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카르타에서 관전한 대통령 선거


지난 7월 8일, 인도네시아에서 대통령 선거가 평화적으로 수행되었다. 독재자 수하르토가 1998년에 물러나면서 시작된 인도네시아의 민주화는 1999년의 자유총선과 2004년 사상 최초의 대통령 직접선거를 치르면서 벅찬 과제를 잘 풀어왔고 이번의 대통령 직접선거도 인도네시아의 선거민주주의를 한 층 더 확고한 기반 위에 올려놓는 역사적 전진으로 기록될 것이다.

세계에서 인도, 미국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규모의 민주주의 체제를 운영하는 나라에서 정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선거인 만큼 각종 선거 관련 수치가 어마어마하다. 2억3200만 인구 중에서 등록된 유권자가 1억7600만 명 이상이고 33개 주 471개 시군에 설치된 45만여 개의 투표소(TPS)에서, 일부 악천후 지역을 제외하고, 아침 8시부터 오후 1시까지 일시에 추진되었으며, 투표율은 등록유권자의 72.5% 정도일 것으로 추산되었다. 정말 '거대한' 선택이라 부를 수 있다.

규모가 큰 만큼 문제가 없을 수 없다. 2004년 선거 때 어느 선거관리위원의 말처럼 "문제가 없으면 인도네시아가 아니다". 그렇지만 2004년 선거 때보다 올 해 선거의 관리가 허술하였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려울 것 같다. 선거 유세 막바지에 야당후보가 유권자 등록의 허술함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선거절차의 정당성에 관한 의구심과 함께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측의 폭동이 우려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선거위원회(KPU)와 헌법재판소(MK)가 미등록유권자들도 투표소에서 신분증을 제시하면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대안을 신속히 제시하자 문제를 삼던 후보자들도 이를 즉각 수용하였고, 경찰은 소요혐의자에 대하여 경고 사격 없이 직접 발포 할 수 있는 '1호경계령'을 발동하여, 결국 선거는 평온하게 완수될 수 있었다. 물론 앞으로 한 달 정도 거치면서 선거위원회(KPU)가 최종집계 결과를 발표하고 헌법재판소(MK)가 이를 인준할 때까지 선거관리에 관한 논란은 계속될 것이고 그 결과는 다음 선거의 관리체계 발전을 위한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민주주의 축제'(pesta demokrasi)

인도네시아에서 선거는 '민주주의 축제'로 불린다. 폭동 우려와 경계령 발동에도 불구하고 자카르타 지역에서 선거는 평온하고 즐겁게 이루어졌다. 투표소는 활기가 넘치는 주민들의 회합공간이 된다. 투표소는 마을 주민들에 의해 마을 안에 세워지며 줄이나 휘장으로 안팎이 구분되는 열린 구조물이다. 이렇게 투명한 투표소에서 개표까지 진행된다. 수백명 정도의 유권자를 지닌 소규모 투표소들이기 때문에 이 기초 단위의 개표는 한 두 시간 정도면 완료된다. 마을의 투표관리원이 후보자들의 사진과 이름이 담긴 큰 투표용지를 하나씩 펼쳐 보이면서 선택된 후보의 번호를 외치면 또 다른 임원이 벽에 걸린 현황판에 매직펜으로 표시를 한다. 두 후보 이상을 체크하거나 한 후보에게 두 번 체크한 이상한 표가 나오면 관리위원들과 후보별 참관인들이 모여서 확인하고 무효표로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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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표. ⓒ전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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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표. ⓒ전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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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 ⓒ전제성

우리네 반장 선거 같은 개표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마을 사람들에게 큰 기쁨을 준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후보의 표가 나오면 환호하고 박수를 친다. 아이들도 어른들을 따라한다. 아이들은 각 번호의 후보들 이름을 맞추는 놀이를 하기도 한다. 이렇게 투표소는 정치와 민주주의에 관한 조기교육 현장이 된다. 외국인이 구경 오면 마을 사람들은 더욱 신이 난다. 자신들이 누구를 지지하고 왜 그런지에 관하여 열심히 설명하고 한국의 선거제도나 정치에 대해 묻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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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표를 즐기는 주민들. 지지후보의 표가 검표되자 환호하며 어른들이 박수를 친다. ⓒ전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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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호하는 아이들. ⓒ전제성

