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인권의 역사적 시험대,

무니르 독살 형사소송의 ‘마지막 비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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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전 인도네시아 국가정보원(BNI) 부원장 묵디 뿌르워쁘란조노(Muchdi Purwoprandjono)
오른쪽: 인권변호사 무니르 사이드 탈립(Munir Said Thalib)

지난 4월 5일에 자카르타의 대검찰청 앞에서 인도네시아 청년들이 구속도 두렵지 않다며 천막을 치고 철야시위를 벌였다. 검찰에 대한 그들의 요구사항은 인권변호사 무니르 사이드 탈립(Munir Said Thalib)의 독살 배후 용의자인 전 국가정보원(BIN) 부원장 묵디 뿌르워쁘란조노(Muchdi Purwoprandjono)에 대한 마지막 법적 행동을 조속히 취하라는 것이었다. ‘용맹’과 ‘총명’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 무니르는 노동운동, 국가폭력반대운동, 과거사청산운동, 안보기관개혁운동에 헌신함으로써 수하르토 독재의 몰락과 민주주의 진전에 기여하였고, 꼰뜨라스(Kontras)와 임빠르샬(Imparsial) 같은 선명한 주창형 운동단체를 조직적 유산으로 남겨 인도네시아 최고의 인권운동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런데 2004년에 9월 7일에 암스테르담행 인도네시아 국영항공기 안에서 사망하였고, 네덜란드당국의 부검결과 그 사인이 치사량을 훨씬 웃도는 독극물 섭취로 밝혀졌다.

서른아홉 해의 삶이 이렇게 마감된 뒤 6년이 넘도록 인도네시아 시민사회단체들은 국제적 관심과 지지를 받으며 살인자들을 찾아 처벌해줄 것을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진상규명활동과 추모활동을 전개하는 한편으로 법적 경로도 밟아왔는데,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성과도 있었다. 독극물을 음료에 투입했다는 조종사 뽈리까르뿌스 쁘리얀또(Pollycarpus Priyanto)가 우여곡절 끝에 대법원 재심의까지 거쳐 20년형을 언도받고 반둥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를 보안요원으로 항공기에 탑승토록 허용하는 공문을 위조하여 발송한 세 명의 국영항공사 직원들도 실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올해 2월에는 국영항공사가 무니르 유족에게 우리 돈 4억원 이상을 보상해야 된다는 대법원 판결도 얻어냈다. 최고의 법률적 승부는 독살의 공범이자 배후에 대한 형사소송이었다. 심증이 가는 여러 권력자들 중에서 증거가 발견된 묵디 한 명만을 대상으로 삼은 소송이었지만, 역시 만만치 않았다.

검찰은 사건 전후에 묵디와 뽈리 간 41건의 휴대폰 통화기록을 핵심 증거로 제시하였지만, 2008년 12월 31일 남부자카르타지방법원은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묵디에게 무죄를 선고하였고, 대법원도 2009년 6월에 묵디의 손을 들어주었다. 적지 않은 수의 증인들이 불출석한 파행 재판이었고, ‘애국자’ 묵디를 위한 ‘어깨들’의 위협적인 지지시위도 있었다. 판사들이 매수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고, 소송을 이끌었던 시나가(Cirus Sinaga) 검사는 광범한 부패사건의 연루자로 조사를 받는 처지가 되었다. 새로운 증거를 제시해야만 법률적으로 마지막 단계인 대법원 재심의를 요청할 수 있기에, 묵디의 법적 단죄는 무산되고 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무니르의 유족과 동료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경찰이 묵디의 혐의를 입증할 새로운 증거들을 확보하고 있으며, 가장 결정적인 증거가 뽈리와 묵디 사이의 통화 녹음테이프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대검찰청이 “학습하는 중”이라거나 “때를 기다리는 중”이라는 애매한 표현을 흘리며 ‘마지막 무기’의 사용을 주저하고 있어서, 대검찰청 앞에서 철야시위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묵디는 동티모르와 이리안자야(현 파푸아)처럼 악명 높고 험난한 ‘분쟁지역’의 야전에서 경력을 쌓았고 수하르토 체제 말기에 특전단(KOPASSUS) 사령관으로 복무한 전도유망의 장성 출신이다. 그러나 특전사령관 재임 시 민주화운동가들에 대한 조직적 납치를 지휘한 것으로 무니르에 의해 지목된 바 있고, 결국 ‘임무해제’ 명령을 받아 소장계급을 끝으로 퇴역해야만 했다. 이로 인해 무니르에 대한 묵디의 원한이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추정한다. 그러나 묵디는 국정원 부원장으로 영전되면서 민주화 이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군 출신과 민간 출신 후보의 대결로 압축된 2004년 대통령 직접선거 때는 역설적이게도 군 출신 유도요노(Susilo Bambang Yudhoyono)와 맞붙은 민간 출신 메가와띠(Megawati)의 편에서 선거를 도왔으며, 바로 이 때 무니르 독살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음모가설은 안보기관을 넘어서 민간정치부문의 실력자들까지 포괄하는 중층적인 양상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묵디는 독살배후로 제소된 뒤에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정치에 가담하여 대인도네시아운동당(Gerindra)의 부총재를 역임하더니, 최근에는 말년을 이슬람정치에 헌신하겠다며 통일개발당(PPP)에 입당하여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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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하르토체제 말기에 납치된 13인의 민주화운동가


지난 4월 7일에 콘트라스와 국제이행기정의센터(ICTJ)는 수하르토 체제 종식이후 13년간 추구된 이행기 정의(transitional justice)의 역정을 평가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민주화 초기에 여러 희망찬 시도들이 있었지만, 구세력과의 타협적 시기를 거쳐, 최근에는 아예 꽉 막힌 시기를 맞이하게 되는 허탈한 과정을 기록하였다. 그 동안 인권침해사건과 관련된 고위급 장성들이 단 한 명도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았으며, 민주화운동가납치사건의 지휘자인 묵디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민주화 이후에 정치적으로 더 활동적이다. 대표적으로 1999년 동티모르 철수 시 발생한 군부폭력의 책임자인 위란또(Wiranto) 장군, 1998년 5월 반화인 집단폭력의 책임자 쁘라보오(Prabowo) 장군이 정부통령선거에 후보로 출마한 바 있고, 차기 대선에도 출마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과거사가 정리되지 않은 탓에 2014년 인도네시아 대선의 전망도 따라서 회귀적이다. 이로써 진실은 무력하고 정의는 강자의 편이라는 국민적 학습이 지속된다.

이런 정황에서 무니르 사건 형사소송은 인도네시아 인권의 ‘역사적 시험대’로 부각된다. 과연 특전사령관과 국정원부원장을 역임한 국가폭력의 핵심인물을 감옥으로 보낼 수 있을 것인가? 인도네시아 인권운동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도전에 나섰고, 지금 그 장도의 막바지에 서 있다. 무니르는 과거사 청산운동의 중핵이었고 현재도 그러하다. 무니르는 수하르토 독재의 국가폭력에 과감하게 맞서면서 전국적 ‘스타’가 되었고, 과거에 갇힌 각종 국가폭력사건들을 되불러내고, 국가폭력의 ‘성채’인 안보기관의 개혁운동에 돌입하였다. 역사를 위해 투쟁하다 스스로 역사가 되었으며,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을 옹호하다가 자신이 피해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반국가폭력의 화신이다. 고위급이 연루된 살인이라는 위키리크스(Wikileaks)의 폭로, 무니르를 거리명칭으로 삼겠다는 네덜란드정부의 발표, 거액의 민사배상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판결, 심지어 묵디의 화려한 정치행보까지도 무니르에 대한 기억을 재생시키고 영웅적 서사를 재구성시킨다. 그러니 무니르가 아니라면 누가 할 수 있으랴? 아니 무니르라면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번이 마지막 전투이다. 무니르는 생전에 묵디의 군복을 벗겼지만 감옥에 가두지는 못했고, 그래서 묵디의 복수가 가능했던 것이라고 동료들은 한탄한다. 무니르는 생전에 실패한 것을 사후에 성사시킬 수 있을까? 과연 ‘죽은 무니르’가 ‘산 묵디’를 결박시킬 수 있을 것인가? ‘시작은 있지만 결말이 없다’는 냉소로 얼룩진 인도네시아 인권침해의 역사와 법치의 비극이 이번 소송에서 단 한번이라도 깨끗이 마무리되는 선례를 남길 수 있을까? 이 ‘역사적 한 판’의 끝을 보려면 지금은 우선 대검찰청의 행동을 재촉해야만 한다. 대검찰청이 대법원에 재심의 요청서를 보냄으로써 반국가폭력의 화신 무니르가 유족과 동료들을 이끌고 마지막으로 ‘출전’할 수 있도록 ‘혈로’를 열어주어야 한다. 나는 인도네시아의 민주화에 열광했고 민주주의 진전을 축하해온 연구자로서 인도네시아 민주주의의 수치인 불처벌(impunity)의 악순환을 돌파하는 대역사를 진정 목도하고 싶다.  


전제성(전북대 정치외교학과 부교수)

* 이 글은 서남포럼 뉴스레터(2011.4.12)에 실린 글입니다.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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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특사단, 국가정보원, 그리고 ‘신아시아외교’


인도네시아 대통령 특사단 숙소 잠입사건의 대한민국 국가정보원 관련설로 인하여 최근에 국회에서 정보위가 개최되었고 의원들의 발언과 언론의 보도태도에 관한 논쟁이 일고 있다. 의문을 제기하는 언론 보도와 해명을 촉구하는 의원들의 발언에 대하여, 국익을 위해서는 자꾸 들추려 하지 말고 덮어주어야 한다는 주장들이 일각에서 강한 어투로 등장하였다. 그런데 덮어주자는 주장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비현실적이라는데 있다. 우선 당사자인 인도네시아 정부가 한국 정부에게 해명을 요청해놓은 상태라 설득력 있는 답변을 내놓아야 한다. 게다가 국정원 관련설은 이미 국내 일간지와 티비 톱뉴스로 전 국민에게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현지 언론은 물론이고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는 ‘영광’을 누렸기 때문에, 덮어주자는 주장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비현실적인 바램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정원이 부인도 시인도 않는 전략은 오히려 관련성을 시인하는 것으로 읽혀질 것이다.

