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국제연대위원회입니다. 최근 태국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마약과의 전쟁'에서 144명이 피살되고 6천 900여명이 체포되었다는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피살자 중 경찰의 체포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은 정작 8명뿐이며, 나머지는 마약밀매조직이 정보 누출을 막기 위해 조직원끼리 서로 살해하여 사망자수가 늘어난 것입니다.

태국은 버마 및 라오스와의 접경지역인 세계 최대 마약생산지 황금삼각지(버마영토)에서 버마 소수민족인 통일와족군(UWSA : United Wa State Army)이 생산하는 마약이 유입되어 전체인구 6천200만중 300만명 이상이 마약을 복용하는 등 마약이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황금삼각지에서 재배되는 마약은 버마 정부가 자신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와족의 마약 재배 및 유통을 허용하는 정치적 거래에 따른 것입니다. 태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무차별 인명피해의 우려뿐만 아니라 버마의 민주화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은 스리랑카의 분쟁입니다.

뿌리깊은 민족갈등

현재 총인구(약 1,000만) 중 스리랑카 주민의 70%를 차지하는 신할라족(Shinhala)은 인도 아리아 민족의 계통에 속한 민족으로서, 기원전 6세기경에 인도 북부로부터 건너와 선주민(先住民)을 정복하고 왕국을 이룩하였고 기원전 3세기에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를 수용하여 깊은 '실론 불교'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스리랑카 인구의 20%(약 200만명)를 차지하는 타밀족(Tamil)은 남인도의 드라비다계통의 민족으로, 기원전 1세기경 남부 인도에서 이주하여 정착을 한 스리랑카 타밀인과 이후 영국식민시대에 영국자본에 의해 플랜테이션 노동자로 이주된 인도 타밀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타밀족의 대부분은 육체노동에 종사하고 있으며 스리랑카 사회의 최하층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타밀족은 종교는 힌두교를 주로 믿고, 타밀어를 사용하여 신할라족과 인종·언어·문화면에 걸쳐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서구의 식민지 쟁탈시기에는 해상무역의 요충지인 실론섬은 제국주의국가들의 쟁탈이 거듭되어 처음에는 포르투갈(1505-1658)이 점령하였다가, 이후 네델란드(1658-1779)로, 마지막엔 인도에 진출한 영국에 의해 1815년에는 마지막 신할라 왕조가 멸망하면서 영연방에 합병되었습니다. 2차 대전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배국가들이 그러하듯 독립요구가 거세지자 영국은 1948년 독립을 인정하였지만, 영국의 지배력은 상당히 남아 있었으며, 총독의 임명권도 영국 국왕이 보유하고 있다가 이후 1972년에 국명을 실론(Ceylon)에서 스리랑카 공화국으로 개칭하고 영국연방에서 완전 독립국이 되었고, 1978년에 현재의 국명인 스리랑카 민주사회주의 공화국(Democratic Socialist Republic of Sri Lanka)으로 되었습니다.



20년 민족분쟁 시작 : 차이에 의한 차별

신할라족과 타밀족 간의 역사적으로 뿌리깊은 차이는 서구문명이 실론섬에 상륙하기 전에는 그리 심각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서구 문명 특히 공격적인 카톨릭인들로부터 고통받고, 식민정책에 의한 착취 등은 이들 두 집단이 민족주의를 자각하여 급진적 민족주의로 발전하게 하였고, 인도의 독립운동과정에서 부흥했던 민족주의도 여기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두 민족간의 본격적 갈등은 1949년 정부가 신할라인만을 국민으로 인정, 타밀인의 선거권을 박탈하는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습니다. 1958년에는 타밀인의 첫 폭동이 발생하였는데, 이는 타밀족에 대한 토지소유권 박탈에 이어 신할라 민족주의세력인 스리랑카 자유당이 불교계세력과 손잡고 신할라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삼는 정책을 취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1960년의 총선거 이후에는 인도계 타밀인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함으로써 민족대립을 해소하려고 하였지만, 경제악화로 1965년에 내각이 무너지고 친서구적 성격의 통일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우파세력의 연립내각이 성립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타밀족은 분리운동을 추진하게 됩니다. 타밀족의 분리투쟁이 본격화된 것은 1983년 7월 이후로, 타밀족의 거주지역인 자프나(Jaffna)반도에서 정부군이 살해되자 이를 계기로 신할라족의 타밀족 대학살(약 1천명)이 전국적으로 발생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같은 해에 타밀일람해방호랑이(LTTE : 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라는 반군이 결성되었습니다. 타밀족 반군은 자신의 점령지역에서 세금을 거두었으며, 인도 동남부 타밀 나두주(인구 5천만) 및 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해상 전투력도 보유하였으며, 인도, 파키스탄, 중국 등의 외국무기는 정부군과 반군 양측에 제공되면서 분쟁은 2002년 2월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타밀족 반군은 해외거주 타밀족 단체의 후원, 무기 밀수입을 통하여 전력을 유지하였지만, 20년이 넘게 지속된 분쟁으로 병력증원에 힘이 들자 17세 이하의 소년병까지 징집하였습니다(2001년 소년병 징집은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정부 또한 반군을 압도하기 위해, 러시아, 이스라엘, 파키스탄, 우크라이나 등으로부터 다량의 신형 무기를 도입하고, 정부군 증가계획발표와 정부군을 파견하여 미군 특수부대의 교육을 받는 등 군사력 증강을 계속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분쟁으로 인하여 1983년부터 2002년까지 이 지역에서는 8만명 이상이 사망하였고, 약 160만 이상의 난민과 강제이주민이 발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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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협상의 과정

내전 종식을 위한 노력은 노르웨이의 적극적인 중재와 함께 1999년 취임한 찬드리카 쿠마라퉁가(Chandrika Bandaranaike Kumaratunga) 대통령이 분쟁종식 추진을 발표하면서부터 물꼬가 트이기 시작하였습니다. 2000년 7월 스리랑카 정부와 야당은 타밀주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연방국가 창설 계획에 합의하였고, 2001년 11월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의 지도자 벨루필라이 프라브하카란( V. Prabhakaran)은 독립 국가 창설 목표의 철회방침을 밝히면서 자치회담의 개최를 정부에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스리랑카 정부도 유화조치를 취해 2002년 1월 타밀반군이 장악하고 있는 정글지대인 와니지역에 대해 지난 1994년부터 취해온 경제제재조치를 해제하고 북부해역의 어로제한조치도 완화하였습니다.

이러한 유화분위기 속에서 2002년 2월 스리랑카 정부와 타밀 반군은 항구적 휴전협정을 조인하여 노르웨이주도의 국제감시단을 받아들이고, 상대지역에 대한 왕래를 단계적으로 확대하기로 하였습니다. 이후 2002년 6월 스리랑카 정부는 그동안 타밀엘람해방호랑이에 가해졌던 불법단체규정을 해제하였고, 2002년 9월 평화협상을 시작하여 국토 재건을 위한 공동개발위원회를 설치하고 위원회에 소수 이슬람 교도들을 위한 의석을 배정하는 데 합의한 뒤, 인종문제해결을 위한 소위원회 설치와 황폐화된 북부 및 동부지역의 복구와 인권문제를 다룰 위원회, 난민들의 재정착문제를 다룰 위원회 등 주요 위원회 설립에 대해 합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2002년 11월 스리랑카 반군은 향후 민주적 정치체제에 참여하고 기존 정당들의 반군지역 활동을 허용하겠다고 발표하여 실질적인 내전 종식의 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2003년 2월 7일에 이틀간 베를린 주재 노르웨이 대사관에서 스리랑카 정부와 타밀반군간의 회담이 열려 인권관련 사안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국제사면위원회 사무총장에게 인권이슈들에 대한 개선의지를 담은 합의문을 요청하는데 양측 모두 동의하였습니다. 여기에는 3월 일본에서 열릴 6차 회담의 토론을 위한 초안으로서 인권감시에 대한 효과적인 체계, 스리랑카 정부 관료와 타밀반군의 간부들에 대한 교육, 경찰과 교도관들에 대한 교육, 평화협상을 통한 지속적인 인권사항 체크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타밀반군은 유니세프(UNICEF)와 함께 소년병 징집의 중단을 위한 행동계획을 세울 것을 합의하였습니다. 현지 언론에 의하면 실제로 타밀반군은 이러한 계획을 발표한 직후 350명의 소년병을 부모와 보호자들에게 인도하는 기관에 보냈습니다. 또한 이번 회의를 통해 스리랑카 정부와 타밀반군측은 모두 북부와 동부지역 주민과 난민들의 인권보호와 재정착을 위한 국제사회의 즉각적인 원조와 도움을 다시한번 촉구하였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하여

현재 정부군과 반군에 의해 난민과 강제이주민으로 전락한 사람들 중 23만명 이상이 2002년 휴전이후 귀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 앞에는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데, 재산강탈, 물의 부족, 위생시설과 공중보건 등이 그것입니다. 더욱이 이들 귀향자들은 대부분 농부나 어부, 농업노동자들이거나 미숙련 노동자들이어서 그들의 삶을 다시 시작하려면 강력한 지원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지구 강제이주민 프로젝트 (Global IDP ; internally displaced people Project)에 따르면 반군점령지역의 비 타밀족(non-Tamils) 12만 5천여명과 정부의 절대안전(high security)지역의 5만여 타밀족들은 귀향 이전에 보호시설이 시급하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정부가 운영하는 구호시설의 사람들이 이들 중 제일 심각한 상태입니다. 정부와 타밀반군의 대규모 귀향자들을 위한 시설조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적절한 보호와 지원이 되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또한 타밀반군 점령지역의 신할라족 주민들은 그들이 돌아가기 전에 안전보장을 원하며 돌아가지 않고 있고, 게다가 타밀족 역시 상황이 개선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편, 이들의 귀향길 역시 매우 위험한데 그것은 바로 지뢰 때문입니다. 국제 지뢰금지 캠페인(ICBL : International Campaign to Ban Landmines)이 발표한 '2002년 지뢰연례 감시보고서'에 따르면 휴전협정 이후 지뢰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타밀반군측이 매설한 지뢰는 정확히 확인되지도 않아 2001년 5월 한달동안 33명이 사망하고, 41명이 부상당하였습니다. 정부군 역시 방어선을 따라 광범위하게 지뢰를 매설하여 북부지방과 동부지방에 매설된 대인지뢰가 가장 심각한 분쟁후유증을 남기고 있는데, 자프나(Jaffna)지역의 경우 도시와 시골 구분없이, 도로, 상수원, 농경지 등에 광범위하게 매설되어 있고, 심지어 반군에 의해 새로 만들어진 정착촌지역에도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20년간 지속된 분쟁은 이제 서서히 종식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수많은 난민은 열악한 환경에서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재 스리랑카에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과 인권위원회, 유니세프가 각 영역에서 사업을 벌이고 있고, 1986년부터 '국경없는 의사회'(Medecins Sans Frontiers)가 의료활동을 해왔으며, 국제 적십자, OXFAM Campaign 등 많은 국제 NGO들이 구호사업을 하고 있지만, 그들에겐 모든 것이 부족합니다. 넘치는 것이 있다면 자신의 삶에 대한 불안함일 것입니다. 이들을 향해 내미는 작은 손. 그 어느 손보다 아름다울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그들이 자신의 땅에서 안전한 삶을 누릴 때 비로소 실현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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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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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국제연대위원회입니다. 유엔환경계획(UNEP)은 올해 유엔이 정한 '세계 물의 해'를 맞아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물 부족을 겪는 인구가 현재의 4억여명에서 2050년에는 40억명 이상으로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이러한 수자원 낭비는 물 부족과 함께 어획량 및 농작물 수확량 감소, 해안가 오염, 기후변화에 따른 해수면 증가, 수자원을 둘러싼 국제분쟁 등 숱한 어려움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특히 한국이 속해 있는 아시아와 태평양 국가들은 물 부족과 오염에 취약하여 물 소비량 증가와 환경오염 확산에 대한 획기적 대비책을 강구하지 않을 경우 빠른 시일 내에 물 부족 사태에 직면하게 될 것으로 전망하였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지구의 '주인'이 아닌 '세입자'입니다. 하나뿐인 지구와 다음 세대를 위해서 생활 속에서의 작은 실천이 필요하겠습니다. 오늘은 아직까지 그 사태의 결말이 보이고 있지 않은 버마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다양한 소수민족의 땅

버마는 다수민족인 버마족과 130여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대표적인 소수민족으로는 중국국경지방의 샨족(약 190만), 태국국경지방과 이라와디강의 황금의 삼각주 지방에 분포한 카렌족(약 220만), 중국과 인도국경지방의 카친족(약 110만), 인도와 방글라데시 국경지방의 친족(약 60만), 태국국경지방의 몬족 등이 있습니다. 버마는 전통적으로 불교 문화(소승불교)가 중심으로 국가업무와 생활전반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지만, 친족, 카렌족, 카친족 등 일부 소수민족은 기독교를 받아들여 각기 고유의 언어와 종교를 갖고 있습니다.

18세기 콤파운 왕조가 버마를 통일시킨 이후, 인도에 진출하였던 영국과 3차례 전쟁이후 1885년 버마는 인도의 한주로 편입되면서 영국의 식민지로 되었습니다. 영국은 버마의 다양한 민족들에 대한 통치를 위해 민족간 분열을 이용하였고, 소수민족들은 버마족을 또 다른 식민통치자로 간주하였습니다. 이러한 분열통치 속에서도 독립투쟁은 고조되었는데 이중 아웅산(Aung San)과 우누(U Nu) 등이 이끄는 그룹이 두각을 나타냈고,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이 동남아시아에 진출하자 일본을 이용하여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과 손잡을 수 없다는 공산주의 계열의 원칙론과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이 우선 과제라는 그룹의 현실론으로 노선이 분열되었습니다. 결국 현실론에 입각한 아웅산장군이 일본과 함께 영국군을 몰아냈지만 일본이 식민지배를 노골화하자, 반파시스트 인민자유연맹(AFPFL)을 결성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이후 버마는 1947년 제헌의회 선거를 거쳐 1948년 1월 4일 독립을 쟁취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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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독립이후 버마는 커다란 정치적 혼란을 겪는데, 버마족 중심의 새 정부에 카렌족·샨족 등 소수민족이 반발, 제각기 독립·자결을 요구하여 1949년 소수민족인 카렌족이 토운구(Toungoo) 독립국의 건국을 선포한 이후, 버마족으로 구성된 정부와 카렌족, 카친족, 샨족, 몬족, 친족 등 10여개 소수민족간의 무장투쟁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최대 소수민족인 카렌족은 카렌국민연합(KNU : Karen National Union)을 결성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는데, 이외에도 카렌 민족해방군(KNLA : Karen National Liberation Army), 카렌 평화군(KPA : Karen Peace Army), 신의 군대(God's Army) 등이 있으며 기독교 전통의 카렌족내에 불교전통의 카렌족 무장세력으로 민주카렌불교군(DKBA : Democratic Karen Buddhist Army)이 있어 정부군에 협조하고 인권탄압에 동원되는 등 카렌족내에서도 갈등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카친족은 카친독립군(KIA : Kachin Independence Army), 카친 민주군(KDA : Kachin Democratic Army), 신민주군(NDA-K : New Democratic Army - Kachinland) 등이 있으며, 샨족은 샨주남부군(SSA-South : Shan State Army-South), 몬족은 몬 민족해방군(MNLA : Mon National Liberation Army), 몬영토회복군(MRA : Monland Restoration Army) 등을 결성하여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마약왕'이라 불리는 쿤사의 군사조직도 마약재배와 샨족 독립투쟁에 연계되어 있습니다.





