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의 관심과 지원이 그들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군사정권이 무고한 시민들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더 나은 미래와 민주주의를 원한다.”

- 시위에 참가하는 버마 시민의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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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의 반(反)정부 민주화 시위에 군사정권이 발포를 동원한 폭력진압으로 맞서며 유혈사태가 빠르게 격화되고 있습니다. 스님과 학생, 일반 시민까지 가세한 시위는 거대한 민주화 항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군정은 소요상황이 해외로 전해지며 국제사회의 지탄이 높아지자 현지 언론을 봉쇄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럼에도 군정의 유혈 폭력을 목도한 버마 국민들은 양곤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상황을 각종 매체를 통해 외부로 전하며 도움을 간절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버마의 민주화를 지원해 주세요!

최대도시인 양곤의 한 주민은 "27일 시위 군중들은 군인들에게 '당신들의 임무는 시민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며 항의하고 있지만 군인들은 총을 쏘고 최루탄을 터뜨리며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사이라는 이름의 한 시민은 도심 여행자호텔 앞에서 "2천여명의 군중이 평화시위를 벌이고 있었으나 군인들은 스님들에게 머리를 숙일 것을 강요하며 곤봉으로 때렸다"고 말했습니다.

와이라는 시민은 양곤 거리에서 많은 시체들을 목격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군경이 총격을 가해 많은 시민들을 죽여 놓고 이러한 비인간적 행위를 감추기 위해 시체를 치우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또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무고한 구경꾼들마저 총을 맞고 쓰러지고 있다며 비명을 질렀습니다.

많은 운전기사들은 다친 스님들을 병원으로 실어날랐다고 전했습니다. 한 목격자는 "군정이 더러운 전술을 쓰고 있다면서 총을 쏘는 대신 총 개머리판으로 사람들을 무차별로 때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 시민은 “우리는 무기를 갖고 있지 않으며 평화를 바란다”면서 “더 나은 미래와 민주주의를 바라는 만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군정에 압력을 가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 현재 군정은 인터넷과 전화를 통제하며 국제사회의 비난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버마 민주화를 위한 Free Burma Campaign에 참여해주세요.

○ 버마 정부군의 무차별한 시위 진압으로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버마 민주화 운동 유혈 탄압의 중단을 촉구하는 서명 운동에 동참해 주십시오.

○ 버마국민들의 민주화운동에 쓰일 돈을 모금하고 있습니다. 모금운동에 함께 해주십시오. 우리들의 작은 정성이 버마 민주화를 위하여 귀중하게 쓰일 것입니다.

버마 민중학살 규탄과 민주화 지지 긴급행동 블로그http://cafe.naver.com/freebur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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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의 역사] 군부독재에 신음하는 버마

동남아시아에 위치한 버마는 1948년에 영국 식민통치에서 독립했지만 1962년 쿠데타 발발 이후 일당 사회주의국가가 되었습니다.

쿠데타 발생 이후 정권을 잡은 군부는 그들이 원하는 민주국가를 표방하고 총선거 실시를 약속하고 승리한 정당에 정권을 이양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1990년 5월 27일 총선을 실시했고, 아웅산 수지 여사가 이끄는 버마민족민주동맹(NLD)이 82%이상의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UN을 비롯한 국제사회도 합법적인 총선거 결과를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군부는 총선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아직까지 정권을 장악하고 군부독재체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버마 문제의 근원입니다.

[버마의 현실] 이것이 버마의 일상입니다

1988년 버마 민중들의 총궐기를 총칼로 진압한 군부 정권은 국제 사회의 여론을 호도하고 정권의 정당성을 세우고자 나라 이름 버마를 ‘미얀마’로 강제 개명하였습니다. 현재 버마에는 교육, 의료, 도로, 전기, 수도 등 모든 공공서비스가 붕괴된 상태이며, 어린이와 여성, 노약자 등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시민들이 군부의 일상적인 인권 유린 앞에 놓여 있습니다.

1996년 군부는 학생들의 시위를 이유로 전국의 대학을 폐쇄하였으며, 1988년부터 1999년 사이에 보건 관련 예산을 5%에서 2.7%로 삭감해 심각한 건강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국방예산은 최근 예산의 60%에 달해 민중들의 고혈을 짜낸 대가로 철저한 병영국가를 만들어 왔습니다.

버마에서는 최소한의 정치적 의사표현만 해도 정부로부터 불법 체포와 감금을 당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정치범의 숫자만 해도 1천 3백 여 명에 이르고 있으나, 이도 추정치일 뿐이며 그 누구도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체포되는 사람도 학생, 정당인, 소수 민족단체 활동가, 예술가, 승려 등 매우 다양합니다.

