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 8888 전국민주항쟁 20주년 공동성명

8월 8일 오전 11시, 서울 한남동에 위치한 주한 버마대사관 앞에서 국제민주연대,버마행동, 참여연대등 시민단체 및 학계들은 버마8888민주항쟁 20주년을 맞아 버마민주화를 염원하는  공동기자회견을 개최하였다.

1988년 8월 8일, 민주주의, 인권, 평화로운 버마 건설에 대한 강렬한 열망으로 버마 군부 독재 정권에 대항하여 스님들과 학생을 선두로 모든 계층의 버마인들이 참여하여 일어났던 버마 8888 민주항쟁이 일어난 지 오늘 2008년 8월 8일로 20주년을 맞게 되었다. 오늘 우리는 20년 전 버마민중들의 민주화 염원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버마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버마에 하루 빨리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를 강력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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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군부체제는 1990년의 총선 결과를 무시해왔고 NLD를 포함한 야당의 활동을 불법적으로 금지했습니다. 게다가 민주주의와 국가 화해를 위해 애써 온 아웅 산 수찌 여사, 우 쿤 툰 우와 밍꼬 나잉 등 2천명 이상의 정치 인사들을 투옥하거나 가택연금 시켰다. 더욱이 진정한 대화 진전을 위해 제시된 모든 제안은 전부 묵살해 버렸고 최근에는 자신들의 정권 유지를 위해 일방적으로 초안한 헌법을, 강제적이며 파렴치한 방식으로 승인시킨 후, 2010년 국민들의 의지에 반하는 또 다른 총선을 실시하려 하고 있다.

더구나 세계최빈국에 속하는 버마국민들은 2008년 5월 2일과 3일 버마를 강타한 태풍 나르기스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고 있다. 태풍피해를 복구하기위하여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버마군정은 아직 활발한 복구노력을 벌이지 않고 있다.

아시아에서 민주주의 국가를 자랑하는 한국정부는 아시아의 이웃국가 버마의 군사독재 상황을 종식시키고자 그동안 과연 무슨 노력을 하였는가? 가끔의 외교적인 수사 외에 한국정부는 버마민주화를 위하여 뚜렷한 노력과 행보를 보이지 않고 있다. 한국은 국제평화와 인권증진을 위한 노력을 다하여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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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의 악화되어가고 있는 비참한 상황에서 국가 위기를 해결할 정치적 변화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므로 버마 민주화 인사들과 버마의 평화와 민주화를 염원하는 한국 조직들은 버마군사정권과 한국 정부에 다음을 강력히 요구한다.

1. 버마군사정부는 아웅 산 수찌 여사와 모든 정치 수감자들을 무조건 즉각 석방하라.

2. 버마군정은 국가적 화해와 민주화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군부의 청사진을 전부 단념하고, 가능한 한 빨리 정확한 일정 안에서 NLD와 다른 소수민족 대표자들이 참여하는 진정한 대화를 시작하라.

3. 한국정부는 버마에 평화와 민주주의가 하루속히 정착될 수 있도록 외교적 노력을 다하라.

2008년  8월  8일

버마NLD-LA한국지부/버마행동/경계를넘어/구속노동자후원회/국제민주연대/나와우리/다산인권센터/동성애자인권연대/민주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민주주의 법학연구회/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연구소/민주화운동가족협의회/부산인권센터/새사회연대/서울외국인노동자센터/성공회대학교 NGO대학원 아시아시민사회지도자과정/아시아의친구들/아레나/에스페란토평화연대/5.18재단/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이주인권연대/인권실천시민연대/참여연대/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팔레스타인평화연대/통일교육문화원/한국노동네트워크협의회/함께하는 시민행동/환경운동연합/ 진영종