덮어주자는 이들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크게 문제를 삼지 않고 있다는 점을 주장 근거의 하나로 제시하였다. 물론 인도네시아 정부는 국민들에게 별 일 아니라고 설명하였다. 인도네시아 언론과 야당의 문제제기에 대하여 특사단장이었던 경제조정정관, 우리로 따지면 경제부총리인 하따 라자사(Hatta Rajasa)는 도난당한 군사기밀이 없고, 심지어 침입자들은 자기 객실로 착각하고 실수로 들어온 이들이라고 발표하였다. 산업부장관의 보좌관 방이 침입 당했으므로 군사기밀은 도난당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침입자가 자기 방으로 알고 잘못 들어온 손님이라는 설명은 명백한 거짓이다. 침입자의 해명을 단순히 옮긴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나중에 거짓말이라고 지탄받을 수도 있는 브리핑을 하면서까지 인도네시아 정부는 한국 정부를 봐주고 있다.

그 내밀한 속내야 정확히 알 수 없다. 우선 문화적인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인도네시아, 그 중심의 자바 문화는 불편한 감정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문제가 있어도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덕목으로 삼고 있어서 외교적으로도 그렇게 대처했을 수 있다. 물론 실제로는 심히 불편할 것이다. 다른 설명은 양국관계의 맥락 속에서 찾아질 수 있다. 이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다른 기회로 만난 국립인도네시아대학 총장의 말은 이러했다. “한국과 인도네시아 관계는 친구 같은 관계이므로 심각한 외교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구밀라르 총장의 표현처럼, 인도네시아와 한국 관계는 무역관계가 호혜적이고 수지 균형이 맞으며, 자본과 노동의 상호이동이 긴밀하고, 지역적 차원에서 ‘동아시아공동체’(East Asian Community)를 함께 만들어가고 있으며, 지구적 차원에서는 G20도 같이 참여하는 ‘절친’ 관계이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정부는 한국을 “전략적 동반자”라고 부르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인도네시아 정부는 절친 관계를 망치지 않고자 친구의 실수를 덮어주려고 애쓰는 중이라고 해석할 있다. 그렇다면 실수를 저지른 친구는 상대가 봐준다 하여 잘되었다며 은근슬쩍 넘어가야할 것인가? 오히려 그런 너그러운 친구에게는 더욱 더 실수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국정원을 그만 흔들라는 입장과 국정원을 추궁하는 입장 사이에 흥미로운 공통점도 엿보인다. 국정원 비판의 상당한 부분은 그 내용이 국정원의 후진성과 무능에 관한 것이다. ‘그만 흔들자’와 ‘더 따지자’ 양 측이 다 국익의 기반에서 현실주의적으로 국제관계를 바라본다. 그러다보니 국정원의 업무범위나 규범의 문제는 도외시한다. 또한 관심이 국정원 쇄신에 국한되면서 이번 사건의 더 넓은 배경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은 소홀했던 것 같다.



이번 기회에 현 정부가 ‘신아시아외교’(New Asia Initiative)라고 명명한 외교정책의 기조가 점검되어야 할 것이다. 신아시아외교가 처음에는 번영, 평화, 진보의 새로운 아시아를 만들어 가는데 한국이 주도적으로 기여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은 아시아 이웃을 자원 확보나 상품 시장의 대상으로만 활용하려는 노선으로 귀착되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생긴다. 원자력발전소나 군용비행기를 어떻게든 팔아야만 한다는 생각에 휩싸여 ‘친구’의 등도 치는 게 혹시 우리 정부 신아시아외교의 본색이냐는 의문이다.

아시아 개도국에 대한 외교도 시민적 감시대상에 포함되어야 한다. 국회를 통한 대의제적 점검에 만족하지 말고 각 분야별 시민사회단체들이 정부의 외교를 직접 모니터링하고 주기적으로 평가하는 자리를 만들자고 제안하고 싶다. 대한민국의 대외원조가 어디로 얼마나 어떻게 지원되는지에 대한 모니터링과 평가활동은 이미 몇 해 전에 시작되었다. 이런 모니터링 활동에 군사, 안보, 경제 외교와 동아시아지역협력 관련 외교도 포함시키자. 주로 남북관계나 한미-한일관계 위주로 사회적 관심과 문제제기가 편향되어 왔기에, 그 밖의 외교는 ‘나머지 외교’로 사회적 압력 없이 자유롭게 수행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아시아외교 분야에서도 정부의 책임성(accountability)을 증대시킬 수 있도록 모니터하고 압력을 가하는 ‘참여적 국제관계’의 필요성과 방법론이 사회적으로 많이 논의될 수 있기를 바란다.
   
 

전제성(전북대 정치외교학과 부교수)

* 이 글은 서남포럼 뉴스레터(2011.03.14.)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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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아세안 의장국 인도네시아에 거는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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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가 올해의 ASEAN(동남아국가연합) 의장국이 되었다. 지난 1월 12일에 작년 의장국 베트남으로부터 리더십을 인수받는 의례를 치렀고 바로 이어서 아세안외무장관회담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앞으로 정상회의를 포함하여 300회 이상의 다양한 정부 간 회의가 인도네시아에서 개최된다. 한국정부도 아세안대화상대국으로서 또한 아세안+3과 동아시아정상회의 회원국으로 수십 차례의 관련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인도네시아를 방문하게 될 것이다. 우리 언론이 논평은 고사하고 단신도 내주지 않았지만, 인도네시아의 아세안 의장국 수임은 동남아시아의 인권 신장과 민주 진전을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는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 아세안 심볼 -


아세안 의장국은 국명의 알파벳 머리글자 순서로 수임하므로 올해는 브루나이 차례이지만 일찍이 재작년 4월에 인도네시아가 2011년 의장국을 자원하고 나서서 먼저 하게 된 것이다. 아세안 전체의 절반이 넘는 인구와 광대한 군도에 펼쳐진 영토 덕분에 인도네시아는 아세안의 중심적 위상을 실질적으로 인정받아 왔는데, 공식적 의장국까지 브루나이와 캄보디아를 제치면서 먼저 수임하려 할 만큼 인도네시아의 상황인식은 급박했다. 2015년 ‘아세안공동체’의 역사적인 출범이 목전에 다가왔는데 숙제가 한 참 밀려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당면한 과제를 “People-Centered ASEAN”(국민 중심의 아세안) 형성으로 압축 표현하고 있다. 진정한 공동체를 실현하려면 ‘국가 연합’이 아니라 ‘국민 연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인권 신장과 참여의 제도화가 필요하다는 시각을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이 일찌감치 분명히 하였고, 외무장관 마르띠 나딸레가와도 같은 노선에 입각하여 여러 가지 실행계획을 이번 외무장관회의에서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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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도네시아 외무장관 마르띠(로이터) -


마르띠 외무장관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들을 존중하는 풍토의 조성을 위하여 시급한 당면과제로서 아세안인권위원회(AICHR: ASEAN Intergovernmental Commission on Human Rights)의 내실화를 거론하였다. 2009년에 출범한 아세안인권위원회는 효과적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지만, 아세안인권선언(ASEAN Human Rights Declaration)이 제정되면 합의된 기준을 갖고 체계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면서, 인도네시아정부는 아세안인권선언이 올해 통과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아세안재단(ASEAN Foundation)의 3년 임기 소장에 임명된 마까림 위비소노의 면모 역시 인도네시아의 기획에 부합한다. 위비소노는 유엔의 인권위원회 의장과 경제사회이사회 의장을 역임한 베테랑 외교관으로 국제기구의 인권관련업무 경험을 바탕으로 인도네시아의 아세안 청사진을 실현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아울러 마르띠 장관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이주노동자 권리보호 문제도 중요한 의제로 제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은 송출국의 입장에서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는 수입국의 입장에서 협의에 나서게 될 것이다. 미얀마 인권문제에 대해서도 미국, 캐나다, 유럽연합에게는 별반 효과가 없는 경제제재를 중지하도록 요구하고 미얀마(버마)정부에게는 아웅산 수찌를 포함한 모든 세력의 화해와 국민통합의 과정을 시작하도록 요구한다는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학계, 언론, 시민사회의 의견을 듣고 함께 논의하는 다양한 포럼을 결성함으로써 아세안을 더욱 개방시키자는 의견도 피력하였다.  

 
         


어느 때보다 열의가 높으니 그 귀추가 주목된다. 아세안인권선언은 올 해 제정될 수 있을지, 아세안인권위원회는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물적 인적 지원을 받게 될 것인지, 합의한 인권기준을 위배한 회원국의 처벌까지 가능해 질 것인지, 국제적으로 지탄받는 미얀마 인권 침해문제가 완화될 수 있을 것인지, 이에 따라 아세안의 전통적 운영원리인 내정불간섭원칙은 어느 정도로 약화될 수 있을지, 일종의 ‘인권외교’ 덕분에 인도네시아의 인권수준도 따라서 향상될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한 점이 아주 많다.


