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국가의 인권과  민주화의 자취를 찾아서
아시아 인권옹호자 전기 중심으로

올해는 유엔이 인권옹호자선언 (UN Declaration on Human Rights Defenders)을 채택한지 1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를 기념해 국제연대위원회는 버마,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를 중심으로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활동한 아시아 인권옹호자의 삶을 조명해 보는 기획 연재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아시아 인권옹호자의 일대기를 통해 살펴보는 각 국의 인권 상황과 민주화의 자취는 아시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새롭게 아시아를 만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인도네시아의 양심이자 인권 영웅, 무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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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무니르(Munir Said Thalib, 1965 ~ 2004)
국가 : 인도네시아(Indonesia)
분야 : 인권 운동, 반부패운동


수하르토 독재정권의 시작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 통치 시대 이전에는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각 종족들이 자치로 통치하는 여러 나라들이었으나 네덜란드 통치 후, 독립을 하는 과정 속에서 한 국가가 되었다. 350년이 넘는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 후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군정 하에 있다가, 1945년 8월 17일 민족운동 지도자 수카르노와 하타를 중심으로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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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지도_ 붉은색 표시 지역은 아체


1963년 수카르노가 군부의 지지하에 종신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독재체제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군부와 공산당의 대립은 경제난과 정치적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에 1965년 ‘930 사태’로 불리는 일련의 사태를 수하르토가 평정하고 수카르노 지지 세력과 인도네시아 공산당세력을 괴멸시켜 수하르토 독재체제를 수립한다. 한 인권보고서에 따르면 ‘930 사태’ 이후 1966년까지 공산주의자로 몰려 살해된 숫자는 약 100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300여 종족이 600여 종류에 가까운 지역언어를 구사하며 독자적이고 독립적 문화를 발전시켜온 1만7508개 도서로 이루어진 군도(群島) 대국 인도네시아에서는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종족들과 자바섬을 중심으로 한 인도네시아 중앙정부 사이에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대표적인 갈등 지역이 바로 아체지역이다.

1999년 동티모르 독립 이후 아체의 인권상황은 매우 악화되었다. 국제사회의 압력을 받아 동티모르의 독립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인도네시아 정부는 자치를 외치는 아체인들을 무자비 하게 탄압했다. 아체에서 인도네시아 군인과 경찰이 자행한 불법연행, 납치, 고문, 사살 등과 같은 인권유린은 쉬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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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 지배와 내전으로 얼룩진 ‘불행한 땅’_아체


인도네시아 최고의 인권옹호자이자 웅변가

무니르(Munir Said Thalib)는 인도네시아의 군부 및 정보기관의 인권침해와 아체 관련 정부정책을 비판했던 인도네시아 최고의 인권운동가였다. 그는 1992~1996년에 동부자바에서 노동 인권 개선을 위해 투쟁했고, 1996~2003년에는 자카르타에서 수하르토 체제가 자행한 활동가 납치실종사건과 동티모르 인권침해 사건들을 다뤘으며, 비극적 죽음을 맞기까지 2003~2004년에 걸쳐 임파르살 소장으로서 활동했다.

무니르는 인도네시아 최초의 인권옹호단체로서 가난한 이들에게 무료 변호를 제공하는 것으로 유명한 인도네시아법률구조재단(이하 YLBHI: Yayasan Lembaga Bantuan Hukum Indonesia) 수라바야 지부의 노동분과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당시 수하르토 체제는 국내자본가와 외국인 투자자들을 최대한 지원하는 방식으로 경제발전을 추구하였기에 노동문제는 아주 중요한 이슈였다. 그는 노동분쟁 사건들을 다루는 전문적 능력과 기자들에게 흥미를 끌만한 뉴스를 제공하는 기민한 능력을 지녀 노동자들과 기자들에게 아주 인기가 있었다. 그는 법정, 노동부, 지방 및 중앙 노동분쟁조정위원회에서 노동자들을 직접 변호하고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수집된 자료를 분석하여 보고서를 완성하는 일을 수행했다.

YLBHI에 접수되는 사건들의 대다수는 노동법이 보장한 정규적 권리 위반과 해고 관련 사례들이었다. 대표적인 활약으로는, 시도방운사의 일방적인 해고 사건이 있다. 무니르는 해고자들이 위법행위에 관한 법률조항에 근거하여 회사 측을 지방법원에 제소하도록 제안하고 후원했다. 그 결과 1995년 대법원 판결로 위법행위에 관한 조항으로 노동자들이 승소한 첫 사례이자 노동자들이 법정에서 회사 측을 해소시킨 최초의 사례를 만들어 냈다. 또한 그는 군부의 노동문제 개입과 자본과의 협력이 노동자들에게 가장 큰 위협이라고 생각하고, 위법행위를 자행한 죄목으로 시도아르조 지역주둔군사령관 등을 지방법원에 고발하도록 해고자들을 고무시켰다. 또한 생산성과 생산품의 질에 비해 지나치게 적게 지급되는 임금실태를 보고, 정부가 최저임금권장선을 발표하면 인도네시아의 4대산업지대의 임금사정을 조사하였다. 그는 이를 통해 노동자들의 열악한 실태를 사회에 고발하였다. 그의 이러한 역동적인 활동은 YLBHI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고 1996년 YLBHI의 운영국 차장으로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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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니르 활동사진

 1997~1998년 수하르토 체제의 말기에 활동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납치가 자행되자 YLBHI와 자카르타의 몇몇 인권운동단체들이 연대하여 실종및폭력피해자대책위원회(Kontras: Komisi untuk Orang Hilang dan Korban Tindak Kekerasan)를 1998년 3월 20일에 결성하였다. 무니르는 이 위원회의 총무국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특전단(Kopassus)의 비밀작전팀(Mawar)에 의해 자행된 활동가 납치 사건을 법정으로 끌고가는데 성공하였고 특전단의 몇몇 장교들은 법정 처벌을 받았다. 또한 1989~1998년에 아체에서 수행된 군사작전 중에 인권침해를 자행한 자들이 법정에 세워져야 하고 군부의 각종 면책특권이 중단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그는 특히 인도네시아의 군부를 비판하는 웅변가로 유명했다. 거는 군부에 의해 자행된 동티모르, 파푸아, 아체 지역에서의 인권탄압행위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그는 국가인권위원회의 동티모르 지역 인권침해 조사위원회 위원이 되어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인권침해 혐의를 받는 장군들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고 서슴없이 조사를 추진하였다. 당시 막강한 귄력을 지녔던 위란토 장군은 와히드 대통령에 의해 장관직을 박탈당했다. 이러한 굵직한 사건들은 무니르를 용감한 인권운동가로서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했다. 1998년에 무니르는 콘트라스 총무국장 자격으로 인도네시아 최고의 인권상 얍 띠암 힌 상(Yap Thiam Hien Award)을 수상하였다. 이어 2000년에는 인권운동가를 위한 대안적 노벨상(Rights Livelihood Award)과 유네스코의 만다젯 싱 상(Mandajeet Singh Award)를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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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초에는 콘트라스의 소장역할을 수행하면서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인도네시아대학교, 가자마다대학교에 소속된 안보문제 전문가들과 함께 군부와 경찰에 대한 조사연구를 시작했다. 이어 그는 아체와 파푸아 지역의 인권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는 인권감시단체를 결성하고자 하였다. 2002년 11월에 18명의 인권운동가들과 함께 임파르샬(Imparsial)을 설립, 만장일치로 소장으로 선출되었다. 임파르샬은 ‘시민사회의 자유 대 반테러 전쟁’ 캠페인을 통해 테러리즘을 저지하려는 정부 정책이 시민사회의 자유를 침해하는 실상을 고발하였다. 또한 태국에서 개최된 납치실종에 반대하는 아시아연맹(AFAD) 회의에 참석하여 의장활동을 하였다.

그 후 군법 초안을 비판하는 시위를 조직했다, 해악을 초래할 수 있는 군법의 일부 조항들이 국회심의과정에서 수정될 수 있도록 하였고, 해군참모장과 국방부에 대한 항의행동을 전개하여 해군이 불법 선박거래를 중단토록 하였다.