배경

1988년 8월8일 날에 대학생들이 주도하는 버마 민주화 시위가 수도 란궁에서 일어났다.   6주 내내 버마의 모든 도시들에서 항쟁이 일어났다. 버마군부는 이 항쟁에 참여한 국민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3000명의 버마인이 사살되었다.
국제사회가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여전히 몇 천 명 이상이 수감되어 있고 그중에서 민주세력의 지도자인 아웅산 수 치는 가택연금 중이다. 유엔이 승인하는 결의안에도 불구하고 2.050명의 정치범들이 여전히 감금에서 지키게 되고 있다. (국제 엠네스티)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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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사이클론)이 강타한 버마는 지금 6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거나 실종되었습니다. 이번 피해는 2004년 인도양 쓰나미 재난에 버금갈거라는 예측이 나오는 가운데 피해 규모는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버마 국영 TV에 따르면, 이라와디 지방에서 2만1793명이 숨지고 4만695명이 실종됐으며 양곤 지방에서는 사망 671명, 실종 359명, 부상 670명으로 집계되었다고 합니다. 접근이 불가하여 피해가 정확하게 파악되지 못하고 있는 외곽지역과 섬지역의 피해까지 조사가 본격화되면 희생자수는 급격하게 늘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수십만 명의 수재민이 발생하고 식수와 대피소조차 없어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버마는 그간 군사정부의 독재로 신음해왔기에 이번 사태가 더욱 안타까움을 더해가고 있습니다. 작년 10월 비폭력 민주화 시위대를 향해 군부가 벌인 끔찍했던 탄압이 아직도 생생하기만 합니다. 그런데도 버마군부는 일부 재난지역을 제외한 전국에서 자신들의 영구 집권을 위해  헌법을 제정하는 국민투표를 예정대로 오는 10일 강행한다고 합니다.

참여연대는 군부독재에 자연재해까지 겹친 버마의 국민들과 아픔을 나누고자 긴급하게 '태풍피해 버마국민을 돕는 모금'에 동참하고자 합니다.

모금은 작년 가을 버마 군부의 탄압에 맞서 활동했던 한국 내 버마 활동가들이 만든 '버마국민운동촉진위원회'를 통해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현재 버마의 상황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이번주 일요일까지 1차 모금기간으로 정해 모금을 집중한다고 합니다.

태풍피해로 고통받는 버마인들에게 큰 희망과 위로가 될 수 있도록 참여연대 회원 및 시민들의 따뜻한 성원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1차 모금기간 : 2008. 5.7 - 2008. 5.10
모금기관 : 버마국민운동촉진위원회 (www.pcnmb.net)
모금계좌 : 신한은행 607-02-426386 (계좌명 : 어밍슈이)

문의 :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02-723-5051)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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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 민족

버마 문제의 한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는 것은 종족문제/분쟁이다. 버마는 약 68%의 버마인, 9%의 샨(Shan)인, 7%의 까렌(Karen)인, 4%의 러카인(Rakhine)인, 3%의 화교, 2%의 몬(Mon)인, 2%의 인도인, 그리고 5%의 기타 종족으로 구성된 사회이다.

버마는 독립당시 현재와 같은 중앙집권적 체제가 아닌 연합(Federation/Union)의 체제로 탄생되었다. 현재의 행정구역 구분에서도 남아 있듯이 14개의 행정구역 구분 중 7개는 소수민족의 이름을 딴 자치구(state)들이고 나머지 7개주는 주로 버마인들이 거주하는 구(division)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군부가 집권을 시작하면서 이 소수민족들에게 부여되었던 자치권은 박탈당해 현재는 이름만의 자치구로 남아 있다. 현재 버마의 군사정부는 소수민족의 존재를 이유로 군부의 강력한 통치만이 버마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고 소수민족의 분리독립 움직임에 맞서 버마의 통일성을 보장할 수 있다는 논리로 자신들의 강압적 통치를 합리화 하고 있으나 통일성을 보장한다는 군부는 오히려 소수민족을 차별하고 고립화 시키는 행위를 하고 있으며 일부 소수민족과의 휴전협정에도 불구하고 소수민족에 대한 각종 탄압은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

1947년 버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무렵 Panglong 조약에 의해서 소수민족들의 자치주는 완전한 내치의 자율권을 부여 받았다. 그러나 이런 자치권은 점차 희생되어갔다. 버마에서 소수민족들의 분리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은 버마인이 중심이 된 국가에서 소수민족들이 점차 한계화되고 자신들의 정당한 이익을 보장 받지 못할 뿐 아니라 군부 독재하에서 자신들의 자치권이 점차 희생되는데 대한 항의로 시작되었다. 1962년 집권을 시작한 군부는 군을 버마인들로 채우고 학교와 종교문제에서도 강력하게 버마화(Burmanization)를 추진했다. 그러나 현재 소수민족들은 공식적으로 무장투쟁의 명분으로 분리독립운동을 더 이상 주장하지는 않는다. 1984년 이후로 9개의 소수민족 정당의 연합인 민주국민전선(National Democratic Front)는 공동목표에서 분리를 완전히 삭제하고 대신에 연방제 추진을 공식목표로 설정했다.

