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민주화의 과거, 현재, 미래 

책을 표지만으로 평가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책을 서두만 읽고 마지막 장의 내용을 예측할 수는 없다. 의사 또한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효과적인 치료방법을 강구하기 위해서는 겉으로만 드러나는 환자의 증세만을 봐서는 안된다.
 
오늘날 이라크의 상황은 위와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이라크인들이 수십 년간 독재 정권, 부당한 위계질서로 고통 받아야 했던 원인은 어느 특정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종교, 인종, 문화 등의 여러 사회적 측면에서 국민들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권리를 모두 박탈 당했기 때문이다.
 
1920년도에 구 영연방 제국이 이라크에서 석유를 발견하자 영국은 그곳에 유전회사를 건립했다.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회사 수익의 95퍼센트를 영국, 프랑스, 미국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영국은 그 후 1932년에 이라크 왕정을 설립해 이라크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영국은 그 후 권력을 이라크 수니 엘리트 파에게 넘겼다. 수니 엘리트 파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요르단 왕족들과 혈연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때부터 이라크 시민사회는 수 차례 엘리트 파로부터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힘겹게 싸워왔다. 이라크 국민들은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실권을 얻으려 했으나 그들의 노력은 매번 막대한 영국 군비가 지원되는 왕정의 군부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라크 왕정은 1958년 발생한 군사 쿠데타에 의해 막을 내렸다. 왕정이 소멸하고 나서 권력은 정예 군부로 넘어갔다. 군부는 수십 년간 민주화와 시민참여의 출범을 막아왔다. 오랜 세월, 서양세계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라크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군사 수니 정권까지 이라크 정부는 이라크 국민들을 사회적 부정의로 일관했고 기본권인 정치권조차 짓밟아왔다. 그 동안 서양국가들은 이라크인들의 수난에는 아무 관심도 두지 않았다.
 
1991년 사담 후세인이 자신의 야망을 위해 서양에 비협조하고 쿠웨이트 유전을 공략했을 때, 서양 국가들은 연합을 형성하여 쿠웨이트 해방을 이야기 하며 이라크에 전쟁 선포를 단행했다. 이는 그 동안 후세인의 군대가 수 천명의 이라크 민간인들을 죽이고 수 백 명의 이라크인들이 후세인의 탄압을 피해 이란과 터키로 피난갔을때 서양국가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2차 걸프전 직후 유엔과 서양국가들이 이라크에 가한 경제재제는 이라크 군부의 횡포와 더불어 이라크 국민들의 고통을 배가시키는 것이었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많은 이라크인들은 서양의 공격에 맞서 싸우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서양으로부터 이라크 독재정권을 보호하기를 거부한 것이었다. 이라크 인들은 이라크 정권 붕괴를 기대했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희망으로 여겼다.
 
오늘날 이라크는 외세 주둔의 긴 역사, 복잡한 정계 역사, 여러 소수 민족들과 그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로 인해 이라크 국민들은 제대로 이들의 의사를 사회적으로 표명하지 못하고 사회참여의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이러한 이라크 내부 상황과 문제뿐만 아니라 점차 거세지는 주변국들의 관심과 참견은 이라크가 스스로 성장하는 것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장기간의 군사 독재를 겪은 탓에 대부분의 이라크 인들은 한 가지 목소리를 내고 한 가지 이념만을 내세우는 유일당의 당론을 교육 받아 왔다. 이러한 교육은 이라크인들이 민주주의에 일체 노출되지 못하고 사회활동을 전혀 하지 못하게 했다.
 
이라크인들의 민주주의와 사회참여에 대한 인식의 부재는 후세인의 독재정권이 무너졌을 때 외부 간섭 없이 국민 스스로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했다. 오히려, 시아파와 수니파, 그리고 나머지 이라크 소수 민족들 사이에는 공포와 복수심만이 퍼져갔다.
 
이라크의 과반이 넘는 시아파는 그들이 새 국가의 운영을 도맡을 차례라고 여겼다. 한편 수니-아랍 파는 과거 그들의 전통에 따라 이라크를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소수민족으로서 쿠르드인들은 지난 역사의 소수민족 차별과 민족말살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민족의 안전을 보장받아야 할 입장에 놓여 있다.
 
새로운 이라크의 건설을 위해서는 종교, 민족, 문화에 상관 없이 모든 이라크인이 동등하게 사회 건설에 참여하고 실질적으로 민주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길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라크는 건강한 경제와 평화적인 민주정치를 이룩하기 위해서 교육과 인재양성에 대한 지원과 연대가 필요하다. 한국의 시민 사회가 이러한 역할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이라크에 우호적인 협력을 해나갔으면 한다. 더불어, 이라크 역시 아시아의 한 일권으로서, 아시아권 국가들의 국제 연대가 절실하다. '도움이 필요한 때의 친구야 말로 진정한 친구' 라는 격언이 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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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샴/대학원생·성공회대 MAINS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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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해가는 전쟁의 의미
 
 
인도차이나 반도에 속하는 베트남은 꽤 작고 평범한 나라다. 베트남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오늘날 전세계인들은 베트남이란 나라의 이름도 잘 몰랐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베트남전은 베트남의 정체성과도 일치하는 의미로 받아 들여진다. 베트남인들에게 베트남전은 어떤 의미일까? 자랑스러운 전쟁이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전쟁에서 이어지는 평화의 의미를 생각할까?
 
"모든 것이 한순간 엉망…그런 것이 전쟁이었어요"
 
필자는 베트남전 당시 군인이었던 베트남 작가 반 레이가 베트남전에 대해 한 말을 잊을 수 없다. 필자도 참석한 한 좌담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쟁이라는 개념을 정의할 수 없습니다. 그냥 폭탄이 거리에 떨어지고 끔찍하게 터지면 논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거리로 도망치고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논으로 뛰어 내려갔어요.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엉망이 되었지요. 그런 것이 전쟁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전쟁이 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의 기억에 베트남전은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는 것이었다.
 
베트남의 교과서 내용을 살펴보면, 베트남전은 '베트남인들이 나라를 위해 미군에 대항하고 결국 이들을 쫓아낸 전쟁'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또 베트남이 미군을 이겼기 때문에 지금까지 독립을 유지하고 자유로운 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베트남인들은 작은 베트남이 '골리엇' 미국을 이겼다고 자랑하고 있다. 심지어 대학생들도 미국을 이길 수 있는 나라는 베트남 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베트남전을 아주 성스럽게 본다.
 
베트남인들은 교과 과정을 통해 베트남 군인들의 공헌과 베트남전의 승리에 대한 내용을 배우고 호치민을 통한 군인들의 모습을 미화해 갔다. 베트남전이 끝난 1975년 4월 30일, 베트남인들은 베트남전에 대해 승리만을 이야기 하고 전쟁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거나 언급하기를 꺼렸다.
 
그러나 1986년 도이모이(Doi Moi·개혁개방정책) 후에 '글라스노스트'(경제개방)이라는 개념이 베트남에 들어오게 된다. 외부 세계로부터 들어온 새로운 문물을 접한 베트남인들의 생각이 자유롭고 다양해졌다. 이때부터 전쟁의 다른 면에 대한 언급이 시작됐고, 그 중에서 작가, 소설가, 화가등 예술가들은 작품을 통해 베트남전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 슬픔, 비판등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작곡가 찐공션(Trinh Cong Son)의 반전 노래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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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곡가 찐공션(Trinh Cong Son) 

베트남전쟁의 어두운 이면을 반영하는 노래는 일찍이 찐공션 작품에서 나왔다. 찐공션은 베트남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하고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작곡가이다. 사람들은 이 작곡가의 인간애와 철학을 칭찬하고 존경한다.
 
찐공션이 부른 사랑 노래, 반전 노래 등은 베트남뿐만 아니라 인접 아시아 국가에서도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찐공션의 노래 중 반전 노래는 전쟁 속에서 인간이 겪는 고통과 아픔을 잘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필자가 중요하게 보는 것은 작가 찐공션이 전쟁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시름과 괴로움을 관찰하고 묘사만 한 것이 아니라 그는 직접 민간인들이 당한 수난을 이해하는 내용의 감동적인 노래들을 많이 창작했다는 점이다. 베트남전 동안에 찐공션의 반전곡은 남베트남의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고 평화를 위한 투쟁의지를 높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당시 남베트남의 정권은 찐공션의 곡들을 부르는 것을 금지시켰고 심지어 북베트남의 정권도 찐을 싫어했다. 그의 노래에서는 베트남전을 내전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베트남 정부는 독립 후에도 오랜시간 찐공션의 곡을 국내에서 유통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리고 외국으로 이민간 베트남 사람들도 계속해서 찐공션의 곡들을 비판하고 경멸했다.
 
하지만 1980년부터 찐공션은 작곡을 다시 시작했고 베트남의 새로운 제도들을 칭찬하는 노래를 지었다. 그때부터 베트남 정부는 찐공션을 감시하는 일을 그만두었고 찐공션의 노래를 사람들이 다시 부를 수 있게 허락했다. 배트남 사람들은 찐공션의 반전곡을 통해 전쟁의 끔찍한 이면을 떠올리고 평화의 가치를 더욱 소중하게 여길 수 있게 되었다.
 
소설가 바오닌(Bao Ninh)의 <전쟁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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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의 슬픔> 

바오닌(Bao Ninh)은 베트남의 작가이면서 베트남전 당시 군인이었다. 그는 참전 중 전쟁의 끔찍하고 야만스러운 상황을 목격했고, 이를 모아 <전쟁의 슬픔>이라는 소설을 써냈다.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나오는 '끼엔'이라는 인물은 베트남전에 참전한 군인이다. 끼엔은 종전이 된 후에도 전쟁의 슬픈 단면을 명확하게 기억하고 "군인, 총, 탱크-이는 베트남인에게 아주 평범한 것들이다. 전쟁은 별일이 아니다. 전쟁은 평범한 것이다. 그런데 평화는? 평화는 아주 특별한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는 게다가 "그리고 전쟁에서 이기는 편을 보는 것은 (…) 정의가 이겼다고 하지만 잔인하게도 죽음과 폭력도 이긴 것"이라는 나레이션을 하게 된다.
 
