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2일(화)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일본대지진과 핵사고 피해지원 및 핵으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염원하는 시민사회의 공동선언을 위한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일본대지진, 핵사고 피해지원과
핵으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염원하는
시민사회 공동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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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매우 참담한 심정으로 여기에 섰습니다.
지난 11일 일본에서 일어난 대지진은 일본 국민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습니다. 공식 사망ㆍ실종자가 2만명에 육박하고, 40여만명이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대피소에서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대한 자연재난으로 희생되고 고통받고 있는 일본 국민에게 깊은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과거 역사 문제도 있지만, 많은 경제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는 이웃국가이기에 우리는 일본 국민들이 직면하고 있는 시련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이번 대지진과 쓰나미에 의한 막대한 피해뿐만 아니라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 또한 크나큰 재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도 방사능 물질이 계속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대형 핵참사로 이어질 수 있다는 공포와 불안감도 커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본 국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인류와 자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지 않도록 이번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가 조속히 수습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에 한국의 시민사회단체와 정당들은 일본 대지진과 핵사고의 피해를 지원하는 활동을 함께 벌이려고 합니다. 일본에서 현재 일어난 엄청난 규모의 참사에 비하면 너무 미약한 힘이지만, 우리 국민을 비롯하여 전 세계가 힘을 모은다면 일본 국민들이 현재의 참사를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번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를 계기로 핵으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얼마 중요한 일인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지진 등 자연재해는 인간의 힘으로 예측하거나 대비하기에 한계가 있지만, 자연재해에 뒤따라오는 핵발전소 폭발사고는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한국보다 2배 이상 많은 핵발전소를 보유하고 있지만, 국토 면적당 핵발전소의 숫자는 오히려 한국이 더 높습니다.  일본에서 일어난 재난이 한국에서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이를 막기 위해서는 핵발전 위주의 에너지정책이 전환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민사회단체와 정당들은 일본 대지진과 핵발전소 폭발사고로 일본 국민들이 겪고 있는 피해를 지원하고 핵으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광범위하고 다양한 공동행동에 나설 것을 선언합니다. 온 국민이 함께 일본 국민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또다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핵발전 정책을 전환할 것을 촉구합니다.


3월 22일(화)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일본대지진과 핵사고 피해지원 및 핵으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염원하는 시민사회의 공동선언을 위한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2011년 3월 22일(화)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일본대지진과 핵사고 피해지원 및 핵으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염원하는 시민사회의 공동선언을 위한 기자회견


오늘 선언을 시작으로 우리 시민사회, 종교, 제정당은 드리마일 핵사고 발생일 3월 28일부터 체르노빌 사고 발생일 4월 26일까지 일본대지진, 핵사고 피해지원과 핵발전 정책전환을 위한 공동행동기간으로 선언합니다.

첫째, 우리는 일본 대지진과 핵사고로 인한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일본 사회가 이 같은 재난으로부터 조속히 복구되기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3월 28일 저녁 7시에 시민들과 함께 추모행사를 진행할 것입니다. 또한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언론사 등 각계가 참여하는 모금활동을 비롯하여 고통 받고 있는 일본 시민들을 지원하고 격려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전개해 나가겠습니다.

둘째, 핵으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정부의 핵발전소 정책의 전환을 촉구하는 활동을 벌여 나가겠습니다. 안전한 핵발전소란 없다는 것이 일본의 핵발전소 사고로 다시 한 번 확인되었습니다. 우리는 정부의 핵발전소 수명 연장과 신규 핵발전소 건설 계획을 중단시키기 위한 활동을 전개할 것입니다. 또한 정부가 계획하고 있는 핵발전소 안전진단이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이루어지도록 국회,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는 민관공동조사활동을 촉구해 나가겠습니다.

셋째, 방사능 물질이 인체와 자연에 끼치는 영향이나 먹거리 안전문제 그리고 핵폐기물 처리 문제 등 핵이 우리의 일상생활을 얼마나 위협할 수 있는지 시민들에게 알려나가겠습니다. 일본 핵사고의 진상을 시민에게 알려나가는 한편, 만일의 핵재난에 대비하는 시민안전 대책을 만들어가겠습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시민과 함께 핵으로부터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11. 3. 22.
  