이처럼 인권투사로 활동하는 동안 무니르는 다양한 협박과 테러에 직면했다. 동부자바주 주둔군사령관인 하르또노 육군소장은 노동자들을 계속 선동하고 다니면 “소시지를 만들어버리겠다”고 직접 협박하였고, 정보기관원들과 폭력배들도 전화나 편지로 종종 위협을 가했다. 이러한 협박에 대해 무니르는 대수롭지 않게, “모든 일에는 위험이 따르는 법이다. 피할 수 있다면 당연히 피해야지만, 피할 수 없다면 맞서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항상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 만약 우리가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그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적이 이미 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유명한 말을 남겼다.

2000년에는 콘트라스 사무소 문 앞에서 두 개의 폭발물이 터졌고, 같은 해에 말랑의 바투 지역에 있는 친가로 고성능폭발물이 보내졌다. 2002년 3월에는 유혈짜왕지역민회라는 이름을 내건 5백명의 해결사들이 콘트라스로 들이닥쳐 사무실을 파손시키고 무니르를 위협했다.  2003년 9월에는 무니르 집 안마당으로 폭발물이 담긴 봉지가 투척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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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카퍼스(Pollycarpus Priyanto) 재판 사진



2004년 9월 7일 석사학위 과정을 위해 네덜란드로 향하던 중 무니르는 인도네시아 비행기 안에서 비소에 중독되어 살해당했다. 이 사건의 용의자로 전직 조종사였던 폴리카퍼스(Pollycarpus Priyanto)가 지목되었고 그는 가루다 항공의 고위층이었던 인드라(Indra Setiawan)의 명령을 받고 무니르의 오렌지 주스에 비소를 넣었다고 자백했다. 무니르의 지지자들은 그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사주한 세력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지 않았다고 정부에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인도네시아, 민주화로의 나아가려는 노력 
2001년 7월 23일 국민협의회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와히드(Abdurrahman Wahid)가 무능력과 부패 의혹 등으로 집권한 지 21개월 만에 대통령직에서 쫓겨나고, 스카르노 대통령의 딸인 메가와티 부통령이 신임 대통령으로 정권을 잡았다. 그후 2004년 인도네시아의 첫 직선제 대통령선거에서 군 장성 출신의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전 안보장관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현정권을 이어가고 있다. 이로써 인도네시아는 현재 수하르토 시기와 달리 군의 정치•사회적 기능이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

한편 1998년 수하르토의 하야 이후 인도네시아의 인권단체 및 NGO들은 정부의 정책에 대해 적극적인 대안을 제시하는등 인도네시아 민주화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한다.

정리: 김연재, 최유미 국제연대위원회 자원 활동가

참고 정보 사이트
http://www.kdemocracy.or.kr/
http://en.wikipedia.org/wiki/Munir_Said_Thalib
http://www.kontras.org/eng/index.php
http://www.munir.or.id/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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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체가 나를 부끄럽게 했다

비행기에 탑승하고서야 자카르타까지 7시간이나 걸리는 걸 확인하였다. 목적지가 어디든 몇 시간이 걸리든 별로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뭔지 모르게 피곤하기만 한 한국에서의 일상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했다. 이렇게 허둥지둥 시작한 인도네시아 방문은 일주일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7시간의 지루할 수 있는 비행시간은 오히려 안락한 휴식이 되어 주었다.
 
한밤중에 자카르타에 도착해 짐을 찾아 세관을 나가려고 하는데, 경찰인지 세관원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박스로 싼 짐을 질질 끌어 내며 뭔가를 요구한다. 어쩌란 말인가 싶어 귀를 기울였더니 결국은 돈을 내라는 애기다. 언젠가 남의 애기를 인용해서 인도네시아의 부패문제를 민주주의와 인권의 걸림돌로 지적한 적이 있었는데, 그 사실을 생생하게 눈 앞에 두고도 그냥 무기력하게 공항을 빠져 나왔다. 뭔가 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자괴감이 한 순간 스치고 지나갔다. 마중 나오기로 한 차는 한참이 지났는데도 오질 않는다. 몇 대의 담배를 피우고 한국에서는 한 가닥씩 하는 일행들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펴 보았다. 모두가 이 상황을 얼마큼은 받아 들이고 있는 듯 하였다. 달리 방도가 없으니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얼마를 더 기다린 후에 차가 도착하고 일행은 공항 근처 호텔에서 하루 밤을 묵게 되었다. 로비에서부터 아늑하게 뻗어 있는 긴 복도를 좌우로 몇 번 돌아서야 겨우 방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가라오케인지 나이트클럽인지 모를 시설이 방과 한 층에 있었다. 클럽 앞에는 한 가지로 유니폼을 입고 어려 보이는 여성 종업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공항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성 종업원들의 미소를 외면한 채 무기력하게 지나쳤다. 일행 중에 과격한 페미니스트가 있었다면 그렇게 무기력하지는 않았을까? 인도네시아에서의 첫날밤은 우리 일행의 정체성과 한계를 분명하게 설명해 주었다. 지금의 생각이지만 뭔가 하지 않는 것이 이유야 어찌되었든 잘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싶다. 내가 보편적이라 믿었던 것들이 어떤 사람에게는 이상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여행하는 동안 여러 차례 느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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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쓰나미로 인해 마을 한 가운데까지 7㎞를 밀려와 정박한 산만한 화물선박. ⓒ김신

 잠을 자는 둥 마는 둥하고 제법 차가운 열대의 새벽 공기를 쐬면서 다시 공항으로 가서 수마트라 섬 최 북부의 아체주로 향하였다. 공식일정이 시작된 것이다. 4시간이 걸려 도착한 아체주 공항은 시골 간이역을 연상시켰다. 공항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냥 나왔다. 쓰나미때 이곳 공항까지 바닷물이 넘쳐 그나마도 공항이 제 기능을 못해 구호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아직 아침인데도 5월의 뜨거운 열기는 피부를 찔러대며 파고들었다. 자카르타와는 다르게 공기는 신선하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상쾌하다. 무엇보다 담배 파는 가게직원이 없어 안달하는 일행에게 피우던 담배를 갑 채로 가지라고 권하는 공항직원들의 여유로움과 친근함이 자카르타와는 사뭇 다르다. 또 택시 호객과 전화카드를 팔려고 젊은 상인들이 진을 치고 있던 자카르타 공항과는 달리 이곳 공항입구는 망고를 팔러 나온 농부 몇 사람과 택시기사 한둘이 전부다. 망고를 팔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자기네끼리 깎아 먹고 노닥거리고 있다. 일행은 마중 나오기로 한 차를 기다리다 망고 한 바구니를 샀다. 노란 속살을 나누어 먹으면서 노닥거리는 사이 차가 도착했다. 역시 두 시간을 기다렸다. 아체의 첫인상은 마중 나오기로 한 차를 두 시간 기다린 것을 빼고는 사람도 공기도 그리고 일행들의 분위기도 모든 것이 자카르타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다.
 
숙소가 분명히 호텔인데 한참을 달려도 호텔은 고사하고 여인숙도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쓰나미가 다 휩쓸어 버린 것인가라고 의아해하고 있는데, 눈앞에 3층의 꽤 괜찮은 호텔이 갑자기 나타났다.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이곳에 호텔이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현지에서 우리 일행의 이동과 프로그램에 대해서 간사역할을 해준 단체는 SIRA(Central Information Referendum of Aceh)인데, 아체주 부지사가 된 나자르(37세)를 대표로 해서 중앙정부와의 분쟁 당시 자치획득을 위해서 주민투표를 추진해왔고, 지금은 정당으로서 변형과정을 거치고 있는 반정당적 성격을 띄고 있었다. 누구와도 영어가 통하지 않은 관계로 SIRA에 대한 많은 애기는 들을 수 없었다. 다만 한국의 경험에 비추어 정치를 하기에는 너무나 순박한 사람들이고 20~30대의 젊은 청년들로 리더십을 구성하고 있으며 어떤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빈곤과 복지가 주요 관심사라는 점이다. 그리고 당원 중에 여성과 노인 심지어 중년의 남성은 단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SIRA뿐 만 아니라 몇 개의 현지 NGO를 방문했을 때도 거리에서도 시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30년 넘는 분쟁으로 수 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그나마도 쓰나미가 휩쓸어 버린 아체의 현실이다. 굳이 쓰나미 피해 현장을 찾아 다닐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성들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이슬람법을 주법으로 삼고 있는 아체의 문화적 요인도 있었겠지만, 전쟁과 재해의 피해자는 언제나 사회적 약자그룹에게 더 가혹한 것이니 남성보다는 여성이 젊은이 보다는 노인의 피해가 심각했으리라. 이러한 사실은 예정에 없던 노동절행사에 동원되었을 때 더욱 더 실감이 났다. 겨우 50여명이 노동절행사를 갖고 있었다. 쓰나미가 파괴한 것은 단순히 자연환경과 삶의 터전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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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체의 노동절 행사 ⓒ김신 

