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노동조합으로부터 온 편지
이명박 대통령 한인공장 방문 유감

지난 3월 6일부터 8일까지 이명박 대통령 부부가 인도네시아를 국빈방문한지 열흘이 지난 뒤에 인도네시아독립노조연합(GSBI: Gabungan Serikat Buruh Indonesia) 위원장 얀띠(Emelia Yanti MD. Siahaan)로부터 이메일 편지를 한 통 받았다. 그 내용은 대통령 일행의 한국인 소유 공장 방문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는 것이었다.

이명박 대통령 부부는 3월 7일 오후에 한인투자 ‘최고의 기업들’ 중에 하나라며 보고르(Bogor)의 의류공장을 방문하였다. 한국인 소유의 이 공장은 2천여 명의 현지인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주문자상표부착방식으로 Le Coq Sportif를 비롯한 유명회사의 스포츠의류를 제작하여 유럽시장에 수출하는 기업이다. 그 공장에서 대통령 일행은 약 한 시간 반 동안 사장을 만나고 생산품을 소개받고 작업장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노동조합활동가 얀띠는 이 회사가 “결사의 자유 위반과 기진맥진한 작업조건에 있어서 최고의 기업”이라며 대통령의 방문에 유감을 표하는 성명서를 세계도처의 활동가들과 학자들에게 발송했다.

2003년에 이 회사는 노동조합이 결성되자 많은 수의 노동자들을 해고시켜서 국제소비자운동단체들로부터 항의서한을 받았던 기업이었다. 인도네시아 노사관계를 조사하고 있던 필자도 사건 발생 직후에 그 소식을 현지에서 소상하게 들은 바 있다. 당시에 필자가 만났던 해고자들의 진술에 따르면, 이 회사의 경영자는 노조가 결성되자 노조간부 4명에게 가택대기 처분을 내렸고 이에 항의하는 파업이 발생하자 168명을 집단 해고하였다. 노조원들은 사장과의 직접 협상, 해고자 원직복직, 인사과장 해고, 노동조합 인정 등 4개항을 요구하였으나, 공장장은 “사장과 만나자는 것은 대통령을 만나자는 것”이라는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해고자들은 지역노조의 도움을 받아 영문으로 항의성명서를 작성하여 해외각지로 발송했다. 이에 호응하여 깨끗한 옷 입기 캠페인(CCC; Clean Clothes Campaign), 노동권콘소시엄(Workers’ Rights Consortium) 등 유력한 국제소비자운동단체들이 홈페이지 전면에 이 기업 사례를 소개하고 항의서한을 보내는 운동을 전개하자 기업의 이미지 손상은 물론이고 한국인의 국제적 이미지까지 손상시킬 것이 우려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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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 인도네시아를 국빈방문중인 이명박 대통령은 한인 투자 의류업체를 방문했다. ⓒ뉴시스

그런데 이 회사의 상황은 “그 후 여러 해가 지났지만 나아진 것이 없다”고 얀띠는 주장하였다. 이 회사는 생산목표량을 채우지 못한 노동자는 그것을 완수할 때까지 잔업수당 없이 남아서 일해야 하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으며, 2007년에도 바이어들에게 작업조건에 관한 편지를 보냈다는 이유로 두 명의 노조간부를 해고한 바 있고, 회사에 존재하는 두 노조에 대한 편의제공을 달리하여 상대적으로 전투적인 노조를 차별하는 등의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얀띠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편지를 끝냈다. 제품의 질이 향상되고 수출 물량이 증대하여 그 기업이 찬사를 받는다면 그 제품을 생산해낸 현지 노동자들이 마땅히 칭송받아야 되지 않겠는가? 만약 그 기업이 결사의 자유를 비롯한 노동권을 침해하는 기업이라는 점을 알았더라도 한국의 대통령은 이 한국인 기업가를 여전히 자랑스러워하고 칭송했을까?  

이명박 대통령은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신아시아 외교’를 천명하였다. 아직 그 내용이 명료하지는 않지만, 현지 한인기업 방문 사례를 통하여 새로운 아시아 외교의 편향성을 우려할만한 징표를 읽어낼 수 있다. ‘추한 한국인’ 이미지가 제기되던 1990년대 중반이래로 지난 10여 년간 한국의 시민사회운동단체들은 한국인의 해외투자기업에서 벌어지는 인권침해실태를 모니터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덕분에 현지사회에 대하여 한국인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개선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고 국내적으로는 자원의 이용과 경제적 이익에만 골몰하지 말고 그곳에 사는 이웃들을 생각하자는 의식을 확산시켰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런 노력은 한국외교 일선에 공유되지 않았었나 보다. ‘국가의 편에서’ 현지의 유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외교상의 간단한 기술을 제안하자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잊지 말고 추가하라고 권하고 싶다. ‘기업의 편에서’ 방문 후보로 추천되는 그 현지 한인기업이 인권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는가? 이런 식의 질문이 ‘신아시아외교’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가 되기를 바란다.


전제성(열린전북 편집위원,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이 글은 [열린전북 5월호]에 기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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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의 '민주주의 재건하기'
- 다시 생각하는 민주주의


이미 여러 갈등을 마주하고 있는 네팔에서는 정당들 사이에 또 하나의 힘겨운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새 헌법을 제정하는 데에 있어 따라이(Terai) 자치 문제와 바람직한 연방제 구조에 대한 것이다.

한편, 이는 다른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로도 여겨져 왔다. 과거 중앙권력은 오랜 세월 많은 인종집단과 네팔의 카스트 계급을 지배했고, 때문에 연방제를 통해 중앙으로부터 이런 권력을 제거하고, 지역차원에서 삶의 질 향상과 공정한 분배를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방제가 어떻게, 그리고 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 조사는 거의 발견할 수 없다. 나는 새 헌법이 시민 참여를 보장하고 권익을 보호하고 증진할 수 있는지 최소한의 확신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를 위한 어떤 준비도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주요 정당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헌법을 통한 발전된 형태의 민주주의와 지속적인 평화구축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네팔공산당이 단일정당 독재로 가지 않고,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겠다고 한 그들의 약속을 지키리라 생각한다). 이 목표를 위해 첫째로 어떤 이유로 네팔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한 세심한 조사와 분석, 평가가 필요할 것이다. 이미 존재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객관적이고 철저한 평가 없이 앞으로 다가올 민주주의가 성공적일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1990년 서구 형태의 자유 민주주의를 채택한 이래 네팔은 현재 더 나은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역사적 순간에 서있다. 그러나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할 지에 대한 질문에 정당들은 답하지 못하고 있다.

사무엘 헌팅턴은 냉전의 종식은 '역사의 종말'을 위한 조건과 서구 형태 민주주의의 승리를 낳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유 민주주의 모델이 적절한 환경과 실행 속에서 번창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많은 사회과학자들은 냉전 후 자유주의 관점에서 제기되었던 좁은 의미의 자유 민주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들은 자유 민주주의는 이상을 성취하지 못했고, 따라서 도전에 부딪쳤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또한 서양에서 이식된 민주주의가 세계 곳곳의 다른 문화와 사회에 적합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는 네팔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를 네팔에 도입했을 때, 자본의 세계화 앞에서 신자유주의 시장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초래된 것(몇몇 긍정적인 면들을 제외하고)은 낮은 수준의 민주주의였고, 정치는 단순한 게임의 수준에 머물렀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초기의 낙관론은 나라가 민주화에 접어들면서 시작된 정부와 네팔공산당의 갈등의 심화 속에서 사라져 갔다. 하지만 단순히 이 현상만이 과거의 민주주의 실패 또는 결점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원주민 그룹의 문제를 제기하는데 실패했고, 권력정치는 이를 방치하며 커져가고 있다. 그리고 공공정책을 형성하고 실행하는데 일반시민의 참여를 포함하는 전통적인 민주주의의 능력에 대한 의구심이 여전히 존재한다.

네팔의 선출된 대표들은 시민의 삶과 사회에 관련된 일들에 대해 폭넓은 대중의 참여 없이 모든 것을 자신들이 결정했다. 결과적으로 네팔은 평등, 정치적 자치권, 책임, 경제적 평등 등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채 처음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물론 행정·입법·사법의 분리, 자유공정 선거, 그리고 자유로운 정치 정당, 자유로운 기관들의 연합 등 시민사회의 성장과 함께하는 긍정적인 면들이 있다. 그러나 네팔과 같은 나라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엘리트에 의한 권력정치가 아니라, 소외된 사람들의 이익, 소수그룹, 젠더 이슈 등을 위한 정치적 평등을 기본으로 하는 대중정치로 이해되어야 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과거에 수행되었던 기관 개혁과 정책 실행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평가해야하는 시점에 와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존재하는 민주주의 자체가 나라를 위해 적합한지를 평가하고, 그렇지 않다면 어떠한 형태의 민주주의가 적합할지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이다. 이렇게 민주주의의 형태와 생각을 재언급하는 나라가 네팔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런 흐름은 세계 곳곳에서 '다시 생각하는 민주주의', 또는 '급진적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발견된다.

