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운동권에 ‘아시아연대’가 새로운 키워드로 부각되고 있다. 그 아시아연대의 중심대상지는 ‘동아시아’(동북아+동남아)이다. 서남포럼의 추산에 따르면, 동아시아연대를 역점사업으로 추진하는 시민사회단체는 100개에 육박한다. 참여연대는 2004년 창립 10주년을 맞아 아시아연대활동의 활성화를 주요사업으로 상정했으며, 올해부터는 국제연대위원회의 아시아연대사업을 본격 가동하기 시작했다. 한국인권재단도 아시아연대를 주요 역점사업으로 삼고 동남아 인권문제에 대한 조사와 활동가교류프로그램을 지원할 계획이다. 이밖에 ‘함께하는 시민행동’ ‘버마행동’ ‘국제민주연대’ 등 20여개 단체가 버마(미얀마)의 인권침해를 규탄하고 관심을 촉구하는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으며, ‘바스피아’도 아시아 여성과 아동의 권리보호를 목적으로 활동을 개시했다.

인권운동단체뿐만 아니라 노동운동계의 아시아연대도 활발하다. 대표적으로 ‘아시아태평양노동자연대 한국위원회’는 아시아레이버넷 웹사이트를 만들어서 아시아의 노동정보와 동영상을 영어나 아시아 언어로 게시하는가 하면 한국과 동남아의 단위노조간 자매결연을 통한 풀뿌리연대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그 밖에 환경운동, 여성운동, 소수자운동, 평화운동, 문화운동, 학술운동 등의 분야에서도 많은 단체들이 동아시아연대활동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홍콩, 필리핀, 태국, 말레이시아 등 동아시아 각지의 초국적 단체들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활동가들도 한국의 동아시아연대운동에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이러한 동아시아연대운동은 동아시아를 담론의 대상에서 실천의 영역으로 구체화하는 작용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아리랑’의 김산처럼 한국 독립을 위해 중국혁명에 뛰어든 실천방식이나 안중근처럼 동양인의 정체성에 입각해 일본의 침략을 질타했던 논리에서 간파되듯이, 한국 사회 동아시아연대운동의 기원은 해방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해방이후 한국전쟁과 냉전으로 동아시아의 지역적 연대 구상과 실천은 그다지 두드러지지 못했다. 아마도 한국사회의 동아시아연대 이니셔티브는 90년대 이후의 산물일 것이다. 90년대 이후는 한국인 자본의 동아시아 투자와 동아시아인의 한국 유입이 두드러진 시대이다.

88년부터 한국인기업들은 ‘값싸고 온순한 노동자’를 찾아 인도네시아에 대거 진출하기 시작했다. 90년대에 이르러 베트남과 중국이 주요투자지로 추가되면서 자본의 동아시아 진출이 러시를 이루게 된다. 이런 가운데 현지 한인공장에서 현지노동자들의 인권침해 소식이 전해지고 이에 따른 현지 노동단체들의 반발과 지원요청이 답지하면서 해외 한국기업의 인권침해는 운동단체들로서는 좌시할 수 없는 시급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참여연대가 95년부터 한국해외진출기업문제 특별위원회를 결성하여 동남아와 중국에 투자된 한인기업의 인권침해 문제를 조사하는 사업을 전개하였다. 참여연대의 활동은 한국 주도 동아시아 사회운동연대의 선구적 사업 중에 하나였다.

또한 90년대 이후부터는 한국자본주의가 아시아의 외국인노동자들을 끌어들여야만 가동되는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최근에는 동아시아 여성들이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에 거주하는 ‘동아시아적 인구재생산’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이러한 아시아 여성 및 노동자의 한국러시는 수백개에 달하는 외국인노동자 및 이주인권운동단체의 출현을 유발하였다. 요컨대 한국과 동아시아간 자본과 인구의 이동을 핵심으로 하는 사회경제적 변화는 결국 ‘동아시아 속의 한국’과 ‘한국 속의 동아시아’에 대한 성찰과 함께 공동실천을 자극하게 됐다.

한편 한국 경제의 위기상황도 동아시아 연대의 필요성을 제고시켰다. 97년에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이 함께 경제위기를 맞이하는 상황은 동병상련의 공감대를 낳으며 각국의 시민사회가 공동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인식을 고양시켰다. 특히 노동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 진영이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이를테면 민주노총이 동남아지역의 노동운동에 대한 조사단을 파견하고 보고서를 발간한 것이나 아시아초국적기업감시네트워크(ATNC)에 관심을 갖고 참여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동아시아연대운동은 정치외교적 계기를 통해 가속화되었다. 그것은 바로 ‘위로부터의’ 동아시아지역협력의 심화이다. 아세안(ASEAN)+3(한·중·일)을 추진축으로 하는 정부간 지역협력은 경제위기 이후 날로 강화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간 동아시아지역 협력의 심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사회운동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참여와 영향력 행사는 좀처럼 실현되지 않고 있다. 한국의 사회운동은 아시아연대를 주장하면서도 주로 유엔 산하기구들을 협력의 대상으로 고려하고 아시아의 지역협력기관은 진공상태로 내버려두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동남아의 사회운동이 우리보다 앞서 있다. 아세안을 상대로 압력과 교섭의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방콕에 사무국을 둔 포럼아시아의 이성훈 실행소장의 말처럼 “한국에서 동아시아연대는 담론이고 동남아에서는 현실”인 셈이다.

