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생각하는 사람들 23차 문화나눔마당 시민과 함께 하는 좌담회]
티베트와 중국 그리고 2008  티베트 항쟁
 
일시      : 2008년 7월22일(화) 오후 7시30분
이야기    : 남카스님(한국티베트공동체센터 회장), 정웅기(티베트평화연대 대변인)
장소      : 인권연대 교육장 (지하철 : 4호선 한성대입구역 7번 출구 / 버스 : 한성대입구역)
참가비    : 무료
후원      : 티베트평화연대 (www.peacetibet.com)
문의      : 문화를생각하는사람들 (02-336-5642, www.artize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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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발발한 티베트인들의 평화시위에 대하여 중국정부는 폭력적인 탄압을 자행, 250명 이상이 숨지고, 4천명 이상이 투옥되었다 한다. 중국정부는 소수의 티베트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법에 의거해 진압하였다고 말하지만, 이미 시위 초기 군대를 투입, 발포하였음이 밝혀졌고, 평화로운 시위대를 향하여 탱크를 돌진했다는 보도등을 보았을 때 이는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티베트인의 평화시위를 총과 탱크를 앞세워 강경진압하면서, 시위대가 피신한 사원을 봉쇄하여 식량, 전기를 차단하는 등 반인권적 행위를 일삼고 있다.

서울에서의 베이징올림픽 성화봉송 때 일부 중국인 유학생 폭력시위로 인해 우리나라에서도 큰 관심을 집중시켰던 티베트 사건은 이후 벌어진 버마사이클론 피해, 중국쓰촨성 대지진,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사태 등으로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느낌이다.
쓰촨성 대지진 이후에 불고 있는 중국을 향한 전 세계의 동정여론은 그 이전까지 팽배하던 반중국 정서와 티베트에 평화를 외치는 목소리를 잠식시키며 아이러니하게도 올림픽을 앞두고 온갖 악재로 곤혹스러웠던 중국의 호재로 작용하고 있고, 더욱 강화된 중화민족주의는 티베트를 더욱 고립시킬 염려를 불러일으킨다.

문화를생각하는사람들은 한국티베트공동체센터의 남카스님과 티베트평화연대의 정웅기 대변인을 모시고 국제사회의 현안으로 떠오르며 올림픽을 목전에 둔 중국의 뜨거운 감자로 주목받고 있는 티베트 사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준비했다.한국티베트공동체센터 회장인 게셰 텐진 남카스님은 티베트 사태의 궁극적인 원인에 대해 “‘중도정책(Middle-Way Policy)’을 중국정부가 귀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티베트 국민들은 중국 지배하의 현재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고 티베트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 두 입장 사이의 중도를 걷고자 하는 것이 바로 중도정책이다. 중도정책은 티베트인들에게 문화·종교·민족정체성의 보호와 보전을, 중국에게 안보와 영토의 보존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누구에게도 피해가 되지 않는 정책이다.” 티베트망명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며 티베트평화연대를 이끌고 있는 정웅기 대변인은 “이른바, 티베트독립론, 서방의 중국견제론 등 대다수의 언론이 중국 정부의 시각에서 티베트 사태를 바라보고 있으며 일부 진보진영에서 조차도 편향된 시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23차 문화나눔마당은 티베트 사태의 잘 알려지지 않은 내막과 더불어 치우치지 않고 균형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도와 줄 것이다. 참가비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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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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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9일, 참여연대에서 중국의 민족주의와 소수민족정책, 인권을 조명해보는 좌담회가 열렸다. 2008년 3월 티베트 시위대에 대한 중국정부의 유혈진압 이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보이콧 등 중국정부의 인권탄압에 항의하는 국제사회의 대응, 4월 27일 서울에서 올림픽성화봉송 행사에서 벌어진 일부 중국유학생의 폭력사태로 드러난 중국인들의 과도한 애국주의 표출 등 티베트 사태로 불거진 중국의 민족주의와 인권의 문제를 한국시민사회가 어떻게 볼 것인지 그 답을 찾기 위해 마련된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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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맡은 이재현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은 최근 중국의 부상으로 중국 패권에 대한 우려, 동북아시아 통합의 문제 등 어느 때보다 중국에 대한 관심이 높은 상황에서 벌어진 티베트사태는 한국 시민사회가 중국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진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며 중국의 민족주의나 인권의 문제를 중심으로 자유롭게 의견을 모아보자고 토론을 제안했다.