1989년에 이 소설은 처음으로 베트남 작가협회의 '신작품지'에 나왔다. 나중에 소설의 이름은 <사랑의 운명>으로 바뀌었고, 이는 베트남 문학계에서 가장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1991년에 몇명의 작가들이 경멸적으로 이 책을 비판했고, <사랑의 운명>은 사회적으로 핫이슈가 되었다.
 
베트남 사람들의 비판을 한 몸에 받았던 이 책은 외국에서는 아주 좋은 평가를 받았다. 2003년 무렵 이 소설에 대한 외국의 평가와 국내 평가의 차이가 커지자 베트남인들은 다시 이 책을 찾아 보게 되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일어난 전쟁은 베트남의 한 시대를 공고히 차지한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시대의 바람이 베트남 전체를 사로 잡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쟁에 대한 인식도 변해가고 있다. 많은 베트남인들은 더 이상 베트남전을 성스러운 전쟁으로 보지 않는다. 오늘날 베트남인들은 전쟁이 주었던 아픔, 고통, 시름, 괴로움 등을 더 많이 이해하고 있고 더 이상 전쟁이 아름다운 승리가 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또 그들은 베트남전 후에 남아있는 많은 희생자, 피해자, 다이옥신으로 오염된 땅 등의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베트남인들은 여전히 '전쟁은 평범한 것이고 평화는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베트남인들에게 베트남전의 영향은 오랜 세월 계속될 듯 하다.  
   


투엔 응웬 응옥뗀 / 대학원생·성공회대 MAINS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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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올림픽, '안전'올림픽 되나

베이징올림픽은 녹색올림픽, 환경올림픽, 인문올림픽을 구호로 내세워 세계에 중국의 새로운 면모를 과시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최근 '안전올림픽'이 이번 올림픽의 가장 중요한 화두의 하나로 등장하고 있다. 과연 베이징올림픽이 큰 탈 없이 치러질 수 있을 것인가가 국제사회는 물론이고 중국정부에게도 가장 커다란 관심사로 되고 있다.
 
베이징올림픽이 안전 문제와 연관되기 시작한 것은 3월 티베트 지역에서 대규모시위가 발생한 이후의 일이다. 최근에는 신쟝지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조직이 테러 가능성을 위협하고 나서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재 중국 내에서 더욱 커다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연이어 발생하고 있는 민중들의 시위이다. 21세기에 들어서 집단행동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2005년에만 7만 건이 넘게 발생한 바 있다. 지방정부의 개발을 위한 토지수용과 과도한 세부담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 노동분쟁 지속적인 증가 등이 중요한 원인이었다.
 
그런데 최근 한 달 사이에 주민들과 정부 사이의 대규모 충돌이 연이어 발생하며 올림픽을 앞둔 중국정부를 긴장에 몰아넣고 있다. 지난 6월 28일 궤이저우성의 웡안현에서 수만 명의 주민들이 지방정부청사를 공격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7월 1일에는 상하이시에서 경찰과 시시비비를 다투던 한 시민이 경찰서를 공격하여 6명의 경찰이 사망하였다. 7월 17일 광동성 회이저우시 보뤄현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경찰과의 충돌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7월 19일 위난성 멍렌현에서 수백명이 참가한 격렬한 시위에 경찰이 발포하여 2명이 사망하였고, 21일에는 위난성의 쿤밍시에서 테러로 추정되는 버스 폭발사고로 3명이 사망하였다.
 
이러한 사태가 발생한 이유는 모두 다르지만 많은 경우 이미 존재하고 있던 사회적 불만들이 경찰과 공권력의 부당한 처사를 계기로 촉발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7월 1일 사건의 경우 5명의 경찰이 사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론에서는 경찰의 불법적, 혹은 부당한 저치들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도 매우 높다. 이러한 현상들은 중국에서 정부와 시민들 사이에 얼마나 큰 긴장관계가 존재하며 사회적 불만이 얼마나 넓게 확산되어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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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베이징올림픽이 큰 탈 없이 치러질 수 있을 것인가가 국제사회는 물론이고 중국정부에게도 가장 커다란 관심사로 되고 있다. 전세계 누리꾼들은 티베트 사태 등과 관련해 올림픽을 치르는 중국 정부를 비판하는 글과 이미지를 제작해 공유하고 있다. ⓒ프레시안 

그런데 우리는 중국에서 이처럼 사회적 불만이 확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정치적으로 매우 안정되어있는 역설적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즉 현재 중국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지식인들의 운동과 중국공산당 사이의 갈등, 그리고 최고지도부 내의 권력갈등 등 정치적 안정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요인들이 찾아보기는 힘들다. 정치적 안정과 사회적 불안이 기묘하게 동거하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의 정치사회적 상황은 '거시적 안정, 미시적 불안'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정치적·이념적 측면에서는 갈등이 억제되고 안정적 국면으로 유지하고 있으나 인민들의 생활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문제들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과 분쟁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기묘한 공존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사회적 불안, 특히 일반 민중들의 불만을 정치적 도전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하는 중국공산당의 통치전략이 지금까지 주효하고 있다는 점을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중국의 지도부는 과도기적 발전단계에서 사회적 불안요인들을 단기간 내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당면한 상황에서 가장 역점을 두는 것은 미시적 불안 요인들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며 이러한 불안요인이 거시적 차원의 불안과 혼란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핵심정책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첫째, 안정적인 경제성장이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공산당은 사회주의 이념의 통합력이 약화됨에 따라 통치정당성을 경제적 실적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 중국은 현 지도부가 출범한 2003년 이후 다시 고도성장 국면에 진입하면서 정치·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데 비교적 유리한 경제적 환경을 확보할 수 있었다.
 
둘째, 시장경제로의 전환과정에서 빈부격차의 증가와 사회적 갈등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데 현 지도부는 '인민본위(以人爲本)'과 '조화사회(和諧社會)를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내세우며 중국공산당이 다수 인민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것에 대한 신뢰를 확보하기 노력하였다. 물론 이러한 전환이 모든 경제, 사회정책에 전면적으로 반영될 수는 없었지만 상징성이 높은 몇 가지 사회정책을 통해 그 효과를 극대화시켰다. 2004년에 결정된 농업세의 점진적 축소 및 폐지 정책이 대표적 사례이다.
 
셋째, 통치방식의 변화이다. 중국공산당과 중앙정부의 신뢰를 제고하기 위해 지도부들의 국민들의 삶의 현장에 밀착하는 이미지를 강화하고, 국민적 관심이 모아진 주요 돌발사건에 대해 신속하고 직접적인 개입을 시도하였다. 후진타오, 원자바오는 최고지도부로 선출된 직후부터 빈곤지역에 대한 현지시찰을 활발하게 진행하였다. 이를 통해 중국의 최고지도부들은 여러 사회적 문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문제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지방정부의 독직과 잘못된 정책결정으로부터 자신들의 권위와 위신을 보호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웡안현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한 이후에도 원앙현의 당서기 등이 파면시키는 것을 통해 지방주민들의 불만을 가라앉히고자 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정책들은 언제까지 효과를 발휘하고 정치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베이징올림픽이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 직접적인 답을 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사회적 불만과 갈등은 구조적 문제와 연관된 것이고 그 해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베이징올림픽이 중국정부가 기대하는 것처럼 중화민족의 단결과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지위 향상을 과시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이면에 존재하는 그림자까지 잘 보여주는 계기가 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중국의 변화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양면적 측면은 당분간은 피하기 힘든 현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미래로 나아가는가에 있다. 외부에서는 중국에 존재하는 그림자들을 쉽게 없앨 수 있다는 성급한 기대보다는 인내심을 가지고 중국의 변화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중국정부도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사회적 현실에 대해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대응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중국 내의 민중들과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기 위해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남주(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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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의 저주가 비켜간 나라, 몽골 

그 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네
 
몽골-푸르다 못해 시린 하늘, "드넓은" 이란 말이 담아 내기에는 부족한, 카메라 렌즈 저 밖으로 한도 끝도 없이 펼쳐지는 초원의 나라, 그리고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는 양떼들. 딱 이것이 몽골로 떠나는 비행기안에서 조차 내가 가지고 있던 몽골에 대한 이미지의 전부였다.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을까? 물론이다. (이 질문이 몽골 국민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용서를 바란다.) 몽골에서 온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칭기스칸 이래 역사에서 사라진 듯한 몽골이 이주노동자의 모습으로, 다문화가정의 모습으로, 혹은 유목주의를 외치며 울란바타르 시내를 휘젓는 한국인들을 상대로 다시 한국인들에게 나타났을 때, 이들의 사라진 역사, 사라진 삶의 모습이 머리 속에 도저히 그려지지 않았다. 게르와 흐미로 대표되는 여행사 가이드에 나오는 박제화된 몽골인의 모습이 아니라, 그야말로 살아 꿈틀대면서 삶의 고단함에, 역사의 질곡에 몸부림치는 몽골인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이 살고 있었다. 울란바타르 공항에서 호텔로 가는 길에서, 그리고 다음 날부터 이어지는 일정 속에서 몽골은 NGO의 나라로, 빈곤과 부패, 여성문제와 민주주의로 끊임없이 싸우는 나라로 등장했다.
 