한국시민사회의 동아시아연대운동은 역사가 짧고 인적·물적 자원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의 이웃 국가들로부터 연대활동에 대한 요구는 늘고 있다. 한국이 서구에 비해 지리적으로 가깝고 한국 사회운동의 목표와 과제가 자신들과 유사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인도네시아 사회운동가들은 2004년 총선시기에 한국의 낙천낙선운동을 ‘수입’하여 조직적인 캠페인을 전개한 바 있다. 그들은 양국 활동가의 교류방문이나 연수 기회 확대를 요청하고 있다.

그런데 성급해서는 안될 것이다. 자신을 한국 노동운동 ‘팬클럽 회원’이라고 표현하는 태국 여성노동운동가 렉(Lek)은 “팬클럽 회원들이 한국을 무척 좋아하면서도 한국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말한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동아시아연대운동을 전개하면서도 동아시아에 대해 잘 모른다. ‘전태일평전’을 번역하고 있다는 렉은 한국 활동가들이 ‘형제’보다는 ‘큰형’처럼 행세하려 하거나 자기들끼리만 어울리며 타문화에 대해 다소 폐쇄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문제라고 꼬집는다. 한국 노동운동의 ‘아시아 리더십’을 기대한다는 태국의 중견활동가 솜욧(Somyot)도 한국 노동운동이 아시아전체의 이슈가 아니라 국내적 관심사를 밖으로 들고 나오는 한계가 있다고 비판한다.

동아시아연대운동은 우리 것을 알리고 고수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배워나가고 변할 것을 요구받는, 쉽지 않은 작업이다. 우리가 동아시아를 이미 알고 있다는 식의 생각이나 그들도 우리가 지나온 길을 그대로 따라올 것이라는 생각은 서구의 근대화론을 답습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서로 배우려 하지 않으면 연대운동은 발전하기 어렵다.

태국서 ‘임을 위한 행진곡’ 울려퍼지다

방콕에는 태국노동자박물관(Thai Labour Museum)이라는 아주 흥미로운 장소가 있다. 비록 태국가이드북에는 빠져있으나 화려한 왕궁과 흥청대는 술집에 가려진 태국의 이면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다. 이 박물관은 노동사의 측면에서 고대, 근대, 현대의 태국사를 사진과 동영상으로 재현하고 있다. 이곳의 관리는 태국사회운동가들에게 널리 알려진 노동자밴드 파라돈(Paradon)이 맡고 있다. 이 때문에 박물관을 방문하면 덤으로 민중가수들을 만나고 그들의 음반을 구입하며 사인을 받을 수 있는 특별한 기회도 가질 수 있다.

태국노동자박물관의 6개 방 중에서 하나는 태국노동가요사에 관한 기록영화를 보여주는 곳이다. 이 영화에는 노동가요 4곡이 소개되는데 마지막 곡이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에 태국어로 가사를 붙인 ‘솔리대러티’(Solidarity:연대)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하는 운동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를 영어로 소개한 뒤에 한국 노동자들의 시위장면과 함께 원곡이 흘러 나온다. 곧바로 대만판·홍콩판에 이어 태국어로 된 노래가 연주된다. 처음 이곳을 찾는 한국인 관람객들에게는 깜짝 놀랄 만한 일이다.

한류의 시초가 4·19혁명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1960~70년대에 서구와 제3세계에서 들불처럼 번진 학생시위의 원조가 바로 4·19혁명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래에 있어서 한류의 원조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그런데 태국의 노동자밴드가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에는 아시아 연대에 대한 희구가 담겨있다. 1990년대에 한국을 찾은 태국노동정보센터소장 솜욧은 한국의 어느 대학교에서 처음 이 노래를 듣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 노래 테이프를 태국으로 가져가 계층의 연대를 통해 좋은 세상을 만들자는 내용으로 가사를 바꿔 부르기 시작했고, 마침내 노동자밴드 파라돈의 공식음반에 수록됐다.

그 뒤 이 노래는 각종 집회와 기념식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애창되면서 널리 유행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태국으로 건너가 노래의 운율이 비장한 원본을 탈피하고 경쾌하게 변형됐다.

그래서 태국의 노동자들은 이 노래를 들을 때 활기찬 율동을 섞곤 한다. 솜욧은 “이 노래를 활동가교육 때 즐겨 불렀다”면서 “그것은 한국의 광주항쟁과 노동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며 국제연대의식을 고양시키려 했기 때문”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숌욧의 이야기는 동아시아 연대에서 한국 사회운동의 책임성과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 이 칼럼은 경향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전제성(전북대 정치사회학부 교수,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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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시아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 등 아시아를 다시 지리적으로 나누어 부르고 있다. 이런 분류를 하는 동안 아시아에서 잠시 잊혀져 있던 국가가 바로 징기스칸의 나라, 몽골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머물고 있는 아시아계 이주인들 중 몽골인이 2만명을 넘어섰다고 하면 모두 놀라는데, 생김새가 워낙 비슷해서인지 주변에서 몽골인을 보았거나 만났다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만큼 몽골인은 우리와 비슷하고 가까이 와있지만, 우리는 아직 그들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

권위주의 체제로부터 ‘체제 전환’이나 형식적 혹은 절차상의 ‘민주화’가 이루어지게 되면, ‘민주주의의 공고화’ 내지 ‘실질적인 민주화’라는 과제에 부딪히게 된다. ‘민주화’ 자체가 곧바로 민주주의를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몽골역시 헌법과 같은 제도적 장치는 이미 갖추어졌지만,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운용에 직면하고 있는 상황이다.