그런데 아세안 인권체제 제도화를 위한 인도네시아 정부의 열정은 벌써 냉소적인 반응에 부닥치고 있다. 지역 차원에서나 국내 상황으로나 한계가 뚜렷해 보이기 때문이다. 아세안 회원국들의 정치체제는 다양하다. 미얀마는 군부독재, 베트남과 라오스는 일당지배체제, 브루나이는 술탄왕정체제이다.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는 민주주의 형식을 갖추었지만 정치적 경쟁이 실질적으로 제한되고 있다. 필리핀 민주주의는 최근에 나아지고 있지만 태국의 민주주의는 퇴행하였다. 따라서 일부 회원국들은 아세안의 인권체계를 강화하려는 인도네시아의 노력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을 수 있고 심지어 부당한 간섭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인도네시아가 동남아 최고의 민주주의 수준을 자랑한다 하더라도, 군인들이 파푸아 섬의 민간인들을 고문하여 국제적인 지탄을 받은 최근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여전히 내부적으로 심각한 인권침해가 자행되고 가해자들이 엄벌에 처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인도네시아가 강도 높은 인권기준을 제시할 수 없고 회원국이 인권선언을 위배하더라도 처벌보다는 설득이라는 외교적 방식을 취할 것이라는 예상은 충분한 근거를 지닌다. 그러나 관찰자든 실천가든 공히 흥미진진한 점은 정부 정책과 관료적 언술이 만드는 기회구조에 관한 것이다.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정치적 약속과 실제의 차이는 비판적 개입의 여지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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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카르타의 아세안 사무국 -


동남아 민주주의의 기수 인도네시아가 역내 인권신장을 향한 깃발을 올렸다. 아세안의 지도적 중심국가로서 ‘아세안시민권’을 만들어보겠다는 창대한 기획과 책임 있는 자세에 대해 진심으로 지지와 박수를 보내주자. 그리고 어떻게 진행되는지 열심히 관찰하자. 무엇보다도 이런 호기를 이용하여 아세안 운영이나 회원국의 인권문제에 관한 요구와 해법을 적극적으로 제안하자. 동남아 이웃나라들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염려하는 이들에게 약속과 실제의 차이를 기회로 활용하는 실천적 지혜가 각별히 필요하다 하겠다. 올 해는 아시아 민주연대의 진전에 있어서 중요한 해로 기억될 것이니까.

전제성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부교수)


 * 이 글은 서남포럼 뉴스레터(2011.02.10)에 실린 글입니다.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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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노동운동가 파우지 압둘라(Fauzi Abdullah)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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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지 압둘라(Fauzi Abdullah)


인도네시아의 독보적인 노동운동가 파우지 압둘라(Fauzi Abdullah)가 영면한 지 1년이 지났다. 2009년 11월 27일 밤, 파우지는 생산직노동자출신의 아직 젊은 부인 드위 뿌리완띠(Dwi Priwanti)와 아홉 살 난 아들을 남겨놓고 예순의 나이에 눈을 감았다. 노동인권신장에 생애의 절반을 바친 그의 업적을 기려 인도네시아 최고의 인권상 얍티암힌(Yap Thiam Hien) 상이 수여되기 한 달 전이었다. 일찍이 당뇨를 앓았고 2005년 초에는 몸의 왼쪽이 마비되었지만 세상을 등지기 1주일 전까지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필자는 그를 인도네시아의 현대노동운동가 중에서 단연 최고의 인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파우지는 1949년에 아랍계이주민 사업가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형제들이 모두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파우지만이 ‘빨갱이’로 취급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다. 국립인도네시아대학교(Universitas Indonesia) 영문과에 재학할 때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의 『페다고지』(Pedagogy of the Oppressed)를 읽고 감명을 받은 것이 투신의 계기였다고 후배들은 증언한다. 파우지의 노동운동경력은 1978년에 당시 인도네시아 최대의 인권옹호민간단체인 자카르타 법률구조재단(LBH: Lembaga Bantuan Hukum)에 인턴활동가로 참여하면서부터 시작되었고, 1980년부터는 재단의 정식 활동가로서 10년간 활약하면서 독보적 능력과 접근법을 선보이게 된다.

재단은 특성상 변호사들이 주력이었고 당연히 무료법률자문이 활동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파우지는 법적 전문성 없이 재단에서 근무했다는 점에서 독특했다. 흥미롭게도 파우지의 약점은 강점이 되었다. 파우지는 노동자의 미래가 법적인 자문이 아니라 조직화에 달려있다고 믿었고, 조직화의 전략은 현장의 노동자들로부터 나온다고 보았다. 그래서 파우지는 법률지식을 설파하는 대신에 노동자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 책상너머로 노동자들을 대하는 변호사들과 달리 파우지는 노동자들과 같은 높이로 앉아서 커피와 담배를 즐기며 토론의 꽃을 피우곤 했다고 한다. 파우지는 노동자들과의 대화가 정말 즐거웠고 그들로부터 현장의 사정,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조직화의 지혜를 배웠다고 회고하였다. 노동자들로부터 배우고자 했던 점, 이것이 바로 파우지의 위대한 점이었다. 필자는 지금까지도 인도네시아에서 파우지 외에 이런 태도를 지닌 노동운동가를 만난 적이 없다.

파우지는 노동자들이 변호사나 지식인들의 슬하를 떠나 스스로 조직할 수 있는 날을 바랐고 그런 날을 앞당기고자 했다. 그래서 수하르토 체제·하에서 해고자 출신들이 비정부단체(NGO)를 조직하도록 후원했고, 민주화 과정에서는 수도권지역노동조합(Serikat Buruh Jabotabek)을 결성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민주화 직후 노동귀족들이나 노동운동가들에 의한 '하향식' 노조연맹들이 우후죽순처럼 설립되어 노동운동이 사분오열될 때, 파우지는 현장노동자들이 주도권을 갖는 '상향식' 노조연맹의 건설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아울러 노동운동이 공장의 담을 넘어서 다른 부문의 사회운동과 광범하게 연대해야 한다고 믿었고, 스스로도 그 일익을 담당하여 1997년에 인도네시아사회변혁협회(INSIST) 창설에 가담하였고, 사망할 때까지 실종및폭력피해자위원회(KONTRAS)의 연대회의 의장직을 수행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파우지는 노동운동이 기록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결성한 것이 스다네노동정보센터(LIPS: Lembaga Informasi Perburuhan Sedane)였다. 스다네는 센터가 위치한 동네의 명칭이다. 이 센터를 통하여 도처에 흩어진 노동관련 자료를 조사하고 수집하고 인도네시아 유일의 노동운동 전문잡지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파우지는 오래전부터 노동자교육센터의 설립을 꿈꿨다. 단순한 교육 공간이 아니라 노동자들끼리 모여서 경험과 지혜를 교류할 수 있고 멀리서 온 노동자들이 쉬어갈 수 있는 숙소까지 겸하는 그런 공간을 마련하고 싶다고 했다. 땅까지 사 두었지만 건축비를 구하지 못해서 그의 마지막 꿈은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파우지는 한국 시민사회와 일찍이 연관되었다. 1990년대 중반에 한국의 NGO들이 한인투자기업 노동인권침해 문제를 모니터링하면서 부터였다. 1996년에 파우지를 발표자로 서울에 초청한 당시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위원장 신윤환 교수는 파우지가 전국노동자대회를 참관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각지에서 노동조합의 깃발을 가져온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일사분란하게 율동을 섞어가며 노동운동가요를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은 언제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라더니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수하르또 독재 치하에서 국가의 지도감독을 받는 어용노조만이 활개 칠 때였다.  

필자는 파우지를 1998년 8월에 처음 만났다. 한인투자기업의 노동인권침해 문제를 조사하러 자카르타를 방문했을 때였고, 인도네시아 노동문제를 이해하려면 파우지부터 만나야 한다는 주변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만나보니 파우지는 명성과 달리 수수한 복장에 친절하고 겸손하고 나이나 성별에 따른 차별이 없는 일관된 사람으로 보였고 열심히 듣고 진지하게 답하는 사람이었다. 그 후 계속된 만남과 토론에서도 파우지는 한결같았다. 마지막으로 그를 직접 대한 것은 2001년 5월에 노동운동에 관한 1년 반의 현지조사를 마치고 귀국인사를 위해 보고르(Bogor)의 자택을 찾았을 때였다. 당시 파우지는 늦장가에다 아들 라이한(Raihan)까지 얻어서 행복한 한 때를 누릴 때였다. 그 후 파우지를 다시 만날 수 없었지만 그가 설립한 단체 활동가들과의 접촉과 토론이 계속되었고 그 때마다 파우지는 안부인사를 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파우지의 영면은 인도네시아 현대노동운동사에 대한 기억과 현장노동자들이 그에게 들려준 지혜의 손실이기도 하다. 만날 때마다 파우지는 조사여행을 통해 노동자들로부터 새로 배운 바를 들려주곤 했다. 마지막 만남 때의 이야기는 술라웨시섬 넝마주이들의 조직화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노동자들의 지혜를 사랑한 파우지는 그렇게 해서 얻게 된 자신의 지혜와 전략에 대해서는 정작 책 한 권 남기지 못했다. 필자는 파우지에게 인도네시아 노동운동의 역사, 혼탁 그 자체인 작금의 노동운동, 후배들에게 들려줄 전략과 권고에 관하여 글을 쓸 것을 강권한 바 있다. 그 때 파우지는 정말 진심으로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만든 단체에 딸린 네 명의 활동가들이 월급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 만만치 않은 현실의 고충에 대해 토로했다. 그렇게 파우지는 떠나갔다. 만약 그가 책을 썼다면 인도네시아의 노동운동과 인권운동에 관한 역사적 이해는 물론이고 미래의 전진을 위한 귀중한 토착적 안내서가 되었을 텐데 정말 안타깝다.