버마의 군사정권은 소수민족들과 1980년대부터 휴전을 추진해왔다. 38개의 소수민족 단체와 정당들 중에서 현재 26개의 단체가 군사정부와 휴전협정을 맺고 있다. 하지만 이 휴전협정이 버마나 특히 소수민족에게 안전의 보장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휴전협정이 맺어진 후 오히려 버마군은 소수민족의 지역에서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받았다. 이는 곧 소수민족의 인권탄압, 강제노동으로 이어진다. 버마군은 소수민족의 지역에 들어가서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강제로 노역에 동원하고 있다. 한 예로 버마군은 2003년 카렌민족동맹(Karen National Union)과 구두로 휴전협정을 했다. 하지만 휴전협정을 한지 17일 만에 군인들은 카렌인 거주지역에서 마을 주민들을 불법적으로 이주시키고, 주민중의 일부를 강제노동에 동원하고, 주민들의 집을 부수고, 재산을 강탈하고, 마을 주민들을 폭행하는 일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또 일부 소수민족의 휴전협정으로 인해서 버마군은 아직 휴전협정을 맺지 않은 소수민족과의 내전에 더 집중할 수 있어 분쟁은 격화되고 있다. 그리고 SPDC는 휴전협정이 버마에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이 휴전협정은 평화협정이 아닌 이상 평화 역시 보장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양심수

버마 군사정권은 자신들의 통치에 반대하거나 민주화 운동을 하는 인사들의 활동을 억제하는 수단으로 체포하여 투옥한다. 버마정치범지원연합(Assistance Association for Political Prisoners-Burma)라는 단체의 통계에 의하면 2005년 4월까지 확인된 정치범의 숫자만 해도 1317명에 달한다(http://www.aappb.net/prisoners1.html). 하지만 이 1,317명의 명단조차도 부분적인 것이며 전체 정치범이 얼마나 구금되어 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 명단에 소개된 정치범의 배경도 다양해서 학생, 정당인, 소수민족단체 활동가, 예술가, 엔지니어까지 망라하며 특히 버마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들은 승려들까지 이 정치범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더욱이 UN 특사인 Sergio Pinheiro에 따르면 2명의 국회의원을 포함한 25명의 정치범은 이미 그들의 형기를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석방되지 않고 있다. 또 사법적 판단의 기준도 자의적이어서 한 야당 국회의원은 면허 없이 오토바이를 탔다는 이유로 7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또 1988년 민주화 운동 이후로 확인된 것만 86명에 달하는 정치범이 옥중사했다. 그는 버마 조사 후 작성한 성명서에서 다음과 같이 버마의 자의적 사법해석을 비판하고 있다: “이 인사들을 체포한 근거는 매우 자의적이며 기본권과 표현, 정보, 이동, 집회, 결사의 자유를 행사하려는 행위를 범죄시하는 법률에 근거하고 있다”
(http://www.burma.no/nyhetsarkiv/2004/mars/260304_pinheiro_statement.htm).

인신 매매

버마에서 인신매매의 주된 희생자는 여성이며 여성 인신매매가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것은 여성의 권리가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버마의 상황과 깊은 연관이 있다. 버마에서 인신매매가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것은 한편으로는 가정폭력, 가계부양의 중압감, 내전, 경제적 그리고 교육의 기회가 부족한 것이 원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주변국 특히 태국에서 가정부나 성매매자와 같은 비숙련 임노동의 수요가 많기 때문이다. 버마 당국, 특히 지방의 행정당국은 이런 인신매매를 눈감아주고 있는데 그 대신에 뇌물을 받아 이익을 챙긴다. SPDC 군사정부는 인신매매에 대해서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SPDC 당국은 2004년에 인신매매의 단속에 진전이 있었다고 선전하고 있지만, 이는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강력한 의지에 의한 단속과 예방의 노력이 있었다기 보다는 미국의 경제제재 위협과 버마의 대외적 이미지를 염려한 군부의 일시적 노력에 지나지 않았다. 보다 근본적으로 SPDC 당국은 인신매매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고 있지 않다.

여성

버마에서 여성은 이중의 고통을 겪고 있는데, 군사독재하에서 자유를 박탈당한 고통과 더불어 버마군의 만연한 성범죄 즉 강간에 의해 고통받고 있다. 2004년 카렌여성조직(KWO)는 126건의 강간을, 같은 해 버마여성동맹은 추가로 26건을, 그리고 2002년 샨 여성행동네트워크는 샨주 한 곳에서만 173건의 강간을 보고했는데, 실제 숫자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되며 샨여성행동네트워크의 보고에 따르면 그중 61%가 집단강간이며, 83%는 군 고위장교가 가담했고, 강간을 당한 여성중 28%는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173건중에서 가해자가 처벌된 것은 단 한건에 불과하다. 이런 만연한 강간은 군사문화와 더불어 적절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출산중 산모 사망률이 10만명당 580명에 달하며 3-15%로 추정되는 여성이 물리적, 정신적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더불어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이나 오지에서 여성의 교육이 제한되어 여성 문맹률이 70-80%에 이른다.