독재정권의 등장 : 민족분쟁과 반독재 투쟁의 결합

이와 같은 소수민족의 무장투쟁과 더불어 정부의 경제개발 실패에 따른 불만 등으로 1959년 미얀마 공산당과 카렌족 좌파와의 제휴가 이루어져 분쟁이 다시 확대되었고, 이러한 혼란중에 1962년 3월 2일 네윈(Ne Win) 장군이 이끄는 버마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정당활동을 정지시키고, 우누 수상 등 많은 정치인을 체포함으로써 버마는 군사독재정권 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버마의 분쟁은 소수민족의 독립운동과 더불어 반독재투쟁이 혼합되어 복잡한 성격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네윈은 혁명평의회에 막강한 권력을 집중시키고 버마사회주의계획당(BSPP : Burmeses Socialist Programme Party)를 만들어 군·당·정이 일체화된 강력한 독재체제를 형성하였고, 1981년까지 장기집권을 하였습니다. 이후 1988년 군부가 재집권하면서 이전의 모든 기구를 폐지하고, 국법·질서회복위원회(SLORC: 현재의 국가평화개발위원회 SSPDC: State Peace and Development Council) 의장이 국가 수반을 맡아 과거 나쁜 이미지를 개선하고자 1989년 버마를 미얀마로 개명하고(이러한 이유로 반독재투쟁을 하는 세력은 버마라는 명칭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1990년 정권의 정당성 확보와 국민의 저항을 잠재우기 위해 총선을 실시하였는데, 이 총선에서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연맹(NLD :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이 전체 의석수의 80%를 획득하는 압승으로 끝났지만, 신군부는 정권이양을 거부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반독재 투쟁과 민족분쟁이 결합은 1988년 이후 보다 강화되었습니다. 1988년 학생시위의 진압과정에서 수십명의 학생이 사망하는 사건을 계기로 8월 8일 8시 8분에 대규모 집회를 열어 시민, 학생들과 국민적으로 존경받는 승려들까지 반정부시위를 벌였습니다(이날 시위의 진압과정에서 최소 2000명에서 최대 20,000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대규모 항쟁을 계기로 결성된 민주주의 민족연맹(NLD)에 각 소수민족집단들이 합류하였습니다.

신군부는 정권이양의 거부와 1990년 총선결과에 따른 국회구성을 저지하며 민주주의 민족연맹 관련자들을 체포하였고, 아웅산 수지는 가택연금을 당했다가 2002년에 수도랭군에서만 활동이 가능한 부분적 가택연금해제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국내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된 민주주의 민족연맹은 태국에 버마 민주주의 민족연맹 자유지역(NLD-Liberated Area)을 두고 호주, 미국, 뉴질랜드, 영국, 일본, 한국 등 세계 각국에 지부를 건설하여 해외단체들과의 연대를 추구하고 있으며, 1990년 총선에서 당선된 국회의원들과 함께 버마연방국민연합정부 (NCGUB : The National Coalition Government of the Union of Burma)라는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미국 워싱턴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정부시위에 적극적이었던 학생들은 전버마학생민주전선(ABSDF : All-Burma Students' Democratic Front)을 1988년에 결성하고 6만여명이 태국과의 국경지역의 정글 속에서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이들은 맨발로 다녔기 때문에 맨발학생군(bare-foot student army)라 불리기도 합니다). 한편 1998년에는 태국의 카렌 난민촌이 카렌 반군(DKBA, 민주 카렌 불교군)으로부터 지속적인 공격에 직면하는가 하면, 2000년에는 정부군의 대카렌군 공세로 카렌족 난민 1천명이 태국으로 유입되었으며, 2002년에는 정부군과 샨족 반군과의 2주간 전투로 150명이 사망하는 등 무장투쟁과 정부군의 소탕작전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독재정권의 인권유린과 고통받는 민중들

버마의 인권문제와 관련하여 먼저 소년병(child soldiers)과 아동착취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1999년 총회에서 버마 군사정권이 국가사업에 미성년자와 노인들을 강제노동시키고 있으며 노조를 광범위하게 탄압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미국의 Human Rights Watch에 따르면 1988년 이후 두배로 증가된 버마군에 전체 20%, 혹은 그 이상이 18세 이하의 소년들이라고 밝혔습니다. "내 총은 내 키만 해요 : My Gun was as Tall as Me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버마 정부군과 19개의 반군에 속한 소년병들을 조사한 결과 정확한 수치를 낼 수는 없지만 18세 이하의 소년병이 70,000명 정도 될 것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 이들 소년병들은 가족과의 상의없이 공공장소 등에서 강요와 협박에 의해 징용되었으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정부군에 속한 소년병들은 반군과의 전투참가 뿐만 아니라 소수민족 부락에 대한 방화, 강제노동의 강요, 대량학살에 참가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하지만 2003년 1월 버마 유엔대사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석상에서 이러한 소년병의 존재에 대해 부인하였습니다).

식량난과 해외기업의 진출 역시 심각한 인권침해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아시아인권위원회(Asia Human Rights Commission)가 개최한 버마에서의 식량난과 군사화에 대한 민중법정(Peolpe's Tribunal on Food Scarcity and Militarization in Burma)은 분쟁이 식량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밝혔습니다. 정부군과 반군의 식량에 대한 직접적인 파괴와 약탈, 정부군에 의한 반군장악지역으로의 여행제한과 거래금지에 따른 식량이동의 제한, 잦은 군사적 충돌과 강제노동에 의한 농업활동의 제약, 말라리아 등 질병에 대한 노출과 반군지역에서의 비정부 병원이 군사적 목표가 되고 의약품 거래가 금지되어 허약한 체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조건들이 식량생산활동에 많은 제약을 가져와 식량난이 가중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버마의 경제적 잠재력, 석유를 비롯한 풍부한 지하자원과 관광상품, 값싼 노동력 등으로 '아시아의 마지막 시장'으로 불리고 있으며 시장진출을 위한 각국의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버마는 대부분의 기업들이 국유화되어 있고, 자본진출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군사정권과 거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외국자본의 진출과정에서 얻은 이익들은 군사정권 유지비용을 충당하는 주 자금원이 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몇몇 NGO들은 버마로 진출하는 기업들에 대한 불매운동을 하거나 진출을 포기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습니다. 버마에 대한 투자가 독재정권을 강화한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영국의 버마 캠페인(Burma Campaign UK)은 2003년 1월 30일 버마민주화 운동단체들의 요청으로 버마에 진출했거나 진출을 고려하고 있는 기업들의 목록(dirty list)를 공개하기도 하였습니다(여기에는 한국기업으로 대우가 포함되었는데, 뱅갈만의 가스탐사와 대우자동차의 합작이 지적되었습니다). 그동안 버마는 인권탄압을 이유로 서방국가들로부터 경제제재를 당해왔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마약과의 전쟁'에 따라 1980년대 이후 미국과 태국은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여 독재정권을 결과적으로는 돕는 이른바 '인권외교'의 이중성을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소수민족 문제는 현재 가장 심각한 인권침해 사안입니다. 소수종족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이른바 '초토화작전'이 진행되어 매년 수백명의 사람들이 무차별하게 학살당하고 있으며 많은 여성들이 강간당하고 있습니다. 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샨족 인권기구는 지난 1996년부터 2000년까지 버마 동북부지역에서 625명 이상이 버마군인들에게 강간당했으며 이중 173건은 소수민족 여성들이 붙잡혀 있는 수용소의 장교들에 의해 자행되었다고 밝혔습니다. 사건의 대부분은 30여만명의 소수민족이 지난 96년이래 강제 이주된 지역에서 벌어졌으며 피해자의 대부분은 집단 이주지역 바깥으로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갔다가 수용소에 감금된 이후 당한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샨족 인권기구 보고서는 '버마 군사정부가 샨족을 협박하고 복종시키기 위해 군인들이 아무런 제재없이 광범위하고 조직적으로 강간행위를 하도록 하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한편 1984년 정부군의 카렌국민연합에 대한 공세로 카렌족 난민의 태국 이주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이후 강간, 고문, 불법처형, 강제노동과 굶주림 등을 피해 1991∼92년에는 20만명의 소수민족들이 태국으로 난민생활을 시작하였고, 현재 난민은 최대 200만명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올해 1월에도 약 500여명의 카렌족이 정부군과 카렌국민연합(KNU)과의 계속되는 전투를 피해 태국으로 국경을 넘는 등 난민의 피난 행렬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난민에 대한 보호는 매우 열악한 실정입니다.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버마 인권단체인 `자유버마연합'(Free Burma Coalition)은 카렌족 어린이들과 여성 12명이 집단 피살당한 사진을 공개하였는데, 강제이주 후 2000년 4월 태국의 난민캠프로 넘어가려다 학살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또한 1997년에는 인도국경지대 미조람지방에 있는 친족 난민들에 대해 미조람 주정부는 이들을 외국인법(Foreigners Acts)에 의거 불법입국으로 간주, 체포된 난민을 버마정부군에게 넘겼는데 이 난민들은 버마국경내에서 총살당했습니다.

이와 같은 인권상황에 대하여 유엔인권위원회는 거의 해마다 결의문을 채택하고, 많은 국제 NGO들이 버마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부독재정권은 지속되고 있고 이로 인한 계속되는 전투와 강간, 고문, 불법처형, 강제노동 역시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고, 더욱이 지구촌 시민사회에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고통의 신음소리는 알 수 조차 없습니다. 우리가 겪었던 일제식민지 시대의 아픔과 30여년의 군사독재, 80년 5월 광주의 아픔을 버마의 민중들은 지금까지도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것입니다.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의 예산이 삭감되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더 많은 지구촌의 관심과 행동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한국정부는 그동안 난민인정에 대해 인색한 태도를 유지하다가 버마 전국학생회연합 간부를 포함한 버마인 3명과 카메룬 정당인(29) 등 모두 4명에 대해 난민 지위을 부여키로 지난 1월 29일 결정했습니다. 우리가 행동에 나서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들보다 우월해서가 아닐 것입니다. 서로가 평등하게 같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누려야하는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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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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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국제연대위원회입니다.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공격이 고조되는 가운데 최근 9.11테러 희생자 가족모임인 평화로운 내일(September 11 Families for Peaceful Tomorrows) 소속 회원들이 이라크를 방문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지난 1991년 걸프전 당시 오폭으로 어린이 52명, 여성 261명 등 403명이 희생된 알이미리야지역을 방문하여, 지역 희생자 가족들과 만남을 가졌습니다. 이 지역은 미국이 군사작전기지로 오해하여 폭탄을 투하했던 곳으로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의 뜻으로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편견을 버리고,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들이 같은 이유로 또다시 이라크를 방문하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은 아시아 분쟁지역 중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을 살펴보겠습니다.

인도네시아의 아체(Aceh)분리운동

7세기부터 14세기경까지 인도네시아의 주요지역을 장악했던 슈리비자야 왕국이 인도네시아지역의 통합의 시초였습니다. 슈리비자야왕국은 각 지역 부족의 자치를 인정하면서 무역권을 독점하여 이를 통해 모든 부족을 다스렸습니다. 그후 인도네시아지역은 영국, 네델란드, 포르투갈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습니다. 아체지역은 인구 4백만명의 수마트라 서북쪽에 위치한 자치주입니다. 원래 이슬람 율법 국가를 표방한 독립국으로, 네델란드의 식민지 하에서도 강력하게 독립투쟁을 벌였던 지역입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네덜란드는 종족 및 지역별로 독립을 약속하면서 인도네시아 연방정부와 협상을 하였는데, 이 통합과정에서 아체지역은 자치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바족(전체 인구의 45%)을 중심으로 한 인도네시아에 편입됨으로써 독립의 꿈은 무산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자치주로의 승격을 요구해온 아체지역주민들의 반발로 7년여의 분쟁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분쟁의 결과로 아체지역은 이슬람율법과 전통관습 및 교육에 대한 자율권을 획득하는 특별지구로 지정되었지만, 1966년 수하르또가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강한 통합정책과 경제개발을 추진하면서 갈등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아체지역의 아룬(Arun)지방의 액화천연가스(LNG)는 인도네시아의 심각한 경제위기를 타개할 수 있었던 계기였습니다. 1977년 생산에 들어간 아룬유전으로부터 얻은 연평균 21억 달러의 국가수익은 1980년대 연평균 7%의 경제성장을 이룩하도록 한 발판이 되었으며, 수하르또를 '개발의 아버지'로 추앙받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경제개발과정에서 아체지역주민들은 소외되었습니다. 아체지역의 개발은 1975년 이래로 중앙정부의 주도아래 이 지역에 이주시키기 시작한 자바인들을 생산현장에 투입시켰고(1991년까지의 자바 이주민 숫자는 당시 아체 인구의 약 3%인 10만 5천명이었음), 이 지역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수익에 비해 아체지역에 돌아오는 것은 극히 미비하였습니다. 1997년의 경우 약 26억 달러(30조 루삐아)의 외화를 벌여들였지만, 아체주에 할당된 연간 예산은 수입의 0.34 %인 약 1021억 루삐아였습니다. 또한 아체지방의 산림자원이 주면적의 3/4인 413만 ha 산림이 그 동안 19개의 수하르또 측근 기업에 의해 무차별 벌목되어, 산간지방에서 얻은 수확물로 생계를 유지해오던 지역주민들에게 많은 타격이 되었으며, 1995년과 1996년에 약 1000억 루삐아 이상의 재산손실을 가져온 대홍수의 원인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경제적 수탈로 인하여 1976년 자유아체독립운동(GAM) 단체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무장투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하여 낮에는 정부군의 반군공격, 밤에는 아체 독립주의자들의 습격 등 살육전이 반복·지속되고 있습니다. 무장투쟁과 더불어 1998년 자유아체독립운동은 아체 전체 인구의 40%에 해당하는 약 150만 명의 주민이 모여 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요구하는 집회를 개최한데 이어 1999년 자유아체독립운동은 아체주의 수도 반다아체에서 대규모 평화집회를 열었습니다. 1999년 집회에서는 하루에만 100명이 넘는 비무장 민간인들이 죽고 수백명이 총상을 입는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인권유린은 수하르또 시절부터 비롯되었는데, 1990년 7월 붉은 그물작전(OJM: Operasi Jaring Merah)으로 명명된 토벌로 아체지역의 민간인에 대한 살인, 방화, 강간 등 인권유린은 극심하였으며, 특히 1995년 수하르또 사위인 쁘라보오의 특전사(꼬빠수스) 사령관 재임 시에 파견된 예하 부대의 만행은 극에 달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만행으로 1976년부터 작년까지 12만명이 숨졌고, 폭력의 희생자와 실종자를 위한 아체위원회(The Aceh Commission for Disappearances and victims of violence)에 의하면 2002년 1월부터 11월 동안 1,307명이 살해되었고 1,806명이 고문당했으며, 1,186명이 체포 또는 자의적 구금을 당하였으며, 몇몇 시체로 발견된 377건의 실종사고와 46명의 여성들이 성추행을 당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위원회에 의하면 이 통계는 90년대 말 이후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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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아체지역에 대하여 분쟁종식을 위한 평화협정이 2002년 12월에 체결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 정부와 자유아체운동(GAM) 대표들은 ▲ 적대관계 청산, ▲ GAM 무장해제, ▲ 정부군 철수, ▲ 자치선거 실시, ▲ 유엔 감독관 파견 등에 합의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평화협정 체결 즉시 모든 적대행위를 중단하며, 자유아체운동은 모든 무기를 국제 감시인단이 관할하는 병영에 넘기고, 공수부대 및 경찰기동여단을 포함한 대다수 정부군을 아체에서 철수시키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체지역은 오는 2004년 자유롭고 공정한 지방선거를 실시해 중앙정부로부터 광범위한 자치권을 넘겨받고, 공동안보위원회를 설립해 치안상황을 감시하기로 하였습니다. 협정의 체결에는 스위스 인권단체 앙리 뒤낭 센터 등 국제사회의 노력도 기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12월 9일의 평화협정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다시 폭력사태가 발생하는 등 갈등과 긴장은 전혀 사라지고 있지 않습니다. 폭력의 희생자와 실종자를 위한 아체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1월 9일 이 평화협정을 지지하는 평화집회가 개최되었는데, 대부분의 시민사회단체들은 인도네시아 치안당국의 제지로 집회장소에 도착하지 못하였고, 각 지역에서 집회장소로 가기를 원하는 현지 주민들에 대하여 인도네시아 군대가 발포하여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또한 수명의 주민들이 구타로 인한 심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들 부상자는 대부분 20대로서 17세 청소년도 포함되었습니다. 평화협정에는 적대행위 중지와 시민사회의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였지만, 인도네이사 정부는 평화적 대화보다는 여전히 군사적 접근을 취하고 있습니다.