자원의 저주가 비켜간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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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영 





1990년 우리 식으로 따지자면 데모 몇 번하고 싱겁게(?) 체제 전환에 성공한 이 나라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스탈린식 통치체제가 그렇게도 허약했단 말인가? 단순히 '허약한 국가-강한 시민사회' 식의 도식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1921년 혁명에 성공한 이래, 몽골의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초이발산과 몽골의 후르시쵸프, 안드로포프 등으로 인식되는 체덴발의 장기집권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허약한" 국가로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된다. 게다가 체제 전환이전까지만 해도 몽골에서는 이렇다 할 시민사회라고 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한가지 의심할 수 있는 것은, 혁명이 외부로부터, 그리고 위에서 이식되었기 때문에 외부적 요인이 붕괴되면 한번의 가격에도 일순간에 붕괴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나의 의문을 스티븐 피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그는 먼저 구 소비에트 블록에서 민주주의로의 전환과정을 거쳤다가 다시 권위주의 내지 일인 독재로 나아가는 중앙 아시아 국가들과 몽골을 비교하면서 민주주의로의 성공적 전환을 막는 요인들이 무엇인지를 열거하고 이들 요인들의 부재로 인해 몽골 민주주의가 상대적으로 성공적인 안착을 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먼저, 우리의 상식과는 반대로 몽골은 다른 중앙 아시아 국가와 비교해 봤을 때, 상대적으로 자원빈국(?)속한다. 지금이야 국제원자재가격이 급등했기 때문에 몽골에 대한 관심이 이전보다 많이 늘어났지만, 몽골은 카자흐스탄처럼 미국, 러시아, 중국 등이 탐 낼 만큼 거대한 유전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투르크메니스탄처럼 세계 제 3위의 천연가스 매장량을 기록하고 있지도 않다. 바로 이런 점이 몽골이 상대적으로 강대국의 개입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요인이다. 게다가 지정학적 중요성도 그리 크지 않아서 미국이나 러시아가 무조건적으로 미는 독재자나 권위주의 정권이 부재하다는 점도 역설적으로 몽골의 민주화에 기여하였다고 본다.
 
결국, 빈곤에 허덕이는 몽골인들의 염원과는 반대로 이러한 상대적 자원빈곤이 몽골의 민주화와 민주주의로의 전환에 기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카스트로와 같은 위상을 갖는 인물이 체제 전환시점에서 몽골에서는 부재하였다는 점 역시 몽골로서는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독립의 아버지, 민주화의 기수와 같은 위상을 갖는 인물이 계속 집권하고 있다면, 이는 여러 포스트 공산주의 국가에서 보듯이 권위주의로 회귀하는데 중심적인 행위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고, 민주주의를 제도화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몽골의 민주주의로의 전환은 "부재"로부터 가능했다고 하는 역설이 가능해진다. 카자흐스탄의 석유와 투르크메니스탄의 천연가스가 자원의 저주를 불러와 정치계급의 부패와 국가기구의 왜곡을 가져왔다면, 몽골은 이러한 자원의 상대적 부재로 그나마 체제전환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최근의 국제원자재 가격의 급등과 캐나다 등 외국자본과의 합작으로 인한 유전개발 결과에 따라 몽골 민주화의 미래는 여전히 불안하다고 할 수 있다. 제발, 자원의 저주에 걸리지 않기를. 몽골인들이 바라는 자원이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동사무소와 선관위, 그리고 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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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의 투표소. ⓒ이주영




이번 몽골 프로그램에서 우리의 관심은 단연 선거였다. 선거 시기에 맞춰서 이 프로그램을 추진한 이유 중의 하나가 선거시기에 사회적, 정치적 갈등이 어떻게 표출되는지, 그리고 선거에서의 시민단체의 역할은 어떠한지를 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번 선거에서 선거감시단을 구성한 6개의 시민단체 중 몇몇을 방문한 결과, 우리는 몇 가지 몽골 사회가 안고 있는 특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랜 사회주의 정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제도화라는 측면에서 국가기구의 미비함은 시민단체가 국가의 역할을 대신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지방에서 이주한 사람들의 경우, 울란바타르 시 주민등록청에 등록을 해야 하는데, 여기에 대한 홍보와 안내 역할 및 주민등록청 직원에 대한 교육을 시민단체가 많이 하고 있었다. 이렇게 시민단체가 주민등록에 집중하는 이유는 바로 주민등록 문제가 한편으로는 시민의 선거권을 제약하고 선거를 왜곡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시골 이주민들이 몇 푼의 주민등록비를 내지 못해 선거권을 행사하지 못하거나, 매표 행위, 이중 유권자 등록 등으로 선거 부정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더구나 한 선거구에서 무더기로 유령 선거인 명단이 나온 것은 그만큼 주민등록 문제와 선거인 명부 관리문제가 이번 선거의 투명성을 가르는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국가의 역할이 있고 시민단체의 역할이 따로 있는데, 왜 시민단체가 국가의 역할을 하느냐라고 하는 우리 방문단의 의문은 몽골과 같은 체제 전환국가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한 오만한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었다. 도대체 한 줌의 선관위원이 뭘 할 수 있겠는가?
 
건설족과 광산족이 지배하는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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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영 






인민혁명당과 민주당은 태생부터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인민혁명당이 구 공산당의 후신이라면, 1990년 몽골 민주화시기 민주화를 추동 했던 세력들이 이합집산하면서 만든 정당이 민주당이다. 물론 여기에는 민주연합이 중간에 매개되어 있긴 하지만, 민주연합의 정책 실패가 가져온 결과 인민혁명당이 재집권에 성공하면서 탄생한 것이 민주당이기 때문에 두 집단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큰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민혁명당과 민주당의 공약을 들여다 보면 거의 큰 차이를 발견하기 힘들다. 우리 나라 건설족들이 아파트 건설로 국가 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고 있는 것만큼이나, 몽골에서는 광산 개발에 대한 기대가 크다. 그래서 인민혁명당이나 민주당은 광산개발로 나온 이윤을 국민들에게 돌려준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게다가 울란바타르 시내 외곽에 위치한 게르지역에 아파트를 짓겠다는 공약 역시 두 당이 별 차이가 없다. 한 마디로 인민혁명당과 민주당은 공약만을 놓고 본다면, 우리 나라 정당들이 장터에서 시장 상인들이 가격 흥정하듯이 경쟁적으로 지난 대선에서 목표 경제 성장률을 높여 부른 것처럼, 한 쪽이 100만 투그릭을 제시하면 다른 한 쪽에선 150만 투그릭을 주민들에게 돌려 주겠다고 하는 식으로 대동소이하다고 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이들은 시장 개방과 신자유주의를 지향한다는 측면에선 같다고 할 수 있고, 단지 얼마나 속도를 내느냐 하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다. 시장 개방과 사유화에 더 열성적으로 밀어붙인다는 면에서 몽골 민주당은 우리가 생각하는 식의 진보적인 정당 내지 자유주의적인 정당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부패에 관한 국민들의 인식 역시, 인민혁명당이나 민주당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식으로 비록 제 2정당이긴 하지만 그리 고운 시선을 받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래왔고, 지금도 벗어나고 있지 못한 개발론적 사고에서 몽골 국가와 정치인들이 벗어나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보다 몇 배나 척박한 환경에서 생태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진행되는 밀어붙이기 식의 개발은 그 몇 배로 인간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감안할 때, 자연의 복수는 이미 시작된 셈이다. 점점 더 심해지는 황사와 수자원의 고갈은 이제 몽골인들만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지속 가능한 개발, 그것은 몽골에서는 단순히 이미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한 국가들이나 내세우는 배부른 소리가 아니라 많은 유목민들의 생존권이 걸린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 생존권은 바로 인권인 것이다.
 
도대체 한 선거구에서 세 명의 입후보자를 내는 정당이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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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 총선의 투표 용지. ⓒ이주영





몽골 방문 며칠 째 계속 드는 의문중의 하나는 왜 한 선거구에서 인민혁명당이 세 명의 후보자를 내는가 하는 것이다. 지난 번까지 소선구제였다가 이번에 중선거구제로 바뀌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고는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비용과 성과를 생각해 보면 납득이 되지 않았다. 예컨대, 인구수에 따라 두, 세 명의 입후보자를 뽑는다 하더라도 한 정당에서 여러 명의 후보자를 내면 그 후보자들끼리도 경쟁을 하게 되는 구조이고 그렇게 되면 정당에서 선거에 쏟아 부을 수 있는 자원이 분산되면서 다른 정당과의 경쟁에 불리해 질 수도 있는 것이다.
 
선거라는 게 될만한 사람 한 사람에게 모든 자원을 쏟아 부으면서 총력전을 펼쳐도 될락 말락한다는 게(물론 경합지역에서는) 내가 이때까지 갖고 있었던 상식이었다. 이런 상식에 위배되는 현실이 주는 퍼즐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끙끙거리면서, 한 정당(시민의 의지당) 선거사무실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팀이 방문한 지역의 선거홍보담당자가 분노에 차서 하는 말 한마디가 바로 나의 의구심을 일소해 버렸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올해부터 바뀐 선거구제 때문에 인민혁명당을 위시한 거대 정당들이 한 선거구에서 한 정당에서 나온 후보자들만 뽑아야지 그 투표가 유효하다고 선전해 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거대 정당들은 손쉽게 의석 수를 늘릴 수 있는 반면, 여러 명의 의원을 뽑는 거대 지역구에서는 이런 정당들의 악선전에 중소정당들은 맥을 못 출수 밖에 없는 현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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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영



1992년 아버지 부시의 정책 실패에 대해 민주당 세력을 결집하고자 클린튼이 들고 나온 캐치 프레이즈가 바로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이다. 이 말은 15년의 세월을 돌고 돌아 작년 한국의 대선을 휘젓더니, 불과 몇 개월 뒤 몽골 사회를 그야말로 혼란에 빠뜨렸다.
 
