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시위 사수, 인도네시아에서는? 

이명박 정부와 촛불집회의 팽팽한 대결이 장기간 지속되는 가운데 폭력에 관한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그렇지만 내가 학습대상으로 삼는 인도네시아의 실상에 비추어보면 한국의 시위대는 놀라울 정도로 평화를 지켜내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사람들이 대규모로 결집한 곳에서 폭력행동이 발생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시위현장 뿐만 아니라 경기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인도네시아 친구들은 한국에서 대규모 집회나 축구 응원이 평화적으로 전개되는데 대하여 놀라움을 표하곤 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외환위기로 물가가 폭등하자 이에 항의하는 집단행동이 곳곳에서 발생했는데 그 규모가 커지자 약탈, 방화, 강간이나 살인이 수반하는 극단적 폭력사태로 번져나갔다. 민주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각지에서 종족간의 균열이 인명과 재산을 앗아가는 수평적인 집단폭력이 발화했다. 마을 사람들이 도둑을 잡아 집단적으로 뭇매를 때리거나 불태워 죽이는 일도 허다하게 발생하였다.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이 건물과 승용차를 파괴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에서는 군중과 폭력이 근친의 관계로 간주되고, 상류층은 물론이고 중산층까지도 대체로 군중동원에 대한 공포를 지니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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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네시아의 실상에 비추어보면 한국의 시위대는 놀라울 정도로 평화를 지켜내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프레시안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하는 대중폭력은 여러 가지로 설명된다. 우선 가장 오래된 설명은 말레이계의 종족적 특성이 원래 그렇다는 것이다. 현지어 "아묵"(amuk)이라는 말은 정신을 잃을 정도의 발작상태를 가리키는 말인데 유럽식민주의자들이 이 단어를 영어사전에 올리면서 국제어가 되었다. 현지인들이 아묵 상태에서 행하는 폭력행동을 유럽인들이 열대의 이국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였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현지인들의 아묵은 평소의 인내심과 아주 대조적이었기 때문에 더욱 인상적으로 보였던 것 같다. 6백여 년 전에 인도네시아 자바의 스마랑(Semarang)에 원정을 왔던 명나라 쩡허(鄭和)의 사관도 현지인들의 높은 인내심과 강한 폭력성을 모순적 현상으로 특이하게 보아 각별히 기록해두었다고 한다. 높은 인내심과 강한 폭력성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평소에 너무 참기 때문에 폭발적으로 의사표현을 한다는 식으로 인내와 폭력을 연결시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다른 한편에 군중폭력을 체제 탓으로 돌리는 해석들도 있다. 돌발적인 폭력을 통해 요구를 표출하는 행동은 장기간 지속된 폭압적인 체제에서 온건한 의사표출의 자유도 주어지지 않았고, 폭력적인 해법을 일삼는 체제로부터 폭력적인 해법만 전수받았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근자에 유력한 가설은 아묵 현상을 유발하려는 음모와 책동이 있다는 설이다. 시위현장에서 시위대의 일원처럼 행세하면서 폭력을 남보다 앞서 행사하는 외부인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그들은 주로 "선동가"를 뜻하는 외래어를 차용한 "쁘로보까또르"(provokator)라는 용어로 지칭된다. 이를테면 1998년 5월에 벌어진 일련의 폭력사태들은 머리카락이 짧고 건장한 체격의 낯선 사람들이 시위대 속에서 먼저 폭력을 행사하면서 집단폭력이 시작되었다는 증언들이 나오고 이들이 특전대 소속이었을 것이라는 구체적인 음모설이 제기된 바 있다. 지방에서 벌어진 종족분쟁들도 작은 시비와 다툼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역시 외부인의 소행이고 신생민주정부의 개혁을 방해하려는 구체제 지지자들이 배후에 있다는 음모론이 나돌았다. 노동자들의 가두시위에서도 마찬가지 음모설이 작동하는데, 지방정부나 지방의회에 찾아가서 최저임금을 올려달라고 대규모로 시위를 벌이면 작업복을 입은 낯선 이들이 나타나 폭력행동을 선동하면서 기물을 앞서서 파괴하곤 한다고 노동조합 간부들이 주장하였고, 지방관구사령부가 관할 지역의 주요 회사들의 작업복을 골고루 보관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주장도 들어본 바 있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시위가 심각한 폭력을 동반하면 경찰이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언론은 '폭동'이라고 보도하고 시위지도부를 구속하는 '3박자' 대응이 이어지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규모가 큰 군중결집을 두려워하고 보통 사람들의 집단적 의사표현을 신뢰하지 않는 수평적인 공포와 불신을 일반인들이 갖게 되고 국민들이 직접행동을 통해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보다 강력한 국가와 군부가 질서를 잡아줄 것을 기대하는 공권력 의존성이 사람들의 뇌리에 자리 잡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군중폭력은 인도네시아에서 사회운동을 전개하는 이들에게는 각별한 고민꺼리일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러하니 인도네시아의 사회단체들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규모 시위를 기획하지 않는다.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러나 대규모 시위가 불가피하다면 자율검색을 시행하거나 안전요원을 배치하는 해법을 취한다. 자율검색의 대표적인 예가 1998년 5월에 수하르토를 끌어내린 국회의사당 시위로서 대학생들이 의회정문에서 수상한 이들의 진입을 막은 경우였다. 그런데 노동자와 빈민들의 진입을 막은 경우를 들어 자율검색이 대학생들의 우월감과 군중공포를 드러낸 비연대적 행동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반면에 시위대 중에 일부가 안전을 관리하는 임무를 띠는 자율적 안전관리는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져 일반적으로 수행되고 있다. 또 하나의 지혜는 즐겁게 시위하는 것이다. 특이한 분장, 보디페인팅, 퍼포먼스가 시위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고 사진기자들의 집중조명을 받곤 한다. 국제노동절시위도 지방 단위에서 공연, 경연, 집단놀이 등을 통해 카니발 형식으로 전개되곤 한다. 자율적인 안전관리나 집단놀이형 시위는 우리보다 인도네시아가 '선배'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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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의 지혜는 즐겁게 시위하는 것이다. 특이한 분장, 보디페인팅, 퍼포먼스가 시위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고 사진기자들의 집중조명을 받곤 한다." ⓒ프레시안 



인도네시아에서 집단의사의 평화적 표현을 위한 노력은 운동권만의 일은 아니었다. 1999년 6월에 44년만의 자유총선거를 앞두고 인도네시아의 한 일간지는 동부 자바의 수라바야(Surabaya)시가 폭동이 가장 강력하게 발생할 만한 화약고로 지목하였다. 그런데 의외로 사소한 시비만 있었을 뿐 폭동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과 자긍심이 가득한 시민들 덕분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당시 인도네시아의 민주화를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민주사회에 대한 기대로 집단폭력이 자제되었을 것이라는 해석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자긍심에 대해서는 약간의 부연이 필요할 것이다. 수라바야는 2차대전 종전이후 승전국으로 복귀하는 서양식민주의 세력을 목숨을 걸고 격퇴한 역사적인 도시라서 '영웅의 도시'로 불리어왔으며 시민들도 직선적이지만 자존심이 강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 자긍심 강한 시민들이 집단폭력으로 도시가 상처받는 일을 막아냈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1998년 5월로 다시 돌아간다면, 평화적인 대중시위의 선명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전국이 폭동으로 얼룩질 때, 족자카르타(Yogyakarta)시에서도 역사상 최대의 시민이 참여하는 시위가 벌어졌지만 군중폭력은 발생하지 않았다. 수하르토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민들 앞에 족자카르타의 술탄이 나타나서 시민의 뜻을 대통령에게 전달하겠다고 약속하고 시위대와 함께 행진을 하였다. 전통적 종교적 권위를 지닌 술탄이 책임을 지고 사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하였기 때문에 시민들은 평화적으로 시위를 전개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수하르토가 물러났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촛불시위를 보면서 연상된 인도네시아의 집단시위 풍경이었다. 이런 이야기가 팽팽한 대결 국면 속에서 지친 우리 시민들에게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기회가 되었기를 바란다. 한국에 대한 함의 따위는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고 독자들의 몫으로 남긴다. 다만 인도네시아의 대중시위 현장에서는 전투성을 증대시키는 능력보다 평화를 지켜내는 능력이 더 결정적인 관건이고 평화시위를 사수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더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를 성사시키는데 기여할 것이라는 소견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전제성(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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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체가 나를 부끄럽게 했다

비행기에 탑승하고서야 자카르타까지 7시간이나 걸리는 걸 확인하였다. 목적지가 어디든 몇 시간이 걸리든 별로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뭔지 모르게 피곤하기만 한 한국에서의 일상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했다. 이렇게 허둥지둥 시작한 인도네시아 방문은 일주일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7시간의 지루할 수 있는 비행시간은 오히려 안락한 휴식이 되어 주었다.
 