티베트에 대한 시각차는 서로 다른 인식의 출발

첫 번째로 ‘티베트 사태와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에 대해 발제에 나선 박장배 박사(한국산업기술대학교 강사)는 “티베트에 대한 한국인의 시각은 식민지 경험 및 경제개발 경험과 연결되는 동시에 티베트를 바라보는 서구인의 시각이 반영된 측면이 많고, 티베트를 바라보는 중국의 주류적 시각은 ‘하나의 중국’ 정책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언급하고 2008년 3월 14일 티베트 사태를 두고 “달라이라마 집단이 사주해 티베트를 중국에서 분리시키려는 폭력 활동이라고 규정하는 중국정부와 티베트가 독립국가였다는 티베트 망명세력간에 역사적 관점의 차이가 있다”며 티베트를 바라보는 시각차가 동일 상황에 대한 다른 인식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어 박장배 박사는 “티베트 사태는 1720년 이래 청 제국의 티베트 분할 지배, 중화민국 시기의 티베트 일부 장악, 1951년 중국인민공화국의 티베트 해방, 중국식 개조에 대한 저항인 1959년 3월 봉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그 배경을 설명하고, 이번 티베트 시위의 특징 몇 가지를 지적했다. “먼저 중국정부의 무력진압 양상이 1989년 티베트 봉기 때에 비해 상대적으로 심하지 않았고 티베트 청년세대가 비폭력노선을 버리고 무장투쟁노선으로 전환했다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 산발적이던 승려들의 시위가 격해진 데는 시민들의 참여가 결정적이었다는 점, 1989년과 비교해 국제적인 지원이 매우 부족했다는 점, 즉 시민단체 등의 목소리는 컸으나 정작 힘을 가진 행정부가 티베트 문제에 행동을 취한 경우는 찾을 수 없었다.”고 언급했다.

티베트 사태는 개발정책으로 인한 민족간 격차, 문화적 박탈감, 정치적 독립욕구의 분출

이어서 “중국의 소수민족 통합정책 기저에는 ‘하나의 중국’이라는 코드가 존재하고 그것은 하나의 국가를 강조하는 ‘다민족통일국가’ 개념과 하나의 민족이라는 ‘중화민족’ 개념으로 구성된다. 특히 1980년대 이후 법적이고 정치적인 개념이던 다민족통일국가 개념이 역사적 개념으로 확장되면서 애국주의 교육 및 ‘중화민족’의 일체성이 소수민족에게 강조된 점이 이번 티베트 사태의 근저에 깔려 있다." 고 설명했다. 이번 티베트 사태에 대해서는 “2008년 3월 티베트 봉기는 1959년 3월 10일 봉기와 1989년의 라싸 시위와 역사적으로 연결되며, 직접적으론 티베트 개발정책이 야기한 민족간 격차와 현지인들의 경제적 소외, 문화적 박탈감과 정치적 독립욕구를 바탕으로 진행된 사건으로 볼 수 있으며 동시에 막대한 물량을 동원한 중국의 개발정책이 개별 민족의 민족의식 강화로 작용한 점도 티베트의 민족적, 종교적 저항을 불러온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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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발제자로 나선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는 중국의 국가구조의 변화의 측면에서 민족문제가 어떻게 처리되어 왔는지 살펴보고, 이 속에서 티베트나 중국 민족주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함께 생각해 보자고 제안했다.

이남주 교수는 “근대 시기 중국의 민족주의 및 민족정책의 변화는 청조가 무너진 이후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중화민족의 개념과 그 핵심인 동화주의가 아래로부터의 합의나 동의가 결여된 채 위로부터의 통합으로 이뤄졌다는 점과 사회주의 시기, 문화대혁명 등 사회주의 개조과정에서 중앙정부와 소수민족간의 관계를 악화하는 역사적 경험들이 누적되어 현재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 민족주의, 패권의 열망보다는 상처받은 민족주의의 표출
 
이 교수는 “1980년대 개혁개방 이후 문화대혁명에 대한 반성과 계몽적 과제, 인도주의에 대한 관심의 증가로 등장한 서화론(중국문명을 낮추고 서구문명을 받아들이자는 논리)이 서구질서에 대항하는 담론의 등장과 1989년 천안문사태 이후 중국과 서방세계의 갈등과 마찰 등으로 퇴조하는 과정에서 민족주의가 재등장하게 되었다”며 그 형태는 주요하게 “애국주의 교육 강화 등으로 표출되는 ‘국가주도의 민족주의’와 일련의 민족주의적 경향의 시리즈 출판물이나 일본 교과서 왜곡에 대한 대중적 시위, 이번 티베트 사태에서 표출된 애국주의 등 대중들의 자발적인 민족주의 흐름인 ‘대중적 민족주의’로 구분된다.”고 언급하고 이 두 민족주의가 서로  이용하고 갈등하는 길항관계로 나갈 것이라고 언급했다.

