의 주요활동의 책임은 녹색연합, 환경운동연합, 에너지정의행동 그리고 참여연대가 맡고 있다. 동아일보가 자의적으로 핵심세력을 운운한 것이 아니라면, 동아일보는 이들 단체 중 어느 한 단체라도 북한의 핵실험을 두둔하거나 옹호한 적이 있는지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이들 단체들은 북한의 핵실험을 강력히 규탄한 것은 물론 북한의 핵무기 보유 시도에 분명한 반대입장을 천명해왔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들 단체들은 북의 핵개발 문제에 한정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핵없는 세상을 위한 국제적인 연대활동을 일관되게 펼쳐 온 단체들이다. 따라서 동아일보 사설은 공동행동의 명예를 의도적으로 훼손할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다.

또한 공동행동은 “일본 원전보다는 북한의 핵무기가 우리에게 훨씬 큰 위협이다”라는 동아일보의 일차원적이고 근시안적인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다. 초유의 일본 원전사고가 초래할 재앙이 어느 수준인지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본의 원전사고는 북한의 핵무기 못지않게 당면한 큰 위협이라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이미 독일 선거의 승패를 바꿔 놓았고, 각국이 원전정책의 전면적인 재검토에 나서도록 촉발한 것이 바로 일본의 원전사고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이 시간에도 전 인류에게 크나큰 위협이 되고 있다.

우리는 자질 없는 정치인도 문제이지만 공동행동 활동에 대한 동아일보의 왜곡과 오도는 간단히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이번 동아일보 사설은 문제의 핵심과 비판적 여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의도를 넘어 ‘괴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동아일보가 최소한의 자정능력도 상실한 채 이런 식으로 왜곡보도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한다. 이에 우리는 이번 사설에 대한 동아일보의 사과와 정정을 요구하며, 이에 응하지 않는다면 단호히 법적 대응에 나설 것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2011. 4. 12.
일본대지진, 핵사고 피해지원과 핵발전 정책 전환을 위한 공동행동
(가톨릭환경연대, 경주핵안전연대, 기독교환경운동연대, 기후변화행동연구소, 나눔문화, 녹색교육센터, 녹색교통운동, 녹색연합, 다함께, 문화연대, 민주노동당, 민주당,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민주언론시민연합, 보건의료단체연합, 부안시민발전소, 사회당, 사회진보연대, 삼척핵발전소유치백지화위원회, 생명살림연구소, 생태지평, 시민평화포럼,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에너지전환, 에너지정의행동, 여성환경연대, 영광군농민회, 영덕핵발전소반대 500인결사,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철거민연합중앙협의회, 진보신당, 참교육학부모회, 참여연대, 초록교육연대, 평화네트워크, 한국노동조합총연맹, 한국미래연대,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진보연대, 한국YMCA전국연맹, 핵으로부터 안전하게 살고 싶은 울진사람들(핵안사), 환경과공해연구회, 환경을 생각하는 교사모임, 환경재단, 환경운동연합, 환경정의. KYC, 흥사단, (사)에너지 나눔과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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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후기]중동 북아프리카의 현실과 재스민 혁명의 의미
중동 북아프리카 민주화 혁명의 오늘과 내일


참여연대는 4월 한 달 동안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의 민주화 혁명에 대해서 강좌를 엽니다. 최근 중동의 반정부 시위는 튀니지에서 청년의 분신으로 시작해 이집트, 리비아,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으로 퍼져가고 있습니다. 이 강의는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지역과도 같았던 중동 아프리카 지역의 변화양상과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강의는 중동 현장의 경험이 많은 구정은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가 맡았습니다. 4월5일, 첫 강의에서는 중동 북아프리카의 현실과 재스민 혁명의 의미에 대해 짚어봤습니다.


리비아 사태에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바람으로: 사회자 주은경

이 강의를 기획한 것은 이집트 혁명이 승리를 이루면서 중동지역의 ‘프랑스 혁명’이 되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있어서였다. 구정은 기자는 문화일보의 국제부 거쳐 지금은 경향신문 국제부기자로 있다. 교수보다 오히려 현장에 강한 강사라 좋은 시간이 될 것 같다. 중동 북아프리카의 혁명을 배움으로써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방법이나 한국인이 국제사태에 갖고 있는 감수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강의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리비아 사태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강좌의 시작: 구정은 기자

나는 중동 북아프리카의 역사를 전공한 것도 아니고 살아본 것도 아니다. 단지 10년 동안 일하다보니 이 지역 뉴스를 남보다 관심을 갖고 살펴보게 됐다. 지금은 이 지역에 많은 애정과 문화적 매력을 느끼고 있다. 비록 민주화에서 뒤쳐져 있지만 아픔을 최소화하면서 발전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크다. 이 지역 상황은 지금도 진행형이어서 강의가 끝나는 4월 말이면 어떤 상황이 될지 모른다. 진행되는 걸 보면서 같이 공부한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일단은 중동 아프리카의 지리를 머릿속에 넣어두는 것이 필요하다. 보통 중동 북아프리카라고 하면 터키와 이란은 빼고 생각한다. 오늘은 북아프리카 쪽에 초점을 두겠다. 앞으로 이어지는 2,3강은 걸프 지역에 초점을 둘 것이다. 최근은 리비아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리비아는 이집트 옆에 위치한다. 리비아는 민주화 시위가 지속되어 지금은 내전상황이다.

1. 튀니지는 민주화 혁명이 아닌 시민혁명, 그리고 SNS(소셜네트워크)

일단 튀니지 혁명에 대해 알아보겠다. 이것을 민주화 혁명이라고 볼 것인지 시민혁명으로 볼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아직까지 민주화라는 결과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시민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람들은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지금까지 이런 혁명을 볼 수 없었다’라는 말을 하는데, 여기에는 중동사회가 가부장적이고 억압적이라 저항적이지 않다고 보는 서구적인 사고가 들어가 있다. 중동 북아프리카가 민주화에서 후진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종교나 아랍의 문화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나 이곳은 지금 역사적인 혁명의 시기를 겪고 있다.

‘튀니지는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의 SNS 혁명'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또한 중동 지역에는 '알자지라'라는 24시간 위성방송을 하는 방송국이 있는데 시위현장을 마치 CCTV처럼 생중계한다. 아랍어를 쓰는 국가 모두가 이 방송을 보기 때문에 이번 혁명 과정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기존에 존재하던 분노와 억압의 강도가 셌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므로 시민의 분노와 SNS의 역할이 합쳐져 촉발됐다고 볼 수 있다.

2. 무바라크 시절 이집트와 중동 지역의 혁명

이 지역은 공통점이 있다.