한밤중에 자카르타에 도착해 짐을 찾아 세관을 나가려고 하는데, 경찰인지 세관원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박스로 싼 짐을 질질 끌어 내며 뭔가를 요구한다. 어쩌란 말인가 싶어 귀를 기울였더니 결국은 돈을 내라는 애기다. 언젠가 남의 애기를 인용해서 인도네시아의 부패문제를 민주주의와 인권의 걸림돌로 지적한 적이 있었는데, 그 사실을 생생하게 눈 앞에 두고도 그냥 무기력하게 공항을 빠져 나왔다. 뭔가 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자괴감이 한 순간 스치고 지나갔다. 마중 나오기로 한 차는 한참이 지났는데도 오질 않는다. 몇 대의 담배를 피우고 한국에서는 한 가닥씩 하는 일행들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펴 보았다. 모두가 이 상황을 얼마큼은 받아 들이고 있는 듯 하였다. 달리 방도가 없으니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얼마를 더 기다린 후에 차가 도착하고 일행은 공항 근처 호텔에서 하루 밤을 묵게 되었다. 로비에서부터 아늑하게 뻗어 있는 긴 복도를 좌우로 몇 번 돌아서야 겨우 방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가라오케인지 나이트클럽인지 모를 시설이 방과 한 층에 있었다. 클럽 앞에는 한 가지로 유니폼을 입고 어려 보이는 여성 종업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공항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성 종업원들의 미소를 외면한 채 무기력하게 지나쳤다. 일행 중에 과격한 페미니스트가 있었다면 그렇게 무기력하지는 않았을까? 인도네시아에서의 첫날밤은 우리 일행의 정체성과 한계를 분명하게 설명해 주었다. 지금의 생각이지만 뭔가 하지 않는 것이 이유야 어찌되었든 잘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싶다. 내가 보편적이라 믿었던 것들이 어떤 사람에게는 이상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여행하는 동안 여러 차례 느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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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쓰나미로 인해 마을 한 가운데까지 7㎞를 밀려와 정박한 산만한 화물선박. ⓒ김신

 잠을 자는 둥 마는 둥하고 제법 차가운 열대의 새벽 공기를 쐬면서 다시 공항으로 가서 수마트라 섬 최 북부의 아체주로 향하였다. 공식일정이 시작된 것이다. 4시간이 걸려 도착한 아체주 공항은 시골 간이역을 연상시켰다. 공항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냥 나왔다. 쓰나미때 이곳 공항까지 바닷물이 넘쳐 그나마도 공항이 제 기능을 못해 구호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아직 아침인데도 5월의 뜨거운 열기는 피부를 찔러대며 파고들었다. 자카르타와는 다르게 공기는 신선하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상쾌하다. 무엇보다 담배 파는 가게직원이 없어 안달하는 일행에게 피우던 담배를 갑 채로 가지라고 권하는 공항직원들의 여유로움과 친근함이 자카르타와는 사뭇 다르다. 또 택시 호객과 전화카드를 팔려고 젊은 상인들이 진을 치고 있던 자카르타 공항과는 달리 이곳 공항입구는 망고를 팔러 나온 농부 몇 사람과 택시기사 한둘이 전부다. 망고를 팔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자기네끼리 깎아 먹고 노닥거리고 있다. 일행은 마중 나오기로 한 차를 기다리다 망고 한 바구니를 샀다. 노란 속살을 나누어 먹으면서 노닥거리는 사이 차가 도착했다. 역시 두 시간을 기다렸다. 아체의 첫인상은 마중 나오기로 한 차를 두 시간 기다린 것을 빼고는 사람도 공기도 그리고 일행들의 분위기도 모든 것이 자카르타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다.
 
숙소가 분명히 호텔인데 한참을 달려도 호텔은 고사하고 여인숙도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쓰나미가 다 휩쓸어 버린 것인가라고 의아해하고 있는데, 눈앞에 3층의 꽤 괜찮은 호텔이 갑자기 나타났다.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이곳에 호텔이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현지에서 우리 일행의 이동과 프로그램에 대해서 간사역할을 해준 단체는 SIRA(Central Information Referendum of Aceh)인데, 아체주 부지사가 된 나자르(37세)를 대표로 해서 중앙정부와의 분쟁 당시 자치획득을 위해서 주민투표를 추진해왔고, 지금은 정당으로서 변형과정을 거치고 있는 반정당적 성격을 띄고 있었다. 누구와도 영어가 통하지 않은 관계로 SIRA에 대한 많은 애기는 들을 수 없었다. 다만 한국의 경험에 비추어 정치를 하기에는 너무나 순박한 사람들이고 20~30대의 젊은 청년들로 리더십을 구성하고 있으며 어떤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빈곤과 복지가 주요 관심사라는 점이다. 그리고 당원 중에 여성과 노인 심지어 중년의 남성은 단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SIRA뿐 만 아니라 몇 개의 현지 NGO를 방문했을 때도 거리에서도 시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30년 넘는 분쟁으로 수 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그나마도 쓰나미가 휩쓸어 버린 아체의 현실이다. 굳이 쓰나미 피해 현장을 찾아 다닐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성들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이슬람법을 주법으로 삼고 있는 아체의 문화적 요인도 있었겠지만, 전쟁과 재해의 피해자는 언제나 사회적 약자그룹에게 더 가혹한 것이니 남성보다는 여성이 젊은이 보다는 노인의 피해가 심각했으리라. 이러한 사실은 예정에 없던 노동절행사에 동원되었을 때 더욱 더 실감이 났다. 겨우 50여명이 노동절행사를 갖고 있었다. 쓰나미가 파괴한 것은 단순히 자연환경과 삶의 터전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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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체의 노동절 행사 ⓒ김신 

쓰나미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들어온 국제기구, NGO들이 저마다 내건 영문단체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거의 문맹의 상태에서 우리 일행은 스스로의 자치권을 포기한 채 SIRA의 안내에 따라 먼저 나자르 부주지사와 간담회를 가졌다. 부주지사는 과거의 아픈 기억을 자치권 속에서 풀어내는 것을 과제로 안고 있었다. 지난 30여 년 간의 투쟁의 역사를 민주주의의 역사로 정착하고 과거 분리독립세력을 평화의 세력으로 사회화하여 과거의 상처가 민주적 자치권 속에서 인권과 평화의 문화로 거듭나는 아체인의 삶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일행에게 아체인들은 투쟁에 집중한 나머지 한번도 민주적 삶을 살아 보지 못해 민주주의를 피상적으로 알 뿐이라며 한국과의 민주주의 교육 교류를 제안하였다. 순간 부끄러워졌다. 민주주의가 제도만을 애기하는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의 삶 속의 민주주의 애기라면 오히려 아체의 상황이 좋아 보였다. 가부장적이고 이기적인 권위주의가 가정, 직장, 여타 사회 활동을 지배하고 있는 한국에서의 일상에 익숙한 나에게 직원이 있는데도 단체대표가 길거리 상인과 사소한 흥정을 하고 운전기사와 수행직원이 있는데도 고위공무원이 시장에서 산 점심을 담은 비닐봉투를 흔들고 다니고 상인들 간의 사소한 시시비비에 끼어드는 모습은 뭔가 역할이 잘못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새로웠다.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 학력, 무엇보다 나이와 상관없이 자유롭게 주제를 공유하고 뭔가를 토론하는 모습은 여행 내내 자주 볼 수 있었다. 아체인은 태생문화적으로 민주적일 수 밖에 없다는 어느 동남아학자의 말이 생각난다. 그 태생적 문화가 무엇인지는 아직까지 분명하지 않지만….
 
