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지붕, 네팔에도 봄이 오기를

4월10일은 네팔에 의미있는 날이었다. 239년에 걸친 네팔의 왕정을 끝내고 공화정을 출범시키기 위한 네팔의 첫 제헌의회 선거가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 의미만큼이나 국제 사회로부터 네팔의 제헌의회 선거는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UN 반기문 사무총장은 네팔의 제헌의회 선거가 공정하고 민주적으로 치러지기를 요청하고 미국의 전 대통령 지미 카터는 총선을 참관하기 위해 네팔을 방문했다. 28개 국제기구와 비정부기구(NGO)는 네팔 총선에 약 900명의 선거 감시단을 파견했고 네팔 시민사회에서도 선거 자원활동가와 민간 부정선거 감시요원을 조직해 네팔이 선거를 통해 거듭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필자는 아시아 지역에 선거감시단을 파견하는 네트워크 조직 ANFREL(Asian Network for Free Elections)을 통해 국제 선거감시단으로 약 열흘간 활동을 하고 돌아왔다. ANFREL은 1997년에 설립한 이후 지난 10년간 스리랑카, 태국,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파키스탄 등 많은 아시아 국가의 민주주의를 강화하고자 노력해왔다. 국제 선거감시단을 파견하는 것뿐 아니라 시민교육, 선거 개혁을 위해 활동하는 시민 단체들의 역량을 강화하는 노력도 함께 하고 있다. 이번 네팔선거에는 약 25 나라의 아시아 국가를 비롯해 남아프리카공화국, 호주, 캐나다의 시민단체가 참여하였고 약 20명의 장기 선거감시단과 80명의 단기 선거감시단으로 나누어 100명이라는 큰 규모로 조직되었다.
 
ANFREL은 감시단을 파견하기 전 선거 감시단의 역할과 주의점들을 교육시켰다. 당시 네팔 의회당과 마오공산당 간의 갈등이 첨예하여 종종 폭력사태로 나타나고 있어서 파견 전 긴장감이 꽤 높았다.
 
  민주화의 첫걸음을 내딛는 네팔
 
현재 네팔은 74개의 정당이 난립해 있다. 그러나 네팔국민회의당(NC)과 마르크스 레닌 주의자 연대인 네팔공산당(UML), 마오 반군이 만든 네팔공산당(Maoist)가 주요 3대 정당으로 꼽힌다. 이번 총선에서는 국민회의당과 공산당간의 대결구도로 예상되었다. 절대왕정 국가였던 네팔은 1990년 입헌군주제가 도입되면서 정치상황이 급변하였다. 그러나 1996년 마오공산당의 무장봉기로 내전에 빠지게 된다. 네팔정부는 마오공산당과 10년의 내전을 치루면서 갈등이 증폭되고 많은 서민들의 삶도 피폐해졌다. 다행히도 2006년 11월 네팔정부와 마오공산당은 공동 임시정부를 구성해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총선에 합의하게 된다. 그러나 유혈사태는 아직도 진행되고 있었다. 따라서 총선시기에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자 하는 당간의 갈등은 증폭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파견된 지역은 안나푸르나의 출발지로 유명한 포하라(Pakhara)와 근접한 타나후(Tanahu)라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3개의 선거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한 선거구에선 국민회의당과 마오공산당의 각 후보가 개인적 영향력도 비등하게 높았고 각 정당에서 이 지역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높아 당원 간의 마찰이 자주 있었다. 선거일을 앞두고 선거관리위원회는 여러 준비로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산간지역이 많고 도로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이곳에선 선거물품을 옮기는 것에도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선거관리인단을 만나 면담을 하자 그는 네팔의 선거 준비로 겪는 애로 사항을 들려주었다. 네팔은 자동차로 이동이 어려울 정도로 험한 오지들이 많아서 나귀를 이용해 선거물품을 이동시키기도 한다고 했다. 특히 이곳의 문제는 외지인들의 접근이 어려워 당, 특히 마오공산당에 의해 장악된 지역이 많다고 했다. 이것은 그만큼 공정한 선거를 치루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형사 콜롬보가 되어라. 국제 선거감시단으로 지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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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팔 국민들이 투표절차를 밟고 있다.  


국제 선거감시단의 역할은 어느 정도 정형화 되어 있다. 총선 전에 얼마나 선거단이 준비를 잘 하고 있는지, 투표자들이 자유 의사에 의해 선거에 참여하고 정치적 발언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지, 공정 선거를 위한 외압 및 폭력 사태는 없는지 등 정보를 직접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수집하는 것이다. 선거감시단은 이를 꾸준히 언론이나 국제사회에 알려서 네팔정부가 좀 더 공정한 선거 환경에서 선거를 준비하고 각 정당들이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안정적 선거 환경을 유지하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감시단으로서 정치적 개입은 절대 금지 되어 있다. 절대적으로 선거 준비 인원이 부족한 나라에서 국제 선거감시단은 안정적 선거 환경을 제공하고 정치적 불안을 최소화하는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되었다.

필자는 방글라데시에서 선거 감시활동을 했던 FEMA(Free Election of Monitoring Alliance) 멤버와 선거감시활동을 시작했다. 필자가 방문했던 대부분의 지역은 우리에게 호의적이었고 이들이 이번 선거를 통해 사회 변화를 얼마나 이루고 싶어하는지 설명해 주었다. 근 9 년 만에 이루어지는 선거로서 많은 네팔인들은 이번 선거를 통해 지금의 불안정한 네팔 정세가 나아지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특히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기대가 묻어났다. 네팔은 오랜 정치적 갈등과 무능으로 사회 발전이 많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회기반시설이 아직도 매우 취약하여 우리가 머물렀던 타나후에서도 전기나 물이 끊어지기가 일수였다. 거리를 다녀보아도 가로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며 도로 역시 매우 낙후되어 있었다. 그래서 지형이 험해 접근이 어려운 일부 지역은 특정 정당의 정치적 통제를 받기 쉽다고 한다. 실제로도 산악지역의 마을에 들어가 보면 사람들이 외국인으로서 우리들을 경계하고 그들의 정치적 발언도 거의 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는 국제 선거감시단으로 선거 감시활동이 매우 필요한 지역에 들어간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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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선거감시단이 현지 선거 감시 단체들과 면담하는 모습

둘말리(Dumali)는 타나후에서 중심 도시였다. 이 곳을 방문했을 때 오전임에도 마을의 몇몇 남성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들에게 다가가 '라마스떼(네팔어 인사)' 인사를 건네며 선거에 대한 기대 등을 물어보았다. 이들은 매우 유쾌하게 선거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며 이 마을에서는 별 문제 없이 잘 지낸다고 전했다. 또한 이번에 첫 선거를 하기위해 카투만두에서 온 마을 청년의 수줍은 미소가 기억에 남는다. 소수 정당의 후보자도 만날 수 있었는데 자신의 당의 자부심을 여과없이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 자리에는 여성들도 있었는데 가족간이나 여성들끼리 선거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나누지 않아 남성들 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실제로 선거일 이른 아침에는 남성보다 많은 여성들이 투표를 위해 나와 있었고 많은 여성들이 자원활동가로 선거 준비며 부정선거 감시 활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시장에 가보면 특정 정당을 상징하는 깃발을 흔들며 다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발언이 있으면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이에 맞서서 "NC, NC(네팔국민회의당)"하고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필자가 접한 사건 중에는 국민회의당을 지지하는 군중 버스가 지나가자 거리에서 돌멩이가 날아와서 차에 타고 있는 당원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다. 군중 속에서 발생한 사건인 만큼 경찰도 범인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같은 장소에서 국민회의당 지지자들은 점심 식사를 하고 있는 마오공산당 지지당원을 보복 폭행하는 사고가 있었다. 이렇듯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서야 별 문제 되지 않는 광경들이 이곳에서는 자칫 긴장을 유발할 수 있는 사건으로 번질 수 있어 사소한 것 하나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지역 선거 단체 및 언론, 경찰관은 주요한 사건 정보를 기민하게 얻을 수 있는 창고였다. 산악지역이 많은 반면 열악한 도로 사정으로 접근이 어려운 지역이 많았는데 이러한 경우 현지 단체를 통해 매우 빠르게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필자가 담당한 지역의 정치구도나 상황도 좀 더 정확하게 들을 수 있었다. 또한 네팔에 평화 프로세스를 정착하기 위해 들어와 있는 UN 및 여러 나라에서 파견한 국제 감시단과의 협조는 효율적으로 감시활동을 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당원간의 폭력 사태가 있었다는 보고를 받았을 경우 직접 그곳을 방문해 정황을 파악해 보기도 했고 보복 폭력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이면 그곳에 대한 일정을 여러 국제 감시단과 공조하며 주시하기도 했다.
 
