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인권의 역사적 시험대,

무니르 독살 형사소송의 ‘마지막 비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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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전 인도네시아 국가정보원(BNI) 부원장 묵디 뿌르워쁘란조노(Muchdi Purwoprandjono)
오른쪽: 인권변호사 무니르 사이드 탈립(Munir Said Thalib)

지난 4월 5일에 자카르타의 대검찰청 앞에서 인도네시아 청년들이 구속도 두렵지 않다며 천막을 치고 철야시위를 벌였다. 검찰에 대한 그들의 요구사항은 인권변호사 무니르 사이드 탈립(Munir Said Thalib)의 독살 배후 용의자인 전 국가정보원(BIN) 부원장 묵디 뿌르워쁘란조노(Muchdi Purwoprandjono)에 대한 마지막 법적 행동을 조속히 취하라는 것이었다. ‘용맹’과 ‘총명’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 무니르는 노동운동, 국가폭력반대운동, 과거사청산운동, 안보기관개혁운동에 헌신함으로써 수하르토 독재의 몰락과 민주주의 진전에 기여하였고, 꼰뜨라스(Kontras)와 임빠르샬(Imparsial) 같은 선명한 주창형 운동단체를 조직적 유산으로 남겨 인도네시아 최고의 인권운동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런데 2004년에 9월 7일에 암스테르담행 인도네시아 국영항공기 안에서 사망하였고, 네덜란드당국의 부검결과 그 사인이 치사량을 훨씬 웃도는 독극물 섭취로 밝혀졌다.

서른아홉 해의 삶이 이렇게 마감된 뒤 6년이 넘도록 인도네시아 시민사회단체들은 국제적 관심과 지지를 받으며 살인자들을 찾아 처벌해줄 것을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진상규명활동과 추모활동을 전개하는 한편으로 법적 경로도 밟아왔는데,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성과도 있었다. 독극물을 음료에 투입했다는 조종사 뽈리까르뿌스 쁘리얀또(Pollycarpus Priyanto)가 우여곡절 끝에 대법원 재심의까지 거쳐 20년형을 언도받고 반둥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를 보안요원으로 항공기에 탑승토록 허용하는 공문을 위조하여 발송한 세 명의 국영항공사 직원들도 실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올해 2월에는 국영항공사가 무니르 유족에게 우리 돈 4억원 이상을 보상해야 된다는 대법원 판결도 얻어냈다. 최고의 법률적 승부는 독살의 공범이자 배후에 대한 형사소송이었다. 심증이 가는 여러 권력자들 중에서 증거가 발견된 묵디 한 명만을 대상으로 삼은 소송이었지만, 역시 만만치 않았다.

검찰은 사건 전후에 묵디와 뽈리 간 41건의 휴대폰 통화기록을 핵심 증거로 제시하였지만, 2008년 12월 31일 남부자카르타지방법원은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묵디에게 무죄를 선고하였고, 대법원도 2009년 6월에 묵디의 손을 들어주었다. 적지 않은 수의 증인들이 불출석한 파행 재판이었고, ‘애국자’ 묵디를 위한 ‘어깨들’의 위협적인 지지시위도 있었다. 판사들이 매수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고, 소송을 이끌었던 시나가(Cirus Sinaga) 검사는 광범한 부패사건의 연루자로 조사를 받는 처지가 되었다. 새로운 증거를 제시해야만 법률적으로 마지막 단계인 대법원 재심의를 요청할 수 있기에, 묵디의 법적 단죄는 무산되고 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무니르의 유족과 동료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경찰이 묵디의 혐의를 입증할 새로운 증거들을 확보하고 있으며, 가장 결정적인 증거가 뽈리와 묵디 사이의 통화 녹음테이프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대검찰청이 “학습하는 중”이라거나 “때를 기다리는 중”이라는 애매한 표현을 흘리며 ‘마지막 무기’의 사용을 주저하고 있어서, 대검찰청 앞에서 철야시위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묵디는 동티모르와 이리안자야(현 파푸아)처럼 악명 높고 험난한 ‘분쟁지역’의 야전에서 경력을 쌓았고 수하르토 체제 말기에 특전단(KOPASSUS) 사령관으로 복무한 전도유망의 장성 출신이다. 그러나 특전사령관 재임 시 민주화운동가들에 대한 조직적 납치를 지휘한 것으로 무니르에 의해 지목된 바 있고, 결국 ‘임무해제’ 명령을 받아 소장계급을 끝으로 퇴역해야만 했다. 이로 인해 무니르에 대한 묵디의 원한이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추정한다. 그러나 묵디는 국정원 부원장으로 영전되면서 민주화 이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군 출신과 민간 출신 후보의 대결로 압축된 2004년 대통령 직접선거 때는 역설적이게도 군 출신 유도요노(Susilo Bambang Yudhoyono)와 맞붙은 민간 출신 메가와띠(Megawati)의 편에서 선거를 도왔으며, 바로 이 때 무니르 독살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음모가설은 안보기관을 넘어서 민간정치부문의 실력자들까지 포괄하는 중층적인 양상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묵디는 독살배후로 제소된 뒤에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정치에 가담하여 대인도네시아운동당(Gerindra)의 부총재를 역임하더니, 최근에는 말년을 이슬람정치에 헌신하겠다며 통일개발당(PPP)에 입당하여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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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하르토체제 말기에 납치된 13인의 민주화운동가