네팔은 정책결정과정에서 더 넒은 시민참여가 이루어져야 하고, 공공이슈에 대한 시민의 역할 또한 확신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신중하고 지속가능한 민주주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이전 관심은 엘리트 권력정치에,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한 전제조건들의 확인과 실행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시민의 삶과 관련된 이슈에 최대한의 시민참여를 보장하는 데에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네팔의 민주주의, 개발, 평등 그리고 평화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들 중 하나는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문화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네팔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대부분 개념적이고 규범적으로 한정되어 왔다. 이는 우리의 초점이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문제와, 정확한 조건과 민주주의에 대한 다른 대안을 무시하는, 특수하고 제한된 형태의 민주주의를 위한 선행조건을 찾아내는데 맞추어졌기 때문이다. 참된 민주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 우리의 정치적, 학문적 전문가들은 민주주의를 넓히고 굳건히 하는 대안적 장치들의 힘과 요소들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의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시민운동 세력(People's Movement II)에 의해 조직되고 창조된 행동중심은 네팔에서 민주주의를 사회화하는 데 유용할 수 있다. 정치세력들, 시민사회, 학계, 언론 그리고 다른 관계자들의 참여를 바탕으로 이 의제에 대한 담론은 네팔에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기초를 건설하는데 필수적일 것이다.


 

지반 바니야 / 서강대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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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퇴하는 동북아 인권, 연대로 막자"
점차 커지는 '동북아 연대'의 필요성

현재 동남아시아 인권단체들 사이에서는 아세안 (동남아 국가연합, ASEAN) 내에서 시민 사회의 목소리를 높이기 위한 논의가 한창이다. 아세안이 처음 출범한1967년에는 아세안의 주된 관심이 단지 안보와 경제 개발에만 집중되었지만 1993년 비엔나 세계 대회를 거치면서 아세안 정상들은 비엔나 인권 선언을 기반으로 아세안 내에서도 인권 관련 기구를 설립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견을 모았다.

그렇지만 그 이후, 1998년 하노이 Action Plan에 이르러서야 아세안 내에서의 인권에 대한 논의가 다시 시작된다. 이후 2004년, 비엔티엔 Action Programme 에서 특히 여성과 아동의 인권과 관련해 구체적으로 아세안 내부의 인권 기구 설립에 관한 논의가 이뤄진다. 이와 관련해 2004년, 아세안 내부에서는 아세안 지역의 여성 폭력 금지를 위한 선언 (Declaration on the Elimination of Violence Against Women in ASEAN Region), 여성과 아동에 초점을 맞춘 인신매매 금지 선언(ASEAN declaration against Trafficking in Persons particularly Women and Children),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의 권리 증진과 보호를 위한 아세안 선언(ASEAN Declaration on the Protection and Promotion of the Rights of Migrant Workers)과 같은 인권 관련 선언들을 제정했다.

2007년에 이르러 아세안 국가들은 드디어 아세안 헌장(Charter)을 채택하였다. 무엇보다도 아세안 헌장 제 14조는 인권을 보호하고 증진시킨다는 아세안의 설립 목적에 걸맞게 아세안 인권기구를 설립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비록 헌장을 만들어 가는 과정은 모두 비공개로 진행되었고 따라서 시민사회도 실질적 기여를 할 기회가 없었기에 결과적으로 형식적인 인권 및 민주주의에 대한 언급과 신자유주의에 중심을 둔 헌장이라는 문제점이 지적되었지만 헌장 제14조는 ASEAN Human Rights Body를 설립하는 기반이 되었다.1) 현재 ASEAN human rights body는 2009년 12월 설립을 앞두고 있으며 아시아 시민사회들은시민사회의 목소리를 그 안에 담기위해 적극적인 로비활동을 벌이고 있다. 특히 2007년 초 출범한 아시아시민사회연대회의(Solidarity for Asian People's Advocacy·SAPA) 산하 아세안 실무그룹(Working Group on ASEAN)에서는 ASEAN Human Rights body의 설립을 담당하고 있는 ASEAN High Level Panel 그룹에게 시민사회의 요구사항을 담은 문서를 2008년 11월 7일에 제출하기도 했다.

이처럼 동남아시아 시민 사회들은 아세안 설립 과정에 있어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목소리를 개진하며 그 안에서의 인권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 끊임없는 연대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렇지만 이에 비해 아시아 내에서 동북아시아 시민사회의 연대의 목소리는 약한 편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포럼아시아 동북아시아 팀에서 다루고 있는 국가들은 몽고, 남한, 북한, 일본, 중국, 대만, 티벳 이렇게 총 8개 국가이다. 동북아시아 지역 연대가 약한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그중에는 아세안과 같은 지역적 기구의 부재, 대부분의 국가들이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언어 소통의 문제, 지역 내에서의 인권 갈등 (예를 들면 중국, 티벳 그리고 대만), 그리고 시민사회들 사이의 정보 및 소통 부족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동남아시아보다 동북아시아는 인권 상황이 조금 더 낫다는 인식, 그리고 경제적으로 다른 국가들 보다 조금 더 풍족하니 당장 급한 불은 껐다라는 생각이 동북아시아에 대한 지속적 관심과 연대를 부족하게 하는 주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제 더 이상 한 국가의 문제가 그 국가의 인권 문제로만 끝나지 않는만큼 동북아시아 내에서도 시민사회의 연대가 필요하다. 더욱이 아세안과 같은 지역적 기구가 부재하는 만큼 시민사회간의 연대의 중요성이 더 강조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촛불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동안 일어났던 표현의 자유 침해 문제는 현재 대만에서 경찰들이 Wild Strawberry Movement에 참가한 인권옹호자들을 진압하는 모습에서도 똑같이 발견되고 있다. 또한 현재 한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인터넷 상에서의 표현의 자유 억압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중국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으며 프라이버시 침해의 문제도 한국, 중국, 대만, 일본 등 여러 동북아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동북아 지역은 이주자 문제에 있어서도 송출국과 유입국이 공통적으로 존재하는만큼 이에 대한 시민사회의 연대적 고민이 더욱더 필요하다.

2008년은 동남아시아보다 더 안정적이라고 생각되었던 여러 동북아 국가들에서 인권이 후퇴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던 한해였다. 일본에서만해도 적어도 15건의 사형이 행해졌으며 몽고에서는 7월에 있었던 부정 선거 반대 시위에서 4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우리나라에서도 촛불 시위동안 수많은 인권옹호자들이 부상당하고 연행되는 일들이 일어났다.

인권 옹호자로써 각자의 나라에서 열심히 활동하며 국내 인권상황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지만 이와 동시에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인권 상황에도 항상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지며 연대의 목소리를 보내는 것도 중요하다. 단순히 공동 성명을 발표하고 일회성으로 회의에 참가해서 의견을 나누는 것을 넘어서 좀 더 지속적인 교류와 지속적인 관심, 그리고 지속적인 연대가 필요하다. 결국 인권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후퇴하는 것이고 이를 막기 위해 아시아 인권 옹호자들의 끊임없는 연대는 더욱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좋은 원동력이 될 것이다.

1) 아세안 헌장 제 14조: ASEAN Human Rights Body
(1) In conformity with the purposes and principles of the ASEAN Charter relating to the promotion and protection of human rights and fundamental freedoms, ASEAN shall establish an ASEAN human rights body,
(2) This ASEAN human rights body shall operate in accordance with the terms of reference to be determined by the ASEAN Foreign Ministry Meeting.


백가윤 포럼아시아 동북아시아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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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가 보는 한국 민주주의 위기

아시아가 한국 민주주의의 퇴보를 우려하고 있다. 한때 한국 민주주의는 아시아 민주주의의 선두 대열에 서있다는 평을 받았지만 이제는 그런 호평을 기대하기 어렵다. 현 정부가 출범한 작년부터 주로 인권 후진국을 상대로 활동을 하던 국제앰네스티나 '포럼 아시아'와 같은 국제인권기구가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의 인권지수 악화를 경고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니 말이다.

