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서 지낸 지 두어 달 쯤 됐다. 마닐라에 머물며 아시아엔지오센터 연수에 참가하고 있다. 연수는 주로 필리핀시민사회단체를 방문해 활동을 소개받고 필리피노들과 이야기하는 시간으로 이뤄진다. 이런 기회를 통해 조금씩 한국과는 또 다른 사회를 알아가고 있다. 필리핀을 통해 한국을 다시 보기도 하고 자신을 돌아보게도 된다. 필리핀에 온 뒤 내내 나를 붙잡는 의문이 하나 있다. 사회 전체가 가난으로 휩싸여 있는데도 초연하고 행복한 필리피노들을 발견해서이다. 절대빈곤 앞에서도 웃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가난을 넘어서게 하는 또 다른 행복의 조건은 무엇일까.

필리핀은 생각보다 참 가난하다. 한 달 전 쯤 마닐라의 대표적인 빈민지역 중 하나인 바세코에 들어가 3일간 지낼 기회가 있었다. 바세코는 지방에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온 사람들로 형성된 마닐라 만 옆 도시빈민 밀집지역이다. 마침 내가 간 때는 우기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길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데다 아무데나 버린 오물들이 빗물에 뒤섞여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각종 쓰레기와 오물이 가득한 거리, 슬리퍼도 신지 못한 채 오물에 찬 거리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10평도 안되는 집에 7-8명 이상의 가족이 지내고, 그나마 이런 집도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최소한의 의식주도 해결되지 않은 채 살아가는 그들의 처지는 비참하다. 더구나 이런 환경에 노출된 어린이들의 모습은 더욱 안타깝다.

가난의 흔적은 필리핀에서도 가장 열악한 지역 중 하나로 꼽히는 바세코에만 있는 건 아니다. 내가 만난 한 영어학원 선생은 8년을 초등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남편과 아이까지 세 식구가 생활하기가 힘들어 사설영어학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런 말도 했다. 필리핀에서는 더 이상 기대할 직업이 없다고. 필리피노의 유일한 희망은 이곳을 떠나 해외로 나가는 것뿐이라고 했다. 해외로 탈출하는 것이 마지막 보루라고 말하는 그나마 먹고살만한 필리피노의 말에서 필리핀 사회에 퍼진 빈곤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느껴진다. 차라리 마르코스 시절은 이렇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네들을 보면서 더 이상 정치도 그 어떤 사회적 여건도 빈곤의 문제 앞에서 우선일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빈곤의 정도가 이렇게 심각한데도 놀라운 점은 많은 필리피노들이 밝고 태연하다는 것이다.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고 표현한다는 것이다. 국제통계로도 필리핀의 행복지수는 최상위권을 다툰다. 또 이 사회는 아직 스트레스란 용어가 일반화되지 않았다. 아이러니다. 도대체 이런 절대빈곤 앞에서도 사람들은 어떻게 행복해 하는 걸까, 과연 행복의 조건은 무엇인지 혼란스러워진다.

몇 명의 필리피노에게 물었다. 필리피노들이 어떻게 빈곤을 감내하는지, 더구나 행복할 수 있는지. 2년째 바세코에서 자원활동을 하고 있는 한 대학원생은 필리피노가 행복한 건 끈끈한 그들의 가족관계 때문이라고 했다. 가족과의 정서적인 유대, 물질적 지원이 힘든 조건에서도 그들을 행복하게 한다는 것이다. 한 영어학원 선생은 그것이 필리피노의 천성적인 스타일이라고 했다. 또 다른 사람은 필리피노들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그들의 행복감 이면에 혹시 부당한 현실을 용인하고 현재의 삶을 합리화는 의식이나 문화는 없는지도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필리핀은 1960-70년대 만해도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경제적으로 2위의 국가였다. 또한 1986년과 2001년 두 차례의 민중혁명을 경험한 국민들로 민주주의 대한 의식과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현재의 빈곤, 소수 엘리트층의 지배구조,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를 묵인하고 현실을 용인하는 것은 잘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은 모르겠다. 다만 필리핀 사회가 스페인, 일본, 미국으로 이어지는 긴 식민의 역사, 전체의 90%를 차지하는 가톨릭의 영향, 7100여 개의 섬으로 구성된 국가, 뭘 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열대기후 등 우리와는 다른 조건과 경험을 통해 만들어온 그들만의 문화의 독특성인 것은 분명할 것이다.

다른 역사와 전통, 문화로 형성된 필리핀의 문화와 가치, 의식을 존중한다. 동시에 왜 이런 문화를 갖게 되었는지 이해하고 싶다. 그것은 이들의 보다 나은 삶은 위해서이고, 또한 내가 찾는 행복의 조건, 건강한 사회에 대한 희망 때문이다.
정지인(아시아NGO센터 연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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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빈곤퇴치의 날’에 떠올려 본 1,000원의 가치



10월 17일. 유엔이 정한 ‘세계 빈곤퇴치의 날’이다. 먹고 살기 바빠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모르겠다는 푸념과 하소연에 빠져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공휴일이라면 모를까, 그냥 지나치는 게 당연지사. 나 몰라라 한다고 해도 달리 탓할 명분이 없다.

하지만 동시에 억지로라도 이런 날은 좀 알고 넘어가자고 떼를 써도 나무랄 명분 역시 없을 것이다. 단 하루만이라도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지구촌 이웃을 생각하고 평소 자신의 생활을 되돌아본다면, 좀 더 나아가 세계의 빈곤과 질병 근절을 위해 뭔가를 실천한다면 이 지구상 누군가의 생명을 하루, 아니 1년 연장할 수 있고 좀 더 희망을 갖는다면 자연이 주신 생을 모두 누릴 수도 있게 할 터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단돈 1,000원으로 가능한 방법이 있다면 말이다.

여전히 갈 길 먼 '빈곤과의 싸움'

유엔이 ‘세계 빈곤퇴치의 날’을 지정한 까닭은 지구촌의 모든 국가와 사람들이 빈곤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빈곤 퇴치를 위한 노력에 힘을 기울이자는 것이다.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가난 때문에 3초마다 1명씩의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현실을 바꿔보자는 것. 그 현실을 바꾸기 위해 각국 정부와 세계 기구 등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2000년 유엔이 정한 새천년개발목표(MDGs). 2015년까지 빈곤 감소, 보건·교육의 개선, 환경보호에 관해 8가지 목표(△극심한 빈곤과 기아 퇴치, △초등교육의 완전보급, △성평등 촉진과 여권 신장, △유아 사망률 감소, △임산부의 건강개선, △에이즈와 말라리아 등의 질병과의 전쟁, △환경 지속 가능성 보장, △발전을 위한 전 세계적인 동반관계의 구축)를 제시하고 공동실천하기로 약속했다.

중국, 인도처럼 덩치가 큰 나라들에서는 가시적인 변화가 목격되기도 하나, 사하라 이남지역의 경우는 여전히 수백만 명의 아동들이 다섯 살이 되기 전에 말라리아나 에이즈 등으로 사망하는 등 모든 분야에서 별무신통이다.

(그래서 MDGs의 이행률이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냐하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이나 남아시아 지역의 고통스러운 현실은 전혀 변화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 인구 규모가 큰 중국이나 인도의 수치가 조금만 개선되어도 통계적으로는 큰 변화가 있는 것처럼 착시효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ODA 기여금에 무심한 언론…1000원이 우습게 보이나

한국 정부도 국제사회가 정한 공동의 목표를 위해 노력중이라고 한다. 한국의 ODA규모는 아직 GNI대비 0.05%에 머물러 국제적인 목표인 GNI대비 0.7%는 고사하고 OECD DAC(개발원조위원회) 회원국 평균인 0.3%에도 한참 모자라는 수준이라 과연 정부의 노력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난감하지만 몇 가지 전향적인 조치들이 취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 ODA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이 나지 않는 이들에게는 국민 1인당 연간 평균 대외원조액 비교가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이 9달러인데 반해 노르웨이는 630달러, 언제나 한국의 비교 대상인 미국과 일본은 각각 76달러, 91달러이다.)