이렇게 ‘아시아의 지혜’가 사라지고 있다. 한국의 시민사회에서 ‘아시아연대운동’이 활발한데, 우리의 경험과 지혜를 알리는 것을 넘어서, 작은 자금이나마 보태서 아시아 시민사회의 경험과 지혜도 기록될 수 있도록 독려하고 후원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그렇게 만들어진 한 권의 책으로 인도네시아의 젊은 세대들이 배우고 우리도 따라서 배우는 기회를 갖게 된다면 얼마나 멋진 일일까? 파우지 사망 1주기를 넘긴 자카르타에서 그와 나눈 추억과 그가 없는 오늘의 상실감을 적어보았다.     

전제성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부교수)


* 이 글은 서남포럼 뉴스레터(2011.01.10)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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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스캔들, 수사는 하지만 해결은 없다?

인도네시아 2009년은 선거의 해였다. 1998년 민주화 이행 이후 세 번째로 맞는 국회의원선거와 2004년 최초 직선제 대통령 선거 이후 두 번째 대통령 선거가 진행되었다. 우선 인도네시아 민주주의는 세계적 차원에서 인구 및 국토면적에 비추어보았을 때 인도, 미국에 이어 지구상에 존재하는 세 번째로 큰 민주주의 국가의 위상을 갖는다. 또한 인도네시아 민주주의는 여타 다른 동남아 국가와 비교해 보았을 때 민주주의 이행과 공고화의 상대적인 성공사례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민주주의가 20세기 후반을 지나 모든 국가에서 ‘따라 가야할’ 정치체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편성을 갖고 있지만, ‘어떤’ 민주주의 정치체제이어야 하느냐라는 맥락에서 특수한 측면도 갖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 결사체민주주의, 심의민주주의 등등의 ‘어떤’ 민주주의냐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인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민주주의 논의에서 쉽게 간과되었던 지점은 ‘사회문화적 토양과 역사적 경험’의 요소이다. 민주주의가 정치체제(political regime)라는 측면에서, 정치체제란 국가와 시민사회 관계의 법제도적 표현인 것이다. 그러나 기존 논의에서는 법과 제도를 잉태하는 사회문화적 기초에 대한 인식이 매우 많이 결여되어 있다. 예를 들면, 서구적 경험에서 ‘개인자유의 우선성’이라고 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와 선택적 친화성을 갖고 있다면, 가족 및 종교, 마을 공동체성을 우선시하는 아시아적 경험은 서구와는 다른 민주주의 형태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특수한 사회문화적 기초에 바람직한 ‘어떤’ 민주주의 유형이냐를 논하기 이전에, 오히려 현실에서는 비민주주의 정치체제로부터 이행한 국가들에서 민주주의를 진전 또는 심화시키기 어려운 현실적 제약조건들에 부딪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새롭게 형성된 민주주의 법.제도와 시민 의식 및 인식 사이의 괴리현상이라든가, 민주주의 기대와 정당정치현실 사이의 지체현상이라든가, 민주주의를 지탱하기 위한 경제적 조건의 문제 등등 현실적 제약요소들이 많이 존재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문제의 핵심이 되는 것 중의 하나는 권위주의적 정치유산으로서 구(舊)체제 지배엘리트 지속성으로 만들어진 정치적 관행의 문제일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1998년 민주화 이행 이후 인도네시아 정치체제는 ‘과두제적(oligarchic)’ 민주주의로서 그 한계를 지적받고 있다. 고전적 정치이론에 의하면 ‘과두성’과 ‘민주성’이 한 체제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 모순적으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제3의 민주화 물결이후 제3세계 민주주의는 법과 제도는 민주적 요소를 갖고 있으나, 구체제 지배엘리트의 견고성, 지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민주적 요소’와 ‘권위주의적 요소’가 혼재한 상태의 정치체제의 특징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소재 데모스(Demos: Center for Democracy and Human Rights Studies) 단체는 실증적 연구를 통해, 과거 권위주의체제의 지배엘리트들이 민주화를 통해 공적인 제도 영역 내에서 정치세력화를 성공함으로써, ‘과두제 민주주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하자면, 인도네시아에 적용된 ‘과두제 민주주의’란 민주적 정치기구들이 지배엘리트에 의해 포획된 체제를 말한다. 이러한 과두제 민주주의로 인해 민주주의 심화를 제약시키는 요소 중의 하나는 ‘부패구조청산’의 어려움이다. 제3세계 신생민주주의 국가가 민주주의로서 지속가능한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부패구조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의 문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반부패와 민주주의는 상관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제와 다당제 의회민주주의에 기초한 인도네시아의 경우, 작년에 있었던 총선과 대통령 선거 정치과정을 통해 공직자들의 충원 절차를 민주적으로 이루어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올해 2010년 초반은 2009년 조용한 총선과 대통령 선거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정세가 전개되었다. 작년 두 번째 대통령 직선제로 대통령 유도요노(Susilo Bambang Yudhoyono)와 부통령 부디오노(Boediono) 정부가 지지율 59.44%로 올해 출범하였으나, 집권 100일 만에 매우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경험하였던 것이다. 자카르타를 시위로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일명 센츄리 은행(Bank Century) 스캔들로 명명된 부패스캔들이다. 이 사건은 2008년 미국발 세계경제위기의 여파로 부실 경영을 겪고 있는 센츄리 은행에 6.7조 루피아(7조 달러)의 공적자금을 긴급지급한 일로서, 이러한 결정에는 유도요노의 핵심측근 세력인 부통령 부디오노와 재정부 장관(Menteri Keuangan)이었던 스리 물리아니(Sri Mulyani)가 있었다. 당시 부디오노는 인도네시아 중앙은행 총재였고, 스리 물리아니는 재정안정위원회(KSSK: Komite Stabilitas Sistem Keuangan) 위원장으로 긴급자금을 지원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공적 자금을 지원할 만큼 센츄리 은행이 위기 상태였는가, 또 센츄리 은행의 부실이 인도네시아 경제위기에 미치는 영향이 과연 그렇게 컸을까, 그리고 그 공적 자금 규모의 면에 있어서도 너무 크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의혹의 핵심은 이 돈이 2009년 선거를 위해 현 집권당인 민주당(Partai Demokrat) 선거자금으로 흘러들어간 것이 아니냐는 주장에 있었다. 또한 그 책임선이 유도요노 대통령에게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국회 안과 밖에서 정치적 공방이 강도 높게 진행되면서, 국회 내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조사된 바 있다. 정부의 부패스캔들로서 국회 내 유도요노 정부의 반대 정치세력과 국회 밖 유도요노 반대 정치세력은 정치적 공세를 가했었다. 그러나 현재 이 사건은 작년 12월부터 약 4개월간의 뜨거운 정치적 공방으로 인해 대통령 탄핵 담론까지 형성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재정부 장관인 스리 물리야니가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장관직을 하차한 것 외에는 뚜렷한 사건 처리 없이 국회에서 법원으로 넘어간 사건이 되었고, 2010년 8월 이 사건은 정치적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인도네시아 민주주의 측면에서 센츄리 은행 부패 스캔들을 통해서 지적하고 싶은 내용은 민주화 이행 이후 2002년 부패방지위원회(KPK: Komisi Pemberantasan Korupsi)가 만들어지고, 인도네시아는 ‘반부패 개혁’ 이슈를 국가적 차원에서 다루어왔고, 정치 이슈화하기도 하였지만 뚜렷한 민주적 해결 없이 매번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점이다.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권력구조 안에서 부패스캔들이 논의되고, 조사되고, 수사되지만 사건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앞에서 지적된 인도네시아 민주주의의 과두제성 때문일 확률이 높다. 민주적 기제와 기구들이 지배엘리트에 의해 포획되었기 때문에, 일정정도는 법과 제도에 따라 논의, 조사, 수사는 되지만, 물론 미흡한 논의, 미흡한 조사와 수사이겠지만, 결과적으로 판결, 심판, 집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화 이행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인도네시아 부패방지위원회의 위력과 역할이 저조해진다는 것은 역으로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도네시아를 비롯하여 제3세계 신생민주주의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심화, 확대발전시키기 위해서 지배엘리트의 비순환성 즉, 구엘리트의 지속성, 구지배엘리트에 의한 민주적 기구의 포획성으로 표현되는 민주주의의 과두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관건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인식, 제도, 토양 등 매우 다양한 요소들의 상호결합으로 만들어진 정치적 결과물이기 때문에, 비약적인 변화보다는 점진적인 변화과정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점진적인 내용적 변화를 위해서라도 ‘누구나에게 인정된’ 정통적인 민주적 법과 제도의 형식적 틀의 강화와 보전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최경희(한국동남아연구소 선임연구원)

*이 글은 프레시안 [아시아생각]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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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에서 관전한 대통령 선거


지난 7월 8일, 인도네시아에서 대통령 선거가 평화적으로 수행되었다. 독재자 수하르토가 1998년에 물러나면서 시작된 인도네시아의 민주화는 1999년의 자유총선과 2004년 사상 최초의 대통령 직접선거를 치르면서 벅찬 과제를 잘 풀어왔고 이번의 대통령 직접선거도 인도네시아의 선거민주주의를 한 층 더 확고한 기반 위에 올려놓는 역사적 전진으로 기록될 것이다.

세계에서 인도, 미국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규모의 민주주의 체제를 운영하는 나라에서 정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선거인 만큼 각종 선거 관련 수치가 어마어마하다. 2억3200만 인구 중에서 등록된 유권자가 1억7600만 명 이상이고 33개 주 471개 시군에 설치된 45만여 개의 투표소(TPS)에서, 일부 악천후 지역을 제외하고, 아침 8시부터 오후 1시까지 일시에 추진되었으며, 투표율은 등록유권자의 72.5% 정도일 것으로 추산되었다. 정말 '거대한' 선택이라 부를 수 있다.

