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12일과 13일 방글라데시에 있는 한국기업 영원무역을 중심으로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의 대규모 시위가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방글라데시 당국의 과잉진압으로 4명이 사망하고 수백명이 부상당한 사건은 한국언론에서도 많이 보도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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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여성 노동운동지도자인 미수(Moshrefa Mishu)씨는 지난 12월 14일 방글라데시 당국에 의해 영장도 없이 연행되어 지금까지 구금되어 있습니다. 미수 씨는 기관지 천식까지 앓고 있는데 방글라데시 당국이 치료를 거부하고 있어 생명까지 위협받고 있습니다. 특히 미수씨가 12일과 13일에 있었던 대규모 시위를  배후조종했다는 혐의를 방글라데시 당국이 조작했다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수씨에 대한 방글라데시 정부의 탄압은 방글라데시 의류산업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미수씨의 변호인측이 신청한 보석결정이 1월 27일에 있을 예정입니다. 국제엠네스티와 아시아인권위원회를 비롯한 국제사회가 미수씨의 석방을 촉구하고 나섰습니다. 미수씨가 겪고 있는 고통을 알리기 위해 한국시민사회단체들은 미수씨의 석방을 요구하는 긴급 기자회견을 방글라데시 대사관 앞에서 개최하였습니다.


일시: 2011년 1월 26일 수요일 오전 11시
장소: 방글라데시 대사관
사회: 국제민주연대 나현필 사무차장
순서: 1)경과보고: 국제민주연대 나현필 사무차장
        2)연대사: 아시아태평양노동자연대 한국위원회 장창원 목사, 다함께 이정원 활동가
        3)기자회견문 낭독: 민주노총 황수영 통일위원장
        4)방글라데시 대사관에 영문 기자회견문 전달   

출처: http://www.srilankaguardian.org/2011/01/bangladesh-military-intelligence-behind.html)

 
                          

< 기자회견문>                      

방글라데시 정부는 미수씨를 즉각 석방하라!


2010년 12월 14일 새벽 1시경, 방글라데시 의류산업 노동자단결포럼(Garment Workers Unity Forum)의장인 미수(Moshrefa Mishu)씨가 방글라데시 당국에 의해 연행되었다. 미수씨의 증언에 따르면, 방글라데시 당국은 군정보기관이 중심이 되어 사찰활동을 해왔으며 체포 영장 없이 미수씨를 불법 연행하였다. 또한  천식을 앓고 있는 미수씨에게 필요한 의약품 및 의료기기 제공을 거부하여 미수씨의 건강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으며 적절한 치료도 제공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더욱이 방글라데시 당국은 20년 이상 방글라데시 섬유산업 노동자 조직 활동을 해온 미수씨의 활동을 추궁하면서 정부에 협조할 것을 회유하고 협조하지 않는다면 살해당할 수도 있다는 협박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명백한 방글라데시의 당국의 자의적 구금이자 미수씨의 생명을 위협하는 고문행위이며 방글라데시 노동운동에 대한 비이성적 탄압이다.
 
우리가 미수씨의 인권침해에 주목하는 것은 지난 12월 12일과 13일에 방글라데시 최대 의류업체인 한국의 영원무역을 중심으로 발생했던 대규모 시위사태와 미수씨의 인권침해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언론에도 보도된 것처럼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와 영원무역 공장이 소재한 치타공의 수출자유지대를 중심으로 수천명의 시위대가 최저임금 인상 및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대를 향해 방글라데시 경찰은 고무탄과 최루탄을 동원한 과잉진압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4명이 사망하고 2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의류수출산업이 방글라데시 전체 수출액의 80%를 차지하고 그 의류산업의 중심에 영원무역을 비롯한 한국기업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사회에서 이 사태에 대한 한국 업체들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의 처참한 현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계기가 된 바 있다.

우리는 방글라데시 당국에 엄중히 경고한다. 방글라데시 정부가 미수씨를 불법으로 구금하고 적절한 치료제공을 거부한 것은 매우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행동이며 국제인권조약위반행위로 마땅히 비난받아야 하는 행위이다. 또한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하기보다 노동운동 지도자와 노동자들을 구금하고 탄압하는 구시대적 작태 역시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결국 방글라데시 정부의 이러한 탄압은 자국 노동자들에게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강요하여 해외자본의 진출을 용이하게 하겠다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과정에서 국제사회의 비난과 자국 노동자의 인권은 무시하겠다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방글라데시를 비롯하여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곳곳에서 경제자유구역 혹은 수출자유지대로 대변되는 이러한 반인권적 자본유치 경쟁은 노동자•민중의 삶을 더욱 도탄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미수씨가 겪고 있는 고통이 결코 우리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함께 연대해나갈 것이다.
 