  긴장된 하루, 그러나 평화로운 선거 D-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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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여성들이 선거 활동에 참여했다.


타나후 지역은 선거 당일 평화롭게 진행이 되었다. 오히려 이른 아침부터 기다란 줄을 서서 들뜬 마음으로 투표용지를 받고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활기찼다. 우리나라와 같이 효율적인 시스템이 아닌 상황이어서 사람이 일일이 복잡한 선거 명단을 찾아보고 안내하고 혹시나 모를 무력 충돌을 막기 위해 파견된 경찰들이 나와 있었다. 네팔의 선거 시스템은 CA시스템으로 지지 후보와 지지 당을 따로 투표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많은 노인들이 이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대부분 젊은이들은 라디오나 TV를 통해 이 시스템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네팔은 선거 부정을 막기 위해 선거 당일 모든 차량이 통제된다. 자동차가 있으면 당원을 각 선거구로 파견시켜 부정 투표를 일으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도로 길을 따라 선거구로 가는 진풍경을 나았다. 인상적인 것은 여성의 참여가 매우 높았다는 것이다. 필자가 다닌 지역은 약 55~60%의 투표율이 나타났는데 여성의 참여가 조금 높거나 비등하게 나타났다.
 
  5시 선거가 끝나고 정리하는 시간은 이날 가장 중요하게 감시해야할 부분이었다.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투표함을 보자기로 꽁꽁 싸는 것은 물론 비 선거 용지 수와 투표자 수가 총 선거자 수와 같은지 맞춰보는 작업이 복잡하게 진행되었다. 투표함을 정리하는 와중에 감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투표 용지를 일부러 훼손하거나 허용되지 않은 선거 용지가 투표함에 포함돼 부정행위가 일어 날 수 있기 때문에 선거가 끝났다고 모든 선거 감시 활동이 마무리 되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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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선거감시단이 네팔 여성들과 선거 참여에 대한 주제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선거가 끝난 직후 각 마을은 술렁거렸다. 특히, 국민회의당과 마오 공산당 당원의 대립이 있는 지역은 저녁 늦게까지 개표소에 사람들이 무리지어 남아 있어서 혹시나 무력충돌은 없을까 긴장되는 시간이었다. 선거다음날 크고 작은 사고는 있었으나 네팔 정부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평화적으로 선거가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였고 국제사회도 이를 환영했다. 필자가 귀국한 후 4월 21일 외신에 따르면, 240개 선거구 중 237곳의 개표가 마무리된 현재, 마오주의공산당(CPN-M)이 전체 의석의 절반인 120석을 확보하고 네팔국민회의당(NC)과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내건 네팔공산당(UML)은 각각 37석, 32석을 얻어 마오공산당이 압승하고 있다고 한다. 마오공산당의 앞날이 여러 정세 속에서 쉽지는 않겠지만 네팔의 진정한 변화와 안정을 가져오길 기대해 본다.

 (차은하/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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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 헌장과 시민사회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ASEAN) 국가들이 아세안 헌장 비준 문제로 고민 중이다. 1967년에 출범한 아세안은 작년 11월 20일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제13차 정상회의에서 ASEAN헌장(Charter)을 채택하였다. 헌장은 헌법과 같은 것으로, 일단 발효되면 아세안은 유럽연합(EU) 처럼 국제법적 지위를 가지게 된다. 헌장 채택은 아세안이 40년간의 '동거'생활을 마치고 '결혼'하기로 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약혼식'으로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필요한 10개국의 비준이 결코 쉬워보이지 않는다.
 
ASEAN 헌장 제정은, 2005년 12월 제 11차 쿠알라룸푸르 정상회의에서 헌장 제정에 합의한 지 2년만에 '초고속'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전직 대통령, 수상 또는 장관으로 구성된 저명인사그룹 (Eminent Persons Group·EPG)은 약 1년간을 광범위한 의견 수렴과 자체 토론을 통해 헌장의 목적과 원칙 그리고 다루어야 할 주요 내용 등 밑그림 작업을 한 후 2007년 1월 세부에서 열린 제 12차 아세안 정상회의에 권고안을 제출하였다.
 
아세안 정상은 이를 토대로 고위급초안작성위원회 (High-level Task Force·HLTF) 를 구성하여 헌장 초안 작성에 *착수하기로 결정하였다. 아세안 각국 정부를 대표하는 직업 외교관으로 구성된 초안작성위원회는 불과 10개월 만에 초안을 만들어 싱가포르에서 열린 정상회의에 제출하였다. '상호 내정불간섭과 합의제' 원칙으로 인해 의사결정과정이 비효율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온 아세안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이렇게 급조된 헌장은 현재 절차 뿐 만 아니라 내용에서도 정당성과 실효성에 많은 결함과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이전에 시민사회는 아세안을 '이빨 빠진 호랑이(toothless tiger)', 또는 현실과 유리된 '엘리트 클럽' 으로 간주하여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여 시민사회단체는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2007년 초 출범한 아시아시민사회연대회의(Solidarity for Asian People's Advocacy·SAPA) 산하 아세안 실무그룹(Working Group on ASEAN) 은 저명인사그룹의 간담회에 참석하여 인권, 경제, 발전, 환경, 노동 등에 관한 시민사회단체의 의견을 제출하였고 초안작성위원회가 주관한 간담회에도 참석하였다. 그러나 시민사회 뿐만 아니라 언론의 거듭되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헌장 초안 작성은 비공개로 진행되었으며 정상들이 서명을 한 후에야 헌장의 내용이 비로소 공개되었다. 따라서 시민사회는 물론 각국의 의회 또한 헌장의 내용을 알 수 없었고 실질적인 기여를 할 기회가 없었다.
 
싱가포르 정상회의 2주 전에 열린 제3차 아세안시민사회회의 (ASEAN Civil Society Conference III)에 참가한 약 150명의 시민사회 대표자들은 아세안헌장의 채택을 연기할 것을 요구하기로 결의하였다. 주된 이유는 시민사회의 의견 수렴 미비와 작년 발생한 버마의 대규모 인권 침해와 민주화 운동 탄압에 대한 의미있는 대책 부재였다. 한편 참가자들은 시민사회의 비전과 열망을 담은 민중헌장 (ASEAN People's Charter)을 제정하기로 결의하였다.
 
정상회의 약 10일 전 태국 인터넷 언론사는 태국의 국회의원을 통해 자체적으로 입수한 아세안 헌장 초안을 공개하였다. 초안 원문을 접한 시민사회단체의 반응은 대체로 매우 비판적이었다. 인권, 민주주의에 대한 언급이 있었으나 형식적이었고 '국가주의와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언어과 관점이 지배적이다는 것이 중론이었는데 구체적으로 아세안 헌장은 '유럽연합과 미국 등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세계 자본주의경제에의 편입을 가속하기 위한 국제법적 기반을 만들기 위한 법적 수단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많은 공감을 받았다. 한마디로 헌장의 내용이 아세안의 비전인 "나눔과 돌봄의 공동체(Sharing and caring community)"와 부합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일단 싱가포르는 약혼식 주최국 답게 올해 1월 초 가장 먼저 비준동의서를 자카르타에 있는 아세안 사무국에 제출하였다. 아세안의 인구 대국인 인도네시아 의회는2월 초 처음으로 비준 문제에 대한 논의를 하였지만 찬반 양론으로 나누어져 결론을 맺지 못하였다. 필리핀은 아웅산 수치 여사가 가택연금에서 풀리기 전에는 비준할 수 없다는 입장을 이미 천명한 바 있다. 말레이시아 내각은 헌장을 비준하기로 결의하였다. 태국은 2006년 9월 군사 쿠데타에 의해 해산된 상원이 2월 말 현재 아직 상원이 구성되지 않아 비준 논의를 못하고 있다. 아세안을 창립했던, 비교적 정치적으로 민주화되었다는 5개국의 상황이 이렇다보니 마지못해 헌장에 서명했던 나머지 나라들도 다른 나라들의 눈치를 보면서 시간끌기 작전을 구사하고 있다. 이렇듯 김이 빠진 듯한 분위기하에서 싱가포르 정상회의에서 약속했듯이 올해 말 태국에서 열리는 제 14차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아세안 헌장 비준안이 통과될 지 불확실하게 되었다.
 