규모가 큰 만큼 문제가 없을 수 없다. 2004년 선거 때 어느 선거관리위원의 말처럼 "문제가 없으면 인도네시아가 아니다". 그렇지만 2004년 선거 때보다 올 해 선거의 관리가 허술하였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려울 것 같다. 선거 유세 막바지에 야당후보가 유권자 등록의 허술함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선거절차의 정당성에 관한 의구심과 함께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측의 폭동이 우려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선거위원회(KPU)와 헌법재판소(MK)가 미등록유권자들도 투표소에서 신분증을 제시하면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대안을 신속히 제시하자 문제를 삼던 후보자들도 이를 즉각 수용하였고, 경찰은 소요혐의자에 대하여 경고 사격 없이 직접 발포 할 수 있는 '1호경계령'을 발동하여, 결국 선거는 평온하게 완수될 수 있었다. 물론 앞으로 한 달 정도 거치면서 선거위원회(KPU)가 최종집계 결과를 발표하고 헌법재판소(MK)가 이를 인준할 때까지 선거관리에 관한 논란은 계속될 것이고 그 결과는 다음 선거의 관리체계 발전을 위한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민주주의 축제'(pesta demokrasi)

인도네시아에서 선거는 '민주주의 축제'로 불린다. 폭동 우려와 경계령 발동에도 불구하고 자카르타 지역에서 선거는 평온하고 즐겁게 이루어졌다. 투표소는 활기가 넘치는 주민들의 회합공간이 된다. 투표소는 마을 주민들에 의해 마을 안에 세워지며 줄이나 휘장으로 안팎이 구분되는 열린 구조물이다. 이렇게 투명한 투표소에서 개표까지 진행된다. 수백명 정도의 유권자를 지닌 소규모 투표소들이기 때문에 이 기초 단위의 개표는 한 두 시간 정도면 완료된다. 마을의 투표관리원이 후보자들의 사진과 이름이 담긴 큰 투표용지를 하나씩 펼쳐 보이면서 선택된 후보의 번호를 외치면 또 다른 임원이 벽에 걸린 현황판에 매직펜으로 표시를 한다. 두 후보 이상을 체크하거나 한 후보에게 두 번 체크한 이상한 표가 나오면 관리위원들과 후보별 참관인들이 모여서 확인하고 무효표로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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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표. ⓒ전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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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표. ⓒ전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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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 ⓒ전제성

우리네 반장 선거 같은 개표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마을 사람들에게 큰 기쁨을 준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후보의 표가 나오면 환호하고 박수를 친다. 아이들도 어른들을 따라한다. 아이들은 각 번호의 후보들 이름을 맞추는 놀이를 하기도 한다. 이렇게 투표소는 정치와 민주주의에 관한 조기교육 현장이 된다. 외국인이 구경 오면 마을 사람들은 더욱 신이 난다. 자신들이 누구를 지지하고 왜 그런지에 관하여 열심히 설명하고 한국의 선거제도나 정치에 대해 묻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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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표를 즐기는 주민들. 지지후보의 표가 검표되자 환호하며 어른들이 박수를 친다. ⓒ전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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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호하는 아이들. ⓒ전제성

안정 속의 개혁을 지지

'민주주의 축제'를 통하여 인도네시아 유권자의 과반수 이상은 현 대통령의 재집권을 지지하였다. 인도네시아의 대통령은 5년 임기로 중임이 가능하며 부통령 후보와 함께 출마해야 한다. 2004년에 결선투표까지 거치며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던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Susilo Bambang Yudhoyono)는 이번에는 경제각료 출신의 부디오노(Boediono)를 러닝메이트로 삼아 출마하였는데, 6개 기관의 투표소 샘플 조사(quick count)에 따르면 60% 정도의 지지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과반수 이상을 득표한 후보가 없을 경우 1위와 2위 후보팀이 결선을 치러야 하는 데, 오차가 있겠지만 유도요노 팀이 과반수를 무난히 넘길 것으로 예상되므로 결선투표 없이 재선이 확정될 듯하다. 따라서 3위에 처한 현부통령 유숩 깔라(Yusuf Kalla) 팀은 물론이고 2위에 오른 전 대통령 메가와티(Megawati Soekarnopurti) 팀에게도 결선 투표를 통한 역전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 같다.

현 대통령에 대한 압도적인 지지를 통하여 인도네시아 유권자의 다수는 안정 속의 전진을 선택하였다. 지난 5년간 다방면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가 큰 허물없이 정치와 경제를 안정적으로 이끌었기 때문에 유권자들은 유도요노에게 5년의 기회를 더 주는 쪽으로 기울었다. 유도요노는 아체의 분리주의 세력과 평화협상을 체결하고, 부패한 전직고위관료들을 구속시키고, 세계적인 경제위기속에서도 경기회복국면을 유지했다는 대통령 재임 중 업적을 근거로 평화, 청렴, 안정의 지속을 호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신중하고 정중한 인성이 잘 돋보이는 유세와 TV토론을 전개하였다.

유도요노-부디오노 팀은 유권자들의 최대 관심사인 경제 문제에서 큰 강점을 보였다. 유도요노는 장군출신이지만 야전사령관이 아니라 주로 행정 정보 업무를 책임졌던 '가방끈이 긴' 장군이었고 보고르농대에서 농경제학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더구나 유도요노는 재무부장관과 중앙은행총재 등 경제 관련 요직을 두루 거친 경제학박사 부디오노를 부통령으로 지명함으로써 경제 정책에 관한 유세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특히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은 유권자들이 유도요노 지지표가 검표될 때마다 "무상교육"이라고 외칠 정도로 매력적인 약속으로 제시되었다.

유도요노는 자신의 정당 민주당(PD)의 후보였지만 부디오노는 특정 정당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 정당 배경이 없는 부통령 지명은 인도네시아 선거정치의 맥락에서 볼 때 특이한 선택이었다. 민주화 이후의 정부들은 서로 다른 정당 출신의 대통령과 부통령의 정당간 연합형식의 정부수반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디오노를 부통령으로 삼은 것은 유도요노의 적실한 승부수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정당간 연합형식의 정부수반은 대통령과 부통령의 갈등을 표출하곤 했는데 지금의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부통령 유숩 깔라는 골까르당(Golkar) 의장으로서 빈번한 독자행보를 취했고 종국에는 대선에 따로 출마하고 말았다. 따라서 정당배경이 없는 부디오노의 부통령선임은 전문적 경제공약의 우위선점에 유리했을 뿐만 아니라 행정전반에 대한 유도요노 리더십의 일관된 관철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어서 다른 팀보다 '강한 정부'에 대한 희구를 충족시킬 수 있고 유도요노의 인기가 굴절 없이 그대로 득표로 연결될 수 있게 하는 비결이었다.

특전사령관의 '민중주의'도, 토착자본가의 '쾌속열정'도 거부

반면에 전 대통령 메가와띠는 2004년 대선에 출마했다가 유도요노에게 패배한 바 있어 신선한 후보가 아니었지만 민주투쟁당(PDIP)은 그녀를 대선 후보로 다시 옹립하였고, 신생 대인도네시아운동당(Gerindra)의 쁘라보오 수비안또(Prabowo Subianto)와 연대함으로써 '새로운 피'를 수혈하였다. 그러나 민주화의 상징인 메가와띠가 수하르토의 사위였으며 민주화에 적대적이었던 특전단 사령관을 지낸 바 있는 쁘라보오와 연대한 것은 너무 지나친 정당연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다수의 정당들이 유도요노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연대할 상대가 적었기 때문이라지만, 정치학자 도디(Dodi Ambardi)의 말처럼, 다음 대선에서 쁘라보오가 메가와띠의 지지를 받아 민주투쟁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은 민주투쟁당의 선명성을 갉아먹었을 것이다. 메가와띠-쁘라보오 팀은 유세연단을 볏짚으로 장식할 정도로 농업을 강조하고 외세가 장악한 천연자원 개발권을 되찾아오자며 강력한 민족주의와 민중 지향 경제 정책을 전면에 내세우는 선동적인 야성을 막판까지 불태웠지만 결국 패하고 말았다.

한편 현 부통령이자 거대정당 골까르(Golkar) 의장 유숩 깔라는 군총사령관 출신의 하누라당(Hanura) 의장 위란또(Wiranto)를 부통령으로 지명하고, 자본가 출신답게 "빠를수록 좋다"(lebih cepat, lebih baik)는 슬로건으로 정력적인 캠페인을 펼쳤으나 가장 낮은 지지를 받았다. 깔라는 현 정권의 업적을 계승하면서도 그 한계를 적절히 비판하였고 유세기간중의 TV토론에서도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사업가적 열정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크게 약진할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결과는 전혀 아니었다. 깔라가 술라웨시 태생으로 주도 자바 출신이 아니라서 적은 지지를 받은 탓도 있겠지만, 내가 만난 사람들은 그가 기업인 출신이라는 점을 더욱 우려하였다. 여러 계급계층과 지역의 다원적 이해관계를 복합적으로 고려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밀어붙이는 식으로 정책을 구사할 것을 우려했고, '토착기업인'을 육성하겠다고 외치지만 실제로는 가족과 측근 기업들의 이익을 챙기는데 권력을 사용할 것이라고 걱정하였다. 심지어 "그가 대통령이 되면 그 집의 가정부마저도 기업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인권 운동도 작은 승리를?