쓰나미 피해 재건현장과 30년 넘게 지속된 오랜 분쟁의 희생자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사회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쓰나미가 파괴한 아체주의 자연환경과 삶의 터전은 국제사회의 원조로 상당부분 복구되고 있거나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다만 마을 한 가운데까지 7㎞를 밀려와 제 멋대로 정박한 산만한 화물선박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안내자는 성룡이 기금을 내서 중국정부가 재건했다는 성룡마을로 우리 일행을 데리고 갔다. 중국식 건축물로 마을 정문을 세우고 거기에 중국어로 "중국과 인도네시아의 우의촌" 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옆으로는 홍보용 비석을 세워 뭐라 장황하게 새겨놓고 있었다. 정문에 들어서자 우뚝하게 세워진 이슬람사원이 눈에 띄었다. 저 멀리 인도양의 수평선에서도 알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지대에 재건된 마을은 5000여 가구는 되어 보였다. 아체의 전형적인 가옥구조 양식을 띄어 빨간색 지붕과 아이보리색 벽으로 지워진 보기 좋게 일률적인 크기와 모양의 가옥들이 장관이었다. 마을 앞으로는 인도양이 내려다 보이고 주변으로는 녹색의 열대 자연이 펼쳐져 있고 마을 끝까지 시멘트로 포장된 잘 정돈된 차도가 지그재그로 엎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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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룡이 기금을 내서 중국정부가 재건했다는 성룡마을. ⓒ김신 

마을은 차도를 따라 형성되었는데, 언뜻 어느 휴양지에 온 기분이었다. 마을까지 차로 오면서도 급경사가 힘들었는데 입구에서 내려 마을에 들어서자 얼마 못 가 주저 앉게 되었다. 어찌 된 일인지 마을 어디에도 사람이 없었다. 마을 입구에서 몇 가지 생필품을 파는 가게 주인과 아이들 서너 명을 본 게 사람의 전부다. 가게 주인에 의하면 교통수단은 없는데 생계를 꾸릴 수단은 멀리 있어서 주민들이 새벽에 나가 저녁 늦게 집에 들어오기도 하고 아예 일터가 가까운 곳에 간이 숙소를 마련하고 산다고 한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학교도 없고, 시장도 없고, 병원도 없어서 이주된 주민들이 다시 원래 살던 곳으로 많이들 빠져나가고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갈 곳이 마땅한 건 아닌데, 이 마을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떠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굳이 주거권에 대한 개념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잘못된 이주정책의 전형적 모습이다. 이주하게 될 주민들의 의견은 들어나 봤을까? 이렇게 만들어진 마을과 사회시설이 아체에 몇 개나 될까? 가게주인도 곧 마땅한 생계거리를 찾아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막막하게 허공을 주시하며 눈시울만 붉혔다. 그 시선을 따라 가보니 하늘은 구름이 한 점 없이 파랗기만 했다.
 
우리 일행도 이제 아체를 떠날 채비를 해야 했다. 도착하자 마자 일그러지기 시작한 일정에 따라 원래의 일정표 상의 순서와 시간은 오간 데 없어지고 그냥 모든 걸 SIRA에 맡긴 채 진행한 이틀간의 아체 여행을 마무리하고 공항으로 향하였다. 자카르타로 가는 비행기가 두 시간 늦게 출발한다고 한다. 왜 모든 게 두 시간인지 모르겠다. 이쯤 되자, 우리 일행 누구도 이것을 문제라고 느끼거나 이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두 시간이 오히려 반가웠다. 아체에서의 이틀 동안 비록 좋아하지 않는 생선을 주식으로 강요당하고, 가끔은 코코넛으로 배를 채워야 했고, 자치정부 수립 이후의 사회 상황을 현지인의 설명 없이 스스로 알아서 살펴 봐야 했지만, 가끔씩 먹여주는 아체 커피의 향긋함에 느긋해 지고, 아무런 경고 없이 데려다 준 해변가, 파도와 바람이 아니면 누구도 침범해보지 못했을 것 같은 백사장에서 누리던 잠깐의 휴식을 생각하면 나의 선택권과 자치권은 싸 그리 무시되었지만 모든 것이 다 그걸로 그만이다.
 
비행기 창 밖으로 보이는 아체의 산과 바다 강줄기를 사진을 찍듯 눈 속에 담았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다음에 다시 오게 된다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유럽의 시티플래너들이 아체에서 그 플랜리란 것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것이 진실로 바른 길이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김신/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국제사업단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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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네시아 개발독재 이후의 정치민주화


인도네시아는 얼마전까지 수하르토 대통령이 32년간 독재정치를 해온 것으로 알려졌고, 그 직후 메가와티 여성대통령, 그리고 현재는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SBY ) 대통령이 집권하고있다. 오랜 기간 독재정치 이후 통치자가 두 번이나 바뀌었으니 독재정치 시기와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는게 일반적인 기대일 것이다. 

몇일 전 부정부패와 인권유린으로 국제사회에서 비난을 받던 수하르토 대통령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런 수하르토를 두고 '개발의 아버지'와 '개발 독재자'라는 대조적인 별칭이 불려진다고 한다. 과연 인도네시아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길래 그런 것일까.
 

인도네시아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수 하르토 정권이후,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는 민주적 선거, 정당의 공정경쟁, 국회 및 지방의회의 정상운영, 언론의 자유 등으로 대변되고 있다. 지금 인도네시아는 대통령직에서부터 정당, 의회에 이르기까지 권력의 분산이 이루어졌고, 이해관계가 집중되어 이합집산으로 표현될 수 있는 정당이 부활하였고, 중앙 및 지방제도에 대한 접근과 통제를 위해 관직 사고파는 관행이 분산되고 해체되는 상황이 분명해지고 있으며, 정치적 중개인, 기업인, 공무원들의 역할이 재조정되고 있으며, 군부가 공식적인 정치역할에서 물러나고 있는 것이 최근의 모습이다. 한마디로 인도네시아는 중앙집권적인 권위주의 국가에서부터 분권화된 선거 민주주의로 변화되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수하르토 정권 이후 민주주의적 제도와 절차를 도입하고 개혁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고질적인 문제가 잔재해있었는데, 그 중 가장 큰 문제는 선거와 정당, 지방정부에까지 퍼진 '부정부패의 만연'이었다. 대통령직접선거가 처음으로 도입된 2004년 선거에서 승리한 SBY 대통령도 몇가지 차원에서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 첫째, 만연한 부패를 근절시키지 못한 점, 둘째, 기득권 세력인 기업과 정치세력들에 대해 통제하지 못한 점, 셋째, 인도네시아의 악명 높은 부패한 사법제도를 개혁하지 못한 점, 넷째, 군부를 통제하지 못한 점 등이 그 원인이다.
 

포스트-수하르토 시대에 드리워진 구체제의 그늘
 
그 결과 인도네시아는 SBY 정권하에서 실시된 개혁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오히려 수하르토 시절의 강력한 통치자에 대한 향수가 번지게 되었으며, 심지어 국민들은 잠재된 범죄가 드러나고 경제가 부진한 원인을 '민주주의'에 있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수하르토 정권은 풍부한 석유와 가스 개발산업의 수익을 바탕으로 연평균 7%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수하르토가 물러난 시기는 아시아 경제위기와 맞물리면서, 그 이후 인도네시아 경제는 곤두박질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의 개혁(reformasi)이 완전히 실행되지 못하고 있는 원인은, 민주적 제도라는 것들도 수하르토 시대동안 성장해온 것들이고 구성원들도 역시 그 시대부터 존재해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거대한 군부가 상당히 중요한 의미에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퇴각을 하였지만, 유사군부 및 조직들 같은 '비시민'(uncivil) 사회집단이 정치 폭력배로 자리를 잡았고 이들이 종종 정당이나 관련 언론조직과 연계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결국 구체제가 포스트(post) 수하르토 시대에도 다양한 영역에 뿌리깊게 잔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한국 민주주의는 어디에 와 있나
 
이 같은 인도네시아의 정치상황은 우리나라의 군부독재시절 또는 자유당 정권이후 모습을 연상케한다. 박정희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현상과도 비슷하다. 그런 가운데 인도네시아와 현재 한국의 공통 키워드는 경제성장, 강력한 지도자이다.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역할모델은 한국이었다고 한다. 비슷한 기간의 군부독재를 거쳤고, 민주화를 경험하고 있으며, 경제성장까지 이루었으니 당연히 모범적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제 그 이후 한국의 방향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이다. 그것이 좋던 나쁘던 한번 뿌리깊이 박힌 정체성, 관습 등은 지도자 한사람이 바뀌었다고 해서 쉽게 변하지 않는다. 30년간 인도네시아 국민들의 습관처럼 형성된 부정부패와 군부의 개발독재 같은 습성들이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의 국민들에게 노스텔지어가 된다는 것이 이를 입증 해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 국가의 정치지도자의 이념과 방향설정이 중요한 이유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다시한번 질문을 해보게된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느 지점에 와 있으며, 현재의 한국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느냐고 말이다.