지난 9월 30일부터 시행된 ‘국제빈곤퇴치기여금’제도가 국민들에게 가장 가까이 느껴지는 조치일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 제도에 대해 무심하다.

국제선 비행기를 이용할 때 항공료에 1,000원씩 자동 부과되는 이 기여금은 연간 약 150억 원 규모로 예상되어 부족하기 그지없는 ODA 재원문제의 해결에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항공사들만 요금 인상 효과가 발생하여 민원이 생길까 주목하고 있을 뿐 언론을 비롯하여 대부분 무관심할 뿐이다. 1,000원이란 금액이 하찮아서일까.

사람들마다 1,000원의 가치와 쓰임이 다를 것이다. 아르바이트로 힘겹게 만학도의 길을 걷고 있는 내 친구에게는 1주일동안 자판기 커피를 즐길 수 있는 돈, 그러나 가격에 구애받지 않고 아무 커피숍에나 들어갈 수 있는 또 다른 내 친구에게는 길에 떨어져도 굳이 주울 마음이 생기지 않는 돈이다. 그러나 세계 빈곤퇴치를 위해 쓰이는 1,000원은 절대 가치를 가지고 있다. 바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지구촌 이웃 스무 명의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가치말이다.

잊지 말자, '1000원의 가치'

한국에서도 ‘세계 빈곤퇴치의 날’을 맞아 다양한 캠페인이 전개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화이트밴드캠페인’. 뭔가 거창해 보이지만 의외로 매우 간단하게 참여할 수 있다. 본시리즈로 유명한 맷 데이먼이 착용하여 눈길을 끌었던, ‘빈곤을 끝내자(End Poverty)'는 구호가 적인 흰색 실리콘 팔찌를 우리도 착용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우리 모두를 으스스하게 하는 공포를 없애는데 드는 비용은 역시 1,000원. 1,000원으로 초등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1억 4백만 명의 어린이들, 임신 출산과정에서 사망하는 50만 명의 여성들, 에이즈에 고통 받고 있는 3천 6백만 명의 성인들과 이웃이 될 수 있다.

물론 화이트밴드를 착용하는 것 외에 더욱 다양한 실천들을 우리 스스로 개발하여 실천할 수 있다. 축구를 좋아하는 나이지리아 사람들은 축구 경기장에서, 공공장소에서 엄숙하기로 소문난 일본 사람들은 버스, 열차 등지에서 빈곤퇴치의 구호를 외친다고 한다.

혼자서 할 수 있는 방법도 널려 있다. 지금 필자처럼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한 방안이다. UCC를 제작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 그도 저도 귀찮다면 친구와 MDGs 실천에 동참하는 안젤리나 졸리 부부를 소재삼아 수다를 떨어도 좋다. 하지만 어떤 실천을 하더라도 당연히 얼마간의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것은 필수다.

머뭇거려진다고? 끔찍한 현실을 다시 보라

혹시라도 뭔가 자기 것을 나누는 데 머뭇거려진다면 10억 이상의 사람들이 하루 1천원 이하로 생활한다는 사실, 미국인들 연간 아이스크림 값의 절반에 해당되는 비용으로 세계 어린이들의 초등 교육 비용을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 1천 5백만 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에이즈로 부모 중의 하나 또는 모두를 잃은 채 살아가고 있다는 끔찍한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하기 바란다.

만약 처음 듣는 사실이라면 가능한 오래 기억할 일이며, 옆 사람에게도 알려주어 자신의 기억 상실에 대비하는 게 좋겠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앞서서 해야 할 것은 ‘세계 빈곤퇴치의 날’을 만든 이유를 스스로 체감하는 것. 그 참담한 빈곤과 가난의 실상이 바로 지금, 이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을 직시하는 것이다. 그때서야 ‘세계빈곤퇴치의 날’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될 터이고, 미구에 그 날을 따로 기억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박영선(참여사회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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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중심의 하나, 모두가 아시아의 중심이 되어야



몇 해 전부터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 '버마를 사랑하는 작가들 모임',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등 나라별 작가 모임부터 이들을 아우르는 '아시아문화네트워크', 그리고 아시아 각국의 문화예술인들과 지식인들이 참여하는 아시아 전문 문예지 [ASIA]의 창간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와 소통하고 교류하는 문인들의 움직임이 활발합니다.

개별 나라들의 관심에서 출발해서 점차 아시아로 사고를 확장하고 다시 한층 폭넓고 깊게 한국의 문제를 고민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이들 문인들에게 있어, 아시아는 무엇일까요?

지난 9월 18일, 소설가이자 중앙대 교수, 그리고 문예계간지'ASIA' 편집주간인 방현석 선생을 모시고 '아시아 연대와 문화'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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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화요일 저녁, 참여연대의 새 보금자리 통인동에 모여 앉은 우리는 곧장 오늘의 안내자, 작가 방현석님의 천천하고 친절한 안내에 따라 “썰물과 같았던 90년대 초반”으로 향했다.

그는 천천히 80년대의 학생선거와 학생운동, 그리고 대망하던 민주화, 공산권의 붕괴 등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흔적이 진하게 남겨진 곳곳으로 우리를 인도했다. 아마 우리 중 누군가는 그 흔적을 찬찬히 훑고, 만지는 이도 있었으리라. 우리네 한 사람, 한 사람이 거대한 시대의 조류 앞에 느꼈던 분노와 슬픔, 상실의 자리, 그 곳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베트남 이야기... 그가 우리에게 마주하게 한 베트남은 1940년대 독립을 앞둔 베트남이었다. 독립 이후 분단과 베트남 전쟁의 발발에 이르면서 우리는 낯익은 이들을 발견했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 군인들. ‘민주주의의 수호자’요, ‘애국’ 청년의 이름을 달고 베트남으로 간 젊은이들, 그러나 금세 뒤돌아 보니 그들의 이름은 ‘학살자’로 바뀌어 있었다. 누가 그들에게 이름을 붙였는가, 누가 그들을 베트남으로 보냈는가. 타인을 향해 이름을 붙이는 그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는가...

2007년 오늘, 우리와 베트남과의 만남에는 과거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베트남은 우리에게 ‘한류’ 열풍이 이는 곳이며, 중요한 ‘투자국’ 중 하나이다. 최근엔 ‘국제결혼’이 베트남을 기억하는 또 하나의 단어가 되었다. 그의 찬찬한 안내의 종착지에서 마주한 질문은 우리가 만나는 아시아, 우리가 기대하는 아시아는 어떤 모습인지이다.

정부가 찾은 대답은 한국이 ‘아시아의 중심 국가’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한국이 아니라 그 누구든 ‘중심’이라 자처하기 시작하면, 각각의 고유한 가치와 아름다움은 상실하기 마련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자꾸만 타자를 가르치려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배우고 훈련하려는 의지와 자세를 선명하게 해야 할 때라는 보탬과 함께.

모두가 중심이 되는 아시아를 기대하는 그는 문예계간지 [ASIA]를 통해 더 넓고 긴 여정을 시작했다. 아시아 각 국의 시, 소설, 수필에 담겨 있는 고유한 아름다움을, 아시아적 상상력의 자유로운 소통을 시작한 것이다.

‘중심’과 ‘중심 아닌 것’으로 구분하는 것이 익숙한 내게는 다소 낯선 여행이었다. 아시아에 대해 그가 가진 무언가 ‘중심’이라 할 만한 것을 가르쳐 줄 거란 기대와는 달리 그의 안내는 자꾸 나, 우리네 삶을 향해 있었다. 이처럼 나, 우리를 향해 있는 안내와 짧은 여정은누군가에 의해 늘 타자화되고, 평가되는 것에 익숙한 나에게 그의 말대로 ‘우리의 모습을 우리의 눈으로 보는 훈련’의 낯선 경험이자, 진지한 첫 걸음이었다.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이라는 그의 삶의 흔적 일부를 말하는 모임의 이름을 곱씹어 보며, ‘이해하려는’ 의지와 실천의 소중함 그리고 그것이 가져올 아름다운 결과를 가만히 생각해 본다.
이경숙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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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유감



지난 몇 년간 우리가 아시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약방의 감초처럼 끼어들었던 주제가 한류다. 가까운 일본과 중국을 시작으로, 처음에는 동남아시아 국가들로, 중앙 아시아로, 중남미로 확산되었던 한류는 우리 내부로부터 다양한 반응을 이끌어 냈다.