필리핀 무슬림의 독립운동

필리핀 남부지역의 민다나오(Mindanao)와 술루(Sulu)지역은 원래 필리핀에 속하지 않는 독립된 이슬람국가였습니다. 한때 마닐라가 있는 루손(Luzon)섬까지 세력을 확대했던 이슬람 세력은 스페인의 통치가 시작된 16세기 중엽이후 필리핀 남부의 민다나오지역으로 이주하여 기독교로의 개종을 강요하는 식민통치에 끊임없이 대항하였습니다. 필리핀 남부 무슬림들에 대하여 스페인은 300여년에 걸쳐 정복을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이후 미국의 식민통치(1898-1946)에서도 기독교화와 필리핀 내로의 통합정책이 추진되었습니다. 미국은 무슬림 거주지에 많은 기독교인을 이주시켰는데, 이와 같은 정책은 필리핀인들의 우월함을 조장함과 동시에 무슬림에 대한 차별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여, 미국이 통치하던 1930년대부터 독자적인 국가수립의 요구가 제기되었습니다.

분리독립운동은 1960년대부터 본격화되었습니다. 이는 1950년대 이후 필리핀정부가 민다나오섬의 모로인(Moro 말레이-인도네시아 인종 그룹으로 민다나오와 술루 군도를 중심으로 하는 필리핀 남부지역에 거주하는 이슬람교도들을 일컫는 총칭) 거주지로 가톨릭교도인 필리핀인들을 대량 이주시켰기 때문인데, 이 정책을 실시하게 된 배경에는 루손섬의 토지문제가 있었습니다. 식민지시대부터 유지된 대토지소유제로 인하여 농민의 불만이 쌓였고, 농지개혁은 대지주계급에 의해 좌절되었습니다. 이러한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농민들을 민다나오섬으로 이주시켰지만, 이지역은 공동체적 토지 소유제도가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필리핀인의 이주와 함께 근대적 소유권이 도입되면서 모로와 이주자 사이에는 토지 이용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는 분리독립운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특히 1971년 필리핀 정부군의 학살을 계기로 분쟁은 모로와 필리핀 정부의 대결로 확산되었습니다.

미수아리(Nur Misuari)가 이끄는 모로 민족 해방전선(MNLF : The Moro National Liberation Front)은 모 조직인 무슬렘독립운동(MIM)의 무장단체로써 리비아, 말레이시아,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등 회교권 국가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약 30년 동안의 무장투쟁 과정에서 정부군과 모로 민족해방전선측의 사망자는 1971부터 현재까지 12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1976년 리비아의 중재로 필리핀 정부와 모로 민족해방전선 간에 트리폴리 협정(Tripoli Agreement)이 체결되어 이슬람 지역 14개주와 9개시가 '민다나오 자치지역(ARMM : Autonomous Region in Muslim Mindanao)'으로 지정되었는데, 주민투표 결과 결국 4개주만이 자치지역에 포함되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 위축되던 분리독립운동세력은 투쟁방식과 관련한 노선갈등으로 1984년 강경파 하심(Salamat Hashim)이 이끄는 1만∼1만 5천명 규모의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LF : Moro Islamic Liberation Front)이 형성되었고, 1천 5백명 정도의 극렬 무장단체인 아부사야프(Abu Sayyaf) 집단도 등장하였습니다.

필리핀 무슬림들의 분리 독립운동에 대한 평화적 해결모색은 1986년 필리핀 2월 민중혁명(Peoples power)이후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분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1996년 9월 2일 마닐라의 대통령궁에서 라모스 대통령과 모로 민족해방전선(MNLF)의 미수아리 의장은 내전을 종식시키고 민다나오 지역의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평화와 개발을 위한 남부 필리핀 평의회(The Southern Philippine Council for Peace and Development, SPCPD)구성 등 평화 협정을 체결하였습니다. 평화협정의 주요 내용은 ▲ `평화 및 개발 특별지역' 지정(1976년 트리폴리 협정에 명시된 민다나오 회교지역 14개주와 9개시를 특별지역으로 선포), ▲ 평화와 개발을 관장할 한시 기구로써 `남부 필리핀 위원회' 설치, ▲ 일부 모로 민족해방전선 요원의 군경 전환, ▲ 지역 치안을 담당할 보안군 설치 등이었습니다. 한편 2001년에는 필리핀 정부와 이슬람 최대 반군단체인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LF)이 공식 휴전협약에 서명했습니다. 말레이시아의 중재로 이뤄진 휴전협정은 1996년 모로민족해방전선(MNLF)과 체결한 것과 마찬가지로 남부 필리핀에서 어느 정도의 자치를 인정한다는 합의를 구체화하였으며, 휴전 이행, 이슬람지역과의 관계정상화 방안, 보안, 사면 문제 등이 휴전협정의 주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슬람세력 중 극렬 무장단체인 아부사야프(Abu Sayyaf)는 아직 무장투쟁을 지속하고 있고, 폭탄테러와 군대의 소탕작전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지금까지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2002년 10월에는 아부사야프를 추적하던 필리핀 정부군이 반군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아 7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했고, 12월에는 필리핀 남부 마긴다나오주의 다투 피앙시 시장이 폭탄테러를 당했으며, 올해 1월에도 벌어진 정부군과 이슬람 분리주의자들간의 충돌로 최소한 반군 28명이 숨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더욱이 필리핀의 경우 '테러와의 전쟁'을 빌미로 필리핀에 다시 주둔하기 시작한 미군이 있어 이 지역에서의 군사적 긴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의 분리독립운동은 종교와 민족(종족)간의 갈등으로 볼 수 있지만, 빈곤과 소외 등 경제적인 원인과 무장투쟁과 진압과정에서 자행되었던 인권유린, 정치적 탄압이 더욱 구체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구의 식민지쟁탈로 인하여 자의적인 영토분할과 억압적인 식민통치는 분쟁의 씨앗을 만들었으며, 독립과정에서 지역주민들의 요구가 좌절되고, 독재정치에 의한 탄압은 분쟁을 더욱 키웠습니다.

최근 양 지역 모두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분쟁을 종식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폭력은 악순환되고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 지역들에 진정한 평화가 정착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단지, 국제사회가 함께 마음을 기울인 노력으로 마련한 평화협정을 바탕으로 평화가 정착될 수 있기 위한 국제사회의 감시와, 지원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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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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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국제연대위원회입니다. 올해 3월부터 세계무역기구(WTO)의 도하개발의제의 농업협상이 본격적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이를 앞두고 농림부가 향후 2년간 협상 실무책임자를 모집하려 했지만, 단 한 명의 지원자도 없었다고 합니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경제특구지정 등 세계화의 공세 속에서 지혜를 모아야 할 이때, 참으로 씁슬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주에 이어 세계의 분쟁지역 중 오늘은 첫 번째로 인도-파키스탄의 분쟁을 살펴 보겠습니다.

카슈미르(Kashmir) 지역 분쟁의 서막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이자 히말라야 산맥의 끝자락에 K-2봉이 우뚝 서 있고, 카라코람 산맥의 만년설이 펼쳐진 카슈미르. 영국의 록그룹 레드 제플린이 찬사를 보내기도 한 카슈미르는 아름다운 숲들과 호수, 초원과 사막이 어우러져 비경을 이루고 있어 '동양의 스위스'라 불리우는 곳입니다. 풍부한 수자원을 이용, 농업과 목축업이 발달하였고, 특히 카슈미르(cashmere) 모직은 유명합니다.

현재 인구는 인도와 파키스탄 지역을 합쳐 약 1300만명에 달하며, 전체 주민 가운데 약 77%가 이슬람교도이고, 나머지는 힌두교와 불교·시크교 등입니다. BC 3세기 마우리아 왕조를 거쳐, 서기 500년경에는 파키스탄 북부 탁실라를 중심으로 불교 문화가 꽃피었던 곳이며, 11세기부터 이슬람 왕조가 흥망을 거듭하다 19세기 영국이 인도를 점령하면서 카슈미르도 영국의 간접 통치를 받았습니다. 당시 카슈미르에는 560여개 국가들이 있었고, 이들 왕국은 소수 힌두교계(22%)임에도 불구하고 지역 주민의 대부분(77%)인 이슬람교도들을 탄압하며 영국의 식민 지배에 협력하였습니다.

1947년 영국으로부터 인도가 독립할 당시 인도는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독립하였고, 특히 이 과정에서 각 지방의 자율적 결정에 따라 인도 또는 파키스탄으로 편입하도록 하였습니다. 당시 카슈미르 지역은 번왕국이 통치하였는데, 번왕국의 하리 싱(hari Singh, 힌두교)은 파탄(북방족속이라는 의미)인들이 카슈미르 지역으로 침입하는 사건 속에서 위협을 느껴, 절대다수의 이슬람교도가 원하는 파키스탄 귀속이 아닌 1947년 10월 26일 국민투표를 전제로 인도로의 편입을 결정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카슈미르지역의 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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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분쟁

1947년 10월 카슈미르의 이슬람 무장부족 집단이 파키스탄의 지원 아래 수도인 스리나가르(Srinagar) 점령을 시도하자, 인도는 즉각 군대를 파견하여 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인도의 네루 수상은 주민투표에 따라 카슈미르의 장래를 결정하겠다고 약속했고, 유엔에 이 문제가 상정되어 1948년 8월 정전합의가 이뤄지고, 1949년 1월부터 정전협정이 발효되었습니다. 이때 카슈미르에 대하여 인도가 카슈미르 지방의 2/3를, 파키스탄이 나머지 1/3을 분할점령하고, 이를 경계하는 통제선(Line of Control)이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유엔 결의안은 '인도령 잠무 카슈미르가 인도와 파키스탄 중 한 곳을 선택할 때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주민투표를 통해 결정해야 한다'고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엔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은 전쟁후에도 자국점령 카슈미르가 독립정부임을 주장하였고, 1951년 인도의 네루 수상은 잠무 카슈미르의 '특별 지위'를 규정하는 헌법 370조항을 신설하고, 1957년 이 지역을 인도 연방의 하나로 편입해 버렸습니다.

1964년 네루의 사망후 인도의 정국혼란을 기화로 파키스탄은 인도 점령 카슈미르에서 비정규전을 감행하여 그해 12월 카슈미르 지역을 공격하였고, 1965년 4월에는 쿠츠(Rann of Kutch)지역에서 양측간 충돌이 빈번히 발생하였고, 결국 1965년 9월 통제선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2차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 전쟁은 구소련의 중재로 1966년 1월 타시켄트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1971년,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하는 과정에서 파키스탄의 세력약화와 난민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인도가 개입하여 3차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이 전쟁은 1972년 심라(Simla)협정으로 전쟁이 종료되면서, 지금의 통제선이 확정되었습니다.

이 분쟁으로 1989년부터 1999년까지 약 7만명 사망, 17만5천명의 난민이 발생하였습니다. 작년에는 양측의 공방전이 가열되는 가운데 인도는 '테러와의 전쟁'을 강조하며 전쟁태세를 강화함으로써 핵전쟁의 위기를 초래하기도 하였습니다. 아직도 이 지역은 통제선을 중심으로 양국가에서 포격전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1980년대 들어 인도령 카슈미르에서 인도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잠무 카슈미르 해방전선(JKLF)'이 결성되면서 이지역의 갈등은 한층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이들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지원을 받으며 인도군에 대한 테러를 벌이면서 '주민들의 자유로운 투표를 통해 잠무 카슈미르의 미래를 결정할 것'을 인도에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인도는 자치정도는 허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고, 파키스탄은 이들의 투쟁을 지지하지만 분리 독립 대신 파키스탄으로의 편입을 원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역패권을 둘러싼 갈등 : '힘의 정치' 지향

카슈미르지역은 비옥한 토지와 수력자원의 이용가능성이 높은 지역입니다. 특히 이 지역의 지형을 이용한 수력발전은 파키스탄의 공업화를 위해 중요한 요소입니다. 따라서 파키스탄이 카슈미르 문제에 양보하지 않는 원인 중의 하나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군사적 충돌을 부추킨 것은 과거 냉전시대에 지역패권을 둘러싼 갈등이었습니다. 즉, 카슈미르 분쟁은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회교권 국가들의 지원과 중국, 소련, 미국 등의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인도와 파키스탄에 대한 군사원조로 무력경쟁이 지속되었던 것입니다. 파키스탄과 인도, 모두 핵보유 국가(미국의 연구기관에 의하면 인도는 65기, 파키스탄은 40기 가량의 핵탄두를 가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이들 모두 핵확산 금지조약 가입을 거부하고 있습니다)이고, 미사일 개발 등 대량살상무기의 개발에 서로 경쟁적입니다.