1) 종교는 이슬람교이고, 언어는 아랍어라는 점 2) 근대 이전까지 아랍지역이었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영토로 한 나라였던 점, 즉 광범위한 공통의 역사 3) 30-40년간의 독재정권을 겪으며 형성된 계층갈등의 심화 그리고 4) 산업 성장 기반이 없고, 외부 의존적이라는 점 이다.

이집트는 이 지역에서 중요한 나라이다. 이집트에서는 아랍연맹사무총장, 노벨상 수상자, 유엔총장 등이 나와 국제적으로 힘이 있는 국가이지만, 팔레스타인을 누르고 자국민을 억압하면서 버텨 왔다. 통계는 없지만 1/3이 유형, 무형의 미국원조로 살아간다. 독재가 지속되다 보니까 미국에도 무바라크 정권이 짐스러운 시점이었고, 시민의 힘이 압도적으로 드러나자 무바라크는 미국이 버리는 카드가 됐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미국에 달렸다’는 건 믿을 말이 못된다. 오히려 시민의 손에 달렸다. 그것이 진정한 권력 투쟁이고 이집트는 지금으로선 시민이 이긴 상태다.

지금 중동은 2차대전이 끝난 것보다 더 큰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이들은 자기들 손으로 혁명을 만들어 가고 있다. 프랑스 혁명만큼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이번 혁명은 시대를 앞서 가는게 아니라 마무리하는 혁명이라는 큰 의미가 있다. 20년 전 냉전시대가 끝나면서 사라졌어야 할 미국의 패권을 등에 업은 독재정권이 중동이라는 특수성과 석유의 이익 때문에 지속되어 온 것이다. 지금 카다피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고 있는 형국이다. 정치적 패러다임으로 봤을 때 이미 끝났다는 의미이다.

3. 리비아의 시민혁명

카다피가 어떻게 정권을 잡게 되었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상황이 진행될 가능성이 있는지를 살펴보겠다. 카다피는 20대 때 쿠데타로 집권한 후 42년간 권좌에 있었다. 그는 카다파 족이어서 카다피가 됐다고 한다. 그는 60-70년대 이집트 낫세르의 영향을 많이 받아 아랍사회주의와 부족주의 성격을 띄는 범아랍주의 성향이 강하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카다피의 패션이 체게바라와 비슷하고 사회주의적 성격을 보여주는 패션을 고수한다는 점이다.

리비아는 이슬람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국영으로 운영되는 영역이 많다. 또한 리비아는 70년 대 대의민주주의가 아닌 ‘자마리아’ 즉 인민공화국이라고 선언한 바가 있다. 독특한 점은 카다피와 그의 측근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다피는 직책이 없다는 점이다. 이때까지 카다피는 권력을 잡은 후 시민에게 고문, 감금은 했지만 처음 집권과정에서 사람을 많이 죽이진 않았다. 미국도 카다피를 두고 막무가내이지만 실용주의라고 인정했다. 또한 그는 석유자원을 팔아서 아랍권을 통합하려 했고 역내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이런 기반을 통해 그는 40년간 정권을 이어 올 수 있었다. 그는 석유를 팔아 번 돈으로 대외정치에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계속 보여왔지만 이집트만큼 국제정치에 영향을 미치기는 어려웠다.

카다피는 이슬람 사회주의를 내세우면서 반미제국주의 투쟁을 진행해 왔다. 미국과의 관계가 최악일 때는 레이건 대통령 때였다. 이란의 팔레비왕조가 무너지면서 미국의 중동전략에 혼란이 왔다. 미국이 이라크를 시켜서 이란을 침공하게 만들 때 카다피는 이란을 지지했다. 이것 때문에 레이건 때 양국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카다피를 ‘중동의 미친개’라고 불렀다. 그 때부터 카다피 전복공작을 시작하게 됐다. 사실 이런 사건들이 없었다면 크게 그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테러사건의 배후였다는 이유로 트리폴리가 공습당하면서 그의 수양딸이 죽었고 90년대 말에는 중동에서는 영향력이 없어서 아프리카주의로 전환했다.

그는 정서적으로 문제가 생긴게 아니가 싶을 정도로 돌출행동을 많이 했다. 아프리카 왕같은 옷을 입고 나오기도 하고, 아프리카연합의 의장국을 맡으면서 부족장을 모아놓고 자신을 왕중왕으로 일컫거나, 외국에 순방가면서 천막을 지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카다피와 서방과의 관계를 보면 그는 영국의 전 총리인 블레어와는 친하게 지냈다. 3년 전 총리직 그만두기 전에 리비아 유전개발권을 따 줄 정도로 친했다. 그리고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과도 가까웠다. 리비아에서 카다피가 잘못한 게 있다면 이번에 혁명이 발발한 후 전투기까지 띄워서 사람을 죽인 것이다. 미국이 석유 이익 때문에 편을 들어 주고 싶어도 국내에서 표가 깎여서 그렇게 못하는 상황이다. ‘앞으로 리비아는 어디로 갈 것인가?’는 국민의 힘에 달렸다.

이집트는 인구의 97%가 국토의 3%에 모여 살고 있다. 반면 리비아는 전체가 사막이고, 사람들이 흩어져 살기 때문에 결집된 시민의 힘이 없다. 지금 리비아는 카다피가 있는 상태에서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으면 카다피를 축출할 방법이 없다. 가장 좋은 방향은 인명피해가 최소화 되는 선에서 카다피가 멈추는 것이며, 리비아인의 힘으로 민주적인 새로운 정부를 꾸리는 것이다. 반군은 전력이 큰 게릴라군이 아니기 때문에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지상군 투입은 못 하기 때문에 현 상황이 유지될 것이다. 그렇다고 다시 카다피가 장악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4. 인도적 개입, 해야 한다 vs 말아야 한다

인도적 개입을 두고 국제적으로 논란이 많다. 왜냐하면 군사행동이 목숨을 빼앗는 전례들이 많기 때문이다. 옳으냐 그르냐는 결과를 중심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코소보는 인구가 밀집된 도시였다. 공습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서 누가 학살자인지 학살받는 사람인지 구분이 안 됐고 악천후까지 겹쳐 실패했다. 코소보 사태에 대한 군사적 개입에 대해 좌파지식인은 개입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한다.

반면 90년대 시에라리온이 절망의 땅이 되어버렸을 때 영국군이 개입했고 이는 성공적이었다. 군벌세력을 몰아내는데 성공했고 학살의 주범인 라이베라 대통령을 잡아서 국제전범재판에 붙였다. 그 후 라이베리아에서는 여성대통령이 당선되었고 결과도 그런대로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인도적 개입이 성공하지 못한 다른 케이스들이 더 많이 있다. 90년 대 이라크는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고 10년 간 엠바고를 실시했는데, 이라크의 어린이와 병든 사람들이 죽는 결과를 낳았다. 지금도 죄를 저지른 당사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징벌을 주는 집단징벌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유엔의 금수조치 책임자였던 사무차장이 금수조치를 반대하는 일까지 생겼다. 90년대 르완다는 300만명이 학살됐는데도 국제사회가 개입하지 않았다. 왜 그런지 알 수 없다. 또한 90년대 아프간 내전에도 개입하지 않았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인도적 개입’이라는 명분으로 이행됐다. 이라크에는 알카에다도 없었고 대량살상무기도 없었는데 인도적 개입이라고 용어를 붙여, 결국 인도적 개입이라는 말만 오염시켜 놨다.