일본대지진, 핵사고 피해지원과 핵발전 정책 전환을 위한 공동행동  

가톨릭환경연대, 경주핵안전연대, 기독교환경운동연대, 나눔문화, 녹색교육센터, 녹색교통운동, 녹색연합, 다함께, 문화연대, 민주노동당, 민주당,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민주언론시민연합, 보건의료단체연합, 부안시민발전소, 사회당, 사회진보연대, 삼척핵발전소유치백지화위원회, 생명살림연구소, 생태지평, 시민평화포럼,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에너지전환, 에너지정의행동, 여성민우회, 여성환경연대, 영광군농민회, 영덕핵발전소반대 500인결사,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철거민연합중앙협의회, 진보신당, 참교육학부모회, 참여연대, 초록교육연대, 평화네트워크, 한국노동조합총연맹, 한국미래연대,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진보연대, 한국YMCA전국연맹, 핵으로부터 안전하게 살고 싶은 울진사람들(핵안사), 환경과공해연구회, 환경을 생각하는 교사모임, 환경재단, 환경운동연합, 환경정의. KYC, 흥사단, (사)에너지 나눔과 평화




*시민사회공동선언문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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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체가 나를 부끄럽게 했다

비행기에 탑승하고서야 자카르타까지 7시간이나 걸리는 걸 확인하였다. 목적지가 어디든 몇 시간이 걸리든 별로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뭔지 모르게 피곤하기만 한 한국에서의 일상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했다. 이렇게 허둥지둥 시작한 인도네시아 방문은 일주일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7시간의 지루할 수 있는 비행시간은 오히려 안락한 휴식이 되어 주었다.
 
한밤중에 자카르타에 도착해 짐을 찾아 세관을 나가려고 하는데, 경찰인지 세관원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박스로 싼 짐을 질질 끌어 내며 뭔가를 요구한다. 어쩌란 말인가 싶어 귀를 기울였더니 결국은 돈을 내라는 애기다. 언젠가 남의 애기를 인용해서 인도네시아의 부패문제를 민주주의와 인권의 걸림돌로 지적한 적이 있었는데, 그 사실을 생생하게 눈 앞에 두고도 그냥 무기력하게 공항을 빠져 나왔다. 뭔가 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자괴감이 한 순간 스치고 지나갔다. 마중 나오기로 한 차는 한참이 지났는데도 오질 않는다. 몇 대의 담배를 피우고 한국에서는 한 가닥씩 하는 일행들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펴 보았다. 모두가 이 상황을 얼마큼은 받아 들이고 있는 듯 하였다. 달리 방도가 없으니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얼마를 더 기다린 후에 차가 도착하고 일행은 공항 근처 호텔에서 하루 밤을 묵게 되었다. 로비에서부터 아늑하게 뻗어 있는 긴 복도를 좌우로 몇 번 돌아서야 겨우 방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가라오케인지 나이트클럽인지 모를 시설이 방과 한 층에 있었다. 클럽 앞에는 한 가지로 유니폼을 입고 어려 보이는 여성 종업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공항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성 종업원들의 미소를 외면한 채 무기력하게 지나쳤다. 일행 중에 과격한 페미니스트가 있었다면 그렇게 무기력하지는 않았을까? 인도네시아에서의 첫날밤은 우리 일행의 정체성과 한계를 분명하게 설명해 주었다. 지금의 생각이지만 뭔가 하지 않는 것이 이유야 어찌되었든 잘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싶다. 내가 보편적이라 믿었던 것들이 어떤 사람에게는 이상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여행하는 동안 여러 차례 느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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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쓰나미로 인해 마을 한 가운데까지 7㎞를 밀려와 정박한 산만한 화물선박. ⓒ김신

 잠을 자는 둥 마는 둥하고 제법 차가운 열대의 새벽 공기를 쐬면서 다시 공항으로 가서 수마트라 섬 최 북부의 아체주로 향하였다. 공식일정이 시작된 것이다. 4시간이 걸려 도착한 아체주 공항은 시골 간이역을 연상시켰다. 공항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냥 나왔다. 쓰나미때 이곳 공항까지 바닷물이 넘쳐 그나마도 공항이 제 기능을 못해 구호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아직 아침인데도 5월의 뜨거운 열기는 피부를 찔러대며 파고들었다. 자카르타와는 다르게 공기는 신선하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상쾌하다. 무엇보다 담배 파는 가게직원이 없어 안달하는 일행에게 피우던 담배를 갑 채로 가지라고 권하는 공항직원들의 여유로움과 친근함이 자카르타와는 사뭇 다르다. 또 택시 호객과 전화카드를 팔려고 젊은 상인들이 진을 치고 있던 자카르타 공항과는 달리 이곳 공항입구는 망고를 팔러 나온 농부 몇 사람과 택시기사 한둘이 전부다. 망고를 팔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자기네끼리 깎아 먹고 노닥거리고 있다. 일행은 마중 나오기로 한 차를 기다리다 망고 한 바구니를 샀다. 노란 속살을 나누어 먹으면서 노닥거리는 사이 차가 도착했다. 역시 두 시간을 기다렸다. 아체의 첫인상은 마중 나오기로 한 차를 두 시간 기다린 것을 빼고는 사람도 공기도 그리고 일행들의 분위기도 모든 것이 자카르타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다.
 
