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 20일 방콕에서 열린 ‘인권과 개발을 위한 아시안 포럼’에서는 불법 체포·구금된 5명의 인도 출신 인권 운동가들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채택하였습니다. 참여연대는 아시아의 27개 기타 인권 단체와 함께 동 성명서에 연명하였습니다.

성명서 주요 내용
Mr. Gnana Diraviam, Mr. Anandan, Ms. Bharati Pillai, Ms. Niharga Priya, Ms. Sudha 등 5명의 인권 운동가는 8월 15일 한 고문 사건을 취재하기 위한 현지 조사 도중, 그에 관한 진술서를 얻고자 지역 경찰서를 방문하였습니다. 담당 경찰관과 대화를 하던 중, 약 3시간 후 이들은 기타의 고지 없이 다른 방으로 옮길 것을 요구받은 후 휴대전화를 압수당한 채 구금되었고 곧바로 유치장에 구류되었습니다. 이들은 무슨 혐의로 구금되었는지 모르는 상태였으며, 혐의 사실을 알려줄 것을 요구한 뒤에야 (1)공무원 사칭, (2)공무 집행에 대한 위협, (3)사칭죄 그리고 (4)협박죄로 기소되었다는 사실을 통지 받았습니다.

운동가들의 적법한 행동을 방해하는 인도 당국의 행위는 그러한 행동을 보호할 것을 규정하고 있는 ‘인권 옹호자들에 관한 UN선언’의 명백한 위반이며, 인도 정부는 상기 5명과 같은 인권 운동가들의 노력을 인정하고 보호할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관련 자료에 의하면, 경찰관들은 운동가들을 기만하여 불법으로 체포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책임 역시 수반되어야 합니다.

포럼 아시아는 5명의 인권 운동가들의 불법 체포를 비난하며, 또한

1. Mr. Gnana Diraviam, Mr. Anandan, Ms. Bharati Pillai, Ms. Niharga Priya, Ms. Sudha 등 체포된 5명의 인권 운동가들을 즉시 석방할 것,
2. 상기 5명의 기소를 취하할 것,
3. 불법 체포·구금에 대한 조사를 진행할 것, 그리고 인도 내 인권 운동가들이 ‘인권 옹호자들에 관한 UN선언’에 따라 자유롭게 인권 향상과 보호를 위한 적법한 행동을 취할 수 있게 보장할 것을 인도 당국에 촉구하는 바입니다.

‘인권 옹호자들에 관한 UN선언(the UN Declaration on Human Rights Defenders)’란?

동 선언 6조에서는,
“모든 사람은 개인적으로, 다른 이들과 연대하여 다음과 같은 권리를 가진다. (a) 모든 인권 및 기본적 자유에 관한 정보를 파악, 조사, 입수, 수령, 보유할 수 있고, 또한 국내 입법·사법·행정 체계에 의해 어떻게 그러한 권리와 자유가 이행되고 있는지에 관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 (c) 모든 인권 및 기본적 자유가 법적으로 또한 실제적으로 어떻게 준수되고 있는지 조사, 토의하고 이에 대하여 의견을 형성, 유지할 수 있으며, 이 뿐 아니라 그 외 적절한 방법을 통해서도 이 문제에 대하여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다.” 라고 규정하고 있다.

정리: 이태원 국제연대팀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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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노래하는 저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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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NGUYEN CHI THIEN (1939~)
국가: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Socialist Republic of Vietnam)
분야: 인권, 민주주의, 저항시인




베트남의 역사

 베트남의 정식명칭은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Socialist Republic of Vietnam)이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이면서 세계에서 유일하게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통해 공산화를 이룬 나라이기도 하다. 1945년까지 지속된 응웬 왕조를 마지막으로 베트남은 2차 세계 대전의 종결 후 여러 외세의 침입에 맞닥트리게 된다. 이에 반발해 베트남에는 여러 민족 진영이 생기게 되는데, 그 중 하나인 베트남 독립동맹(베트민)을 중심으로 북 베트남에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설립된다. 남, 북으로 갈라진 베트남 통일 전쟁에서 남 베트남의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이 1961년 참전하였으며, 한국도 이 때 지원군을 파병하였다. 1975년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 베트남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고, 이에 본격적인 베트남의 공산주의 체제가 시작하게 된다.

<사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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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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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베트남 전쟁에서 폭격을 피해 달아나는 아이들
사진 2. 전투에 참가한 한국 병사들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저작권자ⓒ '한국언론 뉴스허브' 뉴시스통신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베트남은 현재 상당부분 자유시장 경제체제로 돌아섰지만, 여전히 정치적으로는 공산당 일당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독재체제하에서 베트남은 인권운동에 대한 탄압을 계속하고 있고 정치범들은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 영장 없이 체포하는 일은 다반사이고 사법부와 입법부는 정치적인 압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아직까지 종교의 자유는 제한되어 있어서 모든 종교 단체들은 공산당이 운영하는 조국 전선과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 또한 국가보안법을 근거로 인터넷을 이용하여 인권, 민주주의, 정권교체를 토론하는 반 체제주의자들이 학대당하거나 협박을 받고, 구속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그나마 수용시설은 불결하고 위생상태가 좋지 못하며 수용소 내에서는 고문 행위가 자행되고 있다

꿈꾸는 저항시인 NGUYEN CHI THIEN

 뉴우엔 치 티엔은 1939년 2월 27일 베트남 중산층의 아들로 하노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배려로 그는 프랑스와 베트남 문화의 좋은 교육을 받게 된다. 1954년, 그의 나이 15살 때 북 베트남에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된다. 당시 거의 백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공산주의 정권을 피해 북에서 남으로 옮겨갔지만, 그의 부모님은 하노이에 머물기로 결정한다. 왜냐하면 북베트남의 공산주의 정권이 외세를 몰아내는데 기여한 애국주의자들이고 그들의 정책이 서민을 지원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는 어긋나고 1953년에서 56년에 걸쳐 이루어진 소련식 공산화 과정에서 수십만의 사람들이 처형되거나 돌아오지 못하는 감옥으로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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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뉴우엔 치 티엔

 이 때부터 티엔은 공산정권에 반대하는 시를 쓰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시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베트남을 떠돌게 된다. 1960년 12월 고등학교 역사선생님이었던 한 친구의 부탁으로 티엔은 두 시간 동안 역사 수업을 맡게 된다. 당시 사용되었던 교과서인 “Cach Mang Thang Tam 1945” (8월 혁명의 역사)는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패망이 만주에서의 소련군대의 승리 때문이라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었다. 그는 그의 학생들에게 진실은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두 개의 원자폭탄 때문에 일본이 항복한 것이라고 가르쳤고, 약 두 달 뒤 그는 반정부선전의 혐의로 체포되어 2년의 형을 선고 받는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는 푸토와 엔바이 지역의 노동캠프에서 3년 반을 복역하게 된다.

 그는 약 100여 편의 시를 캠프 안에서 쓰는데, 모두 그의 마음 속으로 쓰게 된다. 왜냐하면 캠프에는 시 쓰기를 위한 집필도구도 없었고 그러한 시를 쓰고 읽는 행위 자체가 너무나 위험했기 때문이다. 쥐, 거미, 곤충 등 캠프 내에 살아있는 생물은 모두 멸종될 정도로 캠프 내 환경은 열악했다. 극한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티엔은 시가 영혼의 아내와 깉이 곁에서 그를 위로하고, 격려했다고 회상한다.

 1964년 석방 후 티엔은 기억 속으로 저장해 두었던 시를 옮겨 쓰고 그것들을 그의 친한 친구들에게 낭독해 주기 시작한다. 곧 그의 시는 하노이와 하이폼에서 널리 퍼지게 되고, 1966년 반동적 시를 썼다는 이유로 그는 다시 12년의 감옥행을 선고 받는다. 그는 이 긴 시간 동안 300편이 넘는 시를 마음 속으로 집필한다.