이런 딜레마에 처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아세안이 작년 설립 40주년을 맞이하여 불혹의 나이를 넘기지 말아야 한다는 심리적 강박관념으로 너무 서둘렀기 때문이다. 아세안은 형식으로는 정부간 기구(inter-governmental)이지만 내용으로는 시민사회의 제도적 참여를 의미하는 공치(共治·governance)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엘리트적 성격과 관료적 관행을 지속해왔다. 참여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은 과정이 다소 더디고, 시끄럽지만 결과의 정당성과 실효성을 보장하는 필요조건이다. 국제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세안은 이제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앞으로 아세안이 구시대적 '관료독재'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면 아세안 헌장도 유럽연합의 헌법처럼 한동안 우여곡절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이성훈(아시아인권발전포럼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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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에서 사회 변화를 본다
 

올해 초 보름가량 하노이와 호찌민시에 머물렀다. 매년 가는 베트남이지만 이번만큼은 더 많은 변화가 보인다. 베트남이 앞으로 발전가능성이 큰 나라라는 데는 대부분 동의한다. 베트남이 1980년대 말부터 급성장하여 이제는 아시아에서 작은 용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성장잠재력이 큰 국가들인 BRICs의 브라질 대신에 베트남을 넣은 VRICs를 언급한다. 베트남은 2006년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고,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고 미국으로부터 항구적 정상교역관계국(PNTR) 지위를 부여받아 세계에서의 위상을 더욱 높였다. 2005년 말부터는 베트남 증권시장의 활황 속에서 한국의 투자가들도 베트남펀드에 투자하느라 야단들이었다. 이제는 베트남 정부도 과열된 증권시장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고 있고, 세계 증시의 하향세로 좀 진정되는 분위기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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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우


이런 속에서 땅값과 아파트값 상승 또한 한국 못지 않았다. 시내 중심의 땅 값은 10년 새 열 배 이상 올랐고, 아파트도 4, 5년 새 두 배나 뛰어 졸부들이 여럿 등장하였다. 2007년에는 여섯 달만에 두 배로 값이 뛴 아파트도 있다고 한다. 한 친구의 아파트를 방문하였는데, 그 옆집 주인은 증권시장에 상장하기 전 민영화하는 국영기업의 주식을 산 후 상장한 이후에 팔아 100배 가까운 수익을 얻어 그 아파트를 샀다고 한다. 이런 경제적 변화는 하노이 시 전체를 건설현장으로 만들어 놓았다. 남부 호찌민시에는 이미 고층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는데, 하노이 또한 호찌민시와 경쟁이라도 하듯이 건설 붐으로 시 전체가 먼지로 뒤덮여 있다.
 
 
이렇게 베트남 경제가 활황인데, 정치체제는 여전히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있어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는 듯하다. 공산당이 1당 지배를 계속하며 다당제를 거부하고 있고, 국민들의 대표인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에서는 공산당 지도하의 베트남조국전선이 후보자 선발과정을 여전히 독점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정치적으로 별 변화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근래 책방 풍경을 보면 사뭇 다른 생각을 갖게 된다. 우선 대학 근처나 시내 중심에 책방이 우후죽순으로 많아졌다. 내가 하노이를 방문할 때마다 짱띠엔 거리 책방에 들르는데, 서, 너 해 전부터 바로 그 뒷골목 딘레 거리에 할인서점들이 여러 개 생겨 손님들로 가득하다. 물론 할인서점들은 규모가 작은 사영 서점들이라, 국영 대형서점의 잘 갖춰진 서가에서 본 책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많으나 그래도 제법 갖추어 놓았다. 나도 짱띠엔 거리의 국영 서점에서 책을 탐색하고 그 뒷골목 할인서점으로 가는데, 20%나 깎아 사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 하나 현상은 학교 주변에도 헌책방들이 많이 생겼다는 것이다. 내가 묵던 공과대학 대학촌에도 많은 책방이 생겼는데, 가본 곳만도 대, 여섯 군데나 된다. 호찌민시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응웬후에나 수언투 같은 시내 중심의 큰 국영서점뿐 아니라 응웬티민카이의 헌책방 거리에도 할인서점들이 여러 개 들어섰다. 모두 소규모 사영기업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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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시안


작년 초 하노이에서 이런 저런 책들을 보다 눈에 번쩍 띄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존 로크의 <통치론>,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및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 베트남어 번역본이었다. 그것을 하노이 뒷골목 할인서점에서 먼저 보았는데, 이후 짱띠엔의 국영서점 서가에도 등장하였다. 특히 앞의 두 권은 초기 자유주의 사상의 대표적인 저작들이 아닌가! 게다가, 사회주의체제로부터 시장경제체제로의 이행을 주제로 한 야노스 코르나이의 책도 번역되어 나와 팔리고 있었다. 아는 친구에게 물으니 지식인들은 동요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변화가 베트남에도 왔다고 반기는 눈치다.
 
이 저작들의 출판은 이제 베트남에서도 자유주의가 논의되려는 시점임을 보여주는 징표다. 현재도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견지하고 있는 베트남에서 자유주의가 공개적으로 논의된다는 것은 다원화에 대한 사회의 요구가 표출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공식적으로야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호찌민사상을 사상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사회지만, 장기적으로는 국민들의 다양한 요구가 이러한 단일 이데올로기를 견지하지 못하게 할 것임을 예견케 한다.
 
베트남에서는 이렇게 정치사회적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아무쪼록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좋은 점만을 취하여 조화로운 사회로 만들기를 기대해본다.

이한우(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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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양 아시아지역 <국제인권교육>을 다녀와서


포 카레카레 아-나- 나와 이로 로토 루-아--

위-티아 투코헤 히 네- 마- 리노 아나 에---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 잔해져 오 면---

오늘 그대 오시려 나- 저- 바다 건너 서---

어릴 때 흥얼거리며 배웠던 이 노래가 저 멀리 남반구 섬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안 것은 얼마되지 않았다. 2007년 11월 경 필자는 3주간 아시아 태평양 지역 인권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국제 인권 외교 교육 프로그램(약칭 DTP)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다. DTP 교육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인권교육이며 인권 활동가들에게 유엔을 비롯한 국제 사회에서 각 국가의 인권 현황을 알리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활동을 훈련시키는 것이 주 목적이다. 이번 교육은 주최국이 뉴질랜드인만큼 뉴질랜드의 특수 상황인 원주민 인권에 대해 탐방할 기회가 잦았다. 이 노래 역시 뉴질랜드 웨링톤에 위치한 마오리족 공동체에 방문했을때 마오리어로 직접 배우면서 알게 되었다.


DTP에 참가한 30명의 활동가들은 몽골, 한국을 비롯해서 동티모르, 버마, 베트남, 인도네시아, 인도, 스리랑카, 네팔,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피지, 파푸아 뉴 기니 등 다양한 인종과 종교적 문화유산을 가진 아시아 태평양 나라들에서 왔다. 이렇게 다양한 국가 사람들을 만나본 적도 처음이지만 각 국가에서 많게는 20년씩 인권운동을 해온 이들을 만난다는 것은 그 나라를 가보지 않았어도 그 나라에 대해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을 기회였다.


국제 인권법에서부터 복잡하게 얽혀있는 국가간 인권문제을 토론하면서 각 아시아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독재, 사회적 시스템의 부재와 경제적 빈곤 등의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특히,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원주민, 소수민족 문제였다. 참가자들은 민주주의, 인권 교육, 여성의 평등권, 빈곤 타파, 노동권 보호와 원주민, 게이, 트랜스젠더 등 소수자 인권보호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이들이었다. 활동가 대부분은 그 자신들이 소수민족으로서 그들의 삶에 있어 ‘인권’은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요소였고 하루하루 그들의 삶을 위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정부군에 가족을 잃은 활동가도 있었고 직접 구금되고 고문을 당한 활동가도 있었다. 모두들 밝은 표정의 긍정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삶의 터전은 불안하고 차별로 상처받고 있었다.