지난 4월 7일에 콘트라스와 국제이행기정의센터(ICTJ)는 수하르토 체제 종식이후 13년간 추구된 이행기 정의(transitional justice)의 역정을 평가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민주화 초기에 여러 희망찬 시도들이 있었지만, 구세력과의 타협적 시기를 거쳐, 최근에는 아예 꽉 막힌 시기를 맞이하게 되는 허탈한 과정을 기록하였다. 그 동안 인권침해사건과 관련된 고위급 장성들이 단 한 명도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았으며, 민주화운동가납치사건의 지휘자인 묵디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민주화 이후에 정치적으로 더 활동적이다. 대표적으로 1999년 동티모르 철수 시 발생한 군부폭력의 책임자인 위란또(Wiranto) 장군, 1998년 5월 반화인 집단폭력의 책임자 쁘라보오(Prabowo) 장군이 정부통령선거에 후보로 출마한 바 있고, 차기 대선에도 출마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과거사가 정리되지 않은 탓에 2014년 인도네시아 대선의 전망도 따라서 회귀적이다. 이로써 진실은 무력하고 정의는 강자의 편이라는 국민적 학습이 지속된다.

이런 정황에서 무니르 사건 형사소송은 인도네시아 인권의 ‘역사적 시험대’로 부각된다. 과연 특전사령관과 국정원부원장을 역임한 국가폭력의 핵심인물을 감옥으로 보낼 수 있을 것인가? 인도네시아 인권운동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도전에 나섰고, 지금 그 장도의 막바지에 서 있다. 무니르는 과거사 청산운동의 중핵이었고 현재도 그러하다. 무니르는 수하르토 독재의 국가폭력에 과감하게 맞서면서 전국적 ‘스타’가 되었고, 과거에 갇힌 각종 국가폭력사건들을 되불러내고, 국가폭력의 ‘성채’인 안보기관의 개혁운동에 돌입하였다. 역사를 위해 투쟁하다 스스로 역사가 되었으며,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을 옹호하다가 자신이 피해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반국가폭력의 화신이다. 고위급이 연루된 살인이라는 위키리크스(Wikileaks)의 폭로, 무니르를 거리명칭으로 삼겠다는 네덜란드정부의 발표, 거액의 민사배상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판결, 심지어 묵디의 화려한 정치행보까지도 무니르에 대한 기억을 재생시키고 영웅적 서사를 재구성시킨다. 그러니 무니르가 아니라면 누가 할 수 있으랴? 아니 무니르라면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번이 마지막 전투이다. 무니르는 생전에 묵디의 군복을 벗겼지만 감옥에 가두지는 못했고, 그래서 묵디의 복수가 가능했던 것이라고 동료들은 한탄한다. 무니르는 생전에 실패한 것을 사후에 성사시킬 수 있을까? 과연 ‘죽은 무니르’가 ‘산 묵디’를 결박시킬 수 있을 것인가? ‘시작은 있지만 결말이 없다’는 냉소로 얼룩진 인도네시아 인권침해의 역사와 법치의 비극이 이번 소송에서 단 한번이라도 깨끗이 마무리되는 선례를 남길 수 있을까? 이 ‘역사적 한 판’의 끝을 보려면 지금은 우선 대검찰청의 행동을 재촉해야만 한다. 대검찰청이 대법원에 재심의 요청서를 보냄으로써 반국가폭력의 화신 무니르가 유족과 동료들을 이끌고 마지막으로 ‘출전’할 수 있도록 ‘혈로’를 열어주어야 한다. 나는 인도네시아의 민주화에 열광했고 민주주의 진전을 축하해온 연구자로서 인도네시아 민주주의의 수치인 불처벌(impunity)의 악순환을 돌파하는 대역사를 진정 목도하고 싶다.  