Q & A: 구정은 기자와 수강생과의 대화

Q. 혁명 후는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나? 시민의 힘이라고 하는 데 시민의 힘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을까?

A. 한국의 386 세대가 시민의 힘을 의심하는 경향이 더 강하다. 동시에 그들은 미국의 힘을 믿는다. 이라크 전이 개시되기 전 몇 달 전부터 세계 곳곳에서는 반전시위를 비롯한 움직임이 많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유명한 교수나 학자,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반대해 봤자지’ 하는 회의론이 대세였다. 시민들의 움직임이 미국이 일으킨 전쟁을 막지는 못했지만, 건전한 시민들의 반대가 있었기 때문에 이라크의 사상자를 줄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국제사회가 반대하는 이라크전쟁을 했고, 이 과정에서 미군들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많았지만, 만약 모두가 전쟁에 무관심했다면 더 심하게 사상자를 냈을 것이다. 미군 측에서 오폭 사고를 내면 시민들이 민간인학살이라고 크게 반발하면서 공습자체를 많이 바꿨다. 그것이 바로 시민의 힘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시민의 힘은 작용을 한다.
 
지난 30년 동안 민주화를 이루지 못한 이집트의 경우, 부시 전 대통령은 중동민주화를 원했는데 오바마는 무바라크를 끌어안았지만 이집트 국민의 힘에 밀려 무바라크를 버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시민의 힘은 결정적인 순간에 보이는 것 같다. 중동에 있는 사람들은 이집트를 싫어한다. 매춘부, 사기꾼 등이 이집트를 묘사하는 단어이다. 이집트인들은 부패한 정권 밑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시민들 뼈 속 깊이 부패했기 때문이다. 지금 시민혁명 이후 집권한 이집트 총리는 1년 간 교통부장관을 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주변에는 노벨화학상을 받은 저명한 물리학자와 나사에서 근무한 과학자 지식인 그룹이 그 주변에 있다. 이집트에서는 시민사회가 축적한 힘이 현 상황에서도 이집트가 아수라장이 되지 않게 하고 있으며, 군부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Q. 과연 인도적 개입이라는 명분하에 타국민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옳은가?

A. 인도적 개입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나 원론적이라는 문제가 있지만 원칙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죽여도 되는 정권은 없다. 인권을 넘어서는 주권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실제적인 군사행동은 또 다른 인명피해를 가져오는 것이다.

리비아의 경우는 군사시설에만 폭격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그러나 북한정권에도 인도적 개입을 해야 하나? 평양 같이 인구가 밀집한 곳은 일반인들이 수 천명, 수 만명이 죽는 것이 뻔한 사실이다. 사건 하나하나에 따라 달라 ‘옳다 그르다’하기 어렵다. 지금까지는 리비아에 대해서는 군사개입을 했어야 하는 상황이라는 평가가 많다. 벵가지 공습 함락 때 카다피 군에 타격을 주면서 민간인 거주구역이 아닌 곳에 폭격하는 것은 합당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점은 국제법을 연구하는 분들도 혼란스러워한다.

Q. 중동 지역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십 수년 전에 국제부에 갔을 때 막내였고 선배들이 미국과 유럽을 담당했다. 국제부에서 일하다가 사회부로 옮겼다가 다시 2001년 다시 국제부로 갔을 때 9.11이 터졌고 역시 막내였다. 그때 또 중동을 맡아서 공부를 하면서 출간된 책을 섭력하였다.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 실크로드 그런 것들을 좋아했고 문화적 매력도 느꼈다. 막내라서 중동 아프리카 지역을 맡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어느새 인생의 중심이 되었고, 국제정세 역시 지금에 와서는 유럽은 어떤 영향도 없고 변수도 아닌 상황이 되었다.

2001년 후반 9.11 이후부터는 날마다 집에 가면서 이라크 가는 생각을 했다. 요르단에 한국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했는데 어느 날 비자가 나왔다. 사담후세인이 국민투표를 한 적 있는데 이 때 해외기자초청을 하면서 바로 다음날 요르단으로 갔다. 이라크에 들어가 있다가 최후통첩 때 요르단으로 나와서 이라크전을 보았다. 나야 달랑 나오면 그만이지만 남아 있는 사람은 죽을 수도 있었다. 인생에 가장 마음이 아픈 부분이었다. 그 다음에는 관심사가 아프리카로까지 넘어갔다.

Q. 중동 아프리카 지역에서 미국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

A. 그들은 미국을 굉장히 싫어한다. 이 지역은 미국의 위선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독재정권인 무바라크 정권을 밀어주었고, 이라크 전쟁을 통해서 미국의 위선은 극명하게 드러났다. 역사가 7000년이나 된 세계 최초의 국가이자 문명이 중첩된 국가인 이라크에 대해 미국은 오만하기까지 했다. 미국은 한국 전쟁 때 남한을 지원했고 한국은 미국을 상대로 돈을 벌기도 하는 가까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중동에게는 그렇지 않다. 필요성을 인정하는 정도이지 미국을 옹호하는 것은 중동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다.

첫 강좌를 듣고서: 국제연대위원회 인턴 장유진

우연히 몇 해 전 세바스티앙 살가도 사진전을 보게 됐습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미국중심의 동북아 정세만 공부하던 때,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우리와는 상관없어 보이는 지구 반대편에서 고통 받는 이들에게 관심을 갖게 했고, 참여연대의 중동 북아프리카의 강의를 듣는 계기가 됐습니다. 구정은 기자의 생생한 강의는 이 지역의 상황을 ‘학문적 성찰의 눈’이 아닌 ‘기자의 예리한 눈’으로 현장의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받았습니다. 특히 체험담과 그 지역사람들의 시각에 대한 설명은 책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이어서 값졌습니다. 지도자의 성향이나 국민성 등 체험한 사람에게만 나오는 소소한 일화들이 많아 흥미로웠습니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왜’라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됐습니다. 좀 더 깊이 있는 내용으로 이어질 두 번째 강의가 기대됩니다.