인권활동가들의 활동들을 접하면서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이 민주화로 가기에는 가야 할 길이 너무나 멀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인구의 1/3을 인도네시아 정부의 학살로 잃은 동티모르에서는 아직도 사회가 불안하여 사회정의를 구현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고, 정부군에 쫓겨 밀림 지역으로 몸을 피해 살아야 하는 버마의 소수민족의 비참한 생활에 대한 이야기와 버마 민주화 항쟁에 대한 최근 소식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았다. 웨스트 파푸아는 인도네시아 정부의 억압에 힘겹게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있고 필리핀은 정부의 독재와 부패로 인해 빈곤의 고리는 끊기 어려워 보였다. 그리고 인구의 1/5이 임금도 받지 못하고 일하는 인도네시아의 열악한 노동 상황에 대한 보고를 들으며 아시아의 군부독재와 인권 유린은 상상 이상으로 역사적으로 뿌리 깊고 처참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했다. 그 와중에서도 극도의 빈곤으로 거리로 내몰린 인도의 아이들을 위한 인권 활동이나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공동체를 구성하고 소수민족에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농업기술을 전수하는 베트남 엔지오의 활동, 뉴질랜드와 같이 개발원조(ODA)를 지원하는 국가들의 활동을 보면서 아시아의 상처를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이들이 있기에 절망보다 희망의 가능성을 더 찾아보게 되었다.


소수민족으로 척박한 삶을 살아갈 사람들에게 국가의 폭력과 이로부터 보호해줄 아무런 보호막도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 국제사회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아직도 국익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국제관계에서 실질적으로 아시아의 인권 보호를 위해 무엇을 우선적으로 할 수 있을지 난제에 빠지기도 했다. 아시아 인권단체들은 민주화와 인권문제를 중심으로 활발한 연대활동을 통해, 인권을 바탕으로 하는 국제사회 패러다임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시아 활동가들과 지내는 시간 동안 필자는 우리 사회 안에 존재하는 아시아인들 즉, 이주노동자들을 되짚어 보게 되었다. 우리사회에서 불법 이주노동자에 대한 정부의 정책 부재와 사회적 무관심으로 심각한 차별과 인권을 유린당하고 있는 이주 노동자를 생각할 때, 경제성장과 민주화로 한국의 발전을 긍정적인 모델로 보고 있는 아시아 활동가들에게 부끄러운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루빨리 아시아인들을 우리 공동체 속에 한 구성원으로 품을 수 있는 사회적 배려와 지원이 이루어 져야 한다. 그것이 소위 선진국 반열에 올라있는 한국정부의 기본 역할일 것이다.


아시아가 희망을 만들어 가듯이 한국도 아시아에 희망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유엔의 주요 국제 인권 조약을 거의 채택한 대한민국. 2008년 우리 안의 아시아에서부터 우리와 이웃한 아시아까지 아시아적 인권 좌표를 넓혀가는 연습을 해야 할 것이다.


차은하(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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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부패정치, 한국 민주주의의 선택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한국 민주주의의 앞날에 대한 전망이 엇갈리고 있다. 한쪽에서는 집권-반대세력간의 권력교체가 한국 민주주의를 한층 진보시킬 것이라고 진단한다. 현재의 추세에 따른 새로운 집권세력의 등장이 한국 민주주의를 오히려 후퇴시킬 것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집권의 위기, 경제보다 부패와 연관

물론 집권-반대세력간의 권력교환은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 중의 하나이다. 어느 저명한 정치학자는 이를 '시계추 효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서구 선진국의 예를 볼 때 이 '시계추 효과'의 관건은 집권세력의 경제실정에 대한 유권자의 심판이다. 다시 말해 시계추 효과는 '집권연속의 위기'와 불가분의 관련을 갖는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국면에 있는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의 경우 집권 연속의 위기가 경제정책의 실패보다는 부패와 연관되어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설혹 경제의 실패와 연관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부패구조와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새로운 집권세력 역시 부패문제로 급격하게 정당성을 상실하면서 시민사회의 도전에 직면한다.

대안 조직에 실패한 진보, 공권력으로 집권 지키려는 부패한 보수

예컨대 피플 파워에 성공하여 우리 보다 앞서 민주화의 문턱을 넘어섰던, 그래서 한국을 비롯한 다른 아시아국가들을 향해 민주주의의 전도사 역할을 했던 필리핀의 민주주의는 1986년 이후 지속적인 우경화 속에서 지금은 진보적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을 겨냥한 살해가 빈번이 일어나고 있는 최악의 상황하에 놓여있다. 이런 우경화의 중심에는 오랜 기간 동안 사회 저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기득권세력들의 부패구조가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우경화와 지속적인 부패정치를 청산해내지 못한 진보세력의 분열과 연대의 실패이다. 1986년 피플파워로 등장한 아키노가 사실상 무늬만 '진보'이지 기득권세력의 한 분파임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는데 진보세력내의 불신은 민주주의의 보수화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의 조직화에 실패했다. 그 결과가 구 기득권세력과 거리가 먼 의적 역을 맡아 대중적 인기를 모았던 영화배우 출신 에스트라다의 부상이었다.

그러나 집권 초기 서민의 대변자로까지 칭송되었던 에스트라다는 구 기득권세력에 못지 않은 부패혐의로 도중하차하고 말았다. 대통령직을 이용해 불법 도박활동으로 돈을 끌어모았다는 혐의를 받았던 것이다. 결국 에스트라다는 기득권세력과 시민사회가 연대한 거리투쟁, 이름하여 두 번째 피플파워로 무너졌다. 하지만 곧바로 빈곤층은 에스트라다의 복권을 꾀하는 거리투쟁으로 맞섰다. 이들에게 에스트라다는 여전히 반 기득권세력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세 번째 피플파워는 실패로 끝났다. 반면 구 기득권세력은 이러한 시민사회의 분열 앞에 보다 확고히 단합하였다.

에스트라다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오른 아로요는 구 기득권세력의 지지를 받으며 '강한 공화국'이라는 정치적 수사를 통해 국민들의 지지를 조직해냈다. 이때 강한 공화국 비젼의 핵심은 강한 경제였다. 물론 그녀의 정치적 지지도는 에스트라다에게 개혁을 기대했던 계층의 '반란'의 덕도 있었다. 그러나 아로요 역시 2004년 대통령 선거 때 부정선거 연루 의혹과 불법 도박관련 스캔들에 휘말렸다. 필리핀 시민사회는 또다른 탄핵을 준비해야 했다. 그러나 아로요는 이에 공권력으로 맞서고 있다.

'경제 아는 수상'의 부패행각 문제삼지 않은 태국

필리핀과 함께 아시아 민주주의의 선두그룹에 속했던 태국도 필리핀 못지 않게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침체일로의 태국경제의 회생을 책임지겠다던 '탁시노믹스', 그 주역인 탁신이 법망의 허점을 이용하여 세금을 한 푼도 안 내고 19억 달러에 이르는 주식을 싱가포르 국영투자회사에 매각한 것이 드러나면서부터 방콕 시민의 '반란'은 탁신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태국사랑당을 창당한 태국 최고의 통신재벌 탁신은 애국주의와 포퓰리즘을 수단으로 하여 당을 출범시킨 지 3년도 채 안되어 집권에 성공하였다. 출범 당시 태국의 재계는 "이제 우리도 경제전쟁 시대에 경제를 아는 수상이 필요하다"라고 하면서 탁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국민들은 탁신의 엄청난 재력을 그의 걸출한 능력으로 받아들였다. 연줄을 동원해 정부로부터 특혜를 받으며 부를 일군 그의 부정 축재의 전력은 더 이상 문제가 안되었다. 대중들에게 탁신은 똑똑하면서도 따뜻한 재계 엘리트 출신의 정치지도자일 뿐이었다. 그러기에 집권초기 문제가 되었던 부패행각도 흐지부지되었다.

침체에 빠진 태국을 일거에 회복시키겠다는 그의 경제정책, 이른바 '탁시노믹스'는 아시아 지역내에서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실제 탁시노믹스는 태국경제의 회생을 일구어내기 시작했다. 그는 명실상부한 '백마탄 기사'였다. 2005년 총선에서 탁신의 태국사랑당은 2001년 선거 때보다 더 많은 표를 얻어냈다.

노골적인 독선과 오만…민주주의의 파국

그러나 이때부터 탁신의 독선과 오만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헌법재판소, 부패방지위원회, 선거관리위원회 등 1997년 신헌법의 산물인 독립기구에 다양한 방식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론을 주식 매입과 광고를 통해 길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로는 언론사 인사에 직접 관여하였다. 남부 무슬림에 대한 홀대에서 비롯된 남부지역 폭력사태에 대해서도 사실상 강경 일변도로 나간 결과 군과 경찰의 무고한 민간인 학살을 허용했다.