 1977년, 남 베트남이 몰락한 2년 후, 정치범들을 수감하기 위해 북 베트남 정부는 그를 석방하게 된다. 당시 사람들의 증언으론 그는 ‘걸어 다니는 해골’이라 불릴 정도로 깡마른 상태였다고 한다. 티엔은 그의 시를 해외로 보내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대사관으로 갈 것을 결심하고 3일 밤, 낮에 걸쳐 그의 기억 속에 있던 시 400편을 옮겨 적는다. 7월 16일 마침내 그는 영국 대사관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하고 3명의 외교관에게 셔츠 속에 숨겨두었던 그의 시들을 넘겨주게 된다. 그들은 티엔에게 시를 출판할 것을 약속한다. 티엔이 대사관의 뒷문을 나오자 마자 그는 경찰에 다시 체포된다.

새벽은 올 것이다

 동유럽에서의 공산주의 정권들의 몰락과 국제사회에 티엔의 상황을 알려온 해외거주 베트남인들의 도움으로 그는 1991년 10월 석방되었다. 그가 목숨을 걸고 만난 세 명의 영국 외교관은 약속을 지켰고, 티엔의 시는 미국, 프랑스 그리고 다른 나라의 베트남인들 사이에서 퍼지게 된다. 1982년 Asiaweek 지는 “하노이 지하로부터의 목소리”란 제목의 기사를 싣고, 티엔에 관한 BBC 방송이 이어지면서 세계는 그를 베트남의 저항시인으로 주목을 하게 된다. 티엔은 “Amsterdam Poetry prize”, “American PEN Freedom Award” 등의 상을 수상하게 되고 1988년에는 “Freedom to Writer” 상을 받는다. 그의 시는 지금 영어, 불어,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으로 번역되어 베트남의 인권상황을 세계에 알리고 있다.
 베트남과 미국의 수교가 정상화된 후 미국으로 이주한 티엔은 40년 간 떨어져 있던 그의 동생과 지금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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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ugh the night seems impenetrably deep
And boundless over my head,
I still pray,
Still live and trust
That the dawn will come, the dawn will come.”
“비록 밤이 칠흑처럼 깊을지라도,
그리고 내 머리 위에 끝없이 펼쳐져 있다해도,
나는 여전히 기도합니다
여전히 살아가고 믿고 있습니다
새벽이 오리라는 것을, 새벽이 오리라 것을”
티엔의 시 中에서

참고자료
http://www.vietamreview.net/Nguyen_Chi_Thien_author.html
http://www.vietnamlit.org/nguyenchithien/autobiography.html
http://en.epochtimes.com/news/6-5-3/41077.html
http://en.wikipedia.org/wiki/Nguyen_Chi_Th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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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퇴하는 동북아 인권, 연대로 막자"
점차 커지는 '동북아 연대'의 필요성

현재 동남아시아 인권단체들 사이에서는 아세안 (동남아 국가연합, ASEAN) 내에서 시민 사회의 목소리를 높이기 위한 논의가 한창이다. 아세안이 처음 출범한1967년에는 아세안의 주된 관심이 단지 안보와 경제 개발에만 집중되었지만 1993년 비엔나 세계 대회를 거치면서 아세안 정상들은 비엔나 인권 선언을 기반으로 아세안 내에서도 인권 관련 기구를 설립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견을 모았다.

그렇지만 그 이후, 1998년 하노이 Action Plan에 이르러서야 아세안 내에서의 인권에 대한 논의가 다시 시작된다. 이후 2004년, 비엔티엔 Action Programme 에서 특히 여성과 아동의 인권과 관련해 구체적으로 아세안 내부의 인권 기구 설립에 관한 논의가 이뤄진다. 이와 관련해 2004년, 아세안 내부에서는 아세안 지역의 여성 폭력 금지를 위한 선언 (Declaration on the Elimination of Violence Against Women in ASEAN Region), 여성과 아동에 초점을 맞춘 인신매매 금지 선언(ASEAN declaration against Trafficking in Persons particularly Women and Children),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의 권리 증진과 보호를 위한 아세안 선언(ASEAN Declaration on the Protection and Promotion of the Rights of Migrant Workers)과 같은 인권 관련 선언들을 제정했다.

2007년에 이르러 아세안 국가들은 드디어 아세안 헌장(Charter)을 채택하였다. 무엇보다도 아세안 헌장 제 14조는 인권을 보호하고 증진시킨다는 아세안의 설립 목적에 걸맞게 아세안 인권기구를 설립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비록 헌장을 만들어 가는 과정은 모두 비공개로 진행되었고 따라서 시민사회도 실질적 기여를 할 기회가 없었기에 결과적으로 형식적인 인권 및 민주주의에 대한 언급과 신자유주의에 중심을 둔 헌장이라는 문제점이 지적되었지만 헌장 제14조는 ASEAN Human Rights Body를 설립하는 기반이 되었다.1) 현재 ASEAN human rights body는 2009년 12월 설립을 앞두고 있으며 아시아 시민사회들은시민사회의 목소리를 그 안에 담기위해 적극적인 로비활동을 벌이고 있다. 특히 2007년 초 출범한 아시아시민사회연대회의(Solidarity for Asian People's Advocacy·SAPA) 산하 아세안 실무그룹(Working Group on ASEAN)에서는 ASEAN Human Rights body의 설립을 담당하고 있는 ASEAN High Level Panel 그룹에게 시민사회의 요구사항을 담은 문서를 2008년 11월 7일에 제출하기도 했다.

이처럼 동남아시아 시민 사회들은 아세안 설립 과정에 있어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목소리를 개진하며 그 안에서의 인권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 끊임없는 연대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렇지만 이에 비해 아시아 내에서 동북아시아 시민사회의 연대의 목소리는 약한 편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포럼아시아 동북아시아 팀에서 다루고 있는 국가들은 몽고, 남한, 북한, 일본, 중국, 대만, 티벳 이렇게 총 8개 국가이다. 동북아시아 지역 연대가 약한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그중에는 아세안과 같은 지역적 기구의 부재, 대부분의 국가들이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언어 소통의 문제, 지역 내에서의 인권 갈등 (예를 들면 중국, 티벳 그리고 대만), 그리고 시민사회들 사이의 정보 및 소통 부족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동남아시아보다 동북아시아는 인권 상황이 조금 더 낫다는 인식, 그리고 경제적으로 다른 국가들 보다 조금 더 풍족하니 당장 급한 불은 껐다라는 생각이 동북아시아에 대한 지속적 관심과 연대를 부족하게 하는 주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제 더 이상 한 국가의 문제가 그 국가의 인권 문제로만 끝나지 않는만큼 동북아시아 내에서도 시민사회의 연대가 필요하다. 더욱이 아세안과 같은 지역적 기구가 부재하는 만큼 시민사회간의 연대의 중요성이 더 강조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촛불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동안 일어났던 표현의 자유 침해 문제는 현재 대만에서 경찰들이 Wild Strawberry Movement에 참가한 인권옹호자들을 진압하는 모습에서도 똑같이 발견되고 있다. 또한 현재 한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인터넷 상에서의 표현의 자유 억압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중국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으며 프라이버시 침해의 문제도 한국, 중국, 대만, 일본 등 여러 동북아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동북아 지역은 이주자 문제에 있어서도 송출국과 유입국이 공통적으로 존재하는만큼 이에 대한 시민사회의 연대적 고민이 더욱더 필요하다.

2008년은 동남아시아보다 더 안정적이라고 생각되었던 여러 동북아 국가들에서 인권이 후퇴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던 한해였다. 일본에서만해도 적어도 15건의 사형이 행해졌으며 몽고에서는 7월에 있었던 부정 선거 반대 시위에서 4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우리나라에서도 촛불 시위동안 수많은 인권옹호자들이 부상당하고 연행되는 일들이 일어났다.