또한 중국 민족주의의 성격과 관련해 “중국민족주의를 국가에 의해 동원되는 민족주의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국력의 성장에 따른 패권의 열망이라는 일부의 지적도 있지만 오히려 좌절감이나 패배로 인한 상처받은 민족주의로 이해하는 것이 맞지 않겠냐”고 의견을 피력하고, 이번 티베트 사태와 관련해서는  “티베트 내의 계층분화 과정이 새로운 갈등구조를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이 있고, 또한 중국정부가 이번 사태에서 달라이라마를 연관시키며 협상의 여지를 주지 않은 면이나 교묘하게 한족과 티베트민족간의 내부갈등을 부추킨 것 등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또한 국제사회의 티베트문제 대응은 금새 봉합되어가는 현재의 추세가 앞으로도 크게 변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 결국 티베트의 인권과 민족자결권의 문제는 결국 제 3의 길을 찾는냐에 달려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중국의 민족주의에 대한 대응과 관련해 “중국의 민족주의가 국제적 갈등을 유발하는 것을 막는 것이 중요하며, 감정적 충돌보다는 민족주의의 위험성과 부작용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도록 하는 대응이 필요하며, 중국의 민주화에 관련해서는 인권문제에 대한 관심과 정치화 사이의 구분을 일관된 입장에서 견지하는 자세로 제재보다는 도덕적 힘에 기초한 설득이 효과적이라고 본다.”고 의견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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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에 참여한 홍성태 상지대 교수는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을 구성하는 민족적 실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며, 55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는 중국에서 한족의 비율은 93% 영토는 50%로, 한족이 한족화 정책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한족의 영향력과 영토를 확장하려는 한족 민족주의가 현재의 중국과 소수민족 갈등의 핵심적인 측면”이라고 지적하고 “한족의 민족주의는 티베트 지배나 동북공정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이 제국주의의 속성을 드러내고 있어, 이번 티베트 문제 역시 한족 제국주의의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웅기 참여불교재가연대 협동처장은 “중국이 강력한 식민지 동화정책에 입각한 불공정한 정보를 보도하는 것이 티베트 문제를 왜곡하고 있다”며 국제사회가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3.14 티베트 시위의 배경에 대해서는 “2007년 9월, 중국이 3-4년간 지속해오던 달라이라마 측과의 대화를 갑자기 중단해 본토귀향의 기대가 꺽이면서 내재되었던 분노의 표출이자 달라이라마의 비방이나 사진을 밟고 지나가게 하는 등의 애국주의 훈련에 대한 반발이 작용했다”고 언급하고 “이번 티베트 사태는 올림픽을 앞두고 중국정부가 과도하게 진압한 기획성 강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며 중국의 문제는 민족주의가 아니라 패권주의자 국가주의라고 지적했다.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티베트 사태를 바라보는 관점과 관련해서 “한국사회는 중국견제론이나 반중국적 입장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서방이나 미국의 접근방법과는 거리를 두고 티베트 사태를 논의하는게 적절하다고 본다”고 밝히고, 티베트의 자결이나 독립문제는 “민족자결주의의 연장선상에서 티베트민중의 자결적인 판단에 맡겨야 하고 티베트 내에서 자결의 정치적 방향을 둘러싼 티베트 민중들의 아래로부터의 저항들이 각축하고 있을 것이며 티베트 민중의 정치적 지향을 현 단계에서 절대할 필요는 없으며 여유를 두고 지켜보자”고 제안했다. 또한 지구화가 기존의 민족국가가 갖는 정체성 독점을 약화시키고 소수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다는 지적과 함께, “한국의 과잉민족주의와 중국의 과잉민족주의가 상승작용하면서 갈등하는 양상은 동북아 평화구도에서도 적절하지 않는다”며 우려를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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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27일 올림픽 성화봉송을 놓고 일부 젊은 중국인들과 다양한 한국인 그룹 사이에 충돌이 있었고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한국에 체류하던 젊은 중국인들이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집단적 애국주의 광기를 표현했고 그 반발로 반중국 여론이 일고 있다. 중국 대사관이 조직적으로 개입한 것이 확인되었고 한국 검찰까지 나섰다. 차이나타운에 발길이 줄고 중국인에 대한 배타적 태도가 훨씬 많이 눈에 띠었다. 수면 밑에서 티베트에 관한 논쟁이 번져나가고 있다. 며칠 지났으니 몇 가지 주제를 짚어보고 깊이 생각할 거리를 찾아보았으면 한다.
 
'올림픽과 티베트 문제를 연계시킨 것은 정치적이고 잘못된 일인가?'
 
한국 사회에서는 티베트에서의 심각한 인권침해에 대해 이제야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니 오히려 뒤늦은 감이 있고, 이 상황을 베이징 올림픽과 연계시키기로 한 것은 피해 당사자인 티베트 망명 그룹과 독립운동 그룹의 결정이므로 존중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도시빈민 철거문제와 노태우 정권의 문제점을 외국에서 상당히 문제제기했지만 이것이 올림픽을 공격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한 나라 정부가 올림픽을 이용해서 독재나 인권침해를 가리고자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정치적 음모에 가깝다고 할 것이고 중국 정부가 이러한 비난에서 그리 자유롭다고는 볼 수 없다. 이는 인권단체들만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올림픽에 참여하는 운동선수들도 주최국 정부의 정당성과 인권 수준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런 것이 오히려 올림픽의 정치화를 막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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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징 올림픽 성화가 도착한 지난 달 27일 오전 서울 올림픽 공원에서 한국내 거주하는 중국인들이 올림픽을 축하하는 집회를 갖고 있다. ⓒ뉴시스 

'현재 국제정치 역학을 고려해서 중국 정부를 좀 배려해주고 외세에 대한 피해의식을 고려해 주어야 하지 않는가? 또 대국인 중국을 지나치게 자극하면 원하는 결과의 반대를 얻는 역효과를 내는 것 아닌가?'
 
