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2일(화)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일본대지진과 핵사고 피해지원 및 핵으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염원하는 시민사회의 공동선언을 위한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일본대지진, 핵사고 피해지원과
핵으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염원하는
시민사회 공동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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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매우 참담한 심정으로 여기에 섰습니다.
지난 11일 일본에서 일어난 대지진은 일본 국민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습니다. 공식 사망ㆍ실종자가 2만명에 육박하고, 40여만명이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대피소에서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대한 자연재난으로 희생되고 고통받고 있는 일본 국민에게 깊은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과거 역사 문제도 있지만, 많은 경제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는 이웃국가이기에 우리는 일본 국민들이 직면하고 있는 시련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이번 대지진과 쓰나미에 의한 막대한 피해뿐만 아니라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 또한 크나큰 재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도 방사능 물질이 계속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대형 핵참사로 이어질 수 있다는 공포와 불안감도 커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본 국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인류와 자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지 않도록 이번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가 조속히 수습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에 한국의 시민사회단체와 정당들은 일본 대지진과 핵사고의 피해를 지원하는 활동을 함께 벌이려고 합니다. 일본에서 현재 일어난 엄청난 규모의 참사에 비하면 너무 미약한 힘이지만, 우리 국민을 비롯하여 전 세계가 힘을 모은다면 일본 국민들이 현재의 참사를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번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를 계기로 핵으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얼마 중요한 일인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지진 등 자연재해는 인간의 힘으로 예측하거나 대비하기에 한계가 있지만, 자연재해에 뒤따라오는 핵발전소 폭발사고는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한국보다 2배 이상 많은 핵발전소를 보유하고 있지만, 국토 면적당 핵발전소의 숫자는 오히려 한국이 더 높습니다.  일본에서 일어난 재난이 한국에서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이를 막기 위해서는 핵발전 위주의 에너지정책이 전환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민사회단체와 정당들은 일본 대지진과 핵발전소 폭발사고로 일본 국민들이 겪고 있는 피해를 지원하고 핵으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광범위하고 다양한 공동행동에 나설 것을 선언합니다. 온 국민이 함께 일본 국민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또다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핵발전 정책을 전환할 것을 촉구합니다.


3월 22일(화)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일본대지진과 핵사고 피해지원 및 핵으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염원하는 시민사회의 공동선언을 위한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2011년 3월 22일(화)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일본대지진과 핵사고 피해지원 및 핵으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염원하는 시민사회의 공동선언을 위한 기자회견


오늘 선언을 시작으로 우리 시민사회, 종교, 제정당은 드리마일 핵사고 발생일 3월 28일부터 체르노빌 사고 발생일 4월 26일까지 일본대지진, 핵사고 피해지원과 핵발전 정책전환을 위한 공동행동기간으로 선언합니다.

첫째, 우리는 일본 대지진과 핵사고로 인한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일본 사회가 이 같은 재난으로부터 조속히 복구되기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3월 28일 저녁 7시에 시민들과 함께 추모행사를 진행할 것입니다. 또한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언론사 등 각계가 참여하는 모금활동을 비롯하여 고통 받고 있는 일본 시민들을 지원하고 격려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전개해 나가겠습니다.

둘째, 핵으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정부의 핵발전소 정책의 전환을 촉구하는 활동을 벌여 나가겠습니다. 안전한 핵발전소란 없다는 것이 일본의 핵발전소 사고로 다시 한 번 확인되었습니다. 우리는 정부의 핵발전소 수명 연장과 신규 핵발전소 건설 계획을 중단시키기 위한 활동을 전개할 것입니다. 또한 정부가 계획하고 있는 핵발전소 안전진단이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이루어지도록 국회,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는 민관공동조사활동을 촉구해 나가겠습니다.

셋째, 방사능 물질이 인체와 자연에 끼치는 영향이나 먹거리 안전문제 그리고 핵폐기물 처리 문제 등 핵이 우리의 일상생활을 얼마나 위협할 수 있는지 시민들에게 알려나가겠습니다. 일본 핵사고의 진상을 시민에게 알려나가는 한편, 만일의 핵재난에 대비하는 시민안전 대책을 만들어가겠습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시민과 함께 핵으로부터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11. 3. 22.
  
