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하얀 아오자이를 입은 여고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일시에 하교를 하는 모습은 불그스레한 노을을 배경으로 학이 무리지어 날아가는 착각을 일으키는 매혹이었다. 불과 십 오년 전 호치민 시내에서 매일 같이 연출되던 이 장면은 사라졌다. 형형색색의 유니폼과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바닷물을 가르는 새우 떼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이리저리 얽혀 나름의 질서를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다.

호치민의 외양은 매일매일 변신하고 있다. 개방초기 길거리를 수놓던 씨클로(xich lo)는 시에서 발급한 번호판을 달고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 꽃이나 껌을 팔기위하여 끈질기게 진로를 방해하던 소년, 소녀들은 관광객의 편의를 위하여 어디론가 증발되었다. 식민시대, 전쟁, 그리고 사회주의 강성개혁(hard reform)시대를 상징하던 수많은 건물은 근대화를 상징하는 고층건물에 밀려 매일 역사의 저편으로 자취를 감추고 있다. 백화점에 넘쳐나는 명품 진열대를 보고 있으면 이곳이 불과 십여 년 전 안경, 모자, 신발까지 절도의 표적이 되던 빈곤의 땅이었음을 망각한다.

이러한 변화를 보고 성장주의자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도이머이(Doi Moi)라고 통칭되는 개혁개방정책 이후 매년 평균 7-10%의 성장을 가능하게 한 정부의 정책방향 그리고 국민의 높은 교육열과 근면함에 경의를 표한다. 역사학자들도 베트남의 저력을 새삼 강조한다. 베트남이 캄보디아 내전을 포함해서 중국과의 큰 전쟁에서 자주 승리했을 뿐 아니라 전쟁에는 져본 적이 없는 천하강적 미국에게 1패의 전적을 안긴 유일한 나라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숫자와 외양만 보면 베트남에 관한 이들의 평가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베트남은 성장하고 있고 앞으로도 성장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에 분명하다.

하지만 베트남의 외형적 성장 뒤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 이다. 베트남의 현재는 미래에 대한 예견을 유보하게 하는 여러 가지 모순을 안고 있다. 이러한 모순이 해결되거나 해소될 수 있을지, 아니면 새로운 변화에 대한 요구를 폭발시킬지 두고 볼 일이다. 베트남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안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베트남의 미래를 가장 어둡게 만들고 있는 것은 나날이 벌어지고 있는 빈부격차이다. 베트남에서 한국인이라고 부를 자랑하거나 현지인을 업신여기다가는 망신을 당할 수 있다. 웬만한 자가용을 가지고 있다고 거들먹거리다가는 벤츠와 BMW에서 내리는 베트남인을 보고 머쓱해진다. 일부 공산당 간부와 관료들 그리고 신흥기업가들은 서울의 강북에 맞먹는 가격의 집을 수십 채 가지고 자녀를 비싼 국제학교에 보내거나 아예 미국유학을 보낸다. 나이트클럽에는 수백 달러하는 위스키를 여러 병 시켜 놓고 매일 파티를 즐기는 젊은이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반면 베트남에서 가장 임금이 높은 호치민의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150달러 정도이다. 더욱이 미숙련노동자들은 최저임금을 조금 넘는 돈으로 생활을 한다. 이들이 아이 둘을 낳고 가족을 이루고 살려면 한 달에 400-500 달러는 필요한데, 현재의 임금으로는 부부가 모두 공장노동을 해도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다. 이런 현실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결혼을 하지 않거나,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지 않거나, 숙련노동자가 되어 임금을 더 받는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물가는 나날이 치솟으며 이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결과적으로 노동자가 호소할 곳은 파업 밖에 없다. 베트남의 주요 공단에서 매년 여러 차례 파업이 불길처럼 번지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외자기업의 경영자들도 노동자의 파업이 “떼를 쓸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다만 파업이 일어나면 주동자와 요구조건이 명확하지 않아 협상이 쉽지 않다는 점을 불만스러워 한다. 이처럼 베트남에서 와일드 캣(wildcat)이 일반화되고 있는 것은 노동자들이 기존 노동조합을 불신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파업을 감행하면서도 일자리를 잃거나 경찰의 주목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빈부의 격차가 커지고 노동자의 생활이 힘들어지는 만큼 베트남의 미래는 불투명해지고 있다. 한편으로 현재와 같은 산업구조로는 조만간 안정적 경제성장이 흔들릴 것이다. 물가가 오르고, 노동자의 생활이 힘들어지고,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이 늘어나면 자연히 노동집약적 산업이 감내할 수 있는 임금수준을 넘어설 것이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노동집약적 외국공장들이 앞을 다투어 떠나고 산업 공동화가 일어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산업구조를 고도화하려는 체계적인 노력이 없이 베트남의 미래는 없다.

다른 한편으로, 베트남의 미래가 불투명해질수록 노동자들의 정치적 요구가 거세질 것임에 분명하다. 베트남은 노동자의 나라이며 사회주의 국가이다. 현재는 성장을 볼모로 설득하고 강한 공안(公安)의 힘을 동원하여 노동자의 불만을 잠재우고 있지만 앞으로도 노동자들이 국가이념과 현실 사이의 모순을 용인할지는 불투명하다. 빈부의 격차가 큰 사회주의국가 그리고 노동자가 가장 못사는 노동자국가에서 어떤 정치가 일어날지 두고 볼 일이다.

베트남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해석이 단기적인 수치와 사건에 의해 예단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몇몇 국영회사가 부도가 나거나 주식시장이 요동친다고 비관에 빠지고, 역으로 베트남에 쏟아지는 외자나 높은 성장률을 보면서 낙관하는 것은 단견이다. 베트남은 향후 5-10년 안에 산업구조조정에 성공할 수 있을지 그리고 빈부격차를 줄이고 노동자의 삶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에 성패가 달려있다. 베트남의 저력을 믿으면서도 불안감을 감출 수 없는 것은 베트남의 지도자들과 외국자본이 모두 이런 정치경제적 현실보다 당장 눈앞의 이익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회의가 들기 때문이다.  
           