김은경(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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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인도네시아 여성운동가



처음으로 쓰는 이 칼럼에서 오늘은 인도네시아 여성운동가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작년 ‘언론자유상’을 수상한 가디스 아리비아(Gadis Arivia)를 지난 주에 다시 만났다. 그는 현재 인도네시아국립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근무하고 있으며 프랑스에서 석사학위를 하고 인도네시아국립대 철학과에서 페미니즘으로 박사학위를 했다. 내가 그녀를 알게 된 것은 1998년 대학원 석사과정시절에 있을 때 그녀가 창간하고 편집자로 있는 [여성 저널](Journal Perempuan)이라는 페미니즘 저널을 발간하는 단체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되면서부터였다.

1990년대 중반 그의 집 뒤편의 조그만 통나무 집 서재에서 탄생한 Jurnal Perempuan은 여성문제에 대한 논의가 전무한 상황에서 토론의 장을 만들어보자는 소박한 의도로 시작되었다. 그렇게 시작이 소박했던 잡지가 이제는 인도네시아의 대표적인 여성 계간지가 되었고 여성문제를 연구하는 사람은 한번쯤 거쳐가는 곳이 되었다. 처음에는 여성문제에 대한 논의를 철학에서 시작하였지만 지금은 정치, 인권, 종교, 빈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여성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녀의 활동은 여성문제를 토론하는 데에 국한되지 않았다. 수하르토 집권이 종말로 치닫던 1999년 초에 그녀는 여성운동가들을 조직하여 [걱정하는 어머니들의 모임](Suara Ibu Perduli)을 결성하였다. 자카르타와 주변 지역의 여성단체들과 함께 만들어진 이 조직은 경제위기로 인한 생활고에 대처하기 위하여, 특히 저소득층과 슬럼가의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더 나아가서는 경제 문제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는 정부의 무능력을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일반 시민들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하여 그를 비롯한 여성 활동가들은 자카르타 시내에서 시위를 하였고 이로 인해 경찰에 연행되어 재판을 받는 등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조직은 여전히 자카르타 슬럼지역 여성들의 자립을 위해 공동체 조직을 설립하고 혼자 설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단체로 건재하고 있다.

[걱정하는 어머니들의 모임]의 시위는 당시만 해도 일반 대중이 독재 정권에 반대하여 거리에 나서길 꺼려하던 상황에서 ‘어머니’들의 단합된 용기를 보여주는 것이었고, 중산층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빈곤층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는 계급간 연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최근에 그녀가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포르노금지법에 대한 반대 운동을 벌이면서부터 였다. 인도네시아의회에서 이슬람정당인 '정의복지당'의 지지로 포르노금지법이 논의되었다. 포르노금지법은 포르노를 금지시키는 것이 주 내용이 아니라, 여성을 억압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데, 예를 들어 여성은 공공장소에서 노출의상을 입을 수 없으며, 이슬람 여성들은 질밥(머리카락을 가리는 스카프)을 써야 하고 밤에 외출을 금지하는 등의 조항을 담고 있다.

그래서 여성의 사회경제 활동이 자유로운 인도네시아 사회에 큰 논란을 일으켰고, 여성단체들은 이 법안에 반대하는 연대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거리에 나서 시위를 하고, 직접 자신의 이름으로 은행계좌를 열어 포르노금지법에 반대하는 사람들로부터 모금을 시작하여 신문에 직접 3천명의 지지자 이름과 왜 포르노금지법에 반대하는가에 대해 전면 광고를 싣기도 하였다. 신문광고를 내는 생각은 일본 오키나와에서 열린 회의에 참가했다가 현지 단체들의 활동방법을 보고 배운 것이라고 한다. 그녀는 항상 생각이 열려있다. 어디에 가든 배울 것을 찾고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다.

그녀는 노출 의상을 입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가 나서서 여성이 어떻게 행동하고 옷을 입어야 하는지 관리한다는 것은 인권의 침해이며 국가의 월권행위라고 강조한다. 인도네시아는 이슬람 국가가 아니라 세속적(secular) 국가이고 이러한 국가의 정체성(identity)을 지키는 것은 그녀와 같은 시민들의 힘이라고 그녀는 굳건히 믿는다.

그녀의 자그만 체구를 보면 어디에서 그만한 힘이 나오는지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그녀는 이 땅의 어머니로서 자식들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독재와 경제위기로 인한 빈곤에 대항해서 싸우기도 하고 여성 인권을 위해 여성 단체들과 연대하여 포르노 금지법에 대항하여 싸우기도 한다. 계급이 다르고 분야가 달라도 넓은 의미의 인권을 위해 함께 연대하고 투쟁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인도네시아 여성운동이 고립되지 않고 역동적으로 지속되는 비결을 발견할 수 있다.

정은숙(위스컨신대 정치학과 박사과정, 인도네시아 국제정치전략연구소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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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연대활동에서 ‘언어의 장벽’은 빈번히 지적되어 왔다. 시민운동단체의 회의석상에서 어떤 노장 활동가가 아시아연대를 하려면 아시아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활동가가 육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렇지만 연대와 언어에 관한 이러한 도전적 주장을 접할 때 활동가들의 가장 흔한 반응은 아마도 “영어도 못하는데...”라는 회의론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은 영어부터 하고 아시아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잘못된 단계론에 입각해 있으며 아시아인들끼리 만나 영어로 소통할 때 나타나는 소외와 우스꽝스러움과 엘리트중심성에 대한 무의식에다가 모든 좋은 것은 영어권으로부터 온다는 사대주의적 경향까지 깔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반응이다. 최근 한국 사회운동에 새로운 키워드로 부상하는 ‘아시아연대’가 지정학적인 요인만으로도 한 때 유행으로 그치지 않을 장기슬로건이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수행되는 활동이라는 생각에 이르면 아시아언어의 학습은 그다지 황당한 주장이 아니라는 판단도 가능하다. 언어는 단지 기술적인 수단이 아니라 생활과 문화를 이해하는 통로가 된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어떻게 가능하냐”는 질문이 뒤따를 것이다. 아시아언어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중국어와 일본어 이외의 아시아언어를 가르치는 곳은 일부 외국어대학교밖에 없다는 비관적 여건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건국 이래 대한민국이 요즘처럼 아시아언어를 배우기 좋은 인구적 환경을 갖춘 적이 없었다는 낙관적 여건도 지적해야 한다. 약간만 노력한다면 외국인노동자나 국제결혼이주여성들로부터 일부 대학에서만 가르치는 아시아언어를 배울 수 있다. 활동가들과 단체회원들이 아시아언어를 이주민들로부터 배운다면 이주민들의 사회적 역할과 사회자본이 증대하는 또 다른 좋은 효과가 잇따를 것이다. 적지 않은 사회운동단체에서 아시아의 활동가를 초청하는 인턴십이나 교육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는데 그들로부터 아시아의 언어를 배울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초빙된 외국인활동가가 우리사회에 무언가 기여한다는 자부심도 갖게 될 것이다.

