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의 언론, 표현의 자유 침해사례 유엔 인권이사회에 진정
-한국 정부의 공권력 남용과 국민 기본권 침해에 대한 유엔의 관심과 개입 촉구-

참여연대(공동대표 임종대, 청화)는 오늘 (7월 8일) 유엔인권이사회 특별절차(Special Procedures)를 통해 한국 정부가 국민들의 언론,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고 진정했습니다. 참여연대는 그 대표적인 사례로서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의 문제점을 보도한 PD 수첩 제작진 5명을 불구속 기소하고, 개인 전자메일 내용까지 공개한 사건, 국세청 내부게시판에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와 관련하여 한상률 전 국세청장을 비판한 의견을 올린 후 파면 처분과 명예훼손 고소를 당한 김동일 세무 공무원 사건, 그리고 교육과학기술부가 시국선언에 참여한 1만 7147명 교사 전원을 징계하기로 하고, 교사 징계에 대한 항의서한을 전달하려는 정진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위원장 등 16명의 전교조 교사를 경찰이 강제 연행한 사건 등을 소개했습니다.
   
참여연대는 위 사례들이 한국도 가입하고 있는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유엔 국제협약’ 19조 (Article 19 of the UN International Covenant on the Civic and Political Rights, ICCPR)에 명시된 언론, 사상,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한 것이라며 국제사회와 유엔인권이사회가 적극 관심을 갖고 악화되고 있는 한국의 인권상황에 대해 개입해줄 것을 촉구했습니다. 유엔 특별절차 상의 사상 및 표현의 자유 특별 보고관은 인권침해 사례를 접수한 후 해당 정부에 긴급호소문을 전달하거나 해명 및 시정을 요청하게 됩니다. 사안에 따라서는 특별 보고관이 직접 입장을 표명하거나 현지방문을 하기도 합니다. 

참여연대는 지난 6월 1일 유엔인권이사회에 ‘표현의 자유’를 위반하는 국내법과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서면 의견서를 제출한 바 있습니다. 한편 참여연대는 7월 8일부터 7월 17일까지 헌법 수호 기간으로 두고,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국민적 기본권을 침해하는 현 정부의 행태들을 고발하고 시민들과 함께 한국사회의 인권, 자유, 민주주의 회복을 촉구하는 일련의 프로그램들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 별첨
- Individual Complaint to Special Rapporteur on the promotion and protection of the right to freedom of opinion and expression (3 Case Fact Sheet)




참여연대 [D-10] "헌법이죽어간다" 헌법 심폐소생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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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보호를 위한 동아시아의 도전과 기회
제2차 동아시아 인권포럼: 동아시아 인권 보호를 위한 민주화와 안보 개혁

동아시아 지역의 민주화, 인권, 안보 개혁을 주제로 제2차 동아시아 인권포럼(2nd East Asia Human Rights Forum: EAHRF)이 약 40개 동아시아 인권시민사회단체들의 참여 속에 5월 11일부터 13일까지 성황리에 마무리되었습니다. 참여연대도 인권포럼에 참여하여 최근 심각하게 후퇴하고 있는 한국의 민주주의와 집회, 표현의 자유 침해 상황을 발표했습니다.

EAHRF에서 결의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첨부한 파일 참고>

<요약본>

동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생명권, 신체의 자유, 집회, 표현의 자유와 같은 국민의 기본권이 경찰의 무력과 독재정권, 경제침체, 국가 안보의 영향으로 심각하게 침해되고 있다. 국민의 정치참여와 민주주의 제도는 과도한 국가 권력 행사로 제대로 정착되지 않고 있다.