일본대지진, 핵사고 피해지원과 핵발전 정책 전환을 위한 공동행동  

가톨릭환경연대, 경주핵안전연대, 기독교환경운동연대, 나눔문화, 녹색교육센터, 녹색교통운동, 녹색연합, 다함께, 문화연대, 민주노동당, 민주당,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민주언론시민연합, 보건의료단체연합, 부안시민발전소, 사회당, 사회진보연대, 삼척핵발전소유치백지화위원회, 생명살림연구소, 생태지평, 시민평화포럼,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에너지전환, 에너지정의행동, 여성민우회, 여성환경연대, 영광군농민회, 영덕핵발전소반대 500인결사,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철거민연합중앙협의회, 진보신당, 참교육학부모회, 참여연대, 초록교육연대, 평화네트워크, 한국노동조합총연맹, 한국미래연대,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진보연대, 한국YMCA전국연맹, 핵으로부터 안전하게 살고 싶은 울진사람들(핵안사), 환경과공해연구회, 환경을 생각하는 교사모임, 환경재단, 환경운동연합, 환경정의. KYC, 흥사단, (사)에너지 나눔과 평화




*시민사회공동선언문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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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재외동포NGO대회를 다녀와서



영화 ‘우리학교’를 본적이 있는가? 우리학교는 김명진 감독이 해방직후 재일 조선인 1세들이 일본 땅에서 살아갈 후손들을 위해 만든 ‘혹가이도 조선초중고급학교’를 학교의 교원, 학생들과 3년 5개월이라는 시간을 동고동락하며 카메라에 담아낸 영화다. <씨네21>에 따르면 3월29일부터 8월14일까지 극장 개봉을 완료한 시점까지 개봉관에서 3만8129명, 공동체 상영을 통해 3만7천 명가량, 총 7만5천 명 정도가 유료관객으로 ‘혹가이도조선학교’를 만났다고 한다. 극장 개봉 다큐멘터리로 <비상>이 세웠던 3만9492명의 관객 동원 기록을 두 배 가까이 갱신한 것으로 20∼30명이 모인 작은 공동체까지 직접 찾아 나선 지역 상영이 350회 가까이 이어진 덕분이다. ‘우리학교’의 기록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독립영화의 가능성 뿐 아니라 한국사회가 재외동포문제를 친숙한 시선으로 돌아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나에게 재외동포사회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내 생각의 폭과 크기가 재외동포사회의 어려움에 대해 고민할 수 있을 만큼 넓고 크지도 못하거니와 나와 우리사회가 ‘우리학교’에 갖는 관심에 대해 의심을 가지고 있다. 현재 같이 살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해서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우리가 지역적으로 역사적으로도 단절되고 소외시켜왔던 재외동포학교, 그것도 조총련계 학교에 갖는 관심은 감독과 배급자들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일본 우익세력의 무작위적 협박과 이로 인한 신변의 위협'을 강조해 ‘민족주의의 자극과 반일감정(?)에 기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사람은 조선학교에 다녀야 한다는 그 평범한 진실을 어렵게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한국사회 일반의 관심도 가지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아직 ‘우리학교’ 영화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 또 다른 ‘우리학교’를 보고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지난 달 초 일본의 오사카와 교토에서 개최된 재외동포NGO대회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국내외 22개 민간단체로 구성된 대회 추진위원회가 주관한 이번 대회에는 러시아 사할린, 중국 등지의 재외동포 활동가, 한국의 시민단체 활동가 50여명 등 1백여 명이 참여했다. 작년 3회 대회까지는 한국에서 열리다가 올해는 <역사의 현장에서 재외동포의 미래를 찾다>라는 주제로, 재외동포사회의 현장을 직접 찾아 동포사회를 이해하고 거주국과 모국과의 직접적인 관계 문제를 고민하기 위해 오사카와 교토의 재외동포사회의 현장을 방문했다. 또한, 여전히 강제 퇴거 위기에 놓여 있는 교토 우토로 지역의 재일조선인 마을을 방문, 한국과 일본 양국 정부에 조속히 문제를 해결할 것을 촉구하고 사할린 등 타 지역 재외동포 사회의 문제를 함께 공유ㆍ연대하기 위한 자리였다.

대회에 참석하면서 재외동포사회의 민족교육의 현장을 남측(학교법인 금강학원)과 북측(히가시오사카조선초급학교)이 관여하고 있는 학교와 오사카의 시립소학교의 민족학급을 방문하여 재외동포의 민족교육을 통한 정체성 찾기 노력의 현장을 살펴보고 짧은 시간이지만 아이들과 이야기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또, '재외동포정책에 대한 토론회'나 '사할린잔류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전후보상문제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통해서도 재외동포사회의 가장 큰 어려움은 예전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무관심’과 ‘차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코리안NGO센터>의 고정자 이사는 '재일동포사회의 현황과 과제'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세미나에서 재일동포사회의 현황에 대해 설명하고 일본에 현재 10%를 차지하는 외국인들이, 그간 재일동포들이 받아왔던 차별을 똑같이 받고 있는 것에 대해 안타까와하면서 "먼저 경험한 우리들이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또 중요한 우리의 역할이라 본다"라고 말했다. 거주국의 소수자로서 그리고 차별을 먼저 겪고 그 차별이 다른 외국인에게 이뤄지는 것에 대해 안타까와하고 역할을 고민하고 분단된 모국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재외동포사회와 활동가를 보면서 그들의 고민과 애정의 정도가 민족주의를 넘어섬을 느낄 수 있었다.