아시아언어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상당한 능력자가 존재하는 중국어와 일본어 영역을 논외로 하고 관심을 갖고 배울 필요가 있는 중요한 언어로 말레이인도네시아어를 추천한다. 동아시아의 4개국(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부르나이)에서 사용되는데다가 편리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동남아전문가인 신윤환 교수는 동아시아지역협력의 발전도상에서 공용어가 선정될 필요성을 지적하면서 말레이인도네시아어가 가장 강력한 후보언어임을 주장하며 말레이어의 위력과 미덕을 논리적으로 제시한 바 있다. ‘동아시아공동체’라는 국가주도 지역통합체를 염두에 두고 제기한 주장이지만 사회운동의 아시아연대에 적용해도 될 만한 내용이므로 아래의 글을 읽도록 권하고자 한다. 공동체의 상상과 실질적인 형성에 있어서 언어는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말레이인도네시아어를 ‘동아시아공동체’의 공식 언어로>

- 국제학술대회 “동아시아공동체 정체성함양 워크숍” 발표문(2005년 1월 30일)

- 신윤환(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권고하는 바

1. 아세안+3 또는 동아시아 정상회담은 적절한 시기에 말레이인도네시아어(앞으로는 '말레이어'라 칭함)를 동아시아공동체의 공용어로 선포해야 한다.

2. 동아시아공동체가 실현될 때 말레이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기 위한 준비로서, 아세안+3의 학술 공동체가 말레이어를 지역의 언어로 만들기 위해 연구하고 촉진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맡아야 한다.

3. 동남아시아의 국가들, 특히 말레이어가 쓰이는 세 국가(싱가포르를 포함하면 네 국가)는 말레이어의 지역별, 지방별 차이점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표준적인 말레이어를 만드는 데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

4. 동북아시아 국가들은 이 계획의 성공이 동북아인들의 전폭적인 지지에 달려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동북아 사회에서 말레이어를 대중화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영어는 왜 동아시아 공동체의 공식 언어가 될 수 없는가

5. 영어는 대부분의 동아시아인들에게 외국어로서, 동아시아의 문화를 표현할 수도 없고 동아시아의 통합성과 정체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낼 수도 없다. 만일 동아시아공동체가 영어를 유일한 공식 언어로 채택하거나 그냥 그렇게 되도록 놔둔다면 그것은 자기 부정이나 다를 바 없는 일이다. 어떠한 동아시아의 언어도 공식 언어로서의 역할을 영어보다는 더 낫게 수행할 수 있다. 그 언어는 적어도 일부분의 동아시아 문화를 담고 있을 것이며, 다른 동아시아 언어들에 연관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6. 영어는 말레이어를 포함하여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공식 언어 중 하나가 될 수는 있겠지만 '유일한' 공식 언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아세안+3 또는 동아시아공동체의 공식 언어들은 단 하나가 될 수도 있고 여러 가지가 될 수도 있다. 유럽연합의 사례와 같이, 동아시아공동체의 회원국 언어 모두를 공식 언어로 지정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런 다언어 정책은 동아시아의 통합을 위한 상징적인 의미는 지니겠지만, 강한 동아시아 정체성과 응집력을 만들고 증진시키는 데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중국어도 공식 언어의 후보에는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식 언어가 실제로 쓰이려면, 말레이어와 영어만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다.

7. 동아시아공동체의 건설은 시민사회와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기반을 쌓아야 한다. 단지 국가끼리 혹은 엘리트끼리의 공동체로는 부족하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는 지도자들의 의사 소통도 영어에 의존해서는 힘든 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계속 영어만을 공통 언佇?사용한다면, 평범한 동아시아 사람들끼리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실현되더라도 어마어마한 시간이 들 것이다.

8. 동아시아의 문명과 서구의 문명, 특히 영미 문명은 거의 관련이 없기 때문에 동아시아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는 것은 무척이나 머리 아프고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다. 지금까지 이 절망적인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동아시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돈과 에너지를 소비해 왔는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해 왔는지 생각해 보라.

9. 영어는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배우기가 무척 힘든 언어이다. 문법은 복잡하고, 스펠링은 불규칙적이며, 용법은 천차만별이다. 이 언어는 프랑스어나 독일어, 스페인어 같은 다른 국제화된 유럽의 언어들과 비교하더라도 배우기가 훨씬 힘들다.

10. 국제어로서 영어를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에스페란토와 같은 인위적인 언어들도 역시 우리의 고려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이런 언어들도 서구적인 가치와 관념, 문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에스페란토 단어의 70% 이상이 그 뿌리를 서구의 언어에 두고 있다.

11. 우리는 2004년 7월 6일-8일에 아프리카연합이 스와힐리어를 조직의 공식 언어로 채택하기로 한 역사적인 결정을 지지하고 그 결정에서 배워야 한다. 스와힐리어 사용 인구의 숫자와 비율은 말레이어보다 더 적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말레이어의 장점

12. 오늘날 아시아에서 쓰이는 수천 가지의 언어와 수십 가지의 국어 중, 말레이어는 배우기 쉬우며, 어휘가 풍부하고, 화자들끼리의 평등함을 보장해 준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또한 말레이어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사용하고 있고, 동아시아 전체로 보아도 중국어 다음 가는 사용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13. 말레이어는 오늘날 세계에서 사용되는 중요한 언어들 중에서('가장' 배우기 쉽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외국인이 배우기에 상당히 쉬운 편에 속한다. 몇 달만 학습하면 외국인도 말레이어가 모국어인 사람들과 섞여 생활할 수 있다.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들이 상대방과 대화할 때 그 상대방이 말레이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을 눈치 채면 곧바로 영어 사용을 중단하고 말레이어로 바꾸는 것을 많이 지켜보아 왔다.

14. 말레이어는 그 역사를 통해 모든 주요 문명으로부터 지식과 지혜, 미적 가치가 담긴 새로운 단어와 표현들을 풍부하게 받아들여 왔다. 현대 말레이어와 인도네시아어에는 인도어, 중국어, 아랍어, 포르투갈어, 네덜란드어, 영어에서 빌려온 단어들이 넘친다. 말레이어는 과학기술의 발달에도 계속 적응해 나갈 것이다.

15. 말레이어는 평등한 언어이다. 자바어나 일본어, 한국어와 달리 말레이어에는 계급, 정치적 지위, 나이, 성별을 불문하고 존댓말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조도 남녀 가릴 것 없이 같다.

16. 영어나 다른 서구의 언어들과는 달리, 말레이어는 전쟁과 분쟁이 아닌 평화와 화합의 언어로, 제국주의와 착취가 아닌 교류와 협력의 언어로, 지배와 헤게모니가 아닌 다문화적인 공존의 언어로 발달해 온 역사를 갖고 있다.

17. 말레이어가 아세안+3나 동아시아공동체의 공식 언어로 제안된다면 반대에 부딪칠 가능성이 가장 적으며 동아시아 국가들로부터 만장일치의 합의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아세안 내에서라면, 말레이어와 인도네시아어의 사용자가 워낙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제안에 다른 국가들이 찬성 입장을 표하기를 꺼려할 것이다. 아세안이 동북아시아를 끌어안으며 확장세를 보이고 있는 이 때, 말레이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하는 것은 동북아시아와 중국에 대해 어느 정도 균형을 잡는 역할을 할 수 있다.

18. 동아시아 인구의 3분의 2가 사용하고 있으며 엄청나게 많은 표의 문자(한자)를 보유하고 있는 중국어도 공식 언어로 고려될 만하다. 그러나 정치적인 가능성에 대해 생각한다면, 중국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하는 것은 말레이어를 채택한 다음에나 가능할 것이다. 중국어가 동아시아 공동체의 유일 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장벽을 극복해야만 한다. 첫째는 배우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둘째는 중국의 지배력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말레이어와 중국어가 같이 공식 언어로 채택되더라도, 중국어에 비해 말레이어가 훨씬 배우기 쉽기 때문에 말레이어만이 실제 쓰이는 언어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문법과 용법, 말씨의 단순함

19. 말레이어는 문법이 단순하고 발음하는 데 큰 힘이 들지 않으므로 배우기가 쉽다. 에스페란토는 일반적인 언어보다 "네 배"나 배우기가 쉽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말레이어는 에스페란토보다도 몇 배나 배우기가 쉽다.