또 버마의 여성들은 강간과 인신매매의 위협 앞에 일상적으로 노출돼 있는데, 2002년 샨 여성행동네트워크는 샨 주 한 곳에서만 173건의 강간을 집계했습니다. 물론 실제 숫자는 이보다 많을 것입니다. 같은 보고에 의하면 그 중 61%가 집단강간이고, 83%는 군의 고위 장교가 가담했으며 강간을 당한 여성 중 28%는 살해되었습니다. 가해자에 처벌이 가해진 것은 단 한건에 불과했습니다.

또한 버마 군부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소년병을 운용하고 있습니다. 소년병들의 대부분은 강제 징집됐으며, 주로 18세 미만의 아이들이지만 8살이나 11살의 어린이들도 많습니다.

강제노동도 매우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주로 소수민족 주민들이 군의 무기 운반이나 지뢰 제거 작업 등에 동원되고 있으며, 1992년부터 4년 동안에만 최소 2백 만여 명이 강제노동에 동원되었습니다.

버마와 한국 정부

비민주적 군사정권이 통치하고 있는 버마에 한국의 대우 인터내셔널이 버마 국민들이 원하지 않는 ‘쉐 가스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있을 뿐 아니라, 부도덕하고 반인권적인 ‘불법무기제조기술’을 수출하며 군부정권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소위 ‘민주주의 국가’이고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나라이며 아시아 민주화의 모범국가인 한국이 독재정권을 지원하는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요?

군부에게 무기는 국가방어차원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권 장악을 위해 국민들을 언제든지 죽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대우인터내셔널은 총부리를 국민들에게 겨누는 현재 지구상 가장 악랄한 군사정권을 돕는 것만이 아니라 민주화를 염원하고 한국인의 지원을 기대하는 버마인들의 간절한 소망을 짓밟는 잔인하고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한류의 확산으로 한국문화를 사랑하게 된 버마인들을 생각하고, 머지않은 미래에 실현될 민주국가 버마와의 새로운 관계를 위해 지금부터라도 버마정책을 재검토하고 진지한 배려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한국의 김대중 전 대통령도 최근 민주주의 지도자인 아웅산 수지 여사의 연금조치에 항의하는 국제적 노력에 동참하기 위해 버마 방문 비자를 신청했습니다. 그러나 서울의 버마 대사관은 이 국제적 운동이 다른 나라의 버마 국내문제에 대한 간섭이라며 비자신청을 거부했습니다. 반기문 UN사무총장 역시 1월 8일 버마 군부정권에 아웅산 수지 여사를 포함하여 버마 내 모든 정치범을 석방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버마의 민주화는 버마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시아의 민주화와 인류의 존엄성을 확보하는 길이고, 아시아의 평화와 직결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인들이 성숙한 민주시민으로서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하며 비인간적 삶을 강요하는 버마 군부에 대항하는 민주화 운동에 대한 지지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버마 민중학살 규탄과 민주화 지지 긴급행동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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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민주주의, 희망을 만드는 여정



8월 8일로 18주년이 되는 버마 8888 민주항쟁을 기념하는 행사로 국내 11 인권시민사회단체들이 8월 11일 저녁 7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장에서 버마 민주화운동가 초청 간담회를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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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자 살라인 여아웅(Salai Yaw Aung)씨는 8888민주항쟁 당시 학생운동 지도자로 전버마학생전선(All Burma Students Democratic Front) 활동가이자 국경지역의 민중 건강과교육위원회 초대 사무총장을 역임하였다. 여아웅씨는 버마 야당 NLD 국회의원이던 아버지가 1991년 적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 군부에 납치돼 갖은 고문과 고초를 겪다 옥중사 한 경험을 갖고 있다.

간담회를 통해 버마 8888 민주항쟁과 현재까지 생생한 민주화 투쟁 상황, 군부독재로 핍박받는 난민과 아동에 대한 심각한 인권침해 문제를 나누며 민주주의의 가치를 되새기고 국제연대를 모색할 수 있었다.

간담회 후 아웅산 수치의 얼굴이 그려진 펼침막에 참가자들이 연대의 글을 적어 여아웅씨에게 전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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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연대위원회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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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국제연대위원회입니다. 아민 말루프의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이란 책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써있습니다 "아랍세계는 십자군 전쟁을 먼 옛날에 벌어진 단순한 에피소드로만은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아랍인들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부당한 침범을 느끼고 있다."