이번 선거는 인권 운동 진영에도 작은 승리를 안겨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의 인권운동은 소규모의 비정부기구들(NGO)이 이끌어왔고 전선형태의 대규모 사회운동체를 결성하거나 그들을 대표할만한 정치가를 배출하지 못했다. 이번 대선에 출마한 세 팀이 모두 장군들을 후보로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보면 민주화 11년간 인권 운동의 노력이 무슨 업적이 달성했는지 의구심이 생길만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권 운동 단체들은 온건한 형태의 '낙선 운동'을 전개하였다. 실종자및폭력피해자대책위원회(KontraS)의 조사국장 빠빵(Papang)은 "인권침해범을 뽑지 말자"는 슬로건을 내걸었다면서,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이었다고 자평했다.

메가와띠는 대통령 재임기에 아체지역의 여성과 아동의 생명권을 위협하는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쁘라보오는 수하르토 말기에 특전단 사령관으로서 당시 자행된 반정부활동가 납치실종사건과 1998년 5월 반화인 집단폭력의 배후로 지목된 바 있고, 위란또는 분리독립을 결정한 동티모르 주민선거 직후에 친인도네시아 민병대가 자행한 폭력행위에 책임이 있다고 지목받고 있다. 인권 운동 단체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기억하자는 "망각에 대한 저항" 전시회와 토론회를 개최함으로써 선거 국면에 관여하는 실천 활동을 전개하였다. 심각한 인권침해 혐의를 받는 전직 장성들이 이번 선거에서 뽑히지 않았으니 인권운동가들의 바람도 결국 실현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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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각에 대한 저항 전시회. ⓒ전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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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회를 관람하는 필자. ⓒ전제성

패자의 길?

민중주의나 경제민족주의 슬로건을 내걸었던 후보들이 패배함으로써 앞으로 인도네시아의 경제정책 기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들을 비롯한 외국인 투자자들에게는 희소식일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한인사회는 유도요노의 장인이 한국 초대대사를 지냈다는 인연으로 오래 전부터 유도요노에 대한 호감을 지녀왔다. 그러나 메가와띠 진영에서 계약직 및 외주노동에 대한 규제를 강하게 요구했고 유도요노의 개방적인 경제정책이 '신자유주의적'이라는 비판을 제기하였고, 깔라 측에서 경제성장을 위해 자본친화적인 정책의 신속한 실현이 필요하다는 비판을 제기한 바 있어서 이런 좌우의 비판을 어떻게 경제정책에 반영할 수 있을지는 의문으로 남아있다.

한 편 정당정치와 정부-의회 관계에서는 약간의 변화가 발생할 수도 있다. 특히 패주한 골까르당이 야당의 길을 갈 것인지 여부가 관심을 끈다. 민주투쟁당은 이미 유도요노 정권 하에서 야당의 길을 일찍이 선언했지만, 수하르토 시대부터 여당 노릇을 해 온 골까르당은 현 정권에도 연립으로 참여했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의 정당정치는 '카르텔'이라고 불릴 만큼 선거 이후에 대다수의 정당이 여당이 되는 일종의 '대연정'의 정치를 펼쳐왔다. 패배한 정당은 자동적으로 야당이 되는 것이 아니라 향배를 정하기 위한 고뇌의 과정을 거친다. 30여년의 역사와 광대한 조직을 자랑하는 골까르가 민주투쟁당처럼 야당의 길을 택한다면 의회의 정부견제력은 지금보다 훨씬 막강해질 것이다. 상대적으로 유도요노 팀은 5년 동안 급성장한 신흥 민주당과 다양한 군소정당들의 지지를 받는 일종의 '무지개연립' 상태이다. 물론 패자들의 일부 분파들이 집권세력의 편으로 넘어갈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대선 패배 이후 골까르의 위상설정은 인도네시아의 정당정치의 향배와 정부-의회 관계를 재편하는 중요한 변수로서 흥미롭게 지켜볼 만한 사안이다.

따져봐야 할 것이 많고, 미흡하고 아쉬운 점도 많지만, 이번 선거가 인도네시아 국민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언급할 만하다. 원심력이 강한 세계최대의 군도국가에서 적도하의 자연적 장애들도 극복하고 거대한 규모의 선거를 큰 분쟁과 사고 없이 치러냈다는 사실은 인도네시아 국민들의 민주주의 체제와 제도에 대한 자긍심과 신뢰성을 높이는데 기여하였을 것이다. 나아가 인도네시아의 선거는 초국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번 선거의 성공을 통하여 지난 5년이 그랬듯이 앞으로도 인도네시아는 아세안(ASEAN) 역내 인권신장과 인간안보의 증진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동남아 민주주의의 기수로서 역할을 한 층 강화할 것이며, 이슬람과 민주주의 접합의 세계적인 모범으로서 계속 회자될 것이다.

전제성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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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노동조합으로부터 온 편지
이명박 대통령 한인공장 방문 유감

지난 3월 6일부터 8일까지 이명박 대통령 부부가 인도네시아를 국빈방문한지 열흘이 지난 뒤에 인도네시아독립노조연합(GSBI: Gabungan Serikat Buruh Indonesia) 위원장 얀띠(Emelia Yanti MD. Siahaan)로부터 이메일 편지를 한 통 받았다. 그 내용은 대통령 일행의 한국인 소유 공장 방문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는 것이었다.

이명박 대통령 부부는 3월 7일 오후에 한인투자 ‘최고의 기업들’ 중에 하나라며 보고르(Bogor)의 의류공장을 방문하였다. 한국인 소유의 이 공장은 2천여 명의 현지인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주문자상표부착방식으로 Le Coq Sportif를 비롯한 유명회사의 스포츠의류를 제작하여 유럽시장에 수출하는 기업이다. 그 공장에서 대통령 일행은 약 한 시간 반 동안 사장을 만나고 생산품을 소개받고 작업장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노동조합활동가 얀띠는 이 회사가 “결사의 자유 위반과 기진맥진한 작업조건에 있어서 최고의 기업”이라며 대통령의 방문에 유감을 표하는 성명서를 세계도처의 활동가들과 학자들에게 발송했다.

2003년에 이 회사는 노동조합이 결성되자 많은 수의 노동자들을 해고시켜서 국제소비자운동단체들로부터 항의서한을 받았던 기업이었다. 인도네시아 노사관계를 조사하고 있던 필자도 사건 발생 직후에 그 소식을 현지에서 소상하게 들은 바 있다. 당시에 필자가 만났던 해고자들의 진술에 따르면, 이 회사의 경영자는 노조가 결성되자 노조간부 4명에게 가택대기 처분을 내렸고 이에 항의하는 파업이 발생하자 168명을 집단 해고하였다. 노조원들은 사장과의 직접 협상, 해고자 원직복직, 인사과장 해고, 노동조합 인정 등 4개항을 요구하였으나, 공장장은 “사장과 만나자는 것은 대통령을 만나자는 것”이라는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해고자들은 지역노조의 도움을 받아 영문으로 항의성명서를 작성하여 해외각지로 발송했다. 이에 호응하여 깨끗한 옷 입기 캠페인(CCC; Clean Clothes Campaign), 노동권콘소시엄(Workers’ Rights Consortium) 등 유력한 국제소비자운동단체들이 홈페이지 전면에 이 기업 사례를 소개하고 항의서한을 보내는 운동을 전개하자 기업의 이미지 손상은 물론이고 한국인의 국제적 이미지까지 손상시킬 것이 우려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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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 인도네시아를 국빈방문중인 이명박 대통령은 한인 투자 의류업체를 방문했다. ⓒ뉴시스

그런데 이 회사의 상황은 “그 후 여러 해가 지났지만 나아진 것이 없다”고 얀띠는 주장하였다. 이 회사는 생산목표량을 채우지 못한 노동자는 그것을 완수할 때까지 잔업수당 없이 남아서 일해야 하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으며, 2007년에도 바이어들에게 작업조건에 관한 편지를 보냈다는 이유로 두 명의 노조간부를 해고한 바 있고, 회사에 존재하는 두 노조에 대한 편의제공을 달리하여 상대적으로 전투적인 노조를 차별하는 등의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얀띠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편지를 끝냈다. 제품의 질이 향상되고 수출 물량이 증대하여 그 기업이 찬사를 받는다면 그 제품을 생산해낸 현지 노동자들이 마땅히 칭송받아야 되지 않겠는가? 만약 그 기업이 결사의 자유를 비롯한 노동권을 침해하는 기업이라는 점을 알았더라도 한국의 대통령은 이 한국인 기업가를 여전히 자랑스러워하고 칭송했을까?  

이명박 대통령은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신아시아 외교’를 천명하였다. 아직 그 내용이 명료하지는 않지만, 현지 한인기업 방문 사례를 통하여 새로운 아시아 외교의 편향성을 우려할만한 징표를 읽어낼 수 있다. ‘추한 한국인’ 이미지가 제기되던 1990년대 중반이래로 지난 10여 년간 한국의 시민사회운동단체들은 한국인의 해외투자기업에서 벌어지는 인권침해실태를 모니터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덕분에 현지사회에 대하여 한국인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개선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고 국내적으로는 자원의 이용과 경제적 이익에만 골몰하지 말고 그곳에 사는 이웃들을 생각하자는 의식을 확산시켰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런 노력은 한국외교 일선에 공유되지 않았었나 보다. ‘국가의 편에서’ 현지의 유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외교상의 간단한 기술을 제안하자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잊지 말고 추가하라고 권하고 싶다. ‘기업의 편에서’ 방문 후보로 추천되는 그 현지 한인기업이 인권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는가? 이런 식의 질문이 ‘신아시아외교’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가 되기를 바란다.