7월 2일 인민혁명당사 앞에서 시작된 부정 선거 항의 시위는 밤이 되면서 폭동으로 발전하면서 그 성격이 바뀌었다. 때마침 각 정당과 시민단체와 함께 선거 평가 간담회를 열고 있던 우리는 참석하기로 했던 정당 관계자들이 부정 선거에 항의하면서 속속 불참을 통고해 와서 난감해 하던 중이었다. 간담회를 끝내자 마자 달려간 인민혁명당사 앞에는 이미 2,3천명의 시민들이 몰려와 시위를 벌이면서 돌을 투척하고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시위는 정치적인 것이었고, 화염병 대신 페트병을 던지는 그들의 시위가 필자의 눈에는 너무나 평화적으로 보였다. 밤으로 접어들면서 공항(!) 텔레비전 화면에 비치는 시위의 모습은 시위가 더 이상 시위에 머물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스포츠 경기 중계하듯이 시위 장면을 계속 보여주면서 사태 진행을 중계하는 TV 화면(그 때까지만 해도 시위 장면에 대한 텔레비전 방영이 중단되진 않았다)에 펼쳐진 모습은 바로 몽골의 불안한 미래, 그것이었다.
 
토요타와 폐차 직전의 한국산 중고차가 공존하는 나라, 한국산 중고 학원 버스를 그대로 시내버스로 쓰면서 전국민의 40퍼센트가 빈곤선 이하에서 살고 있는 나라, 실업과 인플레이션에 허덕이는 나라가 바로 몽골의 또 다른 모습이다. 자유화 이후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몽골이 그나마 하이퍼 인플레이션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유가와 세계 곡물가격에 취약한 경제구조하에서 올해의 유가 및 곡물가 직격탄은 그대로 경제에 고스란히 반영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충격은 바로 몽골 최대의 백화점 앞에 있던 홈리스 아이들의 손바닥에, 지나가던 차량에 돌을 던지던 시위대의 분노에 담겨있는 것이다.
 
3 H를 기억하며 몽골 여행을 마무리하다
 
우리의 사소한 말, 질문 하나하나에도 다른 아시아인들은 상처를 받을 수 있고, 무례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오랜 동안 국제사업을 해온 분들의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사업을 할 때에는 3가지 H를 명심해야 한다고 일깨워 준 분의 말이 생각난다. Humble(겸손하고), Humane(인간적이고), Humor(아무리 어렵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상황에서도 유머 감각을 잃지 말라는 것)이 그것이다.

몽골의 각 단체와 정당 선거 사무소를 방문하면서, 한편으로는 나의 호기심에 찬 악의없는 질문이 그 곳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만하게 비쳐질 수도 있었겠다는 반성을 해본다. 국가의 역할이 따로 있고, 시민단체의 영역이 따로 있다고 굳게 믿고 있던 나에게 시민단체가 국가의 역할을 대신하고 그걸 스스로의 성과로 내세우는 모습은 의아하다 못해, 국가가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도록 시민단체가 비판하고 강제하지 않고 시민단체의 정체성과 자기 위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닌 가 하는 식으로 까지 나아갔다. 그리고 그러한 나의 모습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모습이기도 했던 것을 잠시 잊어버리고 무의식중에 오만한 생각을 가지지 않았나 반성해 본다. 여러 가지 힘든 측면도 있었지만, 나에게 겸손함을 일깨워진 값진 여행이었다
 
이번 여행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공감여행-민주주의 교류협력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올해 선거가 예정된 아시아 국가를 방문하여 그 사회를 이해하고 네트워킹을 구축함으로써 사회 교류의 장을 확대해 나가고자 하는 것이 이번 여행의 취지였다.  
   
 
 

  이주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국제사업단 전문위원)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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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여기, 아시아에서 우리, 아시아를 꿈꾸다
이식된 오리엔탈리즘과 패권적 민족주의를 넘어 한국 시민사회의 아시아
연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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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엮음/ 해피스토리
정가 12,000원 [바로 구입하기]


국내에 거주하는 아시아계 이주민이 1백만 명에 달하고 해외여행을 떠나는 한국인의 85%가 아시아로 향하고 있다. 최근 들어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한국인들의 생각 속에 ‘아시아’는 미국이나 유럽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고, 생김새와 피부색이 비슷한 ‘아시아인’들은 서구인들보다 더 낯선 이방인으로 머물러 있을 뿐이다.

한 예로 우리는 아시아의 향신료 산지를 장악하기 위해 세계일주를 한 마젤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마젤란을 죽여 필리핀에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아시아인 라푸라푸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거의 없다. 또한 서구로부터 이식된 오리엔탈리즘으로 인해 우리가 아시아에 대해 갖고 있는 관점은 정실주의, 부패, 빈곤, 독재, 미개발, 덜 문명화된 지역 등 부정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아시아계 결혼이주 여성이 늘어나면서 생겨난 신조어 ‘코시안’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우리’와 ‘아시아’를 애써 구분짓고 외국인 배우자의 국적에 따라 아이를 특정화, 대상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껏해야 우리는 ‘아시아 최초’나 ‘아시아 최고’라는 수식어에서나 ‘아시아 속 한국’을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가 펴낸 『우리 안의 아시아 우리가 꿈꾸는 아시아』는 먼저 한국과 아시아를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우리 안의 아시아를 재인식하고 그것을 진정한 ‘우리’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참여연대 홈페이지에 2006년 6월부터 연재된 ‘아시아 생각’ 칼럼을 모은 이 책은 이식된 오리엔탈리즘, 패권적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와 인권이 고르게 보장되는 ‘사회적 아시아’를 향한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은 아시아에 대한 우리의 편협한 사고를 꼬집는 1부 ‘아시아를 향한 성찰’, 현재 아시아 각국이 처해있는 현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2부 ‘오늘의 아시아’, 시민사회의 아시아 연대를 모색하는 3부 ‘아시아 연대를 위하여’로 구성돼 있다. 필진으로는 조희연 성공회대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연구소 소장, 조효제 성공회대 NGO대학원 교수를 비롯해 국내 아시아 지역 연구자, 활동가, 아시아 출신 유학생 등 25명이 참여했다.

목차

[들어가며] 아시아에 주목해야 할 이유 -조효제
1부 아시아를 향한 성찰

○ 아시아의 자존심? -전제성
○ 우리에게 보이는 아시아는 정말 아시아인가? -이재현
○ 한국에서 친구 사귀기 -유완또
○ 국경과 국적에 갇힌 인권 -이재현
○ 인공의 도시, 차이나타운 -백지운
○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이재현
○ ‘메이드 인 코리아’ 낙인의 진짜 이유는… -이재현
○ 신부 사오는 사회 -박이은실
○ 지자체의 국제결혼지원사업을 반대하는 이유 -이재현
2부 오늘의 아시아
○ 아세안, 공동체 버리고 FTA 택하려나 -이성훈
○ 가야 할 길 먼 동티모르의 ‘독립’ -최재훈
○ 징기스칸의 아시아, 몽골의 민주주의 -김은경
○ ‘금권민주주의’가 불러온 태국의 쿠데타 -박은홍
○ 베트남 사회주의와 노동력 부족 현상 -채수홍
○ 필리핀의 공공연한 정치적 살해 -정법모
○ 내가 만난 인도네시아 여성운동가 -정은숙
○ 중국, 그 배반의 이름으로 -김도희
○ ‘조직’ 대신 ‘시민’ 만든 일본 시민사회 -한영혜
○ ‘야만의 시대’에 갇힌 버마, 가스 개발에 눈먼 한국 -박은홍
○ 새로운 네팔을 향한 기회와 도전 -지번 바니야
○ 네팔 총선 국제 선거감시단 활동기 -차은하
○ 필리핀 남부 통근철도사업 이주지역 이야기 -정법모
○ 너무 깊게 드리워진 수하르토의 그림자 -김은경
○ 경제회생 포퓰리즘…한국도 태국,필리핀 전철 밟나 -박은홍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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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체가 나를 부끄럽게 했다

비행기에 탑승하고서야 자카르타까지 7시간이나 걸리는 걸 확인하였다. 목적지가 어디든 몇 시간이 걸리든 별로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뭔지 모르게 피곤하기만 한 한국에서의 일상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했다. 이렇게 허둥지둥 시작한 인도네시아 방문은 일주일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7시간의 지루할 수 있는 비행시간은 오히려 안락한 휴식이 되어 주었다.
 
한밤중에 자카르타에 도착해 짐을 찾아 세관을 나가려고 하는데, 경찰인지 세관원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박스로 싼 짐을 질질 끌어 내며 뭔가를 요구한다. 어쩌란 말인가 싶어 귀를 기울였더니 결국은 돈을 내라는 애기다. 언젠가 남의 애기를 인용해서 인도네시아의 부패문제를 민주주의와 인권의 걸림돌로 지적한 적이 있었는데, 그 사실을 생생하게 눈 앞에 두고도 그냥 무기력하게 공항을 빠져 나왔다. 뭔가 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자괴감이 한 순간 스치고 지나갔다. 마중 나오기로 한 차는 한참이 지났는데도 오질 않는다. 몇 대의 담배를 피우고 한국에서는 한 가닥씩 하는 일행들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펴 보았다. 모두가 이 상황을 얼마큼은 받아 들이고 있는 듯 하였다. 달리 방도가 없으니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얼마를 더 기다린 후에 차가 도착하고 일행은 공항 근처 호텔에서 하루 밤을 묵게 되었다. 로비에서부터 아늑하게 뻗어 있는 긴 복도를 좌우로 몇 번 돌아서야 겨우 방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가라오케인지 나이트클럽인지 모를 시설이 방과 한 층에 있었다. 클럽 앞에는 한 가지로 유니폼을 입고 어려 보이는 여성 종업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공항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성 종업원들의 미소를 외면한 채 무기력하게 지나쳤다. 일행 중에 과격한 페미니스트가 있었다면 그렇게 무기력하지는 않았을까? 인도네시아에서의 첫날밤은 우리 일행의 정체성과 한계를 분명하게 설명해 주었다. 지금의 생각이지만 뭔가 하지 않는 것이 이유야 어찌되었든 잘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싶다. 내가 보편적이라 믿었던 것들이 어떤 사람에게는 이상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여행하는 동안 여러 차례 느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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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쓰나미로 인해 마을 한 가운데까지 7㎞를 밀려와 정박한 산만한 화물선박. ⓒ김신