이제 와서 한류에 대해서 한마디 더 거드는 것이 어쩌면 너무 늦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이미 아시아에서 한류가 지는 해라는 관찰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한류의 열풍이 식어가는 문제가 아니라, 한류에 대한 반동으로 일본의 혐한류와 같은 생각들이 서로 모습과 정도를 달리 해서 한류가 확산되었던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정황도 포착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초기의 열풍의 단계를 지난 지금이 오히려 한류에 대해서 더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바라 볼 수 있는 시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세계방방 곡곡에 숨어 있는 한류를 찾아내는 미디어

필자가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도대체 왜 “한류”인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다시 뒤집어 보면, 왜 우리가 흔히 한류라고 부르는 이 흐름에 “대한민국”, “한민족”이라는 민족주의적 꼬리표를 붙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며, 그에 대한 반동으로 한류에서 민족주의적 힘을 빼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의 한류는 지나치게 어깨에 대한민국이란 견장을 차고 힘을 잔뜩 주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한류라는 단어 자체는 “국산”이 아니다. 필자가 알고 있기로는 중국에서 붙은 이름이다. 하지만, 한류라는 이름을 사랑하고 애용하고, 거기에 민족과 대한민국의 꼬리표를 붙인 것은 분명 우리다.

국민 개개인이 한류의 확산을 보고 우리의 문화적 힘이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고 자랑스러워한다. 정부차원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한류의 확산은 우리 대한민국의 경제적 이익은 물론 국가적 자긍심을 높이고, 세계시장에서 국가 브랜드의 이미지를 높이고,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떨친다고 규정하며, 온갖 지원을 아까지 않고 있다.

신문과 방송들은 앞 다투어 세계방방 곡곡에 숨어 있는 한류를 찾아내어 “대한민국~”을 외치기에 앞장서고 있다. 얼마 전에는 인도 북부 마니푸르주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국어로 사랑의 밀어를 나누는 것이 대 유행이고, 한류의 확산 결과라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다. 웬만한 한국사람이면 평생 한번 입에 올릴까 말까 하는 인도의 한 주 이름까지 들춰내며 한류 확산에 돋보기를 들이대고 있다.

인터넷에서도 외국 사람들이 한글이 인쇄된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사진이 화제가 되고 있다. 화제를 넘어서 외국의 유명 배우 누구누구도 한글로 된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며 은근히 자랑스러워하는 눈치다. 새로 나오는 대작 드라마나 제작단계에서 화제를 불렀던 드라마는 모두 한류시장을 겨냥한다. 새로 나오는 가수와 연기자들은 모두 한류 스타를 꿈꾼다. 자 이쯤 되면 은근히 문화적 우월의식이 우리 속에 자리 잡을 법도 하다. 충분히 가능하다.

지나친 자랑은 열등감의 또 다른 표현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본다. 우리가 한류의 확산에 대한민국과 한민족의 꼬리표를 붙이고, 거기서 자부심을 느끼고, 더 나아가 문화적 우월의식을 느끼는 것, 그 자체가 또 다른 열등감의 표현은 아닐까? 생각해보면, 1970-80년대 한국의 안방과 극장을 장악했던 홍콩과 중국의 영화들, 그리고 늘 우리 곁에(?) 있는 헐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영화들, 이런 것들에 대해서 홍류(香流), 중류(中流), 미류(美流)라는 이름을 붙여 본적이 없는 것 같다. 정확하게 그런 명칭은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왜? 굳이 그런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식 속에 중국권인 홍콩과 중국 자체는 원래 대국이다. 미국도 두말할 나위 없이 대국이다. 그런 나라의 영화에 환호하고, 그런 나라의 스타에 환호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왜? 대국이니까. 우리나라보다 큰 나라고 강한 나라니까. 그들의 문화적 상품이 한국으로 들어오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생각되었으니까(물론 그런 수출을 하는 입장에서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 그런 이름을 만들어 내지 않았겠지만).

그럼 뒤집어서 우리의 문화상품이 세계로 나가는 것에 굳이 고집스럽게 “Made in Korea"라는 낙인을 강하고 진하게 새겨 넣는 것은 지금까지 변방에 힘없고 작은 나라였던 한국이 이정도 할 수 있다는 이만큼 커졌다는 인상을 너무 너무 세계에 알리고 싶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지나친 자랑은 오히려 열등감을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우리가 남들보다 못하다는,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보다 못하다는 열등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남들보다 잘났다는 우월의식도 가질 필요가 없다. 우리 스스로에 대한 평가로 자주적이고 자부심을 갖는 다는 것은 우리와 남이 같이 있을 때 평등하다는 생각도 반드시 동반해야 할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자랑스럽다고 해서 남을 폄하할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남들보다 객관적으로 좀 못하다고 해서 열등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이재현(연세대 연구교수, 국제연대위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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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개발원조의 철학부터 공감해야



한국 국민에게는 아직 생소한 공적개발원조(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이하 ODA)에 대한 관심이 최근 급증하고 있다. 한국은 그간 개발원조의 수원국에서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저개발국이나 개발도상국에 원조 자금을 제공하는 공여국으로 위치를 탈바꿈했다. 정부는 OECD 국가로서의 책무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원조 자금을 급속히 증가시키고 있지만, 원조사업을 수행할 만한 통일적 기구가 없다든지, 사업을 수행하는 절차상에 원칙이나 가이드 라인이 없다든지 한다는 점에서 시민사회나 언론들의 비판을 받아 왔다. 특히 버마나 필리핀 등에서 보고되는 ODA의 부정적 영향 사례들의 대응 차원에서라도, 정책 변화의 시급성이 제기되고 있다.

'민중중심의 지속 가능한 개발'을 모토로

2007년 7월 25일, ODA 사업을 하는 아시아 시민사회 단체들의 회의가 필리핀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는 ODA에 대한 정책수립이나 모니터링을 수행하는 15국가의 89명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참가하였다. 이 자리에서 수원국과 공여국의 시민단체들은 자국의 ODA사업 현황이나 영향에 대해 공유하였으며, 바람직한 정책 변화에 대한 의견들을 개진하였다. 요컨대, ‘민중중심의 지속 가능한 개발’을 모토로 하여, 그간 국제기구에서 논의되어 온 ODA에 대한 정책 논의를 실질적, 절차적으로 구축하고, ODA 진행과정에 민중이나 시민사회가 참여할 수 있는 정책과정을 구조화하자는 것이 핵심 논의였다.

2000년 UN이 지구상의 빈곤문제를 경감하기 위해 새천년개발목표(MDGs)를 발표한 것을 필두로, 국제사회는 빈곤 근절이라는 공통과제를 공유했으며, 이를 위해 ODA의 효율적이고 민주적인 수행을 위해 여러 합의를 도출했다. 2002년 멕시코의 몬테레이에서 열린UN 개발기금 정상회의에서는, 선진국은 GNI의 0.7%를 ODA 기금으로 이용해야 한다는데 합의했으며, 2005년 파리선언에서는 공여국의 책무성을 강조하는 구체적인 행동방침 등을 공유했다.

이와 같이 수사(rhetoric)상에서는 국제기구나 국가들의 ODA 이념이나 정책 상에 많은 진전이 있었지만, 최근 ODA의 군사적 이용이나 빈곤국가의 외채 비율 심화 등의 문제들이 불거지면서 ODA 원칙에 대한 재합의나 절차에 대한 불투명성 등의 문제가 쟁점이 되고 있다. 최근 선진국들의 ODA 예산이 양적으로 줄어들고 있다는 것도 문제지만, 사업 내용이나 절차 면에서도 많은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데 핵심적으로 논의되었던 문제들은 다음과 같다.