안정 속의 개혁을 지지

'민주주의 축제'를 통하여 인도네시아 유권자의 과반수 이상은 현 대통령의 재집권을 지지하였다. 인도네시아의 대통령은 5년 임기로 중임이 가능하며 부통령 후보와 함께 출마해야 한다. 2004년에 결선투표까지 거치며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던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Susilo Bambang Yudhoyono)는 이번에는 경제각료 출신의 부디오노(Boediono)를 러닝메이트로 삼아 출마하였는데, 6개 기관의 투표소 샘플 조사(quick count)에 따르면 60% 정도의 지지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과반수 이상을 득표한 후보가 없을 경우 1위와 2위 후보팀이 결선을 치러야 하는 데, 오차가 있겠지만 유도요노 팀이 과반수를 무난히 넘길 것으로 예상되므로 결선투표 없이 재선이 확정될 듯하다. 따라서 3위에 처한 현부통령 유숩 깔라(Yusuf Kalla) 팀은 물론이고 2위에 오른 전 대통령 메가와티(Megawati Soekarnopurti) 팀에게도 결선 투표를 통한 역전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 같다.

현 대통령에 대한 압도적인 지지를 통하여 인도네시아 유권자의 다수는 안정 속의 전진을 선택하였다. 지난 5년간 다방면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가 큰 허물없이 정치와 경제를 안정적으로 이끌었기 때문에 유권자들은 유도요노에게 5년의 기회를 더 주는 쪽으로 기울었다. 유도요노는 아체의 분리주의 세력과 평화협상을 체결하고, 부패한 전직고위관료들을 구속시키고, 세계적인 경제위기속에서도 경기회복국면을 유지했다는 대통령 재임 중 업적을 근거로 평화, 청렴, 안정의 지속을 호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신중하고 정중한 인성이 잘 돋보이는 유세와 TV토론을 전개하였다.

유도요노-부디오노 팀은 유권자들의 최대 관심사인 경제 문제에서 큰 강점을 보였다. 유도요노는 장군출신이지만 야전사령관이 아니라 주로 행정 정보 업무를 책임졌던 '가방끈이 긴' 장군이었고 보고르농대에서 농경제학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더구나 유도요노는 재무부장관과 중앙은행총재 등 경제 관련 요직을 두루 거친 경제학박사 부디오노를 부통령으로 지명함으로써 경제 정책에 관한 유세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특히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은 유권자들이 유도요노 지지표가 검표될 때마다 "무상교육"이라고 외칠 정도로 매력적인 약속으로 제시되었다.

유도요노는 자신의 정당 민주당(PD)의 후보였지만 부디오노는 특정 정당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 정당 배경이 없는 부통령 지명은 인도네시아 선거정치의 맥락에서 볼 때 특이한 선택이었다. 민주화 이후의 정부들은 서로 다른 정당 출신의 대통령과 부통령의 정당간 연합형식의 정부수반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디오노를 부통령으로 삼은 것은 유도요노의 적실한 승부수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정당간 연합형식의 정부수반은 대통령과 부통령의 갈등을 표출하곤 했는데 지금의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부통령 유숩 깔라는 골까르당(Golkar) 의장으로서 빈번한 독자행보를 취했고 종국에는 대선에 따로 출마하고 말았다. 따라서 정당배경이 없는 부디오노의 부통령선임은 전문적 경제공약의 우위선점에 유리했을 뿐만 아니라 행정전반에 대한 유도요노 리더십의 일관된 관철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어서 다른 팀보다 '강한 정부'에 대한 희구를 충족시킬 수 있고 유도요노의 인기가 굴절 없이 그대로 득표로 연결될 수 있게 하는 비결이었다.