숙소가 분명히 호텔인데 한참을 달려도 호텔은 고사하고 여인숙도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쓰나미가 다 휩쓸어 버린 것인가라고 의아해하고 있는데, 눈앞에 3층의 꽤 괜찮은 호텔이 갑자기 나타났다.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이곳에 호텔이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현지에서 우리 일행의 이동과 프로그램에 대해서 간사역할을 해준 단체는 SIRA(Central Information Referendum of Aceh)인데, 아체주 부지사가 된 나자르(37세)를 대표로 해서 중앙정부와의 분쟁 당시 자치획득을 위해서 주민투표를 추진해왔고, 지금은 정당으로서 변형과정을 거치고 있는 반정당적 성격을 띄고 있었다. 누구와도 영어가 통하지 않은 관계로 SIRA에 대한 많은 애기는 들을 수 없었다. 다만 한국의 경험에 비추어 정치를 하기에는 너무나 순박한 사람들이고 20~30대의 젊은 청년들로 리더십을 구성하고 있으며 어떤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빈곤과 복지가 주요 관심사라는 점이다. 그리고 당원 중에 여성과 노인 심지어 중년의 남성은 단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SIRA뿐 만 아니라 몇 개의 현지 NGO를 방문했을 때도 거리에서도 시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30년 넘는 분쟁으로 수 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그나마도 쓰나미가 휩쓸어 버린 아체의 현실이다. 굳이 쓰나미 피해 현장을 찾아 다닐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성들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이슬람법을 주법으로 삼고 있는 아체의 문화적 요인도 있었겠지만, 전쟁과 재해의 피해자는 언제나 사회적 약자그룹에게 더 가혹한 것이니 남성보다는 여성이 젊은이 보다는 노인의 피해가 심각했으리라. 이러한 사실은 예정에 없던 노동절행사에 동원되었을 때 더욱 더 실감이 났다. 겨우 50여명이 노동절행사를 갖고 있었다. 쓰나미가 파괴한 것은 단순히 자연환경과 삶의 터전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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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체의 노동절 행사 ⓒ김신 

쓰나미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들어온 국제기구, NGO들이 저마다 내건 영문단체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거의 문맹의 상태에서 우리 일행은 스스로의 자치권을 포기한 채 SIRA의 안내에 따라 먼저 나자르 부주지사와 간담회를 가졌다. 부주지사는 과거의 아픈 기억을 자치권 속에서 풀어내는 것을 과제로 안고 있었다. 지난 30여 년 간의 투쟁의 역사를 민주주의의 역사로 정착하고 과거 분리독립세력을 평화의 세력으로 사회화하여 과거의 상처가 민주적 자치권 속에서 인권과 평화의 문화로 거듭나는 아체인의 삶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일행에게 아체인들은 투쟁에 집중한 나머지 한번도 민주적 삶을 살아 보지 못해 민주주의를 피상적으로 알 뿐이라며 한국과의 민주주의 교육 교류를 제안하였다. 순간 부끄러워졌다. 민주주의가 제도만을 애기하는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의 삶 속의 민주주의 애기라면 오히려 아체의 상황이 좋아 보였다. 가부장적이고 이기적인 권위주의가 가정, 직장, 여타 사회 활동을 지배하고 있는 한국에서의 일상에 익숙한 나에게 직원이 있는데도 단체대표가 길거리 상인과 사소한 흥정을 하고 운전기사와 수행직원이 있는데도 고위공무원이 시장에서 산 점심을 담은 비닐봉투를 흔들고 다니고 상인들 간의 사소한 시시비비에 끼어드는 모습은 뭔가 역할이 잘못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새로웠다.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 학력, 무엇보다 나이와 상관없이 자유롭게 주제를 공유하고 뭔가를 토론하는 모습은 여행 내내 자주 볼 수 있었다. 아체인은 태생문화적으로 민주적일 수 밖에 없다는 어느 동남아학자의 말이 생각난다. 그 태생적 문화가 무엇인지는 아직까지 분명하지 않지만….
 
쓰나미 피해 재건현장과 30년 넘게 지속된 오랜 분쟁의 희생자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사회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쓰나미가 파괴한 아체주의 자연환경과 삶의 터전은 국제사회의 원조로 상당부분 복구되고 있거나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다만 마을 한 가운데까지 7㎞를 밀려와 제 멋대로 정박한 산만한 화물선박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안내자는 성룡이 기금을 내서 중국정부가 재건했다는 성룡마을로 우리 일행을 데리고 갔다. 중국식 건축물로 마을 정문을 세우고 거기에 중국어로 "중국과 인도네시아의 우의촌" 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옆으로는 홍보용 비석을 세워 뭐라 장황하게 새겨놓고 있었다. 정문에 들어서자 우뚝하게 세워진 이슬람사원이 눈에 띄었다. 저 멀리 인도양의 수평선에서도 알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지대에 재건된 마을은 5000여 가구는 되어 보였다. 아체의 전형적인 가옥구조 양식을 띄어 빨간색 지붕과 아이보리색 벽으로 지워진 보기 좋게 일률적인 크기와 모양의 가옥들이 장관이었다. 마을 앞으로는 인도양이 내려다 보이고 주변으로는 녹색의 열대 자연이 펼쳐져 있고 마을 끝까지 시멘트로 포장된 잘 정돈된 차도가 지그재그로 엎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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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룡이 기금을 내서 중국정부가 재건했다는 성룡마을. ⓒ김신 