● 구속성 원조의 문제

우선 공여국들이 원조자금을 지급하면서 제시하는 ‘융자 조건(conditionality)’이 문제되고 있다. 수원국의 하부구조건설이나 재난 복구라는 미명하에 자국 회사들의 건설 참여를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에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일본의 경우, 인도네시아에서 프로젝트 수행시 일본 전문가를 고용하거나 일본 자재를 구입할 것을 선결조건으로 제시했다. 2000년에서 2005년 사이에 필리핀에서 있었던 25개 일본의 ODA 사업 중에 단 3개만이 조건이 없는 프로젝트였다.

● 부채의 문제

OECD의 개발원조위원회의 기준에 따르면 무상원조비율이 25% 이상이 되면 ODA로 인정된다. 유상원조라 하더라도 다른 융자자금에 비하면 이자율이 낮지만 유상원조는 결국 수원국의 부채가 된다. 필리핀의 경우, 1986년에서 2006년 사이에 제공받은379억불 가운데 84%가 차관 형식이었다. 2006년 기준으로 필리핀은 총36조원 가량의 외채가 있는데, 2006년에만 이 외채에 대한 이자로 지급된 액수가 6조 8천억원으로 전체 예산의 32%를 차지했다.

● 하부구조건설 사업에 편중된 ODA

ODA 자금 중 교육, 보건, 주거와 관련된 비중은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하부구조건설 사업에 편중되는 경향이 있다. 2001년에서 2006년 필리핀의 이 부문 원조자금은 67%에 달했다. 원조자금에 부수되는 민영화 정책때문에, 기초 서비스 부문에 대한 일반인들의 부담은 커지고 있으며, 하부 구조 건설 사업과 관련한 빈민들의 철거문제나 환경 파괴 등이 심각해 지고 있다.

● 인권 침해 사례

수원국의 모든 개개인의 지속 가능한 개발을 도모한다는 ODA가 도시빈민, 원주민 등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기본적인 인권을 침해하는 사례 등이 발생하고 있다. 필리핀의 경우, 일본 ODA 자금으로 지어지고 있는 산로케 댐 건설을 반대하던 원주민 대표가 살해되는 사례가 있었으며, 한국 정부에 의한 남부통근철도 사업과 관련하여 이주될 3만가구 이상의 빈민 중에는 정부 기구의 위협과 회유로 인해 지방으로 돌아가거나 기초 서비스 시설이 불완전한 지역으로 옮겨간 이주민들이 대거 발생하고 있다.

● 군사 목적으로의 전환

9.11 테러 이후 선진국들은 공적 자금을 테러 방지나 분쟁지역의 군사력을 강화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가장 큰 ODA를 받고 있는 나라는 이라크이며, 분쟁국가들에 대한 외채탕감을 해 주는 간접 지원이 ODA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아시아 국가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비슷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일본은 인도네시아에 자국의 경비정들을 지원하고 있으며, 호주는 필리핀의 민다나오에서 군사훈련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수행하고 있다.

ODA 정책 걸음마 단계에 있는 한국, 철학부터 공감해야

회의에 참여한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ODA의 근본 취지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 자금이 차관이 아니라 100% 무상원조가 되어야 하며, 또한 공여국의 경제적, 정치적 이익을 대변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ODA가 영향을 미칠 수원국들의 인권문제는, 권고사항이나 고려사항이 아니라 핵심적으로 추구되어야 할 ‘선행 목표’라는 점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인권 실현 중심의 정책변화를 위해서는 시민사회나 수혜자들의 참여가 중요하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한국이나 일본 같은 공여국의 시민사회 단체들은 정부의 정책결정과정이나 시행과정이 민주적이고 투명하도록 견제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갖고 있으며, 수원국들의 시민단체들은 각국의 정부가 주도력을 가지고 다수민중들의 삶을 향상시키도록 견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정부는 ODA에 있어서는 아직 철학과 원칙을 제대로 수립하지 못한 걸음마 단계에 있다. 이러한 절차나 정책상의 변화가 시급하지만, 그보다도 일반 대중이 대외 원조에 대한 철학을 공감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아쉽게도 아직 한국 사회에서는 국민의 세금이 자국 기업의 경제적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하다. 아시아의 새로운 패권국으로서의 등극은, 동시에 ‘가해자’의 반열에 오르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할 때이다.

정법모(필리핀대학 인류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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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2월 1일 네팔 갸넨드라 국왕은 총리를 파면하고 국회를 해산시켜 네팔을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다. 국왕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여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 때부터 그의 행보에 대항하는 네팔 민중의 시위가 일어났다. 2006년 4월 21일까지 민중의 거센 저항은 계속되고, 수도인 카트만두에서 시위에 참여하는 군중도 10만명에서 20만명으로 늘어났다. 마침내 국왕은 2006년 4월 24일, 해산시킨 하원을 다시 복원시키고 대국민연설을 통해, 7개 정당 연합으로 하여금 새로운 총리를 지명하도록 했다. “이제 네팔의 행정권을 국민에게 돌려준다. 앞으로 7개 정당 연합이 정부 운영의 책임을 질 후임 총리를 추천해주길 바란다.” 이는 네팔 민중에게 있어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2006년의 이 역사적인 움직임과 정치적 변화 후, 네팔은 빠른 시일 내에 새로운 네팔을 건설하기 위해 많은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역사적인 움직임(Jana Andolon)은 네팔 민중에게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평화에 대한 많은 희망을 안겨 주었다. 네팔은 가시적인 민주화 과정을 포함한 몇 가지 성과를 이루었는데, 괄목할 만한 것으로는 7개 당과 마오이스트들 사이에 체결된 8개의 합의와 행동강령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7개 당과 마오이스트들 사이의 역사적인 합의와 네팔 정부와 마오이스트들(CPN-Maoist) 사이의 포괄적인 평화적 합의를 담고 있는데, 특히 무기와 군대 행정을 감시하고, 임시 헌법 제정, 마오이스트를 포함하는 임시 과도 정부 구성 등을 담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업적은 네팔이 밝은 미래로 향하고 있다는 조짐이다. 정당 역시 새로운 네팔을 위한 길을 닦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난 6월 중순 제헌 의회 선거가 실시되지 못하고연기되면서 많은 네팔 민중은 실망과 좌절을 겪기도 했다. 세계의 갈등 해결 역사와 비교하면, 네팔의 갈등 해결의 추이와 속도는 빠른 편이다. 그러나 네팔 동부(Tarai)의 최근 움직임과 분열, 불안정성의 증가는 정부에 큰 도전이 되고 있다. 비록 제헌 의회 선거가 마오이스트와 네팔 정부의 주요 의제라 해도, 동부 네팔인(Madhesi), 불가촉민(Dalits), 토착민, 여성 그리고 그외 다양한 집단의 요구에 귀 기울이지 않은 채 선거를 실시한다면 좋은 결과를 맺지 못할 것이다. 민주주의 건설 이후 네팔 정치에서 제헌 의회 선거는 가장 중요한 이슈였다. 하지만, 제헌 의회 선거를 위한 적절한 운영방식과 선거체제도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다.

네팔 동부지역의 불안정과 혼란은 앞으로 정부에게 가장 큰 도전으로 자리할 것 같다. 네팔 전체의 발전이란 측면에서, 우리는 21세기의 권력이 단지 한 정당이나 집단이 아닌 민중에게 있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네팔에는 많은 이해 집단들이 있다. 네팔은 오랫동안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불균형을 경험했다. 네팔에는 그간 무시되고 억압받고 소외된 많은 집단들이 있다. 네팔 정부의 목표인 ‘신 네팔 건설’을 방해하는 주요 문제는 뿌리깊은 계층간, 성별간, 언어간, 지역간 불균형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금 네팔은 기회를 맞고 있다. 선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문제가 다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모든 집단들의 요구를 더 잘 해결해야 한다는 도전도 한편에 있다.

무엇이 행해져야 하는가?

첫째, 무엇보다도 정당들이 단합해야 한다. 현재 신 네팔 건설의 진전을 방해하려는 구시대적이고 반동적인 요소들이 아직 많다. 따라서 모든 정당들은 그들을 분열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이 세력들을 잘 파악해야 한다. 만약 정당들이 이 세력들의 함정에 빠진다면, 네팔은 전쟁터가 될 것이며, 아무도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고, 국가 자체가 분열될 지도 모른다. 따라서 정당들은 서로 잘 협력하여 신 네팔의 기틀을 다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한다.