특전사령관의 '민중주의'도, 토착자본가의 '쾌속열정'도 거부

반면에 전 대통령 메가와띠는 2004년 대선에 출마했다가 유도요노에게 패배한 바 있어 신선한 후보가 아니었지만 민주투쟁당(PDIP)은 그녀를 대선 후보로 다시 옹립하였고, 신생 대인도네시아운동당(Gerindra)의 쁘라보오 수비안또(Prabowo Subianto)와 연대함으로써 '새로운 피'를 수혈하였다. 그러나 민주화의 상징인 메가와띠가 수하르토의 사위였으며 민주화에 적대적이었던 특전단 사령관을 지낸 바 있는 쁘라보오와 연대한 것은 너무 지나친 정당연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다수의 정당들이 유도요노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연대할 상대가 적었기 때문이라지만, 정치학자 도디(Dodi Ambardi)의 말처럼, 다음 대선에서 쁘라보오가 메가와띠의 지지를 받아 민주투쟁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은 민주투쟁당의 선명성을 갉아먹었을 것이다. 메가와띠-쁘라보오 팀은 유세연단을 볏짚으로 장식할 정도로 농업을 강조하고 외세가 장악한 천연자원 개발권을 되찾아오자며 강력한 민족주의와 민중 지향 경제 정책을 전면에 내세우는 선동적인 야성을 막판까지 불태웠지만 결국 패하고 말았다.

한편 현 부통령이자 거대정당 골까르(Golkar) 의장 유숩 깔라는 군총사령관 출신의 하누라당(Hanura) 의장 위란또(Wiranto)를 부통령으로 지명하고, 자본가 출신답게 "빠를수록 좋다"(lebih cepat, lebih baik)는 슬로건으로 정력적인 캠페인을 펼쳤으나 가장 낮은 지지를 받았다. 깔라는 현 정권의 업적을 계승하면서도 그 한계를 적절히 비판하였고 유세기간중의 TV토론에서도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사업가적 열정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크게 약진할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결과는 전혀 아니었다. 깔라가 술라웨시 태생으로 주도 자바 출신이 아니라서 적은 지지를 받은 탓도 있겠지만, 내가 만난 사람들은 그가 기업인 출신이라는 점을 더욱 우려하였다. 여러 계급계층과 지역의 다원적 이해관계를 복합적으로 고려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밀어붙이는 식으로 정책을 구사할 것을 우려했고, '토착기업인'을 육성하겠다고 외치지만 실제로는 가족과 측근 기업들의 이익을 챙기는데 권력을 사용할 것이라고 걱정하였다. 심지어 "그가 대통령이 되면 그 집의 가정부마저도 기업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인권 운동도 작은 승리를?

이번 선거는 인권 운동 진영에도 작은 승리를 안겨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의 인권운동은 소규모의 비정부기구들(NGO)이 이끌어왔고 전선형태의 대규모 사회운동체를 결성하거나 그들을 대표할만한 정치가를 배출하지 못했다. 이번 대선에 출마한 세 팀이 모두 장군들을 후보로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보면 민주화 11년간 인권 운동의 노력이 무슨 업적이 달성했는지 의구심이 생길만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권 운동 단체들은 온건한 형태의 '낙선 운동'을 전개하였다. 실종자및폭력피해자대책위원회(KontraS)의 조사국장 빠빵(Papang)은 "인권침해범을 뽑지 말자"는 슬로건을 내걸었다면서,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이었다고 자평했다.

메가와띠는 대통령 재임기에 아체지역의 여성과 아동의 생명권을 위협하는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쁘라보오는 수하르토 말기에 특전단 사령관으로서 당시 자행된 반정부활동가 납치실종사건과 1998년 5월 반화인 집단폭력의 배후로 지목된 바 있고, 위란또는 분리독립을 결정한 동티모르 주민선거 직후에 친인도네시아 민병대가 자행한 폭력행위에 책임이 있다고 지목받고 있다. 인권 운동 단체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기억하자는 "망각에 대한 저항" 전시회와 토론회를 개최함으로써 선거 국면에 관여하는 실천 활동을 전개하였다. 심각한 인권침해 혐의를 받는 전직 장성들이 이번 선거에서 뽑히지 않았으니 인권운동가들의 바람도 결국 실현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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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각에 대한 저항 전시회. ⓒ전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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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회를 관람하는 필자. ⓒ전제성

패자의 길?