특히, 우리는 한국정부와 기업에 미수씨의 인권침해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저임금과 정부의 반노동정책을 이유로 방글라데시에 대거 진출한 한국기업들은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조성하고 있는 직접적인 당사자들이다. 영원무역은 자사 공장에서부터 발생한 대규모 시위사태에 대해 외부세력의 개입이라 주장하며 자신들의 책임을 부정하고 있지만 영원무역이 치타공 수출자유지대에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이유를 살펴보면 영원무역이 왜 책임을 져야하는 지 명확해진다. 수출자유지대 노동자들은 단체행동권을 행사할 수 없으며 수출자유지대 당국이 임금협상과 채용 및 해고에 관한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득을 얻고 있는 한국기업들이 그 이득으로 인해 피해를 받고 있는 노동자들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다면 누가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인가? 한국기업들이 방글라데시 정부의 인권침해를 통해 이득을 보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따라서 미수씨의 불법구금 및 고문에 한국기업들도 책임을 져야함은 분명하다.

한국정부 역시 저임금 및 열악한 노동조건을 이유로 방글라데시에 대해 투자할 것을 한국 업체들에 홍보하고 있다. 한국정부가 국제노동기준에 무지할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의무이행에 별관심이 없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대규모 시위사태가 발생했다면 그 원인과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한국기업들이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에 대한 인권침해에 연루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도 한국정부에 요구되는 역할이다. 특히 미수씨의 즉각적인 석방을 방글라데시 정부에 촉구하는 것이야 말로 이명박 정부의 국정지표인 “성숙한 세계국가”인 한국정부가 인권의 보호와 증진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일 것이다.
우리 한국의 시민사회와 노동운동은 미수씨의 즉각적인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미수씨의 석방뿐 아니라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이 정부의 탄압에 맞서 노동3권을 쟁취하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함께 연대해 나갈 것이다. 노동자는 하나이며 그 누구의 인권도 침해당해서는 안 된다.    

               
2010년 1월 26일

         
구속노동자후원회/국제민주연대/공익변호사그룹공감/다함께/로넬차크마나니(줌마난민)
민주노동자연대/사회진보연대/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동조합/인권연구소 창
아시아태평양노동자연대 한국위원회/오산이주노동자센터/오산다솜교회
이주인권연대(경산이주노동자센터, 구미가톨릭근로자문화센터, 대전외국인노동자와함께하는모임, 부산외국인근로자선교회, (사)이주민과함께, 아시아의창, 아시아의친구들, 안산이주민센터, 양산외국인노동자의집, 외국인노동자인권복지회, 천안모이세, 대전모이세, 천주교의정부교구 사회사목국이주센터 EXODUS(경기동부),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참여연대/한국노동네트웍크협의회


 * 방글라데시 의류산업 노동운동 지도자 석방 관련 기자회견 자료
(영문)




(국문)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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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미얀마) 디페인학살 4주년 규탄과 진상규명 촉구 공동성명서



5월 30일은 버마에서 디페인 학살이 일어난 지 4년째 되는 날입니다. 그러나 버마군사정부는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을 전혀 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학살의 피해자를 지금까지 수감하고 있으며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아웅산 수치 여사에 대한 가택연금을 1년 더 연장한다고 최근에 발표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규탄과 진상규명 촉구 기자회견을 한남동 버마 대사관 앞에서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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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오늘 2007년 5월 30일은 버마(미얀마)의 디페인에서 군부독재에 의한 학살이 일어난 지 4년째 되는 날이다. 버마민주화를 바라는 버마인들과 한국단체들은 디페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과 학살의 피해자를 포함하여 모든 정치범을 하루속히 석방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버마의 디페인 지역에서 2003년 5월 30일, 전국을 돌며 강연회를 하던 아웅산 수지 여사를 포함한 민족민주동맹(NLD) 정당의 지도부를 겨냥한 것으로 보이는 테러가 일어났다. 버마망명정부에 의하면 이 현장에서 70여명이 살해되고 200여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실종자들도 상당수에 이른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버마군사정부(SPDC)는 대대적인 야당에 대한 탄압을 자행하여 단 며칠 동안에 총 256명을 체포하고 이 중 100여명은 아직까지도 감금되어 있다. 또한 이 사건을 빌미로 전국의 NLD 사무소를 폐쇄하고 주요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사건 직전, 군사정권의 엄혹한 상황에서도 아웅산 수지 여사의 강연을 보기 위해서 수만명의 버마 국민들이 모였다. 버마민주화를 간절히 바라는 버마민중들의 염원은 또다시 잔인한 물리적 폭력에 의하여 짓밟힌 것이다. 사건이 발생한지 4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버마군사정부는 정확한 희생자 숫자와 책임자가 누구인지 진상규명을 하고 있지 않으며 이를 요구하는 국제사회의 요구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버마의 정치 상황과 사건의 현장 목격자들 그리고 국제인권단체의 증언 등을 종합해보면 디페인 학살의 배후에는 버마군부가 있을 것이라는 강한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2003년 11월, 58차 유엔총회 제3위원회에서 유엔특사 폴루사지오 피네로씨는 “디페인 사건이 군부 앞잡이들의 묵인 아래 일어났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고 하였다.

1991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며 버마민중의 민주화 염원의 상징인 아웅산 수지 여사는 지난 2002년 오랜 가택연금에서 해제되었다가 2003년 디페인 학살 사건 직후 다시 가택연금되었다. 수지여사의 가택연금이 총 11년을 넘겨 연금 해제에 대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군사정권은 올해도 역시 가택연금 1년 연장하겠다고 지난 5월 25일 발표하였다. 또한 NLD 정당이 작년 2006년 두 차례에 걸쳐 군사정권에게 버마의 전 분야에 걸친 전반적인 퇴보와 낙후된 상황 해결을 위하여 대화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군사정권은 평화를 위한 대화노력을 거부하고 민주화요구 세력들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다.