보건

버마의 보건문제는 심각한 수준에 있고 특히 군부독재 하에서 그 심각성은 더욱 증대되었다. 일차적으로 버마의 보건문제는 군비지출을 위해서 점차 줄어드는 보건예산에 있다. IMF에 따르면 1988년부터 1999년 사이에 공공지출에서 보건관련예산이 차지하는 비율은 4.97%에서 2.70%로 줄었고,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 역시 0.62%에서 0.19%로 줄어들었다. 그에 반해 같은 시기 국방예산은 공공지출의 24%에서 45%로 증가했다. 또 군사정부하에서 만연한 부패와 의료서비스의 사유화 정책으로 인해 의약품 가격은 계속 상승했고, 공공병원에서도 의사에게 뇌물을 주어야만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 의약품 가격 상승에 따라서 가짜 약도 난무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의료서비스의 사유화는 개인병원들을 소유하고 있는 군부엘리트의 주머니만 채워주고 있고 군인들은 최신의 시설과 약품으로 치료받고 있다. AIDS 문제도 심각해서 UNAIDS는 버마가 아시아에서 가장 심각한 AIDS 문제를 가지고 있는 국가가 되어가고 있다고 경고했는데, 버마의 AIDS 감염률은 2.2% 정도이며 아시아 국가들 중 유일하게 감염률이 상승하고 있다. UNAIDS의 추정에 의하면 버마에는 적게는 17만명, 많게는 62만명의 AIDS 감염자가 있으며 2003년 한해만 해도 1만1천명 내지는 3만 5천명이 AIDS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버마에서 AIDS가 문제가 되는 주 원인은 빈곤, 전쟁, 마약 등으로 볼 수 있다.

<기본 통계>

* 예상수명(남성): 56.2세 - ASEAN 평균인 66.5세보다 8세나 적다.
* 공공보건: WHO는 버마 공공보건 수준을 조사대상 191개국 중 190등에 랭크하고 있다. 버마는 일인당 보건비용 지출이 아세안에서 가장 낮다. 아세안 평균은 US137 달러인데 반해 버마는 US 5 달러에 불과하다.
* 5세이하 사망률: 1천명당 109명.
* 영양상태: 5세이하 어린이 36%가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

언론의 자유

버마에서 언론사와 언론인에 대한 통제는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군사정부는 국내의 내적 위기나 중요한 사건들에 대해 철저하게 보도를 통제하고 사전검열을 철저하게 실시하여 비판적 기사나 보도를 한 경우 강제로 폐쇄된다. 한편, 외국의 언론인들에게 버마 국내 정치사정은 거의 접근이 불가능하다. 해외 언론 특히 BBC, Voice of America는 늘 군사정부의 비난의 타겟이 되어왔고 이런 해외 언론들과 인터뷰를 한 국내인사들은 처벌을 면할 수 없고, 중국에서 수입된 값싼 단파 라디오를 통해 이런 방송들을 청취한 일반 국민들도 언제나 처벌의 위험에 처해있다. 2004년 한해만 해도 홍수를 취재하던 다큐멘터리 작가가 체포되고, 격월간지가 검열을 당하고 가장 최근에는 킨뉸 수상의 해임과 함께 17개에 달하는 신문-출판사가 강제로 군당국에 의해서 폐쇄되었다.

소년병

버마는 가장 많은 소년병들을 이용하는 국가다. 소년병들은 18세미만의 아이들로 강제로 징집되어 전쟁에 이용되고 있다. 소수민족들도 소년병들을 징집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정확한 소년병의 수는 알 수 없지만 , 교육도 받지 못한 약 50,000 명의 아이들이 전쟁터에서 살인과 폭력 그리고 성폭력을 강요받고 있으며, 그들 자신들 또한 그러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국제 단체들과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강제 징집되거나 납치되며, 어떤 아이들은 어려운 가족의 생계를 위해 또는 자신의 부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입대하는 경우도 있다. 거리의 아이들이나 고아들의 경우는 강제 징집에 특별이 더 취약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저항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매우 쉽게 겁먹고, 매우 복종적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군대는 그들의 유일한 어머니이자 아버지로 교육받는다.

거의 모든 소년병들은 군대에 입대하면 가족들과 연락 할 수 없으며, 성인들과 같은 훈련을 해야 한다. 훈련 중 에는 훈련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한다거나 상관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여러 폭력에 시달리며, 개중에는 상관의 폭력으로 시력을 잃거나 몸이 마비되고 , 심지어는 죽는 경우도 보고 되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소년병들은 군대의 만연한 부패 때문에 전혀 급여를 받지 못하거나 저임금에 시달린다.