물론 필자가 이전에도 강조했지만 '결손 민주주의', '선거 권위주의', '경제 헌정주의' 등으로 표현되는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위기는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특히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행보는 한때 한 나라를 기업화하려고 시도하였다가 파국을 맞고, 마침내 자국의 정치를 악순환의 굴레로 다시 밀어넣은 태국의 탁신 전 수상과 그가 이끈 타이락타이당을 연상케 한다.

태국의 경우 1990년대는 새로운 시민사회가 출현한 중요한 시기였다. 정치적 공간이 확장되고 '저항정치'가 발전하였다. 언론의 자유도 확대되고 토론문화가 확산되었다. 새로운 단체들이 우후죽순 처럼 생겨나고, 보다 다양한 요구가 정치영역에 반영되었다. 더 많은 대중들이 더 많은 자유, 더 많은 참여에 대한 욕구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대자본에 이러한 흐름은 위협적이었다. 과거 침묵하고 있던 농민들이 국가가 자의적으로 도시 성장을 위해 천연자원을 투입하는 것에 반발하고 나섰다. 자유주의적 운동과 공동체주의적 운동은 중앙집권적 국가의 종식과 다양한 사회적 요구에 민감한 정부를 희구하고 나섰다. 이러한 시민사회운동은 1997년 신헌법, 교육 및 보건개혁, 분권화와 같은 의제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탁신은 집권 초기에는 시민사회진영의 개혁 의제에 공감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적대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적대감이 그의 정치이념과 무관한 것이 아니나 그를 둘러싼 대자본의 우려를 반영한 것으로 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탁신은 예전보다는 좀 더 균등하게 성장의 결실을 나눠야만 대중적 지지를 살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식을 시민사회 주도가 아닌 국가 주도적인 것으로 고착시키려고 했다.

그러기에 탁신은 1990년대 내내 성장해온 자유주의운동, 공동체주의 운동과 부닥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탁신정권은 의회내 절대의석을 기반으로 그동안 확장되어온 정치적 공간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일부 비판적 지식인들은 '1976년 민중학살' 직후 시기를 제외하고 가장 강력한 언론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느끼까지 했다. 반대자들을 협박하고 길들이기 위해 군이 정치적으로 다시 활용됐다. '마약과의 전쟁'에 따른 대량 살상은 군사독재 시절 처럼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고 있으면서 이를 언제든지 악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저항적 행동'은 여지없이 채찍을 맞았다. 무슬림이 많이 사는 남부지역에서는 촌락 지도자들이 살해되거나 실종되었다. 심지어 인권 변호사까지 실종되었다.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공공연하게 모욕을 당하거나 말단 공무원들로부터 협박을 받았다. 비판적 지식인들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탁신에게 민주주의는 성장의 도구일 뿐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그는 법치를 '경영'의 종속변수로 보았다. 주로 법안을 통해서 혹은 과거 '안보국가'가 행했던 낡은 수법인 은밀한 방식으로 저항정치를 압박하였다. 또 규칙과 돈과 공권력을 수단으로 언론매체를 통제하였다. 특히 뉴스 내용에 대한 치밀한 관리를 통해 반대 목소리를 차단했다.

한마디로 탁신은 나라를 '기업'으로, 통치를 '경영'이라고 사고하였기에 국민들을 권리, 자유, 열망을 갖고 있는 시민이 아닌 소비자, 주주, 생산요소로만 간주하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그러기에 탁신은 시민사회로부터 아시아 민주주의의 선두대열에 있던 태국 민주주의를 반세기 전으로 되돌려, 또다른 일당국가체제를 만들려고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를테면 2003년에 인권 문제에 관련한 유엔의 비판이 있자 탁신은 "우리는 독립국가이고, 어느 누구한테도 머리를 숙이지 않을 것이다. 태국 국민은 단결해야 한다"는 식으로 맞대응했다. 그렇지만 시민단체들은 탁신정부가 "빈곤과의 전쟁"이 아닌 "빈민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2002년 초에는 22명의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44명의 외국인 활동가들이 조직범죄를 다루는 '돈세탁방지청'의 수사를 받고 있음이 드러났다.

탁신은 거듭해서 반정부성향의 시민단체들을 부당한 수법으로 해외 후원금을 챙기는 말썽꾼으로 묘사했다. 그는 자신들의 정책에 동조하는 시민단체들과는 협력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시민단체들은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식의 발언을 해댔다. 같은 해 초 정부는 시위 단속을 위한 보다 강력한 법적 장치를 모색하였다. 구체적으로 사전에 허락받지 않은 시위를 범죄시하는 법안을 만들려다가 여론에 밀려 포기하였다. 이미 폐지된 반공법과 유사한 보안법을 입안하려 하다가 이 역시 여론에 밀려 중단되었다. 그럼에도 탁신정권은 반테러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보다 큰 불만은 방송, 신문분야로부터 나왔다. 대표적인 예가 아이티비(iTV)의 예이다. 아이티비(iTV)는 1996년에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방송매체로 출범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1997년 금융위기 직전에 자금압박에 시달리면서 결국 탁신 가문 소유의 회사에 넘어가게 되었다. 2001년 총선 직전에 아이티비(iTV) 방송사 기자들이 탁신의 선거 보도 간섭에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자 즉시 20여명이 해고됐다. 2003년 9월에도 정치적 간섭에 반발하였다는 이유로 또다른 아이티비(iTV) 직원들이 해고됐다. 방송의 성격은 점점 오락 프로그램 중심으로 바뀌었다.

탁신의 언론매체 간섭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TV 방송사들이 기업인들의 사기를 북돋는 차원에서 부정적 뉴스는 줄이고 좀 더 긍정적 뉴스를 보도할 것을 주문하였다. 마침내 보도범위를 정부사업에 맞추고 정부에 부정적인 보도는 뺄 것을 요구하는 메모가 모든 라디오, TV 방송사에 보내졌다. 하나의 예로 메모 중에는 "민영화 반대는 방송되어서는 안된다"는 문구도 있었다. 자연히 모든 방송사들이 뉴스 프로그램을 줄이고 대신 정부행정, 범죄, 인물 등을 다루는 프로그램을 늘렸다. 당연히 저항정치나 비제도권 정치가 보도될 수 있는 여지가 좁아졌다. 반면 오락 프로그램, 특히 게임 쇼 프로그램이 늘어났다.

그러나 이렇듯 의회내 절대의석을 갖고 오만과 독선의 정치를 펴던 탁신정권도 '애국'을 기치로 내걸었으면서 자신은 세금 한 푼 안내고 어마어마한 액수의 주식을 외국기업에 판 '배신' 행각이 발각되자 방콕시민들의 거센 저항에 봉착했다. 그리고 마침내 군부 쿠테타로 붕괴하였다. 이때 절대의석을 기반으로 독선을 일삼았던 탁신과 타이락타이당은 지식인과 대중들에게 절차적 민주주의, 선거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을 깊게 남겼다. '좋은 쿠테타'도 있을 수 있다는 지극히 위험한 발상까지 횡행하게 됐다.

현재 태국 사회는 친탁신 진영과 반탁신 진영으로 두 동강 나 있다. 왕실과 군부의 위상이 다시금 현저히 높아진 상황 속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실종됐다. 주목할 것은 적지 않은 이들이 이렇듯 '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재앙의 기원을 "국가가 회사이고, 회사가 국가이기에 경영방식도 같다"는 최고경영자(CEO) 발상으로 독선과 전횡을 일삼던 탁신정권의 과오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 아시아 국가들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리고 그 우려의 대상에서 한국 민주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현 정부와 집권 여당은 정치적 소수자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시민사회에 대한 통제를 능사로 여기는 식의 '기업가적 발상'으로 국가를 경영하였다가 전면적인 대중적 저항에 직면하면서, 결국 자국 민주주의의 시계를 거꾸로 되돌려버리고, 스스로도 파국을 맞고 만 태국의 탁신 전 수상과 타이락타이당의 대과(大過)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박은홍/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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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신은 물러나고 민주당이 집권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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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콕의 수완나품 국제공항을 점거한 채 시위를 벌이던 국민민주주의연대(PAD) 소속 반정부 시위대원들이 지난 3일 점거 농성을 풀고 공항을 떠나면서 환호하고 있다. ⓒ신화=뉴시스

2008년 1월 팔랑쁘라차촌당(PPP) 집권 후 태국 정국은 극도로 불안했다. 반 탁신 세력 국민민주주의연대(PAD)는 탁신의 대리인 정권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해서 총리 퇴진 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여 왔다. 정부청사 점거, 비상사태 선포, 헌법재판소의 싸막 총리 직위 박탈 판결, 쏨차이 총리 취임, PAD의 국제공항 점거, 헌법재판소의 PPP 등 집권 3개 여당 해체 판결 등 정국은 바람 잘 날 없었다.