강좌 기록 및 후기: 국제연대위원회 인턴 장유진


다음 강의
4월5일(화) 중동 북아프리카의 현실과 재스민 혁명의 의미
강사: 구정은(경향신문기자), 안주식(KBS 피디)


*1강 강의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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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인권의 역사적 시험대,

무니르 독살 형사소송의 ‘마지막 비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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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전 인도네시아 국가정보원(BNI) 부원장 묵디 뿌르워쁘란조노(Muchdi Purwoprandjono)
오른쪽: 인권변호사 무니르 사이드 탈립(Munir Said Thalib)

지난 4월 5일에 자카르타의 대검찰청 앞에서 인도네시아 청년들이 구속도 두렵지 않다며 천막을 치고 철야시위를 벌였다. 검찰에 대한 그들의 요구사항은 인권변호사 무니르 사이드 탈립(Munir Said Thalib)의 독살 배후 용의자인 전 국가정보원(BIN) 부원장 묵디 뿌르워쁘란조노(Muchdi Purwoprandjono)에 대한 마지막 법적 행동을 조속히 취하라는 것이었다. ‘용맹’과 ‘총명’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 무니르는 노동운동, 국가폭력반대운동, 과거사청산운동, 안보기관개혁운동에 헌신함으로써 수하르토 독재의 몰락과 민주주의 진전에 기여하였고, 꼰뜨라스(Kontras)와 임빠르샬(Imparsial) 같은 선명한 주창형 운동단체를 조직적 유산으로 남겨 인도네시아 최고의 인권운동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런데 2004년에 9월 7일에 암스테르담행 인도네시아 국영항공기 안에서 사망하였고, 네덜란드당국의 부검결과 그 사인이 치사량을 훨씬 웃도는 독극물 섭취로 밝혀졌다.

서른아홉 해의 삶이 이렇게 마감된 뒤 6년이 넘도록 인도네시아 시민사회단체들은 국제적 관심과 지지를 받으며 살인자들을 찾아 처벌해줄 것을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진상규명활동과 추모활동을 전개하는 한편으로 법적 경로도 밟아왔는데,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성과도 있었다. 독극물을 음료에 투입했다는 조종사 뽈리까르뿌스 쁘리얀또(Pollycarpus Priyanto)가 우여곡절 끝에 대법원 재심의까지 거쳐 20년형을 언도받고 반둥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를 보안요원으로 항공기에 탑승토록 허용하는 공문을 위조하여 발송한 세 명의 국영항공사 직원들도 실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올해 2월에는 국영항공사가 무니르 유족에게 우리 돈 4억원 이상을 보상해야 된다는 대법원 판결도 얻어냈다. 최고의 법률적 승부는 독살의 공범이자 배후에 대한 형사소송이었다. 심증이 가는 여러 권력자들 중에서 증거가 발견된 묵디 한 명만을 대상으로 삼은 소송이었지만, 역시 만만치 않았다.

검찰은 사건 전후에 묵디와 뽈리 간 41건의 휴대폰 통화기록을 핵심 증거로 제시하였지만, 2008년 12월 31일 남부자카르타지방법원은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묵디에게 무죄를 선고하였고, 대법원도 2009년 6월에 묵디의 손을 들어주었다. 적지 않은 수의 증인들이 불출석한 파행 재판이었고, ‘애국자’ 묵디를 위한 ‘어깨들’의 위협적인 지지시위도 있었다. 판사들이 매수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고, 소송을 이끌었던 시나가(Cirus Sinaga) 검사는 광범한 부패사건의 연루자로 조사를 받는 처지가 되었다. 새로운 증거를 제시해야만 법률적으로 마지막 단계인 대법원 재심의를 요청할 수 있기에, 묵디의 법적 단죄는 무산되고 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무니르의 유족과 동료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경찰이 묵디의 혐의를 입증할 새로운 증거들을 확보하고 있으며, 가장 결정적인 증거가 뽈리와 묵디 사이의 통화 녹음테이프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대검찰청이 “학습하는 중”이라거나 “때를 기다리는 중”이라는 애매한 표현을 흘리며 ‘마지막 무기’의 사용을 주저하고 있어서, 대검찰청 앞에서 철야시위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묵디는 동티모르와 이리안자야(현 파푸아)처럼 악명 높고 험난한 ‘분쟁지역’의 야전에서 경력을 쌓았고 수하르토 체제 말기에 특전단(KOPASSUS) 사령관으로 복무한 전도유망의 장성 출신이다. 그러나 특전사령관 재임 시 민주화운동가들에 대한 조직적 납치를 지휘한 것으로 무니르에 의해 지목된 바 있고, 결국 ‘임무해제’ 명령을 받아 소장계급을 끝으로 퇴역해야만 했다. 이로 인해 무니르에 대한 묵디의 원한이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추정한다. 그러나 묵디는 국정원 부원장으로 영전되면서 민주화 이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군 출신과 민간 출신 후보의 대결로 압축된 2004년 대통령 직접선거 때는 역설적이게도 군 출신 유도요노(Susilo Bambang Yudhoyono)와 맞붙은 민간 출신 메가와띠(Megawati)의 편에서 선거를 도왔으며, 바로 이 때 무니르 독살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음모가설은 안보기관을 넘어서 민간정치부문의 실력자들까지 포괄하는 중층적인 양상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묵디는 독살배후로 제소된 뒤에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정치에 가담하여 대인도네시아운동당(Gerindra)의 부총재를 역임하더니, 최근에는 말년을 이슬람정치에 헌신하겠다며 통일개발당(PPP)에 입당하여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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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하르토체제 말기에 납치된 13인의 민주화운동가


지난 4월 7일에 콘트라스와 국제이행기정의센터(ICTJ)는 수하르토 체제 종식이후 13년간 추구된 이행기 정의(transitional justice)의 역정을 평가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민주화 초기에 여러 희망찬 시도들이 있었지만, 구세력과의 타협적 시기를 거쳐, 최근에는 아예 꽉 막힌 시기를 맞이하게 되는 허탈한 과정을 기록하였다. 그 동안 인권침해사건과 관련된 고위급 장성들이 단 한 명도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았으며, 민주화운동가납치사건의 지휘자인 묵디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민주화 이후에 정치적으로 더 활동적이다. 대표적으로 1999년 동티모르 철수 시 발생한 군부폭력의 책임자인 위란또(Wiranto) 장군, 1998년 5월 반화인 집단폭력의 책임자 쁘라보오(Prabowo) 장군이 정부통령선거에 후보로 출마한 바 있고, 차기 대선에도 출마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과거사가 정리되지 않은 탓에 2014년 인도네시아 대선의 전망도 따라서 회귀적이다. 이로써 진실은 무력하고 정의는 강자의 편이라는 국민적 학습이 지속된다.