결국 조심해라라는 경고인데, 역효과를 얻을 것이라고 확증할 만한 근거가 별로 없는 우려일 뿐이다. 그 만큼 중국 사회의 애국주의 광풍이 무섭다는 반증일 것이다. 히틀러가 등장할 때 어려운 상황의 독일을 좀 더 배려해 주었어야 했는지, 서구 열강과 경쟁해서 아시아의 자부심을 얻고자 했던 일본제국을 좀 더 배려해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이스라엘의 만행도 배려하고 조심해서 비판한다? 식민지 피해 경험 때문에 그렇다는 것은 피해의식이 특정한 광기와 결합되면 더 공격적인 태도로 변한다는 점에서 중국 변호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피해의식은 파시스트들도 잘 쓰는 상품이다. 소수 집단의 인권과 자결권을 보장하라는 외부의 관심에 대해서 중국 사회에서 어떤 역효과가 난다면 그 역효과는 중국의 정치와 권력구조 그리고 대중문화의 산물일 것이다.
 
'중국 점령 이래 생활 조건이 더 좋아졌고 중국 정부가 끝까지 불허할 텐데 티베트가 꼭 독립할 필요가 있나? 독립한다고 티베트인들의 생활과 민주주의, 인권 이런 문제가 해결될까? 중국에 남아서 협상하는 것이 더 낫지 않나?'
 
이건 강자의 어법이다. 제국주의자들의 어법이다. 한국도 일본 강점 덕분에 근대화되었고 잘 살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어법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인권이나 민주주의 기준보다 친중국 정서를 더 중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일단 티베트인들에게 말할 자유, 결사할 자유, 행동할 자유부터 주고 나서 그 다음에 이 질문을 하던지 말던지 하면 된다. 앞뒤가 바뀌었다. 그만 죽이고 그만 고문하고 그만 투옥하고 물어야 한다. 티베트 독립이나 더 높은 자치는 절대 안된다는 중국 정부의 체계적인 선동과 세뇌를 중단한 다음에 물어야 한다. 티베트인들은 원래 야만적("봉건적")이었으니 중국이 해방시켜주었다는 선동을 중단한 다음 물어도 된다. 고문하고 학살한 것에 대해서 사과도 하고 반성도 한 다음 물어도 늦지 않다. 그리고 나서도 티베트 사람들이 대부분 중국에 남겠다고 하면 별 문제 없지 않겠는가. 그럴 리 없으니 탄압하는 것이겠지만.
 
'미국과 친미반중국 세력이 티베트 인권 문제를 중국때리기에 악용하는 것은 어찌해야 하나?'
 
이것은 중요한 문제다. 일부 중국 시위대의 폭력 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다. 한국 사회에 티베트 인권운동 그룹들이 이 문제에 잘 대처해야 한다. 일단 미국 정부와 친미반중국 세력의 정치음모적 접근은 잘못되었다고 시민사회 내부에서 강한 질타가 있어야 한다. 세계적으로 인권문제에 미국 정부가 개입하면 골치아파진다. 조폭이 자선사업을 하는 꼴이랄까. 이럴 때 인권 단체들은 이중의 비판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즉 미국 정부의 접근과 일부 기독교세력을 포함한 반중국 세력의 접근에 대해서 호된 비판을 가하는 동시에 티베트 문제를 제기함으로서 이 문제에 정면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중국때리기 방식의 접근을 비판하지 않으면서 티베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위험하다. 인권문제를 제기할 윤리적 자격이 중요하다. 중국 시위자에 대해서 엄벌을 요구하며 일종의 보복을 설파하는 것도 매섭게 비판해야 한다. 한국에서 반중국 민족주의 선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패권국가적 접근,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당파적 접근, 민족주의적 접근에 대해 항상 비판을 유지하면서 모든 인권 문제를 불편부당하게 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구더기 무서워 장 안 담글 수는 없으니. 서구가 한 짓은 더 한데 뭘 그러냐고 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인권의 영역에서는 답변할 가치가 없다.
 
어떻게 해야 하나?


27일 종각에서 광화문으로 행진한 비교적 합리적인 티베트 인권 행진에서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부 사람들이 동북공정과 티베트 점령이 같은 것이라며 한국도 언젠가 티베트 처럼 당할 것처럼 선동한 것이나, 어떻게 한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저런 난동을 펴는지 분개하는 모습은 이해가 가는 면도 있지만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러한 정서의 연장선상에서 지금 국내 체류 중국인들에 대한 반감이 다양하게 표시되고 있는데 이건 큰 문제다. 이것인 중국 정부가 외세에 대한 피해의식을 앞세워 탄압과 인권침해를 정당화하는 것과 같은 논법이다. 한국의 민족주의를 동원해서 중국을 비판하겠다는 것인데 이 길로 가면 모두 망한다. 인권과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런 집단적 피해의식을 그만 동원해야 한다. 모든 형태의 민족주의에 경계령을 내려야 한다. 집단의 피해를 앞세우는 순간 독재자, 파시스트, 민족주의자, 군부 보통 이런 사람들이 미소를 짓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민족을 생각하게 하는 집단 호칭을 국어에서 싹 빼고 생각하고 말하자. '중국인들'이라고 하지 말고 '일부 폭력행위자'라고 말하자. '감히 남의 나라 수도에서 이런 일이..' 하면서 분개하는 대신 '평화적 시위에 폭력을 행사하다니'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이 한국을 얕보니까'라고 말하지 말자. 그런 중국과 한국은 인격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인들은...'이라는 주어를 가급적 피하자. 애국주의 광기와 관련되어서 주 책임은 중국 정부이므로 '애국주의 교육에 피해자인 중국인들', '정부의 세뇌공작으로 편견을 갖게 된 중국 청년들은' 하면서 이해할 수 있다. 중국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이렇게 국민이나 민족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는 걸 피하면 더 많은 진실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한국도 마찬가지 - '강부자' 내각과 한나라당에게 하나의 나라가 없듯이 원래 하나의 나라에 한 나라는 없다.