쓰나미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들어온 국제기구, NGO들이 저마다 내건 영문단체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거의 문맹의 상태에서 우리 일행은 스스로의 자치권을 포기한 채 SIRA의 안내에 따라 먼저 나자르 부주지사와 간담회를 가졌다. 부주지사는 과거의 아픈 기억을 자치권 속에서 풀어내는 것을 과제로 안고 있었다. 지난 30여 년 간의 투쟁의 역사를 민주주의의 역사로 정착하고 과거 분리독립세력을 평화의 세력으로 사회화하여 과거의 상처가 민주적 자치권 속에서 인권과 평화의 문화로 거듭나는 아체인의 삶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일행에게 아체인들은 투쟁에 집중한 나머지 한번도 민주적 삶을 살아 보지 못해 민주주의를 피상적으로 알 뿐이라며 한국과의 민주주의 교육 교류를 제안하였다. 순간 부끄러워졌다. 민주주의가 제도만을 애기하는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의 삶 속의 민주주의 애기라면 오히려 아체의 상황이 좋아 보였다. 가부장적이고 이기적인 권위주의가 가정, 직장, 여타 사회 활동을 지배하고 있는 한국에서의 일상에 익숙한 나에게 직원이 있는데도 단체대표가 길거리 상인과 사소한 흥정을 하고 운전기사와 수행직원이 있는데도 고위공무원이 시장에서 산 점심을 담은 비닐봉투를 흔들고 다니고 상인들 간의 사소한 시시비비에 끼어드는 모습은 뭔가 역할이 잘못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새로웠다.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 학력, 무엇보다 나이와 상관없이 자유롭게 주제를 공유하고 뭔가를 토론하는 모습은 여행 내내 자주 볼 수 있었다. 아체인은 태생문화적으로 민주적일 수 밖에 없다는 어느 동남아학자의 말이 생각난다. 그 태생적 문화가 무엇인지는 아직까지 분명하지 않지만….
 
쓰나미 피해 재건현장과 30년 넘게 지속된 오랜 분쟁의 희생자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사회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쓰나미가 파괴한 아체주의 자연환경과 삶의 터전은 국제사회의 원조로 상당부분 복구되고 있거나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다만 마을 한 가운데까지 7㎞를 밀려와 제 멋대로 정박한 산만한 화물선박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안내자는 성룡이 기금을 내서 중국정부가 재건했다는 성룡마을로 우리 일행을 데리고 갔다. 중국식 건축물로 마을 정문을 세우고 거기에 중국어로 "중국과 인도네시아의 우의촌" 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옆으로는 홍보용 비석을 세워 뭐라 장황하게 새겨놓고 있었다. 정문에 들어서자 우뚝하게 세워진 이슬람사원이 눈에 띄었다. 저 멀리 인도양의 수평선에서도 알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지대에 재건된 마을은 5000여 가구는 되어 보였다. 아체의 전형적인 가옥구조 양식을 띄어 빨간색 지붕과 아이보리색 벽으로 지워진 보기 좋게 일률적인 크기와 모양의 가옥들이 장관이었다. 마을 앞으로는 인도양이 내려다 보이고 주변으로는 녹색의 열대 자연이 펼쳐져 있고 마을 끝까지 시멘트로 포장된 잘 정돈된 차도가 지그재그로 엎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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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룡이 기금을 내서 중국정부가 재건했다는 성룡마을. ⓒ김신 

마을은 차도를 따라 형성되었는데, 언뜻 어느 휴양지에 온 기분이었다. 마을까지 차로 오면서도 급경사가 힘들었는데 입구에서 내려 마을에 들어서자 얼마 못 가 주저 앉게 되었다. 어찌 된 일인지 마을 어디에도 사람이 없었다. 마을 입구에서 몇 가지 생필품을 파는 가게 주인과 아이들 서너 명을 본 게 사람의 전부다. 가게 주인에 의하면 교통수단은 없는데 생계를 꾸릴 수단은 멀리 있어서 주민들이 새벽에 나가 저녁 늦게 집에 들어오기도 하고 아예 일터가 가까운 곳에 간이 숙소를 마련하고 산다고 한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학교도 없고, 시장도 없고, 병원도 없어서 이주된 주민들이 다시 원래 살던 곳으로 많이들 빠져나가고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갈 곳이 마땅한 건 아닌데, 이 마을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떠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굳이 주거권에 대한 개념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잘못된 이주정책의 전형적 모습이다. 이주하게 될 주민들의 의견은 들어나 봤을까? 이렇게 만들어진 마을과 사회시설이 아체에 몇 개나 될까? 가게주인도 곧 마땅한 생계거리를 찾아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막막하게 허공을 주시하며 눈시울만 붉혔다. 그 시선을 따라 가보니 하늘은 구름이 한 점 없이 파랗기만 했다.
 
우리 일행도 이제 아체를 떠날 채비를 해야 했다. 도착하자 마자 일그러지기 시작한 일정에 따라 원래의 일정표 상의 순서와 시간은 오간 데 없어지고 그냥 모든 걸 SIRA에 맡긴 채 진행한 이틀간의 아체 여행을 마무리하고 공항으로 향하였다. 자카르타로 가는 비행기가 두 시간 늦게 출발한다고 한다. 왜 모든 게 두 시간인지 모르겠다. 이쯤 되자, 우리 일행 누구도 이것을 문제라고 느끼거나 이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두 시간이 오히려 반가웠다. 아체에서의 이틀 동안 비록 좋아하지 않는 생선을 주식으로 강요당하고, 가끔은 코코넛으로 배를 채워야 했고, 자치정부 수립 이후의 사회 상황을 현지인의 설명 없이 스스로 알아서 살펴 봐야 했지만, 가끔씩 먹여주는 아체 커피의 향긋함에 느긋해 지고, 아무런 경고 없이 데려다 준 해변가, 파도와 바람이 아니면 누구도 침범해보지 못했을 것 같은 백사장에서 누리던 잠깐의 휴식을 생각하면 나의 선택권과 자치권은 싸 그리 무시되었지만 모든 것이 다 그걸로 그만이다.
 
비행기 창 밖으로 보이는 아체의 산과 바다 강줄기를 사진을 찍듯 눈 속에 담았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다음에 다시 오게 된다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유럽의 시티플래너들이 아체에서 그 플랜리란 것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것이 진실로 바른 길이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김신/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국제사업단 전문위원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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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뉴스레터를 통해 한국의 대외원조 실태와 제도적 미비점, 대외원조에 대한 우리 국민의 생각, 정부의 정책 의지 등 한국의 ODA 실태 전반에 대해 다각도로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호부터는 주요 원조 공여국의 원조 역사, 원조 규모, 집행 체계, 정책 등을 살펴보며 한국 대외원조의 발전에 도움을 줄 시사점을 찾고자 합니다.