버마의 오랜 군부독재는 아시아의 평화와 인권 성장에 발목을 잡고 있다. 이러한 버마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선출이후 한국내외에서 한국이 버마민주화를 위한 뚜렷한 노력과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9월 열린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서 버마 인권문제에 대하여 관여할 의사가 없음을 밝히는 등 세계적인 인권과 민주화 흐름에 거꾸로 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민주화와 인권이라는 가치는 어느 상황에서도 양보할 수 없는 가치이자 세계평화를 위한 기본적인 전제조건이다. 21세기인 현재까지도 군사정권이 권력을 잡고 있는 버마에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하여 한국정부가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한국은 인권국가라고 자부할 수 없으며 유엔과 같은 국제사회에서 설 자리를 점차 잃게 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오늘 우리는 다음을 강력히 요구한다.

1. 디페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를 처벌하라

1. 아웅산 수지여사를 포함한 정치범을 석방하고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보장하라

1. 한국정부는 버마의 민주화와 인권을 위하여 실질적인 노력과 역할을 다하라


2007년 5월 30일


버마 민족민주동맹(NLD-LA) 한국지부/버마행동/(사)기업책임시민센터/경계를넘어/나눔문화/나와우리/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국제연대위원회/버마민주화를지원하는모임/새사회연대/서울경기이주노동자노동조합/아시아의친구들/열린북한방송/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외국인이주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인권과평화를위한 국제민주연대/인권실천시민연대/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참여연대/팔레스타인평화연대/피난처/함께하는 시민행동/환경운동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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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페인 학살 개요>

버마의 디페인(Depayin) 지역에서 2003년 5월 30일 전국을 돌며 강연회를 하던 아웅산 수지 여사를 포함한 야당 NLD(민족민주동맹)의 지도부를 겨냥한 것으로 보이는 테러가 일어났다. 버마망명정부에 의하면 이 현장에서 70여명이 살해되고 200여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실종자들도 상당수에 이른다. 이 사건을 계기로 SPDC(버마군사정부)는 민주화요구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자행하여 단 며칠 동안에 총 256명을 체포하고 이 중 100여명은 아직까지도 감금하고 있으며 전국의 NLD 사무소를 폐쇄하고 주요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사건 직전, 군사정권의 엄혹한 상황에서도 아웅산 수지 여사의 강연을 보기 위해서 수만명의 버마 국민들이 모였다. 버마민주화를 간절히 바라는 버마민중들의 염원은 또다시 잔인한 물리적 폭력에 의하여 짓밟히게 된 것이다. 사건 발생 4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버마군사정부는 정확한 희생자 숫자와 책임자가 누구인지 진상규명을 하고 있지 않으며 이를 요구하는 국제사회의 요구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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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파푸아의 양심수 유삭 파카쥐(Yusak Pakage)와 필립 카르마(Filep Karma)의 석방을 촉구한다



사진협조: 경계를 넘어
인도네시아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웨스트 파푸아의 양심수 유삭 파카쥐와 필립 카르마는 2년 전 오늘, 웨스트 파푸아의 국기인 모닝스타를 게양했다는 이유만으로 반역죄로 징역 10년, 15년형을 선고받아 현재 수감 중에 있습니다.

웨스트 파푸아는 43년 전 인도네시아로부터 불법 점령당하면서 온갖 인권침해와 자원 수탈을 당하고 있으며, 이에 웨스트 파푸아 사람들은 자결권 보장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12월 1일은 웨스트 파푸아의 독립선포 기념일이자 유삭과 필립이 체포된 날로, 이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국제 공동행동에 한국의 인권사회단체들도 함께 하였습니다. 12시부터 3시까지 인도네시아 대사관 앞에서 일인시위와 항의 엽서 쓰기를 진행하였습니다.

<공동성명>

우리는 분노없이 43여 년간에 걸친 웨스트파푸아의 식민사를 말할 수 없다.

12월 1일 오늘은, 인도네시아에 의해 27번째주로 강제 편입된 웨스트 파푸아가 네델란드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날이다. 또한 유삭파카쥐와 필립 카르마가 파푸아의 자결을 요구하며 국기 빈땅끄조라를 게양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지 2년째 되는 날이다. 그들은 반역죄로 각각 10년 형과 15년 형을 선고받고 현재 자야뿌라 감옥에 수감중이다.