이제 더 이상 탁신은 똑똑하고 따스한 지도자가 아니었다. 마침내 탁신은 자신의 지지세력이었던 재계 일부로부터도 신뢰를 잃기 시작했다. 한때 동지였던 언론재벌 손티의 '반란'이 바로 그것이었다. 여기에다가 자신의 친코포레이션의 주식을 세금 한 푼 안내고 해외에 매각한 그의 '매국적' 행각은 반탁신 시민사회 진영의 불만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포퓰리즘 정책의 최대 수혜지역인 농촌에서의 탁신 지지도는 계속되었다. 그러기에 위기 해결책으로 의회를 해산하고 새로이 총선을 실시한 탁신에 대다수 야당과 시민사회는 보이콧으로 대응하였지만 농촌은 또다시 절대적 지지를 보냈다. 이렇듯 상황이 악화일로를 치닫게 되던 시점에서 안정과 질서 회복을 기치로 내건 군부쿠테타가 발발하였다. 결국 한때 태국 국민의 자부심이던 CEO 수상의 지도력은 태국 민주주의를 파국으로 이끈 채 종언을 거두었다. 그리고 태국 시민사회 역시 친탁신=반쿠데타, 반탁신=친쿠데타로 분열하였다.

경제까지 퇴보시킨 '경제회생 포퓰리즘'…이대로 멈출 것인가

이렇듯 나름대로 아시아 민주주의 그룹에 선두에 속하고 있다고 자부하던 필리핀과 태국의 민주주의는 지도자의 부패행각으로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고, 마침내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물론 이러한 '부패의 외부효과'는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국면에 있거나 민주화로 나아가고 있는 아시아 모든 국가들 공통의 문제이다. 그러기에 '반부패'라는 최소한의 합의를 토대로 반부패연대의 극대화를 꾀하는 변형된 형태의 최대최소(maximin) 전략이 아시아에 요청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한국 민주주의는 권력의 투명성을 높이면서 아시아 시민사회로부터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현재의 추세로 볼 때 대선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앞날을 낙관하기란 쉽지 않다. 부패사슬과 연결된 '경제회생 포퓰리즘'이 민주주의는 물론이고 얼마 있지 않아 경제까지 심각하게 퇴보시킨 다른 아시아국가들의 예가 이러한 우려를 갖게 하기 때문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는 한국 시민사회가 반부패연대의 극대화를 통해 "부패는 안된다"라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 때만이 미래를 낙관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위기는 우리 민주주의를 한층 성숙시킬 수 있는 또다른 기회일 수 있다. 그러나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현재로서 차이를 뛰어넘는 반부패연대가 관건이다. 이는 인권옹호와 빈곤해방, 나아가 신자유주의와 투쟁하고 있는 아시아 대중들의 기대에 대한 책임이기도 하다.

박은홍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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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재외동포NGO대회를 다녀와서



영화 ‘우리학교’를 본적이 있는가? 우리학교는 김명진 감독이 해방직후 재일 조선인 1세들이 일본 땅에서 살아갈 후손들을 위해 만든 ‘혹가이도 조선초중고급학교’를 학교의 교원, 학생들과 3년 5개월이라는 시간을 동고동락하며 카메라에 담아낸 영화다. <씨네21>에 따르면 3월29일부터 8월14일까지 극장 개봉을 완료한 시점까지 개봉관에서 3만8129명, 공동체 상영을 통해 3만7천 명가량, 총 7만5천 명 정도가 유료관객으로 ‘혹가이도조선학교’를 만났다고 한다. 극장 개봉 다큐멘터리로 <비상>이 세웠던 3만9492명의 관객 동원 기록을 두 배 가까이 갱신한 것으로 20∼30명이 모인 작은 공동체까지 직접 찾아 나선 지역 상영이 350회 가까이 이어진 덕분이다. ‘우리학교’의 기록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독립영화의 가능성 뿐 아니라 한국사회가 재외동포문제를 친숙한 시선으로 돌아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나에게 재외동포사회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내 생각의 폭과 크기가 재외동포사회의 어려움에 대해 고민할 수 있을 만큼 넓고 크지도 못하거니와 나와 우리사회가 ‘우리학교’에 갖는 관심에 대해 의심을 가지고 있다. 현재 같이 살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해서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우리가 지역적으로 역사적으로도 단절되고 소외시켜왔던 재외동포학교, 그것도 조총련계 학교에 갖는 관심은 감독과 배급자들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일본 우익세력의 무작위적 협박과 이로 인한 신변의 위협'을 강조해 ‘민족주의의 자극과 반일감정(?)에 기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사람은 조선학교에 다녀야 한다는 그 평범한 진실을 어렵게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한국사회 일반의 관심도 가지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아직 ‘우리학교’ 영화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 또 다른 ‘우리학교’를 보고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지난 달 초 일본의 오사카와 교토에서 개최된 재외동포NGO대회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국내외 22개 민간단체로 구성된 대회 추진위원회가 주관한 이번 대회에는 러시아 사할린, 중국 등지의 재외동포 활동가, 한국의 시민단체 활동가 50여명 등 1백여 명이 참여했다. 작년 3회 대회까지는 한국에서 열리다가 올해는 <역사의 현장에서 재외동포의 미래를 찾다>라는 주제로, 재외동포사회의 현장을 직접 찾아 동포사회를 이해하고 거주국과 모국과의 직접적인 관계 문제를 고민하기 위해 오사카와 교토의 재외동포사회의 현장을 방문했다. 또한, 여전히 강제 퇴거 위기에 놓여 있는 교토 우토로 지역의 재일조선인 마을을 방문, 한국과 일본 양국 정부에 조속히 문제를 해결할 것을 촉구하고 사할린 등 타 지역 재외동포 사회의 문제를 함께 공유ㆍ연대하기 위한 자리였다.

대회에 참석하면서 재외동포사회의 민족교육의 현장을 남측(학교법인 금강학원)과 북측(히가시오사카조선초급학교)이 관여하고 있는 학교와 오사카의 시립소학교의 민족학급을 방문하여 재외동포의 민족교육을 통한 정체성 찾기 노력의 현장을 살펴보고 짧은 시간이지만 아이들과 이야기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또, '재외동포정책에 대한 토론회'나 '사할린잔류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전후보상문제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통해서도 재외동포사회의 가장 큰 어려움은 예전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무관심’과 ‘차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코리안NGO센터>의 고정자 이사는 '재일동포사회의 현황과 과제'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세미나에서 재일동포사회의 현황에 대해 설명하고 일본에 현재 10%를 차지하는 외국인들이, 그간 재일동포들이 받아왔던 차별을 똑같이 받고 있는 것에 대해 안타까와하면서 "먼저 경험한 우리들이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또 중요한 우리의 역할이라 본다"라고 말했다. 거주국의 소수자로서 그리고 차별을 먼저 겪고 그 차별이 다른 외국인에게 이뤄지는 것에 대해 안타까와하고 역할을 고민하고 분단된 모국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재외동포사회와 활동가를 보면서 그들의 고민과 애정의 정도가 민족주의를 넘어섬을 느낄 수 있었다.

대회가 끝나갈 무렵,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우선 일제 식민지시기 교토 비행장 건설에 강제동원 되었고 현재 거주권, 생존권이 위협받는 우토로에 대해 또, 토지수용 등의 재일동포들 여러 현안들에 대해 관심 갖고 알게 된 이야기들을 주변과 나눠야겠다. 가능하다면 아직 보지 못한 ‘우리학교’를 지근거리의 사람들과 보고 내가 보고 느낀 것을 더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을 것 같다. 또, 우리 동포가 거주국에서 이방인을 차별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사회로 들어온 이주노동자들을 이해하고 그들이 차별받지 않도록 가까운 곳에서부터 노력해야겠다. 물론 재외동포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조국’을 조금이라도 더 깨끗하고 정상적인 사회로 바꾸는'본업'에도 충실해야겠다.
장정욱 (참여연대 행정감시센터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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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남부통근철도사업 이주지역 이야기



필리핀 수도 메트로마닐라에서 남쪽으로 50㎞ (시간거리 2-3시간) 떨어진 카부야오란 지역에는 사우스빌(Southville)이라는 재이주 마을이 있다. 한국정부의 공적개발원조(ODA: 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자금을 지원 받아 필리핀 정부가 진행하는 남부통근철도 개선사업과 관련해서 이주된 7000가구가 넘게 살고 있는 곳이다.

왜 이주해온 주민들은 아직도 도시로 출근할까?