대회가 끝나갈 무렵,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우선 일제 식민지시기 교토 비행장 건설에 강제동원 되었고 현재 거주권, 생존권이 위협받는 우토로에 대해 또, 토지수용 등의 재일동포들 여러 현안들에 대해 관심 갖고 알게 된 이야기들을 주변과 나눠야겠다. 가능하다면 아직 보지 못한 ‘우리학교’를 지근거리의 사람들과 보고 내가 보고 느낀 것을 더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을 것 같다. 또, 우리 동포가 거주국에서 이방인을 차별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사회로 들어온 이주노동자들을 이해하고 그들이 차별받지 않도록 가까운 곳에서부터 노력해야겠다. 물론 재외동포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조국’을 조금이라도 더 깨끗하고 정상적인 사회로 바꾸는'본업'에도 충실해야겠다.
장정욱 (참여연대 행정감시센터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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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민주주의를 내것으로"



최근 '시민사회론의 르네상스'라 일컬어질 만큼 세계적으로 시민사회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가운데, 일본에서는 일본의 초기 시민사회, 시민운동론이 재조명을 받고 있다.

일본에서 '시민운동'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60년 안보투쟁을 계기로 해서다. 시민운동은 기존의 사회운동에 대한 대안적인 운동형태로서 제시됐다. 그것은 "진보적 운동 속의 관료주의적 교조주의적 편향"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경제성장과 급속한 도시화에 따라 파편화된 사생활 중심의 대중사회화가 진전되는 데 대한 문제의식을 내포하고 있었다.

'민주주의 수호 투쟁'으로 확대된 안보투쟁

패전 후 일본에서는 전후 민주화의 흐름 속에서 수많은 자발적 결사체들이 조직됐다. 치안유지법이 폐지되고, 공산당, 사회당 등 좌파 정당이 합법적으로 존재하게 됐으며, 직장 단위의 노조 조직률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농민의 조직화도 진전됐고, 학생운동도 부활하여 각 대학, 그리고 대학 간의 연대 조직이 결성됐다. 1960년대까지 사회운동을 주도한 것은 전후에 분출한 이들 진보적 민주단체들이었고, 사회운동의 주류는 이러한 조직 기반을 가진 노동운동, 학생운동이었다.

1950년대 냉전체제가 확립되면서 정치권은 '보수-혁신' 대립 구도로 재편되고, 다양한 자발적 결사체들도 각 정당 아래 계열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노조, 학생조직 등 진보적 단체들은 좌파 정당 아래 계열화되어 그 대중적인 기반이 됐으며 사회운동은 좌파 정당을 정점으로 그 하부에 수직적으로 계열화된 운동 조직들에 의해 이루어진 '혁신세력'에 의해 주도됐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일본의 진보적 사회운동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운동의 논리를 전개한 것이 '시민운동'을 주창한 지식인들이다. 안보투쟁은 기시 정권이 추진하던 일미안전보장조약 개정을 저지하기 위해 다양한 세력들이 연대하여 전개한 대투쟁으로, 1960년 5월19일 집권 자민당이 경찰대를 국회 내에 배치시킨 가운데 단독으로 신안보조약 승인을 강행함으로써 안보조약 개정 반대운동은 집권여당의 비민주적인 폭거에 항의하는 민주주의 수호 운동으로 의미가 확대됐다.

조직화되지 않은 일반 시민 중심으로 탄생한 '시민운동론'

그 이후 한달 가까이 매일 10만 명 이상, 많을 때는 30만 명 가까운 군중이 국회를 둘러싸고 시위를 했다. 안보투쟁도 실질적으로 노조, 학생단체 등이 주도하여 시위 참가자들은 조직을 통해 동원된 경우가 많았으나, 그동안 정치에 무관심했던 사람들, 조직에 속하지 않은 자발적 시위 참가자들도 많았으며, 이들은 직업 정치가들과 직업 혁명가들의 지도자의식이나 행동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안보투쟁이 민주주의 수호 투쟁으로 신국면을 맞게 된 이후 조직화되지 않은 일반 시민 참가자들이 증대했다. 기존의 운동 방식에 대해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가졌던 지식인들 가운데 이러한 새로운 경향에 주목하여, 일본사회의 현실에 맞고 형해화된 민주주의를 실질화하기 위한 새로운 운동의 논리를 모색했다. 즉 안보투쟁을 통해 대두한 새로운 운동 형태의 특징을 포착하여 이를 바탕으로 향후 대안적인 운동을 창출하기 위한 실천적 이론으로서 시민운동론이 나오게 된 것이다.