이대훈(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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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진보, 국가주의·민족주의를 넘어라


민주화의 '제3의 물결'이 스쳐간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과 '공고화'를 둘러싼 갈등이 전개되고 있다. 태국에서는 군부쿠데타로 민주화의 과정이 '역전(逆轉)'되었던 반면에 2007년 12월 총선에서는 다시 쿠데타로 쫓겨난 탁신당이 '국민의 힘당'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단 다수당으로 재부상하였다. 한국에서는 '신보수정권' 시대의 개막이라는 형태로 민주화에서 또다른 '역전'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아시아 민주화의 최대의 문제는, 많은 아시아 나라들에서 민주주의 이행을 통하여 정치적 경쟁구조로서의 선거민주주의가 등장했지만 그것이 실질적인 권력분점이나 경제적・사회적 독점의 해체나 완화로 이어지지 못함으로써 민주주의가 새로운 독점적 질서의 변형태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많은 경우 독재 하에서 사회경제적 하위주체들은 새로운 '민주주의적인 정치적 형식' 하에서 새롭게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배제되고 주변화되는 경우가 많다.

그 하나의 현상으로, 많은 아시아 나라들에서는 인종적・사회적 균열선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때로 더 큰 정치적 폭력에 의해서 다양한 사회경제적 하위주체들과 소수자들이 배제되는 경우도 있다. 한국에서 경험하고 있듯이 민주화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와 결합되면서 소득분배의 악화, 양극화의 심화, 계급적 불평등의 심화 등을 동반하는 민주주의의 왜곡현상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위기와 위협을 의미하고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의 민주화' 혹은 필자의 표현으로는 '민주주의의 사회화(socialization of democracy)'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는 민주주의를 사회와 일체화시키는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것, 즉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형식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구성원들의 요구(demands)와 권리(rights)를 더욱 폭넓게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민주주의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형식 속에서 존재하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권력의 독점을 사회적경제적 하위주체들에게 평등한 방향으로 탈독점화하고 평등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의 아시아'에 대응하는 '민중적 아시아'에 대한 고민의 필요성

이러한 민주주의의 사회화는 한국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현재 민주주의 발전의 병목지점을 돌파하고 진보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필자는 이러한 과제가 한국민주주의 자체를 분석하고 변화시키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이러한 관점을 아시아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지평에 확대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의 사회화를 위한 실천이 일국적 차원 뿐만 아니라 아시아적 차원에서도 시도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사회적 아시아(Social Asia)'의 논의를 제기하고 있다.

사회적 아시아는 개별 아시아 사회 내에 존재하는 시민사회 및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힘에 기초하여 아시아 민중들의 사회적 요구를 실현하기 위하여 아래로부터의 연대에 기초하여 구성되는 새로운 초국경적 아시아의 성격과 지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는 시장 자율보다는 시장에 대한 공적・정치적 규율, 국가안보가 아니라 인간안보, 경제정책에 의한 사회정책의 희생이 아니라 사회적 관심에 의한 경제정책의 조정, 생태적 지속가능성 등 시민사회적 가치와 지향을 실현하기 위한 초국경적 차원의 사회적 규율질서를 형성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개별 사회에서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들이나 민중들의 요구를 시장논리에 의해서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아시아적 질서를 그러한 요구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재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기존에 개발독재에 싸우면서 나타난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의 정신이 일국적 차원이 아니라 새로운 아시아를 형성하기 위한 '정신적 에토스'로 표현되어야 한다. 현재 우리의 의사와는 관계 없이, 자본이 주도하는 아시아의 초국경적 통합이 진전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자본의 아시아'가 구체화되어가고 있다. ASEAN+3와 같은 형태의 신자유주의적 아시아통합도 진전되고 있다.

초국경화는 피할 수 없는 추세인 것이 분명하다. 단지 어떤 성격이 초국경화냐 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어떤 성격의 아시아'를 구성할 것인가하는 자본과 노동자계급, 자본과 시민사회, 자본과 민중의 투쟁이 전개되고 있을 뿐이다. 지구화 시대에 일국적 차원에서 전개된 민주주의투쟁은 이제 자본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아시아'가 아니라 민중이 주도하는 아시아를 형성하기 위한 초국경적 진보에너지로 확장되어야 한다.