인권 옹호자로써 각자의 나라에서 열심히 활동하며 국내 인권상황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지만 이와 동시에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인권 상황에도 항상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지며 연대의 목소리를 보내는 것도 중요하다. 단순히 공동 성명을 발표하고 일회성으로 회의에 참가해서 의견을 나누는 것을 넘어서 좀 더 지속적인 교류와 지속적인 관심, 그리고 지속적인 연대가 필요하다. 결국 인권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후퇴하는 것이고 이를 막기 위해 아시아 인권 옹호자들의 끊임없는 연대는 더욱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좋은 원동력이 될 것이다.

1) 아세안 헌장 제 14조: ASEAN Human Rights Body
(1) In conformity with the purposes and principles of the ASEAN Charter relating to the promotion and protection of human rights and fundamental freedoms, ASEAN shall establish an ASEAN human rights body,
(2) This ASEAN human rights body shall operate in accordance with the terms of reference to be determined by the ASEAN Foreign Ministry Meeting.


백가윤 포럼아시아 동북아시아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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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참사에 대하여 아시아 인권활동가들
한국정부에 책임자 처벌 및 강제철거 중단 요구

유엔 인권옹호자관련 특별 보고관 역시 지난 촛불시위와 용산참사에 이르는  경찰의 폭력진압 및 인권후퇴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표시
 
     
 촛불집회과정에서 발생한 일련의 인권침해 상황에 대해 지난 7월 방문조사를 벌였고 아시아지역 인권 및 개발단체인 Asian Forum for Human Rights and Development (FORUM-ASIA)가 주최하는 제 3회 아시아 지역 인권옹호자 포럼 및 아시아 태평양 지역 여성인권옹호자 협의회(3rd Regional Human Rights Defenders Forum and the Asia-Pacific Regional Consultation on Women Human Rights Defenders)가 2009년 1월 18일부터 20일까지 태국 방콕에서 개최되었다. 이 포럼에 인권옹호자의 상황에 관한 유엔 특별 보고관(UN Special Rapporteur on the Situation of human rights defenders)인 마가렛 세카야(Margaret Sekaggya)씨가 참석하여 아시아 지역 인권옹호자들의 상황에 대하여 의견을 청취하기로 함에 따라 한국NGO도 참가단을 파견하였다.

한국 참가단은 1월 20일 오전 인권옹호자 포럼을 통해 발표한 한국 인권상황에 대한 브리핑에서 당일 오전에 발생한 용산 참사를 긴급하게 소개하면서 한국의 인권상황이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한국 인권상황에 대한 관심과 연대를 촉구하였다. 한국 참가단의 발표를 통해 자신들의 주거권을 지키려다 경찰특공대의 진압과정에서 사망한 철거민들의 희생을 접한 아시아 16개국의 61명의 활동가들은 적절한  보상도 없이 개발로 인해 많은 한국의 도시빈민들이 건설회사가 고용한 용역깡패들로부터 위협을 받아 왔으며 경찰은 용역깡패의 폭력에 대해 묵인해 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희생자들에 대해 애도를 표하고, 성명서를 통해 한국정부의 살인적인 진압작전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면서 한국정부에 관련 책임자를 처벌할 것과 추운겨울에 철거민들이 적절한 대책도 없이 자행되고 있는 강제철거 중단, 인권옹호자들에 대한 경찰폭력 중단을 요구하였다.  (아래 성명서 파일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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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인권옹호자관련 특별 보고관과 면담중인 한국NGO참가단

1월 20일 오후4시부터 약 1시간 동안 진행된 유엔인권옹호자 특별보고관과 한국참가단과의 면담에서 한국 참가단은 촛불 집회 과정에서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뿐만 아니라 인권옹호활동을 벌이던 변호사와 국가인권위원회 직원, 의료진, 기자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자행된 경찰폭력이 결국 1월 20일 오전에 발생한 용산 참사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우선 지적하였다. 또한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활동가들을 비롯한 많은 인권옹호자들이 현재 사법 처리되고 있으며 이러한 정부의 탄압은 과거 20년 전 군사독재정권 시절과 매우 유사하다고 설명하였다. 더욱이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집회 및 시위의 자유, 언론 및 표현의 자유가 심각하게 위축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언론인 해직사태 및 정부에 반대하는 프로그램 제작 중단, PD수첩에 대한 수사, 미네르바 구속을 포함한 네티즌들에 대한 무차별 수사 등은 사실상 한국정부가 인권옹호자들의 활동을 온라인과 현실에서 모두 봉쇄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한국정부가 이러한 인권침해에 대하여 국가인권위원회와 엠네스티 인터내셔널을 비롯한 국제인권단체들의 권고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유엔인권옹호자 특별보고관실과 표현의 자유 관련 유엔특별보고관실의 질의에 대해서도 성실하게 답변하고 있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한국 참가단은 현재 한국의 국가인권위원회가 ICC(International Coordinating Committee of National Institutions for the Promotion and Protection of Human Rights, 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의 부의장국가이자 아시아 지역에서 유일하게 ICC로부터 'A‘등급을 받은 국가인권기구임에도 현 정부가 국가인권위원회의 역할과 예산을 축소하려 하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지난 20년 동안 한국이 점진적으로 인권상황을 개선해오면서 현재, 한국이 현재 유엔인권이사회 이사국으로 재선되었을 뿐만 아니라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강경화 유엔인권 고등 부판무관을 배출한 국가로써 국제사회의 많은 기대를 받고 있음에도 현 정부가 집시법, 통신비밀보호법, 국정원법등을 개악하고 사이버모욕죄를 도입하는 등 심각한 인권후퇴를 시도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유엔차원의 특별한 관심이 필요함을 설명하였다. 이에 유엔 인권옹호자 특별 보고관 마가렛 세카야씨는 지난 2004년 서울에서 열린 제7차 국가인권기구대회 때 한국을 방문하여 당시 한국정부와 국가인권위원회의 대회준비와 활동에 대하여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소개하면서, 급격히 한국의 인권상황이 악화되고 있음에 놀라움과 우려를 표명하였다. 이후, 한국NGO들이 유엔인권옹호자 특별보고관실에 한국 상황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연락 및 협의를 해줄 것을 당부하였다.

1. 한국 참가단

-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장 김남근 변호사
- 인권과평화를위한국제민주연대 나현필 상임활동가

광우병국민대책회의,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인권운동사랑방, 참여연대,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인권과평화를위한국제민주연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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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연대 성명



용산 철거민 강제진압 희생자들을 추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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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받는 파키스탄 여성과 종교적 소수자들의 인권변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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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Asma Jehangir(Asma Jahangir) (1952 ~ )
국가 : 파키스탄 (Pakistan)
분야 : 여성 인권, 소수 종교자, 아동 인권





여성에게 명예살인이 이루어지는 나라, 파키스탄

제2차 세계대전 후 약 100년간 인도대륙을 지배하였던 영국의 통치가 끝나자, 인도에서 이슬람교도의 이익 옹호와 나라 건설을 위해 1906년 무슬림연맹이 조직되었다. 무실림연맹은 이슬람 인구가 많은 파키스탄의 독립을 요구했고 1947년 8월 인도국민회의파·무슬림 연맹·영국 정부의 합의에 따라 인도 독립법이 제정되었다. 그래서 동·서 파키스탄과 인도는 분리하여 영국연방 내의 자치령으로서 독립한다. 이렇게 시작한 파키스탄은 인구의 97%가 이슬람교도인 독실한 이슬람 국가이지만, 동시에 종교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여성과 소수자의 인권과 평등권이 심하게 침해받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특히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아주 심각한 수준인데, 이는 파키스탄의 Hudood 법과 신성모독 법의 역할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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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두드(Hudood) 법은 1979년 하크(Zia-ul-Haq) 군부 독재체제의 ‘이슬람화’ (Islamization process)정책의 일환으로 처음 실행되었다. 코란(Quran)과 순나(Sunnah)를 기반으로 하는 이 법은 혼외정사, 즉 간통을 벌하는 법안이었다. 하지만 이 법은 성폭력의 희생자인 여성들을 도리어 가문의 명예라는 이름 하에 “명예살인”을 하고 있다.