이에 국가중심적인 안보 시각에서 벗어나 인간 안보의 관점에서 인권을 증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안보는 국민 중심, 국민에 의한 “국민 주권”을 이루어야 할 개혁 분야이다. 안보 개혁은 사법부, 입법부, 인권 기관, 권력감시 기관 등의 권한이 강화되고 경찰과 군대의 법 집행이 인권 프레임을 통해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

따라서 시민사회는 안보 분야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효과적인 민주주의 통제 기제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정부는 모든 분야에서 책임성과 투명성을 준수해야 하며 시민사회는 적극적으로 정부, 국회의 정책결정 및 실행과정에 개입하고 모니터링 해야 한다. 의회는 안보 정책과 이슈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고 안보 분야의 예산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사법부는 안보분야에서 정의를 고수하고 공정한 재판을 할 수 있도록 독립성을 확보해야 한다. 시민은 국가안보 정책에 대한 정보를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하며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


○ 인권보호를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노력을 수행한다.

- 인권중심의 안보개념을 명확히 하고 아시아 상황에서 적용할 수 있는 안보개혁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

- 국가별 경험을 공유하며 안보 개혁에 대한 국가별 자문을 조직한다.

- 법적 시스템이 시민사회의 감시 하에 놓이도록 한다.

- 안보개혁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인식을 높인다.

- 국회가 국가정보원을 견제하는 제도를 구축하도록 요청한다.

- 시민사회단체는 언론, 대중 캠페인, 네트워킹등 안보 개혁을 위한 연대활동을 한다.

- 포럼아시아 사무국은 인권안보와 인권분야 전문가의 의견이나 정보를 아시아 시민사회와 공유할 수 있도록 한다.


박서현 (국제연대위원회 인턴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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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의 '민주주의 재건하기'
- 다시 생각하는 민주주의


이미 여러 갈등을 마주하고 있는 네팔에서는 정당들 사이에 또 하나의 힘겨운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새 헌법을 제정하는 데에 있어 따라이(Terai) 자치 문제와 바람직한 연방제 구조에 대한 것이다.

한편, 이는 다른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로도 여겨져 왔다. 과거 중앙권력은 오랜 세월 많은 인종집단과 네팔의 카스트 계급을 지배했고, 때문에 연방제를 통해 중앙으로부터 이런 권력을 제거하고, 지역차원에서 삶의 질 향상과 공정한 분배를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방제가 어떻게, 그리고 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 조사는 거의 발견할 수 없다. 나는 새 헌법이 시민 참여를 보장하고 권익을 보호하고 증진할 수 있는지 최소한의 확신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를 위한 어떤 준비도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주요 정당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헌법을 통한 발전된 형태의 민주주의와 지속적인 평화구축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네팔공산당이 단일정당 독재로 가지 않고,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겠다고 한 그들의 약속을 지키리라 생각한다). 이 목표를 위해 첫째로 어떤 이유로 네팔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한 세심한 조사와 분석, 평가가 필요할 것이다. 이미 존재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객관적이고 철저한 평가 없이 앞으로 다가올 민주주의가 성공적일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1990년 서구 형태의 자유 민주주의를 채택한 이래 네팔은 현재 더 나은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역사적 순간에 서있다. 그러나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할 지에 대한 질문에 정당들은 답하지 못하고 있다.

사무엘 헌팅턴은 냉전의 종식은 '역사의 종말'을 위한 조건과 서구 형태 민주주의의 승리를 낳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유 민주주의 모델이 적절한 환경과 실행 속에서 번창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많은 사회과학자들은 냉전 후 자유주의 관점에서 제기되었던 좁은 의미의 자유 민주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들은 자유 민주주의는 이상을 성취하지 못했고, 따라서 도전에 부딪쳤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또한 서양에서 이식된 민주주의가 세계 곳곳의 다른 문화와 사회에 적합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는 네팔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를 네팔에 도입했을 때, 자본의 세계화 앞에서 신자유주의 시장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초래된 것(몇몇 긍정적인 면들을 제외하고)은 낮은 수준의 민주주의였고, 정치는 단순한 게임의 수준에 머물렀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초기의 낙관론은 나라가 민주화에 접어들면서 시작된 정부와 네팔공산당의 갈등의 심화 속에서 사라져 갔다. 하지만 단순히 이 현상만이 과거의 민주주의 실패 또는 결점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원주민 그룹의 문제를 제기하는데 실패했고, 권력정치는 이를 방치하며 커져가고 있다. 그리고 공공정책을 형성하고 실행하는데 일반시민의 참여를 포함하는 전통적인 민주주의의 능력에 대한 의구심이 여전히 존재한다.