둘째, 사람들의 열망을 잘 실현하고 대중 운동의 성과를 제도화하기 위해서 정부, 정당, 시민사회가 서로 협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동부 네팔인(Madhesi), 불가촉민, 토착민, 여성 그리고 또 다른 동요하고 있는 집단의 요구가 다뤄지도록 즉각 포괄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따라서 특별히 수세기 동안 배제되고, 소외되고, 착취당해 온 사람들을 올바르게 대표할 수 있는 선거체계를 만들기 위해 현 선거체계를 재검토해야 한다. 그들이 앞으로 있을 의회선거에서 제대로 대표되지 않는다면, 헌법 작성과정은 국민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포괄적이지도 않고, 민주적이지도 않으며, 대표성을 띨 수도 없다. 이 문제가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는다면 더 극심한 무정부주의와 분쟁이 나타날 것이고 결국 이는 내전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셋째, 대부분의 정당들이 이번 선거를 통해서 네팔에 공화제를 수립할 것을 소리 높여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어떤 정당도 공화정의 뚜렷한 형태와 운영방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오랫동안 공화정을 위해서 투쟁해왔다고 하는 네팔 공산당 마오이스트들도(CPN-Maioist) 마찬가지다. 모든 정당들은 매우 투명한 공화제 국가의 형태와 그들의 발전 패러다임, 그리고 그 추진 일정을 제시해야 한다.

넷째, 최근 네팔은 좋지 못한 의도를 가진 세력으로부터 간섭을 받고 있으며, 이는 네팔의 평화와 민주화 과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여기서 나는 네팔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변화를 위해 국제사회의 어떤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우리는 그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네팔 사람들은 외부세력의 과도한 개입이 네팔의 평화를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네팔이 국제사회로부터 현재 필요로 하는 것은 그들의 친절한 마음과 연대이다. 그러므로 국제 세력은 네팔 국민의 열망을 존중하여 다가올 11월 선거를 통해 그들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 국제사회가 네팔에게 지금 줄 수 있는 도움은 네팔이 자유롭고 공정하고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선거를 치룰 수 있도록 네팔 정부를 돕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네팔인들이 그 도움에 대해 감사해 할 것이다.

이런 조치들 만으로 새로운 네팔 건설이 충분히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조치들이 성공적인 선거를 치를 건설적인 환경을 만들 것이며, 바로 여기에 네팔의 미래가 달려 있다.
지번 바니야 (아주대 국제대학원 NGO학과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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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으로 '선심성 뚜쟁이'가 된 지자체



얼마 전 지자체 농어민 국제결혼 지원 사업이 화제의 뉴스가 되고 이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진 바 있다. 찬반의 논리 이전에 이런 사업이 실시되고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몰랐던 필자는 일단 그 규모와 확산 범위에 먼저 놀랐다.

올 5월 현재 3개 광역시도(경남, 경북, 제주)와 전국 60여개의 기초자치단체에서 이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전국 지자체의 1/4에 해당하는 수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경남(95%)과 경북(83%)에서는 대다수의 기초자치단체가 이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예산의 규모도 2007년 약 25억 5천만 원이 책정되어 지자체 마다 다르지만, 1인당 500여만 원의 지원을 받아 국제결혼 업체를 통해 신붓감을 찾고 있다.

혹자는 이 제도가 우리나라 농촌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제도라고 하며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취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엉뚱하게도 외국의 신부들이 들어오면 한국사회가 그 만큼 다양해지고 다문화 사회가 되지 않겠는가, 그러니 오히려 장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한다. 필자는 분명히 이것이 장려할만한 사업은 아니라 생각한다.

중앙정부는 왜 입다물고 있는가

물론 외국의 신부들(혹은 신랑들)이 한국사회로 들어오는 것은 폐쇄적이고 타문화에 배타적인 한국사회를 바꾸는데 큰 도움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유입이 자발적이지 않고, 중계를 통한 것이라면 장려하기에는 좀 쑥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반대할 만한 사안도 아니다. 단, 다음과 같은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적어도 현재 지자체의 사업들을 봤을 때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는 우려를 씻기 어렵다. 따라서 필자는 지금 현재의 사업에 반대한다.

우선 현재 지자체들이 벌이는 사업은 불법과 탈법, 의혹으로 얼룩져 있다. 이 사업들은 지자체를 통해서 지원을 받은 농어촌 남성들이 국제결혼중개업체를 통해서 외국 신부들을 만나 결혼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일부 국가(베트남과 필리핀)에서는 상업적인 결혼중개 행위 자체가 불법이다. 따라서 지자체의 예산과 이름으로 농어촌 남성들이 외국에 나가서 불법행위를 버젓이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또 지자체와 결혼중개업체간의 돈거래도 전혀 투명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일부 지자체에서는 결혼중개업체로 지원금을 직접 입금하는가 하면, 1인당 성사비용도 중개업체의 이윤을 보전해주기 위해서 인상되었다는 의혹이 있다. 다시 말하면 지자체에서 세금으로 조성된 예산을 가지고 결혼중개업체에 금전적 특혜를 주고 있다는 말이다.

두 번째로 제도적 차원에서도 일부 지자체는 “이혼 또는 배우자의 거주지 무단이탈 시 지원금을 환수”하는 조항을 두어 결혼에 문제가 있을 경우 책임을 당사자 개인에게 묻는다. 부부관계와 결혼의 유지라는 것을 돈을 미끼로 하여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지원금을 받은 죄로 이혼도 하지 못한다. 또 이미 한국에 들어와 살고 있는 외국인 신부들이 한국사회에 정착하도록 하는 지원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외국인 신부들을 들여오는데 정착지원의 여섯 배에 해당하는 예산을 쏟아 붓고 있다. 들어와서는 어찌 되었든지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지자체에서 이런 사업들을 벌이고 있는 것에 대해서 중앙정부는 실태 파악이나 하고 있었는지? 한 정당과 시민단체들이 이 제도의 문제점을 다룬 토론회를 개최하고 언론에 이 사안이 보도된 이후에도 중앙정부에서 이에 대한 어떤 의견을 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해남군 공문에 "베트남 여성은 몸매가 환상적"

세 번째의 문제점은 필자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다. 이 사업을 시행하고, 그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이 사업에 대해서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문제다. 지방정부가 다음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한 “선심성 뚜쟁이”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백번 양보하여 농촌의 현실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이유로 봐주기로 하자. 우리가 낸 세금이 농어촌 남성들이 배우자를 찾는데 쓰이면 그것도 사회복지 차원의 문제가 아닌가라고 우리 자신을 설득해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이 사업이 단순한, 그리고 선의의 뚜쟁이 사업이 아니라, 국제결혼이란 탈을 쓴 “인신매매”가 아닌가 의심스럽다.

