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를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새로운 ‘활동거소’ (site)로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이 점차 세를 얻어가고 있다. 주로 아시아권에서 유입되는 이주노동자들의 권리보호 운동은 한국 시민사회운동에서 하나의 확고한 영역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경제적 위상에 걸맞은 공식개발원조(ODA), 특히 아시아에서의 ODA 문제를 시민사회의 핵심적인 이슈로 부각시켜야 한다는 움직임도 상당히 활성화되고 있다. 경제 지구화에 전향적으로 대처하는 하나의 방안으로 글로벌 민주주의의 구축에 나서야 하고 그것의 적합한 활동 중심은 역시 아시아라는 생각의 흐름도 존재한다.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 더 나아가 역내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서도 아시아 시민사회 간의 연대와 소통이 사활적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모두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서 한 가지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관점은 안과 밖, 국내와 국제, 우리와 세계를 가르는 전통적인 이분법이다. 한국에 이미 들어와 있는 이주노동자가 백만 명을 헤아리고, 공장과 공사판과 식당과 지하철에 ‘우리’와 구분되지 않는 얼굴의 ‘외국인’들이 넘쳐 나는 현실 속에서 과연 이런 이분법이 적실한 관점일까? 한국 기업들의 역내 해외투자가 이미 국내 투자를 훨씬 상회하는 현실 속에서 과연 이것이 가능한 관점일까? 이미 국내와 국제를 억지로 구분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현실인데 해석으로만 인위적인 구분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문제의식 위에서 나는 한국 시민사회가 아시아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국 시민사회를 위해서라도 아시아가 필요하다는 관점이다. 우리가 더 이상 한국 사회만을 중심에 놓고 생각해서는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현실을 포착할 수도 없고, 또 그 미래가 밝지도 않다. 왜 그런가?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고 이미 아시아로 외연이 확장되어 있는 지역 내의 상호의존적 사회관계를 직시해야 우리 시민사회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또한 우리 사회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새로운 시각과 아이디어도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국 아시아에 주목하자는 말은 우리 사회가 어느새 처해 있는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현실을 바로 보자는 말이며, 그러한 달라진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참여연대 본연의 사명과도 부합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이때 ‘우리’라고 하면 우리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물리적·정신적 의미의 ‘타자’를 모두 받아들인다는 뜻이며, 타자의 눈으로 우리 스스로를 볼 줄 아는 ‘상대화된 우리’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미 ‘우리’는 과거의 ‘우리’가 아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우리’라는 정체성의 본질을 묻는 작업을 오래 전에 시작했어야 했다. 특히 시민사회운동 진영은 더욱 그러하다. 이것은 이미 엄연한 현실이며 이 점을 부정하는 것은 현실에 눈을 감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우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시민사회가 장기적으로 살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각전환을 단행할 때 ‘우리’는 국내와 국외 운동을 가르는 인위적인 경계를 넘어서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된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현 단계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가능한 최선의 방안은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우리의 아시아’를 재인식하고 그것을 진정한 ‘우리’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전환이다. 아시아에 주목하고 아시아와 연대하는 것이 한국 시민사회의 자폐적인 ‘자기응시’ (navel-gazing)에서 벗어나는 현실적인 방안이 될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시민사회단체로서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아시아 시민사회가 참여연대에 거는 기대가 이만저만 높은 것이 아니다. ‘우리’ 시민사회를 가꿔나가기 위해서라도 참여연대를 포함한 한국 시민사회가 아시아에 응답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조효제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겸 NGO대학원 교수)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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