전제성(전북대 정치외교학과 부교수)

* 이 글은 서남포럼 뉴스레터(2011.4.12)에 실린 글입니다.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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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국가의 인권과  민주화의 자취를 찾아서
아시아 인권옹호자 전기 중심으로

올해는 유엔이 인권옹호자선언 (UN Declaration on Human Rights Defenders)을 채택한지 1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를 기념해 국제연대위원회는 버마,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를 중심으로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활동한 아시아 인권옹호자의 삶을 조명해 보는 기획 연재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아시아 인권옹호자의 일대기를 통해 살펴보는 각 국의 인권 상황과 민주화의 자취는 아시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새롭게 아시아를 만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인도네시아의 양심이자 인권 영웅, 무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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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무니르(Munir Said Thalib, 1965 ~ 2004)
국가 : 인도네시아(Indonesia)
분야 : 인권 운동, 반부패운동


수하르토 독재정권의 시작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 통치 시대 이전에는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각 종족들이 자치로 통치하는 여러 나라들이었으나 네덜란드 통치 후, 독립을 하는 과정 속에서 한 국가가 되었다. 350년이 넘는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 후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군정 하에 있다가, 1945년 8월 17일 민족운동 지도자 수카르노와 하타를 중심으로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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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지도_ 붉은색 표시 지역은 아체


1963년 수카르노가 군부의 지지하에 종신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독재체제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군부와 공산당의 대립은 경제난과 정치적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에 1965년 ‘930 사태’로 불리는 일련의 사태를 수하르토가 평정하고 수카르노 지지 세력과 인도네시아 공산당세력을 괴멸시켜 수하르토 독재체제를 수립한다. 한 인권보고서에 따르면 ‘930 사태’ 이후 1966년까지 공산주의자로 몰려 살해된 숫자는 약 100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300여 종족이 600여 종류에 가까운 지역언어를 구사하며 독자적이고 독립적 문화를 발전시켜온 1만7508개 도서로 이루어진 군도(群島) 대국 인도네시아에서는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종족들과 자바섬을 중심으로 한 인도네시아 중앙정부 사이에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대표적인 갈등 지역이 바로 아체지역이다.

1999년 동티모르 독립 이후 아체의 인권상황은 매우 악화되었다. 국제사회의 압력을 받아 동티모르의 독립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인도네시아 정부는 자치를 외치는 아체인들을 무자비 하게 탄압했다. 아체에서 인도네시아 군인과 경찰이 자행한 불법연행, 납치, 고문, 사살 등과 같은 인권유린은 쉬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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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 지배와 내전으로 얼룩진 ‘불행한 땅’_아체


인도네시아 최고의 인권옹호자이자 웅변가

무니르(Munir Said Thalib)는 인도네시아의 군부 및 정보기관의 인권침해와 아체 관련 정부정책을 비판했던 인도네시아 최고의 인권운동가였다. 그는 1992~1996년에 동부자바에서 노동 인권 개선을 위해 투쟁했고, 1996~2003년에는 자카르타에서 수하르토 체제가 자행한 활동가 납치실종사건과 동티모르 인권침해 사건들을 다뤘으며, 비극적 죽음을 맞기까지 2003~2004년에 걸쳐 임파르살 소장으로서 활동했다.

무니르는 인도네시아 최초의 인권옹호단체로서 가난한 이들에게 무료 변호를 제공하는 것으로 유명한 인도네시아법률구조재단(이하 YLBHI: Yayasan Lembaga Bantuan Hukum Indonesia) 수라바야 지부의 노동분과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당시 수하르토 체제는 국내자본가와 외국인 투자자들을 최대한 지원하는 방식으로 경제발전을 추구하였기에 노동문제는 아주 중요한 이슈였다. 그는 노동분쟁 사건들을 다루는 전문적 능력과 기자들에게 흥미를 끌만한 뉴스를 제공하는 기민한 능력을 지녀 노동자들과 기자들에게 아주 인기가 있었다. 그는 법정, 노동부, 지방 및 중앙 노동분쟁조정위원회에서 노동자들을 직접 변호하고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수집된 자료를 분석하여 보고서를 완성하는 일을 수행했다.