    채수홍(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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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24일 베트남 공안부(the Ministry of Public Security) 와 사회연구소(the Institute for Social Studies) 관계자 7명이 참여연대를 방문했습니다. 이들은 한국에서 시민사회가 정책입안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왔습니다. 이태호 협동사무처장은 참여연대의 역사와 '감시, 대안, 참여, 연대'의 네 가지 방향을 소개했습니다. 또한 낙선낙천운동, 소액주주운동, 정보공개청구권, 반부패법 제정 로비활동 등 참여연대의 주요 활동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소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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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노래하는 저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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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NGUYEN CHI THIEN (1939~)
국가: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Socialist Republic of Vietnam)
분야: 인권, 민주주의, 저항시인




베트남의 역사

 베트남의 정식명칭은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Socialist Republic of Vietnam)이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이면서 세계에서 유일하게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통해 공산화를 이룬 나라이기도 하다. 1945년까지 지속된 응웬 왕조를 마지막으로 베트남은 2차 세계 대전의 종결 후 여러 외세의 침입에 맞닥트리게 된다. 이에 반발해 베트남에는 여러 민족 진영이 생기게 되는데, 그 중 하나인 베트남 독립동맹(베트민)을 중심으로 북 베트남에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설립된다. 남, 북으로 갈라진 베트남 통일 전쟁에서 남 베트남의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이 1961년 참전하였으며, 한국도 이 때 지원군을 파병하였다. 1975년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 베트남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고, 이에 본격적인 베트남의 공산주의 체제가 시작하게 된다.

<사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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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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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베트남 전쟁에서 폭격을 피해 달아나는 아이들
사진 2. 전투에 참가한 한국 병사들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저작권자ⓒ '한국언론 뉴스허브' 뉴시스통신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베트남은 현재 상당부분 자유시장 경제체제로 돌아섰지만, 여전히 정치적으로는 공산당 일당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독재체제하에서 베트남은 인권운동에 대한 탄압을 계속하고 있고 정치범들은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 영장 없이 체포하는 일은 다반사이고 사법부와 입법부는 정치적인 압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아직까지 종교의 자유는 제한되어 있어서 모든 종교 단체들은 공산당이 운영하는 조국 전선과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 또한 국가보안법을 근거로 인터넷을 이용하여 인권, 민주주의, 정권교체를 토론하는 반 체제주의자들이 학대당하거나 협박을 받고, 구속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그나마 수용시설은 불결하고 위생상태가 좋지 못하며 수용소 내에서는 고문 행위가 자행되고 있다

꿈꾸는 저항시인 NGUYEN CHI THIEN

 뉴우엔 치 티엔은 1939년 2월 27일 베트남 중산층의 아들로 하노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배려로 그는 프랑스와 베트남 문화의 좋은 교육을 받게 된다. 1954년, 그의 나이 15살 때 북 베트남에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된다. 당시 거의 백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공산주의 정권을 피해 북에서 남으로 옮겨갔지만, 그의 부모님은 하노이에 머물기로 결정한다. 왜냐하면 북베트남의 공산주의 정권이 외세를 몰아내는데 기여한 애국주의자들이고 그들의 정책이 서민을 지원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는 어긋나고 1953년에서 56년에 걸쳐 이루어진 소련식 공산화 과정에서 수십만의 사람들이 처형되거나 돌아오지 못하는 감옥으로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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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뉴우엔 치 티엔

 이 때부터 티엔은 공산정권에 반대하는 시를 쓰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시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베트남을 떠돌게 된다. 1960년 12월 고등학교 역사선생님이었던 한 친구의 부탁으로 티엔은 두 시간 동안 역사 수업을 맡게 된다. 당시 사용되었던 교과서인 “Cach Mang Thang Tam 1945” (8월 혁명의 역사)는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패망이 만주에서의 소련군대의 승리 때문이라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었다. 그는 그의 학생들에게 진실은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두 개의 원자폭탄 때문에 일본이 항복한 것이라고 가르쳤고, 약 두 달 뒤 그는 반정부선전의 혐의로 체포되어 2년의 형을 선고 받는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는 푸토와 엔바이 지역의 노동캠프에서 3년 반을 복역하게 된다.

 그는 약 100여 편의 시를 캠프 안에서 쓰는데, 모두 그의 마음 속으로 쓰게 된다. 왜냐하면 캠프에는 시 쓰기를 위한 집필도구도 없었고 그러한 시를 쓰고 읽는 행위 자체가 너무나 위험했기 때문이다. 쥐, 거미, 곤충 등 캠프 내에 살아있는 생물은 모두 멸종될 정도로 캠프 내 환경은 열악했다. 극한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티엔은 시가 영혼의 아내와 깉이 곁에서 그를 위로하고, 격려했다고 회상한다.

 1964년 석방 후 티엔은 기억 속으로 저장해 두었던 시를 옮겨 쓰고 그것들을 그의 친한 친구들에게 낭독해 주기 시작한다. 곧 그의 시는 하노이와 하이폼에서 널리 퍼지게 되고, 1966년 반동적 시를 썼다는 이유로 그는 다시 12년의 감옥행을 선고 받는다. 그는 이 긴 시간 동안 300편이 넘는 시를 마음 속으로 집필한다.