지난주에 한국정치연구회 주관으로 열린 긴급 토론회에서 기조발제를 하신 리영희선생님은 이번 침략전쟁은 현 조지 W. 부시대통령의 아버지인 전 부시대통령 때부터 추구한 신세계질서전략의 실험이며 "아랍세계가 이번 전쟁으로 굴욕 당하고 비참한 자기모멸과 무기력을 느낀 아랍인들이 두고두고 미국을 적대시할 것"을 우려하면서 "이라크전이 거의 일방적으로 끝나 과거 12,3세기에 걸쳐 유럽의 기독교가 소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랍세계를 침략하고 대량살상과 약탈을 일삼았던 십자군 전쟁이 앞으로 미국 단독으로 거침없이 진행될 것"으로 진단하셨습니다. 그리고 현재 미국의 세계전략의 중심에는 중국에 대한 봉쇄와 견제가 있는데, 이를 위해 일본이 군사대국화할 것이며, 한반도에는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이 조성되며 이 난관을 넘어가기 위해서 국제적 통찰력이 필요한 시대가 왔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미국의 이라크침략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침략의 명분인 대량살상무기의 존재여부, 전후복구와 북핵문제에 많은 관심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역사적 안목과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오늘은 분쟁시리즈를 마감하면서 분쟁지역서 국제사회의 구호활동을 알아보겠습니다.

분쟁의 재앙 : 난민

우리는 지금까지 12번의 분쟁시리즈를 통하여 지구상에tj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고통받는지를 보았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살펴본 지역보다도 훨씬 많은 곳에서 전쟁과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분쟁의 원인은 매우 다양하며 역사적으로 복잡했습니다. 식민지 독립과정에서 과거 멋대로 그어진 국경은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상이한 다양한 종족과 종교간의 갈등을 불러일으켰고, 특히 식민통치과정에서 종족차별에 따른 타종족에 대한 배타성과 소외감은 르완다와 소말리아, 부룬디와 같은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좀처럼 쉽게 아물지 않는 갈등의 골이 패였습니다. 독립 이후 국가건설과정에서 벌어진 권력투쟁과 소수민족들의 자결에 대한 희구 또한 분쟁의 원인이었으며, 카슈미르와 스리랑카에서처럼 종교적 갈등도 쉽사리 해소되지 않는 반목을 일으켰습니다. 필리핀 민다나오 지역과 인도네시아의 아체 지역과 같은 빈곤과 빈부격차, 지역적 소외감에서 비롯된 분쟁들이 있었으며, 냉전체제 하에서 수많은 독재정권과 사회주의정권들은 소수민족의 인권을 무자비하게 유린했습니다.

분쟁이 발생하게 되면,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수많은 사상자와 이를 피해 국경을 넘는 난민들, 그리고 국내 유랑민들(internally displaced peoples)이 생겨납니다. 1951년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Convention Relating to the Status of Refugees)에 따르면, 난민이란 "인종, 종교, 국적, 정치적 견해, 특정 사회 단체 참여 등의 이유로 인한 박해의 공포를 피해 조국을 떠난 후, 귀환하지 못하거나 귀환하려 하지 않는 사람"을 뜻합니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에 의하면 2002년 1월에 집계된 지구촌의 난민은 19,783,100명이었습니다. 아시아 8,820,700명, 유럽 4,855,400명, 아프리카 4,173,500명, 북아메리카 1,086,800명, 라틴아메리카 및 카리비안지역이 765,400명, 오세아니아 지역이 81,300명이었습니다. 총 천9백만명 중에서 1천2백만명의 순수난민들(61%)과 940,800명의 피난처 희망자들(asylum seekers)(5%), 그리고 462,700명의 귀향 난민들(3%), 5백3십만명의 국내 유랑민들(25%), 241,000명의 귀향 국내유량민들(1%), 마지막으로 백만명의 관심대상자들(people 'of concern')(5%)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이중 여성의 비율이 45-55%를 차지하고 있으며, 유엔난민고등판무관의 보호아래 18세 이하의 어린이들이 7백7십만명이었습니다.

발칸지역을 제외한 유럽에서의 난민인구는 상당부분 아프리카지역에서 건너온 점을 감안한다면 아프리카지역이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난민이 발생한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대량의 난민과 국내유랑민이 발생한 지역은 부룬디(553,900명), 수단(489.300명), 앙골라(470,500명), 소말리아(440,200명), 콩고민주공화국(391,800명), 에리트리아(333,100명), 라이베리아(244,600명), 시에라 레온(179,000명), 르완다(105,700명), 에디오피아(58900명)의 순으로 밝혀졌습니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이 제시한 난민의 통계에는 국내유랑민들과 피난처 희망자들(asylum seekers)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과거 국가간의 전쟁으로 난민이 발생한 것과는 달리 198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증가한 국내에서의 분쟁들로 인하여 국내유량민들이 눈에 띤 증가현상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국제 국내유랑민계획(Global IDP:Internally Displaced peoples Project)에 의하면 2002년 한해동안 3백만명의 국내유량민들이 분쟁지역에서 발생하였는데, 아프가니스탄, 부룬디, 콜롬비아, 콩고, 콩고민주공화국, 라이베리아, 필리핀, 수단, 우간다와 같은 오랜 분쟁지역에서도 수천명의 새로운 국내유랑민들이 발생하였습니다.