명예 살인은 가족이나 부족에 의한 그 구성원에 대한 살해행위이다. 이는 주로 이슬람 사회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옷차림을 하거나, 특정 성범죄에 연루되어서 구성원이 가족, 부족, 혹은 그 사회에 불명예를 끼쳤다고 판단될 때 행해진다. UNPF(The United Nations Population Fund)는 전 세계적으로 명예살인의 희생자가 연당 최고 5000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파키스탄 국무총리 사우카트(Shaukat Aziz)의 조언자인 니로파르(Nilofar Bakhtiar)에 따르면 2003년 1,261명의 파키스탄 여성이 “명예살인”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2004년 12월 국내외의 압력에 의해 파키스탄 정부는 “명예살인”의 살해자를 7년의 징역 또는 극단적인 경우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는 법을 제정하였다. 하지만 여성인권단체들은 이 법이 단순히 가해자들로 하여금 피해자의 친척들에게 보상금을 지불하고 죄를 벗어나게 할 뿐이라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명예살인의 경우 가해자는 피해자의 친척이기 때문이다.

2006년 후두드법의 개정안이 통과되고 이어 ’여성보호법안(Women's Protection Bill)‘이 통과되었지만 종교 근본주의자들의 격렬한 반대 속에 파키스탄에서 여성의 인권이 가족의 명예라는 이름하에 심각하게 위협받는 이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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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받는 파키스탄 여성과 종교적 소수자들의 인권변호인, 아스마 자하져(Asma Jehangir)

파키스탄의 국가인권위원회(Human Rights Commission) 의장이자 인권운동가, 인권변호사로서 활동하고 있는 아스마 자하져(Asma Jehangir)는 박해받는 여성과 소수자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 그녀는 살해 위협 속에서도 파키스탄 인권위원회의 다른 인권 활동가들의 도움에 힘입어 평생 여성과 종교적 소수자 그리고 아동의 인권을 위해 활동해왔다. 특히, 그녀는 성폭행 피해자, 남편에게 학대 받은 아내, 종교적으로 박해 당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돕고 있다.

아스마 자하져(Asma Jehangir)는 1952년 파키스탄 라홀(Lahore)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운동의 역사를 지닌 가문의 내력 때문인지 그녀는 정치에 일찍 눈을 뜨게 된다. 파키스탄군의 전직 대령이었던 그녀의 아버지, 말리크 지라니(Malik Jilani)는 전역 후에 군부 독재에 반대하는 활동을 했다. 방글라데시에 주둔하고 있는 파키스탄 군에 대해 비난했다는 이유로 그는 여러 차례 감금되었다. 그때 18살인 그녀는 아버지를 위해 첫 석방 탄원서를 제출하고 변호사들과 아버지의 석방을 위해 싸우게 된다. 이는 그녀에게 법과 정치에 대해 배우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녀는  1978년 법 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그녀가 28살이 되된 해, 라홀에서 그녀의 동생, 그리고 다른 두 여성과 함께 파키스탄 최초의 여성 법률 사무소를 개업한다. 대부분의 그녀의 고객은 여성들이었다. 이들을 위해 자하져와 그녀의 동료들은 파키스탄 전통적인 악습과 관행이 여성들을 짓누르는 사회 속에서 여성의 권리를 대변하곤 했다. 같은 해 그녀는 Women's Action Forum(WAF)를 설립한다. 1983년에는 그 당시 발생했던 소피아(Safia Bibi) 사건에 대한 항의로 열린 WAF의 첫 시위에 25~50명의 여성들과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소피아(Safia Bibi) 사건은 맹인여성인 소피아가 강간당한 후, 이슬람교의 혼외 교섭법(Zina)에 의해 범죄자들이 투옥되는 대신 오히려 소피아가 투옥되었던 사건이다.

그녀의 사무실이 커갈수록 자하져는 파키스탄을 변화시키기 위한 좀 더 큰 노력에 뛰어들게 된다. 그녀는 하크(Zia-ul Haq)의 군사독재정권에 두려움 없이 맞서 싸웠고, 1984년 결국 난동의 혐의로 체포되기도 한다. 1986년 그녀는 파키스탄 인권위원회(Human Rights Commission of Pakistan)를 창립하고 여성, 어린이, 소수그룹 그리고 노동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와 침탈을 증언하고, 파키스탄을 국제 인권기준에 맞는 나라로 만들기 위해 그녀의 삶을 헌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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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 의해 실종된 사람들의 가족들이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시위하고 있다. 2006년 9월 29일 출처: © Amnesty International)

자하져, 후두드법과 신성모독법에 대한 비판

1980년대에 실행된 이슬람화 정책(Islamization process)으로 공표된 새로운 법에 따르면, 남성을 강간의 혐의로 기소하는 파키스탄의 여성은 반대로 지나(Zina)에 의해 피해자가 되기 십상이었다. 인권단체에 따르면 파키스탄에서 감옥에 있는 여성의 80%이상이 이러한 죄목으로 수감되어 한다. 자하져의 로펌은 이러한 여성들에게 조언을 건네고, 여성을 탄압하는 법에 맞서 이들을 변호해 왔다. 그녀의 무료 원조센터는 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책자를 만들고, 여성들의 현 상태와 법적인 대응책을 교육하는 변호사 보조팀을 가지고 있다.  

파키스탄의 신성모독법은 그것이 남용되어 지는 면에 있어서 악명이 높다. 부당한 혐의의 희생자들(문맹의 젊은이들과 개인적인 상호복수의 대상들- 크리스찬과 무슬림의 경우같은)은 법정으로 끌려오고, 구타당하며, 심지어 광적인 종교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당해왔다. 자하져는 이 법을 “끔찍하다”라고 비판하고, 대법원에서 중요한 승리들을 이끌어내며 악법의 희생자들을 변호해왔다. 한 예로 1995년 자하져는 한 이슬람교 모스크에 모독적인 낙서를 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살라마트(Salamat Masih)라는 14세의 기독교인 청년을 변호하는 것 때문에 살해위협을 받기도 했다. 1999년에는 폭력적인 남편과 이혼하려고 했던 여성의 이혼신고 절차를 돕는 와중에 다시 한번 살해위협을 받기도 한다. 그녀는 는 이혼하기 위해 그녀의 가족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가족은 그녀의 청을 거절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계속 이혼을 요구하자 가족들은 그녀가 수치스러운 행동을 한다며 그녀를 청부살해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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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마 자하져(Asma Jehangir) 연설장면

1994년 자하져는 파키스탄의 최초의 여성판사직을 제의 받으나, “내가 법을 신뢰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것을 지키는 판사가 된다는 것은 위선적인 일이다.”라고 말하며 거절한다. 그녀는 1995년 수상한 Sitara-I-Imtiaz상을 포함하여 여러 국가적 상을 받았다. 인권운동가로써의 그녀의 활동을 인정받아 1992년 American Bar Association International Human Rights Award, 1995년에는 Martin Ennals Award과 Ramon Magsaysay Award을 수상하였다.

자하져의 체포와 국제사회의 반응
 
2007년 11월 유엔 고등 인권이사회에 따르면 자하져는 파키스탄 대통령의 긴급조치에 따라 다른 법조계, 정치적 인사들과 함께 수감되어져 있다고 한다. 당시 이코노미스트지에 따르면 500여명의 법조인, 야당 정치인, 인권 운동가들이 파키스탄 정부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러한 파키스탄의 긴급조치에 대해 유엔 반기문 사무총장은 파키스탄 정부에 유엔 인권 전문가를 포함한 구속자 모두를 석방할 것을 요청하고 민주주의로 돌아가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 대리인에 의해 발표된 성명에서 반기문 사무총장은 “아스마를 비롯해 유엔 특별조사단을 포함한 수백명의 인권 활동가와 반대 정치인을 구속한 조치에 큰 유감”을 표시했다.  