마을은 차도를 따라 형성되었는데, 언뜻 어느 휴양지에 온 기분이었다. 마을까지 차로 오면서도 급경사가 힘들었는데 입구에서 내려 마을에 들어서자 얼마 못 가 주저 앉게 되었다. 어찌 된 일인지 마을 어디에도 사람이 없었다. 마을 입구에서 몇 가지 생필품을 파는 가게 주인과 아이들 서너 명을 본 게 사람의 전부다. 가게 주인에 의하면 교통수단은 없는데 생계를 꾸릴 수단은 멀리 있어서 주민들이 새벽에 나가 저녁 늦게 집에 들어오기도 하고 아예 일터가 가까운 곳에 간이 숙소를 마련하고 산다고 한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학교도 없고, 시장도 없고, 병원도 없어서 이주된 주민들이 다시 원래 살던 곳으로 많이들 빠져나가고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갈 곳이 마땅한 건 아닌데, 이 마을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떠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굳이 주거권에 대한 개념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잘못된 이주정책의 전형적 모습이다. 이주하게 될 주민들의 의견은 들어나 봤을까? 이렇게 만들어진 마을과 사회시설이 아체에 몇 개나 될까? 가게주인도 곧 마땅한 생계거리를 찾아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막막하게 허공을 주시하며 눈시울만 붉혔다. 그 시선을 따라 가보니 하늘은 구름이 한 점 없이 파랗기만 했다.
 
우리 일행도 이제 아체를 떠날 채비를 해야 했다. 도착하자 마자 일그러지기 시작한 일정에 따라 원래의 일정표 상의 순서와 시간은 오간 데 없어지고 그냥 모든 걸 SIRA에 맡긴 채 진행한 이틀간의 아체 여행을 마무리하고 공항으로 향하였다. 자카르타로 가는 비행기가 두 시간 늦게 출발한다고 한다. 왜 모든 게 두 시간인지 모르겠다. 이쯤 되자, 우리 일행 누구도 이것을 문제라고 느끼거나 이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두 시간이 오히려 반가웠다. 아체에서의 이틀 동안 비록 좋아하지 않는 생선을 주식으로 강요당하고, 가끔은 코코넛으로 배를 채워야 했고, 자치정부 수립 이후의 사회 상황을 현지인의 설명 없이 스스로 알아서 살펴 봐야 했지만, 가끔씩 먹여주는 아체 커피의 향긋함에 느긋해 지고, 아무런 경고 없이 데려다 준 해변가, 파도와 바람이 아니면 누구도 침범해보지 못했을 것 같은 백사장에서 누리던 잠깐의 휴식을 생각하면 나의 선택권과 자치권은 싸 그리 무시되었지만 모든 것이 다 그걸로 그만이다.
 
비행기 창 밖으로 보이는 아체의 산과 바다 강줄기를 사진을 찍듯 눈 속에 담았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다음에 다시 오게 된다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유럽의 시티플래너들이 아체에서 그 플랜리란 것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것이 진실로 바른 길이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김신/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국제사업단 전문위원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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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뉴스레터를 통해 한국의 대외원조 실태와 제도적 미비점, 대외원조에 대한 우리 국민의 생각, 정부의 정책 의지 등 한국의 ODA 실태 전반에 대해 다각도로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호부터는 주요 원조 공여국의 원조 역사, 원조 규모, 집행 체계, 정책 등을 살펴보며 한국 대외원조의 발전에 도움을 줄 시사점을 찾고자 합니다.

원조 공여국가 연재가 끝나면, 협력국가(수원국), 지역, 원조 영역별 등으로 확대하여 뉴스레터를 발행하려고 하니, 지속적으로 관심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유럽연합의 대외원조는 전 세계의 원조국 중 원조 규모가 가장 크며, 가장 효과적으로 원조를 수행하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비난여론이 많은 다른 원조국과 달리, 유럽연합의 대외원조가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배경에는 지속적인 원조 프로그램의 개발과 투명한 평가 과정, 원조 전문가 육성, 끊임없는 대외원조의 개혁을 통하여 효율적인 대외원조가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전 세계 160개국이 유럽으로부터 양자 간 또는 다자간 형태의 지원을 받고 있다. 유럽연합 공동체와 유럽연합 소속 회원국들이 제공하는 국제원조의 규모는 매년 약 300억 유로로, 전 세계 원조 흐름의 55%에 해당한다. 유럽연합 공동체 차원의 단독 대외원조 규모는(소속 회원국들의 양자적 대외원조 규모를 제외한 규모) 전 세계 국제원조의 10%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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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원조의 역사