몽골은 1992년부터 신헌법에서 민주주의를 본격적으로 수용하고, 대통령을 국가수반으로 한 의원내각제 형태를 갖추었다. 몽골은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발전의 이행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는 신생 민주주의 국가이다. 오래된 유목민의 생활풍속과 마르크스주의 정치이데올로기는 여전히 강하며, 수동적인 국민성과 국가를 숭배하는 전통은 과거 전체주의 지배에서부터 널리 퍼져있던 현상이다. 몽골은 미국에서 흔히 말하는 “God bless you"라는 표현대신, "State bless me"라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로 국가에 대한 의존도가 강하다고 한다.

몽골에서는 사법제도도 아직 미숙하고, 행정부의 행정서비스도 관료주의적이며 권위주의적이고, 의회의 법안 작성 과정도 투명하지 않다. 농촌 인구가 점차 도시로 유입되면서 농촌의 빈곤은 심화되어 가고,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는 정당과 연계가 닿아야 하는데, 특히 정부 기구나 국영기업에 취직할 때는 더욱 심하다.

1990년부터 시민단체, 기관, 협회들의 설립 과정이 왕성해지며, 2000년도에 공식적으로 1,800여개의 비정부조직이 등록되었다. 2005년의 경우 4,700여개의 비정부조직이 법무부에 등록된 것으로 나타났다. 시민사회에 대한 최근 조사결과 인구의 거의 절반(약45%)이 최소한 하나의 비정부조직 회원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몽골의 NGO는 주로 인구가 밀집된 도시지역을 기반으로 설립되어 있다. NGO의 80%가 수도인 울란바토르에 있고, 이들 NGO는 청소년, 아동, 여성, 가족, 인권, 사회복지, 국제협력 등의 이슈를 위해 일하지만, 지역사회 발전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는 편이다. 그러나 몽골 NGO의 특징은 정당 소속이거나 정당을 후원하는 활동을 공공연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몽골 정치의 최대 난제는 부패 척결이다. 2004년 조사에 따르면 몽골 국민의 88.9%가 부패가 몽골 전국적으로 만연하고 있다고 응답하였다고 한다. 몽골의 부패지수는 3.0으로서 부패가 거의 통제되지 않는 정도이다. 2005년 10월에 수행된 조사에서는 국가 관료가 가장 부패한 집단으로 집계되었다. 최근 정계와 사기업간의 연계가 강화되면서 정경유착의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몽골은 민주적 제도들을 모두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의 둔화와 민주적 제도들 속에 위치한 부패의 고리 등으로 인해 제도의 운영이 민주적으로 실행되지 못하고 있다. 몽골은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는 점에서 우리의 과거 정치를 떠오르게 한다.

최근 몽골시민들의 정치에 대한 불만과 시위운동이 커지고 있다. 특히 국회입법안을 무효로 하거나, 정부 고위직 인사들에 대한 사임 압력을 가하는 등 정치적 민주화를 위한 운동이 활발하다. 몽골의 전통적 문화인 국가에 대한 신봉이나 NGO와 정부 및 정당과의 친밀한 관계는 순수한 NGO로 거듭나기 위해 넘어서야 할 과제이며, 진정한 시민사회 정착을 위한 실마리를 풀어야 할 지점이다. 몽골의 시민사회를 고민해보면서, 지금 현재 한국의 시민사회와 NGO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김은경(한국여성개발원 전문연구원,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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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한 방송사에서 2006년의 모토로 내걸은 “아시아의 창”이라는 말에 아시아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무척 고무되었던 기억이 있다. 새해 첫날부터 아시아 각국을 연결하여 새해를 맞이하는 각 국가의 표정을 입체적으로 중계하고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소개하는 것을 보며, 그리고 한동안 몇몇 다큐멘터리, 고정 프로그램 등을 통해서 “아시아”라는 단어를 연발하는 것을 보며 “우리나라에도 아시아에 관한 관심이 이만큼 높아졌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왜 아시아인가? 아시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아시아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아시아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 등의 심도 깊은 질문에 대한 답을 이런 프로그램들에서 찾겠다는 희망을 하지는 않았다. 나의 기대수준은 아시아가 방송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되면 관심이 높아지지 않을까 정도였다. 하나 덧붙이자면, 방송의 다양한 시도들을 통해서 우리 눈에 들어오는 아시아가 왜곡되지 않은 모습이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올 한해의 반환점을 도는 시점에서 이 방송사의 “아시아”에 대한 강조가 연초만 못하다는 아쉬움은 이미 접었지만, 그래도 꼭 한가지 이야기는 하고 싶다. 이 방송사에서 꾸준히 아시아를 다루고 있는 한 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이 심야에 방송이 된다는 점도 탓하고 싶지 않다. 지난 몇 달간 이 프로그램에 방송된 내용들을 보면 한주에 방송되는 두세 꼭지 중에 하나는 이런 제목을 달고 있다.