인도네시아는 지난 1962년, 네델란드로부터 독립을 준비중인 웨스트 파푸아를 무력으로 침공했다. 풍부한 자원을 갖춘 파푸아 영토를 강제 편입하려는 인도네시아의 요구와 미국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닿으면서, 파푸아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6년의 인도네시아 지배와 파푸아 독립여부에 대한 국민투표 실시를 내용으로 한 뉴욕협정이 1962년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 사이에 체결됐다. 1969년 진행된 국민투표 ‘Act of Free Choice’는 유엔의 묵인 하에 당초 협정에서 명시한 성인 남녀 전부가 아니라 인도네시아 정부가 선발한 친인도네시아인 1022명만이 참여했다. 선발된 사람들은 온갖 협박에 시달리며 ‘우리는 인도네시아를 원한다’는 선택을 강요당했다. 그 뒤 파푸아는 공식적인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인도네시아는 1969년 식민 지배를 시작한 이래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파푸아를 통제해왔다. 이 과정에서 살해당한 파푸아인만도 10만 명. 인도네시아군은 광범위한 폭력과 살인, 고문과 납치, 강간 등을 자행했고, 군이 지나간 마을은 초토화됐다. 250여 개의 부족이 가지고 있던 문화와 언어, 공동체가 파괴됐으며 땅은 개발이란 명목으로 파헤쳐졌다. 대대적인 학살과 이주정책의 결과 현재 파푸아 거주자 중 절반이 이주자들이다. 파푸아 아이들은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 영양 부족과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하여 파푸아 아이들 중 절반이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영아와 산모의 사망률은 최고 수치에 이른다.

하지만 파푸아인들은 지난 43년간 단 한순간도 자유를 향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파푸아인들의 거센 저항에 인도네시아 정부는 2001년 특별자치법을 제정, 파푸아의 특별자치와 독립의회 구성, 국기게양 등을 인정했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군대는 파푸아 최고 의회 의장이었던 데이스 엘루이(Theys Eluay)를 살해했으며, 반땅끄조라를 게양한 사건과 관련해 많은 사람들을 사살했고, 구속했다. 자결을 촉구하는 집회에 참여했던 여성들은 성폭행당한 후 수장됐다.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광기의 폭력이 아직도 웨스트 파푸아 한복판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누가 이 땅을 침략할 권한을 주었는가? 누가 이들을 학살할 권한을 주었는가? 누가 자결과 인권을 감옥에 넣을 권한을 주었는가? 파푸아인들의 삶을 결정할 권한은 오직 파푸아인들에게만 존재하며, 그들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우리가 할일은 ‘점령과 간섭’이 아닌 연대와 그들의 자결을 쟁취키 위한 국제적 실천뿐이다.

파푸아인들은 모멸스런 삶과 죽음의 공포를 견디며 오늘도 자결을 위한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감옥에 갇힌 필립과 유삭은 감옥 안에서도 빈땅끄조라를 옥상에 내걸며 투쟁하고 있다.

우리의 결단이 늦어진다면 파푸아의 암운을 걷어내는 것은 무망할 것이다. 지금 파푸아인들은 묻고 있다. 인도네시아 당신들의 행위는 정당하냐고. 정의로운 국제사회는 어디에 있냐고.

웨스트 파푸아에 자결을!

양심수 유삭 파카쥐와 필립 카르마에게 자유를!


2006. 12. 1


경계를 넘어/ 구속노동자 후원회/ 국제민주연대/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 나와우리/ 민가협/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인권연구소'창'/ 인권운동사랑방/참여연대/팍스아시아나/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팔레스타인평화연대



<배경설명>

사진협조: 경계를 넘어


웨스트 파푸아라는 나라를 들어보셨나요?

12월 1일은 웨스트 파푸아 사람들이 그들의 독립일로 선포한 날입니다.

또한 2004년 두 명의 파푸인이 국기 게양을 이유로 체포되어 10, 15년을 선고 받은 날이기도 합니다.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파푸아 사람들은 이리안 자야(Irianjaya)로 바꿔 불려왔고 동쪽 파푸아 뉴기니와 마주하고 있는 서쪽 지역, 웨스트 파푸아에서 살고 있습니다. 네델란드의 식민지였던 웨스트 파푸아는 1952년 자결권을 인정 받은 이후, 1961년에는 의회를 구성, '웨스트 파푸아'라는 국가명과 모닝스타라는 국기를 정했습니다.

그러나 웨스트 파푸아 영토를 강제 편입하려는 인도네시아의 무력적 탈환 시도와 미국 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한 개입, 그리고 유엔의 무책임한 각본에 의해웨스트파푸아의 독립의지와 약속은 좌절되었습니다.

독립이 좌절된 이후에도 계속된 웨스트파푸아인들에 대한 인도네시아 정권의 인권침해와자원 수탈, 웨스트파푸아 저항 세력에 대한 인도네시아 정부의 무력진압은 수 많은 파푸아사람들을 그들의 희생과 고통을 감수하며 살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독재자 수하르토가 물러나고 와히드가 대통령이 되면서 웨스트 파푸아 사람들에게도그들의 독립을 상징하는 '모닝스타'국기 게양을 인정받았고 파푸아 사람들은 독립 승인을 위해 최고 의회를 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파푸아 사람들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정치 공간이 열리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군대는 국기 게양 사건과 관련해 수백 명을 사살했고, 파푸아 최고 의회 의장이었던 데이스 엘루이(Theys Eluay)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후에도 동티모르 학살에 연루된 인물들을 경찰 간부로 임명하고 친 인도네시아 민병대를 구성하는 등 웨스트 파푸아에 대한 억압적 통치 구조를 유지하려는 시도는 계속 되었습니다.