“상황은 점점 좋아질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엘리트 리더십이나 정치적 리더십, 또는 정부기관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스스로 사회에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삶의 모든 측면에서 싸워왔기 때문입니다.” - Asma Jahangir, Farahnaz Junejo와의 인터뷰에서, Zameen, 12월 1997년. 

그녀는 긍정적이다. 투쟁의 결과물이 현실과의 타협에 달려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다원주의와 기본적인 인권에 대한 강한 믿음은 나라의 종교적 보수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에 대한 분노를 숨기지 않는다. 

Further Information:
www.ahrchk.net/ua/mainfile.php/2007/2653/
www.jazbah.org/asmaj.php
en.wikipedia.org/wiki/Asma_Jahangir
http://word.world-citizenship.org/wp-archive/252


정리: 이경철, 최유미 국제연대위원회 인턴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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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국가의 인권과  민주화의 자취를 찾아서
아시아 인권옹호자 전기 중심으로

올해는 유엔이 인권옹호자선언 (UN Declaration on Human Rights Defenders)을 채택한지 1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를 기념해 국제연대위원회는 버마,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를 중심으로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활동한 아시아 인권옹호자의 삶을 조명해 보는 기획 연재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아시아 인권옹호자의 일대기를 통해 살펴보는 각 국의 인권 상황과 민주화의 자취는 아시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새롭게 아시아를 만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인도네시아의 양심이자 인권 영웅, 무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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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무니르(Munir Said Thalib, 1965 ~ 2004)
국가 : 인도네시아(Indonesia)
분야 : 인권 운동, 반부패운동


수하르토 독재정권의 시작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 통치 시대 이전에는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각 종족들이 자치로 통치하는 여러 나라들이었으나 네덜란드 통치 후, 독립을 하는 과정 속에서 한 국가가 되었다. 350년이 넘는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 후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군정 하에 있다가, 1945년 8월 17일 민족운동 지도자 수카르노와 하타를 중심으로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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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지도_ 붉은색 표시 지역은 아체


1963년 수카르노가 군부의 지지하에 종신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독재체제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군부와 공산당의 대립은 경제난과 정치적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에 1965년 ‘930 사태’로 불리는 일련의 사태를 수하르토가 평정하고 수카르노 지지 세력과 인도네시아 공산당세력을 괴멸시켜 수하르토 독재체제를 수립한다. 한 인권보고서에 따르면 ‘930 사태’ 이후 1966년까지 공산주의자로 몰려 살해된 숫자는 약 100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300여 종족이 600여 종류에 가까운 지역언어를 구사하며 독자적이고 독립적 문화를 발전시켜온 1만7508개 도서로 이루어진 군도(群島) 대국 인도네시아에서는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종족들과 자바섬을 중심으로 한 인도네시아 중앙정부 사이에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대표적인 갈등 지역이 바로 아체지역이다.

1999년 동티모르 독립 이후 아체의 인권상황은 매우 악화되었다. 국제사회의 압력을 받아 동티모르의 독립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인도네시아 정부는 자치를 외치는 아체인들을 무자비 하게 탄압했다. 아체에서 인도네시아 군인과 경찰이 자행한 불법연행, 납치, 고문, 사살 등과 같은 인권유린은 쉬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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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 지배와 내전으로 얼룩진 ‘불행한 땅’_아체


인도네시아 최고의 인권옹호자이자 웅변가

무니르(Munir Said Thalib)는 인도네시아의 군부 및 정보기관의 인권침해와 아체 관련 정부정책을 비판했던 인도네시아 최고의 인권운동가였다. 그는 1992~1996년에 동부자바에서 노동 인권 개선을 위해 투쟁했고, 1996~2003년에는 자카르타에서 수하르토 체제가 자행한 활동가 납치실종사건과 동티모르 인권침해 사건들을 다뤘으며, 비극적 죽음을 맞기까지 2003~2004년에 걸쳐 임파르살 소장으로서 활동했다.

무니르는 인도네시아 최초의 인권옹호단체로서 가난한 이들에게 무료 변호를 제공하는 것으로 유명한 인도네시아법률구조재단(이하 YLBHI: Yayasan Lembaga Bantuan Hukum Indonesia) 수라바야 지부의 노동분과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당시 수하르토 체제는 국내자본가와 외국인 투자자들을 최대한 지원하는 방식으로 경제발전을 추구하였기에 노동문제는 아주 중요한 이슈였다. 그는 노동분쟁 사건들을 다루는 전문적 능력과 기자들에게 흥미를 끌만한 뉴스를 제공하는 기민한 능력을 지녀 노동자들과 기자들에게 아주 인기가 있었다. 그는 법정, 노동부, 지방 및 중앙 노동분쟁조정위원회에서 노동자들을 직접 변호하고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수집된 자료를 분석하여 보고서를 완성하는 일을 수행했다.

YLBHI에 접수되는 사건들의 대다수는 노동법이 보장한 정규적 권리 위반과 해고 관련 사례들이었다. 대표적인 활약으로는, 시도방운사의 일방적인 해고 사건이 있다. 무니르는 해고자들이 위법행위에 관한 법률조항에 근거하여 회사 측을 지방법원에 제소하도록 제안하고 후원했다. 그 결과 1995년 대법원 판결로 위법행위에 관한 조항으로 노동자들이 승소한 첫 사례이자 노동자들이 법정에서 회사 측을 해소시킨 최초의 사례를 만들어 냈다. 또한 그는 군부의 노동문제 개입과 자본과의 협력이 노동자들에게 가장 큰 위협이라고 생각하고, 위법행위를 자행한 죄목으로 시도아르조 지역주둔군사령관 등을 지방법원에 고발하도록 해고자들을 고무시켰다. 또한 생산성과 생산품의 질에 비해 지나치게 적게 지급되는 임금실태를 보고, 정부가 최저임금권장선을 발표하면 인도네시아의 4대산업지대의 임금사정을 조사하였다. 그는 이를 통해 노동자들의 열악한 실태를 사회에 고발하였다. 그의 이러한 역동적인 활동은 YLBHI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고 1996년 YLBHI의 운영국 차장으로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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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니르 활동사진

 1997~1998년 수하르토 체제의 말기에 활동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납치가 자행되자 YLBHI와 자카르타의 몇몇 인권운동단체들이 연대하여 실종및폭력피해자대책위원회(Kontras: Komisi untuk Orang Hilang dan Korban Tindak Kekerasan)를 1998년 3월 20일에 결성하였다. 무니르는 이 위원회의 총무국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특전단(Kopassus)의 비밀작전팀(Mawar)에 의해 자행된 활동가 납치 사건을 법정으로 끌고가는데 성공하였고 특전단의 몇몇 장교들은 법정 처벌을 받았다. 또한 1989~1998년에 아체에서 수행된 군사작전 중에 인권침해를 자행한 자들이 법정에 세워져야 하고 군부의 각종 면책특권이 중단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그는 특히 인도네시아의 군부를 비판하는 웅변가로 유명했다. 거는 군부에 의해 자행된 동티모르, 파푸아, 아체 지역에서의 인권탄압행위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그는 국가인권위원회의 동티모르 지역 인권침해 조사위원회 위원이 되어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인권침해 혐의를 받는 장군들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고 서슴없이 조사를 추진하였다. 당시 막강한 귄력을 지녔던 위란토 장군은 와히드 대통령에 의해 장관직을 박탈당했다. 이러한 굵직한 사건들은 무니르를 용감한 인권운동가로서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했다. 1998년에 무니르는 콘트라스 총무국장 자격으로 인도네시아 최고의 인권상 얍 띠암 힌 상(Yap Thiam Hien Award)을 수상하였다. 이어 2000년에는 인권운동가를 위한 대안적 노벨상(Rights Livelihood Award)과 유네스코의 만다젯 싱 상(Mandajeet Singh Award)를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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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초에는 콘트라스의 소장역할을 수행하면서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인도네시아대학교, 가자마다대학교에 소속된 안보문제 전문가들과 함께 군부와 경찰에 대한 조사연구를 시작했다. 이어 그는 아체와 파푸아 지역의 인권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는 인권감시단체를 결성하고자 하였다. 2002년 11월에 18명의 인권운동가들과 함께 임파르샬(Imparsial)을 설립, 만장일치로 소장으로 선출되었다. 임파르샬은 ‘시민사회의 자유 대 반테러 전쟁’ 캠페인을 통해 테러리즘을 저지하려는 정부 정책이 시민사회의 자유를 침해하는 실상을 고발하였다. 또한 태국에서 개최된 납치실종에 반대하는 아시아연맹(AFAD) 회의에 참석하여 의장활동을 하였다.