집권당 해체라는 미증유 사태 후 태국 의회는 임시회를 열고 민주당의 아피시트 웨차치와 총재를 제27대 총리로 선출했지만 그 전도는 밝지만은 않다.

단기적으로 민주당 정권은 이전보다는 안정적으로 정국을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국불안의 최대변수였던 PAD뿐 아니라 왕실, 군부, 사법부, 기득권층의 심정적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 보면 정국 불안요인은 도처에 깔려 있다.

무엇보다 친 탁신파와 반 탁신파 간의 갈등을 들 수 있다. 양 측은 지역적으로 친 탁신 세력이 우세한 북부, 동북부와 반 탁신 세력이 우세한 기타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고, 계층적으로는 농민, 도시빈민층과 중산층, 왕정파로 나뉘어져 있다.

지금까지는 PAD가 정국 불안의 제일 변수였다면 이제부터는 독재 저항 민주주의 연합전선(UDD)같은 친 탁신 세력이 주요 변수로 대두될 전망이다. 이미 탁신 지지자 수 백명은 아피시트 민주당 총재의 총리 선출 소식이 전해지던 날 그것이 불법임을 주장하며 의사당으로 통하는 길목을 막고 의원들이 탄 차의 유리창을 깨뜨리는 등 폭력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사실상 친 탁신 세력으로서는 민주당 정권의 출범은 용납하지 못 할 일이다. 2008년 초 PPP가 총선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두고도 탁신의 대리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두 차례 씩이나 총리가 물러나고 정당해산까지 당했으며 여전히 의회 내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립정부 구성에 실패했으니 그 억울함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탁신도 군부의 지지를 통해 출범한 민주당 정권의 불법성을 지적하고 나섰다. 군부는 이전부터 PPP 정부에 대해서는 비우호적이었다. 사막과 솜차이 총리가 두 차례씩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PAD 해산을 명했지만 따르지 않아 결과적으로 정권퇴진에 기여했을 뿐 만 아니라 민주당 주도 연립정부 구성과정에서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 것이 사실이다.

연립정부 구성도 정국 불안의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PPP 당보다 의석수가 훨씬 적은 민주당 정부는 구 집권 여당인 찻타이당, 마치마티빠따이당, 루엄짜이타이 찻파타나당, 프어팬딘당 뿐 아니라 PPP 당 일부 파벌과 연정을 구성했다.

과거부터 만성적 정국불안 요인 중 한 가지는 다당제에서 기인하는 연립정부의 취약성이었다. 과반수를 차지하는 절대 다수당이 부재한 가운데 소수당과의 불안정한 내각 구성으로 연립정부의 평균수명은 1년 남짓이었다. 2007년 12월 총선에서 민주당이 차지한 의석수는 165석(총 480석)이었으며 PPP 는 232석이었다. 비록 PPP는 소수당과 연립내각을 구성했지만 과반수에 육박하는 의석수를 차지했다.

민주당 연립정부는 235석(총 437석)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5개 정치파벌과 연립함으로써 취약성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이번 정부 구성에서 나타난바 같이 태국 정당들은 당파의 이해에 따른 이합집산이 격심하다. 정당과 정치인들은 주로 내각직이나 지역구 예산분배 등과 같은 이해관계에 따라 수시로 정치적 입장을 바꾸어 왔다.

지금은 민주당을 지지하고 있는 PAD의 입장변화도 정국 불안의 또 다른 변수가 될 수 있다. PAD는 포퓰리즘에 기반한 부패정치를 뿌리 뽑기 위해서 현재와 같은 1인 1표에 기초한 민주주의는 태국 실정에 맞지 않기 때문에 임명직 의원 70%, 선출직 의원 30%로 하는 새로운 선거제도로의 개편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이 현 정권 하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PAD는 정치적 지지를 철회 할 수 도 있다. PAD 주장은 궁극적으로는 헌법개정을 통해 실현될 수 있는 데 친 탁씬 세력들은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해 부패혐의로 2년형을 선고 받고 망명 중인 탁씬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또 다른 목적으로 현행헌법의 개정을 요구함으로써 정국 불안이 고조될 가능성이 높다.

경제위기도 정국의 안정을 크게 해 칠 수 있다. 현재의 경제위기는 대외적 요인은 물론이고 국내정치 불안에서 기인한다. 내년 경제성장률은 2%, 실업자는 100만 명이 예상된다. 국제공항 점거사태로 관광, 수출, 수입, 운송, 항공분야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사실상 민주당이 2001년 총선에서 탁신의 타이락타이당에게 참패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경제 문제였다. 민주당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과 구조조정에 반발하는 세력들의 불만을 규합하여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것이 탁신의 타이락타이당이었다. 집권 후 탁신이 실시한 경제정책은 비난도 받았지만 큰 지지를 받은 것도 사실이다. 민주당 정권 출범 직후 태국의 경제사정이 악화될 것이라고 주장한 탁신은 앞으로 경제 CEO 총리였던 자신에 대한 국민적 기대를 다시 불러일으키려 애쓸 것이며 민주당 정권의 경제위기 해결능력은 정국안정에 큰 변수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위의 다양한 정국 불안요인 중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친 탁신과 반 탁신 세력간의 갈등에서 기인한 정치적, 사회적 분열 현상이다. 더구나 지금까지 사회통합의 중심 역할을 해 온 푸미폰 국왕의 역할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은 더 할 수 있다. 이미 반 탁신 세력에 의해서 선점 돼버린 국왕이 갖는 정당성은 과거와 다르게 축소되어 있다.

앞으로 정치 불안은 입헌군주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질서와 체제변화에 대한 요구까지 촉발시킬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얼마 전 이와 관련해 자신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반 국왕파로 몰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 탁신의 언급은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김홍구/ 부산외대 태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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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Story: 인도네시아 활동가 이야기

내 이름은 리아, 2008년 3월부터 5.18 기념재단의 국제 인턴으로서 광주에서 9개월을 보냈다. 처음 518 재단에 갔을때 한국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광주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나는 인도네시아에서 NGO(비정부단체) SOLIDARITAS NUSA BANGSA-SNB (Homeland Solidarity- SNB) 의 프로그램 기획팀에서 일하였다. SNB는 '국내 연대'를 의미하며 주권, 평등, 자유와 같은 민주주의의 가치 실현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이다. SNB는 인도네시아의 1998년 5월 항쟁 직후인 98년 6월 5일에 설립되어 자연스레 항쟁의 피해자들과 가족들의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SNB는 인도네시아가 민주적이고 평등을 중시하는 사회가 되도록 시민들이 민주주의 이념에 대한 의식을 높이도록 지원한다.

한국에 도착하기 전, 나는 SNB에서 1년 6개월 가량 98년 항쟁의 피해자 가족들과 관련된 활동을 하였고 동자카르타, 클렌더 지역에 근거한 또 다른 피해자 가족 협회(FKKM -98년 피해자 가족 포럼)과 연대활동을 했다.

98년 항쟁은 1998년 5월 12일 대학생 위주로 구성된 1천여 명 이상의 시민들이 자카르타의 Trisakti 대학에 모여 1967년부터 1998년 까지 당시 독재정권 수하르토(Soharto)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시위중 시민들과 경찰 사이에 무력충돌이 발생하여 대학생 4명이 사망하고 여러 명이 부상당하게 된것이다.

Trisakti 비극으로 인해 많은 시민들은 분노하였고, 뒤이어 5월 13일부터 15일 까지 항쟁이 펼쳐졌다. 일반 시민들은 자카르타 거리의 상점과 자동차에 불을 지르고 기물을 파손을 했고 항쟁은 자카르타뿐만 아니라 팔렘방(Palembang), 솔로(Solo), 수라바야(Surabaya), 랑팡주(Lampung) 과 같은 인도네시아 전역의 도시로 퍼져갔다.