원조 공여국가 연재가 끝나면, 협력국가(수원국), 지역, 원조 영역별 등으로 확대하여 뉴스레터를 발행하려고 하니, 지속적으로 관심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유럽연합의 대외원조는 전 세계의 원조국 중 원조 규모가 가장 크며, 가장 효과적으로 원조를 수행하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비난여론이 많은 다른 원조국과 달리, 유럽연합의 대외원조가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배경에는 지속적인 원조 프로그램의 개발과 투명한 평가 과정, 원조 전문가 육성, 끊임없는 대외원조의 개혁을 통하여 효율적인 대외원조가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전 세계 160개국이 유럽으로부터 양자 간 또는 다자간 형태의 지원을 받고 있다. 유럽연합 공동체와 유럽연합 소속 회원국들이 제공하는 국제원조의 규모는 매년 약 300억 유로로, 전 세계 원조 흐름의 55%에 해당한다. 유럽연합 공동체 차원의 단독 대외원조 규모는(소속 회원국들의 양자적 대외원조 규모를 제외한 규모) 전 세계 국제원조의 10%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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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원조의 역사

유럽의 대외원조는 지난 세기 유럽의 식민지 경영에서 시작하였다. 프랑스, 독일, 이태리, 스페인, 포르투칼, 영국 등과 같은 국가들은 식민지 경영으로 막대한 부를 창출하고 식민지에 학교, 병원과 같은 기반시설을 지원하였다. 위와 같은 경험으로 유럽은 다른 신생 원조공여국과 달리, 원조가 필요한 지원국에 대한 원조 프로그램 진행과 운영에 관한 정보를 많이 축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유럽은 1957년 로마조약을 통하여 유럽의 식민지가 집중된 대륙에 집중 원조를 실시할 것을 천명한다. 이에 따라 유럽공동체는 초기에 아프리카, 환태평양과 카리비안 국가들을 중점적으로 지원하였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유럽대륙이 지배하고 있던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함으로써 유럽의 원조 정책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1993년 유럽공동체가 공식적으로 발족하면서 유럽연합은 개발협력정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법적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1993년 발효된 마르트리히트 조약에 따르면 “개발협력정책의 목표는 개도국의 지속적인 경제적ㆍ사회적 개발을 촉진하고 세계 경제에 개도국을 점진적이고 조화롭게 통합하는 것이며 개도국의 빈곤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에 따라 유럽연합의 원조는 세계 최대의 공여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법적인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1990년대 유럽연합의 원조의 경향은 동부유럽과 유럽대륙 주변국으로 집중되었다. 유럽연합은 민주화로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동유럽 신생 회원국들의 경제, 사회 개발을 지원하기 위하여 막대한 원조를 제공한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유럽연합의 원조는 발칸, 팔레스타인, 북한, 파키스탄 등의 분쟁지역으로 다양화되었다. 이는 과거 유럽연합의 개별 회원국들이 전 식민지 국가들에 대한 기득권 유지를 목표로 하여 지원했던 대외원조 특성에서 벗어나 유럽연합이 전 세계 분쟁의 조정자로서의 역할로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외원조의 개혁

유럽연합의 대외원조는 1990년대까지 회원국들의 정치적인 이해관계와 이익의 상충관계로 많은 혼란을 겪어왔다. 또한, 비효율적이고 방만한 운영으로 여론의 지탄을 받아왔다. 그래서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 대외원조의 개혁은 유럽연합 집행이사회의 가장 큰 이슈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2000년 유럽연합은 대외원조 정책의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한다. 유럽 전역의 원조 전문가와 지역 전문가들이 모여 대외원조 개혁에 관한 워크샵을 1여년에 걸쳐 진행하여 개혁안을 만들었다.

2000년 개정된 유럽연합의 대외원조 개혁안은, 첫째, 효율적인 대외원조 정책의 시행을 위하여 유럽연합 집행위에 집중되어 있던 대외원조 관리의 권한을 63개 대표부로 분산하여 원조 수혜 지역의 원조 실행 과정을 현지 대표부가 관리하도록 했다.

둘째, 유럽연합은 더 많은 비연계 원조(untied aid)를 제공함으로써 원조 효율성을 높였다.

셋째, 2001년 1월 1일 새로운 전담 수행 기구인 유럽연합 원조협력청(Europe Aid)을 창설하여 프로젝트의 발굴, 확인, 시행과 평가 등 대외원조 사업의 관리업무를 총괄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넷째, 원조의 질적 향상을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수혜 국가별 전략보고서(Country Strategy Paper)를 도입하여 대외원조의 평가를 질적으로 향상시켰다.

대외원조의 진행 과정

유럽연합의 대외원조는 유럽연합 대외협력위원회(EU External Relations Committee)와 유럽연합 개발위원회(Development Committee)에서 55개 상주 유럽연합 대표부의 도움을 얻어 수혜국가에 대한 전략보고서와 원조실행 보고서를 작성하여 유럽연합 집행이사회(European Commission)에 제출하는 과정을 거친다.

수혜국가에 대한 전략보고서와 원조실행보고서는 유럽연합 집행이사회의 승인을 받고 유럽연합 원조협력청을 통하여 해당 수혜국가에 본격적인 지원을 실시한다. 수혜국가의 원조의 전달과정과 수행과정에 대한 평가는 수혜국가에 상주하고 있는 유럽연합 대표부가 주기적인 평가보고서를 통하여 관리된다.

평가보고서는 매년 정기적인 감사를 통하여 투명성 여부를 확인하고 다음해 사업에 반영된다. 또한 작성된 평가보고서와 감사보고서는 독립된 민간기업을 통하여 다시 재분석되어 유럽연합 원조협력청에 전달된다. 평가보고서, 감사보고서, 분석보고서는 원조 전문가와 학계 등에 전달되어 공유하게 된다.

분쟁이나 자연재해로 인해 긴급한 구호가 요구되는 지역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유럽연합 인도지원사무국(ECHO)이 주관한다. 쓰나미, 룡천폭발사고, 파키스탄 지진 등 긴급지원이 필요로 요구되는 곳은 유럽연합 인도지원사무국(ECHO)이 비축된 긴급 지원물품을 최단시간 안에 지원한다. 인도주의 지원이 필요한 해당지역에 대해서는 긴급 보고서를 작성하여 유럽회원국에 긴급호소절차를 통하여 더 많은 지원을 요청한다.

대외원조의 특성

유럽연합의 대외원조는 장기간에 걸친 원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수혜국가에 가장 필요한 원조를 제공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다. 대규모적인 물량 지원과 건설사업 등과 같은 선심 사업보다는 현지 지역에 맞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맞춤형으로 제공한다.

프로그램 지원은 국제기구와 유럽연합 회원국 소속 NGO등과 결합하여 농촌개발 사업, 교육, 의료 등에 중점 지원하고 있다. 특정 프로그램에 전문적인 경험과 지식을 비축한 NGO가 유럽연합의 대외원조를 지원받아 수혜국가 중 가장 필요한 지역에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예를 들면, 독일 NGO의 평안북도 농자재 지원 사업, 프랑스 NGO의 아체지역의 병원운영 사업 등이 있다. 현재 유럽연합의 대북지원활동을 살펴보면 교육프로그램, 의료, 취로 사업 등에 집중하고 평양지역보다는 가장 수혜가 필요한 평안남북도 지역에 집중하여 진행하고 있다.

대외원조의 비율

세계 대외원조 공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개발원조위원회(DAC)의 주요 회원 국가들의 총 대외원조 규모가 1990년대 이후 줄어들고 있는 추세와 달리, 유럽연합 회원국과 유럽연합은 최근 대외원조 정책을 더욱 늘려가고 있다.

유럽연합 회원국들은 2002년 3월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각료이사회에서 2006년까지 GNP 대비 ODA의 비율을 최소 0.39%까지 증액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유럽연합의 공적원조 규모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또한 유럽연합은 2015년까지 몬테레이 유엔 개발재원국제회의(International Conference on Financing for Development)에서 확인된 바 있는 선진국들의 향후 도달 목표인 GNP 대비 0.7%로 ODA를 증가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단계적으로 2006년까지 ODA를 0.33%까지 증가시켰고 2010년에는 0.51%까지 증가시킬 예정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원조를 받고 있는 유럽연합의 신생회원국인 체코, 슬로바키아, 폴란드, 에스토이나, 헝가리,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몰타, 슬로베이나, 싸이프러스 등이 원조 공여국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일례로 유럽의 신생회원국인 에스토니아의 ODA비율은 0.01%에 그치고 있다. 이에 따라 유럽공동체의 평균 규모액을 유지하기 위하여 서유럽국가들은 대외원조 비율을 더욱 높이고 있다.

매년 유럽연합 소속 회원국의 개발 장관들과 유럽연합 대외협력위원회는 함께 모여 유럽연합의 대외원조 진행과정에 대하여 평가한다. 최근 회의는 2006년 4월 10일~11일까지 룩상부르그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서 유럽연합은 빈곤퇴치와 개발을 위한 글로벌 파트너쉽을 추구하고 2015년까지 유엔이 제시한 0.7%로 ODA를 늘리는 것에 대해 결의했다.