전제성(열린전북 편집위원,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이 글은 [열린전북 5월호]에 기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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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Story: 인도네시아 활동가 이야기

내 이름은 리아, 2008년 3월부터 5.18 기념재단의 국제 인턴으로서 광주에서 9개월을 보냈다. 처음 518 재단에 갔을때 한국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광주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나는 인도네시아에서 NGO(비정부단체) SOLIDARITAS NUSA BANGSA-SNB (Homeland Solidarity- SNB) 의 프로그램 기획팀에서 일하였다. SNB는 '국내 연대'를 의미하며 주권, 평등, 자유와 같은 민주주의의 가치 실현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이다. SNB는 인도네시아의 1998년 5월 항쟁 직후인 98년 6월 5일에 설립되어 자연스레 항쟁의 피해자들과 가족들의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SNB는 인도네시아가 민주적이고 평등을 중시하는 사회가 되도록 시민들이 민주주의 이념에 대한 의식을 높이도록 지원한다.

한국에 도착하기 전, 나는 SNB에서 1년 6개월 가량 98년 항쟁의 피해자 가족들과 관련된 활동을 하였고 동자카르타, 클렌더 지역에 근거한 또 다른 피해자 가족 협회(FKKM -98년 피해자 가족 포럼)과 연대활동을 했다.

98년 항쟁은 1998년 5월 12일 대학생 위주로 구성된 1천여 명 이상의 시민들이 자카르타의 Trisakti 대학에 모여 1967년부터 1998년 까지 당시 독재정권 수하르토(Soharto)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시위중 시민들과 경찰 사이에 무력충돌이 발생하여 대학생 4명이 사망하고 여러 명이 부상당하게 된것이다.

Trisakti 비극으로 인해 많은 시민들은 분노하였고, 뒤이어 5월 13일부터 15일 까지 항쟁이 펼쳐졌다. 일반 시민들은 자카르타 거리의 상점과 자동차에 불을 지르고 기물을 파손을 했고 항쟁은 자카르타뿐만 아니라 팔렘방(Palembang), 솔로(Solo), 수라바야(Surabaya), 랑팡주(Lampung) 과 같은 인도네시아 전역의 도시로 퍼져갔다.

두 사건은 인도네시아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수하르토 대통령은 5월 21일 직책에서 물러났고, 부통령이었던 하베(B.J.Habbie) 가 수장으로 교체되었다. 수하르토의 정권이 물러난 후 인도네시아에는 인권, 민주주의 그리고 평화를 위해 활동하는 집단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인도네시아의 민주화가 열리게 되었다. 나 또한 SNB에서 피해자 가족들의 미소를 보면서 더욱 인권과 민주주의, 평화를 위한 활동에 헌신하게 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 변화의 바람은 있었지만, 정부는 98년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피해자 대다수는 동자카르타, Pondok Rangon 지역에 방치되어 사망했다. 2007년 4월, 21개 시민사회단체들은 98년 항쟁의 피해자들을 위한 정식 국립묘지를 설립하도록 현 대통령 유도요노(Soesilo Bambang Yudhino) 에게 탄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 외 SNB는 98년 항쟁을 주제로 한 도서 출판을 비롯하여 전시회, 홍보 캠페인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인턴 활동 중 가장 인상깊었던 순간은 6월 10일 광주 금남로에서의 가두시위였다. 이 대규모의 집회를 통해 나는 한국 시민들이 어떻게 모이고 집회에 참여하는지 지켜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진정으로 차분하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촛불 시위가 이루어 졌다. 사람들은 저마다 촛불을 들고 운동가요를 불렀다. 촛불시위이기에 시민들은 가족들, 아이들까지 데리고 나와 함께할 수 있었다. 나는 시위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그 자리에서 역사를 배우고 경험하며,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의식하고 특히 민주주의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인식이 생기는 자리라고 생각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으며 오히려 민주화 운동을 평화로운 방법으로 행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우리의 꿈과 이상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근 10개월 간의 한국 생활을 통해 얻은 나의 경험과 지식은 한국의 서적들, 인터넷, 그 외 자료에서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들로부터 얻은 것이 많았다. 한국 사람들의 의식과 굳은 정신, 특히 80년 광주 항쟁으로 표출되는 한국인들의 의지는 내게 많은 영감을 남겼다.

12월 27일 나는 다시 인도네시아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인도네시아는 아직 개발 중에 있는 나라이고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나아가야 할 길이 산적해 있다. 나는 인도네시아 시민으로서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를 위한 힘찬 내일을 준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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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 바바리카 / 인도네시아 시민 활동가·518재단 인턴, 사진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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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국가의 인권과  민주화의 자취를 찾아서
아시아 인권옹호자 전기 중심으로

올해는 유엔이 인권옹호자선언 (UN Declaration on Human Rights Defenders)을 채택한지 1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를 기념해 국제연대위원회는 버마,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를 중심으로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활동한 아시아 인권옹호자의 삶을 조명해 보는 기획 연재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아시아 인권옹호자의 일대기를 통해 살펴보는 각 국의 인권 상황과 민주화의 자취는 아시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새롭게 아시아를 만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인도네시아의 양심이자 인권 영웅, 무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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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무니르(Munir Said Thalib, 1965 ~ 2004)
국가 : 인도네시아(Indonesia)
분야 : 인권 운동, 반부패운동


수하르토 독재정권의 시작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 통치 시대 이전에는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각 종족들이 자치로 통치하는 여러 나라들이었으나 네덜란드 통치 후, 독립을 하는 과정 속에서 한 국가가 되었다. 350년이 넘는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 후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군정 하에 있다가, 1945년 8월 17일 민족운동 지도자 수카르노와 하타를 중심으로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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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지도_ 붉은색 표시 지역은 아체


1963년 수카르노가 군부의 지지하에 종신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독재체제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군부와 공산당의 대립은 경제난과 정치적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에 1965년 ‘930 사태’로 불리는 일련의 사태를 수하르토가 평정하고 수카르노 지지 세력과 인도네시아 공산당세력을 괴멸시켜 수하르토 독재체제를 수립한다. 한 인권보고서에 따르면 ‘930 사태’ 이후 1966년까지 공산주의자로 몰려 살해된 숫자는 약 100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300여 종족이 600여 종류에 가까운 지역언어를 구사하며 독자적이고 독립적 문화를 발전시켜온 1만7508개 도서로 이루어진 군도(群島) 대국 인도네시아에서는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종족들과 자바섬을 중심으로 한 인도네시아 중앙정부 사이에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대표적인 갈등 지역이 바로 아체지역이다.

1999년 동티모르 독립 이후 아체의 인권상황은 매우 악화되었다. 국제사회의 압력을 받아 동티모르의 독립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인도네시아 정부는 자치를 외치는 아체인들을 무자비 하게 탄압했다. 아체에서 인도네시아 군인과 경찰이 자행한 불법연행, 납치, 고문, 사살 등과 같은 인권유린은 쉬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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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 지배와 내전으로 얼룩진 ‘불행한 땅’_아체


인도네시아 최고의 인권옹호자이자 웅변가

무니르(Munir Said Thalib)는 인도네시아의 군부 및 정보기관의 인권침해와 아체 관련 정부정책을 비판했던 인도네시아 최고의 인권운동가였다. 그는 1992~1996년에 동부자바에서 노동 인권 개선을 위해 투쟁했고, 1996~2003년에는 자카르타에서 수하르토 체제가 자행한 활동가 납치실종사건과 동티모르 인권침해 사건들을 다뤘으며, 비극적 죽음을 맞기까지 2003~2004년에 걸쳐 임파르살 소장으로서 활동했다.

무니르는 인도네시아 최초의 인권옹호단체로서 가난한 이들에게 무료 변호를 제공하는 것으로 유명한 인도네시아법률구조재단(이하 YLBHI: Yayasan Lembaga Bantuan Hukum Indonesia) 수라바야 지부의 노동분과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당시 수하르토 체제는 국내자본가와 외국인 투자자들을 최대한 지원하는 방식으로 경제발전을 추구하였기에 노동문제는 아주 중요한 이슈였다. 그는 노동분쟁 사건들을 다루는 전문적 능력과 기자들에게 흥미를 끌만한 뉴스를 제공하는 기민한 능력을 지녀 노동자들과 기자들에게 아주 인기가 있었다. 그는 법정, 노동부, 지방 및 중앙 노동분쟁조정위원회에서 노동자들을 직접 변호하고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수집된 자료를 분석하여 보고서를 완성하는 일을 수행했다.