파키스탄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2차 대전이후 남아시아에서 거의 유일한 친미정권이었던 파키스탄은 1980년대 후반까지 미국의 막대한 군사원조를 받았습니다.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을 둘러싼 인도-파키스탄의 3차 전쟁은 소련과 인도의 개입 속에서 치뤄진 전쟁이었고, 더욱이 1979년 이란의 혁명과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은 미국에게 파키스탄의 중요성을 부각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군사원조를 바탕으로 파키스탄은 핵무기 개발계획을 추진하였고, 미국은 이를 묵인 및 지원하는 정책을 취하였습니다(핵확산에 대한 이러한 미국의 자의적인 태도에 대해서는 뉴스레터 33호 참조). 탈냉전 이후에도 1997년 파키스탄은 핵무기제조능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공개 선언하였고, 1998년 지하 핵실험을 하기도 하였으며, 1998년 지대지 미사일 '가우리' 발사 실험을 시작으로 작년에는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사거리 1천 500∼2천km의 미사일 실험 발사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인도의 외교정책은 기본적으로 비동맹주의입니다. 그러나 1959년 중국과 인도간의 국경분쟁 이후 외교정책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카슈미르 지역은 인도-파키스탄-중국의 국경을 이루는 지역에 위치하여 인도-중국의 영토분쟁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중국은 영국이 설정한 맥마흔(McMahon) 라인을 불평등 조약으로 간주하여 이를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1959년 티베트 라사에서 발생한 폭동에 대한 인도의 군사적 개입에 대하여 1962년 중국은 군사적으로 대응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미국이 1971년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시도하자(이른바 '핑퐁외교'), 소련과 일종의 안보조약인 '평화·우호·협력조약'을 체결하고 친소정책을 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도는 1974년 5월, 지하핵실험을 통해 세계에서 6번째의 핵보유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8년 5월 3차례의 지하핵실험에 이어 사정거리 50㎞의 단거리미사일을 실험 발사하였습니다. 1999년에 카슈미르의 카길지역에서 벌어진 대규모 포격전 이후 2000년에는 12억 달러의 보병전투장비 증강계획을 결정하는 등 무력경쟁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분쟁의 '방치'와 인권의 실종

카슈미르 지역에 대한 분쟁 해결책으로 파키스탄은 유엔 결의에 따라 주민들의 투표로 주민들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인도는 1972년 3차 전쟁이후 체결된 협정에 따라 쌍무협상으로 해결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국제사회가 이 문제에 개입하는 데 반대하고 있고, 인도와 파키스탄은 모두 카슈미르 독립을 위한 이른바 '제 3의 선택'에는 모두 반대하고 있습니다. 핵무기와 대량살상무기의 기술이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전되면서 결국 강대국들도 통제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렇듯 카슈미르 분쟁이 '방치'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카슈미르 지역은 인권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는 지역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곳에서의 무장 군인들의 폭력과 살인, 고문, 인권유린, 건물파괴 등은 법(TADA : Terrorist and Disturbed Areas Act)에 의해 합법화 되어있는 실정입니다. 또한 국제사면위원회 에 따르면 인도의 공공안전법(Public Safety Act)은 카슈미르지역의 정치적 반대에 대한 탄압과 인권유린의 근거가 되고 있고, 1990년에서 2000년까지 경찰이나 무장한 준군사조직에 의해 끌려간 후 실종된 실종자들이 1000명에 이른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더욱이 9.11 테러 이후 전세계적인 군사주의의 발흥은 인도 사회 내부에서도 영향을 미쳐 구자라트 학살(구자라트 지역에서는 2천여명의 무슬림이 학살당했고, 수 천명의 여성이 강간 당했습니다)을 비롯한 각종 종교·인종 분쟁을 일으키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정권유지를 위한 내부정치의 이용목적으로, 혹은 지역패권의 유지를 위한 목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분쟁은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입니다. 카슈미르 지역 주민들의 무고한 희생을 방지하고 실종된 인권은 회복할 길이 없는 것일까요? 작년 2월 구자라트 학살 당시 민주적인 행동을 주장하고 나선 시민들과 비종교주의 단체들이 구자라트 학살 확대 저지와 인도-파키스탄 국경에 배치한 70만 대군을 철수케 한 점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지난 1월 18일, 한국을 포함하여 워싱톤을 비롯 전세계에서는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공동행동의 날을 가졌습니다(이날 행사는 미국의 반전네트워크인 평화를 위한 연대(United for Peace)와 국제ANSWER가 제안하였고, 아시아에서는 아시아평화연대가 조직하였습니다). 이처럼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영향력을 키워갈 때 분쟁과 갈등을 잠재울 수 있는 이성이 회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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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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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국제연대위원회입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북핵 문제가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평화적 해결을 위한 북-미 양국의 적극적인 자세와 한국 정부의 세심한 노력을 촉구합니다(188개 시민사회단체들은 SOFA개정과 전쟁반대와 평화를 위해 연대의 촛불을 피워 올리자는 신년 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기자회견내용보기). 오늘 우리는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분쟁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분쟁의 개괄적 이해

역사적으로 보면, 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의 분쟁은 크게 식민지 청산과 1, 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과정에서 발생한 분쟁, 이와 함께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전쟁이 있습니다. 그리고 독립국가 건설과정에서 이데올로기와 인종, 종족, 민족간 갈등에 의한 분쟁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 독립국가 전쟁 2차 대전후 프랑스, 영국, 포르투칼, 네델란드 등 유럽의 식민지 국가들, 즉 아프리카와 중동, 아시아지역의 국가들의 독립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1946년의 인도차이나반도, 1947년 마다가스카르, 1952년 튜니지아, 1954년 알제리, 1955년 카메룬, 1957년 서부사하라 등에서의 분쟁이 여기에 속합니다.


▲ 식민지 유산 및 전후처리과정에서 발생한 분쟁들

독립국가 건설과 함께 전후처리과정에서 파생된 국경의 문제 등 전후처리와 식민 유산의 문제 등으로 인하여 촉발된 분쟁들로서 이란-이라크 및 이라크-쿠웨이트 전쟁, 방글라데시 내전, 터키내 쿠르드족 분리운동 등이 그것입니다.


▲ 종족, 인종, 민족, 종교 갈등에 의한 분쟁들

1963년 사이프러스의 그리스, 터키 민족갈등, 1948년 버마, 1950년 인도네시아, 1959년 티벳, 1959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오는 이라크 내 쿠르드족 갈등, 1967년 나이지리아, 1983년 스리랑카의 타밀분쟁, 너무나 악명높은 이스라엘-파키스탄, 소말리아, 르완다 등이 인종, 민족간의 갈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종교문제로는 인도의 카슈미르 지역, 인도-파키스탄, 레바논 내전, 방글라데시 등의 지역에서 분쟁이 있었습니다.


▲ 이데올로기에 의한 분쟁

냉전시대에는 독립국가 건설과정과 이후 집권세력과 반대세력간의 정치투쟁에서 무엇보다도 이데올로기적 갈등이 강하게 작용하였습니다. 콜롬비아, 앙골라, 알제리, 멕시코, 인도네시아, 이란 내분, 필리핀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분쟁은 하나의 원인으로만 규정하기에는 상호 복합적으로 얽혀있습니다. 즉,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내부적으로 봉합되어 있던 종족, 인종, 종교, 민족의 문제들이 신생 국가권력을 둘러싼 투쟁의 과정에서 혼합되었던 것입니다. 국경분쟁 역시 종교, 민족, 식민지유산의 원인이 섞여 있습니다. 인도의 독립과정에서 발생한 인도-파키스탄의 문제는 식민지 유산과 종교, 국경 등이 얽혀 있었고, 동남아시아 대부분의 분쟁국가들이 정치권력과 이데올로기, 종교, 인종이 혼재된 갈등의 양상이었습니다. 즉, 스리랑카는 자치를 요구하는 힌두교의 타밀족과 지배세력이었던 불교의 싱할라족 간의 갈등이었습니다. 중동과 아프리카는 2차 대전후 "땅따먹기"를 끝낸 식민지 모국들이 철수하면서 제멋대로 그어놓은 국경에 대한 갈등과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강대국의 패권유지를 위한 독재정권 혹은 반대세력에 대한 끊임없는 지원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우리 나라의 경우처럼 신생국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이루어진 식민지 유산과 전후처리과정에서 발생된 것이며, 냉전시대에 독립국가 건설의 문제에서 정치적 갈등은 곧 이들을 후원하는 강대국들의 대리전이였기 때문에 식민지 유산과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내란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 하겠습니다.


중부 및 동부 유럽의 경우

한편, 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이후 등장하게되는 민족주의는 동부 및 중부유럽에서 민족국가의 형성 역사와 사회주의 시절 내부정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19세기 중부 및 동부유럽은 민족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한 국가내에 다양한 민족들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유럽의 화약고라 불리는 발칸지역에서는 1894년(세르비아인들의 폭동)에서 1912-1913년(발칸전쟁)까지 오토만제국이 제거되고 6개의 작은 독립 민족국가들이 탄생하였고, 중부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이후와 1919년 베르사이유조약 이후 발칸왕국(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가 된 세르비아)과 7개의 새로운 민족국가(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발트3국 핀란드) 가 탄생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국가와 민족이 일치하지 않는 '불완전한 민족국가'가 형성되어 소수민족은 증가했고, 특히 발칸에서는 소수민족을 제거하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전쟁, 추방과 학살, 대량 이민 또는 인구의 교환 등의 결과로 국경이동이 빈번히 일어났고 이는 민족간의 갈등을 고조시켰습니다.

전쟁 이후에 중부유럽의 몇몇 나라에서는 소수민족이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되었는데, 이는 국경의 이동(헝가리 1919년)이나 인구의 이동(체코 1945년) 또는 두 방법의 결합(폴란드 1945년)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모든 발칸의 국가들과 슬로바키아는 다수의 소수민족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주의화 이후 이 지역에서는 소련의 패권/ 일국사회주의에 대한 반발과 더불어 민족문제가 대두되었으며, 루마니아에서 헝가리인들의 이주, 폴란드에서 민족적 숙청 등 민족문제가 다양하게 표출되었습니다.

구소련에서는 잘알려진 강제이주를 통한 민족문제해결이 갈등의 원인이었습니다. 현재도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는 체첸민족은 러시아 혁명 당시 볼셰비키에 협력하였지만, 독립하지 못하고 자치권을 얻었습니다. 그나마도 스탈린 집권기에는 농업 협동화와 같은 강압적인 통합 속에서 점차 의미를 잃어갔고, 체첸 공산당의 지도부가 분리주의혐의로 끌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1937∼38년대에 일어난 체첸지역에서의 대규모 저항을 스탈린 군대는 약 12만명을 학살하며 진압하였습니다.

또한 2차 대전 당시 독립을 위해 독일에 협조한 '배반'의 댓가로, 1944년에 중앙아시아와 카자흐스탄으로의 강제이주 과정에서 40만명이 되는 체첸민족 중 약 30%가 기아와 계획적인 학살로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이러한 점에서 공산주의는 공산주의 이후에 구소련과 동유럽에서 민족갈등과 소수민족 문제가 전면에 재등장하는 데 기여한 셈입니다).



탈 냉전이후 지속되는 분쟁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tockholm International Peace Research Institute : SIPRI)에 의하면 2001년 대규모 무력분쟁이 24건 발생하였으며, 이중 3분의 2는 아시아 및 아프리카에서 일어났다며, 냉전 종식이래 12년간 이같은 추세가 지속되고있다고 밝혔습니다. 연구소가 밝힌 대규모 분쟁은 최소 1개 국가의 정부가 개입된 무력충돌로 연간 1천명 이상의 사망자가 생겨난 형태를 말합니다. 과거 소련과 미국의 냉전체제 하에서 저강도 분쟁(low-intensity conflict)의 형태로 발생하였던 지역분쟁은 여전히 탈냉전 이후에도 발생하고, 지속되고 있습니다(저강도 분쟁이란 강대국의 핵무기의 존재 때문에 규모가 큰 전쟁을 피하고, 강대국의 자기 진영에게 유리한 국제정세를 조정하려는 의도로 치루어지는 분쟁의 형태를 의미합니다). 이후 냉전체제의 종식, 즉 절대적 억제자의 부재는 이러한 저강도 분쟁이 증가하게 되고, 2차 대전 이후 냉전체제 속에서 잠재되어 있던 갈등이 지역적으로 폭발하게 되는 계기였습니다. 즉, 미국과 구소련이 냉전시대에 그러했던 것과는 달리 제 3세계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위한 경쟁을 벌리지 않는 것이 저강도 분쟁 증가의 가장 중요한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강도 분쟁에 대한 '위협과 이익의 불일치'(threat-interest mismatch)는 전반적인 개입보다는 강대국의 이해에 따라 선택적인 개입을 택하고 있어 갈등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있습니다.

더욱이 9.11이후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이 무력사용에 면죄부를 주면서 이스라엘의 '미국 따라하기'와 이로 인한 테러의 악순환과 인도 카슈미르지역의 긴장, 발리 폭탄테러 등으로 인하여 갈등의 해결에 대해 무력적 방법을 선호하게 되는 군사주의의 발흥이라는 국제정세도 평화적 문제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미국의 아프카니스탄 공격에 이은 이라크 공격 준비 등 '위협(테러)과 이익(석유, 패권)의 일치'를 위한 고강도 전쟁을 추구하고 있어 더욱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서글픈 역사, 희망없는 삶 : 강대국이 짓밟은 미래

분쟁문제를 보면서 우리가 묵과할 수 없는 사실은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인 국경문제, 독립국가 형성과정에서 강대국의 지원과 이후 독재정권에 대한 비호 등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다수의 분쟁문제들이 과거 유럽과 미국, 구소련의 책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진국들의 해결노력이 미흡하다는 것입니다. 선진강대국들은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선택적 개입을 하고 있어 분쟁지역들에서는 삶은 여전히 내일이 없는 삶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분쟁에 따라 벌어지는 대량학살, 강간, 청소년의 무장, 난민발생 등 인간파괴는 참혹하기 그지없습니다.