새로운 운동 논리의 핵심은 주체와 조직에 관한 것이다. 사회학자이자 대표적인 시민운동론자인 히다카 로쿠로는 시민운동 주체인 '시민'의 특징으로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를 들었다: 첫째, 무당무파일 것, 둘째, 정치적 야심을 갖지 않을 것, 셋째, 24시간 활동가가 아니라 직업을 가진 생활인으로서 '파트타이머'적인 참가자일 것, 넷째, 조직의 지령에 의해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참가할 것, 다섯째, 필요 경비는 자신이 부담할 것. 이같은 '시민' 개념은 '조직인'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조직에 매몰되지 않은 자율적인 개인을 강조한다.

"좌·우 양쪽 중앙집권주의 모두에 저항하는 운동"

이러한 시민운동의 주체 개념은 조직론과 밀접하게 연계돼 있다. 기존의 사회운동은 지도부와 이데올로기적인 지도 이념이 있어, 운동의 방침과 구체적인 행동강령은 상층의 핵심 간부들에 의해 결정되어 하부로 전달되고, 조직에 속한 대중은 지도부의 방침에 따라 통일적인 행동을 취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정치학자 이시다 다케시는 이런 정책 결정 방식을 '관료주의적 지령주의'라고 표현했다). 목표 달성을 우선시하여 효율적인 운동을 수행하기 위해 조직과 조직력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연합조직과 각 단위 조직들의 관계는 '전면 포섭'의 관계로서, 모든 점에서 단일한 지도 방침에 따라 획일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런 관계는 필연적으로 조직을 단순한 '세(勢) 집합'으로 만든다. 이런 구조 하에서 같은 운동에 동참하는 주체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일한 계열에 속하는 것을 당연한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 계열에서 자신이 정통적 전위임을 주장하는 사람은 같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신념이 약한 자를 "뒤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과 같은 계열에 전면 포섭되지 않은 조직에 대해서는 '전면 부정'의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이는 "정의를 독점하는 '양심'주의"를 낳는다. '정의로운' 목표 달성을 위해 운동의 효율적인 조직과 세불리기가 중시되는 가운데 운동에 참가하는 풀뿌리 대중 개개인은 자율적인 판단에 의해 움직이기보다는 조직의 논리, 지도부의 방침과 지도 이념에 따라 동원되는 양상을 보였다.

시민운동론자들은 기존의 사회운동의 이같은 조직 구조를 집단주의, 권위주의, 정치주의적인 점에서 보수, 체제측과 공유하는 '일본적 특성'이라고 봤다. 조직 논리가 지배하는 집단주의적, 목표지향적인 운동은 풀뿌리 대중의 주체화를 억제한다. 히다카가 '시민운동'을 "좌로부터의 중앙집권주의에도, 우로부터의 중앙집권주의에도 저항하는 운동"이라고 한 것은 이런 의미를 내포한다. 시민운동론자들이 제시한 '시민' 개념은 하나의 이념형으로서, 개인이 내면에 일관된 의식이나 논리를 형성하고 그에 의거해서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그런 의미에서 '시민성'을 확보한 인간 유형이라 할 수 있다. 한편에는 조직 내지 집단에 매몰된 대중이, 다른 한편에서는 파편화된 사생활에 매몰된 대중이 존재하는 가운데, 어떻게 대중을 주체화하여 정치, 사회에 대해 적극적인 발언과 참가를 하도록 할 것인가- 시민운동론자들은 이를 일본에 민주주의를 뿌리 내리기 위한 과제로 봤다.

조직이 물신화되지 않도록 이슈 중심으로 뭉친다

철학자 쓰루미 슌스케(鶴見俊輔)는 서구에서 시민혁명을 통해 이룬 제도를 들여왔을 뿐인 일본 같은 나라는 '주어진 민주주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새로운 시민혁명"을 거칠 필요가 있다면서, 안보투쟁의 전개과정 특히 1960년 5월19일 이후의 흐름에서 그런 시민혁명적인 성격을 발견한다. 그것은 "일본의 공적 정책이 일본인의 사상의 사적(私的)인 뿌리로부터 새롭게 배태"되는 것으로서 "뿌리로부터의 민주주의(radical democracy)(根本からの民主主義)"이다. 즉 1960년에 등장한 일본의 '시민운동' 담론은 서구와 같은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일본에서 형해화된 근대 민주주의의 실질을 이루기 위한 '근대성'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앞에서 히다카의 운동 주체로서의 '시민' 개념을 소개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개인주의'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시민'은 '다른 사람과 단절되어 자신의 생활에 매몰되는 존재'가 아니라 연대를 추구한다. 단 그것은 집단 활동이 개성의 상실을 가져오지 않는, 즉 자율적 개인으로서의 연대다. 일본의 기존의 조직 구조는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개인이 어떤 조직에 속하게 되면 모든 사안에 대해 동조하고 통일 행동을 취할 것을 전제로 하고, 개별 사안에 대해 다른 행동을 취하는 것은 이단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조직에 속한 모든 개인이 모든 사안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가질 수는 없다.