한가지 고무적인 현상은 몇몇 지역에서 많은 수의 난민들이 집으로 돌아갔는데, 에리트리아(백만명), 보스니아(80,000명), 부룬디 국내유량민들(42,000명), 아프리카 난민들(267,000명)과 마케도니아(160,000명)에서 귀향이 이루어졌고, 무국적자(stateless persons)가 700,000명 감소하였습니다. 그러나 파키스탄의 2백2십만명과 이란의 백9십만명과 독일의 988,500명은 여전히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 곳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생존을 넘어 희망의 씨앗 심기 : 나눔의 손을 내밀자

국제사회에서는 이들에 대한 구호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쳐왔습니다. 유엔은 그 창립이래로 난민에 대한 구호사업이 핵심 역할 중에 하나였는데, 유엔에서는 산하 특별기구별로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였습니다. 난민구호와 재정착에 필요한 각종 지원과 관계되어있는 특별기구로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유엔아동기금(UNICEF), 유엔개발계획 (UNDP), 세계식량계획(WFP), 세계보건기구(WHO)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권고등판무관실(UNHCHR)과 인권문제조정협력실(OCHA: UN Office for the Coordination of Humanitarian Affairs)도 분쟁지역에서 야기되는 인권침해상황에 대해 관여하고 있으며, 유엔지뢰행동(UN Mine Action)은 분쟁지역에서의 지뢰제거작업과 지역주민들에 대한 교육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유엔의 활동은 민간단체들과의 협력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인도적 구호에 나서는 지구촌의 민간단체들은 아프리카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는 등 이들은 분쟁지역에서 목숨을 걸고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단체들로는 국제적십자(International Committee of the Red Cross), CARE, World Vision, 국경없는 의사회(Medecins sans frontieres), Save the Children, OXFAM 등이 있습니다.

국제적십자 : 1859년에 시작된 국제적십자운동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광범위하며 조직화된 국제 구호단체입니다(국제적십자는 1949년 제네바 협약으로 국제법상의 지위와 권한을 가지고 있어 일반 비정부기구(NGO)들과는 다른 독특한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2001년 국제적십자의 연간보고서에 의하면, 160,000건의 수술이 적십자의 도움으로 이루어졌고, 580,000명의 인원이 식량을 포함한 생필품을 제공받았고, 전쟁 및 분쟁지역에서 2백5십만명이 적십자의 물 공급프로그램으로 직접 혜택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콩고민주공화국, 수단, 우간다, 부룬디 등 아프리카지역과 북부 코카서스지방에서는 구호활동의 안전에 심각한 위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기적인 구호활동을 펼치는 지역으로 이라크, 콜럼비아, 스리랑카, 수단을 포함한 아프리카 대호수지역이 있었고, 마케도니아를 제외한 발칸지역과 앙골라, 타지키스탄 동티모르는 정국이 안정되면서 활동을 줄였지만, 서아프리카와 네팔, 버마에서는 구호활동을 더욱 증가하였습니다.