 잠을 자는 둥 마는 둥하고 제법 차가운 열대의 새벽 공기를 쐬면서 다시 공항으로 가서 수마트라 섬 최 북부의 아체주로 향하였다. 공식일정이 시작된 것이다. 4시간이 걸려 도착한 아체주 공항은 시골 간이역을 연상시켰다. 공항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냥 나왔다. 쓰나미때 이곳 공항까지 바닷물이 넘쳐 그나마도 공항이 제 기능을 못해 구호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아직 아침인데도 5월의 뜨거운 열기는 피부를 찔러대며 파고들었다. 자카르타와는 다르게 공기는 신선하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상쾌하다. 무엇보다 담배 파는 가게직원이 없어 안달하는 일행에게 피우던 담배를 갑 채로 가지라고 권하는 공항직원들의 여유로움과 친근함이 자카르타와는 사뭇 다르다. 또 택시 호객과 전화카드를 팔려고 젊은 상인들이 진을 치고 있던 자카르타 공항과는 달리 이곳 공항입구는 망고를 팔러 나온 농부 몇 사람과 택시기사 한둘이 전부다. 망고를 팔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자기네끼리 깎아 먹고 노닥거리고 있다. 일행은 마중 나오기로 한 차를 기다리다 망고 한 바구니를 샀다. 노란 속살을 나누어 먹으면서 노닥거리는 사이 차가 도착했다. 역시 두 시간을 기다렸다. 아체의 첫인상은 마중 나오기로 한 차를 두 시간 기다린 것을 빼고는 사람도 공기도 그리고 일행들의 분위기도 모든 것이 자카르타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다.
 
숙소가 분명히 호텔인데 한참을 달려도 호텔은 고사하고 여인숙도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쓰나미가 다 휩쓸어 버린 것인가라고 의아해하고 있는데, 눈앞에 3층의 꽤 괜찮은 호텔이 갑자기 나타났다.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이곳에 호텔이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현지에서 우리 일행의 이동과 프로그램에 대해서 간사역할을 해준 단체는 SIRA(Central Information Referendum of Aceh)인데, 아체주 부지사가 된 나자르(37세)를 대표로 해서 중앙정부와의 분쟁 당시 자치획득을 위해서 주민투표를 추진해왔고, 지금은 정당으로서 변형과정을 거치고 있는 반정당적 성격을 띄고 있었다. 누구와도 영어가 통하지 않은 관계로 SIRA에 대한 많은 애기는 들을 수 없었다. 다만 한국의 경험에 비추어 정치를 하기에는 너무나 순박한 사람들이고 20~30대의 젊은 청년들로 리더십을 구성하고 있으며 어떤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빈곤과 복지가 주요 관심사라는 점이다. 그리고 당원 중에 여성과 노인 심지어 중년의 남성은 단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SIRA뿐 만 아니라 몇 개의 현지 NGO를 방문했을 때도 거리에서도 시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30년 넘는 분쟁으로 수 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그나마도 쓰나미가 휩쓸어 버린 아체의 현실이다. 굳이 쓰나미 피해 현장을 찾아 다닐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성들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이슬람법을 주법으로 삼고 있는 아체의 문화적 요인도 있었겠지만, 전쟁과 재해의 피해자는 언제나 사회적 약자그룹에게 더 가혹한 것이니 남성보다는 여성이 젊은이 보다는 노인의 피해가 심각했으리라. 이러한 사실은 예정에 없던 노동절행사에 동원되었을 때 더욱 더 실감이 났다. 겨우 50여명이 노동절행사를 갖고 있었다. 쓰나미가 파괴한 것은 단순히 자연환경과 삶의 터전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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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체의 노동절 행사 ⓒ김신 

쓰나미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들어온 국제기구, NGO들이 저마다 내건 영문단체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거의 문맹의 상태에서 우리 일행은 스스로의 자치권을 포기한 채 SIRA의 안내에 따라 먼저 나자르 부주지사와 간담회를 가졌다. 부주지사는 과거의 아픈 기억을 자치권 속에서 풀어내는 것을 과제로 안고 있었다. 지난 30여 년 간의 투쟁의 역사를 민주주의의 역사로 정착하고 과거 분리독립세력을 평화의 세력으로 사회화하여 과거의 상처가 민주적 자치권 속에서 인권과 평화의 문화로 거듭나는 아체인의 삶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일행에게 아체인들은 투쟁에 집중한 나머지 한번도 민주적 삶을 살아 보지 못해 민주주의를 피상적으로 알 뿐이라며 한국과의 민주주의 교육 교류를 제안하였다. 순간 부끄러워졌다. 민주주의가 제도만을 애기하는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의 삶 속의 민주주의 애기라면 오히려 아체의 상황이 좋아 보였다. 가부장적이고 이기적인 권위주의가 가정, 직장, 여타 사회 활동을 지배하고 있는 한국에서의 일상에 익숙한 나에게 직원이 있는데도 단체대표가 길거리 상인과 사소한 흥정을 하고 운전기사와 수행직원이 있는데도 고위공무원이 시장에서 산 점심을 담은 비닐봉투를 흔들고 다니고 상인들 간의 사소한 시시비비에 끼어드는 모습은 뭔가 역할이 잘못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새로웠다.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 학력, 무엇보다 나이와 상관없이 자유롭게 주제를 공유하고 뭔가를 토론하는 모습은 여행 내내 자주 볼 수 있었다. 아체인은 태생문화적으로 민주적일 수 밖에 없다는 어느 동남아학자의 말이 생각난다. 그 태생적 문화가 무엇인지는 아직까지 분명하지 않지만….
 
쓰나미 피해 재건현장과 30년 넘게 지속된 오랜 분쟁의 희생자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사회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쓰나미가 파괴한 아체주의 자연환경과 삶의 터전은 국제사회의 원조로 상당부분 복구되고 있거나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다만 마을 한 가운데까지 7㎞를 밀려와 제 멋대로 정박한 산만한 화물선박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안내자는 성룡이 기금을 내서 중국정부가 재건했다는 성룡마을로 우리 일행을 데리고 갔다. 중국식 건축물로 마을 정문을 세우고 거기에 중국어로 "중국과 인도네시아의 우의촌" 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옆으로는 홍보용 비석을 세워 뭐라 장황하게 새겨놓고 있었다. 정문에 들어서자 우뚝하게 세워진 이슬람사원이 눈에 띄었다. 저 멀리 인도양의 수평선에서도 알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지대에 재건된 마을은 5000여 가구는 되어 보였다. 아체의 전형적인 가옥구조 양식을 띄어 빨간색 지붕과 아이보리색 벽으로 지워진 보기 좋게 일률적인 크기와 모양의 가옥들이 장관이었다. 마을 앞으로는 인도양이 내려다 보이고 주변으로는 녹색의 열대 자연이 펼쳐져 있고 마을 끝까지 시멘트로 포장된 잘 정돈된 차도가 지그재그로 엎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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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룡이 기금을 내서 중국정부가 재건했다는 성룡마을. ⓒ김신 

마을은 차도를 따라 형성되었는데, 언뜻 어느 휴양지에 온 기분이었다. 마을까지 차로 오면서도 급경사가 힘들었는데 입구에서 내려 마을에 들어서자 얼마 못 가 주저 앉게 되었다. 어찌 된 일인지 마을 어디에도 사람이 없었다. 마을 입구에서 몇 가지 생필품을 파는 가게 주인과 아이들 서너 명을 본 게 사람의 전부다. 가게 주인에 의하면 교통수단은 없는데 생계를 꾸릴 수단은 멀리 있어서 주민들이 새벽에 나가 저녁 늦게 집에 들어오기도 하고 아예 일터가 가까운 곳에 간이 숙소를 마련하고 산다고 한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학교도 없고, 시장도 없고, 병원도 없어서 이주된 주민들이 다시 원래 살던 곳으로 많이들 빠져나가고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갈 곳이 마땅한 건 아닌데, 이 마을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떠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굳이 주거권에 대한 개념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잘못된 이주정책의 전형적 모습이다. 이주하게 될 주민들의 의견은 들어나 봤을까? 이렇게 만들어진 마을과 사회시설이 아체에 몇 개나 될까? 가게주인도 곧 마땅한 생계거리를 찾아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막막하게 허공을 주시하며 눈시울만 붉혔다. 그 시선을 따라 가보니 하늘은 구름이 한 점 없이 파랗기만 했다.
 
우리 일행도 이제 아체를 떠날 채비를 해야 했다. 도착하자 마자 일그러지기 시작한 일정에 따라 원래의 일정표 상의 순서와 시간은 오간 데 없어지고 그냥 모든 걸 SIRA에 맡긴 채 진행한 이틀간의 아체 여행을 마무리하고 공항으로 향하였다. 자카르타로 가는 비행기가 두 시간 늦게 출발한다고 한다. 왜 모든 게 두 시간인지 모르겠다. 이쯤 되자, 우리 일행 누구도 이것을 문제라고 느끼거나 이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두 시간이 오히려 반가웠다. 아체에서의 이틀 동안 비록 좋아하지 않는 생선을 주식으로 강요당하고, 가끔은 코코넛으로 배를 채워야 했고, 자치정부 수립 이후의 사회 상황을 현지인의 설명 없이 스스로 알아서 살펴 봐야 했지만, 가끔씩 먹여주는 아체 커피의 향긋함에 느긋해 지고, 아무런 경고 없이 데려다 준 해변가, 파도와 바람이 아니면 누구도 침범해보지 못했을 것 같은 백사장에서 누리던 잠깐의 휴식을 생각하면 나의 선택권과 자치권은 싸 그리 무시되었지만 모든 것이 다 그걸로 그만이다.
 