또한 탈냉전이후 새롭게 분출된 분쟁지역들은 경제적으로도 매우 낙후된 지역이기 때문에 국제사회의 도움이 절실한데, 빈곤퇴치를 위한 유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진국의 개발원조는 턱없이 부족하기만 합니다. 또한 경제적으로 이들을 옥죄고 있는 외채문제나, 몇몇 국가에 가해지고 있는 경제제재조치들이 가져오는 문제는 날로 심각해져가고 있습니다. 현재 또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는 이라크에서는 유엔의 경제봉쇄로 인하여 매달 4500-6000명씩 5살 미만 아동이 죽어가고 있다고 유엔아동기금과 세계식량농업기구가 밝혔습니다. 걸프전 이후 10년 동안 60-70만명의 5살 미만 어린이들이 사망하였고, 다른 연령대의 사람들을 포함할 경우 사망자수는 200-300만에 달할 것이라고 현지 조사자들이 밝혔습니다. 이러한 참상의 직접적인 이유는 걸프전 당시 파괴된 각종 시설이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의 경제제재로 복구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역금수 조치로 주민생활의 필수품들이 제때 공급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지구에서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국가들의 공동기구인 유엔이었습니다. 그동안 유엔은 난민구호, 평화유지활동, 선거감시 등 분쟁해결과 분쟁으로 인한 난민문제 등의 해결을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상임 안보리 5개국의 기득권으로 인하여 유엔은 그동안 강대국에 의해 도구적으로 이용되거나, 그 본래의 임무를 다하는데 많은 제약을 가져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만으로 우리는 유엔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현재 이러한 인권과 평화 문제를 지속적으로 다루어온 국제기구로서, 그리고 유일하게 국제사회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기구로서 유엔의 강화를 위해 지구촌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유엔 속에서 더욱 커져야 할 때입니다. 다음주부터는 지역별 분쟁현황을 알아보겠습니다.


관련사이트

지역분쟁국, 지역원인발발시기
아시아동아시아네팔내분정쟁, 이데올로기1996
버마분쟁민족/ 정쟁/ 마약1949
인도네시아분리분리/이데올로기/종교/식민유산1975
필리핀 내전종교/이데올로기/민족/분리1969
서남아시아미국-아프간이데올로기/종교

2001
방글라데시종교/민족/분리/식민유산

1974
스리랑카영토/종교/민족/분리/식민유산

1983
아프카니스탄정쟁/종교/종족/개입

1978
인도종교/분리/식민유산/종족

1947
카슈미르영토/종교/민족/패권/식민유산

1947
중동

이란



/이라크

이란종교/이데올로기/정쟁/민족

1963
이란-이라크영토/패권/민족/종교/정쟁/식민유산

1969
이라크-쿠르드영토/개입/패권 추구

1998
걸프전민족/분리/정쟁/종교/이데올로기

1959
이라크-쿠웨이트영토/식민유산/탈냉전/패권

1973

이스라엘



/기타

이스라엘-시리아영토/식민유산/탈냉전/패권

1948
팔레스타인민족/영토/종교/분리/식민유산

1948
터키-쿠르드민족/분리/식민유산

1922
레바논종교/정쟁/민족/식민유산/개입1958













북부수단민족/종교/정쟁/분리/식민유산/이데올로기

1956
알제리종교/이데올로기/정쟁

1989
차드정쟁/종교/민족/식민유산

1966
대호수지역르완다민족/정쟁/식민유산

1963
부룬디민족/정쟁/식민유산

1965
우간다민족/정쟁

1971
콩고정쟁/분리/민족/식민유산/개입

1960
케냐민족/정쟁

1978
앙골라이데올로기/정쟁

1975

서/동부



아프리카

소말리아정쟁/민족/종교/식민유산

1991
나이지리아정쟁/민족/분리/식민유산/종교/종족/지역/독재

1967
라이베리아정쟁/민족

1989
시에라레온민족/정쟁/식민유산

1985
유럽마케도니아민족/탈냉전/정쟁

2000
북아일랜드분리/종교/민족

1969
코소보민족/분리/탈냉전

1992
CIS-중앙아시아러시아-체첸분리/종교/탈냉전

1991
미주멕시코민족/정쟁/이데올로기

1991
과테말라정쟁/이데올로기1962
니카라과

정쟁/이데올로기1928
아이티

개입/정쟁1991
엘살바도르정쟁/이데올로기1979
페루정쟁/이데올로기1969
페루-에콰도르 국경분쟁영토1941
포클랜드영토/식민유산1982
콜롬비아정쟁/이데올로기

1964
자료출처 : 한국 국방연구원 세계의 분쟁과 전쟁
양영미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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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국제연대위원회입니다. 새해 첫 일주일은 어떠하셨습니까? 저마다의 가슴마다 간직한 소중한 계획이 모두 이루어지길 기원합니다. 새해부터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떨치네요. 아마도 정신 바짝 차리고 한해를 시작하라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오늘은 올 해 최대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북한의 핵문제와 관련하여 국제사회에서의 핵문제를 짚어 보고자합니다.


국제원자력기구와 핵확산 금지조약 : 보편주의의 실종과 미국의 일방주의

2차 대전이 핵무기의 사용으로 종결된 이후 국제사회에서 핵문제는 핵의 평화적 이용과 핵확산의 방지가 주된 이슈였습니다. 그러나 냉전체제 하에서 핵의 개발과 군사화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제원자력기구(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 : IAEA)는 1953년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제안으로 1957년에 조약이 발효되어 창설되었습니다. 국제원자력기구는 원자력 발전의 경제성 및 안전성 제고를 위해 개발도상국의 전력생산을 포함한 원자력의 실용적 응용을 지원하며, 핵분열 물질이 군사적 목적에 이용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을 주요 활동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요 기관으로는 총회, 이사회, 사무국이 있고, 이사회는 지역적 안배와 기술전문성에 따라 지명 또는 선출되는 35명으로 구성되고 있습니다.

군사적 목적으로 기술발전이 이루어진 핵관련 산업은 미국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북한에 제공된 경수로 역시 잠수함 추진용으로 개발된 것이었습니다). 1980년대까지 미국은 세계 원자력 총생산의 20%를 차지했고, 140여기의 원자로를 수출하였습니다(서독 11기, 캐나다 9기, 프랑스 12기와는 대조적입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국제원자력기구는 냉전체제 하에서 소련과 함께 핵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이사회의 인적구성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데, 35명으로 구성된 이사회는 핵 보유 강대국의 대표들에 의해 주로 자국의 원자력산업 및 핵무기관련부문에 종사하면서 핵기술을 가지고 있는 13개 나라의 영향력이 관철되도록 이 부문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인물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즉, 미국의 대표단은 미국의 원자력위원회 및 에너지부, 국방 및 정보부서를 대변하는 인물들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국제원자력기구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핵무기 보유국가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있고, 특히 핵기술확산에 관한 강경파들의 영향하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1970년에 발효된 핵확산금지조약(Non-Proliferation Treaty : NPT)은 미국과 소련이 자신의 핵무기 보유를 유지하면서 특히 제 3세계 국가들에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이를 근거로 국제원자력기구는 핵무기 비보유국에 대하여 안전협정(Safeguards Agreement)을 체결해야 하며, 핵무기 비보유국이 핵연료를 군사적으로 전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핵무기 비보유국의 핵물질 관리실태를 점검하고 현지에서 직접 사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약의 협상과정에서부터 이미 핵보유국의 핵군축의무가 명기되어 있지 않다는 것, 비핵보유국의 핵활동에 대한 사찰이 자주권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것, 비핵보유국의 안전보장에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 반대가 심했던 이 조약은 그 운용에 있어 핵강대국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 점에서 매우 편파적인 조약입니다. 즉, 핵무기보유국가들은 국제원자력기구의 핵사찰을 받지 않고, 다만 핵감축을 위해 노력한다는, 구체적인 구속성을 갖지 않는 약속만 있을 뿐입니다. 더욱이 비가입국에 대해서는 기술이전을 제한하고 있지만, 미국 등 핵보유국가들은 비가입국들, 이스라엘, 인도, 이집트, 남아프리카 등에 대한 핵시설 판매에 적극적이었습니다. 따라서 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한 비핵국가들은 사찰을 받는 불편과 불이익을 감수하였으나 비가입국에 비하여 하등 이득을 얻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점을 고려하면서 1994년 북한의 핵사찰과 현재 진행중인 이라크의 사찰을 본다면 핵확산금지조약의 적용과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강제할 수 있는 힘은 미국의 군사적 위협과 유엔 안보리에 의한 경제적 군사적 제재를 통한 압력에서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핵문제의 어제와 오늘 : 핵 개발에 대한 미국의 자의적 대응

살펴본대로 국제원자력기구의 활동과 핵확산 금지조약의 문제는 바로 미국의 군사력, 그리고 미국과 함께 핵무기를 독과점하고 있는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들의 기득권에 의해 보장되고, 미국의 세계전략에 부합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너무나 자의적으로 운용되어 왔습니다. 핵확산금지조약이 발효된 이후인 1974년 인도는 핵실험을 하였지만, 국제적인 제재는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례는 친미, 친서방 국가들의 핵무장에 대한 묵인, 또는 묵인을 넘어선 지원활동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1990년 핵무기를 폐기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우 미국과 독일, 이스라엘의 지원으로 핵무기를 개발하였습니다. 냉전체제 하에서 반미(친소)정권의 확산을 저지할 목적으로 이를 묵인한 것입니다. 또한 미국은 1979년 이스라엘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핵실험 성공을 인지하였지만, 이를 은폐하는데 노력하면서 당시 이란의 회교혁명에 따라 중동지역에서의 패권유지를 위한 이스라엘의 군사화를 목적으로 이스라엘의 핵무기개발을 묵인한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서남아시아에서 소련이 아프카니스탄에 군대를 파견하였고, 이 지역에서 인도의 영향력 제지라는 측면에서 파키스탄의 전략적 중요성이 증대되었고, 이러한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 때문에 1970년대 후반부터 진행되었던 파키스탄의 핵무기개발을 묵인하면서, 대규모 군사원조를 통해 실질적으로 뒷받침해주었던 것입니다.

한반도 정세와 관련하여 더욱 심각한 것은 그동안 일본에 영국이 1톤 이상의 플루토늄을 수출하였다는 것입니다(핵폭탄 100개 이상을 제조할 수 있는 양이며, 핵무기 제조에도 적합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일본은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잠재능력 보유를 자신의 정책으로 정했던 것도 밝혀졌고, 특히 미국이 이를 묵인하고 핵폭탄 제조에 필요한 플루토늄 정제기술을 수출한 것을 그린피스가 폭로한 바 있습니다. 미국의 이러한 지원은 미 에너지부가 인정한 사실입니다.



북한 핵카드의 진심은 무엇인가?

이렇듯 미국에 의해 패권적으로 운용되어 온 핵확산금지조약은 국제조약에 따른 보편적이고 상호주의적인 면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자국의 이해와 일치되는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일방적인 잣대만이 그 기준이었을 뿐입니다. 이러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94년 핵확산금지조약탈퇴라는 카드로 미국과 협상을 벌인 북한의 벼랑끝 외교의 본질은 대미관계개선을 통한 생존전략이었습니다. 생존전략은 두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대외관계 특히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한 경제난 해소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에 대한 핵위협 등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체제의 안정을 보장받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북한의 목적은 이번에도 유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에 의한 북한의 제재는 '적성국교역법(Trade with Enemy Act)'과 '수출관리법(Export Administration Act)'에 의한 법적 제재와 테러국가 지정에 따른 대북 제재와 미사일기술통제체제 위반국에 대한 제재조치들이 있습니다. 94년 제네바 합의를 통하여 법적 제재는 일부 완화되었지만, 아직도 금융과 무역에 있어 실질적인 혜택을 받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더욱이 북한은 작년 경제제도를 정비하고 경제특구를 지정하는 등 개방에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중삼중의 제재가 있는 한 아무리 북한이 개혁개방을 한다하더라도 국제사회의 금융지원이나 투자, 수출을 통한 경제성장은 불가능합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여, 현재 심각한 북한의 에너지 난입니다. 작년 북한을 방문했던 세계식량기구에 의하면 심각한 에너지 난으로 인하여 전체 공장의 20%만이 가동되고 있으며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에 의해 2003년 완공예정이었던 경수로가 1호기는 2008년 말, 2호기는 2009년 말에 완공예정(사업비의 70% 한국부담)이어서 에너지 난은 좀처럼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다음, 북한은 그동안 지속적으로 체제위협에 처한 것이 사실입니다. 비밀문서에서 해제된 한국전쟁관련 자료에서도 한국전쟁 당시 핵폭탄을 탑재한 폭격기의 훈련과 실제 운용의 검토 사실이 밝혀졌고, 미국의 '작전계획 5027'이 이전에는 주로 북한의 남침을 상정한 것이라면, 탈냉전이후 두러진 특징은 특히 98년도의 개정판에서는, 예방 전쟁의 개념을 도입한 '선제공격'을 채택하는 등 군사적 긴장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또한 작년 여름에는 부시 행정부가 마련한 선제공격 방안의 한 목표물로 북한의 대량살상무기를 상정하고, 남한 정부와의 사전 상의 없이 기습공격을 통해 북한의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하는 방안이 미 국방부에서 검토되었다는 것이 미 언론에 의해 확인되기도 하였습니다.

뿐만아니라 작년 부시행정부 하에서 미국 국방부가 의회에 제출한 '핵태세 보고서'(Nuclear Posture Review : NPR)는 기존의 전략을 수정하여 핵무기를 선제공격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언급하면서, 잠재적 공격 대상 국가로 북한을 비롯해 7개국을 거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선제 핵공격 최우선 목표 5개국에 북한이 포함되어 있고, "즉각적이고 잠재적이며, 예기치 못한 돌발 상태가 가능한 나라"로 북한을 지목하면서 핵 선제공격의 구체적 사례도 '북한의 남한 공격'이었습니다. 이렇듯 한반도는 미국의 선제핵공격의 0순위에 올라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작년 9월에 백악관이 발표한 '미국의 국가안전보장 전략'(The National Security Strategy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에서도 탈냉전 이후 미국에 대한 새로운 치명적인 도전은 북한을 비롯한 '깡패국가들(rogue states)'과 테러리스트들이라고 규정하고, 이들에 의한 적대적 행동을 방지하고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필요하다면 미국은 '선제행동(act preemptively)'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는 부시 행정부가 제네바 합의문에 명시된 북한에 대한 소극적 안전보장, 즉 핵무기 사용 및 사용 위협을 하지 않겠다는 소극적 안전보장을 사실상 철회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명백한 제네바 합의 위반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북한은 안전보장에 대한 요구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반도 평화, 한국과 주변국의 중재가 중요하다

물론 우리는 북한의 이번 조치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이미 표명한 바 있습니다( 참여연대 논평보기). 북한의 핵동결조치의 해제와 핵무기 개발에 대한 위협이 제네바 합의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북한 핵과 관련하여 제네바 합의 이외에 어떠한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 점에서 이번 북한의 조치는 한반도에 전쟁의 상황까지 배제할 수 없는 매우 심각한 불안을 유발하고 있습니다.