민중주의나 경제민족주의 슬로건을 내걸었던 후보들이 패배함으로써 앞으로 인도네시아의 경제정책 기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들을 비롯한 외국인 투자자들에게는 희소식일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한인사회는 유도요노의 장인이 한국 초대대사를 지냈다는 인연으로 오래 전부터 유도요노에 대한 호감을 지녀왔다. 그러나 메가와띠 진영에서 계약직 및 외주노동에 대한 규제를 강하게 요구했고 유도요노의 개방적인 경제정책이 '신자유주의적'이라는 비판을 제기하였고, 깔라 측에서 경제성장을 위해 자본친화적인 정책의 신속한 실현이 필요하다는 비판을 제기한 바 있어서 이런 좌우의 비판을 어떻게 경제정책에 반영할 수 있을지는 의문으로 남아있다.

한 편 정당정치와 정부-의회 관계에서는 약간의 변화가 발생할 수도 있다. 특히 패주한 골까르당이 야당의 길을 갈 것인지 여부가 관심을 끈다. 민주투쟁당은 이미 유도요노 정권 하에서 야당의 길을 일찍이 선언했지만, 수하르토 시대부터 여당 노릇을 해 온 골까르당은 현 정권에도 연립으로 참여했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의 정당정치는 '카르텔'이라고 불릴 만큼 선거 이후에 대다수의 정당이 여당이 되는 일종의 '대연정'의 정치를 펼쳐왔다. 패배한 정당은 자동적으로 야당이 되는 것이 아니라 향배를 정하기 위한 고뇌의 과정을 거친다. 30여년의 역사와 광대한 조직을 자랑하는 골까르가 민주투쟁당처럼 야당의 길을 택한다면 의회의 정부견제력은 지금보다 훨씬 막강해질 것이다. 상대적으로 유도요노 팀은 5년 동안 급성장한 신흥 민주당과 다양한 군소정당들의 지지를 받는 일종의 '무지개연립' 상태이다. 물론 패자들의 일부 분파들이 집권세력의 편으로 넘어갈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대선 패배 이후 골까르의 위상설정은 인도네시아의 정당정치의 향배와 정부-의회 관계를 재편하는 중요한 변수로서 흥미롭게 지켜볼 만한 사안이다.

따져봐야 할 것이 많고, 미흡하고 아쉬운 점도 많지만, 이번 선거가 인도네시아 국민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언급할 만하다. 원심력이 강한 세계최대의 군도국가에서 적도하의 자연적 장애들도 극복하고 거대한 규모의 선거를 큰 분쟁과 사고 없이 치러냈다는 사실은 인도네시아 국민들의 민주주의 체제와 제도에 대한 자긍심과 신뢰성을 높이는데 기여하였을 것이다. 나아가 인도네시아의 선거는 초국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번 선거의 성공을 통하여 지난 5년이 그랬듯이 앞으로도 인도네시아는 아세안(ASEAN) 역내 인권신장과 인간안보의 증진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동남아 민주주의의 기수로서 역할을 한 층 강화할 것이며, 이슬람과 민주주의 접합의 세계적인 모범으로서 계속 회자될 것이다.

전제성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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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9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서 한국이 유엔 인권이사회의 초대 이사국으로 선출되었다. 정부는 ‘세계가 한국의 인권을 인정했다’, ‘국내외 인권 개선노력을 높이 평가했다’며 자화자찬했다.

모든 선거의 문제는 늘 ‘자격’이다. 정부의 홍보대로라면, 이번 이사국의 선출 기준이 ‘인권의 보호와 증진에 대한 기여도’ 그리고 ‘자발적 공약’에 따른 것이니, 선출된 47 나라 모두는 이사국으로서 자격을 충분히 갖췄다는 말이 된다. 더구나 아시아에 할당된 13 이사국 중 7위로 뽑힌 한국을 비롯하여 그 윗 순위에 있는 인도, 방글라데시, 말레이시아, 파키스탄 등의 인권도 세계가 인정한 셈이다.