비행기 창 밖으로 보이는 아체의 산과 바다 강줄기를 사진을 찍듯 눈 속에 담았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다음에 다시 오게 된다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유럽의 시티플래너들이 아체에서 그 플랜리란 것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것이 진실로 바른 길이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김신/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국제사업단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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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여기, 아시아에서 우리, 아시아를 꿈꾸다
이식된 오리엔탈리즘과 패권적 민족주의를 넘어 한국 시민사회의 아시아 연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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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거주하는 아시아계 이주민이 1백만 명에 달하고 해외여행을 떠나는 한국인의 85%가 아시아로 향하고 있다. 최근 들어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한국인들의 생각 속에 ‘아시아’는 미국이나 유럽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고, 생김새와 피부색이 비슷한 ‘아시아인’들은 서구인들보다 더 낯선 이방인으로 머물러 있을 뿐이다.

한 예로 우리는 아시아의 향신료 산지를 장악하기 위해 세계일주를 한 마젤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마젤란을 죽여 필리핀에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아시아인 라푸라푸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거의 없다. 또한 서구로부터 이식된 오리엔탈리즘으로 인해 우리가 아시아에 대해 갖고 있는 관점은 정실주의, 부패, 빈곤, 독재, 미개발, 덜 문명화된 지역 등 부정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아시아계 결혼이주 여성이 늘어나면서 생겨난 신조어 ‘코시안’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우리’와 ‘아시아’를 애써 구분짓고 외국인 배우자의 국적에 따라 아이를 특정화, 대상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껏해야 우리는 ‘아시아 최초’나 ‘아시아 최고’라는 수식어에서나 ‘아시아 속 한국’을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가 펴낸 『우리 안의 아시아 우리가 꿈꾸는 아시아』는 먼저 한국과 아시아를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우리 안의 아시아를 재인식하고 그것을 진정한 ‘우리’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참여연대 홈페이지에 2006년 6월부터 연재된 ‘아시아 생각’ 칼럼을 모은 이 책은 이식된 오리엔탈리즘, 패권적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와 인권이 고르게 보장되는 ‘사회적 아시아’를 향한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은 아시아에 대한 우리의 편협한 사고를 꼬집는 1부 ‘아시아를 향한 성찰’, 현재 아시아 각국이 처해있는 현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2부 ‘오늘의 아시아’, 시민사회의 아시아 연대를 모색하는 3부 ‘아시아 연대를 위하여’로 구성돼 있다. 필진으로는 조희연 성공회대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연구소 소장, 조효제 성공회대 NGO대학원 교수를 비롯해 국내 아시아 지역 연구자, 활동가, 아시아 출신 유학생 등 25명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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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들어가며] 아시아에 주목해야 할 이유 -조효제

1부 아시아를 향한 성찰

○ 아시아의 자존심? -전제성
○ 우리에게 보이는 아시아는 정말 아시아인가? -이재현
○ 한국에서 친구 사귀기 -유완또
○ 국경과 국적에 갇힌 인권 -이재현
○ 인공의 도시, 차이나타운 -백지운
○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이재현
○ ‘메이드 인 코리아’ 낙인의 진짜 이유는… -이재현
○ 신부 사오는 사회 -박이은실
○ 지자체의 국제결혼지원사업을 반대하는 이유 -이재현

2부 오늘의 아시아

○ 아세안, 공동체 버리고 FTA 택하려나 -이성훈
○ 가야 할 길 먼 동티모르의 ‘독립’ -최재훈
○ 징기스칸의 아시아, 몽골의 민주주의 -김은경
○ ‘금권민주주의’가 불러온 태국의 쿠데타 -박은홍
뛰는 경제, 기는 정치 속의 베트남 -이한우
○ 베트남 사회주의와 노동력 부족 현상 -채수홍
○ 필리핀의 공공연한 정치적 살해 -정법모
○ 내가 만난 인도네시아 여성운동가 -정은숙
○ 중국, 그 배반의 이름으로 -김도희
○ ‘조직’ 대신 ‘시민’ 만든 일본 시민사회 -한영혜
○ ‘야만의 시대’에 갇힌 버마, 가스 개발에 눈먼 한국 -박은홍
○ 새로운 네팔을 향한 기회와 도전 -지번 바니야
○ 네팔 총선 국제 선거감시단 활동기 -차은하
○ 필리핀 남부 통근철도사업 이주지역 이야기 -정법모
○ 너무 깊게 드리워진 수하르토의 그림자 -김은경
○ 경제회생 포퓰리즘…한국도 태국,필리핀 전철 밟나 -박은홍

3부 아시아 연대를 위하여

○ 한국 시민사회의 동아시아 연대운동 -전제성
○ 입으로는 ‘아시아 연대’ 외치지만… -지번 바니야
○ 공감은 연대의 또다른 이름 -박이은실
○ 아시아 연대의 한류 -박진영
○ 내가 생각하는 아시아 연대 -제시카 우마노스 소토
○ ‘천국보다 낯선’ 티베트의 잔인한 봄 -나현필
○ 중국과 티베트, 한국의 민족주의 -이대훈
○ 우리의 인권좌표를 넓혀라 -차은하
○ 대상에서 주체로! 아시아 이주민의 위상전환 -전제성
○ 생각을 바꾸는 ‘천원’을 아십니까 -박영선
○ 언어와 연대 : 아시아 이주민들로부터 아시아 언어를 배우자 -전제성

[나오며] ‘사회적 아시아’를 향한 상상 -조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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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기억의 도시가 되려는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설레임처럼 새로운 지역을 간다는 것은 미지에 대한 호기심으로 마음의 밑바닥에서 전해져오는 떨림이 있다. 특히나 평소에 가보고 싶던 곳이라면 더욱 그렇다. 지난 가을에 갔던 타이베이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위치한 지우펀(九份)은 금광이 있던 곳으로 일제 강점기 일본인의 감시 하에 굴욕을 당하던 채광 노동자들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사금 한 조각이라도 몰래 빼낼까 감시하던 광산주들은 야간작업을 마치고 귀가하는 그들의 몸수색을 위해 은밀한 부분까지 거울을 비춰가며 모욕을 주었다.
 
 타이완이 해방되고 광산이 폐광된 이후 지우펀은 잊혀 졌지만 허우샤오셴이 이곳을 배경으로 <비정성시(非情城市)>를 찍으면서 다시 사람들의 기억으로 돌아왔다. <비정성시>는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또 다시 국민당의 통치하에서 한 가족이 당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을 느린 선율로 보여주었던 영화다. 여기서 귀머거리이며 벙어리였던 문청역의 양조위가 뿜어내는 눈빛은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었던 지우펀에 가보고 싶은 욕망을 일으켰다.
 
 그러나 직접 가본 지우펀은 내가 상상하던 곳이 이미 아니었다. 이제는 폐쇄된 지난 시절의 극장 간판만이 이곳이 <비정성시>를 잉태한 지역이었음을 암시하고 있을 뿐 계단으로 이어진 주택들은 이제는 물건을 파는 상점으로 변해 조잡한 상술이 거리 곳곳을 술렁대고 있었다. 카페에 앉아 항구를 바라보며 차를 마시는 수많은 젊은 연인들에게 이곳은 더 이상 타이완의 비극을 가진 역사의 장소가 아니었다. 너무나 보고 싶던 사람을 직접 만나고 나서 '차라리 만나지 말 것을…' 하고 후회하듯이 현실 속에 생생한 지우펀은 내가 기대했던 그곳이 아니었다. 이럴 때 난 내 기억에 배반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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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던가. 지난 4월 중간고사 기간을 이용해 윈난(雲南)성을 가기 전, 나는 또 다시 얼마나 가고 싶었던가를 생각하며 베이징에서 비행기에 오를 때부터 약간의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비행기를 많이 타봤지만 윈난으로 가는 남방항공은 유달리 비틀거리며 요동을 치며 아슬아슬하게 고도 1840미터의 성도(省都)를 향해 날아갔다.
 
사계가 모두 봄(四季如春)과 같다는 쿤밍, 구름으로 둘러싸인 곳, 수많은 소수민족이 살아가는 곳, 이상향 샹그릴라가 있는 곳…. 윈난을 수식하는 미사여구는 다양하게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의 관심은 옥룡설산의 눈 녹은 물이 흐르는, 한옥건물이 즐비한 고성 마을로 불리는 리장(麗江)에 있었다. 리장에 가고 싶었던 건, 이곳이 강진으로 세상에 알려져서도,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윈난에 살고 있는 60여만 명의 20여개 소수민족 중에서 모계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티벳족의 혈통을 가진 머쒀(摩梭)족, 자신들의 문화와 문자(東巴文)를 유지하면서 검은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는 나시(納西)족의 삶을 보고 싶어서였다.
 
2400m높이에 펼쳐진 산과 들판은 이렇게 높은 곳에 이렇게 평화로운 정경이 존재한 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지게 했다. 그러나 높이나 해발, 이것은 과연 누구를 중심으로 한 것일까. 여기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에게 리장은 바로 평지가 아닐까. 머쒀족이 사는 루구(瀘沽)호는 기회가 없어서 못 갔지만, 리장 곳곳에서 나시족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터전에서 나시족 몇몇은 집에서 만든 물건을 내다 팔며, 몇몇은 공원에서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해주면서 살고 있었다. 리장 중심에 위치한 극장에서는 여수금사(麗水金沙)라는 제목으로 리장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소수민족 공연을 하고 있었고, 화려하게 치장한 무용수들이 나시족이 유지하고 있는 전통 혼례관습을 무대에서 보여 주었다. 쏟아지는 박수소리를 들으며 그들의 일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구경거리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것을 나시족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리장이 여행 오는 사람들로 넘쳐나면서 그들이 거주하던 한옥은 거의 모두 상점으로 변해버렸다. 이제 리장은 아름다운 물이 굽이굽이 마을을 돌던 검은 얼굴빛을 가진 민족의 터전이 아니라 지우펀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상점과 물건을 흥정하는 군상들, 밤이면 떠들썩한 음악과 비트에 몸을 맡기고 흥청거리는 젊은이들의 도시가 되었다. 자본의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자본의 힘에 흔들거리는 옛 기억의 장소들을 볼 때마다 불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현실의 리장은 지우펀과 마찬가지로 내가 기대했던 그곳이 아니었다. 하나 둘씩 실망을 안기는 기대의 장소들처럼 지우펀과 리장도 이제 사라진 기억의 도시가 되어버릴 것 같다.