유럽의 대외원조는 지난 세기 유럽의 식민지 경영에서 시작하였다. 프랑스, 독일, 이태리, 스페인, 포르투칼, 영국 등과 같은 국가들은 식민지 경영으로 막대한 부를 창출하고 식민지에 학교, 병원과 같은 기반시설을 지원하였다. 위와 같은 경험으로 유럽은 다른 신생 원조공여국과 달리, 원조가 필요한 지원국에 대한 원조 프로그램 진행과 운영에 관한 정보를 많이 축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유럽은 1957년 로마조약을 통하여 유럽의 식민지가 집중된 대륙에 집중 원조를 실시할 것을 천명한다. 이에 따라 유럽공동체는 초기에 아프리카, 환태평양과 카리비안 국가들을 중점적으로 지원하였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유럽대륙이 지배하고 있던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함으로써 유럽의 원조 정책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1993년 유럽공동체가 공식적으로 발족하면서 유럽연합은 개발협력정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법적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1993년 발효된 마르트리히트 조약에 따르면 “개발협력정책의 목표는 개도국의 지속적인 경제적ㆍ사회적 개발을 촉진하고 세계 경제에 개도국을 점진적이고 조화롭게 통합하는 것이며 개도국의 빈곤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에 따라 유럽연합의 원조는 세계 최대의 공여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법적인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1990년대 유럽연합의 원조의 경향은 동부유럽과 유럽대륙 주변국으로 집중되었다. 유럽연합은 민주화로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동유럽 신생 회원국들의 경제, 사회 개발을 지원하기 위하여 막대한 원조를 제공한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유럽연합의 원조는 발칸, 팔레스타인, 북한, 파키스탄 등의 분쟁지역으로 다양화되었다. 이는 과거 유럽연합의 개별 회원국들이 전 식민지 국가들에 대한 기득권 유지를 목표로 하여 지원했던 대외원조 특성에서 벗어나 유럽연합이 전 세계 분쟁의 조정자로서의 역할로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외원조의 개혁

유럽연합의 대외원조는 1990년대까지 회원국들의 정치적인 이해관계와 이익의 상충관계로 많은 혼란을 겪어왔다. 또한, 비효율적이고 방만한 운영으로 여론의 지탄을 받아왔다. 그래서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 대외원조의 개혁은 유럽연합 집행이사회의 가장 큰 이슈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2000년 유럽연합은 대외원조 정책의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한다. 유럽 전역의 원조 전문가와 지역 전문가들이 모여 대외원조 개혁에 관한 워크샵을 1여년에 걸쳐 진행하여 개혁안을 만들었다.

2000년 개정된 유럽연합의 대외원조 개혁안은, 첫째, 효율적인 대외원조 정책의 시행을 위하여 유럽연합 집행위에 집중되어 있던 대외원조 관리의 권한을 63개 대표부로 분산하여 원조 수혜 지역의 원조 실행 과정을 현지 대표부가 관리하도록 했다.

둘째, 유럽연합은 더 많은 비연계 원조(untied aid)를 제공함으로써 원조 효율성을 높였다.

셋째, 2001년 1월 1일 새로운 전담 수행 기구인 유럽연합 원조협력청(Europe Aid)을 창설하여 프로젝트의 발굴, 확인, 시행과 평가 등 대외원조 사업의 관리업무를 총괄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넷째, 원조의 질적 향상을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수혜 국가별 전략보고서(Country Strategy Paper)를 도입하여 대외원조의 평가를 질적으로 향상시켰다.

대외원조의 진행 과정

유럽연합의 대외원조는 유럽연합 대외협력위원회(EU External Relations Committee)와 유럽연합 개발위원회(Development Committee)에서 55개 상주 유럽연합 대표부의 도움을 얻어 수혜국가에 대한 전략보고서와 원조실행 보고서를 작성하여 유럽연합 집행이사회(European Commission)에 제출하는 과정을 거친다.

수혜국가에 대한 전략보고서와 원조실행보고서는 유럽연합 집행이사회의 승인을 받고 유럽연합 원조협력청을 통하여 해당 수혜국가에 본격적인 지원을 실시한다. 수혜국가의 원조의 전달과정과 수행과정에 대한 평가는 수혜국가에 상주하고 있는 유럽연합 대표부가 주기적인 평가보고서를 통하여 관리된다.