 1977년, 남 베트남이 몰락한 2년 후, 정치범들을 수감하기 위해 북 베트남 정부는 그를 석방하게 된다. 당시 사람들의 증언으론 그는 ‘걸어 다니는 해골’이라 불릴 정도로 깡마른 상태였다고 한다. 티엔은 그의 시를 해외로 보내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대사관으로 갈 것을 결심하고 3일 밤, 낮에 걸쳐 그의 기억 속에 있던 시 400편을 옮겨 적는다. 7월 16일 마침내 그는 영국 대사관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하고 3명의 외교관에게 셔츠 속에 숨겨두었던 그의 시들을 넘겨주게 된다. 그들은 티엔에게 시를 출판할 것을 약속한다. 티엔이 대사관의 뒷문을 나오자 마자 그는 경찰에 다시 체포된다.

새벽은 올 것이다

 동유럽에서의 공산주의 정권들의 몰락과 국제사회에 티엔의 상황을 알려온 해외거주 베트남인들의 도움으로 그는 1991년 10월 석방되었다. 그가 목숨을 걸고 만난 세 명의 영국 외교관은 약속을 지켰고, 티엔의 시는 미국, 프랑스 그리고 다른 나라의 베트남인들 사이에서 퍼지게 된다. 1982년 Asiaweek 지는 “하노이 지하로부터의 목소리”란 제목의 기사를 싣고, 티엔에 관한 BBC 방송이 이어지면서 세계는 그를 베트남의 저항시인으로 주목을 하게 된다. 티엔은 “Amsterdam Poetry prize”, “American PEN Freedom Award” 등의 상을 수상하게 되고 1988년에는 “Freedom to Writer” 상을 받는다. 그의 시는 지금 영어, 불어,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으로 번역되어 베트남의 인권상황을 세계에 알리고 있다.
 베트남과 미국의 수교가 정상화된 후 미국으로 이주한 티엔은 40년 간 떨어져 있던 그의 동생과 지금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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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ugh the night seems impenetrably deep
And boundless over my head,
I still pray,
Still live and trust
That the dawn will come, the dawn will come.”
“비록 밤이 칠흑처럼 깊을지라도,
그리고 내 머리 위에 끝없이 펼쳐져 있다해도,
나는 여전히 기도합니다
여전히 살아가고 믿고 있습니다
새벽이 오리라는 것을, 새벽이 오리라 것을”
티엔의 시 中에서

참고자료
http://www.vietamreview.net/Nguyen_Chi_Thien_author.html
http://www.vietnamlit.org/nguyenchithien/autobiography.html
http://en.epochtimes.com/news/6-5-3/41077.html
http://en.wikipedia.org/wiki/Nguyen_Chi_Th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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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품도, 예단도, 부조금도 없지만…"
한국과 베트남의 결혼 문화 비교해보니…
  
지난 11월 17일 함께 일하는 여직원의 결혼식 식사 초대에 다녀왔다. 오후 5시에 도착하여 친지들이 정성스럽게 준비해온 전통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신부에게 줄 결혼 축하금을 전달하면서 결혼 후 행복하게 살 것을 축복하였다. 오늘은 결혼 전날 행사로 성대하게 잔치를 한다. 친구, 친척, 이웃들이 모여서 함께 식사를 하면서 결혼을 축하해준다. 부모님의 초청으로 잔치에 참석한 경우는 축하금을 부모에게 주고, 신부의 초청으로 온 경우는 신부에게 축하금을 전달한다. 축하금은 식사비에 대신하여 내는 금액이다. 대체로 축하금과 음식준비 비용이 상충하면서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을 정도이다. 결혼식은 행사다음 날인 18일에 진행된다.

농촌의 결혼식 행사는 오후 2시에 신랑이 큰 아버지를 가정 대표로 하여 친구들과 함께 신부를 마중 나간다. 신랑의 가정 대표가 신부 집에 도착해서 조상제단에 절을 한 후 양가 인사를 하고 신부를 데리고 신랑 집으로 돌아온다. 이때 신부 친구가 함께 신랑 집으로 온다. 신부 친구는 신랑 집 마당에 임시로 준비된 천막아래서 신랑 신부와 함께 흥겹게 가요를 부르면서 논다. 신랑 집에서는 신부 친구들이 마실 수 있는 녹차를 준비하면 된다. 이날 식사는 없다. 2-3시간을 흥겹게 논 후 신부 친구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신부는 평상시의 옷으로 갈아입고 설거지를 하면서 그날부터 신랑 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아직은 대다수가 신혼여행은 가지 않는다. 대도시의 부유한 가정에서는 신혼여행을 가기도 한다.

베트남의 결혼식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대체로 친구나 주위 사람의 소개로 신랑, 신부가 될 사람이 만나 일정 기간 동안 서로 교제하면서 사랑을 키워간다. 두 사람이 결혼하기로 결정이 되면 양가 부모님을 찾아뵙고 결혼을 준비한다. 가능한 배우자는 같은 동네나 가까운 곳에서 찾는다. 양가가 멀리 떨어진 경우는 드문데 왜냐하면 결혼 후 양가를 찾아가는데 경비도 많이 들고, 태어난 자녀들을 양가부모가 돌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혼 준비는 함께 살아 갈 주택(방)의 확보가 우선이다. 현재 대다수의 베트남 신혼부부는 신랑의 부모님과 함께 살아간다. 그러므로 신혼부부의 살림 방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된다. 도시나 시골이나 신혼부부가 자신들만의 주택을 가진다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이다.