김도희(한신대학교 중국지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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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빈민운동의 결실, 홈리스 센터


2008년 4월 9일은 태국에서 방콕 노이의 철로주변에 노숙자 쉼터가 문을 여는 날이었다. 태국에서 첫 번째로 문을 여는 노숙자 쉼터의 이름은 '스윗 와트누 홈리스 센터'였다. 태국의 홈리스단체 및 빈민단체들이 지속적으로 철도청이나 사회복지부에 지속적으로 요구하여 완성된 시설에 빈민들은 작년에 작고한 빈민운동가 '스윗 와트누'의 이름을 사용되길 원했다. 태국 최대 명절인 송크란 직전에 있었던 개관식에 스님들은 물을 부어 축복했고, 방콕 부시장, 사회복지부 관계자 등을 비롯한 200여 명이 운집했다.
 
미디어에는 이날 참석한 명망가들이나 정부의 지원사업이라는데 의미가 있겠지만, 주민들에게는 빈민지역 주민운동단체들이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직접 참여하여 얻어낸 성과라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가지는 날이었다. 방콕 시내의 공원이나 광장에 산재되어 있는 노숙자에 대해서 쫓아내거나 보호 시설에 수용하던 기존의 국가 정책과는 달리, 금번 노숙자 쉼터는 60여 명이 머무르면서 쓰레기 수거나 막노동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장소로 이용하는 곳이다. 방콕 시내에만 1500명 이상이 넘는 노숙자를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공간이지만 제2, 제3의 센터를 개관하기 위한 교두보로서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빈민이나 노숙자들을 범죄자나 사회의 골칫거리로 치부하는 국가 권력에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던 빈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요구할 수 있게끔 의식과 태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스윗 와트누라는 인물을 '빈민의 대통령'이라 칭한 이유는 이러한 환경의 변화 때문이다. 스윗과의 인연으로 행사에 참여한 한 일본인 홈리스 대표는 자신들의 홈리스센터는 감옥과 같은 곳이었지만, 이 센터는 집과 같은 곳이라고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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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윗 와트누 홈리스 센터' ⓒ정법모

  철길 근처 장기임대 승인 얻어낸 태국 빈민들
 
방콕 시내를 가로지르는 철길 근처에는 어느 개발도상국과 마찬가지로 빈민들이 많이 살고 있다. 1961년 시행된 국가 경제 및 사회 개발 계획 이후에 시골 지역에서 터전을 잃은 빈민들이 대도시로 많이 유입되었고 공유지인 철길 주변이나 다리 밑에 많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주로 도심에서 쓰레기 수집이나 거리 청소, 건설 노동자, 운전기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사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기피하는 일이나 구석진 일들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태국 정부는 '불법침입자'(trespassers)로 규정하고 이들을 도심에서 쫓아내는데 주력해 왔다.
 
빈민운동단체 COPA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전국에 3750개 (513만 명)의 슬럼 지역이 존재한다고 하는데, 최근 태국이 경제 성장하면서 이들에 대한 강제 철거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대략 위에 언급한 지역 중 445개 지역이 철거 중이나 철거 공시를 받은 상태라 한다. 과거 국가 기관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도심 밖으로 쫓기거나 빈민용 공공 주택으로 내몰려야 했던 빈민들도 1980년대 후반부터는 새로운 협상 방법을 시도하기 시작하였다. 사유지나 공유지에서 빈민들이 집합적인 행동을 통해 그 지역에 대한 업그레이드 작업을 맡으면서 저임대의 장기임대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이들은 본인들이 새로운 주택 및 동네 설계를 하여 정부로부터 승인을 얻고 사회복지단체로부터 후원을 받아 직접 주택 건축에도 참여하게 된다.
 
어느 국가에 있는 빈민들과 마찬가지로, 도시 빈민들은 도시 중심이나 도심 변두리에서 자신들의 직업을 찾을 수 있으며 도시의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았을 때만, 비공식부문 직업이나 쓰레기 수거 등의 일을 할 수 있다. 이들을 도시에서 떼어내는 것은 단순히 거주지역을 이동하는 의미뿐 아니라 그들의 삶을 위협하는 것을 의미한다. 태국의 슬럼지역 주민조직의 연합인 '4개 지역 슬럼 네트워크'(Four Region's Slum Network)는 태국 철도청과의 오랜 투쟁과 협상 이후 여러 지역에서 장기임대에 대한 승인을 얻어 내었다. 태국 철도청이 이 지역들은 개인 사업가나 상법 용도로 임대해주던 것과는 달리 2000년 이후에는 집합적인 빈민들의 요구에 응해주기 시작했다.
 
총전체 32000 헥타아르의 철도청 소유의 부지 중 8000 헥타아르에는 도시빈민들이 주거하고 있으며, 이들 인구는 1만7000가구에 이른다. 이들은 효율적이고 성공적인 협상을 위하여, 철도주변 빈민지역을 단계적으로 구분하여 협상하기 시작하였다. 즉 2000년 9월, 약 2년간 언론을 통해 압력을 행사하고 정부기관이나 거리에서의 시위를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지속적으로 알려온 이후, 빈민조직들은 철도청과의 협상 자리에서, 철로에서 20m 이내 지역, 40m 이상 떨어진 지역으로 구분하여 각기 다른 대책을 주장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만들어 냈다. 40m 이상 떨어진 지역은 30년간의 장기계약, 20m에서 40m 지역은 3년간의 임대 및 개발 계획 진행 이전에 원래 거주지역에서 5㎞ 이내에 이주지역을 제공받을 약속을 받는 것, 그리고 20㎞ 이내 지역은 역시 원래 거주지역에서 5㎞ 이내에 있는 이주지역을 보장받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정부기구가 원칙에 합의했다고 해서 그 약속이 곧바로 실행되거나 정부가 적극적으로 집행하는 것과는 다르다. 여전히 주민조직의 집합적인 요구가 있었을 때 이러한 노력들이 실행에 옮겨지며, 범죄자 취급하던 노숙자에 대해서 처음으로 문을 연 노숙자 쉼터도 빈민조직들의 지속적인 요구와 협상에 의해서 이루어진 성과였다.
 
  적극적인 의사 관철, 자금 마련 나선 태국의 빈민운동
 
짧은 기간이었지만 태국의 빈민 지역 내의 주민조직활동은 필리핀에서의 빈민운동과는 또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필리핀에서의 주민조직운동이 의사결정이나 자금 마련에 있어서 다소 NGO에 의존적인 측면을 보인 방면, 태국 주민조직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시켰으며,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자금 마련도 훨씬 적극적이었다.
 
특히 본인들 마을에 대한 계획을 직접 세우고, 당면 과제가 해결한 이후로도 조직이 지속적으로 타빈민지역 문제나 국가적 사안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물론 한 나라의 경제적 발전 수준에 차이가 있다는 점이 중요한 이유가 되겠지만, 경제적 수준이 높은 나라에서도 자발적, 지속적인 주민운동이 실현되지 못하는 사례를 보면, 태국의 빈민운동에서 여러 가지 시사점들을 얻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이 된다.

정법모 (필리핀대학 인류학 박사과정)

<참고> 스윗 와트누의 생애 (COPA 활동가 Ake가 작성한 글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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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법모



촌부리 주의 시골 지역에서 태어났던 스윗 와트누는 군사 독재 시기였던 1971년과 1972년을 대학에서 보내면서 사회 정의나 사회 변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973년 대학 3학년이던 체게바라, 마오쩌뚱, 호치민 등의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면서 학생운동에 관여하기 시작하여1973년 10월 14일 있었던 독재자 축출을 위한 시위에 학생회장으로 참가하였다. 하지만 민중시위를 통해 얻어낸 민주화시기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1976년 다시 군부에 의한 비민주적 통치가 시작되었다. 교육학을 전공하고 1975년부터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그는 여전히 학생운동이나 농민운동에 관련하다 1976년 복귀한 군사독재에 반대하던 학생들을 유혈진압했던 이후, 학교를 그만두고 정글에 들어가 무장투쟁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중간에 많은 학생들이 산에서 내려와 도시로 돌아갔으나 그는 1980년까지는 총창산에서 1985년까지는 춤포주에서 부사령관으로 있으면서 무장투쟁을 계속하였다. 산에서 내려온 후, 1987년에는 두앙 프라테엡 재단에서 일을 하면서 NGO 단체인HSF(Human Settlement Foundation)과 함께 슬럼지역에서의 주민조직 USDA(United Slum Development Association)의 결성을 도왔다. 그 이후 복지 서비스나 지역개발사업을 하던 두앙 프라테엡 재단보다 주민들의 정치적 역량 강화를 추구하던 HSF 일을 1987년부터 맡게 되었다. 매일같이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사람들과 친화 관계를 맺고 일을 하면서 주민들을 조직하고 그들로 하여금 사회문제를 분석할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성실하고 근면한 그의 조직화 방법외에 탁월한 정부부서와의 협상력으로 말미암아 여러 빈민 조직운동들이 성공적인 성과를 내기 시작하였다. 겸손하면서 예의바른 태도 외에 논리적이고 예리하게 상대를 설득하는 힘이 대외 협상에서 좋은 효과를 낳게 하였다. 1998년 USDA뿐 아니라 여러 지역의 주민조직들이 합세하여 4개지역 슬럼네트워크가 결성되었고 스윗은 창시 때부터 이 조직의 자문위원으로 일을 했었다. 슬럼지역 주민 운동에 노숙자들을 포함시켰으며, 도시빈민 뿐만 아니라 농민 그리고 태국 전역에 있는 빈민들을 연계시키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전국 빈민들의 연합 결성체였던 '빈민위원회'(Assembly of the poor)의 자문위원이었으며, 빈민운동들을 아시아 국가나 국제적으로 활동을 교류하게 하는 역할을 맡았다.
 