그 후 군법 초안을 비판하는 시위를 조직했다, 해악을 초래할 수 있는 군법의 일부 조항들이 국회심의과정에서 수정될 수 있도록 하였고, 해군참모장과 국방부에 대한 항의행동을 전개하여 해군이 불법 선박거래를 중단토록 하였다.

이처럼 인권투사로 활동하는 동안 무니르는 다양한 협박과 테러에 직면했다. 동부자바주 주둔군사령관인 하르또노 육군소장은 노동자들을 계속 선동하고 다니면 “소시지를 만들어버리겠다”고 직접 협박하였고, 정보기관원들과 폭력배들도 전화나 편지로 종종 위협을 가했다. 이러한 협박에 대해 무니르는 대수롭지 않게, “모든 일에는 위험이 따르는 법이다. 피할 수 있다면 당연히 피해야지만, 피할 수 없다면 맞서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항상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 만약 우리가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그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적이 이미 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유명한 말을 남겼다.

2000년에는 콘트라스 사무소 문 앞에서 두 개의 폭발물이 터졌고, 같은 해에 말랑의 바투 지역에 있는 친가로 고성능폭발물이 보내졌다. 2002년 3월에는 유혈짜왕지역민회라는 이름을 내건 5백명의 해결사들이 콘트라스로 들이닥쳐 사무실을 파손시키고 무니르를 위협했다.  2003년 9월에는 무니르 집 안마당으로 폭발물이 담긴 봉지가 투척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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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카퍼스(Pollycarpus Priyanto) 재판 사진



2004년 9월 7일 석사학위 과정을 위해 네덜란드로 향하던 중 무니르는 인도네시아 비행기 안에서 비소에 중독되어 살해당했다. 이 사건의 용의자로 전직 조종사였던 폴리카퍼스(Pollycarpus Priyanto)가 지목되었고 그는 가루다 항공의 고위층이었던 인드라(Indra Setiawan)의 명령을 받고 무니르의 오렌지 주스에 비소를 넣었다고 자백했다. 무니르의 지지자들은 그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사주한 세력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지 않았다고 정부에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인도네시아, 민주화로의 나아가려는 노력 
2001년 7월 23일 국민협의회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와히드(Abdurrahman Wahid)가 무능력과 부패 의혹 등으로 집권한 지 21개월 만에 대통령직에서 쫓겨나고, 스카르노 대통령의 딸인 메가와티 부통령이 신임 대통령으로 정권을 잡았다. 그후 2004년 인도네시아의 첫 직선제 대통령선거에서 군 장성 출신의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전 안보장관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현정권을 이어가고 있다. 이로써 인도네시아는 현재 수하르토 시기와 달리 군의 정치•사회적 기능이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

한편 1998년 수하르토의 하야 이후 인도네시아의 인권단체 및 NGO들은 정부의 정책에 대해 적극적인 대안을 제시하는등 인도네시아 민주화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한다.

정리: 김연재, 최유미 국제연대위원회 자원 활동가

참고 정보 사이트
http://www.kdemocracy.or.kr/
http://en.wikipedia.org/wiki/Munir_Said_Thalib
http://www.kontras.org/eng/index.php
http://www.munir.or.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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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는 인권옹호자 탄압을 즉각 중단하라

포럼아시아(FORUM-ASIA)는 아시아의 인권과 개발을 위해 활동하는 인권단체로서 아시아 15개국 40개 멤버 단체로 구성되었으며 본부는 태국에 소재한다. 참여연대는 2007년부터 멤버 단체로 활동을 해왔다. 포럼아시아는 한국의 인권옹호자 5인이 구속된 것에 유감을 표하고 이들의 석방과 한국정부가 집시법을 개정할 것을 요청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아시아의 25개 인권단체가 연명하였다. <편집자 주>

FORUM-ASIA는 2008년 11월 8일, 인권옹호자 박원석, 한용진, 백성균, 김동규 그리고 권혜진이 구속된 것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한다. 위의 인권옹호자들은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일반교통방해죄, 그리고 특수공무집행방해죄로 구속되었다. 또한 5명의 인권옹호자들은 2008년 5월, 미국산 소 수입 협상 철폐 관련한 촛불 시위를 주도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중에서도 박원석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공동상황실장은 포럼아시아의 회원단체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직을 맡고 있기도 하다.

포럼아시아는 5명의 인권옹호자의 구속이 정부에 대한 비난과 반대 여론을 잠재우려고 하는 한국 정부의 모습이라고 믿는다. 포럼아시아는 또한 권혜진씨를 제외한 다른 인권옹호자들이 체포될 당시 미란다 원칙이 고지되지 않은 점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한다.

2008년 4월, 포럼아시아는 아시아인권위원회 (Asian Human Rights Commission)와 함께 한국을 방문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와 관련해 열린 촛불 시위에서 인권옹호자들에게 가해진 인권 침해 실태를 조사했었다. 실태 조사 후, 우리는 한국 정부에게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특히 그중에서도 야간 집회를 금지하는 제 10조를 수정 및 개선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한 바 있다.

2008년 10월 9일, 서울지방법원은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제 10조의 위헌법률심판을 헌법재판소에 제청하였다. 인권단체들은 이번 결정이 위에 언급된 조항이 수정 및 개선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긍정적인 한 걸음이라는 이유로 제청 결정을 환영한다. 포럼아시아도 한국 인권 단체들과 함께 정부가 헌법 재판소의 위헌성 여부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까지 이와 관련된 모든 구금 및 체포를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포럼아시아는 한국 정부에게 인권옹호자들의 표현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를 포함한 시위의 자유를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 시위의 자유는 인권옹호자들이 진실을 밝히고 인권을 보호하고 증진시키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권리이다.

포럼아시아는 한국 정부가 박원석, 한용진, 백성균, 김동규 그리고 권혜진씨를 당장 석방할 것과 향후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아래 이뤄지는 어떠한 형태의 구속도 금지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한국 정부는 반드시 한국의 인권을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해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특히 그 중에서도 제 10조를 수정 및 개선해야 한다.