다음의 준비는 신혼살림인데, 이 역시 부모님과 함께 삶기 때문에 저절로 해결된다. 하지만 꼭 살림으로 준비해야 하는 것은 부부용 침대, 조그만 옷장 겸 이불장, 작은 책상 1개이면 된다. 그리고 그 방을 예쁘게 꾸밀 장식용 사진이나 조화, 달력 등이다. 예복은 당일 빌려서 입는다. 신부는 예쁜 드레스를 빌리면 되고, 신랑은 자기 몸에 맞는 양복을 빌려 입는다. 요즘은 신랑이 양복을 자신이 구입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신부가 신랑의 부모나 가족을 위해서 예복, 예단을 준비할 필요는 없다. 신랑은 신부의 집에 보내는 함에 담배 1갑, 빈랑열매 조금, 녹차, 과자와 약간의 돈(20만~30만 원)을 넣어야 한다. 그리고 결혼 당일 신랑은 준비한 반지를 신부에게 선물한다. 요즘은 대체로 금반지 반 돈 혹은 한 돈으로 한다. 보통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비용은 100만 원 정도이다. 농촌에서는 이보다 약간 낮고 도시에서는 좀 더 비용이 높다. 반면에 신부는 거의 비용이 지출되지 않는다.

한국의 결혼식은 너무 경제적인 비용이 높다. 신혼 부부 당사자가 필요한 주택과 물품 구입이외에도 양가 부모나 가족들의 예단 비용이 많이 든다. 예단 준비 때부터 신랑 신부는 파김치가 된다. 육체적으로도 피곤하지만 심적으로 너무 부담이 된다. 결혼 후 부부싸움이 생겼을 때나, 신부와 시부모와 마음이 맞지 않을 때 결정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예단에 대한 불평불만이다.

베트남에서는 시부모가 신부를 매우 귀하게 여긴다. 농촌에서는 새로운 노동력이 확충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모를 모시고 살 새로운 가족이 늘었기 때문이다. 신부도 직장을 다니거나 농사일을 하므로 집안 일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침준비는 시어머니가 하는 경우가 많다.

고부간의 갈등이 있지만 시부모와 신혼부부가 따로 살림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만약 둘째 아들이 결혼을 하면 첫 아들은 분가를 하고 부모는 둘째 아들 부부와 함께 산다. 그러므로 자연적으로 부모는 막내 아들과 함께 사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한국과 상당히 다른 문화이다. 한국에서는 장남이 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차남이 결혼하면 분가해서 나가는 반면에 베트남에서는 반대로 차남이 결혼하면 장남이 분가해서 나간다.

베트남의 결혼식은 허례허식이 거의 없다. 베트남 농촌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주례가 있고, 신랑신부가 입장하는 그리고 양가의 축하객이 모두 모이는 '결혼식'은 없다. 결혼행사 하루 전 식사초대와 결혼 당일 날 간단한 양가 만남과 친구들과의 한바탕 흥겨운 놀이가 있을 뿐이다. 더구나 혼수품이 없고, 신혼부부만의 주택이 필요하지 않으므로 결혼비용이 아주 적게 소비된다. 혼수품으로 인한 부부싸움, 고부간의 갈등은 없다.

한국의 결혼식은 엄청난 경비와 예비 신랑신부의 큰 심적 부담과 육체적 피곤함을 보게 된다. 한국도 베트남처럼 단순하고, 저렴한 결혼식은 할 수 없을까? 결혼비용이 없어서 결혼식을 하지 못하는 경우는 생기지 않을 수 없을까? 혼수품과 예단을 없앰으로 고부간의 갈등을 없앨 수는 없을까?

결혼이란 양가 부모와 친인척, 이웃과 친구들의 축복 속에서 새로운 한 가정이 탄생하는 아름다움이다. 이 아름다움에 너무 형식과 외형을 추가하는 것은 오히려 거추장스럽고 부담스럽다. 부조금이 부담스럽고, 체면유지가 부담스럽다.

최의교 (국제개발NGO 지구촌나눔운동 베트남 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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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해가는 전쟁의 의미
 
 
인도차이나 반도에 속하는 베트남은 꽤 작고 평범한 나라다. 베트남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오늘날 전세계인들은 베트남이란 나라의 이름도 잘 몰랐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베트남전은 베트남의 정체성과도 일치하는 의미로 받아 들여진다. 베트남인들에게 베트남전은 어떤 의미일까? 자랑스러운 전쟁이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전쟁에서 이어지는 평화의 의미를 생각할까?
 
"모든 것이 한순간 엉망…그런 것이 전쟁이었어요"
 
필자는 베트남전 당시 군인이었던 베트남 작가 반 레이가 베트남전에 대해 한 말을 잊을 수 없다. 필자도 참석한 한 좌담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쟁이라는 개념을 정의할 수 없습니다. 그냥 폭탄이 거리에 떨어지고 끔찍하게 터지면 논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거리로 도망치고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논으로 뛰어 내려갔어요.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엉망이 되었지요. 그런 것이 전쟁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전쟁이 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의 기억에 베트남전은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는 것이었다.
 
베트남의 교과서 내용을 살펴보면, 베트남전은 '베트남인들이 나라를 위해 미군에 대항하고 결국 이들을 쫓아낸 전쟁'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또 베트남이 미군을 이겼기 때문에 지금까지 독립을 유지하고 자유로운 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베트남인들은 작은 베트남이 '골리엇' 미국을 이겼다고 자랑하고 있다. 심지어 대학생들도 미국을 이길 수 있는 나라는 베트남 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베트남전을 아주 성스럽게 본다.
 
베트남인들은 교과 과정을 통해 베트남 군인들의 공헌과 베트남전의 승리에 대한 내용을 배우고 호치민을 통한 군인들의 모습을 미화해 갔다. 베트남전이 끝난 1975년 4월 30일, 베트남인들은 베트남전에 대해 승리만을 이야기 하고 전쟁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거나 언급하기를 꺼렸다.
 