하지만, 국제인권단체들이 하루에도 몇 건씩 보내는 이들 나라의 고문, 살해, 강간 소식은 무엇인가? 한국 상황만 보더라도, 사형제도는 아직도 폐지되지 않았고, 국가보안법의 자의적 적용과 남용으로 인한 인권침해는 수차례 국제기구로부터 지적받고 있는 문제다. 또 얼마 전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과도한 단속으로 이주노동자들이 사망한 사건은 우리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을 부끄럽게했다. 무엇보다 민주주의 국가임을 포기한 평택 대추리 주민들에 대한 처참한 폭력 진압은, 인권이사회 설립 결의안에 나와있듯, 이사국의 자격을 중지할 만한 중대한 인권 침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가?

후보국들이 내놓은 공약도 대개 일반적이고 모호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권이사국에 뽑혔다고 해서, 그 나라가 인권이사국으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인권단체들은 이런 부실한 공약들이나마 제대로 실행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래서 공약을 검토하고 그 결과를 해당 정부에 전달하면서 부족한 점은 개선토록 제안하고, 이후 이사국으로 선출되든 안되든 공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을 독려하였다. 국제인권단체들은 하나같이 이번 선거를 해당 국가의 인권 개선에 이바지하는 기회로 적극 활용하고자 한 것이다.

유엔 인권이사회의 초대 이사국 선출에 대한 국제인권단체들은 관심은 높았다. 그도 그럴것이 인권이사회는 지난 60년간 활동한 기존 유엔 인권위원회를 대체하게 된 신설기구로, 격상된 법적 지위와 강화된 기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인권이사회의 설립만으로 세계 인권의 보호, 증진을 위한 실효성 있는 논의의 장이 되리라는 평가를 하기엔 섣부르다. 3월 15일 유엔 총회가 통과시킨 인권이사회 설립 결의안엔 구체적인 이사회의 임무와 운영 방식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사국들의 입장에 따라 기대만큼 기능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운영의 성패는 초대 이사국들에 전적으로 맡겨진 것이다. 이는 이번 초대 이사국 선거를 유엔 인권이사회의 첫 시험대라 부르며 인권 단체들이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에 국제인권단체들은 초대 이사국 선거 대응 활동을 활발히 벌였다. 그 중 ‘유엔 워치’ 같은 단체는 특정 나라들을 인권침해국이라며 이사국으로 선출되는 것을 반대하기도 했고, ‘국제앰네스티’는 ‘자격을 갖춘 이사국 선출을 위한 국제캠페인’을 통해, 후보국들의 인권 상황을 웹사이트에 공개하고, 각국 정부에 투표시 정치적 고려를 삼가고 공개된 인권상황를 검토해서 투표할 것을 촉구하였다.

한국의 인권사회단체들은 정부가 이번 이사국 출마를 계기로 국내외 인권상황에 대한 자성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옳은 말이다. 한국의 경제 성장이나 민주화 진전 정도를 볼 때, 아시아 13 이사국 중 하나로 뽑힌 것은 이변이 없는 한 예상된 일이었다. 그러니 한국이 인권이사국으로 뽑혔다는 것이 마치 인권 문제에 대한 면죄부를 받은 것인양 착각하거나 호도해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인권을 보호하고 증진하려는 막중한 역할과 책임이 맡겨진 인권이사국으로서, ‘자격 있다’는 평가를 우리 국민으로부터 받을 수 있도록, 진정한 의지를 보이는 것이다.

더구나 한국은 이제 국내에 머물지 않고 세계 인권, 평화를 위해 적극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상태다. 차기 유엔 사무총장 후보 출마가 이를 단적으로 말하는 것 아니겠는가. 국내 인권 상황조차 개선시킬 노력을 적극 기울이지 않으면서 세계 인권을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인권이사회의 설립 결의안엔, 이사국들이 ‘인권의 보호와 증진에 있어 최고의 기준을 지향해야 한다’고 나와있다. 이사국이 된 한국 정부는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인권이사회가 인권 논의를 위한 실질적인 기구로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물론이고, 말 그대로 인권의 보호와 증진에 있어 최고의 기준을 지향하도록 국내외에서 실체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제 한국 시민사회와 세계 시민사회가 지켜보고 있을테니 말이다.