옥스팜(OXFAM) : 1941년 나치가 그리스를 점령하고 국경을 봉쇄하자 이로 인하여 발생한 난민들을 돕기 위해 영국의 옥스퍼드 기아구호위원회(Oxford Committee for Famine Relief)를 중심으로 한 긴급구호활동이 옥스팜의 시초였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한국전쟁에서도 난민보호와 기아문제에 개입하였고, 최근에는 코소보분쟁 이전부터 코소보지역에서 식수와 위생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였고, 나토의 공습이후에는 긴급구호활동을 벌였습니다. 또한 동티모르, 르완다의 난민구호, 이란, 이라크, 터키 지역의 쿠르드족 구호활동에 유엔기구들과 파트너로 참여하였습니다. 특히 옥스팜은 소총과 같은 소형경무기의 국제거래 금지를 위한 캠페인을 벌여 장기적인 면에서 분쟁의 감소와 평화만들기의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CARE INTERNATIONAL : 오스트레일리아, 브라질, 캐나다, 덴마크, 독일,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노르웨이, 일본, 미국에 걸쳐 단체가 있는 CARE는 2차대전 직후에 창설되었습니다. 1946년 미국에서 영국인들에 대한 식량 및 의류지원을 하면서 시작되었고, 그 후에는 주로 개발도상국의 기아현장과 난민캠프 등지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점차 그 활동영역을 넓혀 도시 빈민지역의 종합개발, 고용, 보건, 식수 및 위생, 커뮤니티 건설 등 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월드비젼(World Vision) : 1950년 한국전쟁의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창설된 단체로, 그 이후에 12개국에 지부를 두어 순수 민간차원의 모금에 의한 인도적 구호활동을 하였습니다. 초기에는 단순한 물자공급 중심의 구호활동이 많았으나, 구호활동과 함께 점차 지속가능한 지역사회 개발에 초점을 두는 개발사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한국월드비전의 경우 국내 지역사회복지사업뿐만 아니라, 북한에 채소농장과 국수공장경영 등 개발 사업과 아프가니스탄 난민지원사업들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국경없는 의사회(Medecins sans frontieres) : 1968년 나이지리아 내전에 파견된 프랑스 적십자사 소속 베르나르 쿠시네(Bernard Kouchner)를 비롯한 의사와 언론인 12명이 전쟁·기아·질병·자연재해 등으로 고통받는 세계 각 지역의 주민들을 구호하기 위하여 설립한 국제 민간의료구호단체입니다. 매년 3,000명 이상의 자원봉사자들이 전세계 80여 국가에서 모여 인종·종교·정치적 신념을 떠나 차별없는 구호활동을 벌여 왔습니다. 1972년 지진이 발생한 니카라과에 들어가 구호활동을 벌인 것을 시초로 1975년 베트남전쟁에서도 구호활동을 벌였고, 지난 1990년 걸프전쟁 때는 60대의 전세기를 타고 현장으로 날아가 7개소의 난민 캠프를 설치하여 7만여명의 난민을 구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르완다, 소말리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나이지리아, 콩고, 에티오피아, 코소보, 동티모르 등의 분쟁지역과 지진과 홍수 등 자연재해지역에서의 의료활동을 벌여 1999년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Save the Children : 1932년 미국의 아팔래치아 광부 아이들을 위한 활동이 계기가 되어 2차 대전 당시에도 유럽 8개국 난민아동과 지역사회를 돕는 활동을 하였으며 아동의 보건, 영양, 식수, 위생 프로그램의 개발과 운영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단체입니다.

이외에도 국경없는 기자회(Reporters sans frontieres)는 분쟁지역에서의 정확한 사실보도를 위해 죽음을 무릅쓴 취재를 하기도하는데, 이번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에서도 9명의 사망gkrh 2명이 실종되었습니다. 한국에서도 한국이웃사랑회는 르완다 분쟁과 아프가니스탄 난민지역에서 의료지원 사업을 펼치기도 하였으며, 나와우리는 버마 NLD(National League for Demcracy) 한국지부회원들에 대한 후원모임을 가지고 있으며, 지구촌 나눔운동 은 베트남, 몽골, 필리핀, 캄보디아, 중국 등지에서 빈곤문제 해결을 위한 개발 및 보건의료사업과 난민, 피해자에 대한 구호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처럼 국제사회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분쟁지역 난민과 주민들에게는 하루하루의 생명을 이어가는 생명수를 얻기도 하고, 지뢰로 부상을 입은 아이들이 치료를 받으며,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에게는 그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쉼터를 함께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사는 이들에게 나눔의 손을 내미는 것이야말로 따뜻한 인류애입니다.

자, 이제 우리가 손을 내밉시다!

관련사이트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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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국제연대위원회입니다. 최근 태국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마약과의 전쟁'에서 144명이 피살되고 6천 900여명이 체포되었다는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피살자 중 경찰의 체포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은 정작 8명뿐이며, 나머지는 마약밀매조직이 정보 누출을 막기 위해 조직원끼리 서로 살해하여 사망자수가 늘어난 것입니다.

태국은 버마 및 라오스와의 접경지역인 세계 최대 마약생산지 황금삼각지(버마영토)에서 버마 소수민족인 통일와족군(UWSA : United Wa State Army)이 생산하는 마약이 유입되어 전체인구 6천200만중 300만명 이상이 마약을 복용하는 등 마약이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황금삼각지에서 재배되는 마약은 버마 정부가 자신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와족의 마약 재배 및 유통을 허용하는 정치적 거래에 따른 것입니다. 태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무차별 인명피해의 우려뿐만 아니라 버마의 민주화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은 스리랑카의 분쟁입니다.