김여정(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ODA연구팀)


※ 편집자주: 오랜 원조 역사의 경험으로 성공적인 대외원조를 시행하고 있다고 평가받는 유럽연합의 사례는 공여국으로서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과는 다르다. 그러나, 협력국가(수여국)의 요구와 긴밀한 관계 속에서 가장 효과적인 대외원조를 실시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고 있는 현재 한국 ODA의 현실에서 경청할 점들이 있다. 비록, 유럽연합의 대외원조가 인도주의적 차원보다는 유럽대륙의 식민지 이익 창출을 위해 시작했다고 평가받지만, 식민지 경험을 통해 확보된, 현지에 가장 필요하고 적절한 원조를 수행하고 있는 대외원조 집행 과정에 대해서 좀더 연구해봐야 할 것이다. 다음 편에서는 유럽연합과는 반대로 인도주의적인 기원으로 대외원조를 시작한 캐나다와 비교하면서 우리나라 대외원조의 나아갈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 첨부화일: 뉴스레터 원본
국제연대위원회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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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정부는 아체에서의 군사작전과 민간인학살을 즉각 중단해야 합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아체에서의 군사작전과 민간인학살을 즉각 중단해야 합니다”

더불어 객관성이 보장될 수 있는 인권실태조사를 실시하는 한편

아체 주민의 의사를 존중하여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바랍니다.

최근 인도네시아 정부는 지난 1년간 아체주에 내려져있던 계엄령을 해제하고 민간비상상태(civil emergency)로 그 수위를 낮추겠다는 발표를 한 바 있습니다. 오랜 군사작전과 계엄령으로 인한 고통이 지속되어온 아체 지역에 있어 이는 환영할 만한 계획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민간비상상태에서도 군대를 상주시키며 군사작전을 계속 수행하도록 조치한 것은 매우 실망스러운 일입니다. 지난 1년간 계엄령 하에서 군부는 아체주 내에서만 총 5,000여명의 자유아체운동(GAM) 조직원들을 사살, 체포, 항복 등의 형태로 진압하였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GAM의 주요 지도부 인사들은 한명도 체포하지 못한 상태로서, 이들을 완전히 뿌리뽑고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군사작전이 지속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정부의 주장입니다.

인도네시아 서북쪽 끝에 위치한 인구 400여만의 아체주는 풍부한 천연자원을 갖고 있는 땅으로서, 이 지역 개발을 통해 얻는 수익이 인도네시아 정부 재정수입의 13%를 차지할 정도로 크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수익은 대다수가 중앙정부에 귀속되거나 주정부 관리의 주머니로 들어갈 뿐 아체 주민들에게는 아무런 혜택을 주지 못했습니다. 개발로 인한 농지파괴와 노동력 착취로 인하여 주민들은 오히려 심각한 빈곤과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형편입니다.

한편, 1976년 기존의 민족독립운동을 계승하며 이슬람계 무장독립세력 GAM이 결성된 이후 인도네시아 정부군은 다양한 군사작전을 동원하여 이들을 진압해왔습니다. 1989년-1998년 사이에는 강압적 군사작전을 통해 10,000여명의 사상자를 내었을 뿐 아니라 GAM과 무관한 민간인들을 무장조직에 가담하였거나 지지하였다는 혐의로 고문, 강간, 납치, 살해하거나 학교 등 주요 시설을 포함, 수많은 마을을 파괴하는 등 가혹한 인권유린 행위를 지속해 왔습니다.

수하르토 전 대통령 하야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된 정부와 GAM 사이의 평화협상은 이렇듯 오래 지속되어온 아체 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그러나 2003년 5월 그 협상이 결국 결렬됨으로써 아체는 다시금 준전시상태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GAM 소탕을 내세운 인도네시아 정부군에 의해 계엄령이 선포되고 모든 주요 도로와 무역이 통제되었을 뿐 아니라 군대의 지휘에 따르지 않은 어떠한 생업활동도 GAM을 지원하는 행위로 간주되어 처벌되어습니다. 각종 언론과 인권기구의 활동마저 철저하게 통제됨에 따라 정확한 실태파악도 어려운 상태입니다. 하지만 오랜기간 아체 지역을 감시해 온 인권단체들은 조심스러운 보고서들을 통해 계엄령 이후 발생한 희생자의 수치가 앞서 군부의 발표보다 훨씬 클 뿐 아니라 그 대다수는 GAM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지 않은 무고한 민간인들이라며 아체 지역에서의 심각한 인권유린 상황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아체에는 GAM과 같은 무장투쟁을 통하여 독립국가를 수립하기를 원하는 이도 있지만 자치권을 보장받으며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영위해나갈 수 있는 체제만을 원하는 이도 있습니다. 이러한 독립 혹은 자치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주민들 스스로에게 그 결정권이 주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정치적 결정 이전에 인도네시아 정부군이 아체주에서 자행해 온 심각한 인권유린과 파괴 행위를 즉각 멈추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주요 국제인권기구 및 활동가들의 접근을 허용한 상태에서 객관성이 보장될 수 있는 인권실태조사를 실시하는 한편 아체 주민의 의사를 존중하여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따라서 지구상 모든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군사행위와 그로 인한 민간인학살 등의 인권유린 문제에 대하여 우려하는 한국의 여러 개인과 단체들은 아체주에서 계엄령과 함께 본격적인 군사작전이 개시된 지 꼭 1년이 지난 오늘, 인도네시아 정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구하는 바입니다.

1. 인도네시아 정부는 아체 지역에서의 군사작전과 민간인학살을 즉각 중단하라!

2. 인도네시아 정부는 국내외 인권기구 및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라!

3. 인도네시아 정부는 GAM과 더불어 군사적 행동이 아닌 평화적 수단을 통한 분쟁종식이 절실함을 인정하고 속히 평화협상을 재개하라!

이러한 요구를 전달하는 한편, 이 성명에 동참한 우리 개인과 단체들은 이후 아체 지역을 포함, 심각한 인권유린과 민간인학살이 자행되는 전세계 각지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인권과 평화의 가치를 담은 감시의 목소리를 모아낼 것을 다짐합니다.

<참여자>

시민사회단체

국제민주연대 / 비폭력 평화물결 / 생명평화 마중물 / 사이버NGO자료관 / 아시아의 친구들 / 팔레스타인 평화연대 / 참여연대 / 함께하는 시민행동

개인

김규환 (버마민주화를 지지하는 사람들) / 김 신 (Asia Human Rights Community Initiative) / 도임방주 / 마웅저 (버마민주화를 지지하는 사람들) / 박은홍 (성공회대학교 아시아NGO정보센터) / 조효제 (성공회대학교 NGO대학원) / 조희연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국제연대위원회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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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국제연대위원회입니다. 아민 말루프의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이란 책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써있습니다 "아랍세계는 십자군 전쟁을 먼 옛날에 벌어진 단순한 에피소드로만은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아랍인들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부당한 침범을 느끼고 있다."

지난주에 한국정치연구회 주관으로 열린 긴급 토론회에서 기조발제를 하신 리영희선생님은 이번 침략전쟁은 현 조지 W. 부시대통령의 아버지인 전 부시대통령 때부터 추구한 신세계질서전략의 실험이며 "아랍세계가 이번 전쟁으로 굴욕 당하고 비참한 자기모멸과 무기력을 느낀 아랍인들이 두고두고 미국을 적대시할 것"을 우려하면서 "이라크전이 거의 일방적으로 끝나 과거 12,3세기에 걸쳐 유럽의 기독교가 소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랍세계를 침략하고 대량살상과 약탈을 일삼았던 십자군 전쟁이 앞으로 미국 단독으로 거침없이 진행될 것"으로 진단하셨습니다. 그리고 현재 미국의 세계전략의 중심에는 중국에 대한 봉쇄와 견제가 있는데, 이를 위해 일본이 군사대국화할 것이며, 한반도에는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이 조성되며 이 난관을 넘어가기 위해서 국제적 통찰력이 필요한 시대가 왔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미국의 이라크침략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침략의 명분인 대량살상무기의 존재여부, 전후복구와 북핵문제에 많은 관심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역사적 안목과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오늘은 분쟁시리즈를 마감하면서 분쟁지역서 국제사회의 구호활동을 알아보겠습니다.