이런 정황에서 무니르 사건 형사소송은 인도네시아 인권의 ‘역사적 시험대’로 부각된다. 과연 특전사령관과 국정원부원장을 역임한 국가폭력의 핵심인물을 감옥으로 보낼 수 있을 것인가? 인도네시아 인권운동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도전에 나섰고, 지금 그 장도의 막바지에 서 있다. 무니르는 과거사 청산운동의 중핵이었고 현재도 그러하다. 무니르는 수하르토 독재의 국가폭력에 과감하게 맞서면서 전국적 ‘스타’가 되었고, 과거에 갇힌 각종 국가폭력사건들을 되불러내고, 국가폭력의 ‘성채’인 안보기관의 개혁운동에 돌입하였다. 역사를 위해 투쟁하다 스스로 역사가 되었으며,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을 옹호하다가 자신이 피해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반국가폭력의 화신이다. 고위급이 연루된 살인이라는 위키리크스(Wikileaks)의 폭로, 무니르를 거리명칭으로 삼겠다는 네덜란드정부의 발표, 거액의 민사배상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판결, 심지어 묵디의 화려한 정치행보까지도 무니르에 대한 기억을 재생시키고 영웅적 서사를 재구성시킨다. 그러니 무니르가 아니라면 누가 할 수 있으랴? 아니 무니르라면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번이 마지막 전투이다. 무니르는 생전에 묵디의 군복을 벗겼지만 감옥에 가두지는 못했고, 그래서 묵디의 복수가 가능했던 것이라고 동료들은 한탄한다. 무니르는 생전에 실패한 것을 사후에 성사시킬 수 있을까? 과연 ‘죽은 무니르’가 ‘산 묵디’를 결박시킬 수 있을 것인가? ‘시작은 있지만 결말이 없다’는 냉소로 얼룩진 인도네시아 인권침해의 역사와 법치의 비극이 이번 소송에서 단 한번이라도 깨끗이 마무리되는 선례를 남길 수 있을까? 이 ‘역사적 한 판’의 끝을 보려면 지금은 우선 대검찰청의 행동을 재촉해야만 한다. 대검찰청이 대법원에 재심의 요청서를 보냄으로써 반국가폭력의 화신 무니르가 유족과 동료들을 이끌고 마지막으로 ‘출전’할 수 있도록 ‘혈로’를 열어주어야 한다. 나는 인도네시아의 민주화에 열광했고 민주주의 진전을 축하해온 연구자로서 인도네시아 민주주의의 수치인 불처벌(impunity)의 악순환을 돌파하는 대역사를 진정 목도하고 싶다.  


전제성(전북대 정치외교학과 부교수)

* 이 글은 서남포럼 뉴스레터(2011.4.12)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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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그 동안 핵발전 정책을 꾸준히 추진해 온 한국, 중국, 일본 3개 국가의 핵발전소 현황에 많은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이들 국가는 서로 인접해 있으면서 전세계 핵발전소의 52%가 밀집되어 있는 적극적인 핵발전 추진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세계 각국이 탈핵 발전을 선언하고 에너지 정책을 전환할 때 이들 국가는 핵발전소 건설을 멈추지 않았고, 그 결과 동북아시아는 매우 높은 핵발전 밀집도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2011년 4월 6일) 한일 시민단체는 공동 기자회견(환경재단 레이첼카슨 룸)을 열어 후쿠시마 핵사고를 계기로 세계 각국 시민사회와 연대하여 '핵없는 아시아'를 만들기 위해 적극적인 운동을 펼쳐나가기로 했습니다.


다음은 오늘 발표된 한일 공동성명 입니다.


우리는 핵 없는 세상을 원하며,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거대한 지진과 쓰나미의 비극을 목격하며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재앙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와 방사능 물질 유출로 수십만명의 일본인들이 살던 곳을 떠나 대피하였으며, 방사능 오염의 공포에 떨고 있다. 우리 모두는 하루빨리 후쿠시마 핵사고가 진정되기를 기원하며, 이를 위해 방사능 위험을 무릅쓰고 애쓰고 있는 많은 노동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


우리는 후쿠시마 핵사고 이미 체르노빌 사고의 수준을 넘어선 최악의 핵재앙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핵재앙이 일어나게 된데에는 원자력 안전 신화를 내세우며, 54기의 핵발전소를 가동해 온 일본 정부와 원자력계에 그 책임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간 핵발전소가 위험하다는 전 세계 시민들의 경고를 무시해왔으며, 이번 사고에 대해 안일한 대응과 사고를 축소하려는 태도로 핵재앙을 더욱 키웠다. 지금도 주변국가뿐만 아니라, 자국 국민들에게도 핵발전소 사고의 실태와 방사능 오염 정보를 정확히 알려주고 있지 않다. 일본 정부와 동경전력은 정확하고 자세한 방사능 오염정보를 제공하고, 위험에 빠진 일본 국민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취를 취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후쿠시마 핵사고로 일본 국민들이 겪고 있는 비극이 결코 재현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일본과 한국 국민들을 포함하여 인류 전체는 핵발전소가 꼭 필요한 것인지 자문하고 있다. 핵에너지가 기후변화를 막는 대안이라거나, 핵에너지를 대체할 다른 에너지가 없다거나, 정부와 핵산업계가 핵발전소를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다는 주장은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 특히 중국, 한국, 일본이 위치한 동북아시아 지역은 현재 건설중인 핵발전소의 52%가 몰려 있는 대표적인 핵발전 선호지역이다. 이번 사고를 계기로 이들 지역에서부터 본격적인 탈핵선언이 이루어져야 지구상에서 핵발전소를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번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전세계적인 핵발전소 폐쇄와 포기를 위한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전세계의 시민들이 하루 빨리 핵발전의 위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이미 체르노빌 사고의 후유증을 겪으며 탈핵발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독일을 비롯, 유럽 국가들과 후쿠시마 핵사고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는 한국과 일본, 인도, 필리핀, 대만 등 아시아 각국에서도 많은 시민들이 핵발전소 반대 구호를 외치며 거리에 나섰다. 이제 전세계가 연대하여 핵안전과 탈핵을 위한 대전환의 길로 함께 나서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더 이상 지구상에서 후쿠시마와 같은 핵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며, 핵없는 세상을 통해 평화롭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2011. 4. 6.