한편, 인도네시아 정부는 2001년 웨스트파푸아에 특별자치를 인정하는 법을 통과시켰고, 이와는 모순적인 웨스트파푸아 3개 도 분리 법안을 독단적으로 시행하기에 이릅니다. 최근까지도 웨스트파푸아 사람들에 대한 인도네시아 정부의 억압정책과 탄압은 계속 되고 있으며, 2004년 12월 1일 독립일선포를 기념하는 자리에서 국기인 모닝스타를 게양했다는 이유만으로 유삭과 필립이 체포당해 10년과 15년 형을 선고 받아 그들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국기 게양이라는 이유만으로 10년과 15년을 선고 받았다는 것은 지금 웨스트 파푸아 사람들이 처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파푸아 양심수 유삭과 필립을 석방하라

그래서 웨스트 파푸아의 자유와 독립을 원하는 세계 각국의 국제연대단체들은 12월 1일 독립선포일을 맞이해 유사크와 필리페의 석방을 요구하는 국제 공동 행동을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단순히 두 사람의 석방을 요구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웨스트 파푸아에서 매일매일 일어나고 있는 인권침해와 자원 수탈, 그리고 군사화를 통한 저항 세력에 대한 인도네시아 정부의 폭력적 지배에 항의하는 의미가 담겨 있기에 이번 국제 공동 행동에 대한 여러분들의 관심과 지지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웨스트 파푸아 사람들의 자유에 여러분의 자유를 보태주십시오.

웨스트 파푸아 양심수 석방을 촉구하는 한국단체들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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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민주화 인사 석방 위한 서명운동에 버마 민중 53만명 참여



최근 버마에서 아웅산 수치를 비롯한 민주 인사 석방 서명운동에 버마 민중 몇 십만 명이 참여하였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다. 일상적인 군부의 통제와 감시 속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놀랍기만 한데, 마침 11월 9일부터 11일까지 서울에서 열리는 아시아 시민사회교육포럼에 태국에서 참석한 버마 새사회민주당 (DPNS, Democratic Party for New Society) 아웅 모 저(Aung Moe Zaw) 대표를 15일 초청하여, 국내에서 버마 민주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여러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현재 버마 상황에 대해 자세히 듣는 자리를 가졌다. 아래는 마웅 모 저 대표의 발언과 질의, 응답을 요약한 것이다.



며칠 전 이브라힘 감바리 유엔 정무담당 사무차장이 버마를 방문해서 군부 대표와 아웅산 수치를 만났다. 나는 이 기회를 통해 군부와 대화가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가 있으리란 증거를 나는 아직 보지 못하고 있다. 군부는 여전히 민중을 억압하고 있고, 민주화 운동가들을 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보인다.

얼마 전 학생 운동가가 14-5년 간 수감됐다 석방된 후 다시 구금돼서 이에 대해 항의하는 운동이 버마 내에서 일어났다. 이런 반복되는 구금, 석방으로 미래는 예측하기 어렵다. 더 악화될지 좋아질지 그 사이엔 긴장감이 존재한다. 그래서 지금 상황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이 시점에 좀 더 확고한 전 세계의 지지가 필요하다. 국제사회의 압력 뿐 아니라 버마 내부에서도 운동이 필요하다. 지금 버마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의제로 상정돼 있는데, 안보리의 결의안 통과를 위해선 국제사회의 압력과 지지가 필요하다.

나는 여러분들의 의견을 묻고 싶다. 아시아를 비롯한 국제 사회로부터 어떻게 버마의 민주화를 위한 지지를 더 많이 이끌어낼 수 있을지 알려 달라. 한국에서 어떻게 지지 얻어야 할지 알려 달라.

중국, 일본, 한국, 인도, 이 네 나라는 아시아에서 영향력 있는 큰 나라인데, 중국은 군부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고, 인도도 그러려고 한다. 한국은 버마 민주화에 대한 명확한 지지는 없으나 일본은 확실히 지지하고 있다. 나는 그래서 한국 정부의 지지를 받으려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버마 민주화에 대한 지지를 약속했다. 하지만 그동안 한국 정부로부터 확실한 지지 정책을 보지 못했다. 한국 정부가 버마 민주주의에 대한 정책을 내놓길 바란다. 여러분의 노력과 지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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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버마 내에서 활발히 이루어진 서명운동에 대해 말해 달라

지난 1988년 민주화 운동을 이끈 학생 운동가 지도자들이 14-5년간 장기 수감됐다 2004년에 석방되었다. 이들은 석방 후 버마의 민족 화합, 아웅산 수치와 군부의 대화, 버마 민주주의, 화해, 단합 등을 요구하며 평화적으로 운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문제는 군부 정권이다. 아웅산 수치와 대화하는 것도, 민족 화합도 원하지 않는다. 군부는 석방된 학생 운동 지도자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이들 지도자들은 버마 민중으로부터 지지를 받으며 영향력 있는 민주화 운동 지도자들이 되었다. 그래서 군부는 이들을 위험 인물로 간주하고 지난 9월 27일 다시 체포하였다. 이때부터 이들 지도자들, 민 코 나잉, 코 코 기이, 흐타이 키웨, 코 민 제야와 가택연금 중에 있는 아웅산 수치 등 민주인사 석방을 위한 서명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서명운동은 불과 2주 만에 53만명이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두 번째 단계의 캠페인은 이들 지도자들의 체포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흰 셔츠 입기를 벌였다. 이건 1주일 동안 진행하였다. 다음 단계의 캠페인은 기도회로, 지금도 진행 중이다.