전쟁에 어린 소년병들이 투입될 경우 최전선에 배치되어 인간방패로 이용되거나 작고 민첩한 소년병들을 이용한 게릴라식 전투에 투입한다. 또 소년병들은 마약과 무기를 운반한다. 참전했던 아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마을로 들어가서 마을사람들을 죽이고 여자들을 강간하고 마을을 불태우며 가축들과 양식들을 강탈할 것을 강요받는다. 소년병들은 잔악한 전쟁과 폭력을 피해 탈출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실패하고 혹독한 벌을 받는다.

유엔총회가 2005년5월 미얀마 정부에 18살 미만의 아이들이 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막을 것을 요구하는 의정서를 채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군부는 이를 부인하고 오히려 군대와 군인의 수를 증강시키고 있다. 그리고 증강된 군대와 군인의 수 중 많은 부분을 소년병들이 채우고 있다.

강제 노동

버마에서는 군의 무력을 동원한 강제노동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주로 고산지대에 사는 소수민족 주민들이 군을 위한 강제노동에 동원되는데, 그들은 짐을 나르는 일부터 심지어 지뢰제거의 도구로까지 이용된다. Human Rights Watch에 따르면 1992년부터 1996년까지 어린이, 노약자, 여성을 포함하여 최소한 200만명의 인원이 보수를 받지 않는 강제노동에 동원되어왔다는 보고가 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이 강제노동이 아주 열악한 환경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던 60세 가량의 한 농부의 증언을 보면 다음과 같다(Ross Marlay and Bryan Ulmer, 2001. "Report on Human Rights in Burma: Background and Current Situation", Journal of Third World Studies, p. 121).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아주 무거운 탄약들을 운반해야 했다. 허리에 연결된 족쇄를 차고 그 짐들을 운반했다. 거기엔 약 100여명의 군인들이 있었고, 대부분 늙고 도망갈 수도 없는 17명의 짐꾼들이 있었다. (내가 도망쳤을 때) 군인들은 나를 마을의 한가운데서 붙잡았다. 내가 땅에 쓰러졌을 때 그들은 나를 때리고 발로 찼다. 한참을 맞은 후에 더 이상 감각이없었기 때문에 나는 얼마나 맞았는지 기억하지 못하다. 나는 너무 힘들었고 상처를 많이 입었다. 넘어졌을 때 일어날 수도 없었다. 나의 두손에 수갑이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뭇잎에 담긴 밥과 카레를 먹었는데, 그건 개에게 밥을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더 이상 도망칠수 없었고, 내가 마침내 풀려났을 때 그 무거운 짐을 날랐기 때문에 온몸에 상처 투성이였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강제로 동원된 사람들은 군인들의 감시 하에 생명을 무릅쓰고 강제로 일해야 한다. 도망치다가 다시 잡히면 많은 경우 사실되고 운이 좋은 경우라도 엄청난 구타를 당한다. 이런 강제노동은 주로 숲을 개간하거나, 군부대시설을 새로 만들고 고치는데, 그리고 도로건설을 위한 힘든 노동에 동원된다. 더불어 도로를 개설하고 군부대를 만들기 위해서 주민들이 강제로 이주당하고 이런 강제노동과 주민이주를 담당하는 군인들은 강간을 포함해서 마을주민들에게 온갖 악행을 자행하고 있다.

국제사회는 오래 전부터 버마의 강제노동과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인권침해에 대해서 염려를 표해오고 있다. 그중 하나가 국제노동기구(ILO)인데, 1998년에 펴낸 ILO 보고서(UN 사무총장의 인권문제에 관한 특별 조사위원회의 보고서)에는 버마의 강제노동에 관한 자세한 서술이 등장한다. “조사위원회가 제출한 정보에 따르면 지방단체, 군, 민병대를 포함한 버마 당국은 아주 많은 일들을 수행하기 위해서 버마인들을 강제로 동원한다고 한다. 남자, 여자, 어린이 등이 강제노동에 차출된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들에게 보수가 지급되거나 어떤 형태의 보상도 행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동원된 사람들은 폭언과 강간, 고문, 살해를 포함한 신체적 학대에 노출되어 있다... 마을주민들은 군대를 위해서 짐꾼을 제공하는 것 외에도 군대 막사를 건설하거나 보수하는데 동원되며 이 시설들을 운영하는데도 동원된다... 또 이렇게 강제동원된 사람들은 인간방패로도 동원된다. 그들은 군대보다 앞서서 적군의 총알받이로 나가며, 부비트랩을 군대에 앞서 나가 폭발시키는데 동원되고, 정규군에 대한 공격을 차단하기 위한 인질로도 동원된다... 또한 버마당국 특히 버마군은 자신들의 수입을 위해서 강제동원된 사람들을 이용한다. 강제동원된 사람들을 이용해서 경작을 하거나, 물건을 생산하고, 주민들로부터 금품을 갈취하거나 강탈한다... 많은 수의 국가적 또는 지방의 사회간접자본 건설 역시 강제노동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종종 수십만명의 인원이 동원된다.”