- 중국의 인간변압기, 별걸 다 먹는 남자, 혀로 그림 그리는 남자

- 일본의 로빈슨 크루소, 귀신이 봉인된 그림, 머리카락이 자라는 인형

- 베트남의 난쟁이 가족, 6.8m 장발 할아버지

- 태국의 바위손 아줌마, 휘발유 먹는 남자

- 터키의 네발로 걷는 가족, 박쥐이발관

- 캄보디아의 불개미요리, 말레이시아의 인간자석

물론 “오락성과 정보성을 겸한 새로운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라는 해당 프로그램 웹사이트의 소개처럼 오락성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제들은 아시아 각국, 각지에 있는 흥미위주의 눈요깃거리만 찾아다닌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게 한다.

서양이 처음 동양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럴 거라 생각이 되지만) 자기와 다른 대상을 이해하려는 진지한 관심 보다는 뭔가 이국적인(exotic)인 것에 관심을 두고 시작한 것처럼 지금 한국에서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뭔가 이국적인 것에 대한 흥미위주의 관심은 아닌가 의심해볼 만하다. 인간과 현실에 대한 진지한 관심은 없고 단순한 말초신경적인 재미만 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볼 일이다. 나아가 단순한 흥미위주의 접근이 도를 넘어서 아시아를 요상하고 웃기는 것으로 전형화하지는 않고 있나 생각해 볼 일이다.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의 혼혈인 숫자가 2020년 즈음해서는 167만 명이 될 것이고, 20세 이하 인구 5명중 1명은 혼혈인이며, 신생아 3명중 1명이 혼혈아가 될 것이라 한다. 또 2005년 충북 보은에서 혼인신고를 한 205쌍 중 82쌍(40.4%)은 국제결혼을 한 부부들이다. 2006년 초 통계에 의하면 국내 거주하는 여성 결혼 이민자는 총 6만6천659명으로 재중동포가 41.6%(재중동포도 한민족이라고 하지만 정말 그들을 차별없는 눈으로 보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중국인이 20.1%, 베트남인이 11.1%, 일본인이 10.7% 등으로 이들이 83.5%를 차지하며, 기타 국적도 필리핀, 캄보디아, 태국, 라오스, 인도네시아 등 대부분 아시아 국가들이다.

이미 아시아는 한국 속에 깊이 들어와 있다. 이제라도 단순한 흥미를 넘어서 아시아인들은 누구이며, 아시아는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 속의 그들과 우리가 더 큰 새로운 “우리”가 되어 어울려 살 수 있는 그런 사회를 위해서.
이재현 (한국동남아연구소 선임 연구원,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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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만 국제연대 활동가인 제게 동티모르는 특별한 기억으로 다가오는 곳입니다. 1999년 8월에 치러진 독립 주민투표 당시 민간선거감시단 자격으로 약 보름간 동티모르에 머문 적이 있거든요. 그런 제게 두어 달 전 동티모르에서 들려온 소식은 당혹스럽고 착잡한 것이었습니다. 25년에 걸친 인도네시아의 침략과 군사점령 하에서 인구의 4분의 1이 희생되면서도 독립의 꿈을 놓지 않았고, 결국은 그 꿈을 이뤄냈던 동티모르 사람들. 도대체 그들의 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고난과 희생 끝에 되찾은 ‘독립’

16세기부터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동티모르는 1974년 포르투갈의 청년 장교들이 파시스트 정권을 몰아낸 뒤 식민지 해방을 약속하면서 독립의 꿈을 품게 됩니다. 그러나 호시탐탐 동티모르를 노리던 인도네시아가 75년 12월 7일, 1만 여 명의 육·해·공군을 동원해 전면적인 침략을 단행함으로써 이 꿈은 물거품이 되죠. 아름다운 동티모르의 바다는 붉은 피로 물들었고, 그 짧은 기간동안 전체 인구 70만 명 중에 약 6만 명이 살해된 뒤, 동티모르는 공식적으로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로 병합되었습니다.

그 당시 강대국들은 인도네시아 침략의 든든한 후원자, 방조자 역할을 했습니다. 동남아시아의 공산화 도미노를 막기 위한 교두보로서 인도네시아의 전략적 중요성을 높이 산 미국은 대통령과 국무장관이 자카르타를 방문해 동티모르 침략을 ‘허가’해주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도 79년 2월에 세계 최초로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합병을 승인해주었습니다. 이 외에도 영국은 전투기를, 네덜란드는 전함을, 프랑스와 캐나다는 탱크와 헬리콥터를, 이스라엘은 기관총을 인도네시아에 판매했습니다. 그 무기들이 동티모르 민중 학살에 쓰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눈 딱 감고 무기 수출에만 열을 올린 거죠.

79년까지 인도네시아 군대가 전개한 포위섬멸작전으로 저항운동은 거의 궤멸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타난 지도자 샤나나 구스망이 조직을 다시 추슬러 민족해방군을 창설하고, 전선운동조직을 재편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라 밖에서는 주제 라무스 오르타(1996년 노벨평화상 수상)와 마리 알카티리를 중심으로 한 망명 활동가들이 온갖 냉대와 모멸을 견디며 국제사회의 지지와 연대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한, 가톨릭 교회와 성직자들은 민중들이 독립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도록 정신적인 기둥 역할을 했습니다.

90년대로 접어들어 국제사회의 여론이 급격히 불리해지자, 인도네시아는 결국 99년 5월, 독립 여부를 동티모르인들이 스스로 결정하는 주민투표 실시에 합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8월의 독립투표에서 98.5% 투표율에 78.5%의 찬성으로 동티모르의 독립이 결정되었습니다. 2002년 5월 20일, 동티모르는 ‘티모르 레스테(Timor Leste)'라는 이름으로 21세기 최초의 독립국가로 탄생하게 됩니다.