매일 아침 새벽, 특히 월요일 새벽 1시경에는 이 마을에 '지프니'(짚차를 개조한 대중교통 수단) 들이 즐비하게 서서 사람들을 기다린다. 한 대에 24명에서 30명을 가득 태우면 메트로 마닐라로 향하는 이 지프니는 25대 가량이지만, 가고자 하는 사람을 다 태우기에는 부족하다고 한다.

사람들은 3시간 가량 차를 타고 이 마을로 이주하기 이전에 직장이 있었던마카티로 향한다. 야심한 시간을 이용하여 이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은, 극심한 교통체증을 피하기 위한 이유도 있지만, 이 교통수단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이다. 매일 출퇴근하기에는 교통비 부담이 있어, 집안의 가장들은 도시에서 작은 방을 세 내어 살다가 주말에만 집에 돌아온다. 주말이면 북적북적 하던 마을이 주중이 되면 텅 비어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05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이주했던 이 주민들은 왜 아직도 메트로마닐라로 힘겹게 매일 출퇴근을 하고 있을까? 철로변에서 위험천만하게 살던 주민들이 상대적으로 깨끗하고 넓은 동네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철도 개선 프로젝트는 메트로 마닐라에 살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일까?

위험천만 철길 옆이 오히려 좋다는 주민들

▲ 경제개발 원조를 받아 교외지역으로 이주한 필리핀 마닐라 빈민들은 위험천만한 지역이어도 오히려 도시가 좋다고 한다. ⓒ천리
카부야오에 이주한 사람들은 대부분 마카티나 마닐라 시의 철로 주변에 무허가로 살던 사람들이다. 아직도 철길 주위에 사는 사람들은 그 지역이 살기에 좋다고 한다. 낙후되기 그지 없고 위험해 보이는 철길 근처가 좋은 이유는, 그 지역에는 살아갈 수단이 있다는 것이었다.

건설노동자이거나 빨래를 해 주거나 노점상을 하더라도, 도시에는 일단 생계 수단이 있으며, 의료, 교육, 수도, 전기 등의 기초 시설에 대한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상으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보건소가 있으며 도시의 공립학교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양질의 교육의 받을 수 있다. 불법이긴 하지만 주변에서 전기나 수도를 끌어 쓸 수 있으며, 정치인이나 종교인의 자선 혜택을 받기도 수월하다.

2007년 3월, 카부야오에 있는 주민조직 코사리카(KOSARIKA)는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시 이주된 6800가구 중에 4000가구가 전기를 공급받지 못하고 있으며 수도는 오전 15분과 오후 15분에만 제한적으로 공급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3445명의 학생인구에 대해서 초등학교, 중등학교를 포함해 56명의 선생님만 있을 뿐이라고 한다.

더욱이 아직도 80%의 인구가 메트로 마닐라에서 직장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들의 주장은아직 이주지역이 여러 서비스면에서 완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므로, 한국정부는 필리핀정부에게 공여되는 차관지급을 유보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2007년 5월 한국의 재정경제부는 '철로변 거주민에 대한 적절한 이주대책의 마련과 이행이 이 사업에 대한 지원의 전제 조건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 국제개발기구 소속 이주전문가에 의뢰하여 이주현황과 이주단지의 생활여건 등을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또한 한국정부는 이주단지의 생활 기반 시설 조성 등에 대한 의사가 있으나 수원국이 거부하고 있다는 입장을 표현하기도 했다.

한국 공적개발사업, 시행착오 겪는 일본 전철 밟을라

한국 정부는 2003년 12월 3500만달러 가량의 차관(연 2,5% 이자, 상환기간 30년) 지원을 약속한 이후, 정책 상에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으나 여전히 프로젝트의 직접 영향을 받는 주민들에게는 환영을 받고 있지 못하다.

상당부분, 주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책임은 필리핀 정부의 몫이지만, 공적개발원조의 기본 취지를 고려한다면 생각해 볼 여지가 많다.

공적개발원조 사업은 국제적으로 2001년 UN이 상정한 MDGs(Millennium Development Goals)의 달성과 같이 한다. 이에 따르면 개발도상국의 빈곤 근절을 최우선목표로 삼고 있지만, 선진국들의 공적개발원조 사업은 타국에 대한 자국의 경제적·정치적 영향력을 높이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은 공여국의 후발주자로서 원조자금의 비율을 급속히 올리고 있지만(2006년 기준, 4400억 원, GNI의 0.05%), 무상원조에 비하여 유상원조의 비율이 다른 선진국에 비하여 높으며(2006년 기준, 32%), 차관제공시 재화와 서비스 공급주체를 공여국이 제한하는 구속성 원조 비율이 높다는 점에서(2003년 기준 80.6%) 우려를 갖게 한다.

유상원조나 구속성원조 비율이 높다는 사실과 복지부문보다는 경제인프라를 구축하는데 높은 비중을 둔다는 점은, 이로 인해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일본의 원조정책의 전철을 밟고 있지 않냐는 빈축을 사게 하고 있다. 원조 사업이 수원국의 외채 상환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면, 원조 사업의 실제 수혜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경제개발이 실제 빈민들에게 어떤 영향 끼치는지 고민해야

철거 일시를 불안하게 기다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메트로 마닐라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지역으로 이주되기를 바라며 정부와 협상해 보기도 하고 주민조직을 결성하여 대항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정부가 카부야오에 이어 두번째로 이주지역으로 제시한 곳은 시간거리 4~5시간이나 되는 카비테 지역이며 이미 2000가구 넘게 이주되어 있다.

경제개발을 통해 빈곤을 감소한다는 정책이, 실제로 빈민들의 인권에 대해서는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할 때이다.

정법모(필리핀대학 인류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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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서 지낸 지 두어 달 쯤 됐다. 마닐라에 머물며 아시아엔지오센터 연수에 참가하고 있다. 연수는 주로 필리핀시민사회단체를 방문해 활동을 소개받고 필리피노들과 이야기하는 시간으로 이뤄진다. 이런 기회를 통해 조금씩 한국과는 또 다른 사회를 알아가고 있다. 필리핀을 통해 한국을 다시 보기도 하고 자신을 돌아보게도 된다. 필리핀에 온 뒤 내내 나를 붙잡는 의문이 하나 있다. 사회 전체가 가난으로 휩싸여 있는데도 초연하고 행복한 필리피노들을 발견해서이다. 절대빈곤 앞에서도 웃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가난을 넘어서게 하는 또 다른 행복의 조건은 무엇일까.

필리핀은 생각보다 참 가난하다. 한 달 전 쯤 마닐라의 대표적인 빈민지역 중 하나인 바세코에 들어가 3일간 지낼 기회가 있었다. 바세코는 지방에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온 사람들로 형성된 마닐라 만 옆 도시빈민 밀집지역이다. 마침 내가 간 때는 우기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길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데다 아무데나 버린 오물들이 빗물에 뒤섞여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각종 쓰레기와 오물이 가득한 거리, 슬리퍼도 신지 못한 채 오물에 찬 거리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10평도 안되는 집에 7-8명 이상의 가족이 지내고, 그나마 이런 집도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최소한의 의식주도 해결되지 않은 채 살아가는 그들의 처지는 비참하다. 더구나 이런 환경에 노출된 어린이들의 모습은 더욱 안타깝다.

가난의 흔적은 필리핀에서도 가장 열악한 지역 중 하나로 꼽히는 바세코에만 있는 건 아니다. 내가 만난 한 영어학원 선생은 8년을 초등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남편과 아이까지 세 식구가 생활하기가 힘들어 사설영어학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런 말도 했다. 필리핀에서는 더 이상 기대할 직업이 없다고. 필리피노의 유일한 희망은 이곳을 떠나 해외로 나가는 것뿐이라고 했다. 해외로 탈출하는 것이 마지막 보루라고 말하는 그나마 먹고살만한 필리피노의 말에서 필리핀 사회에 퍼진 빈곤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느껴진다. 차라리 마르코스 시절은 이렇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네들을 보면서 더 이상 정치도 그 어떤 사회적 여건도 빈곤의 문제 앞에서 우선일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빈곤의 정도가 이렇게 심각한데도 놀라운 점은 많은 필리피노들이 밝고 태연하다는 것이다.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고 표현한다는 것이다. 국제통계로도 필리핀의 행복지수는 최상위권을 다툰다. 또 이 사회는 아직 스트레스란 용어가 일반화되지 않았다. 아이러니다. 도대체 이런 절대빈곤 앞에서도 사람들은 어떻게 행복해 하는 걸까, 과연 행복의 조건은 무엇인지 혼란스러워진다.