94년 클린턴의 전쟁승인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 걸려온 카터의 전화가 전쟁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북한의 해확산금지조약 탈퇴 사태 때 한국은 미국 강경파의 입장에서 북한 핵문제를 접근하였습니다. 그 결과 한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직전까지 갔던 아찔한 기억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행히도 이번 사태에 대해 북한과 미국 모두는 외교를 통하여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기를 희망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과 주변국들도 미국의 고압적인 입장보다는 보다 상호주의의 입장에서 해결에 접근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한국정부는 현재, 북한의 핵개발 선포기, 미국의 문서형식에 의한 안전보장을 받아내는 중재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정부가 유념해야할 것은 북한과 미국이 반드시 수용할 수 있는 중재안을 만들어야만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위기상황이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적대적 북미관계의 종식, 나아가 한반도에서의 평화정착, 냉전구조 해체라는 거시적인 안목 속에서 중재의 역할과 중재안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평화네트워크에 따르면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한국의 중재안은 몇가지 보충되어야 할 점이 있습니다 : 전문보기 ). 시민사회 역시 한국 정부의 중재가 올바르게 나아갈 수 있도록 내실있는 제안과 공론형성을 위해 발빠르게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21세기. 냉전의 구도는 더 이상 미래지향적일 수 없습니다. 낡은 방식과 사고를 벗어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할 때입니다. 그 발걸음의 중심에는 평화라는 보편적 가치가 핵심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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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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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__) 국제연대위원회에서 새해인사 드립니다.

올 한해 마음도 몸도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한해를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우연히도 뉴스레터가 나가는 수요일에 크리스마스와 1월 1일이 같이 있네요. 매주 꾸준히 인사드린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변치 않는 뉴스레터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미국의 일방주의와 군사주의로 얼룩진 한해

미국은 군사주의 노선을 강화하면서, 대량살상무기에 대비 선제공격의 가능성을 포함한 새로운 군사전략을 채택하였고, 엄청난 액수의 국방비를 증액하였으며, 미사일방어체제(Missile Defense)를 조기배치한다고 합니다. 이미 작년부터 알래스카에는 미사일방어체제를 위한 기지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소위 '악의 축'을 제거하기 위해 이라크를 목죄어 오고 있습니다. 언론에 의하면 1월말경 유엔 무기사찰단의 보고서가 완료되는 데로 이라크공격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다시금 무고한 희생이 벌어지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을 빌미로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살육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폭탄테러의 악순환은 계속되었구요. 작년 폭탄테러방지와 팔레스타인과 이집트간의 무기밀매를 막는다는 구실로 방어벽을 쌓기 시작하였는데, 이를 위해 라파난민촌이 무참히 파괴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200여명의 팔레스타인이 사망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한밤에 자행되는 이스라엘군인의 무차별 사격으로 이 지역의 병원에서는 2년간 2,200명의 총상환자를 수술했으며, 200여명이 사망하였습니다. 팔레스타인지역인 라말라지역의 봉쇄로 인하여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고, 이스라엘 지역에 일용노동을 하러 가는 팔레스타인들은 엄격한 출입제한과 검문으로 출퇴근만 12시간에 걸리고 있습니다(자세한 내용은 2월 18일 방송된 KBS 수요기획 2002년 팔레스타인 보고서 참조). 국제사면위원회에 의하면 2000년 9월에 발생한 가자지구와 서안지역에서 이스라엘의 점령에 대항하여 발생하였던 민중봉기(intifada)가 시작된 후 2년간 250명의 팔레스타인 아동과 72명의 이스라엘 어린이들이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이 어린이들이 이스라엘 탱크에 던지는 돌팔매질을 멈추고 맘껏 뛰어 놀며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세상은 언제나 올런지...

'테러와의 전쟁' 국면과 관련하여 우리나라의 국정원은 테러를 방지한다는 속임수로 테러방지법을 재정하려고 하여 작년 초까지 이에 대한 반대운동이 활발하였던 한해이기도 했습니다. 국가인권위에서도 인권침해의 소지가 다분하며, 기존의 법률체계에서도 충분히 테러에 대응할 수 있다고 권고한바 있었습니다.



연대와 내일을 다짐하는 기억들

1월에는 세계사회포럼이 열려 반세계화 행동을 위한 강력한 국제연대를 보여주었습니다. 세계사회포럼은 두 번의 성공적인 개최에 힘입어 올해도 개최될 예정입니다. 특히 지역별 사회포럼이 먼저 열려 지역의 다양한 이슈들을 지구촌 시민사회가 논의하고 함께 하는 과정을 진행한다고 합니다.

인권보호와 전쟁범죄에 대한 매우 획기적인 제도적 장치인 국제형사재판소 로마협약 발효되었습니다. 세계 최초의 상설 전쟁범죄재판소인 국제형사재판소(ICC) 설립에 관한 조약인 로마조약이 60개국의 비준을 받아 작년 7월 1일 공식 출범하였습니다(2002년 11월 28일 현재 84개국 비준).

이에 대해 미국은 자국민에 대한 `면책권'을 로마조약 협의과정에서부터 요구하면서 아직 비준을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고, 더욱이 비준국들과의 개별협상을 통하여 미군의 '면책특권'을 요구하는 작태를 보였습니다. 로마조약에 서명국인 한국도 작년 11월 8일 국회 본회의에서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조약 비준동의안이 통과되었습니다.(자세한 내용은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홈페이지 참조)

8월에 열렸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세계정상회의(World Summit on Sustainable Development : WSSD, 리우+10)는 본회의는 말잔치로만 끝났지만, 한국 민간위원회의 활발한 활동은 국제연대의 인식을 제고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2002년 3월 44개단체로 이루어진 '리우+10 한국민간위'를 구성해 지속가능발전정상회담을 준비해 왔는데, 한국 민간위원회의 정력적인 활동은 현지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고 합니다. 환경연합의 경우 새만금 갯벌 살리기 서명운동 및 행진을 하였고, 환경과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부시의 일방주의에 대한 규탄 시위 STOP! BUSH 집회 및 WSSD is DEAD라는 캠페인을 벌여 국제 언론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녹색연합의 경우 '해외 미군기지의 환경문제와 인권'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하는 것과 아울러 미군관련 사진 전시회를 개최하여 미군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압사사건과 2000년에 발생한 한강독극물 방류사건 등의 사례를 들어 미군기지 문제의 심각성과 불평등한 소파협정으로 인해 문제 해결이 어려움을 전세계에 알렸습니다.(환경연합 환경정보/국제연대자료 참조)

12월 방콕에서는 아시아 시민사회포럼(ACSF 2002)이 개최되었습니다. 유엔 협의자격 시민사회단체 협의회(CONGO : Conference of Nongovernmental Organizations)의 주최로 33개국 이상에서 2백여 개의 민간단체가 참여한 가운데 열린 이 행사는 유엔이 밀레니엄 총회에서 설정한 밀레니엄 발전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유엔의 개혁과 강화, 유엔과 시민사회단체들간의 파트너쉽 강화를 위한 모임이었습니다.

특히 이번 아시아 시민사회포럼은 전지구적 이슈들에 대하여 아시아지역의 공동대응과 유엔과 시민사회단체의 동반자관계를 강화하고자하는 첫 번째 지역포럼으로서 향후 유엔에서 시민사회단체의 위상강화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모임이었습니다. 결의문을 통해 포럼 참가자들은 아시아 각국 정부들에 △ 핵심적인 국제인권조약의 비준과 그에 따른 책임의 증진, △ 아시아지역에서 확장일로에 있는 군사주의를 후퇴시키고, 군사기지 주변에서의 인권과 환경의 보호를 보장할 것, △ 아시아 지역에서 인권을 침해하고 있는 국가보안법과 반테러 법령 및 정책의 개폐 등을 촉구하였습니다.

한편, 유엔은 작년에 리우+10회의 이외에도 개발을 위한 재정회의(International Conference on Financing for Development, 몬트레이, 멕시코, 3월), 고령화회의(Second World Assembly on Ageing, 마드리드, 4월), 유엔 아동총회(General Assembly Special Session on Children, 뉴욕, 5월), 세계 식량정상회의+5(World Food Summit: five years later, 로마, 6월) 등이 개최되었습니다. 올해에는 정보사회에 대한 세계정상회의(The World Summit on the Information Society: WSIS, 제네바, 12월)가 예정되어 있고, 이에 대한 아시아 지역 회의는 1월 일본에서 개최될 예정입니다(일본 준비홈페이지). 20세기가 산업사회라면 21세기는 정보사회라는 관점에서 정보, 통신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정치, 경제, 사회적 영향들에 대한 성찰을 시도합니다.

이렇듯 2002년에는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올해에도 많은 일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북한의 핵문제가 미궁에 빠져있는 상황하에서 원래 제네바 합의에 따른 경수로 건설완공 시점이 올해까지였고, 미사일 발사유예기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뉴스레터는 이미 작년에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올해 한반도에 위기상황이 도래할지도 모른다 경고한 바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북한과 미국이 싸우면, 우리가 나서서 막을 것"이라고 했습니다(정몽준씨에 의해 유명해진 말이죠). 어떠한 점에서도 한반도의 평화를 지킬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작년 참여연대의 정책검증에 의하면 평화와 안보분야에서 명확한 답변보다는 애매모하나 답변이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노무현대통령당선자 정책보기

또한 올해 3월부터는 도하개발의제(Doha Development Agenda)의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됩니다. 쌀시장 개방을 포함한 농업부문과 스크린쿼터를 포함한 서비스분야의 개방에 관한 협상이 어떻게 진행될지도 주목됩니다. 어느 해 보다도 모두의 지혜를 모은 슬기롭고, 신중한 결정이 필요할 때입니다. 시민사회의 어깨가 무거운 한해입니다.

양영미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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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국제연대위원회입니다. 크리스마스입니다. 혹시 산타클로스를 믿으세요? 혹시 SOFA(주한미군지위협정)개정을 선물로 달라고 기도한 사람은 없었는지요? ^^ 간절한 바램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지요. 역시 인간세상의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 행동으로 해결을 해야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뉴스레터는 광화문과 시청앞을 작은 촛불의 물결로 뒤덮어 버린 우리의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리고자 합니다.

광화문, 그리고 사이버 스케치

"세계에 우리의 의지를 다시 보여줍시다. 우린 광화문을 걸을 자격이 있는 대한민국의 주인들입니다. 피디수첩을 보면서 울었습니다. 그렇게 강경하게 싸운 그들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습니다. 죽은 이의 영혼은 반딧불이 된다고 합니다. 광화문을 우리의 영혼으로 채웁시다. 광화문에서 미선이 효순이와 함께 수천수만의 반딧불이 됩시다. 토요일. 일요일 6시. 우리 편안한 휴식을 반납합시다. 검은옷을 입고 촛불을 준비해주십시요. 집에서 나오면서부터 촛불을 켜주십시요. 누가 묻거든, 억울하게 죽은 우리 누이를 위로하러간다고 말씀해주십시요. 촛불을 들고 광화문을 걸읍시다. 6월의 그 기쁨 속에서 잊혀졌던 미선이 효순이를 추모합시다. 경찰이 막을까요? 그래도 걷겠습니다. 차라리 맞겠습니다. 우리는 폭력을 더 큰 폭력으로 갚는 저급한 미국인들이 아닙니다. 한분만 나오셔도 좋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미선이, 효순이가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대한민국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저 혼자라도 시작하겠습니다. 이번주, 다음주, 그다음주. 광화문을 우리의 촛불로 가득 채웁시다. 평화로 미국의 폭력을 꺼버립시다."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왔던 이 글이 급속도로 사이버에 퍼졌습니다. 메신저를 쓰는 사람들은 리본(▷◁,▶◀)을 시작으로 삼베(▦, ▩)를 달기 시작했습니다. 6월 그 뜨거운 응원에 묻혀, 어린 생명의 희생을 몰랐음에 부끄러워하며 그렇게 광화문에 다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컴퓨터 앞을 박차고 나온 네티즌, 직장을 마치고 온 직장인, 학교에서 바로 온 학생들... 세대를 넘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광화문으로, 시청으로 모였습니다. 처음으로 미대사관 앞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시위가 끝나면 스스로 쓰레기를 치우고 돌아갔습니다. 배우, 영화감독, 개그맨(우먼), 가수 등 문화계 인사뿐만 아니라, 불교, 천주교, 기독교 등 종교를 초월하였고, 카메라 기자들도 동참하였습니다.

"눈길 닿는 모든 곳이 곱고 작은 불꽃 천지다. ... 행여 곁에서 한목소리로 외치는 사람의 머리카락을 태울까 촛불을 높이 쳐든다. ... 이토록 평온한 시위를 본 적이 없다. ... 호호백발 할아버지께서 주머니 속 양초를 꺼내 미처 초를 준비하지 못한 젊은이에게 건네는 모습, 교복차림으로 시위에 참가해 묵묵히 대열을 따르던 고등학생, 코흘리개 아이를 무동 태우고 걸어가는 아버지, 어린 딸에게 이 시위의 의미에 대해 천천히 설명해주던 어머니. 그 모든 모습에 놀랐고 반가웠다."(오마이 뉴스)

한 고등학생은 "우리나라의 주체성은 어디로 갔는가? 맥도날드, 버거킹, 코카콜라 수많은 미국 다국적 기업에 점령된 우리나라가 이젠 우리 땅에서 우리 국민이 죽어도 한마디 항의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야 하겠는가? 어른들뿐만 아니라, 우리 고등학생들이 많이 참여해서 우리나라의 주체성이 살아 있다는 것은 확실히 보여줬으면 좋겠다."(오마이 뉴스)라며 광화문 시위에 함께 하였습니다. 추모시위는 비단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미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영국, 호주, 캐나다, 스웨덴, 일본 등 국외에서도 현지 동포들과 유학생을 중심으로 촛불시위가 열렸습니다.

이어 21일 미대사관을 둘러싸는 인간 띠잇기를 저지하는 경찰을 향해 한 청년은 "경찰여러분들께 부탁드립니다. 하룻밤 잠 못자는 한이 있어도, 얼차려를 받는 한이 있어도, 여러분들의 가족을 위해, 미래를 위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제발 저희들을 막지 마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여러분들은 국민을 가로막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미래를 막고 있습니다."라고 호소하였습니다.(시민의 신문) 이날 시위는 경찰의 과잉진압 속에서 부상자가 속출한 가운데서도 결국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미대사관을 잇는 띠를 만들어 우리의 뜻을 전달하고자 하였습니다.