평가보고서는 매년 정기적인 감사를 통하여 투명성 여부를 확인하고 다음해 사업에 반영된다. 또한 작성된 평가보고서와 감사보고서는 독립된 민간기업을 통하여 다시 재분석되어 유럽연합 원조협력청에 전달된다. 평가보고서, 감사보고서, 분석보고서는 원조 전문가와 학계 등에 전달되어 공유하게 된다.

분쟁이나 자연재해로 인해 긴급한 구호가 요구되는 지역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유럽연합 인도지원사무국(ECHO)이 주관한다. 쓰나미, 룡천폭발사고, 파키스탄 지진 등 긴급지원이 필요로 요구되는 곳은 유럽연합 인도지원사무국(ECHO)이 비축된 긴급 지원물품을 최단시간 안에 지원한다. 인도주의 지원이 필요한 해당지역에 대해서는 긴급 보고서를 작성하여 유럽회원국에 긴급호소절차를 통하여 더 많은 지원을 요청한다.

대외원조의 특성

유럽연합의 대외원조는 장기간에 걸친 원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수혜국가에 가장 필요한 원조를 제공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다. 대규모적인 물량 지원과 건설사업 등과 같은 선심 사업보다는 현지 지역에 맞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맞춤형으로 제공한다.

프로그램 지원은 국제기구와 유럽연합 회원국 소속 NGO등과 결합하여 농촌개발 사업, 교육, 의료 등에 중점 지원하고 있다. 특정 프로그램에 전문적인 경험과 지식을 비축한 NGO가 유럽연합의 대외원조를 지원받아 수혜국가 중 가장 필요한 지역에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예를 들면, 독일 NGO의 평안북도 농자재 지원 사업, 프랑스 NGO의 아체지역의 병원운영 사업 등이 있다. 현재 유럽연합의 대북지원활동을 살펴보면 교육프로그램, 의료, 취로 사업 등에 집중하고 평양지역보다는 가장 수혜가 필요한 평안남북도 지역에 집중하여 진행하고 있다.

대외원조의 비율

세계 대외원조 공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개발원조위원회(DAC)의 주요 회원 국가들의 총 대외원조 규모가 1990년대 이후 줄어들고 있는 추세와 달리, 유럽연합 회원국과 유럽연합은 최근 대외원조 정책을 더욱 늘려가고 있다.

유럽연합 회원국들은 2002년 3월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각료이사회에서 2006년까지 GNP 대비 ODA의 비율을 최소 0.39%까지 증액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유럽연합의 공적원조 규모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또한 유럽연합은 2015년까지 몬테레이 유엔 개발재원국제회의(International Conference on Financing for Development)에서 확인된 바 있는 선진국들의 향후 도달 목표인 GNP 대비 0.7%로 ODA를 증가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단계적으로 2006년까지 ODA를 0.33%까지 증가시켰고 2010년에는 0.51%까지 증가시킬 예정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원조를 받고 있는 유럽연합의 신생회원국인 체코, 슬로바키아, 폴란드, 에스토이나, 헝가리,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몰타, 슬로베이나, 싸이프러스 등이 원조 공여국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일례로 유럽의 신생회원국인 에스토니아의 ODA비율은 0.01%에 그치고 있다. 이에 따라 유럽공동체의 평균 규모액을 유지하기 위하여 서유럽국가들은 대외원조 비율을 더욱 높이고 있다.

매년 유럽연합 소속 회원국의 개발 장관들과 유럽연합 대외협력위원회는 함께 모여 유럽연합의 대외원조 진행과정에 대하여 평가한다. 최근 회의는 2006년 4월 10일~11일까지 룩상부르그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서 유럽연합은 빈곤퇴치와 개발을 위한 글로벌 파트너쉽을 추구하고 2015년까지 유엔이 제시한 0.7%로 ODA를 늘리는 것에 대해 결의했다.

김여정(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ODA연구팀)


※ 편집자주: 오랜 원조 역사의 경험으로 성공적인 대외원조를 시행하고 있다고 평가받는 유럽연합의 사례는 공여국으로서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과는 다르다. 그러나, 협력국가(수여국)의 요구와 긴밀한 관계 속에서 가장 효과적인 대외원조를 실시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고 있는 현재 한국 ODA의 현실에서 경청할 점들이 있다. 비록, 유럽연합의 대외원조가 인도주의적 차원보다는 유럽대륙의 식민지 이익 창출을 위해 시작했다고 평가받지만, 식민지 경험을 통해 확보된, 현지에 가장 필요하고 적절한 원조를 수행하고 있는 대외원조 집행 과정에 대해서 좀더 연구해봐야 할 것이다. 다음 편에서는 유럽연합과는 반대로 인도주의적인 기원으로 대외원조를 시작한 캐나다와 비교하면서 우리나라 대외원조의 나아갈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 첨부화일: 뉴스레터 원본
국제연대위원회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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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ODA정책감시 뉴스레터 2호