YLBHI에 접수되는 사건들의 대다수는 노동법이 보장한 정규적 권리 위반과 해고 관련 사례들이었다. 대표적인 활약으로는, 시도방운사의 일방적인 해고 사건이 있다. 무니르는 해고자들이 위법행위에 관한 법률조항에 근거하여 회사 측을 지방법원에 제소하도록 제안하고 후원했다. 그 결과 1995년 대법원 판결로 위법행위에 관한 조항으로 노동자들이 승소한 첫 사례이자 노동자들이 법정에서 회사 측을 해소시킨 최초의 사례를 만들어 냈다. 또한 그는 군부의 노동문제 개입과 자본과의 협력이 노동자들에게 가장 큰 위협이라고 생각하고, 위법행위를 자행한 죄목으로 시도아르조 지역주둔군사령관 등을 지방법원에 고발하도록 해고자들을 고무시켰다. 또한 생산성과 생산품의 질에 비해 지나치게 적게 지급되는 임금실태를 보고, 정부가 최저임금권장선을 발표하면 인도네시아의 4대산업지대의 임금사정을 조사하였다. 그는 이를 통해 노동자들의 열악한 실태를 사회에 고발하였다. 그의 이러한 역동적인 활동은 YLBHI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고 1996년 YLBHI의 운영국 차장으로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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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니르 활동사진

 1997~1998년 수하르토 체제의 말기에 활동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납치가 자행되자 YLBHI와 자카르타의 몇몇 인권운동단체들이 연대하여 실종및폭력피해자대책위원회(Kontras: Komisi untuk Orang Hilang dan Korban Tindak Kekerasan)를 1998년 3월 20일에 결성하였다. 무니르는 이 위원회의 총무국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특전단(Kopassus)의 비밀작전팀(Mawar)에 의해 자행된 활동가 납치 사건을 법정으로 끌고가는데 성공하였고 특전단의 몇몇 장교들은 법정 처벌을 받았다. 또한 1989~1998년에 아체에서 수행된 군사작전 중에 인권침해를 자행한 자들이 법정에 세워져야 하고 군부의 각종 면책특권이 중단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그는 특히 인도네시아의 군부를 비판하는 웅변가로 유명했다. 거는 군부에 의해 자행된 동티모르, 파푸아, 아체 지역에서의 인권탄압행위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그는 국가인권위원회의 동티모르 지역 인권침해 조사위원회 위원이 되어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인권침해 혐의를 받는 장군들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고 서슴없이 조사를 추진하였다. 당시 막강한 귄력을 지녔던 위란토 장군은 와히드 대통령에 의해 장관직을 박탈당했다. 이러한 굵직한 사건들은 무니르를 용감한 인권운동가로서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했다. 1998년에 무니르는 콘트라스 총무국장 자격으로 인도네시아 최고의 인권상 얍 띠암 힌 상(Yap Thiam Hien Award)을 수상하였다. 이어 2000년에는 인권운동가를 위한 대안적 노벨상(Rights Livelihood Award)과 유네스코의 만다젯 싱 상(Mandajeet Singh Award)를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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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초에는 콘트라스의 소장역할을 수행하면서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인도네시아대학교, 가자마다대학교에 소속된 안보문제 전문가들과 함께 군부와 경찰에 대한 조사연구를 시작했다. 이어 그는 아체와 파푸아 지역의 인권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는 인권감시단체를 결성하고자 하였다. 2002년 11월에 18명의 인권운동가들과 함께 임파르샬(Imparsial)을 설립, 만장일치로 소장으로 선출되었다. 임파르샬은 ‘시민사회의 자유 대 반테러 전쟁’ 캠페인을 통해 테러리즘을 저지하려는 정부 정책이 시민사회의 자유를 침해하는 실상을 고발하였다. 또한 태국에서 개최된 납치실종에 반대하는 아시아연맹(AFAD) 회의에 참석하여 의장활동을 하였다.