네팔의 선출된 대표들은 시민의 삶과 사회에 관련된 일들에 대해 폭넓은 대중의 참여 없이 모든 것을 자신들이 결정했다. 결과적으로 네팔은 평등, 정치적 자치권, 책임, 경제적 평등 등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채 처음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물론 행정·입법·사법의 분리, 자유공정 선거, 그리고 자유로운 정치 정당, 자유로운 기관들의 연합 등 시민사회의 성장과 함께하는 긍정적인 면들이 있다. 그러나 네팔과 같은 나라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엘리트에 의한 권력정치가 아니라, 소외된 사람들의 이익, 소수그룹, 젠더 이슈 등을 위한 정치적 평등을 기본으로 하는 대중정치로 이해되어야 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과거에 수행되었던 기관 개혁과 정책 실행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평가해야하는 시점에 와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존재하는 민주주의 자체가 나라를 위해 적합한지를 평가하고, 그렇지 않다면 어떠한 형태의 민주주의가 적합할지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이다. 이렇게 민주주의의 형태와 생각을 재언급하는 나라가 네팔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런 흐름은 세계 곳곳에서 '다시 생각하는 민주주의', 또는 '급진적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발견된다.

네팔은 정책결정과정에서 더 넒은 시민참여가 이루어져야 하고, 공공이슈에 대한 시민의 역할 또한 확신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신중하고 지속가능한 민주주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이전 관심은 엘리트 권력정치에,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한 전제조건들의 확인과 실행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시민의 삶과 관련된 이슈에 최대한의 시민참여를 보장하는 데에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네팔의 민주주의, 개발, 평등 그리고 평화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들 중 하나는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문화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네팔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대부분 개념적이고 규범적으로 한정되어 왔다. 이는 우리의 초점이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문제와, 정확한 조건과 민주주의에 대한 다른 대안을 무시하는, 특수하고 제한된 형태의 민주주의를 위한 선행조건을 찾아내는데 맞추어졌기 때문이다. 참된 민주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 우리의 정치적, 학문적 전문가들은 민주주의를 넓히고 굳건히 하는 대안적 장치들의 힘과 요소들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의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시민운동 세력(People's Movement II)에 의해 조직되고 창조된 행동중심은 네팔에서 민주주의를 사회화하는 데 유용할 수 있다. 정치세력들, 시민사회, 학계, 언론 그리고 다른 관계자들의 참여를 바탕으로 이 의제에 대한 담론은 네팔에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기초를 건설하는데 필수적일 것이다.


 

지반 바니야 / 서강대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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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가 보는 한국 민주주의 위기

아시아가 한국 민주주의의 퇴보를 우려하고 있다. 한때 한국 민주주의는 아시아 민주주의의 선두 대열에 서있다는 평을 받았지만 이제는 그런 호평을 기대하기 어렵다. 현 정부가 출범한 작년부터 주로 인권 후진국을 상대로 활동을 하던 국제앰네스티나 '포럼 아시아'와 같은 국제인권기구가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의 인권지수 악화를 경고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니 말이다.

물론 필자가 이전에도 강조했지만 '결손 민주주의', '선거 권위주의', '경제 헌정주의' 등으로 표현되는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위기는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특히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행보는 한때 한 나라를 기업화하려고 시도하였다가 파국을 맞고, 마침내 자국의 정치를 악순환의 굴레로 다시 밀어넣은 태국의 탁신 전 수상과 그가 이끈 타이락타이당을 연상케 한다.