 빈민들의 정치의식을 고양하는데 힘을 기울였던 그는, 태국에 1992년 군사정권이 다시 들어섰을 때 이 체제에 반대하는 운동에도 관여했다. 이 당시 그는 빈민들에 대해서, 슬럼지역 주미들이 더 이상 자신들의 배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서거나 당면문제만을 푸는 것을 위해서만 투쟁하지 않는다는 점에 뿌듯해 했다고 한다. 일례로 태국 내 민주화 운동을 위해 결성된 '민주화를 위한 슬럼조직(Slum Organization for Democracy)'에는 500 여 명의 슬럼 지역 주민이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빈민조직을 태국내 민주화운동조직인 CPD(Campaign for Popular Democracy) 활동과 연계하는 것도 스윗의 활동이었다. 스윗은 CPD에서 활동하면서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으나 2005년부터는 대안적 진보 정당을 결성하는데 노력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민중들의 대중 정당을 만드는 데에는 여러 영역에서 흩어져서 움직이는 대중운동을 집결할 필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보정당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은 탁신정부의 비민주적 통치로 인한 퇴진운동을 위한 참여 때문에 연기되었다. 스윗은 민주화를 위한 인민연합(People's Alliance for Democracy)에 빈민섹터를 대표하여 참여하게 되었고 탁신이 하야한 이후 스윗은 다시 빈민 섹터로 돌아와 진보정당을 결성하기 위한 노력에 매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2007년 3월 11일 농민 지도자 세미나에 참여했다 돌아오던 중 갑작스럽게 심장질환으로 인하여 5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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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27일 올림픽 성화봉송을 놓고 일부 젊은 중국인들과 다양한 한국인 그룹 사이에 충돌이 있었고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한국에 체류하던 젊은 중국인들이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집단적 애국주의 광기를 표현했고 그 반발로 반중국 여론이 일고 있다. 중국 대사관이 조직적으로 개입한 것이 확인되었고 한국 검찰까지 나섰다. 차이나타운에 발길이 줄고 중국인에 대한 배타적 태도가 훨씬 많이 눈에 띠었다. 수면 밑에서 티베트에 관한 논쟁이 번져나가고 있다. 며칠 지났으니 몇 가지 주제를 짚어보고 깊이 생각할 거리를 찾아보았으면 한다.
 
'올림픽과 티베트 문제를 연계시킨 것은 정치적이고 잘못된 일인가?'
 
한국 사회에서는 티베트에서의 심각한 인권침해에 대해 이제야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니 오히려 뒤늦은 감이 있고, 이 상황을 베이징 올림픽과 연계시키기로 한 것은 피해 당사자인 티베트 망명 그룹과 독립운동 그룹의 결정이므로 존중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도시빈민 철거문제와 노태우 정권의 문제점을 외국에서 상당히 문제제기했지만 이것이 올림픽을 공격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한 나라 정부가 올림픽을 이용해서 독재나 인권침해를 가리고자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정치적 음모에 가깝다고 할 것이고 중국 정부가 이러한 비난에서 그리 자유롭다고는 볼 수 없다. 이는 인권단체들만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올림픽에 참여하는 운동선수들도 주최국 정부의 정당성과 인권 수준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런 것이 오히려 올림픽의 정치화를 막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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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징 올림픽 성화가 도착한 지난 달 27일 오전 서울 올림픽 공원에서 한국내 거주하는 중국인들이 올림픽을 축하하는 집회를 갖고 있다. ⓒ뉴시스 

'현재 국제정치 역학을 고려해서 중국 정부를 좀 배려해주고 외세에 대한 피해의식을 고려해 주어야 하지 않는가? 또 대국인 중국을 지나치게 자극하면 원하는 결과의 반대를 얻는 역효과를 내는 것 아닌가?'
 
결국 조심해라라는 경고인데, 역효과를 얻을 것이라고 확증할 만한 근거가 별로 없는 우려일 뿐이다. 그 만큼 중국 사회의 애국주의 광풍이 무섭다는 반증일 것이다. 히틀러가 등장할 때 어려운 상황의 독일을 좀 더 배려해 주었어야 했는지, 서구 열강과 경쟁해서 아시아의 자부심을 얻고자 했던 일본제국을 좀 더 배려해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이스라엘의 만행도 배려하고 조심해서 비판한다? 식민지 피해 경험 때문에 그렇다는 것은 피해의식이 특정한 광기와 결합되면 더 공격적인 태도로 변한다는 점에서 중국 변호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피해의식은 파시스트들도 잘 쓰는 상품이다. 소수 집단의 인권과 자결권을 보장하라는 외부의 관심에 대해서 중국 사회에서 어떤 역효과가 난다면 그 역효과는 중국의 정치와 권력구조 그리고 대중문화의 산물일 것이다.
 
'중국 점령 이래 생활 조건이 더 좋아졌고 중국 정부가 끝까지 불허할 텐데 티베트가 꼭 독립할 필요가 있나? 독립한다고 티베트인들의 생활과 민주주의, 인권 이런 문제가 해결될까? 중국에 남아서 협상하는 것이 더 낫지 않나?'
 
이건 강자의 어법이다. 제국주의자들의 어법이다. 한국도 일본 강점 덕분에 근대화되었고 잘 살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어법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인권이나 민주주의 기준보다 친중국 정서를 더 중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일단 티베트인들에게 말할 자유, 결사할 자유, 행동할 자유부터 주고 나서 그 다음에 이 질문을 하던지 말던지 하면 된다. 앞뒤가 바뀌었다. 그만 죽이고 그만 고문하고 그만 투옥하고 물어야 한다. 티베트 독립이나 더 높은 자치는 절대 안된다는 중국 정부의 체계적인 선동과 세뇌를 중단한 다음에 물어야 한다. 티베트인들은 원래 야만적("봉건적")이었으니 중국이 해방시켜주었다는 선동을 중단한 다음 물어도 된다. 고문하고 학살한 것에 대해서 사과도 하고 반성도 한 다음 물어도 늦지 않다. 그리고 나서도 티베트 사람들이 대부분 중국에 남겠다고 하면 별 문제 없지 않겠는가. 그럴 리 없으니 탄압하는 것이겠지만.
 
'미국과 친미반중국 세력이 티베트 인권 문제를 중국때리기에 악용하는 것은 어찌해야 하나?'
 
이것은 중요한 문제다. 일부 중국 시위대의 폭력 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다. 한국 사회에 티베트 인권운동 그룹들이 이 문제에 잘 대처해야 한다. 일단 미국 정부와 친미반중국 세력의 정치음모적 접근은 잘못되었다고 시민사회 내부에서 강한 질타가 있어야 한다. 세계적으로 인권문제에 미국 정부가 개입하면 골치아파진다. 조폭이 자선사업을 하는 꼴이랄까. 이럴 때 인권 단체들은 이중의 비판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즉 미국 정부의 접근과 일부 기독교세력을 포함한 반중국 세력의 접근에 대해서 호된 비판을 가하는 동시에 티베트 문제를 제기함으로서 이 문제에 정면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중국때리기 방식의 접근을 비판하지 않으면서 티베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위험하다. 인권문제를 제기할 윤리적 자격이 중요하다. 중국 시위자에 대해서 엄벌을 요구하며 일종의 보복을 설파하는 것도 매섭게 비판해야 한다. 한국에서 반중국 민족주의 선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패권국가적 접근,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당파적 접근, 민족주의적 접근에 대해 항상 비판을 유지하면서 모든 인권 문제를 불편부당하게 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구더기 무서워 장 안 담글 수는 없으니. 서구가 한 짓은 더 한데 뭘 그러냐고 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인권의 영역에서는 답변할 가치가 없다.
 
어떻게 해야 하나?


27일 종각에서 광화문으로 행진한 비교적 합리적인 티베트 인권 행진에서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부 사람들이 동북공정과 티베트 점령이 같은 것이라며 한국도 언젠가 티베트 처럼 당할 것처럼 선동한 것이나, 어떻게 한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저런 난동을 펴는지 분개하는 모습은 이해가 가는 면도 있지만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러한 정서의 연장선상에서 지금 국내 체류 중국인들에 대한 반감이 다양하게 표시되고 있는데 이건 큰 문제다. 이것인 중국 정부가 외세에 대한 피해의식을 앞세워 탄압과 인권침해를 정당화하는 것과 같은 논법이다. 한국의 민족주의를 동원해서 중국을 비판하겠다는 것인데 이 길로 가면 모두 망한다. 인권과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런 집단적 피해의식을 그만 동원해야 한다. 모든 형태의 민족주의에 경계령을 내려야 한다. 집단의 피해를 앞세우는 순간 독재자, 파시스트, 민족주의자, 군부 보통 이런 사람들이 미소를 짓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민족을 생각하게 하는 집단 호칭을 국어에서 싹 빼고 생각하고 말하자. '중국인들'이라고 하지 말고 '일부 폭력행위자'라고 말하자. '감히 남의 나라 수도에서 이런 일이..' 하면서 분개하는 대신 '평화적 시위에 폭력을 행사하다니'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이 한국을 얕보니까'라고 말하지 말자. 그런 중국과 한국은 인격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인들은...'이라는 주어를 가급적 피하자. 애국주의 광기와 관련되어서 주 책임은 중국 정부이므로 '애국주의 교육에 피해자인 중국인들', '정부의 세뇌공작으로 편견을 갖게 된 중국 청년들은' 하면서 이해할 수 있다. 중국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이렇게 국민이나 민족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는 걸 피하면 더 많은 진실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한국도 마찬가지 - '강부자' 내각과 한나라당에게 하나의 나라가 없듯이 원래 하나의 나라에 한 나라는 없다.

이대훈(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실행위원)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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