따라서 시민운동은 조직이 물신화되지 않도록 상설 조직을 갖지 않고, 이슈 중심으로 입장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함께 조직하고, 이슈가 해결되면 운동조직은 해체하는 방식을 추구했다. 지도부와 이데올로기적인 지도 이념이 없이 운동 참가자는 동등한 자격으로 횡적인 유대를 맺으며, 이데올로기나 정치주의적인 관점이 아니라 개인에 내면화된 윤리나 생활의 관점에서 발언하고 행동하는 것, 참가자 개개인이 납득하면서 행동하기 위해 목표 달성 이상으로 논의의 과정을 중시하는 것, 이런 원칙들은 사회운동 자체의 민주성을 확보하는 것이 곧 진정한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길이라는 인식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하겠다.

이상과 같은 일본의 초기 시민운동론은 일본의 역사 속에서 배태된 것이므로, 한국의 시민운동론과 차이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지면의 제약 상 한국과 비교하며그 의미를 짚어볼 여유는 없으나, 이 시기 일본의 시민운동론자들이 제시한 문제의식과 비전은 눈부신 성장을 이룬 가운데 시민운동 내부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시점에 있는 오늘날의 한국 시민운동에 시사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영혜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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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익 최우선의 원조, 일본 ODA의 현황과 미래



일본은 1989년 미국을 제치고 세계최대의 ODA 공여국이 되었으며, 1990년을 제외하고는 2000년까지 1위를 유지한 ODA 대국이다. 2001년 이후부터는 장기불황으로 인한 ODA 감소로 1위 자리를 미국에 다시 내주었지만, 여전히 일본은 세계 ODA의 15%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막대한 ODA 공여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의 존경을 받는 국가가 되지는 못하였다. 이번 연재를 통해 그 이유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일본 국내에서도 ODA에 대한 여론은 경제 불황과 재정상황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특히 2002년도의 ODA예산의 경우 2001년에 비해 10.3% 대폭적인 삭감이 있었다. ODA는 국민의 세금으로 집행되기 때문에, 국민의 지지와 이해도가 필수불가결하다. 국민들에게 ODA에 대한 인지도와 지지가 낮은 한국으로서도 일본의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일본 ODA와 한국

평화헌법과 미일안보조약으로 인한 외교적 제약으로 인해 일본에게 ODA는 국익과, 안정된 국제적 환경을 확보할 수 있는 중요한 외교정책수단이다. 그러나 일본의 ODA는 무상원조 보다는 유상원조인 엔 차관의 비중이 높고, ODA 프로젝트 입찰에 일본기업이 많이 낙찰되고 있다. 이는 개도국의 ‘인간안보’를 최우선으로 한다는 ODA 추세와 역행하는 것이고, 그래서 일본은 ODA를 자국의 이익추구에 이용한다는 국제적 비판을 많이 받고 있다. 이는 한국에 대한 ODA 공여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미국에 이어 한국에 두 번째로 큰 규모의 ODA를 공여하였다. 미국이 한국전쟁이후 1950-1960년대 약 60억 달러의 ODA를 제공하고, 일본은 1965년 이후 50억 달러에 해당하는 ODA를 공여하였다. 그러나 ODA의 성격에 있어서 미국은 약 70%이상의 ODA가 무상으로 제공된 반면, 일본은 70% 정도가 유상으로 공여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사실 한국은 1990년대까지도 경제 인프라 구축과 인적 자원개발 등에서 일본 ODA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럼에도 일본은 ODA 공여를 통해 한국국민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하였다. 2000년대 이후 일본은 이러한 문제점을 깨닫고 ODA 시행기관을 일본국제협력단(JICA)로 일원화하고 ODA 전략을 새롭게 개편하고 있다. 지금부터 일본의 ODA가 어떻게 전개되었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 살펴보자.

일본 ODA의 역사와 특징

일본정부는 일본 ODA 역사를 크게 5기로 구분하고 있다. 제 1기는 1945년부터 1953년까지 ‘전후 부흥기’로 미국이나 세계은행에서 ODA를 수원 받던 시기이다. 제2기는 1954년부터 1963년까지 ‘전후 배상기’로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배상을 중심으로 ODA를 공여한 시기이다. 제3기는 1964년부터 1976년까지 ‘ODA 신장기’로 ODA의 양적확대와 형태의 다양화가 시도된 시기이다. 제 4기는 1977년부터 1988년까지 ‘계획적 확충기’로 여러 차례의 중기목표에 의해 ODA가 확충된 시기이다. 제5기는 1989년 이후 ‘최대 공여국’의 시기로서 ODA 최대 공여국으로의 이니셔티브를 발휘하는 ‘ODA 충실기’이다.