군부는 이런 캠페인을 반란을 일으키기 위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어, 이들 캠페인 주도하는 지도자들을 체포하려고 한다. 또, 기도회에 버마 민중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파고다에 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캠페인 운동가들과 군부 사이에 긴장감이 존재한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지 못하겠다. 이 캠페인이 민중항쟁으로 발전할지 아니면 군부의 억압으로 실패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매우 중요하다. 이 캠페인이 더 확대되길 원한다.

53만명이 그렇게 단시간에 참여한 것은 대단한데, 이렇게 전국적인 서명운동이 어떻게 가능했나? 이 캠페인을 조직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서명운동은 전국적으로 일어난 게 아니라, 랭군, 만달레이 등 버마 중심 지역에서만 진행했다. 기간도 (민 코 나잉 생일인 18일까지) 애초 2주간으로만 정한 것이다. 짧은 기간이기 때문에 교통 등 여러 문제로 지방까지 확산시키진 못했다.

버마에는 많은 운동가들이 활동 중이지만, 조직화된 운동 단체가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도 군부 독재 시기에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언론에 나온 ‘88세대 학생 단체’는 단체명이 아니라, 1988년 민주항쟁 세대 학생 운동가들을 지칭한 것이다. 그래서 조직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군부가 사실상 두려워한다. 버마는 학생, 노동자 등으로 이루어진 단체나 모임을 조직하지 못하게 돼있어서, 제도권에서 허용하는 범위에서 또는 지하운동으로 학생, 노동자, 스님, 재야 정치인 등 네트워크를 통해 사람들을 민주화운동에 동참하게 하고 있다. 신문이나 팜플렛을 사람 손으로 거쳐서 직접 배포하고 있는데, 이러한 배포는 매우 위험하다. 한 장 배포로 20년형을 살 수도 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고 민주화 운동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인적 네트워크가 있어서 53만명의 서명이 가능했다. 이미 몇몇 서명 운동 지도자들이 체포돼서 14년형을 선고 받았다. 버마에는 양심수가 최소한 1500명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시골에는 인권 침해가 더 많이 발생하고 있다.

어려운 조건에도 53만명의 서명이 이루어진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이 흐름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양상이 보이나?

아니다. 서명운동은 2주간이라는 시기를 정하고 한 캠페인이라 더 이상 계속하지 않는다.

군부가 53만명이나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서명자 명단 공개가 어려울 텐데..

군부도 53만명이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가만히 있는 이유는 너무나 많은 숫자가 참여해서 잘못 건드렸다가 폭동으로 발전할까봐서다. 그래서 너무 이 운동이 확산되지 않도록 어느 정도 견제하는 차원에서만 막고 있다. 사실 이 서명운동 결과는 유엔 사무차장이 버마에 올 때 전달하려 했는데 군부가 막아서 못한 것 같다.

새사회민주당과 민족민주당과 관계는?

우리는 80년대 후반 학생 운동 조직으로 8888 민주항쟁 당시 함께 참여했는데 쿠데타 후 학생 조직이 금지되어 많은 운동가들이 정당을 만들어서 정치 운동을 했다. 이것을 채널로 해서 당시 학생운동 지도자들은 세 중심 기조로 나누어서 활동했다. 정당 활동(새사회민주당)과 지하운동 조직, 무장 투쟁 조직. 당시 우리 전략은 합법 정치와 동시에 무장 투쟁을 벌이는 것이었다. 1988년 당 만들 때 만해도 학생 조직이라 정치 형태의 정당을 만들지 못했다. 이 세 활동 조직은 긴밀한 협력을 가졌다.

NLD(민족민주당)는 1990년 선거에서 80% 이상 지지를 받았을 때부터 주도적인 정당으로 간주됐으며, 우리는 아웅산 수치를 우리의 지도자로 여기고 있다. 1990년 선거 당시 우리는 선거에 나가지 않고 NLD를 지지하였다. 우리는 정권을 잡기 위한 경쟁 관계에 있지 않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엔, 우리도 선거에 참여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민주주의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아웅산 수치를 우리의 지도자로 여기고 있다.

1997년 버마가 아세안에 들어가는 과정에 많은 논란이 있었다. 지금 보면, 아세안에 들어간 게 좋은지, 배제한 게 좋은지, 어떻게 평가하나? 그리고 서방에서 버마 군부를 압박하기 위해 경제 봉쇄를 하는데 이것이 버마 민주화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가?

우선 군부 독재 정권 스스로 정권을 포기할 리 없다. 그래서 경제 봉쇄라도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경제 봉쇄를 말할 때, 전면적 경제 봉쇄를 말하는 게 아니다. 군부 정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비즈니스만 말하는 것이다. 일반 사람과 관계있는 비즈니스는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전쟁 무기와 관련된 것, 그리고 유노칼, 토탈 같은 큰 석유회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일반인과 관련된 작은 비즈니스는 아니다.

그리고 군부는 확고하고 구체적인 경제 정책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비즈니스란 게 버마에서 잘 작동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억압할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억압하기 때문에 사업을 하지 못한다.