국제적 합의

1996년 OECD가 제안했고, 2000년에 이르러서 유엔이 결의한 것은, ‘지구촌 빈곤을 감소시키기 위해 국제협력이 불가결하다’는 주장과 함께, ‘부유한 국가들이 대외원조기금을 증액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안된 수준은 대체로 국민총소득(GNI) 대비 0.7%를 대외원조기금으로 집행하자는 것이며, 이에 국제사회는 2000년 새천년개발목표(MDGs)에 합의하고 ODA규모를 GNI의 0.7%까지 올리고 2015년까지 지구촌의 빈곤을 반감하자고 합의했다. 이후 개도국과 빈국의 빈곤문제는 국제사회의 정치적 의제로 자리를 잡게 되고 빈곤을 반감하자는 지구촌 빈곤퇴치 화이트 밴드 캠페인이 2005년 한 해 내내 한국과 지구촌을 울렸다.

전 세계적으로 한해 1조 달러가 전쟁 비용으로 쓰이고 있는 반면, 대외원조기금은 680억 달러에 그치고 있다. 즉 국제사회의 빈곤퇴치 공동계획에 국가들이 공감은 했으나, 실제로 그 약속은 잘 이행되고 있지 않는 것이다. 2005년 유엔 밀레니엄+5 회의에서는 5년 전 선언한 새천년개발목표에 따른 실적을 점검하였는데,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등은 GNI 대비 0.7%를 상회하는 기금을 대외원조로 쓰고 있는 반면, 대부분의 국가는 2000년 목표 설정 당시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못 다한 숙제를 서둘러 2009년까지 지금의 원조규모 0.06%를 배가하고 2015년까지 4배까지 늘리겠다고 뒤늦게 선언했다.

기실 우리나라는 한국전쟁 이후 국제사회로부터 203억불에 달하는 원조를 제공받았으며, 국제사회의 원조를 받았던 개도국 중에 가장 성공적으로 경제개발과 민주화를 이룩한 국제원조의 성공사례로 꼽히고 있다. 이것은 또 한국이 받는 나라(수원국)에서 주는 나라(공여국)가 되었으니 국제적으로 대외원조의 모범사례 모델을 창출해 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규모와 내용으로 보아 한국은 대외원조의 시범 사례로 꼽히기는커녕 규모면으로서도 OECD 가입국 중 최하위를 달리며 대외원조의 내용도 OECD 권고사항을 준수하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한국, OECD 가입국 중 최하위 규모

한국의 ODA 규모는 OECD 가입국 중 최하위로 회원국 평균치인 0.1%를 훨씬 못 미치는 0.06%를 몇 년째 기록하고 있다. GNI의 0.92%를 ODA로 제공하는 노르웨이의 1인당 국민소득은 한국의 4배인데 비해, 1인당 ODA 공여액은 1인당 8달러인 한국에 비해 무려 57배에 달하는 454달러다. 일본은 1인당 국민소득이 12,000불이던 1985년에 한국의 10배 규모, GNI의 0.29%인 3,797억불의 ODA를 제공하였다. 또한 한국과 경제규모가 비슷한 스위스나 핀란드, 그리스와 같은 나라와 비교해도 한참 모자란다. -> 자세한 것은 첨부화일 표1 참조

한국 ODA의 허와 실

한국의 ODA는 그 규모면에서만도 국제사회에서 망신스러운 정도이지만, 그 성격 또한 인도주의적 철학과 인권적 원칙에 반한다. 국제적으로 ODA 정책은 0.7% 규모로 증액하고, 최빈국 등에 우선 지원하여 유상원조를 없애고 비구속성(un-tied) 무상원조로 가자는 방향이나, 한국은 거꾸로 가는 듯 하다.

한국 ODA 중 수원국에 직접 공여하는 양자간 원조는 전체의 약65%를 차지하고 있으며, 다자간 원조가 약 35%를 차지한다. 1991년부터 1995년까지 양자간 원조 중에서 무상원조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70%에 가까왔으나, 1996년부터 2002년까지 무상원조의 수준은 35% 수준까지 오히려 하락하였다. OECD는 2001년부터 최빈국에 대한 모든 ODA를 무상으로, 그리고 비구속성 원조로 제공할 것을 결의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통계수치가 보여주듯이 도리어 유상원조를 늘려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함으로써 OECD의 결의에 반하고 국제사회의 기대에 역행하고 있다. 한편, 2003년과 2004년에는 무상원조 비율이 60%까지 증가하였는데, 이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전후(戰後) 복구 지원금 때문에 한시적으로 이루어진 것에 불과하다. -> 자세한 것은 표2 참조

대규모의 대외경제협력기금으로 원조를 하면서 한국의 기업이 그 공사를 맡고, 한국의 자동차를 사야하는 구속성 원조의 형태는, 일본이 10억달러를 대외원조기금으로 쓰면서도 일본기업진출의 교두보를 닦았다고 전 세계의 비난을 받는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한국은 여전히 유무상을 떠나 90%가 구속성(tied)이며 이 공사들의 수주역시 삼성 등 4.5개 재벌기업이 독점하고 있다.