현재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는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에서 사회적 아시아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아시아를 촉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워싱턴 컨센서스에 부응하는 일련의 신자유주의적 정책들(민영화, 작은 정부, 금리의 시장연동성 증대, 복지 축소, 생활기본재의 상품화 등)이 민중복지의 확대가 아니라 축소, 그리고 민중들의 삶의 더 많은 부분이 공적 서비스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장기제에 의해서 충족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아시아적 차원에서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의 조건들이 공공재로서 확보되고 최소한의 노동권리가 사회적 권리로 확보되도록 하는 노력이 절실해진다.

이러한 사회적 아시아를 위한 노력을 예를 통해서 드러내보자. 한국의 노동운동은 세계적으로 역동적인 노동운동의 나라이다. 그러나 한국의 노동운동은 주로 일국적 이슈에 집중되어 있고 글로벌 이슈를 대면하는 경우에도 일국적 노동기준의 약화의 문제와 관련될 때이다. 그러나 이제 한국의 노동운동, 나아가 많은 아시아의 노동운동은 일국적 노동문제만이 아니라 범아시아적 차원의 노동규범과 사회규약을 위한 초국경적인 실천 속에서 만나야 한다.

나아가 아시아 차원에서 사회적 최저선(minimum)을 형성・실체화하려는 노력을 행할 수 있다. 아시아 차원에서의 최소한 사회적 규약(social charter)를 실현하려는 노력도 행할 수 있다. 또한 투기적 금융자본의 60% 이상이 동아시아 몰려있는 상황에서, 아시아 시민사회가 이러한 투기자본에 대한 국제적 규제장치를 만들려는 노력을 공동으로 행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노력들은 '실체없는' 초국경적 권력을 향해서가 아니라 결국 국민국가에 대항하여 초국경적 규범과 규칙을 강제하는 노력으로 나타나겠지만, 국민국가적 이슈 그 자체에 집중하는 운동과는 구별될 수 있다.


아시아 민주주의의 최소규범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과 한국의 과제

이러한 아시아적 차원에서의 '민주주의의 사회화'는 민주주의를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실현하고자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아시아 민주주의의 최소규범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 위에서, 그리고 그것과 병행하면서 추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아시아 민주주의의 최소규범의 형성노력은 아시아적 차원의 인권레짐, 더 낮은 수준에서는 인권헌장 등과 같은 형태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적 차원의 민주주의와 인권 규범을 구속력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내부적 인권발전을 넘어서서, 아시아적인 인권규범을 만들려는 노력을 국가적・시민사회적 차원에서 진행하고 이를 구속력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도 진행할 수 있다.

예컨대 2002년 7월 1일자로 발효된 로마규정을 기초로 설립된 ICC(국제형사재판소)의 경우, 그것이 관할권을 갖는 '반인도주의적 범죄(anti-humanitarian crimes)'는 국민국가의 사법적 관할권을 일정하게 제약하고 그것을 초국경적인 사법적 정의기구에 종속시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물론 대단히 불완전하고 미국 등 강대국들은 이를 무시하고 있지만, 이는 초국경적인 민주주의라는 점에서 대단히 의미있는 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아시아에서도 반인도주의적 범죄에 해당하는 '정치학살'같은 경우 아시아 공동의 민주주의적 의제로 만들 수도 있다. 현재로 민주화 이행 이후에도 필리핀에서는 수백명의 정치학살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학살은 심지어 사회운동가들에게까지 행해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아시아의 정치학살에 대응하는 아시아 의원단 네트워크 같은 경우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며,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산재하는 인권 및 민주주의 관련단체들이 최소한 이러한 정치학살, 그것이 어렵다고 한다면 운동가들에 대한 정치학살(인도네시아의 무니르 사건 처럼)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초국경적인 공동기구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동안 아시아의 인권규약을 만들려는 노력이 여러 군데서 이루어져 왔다. 1998년 광주에서는 아시아 인권워크숍이 열려서 아시아의 인권단체들이 아시아 인권헌장을 합의하기도 했다. 아시아 인권단체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노력이 진전되어져 왔다. 문제는 이러한 노력을 어떻게 아시아의 국가적 차원의 구속력있는 합의사항으로 만들어갈 것인가하는 점이다. 이것은 사실 시민사회 캠페인이 강력하게 전개됨으로써 비로서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시민사회적 인권헌장이 개별 국민국가의 국회를 통과하려는 범아시아적 차원에서의 노력이 필요하다. 아시아 민주주의의 최소규범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시민사회의 행위자들이 국가 행위자들에 대해서 효과적인 압력을 조직하는 중장기적인 노력을 공동의 의제로 할 때 가능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국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압력과 영향력의 정도가 강한 나라에서부터 선도적인 모범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의 많은 민주화 이행국가들은 불안정한 이행과정을 겪고 있다. 민주정부들은 구세력들의 저항에 포위되기도 한다. 남유럽의 경우 신생민주주의국가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초국가적인 지역(region)의 수준에서의 인권레짐에 대해서 적극적이었으며 그것은 역으로 신생(新生)민주주의를 안정화시키는 효과를 낳았던 전례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초국경적인 혹은 범아시아적 차원에서의 인권레짐 혹은 민주주의 레짐의 형성노력은 개별국가에서의 민주주의의 안정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한 한국의 역할을 고민해보게 되면, 위와 같이 아시아 차원의 인권레짐과 아시아 민주주의의 최소규범을 만들기 위한 노력에 앞장서야 할 것이며, 동시에 개별 나라의 민주주의와 인권발전을 위한 연대적 지원노력을 적극화해야 한다. 상대적으로 정치적 민주주의가 선진화되어 있는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은 국내적 이슈에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어, 이러한 아시아적 차원의 새로운 노력을 고민하지 못하고 있다. 일부 아시아 단체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노력들이 선구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한 최근 한국단체들, 태국의 쿠데타를 비판하기 위한 시위 등도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이러한 노력은 미약하다.