몇 명의 필리피노에게 물었다. 필리피노들이 어떻게 빈곤을 감내하는지, 더구나 행복할 수 있는지. 2년째 바세코에서 자원활동을 하고 있는 한 대학원생은 필리피노가 행복한 건 끈끈한 그들의 가족관계 때문이라고 했다. 가족과의 정서적인 유대, 물질적 지원이 힘든 조건에서도 그들을 행복하게 한다는 것이다. 한 영어학원 선생은 그것이 필리피노의 천성적인 스타일이라고 했다. 또 다른 사람은 필리피노들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그들의 행복감 이면에 혹시 부당한 현실을 용인하고 현재의 삶을 합리화는 의식이나 문화는 없는지도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필리핀은 1960-70년대 만해도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경제적으로 2위의 국가였다. 또한 1986년과 2001년 두 차례의 민중혁명을 경험한 국민들로 민주주의 대한 의식과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현재의 빈곤, 소수 엘리트층의 지배구조,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를 묵인하고 현실을 용인하는 것은 잘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은 모르겠다. 다만 필리핀 사회가 스페인, 일본, 미국으로 이어지는 긴 식민의 역사, 전체의 90%를 차지하는 가톨릭의 영향, 7100여 개의 섬으로 구성된 국가, 뭘 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열대기후 등 우리와는 다른 조건과 경험을 통해 만들어온 그들만의 문화의 독특성인 것은 분명할 것이다.

다른 역사와 전통, 문화로 형성된 필리핀의 문화와 가치, 의식을 존중한다. 동시에 왜 이런 문화를 갖게 되었는지 이해하고 싶다. 그것은 이들의 보다 나은 삶은 위해서이고, 또한 내가 찾는 행복의 조건, 건강한 사회에 대한 희망 때문이다.
정지인(아시아NGO센터 연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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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빈곤퇴치의 날’에 떠올려 본 1,000원의 가치



10월 17일. 유엔이 정한 ‘세계 빈곤퇴치의 날’이다. 먹고 살기 바빠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모르겠다는 푸념과 하소연에 빠져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공휴일이라면 모를까, 그냥 지나치는 게 당연지사. 나 몰라라 한다고 해도 달리 탓할 명분이 없다.

하지만 동시에 억지로라도 이런 날은 좀 알고 넘어가자고 떼를 써도 나무랄 명분 역시 없을 것이다. 단 하루만이라도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지구촌 이웃을 생각하고 평소 자신의 생활을 되돌아본다면, 좀 더 나아가 세계의 빈곤과 질병 근절을 위해 뭔가를 실천한다면 이 지구상 누군가의 생명을 하루, 아니 1년 연장할 수 있고 좀 더 희망을 갖는다면 자연이 주신 생을 모두 누릴 수도 있게 할 터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단돈 1,000원으로 가능한 방법이 있다면 말이다.

여전히 갈 길 먼 '빈곤과의 싸움'

유엔이 ‘세계 빈곤퇴치의 날’을 지정한 까닭은 지구촌의 모든 국가와 사람들이 빈곤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빈곤 퇴치를 위한 노력에 힘을 기울이자는 것이다.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가난 때문에 3초마다 1명씩의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현실을 바꿔보자는 것. 그 현실을 바꾸기 위해 각국 정부와 세계 기구 등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2000년 유엔이 정한 새천년개발목표(MDGs). 2015년까지 빈곤 감소, 보건·교육의 개선, 환경보호에 관해 8가지 목표(△극심한 빈곤과 기아 퇴치, △초등교육의 완전보급, △성평등 촉진과 여권 신장, △유아 사망률 감소, △임산부의 건강개선, △에이즈와 말라리아 등의 질병과의 전쟁, △환경 지속 가능성 보장, △발전을 위한 전 세계적인 동반관계의 구축)를 제시하고 공동실천하기로 약속했다.

중국, 인도처럼 덩치가 큰 나라들에서는 가시적인 변화가 목격되기도 하나, 사하라 이남지역의 경우는 여전히 수백만 명의 아동들이 다섯 살이 되기 전에 말라리아나 에이즈 등으로 사망하는 등 모든 분야에서 별무신통이다.

(그래서 MDGs의 이행률이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냐하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이나 남아시아 지역의 고통스러운 현실은 전혀 변화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 인구 규모가 큰 중국이나 인도의 수치가 조금만 개선되어도 통계적으로는 큰 변화가 있는 것처럼 착시효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ODA 기여금에 무심한 언론…1000원이 우습게 보이나

한국 정부도 국제사회가 정한 공동의 목표를 위해 노력중이라고 한다. 한국의 ODA규모는 아직 GNI대비 0.05%에 머물러 국제적인 목표인 GNI대비 0.7%는 고사하고 OECD DAC(개발원조위원회) 회원국 평균인 0.3%에도 한참 모자라는 수준이라 과연 정부의 노력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난감하지만 몇 가지 전향적인 조치들이 취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 ODA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이 나지 않는 이들에게는 국민 1인당 연간 평균 대외원조액 비교가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이 9달러인데 반해 노르웨이는 630달러, 언제나 한국의 비교 대상인 미국과 일본은 각각 76달러, 91달러이다.)

지난 9월 30일부터 시행된 ‘국제빈곤퇴치기여금’제도가 국민들에게 가장 가까이 느껴지는 조치일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 제도에 대해 무심하다.

국제선 비행기를 이용할 때 항공료에 1,000원씩 자동 부과되는 이 기여금은 연간 약 150억 원 규모로 예상되어 부족하기 그지없는 ODA 재원문제의 해결에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항공사들만 요금 인상 효과가 발생하여 민원이 생길까 주목하고 있을 뿐 언론을 비롯하여 대부분 무관심할 뿐이다. 1,000원이란 금액이 하찮아서일까.

사람들마다 1,000원의 가치와 쓰임이 다를 것이다. 아르바이트로 힘겹게 만학도의 길을 걷고 있는 내 친구에게는 1주일동안 자판기 커피를 즐길 수 있는 돈, 그러나 가격에 구애받지 않고 아무 커피숍에나 들어갈 수 있는 또 다른 내 친구에게는 길에 떨어져도 굳이 주울 마음이 생기지 않는 돈이다. 그러나 세계 빈곤퇴치를 위해 쓰이는 1,000원은 절대 가치를 가지고 있다. 바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지구촌 이웃 스무 명의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가치말이다.

잊지 말자, '1000원의 가치'

한국에서도 ‘세계 빈곤퇴치의 날’을 맞아 다양한 캠페인이 전개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화이트밴드캠페인’. 뭔가 거창해 보이지만 의외로 매우 간단하게 참여할 수 있다. 본시리즈로 유명한 맷 데이먼이 착용하여 눈길을 끌었던, ‘빈곤을 끝내자(End Poverty)'는 구호가 적인 흰색 실리콘 팔찌를 우리도 착용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우리 모두를 으스스하게 하는 공포를 없애는데 드는 비용은 역시 1,000원. 1,000원으로 초등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1억 4백만 명의 어린이들, 임신 출산과정에서 사망하는 50만 명의 여성들, 에이즈에 고통 받고 있는 3천 6백만 명의 성인들과 이웃이 될 수 있다.

물론 화이트밴드를 착용하는 것 외에 더욱 다양한 실천들을 우리 스스로 개발하여 실천할 수 있다. 축구를 좋아하는 나이지리아 사람들은 축구 경기장에서, 공공장소에서 엄숙하기로 소문난 일본 사람들은 버스, 열차 등지에서 빈곤퇴치의 구호를 외친다고 한다.

혼자서 할 수 있는 방법도 널려 있다. 지금 필자처럼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한 방안이다. UCC를 제작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 그도 저도 귀찮다면 친구와 MDGs 실천에 동참하는 안젤리나 졸리 부부를 소재삼아 수다를 떨어도 좋다. 하지만 어떤 실천을 하더라도 당연히 얼마간의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것은 필수다.

머뭇거려진다고? 끔찍한 현실을 다시 보라

혹시라도 뭔가 자기 것을 나누는 데 머뭇거려진다면 10억 이상의 사람들이 하루 1천원 이하로 생활한다는 사실, 미국인들 연간 아이스크림 값의 절반에 해당되는 비용으로 세계 어린이들의 초등 교육 비용을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 1천 5백만 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에이즈로 부모 중의 하나 또는 모두를 잃은 채 살아가고 있다는 끔찍한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하기 바란다.