신생 독립국 티모르 레스테에 대체 무슨 일이

이제 2006년으로 되돌아와, 한동안 잊혀졌던 동티모르는 반란과 폭동이라는 우울한 단어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되살아납니다. 겉으로 알려진 사건의 발단은 승진, 보수에서 차별을 당했다고 여긴 서부지역(서티모르가 아닙니다) 출신 군인 600여 명이 2월부터 파업을 벌이고, 정부가 이들을 강제전역시키자, 4월 28일부터 정부군 및 경찰과 해직군인들 사이에 유혈사태가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그 뒤, 국방, 내무장관이 잇따라 해임되고, 호주를 비롯한 뉴질랜드, 포르투갈, 말레이시아 4개국 2,700여 명의 다국적군이 파견되었습니다. 결국 6월 26일 마리 알카티리 총리까지 사임한 뒤 7월 8일 주제 라무스 오르타 외무장관 겸 임시조정장관이 새 총리로 지명되면서 사태는 외형상 수습 국면으로 접어들게 됩니다.

그러나 몇 가지 의문점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로 남습니다. 반란을 일으킨 군인들의 유일한 요구사항이 왜 하필 알카티리 총리의 사임이었을까요? 반란군이 대통령의 요청으로 순순히 무기를 반납하고 대통령은 이들을 처벌하지 않겠다고 한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대통령과 총리가 함께 파병 요청을 하기 전까지는 군대를 파견하지 않겠다’던 오스트레일리아는 왜 갑자기 태도를 바꿔 1,300명이나 되는 군대를 서둘러 파병했으며, 왜 다국적군은 적극적으로 반란군을 진압하거나 질서를 회복하려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들 말입니다.

이에 대해 동티모르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진실은 다른 곳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번 사태는 마리 알카티리 총리를 겨냥한 ‘외부세력을 등에 업은 권력 내부의 쿠데타’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외세를 등에 업은 권력다툼의 내막

먼저, 군대 내의 출신지역에 따른 차별이 진짜 원인이었는가를 짚어보지요. 지금의 동티모르 군대는 총사령관인 타우르 마탄 루악을 비롯해 대다수가 과거의 민족해방군 출신들입니다. 독립운동 당시 동부지역에서 민족해방군의 세력이 더 컸었고, 상대적으로 서부지역은 친인도네시아 민병대 세력이 세긴 했었지만, 민족해방군 내부에 지역, 인종간의 갈등은 없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군대에도 지역갈등의 징후는 없고요. 그렇지만 군 내부에서 알카티리 정부에 대한 쿠데타 시도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있었습니다. 루악 사령관조차도 작년 4월과 올 초, 쿠데타 제안을 받고 거절한 적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를 토대로 짐작해보면, 군 내부의 지역 차별은 처음부터 실재한 것이라기보다는 알카티리 총리를 몰아내고자 하는 그 ‘누군가’에 의해 부추겨지고 왜곡, 과장된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한 것이지요.

그 ‘누군가’의 실체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다만, 동티모르 정부의 권력 내부, 구체적으로는 과거 독립운동을 같이 한 동지들 간에 갈등이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동티모르의 정치 형태는 4권 분립(대통령,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체제입니다. 2001년 8월의 제헌의회 선거에서 전체 88석 중 55석을 차지한 집권당의 알카티리 총리가 헌법상 정부수반으로서 국정을 주도하고, 샤나나 구스망 대통령은 대외관계에서 상징적인 역할만을 하는 체제입니다. 이 때문에 독립운동 지도자로서의 기득권을 내놓았다 해서 한 때 구스망 대통령을 칭송하는 목소리도 있었는데요, 사실 구스망 자신은 강력한 대통령제를 원했다가 뜻대로 안되자 아무런 권한이 없는 대통령직에는 관심이 없다며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으려고도 했다죠.

아무튼, 국정운영권을 쥔 알카티리 전 총리는 재임 기간 중 ‘문 뒤에서 향연을 벌이는 부자들’이 없는 점진적인 개발정책을 취했습니다. 동티모르의 석유와 천연가스를 노리는 오스트레일리아, 미국과도 거리를 유지하려 했고,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의 개발자금을 거부하기도 했죠. 이런 알카티리를 가리켜 구스망과 그의 지지자들은 ‘앙골라 공산주의자’라 부르곤 했습니다(알카티리는 아프리카에서 망명생활을 했습니다). 그에 반해 구스망 대통령은 확실한 친오스트레일리아 노선을 걸었습니다. 그의 수십 년 동지이자 이번에 총리로 지명된 오르타와 함께 말이지요.

오스트레일리아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미국’을 스스로 인정하는 나라입니다. 미국도 그걸 인정하고 있고요. 1999년 독립선거 이후 친인도네시아 민병대의 난동으로 동티모르가 쑥대밭이 되어 유엔 산하 다국적군이 구성될 때도 그랬고, 이번에도 가장 많은 군대를 파병하면서 동티모르의 후견인을 자처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지요. 그런 오스트레일리아가 바라는 것은 단순합니다. 바로 티모르해에 매장되어 있는 석유와 천연가스의 채굴권을 확보하는 것, 그리고 동티모르를 발판으로 동남아시아 역내 주도권과 영향력을 유지, 강화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바로 알카티리 정부는 걸림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호주 최대 일간지 <더 오스트레일리안>의 외신부장 그렉 쉐리던은 이렇게 단언합니다.