두 사건은 인도네시아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수하르토 대통령은 5월 21일 직책에서 물러났고, 부통령이었던 하베(B.J.Habbie) 가 수장으로 교체되었다. 수하르토의 정권이 물러난 후 인도네시아에는 인권, 민주주의 그리고 평화를 위해 활동하는 집단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인도네시아의 민주화가 열리게 되었다. 나 또한 SNB에서 피해자 가족들의 미소를 보면서 더욱 인권과 민주주의, 평화를 위한 활동에 헌신하게 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 변화의 바람은 있었지만, 정부는 98년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피해자 대다수는 동자카르타, Pondok Rangon 지역에 방치되어 사망했다. 2007년 4월, 21개 시민사회단체들은 98년 항쟁의 피해자들을 위한 정식 국립묘지를 설립하도록 현 대통령 유도요노(Soesilo Bambang Yudhino) 에게 탄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 외 SNB는 98년 항쟁을 주제로 한 도서 출판을 비롯하여 전시회, 홍보 캠페인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인턴 활동 중 가장 인상깊었던 순간은 6월 10일 광주 금남로에서의 가두시위였다. 이 대규모의 집회를 통해 나는 한국 시민들이 어떻게 모이고 집회에 참여하는지 지켜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진정으로 차분하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촛불 시위가 이루어 졌다. 사람들은 저마다 촛불을 들고 운동가요를 불렀다. 촛불시위이기에 시민들은 가족들, 아이들까지 데리고 나와 함께할 수 있었다. 나는 시위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그 자리에서 역사를 배우고 경험하며,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의식하고 특히 민주주의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인식이 생기는 자리라고 생각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으며 오히려 민주화 운동을 평화로운 방법으로 행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우리의 꿈과 이상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근 10개월 간의 한국 생활을 통해 얻은 나의 경험과 지식은 한국의 서적들, 인터넷, 그 외 자료에서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들로부터 얻은 것이 많았다. 한국 사람들의 의식과 굳은 정신, 특히 80년 광주 항쟁으로 표출되는 한국인들의 의지는 내게 많은 영감을 남겼다.

12월 27일 나는 다시 인도네시아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인도네시아는 아직 개발 중에 있는 나라이고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나아가야 할 길이 산적해 있다. 나는 인도네시아 시민으로서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를 위한 힘찬 내일을 준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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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 바바리카 / 인도네시아 시민 활동가·518재단 인턴, 사진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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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품도, 예단도, 부조금도 없지만…"
한국과 베트남의 결혼 문화 비교해보니…
  
지난 11월 17일 함께 일하는 여직원의 결혼식 식사 초대에 다녀왔다. 오후 5시에 도착하여 친지들이 정성스럽게 준비해온 전통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신부에게 줄 결혼 축하금을 전달하면서 결혼 후 행복하게 살 것을 축복하였다. 오늘은 결혼 전날 행사로 성대하게 잔치를 한다. 친구, 친척, 이웃들이 모여서 함께 식사를 하면서 결혼을 축하해준다. 부모님의 초청으로 잔치에 참석한 경우는 축하금을 부모에게 주고, 신부의 초청으로 온 경우는 신부에게 축하금을 전달한다. 축하금은 식사비에 대신하여 내는 금액이다. 대체로 축하금과 음식준비 비용이 상충하면서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을 정도이다. 결혼식은 행사다음 날인 18일에 진행된다.

농촌의 결혼식 행사는 오후 2시에 신랑이 큰 아버지를 가정 대표로 하여 친구들과 함께 신부를 마중 나간다. 신랑의 가정 대표가 신부 집에 도착해서 조상제단에 절을 한 후 양가 인사를 하고 신부를 데리고 신랑 집으로 돌아온다. 이때 신부 친구가 함께 신랑 집으로 온다. 신부 친구는 신랑 집 마당에 임시로 준비된 천막아래서 신랑 신부와 함께 흥겹게 가요를 부르면서 논다. 신랑 집에서는 신부 친구들이 마실 수 있는 녹차를 준비하면 된다. 이날 식사는 없다. 2-3시간을 흥겹게 논 후 신부 친구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신부는 평상시의 옷으로 갈아입고 설거지를 하면서 그날부터 신랑 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아직은 대다수가 신혼여행은 가지 않는다. 대도시의 부유한 가정에서는 신혼여행을 가기도 한다.

베트남의 결혼식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대체로 친구나 주위 사람의 소개로 신랑, 신부가 될 사람이 만나 일정 기간 동안 서로 교제하면서 사랑을 키워간다. 두 사람이 결혼하기로 결정이 되면 양가 부모님을 찾아뵙고 결혼을 준비한다. 가능한 배우자는 같은 동네나 가까운 곳에서 찾는다. 양가가 멀리 떨어진 경우는 드문데 왜냐하면 결혼 후 양가를 찾아가는데 경비도 많이 들고, 태어난 자녀들을 양가부모가 돌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혼 준비는 함께 살아 갈 주택(방)의 확보가 우선이다. 현재 대다수의 베트남 신혼부부는 신랑의 부모님과 함께 살아간다. 그러므로 신혼부부의 살림 방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된다. 도시나 시골이나 신혼부부가 자신들만의 주택을 가진다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이다.

다음의 준비는 신혼살림인데, 이 역시 부모님과 함께 삶기 때문에 저절로 해결된다. 하지만 꼭 살림으로 준비해야 하는 것은 부부용 침대, 조그만 옷장 겸 이불장, 작은 책상 1개이면 된다. 그리고 그 방을 예쁘게 꾸밀 장식용 사진이나 조화, 달력 등이다. 예복은 당일 빌려서 입는다. 신부는 예쁜 드레스를 빌리면 되고, 신랑은 자기 몸에 맞는 양복을 빌려 입는다. 요즘은 신랑이 양복을 자신이 구입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신부가 신랑의 부모나 가족을 위해서 예복, 예단을 준비할 필요는 없다. 신랑은 신부의 집에 보내는 함에 담배 1갑, 빈랑열매 조금, 녹차, 과자와 약간의 돈(20만~30만 원)을 넣어야 한다. 그리고 결혼 당일 신랑은 준비한 반지를 신부에게 선물한다. 요즘은 대체로 금반지 반 돈 혹은 한 돈으로 한다. 보통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비용은 100만 원 정도이다. 농촌에서는 이보다 약간 낮고 도시에서는 좀 더 비용이 높다. 반면에 신부는 거의 비용이 지출되지 않는다.

한국의 결혼식은 너무 경제적인 비용이 높다. 신혼 부부 당사자가 필요한 주택과 물품 구입이외에도 양가 부모나 가족들의 예단 비용이 많이 든다. 예단 준비 때부터 신랑 신부는 파김치가 된다. 육체적으로도 피곤하지만 심적으로 너무 부담이 된다. 결혼 후 부부싸움이 생겼을 때나, 신부와 시부모와 마음이 맞지 않을 때 결정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예단에 대한 불평불만이다.

베트남에서는 시부모가 신부를 매우 귀하게 여긴다. 농촌에서는 새로운 노동력이 확충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모를 모시고 살 새로운 가족이 늘었기 때문이다. 신부도 직장을 다니거나 농사일을 하므로 집안 일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침준비는 시어머니가 하는 경우가 많다.

고부간의 갈등이 있지만 시부모와 신혼부부가 따로 살림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만약 둘째 아들이 결혼을 하면 첫 아들은 분가를 하고 부모는 둘째 아들 부부와 함께 산다. 그러므로 자연적으로 부모는 막내 아들과 함께 사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한국과 상당히 다른 문화이다. 한국에서는 장남이 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차남이 결혼하면 분가해서 나가는 반면에 베트남에서는 반대로 차남이 결혼하면 장남이 분가해서 나간다.

베트남의 결혼식은 허례허식이 거의 없다. 베트남 농촌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주례가 있고, 신랑신부가 입장하는 그리고 양가의 축하객이 모두 모이는 '결혼식'은 없다. 결혼행사 하루 전 식사초대와 결혼 당일 날 간단한 양가 만남과 친구들과의 한바탕 흥겨운 놀이가 있을 뿐이다. 더구나 혼수품이 없고, 신혼부부만의 주택이 필요하지 않으므로 결혼비용이 아주 적게 소비된다. 혼수품으로 인한 부부싸움, 고부간의 갈등은 없다.

한국의 결혼식은 엄청난 경비와 예비 신랑신부의 큰 심적 부담과 육체적 피곤함을 보게 된다. 한국도 베트남처럼 단순하고, 저렴한 결혼식은 할 수 없을까? 결혼비용이 없어서 결혼식을 하지 못하는 경우는 생기지 않을 수 없을까? 혼수품과 예단을 없앰으로 고부간의 갈등을 없앨 수는 없을까?

결혼이란 양가 부모와 친인척, 이웃과 친구들의 축복 속에서 새로운 한 가정이 탄생하는 아름다움이다. 이 아름다움에 너무 형식과 외형을 추가하는 것은 오히려 거추장스럽고 부담스럽다. 부조금이 부담스럽고, 체면유지가 부담스럽다.