분쟁의 재앙 : 난민

우리는 지금까지 12번의 분쟁시리즈를 통하여 지구상에tj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고통받는지를 보았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살펴본 지역보다도 훨씬 많은 곳에서 전쟁과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분쟁의 원인은 매우 다양하며 역사적으로 복잡했습니다. 식민지 독립과정에서 과거 멋대로 그어진 국경은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상이한 다양한 종족과 종교간의 갈등을 불러일으켰고, 특히 식민통치과정에서 종족차별에 따른 타종족에 대한 배타성과 소외감은 르완다와 소말리아, 부룬디와 같은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좀처럼 쉽게 아물지 않는 갈등의 골이 패였습니다. 독립 이후 국가건설과정에서 벌어진 권력투쟁과 소수민족들의 자결에 대한 희구 또한 분쟁의 원인이었으며, 카슈미르와 스리랑카에서처럼 종교적 갈등도 쉽사리 해소되지 않는 반목을 일으켰습니다. 필리핀 민다나오 지역과 인도네시아의 아체 지역과 같은 빈곤과 빈부격차, 지역적 소외감에서 비롯된 분쟁들이 있었으며, 냉전체제 하에서 수많은 독재정권과 사회주의정권들은 소수민족의 인권을 무자비하게 유린했습니다.

분쟁이 발생하게 되면,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수많은 사상자와 이를 피해 국경을 넘는 난민들, 그리고 국내 유랑민들(internally displaced peoples)이 생겨납니다. 1951년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Convention Relating to the Status of Refugees)에 따르면, 난민이란 "인종, 종교, 국적, 정치적 견해, 특정 사회 단체 참여 등의 이유로 인한 박해의 공포를 피해 조국을 떠난 후, 귀환하지 못하거나 귀환하려 하지 않는 사람"을 뜻합니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에 의하면 2002년 1월에 집계된 지구촌의 난민은 19,783,100명이었습니다. 아시아 8,820,700명, 유럽 4,855,400명, 아프리카 4,173,500명, 북아메리카 1,086,800명, 라틴아메리카 및 카리비안지역이 765,400명, 오세아니아 지역이 81,300명이었습니다. 총 천9백만명 중에서 1천2백만명의 순수난민들(61%)과 940,800명의 피난처 희망자들(asylum seekers)(5%), 그리고 462,700명의 귀향 난민들(3%), 5백3십만명의 국내 유랑민들(25%), 241,000명의 귀향 국내유량민들(1%), 마지막으로 백만명의 관심대상자들(people 'of concern')(5%)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이중 여성의 비율이 45-55%를 차지하고 있으며, 유엔난민고등판무관의 보호아래 18세 이하의 어린이들이 7백7십만명이었습니다.

발칸지역을 제외한 유럽에서의 난민인구는 상당부분 아프리카지역에서 건너온 점을 감안한다면 아프리카지역이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난민이 발생한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대량의 난민과 국내유랑민이 발생한 지역은 부룬디(553,900명), 수단(489.300명), 앙골라(470,500명), 소말리아(440,200명), 콩고민주공화국(391,800명), 에리트리아(333,100명), 라이베리아(244,600명), 시에라 레온(179,000명), 르완다(105,700명), 에디오피아(58900명)의 순으로 밝혀졌습니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이 제시한 난민의 통계에는 국내유랑민들과 피난처 희망자들(asylum seekers)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과거 국가간의 전쟁으로 난민이 발생한 것과는 달리 198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증가한 국내에서의 분쟁들로 인하여 국내유량민들이 눈에 띤 증가현상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국제 국내유랑민계획(Global IDP:Internally Displaced peoples Project)에 의하면 2002년 한해동안 3백만명의 국내유량민들이 분쟁지역에서 발생하였는데, 아프가니스탄, 부룬디, 콜롬비아, 콩고, 콩고민주공화국, 라이베리아, 필리핀, 수단, 우간다와 같은 오랜 분쟁지역에서도 수천명의 새로운 국내유랑민들이 발생하였습니다.

한가지 고무적인 현상은 몇몇 지역에서 많은 수의 난민들이 집으로 돌아갔는데, 에리트리아(백만명), 보스니아(80,000명), 부룬디 국내유량민들(42,000명), 아프리카 난민들(267,000명)과 마케도니아(160,000명)에서 귀향이 이루어졌고, 무국적자(stateless persons)가 700,000명 감소하였습니다. 그러나 파키스탄의 2백2십만명과 이란의 백9십만명과 독일의 988,500명은 여전히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 곳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생존을 넘어 희망의 씨앗 심기 : 나눔의 손을 내밀자

국제사회에서는 이들에 대한 구호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쳐왔습니다. 유엔은 그 창립이래로 난민에 대한 구호사업이 핵심 역할 중에 하나였는데, 유엔에서는 산하 특별기구별로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였습니다. 난민구호와 재정착에 필요한 각종 지원과 관계되어있는 특별기구로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유엔아동기금(UNICEF), 유엔개발계획 (UNDP), 세계식량계획(WFP), 세계보건기구(WHO)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권고등판무관실(UNHCHR)과 인권문제조정협력실(OCHA: UN Office for the Coordination of Humanitarian Affairs)도 분쟁지역에서 야기되는 인권침해상황에 대해 관여하고 있으며, 유엔지뢰행동(UN Mine Action)은 분쟁지역에서의 지뢰제거작업과 지역주민들에 대한 교육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유엔의 활동은 민간단체들과의 협력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인도적 구호에 나서는 지구촌의 민간단체들은 아프리카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는 등 이들은 분쟁지역에서 목숨을 걸고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단체들로는 국제적십자(International Committee of the Red Cross), CARE, World Vision, 국경없는 의사회(Medecins sans frontieres), Save the Children, OXFAM 등이 있습니다.

국제적십자 : 1859년에 시작된 국제적십자운동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광범위하며 조직화된 국제 구호단체입니다(국제적십자는 1949년 제네바 협약으로 국제법상의 지위와 권한을 가지고 있어 일반 비정부기구(NGO)들과는 다른 독특한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2001년 국제적십자의 연간보고서에 의하면, 160,000건의 수술이 적십자의 도움으로 이루어졌고, 580,000명의 인원이 식량을 포함한 생필품을 제공받았고, 전쟁 및 분쟁지역에서 2백5십만명이 적십자의 물 공급프로그램으로 직접 혜택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콩고민주공화국, 수단, 우간다, 부룬디 등 아프리카지역과 북부 코카서스지방에서는 구호활동의 안전에 심각한 위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기적인 구호활동을 펼치는 지역으로 이라크, 콜럼비아, 스리랑카, 수단을 포함한 아프리카 대호수지역이 있었고, 마케도니아를 제외한 발칸지역과 앙골라, 타지키스탄 동티모르는 정국이 안정되면서 활동을 줄였지만, 서아프리카와 네팔, 버마에서는 구호활동을 더욱 증가하였습니다.