그러나 1986년 도이모이(Doi Moi·개혁개방정책) 후에 '글라스노스트'(경제개방)이라는 개념이 베트남에 들어오게 된다. 외부 세계로부터 들어온 새로운 문물을 접한 베트남인들의 생각이 자유롭고 다양해졌다. 이때부터 전쟁의 다른 면에 대한 언급이 시작됐고, 그 중에서 작가, 소설가, 화가등 예술가들은 작품을 통해 베트남전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 슬픔, 비판등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작곡가 찐공션(Trinh Cong Son)의 반전 노래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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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곡가 찐공션(Trinh Cong Son) 

베트남전쟁의 어두운 이면을 반영하는 노래는 일찍이 찐공션 작품에서 나왔다. 찐공션은 베트남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하고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작곡가이다. 사람들은 이 작곡가의 인간애와 철학을 칭찬하고 존경한다.
 
찐공션이 부른 사랑 노래, 반전 노래 등은 베트남뿐만 아니라 인접 아시아 국가에서도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찐공션의 노래 중 반전 노래는 전쟁 속에서 인간이 겪는 고통과 아픔을 잘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필자가 중요하게 보는 것은 작가 찐공션이 전쟁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시름과 괴로움을 관찰하고 묘사만 한 것이 아니라 그는 직접 민간인들이 당한 수난을 이해하는 내용의 감동적인 노래들을 많이 창작했다는 점이다. 베트남전 동안에 찐공션의 반전곡은 남베트남의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고 평화를 위한 투쟁의지를 높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당시 남베트남의 정권은 찐공션의 곡들을 부르는 것을 금지시켰고 심지어 북베트남의 정권도 찐을 싫어했다. 그의 노래에서는 베트남전을 내전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베트남 정부는 독립 후에도 오랜시간 찐공션의 곡을 국내에서 유통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리고 외국으로 이민간 베트남 사람들도 계속해서 찐공션의 곡들을 비판하고 경멸했다.
 
하지만 1980년부터 찐공션은 작곡을 다시 시작했고 베트남의 새로운 제도들을 칭찬하는 노래를 지었다. 그때부터 베트남 정부는 찐공션을 감시하는 일을 그만두었고 찐공션의 노래를 사람들이 다시 부를 수 있게 허락했다. 배트남 사람들은 찐공션의 반전곡을 통해 전쟁의 끔찍한 이면을 떠올리고 평화의 가치를 더욱 소중하게 여길 수 있게 되었다.
 
소설가 바오닌(Bao Ninh)의 <전쟁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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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의 슬픔> 

바오닌(Bao Ninh)은 베트남의 작가이면서 베트남전 당시 군인이었다. 그는 참전 중 전쟁의 끔찍하고 야만스러운 상황을 목격했고, 이를 모아 <전쟁의 슬픔>이라는 소설을 써냈다.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나오는 '끼엔'이라는 인물은 베트남전에 참전한 군인이다. 끼엔은 종전이 된 후에도 전쟁의 슬픈 단면을 명확하게 기억하고 "군인, 총, 탱크-이는 베트남인에게 아주 평범한 것들이다. 전쟁은 별일이 아니다. 전쟁은 평범한 것이다. 그런데 평화는? 평화는 아주 특별한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는 게다가 "그리고 전쟁에서 이기는 편을 보는 것은 (…) 정의가 이겼다고 하지만 잔인하게도 죽음과 폭력도 이긴 것"이라는 나레이션을 하게 된다.
 
1989년에 이 소설은 처음으로 베트남 작가협회의 '신작품지'에 나왔다. 나중에 소설의 이름은 <사랑의 운명>으로 바뀌었고, 이는 베트남 문학계에서 가장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1991년에 몇명의 작가들이 경멸적으로 이 책을 비판했고, <사랑의 운명>은 사회적으로 핫이슈가 되었다.
 
베트남 사람들의 비판을 한 몸에 받았던 이 책은 외국에서는 아주 좋은 평가를 받았다. 2003년 무렵 이 소설에 대한 외국의 평가와 국내 평가의 차이가 커지자 베트남인들은 다시 이 책을 찾아 보게 되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일어난 전쟁은 베트남의 한 시대를 공고히 차지한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시대의 바람이 베트남 전체를 사로 잡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쟁에 대한 인식도 변해가고 있다. 많은 베트남인들은 더 이상 베트남전을 성스러운 전쟁으로 보지 않는다. 오늘날 베트남인들은 전쟁이 주었던 아픔, 고통, 시름, 괴로움 등을 더 많이 이해하고 있고 더 이상 전쟁이 아름다운 승리가 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또 그들은 베트남전 후에 남아있는 많은 희생자, 피해자, 다이옥신으로 오염된 땅 등의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베트남인들은 여전히 '전쟁은 평범한 것이고 평화는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베트남인들에게 베트남전의 영향은 오랜 세월 계속될 듯 하다.  
   


투엔 응웬 응옥뗀 / 대학원생·성공회대 MAINS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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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에서 사회 변화를 본다
 

올해 초 보름가량 하노이와 호찌민시에 머물렀다. 매년 가는 베트남이지만 이번만큼은 더 많은 변화가 보인다. 베트남이 앞으로 발전가능성이 큰 나라라는 데는 대부분 동의한다. 베트남이 1980년대 말부터 급성장하여 이제는 아시아에서 작은 용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성장잠재력이 큰 국가들인 BRICs의 브라질 대신에 베트남을 넣은 VRICs를 언급한다. 베트남은 2006년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고,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고 미국으로부터 항구적 정상교역관계국(PNTR) 지위를 부여받아 세계에서의 위상을 더욱 높였다. 2005년 말부터는 베트남 증권시장의 활황 속에서 한국의 투자가들도 베트남펀드에 투자하느라 야단들이었다. 이제는 베트남 정부도 과열된 증권시장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고 있고, 세계 증시의 하향세로 좀 진정되는 분위기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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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우


이런 속에서 땅값과 아파트값 상승 또한 한국 못지 않았다. 시내 중심의 땅 값은 10년 새 열 배 이상 올랐고, 아파트도 4, 5년 새 두 배나 뛰어 졸부들이 여럿 등장하였다. 2007년에는 여섯 달만에 두 배로 값이 뛴 아파트도 있다고 한다. 한 친구의 아파트를 방문하였는데, 그 옆집 주인은 증권시장에 상장하기 전 민영화하는 국영기업의 주식을 산 후 상장한 이후에 팔아 100배 가까운 수익을 얻어 그 아파트를 샀다고 한다. 이런 경제적 변화는 하노이 시 전체를 건설현장으로 만들어 놓았다. 남부 호찌민시에는 이미 고층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는데, 하노이 또한 호찌민시와 경쟁이라도 하듯이 건설 붐으로 시 전체가 먼지로 뒤덮여 있다.
 