만일 한국의 시민사회가 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발전에 대해서 적극적인 연대의지를 갖게 되면, 아시아의 많은 후발 민주화의 국가들의 반민주주의적・반인권적 주제들을 우리의 문제들로 수용하면서 협력하고 지원하는 초국경적 연대노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다층적인 차원에서 아시아의 많은 신생민주국가들에 대하여 민주주의와 인권발전을 위한 기술적・경제적・정치적 지원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민주주의 지원에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도록 하기 위한 지원, 민주주의의 운영을 위한 기술적 지원에서부터 최근에는 '민주적 가버넌스(democratic governance)' 지원이나 인권 지원(Human Rights Aid),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한 지원, 시민사회 활성화를 위한 지원 등을 포함하여 다양한 차원을 포함할 수 있다. 각 영역에서 핵심적으로 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진전시키기 위해서 아시아 시민사회 활동가들과 인권활동가들의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인적 지원도 포함될 것이다. 다양한 수준에서 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 발전이 가능한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힘이 강화되기 위한 다양한 협력과 연대노력들이 가능할 것이다.


탈민족주의・탈국가주의적인 인식을 위하여

이러한 초국경적인 아시아적 실천과 연대적 지원이 대중적 기반을 가지려면, 또한 실효성을 가지려면, 탈국가주의적・탈민족주의적 인식이 활동가 수준에서 나아가 일반 대중 수준에서 확산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 지구화와 아시아 민주화라고 하는 새로운 상황은 우리가 일국적 차원에서 가지고 있던 저항성을 어떻게 탈국가주의적 저항성으로 변화시킬 것인가하는 과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탈국가주의의 과제는 아시아의 모든 나라 및 개별 사회의 민주진보세력에게도 적용된다.

아시아의 시민사회 세력 내부에도 사실 여전히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적 사고가 내재해있다. 동북아시아의 경우만 보더라도, 일본, 한국, 중국의 시민사회가 국가주의와 편협한 민족주의 를 어떻게 성찰할 것이며 동아시아의 민중연대와 시민사회 연대가 넘어설 것인가하는 것이 심각하게 고민되어야 한다. 특히 중국과 일본은 과거와 현재도 아시아의 지역에서 패권국가 혹은 준(準)패권국가로부상해가고 있는 점, 한국도 이제 경제적 패권국가로 전환되어가고 있다는 점 때문에도, 특별히 이러한 탈국가주의적・탈민족주의적 인식의 지평은 대단히 중요하다.

아시아에는 다양한 성격의 아시아주의가 존재한다. 중국의 중화(中華)주의와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의 상기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패권적' 아시아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아시아''사회적 아시아'를 지향하는 새로운 아시아주의가 필요할 수 있다. 한국 및 아시아의 민주진보세력이 지향해야 하는 아시아주의가 있다면, 그것은 아시아를 민주적 공동체와 사회적 공동체로 사고하는 것이어야 한다.

특히 한국의 경우에 새로운 아시아의 경제적 착취자가 되어가는 상황에 놓여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과거의 피억압자가 새로운 경제적 억압자로 전화되어 갈 수 있고 실제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지구화의 흐름은 한국의 시민사회와 민중진영에 대해서 과거의 피억압자가 어떻게 억압자로의 경로를 피할 수 있는 것하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과거의 피억압민족이 준(準)제국주의적 민족으로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이 '세계무역 12대 대국'이 되고 한국의 '다국적' 대자본이 글로벌 경영이 전면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우리가 과거 피억압민족의 경험을 성찰적으로 파악하고한국이 과거의 제국주의적 민족의 경로와 다른 경로를 밟을 수 있도록 한국의 진보주의가 전환점을 만들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한국시민사회와 민중진영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에서 편협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넘어서려는 운동은 한편에서는 '자폐적 민족주의'를 담지하는 우파에 대한 투쟁임과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진보운동 그 자체의 혁신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한국의 민주진보운동이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적 운동이 아니라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성찰적 운동으로 전개하는 것은 우파의 국가주의와 편협한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국가주의와 편협한 민족주의를 넘는 운동으로 재구성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라고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진보가 민족주의적・국가주의적 진보에서 세계주의적 진보로 전환하기 위한 노력을 새롭게 강화해야 한다.