“만약 알카티리가 총리직을 유지한다면, 이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무기력함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결과가 아닐 수 없다. 1,300명의 군인들과 50명의 경찰관, 수백 명의 지원인력, 수많은 구호물자를 쏟아 붓고도 이 재앙에 가까운 마르크스주의자 총리를 제거할 만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면, 국익을 증진시킬 능력이 없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강대국 틈에 낀 약소국의 운명

이와 같이 확실한 증거만 없을 뿐, 오스트레일리아가 ‘반알카티리 쿠데타’에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동티모르 권력 내부에서 쿠데타를 실행에 옮긴 그 ‘누군가’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구스망과 오르타? 아니면 제3의 세력? 글쎄요…….

어찌 됐건 알카티리는 이제 총리직에서 물러나 정적제거 음모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는 처지가 됐습니다. 반란군은 총을 내려놓고 복귀를 준비하고 있으며, 내각은 새로운 인물들로 채워졌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이 장갑차를 타고 순찰하는 거리에서는 총소리가 잦아들었습니다. 과거의 끔찍했던 학살과 약탈의 공포를 떠올리며 집을 떠났던 15만 명의 난민들은 다시 하나 둘 집으로 돌아와 예전처럼 하루하루의 끼니를 걱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20만 명의 생명을 역사의 제단에 바쳐가며 동티모르가 그토록 갈망했던 ‘독립된 나라에서의 평화로운 일상’일까요? 오늘의 동티모르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낀 약소국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 이 칼럼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만드는 참여사회> 2006년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최재훈 (경계를 넘어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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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結婚, marriage)이란 것은 지구 위의 짝짓기하는 어떤 다른 동물들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인간 특유의 문화제도이다. 결혼이 단순히 각기 다른 개인이 누군가와 함께 생활하는 형태를 말하는 것만이 아닌 이상 그러할 것이다. 사람들이 결혼을 왜 하는지는 시대마다 또 문화마다 크고 작게 다른 배경과 까닭을 가지고 있다. 이십일세기 남한 사회에서 결혼은 따라서 이십일세기 남한의 정치, 경제, 사회적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문제일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결혼하려는 이들은 누군가? 왜 결혼하려는 것일까? 그들 중 결혼을 ‘못하고’ 남겨지는 이들은 누굴까? 왜 이들의 결혼못함이 사회적 반향을 얻고 사회적 호소가 되어 급기야 범사회적인 ‘신부 수입’ 열풍이 일어나기까지 하는 것일까?

‘남들처럼’ ‘결혼 적령기’에 ‘여자’와 결혼해 집을 사고 차를 굴리고 안정된 정규직 직장을 다니며 6개월이 된 아들을 둔 한 삼십대 중반의 이성애 ‘남자’인 친구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가 문득 떠오른다. 지금 나이가 될 때까지 혼자 사는 남자들은 결혼을 못한 ‘잔여물들’일 가능성이 많고 여자들은 오히려 능력있는 ‘독립인’들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이 여자들과 남자들은 서로 맞을 수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그는 말한다. 나는 그의 의견에 뜻을 함께 하고 안하고를 떠나서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일이라 여겼다. 그는 이런 현상이 여자에게 가해지는 결혼에 대한 사회적 (주로 가까운 ‘가족’들에 의한) 압력보다 남자에게 가해지는 압력이 더 심하기 때문이라고 의견을 댔다. 결혼한 게 후회스럽다고 가끔 투정하는 그는 그러나 아내에게 잘 하고 아이양육에 열심히 참여하는 ‘좋은’ ‘남편’이자 ‘아빠’로 보인다. 그리고, 남한의 많은 남자들이 그러하듯 그도 결혼을 해서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게 많은 것 같다. 그래서일까? 결혼도 ‘못한’ ‘못난 놈’이라 흉을 잡히거나 혹은 노후에 돌봐줄 이 하나 없이 냄새나는 뒷방 늙은이로 살다죽을까 걱정 듣는 남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남자들은, 심지어 남자 동성애자들까지도 우선 결혼은 하고 본다. 남성에게 실질적 보상 (사회적 성인으로서의 인정, 무급 가사노동력 충당, 성욕해소, 재생산, 사회관계용 에스코트서비스, 맞벌이인 경우에는 경제적 보상까지)이 실로 엄청난 결혼을 마다하는 것은 어쩌면 바보나 할 짓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남겨지는’ 남자들은 주로 소외층에 있다. 한편, 여자들은 당연히 이같이 엄청난 내용의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하게 되는 사회적 ‘거래’이므로 안정적인 ‘평생 직장’을 갖기 위해서 현명한 계산을 하게 된다. 국내의 결혼알선업과 고급 중매업의 성행이 이토록 장수하는 것은 결혼이 ‘제도’를 빙자한 ‘거래’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베트남 신부’를 ‘사오는’ 남자들은 국내에서 일어나는 결혼 거래에서 소외된 이들이다. 지역적으로나 계급적으로 혹은 두 가지 모두의 이유로 국내에서 신부를 거래해오지 못한 이들은 가난한 나라들의 값싼 노동력에 눈을 돌리는 다국적기업들마냥 베트남, 중국, 필리핀, 소련 등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동원해 신부를 수입한다. 대체로 상대인 남한의 남자들보다 나이가 훨씬 어려 젊음이라는 권력을 누려봄직도 했을 이 신부의 거래조건은 여느 이주노동자들과 마찬가지다. 본국에 남은 가족들에게 얼마만이라도 생활비를 보내 줄 수 있는 것. 해외취업을 나가는 이주노동자들처럼 이들은 ‘평생직장’을 잡으러 한 두 번의 선을 뵈인 후 경쟁자들 중에서 ‘뽑혀’ 한국으로 ‘사들여져’온다. 한국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재수가 좋으면 본국에서의 자신의 집보다 좀 덜 가난한 ‘남편’의 집에서 하게 될 가사노동, 재생산노동, 남편에 대한 성적 서비스, 어느 경우에는 임금노동을 해서 집안을 되려 먹여 살리는 경우까지 다양한 ‘아내 노동’이다. 소통과 이해가 절대적으로 부재한 상태에서의 고립된 노동.