 
이렇게 베트남 경제가 활황인데, 정치체제는 여전히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있어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는 듯하다. 공산당이 1당 지배를 계속하며 다당제를 거부하고 있고, 국민들의 대표인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에서는 공산당 지도하의 베트남조국전선이 후보자 선발과정을 여전히 독점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정치적으로 별 변화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근래 책방 풍경을 보면 사뭇 다른 생각을 갖게 된다. 우선 대학 근처나 시내 중심에 책방이 우후죽순으로 많아졌다. 내가 하노이를 방문할 때마다 짱띠엔 거리 책방에 들르는데, 서, 너 해 전부터 바로 그 뒷골목 딘레 거리에 할인서점들이 여러 개 생겨 손님들로 가득하다. 물론 할인서점들은 규모가 작은 사영 서점들이라, 국영 대형서점의 잘 갖춰진 서가에서 본 책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많으나 그래도 제법 갖추어 놓았다. 나도 짱띠엔 거리의 국영 서점에서 책을 탐색하고 그 뒷골목 할인서점으로 가는데, 20%나 깎아 사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 하나 현상은 학교 주변에도 헌책방들이 많이 생겼다는 것이다. 내가 묵던 공과대학 대학촌에도 많은 책방이 생겼는데, 가본 곳만도 대, 여섯 군데나 된다. 호찌민시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응웬후에나 수언투 같은 시내 중심의 큰 국영서점뿐 아니라 응웬티민카이의 헌책방 거리에도 할인서점들이 여러 개 들어섰다. 모두 소규모 사영기업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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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시안


작년 초 하노이에서 이런 저런 책들을 보다 눈에 번쩍 띄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존 로크의 <통치론>,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및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 베트남어 번역본이었다. 그것을 하노이 뒷골목 할인서점에서 먼저 보았는데, 이후 짱띠엔의 국영서점 서가에도 등장하였다. 특히 앞의 두 권은 초기 자유주의 사상의 대표적인 저작들이 아닌가! 게다가, 사회주의체제로부터 시장경제체제로의 이행을 주제로 한 야노스 코르나이의 책도 번역되어 나와 팔리고 있었다. 아는 친구에게 물으니 지식인들은 동요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변화가 베트남에도 왔다고 반기는 눈치다.
 
이 저작들의 출판은 이제 베트남에서도 자유주의가 논의되려는 시점임을 보여주는 징표다. 현재도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견지하고 있는 베트남에서 자유주의가 공개적으로 논의된다는 것은 다원화에 대한 사회의 요구가 표출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공식적으로야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호찌민사상을 사상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사회지만, 장기적으로는 국민들의 다양한 요구가 이러한 단일 이데올로기를 견지하지 못하게 할 것임을 예견케 한다.
 
베트남에서는 이렇게 정치사회적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아무쪼록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좋은 점만을 취하여 조화로운 사회로 만들기를 기대해본다.

이한우(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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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중심의 하나, 모두가 아시아의 중심이 되어야



몇 해 전부터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 '버마를 사랑하는 작가들 모임',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등 나라별 작가 모임부터 이들을 아우르는 '아시아문화네트워크', 그리고 아시아 각국의 문화예술인들과 지식인들이 참여하는 아시아 전문 문예지 [ASIA]의 창간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와 소통하고 교류하는 문인들의 움직임이 활발합니다.

개별 나라들의 관심에서 출발해서 점차 아시아로 사고를 확장하고 다시 한층 폭넓고 깊게 한국의 문제를 고민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이들 문인들에게 있어, 아시아는 무엇일까요?

지난 9월 18일, 소설가이자 중앙대 교수, 그리고 문예계간지'ASIA' 편집주간인 방현석 선생을 모시고 '아시아 연대와 문화'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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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화요일 저녁, 참여연대의 새 보금자리 통인동에 모여 앉은 우리는 곧장 오늘의 안내자, 작가 방현석님의 천천하고 친절한 안내에 따라 “썰물과 같았던 90년대 초반”으로 향했다.

그는 천천히 80년대의 학생선거와 학생운동, 그리고 대망하던 민주화, 공산권의 붕괴 등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흔적이 진하게 남겨진 곳곳으로 우리를 인도했다. 아마 우리 중 누군가는 그 흔적을 찬찬히 훑고, 만지는 이도 있었으리라. 우리네 한 사람, 한 사람이 거대한 시대의 조류 앞에 느꼈던 분노와 슬픔, 상실의 자리, 그 곳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베트남 이야기... 그가 우리에게 마주하게 한 베트남은 1940년대 독립을 앞둔 베트남이었다. 독립 이후 분단과 베트남 전쟁의 발발에 이르면서 우리는 낯익은 이들을 발견했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 군인들. ‘민주주의의 수호자’요, ‘애국’ 청년의 이름을 달고 베트남으로 간 젊은이들, 그러나 금세 뒤돌아 보니 그들의 이름은 ‘학살자’로 바뀌어 있었다. 누가 그들에게 이름을 붙였는가, 누가 그들을 베트남으로 보냈는가. 타인을 향해 이름을 붙이는 그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는가...