일본대지진핵사고 피해지원 및 핵발전 정책 전환 공동행동(한국)

원자력자료정보실(일본)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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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전역 방사능 오염 위험,
정부 차원의 비상조치 착수해야


안일한 태도와 말바꾸기로 일관하는
관계당국의 '안전' 주장 신뢰할 수 없어



독일 기상청, 노르웨이 대기연구소 등 지구 반대편 나라들의 기상 및 대기 전문가들은 오는 6일부터 한반도가 일본 후쿠시마에서 누출되고 있는 방사성물질의 직접적인 오염 영향권에 들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는 그동안 기상청의 ‘편서풍’ 이나 ‘지구 한바퀴’ 주장, 또는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이 자체 시뮬레이션을 통해 ‘일본 원전 최악 가정해도 한국은 안전’하다는 주장에 배치되는 것으로 국민들이 언제까지 정부 기관의 ‘안전’ 타령만 듣고 있어야 할지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은 이미, 프랑스 기상청이 방사성물질이 편서풍 경로가 아닌 북극을 통해서 한반도로 내려올 수 있다는 예측 실험 결과를 발표한 것에 대해 예측 자료가 신뢰할만한 수준이 아니라고 일축했다가 방사성 물질이 검출되자 미량이라 안전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번, 독일과 노르웨이의 예측에 대해서도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의 한 관계자는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우리나라가 방사능 오염의 직접 영향권이 아니라던 기존의 말을 바꾸어 ‘지난달 21일부터는 일본에서도 방사성 물질이 기체상으로 거의 나오지 않고’있어 ‘기상 흐름과 방사성 물질의 흐름은 이제 상관관계가 낮아지고 있다’고 발뺌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액체 방사성물질에 의한 해양오염이 상대적으로 새롭게 부각되고 있고 일본 당국이 기체 방사성 물질 누출에 대해서는 언급 자체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지 기체 방사성 물질이 누출되지 않는다고 넘겨짚을 상황이 아니다. 일본 정부는 핵연료봉이 녹아내리는 것도 뒤늦게 인정했으며 격납용기 손상에 대해서도, 플루토늄 누출에 대해서도, 방사성물질 해양 유출에 대해서도 뒤늦게 인정했다. 이번 주말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는 일본 정부가 민심이반을 무마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정보 공개를 중단한 것이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더구나 제어봉을 투입하는 곳, 붕산수를 투입하는 곳, 격납용기 일부 등 여러 곳이 손상된 상황에서 핵연료봉 냉각을 위해 바닷물 투입이 계속되고 있는데 방사성 증기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자체가 논리적으로 맞지도 않고 매우 안일한 태도다.

이 미 정부와 관계 당국의 안일한 태도와 말바꾸기는 국민들의 불신을 자초하고 있다. '안전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손 놓고 있기에 방사성 물질의 위협은 매우 구체적인 현실이 되고 있다. 지금은 국민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대처방법을 알리는 것이 시급하다. 당장 6일부터 제주도와 부산 등 남부 지역으로 방사성 물질이 직접 유입되는 것을 대비한 비상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방사성 물질 측정소를 대폭 늘리고 영유아, 노약자, 임산부의 외출을 자제시키는 것은 물론 초등학교 휴교령까지 고려할 필요가 있다. 목요일부터 시작되는 비를 맞지 않도록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신속하게 국민들에게 알려 나가는데 착수해야 한다. 아울러 방사성 물질의 위협에 대해 축소, 왜곡하고 있는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과 기상청 책임자를 즉각 교체할 것을 촉구한다.


2011. 4. 4

일본대지진․핵사고 피해지원 및 핵발전 정책 전환 공동행동
가톨릭환경연대, 경주핵안전연대, 기독교환경운동연대, 기후변화행동연구소, 나눔문화, 녹색교육센터, 녹색교통운동, 녹색연합, 다함께, 문화연대, 민주노동당, 민주당,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민주언론시민연합, 보건의료단체연합, 부안시민발전소, 사회당, 사회진보연대, 삼척핵발전소유치백지화위원회, 생명살림연구소, 생태지평, 시민평화포럼,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에너지전환, 에너지정의행동, 여성민우회, 여성환경연대, 영광군농민회, 영덕핵발전소반대 500인결사,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철거민연합중앙협의회, 진보신당, 참교육학부모회, 참여연대, 초록교육연대, 평화네트워크, 한국노동조합총연맹, 한국미래연대,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진보연대, 한국YMCA전국연맹, 핵으로부터 안전하게 살고 싶은 울진사람들(핵안사), 환경과공해연구회, 환경을 생각하는 교사모임, 환경재단, 환경운동연합, 환경정의. KYC, 흥사단, (사)에너지 나눔과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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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드테이블] 리비아 사태와 군사적 개입, 어떻게 볼 것인가


3월1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리비아 무장갈등에 군사적 개입을 승인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한 후, 리비아 상공에 비행금지구역이 설정되고 다국적군의 군사적 개입이 시작되었습니다. 41년간의 독재를 종식시키고자 들고 일어선 시민들을 카다피 정권이 유혈진압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제기구나 강대국이 군사적 개입에 나선 것에 대해 다양한 견해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에 참여연대는 리비아에 대한 군사개입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 인도주의적 개입(humanitarian intervention)혹은 R2P(Responsibility to Protect) 등의 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지, 이 개념을 둘러싼 논란은 없는지, 더불어 군사적 개입이 가장 실효성이 있는 방안인지 등을 토론하는 라운드테이블 「리비아 사태와 군사적 개입, 어떻게 볼 것인가」를 개최하였습니다. 참여연대 박정은 팀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 자리에는 한국외대 유달승 교수, 이화여대 평화학연구소 서보혁 연구교수, 경계를 넘어 최재훈(까밀로) 활동가, 그리고 평화네트워크 정욱식 대표가 패널로 나와 의견을 개진하였습니다.

이번 라운드테이블에서는 ▷ 중동아프리카지역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 리비아에 대한 군사적 개입에 대한 평가, ▷ 중동아프리카, 서방국가들 각각의 내부정치와 석유라는 에너지원을 둘러싼 국제정치의 실상, ▷ 국제사회의 보호의 책임(R2P)을 어디까지 한정하고 이에 필요한 장치는 무엇인지, ▷ 이러한 국제사회 담론이 국제평화운동과 한반도 평화에 함의하는 바는 무엇인지 등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각 패널의 주요 발제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민간인 보호가 아닌 민간인 피해 초래하는 군사적 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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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 활동가(경계를 넘어)는 과거 역사를 되돌아볼 때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진 몇몇 패권국가들에 의해 선택적으로 취해진 군사개입이 애초 의도한 민간인 보호라는 목적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군사적 개입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한다고 밝혔다. 최재훈 활동가는 몇 가지 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 리비아 사태에 대한 성격을 내전 또는 민주화항쟁 가운데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국제사회의 대응 방식이 달라짐. 리비아에서 정치적 폭압에 항거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시작되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음. 그러나 처음부터 일관되게 비상사태해제, 무바라크 퇴진, 개헌을 통한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주장해온 이집트 민주화 항쟁과는 달리 반카다피 진영의 정치적 비전은 불명확함.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중들의 항쟁을 정치적, 외교적 차원 등에서 지원하고 독재자에 압력을 가하는 것과 내전의 한 축을 지원함으로써 다른 한축을 몰아내는 것은 분명 다른 차원의 문제임.