태국의 경우 1990년대는 새로운 시민사회가 출현한 중요한 시기였다. 정치적 공간이 확장되고 '저항정치'가 발전하였다. 언론의 자유도 확대되고 토론문화가 확산되었다. 새로운 단체들이 우후죽순 처럼 생겨나고, 보다 다양한 요구가 정치영역에 반영되었다. 더 많은 대중들이 더 많은 자유, 더 많은 참여에 대한 욕구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대자본에 이러한 흐름은 위협적이었다. 과거 침묵하고 있던 농민들이 국가가 자의적으로 도시 성장을 위해 천연자원을 투입하는 것에 반발하고 나섰다. 자유주의적 운동과 공동체주의적 운동은 중앙집권적 국가의 종식과 다양한 사회적 요구에 민감한 정부를 희구하고 나섰다. 이러한 시민사회운동은 1997년 신헌법, 교육 및 보건개혁, 분권화와 같은 의제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탁신은 집권 초기에는 시민사회진영의 개혁 의제에 공감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적대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적대감이 그의 정치이념과 무관한 것이 아니나 그를 둘러싼 대자본의 우려를 반영한 것으로 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탁신은 예전보다는 좀 더 균등하게 성장의 결실을 나눠야만 대중적 지지를 살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식을 시민사회 주도가 아닌 국가 주도적인 것으로 고착시키려고 했다.

그러기에 탁신은 1990년대 내내 성장해온 자유주의운동, 공동체주의 운동과 부닥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탁신정권은 의회내 절대의석을 기반으로 그동안 확장되어온 정치적 공간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일부 비판적 지식인들은 '1976년 민중학살' 직후 시기를 제외하고 가장 강력한 언론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느끼까지 했다. 반대자들을 협박하고 길들이기 위해 군이 정치적으로 다시 활용됐다. '마약과의 전쟁'에 따른 대량 살상은 군사독재 시절 처럼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고 있으면서 이를 언제든지 악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저항적 행동'은 여지없이 채찍을 맞았다. 무슬림이 많이 사는 남부지역에서는 촌락 지도자들이 살해되거나 실종되었다. 심지어 인권 변호사까지 실종되었다.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공공연하게 모욕을 당하거나 말단 공무원들로부터 협박을 받았다. 비판적 지식인들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탁신에게 민주주의는 성장의 도구일 뿐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그는 법치를 '경영'의 종속변수로 보았다. 주로 법안을 통해서 혹은 과거 '안보국가'가 행했던 낡은 수법인 은밀한 방식으로 저항정치를 압박하였다. 또 규칙과 돈과 공권력을 수단으로 언론매체를 통제하였다. 특히 뉴스 내용에 대한 치밀한 관리를 통해 반대 목소리를 차단했다.

한마디로 탁신은 나라를 '기업'으로, 통치를 '경영'이라고 사고하였기에 국민들을 권리, 자유, 열망을 갖고 있는 시민이 아닌 소비자, 주주, 생산요소로만 간주하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그러기에 탁신은 시민사회로부터 아시아 민주주의의 선두대열에 있던 태국 민주주의를 반세기 전으로 되돌려, 또다른 일당국가체제를 만들려고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를테면 2003년에 인권 문제에 관련한 유엔의 비판이 있자 탁신은 "우리는 독립국가이고, 어느 누구한테도 머리를 숙이지 않을 것이다. 태국 국민은 단결해야 한다"는 식으로 맞대응했다. 그렇지만 시민단체들은 탁신정부가 "빈곤과의 전쟁"이 아닌 "빈민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2002년 초에는 22명의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44명의 외국인 활동가들이 조직범죄를 다루는 '돈세탁방지청'의 수사를 받고 있음이 드러났다.