얼마 전 국내 일부 결혼중개업체들이 외국인 신부에 대해서 모욕적인 단어들을 동원하여 광고하면서 국제적, 국내적 비난을 산 것을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이건 돈에 눈이 먼 사기업들의 한심한 작태라 치자. 하지만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도 아닌 지방자치단체도 그런 비슷한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어떨까? 해남군의 한 지방의회 의원이 공개한 이 사업 관련 지자체의 ‘공문’은 우리를 경악케 한다. 해남군의 국제결혼 협조 공문에 “베트남 여성은 남편을 하나님처럼 모시고 사는, 지구상의 마지막 남은 순수함을 지닌 천사”, “남편에게 헌신적이고, 몸매가 환상적이며, 소식하는 식문화를 가지고 있어 살이 찐 여성이 거의 없다”라는 문구가 있다. 일전에 비난을 샀던 결혼중개업체의 광고내용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시각을 가진 지방자치단체가 추진하는 국제결혼 중개는 ‘인신매매’의 다른 형태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 공무원들의 더 낮아질 수 없을 정도로 한 없이 낮은 인식수준이 개탄스럽다. 이런 인식 하에 진행되는 국제결혼지원사업을 어떻게 환영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 농촌사회의 문제가 심각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농촌에는 노인층만 남아 있고, 그나마 남은 젊은 세대들, 특히 남성들은 결혼하여 농촌에 살려는 배우자감이 없어서 결혼적령기를 훌쩍 넘겨버리고, 농촌에서는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지 않으며 농촌학교들은 하나 둘씩 폐교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는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대책이 있었던가? 어쩌다 농촌의 문제가 언론에 불거지기라도 하면 땜빵식, 대증요법식의 짜깁기 대책만이 난무해왔다. 이 국제결혼 지원사업도 문제의 근원을 파고들어 해결하는 대책이 아닌 짜깁기 대책의 전형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업을 발상한 기본적인 인식에 있어 매우 큰 문제를 안고 있는 그런 사업이다. 지금이라도, 좀 시간이 걸리더라도 농촌문제에 관한 종합적인 긴 호흡의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재현(한국동남아연구소 선임 연구원,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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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연대사업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완성시켜가는 또 다른 길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결정적 전환점이자 정점이었던 5.18 민중항쟁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민족의 통일과 인류의 평화를 실현하는데 헌신하고자 설립된 5.18기념재단은 뜻을 같이하는 일반국민과 광주시민의 기금을 포함해 5.18 피해자들이 정부로부터 받은 보상금 일부 출연으로 1994년 8월 30일 설립한 비영리 재단법인이다. 초기 출범 당시에는 재정여건 상 5.18기념행사를 중심으로 기념사업을 전개하였으나, 1998년 광주광역시에서 보관하던 국민성금이 출연되고, 20주년이 되던 해인 2000년도부터 사업비의 일부를 국가로부터 지원받으면서 관련 기념사업이 성장해 왔다.

5.18기념재단의 여러 사업 중 국제연대사업은 2000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됐는데, 아시아 지역의 인권관련 희생자와 가족, 관련 활동가를 초청하여 연대와 경험을 나누는 시간을 갖던 ‘아시아민주희생자 광주네트워크’ 행사로 시작된 된 국제사업은 스리랑카 실종자 행사를 지원하면서 그 규모가 더해져, 2004년에는 광주국제평화포럼(구 광주국제평화캠프)행사가 처음 조직되었으며, 2007년 올해에는 약 100명의 아시아지역 시민사회단체 활동가와 50여명의 국내단체 국제연대 활동가가 모여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5.18항쟁 직후 외롭고 힘겨운 진실규명 투쟁 뒤에는 언제나 세계도처에서 오월광주를 지지하는 성원과 후원이 더욱 큰 용기를 얻게 되었으며, 명예를 온전히 회복한 지금의 시점에서 이를 다시 되돌려 줄 수 있는 길을 5.18기념재단은 아시아에서 찾았다. 특히 금년 광주국제평화포럼 행사를 통해 5.18기념재단은 가칭‘아시아민주화운동 네트워크 출범을 위한 추진위원회’사무국이 되어 그동안 광주가 아시아 민주주의와 인권운동의 네트워크를 위한 공간을 제공하던 역할을 넘어 광주를 중심으로 아시아의 상시적이고 구체적인 형태의 협력과 연대활동을 연결하는 역할로 성장하기 위해 준비 중이며, 이를 계기로 재단의 국제협력사업도 새로운 변화와 발전을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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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와 같은 준비모임을 추진해오기까지 5.18기념재단은 그 단계와 과정을 한 걸음 한 걸음 거쳐 왔다. 특히 아시아지역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관련 사업들은 2004년부터 전국적인 단위의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토론과 심의에 의해 진행되었고, 재단 역시 추진위원회의 결과를 전폭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러나 5.18에 대한 자료제공과 국제적인 활동가를 위한 네트워크 공간 제공이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 국제사업의 형식은 참여하는 활동가들에 의해 보다 구체적이고 더 높은 수준의 연대 활동과 지원을 요구받게 되었으며, 2007년 행사를 기점으로 변화를 꾀하게 되었다.

2007 광주국제평화포럼의 의미

1999년 재단은 5.18기념행사 주간에 ‘아시아민주희생자 광주네트워크’라는 명칭으로 아시아의 인권관련 희생자 가족과 활동가를 꾸준하게 초청하여 그들의 경험을 듣고 5.18민주화운동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아시아인권위원회(상임대표 : 바실페르난도, 2001년 광주인권상 수상자)의 추천을 받아 소규모 초청행사에서 시작된 이 네트워크 모임은 2004년에 ‘광주국제평화캠프’라는 명칭으로 바뀌게 되었고, 행사의 규모도 국제적인 관련 활동가들의 네트워크 공간으로 발전하였다. 2004년부터 개최된‘광주국제평화캠프’행사는 행사추진을 위한 추진위원회를 전국 관련 단체에서 구성하여 준비하였으며, 그동안 ‘아시아인권과정,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학살문제, 전쟁, 국가폭력, 개발과 인권, 아시아의 분쟁과 NGO의 평화만들기’라는 주제들을 다루었다.

2007년에는 국제협력팀의 올해 사업목표를 반영하기 위해 행사명칭을 ‘캠프’에서 ‘포럼’으로 변경하여 지난 5월 15일부터 18일까지 개최하였다. 아시아지역 인권시민사회단체 활동가 90여명과 국내참가자 40여명등 130여명의 참가자가 참여한 이번 행사는 특히 태국에 위치한 포럼아시아(사무총장 이성훈)의 ‘동아시아인권포럼’ 행사와 함께 공동으로 개최되어 명실공히 5월기념행사 기간에 개최되는 대표적인 국제행사로 치러졌다.

한편, 국내시민사회단체 국제사업 활동가를 위한 프로그램이 그동안 행사 기간 중에 편성되어 있었으나, 형식적인 편성에 그쳐 구체적인 이슈나 사안을 가지고 논의와 협의가 없었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래서 올해 평화포럼 행사에는 별도의 국내단체 활동가 워크숍을 진행하게 되었다. 비록 참가자와 단체의 숫자는 많지 않았으나, 한국인권재단의 양영미 상임이사의 진행으로 워크숍에 참여한 각 단체의 국제 사업내용들이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되었고, 각 단체에서 사전에 보내온 활동내용을 담은 자료집이 배포되었으며, 이 모임을 통해서 앞으로 국내 단체 간의 네트워크를 활성화 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아시아 민주화운동 네트워크

그동안 평화캠프 등 우리재단에서 개최했던 크고 작은 국제 행사에 참여한 아시아지역 시민사회활동가와 전문가들은 광주가 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더 많은 역할과 지원을 해줄 것을 요구해 왔다. 최근에 들어 한국에서 개최하는 여러 국제행사들의 후속조치가 미비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재단의 행사 역시 이러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것은 사실 아시아의 대표적인 인권도시라는 거창한 명제에 사로잡혀 자칫 또 다른 오해를 불러 올 수 있다는 데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해가 지날수록 아시아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을 위한 네트워크 공간을 제공하는 역할을 넘어서는 수준의 요구를 받기에 이르렀고,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관련 부서 역시 재단 내부에서 국제협력사업의 내용이 한층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위해서는 이와 같은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별도의 내부적인 근거 수립이 매우 절실했다. 이에 지난해 10월과 금년 2월에 우리재단의 사업과 연관된 아시아 지역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과 준비모임을 가졌고, 2007 광주국제평화포럼 행사를 통해 민주화운동 네트워크와 관련된 논의를 공식적으로 진행하기에 이르렀다.

2007 광주국제평화포럼이 남긴 것

2007 광주국제평화포럼 중 아시아 민주화운동 네트워크에 참여한 40여명의 국내외 인권시민단체 관계자와 활동가들은 토론을 통해 발전적이고 상호간의 시너지 효과를 모색하며, 행동으로 실천하고 이슈나 사안에 대해 즉각적인 조치를 할 수 있는 협의체 기구를 구성하는데 의견을 모으고, 10여개 지역단체와 네트워크 단체가 참가하는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1차 회의를 개최하여 명칭과 기구의 성격, 활동내용 등에 대해 결정하기로 하였다. 이 추진위원회 회의는 5.18기념재단의 지원하에 2007년 하반기에 아시아국가(태국의 방콕, 필리핀의 마닐라 또는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지역적 협의회를 개최하기로 하였으며, 5.18기념재단은 추진위원회의 간사역할과 함께 필요한 재정적 지원을 하기로 하였다.