1997년 아세안에 들어갈 때 말레이시아 수상 마하티르가 버마를 끌어들임으로써 민주화 촉진을 하도록 하자했고, 당시 운동가들은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2003년 마하티르는 이제 버마를 아세안에서 축출하자고 한다.

민주인사 석방엔 여러 나라의 국회의원들도 서명운동을 벌였고 한국도 한 것으로 안다. 이러한 것이 실질적인 도움이 되나?

태국,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뉴질랜드, 일본의 국회의원들이 버마 민주화를 지지하는 모임을 결성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임들은 아시아 차원에서 AIPMC(ASEAN INTER-PARLIAMENTARY MYANMAR CAUCUS)라는 아세안 나라들의 국회의원 모임에 합류하고 있다. 한국은 아직 여기에 합류하지 않고 있다. 나는 한국도 국회의원 모임이 만들어지길 바라고, 아시아 내에서 이런 활동들이 군부 정권에 압력을 가하고, 유엔 안보리에도 압력을 가할 수 있길 바란다.

새사회민주당 소개

Democratic Party for New Society (DPNS)는 1988년 미처 완성되지 못한 민주주의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결성된 정당으로 당시 아웅 산 수치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 (NLD)에 이어 두 번째 규모였다. 전국적으로 25만 명의 당원과 120여 개의 지부를 거느린 큰 규모의 정당으로 당시 버마 국민들의 전폭적 지지를 얻었는데 특히 버마 학생 단체들과 젊은이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1990년 5월 27일의 총선거에서 DPNS 는 대중을 지지기반으로 한 민주정당이었지만 NLD 승리를 위해 NLD에 대한 지지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90년 5월 총선에서 NLD가 승리한 후, 군사정부에게 정권이양을 요구한 DPNS에 대해 군사정부는 극심한 탄압을 자행하고 핵심 당원들을 수감했다. 이후 버마 내에서 민주화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DPNS 중앙위원회는 군부에 대한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1991년 당 본부를 태국- 버마 국경지대의 자유지역으로 옮기고 당을 재결성했다.

현재 DPNS는 버마 내에서 인권과 민주주의를 주창하며 시민 사회를 강화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으며 또한 미래 버마에서 자격을 갖춘 정당이 되기 위해 당원들의 교육적, 전문적 자질 향상에 힘쓰고 있다.

아웅 모 저 대표 약력

Aung Moe Zaw 대표는 1988년 8월 민중항쟁 전, 그 해 3월부터 버마 양곤 대학교에서 시작됐던 학생시위를 주도한 학생지도자 중 한 명이다. 그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1988년 10월 14일 결성된 DPNS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현재까지 계속 활동하고 있다. 아웅 모 저 대표는 1997년부터 DPNS 대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버마 연맹 국가 위원회(NCUB) 총무단의 구성원이자 버마 민주주의 포럼(FDB)의 정책 입안자 중 한 명이다. 그는 1986년 양곤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다 영국으로 건너가 2004년 영국 석세스 대학교에서 행정과 개발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2006년 11월 9일부터 11일까지 서울에서 열리는 2006년 아시아 시민 사회 교육 포럼에 초청받아 버마 시민 사회에 대해 강연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포럼 후 한국에 체류 하며 버마 민주화를 지지하는 한국 시민 단체, 기자, 국회의원 등 많은 한국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버마의 상황을 알릴 예정이다. 특히 아웅 모 저 대표는 1988년 민중항쟁으로 수감됐다 석방된 5명의 학생지도자가 다시 체포된 상황을 한국사회에 알림으로써 버마 민주화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한국사회가 더 많은 관심과 도움을 통해 국제적 연대의식을 보여주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정보 제공: NLD 한국지부)

국제연대위원회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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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산 수치와 모든 정치 수감자들을 즉각 석방하라



오늘은 버마 디페인 학살 3주년이 되는 날이다. 디페인 학살은 군부의 묵인 하에 일단의 반 NLD무리들이 2003년 5월 30일 아웅산 수치를 비롯한 야당 NLD(민족민주동맹,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지도자들을 겨냥해서 자행한 테러다. 군부는 학살 이후 살아남은 아웅산 수치 등 야당 지도자들을 체포, 가택 연금시키고, NLD 사무소를 폐쇄하면서 대대적인 야당 탄압의 빌미로 삼았다. 또한, 국제사회의 진상 조사 요구와 학살자 처벌 요구도 지금까지 묵살하고 있다.