또 한국의 대외원조는 지구적 빈곤퇴치에 공동협력을 하자는 취지와 걸맞지 않게 경제협력 가능성이 큰 아시아국가 위주로 지원하고 있다. 2000년부터 2003년까지 원조를 보면, 아시아 74%, 아프리카 8%, 기타 국가들에 18%가 제공되으며, 도로나 철로, 병원 등이 최빈국이 아닌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중소득국을 전략적으로 선정함으로써 국제적으로 결의된 “지구촌 빈곤퇴치”보다 “향후 자국기업의 해외진출, 에너지 확보 등 경제적 목적”을 우선으로 했다.

긴급재난 구호 사업 예산

참여연대는 지난 쓰나미 이후 긴급재난구호예산이 500만 달러 수준으로 증가된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 바 있다. 그러나 아직도 지구촌 내 빈발하고 있는 지진, 홍수, 해일 등의 재난에 대한 예산은 턱없이 작은 규모라 할 수 있고, 또 이를 수행하는 전문인력 양성도 후진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

한국의 지난 5년간 재난구호사업 지원내역을 보면 연간 20개국 대상으로 5억에서 10억원 정도의 예산을 배당하여 지원했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후 복구사업지원비로 일시적으로 160억원을 상회했지만 2004년 다시 11억으로 회귀했다. 일본의 경우 3천 6백억원으로 총 ODA 예산의 0.39 %를, 네덜란드는 2천1백2십억원이 넘는 액수로 ODA 총 예산 대비 6.35%를 긴급재난구호 기금으로 책정하고 있다. 이와 비교해볼 때, 한국의 긴급재난 구호 사업 예산을 비롯한 ODA 규모는 세계 경제 순위 11위라는 외형에 한참 모자라는 것이며, 국제사회에 대한 당연한 책무를 회피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세계 경제 11위 규모에 걸맞게 대외원조 확대해야

2005년 4월 국무회의 결정에 따라 한국은 2009년까지 현재의 GNI 대비 대외원조예산 비율을 2배 늘린 0.1%, 1조원으로 증감할 것을 결정하였다. 현행 4억 정도의 예산이 10억원 규모로 단계적으로 확대되고, 2015년까지는 4배로 늘리겠다는 예정을 가지고 있지만, 아쉽게도 여전히 유엔 권고의 1/10 수준인 양적 개선의 목표는 지구촌 빈곤화의 속도를 넘어서지 못한 채 최소한의 달팽이 걸음으로 다른 나라들을 따라갈 뿐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의 대외원조 규모는 양적으로 증액되어야 하고, 무상원조로 전환되어야 하며, 질적으로 개도국이나 최빈국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방향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공동의 번영과 평화와 인권을 추구하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한국이 적극적으로 그 책무를 수행해 나가고자 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리고 시민사회는 정부의 대외원조 정책 개선의 과정을 모니터하며 올바른 방향으로 가닥을 잡도록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양영미(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뉴스레터는 아래와 같은 순서로 발행될 예정입니다

0. 우리는 왜 ODA에 주목하는가

0. 한국의 ODA 실태

- 규모-숫자로 본 ODA◀

- 집행 체계

- 지원 대상과 내역

- 선정 방식과 사후 평가

0. 한국 시민은 ODA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0. ODA 관련 국제 기준

0. 외국의 ODA 감시 활동

0. ODA 관련 국내 제도 현주소



국제연대위원회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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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인도네시아 최고의 인권운동가로 추앙받던 무니르에 대한 독살사건을 한국 최초로 소개하는 글이다. 2004년에 벌어진 무니르 독살사건은 인도네시아를 발칵 뒤집어 놓았지만 쓰나미 사태에 묻혀버리고 말았으며 한국에는 단 한 건의 보도도 이루어진 적이 없다. 10년간 무니르와 함께 일했던 동지 풍키 양이 처음으로 무니르에 관한 글을 한국의 독자들을 위해 작성해 주었으며 (사)한국동남아연구소 총무부장인 전제성 박사가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번역문을 작성해 주었다. 이 글이 위기에 직면한 인도네시아 인권활동가들에 대한 한국 사회운동의 연대행동 촉진에 소중한 자원이 되길 기대한다.

<인도네시아의 인권을 위한 장기항전과 무니르(Munir)의 삶>

글쓴이: 풍키 인다르띠 (Poengky Indarti)/ 인도네시아 인권감시단체 임파르샬 (Imparsial) 부소장

*민주화기념사업회 간행물 [기억과 전망] 2005년 가을호에 실림
국제연대위원회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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