천연가스 개발: 유노칼 소송

Unocal이란 회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근거를 두고 프랑스의 Total이 주도하는 버마에서 천연가스를 채굴하여 태국까지의 파이프라인을 통해 이를 수출하는 컨소시엄의 일원이다. 이 천연가스 채굴과 관련하여 버마에서 군사정권에 의한 광범위한 인권탄압이 이루어졌고 이에 대해서 EarthRighs International 이란 단체가 Unocal을 상대로 미 법원에 제소를 하였다. 이 천연가스 개발을 위해서 Unocal이 포함된 컨소시엄은 1990년 버마 군사정부와 협상을 시작했고, 1995년부터 천연가스 수송을 위한 파이프라인 건설을 위해 버마정부와 조인트 벤쳐를 만들었다. 이 조인트 벤쳐의 합의 사항에 따라서 버마 군사정부는 파이프라인에 대한 사보타지 행동을 막기 위해서 파이프라인 주변으로 군을 증강 배치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 천연가스 개발 사업을 위해 버마군은 해당지역의 농부와 어부들을 강제이주시키고, 주민들을 동원하여 정글을 개간하고, 군 막사를 건설하고, 군 장비를 나르도록 했다. 물론 이들은 이 노동에 대해서 보상받지 못했다. 오히려 이들은 군인들의 위협속에서 강제노동을 해야했고, 아주 적은 양의 식사만을 공급받으며 치료도 받지 못하고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이를 피해 도망하는 사람들은 사살되었으며 마을의 여성들은 군인들에 의해서 강간을 당했다.

버마 학생운동가 출신인 카사와(Ka Hswa Wa)가 세운 EarthRights Internatinal은 미국의 노동조합(AFL-CIO)의 지원을 받아 1996년 Unocal, Total, 그리고 버마국영가스회사, 태국국영가스회사를 법원에 제소했다. 원고가 된 마을 주민들은 Unocal이 악명높은 강제노동을 자행하는 버마정부와 사업 파트너였기 때문에 이 회사의 파이프라인을 건설하기 위해서 버마정부가 저지를 조직적인 인권탄압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Unocal은 자신들은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Unocal의 버마 사업 고문(consultant)과 Unocal의 버마 책임자들은 버마군에 의해서 Unocal의 파이프라인 건설중에 심각한 인권침해가 있을 수 있거나 있었다고 증언했다.

법원으로 간 이 소송사건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1997년 LA의 미연방 지방법원은 이 소송사건이 이유가 있다고 여기고 심리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서 Unocal은 2001년 이 사건을 기각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여 책임을 모면하려고 시도했으나 거부당했다. 다시 2002년 6월에 Unocal이 소 각하여부에 대한 판단을 법원에 요청했으나 이 역시 거부당했다. 그러나 2002년 9월 미국 상소법원은 Unocal 소송사건을 진행하려던 지방법원의 결정을 뒤집었다. 2003년에 제 9 연방순회상소법원은 이 소송사건을 다시 심리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지루하게 반전을 거듭하면서 계속되던 소송은 2005년 3월 Unocal과 최종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보상합의에 따르면 Unocal은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해주어야 하며 피해를 입은 마을 주민들의 생활수준 향상, 보건, 교육을 지원할 자금을 제공하고, 파이프라인이 설치된 지역의 주민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책임을 Unocal에게 안겼다. Unocal은 자신의 모든 사업에서 인권을 존중할 것과 교육프로그램을 향상시킬 것을 약속했다.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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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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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900년경에 버강(Bagan)왕국을 건설했던 버마는 1820년대 들어서 영국과 전쟁에서 패해
일부 영토를 영국에 빼앗기면서 영국 식민지 시대로 들어간다.
1942년 버마의 영토는 다시 일본에 의해 점령당했으나 1945년 일본에서 해방되고 다시 영국이 진입한다.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버마는 이후 10여년간 영국이 이식한 의회민주주의를 실시하지만, 소수민족의 분리독립 움직임, 공산주의 문제, 그리고 권력을 잡은 독립운동가 출신의 엘리트간 내적 분열로 인해 정국혼란이 초래되고, 이를 틈타 1962년 네윈이 이끄는 군사쿠데타가 성공하여 버마식 사회주의라고 알려진 제1차 군부독재시기에 들어선다.