▷ ‘비행금지의 준수를 강제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처들을 취하도록 승인’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 1973호가 몇몇 회원국들에게 자의적 판단에 의한 포괄적 수단 동원의 길을 허용한 점에서 ‘정당하다’고 할 수 없음.

▷ 리비아뿐만 아니라 예멘, 바레인, 요르단, 모로코, 사우디아라비아 등등 중동아프리카 내에서 발생하고 있는 유사한 사태에 대한 군사적 개입에 대한 논의는 이뤄지지 않음. (레바논, 팔레스타인을 침공한 이스라엘, 2010년 한 해 동안 무인기를 동원해 929명의 파키스탄인들을 사망하게 한 미국 등에 대한 논의도 없다는 점에서) 형평성이 부족함.

▷ 민간인 보호를 내세웠던 비행금지구역 설정은 오히려 민간인 피해를 초래할 수밖에 없고 지상에서 쌍방간의 보복학살을 격화시켜 오히려 민간인 피해를 더 초래한다는 점에서 실효성도 도덕성도 부족함.


최재훈 활동가는 카다피의 해외자산 동결, 무기 금수, 국제형사재판소 회부, 아프리카 연맹이나 역내 국가의 중재 등 지금이라도 정치적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리비아 사태와 군사적 개입, 과연 ‘최선의, 최후의’ 수단이었나

서보혁 교수(이화여대 평화학연구소)는 R2P(Responsibility to Protect*)의 개념에서 이번 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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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사태를 분석하였다. R2P는 국가가 국민보호의무를 실패할 때 국제사회가 시의적절한 집단행동을 취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주요골자로 한다며, 카다피정권에 대해 군사적 개입을 하지 않았다면 어떤 형태로든 폭력이 계속되거나 확대되었을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에 이를 중단시키기 위한 수단의 강구, 즉 광의의 인간안보의 관점에서 리비아 군사적 개입은 필요한 부분이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서보혁 교수는 비록 R2P를 명분으로 리비아 군사적 개입을 단행했으나 실제 R2P 목적이 제대로 수행되었는가는 별도의 평가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안보관여(Human Security Engagement) 가 목표로 하는 개입의 6가지 전제조건은 다음과 같다 : right authority(정당한 권위), ▷just cause(정당한 명분), ▷right intention(정당한 의도), ▷last resort(최후의 수단), ▷proportional means(수단의 비례성), ▷reasonable prospects(합리적 전망).

유엔안보리에 대한 구조적 문제점은 이번 논의에서 차치하고 유엔 결의안은 정당한 권위, 명분, 의도의 조건은 충족하지만, 과연 군사적 개입이 다른 모든 가용할 수 있는 수단이 동원된 뒤에 최후의 수단으로 이뤄진 것인지(최후의 수단), 현 수준의 군사조치가 리비아 사태와 비례하는 것인지(수단의 비례성), 인간안보 관여가 중장기적으로 시민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사후 재건 비전 등에 대한 구체적 계획(합리적 전망)을 동반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번 리비아 군사적 개입에 대한 문제점과 한계점이 존재한다고 서교수는 지적했다. 즉 리비아에 대한 군사적 개입은 R2P를 명분으로 시작됐으나 실제 진행된 양상은 이를 충족시키기 어려운 상황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서보혁 교수는 유엔에서 R2P 개념을 내세워 이번 리비아 결의안을 통과시켰지만 합의절차와 행동절차 등이 제도화가 안된 상태에서 R2P 개념을 도입하여 결의와 개입이 이뤄진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하며, 인간안보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으로서 R2P를 공론화하고 제대로 달성하기 위한 장치를 고안하는 데 국제시민사회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리비아 사태와 서방 군사개입의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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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승 교수(한국외대)는 리비아 사태는 민주화운동, 내전, 전쟁 등으로 이름을 달리 붙여야 할 만큼 그 양상이 계속 변화하고 있다고 하면서, 리비아 사태에 대해 미국과 유럽의 대응양식이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리비아에서의 시위는 극단적 무장투쟁을 강조하는 이슬람 투쟁세력과 민족해방운동을 하는 소수 엘리트 장교, 그리고 아프간 내전에 참가했던 리비아 전사들이 조직했기 때문에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급격한 총격전과 무장투쟁이 벌어졌다고 설명했다.

즉, 2011년 리비아 사태는 1995년에 있었던 유혈폭동과는 다른 다양한 세력이 결합되어 시위대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과 다른 국가와는 달리 카다피에 반대하는 이슬람세력이 군부와 결합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반카다피 세력으로 인해 군주제로 복귀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 등 리비아만의 특이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유교수는 왜 이 시점에서 리비아에 대한 서방의 군사적 개입이 이뤄졌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리비아 내전은 서방의 군사적 개입으로 전쟁으로 확대된 반면, 이들 국가들은 예멘과 바레인 등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주화 시위에 대한 학살은 침묵하고 있다. 미국이 발을 빼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시민군에 알카에다가 개입했다는 카다피의 주장과 연관되어 있는 듯 보이며, 리비아의 원유 수출량은 세계12위에 불가하지만, 원유가 질적으로 좋으며 이 석유의 85%가 유럽에 수출된다는 점이 서방 국가들의 군사적 개입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유교수는 환기시켰다.

유교수는 어떤 사람들은 이번 아랍 지역의 민주화 혁명이 1989년에 있었던 동유럽에서의 도미노현상과 비슷하다고 하지만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유교수에 따르면 1989년 사건을 통해서는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지면서 미국 중심의 세계패권으로 이어졌지만, 이번에는 친미 국가와 반미국가 모두에서 혁명적 시위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집트는 미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이라는 점에서 친미 아랍국가가 더 이상 미국에 의존할 수 없는 상황이며, 앞으로 중동 지역에서 탈이데올로기 실용주의가 주도하는 새로운 정치지형을 점쳐보게 한다고 말했다.


리비아 군사개입이 한반도 평화에 주는 함의

정욱식 대표(평화네트워크)는 평화운동의 입장에서 무력사용 자체는 원칙적으로 반대하나, 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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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입을 해도 되느냐 안되느냐 하는 이분법적인 관점으로 보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정대표는 대량학살이 벌어지기 전에 무력 개입을 선택한 것은 정당하고 적절했다는 찬성론도 존재하지만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보았다.

▷ 우선 국제사회가 리비아 사태 초기 국면에 갈등해결의 가장 중요한 수단인 중재노력을 거의 보이지 않았음.

▷ 리비아 사태를 통상적인 의미의 민주화 운동으로 볼 것인지, 반군 세력과 카다피 정권 사이의 무력충돌, 내전으로 볼 것인지 살펴봐야 하며, 서방의 군사적 개입은 실질적으로 반군을 지원하는 성격이 큼.

▷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 등 서방국가들이 내부정치용으로 리비아 사태 이용함.