뿌리깊은 민족갈등

현재 총인구(약 1,000만) 중 스리랑카 주민의 70%를 차지하는 신할라족(Shinhala)은 인도 아리아 민족의 계통에 속한 민족으로서, 기원전 6세기경에 인도 북부로부터 건너와 선주민(先住民)을 정복하고 왕국을 이룩하였고 기원전 3세기에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를 수용하여 깊은 '실론 불교'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스리랑카 인구의 20%(약 200만명)를 차지하는 타밀족(Tamil)은 남인도의 드라비다계통의 민족으로, 기원전 1세기경 남부 인도에서 이주하여 정착을 한 스리랑카 타밀인과 이후 영국식민시대에 영국자본에 의해 플랜테이션 노동자로 이주된 인도 타밀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타밀족의 대부분은 육체노동에 종사하고 있으며 스리랑카 사회의 최하층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타밀족은 종교는 힌두교를 주로 믿고, 타밀어를 사용하여 신할라족과 인종·언어·문화면에 걸쳐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서구의 식민지 쟁탈시기에는 해상무역의 요충지인 실론섬은 제국주의국가들의 쟁탈이 거듭되어 처음에는 포르투갈(1505-1658)이 점령하였다가, 이후 네델란드(1658-1779)로, 마지막엔 인도에 진출한 영국에 의해 1815년에는 마지막 신할라 왕조가 멸망하면서 영연방에 합병되었습니다. 2차 대전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배국가들이 그러하듯 독립요구가 거세지자 영국은 1948년 독립을 인정하였지만, 영국의 지배력은 상당히 남아 있었으며, 총독의 임명권도 영국 국왕이 보유하고 있다가 이후 1972년에 국명을 실론(Ceylon)에서 스리랑카 공화국으로 개칭하고 영국연방에서 완전 독립국이 되었고, 1978년에 현재의 국명인 스리랑카 민주사회주의 공화국(Democratic Socialist Republic of Sri Lanka)으로 되었습니다.



20년 민족분쟁 시작 : 차이에 의한 차별

신할라족과 타밀족 간의 역사적으로 뿌리깊은 차이는 서구문명이 실론섬에 상륙하기 전에는 그리 심각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서구 문명 특히 공격적인 카톨릭인들로부터 고통받고, 식민정책에 의한 착취 등은 이들 두 집단이 민족주의를 자각하여 급진적 민족주의로 발전하게 하였고, 인도의 독립운동과정에서 부흥했던 민족주의도 여기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두 민족간의 본격적 갈등은 1949년 정부가 신할라인만을 국민으로 인정, 타밀인의 선거권을 박탈하는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습니다. 1958년에는 타밀인의 첫 폭동이 발생하였는데, 이는 타밀족에 대한 토지소유권 박탈에 이어 신할라 민족주의세력인 스리랑카 자유당이 불교계세력과 손잡고 신할라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삼는 정책을 취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1960년의 총선거 이후에는 인도계 타밀인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함으로써 민족대립을 해소하려고 하였지만, 경제악화로 1965년에 내각이 무너지고 친서구적 성격의 통일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우파세력의 연립내각이 성립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타밀족은 분리운동을 추진하게 됩니다. 타밀족의 분리투쟁이 본격화된 것은 1983년 7월 이후로, 타밀족의 거주지역인 자프나(Jaffna)반도에서 정부군이 살해되자 이를 계기로 신할라족의 타밀족 대학살(약 1천명)이 전국적으로 발생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같은 해에 타밀일람해방호랑이(LTTE : 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라는 반군이 결성되었습니다. 타밀족 반군은 자신의 점령지역에서 세금을 거두었으며, 인도 동남부 타밀 나두주(인구 5천만) 및 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해상 전투력도 보유하였으며, 인도, 파키스탄, 중국 등의 외국무기는 정부군과 반군 양측에 제공되면서 분쟁은 2002년 2월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타밀족 반군은 해외거주 타밀족 단체의 후원, 무기 밀수입을 통하여 전력을 유지하였지만, 20년이 넘게 지속된 분쟁으로 병력증원에 힘이 들자 17세 이하의 소년병까지 징집하였습니다(2001년 소년병 징집은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정부 또한 반군을 압도하기 위해, 러시아, 이스라엘, 파키스탄, 우크라이나 등으로부터 다량의 신형 무기를 도입하고, 정부군 증가계획발표와 정부군을 파견하여 미군 특수부대의 교육을 받는 등 군사력 증강을 계속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분쟁으로 인하여 1983년부터 2002년까지 이 지역에서는 8만명 이상이 사망하였고, 약 160만 이상의 난민과 강제이주민이 발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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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협상의 과정

내전 종식을 위한 노력은 노르웨이의 적극적인 중재와 함께 1999년 취임한 찬드리카 쿠마라퉁가(Chandrika Bandaranaike Kumaratunga) 대통령이 분쟁종식 추진을 발표하면서부터 물꼬가 트이기 시작하였습니다. 2000년 7월 스리랑카 정부와 야당은 타밀주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연방국가 창설 계획에 합의하였고, 2001년 11월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의 지도자 벨루필라이 프라브하카란( V. Prabhakaran)은 독립 국가 창설 목표의 철회방침을 밝히면서 자치회담의 개최를 정부에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스리랑카 정부도 유화조치를 취해 2002년 1월 타밀반군이 장악하고 있는 정글지대인 와니지역에 대해 지난 1994년부터 취해온 경제제재조치를 해제하고 북부해역의 어로제한조치도 완화하였습니다.