1988년 버마 전역에서 경제난과 정치적 억압에 항의해 일어난 민주화운동은 네윈의 1차 군부독재를 종식시키는데 성공했으나, 곧바로 소마웅이 주도하는 군부가 민주화운동을 진압하며 권력의 전면에 나서 제2차 군부독재 시기에 들어간다.

버마 민주화의 상징으로 알려진 야당 NLD(민족민주동맹,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는 이 2차 군부독재시기가 시작된 직후인 1988년 9월에 창설되었다. SLORC(국가법질서회복평의회, State Law and Order Restoration Council)라 이름붙인 기구를 통해서 권력을 장악한 군부는 1990년 국제적인 압력에 굴복하여 총선거를 실시했고 그 결과 NLD가 의석의 80% 가량을 획득하고 군부가 내세운 후보들은 참패하였다. 하지만 SLORC는 선거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권력이양을 거부했다. 이후 NLD 인사들, 특히 버마 민주화의 상징인 아웅산 수찌여사는 군부에 의해 투옥, 가택연금, 석방을 거듭하였다.

1997년 SLORC가 SPDC(국가평화발전협의회, State Peace and Development Council)라는 새로운 이름의 기구로 대체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버마의 인권상황 개선과 민주화는 요원하기만 하다.


사회

버마는 인구 약 5천만의 국가로 다종족 사회이다. 가장 큰 종족집단은 버마족으로 전체 인구의 약 70%를 차지하며 그 외 소수종족으로 까렌족, 까인족, 샨족, 러카인족, 친족, 몬족, 인도인, 중국인등이 있고 일부 종족은 자신의 종족명을 주의 이름으로 한 자치주(이전에는 자치가 어느 정도 허용되었으나 현재 군부독재 하에서는 이름만 자치주로 남아있다)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사회 전반적으로 불교의 영향이 강하며 전체 인구의 약 90%가 불교 신자다. 그 외 기독교와 무슬림이 각각 인구의 5% 미만을 차지하고 있다. 불교의 영향력이 워낙 강해 버마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들은 바로 스님들이며 군부도 불교에 대해서만은 상당한 지원을 하고 있다. 버마 남성들은 일생동안 한번씩 일정기간 출가를 하여 승려의 생활을 경험한다.

경제적으로 버마는 가장 가난한 국가의 하나다. 일인당 국내총생산은 미화 100달러가 채 되지 않는다. 화폐단위는 짯(Kyat)인데 공식 환율은 1달러당 6.02짯이지만, 실제로 시장에서 거래되기는 1달러에 970짯으로 거래된다. 기대수명도 낮아서 56세밖에 되지 않으며 WHO의 통계에 의하며 버마의 공공보건 수준은 조사대상 191개 국가중 190위로 최하위권이다. 또한 5세 이하 어린이의 36%가 적절한 영양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으며 성인의 3.5% 즉 약 69만명의 HIV/AIDS 환자가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다. 교육상황도 열악하여 전체 어린이의 30% 정도만이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버마군의 약 17.5% 즉 7만명에 달하는 소년병들이 존재한다.


정치

1974년 군부에 의해서 헌법이 폐지된 이후 버마의 정치는 SPDC에 의해서 움직이며 그 최고 정점은 SPDC 의장이며 국가수반인 탄쉐이다. 행정부 쪽을 보면 군부통치하에서 최고의 행정권은 군사평의회가 가지고 있는데, 형식상으로는 총리에 의해서 행정권이 행사되지만, 이 총리는 군사평의회에 종속되어 있다. 따라서 실제 권력은 바로 이 군사평의회에 있다고 보인다.

헌법의 폐지와 함께 입법부 역시 폐지되어 버마는 현재 입법부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대신에 모든 법은 군사평의회에 의해서 칙령의 형태로 발표되며 실행된다. 법원은 최고법원을 정점으로 하여 형식상 존재하고 있지만, 역시 군사평의회가 법원장을 임명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 독립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선거는 1990년 선거 이후 한번도 실시된 적이 없다. 정당은 1990년 선거당시 234개까지 있었으나 현재는 약 10여개로 줄어들었으며 NLD를 제외한 나머지 정당들은 비교적 군사정부에 협조적이다. 친정부적인 정당 중 중요한 정당은 NUP(National Unity Party)와 USDA(Union Solidarity Development Association)가 있는데, NUP는 제1차 군부시기에 정권을 담당했던 BSPP(사회주의자 강령 정당, Burma Socialist Program Party)의 후신에 해당하며 USDA는 현재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신군부, 엄밀하게 말하면 군사평의회의 정치적 기구이다.