한편, 평화포럼 행사를 통해 네트워크 추진위원회에서 다루어질 의제로는 첫째, 총체적인 인권침해와 필리핀에서의 법외살인에 대한 면책과 같은‘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에 대한 직접적인 행동, 둘째, 민주주의 투쟁 또는 인권침해 관련 희생자들에 대한 지원, 셋째, 능력개발과 경험이 적은 법률가 또는 인권 활동가들에 대한 훈련과 교육, 민주화투쟁에 대한 기억들을 세대 간의 소통을 위하여 그리고 젊은 세대들에게 또는 다가올 세대들에게 기억을 전달하기 위하여 문서화와 보존 사업 실시 등이 그것이며, 여기에 덧붙여 필리핀과 스리랑카의 강제실종, 인권변호사와 관련 활동가들에 대한 정치적 암살, 버마의 군부 독재하에서 자행되고 있는 모든 형태의 탄압과 인권침해의 사례들을 우선적인 대상으로 하여 국제적인 연대활동과 캠페인을 전개하는 것에 대해 의견을 나눌 예정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국내 민주화를 완성하지 못한 처지에서 해외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해 연대 사업을 진행하는 것에 대해 마뜩찮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5.18기념재단이 추진해온 아시아 지역의 민주주의와 인권과 관련한 연대사업과 지원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완성시켜가는 또 다른 길이기도 하다. 우리 이웃의 인권과 민주주의 발전 없이 우리의 인권과 민주주의가 성장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광주라는 지리적 불리함과 여러 가지 어려운 한계를 극복하고 추진해온 5.18기념재단의 작지만 소중한 국제연대활동은 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증진시키는 또 하나의 경계에 서있다고 볼 수 있다.

김찬호 (5.18기념재단 국제협력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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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민주주의를 내것으로"



최근 '시민사회론의 르네상스'라 일컬어질 만큼 세계적으로 시민사회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가운데, 일본에서는 일본의 초기 시민사회, 시민운동론이 재조명을 받고 있다.

일본에서 '시민운동'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60년 안보투쟁을 계기로 해서다. 시민운동은 기존의 사회운동에 대한 대안적인 운동형태로서 제시됐다. 그것은 "진보적 운동 속의 관료주의적 교조주의적 편향"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경제성장과 급속한 도시화에 따라 파편화된 사생활 중심의 대중사회화가 진전되는 데 대한 문제의식을 내포하고 있었다.

'민주주의 수호 투쟁'으로 확대된 안보투쟁

패전 후 일본에서는 전후 민주화의 흐름 속에서 수많은 자발적 결사체들이 조직됐다. 치안유지법이 폐지되고, 공산당, 사회당 등 좌파 정당이 합법적으로 존재하게 됐으며, 직장 단위의 노조 조직률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농민의 조직화도 진전됐고, 학생운동도 부활하여 각 대학, 그리고 대학 간의 연대 조직이 결성됐다. 1960년대까지 사회운동을 주도한 것은 전후에 분출한 이들 진보적 민주단체들이었고, 사회운동의 주류는 이러한 조직 기반을 가진 노동운동, 학생운동이었다.

1950년대 냉전체제가 확립되면서 정치권은 '보수-혁신' 대립 구도로 재편되고, 다양한 자발적 결사체들도 각 정당 아래 계열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노조, 학생조직 등 진보적 단체들은 좌파 정당 아래 계열화되어 그 대중적인 기반이 됐으며 사회운동은 좌파 정당을 정점으로 그 하부에 수직적으로 계열화된 운동 조직들에 의해 이루어진 '혁신세력'에 의해 주도됐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일본의 진보적 사회운동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운동의 논리를 전개한 것이 '시민운동'을 주창한 지식인들이다. 안보투쟁은 기시 정권이 추진하던 일미안전보장조약 개정을 저지하기 위해 다양한 세력들이 연대하여 전개한 대투쟁으로, 1960년 5월19일 집권 자민당이 경찰대를 국회 내에 배치시킨 가운데 단독으로 신안보조약 승인을 강행함으로써 안보조약 개정 반대운동은 집권여당의 비민주적인 폭거에 항의하는 민주주의 수호 운동으로 의미가 확대됐다.

조직화되지 않은 일반 시민 중심으로 탄생한 '시민운동론'

그 이후 한달 가까이 매일 10만 명 이상, 많을 때는 30만 명 가까운 군중이 국회를 둘러싸고 시위를 했다. 안보투쟁도 실질적으로 노조, 학생단체 등이 주도하여 시위 참가자들은 조직을 통해 동원된 경우가 많았으나, 그동안 정치에 무관심했던 사람들, 조직에 속하지 않은 자발적 시위 참가자들도 많았으며, 이들은 직업 정치가들과 직업 혁명가들의 지도자의식이나 행동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안보투쟁이 민주주의 수호 투쟁으로 신국면을 맞게 된 이후 조직화되지 않은 일반 시민 참가자들이 증대했다. 기존의 운동 방식에 대해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가졌던 지식인들 가운데 이러한 새로운 경향에 주목하여, 일본사회의 현실에 맞고 형해화된 민주주의를 실질화하기 위한 새로운 운동의 논리를 모색했다. 즉 안보투쟁을 통해 대두한 새로운 운동 형태의 특징을 포착하여 이를 바탕으로 향후 대안적인 운동을 창출하기 위한 실천적 이론으로서 시민운동론이 나오게 된 것이다.

새로운 운동 논리의 핵심은 주체와 조직에 관한 것이다. 사회학자이자 대표적인 시민운동론자인 히다카 로쿠로는 시민운동 주체인 '시민'의 특징으로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를 들었다: 첫째, 무당무파일 것, 둘째, 정치적 야심을 갖지 않을 것, 셋째, 24시간 활동가가 아니라 직업을 가진 생활인으로서 '파트타이머'적인 참가자일 것, 넷째, 조직의 지령에 의해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참가할 것, 다섯째, 필요 경비는 자신이 부담할 것. 이같은 '시민' 개념은 '조직인'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조직에 매몰되지 않은 자율적인 개인을 강조한다.

"좌·우 양쪽 중앙집권주의 모두에 저항하는 운동"

이러한 시민운동의 주체 개념은 조직론과 밀접하게 연계돼 있다. 기존의 사회운동은 지도부와 이데올로기적인 지도 이념이 있어, 운동의 방침과 구체적인 행동강령은 상층의 핵심 간부들에 의해 결정되어 하부로 전달되고, 조직에 속한 대중은 지도부의 방침에 따라 통일적인 행동을 취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정치학자 이시다 다케시는 이런 정책 결정 방식을 '관료주의적 지령주의'라고 표현했다). 목표 달성을 우선시하여 효율적인 운동을 수행하기 위해 조직과 조직력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연합조직과 각 단위 조직들의 관계는 '전면 포섭'의 관계로서, 모든 점에서 단일한 지도 방침에 따라 획일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런 관계는 필연적으로 조직을 단순한 '세(勢) 집합'으로 만든다. 이런 구조 하에서 같은 운동에 동참하는 주체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일한 계열에 속하는 것을 당연한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 계열에서 자신이 정통적 전위임을 주장하는 사람은 같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신념이 약한 자를 "뒤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과 같은 계열에 전면 포섭되지 않은 조직에 대해서는 '전면 부정'의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이는 "정의를 독점하는 '양심'주의"를 낳는다. '정의로운' 목표 달성을 위해 운동의 효율적인 조직과 세불리기가 중시되는 가운데 운동에 참가하는 풀뿌리 대중 개개인은 자율적인 판단에 의해 움직이기보다는 조직의 논리, 지도부의 방침과 지도 이념에 따라 동원되는 양상을 보였다.