김은영 (참여연대 정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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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부는 유엔인권이사회 이사국 선거 출마를 국내외 인권상황에 대한 자성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지난 3월 15일 유엔 총회는 기존의 유엔인권위원회(Commission on Human Rights)를 폐지하고 유엔인권이사회(Human Rights Council)를 신설하기로 결의한 바 있다. 이로써 지난 60여 년간 전 세계 인권논의의 장으로 자리잡아왔던 유엔인권위원회가 올해부터 유엔인권이사회로 그 지위가 격상되어 내일 5월 9일 초대이사국 선거와 6월 19일 첫 회의를 앞두고 있다.

기존의 유엔인권위원회는 그동안 나라별 결의안 제도 운용에 있어서의 선별성, 인권의 정치화 경향, 비효율성 등의 문제들로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미국의 관타나모 수용소,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불법 점령, 서구사회의 인종차별 문제 등 서구 강대국들의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눈 감은 채 특정 국가들에 대해서만 나라별 결의안을 채택하여 ‘인권을 정치적 압박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강하게 제기되어 왔다. 미국과 유럽 등 소위 서구 선진국들도 수단, 쿠바 등이 유엔인권위원회 위원국으로 진출하는 것을 비판해왔고, 심각한 인권침해 상황에 대해 유엔인권위원회가 즉각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를 지적해왔다.

앞으로 신설될 유엔인권이사회는 △그 지위를 유엔총회의 직속 보조기구로 하여 인권의 중요성을 높이고 있고 △특정 국가만이 아니라 모든 유엔 회원국들의 인권상황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보편적 정례검토제도(Universal Periodic Review)를 운영하게 되며 △이사국 선출시 후보국의 인권상황을 적극 고려하고 이후 퇴출제도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유엔인권위원회와 차별성을 두고 있다.



그러나 유엔인권이사회가 기존 유엔인권위원회의 한계를 넘어 전 세계의 인권증진과 보호를 위한 실질적인 논의와 협력의 장이 될 것인지는 아직 판단하기 이르며, 내일 (5월 9일, 한국시간 5월 10일 새벽)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릴 예정인 초대 이사국 선거는 유엔인권이사회 초기운영의 성패를 가늠하는 첫 시험대가 될 것이다. 유엔인권이사회의 구체적인 업무절차들을 만들어나가는 논의에 있어 초대 이사국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일 선거에서는 아시아 지역의 13개국을 포함하여 총 47개 이사국이 선출될 예정이다.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한국, 일본, 중국 등 18개국이 출마를 선언하였고 각 후보국들은 국내외의 인권상황 개선과 유엔인권이사회의 운영 등에 대한 기여와 전망을 담은 공약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지난 4월 19일 발표된 한국정부의 공약 내용과 그 작성과정을 볼 때, 우리는 정부가 유엔인권이사회 이사국으로서 국제사회의 인권증진을 위해 수행해야 할 막중한 책임과 역할에 관해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하였는가에 대해 깊은 의문과 실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국내인권 상황에 기여하기 위해 ‘시민사회와의 협력과 파트너십 강화’를 공약 사항으로 내걸었지만, 이사국 입후보를 위한 인권정책 공약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시민사회와 어떠한 논의도 시도하지 않았다. 공약의 이행에 있어 주된 역할을 하게 될 실제 주무부처 간 논의도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공약을 영문으로만 작성하여 인권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접근권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이러한 절차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공약의 내용에 있어서도 이주노동자협약 등 한국정부가 아직 가입하지 않고 있는 주요 인권조약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헌법상 기본권인 결사의 자유에 관한 자유권규약 조항에 대한 유보 철회 의지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유엔인권이사회의 운영에 있어 비정부기구들(NGO)의 참여와 역할에 대한 입장도 밝히지 않고 있다.