자세한 정보는 인권옹호자 프로그램 매니저인 Ms. Emerlynne Gil에게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hrd@forum-asia.org

연명단체: 25개

Advar – Iran
Alternative ASEAN Network on Burma (ALTSEAN-Burma)
Asian Federation Against Involuntary Disappearances (AFAD) – Philippines
Asian Human Rights Commission (AHRC)
Banglar Manabadhikar Suraksha Mandra (MASUM)- India
Cambodian League for the Promotion and Defense of Human Rights (LICADHO) – Cambodia
Center for Orang Asli Concerns – Malaysia
Defenders of Human Rights Center – Iran
Education and Research Association for Consumer Education (ERA Consumer) - Malaysia
Foundation for Media Alternatives – Philippines
Human Rights Organisation in Kurdistan
Human Security Alliance (HSA)- Thailand
Indonesian Human Rights Monitor (IMPARSIAL)- Indonesia
Informal Sector Service Center (INSEC)- Nepal
International Campaign for Human Rights in Iran – Iran
Korean House for International Solidarity (KHIS)- Korea
Lawyers’ League for Liberty (LIBERTAS) – Philippines
Maldivian Detainees Network (MDN) – Maldives
Non-Violence International – Southeast Asia
People’s Solidarity for Peace and Democracy (PSPD) – Korea
People’s Watch-India
Professor Michael Davis
Suara Rakyat Malaysia (SUARAM) – Malaysia
Taiwan Association for Human Rights (TAHR) – Taiwan
Voices for Interactive Choice and Empowerment (VOICE) – Bangladesh

배경설명:

2008년 4월 18일, 한국 정부는 미국 소 수입 규제를 완화하는 조약에 사인했다. 이후 위 조약에 반대하는 지속적인 촛불시위가 이뤄졌다. 많은 단체들은 이번 조약 체결이 이명박 정부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주장했다. 몇몇은 또한 이러한 현재의 조약 체결이 국민들과의 충분한 대화 없이 국민들의 건강을 고려하지 않은 무책임하고 권위적인 정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첫번째 촛불 시위는 2008년 5월 2일에 시작됐다. 약 3만 5천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했다. 서울 시청 앞에는 가장 많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부산, 대구, 인천, 광주, 춘천을 비롯한 한국 내 다른 지역과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파리, 오클랜드를 비롯한 다른 나라의 도시들에서도 시위는 이어졌다.

2008년 6월 27일, 촛불시위를 주도했다는 혐의 아래 6명의 인권옹호자(박원석, 한용진, 김동규, 박은종, 백성균 그리고 김광일)들에게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이 6명의 인권옹호자들은 서울 시내 중심에 있는 조계사에서 농성을 계속하였다. 2008년 7월 10일 또다른 인권옹호자인 권혜진에게 체포영장이 발부된 후 권혜진도 이 농성에 합류하였다. 경찰은 조계사 주변에서 24시간 순찰을 돌았다.

2주 전, 위의 인권옹호자들은 경찰의 눈을 피해 조계사를 나왔다. 하지만 박원석, 한용진, 백성균, 김동규 그리고 권혜진 인권옹호자는 2008년 11월 6일,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들은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과 일반교통방해죄에 해당하는 형법 185조 위반, 그리고 공무집행방해죄로 구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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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국가의 인권과  민주화의 자취를 찾아서
아시아 인권옹호자 전기 중심으로

올해는 유엔이 인권옹호자선언 (UN Declaration on Human Rights Defenders)을 채택한지 1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를 기념해 국제연대위원회는 버마,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를 중심으로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활동한 아시아 인권옹호자의 삶을 조명해 보는 기획 연재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아시아 인권옹호자의 일대기를 통해 살펴보는 각 국의 인권 상황과 민주화의 자취는 아시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새롭게 아시아를 만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멀고 먼 버마 민주화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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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민 코 나잉 (Min Ko Naing)
연혁 : 1962 ~ 현재
국가 : 버마 (Burma)
분야 : 민주화 운동





폭력적인 통치, 버마 군부독재의 시작


1948년, 버마는 무려 100년이 넘는 영국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루게 된다. 그렇지만 정치 지도자들의 권력투쟁과 영국의 분리 통치 정책의 고수로 버마는 내전에 휩싸이게 된다. 이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진압하던 과정에서 군대와 지휘관들이 정치적으로 큰 세력이 되었고 1962년 3월 군총사령관 네윈이 국민에 의해 선출된 우누 수상이 이끄는 정권을 쿠데타로 장악하면서 버마에서는 인권 유린과 군부 독재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네윈 군부는 버마식 사회주의를 내걸고 버마사회주의정책당의 일당지배체제만을 인정하고 경제적으로도 대부분의 사기업과 그 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였다. 그 결과 버마에서 민주주의는 사라져 버렸고 군부의 부정부패가 팽배하였으며 과거 아시아의 쌀창고라고 불리던 버마는 국민들이 인권탄압과 가난, 경제 붕괴로 고통 받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버마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네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던 1962년부터 학생과 노동자들의 지하 조직을 주축으로 한 민주화 투쟁은 80년대까지 꾸준하게 이어져왔다. 80년대에 들어 심각한 경제난이 버마를 덮치자 1987년 군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버마의 화폐 가치를 취소해 버렸고 이에 분노한 버마 국민들은 1988년 8월 8일 군부에 저항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8888시위이다. 그러나 군부는 버마 국민들이 총 봉기한 8888시위를 무자비한 총격과 살상으로 진압하였다. 전국적인 시위로 버마의 불안정한 상황이 계속되고 전국 각지의 시위를 연계여 이끌 지도력이 없었던 틈을 타 1988년 9월 18일 서마웅 장군은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킨다. 새로운 군부는 민주적 총선거로 권력을 이양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버마의 국민들은 새로운 쿠데타와 군부를 믿지 않았고 거센 시위와 저항, 폭력적인 진압, 수 천 명에 달하는 버마 국민들의 희생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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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88 항쟁 당시 버마 승려들의 시위 모습 ⓒ버마 정치범 지원모임(appb.org)

군부에 맞서기 위한 여러 단체들이 조직되었고 ‘전 버마 학생연합(The All Burma Federation of Student Unions; ABFSU)의 대표였던 민꼬 나잉(Min Ko Naing)’과 학생들은 평화적인 학생운동을 통해 군부의 통치에 대항하였다. 1988년 9월에는 주요 민주화 활동가들이 모여 ‘민족민주연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을 창설하였다. 아웅산 수지(Aung San Suu Kyi) 여사 등 NLD의 주요 지도자들을 모두 체포하고 민꼬 나잉과 같은 활동가들마저 체포하는 등 심한 제재 속에서 1990년 군부가 약속했던 총선거가 실시됐고 그 결과 NLD는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군부는 정권 이양을 실천하지 않았다.

군부는 민주화의 길을 열겠다고 약속했지만 여전히 버마 국민과 민주 지도부, 인권 활동가들에 대한 탄압과 독재는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향한 버마 국민들의 열망도 2007년의 대규모 민주항쟁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식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왕들의 정복자'  민 꼬 나잉

민꼬 나잉은 1962년 버마의 수도 양곤에서 U Thet Nyunt와 Daw Hla Kyi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은 1980년대 양곤 미술과학 대학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당시 그의 전공은 동물학이었지만, 학교생활 동안 그는 시를 읽고 쓰며 풍자만화를 그릴 수 있었던 미술동아리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는 또한 대학시절, Thingyan(물 축제) 기간 동안 전통 Than Gyat(공연) 대회에 참가한 공연단의 멤버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공연단은 버마의 군부정권에 의한 자유와 민주주의의 억압을 풍자하는 단막극을 공연하였다. 1985년 버마의 경제적 상황에 대한 불안이 짙어지자, 나잉과 그의 동료들은 차후에 일어날 정치적 폭동을 예상하고 비밀리에 지하 학생연합을 조직하였다.