아웅산 수치는 버마 민주화의 상징으로 199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나, 10년 이상을 가택 연금 상태로 있다. 최근 아웅산 수치의 가택 연금 기한이 종료되는 즈음에, 유엔 정치부 사무처장이 버마 군부 SPDC(국가평화발전협의회)의 의장 탄 쉐를 만나고 아웅산 수치를 만나면서 연금이 해제될지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했다. 군부는 지난 2년간 외부인이 아웅산 수치를 만나는 것을 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대를 저버리고 다시 가택 연금 1년을 연장시키면서, 군부는 국제사회의 비난에 대해 이는 국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국내 문제이니 간섭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1990년 선거에서 패배했으면서도 정권을 이양하지 않고 무소불위의 독재 권력을 휘두르는 버마 군부의 탄압과 횡포는 날로 심해져가고 있다. 최근에는 밀림에 숨어살고 있는 2천 명의 카렌 소수민족에 대해 버마군대가 쫓아와 추격에 나서고 있고, 경제 상황은 악화일로에 있으며,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버마 민중은 국경을 넘어 난민이 되고 있다. 이제 버마의 문제는 버마만이 아니라 아시아 지역의 안보와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다. 버마 민중의 인권과 경제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하여 NLD는 지난 2월 12일 군부에 타협안을 제시했다. 1990년 선거에 당선된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국회를 소집한다면, 군부를 과도 정부로서 합법적으로 인정하겠다는, 버마 민족의 화해를 위해 군부와 협력할 뜻을 밝힌 것이다. 이에 대해 국제사회는 버마 문제의 평화로운 해결을 위한 제안이라며 환영한 바 있으며, 참여연대를 포함한 국내 시민사회단체들도 지지의 뜻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군부는 이 제안이 있는 바로 다음날, 가택연금 상태에 있던 NLD 부의장의 연금 기간을 1년 더 추가하고, NLD가 여러 차례 회신 기한을 연장했음에도 대화를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외국 대사와 외신 앞에서 NLD를 불법 단체라며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NLD 의원들에게 로비를 가하며 사퇴 압력을 강요하고 있다.

이런 엄혹한 상황에 처해있는 버마에 목숨을 내놓고 조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사람이 있다. 정치범으로 수감 생활을 마친 후 군부에 의해 지난 해 11월 미국으로 추방당한 78세 사라이 툰 딴 박사다. 박사는 편안히 머무를 수 있는 미국 생활을 접고 6월 19일 아웅산 수치 생일을 기해 버마에 돌아가 “국가의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라”는 구호를 외치겠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말 그대로 목숨을 내놓은 박사의 민주화에 대한 그 숭고한 뜻에 머리 숙여 깊은 지지와 안타까움을 보낸다. 버마의 민주화는 우리의 문제다. 우리가 나서지 않는다면, 민주화를 이룬 나라라고 어디서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없다. 한국 정부는 그리고 시민사회는 군부의 폭압정치로 고통당하고 있는 버마 민중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함께 나서고, 외교적 노력을 적극 기울여야 한다.

- 버마 군부는 아웅산 수치 여사를 비롯한 정치 수감자들을 즉각 석방하고 정치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라!

- 버마 군부는 디페인 학살의 진상을 밝히고 학살자를 처벌하라!

- 버마 군부는 민족의 화합을 위한 대화에 적극 나서라!

- 한국 정부는 버마의 민주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버마 정부로 하여금 NLD의 제안을 수용하도록 적극 노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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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페인 학살이란?

2003년 5월 30일 디페인(Depayin) 학살

13년간의 가택연금 끝에 2002년 5월 6일 아웅산 수치가 석방되었다. 석방이 되자마자 아웅산 수치는 전국을 돌며 강연회를 계획했고 SPDC(국가평화발전위원회, State Peace and Development Council) 정부도 이 계획을 승인했다. 하지만 투어가 시작되면서 SPDC의 정치기구인 USDA를 중심으로 반NLD 집회들 역시 조직되어 NLD 지지자들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Depayin 학살은 5월 30일에 일어났는데, 아웅산 수치는 당시 한 도시에서 Depayin으로 이동 중이었다. 마을 입구에서 아웅산 수치 일행은 반NLD 군중들에 의해서 습격을 당했다. NLD를 지지하는 버마망명정부에 의하면 이 현장에서 70여명이 살해되고 2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미국과 UN에서 파견된 조사관들도 당시 현장에서 상당한 폭력사태가 있었음을 인정했다. 아웅산 수치는 다행히 피신을 할 수 있었지만, 바로 다음날 SPDC정부는 이 사건이 NLD 지지자들의 도발에 의해서 일어난 것으로 보고 아웅산 수치 여사를 포함한 NLD 지도부를 체포하기 시작했다. NLD측은 SPDC 군사정부의 재빠른 발표와 대응을 통해 볼 때 이는 군사정권에 의해서 아웅산 수치 여사를 암살하기 위해 미리 계획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으로 야당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는데, 며칠사이에 총 256명이 체포되고 아웅산 수치와 NLD 의장 우틴우 등은 아직까지 감금되어 있다.



** 사라이 탄 뚠 박사 소개문과 박사의 편지 별첨 화일 참조

** 버마 활동가들의 성명서 별첨 화일 참조
국제연대위원회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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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7월 3일 국회의원 34인이 발의하였으나,

2004년 5월 31일 16대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됨

발의 의원:

김성호ㆍ고진부 권오을ㆍ김경재 김근태ㆍ김명섭 김부겸ㆍ김성순 김영환ㆍ김원웅 김일윤ㆍ김태홍ㆍ김희선ㆍ남경필 박양수ㆍ박인상 설 훈ㆍ송영길 신기남ㆍ심재권 오영식ㆍ유재건 이강래ㆍ이낙연ㆍ이정일ㆍ임종석 장성원ㆍ정동영 정범구ㆍ정장선 정진석ㆍ최용규 추미애ㆍ허운나 (34명)

국제연대위원회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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