유엔인권이사회 이사국으로서의 자질 평가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내외 인권상황 개선을 위한 한국정부의 전망과 의지일 것이다. 자유권규약위원회를 비롯한 유엔의 인권기구들이 국가보안법에 의한 인권침해문제를 수년 동안 반복하여 지적하여 왔지만 국가보안법의 자의적 적용과 남용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20만 명 이상의 미등록이주노동자 문제를 과도한 단속으로만 해결하려 하고 있어 강제추방의 위기에 몰린 이주노동자들이 목숨까지 잃는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숫자인 1,000명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이 수감되어 있으나 대체복무제 등 그 해결을 위한 어떠한 방안도 강구하지 못하고 있다. 미군 기지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평택 주민들의 거주권, 발전권이 침해되고 있으며, 경찰과 군 병력을 동원한 폭력적 시위진압으로 지난주에도 500여명의 평택주민과 인권옹호자들이 연행되었다. 정부가 강력 추진하고 있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그 대비책에 대한 충분한 논의 없이 건강권, 교육권, 노동권, 식량권 등 많은 인권침해 문제를 예고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버마 군사독재 정부와의 협력 속에서 벌이고 있는 대규모 가스개발 사업은 버마 민중들의 생존권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한국의 인권현안을 일차적 국정과제로 삼아 한국의 인권정책을 재정비함과 동시에, 나아가 독재와 가난,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여러 개발도상국의 인권증진에 기여할 적극적인 인권정책을 세움으로써 국제사회에 모범을 보이는 것이야말로 유엔인권이사회 이사국의 진정한 역할임을 우리 정부는 명심해야 한다.

국내외 인권상황의 개선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지 않는 국가들이 이사국으로 선출된다면 이는 앞으로 유엔인권이사회의 활동 전반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불러올 수도 있다. 정부는 이번 유엔인권이사회 선거 출마를 국내외 인권상황에 대한 자성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2006년 5월 8일

국제민주연대,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사단법인 유엔인권정책센터, 성공회대학교 인권평화센터, 아름다운재단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인권운동사랑방, 전쟁없는 세상, 참여연대, 천주교인권위원회, 평화인권연대,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이상 14개 인권사회단체)

[참조] 유엔인권이사회 이사국 선거, 한국정부의 공약 내용

영어원문: 유엔총회 웹페이지 (http://www.un.org/ga/60/elect/hrc) 참조

국내 인권상황 개선을 위한 공약

- 여성차별철폐협약 선택의정서 (개인청원권) 가입

- 자유권규약 14조 5항 (모든 사람의 상소권 인정), 고문방지협약 21조와 22조, 여성차별철폐협약 16조 1(g)항 (가족의 성씨 및 직업의 동등한 선택권)에 대한 유보철회 검토

- 고문방지협약 선택의정서 (국내 구금시설 방문 및 조사) 가입 검토

- 국제노동기구(ILO) 기본조약 중 87호 (결사의 자유), 98호 (단체협약권), 29호 (강제노동), 105호 (강제노동폐지)를 2008년까지 비준

-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2007-2011)을 2006년 말까지 확정

- 인권의 주류화 실현을 위해 공공의 인식고양을 위한 인권교육 강화

- 공공정책의 개발과 이행, 평가의 과정에서 시민사회와의 협력과 파트너쉽 강화

국제사회의 인권증진을 위한 공약

- 국제인권조약 감시기구의 개혁 논의에 지속적으로 기여

- 국제인권조약에 대한 이행보고서 제출기한 준수, 조약감시기구의 권고에 대한 신속한 이행

- 기술적 협력을 통해 유엔 회원국들의 인권의무 이행을 지원

- 민주주의, 법의 지배,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 강화를 위한 양자적, 다자적 협력

- 민주주의 공동체 활동을 통해 민주적 제도 정립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는 국가들과 협력

- 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의 업무 향상을 위해 기여

- 국제인권조약 미가입국들이 주요 조약을 가입하도록 독려

- 장애인권리협약에 관한 특별위원회 업무 등 인권조약의 성안을 위한 논의에 적극 참여

-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지역 인권기구 설립을 위한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

- 생명윤리, 정보기술(IT) 등 새로운 인권문제에 관한 기준을 정립해나가는 과정에 기여

유엔인권이사회의 운영에 대한 공약

- 유엔인권이사회가 투명한, 생산적, 실질적 기구가 될 수 있도록 업무방식 논의에 적극 참여

- 인권침해에 신속히,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이사국으로서의) 역할을 수행

- 시민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가 동등하게 강조,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

14 인권사회단체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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