탁신은 거듭해서 반정부성향의 시민단체들을 부당한 수법으로 해외 후원금을 챙기는 말썽꾼으로 묘사했다. 그는 자신들의 정책에 동조하는 시민단체들과는 협력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시민단체들은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식의 발언을 해댔다. 같은 해 초 정부는 시위 단속을 위한 보다 강력한 법적 장치를 모색하였다. 구체적으로 사전에 허락받지 않은 시위를 범죄시하는 법안을 만들려다가 여론에 밀려 포기하였다. 이미 폐지된 반공법과 유사한 보안법을 입안하려 하다가 이 역시 여론에 밀려 중단되었다. 그럼에도 탁신정권은 반테러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보다 큰 불만은 방송, 신문분야로부터 나왔다. 대표적인 예가 아이티비(iTV)의 예이다. 아이티비(iTV)는 1996년에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방송매체로 출범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1997년 금융위기 직전에 자금압박에 시달리면서 결국 탁신 가문 소유의 회사에 넘어가게 되었다. 2001년 총선 직전에 아이티비(iTV) 방송사 기자들이 탁신의 선거 보도 간섭에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자 즉시 20여명이 해고됐다. 2003년 9월에도 정치적 간섭에 반발하였다는 이유로 또다른 아이티비(iTV) 직원들이 해고됐다. 방송의 성격은 점점 오락 프로그램 중심으로 바뀌었다.

탁신의 언론매체 간섭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TV 방송사들이 기업인들의 사기를 북돋는 차원에서 부정적 뉴스는 줄이고 좀 더 긍정적 뉴스를 보도할 것을 주문하였다. 마침내 보도범위를 정부사업에 맞추고 정부에 부정적인 보도는 뺄 것을 요구하는 메모가 모든 라디오, TV 방송사에 보내졌다. 하나의 예로 메모 중에는 "민영화 반대는 방송되어서는 안된다"는 문구도 있었다. 자연히 모든 방송사들이 뉴스 프로그램을 줄이고 대신 정부행정, 범죄, 인물 등을 다루는 프로그램을 늘렸다. 당연히 저항정치나 비제도권 정치가 보도될 수 있는 여지가 좁아졌다. 반면 오락 프로그램, 특히 게임 쇼 프로그램이 늘어났다.

그러나 이렇듯 의회내 절대의석을 갖고 오만과 독선의 정치를 펴던 탁신정권도 '애국'을 기치로 내걸었으면서 자신은 세금 한 푼 안내고 어마어마한 액수의 주식을 외국기업에 판 '배신' 행각이 발각되자 방콕시민들의 거센 저항에 봉착했다. 그리고 마침내 군부 쿠테타로 붕괴하였다. 이때 절대의석을 기반으로 독선을 일삼았던 탁신과 타이락타이당은 지식인과 대중들에게 절차적 민주주의, 선거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을 깊게 남겼다. '좋은 쿠테타'도 있을 수 있다는 지극히 위험한 발상까지 횡행하게 됐다.

현재 태국 사회는 친탁신 진영과 반탁신 진영으로 두 동강 나 있다. 왕실과 군부의 위상이 다시금 현저히 높아진 상황 속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실종됐다. 주목할 것은 적지 않은 이들이 이렇듯 '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재앙의 기원을 "국가가 회사이고, 회사가 국가이기에 경영방식도 같다"는 최고경영자(CEO) 발상으로 독선과 전횡을 일삼던 탁신정권의 과오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 아시아 국가들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리고 그 우려의 대상에서 한국 민주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현 정부와 집권 여당은 정치적 소수자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시민사회에 대한 통제를 능사로 여기는 식의 '기업가적 발상'으로 국가를 경영하였다가 전면적인 대중적 저항에 직면하면서, 결국 자국 민주주의의 시계를 거꾸로 되돌려버리고, 스스로도 파국을 맞고 만 태국의 탁신 전 수상과 타이락타이당의 대과(大過)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박은홍/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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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신은 물러나고 민주당이 집권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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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콕의 수완나품 국제공항을 점거한 채 시위를 벌이던 국민민주주의연대(PAD) 소속 반정부 시위대원들이 지난 3일 점거 농성을 풀고 공항을 떠나면서 환호하고 있다. ⓒ신화=뉴시스