20. 영어와 달리, 말레이어의 단어들은 스펠링대로 읽고 읽히는 대로 쓰면 된다.

21. 대륙부 동남아의 언어들(베트남어, 태국어 등)이나 중국어와는 달리, 말레이어에는 성조가 없다. 영어와 달리 음절에 대한 강세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다.

22. 대부분의 다른 언어들과는 달리, 말레이어의 동사에는 시제나 주격에 따른 어미의 변화가 없다. 자동사와 타동사의 변화는 있지만 간단하고 규칙적이다.

23. 말레이어의 명사는 복수로 변할 때 불규칙 형태를 띠지 않는다. 어느 명사나 복수로 만들고 싶으면 그 명사를 두 번 연속 말하면 된다. 그렇게 동사와 형용사, 부사를 복수형으로 만드는 것은 원래의 단어에 시적이고 다채로우며 때로 어느 한 부분을 강조하는 의미를 더해 준다.

24. 말레이어의 어순은 고정되어 있다기보다는 유동적인 편이다. 주어와 술어의 위치가 바뀌어도 되고 구(phrase)는 어느 자리에나 들어갈 수 있다. 보통 문장의 앞부분에 중요한 단어나 구가 온다. 그러나 형식적인 문어체에는 엄격한 규칙과 문법이 있어 의사소통이 혼란될 염려가 없다.

25. 구어에서는 완전한 문장을 갖추어 말하는 경우가 오히려 드문 편이다.

말레이어의 역사와 언어 지도

26. 말레이어는 한 지역의 언어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으며, 근세로부터 동남아 전역에서 모여든 무역상들의 의사소통에 쓰였다. Anthony Reid에 의하면, "마젤란의 수마트라인 노예가 1521년 중부 필리핀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을 때 필리핀 사람들이 곧바로 그 말을 이해했을 가능성이 크고, 또한 거의 200년 후에, 민다나오에서 말레이어를 배운 Dampier의 영국인들이 그것을 베트남 최남부에 있는 Puolo Condore에서 써먹었을 수도 있다."*

27. 신생국의 공식 언어로서의 말레이어의 경쟁력은 말레이어의 한 부류가 국어로 인가된 아세안의 네 국가, 즉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와 인도네시아어를 사용 언어로 인정한 동티모르에서 이미 충분히 입증되었다.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 동티모르에서는 인구의 소수만이 말레이어를 모어로 사용한다는 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자바어, 싱가포르에서는 중국어, 동티모르에서는 테툼어가 더 널리 쓰인다.

28. 인도네시아의 성공 사례는 특히 본받을 만하다. 인도네시아가 독립 이후 말레이어를 국어인 '바하사 인도네시아'로 채택한 이후 60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말레이어 사용 인구는 몇 백만에서 2억 이상으로 늘었다. 그 전에 인도네시아에서 말레이어는 리아우(Riau) 지역과 해안가에 뿌리를 둔 소수 언어에 불과했다. 단지 정부의 정책만으로 '바하사 인도네시아'는 급속히 전국적으로 퍼질 수 있었다. 쉬운 언어라는 타고난 장점이 이만큼의 성공을 이끌어 낸 중요한 요인이었다. 비교해 볼 때, 필리핀에서의 영어나, 그보다는 낫지만 싱가포르에서의 영어가 인도네시아에서의 '바하사 인도네시아'만큼 성공했는지는 의문이다.

29. 2차대전이 막 끝났을 무렵, 말레이어 사용 인구는 다 합쳐 봤자 천만 명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3억 명이 사용하고 있다. 말레이어는 2차대전 이후 세계에서 가장 빨리 퍼진 언어 중 하나이다. 지금 말레이어 사용 인구는 중국어, 영어, 힌디/우르두어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다.

30. 태국, 필리핀, 캄보디아, 베트남 등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에도 말레이어에 가까운 언어를 사용하는 몇몇 소수민족들이 있다. 몬-크메르어와 베트남어도 말레이어가 속한 오스트로네시안 언어군에 속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언어 체계는 동남아 국가들에서 짧은 시간 내에 말레이어를 대중적인 외국어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31. 만 명이 넘는 중국계 인구가 말레이어를 사용하는 국가에 뿌리박고 살거나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Chinese Malay" 혹은 "Baba Malay"라 불리는 그들끼리의 말레이어를 발전시켜 왔다. 지금은 일본인, 한국인 체류자들도 만 명이 넘는다. 이러한 동아시아인들은 말레이어를 동북아에 옮기고 퍼뜨리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32.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는 많은 수의 아랍인과 인도인의 자손, 이민자들, 사업가들이 자주 방문하거나 거주하고 있다. 이 두 나라의 무슬림 인구는 서아시아(중동)보다 더 많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문화는 인도, 아랍 세계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접촉과 전통은 말레이어가 동아시아의 경계를 넘어 진정한 아시아의 언어로서 아시아 전체에 퍼져 나가고, 미래에는 지구촌의 언어로 발돋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전망

33. 하나 이상의 동아시아 공용어를 갖는 것은 강한 동아시아 정체성을 만들어내고 증진하며, 언젠가는 동아시아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34. 말레이어를 공용어로 인정하는 것은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통합에 놓인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차이를 좁히고 메우는 데 기여할 것이다.

* 번역: 서지원 (오하이오 주립대 박사과정)

전제성(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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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파푸아의 양심수 유삭 파카쥐(Yusak Pakage)와 필립 카르마(Filep Karma)의 석방을 촉구한다



사진협조: 경계를 넘어
인도네시아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웨스트 파푸아의 양심수 유삭 파카쥐와 필립 카르마는 2년 전 오늘, 웨스트 파푸아의 국기인 모닝스타를 게양했다는 이유만으로 반역죄로 징역 10년, 15년형을 선고받아 현재 수감 중에 있습니다.

웨스트 파푸아는 43년 전 인도네시아로부터 불법 점령당하면서 온갖 인권침해와 자원 수탈을 당하고 있으며, 이에 웨스트 파푸아 사람들은 자결권 보장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12월 1일은 웨스트 파푸아의 독립선포 기념일이자 유삭과 필립이 체포된 날로, 이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국제 공동행동에 한국의 인권사회단체들도 함께 하였습니다. 12시부터 3시까지 인도네시아 대사관 앞에서 일인시위와 항의 엽서 쓰기를 진행하였습니다.

<공동성명>

우리는 분노없이 43여 년간에 걸친 웨스트파푸아의 식민사를 말할 수 없다.

12월 1일 오늘은, 인도네시아에 의해 27번째주로 강제 편입된 웨스트 파푸아가 네델란드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날이다. 또한 유삭파카쥐와 필립 카르마가 파푸아의 자결을 요구하며 국기 빈땅끄조라를 게양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지 2년째 되는 날이다. 그들은 반역죄로 각각 10년 형과 15년 형을 선고받고 현재 자야뿌라 감옥에 수감중이다.

인도네시아는 지난 1962년, 네델란드로부터 독립을 준비중인 웨스트 파푸아를 무력으로 침공했다. 풍부한 자원을 갖춘 파푸아 영토를 강제 편입하려는 인도네시아의 요구와 미국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닿으면서, 파푸아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6년의 인도네시아 지배와 파푸아 독립여부에 대한 국민투표 실시를 내용으로 한 뉴욕협정이 1962년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 사이에 체결됐다. 1969년 진행된 국민투표 ‘Act of Free Choice’는 유엔의 묵인 하에 당초 협정에서 명시한 성인 남녀 전부가 아니라 인도네시아 정부가 선발한 친인도네시아인 1022명만이 참여했다. 선발된 사람들은 온갖 협박에 시달리며 ‘우리는 인도네시아를 원한다’는 선택을 강요당했다. 그 뒤 파푸아는 공식적인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인도네시아는 1969년 식민 지배를 시작한 이래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파푸아를 통제해왔다. 이 과정에서 살해당한 파푸아인만도 10만 명. 인도네시아군은 광범위한 폭력과 살인, 고문과 납치, 강간 등을 자행했고, 군이 지나간 마을은 초토화됐다. 250여 개의 부족이 가지고 있던 문화와 언어, 공동체가 파괴됐으며 땅은 개발이란 명목으로 파헤쳐졌다. 대대적인 학살과 이주정책의 결과 현재 파푸아 거주자 중 절반이 이주자들이다. 파푸아 아이들은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 영양 부족과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하여 파푸아 아이들 중 절반이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영아와 산모의 사망률은 최고 수치에 이른다.