버마의 군은 두말할 나위 없이 단일집단으로 가장 강력한 집단이다. 전체 병력은 약 40만명으로 추산되는데, 육, 해, 공군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독립이후 다양한 도전들 즉, 소수민족의 분리독립 움직임, 공산주의문제, 국내적인 혼란 등을 통해서 권력을 확대해왔으며 현재 군 지도부의 가장 큰 관심사는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권력을 붕괴시킬 수도 있는 군 지도부 내의 분열을 방지하는 것이다.


경제

버마의 경제는 1962년부터 1988년까지 지속된 ‘버마식 민주주의’ 기간동안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졌고, 버마식 사회주의가 막을 내린 이후 권력을 잡은 신군부하에서는 부정부패와 인권문제로 인한 부분적 경제봉쇄, 그리고 군인들에 의한 경제정책 실수로 인하여 크게 되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현재 버마는 1인당 GDP가 미화 99달러에도 미치지 않는 최빈국 가운데 하나이며 그에 따라서 제반 경제관련 상황 즉, 공공보건, 교육 등이 극도로 취약한 상태이다. 지니계수도 도시가 56.0, 농촌이 41.0에 달하고 있으며 소득의 분포는 매우 불균형적이어서 최저 20%는 겨우 8%의 소득만을 차지하고 있고 최고 20%에 속하는 버마인이 전체 소득의 40%를 점하고 있다. 천연자원은 산림자원이 풍부하며 원유와 천연가스, 석탄도 생산되고 있다.

국가 경제 정책

버마의 경제정책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 될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독립 직후 자립경제를 건설하기 위한 수입대체 산업화의 시기인데, 결과적으로 이 정책은 실패했다. 두 번째 시기는 1962년 군부가 집권하면서 도입한 ‘버마식 사회주의’ 시기인데 초기에는 강력한 통제경제정책을 실시하여 자급자족적 경제를 건설하려 했다. 이런 시도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군부는 공적개발원조(ODA)에 의존한 수입대체산업화를 다시 시도하였는데, 이 정책이 결정적으로 버마를 파산상태까지 몰고 갔다.

1988년에 집권한 SLORC 군부는 사회주의 성향에서 탈피하여 개방적인 경제를 건설하고 외자를 유치하기 위해 많이 노력하여 경제 성장면에서 볼 때 최근의 실적은 그리 나쁘지 않은 편이다. 특히 1996년부터 경제의 근대화, 제조업 기반확충을 위한 신경제 1차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오랜 사회주의의 습관, 서방국가들의 경제제재, 군사정부의 경제통제, 잘못된 금융, 물가정책, 제도와 법령의 미비 등으로 인해 여전히 외자의 유치가 어려우며 경제개혁의 성과도 미약하다. 또 최근에는 짯화의 급격한 평가절하, 인플레, 경제제재로 인해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산업 구조

버마는 아직 대부분의 인구가 농업에 기반한 농업국가이다. 전체 노동인구의 63%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미약한 제조업과 가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인구는 전체의 9%에 지나지 않는다. 버마는 점차 농업경제에서 산업경제로 이행을 추진하면서 사회주의 시절의 집체기업과 사기업, 국유기업이 혼재되어 있는 상황인데, 사적기업의 국내총생산에 대한 기여가 76%, 국가부분은 22%이며 집체기업의 기여는 2%에 불과하다. 농업을 포함한 산업생산이 국내 총생산의 60%, 그리고 무역과 서비스업이 각각 20%씩 차지한다.

주요통계

  1997-98 1998-99 1999-2000 2000-2001
실질 GDP 성장률 5.7% 5.8% 10.9% 6.2%
물가상승률 2.97 51.5 18.4 -0.1
환율(달러당) 246.4 333.9 340.8 355.3
대외채무(억 달러) 56 56 60 55
외국인 투자기업수 23 7 9 10
 


주요 교역대상국과 투자국

수입: 싱가포르, 태국, 한국, 중국, 일본,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인도, 미국
수출: 태국, 인도, 미국, 중국, 싱가포르, 일본, 홍콩, 말레이시아,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주요 투자국: 싱가포르, 영국, 태국, 말레이시아, 미국, 프랑스,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일본, 한국, 홍콩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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