이러한 유화분위기 속에서 2002년 2월 스리랑카 정부와 타밀 반군은 항구적 휴전협정을 조인하여 노르웨이주도의 국제감시단을 받아들이고, 상대지역에 대한 왕래를 단계적으로 확대하기로 하였습니다. 이후 2002년 6월 스리랑카 정부는 그동안 타밀엘람해방호랑이에 가해졌던 불법단체규정을 해제하였고, 2002년 9월 평화협상을 시작하여 국토 재건을 위한 공동개발위원회를 설치하고 위원회에 소수 이슬람 교도들을 위한 의석을 배정하는 데 합의한 뒤, 인종문제해결을 위한 소위원회 설치와 황폐화된 북부 및 동부지역의 복구와 인권문제를 다룰 위원회, 난민들의 재정착문제를 다룰 위원회 등 주요 위원회 설립에 대해 합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2002년 11월 스리랑카 반군은 향후 민주적 정치체제에 참여하고 기존 정당들의 반군지역 활동을 허용하겠다고 발표하여 실질적인 내전 종식의 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2003년 2월 7일에 이틀간 베를린 주재 노르웨이 대사관에서 스리랑카 정부와 타밀반군간의 회담이 열려 인권관련 사안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국제사면위원회 사무총장에게 인권이슈들에 대한 개선의지를 담은 합의문을 요청하는데 양측 모두 동의하였습니다. 여기에는 3월 일본에서 열릴 6차 회담의 토론을 위한 초안으로서 인권감시에 대한 효과적인 체계, 스리랑카 정부 관료와 타밀반군의 간부들에 대한 교육, 경찰과 교도관들에 대한 교육, 평화협상을 통한 지속적인 인권사항 체크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타밀반군은 유니세프(UNICEF)와 함께 소년병 징집의 중단을 위한 행동계획을 세울 것을 합의하였습니다. 현지 언론에 의하면 실제로 타밀반군은 이러한 계획을 발표한 직후 350명의 소년병을 부모와 보호자들에게 인도하는 기관에 보냈습니다. 또한 이번 회의를 통해 스리랑카 정부와 타밀반군측은 모두 북부와 동부지역 주민과 난민들의 인권보호와 재정착을 위한 국제사회의 즉각적인 원조와 도움을 다시한번 촉구하였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하여

현재 정부군과 반군에 의해 난민과 강제이주민으로 전락한 사람들 중 23만명 이상이 2002년 휴전이후 귀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 앞에는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데, 재산강탈, 물의 부족, 위생시설과 공중보건 등이 그것입니다. 더욱이 이들 귀향자들은 대부분 농부나 어부, 농업노동자들이거나 미숙련 노동자들이어서 그들의 삶을 다시 시작하려면 강력한 지원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지구 강제이주민 프로젝트 (Global IDP ; internally displaced people Project)에 따르면 반군점령지역의 비 타밀족(non-Tamils) 12만 5천여명과 정부의 절대안전(high security)지역의 5만여 타밀족들은 귀향 이전에 보호시설이 시급하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정부가 운영하는 구호시설의 사람들이 이들 중 제일 심각한 상태입니다. 정부와 타밀반군의 대규모 귀향자들을 위한 시설조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적절한 보호와 지원이 되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또한 타밀반군 점령지역의 신할라족 주민들은 그들이 돌아가기 전에 안전보장을 원하며 돌아가지 않고 있고, 게다가 타밀족 역시 상황이 개선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편, 이들의 귀향길 역시 매우 위험한데 그것은 바로 지뢰 때문입니다. 국제 지뢰금지 캠페인(ICBL : International Campaign to Ban Landmines)이 발표한 '2002년 지뢰연례 감시보고서'에 따르면 휴전협정 이후 지뢰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타밀반군측이 매설한 지뢰는 정확히 확인되지도 않아 2001년 5월 한달동안 33명이 사망하고, 41명이 부상당하였습니다. 정부군 역시 방어선을 따라 광범위하게 지뢰를 매설하여 북부지방과 동부지방에 매설된 대인지뢰가 가장 심각한 분쟁후유증을 남기고 있는데, 자프나(Jaffna)지역의 경우 도시와 시골 구분없이, 도로, 상수원, 농경지 등에 광범위하게 매설되어 있고, 심지어 반군에 의해 새로 만들어진 정착촌지역에도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20년간 지속된 분쟁은 이제 서서히 종식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수많은 난민은 열악한 환경에서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재 스리랑카에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과 인권위원회, 유니세프가 각 영역에서 사업을 벌이고 있고, 1986년부터 '국경없는 의사회'(Medecins Sans Frontiers)가 의료활동을 해왔으며, 국제 적십자, OXFAM Campaign 등 많은 국제 NGO들이 구호사업을 하고 있지만, 그들에겐 모든 것이 부족합니다. 넘치는 것이 있다면 자신의 삶에 대한 불안함일 것입니다. 이들을 향해 내미는 작은 손. 그 어느 손보다 아름다울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그들이 자신의 땅에서 안전한 삶을 누릴 때 비로소 실현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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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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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지구촌 시민사회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드디어 월드컵이 개막을 하였습니다. 온 국민이 축구를 매개로 하나가 되어 응원하는 모습! 보기만 해도 흥겨운 일입니다. 하지만, 고개를 약간 옆으로만 돌린다면 우리가 즐기는 월드컵이 그리 곱게 만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FIFA와 초국적 기업