▷ 리비아와는 달리 예멘, 바레인, 시리아, 요르단 등에는 개입하지 않는 국제사회의 모습에서 R2P의 허구성, 강대국의 이중잣대를 드러냄.

▷ 비행금지구역 설정을 넘어선 과도한 군사행동과 군사행동에 내재된 ‘자기증식성’의 문제점.

▷ 민간인 보호 목적의 무력 개입이 초래한 민간인 피해. 이를 소위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 할 수 있는지 문제.

▷ 리비아에 대한 군사적 개입이 민주화 운동세력에게 연대의 희망을 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다른 독재국가들이 민주화 운동의 싹을 자르기 위한 무자비한 탄압에 나서는 현실.

마지막으로 정대표는 북한이 핵을 포기한 리비아의 현실을 보고 자신들의 선군정치와 핵보유 의지를 강화하고자 한다는 점을 볼 때, 이번 국제사회의 군사적 개입이 핵비확산체제의 확립에 기여하는가 하는 점에서 현재로서는 긍정적 평가를 내리기 어려운 면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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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군사개입을 둘러싼 국내정치와 국제정치

최재훈 활동가는 서구가 왜 리비아에 직접 군사개입을 했는지를 보면 석유이권이나 국내 정치상황등의 요인도 있지만, 더 크게 보면 미국이 중동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불확실성'이라는 점에서, 미국의 가장 큰 고민이 현 독재자들의 축출 후 어떤 정권이 들어설 것인가를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현 반카다피 측의 과도정부 인사들의 면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미국이 직접 개입해서 포스트 카다피 시대의 판을 짜 보려는 것처럼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서보혁 교수는 현재 아랍 민주화 바람에 대응하는 미국의 태도는 제국으로서의 미국이 약화되고 있는 현상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번 사태를 미국 중심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렵다고 보았다.

유달승 교수는 튀니지와 이집트는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국제금융기구의 정책을 잘 따르던 국가에서 양극화, 실업 등의 문제를 갖고 일어난 사태들이므로 이후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동반될 것이라고 보았다.

정욱식 대표는 이번 리비아 사태에 미국이 개입한 것에 대해서는 석유 등으로 단순히 설명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고 보았다. 특히 미국 주류의 전쟁방식인 대규모 지상군 파견을 피하는 전쟁수행방식의 변화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현 리비아 사태는 한반도 문제에 여러 가지 함의를 갖고 있는데 특히 북의 핵신봉 시나리오가 강화되는 현 상황에서 대화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유달승 교수는 리비아 사태를 보도하는 미디어의 내용들을 보면 매우 신뢰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리비아사태에 대한 왜곡 보도가 심하며, 알자지라 방송도 리비아사태에서는 미국과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방이 군사개입을 한 이후 미디어에서 카다피 체제의 붕괴와 동서분할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도 그런 측면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리비아 동부는 리비아 원유생산의 80%를 차지한다.




마치며

서보혁 교수는 인간안보의 개념으로 봤을 때는 사람만 교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밑바탕이 되는 사회경제적 개혁, 빈곤으로부터의 자유와 같은 광의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유엔 거버넌스를 개혁하여 기존의 안전보장이사회가 결정을 독점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인간안보이사회와 같은 새로운 논의 구조가 필요하며, 엔지오와 전문가집단과 수평적 네트워크를 갖도록 해야 하다고 주장했다.

R2P를 부실하게 선택적으로 적용하는 국제사회를 비판하면서 그 개념과 정신까지도 없앨 것인지 아니면 취지를 제대로 살려서 국제사회의 평화와 인권증진을 위한 개념으로 발전시킬 것인지를 시민사회가 판단해야 한다는 서보혁 교수의 발언처럼 이번 리비아 군사적 개입은 시민사회에 큰 과제를 남기고 있다.



* 정리 손연우(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간사) 김희순(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간사)

* R2P(Responsibility to Protect) 흔히 '국민보호책임'으로 번역됨. 2005년 유엔세계정상회의 결과문서에서는 the responsibility to protect its populations 으로 표현되어 있음.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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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맑음’...일본이 마주한 큰 재난, 조속히 수습되기를

지난 28일 저녁 7시 보신각 앞. 봄날 같지 않게 유달리 흐리고 추운 날씨에도 촛불을 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다. 내가 찾아간 곳은 일본 대지진으로 목숨을 잃은 이들을 위한 ‘추모와 연대의 밤’이 열리고 있는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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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준비가 한창인 무대를 바라보는 광장 한 가운데는 일본의 안전과 평화를 상징하는 큰 종이학이 원을 그리며 놓여있었다. 이 주위로 호기심에 가득 찬 시민들이 모였다. 광장 한 켠에는 핵 사고의 위험을 알리는 구호물과 일본시민을 돕기 위한 모금함이 준비되어 있어 퇴근길의 사람들에게도 눈에 띄게 준비돼 있었다.

한 외국인 부부는 모금함으로 다가가 선금을 하고는 곧 촛불을 받아들고 무대 앞으로 다가가 문화공연을 즐긴다. 무대 위에서는 고의석씨의 고요한 클래식 기타 선율이 흐르고 곧 일본 지진 피해에 대한 시낭송이 이어졌다.
 
추모제를 문화제 형식으로 만든 것도 어쩌면 이 때문인지 모른다. 뉴스에서 본 일본사태에 가슴아파 추모제에 참석했을지라도 공연이 없으면 빨리 헤어져 그 의미를 다지는 시간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맑음’이라는 이름의 추모제에는 각종 음악 밴드의 공연과 시낭송, 발언 등으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웃 나라에게 깊은 슬픔을 애도하는 시간이었다.

‘다시 맑음’이란 이 추모와 연대의 밤은 대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대규모 핵발전소 사고 등으로 최대의 시련을 겪고 있는 일본 사회에 위로를 전하고자 만들어졌다. 행사의 제목을 ‘다시 맑음’으로 한 이유도 일본이 하루빨리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길 바라는 뜻에서일 것이다.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서 인류애로 일본사회에 우리의 마음을 전달하자는 취지가 엿보인다. 이번 사고로 인한 수 만명의 희생자를 추모하고 더 나아가 핵 없는 세상을 위해 핵사고의 위험을 알리는 노력으로 시민사회가 연대하려는 노력이 뜻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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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맑음’은 추모제와 공연을 통해 시민들 개개인에게 가슴 깊은 공감을 이끌내고 다가가려는 노력이었다. 추모제는 허클베리핀, 킹스턴루디스카의 음악 공연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시민의 연대의 발언, 너름댄스도 하면서 밤 10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홍보가 부족한 탓인지, 추운 날씨 탓인지 기대했던 것만큼 동참한 사람들이 적어 안타까웠다.

글 기고: 장유진(추모제 참가자)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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