하지만 파푸아인들은 지난 43년간 단 한순간도 자유를 향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파푸아인들의 거센 저항에 인도네시아 정부는 2001년 특별자치법을 제정, 파푸아의 특별자치와 독립의회 구성, 국기게양 등을 인정했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군대는 파푸아 최고 의회 의장이었던 데이스 엘루이(Theys Eluay)를 살해했으며, 반땅끄조라를 게양한 사건과 관련해 많은 사람들을 사살했고, 구속했다. 자결을 촉구하는 집회에 참여했던 여성들은 성폭행당한 후 수장됐다.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광기의 폭력이 아직도 웨스트 파푸아 한복판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누가 이 땅을 침략할 권한을 주었는가? 누가 이들을 학살할 권한을 주었는가? 누가 자결과 인권을 감옥에 넣을 권한을 주었는가? 파푸아인들의 삶을 결정할 권한은 오직 파푸아인들에게만 존재하며, 그들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우리가 할일은 ‘점령과 간섭’이 아닌 연대와 그들의 자결을 쟁취키 위한 국제적 실천뿐이다.

파푸아인들은 모멸스런 삶과 죽음의 공포를 견디며 오늘도 자결을 위한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감옥에 갇힌 필립과 유삭은 감옥 안에서도 빈땅끄조라를 옥상에 내걸며 투쟁하고 있다.

우리의 결단이 늦어진다면 파푸아의 암운을 걷어내는 것은 무망할 것이다. 지금 파푸아인들은 묻고 있다. 인도네시아 당신들의 행위는 정당하냐고. 정의로운 국제사회는 어디에 있냐고.

웨스트 파푸아에 자결을!

양심수 유삭 파카쥐와 필립 카르마에게 자유를!


2006. 12. 1


경계를 넘어/ 구속노동자 후원회/ 국제민주연대/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 나와우리/ 민가협/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인권연구소'창'/ 인권운동사랑방/참여연대/팍스아시아나/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팔레스타인평화연대



<배경설명>

사진협조: 경계를 넘어


웨스트 파푸아라는 나라를 들어보셨나요?

12월 1일은 웨스트 파푸아 사람들이 그들의 독립일로 선포한 날입니다.

또한 2004년 두 명의 파푸인이 국기 게양을 이유로 체포되어 10, 15년을 선고 받은 날이기도 합니다.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파푸아 사람들은 이리안 자야(Irianjaya)로 바꿔 불려왔고 동쪽 파푸아 뉴기니와 마주하고 있는 서쪽 지역, 웨스트 파푸아에서 살고 있습니다. 네델란드의 식민지였던 웨스트 파푸아는 1952년 자결권을 인정 받은 이후, 1961년에는 의회를 구성, '웨스트 파푸아'라는 국가명과 모닝스타라는 국기를 정했습니다.

그러나 웨스트 파푸아 영토를 강제 편입하려는 인도네시아의 무력적 탈환 시도와 미국 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한 개입, 그리고 유엔의 무책임한 각본에 의해웨스트파푸아의 독립의지와 약속은 좌절되었습니다.

독립이 좌절된 이후에도 계속된 웨스트파푸아인들에 대한 인도네시아 정권의 인권침해와자원 수탈, 웨스트파푸아 저항 세력에 대한 인도네시아 정부의 무력진압은 수 많은 파푸아사람들을 그들의 희생과 고통을 감수하며 살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독재자 수하르토가 물러나고 와히드가 대통령이 되면서 웨스트 파푸아 사람들에게도그들의 독립을 상징하는 '모닝스타'국기 게양을 인정받았고 파푸아 사람들은 독립 승인을 위해 최고 의회를 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파푸아 사람들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정치 공간이 열리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군대는 국기 게양 사건과 관련해 수백 명을 사살했고, 파푸아 최고 의회 의장이었던 데이스 엘루이(Theys Eluay)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후에도 동티모르 학살에 연루된 인물들을 경찰 간부로 임명하고 친 인도네시아 민병대를 구성하는 등 웨스트 파푸아에 대한 억압적 통치 구조를 유지하려는 시도는 계속 되었습니다.

한편, 인도네시아 정부는 2001년 웨스트파푸아에 특별자치를 인정하는 법을 통과시켰고, 이와는 모순적인 웨스트파푸아 3개 도 분리 법안을 독단적으로 시행하기에 이릅니다. 최근까지도 웨스트파푸아 사람들에 대한 인도네시아 정부의 억압정책과 탄압은 계속 되고 있으며, 2004년 12월 1일 독립일선포를 기념하는 자리에서 국기인 모닝스타를 게양했다는 이유만으로 유삭과 필립이 체포당해 10년과 15년 형을 선고 받아 그들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국기 게양이라는 이유만으로 10년과 15년을 선고 받았다는 것은 지금 웨스트 파푸아 사람들이 처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파푸아 양심수 유삭과 필립을 석방하라

그래서 웨스트 파푸아의 자유와 독립을 원하는 세계 각국의 국제연대단체들은 12월 1일 독립선포일을 맞이해 유사크와 필리페의 석방을 요구하는 국제 공동 행동을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단순히 두 사람의 석방을 요구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웨스트 파푸아에서 매일매일 일어나고 있는 인권침해와 자원 수탈, 그리고 군사화를 통한 저항 세력에 대한 인도네시아 정부의 폭력적 지배에 항의하는 의미가 담겨 있기에 이번 국제 공동 행동에 대한 여러분들의 관심과 지지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웨스트 파푸아 사람들의 자유에 여러분의 자유를 보태주십시오.

웨스트 파푸아 양심수 석방을 촉구하는 한국단체들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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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생활하며 공부하는 건 아주 멋진 경험이다. 고향에서는 결코 체험할 수 없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해주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를 여행한다는 것 자체가 책이나 대학에서 배울 수 없는 지식을 얻게 해준다.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 생활 양식을 직접 배우며 경험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 한 번 시작하면 쉽게 그칠 수 없기도 하다. 그래서 2년간의 유학을 계획하며 한국에 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오래 머물기도 한다.

그러나 어려운 점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오랜 기간 외국에 체류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위협이라 하면 아마도 문화 충격일 것이다. 1958년 인류학자 칼베로 오베르그에 의해 최초로 정의된 '문화 충격'이란 완전히 새로운 문화적 환경에 처한 인간이 느끼는 장기간의 심리적 스트레스를 뜻한다. 예를 들어 내가 경험한 문화 충격은 한국에서 친구를 사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친구가 되는 과정이 다른 나라와는 다르기 때문에 친구를 사귀는 게 어렵다.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친구 관계가 고등학교 또는 그 전의 학교 동창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유일한 예외는 대학 신입생 때라고 할 수 있다. 아는 친구 한 명이 대학에서 1학년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데, 이미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여학생이 수업을 듣는 이유가 궁금했다고 한다.

"재미없지 않아?"

"친구 사귀려고 있는 거예요."

공부를 하기 위해 수업을 듣는 게 아니라는 이런 류의 태도는 대학 신입생들 사이에서 매우 보편적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나이와 상관없이 쉽게 친구를 사귄다. 스스로를 직접 소개하며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소개로 사람을 만나거나 아니면 같은 반 또는 같은 모임에 속해 있다는 상황에 의해 사람을 사귀는 게 일상적이다.

이러한 점은 한국인들이 처음 만나는 사람들을 대할 때 보이는 어색한 모습에서 역력히 찾아볼 수 있다. 생전 처음 만난 한국인이 나에게 불쑥 "어느 나라에서 왔어?"라고 묻는 경우는 셀 수조차도 없다.

하지만 "안녕", "어떻게 지내"라고 묻는다거나 "버스가 언제 올까", " 요즘 날씨가 좀 이상하다 그렇지?" 와 같은 말을 건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왔다고 대답을 하면 그 뒤 연결되는 질문이 없거나 대화를 계속하려는 노력도 없이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갑작스럽게 끝나고 만다.