1989년 이후 일본의 ODA는 그 이념과 전략이 국제 정치경제적 차원에서 결정되고 국제적 참여가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ODA 4지침의 결정(1991. 4), ODA 대강(大綱)의 각의결정(1992. 6), 21세기를 향한 ODA 개혁 간담회 발족(1997. 4) 등은 이러한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다. 2003년 8월에는 ODA 헌장을 개정하고, 2006년 11월 일본 국회에서 통과된 ‘일본국제협력단(JICA)법’ 개정을 바탕으로 일본 ODA는 신(新) JICA를 발족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하고 있으며, 2008년 10월 신 JICA법 개정내용이 발효되면 유무상 원조를 일원화할 예정이다.

<< 일본 ODA 규모와 구조 >> (단위: 백만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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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한국수출입은행. 2004.『우리나라 공적개발원조의 중장기 정책방향』


일본 ODA의 특징은 유상원조 중심, 아시아 중심, 경제 사회 인프라 개발 중심지원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일본의 경우 서구 유럽과 비교했을 때 경제적 이익 위주의 상업주의적 ODA 정책을 실시해왔고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1990년대 이후에는 경제적 목적 중심에서 정치외교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변화하였다. 일본 ODA의 특징으로 경제발전과 경제안전보장을 위해 ODA를 외교적 수단으로 삼았다는 분석도 있다. 일본은 ODA가 일본 정부의 종합적인 안전보장을 확보해 준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ODA를 통해 주변 개발도상국의 불안요인을 줄임으로써 일본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환의무가 수반되는 유상원조를 중심으로 개발도상국의 자조노력과 주체적인 개발 시행을 유도하는 일본 ODA는 앞으로도 유상원조 중심 정책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일본 정부는 ODA로 인한 개발도상국의 발전이 궁극적으로 일본의 경제적 이익이 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통해 개발도상국에게 개방적인 경제체제를 확산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일본 ODA의 비중을 살펴보면 아시아 국가 중심의 공여가 가장 큰 특징이다. 아시아 지역 국가들이 일본 기업의 최대 시장인 동시에, 정치외교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경우 ODA 공여를 통해 원자재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경제발전을 도와주고 사회 간접시설을 확충해 주는 것을 통해 일본 상품의 수출시장을 확보하는 효과도 있다. 현재까지도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아주 크며, 따라서 일본의 정치외교적 목적에는 기여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인도주의에 입각한 ODA 실시가 국제적인 추세인 것을 감안하면 일본은 ODA를 자국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는 비판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ODA의 체계

일본은 ODA 공여 초기부터 다수의 관련 부처와 기관이 참여하는 다원적 체제를 유지하였고 유무상 원조를 분리하여 운영해 왔다. 일본 ODA 체제의 가장 큰 특징은 유상원조와 무상원조가 이원화된 구조라는 것이다. 일본은 가장 복잡하고 분산된 ODA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고, 한국과 마찬가지로 ODA 정책을 조율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까지 유상원조는 재무성과 국제협력은행(JBIC)이 담당을 하였고, 무상원조는 외무성과 일본국제협력단(JICA)이 담당을 하였다. 일본은 1970-1980년대에 유상원조를 중심으로 ODA 규모를 급격히 확대하였으며, 현재에도 OECD 개발원조위원회(DAC) 회원국과는 달리 유상원조 중심의 ODA를 고수하고 있다. 1970년대의 경우 유상원조가 60%를 넘었고, 1980년대 중반 이후에도 50% 수준을 유지하였다. 2002년의 경우 46.8%로 비율이 낮아졌지만 다른 OECD 회원국에 비해서는 매우 높은 수준이다.

일본은 2003년 개정된 ODA 헌장에서 “일본의 원조는 개발도상국의 자조노력"을 촉진하는 형태로 수행되어야 한다”는 기본이념을 천명하고 있다. 일본은 과거 세계은행의 차관을 활용하여 사회 간접시설을 정비하고 고도경제성장을 이룩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논리는 일정 수준 이상 개발이 진전된 개발도상국에 대한 ODA는 상환의무를 수반하는 편이 오히려 자조노력을 촉진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유상원조 중심의 ODA 구조를 유지하는 대신, 1970년대 말부터 언타이드 차관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는 방법으로 ODA의 질적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의 유상원조는 아시아 지역에 80% 이상을 집중하고 있고, 무상원조는 아시아와 최빈국이 많은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비중이 높다. 따라서 일본 ODA는 무상원조는 인도적, 외교적 목적을 적극 반영하고 있고, 유상원조는 경제적 목적을 반영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일본 ODA 형태별 분류와 담당 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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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한국수출입은행. 2004.『우리나라 공적개발원조의 중장기 정책방향』