최의교 (국제개발NGO 지구촌나눔운동 베트남 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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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와 서명운동으로 바뀌는 건 없다
 버마 민주화 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위해


세계에서 현재까지 비민주적 정권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국가들 중 가장 높은 국제적 관심을 끌고 있는 나라 중 하나가 버마(미얀마)일 것이다. 1988년 민주화 요구 시위 실패 이후 서슬 퍼런 군사정권에 외로이 투쟁하는 민주주의 지도자 아웅산 수치(Aung San Suu Kyi)의 용기에 국제사회는 주목했고, 그녀가 독립 운동가이자 국부(國父) 아웅산 장군의 혈육이라는 사실에 국내외 시선은 그녀에게 정통성을 부여했다.
 
아웅산 수치와 그녀의 동지들이 정권에 의해 영어(囹圄)상태에 들어간 뒤 국내적으로 지루하리만큼 정권에 대한 공개적 저항의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다가 드디어 2007년 8월 유가 인상에 항의하는 승려들의 비폭력 가두시위가 발생했다. 서구 언론에 의해 "샤프란 혁명"(Shaffron Revolution)으로 명명된 이 시위는 국제사회의 압력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유혈진압으로 막을 내렸다. 국외에서 활동하는 버마출신 민주화 운동가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조국의 민주화를 낙관했으나 그 결과는 허무하리만큼 군사정권의 일상으로 회귀했다.
 
  정치권력을 유지하려는 버마 군부의 의지가 강력하고 또 그 의지에 따른 사회 통제력이 견고하기 때문에 정권에 도전할 국내세력이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지난 10여 년간 버마 군부의 정치행태를 관찰한 결과에 따르면 정권의 공고한 억압체계는 군사정권 유지에 부분적으로만 인정된다. 규모와 파괴력 면에서 미약하지만 정권을 향한 공개적인 저항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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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2007년 8월 유가 인상에 항의하는 승려들의 비폭력 가두시위가 발생했다. 서구 언론에 의해 "샤프란 혁명"(Shaffron Revolution)으로 명명된 이 시위는 국제사회의 압력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유혈진압으로 막을 내렸다. ⓒhttp://ko-htike.blogspot.com 

필자의 견해에 따르면 버마 민주화 운동이 지리멸렬한 부침(浮沈)을 거듭하는 근본적 이유는 거시적 차원에서 국내세력과 국외세력의 소통 부재에 있다. 바꾸어 말하면 버마 민주화를 지원하는 국제 NGO들과 국외 체류 민주화 운동가들의 운동 노선과 정책이 버마 군사정권의 즉각적인 반응을 유도할 만큼 파괴적이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 주장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내세력의 권력 공백을 지적할 수 있다. 1988년 시위와 1990년 총선 이후 군부는 민주화 운동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들어감에 따라 민주화 운동가들은 신변상의 문제로 외국으로 도피했고, 군사정권의 만행을 세계에 고발하며 국외 체류 민주화 운동의 조직화에는 성공했다. 2007년 말에 필자가 만난 방콕 주재 한 민주화 운동가에 따르면 태국에만 약 4만 명가량의 민주화 운동가가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바꾸어 말하면 이들의 이탈은 국내적으로 군부에 대항할 수 있는 제도의 약화를 의미하며, 군부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손쉽게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통제가 가능하다. 희생을 치르지 않고 민주주의를 달성하겠다는 무임승차자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란다.
 
둘째, 국내에서 이탈한 민주화 운동가들의 분열과 국내세력과의 허약한 연대를 지적할 수 있다. 국외에서 활동하는 민주화 운동가들은 국민민주연합(NLD) 당원 이외에 독자적 정당이나 노동자·학생연합과 같은 소규모 단체, 개인 활동가 등으로 나눠지는데, 각 단체들 간의 배타적 갈등 구도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NLD는 1990년 총선에서 승리했고, 미국이 합헌정부로 인정하는 정당이라는 이유에서인지 민주화 운동을 하는 기타 단체나 활동가들의 운동을 부정하는 경향이 높다. 또한 소규모 단체들은 생성과 소멸의 단계를 반복하는데, 신변과 생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임시방편적 전략이기도 하지만 한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면 세속적인 성공을 했으며 이는 곧 불교에서 말하는 좋은 업(業)을 쌓았다는 것과 동일시하는 버마인들의 습성이 강력히 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고국의 민주화 이전에 운동의 주도권을 두고 각축을 벌이는데 더 열중하며 그 과정에서 각 기구 간 배타성이 나타난다.
 
국외 체류 운동가들의 대립과 분열은 버마 국내세력과의 연대에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2007년 반정부 시위에도 보았듯이 버마 국내세력들이 국외 운동가들과 공동으로 운동을 전개한 증거를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쎄잉윙(Sein Win) 박사와 같이 국외적으로 명망 있는 민주화 운동가들은 언론과의 인터뷰에 집중하며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킬 뿐이었다. 실제로 필자가 버마에서 만난 청년 운동가들은 국외에서 활동하는 운동가들이 국내세력과 어떠한 연대도 꾀하지 않는 것에 대해 큰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이러한 운동 구조로는 정권을 퇴진시키기 힘들다는 평가를 내렸다. 중국, 인도, 태국, 최근 들어서는 러시아까지 군사정권과 경제적 교류를 유지하며 정권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국외 체류 운동가들은 버마 투자 금지, 관광 금지와 같은 요구사항에 20년째 천착하고 있는 사실도 재고될 필요가 있다. 현실을 직시하는 탄력적인 운동 노선과 국내세력과의 연대 모색이 필요하다.
 
셋째, 버마의 민주화를 지원하는 한국 NGO로 눈을 돌리면 이들의 가치편향적인 시각을 지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버마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는 NGO가 한국에만 30여개 이상 주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들은 공통적으로 군사정권 퇴진, 인권탄압 중단과 같은 원론적인 수준에서 군사정권을 압박하고 있다. 즉 정작 버마의 군부통치가 다른 국가들에 비해 장기간 지속되는 이유에 대한 지적 고민을 한다거나 버마를 방문하여 현지 사정에 대한 이해를 도모해야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버마 군사정권을 타도의 대상으로만 정의내릴 뿐이지 어떠한 전략을 동원할 것인가 고민하지 않는 것은 한국 NGO뿐만 아니라 국제 NGO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며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 각 NGO들은 버마 출신 운동가들의 보조적인 역할 이외에도 현지 상황을 직시할 수 있는 가치중립적인 태도를 배양해야하며, 이를 바탕으로 버마의 민주화를 지원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일부 국제사회의 노선 변경이 필요하다. 알다시피 버마는 26년간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국제관계의 틀 속에서 정권의 공고함을 유지했던 국가이다. 따라서 경제봉쇄와 같은 고전적인 수단을 동원한 고립정책이 버마의 체제변동에 영향력을 끼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버마를 국제사회로 유인할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체제변동에 특효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군사정권의 고립을 주장하는 NLD의 내부 목소리도 변화되어야 마땅하다. 창당 이후 지난 20여 년간 NLD의 정강과 노선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온 자들은 당외 세력보다 당내 세력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외 체류 운동가들과 NLD의 요구사항이 다소 중첩된다는 사실은 여전히 버마 민주화 운동의 주류는 NLD의 몫으로 보인다.
 
필자는 최근 몇 년간 개인적 관심에 의거 버마 내 조직화되지 않은 민주화 운동가들과 교류하며 버마 미래의 새로운 희망을 보았다. 민주화 운동가들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국외로 떠난 상황에서도 혁명정신의 계보를 잇는 청년 운동가들이 군부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미래의 정치질서에 대한 고민을 나누며 세력 확대를 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국제사회가 버마의 민주화를 지원할 수 있어도 정작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발전시키는 장본인은 버마 국민이라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지 않고 있었다.
 
이제 버마 민주화를 촉구하는 국제사회, 국제 NGO, 국외 주재 민주화 운동가들은 단선적인 경로에만 치중하던 민주화 운동의 노선을 변경하여 버마 국내세력에 대한 화답이 필요할 때가 되었다. 즉 버마 문제에 대한 국제적 지원과 관심을 요구하는 규탄,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는 서명운동보다 현실적이고 실행 가능한 대안으로서 버마 현지와 교류할 수 있는 연대를 모색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일 것이다. 이를테면 투자 철수가 아니라 민간 분야의 투자 확대 요구, 공정여행을 통한 버마인들의 인식 제고와 같은 활동은 NGO가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고 본다. 국외 체류 민주화 운동가들도 헤게모니의 각축장에 휘말리지 말고 국내세력과 교류하며 시행착오를 거치며 현지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노선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겠다. 버마 국내세력도 더 이상의 국외 퇴장을 지양하며 지하세계에서 조직화와 연대를 꾀하여야 하며, 민주적 의사결정에 취약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군부의 폭압적인 만행에 민초를 대신해서 승려가 길거리로 나선지 1년이 지났다. 이제 버마의 민주화를 위한 새로운 지평이 필요할 때이다. 버마 국내세력-국외 체류 민주화 운동가-국제 NGO간의 공조체제가 이뤄질 경우 버마의 민주화는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올 것이다.