물론 한국인 친구를 사귀는 게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친구 사귀기가 많이 힘들고 친구의 친구라던가 선생님이었다던가 하는 인맥을 통해야 수월해진다는 거다. 이 같은 차이의 원인이 무엇일까 궁금하지만 이것은 사회학 박사 논문의 주제로 다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로선 그 차이를 인정할 뿐이다.

* 유완또(Yuwanto)는 인도네시아 중부 자바의 주도 스마랑(Semarang)에 있는 디뽀네고로(Diponegoro) 국립대 정치학과 교수다. 한국정치로 논문을 쓰기 위해 서강대 국제대학원에 유학한 지 4년 되었으며, KBS 국제방송국에서 자신의 한국체험을 인도네시아어로 방송하는 일도 하고 있다.
유완또(인도네시아 교수, 한국 유학생)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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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28쪽

imparsial은 인도네시아 인권감시단체입니다.

<목차>

- Police Brutality in Indonesia’s Transitional Era

- History of Police and the Emergence of Militaristic Culture in Indonesian Police

- Ethics on Conduct and United Nation Basic Principals in Using Force and Firearms By Law Enforcement Officials

- Analysis on Police Brutality in Transition Period

- Conclusion

국제연대위원회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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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인도네시아 최고의 인권운동가로 추앙받던 무니르에 대한 독살사건을 한국 최초로 소개하는 글이다. 2004년에 벌어진 무니르 독살사건은 인도네시아를 발칵 뒤집어 놓았지만 쓰나미 사태에 묻혀버리고 말았으며 한국에는 단 한 건의 보도도 이루어진 적이 없다. 10년간 무니르와 함께 일했던 동지 풍키 양이 처음으로 무니르에 관한 글을 한국의 독자들을 위해 작성해 주었으며 (사)한국동남아연구소 총무부장인 전제성 박사가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번역문을 작성해 주었다. 이 글이 위기에 직면한 인도네시아 인권활동가들에 대한 한국 사회운동의 연대행동 촉진에 소중한 자원이 되길 기대한다.

<인도네시아의 인권을 위한 장기항전과 무니르(Munir)의 삶>

글쓴이: 풍키 인다르띠 (Poengky Indarti)/ 인도네시아 인권감시단체 임파르샬 (Imparsial) 부소장

*민주화기념사업회 간행물 [기억과 전망] 2005년 가을호에 실림
국제연대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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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정부는 아체에서의 군사작전과 민간인학살을 즉각 중단해야 합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아체에서의 군사작전과 민간인학살을 즉각 중단해야 합니다”

더불어 객관성이 보장될 수 있는 인권실태조사를 실시하는 한편

아체 주민의 의사를 존중하여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바랍니다.

최근 인도네시아 정부는 지난 1년간 아체주에 내려져있던 계엄령을 해제하고 민간비상상태(civil emergency)로 그 수위를 낮추겠다는 발표를 한 바 있습니다. 오랜 군사작전과 계엄령으로 인한 고통이 지속되어온 아체 지역에 있어 이는 환영할 만한 계획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민간비상상태에서도 군대를 상주시키며 군사작전을 계속 수행하도록 조치한 것은 매우 실망스러운 일입니다. 지난 1년간 계엄령 하에서 군부는 아체주 내에서만 총 5,000여명의 자유아체운동(GAM) 조직원들을 사살, 체포, 항복 등의 형태로 진압하였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GAM의 주요 지도부 인사들은 한명도 체포하지 못한 상태로서, 이들을 완전히 뿌리뽑고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군사작전이 지속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정부의 주장입니다.

인도네시아 서북쪽 끝에 위치한 인구 400여만의 아체주는 풍부한 천연자원을 갖고 있는 땅으로서, 이 지역 개발을 통해 얻는 수익이 인도네시아 정부 재정수입의 13%를 차지할 정도로 크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수익은 대다수가 중앙정부에 귀속되거나 주정부 관리의 주머니로 들어갈 뿐 아체 주민들에게는 아무런 혜택을 주지 못했습니다. 개발로 인한 농지파괴와 노동력 착취로 인하여 주민들은 오히려 심각한 빈곤과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형편입니다.

한편, 1976년 기존의 민족독립운동을 계승하며 이슬람계 무장독립세력 GAM이 결성된 이후 인도네시아 정부군은 다양한 군사작전을 동원하여 이들을 진압해왔습니다. 1989년-1998년 사이에는 강압적 군사작전을 통해 10,000여명의 사상자를 내었을 뿐 아니라 GAM과 무관한 민간인들을 무장조직에 가담하였거나 지지하였다는 혐의로 고문, 강간, 납치, 살해하거나 학교 등 주요 시설을 포함, 수많은 마을을 파괴하는 등 가혹한 인권유린 행위를 지속해 왔습니다.

수하르토 전 대통령 하야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된 정부와 GAM 사이의 평화협상은 이렇듯 오래 지속되어온 아체 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그러나 2003년 5월 그 협상이 결국 결렬됨으로써 아체는 다시금 준전시상태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GAM 소탕을 내세운 인도네시아 정부군에 의해 계엄령이 선포되고 모든 주요 도로와 무역이 통제되었을 뿐 아니라 군대의 지휘에 따르지 않은 어떠한 생업활동도 GAM을 지원하는 행위로 간주되어 처벌되어습니다. 각종 언론과 인권기구의 활동마저 철저하게 통제됨에 따라 정확한 실태파악도 어려운 상태입니다. 하지만 오랜기간 아체 지역을 감시해 온 인권단체들은 조심스러운 보고서들을 통해 계엄령 이후 발생한 희생자의 수치가 앞서 군부의 발표보다 훨씬 클 뿐 아니라 그 대다수는 GAM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지 않은 무고한 민간인들이라며 아체 지역에서의 심각한 인권유린 상황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아체에는 GAM과 같은 무장투쟁을 통하여 독립국가를 수립하기를 원하는 이도 있지만 자치권을 보장받으며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영위해나갈 수 있는 체제만을 원하는 이도 있습니다. 이러한 독립 혹은 자치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주민들 스스로에게 그 결정권이 주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정치적 결정 이전에 인도네시아 정부군이 아체주에서 자행해 온 심각한 인권유린과 파괴 행위를 즉각 멈추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주요 국제인권기구 및 활동가들의 접근을 허용한 상태에서 객관성이 보장될 수 있는 인권실태조사를 실시하는 한편 아체 주민의 의사를 존중하여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따라서 지구상 모든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군사행위와 그로 인한 민간인학살 등의 인권유린 문제에 대하여 우려하는 한국의 여러 개인과 단체들은 아체주에서 계엄령과 함께 본격적인 군사작전이 개시된 지 꼭 1년이 지난 오늘, 인도네시아 정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구하는 바입니다.

1. 인도네시아 정부는 아체 지역에서의 군사작전과 민간인학살을 즉각 중단하라!

2. 인도네시아 정부는 국내외 인권기구 및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라!

3. 인도네시아 정부는 GAM과 더불어 군사적 행동이 아닌 평화적 수단을 통한 분쟁종식이 절실함을 인정하고 속히 평화협상을 재개하라!

이러한 요구를 전달하는 한편, 이 성명에 동참한 우리 개인과 단체들은 이후 아체 지역을 포함, 심각한 인권유린과 민간인학살이 자행되는 전세계 각지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인권과 평화의 가치를 담은 감시의 목소리를 모아낼 것을 다짐합니다.

<참여자>

시민사회단체

국제민주연대 / 비폭력 평화물결 / 생명평화 마중물 / 사이버NGO자료관 / 아시아의 친구들 / 팔레스타인 평화연대 / 참여연대 / 함께하는 시민행동

개인

김규환 (버마민주화를 지지하는 사람들) / 김 신 (Asia Human Rights Community Initiative) / 도임방주 / 마웅저 (버마민주화를 지지하는 사람들) / 박은홍 (성공회대학교 아시아NGO정보센터) / 조효제 (성공회대학교 NGO대학원) / 조희연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국제연대위원회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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