일본 ODA와 NGO

한국은 ODA 관련 이슈들에 대하여 시민사회 단체와 NGO들이 관심을 갖게 된 것이 2000년대 이후 최근의 일인데 반해, 일본 NGO들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ODA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대표적인 단체가 ‘일본 ODA 개혁 네트워크(이하 ODA-NET)’로, 일본의 ODA 정책 개혁을 목표로 하는 일본의 시민과 NGO들의 네트워크로서 1996년 ‘ODA 개혁을 위한 시민 NGO 연락협의회’라는 이름으로 도쿄에서 발족되었다. 'ODA-NET'이 여타 개발 NGO들과 다른 점은 현장에서의 구호활동이나 사업진행이 아닌 ‘ODA와 관련한 정책개발과 제언, 그리고 정책결정과정에 있어 시민참여’를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외무성을 포함한 정부기관과 일본국제협력단(JICA)등과 정기 협의회를 통해 정책제언을 해왔으며, 각종 포럼의 개최, 책자 발간 활동에 주력해왔다.

‘ODA-NET’의 최우선 목표는 ‘ODA 기본법 제정’을 통해 일본의 ODA가 국제사회의 ODA 추세에 걸맞도록 개발도상국 주민들의 자립에 기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ODA 관련 시민사회 단체들의 노력은 1997년과 1999년 일본 정부에 제출한 'ODA 개혁을 향한 제언', 1999년 말에 작성한 'ODA 기본법안' 초안으로 결실을 맺었다. ‘ODA-NET’은 정부, 국회의원, ODA 기관에 각종 정책 제언을 해왔으며, 이를 통해 국익을 최우선으로 반영하려는 일본 정부의 흐름에 대한 견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일본 ODA정책이 개도국 주민들의 자립에 공헌하는 정책적 개혁보다는 일본의 국익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개혁되고 있다는 점에서, 정부와의 정기협의가 실질적으로 소득이 없었다는 비판도 있다. 다만 정부와 ODA 실시기관과의 정기협의가 정부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분명하며, 협의내용이 기록되고 정기협의록이 인터넷을 통해 공개된다는 점에서 일본정부의 ODA 개악에 대해 일정 부분 억지력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현재 국제사회의 ODA 정책은 다양하게 변하고 있다. 인도주의를 중시하는 추세를 반영하는 국가도 있고, 오히려 후퇴하는 국가도 있다. ‘ODA-NET’은 유효한 정책 제언을 하기 위해서 국내외 정보 분석이나 구체적 사례조사와 연구를 통해 지식과 전문성 향상에 힘쓰고 있다. 또한 ‘ODA-NET’의 활동성과를 사회에 환원하고 폭 넓은 지지를 받기 위해, ODA에 관한 교육이나 각종 심포지엄 개최, 강사 파견 등을 통해서 ODA에 대한 시민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고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노력을 하고 있다.‘ODA-NET’은 개발NGO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해관계를 갖고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NGO들이 모여서 결성된 네트워크이다. WE21, 아태자원센터(PARC), 인도네시아 민주화를 위한 네트워크(NINDJA), TICAD 시민사회포럼(TCSF), 일본국제자원활동센터(JVC) 등 5개 단체가 주도하고 있다.

세계 2위의 ODA 공여국인 일본의 ODA는 잃어버린 10년으로 일컬어지는 1990년대 경기침체를 통해 국내의 지지기반이 상당히 취약해진 것이 사실이다. 이는 ‘ODA-NET’ 결성 등을 통해 일본의 NGO들이 ODA 정책 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개선되지 않은 일본의 ODA정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일본의 ODA는 수원국의 진정한 발전에 도움이 되는 ODA를 염원하는 일본 시민사회의 열정을 헛되이 만들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NGO 들은 일본의 ODA 정책을 올바른 방향으로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이는 ODA 정책에 관여하고 있는 한국의 시민사회에도 발전전략과 관련하여 시사점을 던져준다고 할 수 있다.

일본 ODA의 미래

일본 정부는 1990년대 이후부터 경제적 측면을 중시하던 경향에서 벗어나 정치, 안보, 인도적 측면을 고려하는 ODA를 실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특히 2003년 ‘ODA 헌장'을 수정하면서 ODA가 국제사회의 평화와 개발에 공헌하기를 요구하는 동시에 일본의 안정과 번영도 증진시킬 것을 명시하였다. 또한 동아시아를 일본 ODA의 중점 지역으로 지정하고 있다. 2006년 11월 일본 국회에서 통과된 JICA법 개정을 바탕으로 일본 ODA는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현재 신 JICA를 발족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하고 있고, 2008년 10월 신 JICA법 개정내용이 발효될 예정이다. 이 법안의 가장 핵심적인 사안은 ODA 실시기관을 JICA로 일원화 한다는 것이다.