옥스팜(OXFAM) : 1941년 나치가 그리스를 점령하고 국경을 봉쇄하자 이로 인하여 발생한 난민들을 돕기 위해 영국의 옥스퍼드 기아구호위원회(Oxford Committee for Famine Relief)를 중심으로 한 긴급구호활동이 옥스팜의 시초였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한국전쟁에서도 난민보호와 기아문제에 개입하였고, 최근에는 코소보분쟁 이전부터 코소보지역에서 식수와 위생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였고, 나토의 공습이후에는 긴급구호활동을 벌였습니다. 또한 동티모르, 르완다의 난민구호, 이란, 이라크, 터키 지역의 쿠르드족 구호활동에 유엔기구들과 파트너로 참여하였습니다. 특히 옥스팜은 소총과 같은 소형경무기의 국제거래 금지를 위한 캠페인을 벌여 장기적인 면에서 분쟁의 감소와 평화만들기의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CARE INTERNATIONAL : 오스트레일리아, 브라질, 캐나다, 덴마크, 독일,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노르웨이, 일본, 미국에 걸쳐 단체가 있는 CARE는 2차대전 직후에 창설되었습니다. 1946년 미국에서 영국인들에 대한 식량 및 의류지원을 하면서 시작되었고, 그 후에는 주로 개발도상국의 기아현장과 난민캠프 등지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점차 그 활동영역을 넓혀 도시 빈민지역의 종합개발, 고용, 보건, 식수 및 위생, 커뮤니티 건설 등 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월드비젼(World Vision) : 1950년 한국전쟁의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창설된 단체로, 그 이후에 12개국에 지부를 두어 순수 민간차원의 모금에 의한 인도적 구호활동을 하였습니다. 초기에는 단순한 물자공급 중심의 구호활동이 많았으나, 구호활동과 함께 점차 지속가능한 지역사회 개발에 초점을 두는 개발사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한국월드비전의 경우 국내 지역사회복지사업뿐만 아니라, 북한에 채소농장과 국수공장경영 등 개발 사업과 아프가니스탄 난민지원사업들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국경없는 의사회(Medecins sans frontieres) : 1968년 나이지리아 내전에 파견된 프랑스 적십자사 소속 베르나르 쿠시네(Bernard Kouchner)를 비롯한 의사와 언론인 12명이 전쟁·기아·질병·자연재해 등으로 고통받는 세계 각 지역의 주민들을 구호하기 위하여 설립한 국제 민간의료구호단체입니다. 매년 3,000명 이상의 자원봉사자들이 전세계 80여 국가에서 모여 인종·종교·정치적 신념을 떠나 차별없는 구호활동을 벌여 왔습니다. 1972년 지진이 발생한 니카라과에 들어가 구호활동을 벌인 것을 시초로 1975년 베트남전쟁에서도 구호활동을 벌였고, 지난 1990년 걸프전쟁 때는 60대의 전세기를 타고 현장으로 날아가 7개소의 난민 캠프를 설치하여 7만여명의 난민을 구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르완다, 소말리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나이지리아, 콩고, 에티오피아, 코소보, 동티모르 등의 분쟁지역과 지진과 홍수 등 자연재해지역에서의 의료활동을 벌여 1999년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Save the Children : 1932년 미국의 아팔래치아 광부 아이들을 위한 활동이 계기가 되어 2차 대전 당시에도 유럽 8개국 난민아동과 지역사회를 돕는 활동을 하였으며 아동의 보건, 영양, 식수, 위생 프로그램의 개발과 운영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단체입니다.

이외에도 국경없는 기자회(Reporters sans frontieres)는 분쟁지역에서의 정확한 사실보도를 위해 죽음을 무릅쓴 취재를 하기도하는데, 이번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에서도 9명의 사망gkrh 2명이 실종되었습니다. 한국에서도 한국이웃사랑회는 르완다 분쟁과 아프가니스탄 난민지역에서 의료지원 사업을 펼치기도 하였으며, 나와우리는 버마 NLD(National League for Demcracy) 한국지부회원들에 대한 후원모임을 가지고 있으며, 지구촌 나눔운동 은 베트남, 몽골, 필리핀, 캄보디아, 중국 등지에서 빈곤문제 해결을 위한 개발 및 보건의료사업과 난민, 피해자에 대한 구호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처럼 국제사회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분쟁지역 난민과 주민들에게는 하루하루의 생명을 이어가는 생명수를 얻기도 하고, 지뢰로 부상을 입은 아이들이 치료를 받으며,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에게는 그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쉼터를 함께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사는 이들에게 나눔의 손을 내미는 것이야말로 따뜻한 인류애입니다.

자, 이제 우리가 손을 내밉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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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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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국제연대위원회입니다.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공격이 고조되는 가운데 최근 9.11테러 희생자 가족모임인 평화로운 내일(September 11 Families for Peaceful Tomorrows) 소속 회원들이 이라크를 방문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지난 1991년 걸프전 당시 오폭으로 어린이 52명, 여성 261명 등 403명이 희생된 알이미리야지역을 방문하여, 지역 희생자 가족들과 만남을 가졌습니다. 이 지역은 미국이 군사작전기지로 오해하여 폭탄을 투하했던 곳으로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의 뜻으로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편견을 버리고,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들이 같은 이유로 또다시 이라크를 방문하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은 아시아 분쟁지역 중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을 살펴보겠습니다.

인도네시아의 아체(Aceh)분리운동

7세기부터 14세기경까지 인도네시아의 주요지역을 장악했던 슈리비자야 왕국이 인도네시아지역의 통합의 시초였습니다. 슈리비자야왕국은 각 지역 부족의 자치를 인정하면서 무역권을 독점하여 이를 통해 모든 부족을 다스렸습니다. 그후 인도네시아지역은 영국, 네델란드, 포르투갈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습니다. 아체지역은 인구 4백만명의 수마트라 서북쪽에 위치한 자치주입니다. 원래 이슬람 율법 국가를 표방한 독립국으로, 네델란드의 식민지 하에서도 강력하게 독립투쟁을 벌였던 지역입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네덜란드는 종족 및 지역별로 독립을 약속하면서 인도네시아 연방정부와 협상을 하였는데, 이 통합과정에서 아체지역은 자치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바족(전체 인구의 45%)을 중심으로 한 인도네시아에 편입됨으로써 독립의 꿈은 무산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자치주로의 승격을 요구해온 아체지역주민들의 반발로 7년여의 분쟁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분쟁의 결과로 아체지역은 이슬람율법과 전통관습 및 교육에 대한 자율권을 획득하는 특별지구로 지정되었지만, 1966년 수하르또가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강한 통합정책과 경제개발을 추진하면서 갈등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아체지역의 아룬(Arun)지방의 액화천연가스(LNG)는 인도네시아의 심각한 경제위기를 타개할 수 있었던 계기였습니다. 1977년 생산에 들어간 아룬유전으로부터 얻은 연평균 21억 달러의 국가수익은 1980년대 연평균 7%의 경제성장을 이룩하도록 한 발판이 되었으며, 수하르또를 '개발의 아버지'로 추앙받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경제개발과정에서 아체지역주민들은 소외되었습니다. 아체지역의 개발은 1975년 이래로 중앙정부의 주도아래 이 지역에 이주시키기 시작한 자바인들을 생산현장에 투입시켰고(1991년까지의 자바 이주민 숫자는 당시 아체 인구의 약 3%인 10만 5천명이었음), 이 지역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수익에 비해 아체지역에 돌아오는 것은 극히 미비하였습니다. 1997년의 경우 약 26억 달러(30조 루삐아)의 외화를 벌여들였지만, 아체주에 할당된 연간 예산은 수입의 0.34 %인 약 1021억 루삐아였습니다. 또한 아체지방의 산림자원이 주면적의 3/4인 413만 ha 산림이 그 동안 19개의 수하르또 측근 기업에 의해 무차별 벌목되어, 산간지방에서 얻은 수확물로 생계를 유지해오던 지역주민들에게 많은 타격이 되었으며, 1995년과 1996년에 약 1000억 루삐아 이상의 재산손실을 가져온 대홍수의 원인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경제적 수탈로 인하여 1976년 자유아체독립운동(GAM) 단체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무장투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하여 낮에는 정부군의 반군공격, 밤에는 아체 독립주의자들의 습격 등 살육전이 반복·지속되고 있습니다. 무장투쟁과 더불어 1998년 자유아체독립운동은 아체 전체 인구의 40%에 해당하는 약 150만 명의 주민이 모여 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요구하는 집회를 개최한데 이어 1999년 자유아체독립운동은 아체주의 수도 반다아체에서 대규모 평화집회를 열었습니다. 1999년 집회에서는 하루에만 100명이 넘는 비무장 민간인들이 죽고 수백명이 총상을 입는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인권유린은 수하르또 시절부터 비롯되었는데, 1990년 7월 붉은 그물작전(OJM: Operasi Jaring Merah)으로 명명된 토벌로 아체지역의 민간인에 대한 살인, 방화, 강간 등 인권유린은 극심하였으며, 특히 1995년 수하르또 사위인 쁘라보오의 특전사(꼬빠수스) 사령관 재임 시에 파견된 예하 부대의 만행은 극에 달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만행으로 1976년부터 작년까지 12만명이 숨졌고, 폭력의 희생자와 실종자를 위한 아체위원회(The Aceh Commission for Disappearances and victims of violence)에 의하면 2002년 1월부터 11월 동안 1,307명이 살해되었고 1,806명이 고문당했으며, 1,186명이 체포 또는 자의적 구금을 당하였으며, 몇몇 시체로 발견된 377건의 실종사고와 46명의 여성들이 성추행을 당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위원회에 의하면 이 통계는 90년대 말 이후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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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아체지역에 대하여 분쟁종식을 위한 평화협정이 2002년 12월에 체결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 정부와 자유아체운동(GAM) 대표들은 ▲ 적대관계 청산, ▲ GAM 무장해제, ▲ 정부군 철수, ▲ 자치선거 실시, ▲ 유엔 감독관 파견 등에 합의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평화협정 체결 즉시 모든 적대행위를 중단하며, 자유아체운동은 모든 무기를 국제 감시인단이 관할하는 병영에 넘기고, 공수부대 및 경찰기동여단을 포함한 대다수 정부군을 아체에서 철수시키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체지역은 오는 2004년 자유롭고 공정한 지방선거를 실시해 중앙정부로부터 광범위한 자치권을 넘겨받고, 공동안보위원회를 설립해 치안상황을 감시하기로 하였습니다. 협정의 체결에는 스위스 인권단체 앙리 뒤낭 센터 등 국제사회의 노력도 기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12월 9일의 평화협정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다시 폭력사태가 발생하는 등 갈등과 긴장은 전혀 사라지고 있지 않습니다. 폭력의 희생자와 실종자를 위한 아체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1월 9일 이 평화협정을 지지하는 평화집회가 개최되었는데, 대부분의 시민사회단체들은 인도네시아 치안당국의 제지로 집회장소에 도착하지 못하였고, 각 지역에서 집회장소로 가기를 원하는 현지 주민들에 대하여 인도네시아 군대가 발포하여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또한 수명의 주민들이 구타로 인한 심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들 부상자는 대부분 20대로서 17세 청소년도 포함되었습니다. 평화협정에는 적대행위 중지와 시민사회의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였지만, 인도네이사 정부는 평화적 대화보다는 여전히 군사적 접근을 취하고 있습니다.