최근에 ‘베트남 신부 수입’에 대한 반인권적 내용의 광고들에 대한 한국의 인권단체들과 베트남 내부의 비판적인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해도 너무했기 때문이다. 신부를 거래하듯 사오는 것까지는 눈감을 수 있겠으나 너무 적나라하게 광고를 했기 때문이었을까? ‘절대 도망안감’같은? (사실 거래내용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거래를 맺은 이들이 결과가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나오면 당연히 따져서 재거래를 할 수 있거나 혹은 거래 자체를 파기하고 돌아설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늙은 여자인 노모의 가사노동과 감정노동에 의지해 살아가는 혼자 생활할 능력을 키우지 못한 ‘남겨진’ 남자들인가? 혹은 결혼제도 안에서의 성만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성이라고 인정해주는 분위기인가? 아니면 결혼안한 혹은 못한 이들은 죽어서도 제삿밥을 얻어먹을 수 있는 ‘가족신’이 되지 못할 거라는 믿음, 세상에 태어나 제 핏줄하나는 만들어놓고 죽어야 한다는 핏줄계승주의 뭐 이런 것들인가? 결혼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똑같은 사회경제적 혜택이 주어진다면, 결혼하지 않은 이들에게 아무런 비하나 호기심 혹은 동정의 시선이 쏟아지지 않는다면, 남자들이 어려서부터 스스로 생활을 챙길 수 있도록 교육받았더라면 굳이 가까이에서 나란히 생애를 함께 보내고 싶은 이들을 이렇게 ‘사와야’ 할 일이 생겼을까? 본국에 남은 ‘가족’들의 생계를 돕자고 ‘평생직장’을 찾아 이주해온 이 여자들도, 이국땅까지 건너가 신부를 ‘사 오게’ 된 이 남자들도 내게는 같은 맥락에서 보인다. 무엇이 나빴던가? ‘가족’관계가 될 여자들을 마치 강제노동을 하게 될 노예 대하듯 써 내린 적나라한 광고였던가? 허풍과 거짓약속으로 신부를 사온 (몇몇?) 남자들인가? 거래를 하고서도 약속한 기일을 채우지 않고 도망간 여자들인가? 아니면 강제적 이성애 ‘결혼제도’ 그 자체인가? 가난하고 소외받으며 사는 우리에게 따로 혹은 함께 살아갈 또 다른 방법들은 없는가?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가능성들에 대한 상상과 실천을 방해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다시 질문의 소용돌이 속에서 머릿속이 얼얼해 온다.

박이은실(성공회대 노동대학 담임,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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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de of Asia"! 한국의 아시아적 정체성을 강렬하게 드러내는 이 구호는 2002년 월드컵 당시 광주경기장에서 한국과 스페인이 8강전을 벌일 때 붉은악마 응원단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던 카드섹션의 구호였는데,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토고를 꺾고 프랑스와 극적인 무승부를 이루면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16강 진출이 유력시되자 국내외의 언론보도에서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아시아팀이 전반적으로 부진할 경우에 월드컵 본선진출 자리수를 줄인다고 하니 더더욱 한국의 선전은 아시아의 이익과 결부되는 상황이 연출된 듯하다. 그런데 월드컵 이외의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아시아의 이익과 명예를 대표하고 아시아 나라들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는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아시아를 대표한다는 의미보다는 서양의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은 욕망이 더 강한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볼만 하다.

이와 관련하여 얼마 전에 미셸 위가 골프경기를 위해 한국방문에 나섰을 때 한 방송사는 ‘정복은 계속된다’면서 미셀 위를 마젤란과 같은 정복자들에 비유하는 광고를 내보냈던 일이 떠오른다. 마젤란은 바로 8강전의 상대국이었던 스페인의 선단을 이끌고 세계일주에 나서 뱃길로 세계를 일주한 탐험가로 추앙받고 있지만 그의 항해는 탐험뿐만 아니라 황금의 가치를 지닌 아시아의 향신료산지들을 장악하기 위한 여행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스페인의 필리핀 식민통치를 낳았다. 또한 마젤란은 오늘날 필리핀 영토에 속하는 막탄(Mactan) 섬에서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아 사망함으로써 그의 배 빅토리아호만이 일주를 완수한 꼴이 되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마젤란은 알아도 마젤란을 죽인 아시아인은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1521년 4월 27일에 마젤란을 죽인 사람은 막탄 섬의 추장 라푸라푸(Lapulapu)였고 그는 “유럽의 침공을 막아낸 첫 번째 필리핀인”으로 현지인들에게 추앙받고 있다. 우리가 라푸라푸를 모르는 이유 중에 하나는 마젤란을 주인공으로 삼는 교육풍토와 지식세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균형은 우리나라의 교육이 서구 중심적이고 아시아에 대한 교육을 한다 하더라도 중국과 일본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아시아연대 담론도 같은 방식으로 검토해 볼 수 있다. 일반인들이 한국의 축구나 골프가 세계무대에 나선 것을 자랑하듯 한국의 사회운동가들도 한국의 민주화와 개혁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아시아 민주주의와 인권의 진전을 위한 한국의 적극적 역할을 설정하는 진취적인 자세를 갖게 되었다는 점은 대단히 긍정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아시아 각국의 사회운동에 대해 공부하고 그들의 실천으로부터 배우려는 태도를 겸비하지 못한다면 아시아연대담론은 근대화론의 한국판 변종을 낳을 수도 있다. 한국 활동가들이 연수대상지로 아시아보다 서구를 더 선호하는 실태나 아시아언어가 가능한 활동가를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은 이러한 우려를 더욱 심화시킨다.