만약 처음 듣는 사실이라면 가능한 오래 기억할 일이며, 옆 사람에게도 알려주어 자신의 기억 상실에 대비하는 게 좋겠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앞서서 해야 할 것은 ‘세계 빈곤퇴치의 날’을 만든 이유를 스스로 체감하는 것. 그 참담한 빈곤과 가난의 실상이 바로 지금, 이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을 직시하는 것이다. 그때서야 ‘세계빈곤퇴치의 날’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될 터이고, 미구에 그 날을 따로 기억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박영선(참여사회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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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담한 인권 유린…"독재의 역사를 기억하라"



버마(미얀마)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아니 이미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다. 상황은 우리의 1980년 5월 광주를 연상케한다.

88년 유혈 진압, 그래도 투쟁은 계속됐다

버마 군사정권의 야만성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1962년 이후 정치, 경제적으로 실정을 범한 버마 군부는 학생들이 주동이 되었던 1988년 8월 8일 민주항쟁을 유혈 진압한 바 있다. 그로 인해 수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유혈 진압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박이 고조되자 군부는 민주화세력과의 타협책의 일환으로 1990년 5월 총선을 치루었다.

선거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웅산 수지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과 민주화세력의 압승으로 끝났다. 반면 군부는 2%의 의석만을 얻는 대참패를 당했다. 그러나 군부는 파렴치하게 권력 이양을 거부하고 공안정국을 다시 재개하였다. 정당한 절차에 따라 국회의원에 당선된 선량들이 투옥되거나 망명 길에 올라야 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학생들 역시 투옥되거나 무장투쟁에 가담하거나 제3국을 찾았다.

이미 이른바 8888 민주항쟁을 이끌었던 민꼬나잉은 1989년에 투옥된 상태였다. 26세에 군부에 의해 사회로부터 차단된 그는 16년간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이렇듯 '시간이 정지된 땅' 버마에는 민꼬나잉과 비슷한 고난의 시절을 겪었고 또 겪고 있는 30대, 40대의 학생들이 많다.

특히 군부가 대학의 문을 폐쇄하고 수많은 민주인사들을 투옥하거나 망명 길에 오르도록 하는 등 저항정치의 보루를 아예 봉쇄하면서 해외에 기지를 둔 민주투사들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특히 태국은 1990년 총선에서 국민의 종복으로 선출되었던 정치인들의 중요한 투쟁 기지가 되었다. 이들의 해외 활동은 미국과 유럽연합(EU)을 비롯한 서방진영이 버마군사정권에 대해 지속적으로 제재를 가하도록 하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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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도, 한국 '군사정부이건 아니건 상관없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제재, 그 중에서도 특히 경제제재의 효과는 이렇다 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은 아세안 창설 30주년을 맞은 1997년에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동남아시아'라는 기치하에 버마에 아세안 정회원 자격을 부여했다.

이때 아세안은 '건설적 관여'라는 이름하에 '경제교류'와 '개발'을 지렛대로 버마의 정치 변화를 이끌어내겠다는 '의지'(?)를 시사했다. 물론 아세안의 '건설적 관여'는 '내정불간섭주의'를 표방해온 '아세안 방식'의 틀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버마 군사정부의 태도변화가 난망 상태에 빠지면서 서방과 국제인권단체, 그리고 해외에서 활동하는 버마 민주투사들의 압박은 아세안의 불간섭주의를 조금씩 변화시켰다. 대표적인 예로 아세안의 보이지 않는 압력에 따른 버마 군사정부의 2006년 아세안 의장국 지위 포기를 들 수 있다. 이는 직접적으로는 버마의 아세안의장국 지위 반대를 주도한 지역내 인권단체들과 '버마문제를 생각하는 아세안 의원 모임'의 성과로 얘기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은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버마군사정부와의 관계를 돈독히 해나갔다. 심지어 인도까지도 실용적 차원에서 그동안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버마군사정부와의 관계 개선을 꾀했다. 이는 이들에게 개발주의를 천명한 군사정부하의 버마가 실리를 챙길 수 있는 '시장'으로 비추어졌기 때문이다.

한국정부 역시 대우인터네셔날이 버마에서 가스전 개발권을 따냈을 때 민간외교의 쾌거인양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가스개발 사업에 한국가스공사까지 참여하였다.

투자와 민주화는 별개? 버마인들의 피폐한 삶을 보라

1990년 총선 결과에 승복하지 않은 버마 군부는 정치적 정당성의 결함을 아시아 역내 국가들과의 적극적인 경제교류를 통한 경제회생으로 보완하려는 전략을 취하였다. 그간 군사평의회의 명칭을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LROC)에서 국가평화개발위원회(SPDC)로 바꾼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동안 싱가포르, 영국, 태국 등이 최대 투자국이었고 한국, 인도, 중국 등이 부상하는 신생 투자국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번 민주항쟁의 배경이 되었던 석유값과 천연가스값의 앙등은 민생경제의 파탄과 군사정권이 내걸었던 개발주의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사실상 국민들의 삶의 질은 더욱 피폐해진 것이다. 이러한 빈곤의 악화는 개발의 과실이 국민이 아닌 군부의 호주머니로 들어간 결과라고 얘기할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미국에 의한 공격 가능성을 이유로 추진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양곤 북쪽 산악지대로의 무리한 수도이전은 국민경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일련의 현상은 아웅산 수지를 비롯한 버마 민주화세력이 어째서 국제사회를 향해 민주화될 때까지만이라도 투자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던, 그리고 아세안의 '건설적 관여'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던 그 이유를 되돌아보게 한다.

국제사회의 노력 없이 '야만의 시대' 끝날 수 있을까

이번 대규모 민주항쟁에 대한 유혈진압을 계기로 버마군부는 1990년 이후 지성의 산실인 대학을 폐쇄했듯이 버마족의 정신적 스승인 승려들을 향해 총구멍을 겨누고 사찰까지 폐쇄해야할 상황을 맞았다.

승려들의 비폭력 평화적 시위는 1988년 이후 20년 가까이 공포정치 하에서 숨죽여 있던 버마 시민사회를 일거에 회생시켰다. 승려들이 주도한 시위대의 구호는 승려들에 대한 공권력의 파렴치한 폭력 행위에 대한 사과, 연료값 인하, 시위도중 구속된 승려들에 대한 석방 등과 같은 비정치적 이슈에서 모든 물가 인하, 모든 정치범 석방 등과 같은 정치적 이슈로 급격히 발전하였다.

그러나 팍코쿠에서 시작된 승려들의 시위가 수도 양곤과 제2의 도시인 만달레이로 확대되고 여기에 일반 시민들까지 동참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승려들이 아웅산 수지를 거론하기 시작하면서 버마 군사정부의 인내력은 현저히 저하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우려한 바대로 얼마 안 있어 군사정부에 의한 유혈진압이 1988년처럼 다시 자행되었다.

현재로서 버마 국내에서의 비폭력 평화적 시위에 의한 군정 종식의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해보인다. 버마 국민들과 승려들, 민주투사들은 자신들의 에너지를 동원할 수 있는만큼 다 동원하였다. 국제사회가 야만적인 군사정부에 자행되고 있는 참담하기 그지없는 인권유린을 종식시키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버마는 영원히 야만의 시대에 갇힐지도 모른다.

'5월 광주'의 정신을 잇는 '참여정부' 아니었나

우리 한국사회가 이만큼 민주화될 수 있었던 데에는 우리가 군사독재 시기에 있었을 때 외부에서 우리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열렬히 지원해주었던 국제사회의 노력도 큰 몫을 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제 우리 사회도 그 빚을 하나씩 갚아 나가야 한다. 왜 우리가 군부에 의해 인간의 최소한의 기본권인 생명권조차 유린되고 있는 버마로 시야를 넓혀야 하는지 이제는 너무나 명확해졌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위급한 시점에서 보다 힘있게 압박할 수 있는 방법은 정부 수준에서 가능하다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얘기이다. 아직도 현정부가 '5월 광주'의 정신을 잇는 '참여정부'임을 자임한다면, 유엔인권이사국 진출에 성공하고 유엔사무총장을 낸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면, 무엇보다도 버마 군사정부에 압박을 가할 수 있는 강력한 인권외교의 지렛대를 사용해야 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슬픔과 분노로 고통받고 있는 버마 국민과 민주투사들에게 '5월 광주'와 '6월 항쟁'으로 거듭 태어난 우리 사회야말로 진정한 친구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버마 45년 군사독재체제를 종식시키기 위해 우리사회가 버마 민주투사들, 국제사회와 적극 연대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박은홍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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