YLBHI에 접수되는 사건들의 대다수는 노동법이 보장한 정규적 권리 위반과 해고 관련 사례들이었다. 대표적인 활약으로는, 시도방운사의 일방적인 해고 사건이 있다. 무니르는 해고자들이 위법행위에 관한 법률조항에 근거하여 회사 측을 지방법원에 제소하도록 제안하고 후원했다. 그 결과 1995년 대법원 판결로 위법행위에 관한 조항으로 노동자들이 승소한 첫 사례이자 노동자들이 법정에서 회사 측을 해소시킨 최초의 사례를 만들어 냈다. 또한 그는 군부의 노동문제 개입과 자본과의 협력이 노동자들에게 가장 큰 위협이라고 생각하고, 위법행위를 자행한 죄목으로 시도아르조 지역주둔군사령관 등을 지방법원에 고발하도록 해고자들을 고무시켰다. 또한 생산성과 생산품의 질에 비해 지나치게 적게 지급되는 임금실태를 보고, 정부가 최저임금권장선을 발표하면 인도네시아의 4대산업지대의 임금사정을 조사하였다. 그는 이를 통해 노동자들의 열악한 실태를 사회에 고발하였다. 그의 이러한 역동적인 활동은 YLBHI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고 1996년 YLBHI의 운영국 차장으로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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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니르 활동사진

 1997~1998년 수하르토 체제의 말기에 활동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납치가 자행되자 YLBHI와 자카르타의 몇몇 인권운동단체들이 연대하여 실종및폭력피해자대책위원회(Kontras: Komisi untuk Orang Hilang dan Korban Tindak Kekerasan)를 1998년 3월 20일에 결성하였다. 무니르는 이 위원회의 총무국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특전단(Kopassus)의 비밀작전팀(Mawar)에 의해 자행된 활동가 납치 사건을 법정으로 끌고가는데 성공하였고 특전단의 몇몇 장교들은 법정 처벌을 받았다. 또한 1989~1998년에 아체에서 수행된 군사작전 중에 인권침해를 자행한 자들이 법정에 세워져야 하고 군부의 각종 면책특권이 중단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그는 특히 인도네시아의 군부를 비판하는 웅변가로 유명했다. 거는 군부에 의해 자행된 동티모르, 파푸아, 아체 지역에서의 인권탄압행위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그는 국가인권위원회의 동티모르 지역 인권침해 조사위원회 위원이 되어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인권침해 혐의를 받는 장군들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고 서슴없이 조사를 추진하였다. 당시 막강한 귄력을 지녔던 위란토 장군은 와히드 대통령에 의해 장관직을 박탈당했다. 이러한 굵직한 사건들은 무니르를 용감한 인권운동가로서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했다. 1998년에 무니르는 콘트라스 총무국장 자격으로 인도네시아 최고의 인권상 얍 띠암 힌 상(Yap Thiam Hien Award)을 수상하였다. 이어 2000년에는 인권운동가를 위한 대안적 노벨상(Rights Livelihood Award)과 유네스코의 만다젯 싱 상(Mandajeet Singh Award)를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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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초에는 콘트라스의 소장역할을 수행하면서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인도네시아대학교, 가자마다대학교에 소속된 안보문제 전문가들과 함께 군부와 경찰에 대한 조사연구를 시작했다. 이어 그는 아체와 파푸아 지역의 인권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는 인권감시단체를 결성하고자 하였다. 2002년 11월에 18명의 인권운동가들과 함께 임파르샬(Imparsial)을 설립, 만장일치로 소장으로 선출되었다. 임파르샬은 ‘시민사회의 자유 대 반테러 전쟁’ 캠페인을 통해 테러리즘을 저지하려는 정부 정책이 시민사회의 자유를 침해하는 실상을 고발하였다. 또한 태국에서 개최된 납치실종에 반대하는 아시아연맹(AFAD) 회의에 참석하여 의장활동을 하였다.

그 후 군법 초안을 비판하는 시위를 조직했다, 해악을 초래할 수 있는 군법의 일부 조항들이 국회심의과정에서 수정될 수 있도록 하였고, 해군참모장과 국방부에 대한 항의행동을 전개하여 해군이 불법 선박거래를 중단토록 하였다.

이처럼 인권투사로 활동하는 동안 무니르는 다양한 협박과 테러에 직면했다. 동부자바주 주둔군사령관인 하르또노 육군소장은 노동자들을 계속 선동하고 다니면 “소시지를 만들어버리겠다”고 직접 협박하였고, 정보기관원들과 폭력배들도 전화나 편지로 종종 위협을 가했다. 이러한 협박에 대해 무니르는 대수롭지 않게, “모든 일에는 위험이 따르는 법이다. 피할 수 있다면 당연히 피해야지만, 피할 수 없다면 맞서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항상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 만약 우리가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그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적이 이미 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유명한 말을 남겼다.

2000년에는 콘트라스 사무소 문 앞에서 두 개의 폭발물이 터졌고, 같은 해에 말랑의 바투 지역에 있는 친가로 고성능폭발물이 보내졌다. 2002년 3월에는 유혈짜왕지역민회라는 이름을 내건 5백명의 해결사들이 콘트라스로 들이닥쳐 사무실을 파손시키고 무니르를 위협했다.  2003년 9월에는 무니르 집 안마당으로 폭발물이 담긴 봉지가 투척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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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카퍼스(Pollycarpus Priyanto) 재판 사진



2004년 9월 7일 석사학위 과정을 위해 네덜란드로 향하던 중 무니르는 인도네시아 비행기 안에서 비소에 중독되어 살해당했다. 이 사건의 용의자로 전직 조종사였던 폴리카퍼스(Pollycarpus Priyanto)가 지목되었고 그는 가루다 항공의 고위층이었던 인드라(Indra Setiawan)의 명령을 받고 무니르의 오렌지 주스에 비소를 넣었다고 자백했다. 무니르의 지지자들은 그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사주한 세력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지 않았다고 정부에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인도네시아, 민주화로의 나아가려는 노력 
2001년 7월 23일 국민협의회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와히드(Abdurrahman Wahid)가 무능력과 부패 의혹 등으로 집권한 지 21개월 만에 대통령직에서 쫓겨나고, 스카르노 대통령의 딸인 메가와티 부통령이 신임 대통령으로 정권을 잡았다. 그후 2004년 인도네시아의 첫 직선제 대통령선거에서 군 장성 출신의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전 안보장관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현정권을 이어가고 있다. 이로써 인도네시아는 현재 수하르토 시기와 달리 군의 정치•사회적 기능이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

한편 1998년 수하르토의 하야 이후 인도네시아의 인권단체 및 NGO들은 정부의 정책에 대해 적극적인 대안을 제시하는등 인도네시아 민주화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한다.

정리: 김연재, 최유미 국제연대위원회 자원 활동가

참고 정보 사이트
http://www.kdemocracy.or.kr/
http://en.wikipedia.org/wiki/Munir_Said_Thalib
http://www.kontras.org/eng/index.php
http://www.munir.or.id/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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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민주화를 위한 안보 개혁 10년
인도네시아 시민사회의 전략과 도전

인구 2억 2천 2백만 명, 1,890,754 평방 킬로미터의 군도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는, 1998년 이후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투쟁을 벌여왔다. 1998년 여러 정치 조직과 시민 단체들은 수하르토 정권이 32년 동안 자행한 가장 억압적인 조치들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을 펼쳤다.  인도네시아의 누적된 정치적, 경제적 위기와 정권에 의해 자행된 대규모의 인권 폐해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민주 정권의 수립을 위한 노력을 가속화 시켰다.

1966년 수하르토가 권좌를 움켜진 후 몇 년 동안 주로 수면 아래에서 활동하던 민주 개혁 운동이 1997년 동남아사아 경제 위기를 계기로 수면 위로 부상했다. 이러한 계기로 인도네시아 대학생들은 독재 정권의 무능력에 대항하고자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그 결과 1998년 5월 수하르토가 대통령직을 사임하게 되고, 개혁 체제(Reformation Order)라 불리는 새로운 시대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개혁의 성과와 진척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인도네시아 안보 개혁과 시민사회
1998년 5월 정권 교체 이후 인도네시아 사회는 몇가지 변화를 맞이했다. 법률 개정과 정부권력을 통제하기 위해서 사법 관할 밖의 기관들을 편성하고, 정부의 의사 결정에 참여하기 위한 시민들에게 열린 공공 정치 공간을 마련했다. 그러나 여전히 정부는 이러한 다양한 정책들을 이행하고, 감독, 평가하는데 있어 부족해 보였다. 비록 국군, 경찰, 국회, 심지어 대통령 내각과 국방부가 안보 개혁을 위해 노력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안보 개혁 과정이 전반적으로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인도네시아 시민사회단체들은 입을 모은다.

인도네시아 시민사회 단체들의 역할을 보면 안보 분야 개혁에 대한 담론 구성, 정책 지원, 정책 집행에 따른 책임성과 투명성 촉진, 권력남용에 대한 감시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해내고 있다. 그러나 안보개혁은 시민사회의 노력에도 불과하고 이렇다 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안보개혁을 위한 시민사회의 움직임
2000년부터 시민사회단체들의 안보 개혁에 대한 지지는 높아져서 여러 관계자들과 연대하기 시작했다. 또한 정치적 문제가 아닌 기술적인 측면에서 안보분야 개혁을 위한 방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민사회단체들은 인도네시아의 정부에 따라 편파적인 방향으로 움직였다. 일부  인도네시아 시민사회는 안보 개혁 의제들을 정부의 인권유린 행위에 영향을 주는 반테러 의제로 보기도 하고 미국과 같은 나라와의 군사적 협력으로 보기도 했다. 또한 중앙 엘리트와 지방 엘리트들의 실용주의 노선으로 접근해 입장에 따라 혼선을 일으키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현재 인도네시아의 시민 단체들은 국내 안보 공공기관들의 개혁 저항과 정부의 정치적 모호성, 엘리트 집단의 개혁 의지 부진에 시달리고 있다. 수실로 밤방 요도요노(Susilo Bambang Yudhoyono) 대통령은 2004년 당선된 후, 인도네시아 군부 (Indonesian National Military - Indonesian Police) 체계하의 민주적 통치 질서를 세우기보다는 군부의 내부자들을 포섭하기에 급급하다.

지금까지 언급한 정부의 행보를 보면 시민 단체들이 안보분야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의제들과 전략을 통해 풀어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난 1997-1998년 동안 대부분의 단체들이 안보분야의 근본적인 개혁 문제에 집중해왔던 것과는 달리 현재는 각 시민사회단체들은 특정 안보 정책과 이슈를 선점해 전략을 짜나가야 한다.
 
어찌 보면 인도네시아는 지금 민주화로 넘어가는데 중대한 시점에 놓여 있다. 긍정적 가능성은 안보 개혁을 통해 민주화가 촉진되는 것이고, 부정적 가능성은 안보 개혁에 따르는 피로와 현기증이 생길 것이라는 것이다.

무프티 마카리마
( 사무국장/ Institute for Defense Security and Peace Studies, 인도네시아 주재)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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