사이버 상에도 추모의 열기가 달아올랐습니다. "유모차 끌고 온 부부들을 보면서 가슴이 따뜻해졌고... 초등학생과 함께 온 아저씨를 보면서 밝은 우리 조국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함성이 대한국민 모두의 가슴에 울렸습니다..."(▩ 미군장갑차 한국소녀 고 신효순, 심미선 살해사건 사이버 범국민대책위 게시판)

"싱가폴에 있어서 마음으로나마 응원합니다. 월드컵에서 보았듯 한사람 한사람이 뭉치면 큰힘이 되는걸. 우리는 이미 체험하였지 않았습니까. 모두 뭉칩시다. 우리의 자주권과 우리의 삶의 의미을 위해."(참여연대 서명게시판)

"이젠 우리도 대등한 한미 관계를 원합니다... 아무리 혈맹이라 하더라도 이 지구상의 경찰국가라 하더라도.. 인권을 넘어서는 그런 미국의 태도를 지켜보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당당하고 대등하게 이젠 그러한 관계를 만들어 가야하지 않을까요? 우리 한민족의 자주와 평화를 위해... 더나아가 전세계의 평화를 위해..."(참여연대 서명게시판)

시민의 신문에서 설치한 사이버 분향소에는 73,423명이 분향을 하였고, 참여연대의 서명판에도 40,859명이 서명을 하였습니다. 여기에도 추모글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의견과 심정을 개진했습니다. 그동안 촛불시위의 참가자들의 성금으로 한겨레신문에 광고를 내보냈고, 촛불시위 참가자들이 자발적으로 사이버 공간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미군 여중생 살해사건해결 서울모임)



아시아 연대의 목소리

이러한 자발적인 행동에 대해 아시아의 평화단체들도 적극적인 지지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새로운 대안을 위한 아시아 교류'(Asia Regional Exchange for New Alternative : arena)를 중심으로 일본, 파키스탄, 태국, 필리핀, 한국 등의 시민단체들이 모여 창설된 아시아평화네트워크(Asian Peace Alliance: APA)는 미국의 '반테러전쟁'과 아시아정부의 전쟁지원에 대한 중지와, 이슬람의 악마화 반대, 아시아의 평화와 안보를 대가로 미국의 패권적 통제를 강화하는 것을 반대하는 활동을 펼쳐온 단체로서 14일에 있었던 집회에 참가하여 연대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메시지를 통하여 "아시아평화연대는 신효순, 심미선 두 여중생에게 깊은 애도를 표하면서, 우리는 또한 한국이나 아시아 전역에서 미군 범죄에 의해 빈번하게 희생당한 수많은 무고한 민중들을 기억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 순간이 아시아에서 평화로 나아가는 데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간이라 보며, 남한 전역에서 퍼지고 있는 미군의 존재에 대한 강한 비판의 물결을 강력하게 지지한다."면서 "우리는 미국의 새로운 전쟁전략이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전역에서 확산되는 새로운 반미정서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이어 한국에서의 분위기에 대하여 "무고한 두 여중생의 영혼에 대한 연민인 동시에 워싱턴으로 인해 새로이 촉발된 위기에 대해 평화와 반군사주의를 향한 집단적 호소"라고 하면서 "우리는 아시아평화연대의 회원으로서, 또한 강대국의 전략적 이해 때문에 수많은 무고한 민중이 희생된 아시아의 시민으로서, 모든 평화를 사랑하는 시민과 평화운동 그룹들이 현재 지구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반전운동을 위해 함께 손을 잡을 것을 촉구"하였습니다.(전문 보기)

아시아평화연대-일본준비위원회(Asian Peace Alliance Japan) 연대성명

월든벨로의 집회 연설문(필리핀대학 교수, Focus on The Global South대표)



SOFA(Status of Forces Agreement), 일본과의 비교

일본과 미국사이에는 '일본국과 미합중국간의 상호협력 및 안전보장조약', '일본국과 미합중국간의 상호협력 및 안전보장조약 제6조에 기한 시설과 구역 및 일본국에 있어서의 합중국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 '동 협정의 합의의사록'이 모두 1960년에 체결되었습니다.

먼저 재판권 포기의 경우 재판권 포기를 요청하면 이에 대해 호의적인 고려를 하고, 포기에 관한 상호절차는 합동위원회가 결정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한미협정은 한국이 권리포기를 요청하면 이에 대해 호의적 고려를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미국 군당국의 요청이 있으면 대한민국 당국이 재판권을 행사함이 특히 중요하다고 결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재판권을 행사할 제1차적 권리를 포기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처럼 합동위원회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률적으로 도록 포기하게 되어있습니다. 또한 일본국 당국이 재판권을 행사할 제1차적 권리를 포기한 사건에 대한 재판은 일본국 당국 대표자의 입회가 가능하다는 점도 우리와 비교됩니다.

구금에 관한 사항에 있어 일본의 협정은 범인이 기소된 때에는 일본이 구금할 수 있고, 일본이 1차적인 재판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는 범죄의 피의자를 구금한 경우 구속할 정당한 이유와 필요가 있으면 계속 구금할 수 있게 되어 있는 반면, 한미협정은 한국이 체포하여 구금한 경우 요청이 있으면 미군에 인도해야 합니다(우리나라의 수사과정에서 미군피의자를 구금한 예가 전혀 없었습니다. 따라서 피의자의 수사에 심각한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형사재판권의 적용범위의 경우 일본의 협정은 군속과 그 가족이 일본의 법에 의해 처벌할 수 있는 범죄에 대하여 재판권을 가지고 있지만, 한국의 한미협정은 미군의 구성원, 군속 및 가족들에 대하여 형사재판권 및 징계권을 미군이 가지고 있어 그 범위가 너무 넓습니다.



한해를 마무리하며 새 대통령에게 바란다

SOFA개정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자 정부는 개선안을 발표했으나 매우 불충분합니다. △ 초동수사과정에서 한국 경찰의 공동 현장접근 및 조사 허용, △ 미군 범죄발생시 미 정부대표의 1시간내 출석, △ 미군 픠의자의 신병인도 후 한국 수사기관의 출석요구에 적극 협조, △ 수사상 필요한 경우 관련자료의 상호제공, △ 미군 피의자의 초상권 보호 등 합의사항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 합의안은 이미 기존 SOFA에 있는 내용으로 크게 새로울 것이 없고, 무엇보다도 강제력이 없고, 주요 사항의 개정이 아닌 운영상의 개선인 점에서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하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당선자는 선거운동기간 중에 여중생 사망사건 범국민대책위원회로부터 SOFA개정 촉구 및 부시 미국 대통령 직접 사과를 요구하는 서명요구에 대해, 서명은 거부하였지만 "우선 당장이라도 SOFA 운용 과정에서 주권국가로서 실효성있는 운용이 되도록 고쳐야 하고, 차후 제도 자체의 개정을 추진해야 하며 우리 국민의 요구를 받아들여 부시 대통령이 직접 사과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적절하다"며 "앞으로 대통령이 되면 이 문제에 관해 좀더 단호하게 변화된 한미관계에 맞도록 SOFA 개정 등 의존적 관계를 대등한 관계로 변화시키도록 노력할 것"이라며"국민 자존심이 손상되지 않도록 한미 관계를 풀어갈 것이며 필요하다면 미국 대통령도 만나고 설득할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 노무현 대통령당선자도 원하는 세상이라 했습니다. 거짓말하지 않는 대통령, 책임지는 대통령, 우리가 바라는 대통령입니다. 광화문을 수놓았던 수만의 촛불, 반디불을 상징하는 그 촛불의 바램이 헛되지 않기를, 오늘 크리스마스날 기원해봅니다.

한해가 저물어 갑니다. 올해 우리는 참으로 많은 일들을 겪었습니다. '광장의 문화'를 만든 붉은 물결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국민경선제라는 새로운 정치실험과 희망의 돼지저금통 등 참여의 정치문화를 만들면서 고비마다 항상 국민으로부터 심판을 받은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였습니다. 이라크 공격이 내년 1월로 예정된 상황에서 북한의 핵문제로 인하여 다시금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여전히 어려운 취업, 쌀시장 개방을 앞두고 성난 농민의 울분을 기억합니다. 여러분들은 올 한해, 어떤 기억들이 떠오르시는지요? 다사다난했던 한해의 기억을 잘 정리하시고, 희망의 새해를 계획을 세우시길 기원합니다. 1월 1일 새해에 찾아 뵙겠습니다.

국제연대위원회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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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국제연대위원회입니다. 국민의 올바른 선택이 앞으로 우리나라의 운명을 5년간 좌우할 것입니다. 이제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습니다. 깐깐한 유권자의 꼼꼼한 선택! 여러분 한분한분의 선택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번 호에는 지난주에 이어 예산감시운동 중 지방자치의 차원에서 주민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제도들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지방에서의 주민참여형태

현재 각 국가별로 시행되고 있는 주민참여제도에는 크게 주민투표제, 주민소환(recall), 주민발안(initiative)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나라에는 아직 도입되지 않은 제도인 주민소환(recall)은 해직청구라고도 하는데, 선거에 의해 선출된 공직자에 대해 일정수 이상의 주민이 해직을 청구하고 단체장 및 의원들의 경우 대체로 주민투표를 통해 해직여부를 의결하며, 여타 하위직 공무원의 경우 의회에서 의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본은 지방의회의 해산청구, 의원의 해직청구, 지방자치단체장의 해직청구, 주요 공무원의 해직청구 등의 주민소환권을 인정하고 있고, 미국에서는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에서 주민소환제도를 두고 있습니다. 미국 샌디애고시의 경우 모든 공직자는 취임 6개월이 지나면 주민소환의 대상이 될 수 있는데, 주민소환은 선거구 유권자의 유권자 15%이상의 동의를 얻어 시의회에 청원하면 소환투표를 실시하는데, 이때 후임자 후보에 대한 투표를 동시에 하여, 소환찬성이 과반수 이상이면 후임자 후보중에서 다수득표자가 그 직을 승계하도록 되어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지방자치법에서 채택하고 있는 '주민투표제(referendum)'는 '선택적, 자문적' 성격의 주민투표로서 지방정부가 주민들의 의견을 파악하는 정도의 규정력을 갖습니다. 따라서 의회해산, 단체장 소환 등 지방정부의 주요 권력과 관련된 상항은 주민투표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보다 적극적 참여민주주의가 되려면 미국에서 채택하고 있는 것과 같이 자치정부의 주요 재정변화와 관련된 문제에서부터 의회해산, 의원 및 단체장 탄핵 등 정부권력의 핵심문제와 관련된 것을 투표대상으로 포함하는 강제적, 의무적 성격의 주민투표제를 채택하여야 할 것입니다. 일본의 경우 니가타현 마키정(町)에서 주민투표를 통해 원자력발전소 건설계획을 철회시킨 성공사례가 있습니다. 마키정의 경우에는 주민투표 이외에도 조례제정청구, 지방자치단체장에 대한 해직청구 등 각종 직접민주주의 제도가 총동원되었는데, 주민들의 조례제개정청구에 의해 '마키정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관한 주민투표조례'가 제정되었고, 단체장의 소극적 자세에 대하여 주민소환을 시도하여 단체장의 사임을 받았으며, 새 단체장 하에서 실시된 주민투표를 통하여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철회시켰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민발안(initiative)을 들 수 있는데, 일정한 수의 유권자 서명에 의해 지방정부의 조례의 제정 및 개폐에 대해 주민들이 직접 발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종적으로 주민투표를 통해 결정되는 경우를 주민발안이라 부르나, 우리나라의 '주민조례청원권'처럼 주민이 발안하되 지방의회에서 의결하는 청원(petition)적 성격의 것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이 조례청원이 유일하게 승소한 사례로 청주시 '행정정보공개조례' 제정운동이 있습니다. 1991년 청주시의원 30명이 '행정정보공개 조례'를 발의하고, 공청회 등을 통한 여론수렴을 거쳐 의원만장일치로 의결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청주시는 1992년 대법원에 '정보공개 조례' 취소소송을 제기하였지만 대법원은 청주시의 사무에 관한 정보만을 공개대상으로 하고 있어 주민의 알권리를 위한 지방자치단체의 조례권 행사를 국가의 입법이 미비하다는 이유로 가로막을 수 없다고 판결하였습니다. 오늘은 국내에서 실시되고 있는 주민발안의 형태인 주민감사청구제도와 이와 유사한 일본의 시민옴부즈만제도, 부패방지를 위한 제도인 청렴계약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일본의 주민감사청구제도와 시민 옴부즈만 운동

주민감사청구제도는 주민이 직접 지방공공단체의 장 혹은 직원이 저지른 위법 또는 부당한 공금의 지출, 재산의 취득, 계약의 체결에 대해 감사위원의 감사를 요구하고, 위법, 부당한 행위를 방지하며, 지방공공단체가 입은 손해를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을 청구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이 제도는 주민이 지방공공단체에 대해, 지방공공단체를 대신하여 소송을 하는 것이 가능하며 한사람의 주민이 소송을 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중립적이라고 하는 감사위원(일본의 감사위원은 지방자치단체장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독립기관입니다) 조차도 부패나 공금유용에 대해서는 무력하기 짝이 없다는 현실 속에서 시민이 직접 세금이 부정하게 사용되는 것을 막자는 시민옴부즈맨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시민 옴부즈만 운동은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조례로 시민옴부즈맨제도를 두고 있지만, 대다수의 경우에 시민 옴부즈만은 시민운동의 차원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1994년 출범한 전국시민옴부즈만 연락회의는 주로 '관관접대'(지방자치단체가 중앙부처나 상급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을 접대하는 것)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식량비'에 대해 전국적인 정보공개청구를 하였습니다. 1995년 정보공개청구의 결과 전국적인 식량비 총액은 300억엔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었고, 그 중 압도적인 부분이 관관접대에 사용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러한 관관접대에 대한 근절을 연락회의는 요구하였고, 몇몇 지자체에서 관관접대를 전면폐지하겠다고 발표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또한 전국시민옴부즈만연락회의는 매년 식량비, 교제비, 관급공사 입찰가, 출장여비 등에 관한 정보공개청구를 하여 세금이 부정하게 사용되지 않도록 감시활동을 하고 있으며, 비리가 드러났는데도, 지방자치단체가 예산환수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에는 주민소송을 제기하여 책임을 물었습니다.(주민소송은 지난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집행에 위법이 있을 경우에는 주민이 지방자치단체를 대신해서 지방자치단체에 피해를 입힌 공무원이나 사인(私人)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서울시, 군포시 등에서 실시하고 있는데, 군포시의 경우 감사청구위원회가 결정한 사항에 대하여 감사여부를 시장이 다시 '결정'하도록 하고 있어 그 실효성에 의문이 많고, 감사청구인의 숫자가 너무 많아 전국적으로 단 17건만이 청구되었습니다. 최근에 이러한 지적에 따라 주민감사청구 요건을 완화하여 2백명 선으로 줄였지만, 실질적인 주민자치와 주민참여를 위해서는 일본의 경우처럼 단 한명이라도 청구할 수 있도록 해야하겠습니다.