FIFA는 월드컵 기간에 사용되는 스포츠 용품은 FIFA와 계약을 맺은 초국적 기업이 생산하고 있습니다. 주로 파키스탄, 인도, 스리랑카 등에서 생산되는 이들 용품은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노동권을 보호받지 못한 상태에서 생산되고 있습니다. 특히 더욱 심각한 것은 수만은 아동들이 축구공 한 개당 100원에서 150원의 돈을 받으며 하루종일 손으로 축구공을 꿰매고 있다는 것입니다 (ILO에서는 이미 1973년부터 14세 이하 아동노동을 전면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아동노동과 스포츠 산업의 노동조건에 대해서는 시민사회의 지속적인 지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지난 1998년 이후 FIFA는 FIFA와 기업 간 계약시 윤리강령을 포함시켰습니다. FIFA 라이센싱 용품을 생산하는 기업은 아동노동을 이용하지 않는 것을 증명해야 하고, 생산과정을 독립적인 감독관이 감사하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이행해야 합니다.



노동하는 아이들

그러나 이러한 계약조건에도 불구하고 아동노동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성인 노동자 역시 노동권에 대한 보장이 지켜지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아동노동 반대를 위한 세계행진'(Global March Against Child Labour)의 보고서는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파키스탄의 시알코트 지역(현재 1년에 약 3500만개의 축구공 생산지역)에 대한 보고서에서 글로벌 마치는 2002 월드컵 주요 후원자인 코카콜라와 아디다스가 아동노동을 시킨 사실을 지적하였습니다.

대부분 가내수공 형태의 비등록 사업장에서 축구공 생산에 이용된 아이들은(적게는 5∼6세부터 10대 중반까지) "어떨 때는 하루에 14시간 동안 똑같은 자세로 앉아 무릎사이에 가죽 조각을 고정시킨 채 조각을 꿰매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노동환경 역시 열악하여 "어두운 방에서 오랫동안 집중하여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시력에 문제가 생기고 있으며, 바늘에 찔리거나 손과 손가락이 상처를 입거나 구멍이 나고 실을 잡아 다녀야 하기 때문에 새끼손가락이 비틀어지고 등의 통증을 느끼고 있으며", 또한 "축구공을 완성해서 갖다주어야만 돈을 받을 수 있어, 성인과 아동 모두 안정적인 수입을 얻지 못하고, 따라서 최저생계비를 벌기 위하여 가족 전체가 축구공 만드는 일에 매달리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드러났습니다.



희망 잃은 노동자

노동환경과 노동권이 보장되지 못하고, 인권이 침해되는 경우는 성인 노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27일부터 '노동자, 아동노동착취 월드컵 후원 초국적 기업반대 공동행동'이 개최한 캠페인 및 공개토론회에 따르면, 스포츠용품 초국적 기업의 하청기업으로 동남아에 진출해 있는 한국기업들이 현지 노동자들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기업운영을 하고 있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한국 기업들은 노동자 부당해고, 강제노동, 임금체불을 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화장실 가는 시간도 제한하는 등 인권침해와 횡포가 심각한 상황입니다(이날 토론회에 참가한 해외단체들은 초국적 기업의 부당행위를 감시하기 위해서는 자국내 해외진출기업들의 감시활동을 꾸준히 하고, 전 아시아 연대를 통해 이러한 기업들에 대한 압력을 행사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지구촌... 우리는 하나?

이처럼 만들어진 축구공으로 하는 경기를 보면서 우리는 즐기고 있습니다. 물론 스포츠를 즐기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즐거움은 지구 저편 '고사리 손'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음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그들과 우리가 인간이기에 다르지 않음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들과 같이 즐거울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FIFA는 스스로가 자신의 라이센싱 상품에 아동노동을 금지한 약속을 보다 성실하게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 월드컵이 세계인의 축제가 되는 길일 것입니다.

관련싸이트

국제민주연대 홈페이지

CCC (Clean Clothes Campaign) 홈페이지

아동노동 반대를 위한 세계행진 홈페이지

양영미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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