아시아연대를 추진하려면 우리는 행동뿐만 아니라 성찰과 학습도 필요하다. “검은 피부”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하얀 가면”을 쓰고 있는 아프리카인들의 심리학을 분석한 프란츠 파농이 피부색깔로 인하여 끊임없이 질문하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피부색깔이 담고 있는 세계사적 변형과 심리적 모호함에 대해 질문하는 아시아인이 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이 세계인이 되기 위한 추상적인 노력과 함께 병행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런 취지에서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는 “아시아 생각” 칼럼을 필두로 하여 활동가, 지역전문가, 국내아시아인들이 아시아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고 서로 배우는 마당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만남과 사유와 네트워킹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노력이 아시아연대의 의미와 아시아의 진짜 자존심에 대한 성찰의 출로를 발견하길 기대한다.

전제성 (한국동남아연구소 연구위원,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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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를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새로운 ‘활동거소’ (site)로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이 점차 세를 얻어가고 있다. 주로 아시아권에서 유입되는 이주노동자들의 권리보호 운동은 한국 시민사회운동에서 하나의 확고한 영역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경제적 위상에 걸맞은 공식개발원조(ODA), 특히 아시아에서의 ODA 문제를 시민사회의 핵심적인 이슈로 부각시켜야 한다는 움직임도 상당히 활성화되고 있다. 경제 지구화에 전향적으로 대처하는 하나의 방안으로 글로벌 민주주의의 구축에 나서야 하고 그것의 적합한 활동 중심은 역시 아시아라는 생각의 흐름도 존재한다.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 더 나아가 역내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서도 아시아 시민사회 간의 연대와 소통이 사활적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모두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서 한 가지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관점은 안과 밖, 국내와 국제, 우리와 세계를 가르는 전통적인 이분법이다. 한국에 이미 들어와 있는 이주노동자가 백만 명을 헤아리고, 공장과 공사판과 식당과 지하철에 ‘우리’와 구분되지 않는 얼굴의 ‘외국인’들이 넘쳐 나는 현실 속에서 과연 이런 이분법이 적실한 관점일까? 한국 기업들의 역내 해외투자가 이미 국내 투자를 훨씬 상회하는 현실 속에서 과연 이것이 가능한 관점일까? 이미 국내와 국제를 억지로 구분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현실인데 해석으로만 인위적인 구분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문제의식 위에서 나는 한국 시민사회가 아시아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국 시민사회를 위해서라도 아시아가 필요하다는 관점이다. 우리가 더 이상 한국 사회만을 중심에 놓고 생각해서는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현실을 포착할 수도 없고, 또 그 미래가 밝지도 않다. 왜 그런가?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고 이미 아시아로 외연이 확장되어 있는 지역 내의 상호의존적 사회관계를 직시해야 우리 시민사회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또한 우리 사회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새로운 시각과 아이디어도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국 아시아에 주목하자는 말은 우리 사회가 어느새 처해 있는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현실을 바로 보자는 말이며, 그러한 달라진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참여연대 본연의 사명과도 부합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이때 ‘우리’라고 하면 우리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물리적·정신적 의미의 ‘타자’를 모두 받아들인다는 뜻이며, 타자의 눈으로 우리 스스로를 볼 줄 아는 ‘상대화된 우리’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미 ‘우리’는 과거의 ‘우리’가 아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우리’라는 정체성의 본질을 묻는 작업을 오래 전에 시작했어야 했다. 특히 시민사회운동 진영은 더욱 그러하다. 이것은 이미 엄연한 현실이며 이 점을 부정하는 것은 현실에 눈을 감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우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시민사회가 장기적으로 살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각전환을 단행할 때 ‘우리’는 국내와 국외 운동을 가르는 인위적인 경계를 넘어서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된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현 단계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가능한 최선의 방안은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우리의 아시아’를 재인식하고 그것을 진정한 ‘우리’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전환이다. 아시아에 주목하고 아시아와 연대하는 것이 한국 시민사회의 자폐적인 ‘자기응시’ (navel-gazing)에서 벗어나는 현실적인 방안이 될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시민사회단체로서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아시아 시민사회가 참여연대에 거는 기대가 이만저만 높은 것이 아니다. ‘우리’ 시민사회를 가꿔나가기 위해서라도 참여연대를 포함한 한국 시민사회가 아시아에 응답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조효제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겸 NGO대학원 교수)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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