2008년 10월 출범할 새로운 JICA의 역할은 기존에 담당하고 있던 사업 외에, 외무성으로부터 무상자금협력사업, 국제협력은행(JBIC)으로부터 유상자금협력(엔차관)을 통합하여 일원화하는 것이다. 일본은 ODA 실시의 일원화를 통해 효율성을 높일 계획을 가지고 있다. 국제협력은행(JBIC) 관련 조직과 인력은 2008년 10월 이후 출범할 새로운 JICA와, 신설되는 일본정책금융공고로 승계될 예정이다. 하지만 일본 ODA는 일본의 국익에 기여하는 외교수단으로 적극 활용한다는 이념에는 변함이 없다. 일본 언론에서도 이번 ODA 개혁에서도 관련부처의 기득권은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한국은 ODA 공여 초기부터 일본 ODA 실시 체제를 모델로 하였다. 일본이 ODA 헌장과 법 개정을 통해 ODA 체계를 개혁하는 작업을 실시하고 있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체계가 바뀌어도 ODA를 공여하는 기본 이념이 바뀌지 않으면 국제사회에서 존경받는 국가가 되기는 요원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 ODA 관련법이나 헌장 등을 제정하는 것을 통해 한국 ODA의 이념과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일본 ODA 실시 체계 개편을 교훈 삼아, ODA의 일원화를 달성함으로써 효율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 일본 정부가 ODA 운영체제를 일원화하고 관련부처를 조정하는 개혁을 실시하는 것은, 한국 정부가 동일하게 당면한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일본 ODA는 경제 논리 등으로 인해 국민여론이 악화(Aid Fatigue)되면 ODA 예산을 늘리기 힘든 좋은 사례가 되고 있다. 따라서 향후 일본의 ODA가 어떻게 전개되고 운영될 것인지 많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최정호(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ODA연구팀)


* 뉴스레터 원본 참조
국제연대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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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협-347번째 정기 수요시위 성명서



찌는 듯한 더위와 폭우에도, 북풍한설의 한겨울에도 우리들의 수요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무려 삼백 마흔 일곱 번의 지치지 않는 시위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군국주의의 멸망과 일본제국주의의 천인공노할 만행이 세상에 드러난 지 오래지만, 그 죄과를 책임지려는 일본당국의 성의 있는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오늘의 일본당국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군국주의의 정통성을 계승하며 아직도 야만의 세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아니면 도덕과 양심의 그곳으로 진정 나아가길 원하고 있는가?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빼앗긴 순정, 책임자를 처벌하라"라는 그림으로 일제의 천인공노할 만행을 규탄하셨던 고 강덕경 할머니가 유명을 달리하신 지 두 해만에 오늘 우리 가운데서 되살아나고 있다. 고인의 2주기를 맞이하여 고인의 유지를 받들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일일이 지문 서명함으로써 고 강덕경 할머니의 초상 작품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전쟁망령들이 아직도 일본열도를 휘감고 완강한 저항을 벌이고 있는 한, 죽은 이는 부활로, 살아 있는 이는 줄기찬 투쟁으로 일본정부의 공식적 사죄와 국가차원의 배상을 강력히 요구할 것임을 천명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21세기를 불과 1년여 앞둔 오늘, 폭력으로 얼룩진 20세기의 유산인 '위안부'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고 이를 통해 사회적 약자, 특히 여성에 대한 폭력은 반드시 응징되고, 그 후과를 치르고야 만다는 역사적 교훈을 만들고자 한다.

지난 8년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우리 민간단체들은 일본정부에 일본군 위안부 범죄의 진상규명과 범죄 사실인정, 사죄, 국가배상, 위령비 건립, 책임자 처벌 등을 일관되게 요구해왔다. 그 결과 일본군 위안부제도는 국제사회에서 전쟁범죄로 인정되었고 심지어 가해국인 일본의 사법부도 일본정부의 법적인 책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또한 지난 8월 유엔 인권 소위원회에서는 맥두걸 보고서를 통해 일본정부에 국제법에 따라 배상과 사죄를 강력하게 권고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가증스럽게도 국가차원의 배상이 아닌 국민기금을 통한 민간차원의 배상을 주장하였다.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왜곡, 호도하며 책임을 회피해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일본정부의 이러한 오만함과 뻔뻔스러움을 강력하게 규탄하며 하루라도 빨리 피해자와 관련단체들의 요구를 완전 수용할 것을 촉구하는 바이다.

우리의 요구

1. 일본정부는 진상을 규명하고 공식적으로 사죄 배상하라.

2. 일본정부는 전범자를 처벌하라.

3. 일본군 위안부 희생자를 위하여 위령탑을 건립하라.

4. 일본정부는 민간기금을 철회하고 국제법적 권고에 따라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배상하라.

1999년 1월 27일 347차 수요시위 참가자 일동
연대사업팀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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