청렴계약제도(Integrity Pact)

청렴계약제란 독일 베를린에 본부를 둔 국제투명성기구(TI : Transparency International)가 90년대의 중반에 개발한 부패척결제도입니다. 1994년 에콰도르에서 정부조달의 대규모의 사회간접자본관련 수주에서 25∼30%정도의 뇌물이 오가고 있는 것에 대해 방지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국제투명성기구는 파견단을 보냈습니다. 국제투명성기구는 조사를 통하여 많은 사업가들이 뇌물을 제공하고 싶지 않지만 제공을 중단하면 다른 경쟁업체가 뇌물로 자신의 사업기회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여 뇌물이 끊이지 않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판단하여, 계약자(낙찰자)가 뇌물공여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과 모든 커미션과 계약에 관련된 모든 금전지급사항을 공개할 것이라는 선서를 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계약을 취소하고 블랙리스트에 올려 입찰을 금지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델은 부패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던 파나마, 아르헨티나(멘도자)에 적용되었고, 독일, 아르헨티나(부에노스아이레스), 콜롬비아, 네팔 등으로 확산되면서 '청렴계약제(Integrity Pact)'로 발전되었고, 한국에서는 서울시와 참여연대가 공동으로 2000년부터 '청렴계약제'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청렴계약제란 행정기관이 발주하는 사업의 입찰, 계약체결, 계약이행과정에서 업체와 행정기관 양당사자가 뇌물을 주고받지 않고 위반시 제재를 받겠다는 약속을 이행함으로써 공공부문 계약과 관련한 부패를 예방하고자 하는 제도입니다. 특히 서울시의 경우 입찰과 계약, 그리고 이행과정에 시민단체가 추천한 인사가 청렴계약 옴부즈맨으로 위촉되어 행정절차과정을 감시케 함으로서 행정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확보한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실제로 2001년 2기 청렴계약 옴부즈만을 참여연대, 반부패국민연대가 참가하여 구성하였습니다.

서울시의 경우 2000년부터 청렴계약제를 통해 서울시와 각 자치구의 모든 관급공사에 적용되고 있으며 특히 서울시의 50억원이상 공사와 10억원 이상의 설계 및 감리, 2억원 이상의 물품구매 사업에 대해서는 청렴계약 옴부즈만이 집중감시대상사업을 설정하여 이에 대해 집중 감시하고 있습니다. 청렴계약 옴부즈만은 청렴계약 관련사업 서류열람 및 제출을 요구, 부조리 관련사항 시정 및 감사요구, 3단계 평가회 주관 등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청렴계약제를 위반했을 때 가해지는 제재조치로는 그 사안별로 6개월에서부터 2년까지 서울시 입찰참가자격을 제한하거나, 계약해지, 공정거래위원회 고발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서울시의 청렴계약제에 대해서 그 긍정적인 면에도 불구하고 보여주기식 행정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습니다. 청렴계약제의 성공적 정착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내부제보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현행 청렴계약제는 이에 대한 규정이 미흡한 실정입니다. 현행 규정에 의하면 '내부비리자의 보호에 대한 의무'를 규정하지 못하고 있으며, 더욱이 서울시의 경우에는 내부비리제보 공무원의 보호에 대한 아무런 규정이 없는 실정입니다. 공익제보자에 대한 보상도 서울특별시 부조리신고 보상금지급에 관한 조례에서 부조리신고 대상별로 각각 10만원, 30만원, 100만원의 보상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한 규정이외에는 없습니다. 따라서 업체는 물론 서울시에 대해서도 공익제보자에게 인사상의 불이익을 금지하고, 공익제보에 따른 보상금 지급을 위한 조례개정이 필요하겠습니다.

공공부문 계약과 관련한 부패는 공직자의 윤리성 문제로 끝나지 않고, 성수대교 붕괴처럼 대형참사로 이어져 인명피해와 정부예산의 낭비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사전 방지대책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부정부패를 막기 위한 청렴계약제는 계약과정을 투명하게 하고 부패를 줄이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청렴계약제나 주민감사청구제도는 제도적 한계로 인하여 크게 실효성을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행정기관에서는 앞다투어 이러한 제도의 실시를 홍보하고 있는데, 홍보를 위한 제도가 아닌 실질적인 주민참여를 이룩할 수 있도록 제도와 법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관련사이트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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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국제연대위원회입니다. 미국의 무시하는 듯한 태도와 SOFA개정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와 요구가 높습니다. 미군장갑차 여중생 고 신효순, 심미선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에서는 대국민 행동지침을 마련하고 서울은 지난주에 이어 토요일(14일) 3시에 시청앞에서 범국민대회를 개최할 예정입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가 필요할 때입니다. 참여연대는 온라인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도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온라인 서명운동 참가하기). 이번 호에는 지난주에 이어 예산감시운동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예산감시운동의 필요성

우리나라에서 예산낭비의 사례들은 불행히도 아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새만금 간척사업과 같이 타당성없는 사업을 타당성있는 것으로 조작한 사업이나, 수익성도 없는 환경박람회를 186억을 들여 무리하게 개최했다가 대규모 적자가 난 하남환경박람회 등과 같은 사례들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만성화된 예산낭비로 관급 공사계약시나 민간위탁계약시에 계약금액을 부풀림으로써 예산을 과다하게 지급받는 사례들도 있고, 예산집행을 최종적으로 책임지거나 감시해야 할 지방자치체장이나 지방의원, 국회의원들의 예산낭비 사례로 관행화된 낭비성 해외연수, 지방자치단체장들의 판공비 낭비, 전직 국회의원들에 대해 대한민국 헌정회를 통해 변칙적으로 월 60만원의 연금을 지급하는 사례 등등 국민의 혈세가 마구 새나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가 예산감시운동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러한 예산낭비의 근절과 같이 '돈의 절약'차원을 포함하여 책임 추궁과 함께, 납세자가 자신의 세금으로 진행되어지는 정책과 사업을 판단하고 시정을 요구하며, 제도개혁을 통하여 실질적인 예산통제권을 확보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산감시운동은 특히 지역차원에서 활용할 수 있는 길이 많이 있는 운동이라 하겠습니다. 지방정부는 예산과 사업의 규모가 지역단체들이 감시하기에 적당하고, 그 내용이 주민들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지방정부 차원의 다양한 예산감시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산감시운동의 주된 경향을 보면 행정부와 의회감시를 통한 예산편성 분석과 비판, 예산감시운동의 법제화와 제도 개혁, 예산편성과 집행에 대한 시민참여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투명성 확보를 위한 행정부 및 의회감시

중앙정부 및 지방정부의 예산분석과 모니터를 통하여 결산이나 차년도 예산(안)을 분석하고, 정책과제를 제시하고, 지방정부의 판공비, 민간단체보조금 등 경상비를 주된 분석 대상으로 하여 예산낭비 실태를 밝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예산안 분석 등에 필요한 정보공개청구운동이 가장 먼저 꼽을 수 있습니다. 지난 6월29일 '판공비 공개운동 전국 네트워크'가 발족하여 지방자치단체장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낭비성 경비인 판공비에 대한 정보공개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지난해 11월 5일 인천지방법원이 인천시내 구청장의 판공비 사용내역이 공개되어야 한다고 판결하였고, 올해 6월 16일에도 서울행정법원이 서울시장의 판공비 사용내역이 공개되어야 한다는 취지와 판결을 내리는 등 성과도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국정감사 모니터링을 시민사회단체가 실시하였던 국회 예산안 심의 감시활동이 있습니다. 올해 국회 예산안 심의에 대하여 경제정의실천연합은 타당성이 결여된 60개 사업 8,576억 5,300만원 삭감조정을 요구하였고, 함께 하는 시민행동은 건설교통위원회와 같이 정부원안보다 1조원 정도를 증대시키는 등 정부원안보다 약 4조 2천억원을 증액한 2003년도 예산안의 국회 심의에 대하여 잘못된 사업예산을 삭감한 후 필요한 사업에 예산을 적절히 편성하지 않은 채, 납세자의 부담을 여전히 고려하지 않는 증액일변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이와 더불어 시민단체의 예산감시운동은 납세자이자 정부 예산 지출의 수혜자인 시민의 입장에서 예산의 투입과 산출, 그 성과를 분석하는 지표를 '성(gender)인지적 예산', '지속 가능한 환경예산' 등 각 영역의 내용을 구체화하는 지표로 만들어 예산의 과정을 감시하는 운동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재정운영의 책임성 확보를 위한 법제화와 제도 개혁

정책결정과 집행에서 발생하는 심각한 정도의 예산낭비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책임을 지는 경우는 거의 없고, 설령 예산낭비를 알게 되어도 불법, 부정한 행위가 아니면 책임을 물을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고, 예산낭비 방지 및 공익제보자 보호, 공익제보를 통한 부정방지를 위한 납세자 소송법 제정운동이나 부패방지법 재정 등 법제화와 제도개혁을 위한 운동이 있습니다. 더욱 세부적으로는 최저가 낙찰제로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는 운동, 의회의원 공무 국내외 출장에 관한 조례, 시금고 운영에 관한 조례, 행정정보 공개조례 등이 있습니다.

납세자 소송이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이 위법하게 사용된 경우에 이를 환수할 수 있는 소송 제기권을 납세자에게 부여하는 제도로서 지난주에 살펴본 미국의 큐탬제도이며, 일본도 지방자치법에 '주민소송'이라는 이름으로 납세자 소송제도를 두고 있습니다.

일본의 주민소송 제도는 1948년 지방자치법 개정시 미국의 납세자소송을 모델로 하여 도입되었는데, 보통 주민감사청구를 거쳐도 지방자치단체의 위법한 재무행위가 시정되지 않을 경우에 행위의 금지나 취소, 무효확인, 손해배상, 부당이득의 반환 등을 주민들이 직접 청구할 수 있는 소송제도입니다. 이러한 일본의 소송제도를 통하여 최근에 가와구치시가 자치회장회의에서 지출한 홍보민원비가 실제로는 접대성으로 지출되었다고 하여 손해배상을 명한 판결이 있었고, 1989년에 나고야시에서 개최된 세계디자인 박람회의 시설, 비품을 주최자인 세계디자인 박람회 협회로부터 나고야시가 구입한 것에 대해 '적자를 감추기 위한 것으로, 가치도 없고 필요도 없는 물건을 구입하여, 시에 손해를 입혔다'고 하여, 시민이 당시 시장을 상대로 낸 주민소송에서 약 10억3천6백만엔의 손해배상청구를 인정한 판결도 있었습니다.

지방의원 등의 시찰 연수여행이 오로지 골프플레이의 유흥 목적으로 계획, 실시된 것으로 시찰 연수의 실체를 갖지 않는 위법한 것이라고 판결한 사례, 토지개발 공사와 오사카시와의 사이에서 상당액을 초과한 가격으로 토지 매매계약의 체결 및 매매대금의 지출을 한 것의 금지 청구가 인정된 사례 등 우리나라와 아주 유사한 유형들의 예산낭비를 소송을 통해 방지, 또는 회수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성과주의 예산제도 역시 이러한 움직임과 가까운데, 예산집행 결과, 어떤 산출물을 생산했고 어떤 성과를 냈는가 측정해 이를 기초로 책임을 묻거나 보상을 하는 결과중심의 예산체계입니다. 하지만 서울시가 그동안 실시한 성과주의 예산제는 예산 편성과 집행을 항목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평가의 근거를 마련하여 재정 합리화에 일정한 진전을 이루었으나, 그 전반적 내용은 양적 효율성과 평가에 편중되어 있으며 항목 자체의 타당성은 문제삼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산 편성에 시민이 직접 참여하여 이러한 항목들을 조정해야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예산편성과 집행과정에 대한 시민참여

예산감시운동은 시민의 참여를 바탕으로 행정부나 집행부의 예산 편성과정에 개입하거나 예산집행과정을 모니터 하는 것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사회복지 예산에 대한 시민예산합의회의, 예산시민위원회를 바탕으로 한 참여예산제도나 건설사업 예산감시운동이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민주노동당이 지난 지방선거시 제시했던 예산 참여운동의 한 형태인 참여예산제도는 세계사회포럼의 개최도시로 잘 알려진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10여 년간 실시해온 제도를 수용한 것입니다.

브라질 노동당은 1988년 지방선거에서 다수의 시정부를 장악하게 되자 참여예산제를 이듬해부터 실시하였습니다. 몇 개의 기관으로 구성된 예산참여기구를 두고 있는 참여예산제는 세계에서 많은 주목을 받아 현재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아르헨티나의 호자리오, 우루과이의 몽떼비데오, 프랑스의 쌍뜨데니스, 캐나다의 토론토, 벨기에의 브뤼셀 등의 지역에서 이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포르투 알레그레의 참여예산제는 지역별 총회 및 의제별 총회, 대의원 포럼, 평의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6개 지역에서 6개 의제별로 2차에 걸쳐 총회가 열리는데, 총회의 목표는 ▲ 지역 및 의제별 요구 수렴, ▲ 대의원(참석자 10명당 1명의 비율)과 평의원 선출, ▲ 집행부에 대한 평가입니다. 대의원들은 평의회와 시민 사이의 매개하여 요구의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예산의 집행을 감시하며, 평의원들은 요구의 우선순위와 자원의 배분을 총괄하는 일반기준을 결정하고 집행부가 제출한 투자계획을 심의합니다.

1차 총회와 2차 총회 사이인 5월과 6월에 대의원과 조정관으로 구성되는 '중재회의'가 개최되어 각 풀뿌리 조직들의 요구들에 대하여 대의원들이 공식적으로 우선순위를 부여하게 됩니다. 6월과 7월에 지역별·의제별 제2차 총회가 개최되어 각 지역과 부문별로 두 명의 평의원과 두 명의 예비 평의원을 선출하는데 평의원은 1년의 임기로 선출되어 재선까지 가능하고, 과반수 참석에 3분의 2의 찬성으로 지역 혹은 의제별 대의원 포럼에 소환될 수 있습니다. 평의원들은 자치단체의 재정을 파악하고, 자원 배분을 위한 일반기준(우선순위, 사회간접자본 및 서비스의 부족도, 지역의 총인구)을 논의하고, 8월과 9월에 평의회는 모든 세입과 세출 항목을 논의하며 9월부터 12월까지 평의회는 우선권이 부여된 사업의 세부계획을 논의하면서, 동시에 평의회는 의회에서 진행되는 예산안에 대한 논쟁을 모니터하고 의원을 개별적으로 만남으로써 혹은 의사당 밖에서 대규모 집회를 하기 위해 지역과 부문을 동원함으로써 의회에 압력을 가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예산감시운동의 필요성과 그 유형들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정리하자면 시민이 정부지출을 감시할 수 있는 정보획득 수단으로서의 정보공개청구제도, 정부지출의 적법성과 타당성이 의심되는 경우에 독립적 감사기구에 감사청구를 할 수 있는 시민감사청구제도, 위법행위로 인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등이 입게 될 손해의 예방과 확산방지, 손해의 회복을 위해 시민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납세자소송 제도, 공익제보를 한 시민을 보호하는 공익제보자 보호제도, 그리고 직접 예산편성과 집행에 참여하는 참여예산제도 등이 예산감시운동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재정적자에 허덕이는 지방정부차원에서도 합리적인 예산 편성과 집행은 필수적입니다. 나아가 납세자가 참여하는 예산감시운동은 참여민주주의를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방법임에는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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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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