조희연(성공회대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연구소 소장)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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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유감



지난 몇 년간 우리가 아시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약방의 감초처럼 끼어들었던 주제가 한류다. 가까운 일본과 중국을 시작으로, 처음에는 동남아시아 국가들로, 중앙 아시아로, 중남미로 확산되었던 한류는 우리 내부로부터 다양한 반응을 이끌어 냈다.

이제 와서 한류에 대해서 한마디 더 거드는 것이 어쩌면 너무 늦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이미 아시아에서 한류가 지는 해라는 관찰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한류의 열풍이 식어가는 문제가 아니라, 한류에 대한 반동으로 일본의 혐한류와 같은 생각들이 서로 모습과 정도를 달리 해서 한류가 확산되었던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정황도 포착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초기의 열풍의 단계를 지난 지금이 오히려 한류에 대해서 더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바라 볼 수 있는 시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세계방방 곡곡에 숨어 있는 한류를 찾아내는 미디어

필자가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도대체 왜 “한류”인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다시 뒤집어 보면, 왜 우리가 흔히 한류라고 부르는 이 흐름에 “대한민국”, “한민족”이라는 민족주의적 꼬리표를 붙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며, 그에 대한 반동으로 한류에서 민족주의적 힘을 빼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의 한류는 지나치게 어깨에 대한민국이란 견장을 차고 힘을 잔뜩 주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한류라는 단어 자체는 “국산”이 아니다. 필자가 알고 있기로는 중국에서 붙은 이름이다. 하지만, 한류라는 이름을 사랑하고 애용하고, 거기에 민족과 대한민국의 꼬리표를 붙인 것은 분명 우리다.

국민 개개인이 한류의 확산을 보고 우리의 문화적 힘이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고 자랑스러워한다. 정부차원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한류의 확산은 우리 대한민국의 경제적 이익은 물론 국가적 자긍심을 높이고, 세계시장에서 국가 브랜드의 이미지를 높이고,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떨친다고 규정하며, 온갖 지원을 아까지 않고 있다.

신문과 방송들은 앞 다투어 세계방방 곡곡에 숨어 있는 한류를 찾아내어 “대한민국~”을 외치기에 앞장서고 있다. 얼마 전에는 인도 북부 마니푸르주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국어로 사랑의 밀어를 나누는 것이 대 유행이고, 한류의 확산 결과라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다. 웬만한 한국사람이면 평생 한번 입에 올릴까 말까 하는 인도의 한 주 이름까지 들춰내며 한류 확산에 돋보기를 들이대고 있다.

인터넷에서도 외국 사람들이 한글이 인쇄된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사진이 화제가 되고 있다. 화제를 넘어서 외국의 유명 배우 누구누구도 한글로 된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며 은근히 자랑스러워하는 눈치다. 새로 나오는 대작 드라마나 제작단계에서 화제를 불렀던 드라마는 모두 한류시장을 겨냥한다. 새로 나오는 가수와 연기자들은 모두 한류 스타를 꿈꾼다. 자 이쯤 되면 은근히 문화적 우월의식이 우리 속에 자리 잡을 법도 하다. 충분히 가능하다.

지나친 자랑은 열등감의 또 다른 표현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본다. 우리가 한류의 확산에 대한민국과 한민족의 꼬리표를 붙이고, 거기서 자부심을 느끼고, 더 나아가 문화적 우월의식을 느끼는 것, 그 자체가 또 다른 열등감의 표현은 아닐까? 생각해보면, 1970-80년대 한국의 안방과 극장을 장악했던 홍콩과 중국의 영화들, 그리고 늘 우리 곁에(?) 있는 헐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영화들, 이런 것들에 대해서 홍류(香流), 중류(中流), 미류(美流)라는 이름을 붙여 본적이 없는 것 같다. 정확하게 그런 명칭은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왜? 굳이 그런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식 속에 중국권인 홍콩과 중국 자체는 원래 대국이다. 미국도 두말할 나위 없이 대국이다. 그런 나라의 영화에 환호하고, 그런 나라의 스타에 환호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왜? 대국이니까. 우리나라보다 큰 나라고 강한 나라니까. 그들의 문화적 상품이 한국으로 들어오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생각되었으니까(물론 그런 수출을 하는 입장에서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 그런 이름을 만들어 내지 않았겠지만).

그럼 뒤집어서 우리의 문화상품이 세계로 나가는 것에 굳이 고집스럽게 “Made in Korea"라는 낙인을 강하고 진하게 새겨 넣는 것은 지금까지 변방에 힘없고 작은 나라였던 한국이 이정도 할 수 있다는 이만큼 커졌다는 인상을 너무 너무 세계에 알리고 싶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지나친 자랑은 오히려 열등감을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우리가 남들보다 못하다는,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보다 못하다는 열등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남들보다 잘났다는 우월의식도 가질 필요가 없다. 우리 스스로에 대한 평가로 자주적이고 자부심을 갖는 다는 것은 우리와 남이 같이 있을 때 평등하다는 생각도 반드시 동반해야 할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자랑스럽다고 해서 남을 폄하할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남들보다 객관적으로 좀 못하다고 해서 열등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이재현(연세대 연구교수, 국제연대위 실행위원)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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