장준영/한국외대 교양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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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인도의 9.11, 그리고 야만
인도 민주주의가 실패해온 이유

 
9.11 하면 많은 이들은 2001년, "악마 같은 이슬람" 사람들이 비행기를 낚아채 세계무역센터 건물을 들이받아 3000명을 죽인 폐허더미의 장면부터 떠올릴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범죄로서 전인류에 대한 범죄라고까지 할 수 있다.
 
물론 9.11 테러 사건이 인류에 대한 범죄이긴 했지만, 여기서 내가 기억나는 것은 오래 전 1998년에 파키스탄의 정치가이자 활발한 혁명이론가였던 에크발 아마드(Eqbal Ahmad)가 했던 말이다. 그는 당시 미국에 거의 빌다시피 서아시아에 대한 간섭과 만행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면서, 마치 9.11 사태로 인한 전세계적 재앙을 예견하는 듯했다. 그리고 실제로 9.11 테러의 현장이 그랬다. 생생한 재난의 장면으로 의해 순식간에 중동 국가들은 다 같은 "야만적인 무슬림"으로 치부됐으며, 민주주의와 테러 퇴치라는 명목으로 어마어마한 폭격을 받아 쓸려버렸다.
 
지금 나는 미국식 신제국주의 모델을 재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2001년 9.11 사태의 희생을 불경스럽게 하지 않으면서도 근대사에서 잊혀진 몇 가지 다른 중요한 9.11 사건을 살펴보고자 한다.
 
칠레에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이 라 모네다에 탱크로 밀고 들어가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이끄는 대단히 인기 있던 민주 정권을 붕괴시킨 것 또한 9월 11일 아침이었다. 그것은 남아메리카 역사상 가장 피 튀기는 쿠데타였고, 3000명의 시민이 학살당했다. 이후 피노체트의 독재 치하에서 사형되거나 실종된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칠레 국립체육관은 강제수용소로 바뀌었고, 그곳에서 살해된 수천 명 가운데 대중가수였던 빅토르 하라는 손가락이 모두 잘렸으며, 기타를 치라는 명령을 받고 피범벅이 된 손 바닥으로 기타를 쥐어 들자 바로 총살됐다.
 
오늘날 사람들이 이 또 다른 '9.11사태'를 누가 일으켰는지 알기 위해 갑자기 역사학도가 될 필요는 없다. 여전히 '야만적'인 정권을 민주화시키는 것을 중요한 정책으로 삼고 있는 콘돌리사 라이스 국무장관이 일하고 있는 미국 정부가 바로 피노체트 쿠데타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십 년 전 당시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아옌데 대통령이 국민의 지지와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면서 미국 회사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보인 데 대해 "자국민들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스스로 공산주의의 길로 가려는 나라를 옆에서 빤히 보고만 있을 수 없다. 그들 스스로의 결정에 맡겨두기에는 너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라고 좌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기억에서 사라진 9.11은 또 하나 있다. 1906년 남아프리카에서 간디(Ghandi) 의해 최초로 발생한 WMD 사건이다. 여기서 WMD는 대량파괴무기를 뜻하는 'weapons of mass destruction' 이 아니라 'weapon of mass disobedience' 로서, 사티야그라하라고 불리는 인종차별과 식민지화에 대한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말한다. 훗날 간디가 밝혔지만, 남아프리카 정부의 간섭을 꺾고 인도 대륙의 주권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한 사티야그라하 운동이 바로 9월 11일 일어났다. 이로써 다른 영연방 식민지 국가들에도 반 식민화 운동이 비폭력적으로 퍼져나갔고, 1960년대에는 키신져와 라이스와 부시의 나라 미국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선도할 시민권 운동의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여기 전세계에 알려지지 않고 잊혀진 또 하나의 9.11이 있다. 50년 전인 1958년 9월 11일, 간디가 활동했던 바로 그 시대에 인도 대통령은 국회의 '군특수권한법안'에 동의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한 이 법은, 식민지 시대에 영국이 인도의 독립 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군특수권한 조례'를 재현한 것이다. 인도의 북-동부 지역의 대부분은 이 법안으로 의해 군대 통치를 받고 있다. '군특수권한법'은 사실상 무력 통치인 현 상황을 민주 정부의 합법통치가 이루어 지고 있는 것처럼 위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오늘날, 군사권이 강한 동북지역은 연 평균 1000명 가량의 민간인이 살해되고 있다.
 
군특수권한법 설명에 구체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인도 동북지역의 다른 9월 사건을 언급하겠다. 1948년, 새롭게 독립한 인도의 북동부에 위치한 왕후국 마니푸르(Manipur)는 보통선거를 통해 민주의회를 구성했다. 이는 아시아 최초였고, 인도 주정부가 세워지기도 전에 이뤄진 것이었다. 하지만 의회는 오래가지 않았고, 인도는 곧 마니푸르 왕후와 통합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1949년 9월 21일 합병 당일에는 마니푸르의 민주의회의 합법적 동의를 받지 않은 군사적 조치가 강행됐고, 이어서 10월 12일에는 인도육군 일개 대대가 마니푸르 수도에 진입했다. 3일 후인 10월 15일, '합병 조약'이 발효되면서 보통선거를 통해 구성된 국회가 속절없이 해산되고 말았다. 일순간 마니푸르는 헌법에 민주의회까지 갖춘 자주국가에서, 민주주의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최고 지방 행정관들과 군 출신 주지사들이 통치하는 인도 뉴델리(New Delhi) 의 행정 하에 속하게 되었다.
 
다시 1958년 군특수권한법으로 돌아와 보자. 그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군특수권한법은 6장 내외의 법률로서, 아마 2억의 인구를 통치하기 위한 세상에서 가장 짧은 법률일 것이다. 이 법은 동북지역에서 군사활동을 규정지으며, 동북 지역의 '혼란 구역' 내에서 인도군 당국과 장병들에게 특별 권한을 부여한다. 그러나 이 법은 '혼란 구역'을 정확히 명시하지 않는다. 4조a항은 "어떤 군 장교, 준위, 하사관이든 그가 공공 질서 유지에 적합하다고 판단할 시, 그러한 내용에 해당하는 경고를 한 후에는, 발포하거나 기타 무력을 사용하여 저지하도록 허용하며, 심지어 살상하는 것도 허용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4조b항은 군 당국이 판단하기에 주거물을 비롯한 어떠한 건물이든, 그 안에서 무장 공격을 "행할 가능성이 있는", 또는 "어떠한 혐의를 받고 있는 수배자든" 은신처로 사용했던 건물을 파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4조c항은 "이성적으로 곧 명백한 범죄를 저지를 의심이 가는 자"에 대해서 "필요한 어떠한 무력"을 사용해서 영장 없이 체포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이런 조항은 무분별한 체포의 근간이 됐고 엄청난 무력 남용과 많은 민간인이 사살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북동부와 같이 문화적, 지리적으로 외딴 곳에 위치한 지역의 군인들은 대개 '이성적'인 근거 없이 무력을 사용한다. 마지막 조항인 6조에는 "이 법안에 명시되어 있는 권한으로 시행되거나 예비된 어떠한 행동으로 인해, 이 법안에 명시된 사람은 어떠한 법적 처벌, 절차를 거치지 아니한다"고 규정되어, 모든 군인사에게 법적 면제권을 부여한다.
 
이 '군 특수권 법안'이 군사행위에 대해 제공하는 법적 보호 때문에 인도국군에 의한 인권침해는 반복됐다. 그 유형에는 강간, 여성 추행, 민간인을 향한 발포, 작대기와 고춧가루를 이용한 항문 고문과 같은 극한의 고문, 그리고 기타 법에 명시되지 않은 사항들도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가장 의아한 점은 야만적이고 가혹한 군사 통치 법안이 민주국가로 알려진 인도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 해답은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인도대륙 중 동북지역은 영연방이 마지막으로 식민지화한 지역이다. 하지만 식민화 이후 동북지역은 곧 제국의 최전선이 됐다. 동북의 아삼 지역 평원을 지나 구릉지대에 위치한 이곳은 행정권이 제한적으로 미치는 곳으로서 많은 부분 영국의 지배를 수용한 전통 족장들에게 통치가 맡겨졌다. 당시 왕후국이었던 트리푸라와 마니푸르는 속국으로 간주되어 인도 중앙정부 주재관들의 간접 조종을 받았다. 약탈적인 구릉지역의 부족들은 이웃한 버마 왕국의 공격적 성향을 흡수하기 위한 완충지대로 관리되었다. 초기의 식민지 행정관들은 그 언덕 지역을 "악마와 도깨비가 득실거리는 공포의 땅 같다"고 입을 모았다.
 