2007년 오늘, 우리와 베트남과의 만남에는 과거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베트남은 우리에게 ‘한류’ 열풍이 이는 곳이며, 중요한 ‘투자국’ 중 하나이다. 최근엔 ‘국제결혼’이 베트남을 기억하는 또 하나의 단어가 되었다. 그의 찬찬한 안내의 종착지에서 마주한 질문은 우리가 만나는 아시아, 우리가 기대하는 아시아는 어떤 모습인지이다.

정부가 찾은 대답은 한국이 ‘아시아의 중심 국가’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한국이 아니라 그 누구든 ‘중심’이라 자처하기 시작하면, 각각의 고유한 가치와 아름다움은 상실하기 마련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자꾸만 타자를 가르치려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배우고 훈련하려는 의지와 자세를 선명하게 해야 할 때라는 보탬과 함께.

모두가 중심이 되는 아시아를 기대하는 그는 문예계간지 [ASIA]를 통해 더 넓고 긴 여정을 시작했다. 아시아 각 국의 시, 소설, 수필에 담겨 있는 고유한 아름다움을, 아시아적 상상력의 자유로운 소통을 시작한 것이다.

‘중심’과 ‘중심 아닌 것’으로 구분하는 것이 익숙한 내게는 다소 낯선 여행이었다. 아시아에 대해 그가 가진 무언가 ‘중심’이라 할 만한 것을 가르쳐 줄 거란 기대와는 달리 그의 안내는 자꾸 나, 우리네 삶을 향해 있었다. 이처럼 나, 우리를 향해 있는 안내와 짧은 여정은누군가에 의해 늘 타자화되고, 평가되는 것에 익숙한 나에게 그의 말대로 ‘우리의 모습을 우리의 눈으로 보는 훈련’의 낯선 경험이자, 진지한 첫 걸음이었다.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이라는 그의 삶의 흔적 일부를 말하는 모임의 이름을 곱씹어 보며, ‘이해하려는’ 의지와 실천의 소중함 그리고 그것이 가져올 아름다운 결과를 가만히 생각해 본다.
이경숙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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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으로 '선심성 뚜쟁이'가 된 지자체



얼마 전 지자체 농어민 국제결혼 지원 사업이 화제의 뉴스가 되고 이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진 바 있다. 찬반의 논리 이전에 이런 사업이 실시되고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몰랐던 필자는 일단 그 규모와 확산 범위에 먼저 놀랐다.

올 5월 현재 3개 광역시도(경남, 경북, 제주)와 전국 60여개의 기초자치단체에서 이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전국 지자체의 1/4에 해당하는 수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경남(95%)과 경북(83%)에서는 대다수의 기초자치단체가 이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예산의 규모도 2007년 약 25억 5천만 원이 책정되어 지자체 마다 다르지만, 1인당 500여만 원의 지원을 받아 국제결혼 업체를 통해 신붓감을 찾고 있다.

혹자는 이 제도가 우리나라 농촌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제도라고 하며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취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엉뚱하게도 외국의 신부들이 들어오면 한국사회가 그 만큼 다양해지고 다문화 사회가 되지 않겠는가, 그러니 오히려 장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한다. 필자는 분명히 이것이 장려할만한 사업은 아니라 생각한다.

중앙정부는 왜 입다물고 있는가

물론 외국의 신부들(혹은 신랑들)이 한국사회로 들어오는 것은 폐쇄적이고 타문화에 배타적인 한국사회를 바꾸는데 큰 도움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유입이 자발적이지 않고, 중계를 통한 것이라면 장려하기에는 좀 쑥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반대할 만한 사안도 아니다. 단, 다음과 같은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적어도 현재 지자체의 사업들을 봤을 때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는 우려를 씻기 어렵다. 따라서 필자는 지금 현재의 사업에 반대한다.

우선 현재 지자체들이 벌이는 사업은 불법과 탈법, 의혹으로 얼룩져 있다. 이 사업들은 지자체를 통해서 지원을 받은 농어촌 남성들이 국제결혼중개업체를 통해서 외국 신부들을 만나 결혼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일부 국가(베트남과 필리핀)에서는 상업적인 결혼중개 행위 자체가 불법이다. 따라서 지자체의 예산과 이름으로 농어촌 남성들이 외국에 나가서 불법행위를 버젓이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또 지자체와 결혼중개업체간의 돈거래도 전혀 투명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일부 지자체에서는 결혼중개업체로 지원금을 직접 입금하는가 하면, 1인당 성사비용도 중개업체의 이윤을 보전해주기 위해서 인상되었다는 의혹이 있다. 다시 말하면 지자체에서 세금으로 조성된 예산을 가지고 결혼중개업체에 금전적 특혜를 주고 있다는 말이다.

두 번째로 제도적 차원에서도 일부 지자체는 “이혼 또는 배우자의 거주지 무단이탈 시 지원금을 환수”하는 조항을 두어 결혼에 문제가 있을 경우 책임을 당사자 개인에게 묻는다. 부부관계와 결혼의 유지라는 것을 돈을 미끼로 하여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지원금을 받은 죄로 이혼도 하지 못한다. 또 이미 한국에 들어와 살고 있는 외국인 신부들이 한국사회에 정착하도록 하는 지원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외국인 신부들을 들여오는데 정착지원의 여섯 배에 해당하는 예산을 쏟아 붓고 있다. 들어와서는 어찌 되었든지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지자체에서 이런 사업들을 벌이고 있는 것에 대해서 중앙정부는 실태 파악이나 하고 있었는지? 한 정당과 시민단체들이 이 제도의 문제점을 다룬 토론회를 개최하고 언론에 이 사안이 보도된 이후에도 중앙정부에서 이에 대한 어떤 의견을 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해남군 공문에 "베트남 여성은 몸매가 환상적"

세 번째의 문제점은 필자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다. 이 사업을 시행하고, 그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이 사업에 대해서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문제다. 지방정부가 다음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한 “선심성 뚜쟁이”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백번 양보하여 농촌의 현실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이유로 봐주기로 하자. 우리가 낸 세금이 농어촌 남성들이 배우자를 찾는데 쓰이면 그것도 사회복지 차원의 문제가 아닌가라고 우리 자신을 설득해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이 사업이 단순한, 그리고 선의의 뚜쟁이 사업이 아니라, 국제결혼이란 탈을 쓴 “인신매매”가 아닌가 의심스럽다.