시민운동론자들은 기존의 사회운동의 이같은 조직 구조를 집단주의, 권위주의, 정치주의적인 점에서 보수, 체제측과 공유하는 '일본적 특성'이라고 봤다. 조직 논리가 지배하는 집단주의적, 목표지향적인 운동은 풀뿌리 대중의 주체화를 억제한다. 히다카가 '시민운동'을 "좌로부터의 중앙집권주의에도, 우로부터의 중앙집권주의에도 저항하는 운동"이라고 한 것은 이런 의미를 내포한다. 시민운동론자들이 제시한 '시민' 개념은 하나의 이념형으로서, 개인이 내면에 일관된 의식이나 논리를 형성하고 그에 의거해서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그런 의미에서 '시민성'을 확보한 인간 유형이라 할 수 있다. 한편에는 조직 내지 집단에 매몰된 대중이, 다른 한편에서는 파편화된 사생활에 매몰된 대중이 존재하는 가운데, 어떻게 대중을 주체화하여 정치, 사회에 대해 적극적인 발언과 참가를 하도록 할 것인가- 시민운동론자들은 이를 일본에 민주주의를 뿌리 내리기 위한 과제로 봤다.

조직이 물신화되지 않도록 이슈 중심으로 뭉친다

철학자 쓰루미 슌스케(鶴見俊輔)는 서구에서 시민혁명을 통해 이룬 제도를 들여왔을 뿐인 일본 같은 나라는 '주어진 민주주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새로운 시민혁명"을 거칠 필요가 있다면서, 안보투쟁의 전개과정 특히 1960년 5월19일 이후의 흐름에서 그런 시민혁명적인 성격을 발견한다. 그것은 "일본의 공적 정책이 일본인의 사상의 사적(私的)인 뿌리로부터 새롭게 배태"되는 것으로서 "뿌리로부터의 민주주의(radical democracy)(根本からの民主主義)"이다. 즉 1960년에 등장한 일본의 '시민운동' 담론은 서구와 같은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일본에서 형해화된 근대 민주주의의 실질을 이루기 위한 '근대성'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앞에서 히다카의 운동 주체로서의 '시민' 개념을 소개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개인주의'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시민'은 '다른 사람과 단절되어 자신의 생활에 매몰되는 존재'가 아니라 연대를 추구한다. 단 그것은 집단 활동이 개성의 상실을 가져오지 않는, 즉 자율적 개인으로서의 연대다. 일본의 기존의 조직 구조는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개인이 어떤 조직에 속하게 되면 모든 사안에 대해 동조하고 통일 행동을 취할 것을 전제로 하고, 개별 사안에 대해 다른 행동을 취하는 것은 이단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조직에 속한 모든 개인이 모든 사안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가질 수는 없다.

따라서 시민운동은 조직이 물신화되지 않도록 상설 조직을 갖지 않고, 이슈 중심으로 입장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함께 조직하고, 이슈가 해결되면 운동조직은 해체하는 방식을 추구했다. 지도부와 이데올로기적인 지도 이념이 없이 운동 참가자는 동등한 자격으로 횡적인 유대를 맺으며, 이데올로기나 정치주의적인 관점이 아니라 개인에 내면화된 윤리나 생활의 관점에서 발언하고 행동하는 것, 참가자 개개인이 납득하면서 행동하기 위해 목표 달성 이상으로 논의의 과정을 중시하는 것, 이런 원칙들은 사회운동 자체의 민주성을 확보하는 것이 곧 진정한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길이라는 인식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하겠다.

이상과 같은 일본의 초기 시민운동론은 일본의 역사 속에서 배태된 것이므로, 한국의 시민운동론과 차이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지면의 제약 상 한국과 비교하며그 의미를 짚어볼 여유는 없으나, 이 시기 일본의 시민운동론자들이 제시한 문제의식과 비전은 눈부신 성장을 이룬 가운데 시민운동 내부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시점에 있는 오늘날의 한국 시민운동에 시사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영혜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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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중국은 지리적 명칭이 아니라 젊은이들의 가슴속을 붉게 물들이는 이데아였다. 흐릿하게 인쇄된 마오의 글과 스노의 두터운 책에 심취하면서, 혁명을 이뤄 낸 중국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느 것에도 걸러지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열정을 담고 있었다. 90년대 초, 처음 중국 땅을 밟게 되었을 때 난 마치 오랜 꿈을 이뤄낸 사람처럼 가슴 떨리고 벅찼다.

그러나 베이징 어느 곳에서도, 날마다 마주치는 중국인 누구에게서도 나의 여진처럼 남아있는 경외를 확인하거나 전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 중국은 너무 다른 모습으로 변모하느라 바빴으며, 나 혼자만이 마치 시간이 정지된 채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느낌이었다.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중국에서 사회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낯설었다. 그들은 어느 학자의 비아냥처럼 자본주의 궤도에 진입하기 위해 가속도를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줄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람들을 유혹한다. 30여년을 패배와 질곡에서 미로를 찾아 헤매던 중국이 그 유혹을 받아들인 건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이치인지 모른다. 그러나 중국의 눈부시다는 성장과 괄목할 변화는 등에 진 그림자도 더 깊게 만들었다.

중국의 도시 곳곳은 마천루로 철옹성을 이루고 있지만 그 사이사이에는 철거의 흔적과 파헤쳐져 벌어진 땅덩어리가 쉽게 눈에 들어온다. 강제 철거를 당해 터전을 잃은 사람들의 무력한 지친 모습도 자주 눈에 띈다. 리어카에 걸터앉아 옷은 입은 둥 마는 둥 누덕누덕한 그릇에 짠지를 담아 찐빵하나로 끼니를 때우는 사람들의 모습도 빈번하게 볼 수 있는 거리 풍경 중 하나다.

작년에는 한 농민공 부부가 1,859위안(한화 약 24만원)의 약값이 없어 민(閩)강에 투신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지난주에도 동일한 사건이 장(長)강에서 일어났다. 몇 천만 원이 아니라 19일 동안 입원한 비용 150여만 원이 없어서 부부가 함께 자식도 남겨둔 채 생을 마감했다. 이들이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강대국이 되어간다는 중국에 특히 농촌에 제대로 된 의료보장 제도가 없어서다.

서민들을 위해 가장 필요한 사회보장제도나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필수적인 노동계약법은 아직 실효를 보지 못한 채, 중국기업에 유리하게 작용할 기업소득세법과 사유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물권법이 먼저 올 봄 전국인대를 통과했다. 중국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세계나 한국의 중국에 대한 관심은 경제적 혹은 외교적인 부분에만 쏠려있다. 사람들은 중국하면... 와! 하는 탄성을 지르거나 그 거대한 부상에 두려움이나 의혹의 눈길만을 보낸다. 그 찬사와 놀라운 반응 속에 상대적으로 더 열악한 상황에 처해지는 민초들의 생생한 삶은 없다. 30%가 성공의 깃발을 휘날릴 때 70%는 그 휘날리는 깃발의 흔들림에 어지러워한다. 중국에서 70%는 단지 100의 70이 아니라 13억의 70%인 9억여 명이다. 중국이 평균의 사회주의가 아닌 경쟁의 자본주의로 가는 것의 위험이 여기에 있다.

우리의 근현대사와 발전의 역사에도 억울하게 죽은 혼령들의 넋이 무수히 많으며 이들은 아직도 조선 산하의 구천을 떠돌고 있다. 중국도 내전과 혁명으로 덧없이 죽어가고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있으며, 새로운 중국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이런 저런 의미 없는 명분과 이유로 자기에게 주어진 생을 다 마치지 못한 영혼들이 우리보다 두 배.. 세 배.. 몇 배로 흩어져 있을 것이다.

중국이 거대기업과 권력을 가진 엘리트와 부유층을 중심으로만 움직이는 사회가 된다면, 시장의 힘에 의해 돌이킬 수 없는 자본주의 국가가 되어 미국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간다면, 약자와 실패자들을 안배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체제로 굴러간다면, 공산주의 혁명과 문화 대혁명의 이름으로 희생된 수많은 중국 인민들에겐 중국이 영광의 조국이 아니라 배반의 이름으로 각인되지 않을까. 우리에게도 참여정부가 자랑스러움이 아니라 배반의 이름으로 남으려 하듯이....





김도희(한신대 중국지역학과 교수)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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