필리핀 무슬림의 독립운동

필리핀 남부지역의 민다나오(Mindanao)와 술루(Sulu)지역은 원래 필리핀에 속하지 않는 독립된 이슬람국가였습니다. 한때 마닐라가 있는 루손(Luzon)섬까지 세력을 확대했던 이슬람 세력은 스페인의 통치가 시작된 16세기 중엽이후 필리핀 남부의 민다나오지역으로 이주하여 기독교로의 개종을 강요하는 식민통치에 끊임없이 대항하였습니다. 필리핀 남부 무슬림들에 대하여 스페인은 300여년에 걸쳐 정복을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이후 미국의 식민통치(1898-1946)에서도 기독교화와 필리핀 내로의 통합정책이 추진되었습니다. 미국은 무슬림 거주지에 많은 기독교인을 이주시켰는데, 이와 같은 정책은 필리핀인들의 우월함을 조장함과 동시에 무슬림에 대한 차별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여, 미국이 통치하던 1930년대부터 독자적인 국가수립의 요구가 제기되었습니다.

분리독립운동은 1960년대부터 본격화되었습니다. 이는 1950년대 이후 필리핀정부가 민다나오섬의 모로인(Moro 말레이-인도네시아 인종 그룹으로 민다나오와 술루 군도를 중심으로 하는 필리핀 남부지역에 거주하는 이슬람교도들을 일컫는 총칭) 거주지로 가톨릭교도인 필리핀인들을 대량 이주시켰기 때문인데, 이 정책을 실시하게 된 배경에는 루손섬의 토지문제가 있었습니다. 식민지시대부터 유지된 대토지소유제로 인하여 농민의 불만이 쌓였고, 농지개혁은 대지주계급에 의해 좌절되었습니다. 이러한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농민들을 민다나오섬으로 이주시켰지만, 이지역은 공동체적 토지 소유제도가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필리핀인의 이주와 함께 근대적 소유권이 도입되면서 모로와 이주자 사이에는 토지 이용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는 분리독립운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특히 1971년 필리핀 정부군의 학살을 계기로 분쟁은 모로와 필리핀 정부의 대결로 확산되었습니다.

미수아리(Nur Misuari)가 이끄는 모로 민족 해방전선(MNLF : The Moro National Liberation Front)은 모 조직인 무슬렘독립운동(MIM)의 무장단체로써 리비아, 말레이시아,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등 회교권 국가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약 30년 동안의 무장투쟁 과정에서 정부군과 모로 민족해방전선측의 사망자는 1971부터 현재까지 12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1976년 리비아의 중재로 필리핀 정부와 모로 민족해방전선 간에 트리폴리 협정(Tripoli Agreement)이 체결되어 이슬람 지역 14개주와 9개시가 '민다나오 자치지역(ARMM : Autonomous Region in Muslim Mindanao)'으로 지정되었는데, 주민투표 결과 결국 4개주만이 자치지역에 포함되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 위축되던 분리독립운동세력은 투쟁방식과 관련한 노선갈등으로 1984년 강경파 하심(Salamat Hashim)이 이끄는 1만∼1만 5천명 규모의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LF : Moro Islamic Liberation Front)이 형성되었고, 1천 5백명 정도의 극렬 무장단체인 아부사야프(Abu Sayyaf) 집단도 등장하였습니다.

필리핀 무슬림들의 분리 독립운동에 대한 평화적 해결모색은 1986년 필리핀 2월 민중혁명(Peoples power)이후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분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1996년 9월 2일 마닐라의 대통령궁에서 라모스 대통령과 모로 민족해방전선(MNLF)의 미수아리 의장은 내전을 종식시키고 민다나오 지역의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평화와 개발을 위한 남부 필리핀 평의회(The Southern Philippine Council for Peace and Development, SPCPD)구성 등 평화 협정을 체결하였습니다. 평화협정의 주요 내용은 ▲ `평화 및 개발 특별지역' 지정(1976년 트리폴리 협정에 명시된 민다나오 회교지역 14개주와 9개시를 특별지역으로 선포), ▲ 평화와 개발을 관장할 한시 기구로써 `남부 필리핀 위원회' 설치, ▲ 일부 모로 민족해방전선 요원의 군경 전환, ▲ 지역 치안을 담당할 보안군 설치 등이었습니다. 한편 2001년에는 필리핀 정부와 이슬람 최대 반군단체인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LF)이 공식 휴전협약에 서명했습니다. 말레이시아의 중재로 이뤄진 휴전협정은 1996년 모로민족해방전선(MNLF)과 체결한 것과 마찬가지로 남부 필리핀에서 어느 정도의 자치를 인정한다는 합의를 구체화하였으며, 휴전 이행, 이슬람지역과의 관계정상화 방안, 보안, 사면 문제 등이 휴전협정의 주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슬람세력 중 극렬 무장단체인 아부사야프(Abu Sayyaf)는 아직 무장투쟁을 지속하고 있고, 폭탄테러와 군대의 소탕작전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지금까지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2002년 10월에는 아부사야프를 추적하던 필리핀 정부군이 반군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아 7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했고, 12월에는 필리핀 남부 마긴다나오주의 다투 피앙시 시장이 폭탄테러를 당했으며, 올해 1월에도 벌어진 정부군과 이슬람 분리주의자들간의 충돌로 최소한 반군 28명이 숨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더욱이 필리핀의 경우 '테러와의 전쟁'을 빌미로 필리핀에 다시 주둔하기 시작한 미군이 있어 이 지역에서의 군사적 긴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의 분리독립운동은 종교와 민족(종족)간의 갈등으로 볼 수 있지만, 빈곤과 소외 등 경제적인 원인과 무장투쟁과 진압과정에서 자행되었던 인권유린, 정치적 탄압이 더욱 구체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구의 식민지쟁탈로 인하여 자의적인 영토분할과 억압적인 식민통치는 분쟁의 씨앗을 만들었으며, 독립과정에서 지역주민들의 요구가 좌절되고, 독재정치에 의한 탄압은 분쟁을 더욱 키웠습니다.

최근 양 지역 모두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분쟁을 종식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폭력은 악순환되고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 지역들에 진정한 평화가 정착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단지, 국제사회가 함께 마음을 기울인 노력으로 마련한 평화협정을 바탕으로 평화가 정착될 수 있기 위한 국제사회의 감시와, 지원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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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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