그 후 군법 초안을 비판하는 시위를 조직했다, 해악을 초래할 수 있는 군법의 일부 조항들이 국회심의과정에서 수정될 수 있도록 하였고, 해군참모장과 국방부에 대한 항의행동을 전개하여 해군이 불법 선박거래를 중단토록 하였다.

이처럼 인권투사로 활동하는 동안 무니르는 다양한 협박과 테러에 직면했다. 동부자바주 주둔군사령관인 하르또노 육군소장은 노동자들을 계속 선동하고 다니면 “소시지를 만들어버리겠다”고 직접 협박하였고, 정보기관원들과 폭력배들도 전화나 편지로 종종 위협을 가했다. 이러한 협박에 대해 무니르는 대수롭지 않게, “모든 일에는 위험이 따르는 법이다. 피할 수 있다면 당연히 피해야지만, 피할 수 없다면 맞서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항상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 만약 우리가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그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적이 이미 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유명한 말을 남겼다.

2000년에는 콘트라스 사무소 문 앞에서 두 개의 폭발물이 터졌고, 같은 해에 말랑의 바투 지역에 있는 친가로 고성능폭발물이 보내졌다. 2002년 3월에는 유혈짜왕지역민회라는 이름을 내건 5백명의 해결사들이 콘트라스로 들이닥쳐 사무실을 파손시키고 무니르를 위협했다.  2003년 9월에는 무니르 집 안마당으로 폭발물이 담긴 봉지가 투척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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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카퍼스(Pollycarpus Priyanto) 재판 사진



2004년 9월 7일 석사학위 과정을 위해 네덜란드로 향하던 중 무니르는 인도네시아 비행기 안에서 비소에 중독되어 살해당했다. 이 사건의 용의자로 전직 조종사였던 폴리카퍼스(Pollycarpus Priyanto)가 지목되었고 그는 가루다 항공의 고위층이었던 인드라(Indra Setiawan)의 명령을 받고 무니르의 오렌지 주스에 비소를 넣었다고 자백했다. 무니르의 지지자들은 그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사주한 세력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지 않았다고 정부에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인도네시아, 민주화로의 나아가려는 노력 
2001년 7월 23일 국민협의회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와히드(Abdurrahman Wahid)가 무능력과 부패 의혹 등으로 집권한 지 21개월 만에 대통령직에서 쫓겨나고, 스카르노 대통령의 딸인 메가와티 부통령이 신임 대통령으로 정권을 잡았다. 그후 2004년 인도네시아의 첫 직선제 대통령선거에서 군 장성 출신의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전 안보장관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현정권을 이어가고 있다. 이로써 인도네시아는 현재 수하르토 시기와 달리 군의 정치•사회적 기능이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

한편 1998년 수하르토의 하야 이후 인도네시아의 인권단체 및 NGO들은 정부의 정책에 대해 적극적인 대안을 제시하는등 인도네시아 민주화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한다.

정리: 김연재, 최유미 국제연대위원회 자원 활동가

참고 정보 사이트
http://www.kdemocracy.or.kr/
http://en.wikipedia.org/wiki/Munir_Said_Thalib
http://www.kontras.org/eng/index.php
http://www.munir.or.id/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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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인도네시아 최고의 인권운동가로 추앙받던 무니르에 대한 독살사건을 한국 최초로 소개하는 글이다. 2004년에 벌어진 무니르 독살사건은 인도네시아를 발칵 뒤집어 놓았지만 쓰나미 사태에 묻혀버리고 말았으며 한국에는 단 한 건의 보도도 이루어진 적이 없다. 10년간 무니르와 함께 일했던 동지 풍키 양이 처음으로 무니르에 관한 글을 한국의 독자들을 위해 작성해 주었으며 (사)한국동남아연구소 총무부장인 전제성 박사가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번역문을 작성해 주었다. 이 글이 위기에 직면한 인도네시아 인권활동가들에 대한 한국 사회운동의 연대행동 촉진에 소중한 자원이 되길 기대한다.

<인도네시아의 인권을 위한 장기항전과 무니르(Munir)의 삶>

글쓴이: 풍키 인다르띠 (Poengky Indarti)/ 인도네시아 인권감시단체 임파르샬 (Imparsial) 부소장

*민주화기념사업회 간행물 [기억과 전망] 2005년 가을호에 실림
국제연대위원회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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