얼마 전 국내 일부 결혼중개업체들이 외국인 신부에 대해서 모욕적인 단어들을 동원하여 광고하면서 국제적, 국내적 비난을 산 것을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이건 돈에 눈이 먼 사기업들의 한심한 작태라 치자. 하지만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도 아닌 지방자치단체도 그런 비슷한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어떨까? 해남군의 한 지방의회 의원이 공개한 이 사업 관련 지자체의 ‘공문’은 우리를 경악케 한다. 해남군의 국제결혼 협조 공문에 “베트남 여성은 남편을 하나님처럼 모시고 사는, 지구상의 마지막 남은 순수함을 지닌 천사”, “남편에게 헌신적이고, 몸매가 환상적이며, 소식하는 식문화를 가지고 있어 살이 찐 여성이 거의 없다”라는 문구가 있다. 일전에 비난을 샀던 결혼중개업체의 광고내용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시각을 가진 지방자치단체가 추진하는 국제결혼 중개는 ‘인신매매’의 다른 형태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 공무원들의 더 낮아질 수 없을 정도로 한 없이 낮은 인식수준이 개탄스럽다. 이런 인식 하에 진행되는 국제결혼지원사업을 어떻게 환영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 농촌사회의 문제가 심각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농촌에는 노인층만 남아 있고, 그나마 남은 젊은 세대들, 특히 남성들은 결혼하여 농촌에 살려는 배우자감이 없어서 결혼적령기를 훌쩍 넘겨버리고, 농촌에서는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지 않으며 농촌학교들은 하나 둘씩 폐교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는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대책이 있었던가? 어쩌다 농촌의 문제가 언론에 불거지기라도 하면 땜빵식, 대증요법식의 짜깁기 대책만이 난무해왔다. 이 국제결혼 지원사업도 문제의 근원을 파고들어 해결하는 대책이 아닌 짜깁기 대책의 전형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업을 발상한 기본적인 인식에 있어 매우 큰 문제를 안고 있는 그런 사업이다. 지금이라도, 좀 시간이 걸리더라도 농촌문제에 관한 종합적인 긴 호흡의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재현(한국동남아연구소 선임 연구원,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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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노동시장은 도이머이(혁신) 정책을 시행한 이래 가장 큰 변화를 맞고 있다. 그 동안 베트남은 값싸고 말 잘 듣는 노동력이 풍부한 곳으로 인식되어 왔다. 불과 3-4년전 만 하더라도 다국적 기업의 공장에서 일을 하기위해 연줄을 동원하고 소개비까지 지불하려는 인력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호치민과 같은 대도시나 인근에 위치한 일부 노동집약적 공장에서 인력 부족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직률도 증가하고 있다.

동시에 대도시 공장노동자의 불만은 개방정책 이래 최고조에 달해 있다. 베트남 노동조합은 다가오는 음력설에 역사상 가장 많은 파업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베트남은 이제 값싸지만 말 잘 안 듣는 노동력마저 부족한 곳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지도 모른다.

이러한 변화에는 몇 가지 복합적 원인이 있다. 베트남은 고공비행을 거듭하고 있는 경제성장률과 국제무역기구(WTO) 가입 덕택에 외국자본이 앞 다투어 들어오고 있다. 외국자본이 붕따우-바지아나 메콩델타와 같은 농어촌지역에 공장을 건설하면서 대도시에 집중되었던 노동력이 분산되고 있다.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대도시로 이주하던 농촌의 노동력이 고향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대도시에서 비싼 생활비를 지불하며 생활하던 노동자가 귀향하는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급속히 팽창하고 있는 서비스-유통 부문의 임금상승도 공장노동의 매력을 감소시키고 있다. 전문 인력이 필요한 금융부문은 물론이고 우후죽순처럼 늘어가는 점포들이 공장노동에 상응하는 임금을 지불하는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인 주재원들은 이전과 달리 웃돈을 주어도 능력 있는 운전기사와 가정부를 찾기가 쉽지 않다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베트남 대도시 공장에서 인력난이 시작되고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더딘 임금상승 때문이다. 비약적인 경제성장과 세계시장에의 급속한 편입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대도시 공장노동자의 임금은 7-8년 전에 비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실질임금은 계속 하락하고 있다. 더딘 임금상승은 노동력 부족은 물론이고 파업의 결정적 원인이 되고 있다.

요즘 한국에서 장기간 이주노동자로 일하다 귀국한 베트남인을 면담하고 있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한국인 업주의 부당노동행위에 익숙한 필자를 당혹시키는 것은 이들이 한국에 다시 가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들이 진정으로 그리워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이다. 임금이 한국의 십분의 일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베트남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많은 이주노동자를 보면서 베트남 사회주의의 현 주소를 묻게 된다. ‘노동자의 국가’를 자처하는 베트남이 언제까지 저임금을 유지할 수 있으며 이것이 정당한 것인가에 대해 물음을 던져 볼 시점이 왔다.

베트남을 들락거린 지 10년이 넘었지만 하루가 다르게 변모해가는 호치민의 거리를 걷고 있노라면 상념에 빠지곤 한다. 수많은 주검 위에 세워진 베트남 사회주의는 이미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들은 무엇을 위해 지난한 전쟁을 벌인 것일까? 베트남의 일상은 이미 시효가 지나버린 이런 질문을 되씹어보게 한다.

채수홍(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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