버라드(S.G. Burrard) 대령이 쓴 <인도 서베이 기록: 북동지역 전선의 탐험, 제4권>은 영국인의 시각에서 이 지역을 미지와 기지, 원시와 문명 사이에 지리적 대비가 강하게 나타난 지역으로 기술하고 있다. 식민지들의 지리적 이미지는 각 곳의 원주민들의 이미지로 표현됐다. 예를 들면, "아삼 사람들은 사납고 야만적인 성격을 가졌다. 그들은 전쟁을 좋아하고 복수심이 강하며 잔인하고 술수가 많다. 아직 인류애의 부드러움은 아삼 사람들의 형체에 녹아있지 않은 듯하다"고 묘사했다. 뿐만 아니라 식민지 행정관들도 아삼 너머 지역 사람들은 성격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유럽이나 인도 중심부와는 확연히 달라, 그 지역은 불가피하게 식민 계획에서 제외됐고, 그 결과 이 지역은 야만의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아삼 너머 구릉 지역의 야만적인 역사는 오늘날 식민 해방 후 인도에서 그 원시성이 가장 강하게 남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많은 학자와 국제 단체, 그리고 인도 정부는 그 지역을 "군사적 통치 질서"가 군림하며, 불순분자들이 사는 낙후 지역으로 꼽는다.
 
이 같은 시각들이 존재하는 것은, 영국으로부터 권한을 인도 받은 인도정부의 엘리트들의 무지 때문이 아니라, 인도 국민들 인식 자체에 커다란 '공백'이 있기 때문이다. 이 공백은 인도 역사교과서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교과서의 지도에는 아삼 부근 야만 지역이 커다란 공터로 나와있다. 이것은 마치 예전 고대 중국에서 자기 나라에 알려지지 않은 곳은 여백으로 처리해 아예 존재 자체를 알리지 않은 것과 유사하게, 인도 역사교과서에는 아삼 부근지역의 유례를 가르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다윈의 사회진화론의 신화와 전세계를 비 문명화된 절반으로 보는 인종주의적 편견과 유사하게 인도 국민들의 상상 속에서 이 지역은 아리안족의 문명과 지역 우수성에 비쳐 볼 때 낙후되고 가장 이질적인 곳으로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군특수권한법과 같은 정책에 의해서 동북지역이 변화할 수 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인도 국민 의식에 존재하는 이 '공백'와 인종적 차이는 인도 정부의 '통합 거부'에 대한 우려와 인도의 팽창주의 정신이 혼재되어 빚어낸 것이다. (인도는 건국부터 식민 통치 당시까지도 서아시아로 뻗어나가는 민족주의 개척정신을 품어왔다) 불만분자의 봉기와 무력이 북동지역의 특성으로 자리매김 하기 이전부터, 그리고 그 지역에 분리파의 아우성이 들리기 오래 전부터 인도정부 지도자들은 통일이 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50년 11월 7일, 초대 내무장관이 네루 총리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 내용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동북전선의 불명확한 상태와 티베트, 중국에 대한 현지인의 친밀감은 앞으로 우리와 중국 사이에 중대한 도전 요인이 될 것이다. 북방 또는 동북방에 대한 접근은 부탄, 시킴, 그리고 아삼의 다아질링과 부족을 포괄한다. 그러나 이 지역 사람들은 인도에 대한 헌신이나 충성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 북방과 동북지역에서 우리의 전선을 강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행정적 조치들은 네팔, 시킴, 다아질링과 접경 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당시 인도주재 미국 대사 찰스 보울스는 인도인들이 인도-네팔 평화우호조약 체결을 미국이 양대 대륙(미국과 유럽) 사이에 맺은 훨씬 광범위한 조약들보다 대단하게 보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라고 이야기 했다.
 
인도의 민주정치체제가 군사보안당국에 의존한 동북정책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군사주의적 사상에 민주주의가 편승하는 것을 의미한다. 국민들 내부의 서로 다른 차이점을 존중할 수 있는 사회적 기초가 형성되지 않다면 인도의 민주주의는 전혀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북동지방 문제는 인도 본토의 민주진보진영에 중대한 도전이기도 하며, 과거에 늘 인도가 민주주의에 실패했던 원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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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노지트 후세인/ARENA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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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민주화를 위한 안보 개혁 10년
인도네시아 시민사회의 전략과 도전

인구 2억 2천 2백만 명, 1,890,754 평방 킬로미터의 군도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는, 1998년 이후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투쟁을 벌여왔다. 1998년 여러 정치 조직과 시민 단체들은 수하르토 정권이 32년 동안 자행한 가장 억압적인 조치들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을 펼쳤다.  인도네시아의 누적된 정치적, 경제적 위기와 정권에 의해 자행된 대규모의 인권 폐해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민주 정권의 수립을 위한 노력을 가속화 시켰다.

1966년 수하르토가 권좌를 움켜진 후 몇 년 동안 주로 수면 아래에서 활동하던 민주 개혁 운동이 1997년 동남아사아 경제 위기를 계기로 수면 위로 부상했다. 이러한 계기로 인도네시아 대학생들은 독재 정권의 무능력에 대항하고자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그 결과 1998년 5월 수하르토가 대통령직을 사임하게 되고, 개혁 체제(Reformation Order)라 불리는 새로운 시대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개혁의 성과와 진척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인도네시아 안보 개혁과 시민사회
1998년 5월 정권 교체 이후 인도네시아 사회는 몇가지 변화를 맞이했다. 법률 개정과 정부권력을 통제하기 위해서 사법 관할 밖의 기관들을 편성하고, 정부의 의사 결정에 참여하기 위한 시민들에게 열린 공공 정치 공간을 마련했다. 그러나 여전히 정부는 이러한 다양한 정책들을 이행하고, 감독, 평가하는데 있어 부족해 보였다. 비록 국군, 경찰, 국회, 심지어 대통령 내각과 국방부가 안보 개혁을 위해 노력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안보 개혁 과정이 전반적으로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인도네시아 시민사회단체들은 입을 모은다.

인도네시아 시민사회 단체들의 역할을 보면 안보 분야 개혁에 대한 담론 구성, 정책 지원, 정책 집행에 따른 책임성과 투명성 촉진, 권력남용에 대한 감시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해내고 있다. 그러나 안보개혁은 시민사회의 노력에도 불과하고 이렇다 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안보개혁을 위한 시민사회의 움직임
2000년부터 시민사회단체들의 안보 개혁에 대한 지지는 높아져서 여러 관계자들과 연대하기 시작했다. 또한 정치적 문제가 아닌 기술적인 측면에서 안보분야 개혁을 위한 방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민사회단체들은 인도네시아의 정부에 따라 편파적인 방향으로 움직였다. 일부  인도네시아 시민사회는 안보 개혁 의제들을 정부의 인권유린 행위에 영향을 주는 반테러 의제로 보기도 하고 미국과 같은 나라와의 군사적 협력으로 보기도 했다. 또한 중앙 엘리트와 지방 엘리트들의 실용주의 노선으로 접근해 입장에 따라 혼선을 일으키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현재 인도네시아의 시민 단체들은 국내 안보 공공기관들의 개혁 저항과 정부의 정치적 모호성, 엘리트 집단의 개혁 의지 부진에 시달리고 있다. 수실로 밤방 요도요노(Susilo Bambang Yudhoyono) 대통령은 2004년 당선된 후, 인도네시아 군부 (Indonesian National Military - Indonesian Police) 체계하의 민주적 통치 질서를 세우기보다는 군부의 내부자들을 포섭하기에 급급하다.

지금까지 언급한 정부의 행보를 보면 시민 단체들이 안보분야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의제들과 전략을 통해 풀어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난 1997-1998년 동안 대부분의 단체들이 안보분야의 근본적인 개혁 문제에 집중해왔던 것과는 달리 현재는 각 시민사회단체들은 특정 안보 정책과 이슈를 선점해 전략을 짜나가야 한다.
 
어찌 보면 인도네시아는 지금 민주화로 넘어가는데 중대한 시점에 놓여 있다. 긍정적 가능성은 안보 개혁을 통해 민주화가 촉진되는 것이고, 부정적 가능성은 안보 개혁에 따르는 피로와 현기증이 생길 것이라는 것이다.

무프티 마카리마
( 사무국장/ Institute for Defense Security and Peace Studies, 인도네시아 주재)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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