그의 원래 이름은 Paw U Tun 으로, ‘왕들의 정복자’라는 의미의 민꼬 나잉이란 이름은 1988년 군사정권을 비판하는 포스터와 전단에 서명하기 위한 필명으로 그와 동료 학생들에 의해 채택되었다. 1988년 8월 28일 나잉은 전국적인 규모의 '전 버마 학생연합'을 조직하여 평화적 수단으로 불법적인 군사정권에 맞서기로 결의, ‘8888 시위’에 크게 기여하였다. 시위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가 정부를 규탄하고 민주주의를 부르짖었다. 나잉의 연설, 공약, 시는 동료 학생들과 버마 시민들을 감동시키며, 그는 군사정권에 대항하여 평화적 시위를 독려하는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재 ‘국가평화발전평의회’로 알려져 있는 군사정권에 의해 시위대는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그후 수천 명의 학생들과 사람들이 국경으로 탈출하여 무장투쟁을 시작하였지만, 그는 탈출을 거부하고 버마에 남을 것임을 천명하였다. 학생운동은 전적으로 비폭력 평화운동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나잉은 군사정권의 감시를 피해 이리저리로 숨어 다니면서도, 군사정권의 5명 이상 집회 금지에 대한 시민 불복종 운동을 조직하는 등의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결국 1989년 3월 24일에 다른 학생들과 함께 체포되어 긴급사태적용법 5조에 따라 20년 형을 선고받았다. 긴급사태적용법 5조는 반란을 선동하여 법, 평화, 안정을 해친다는 명목으로 정치범들을 구속하는데 자주 사용되던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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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화운동 단체 '88 세대'의 활동 모습. 오른쪽 두번째가 민꼬나잉 씨 ⓒbinamojo.org

1993년 1월, 나잉은 일반 사면에 의해 10년으로 감형 받게 되고, 국제사면위원회에 의해 양심수로 선정된다. 국제사면위원회에서는 그의 석방을 위해 활발한 석방 캠페인을 펼쳤는데, 국제사면위원회에 따르면 그는 수감 초기에 심각하게 고문을 당하고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고 한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심문 과정에서 물속에서 쓰러질 때까지 서있기를 강요받았고 그 결과 왼쪽 다리의 감각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고 한다. 2004년 11월 19일, 나잉은 15년간의 투옥생활 끝에 풀려나게 된다.
그러나 그가 석방된 지 불과 2년 후인 2006년 9월 말에 그는 다른 학생 지도자 4명과 함께 다시 수감된다. 단순 조사 차원에서 구류한 것이라고 군사정권은 주장했지만, 나잉과 4명의 학생 지도자들은 흔히 군사정권이 ‘국내 소요, 불안정, 테러리즘’이라고 말하는 명목에 대한 우려로 인해 구속된 것이 확인되었고 이로 인해 나잉의 체포에 대한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2006년 10월 10일부터 18일까지 버마에서는 두 번째 수감생활 중이던 나잉과 그 외의 모든 정치범들의 석방을 촉구하기 위한 캠페인이 열렸다. 8888시위 당시에 체포되지 않았던 남아있는 88세대 학생들에 의해서 조직된 이 캠페인은 ‘White Expression’이라고 불렸는데, 참가자들이 모두 하얀색 옷을 입고 모든 정치범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기 때문이다. 또한 88세대 학생들은 군사정권을 압박하기 위해 서명운동을 벌였고 이 서명운동에는 Ludu Daw Amar와 Zarganar와 같은 유명한 예술가들도 동참하였다. 여론의 극렬한 비난과 나잉의 즉각적인 석방 요구에 의해 정부 당국은 2007년 1월 11일 그를 다시 풀어주었다.  
 
버마의 독립기념일인 2007년 1월 4일에는 그의 88세대 학생 그룹이 모여 표현의 자유를 체험하도록 사람들을 독려하기 위한 ‘Open Heart’ 캠페인을 펼쳤다. 또한 이들은 2007년 3월 11일부터 5월 20일까지 ‘White Sunday’ 캠페인을 벌였다. 정치범의 가족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매주 일요일 양군의 정치범 가족들을 방문하는 캠페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평화 시위 조직을 주도한 혐의로 2007년 8월 21일 자정에 다른 학생 그룹 리더들과 함께 체포되어 현재 구속 수감된 채 재판를 받고 있는 중이다. 군사정권의 치료 제공 거부로 극심한 고통 속에 실명의 위기에 처한 그는, 지난 2008년 9월 9일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다. “You can sentence us to a thousand years in prison for our political activities, but we will continue to defend ourselves in accordance with the law. Nobody can hide from justice.” (버마군부는 우리의 정치적 활동을 탄압할 수 있지만 우리는 법에 따라 우리 자신을 보호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정의를 무시할 순 없다)

버마 민주화를 위한 국제 사회의 움직임   

국제사면위원회와 같은 국제적인 인권단체의 발표에 의하면 현재 버마에는 나잉과 비슷한 이유로 감금되어 있는 정치범들이 20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2007년 5월엔 태풍이 버마를 덮쳐 150만 명의 국민이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도 군부는 국제 사회의 경고를 무시하고 국민투표를 강행하여 신헌법을 통과시켰다. 그후 8, 9월 승려들이 주축이 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당초 시위는 군사정권이 하룻밤 사이에 디젤 값을 2배, 천연가스 값을 4배로 인상하는 등 경제 파탄에 대한 불만이 원인이었다. 그러나 승려들이 구심점이 되며 무능력한 군정에 대한 반대, 민주화를 요구하는 항쟁으로 확산됐다. 88년 이후 최대 규모인 10만여 명의 승려와 시민들이 참여한 2007년 9월 샤프란(승려복을 상징하는 선황색) 민주항쟁을 통해 민주화 열망이 다시 피어올랐지만, 군부의 탄압으로 대규모 유혈사태를 빚으며 최소 2백여 명이 희생당하고, 1만여 명이 강제로 연행, 구금되었다.

세계 곳곳에서 버마의 민주화를 열망하는 버마 민중들의 노력은 샤프란 민주항쟁 1주년을 맞은 지금도 여전히 타오르고 있지만 이에 반해 지난 20여 년 간의 버마 군부독재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처나 한국 정부의 대응은 미미한 실정이다. 1997년 인권유린을 이유로 미국이 경제봉쇄를 단행하였지만, 중국과 인도 같은 일부 열강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버마 군부를 도와 그들은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다. 한편, 지난해 유엔 이브라힘 감바리 특사가 미얀마 군정의 평화시위에 대한 유혈진압 사태 직후에 버마를 방문, 탄 슈웨 군정 최고 지도자와 민주 진영 지도자인 수치 여사 등을 면담하고 국가화해를 촉구했다. 그러나 그후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해, 가택연금 상태에 있는 아웅산 수지 여사는 군부에 대한 저항과 무기력한 국제 사회의 평화 중재 방안에 대한 실망의 표시로 올해 8월 중순부터 한 달 간 단식에 들어가 지난 8월 말 감바리 특사와의 만남을 거부하였다. (미국은 루비와 비취 등 미얀마산 보석의 국내 수입을 금지하고, 미얀마 지도자의 재산을 동결하는 것을 골자로 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유럽연합도 비자 발급 중지와 자산 동결, 무기 금수 등 기존의 제재조치 외에 목재와 보석류, 금속, 광물 등의 수입 금지 조치를 추가로 내렸다. 그러나 미얀마가 가입한 동남아국가연합(ASEAN) 회원국들은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고수하며 제재에 소극적인 자세를 나타냈다.) 군부는 최근 아웅산 수지 여사에 대한 가택연금 조건을 일부 완화했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올 연말에 미얀마를 방문, 교착상태에 빠진 정치상황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한국에서도 버마의 군부독재 상황과 민주화운동에 대한 관심이 커진 상태고, 지난 9월 25일 8명의 버마민주화운동가들이 2000년 난민지위 신청 이후 8년에 걸친 법정공방 끝에 난민지위를 인정받기도 했지만, 여전히 버마에 대한 투자와 한국 기업의 방위산업물품 제조 플랜트 건설 등을 통해 버마 군부를 간접적으로 돕고 있는 등 버마의 민주화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이 부족한 상태이다.

한국의 시민사회단체들은 한국에 머물고 있는 버마 활동가들과 함께 버마 민주화를 위한 ‘프리버마’캠페인을 매주 화요일 종각(서울)에서 벌이고 있으며 다양한 국내외 연대활동을 통해 버마군부의 인권탄압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정리 : 최유미, 김연재 (국제연대위원회 자원활동가)

참고 사이트
참여연대 버마 성명 http://blog.peoplepower21.org/International/40118
프리버마캠페인(인권실천시민연대) http://www.hrights.or.kr/
NLD 한국지부 http://www.nldla.or.kr/
버마행동(Burma Action Korea) http://cafe.daum.net/mmwc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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