2008년 1월 팔랑쁘라차촌당(PPP) 집권 후 태국 정국은 극도로 불안했다. 반 탁신 세력 국민민주주의연대(PAD)는 탁신의 대리인 정권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해서 총리 퇴진 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여 왔다. 정부청사 점거, 비상사태 선포, 헌법재판소의 싸막 총리 직위 박탈 판결, 쏨차이 총리 취임, PAD의 국제공항 점거, 헌법재판소의 PPP 등 집권 3개 여당 해체 판결 등 정국은 바람 잘 날 없었다.

집권당 해체라는 미증유 사태 후 태국 의회는 임시회를 열고 민주당의 아피시트 웨차치와 총재를 제27대 총리로 선출했지만 그 전도는 밝지만은 않다.

단기적으로 민주당 정권은 이전보다는 안정적으로 정국을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국불안의 최대변수였던 PAD뿐 아니라 왕실, 군부, 사법부, 기득권층의 심정적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 보면 정국 불안요인은 도처에 깔려 있다.

무엇보다 친 탁신파와 반 탁신파 간의 갈등을 들 수 있다. 양 측은 지역적으로 친 탁신 세력이 우세한 북부, 동북부와 반 탁신 세력이 우세한 기타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고, 계층적으로는 농민, 도시빈민층과 중산층, 왕정파로 나뉘어져 있다.

지금까지는 PAD가 정국 불안의 제일 변수였다면 이제부터는 독재 저항 민주주의 연합전선(UDD)같은 친 탁신 세력이 주요 변수로 대두될 전망이다. 이미 탁신 지지자 수 백명은 아피시트 민주당 총재의 총리 선출 소식이 전해지던 날 그것이 불법임을 주장하며 의사당으로 통하는 길목을 막고 의원들이 탄 차의 유리창을 깨뜨리는 등 폭력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사실상 친 탁신 세력으로서는 민주당 정권의 출범은 용납하지 못 할 일이다. 2008년 초 PPP가 총선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두고도 탁신의 대리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두 차례 씩이나 총리가 물러나고 정당해산까지 당했으며 여전히 의회 내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립정부 구성에 실패했으니 그 억울함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탁신도 군부의 지지를 통해 출범한 민주당 정권의 불법성을 지적하고 나섰다. 군부는 이전부터 PPP 정부에 대해서는 비우호적이었다. 사막과 솜차이 총리가 두 차례씩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PAD 해산을 명했지만 따르지 않아 결과적으로 정권퇴진에 기여했을 뿐 만 아니라 민주당 주도 연립정부 구성과정에서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 것이 사실이다.

연립정부 구성도 정국 불안의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PPP 당보다 의석수가 훨씬 적은 민주당 정부는 구 집권 여당인 찻타이당, 마치마티빠따이당, 루엄짜이타이 찻파타나당, 프어팬딘당 뿐 아니라 PPP 당 일부 파벌과 연정을 구성했다.

과거부터 만성적 정국불안 요인 중 한 가지는 다당제에서 기인하는 연립정부의 취약성이었다. 과반수를 차지하는 절대 다수당이 부재한 가운데 소수당과의 불안정한 내각 구성으로 연립정부의 평균수명은 1년 남짓이었다. 2007년 12월 총선에서 민주당이 차지한 의석수는 165석(총 480석)이었으며 PPP 는 232석이었다. 비록 PPP는 소수당과 연립내각을 구성했지만 과반수에 육박하는 의석수를 차지했다.

민주당 연립정부는 235석(총 437석)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5개 정치파벌과 연립함으로써 취약성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이번 정부 구성에서 나타난바 같이 태국 정당들은 당파의 이해에 따른 이합집산이 격심하다. 정당과 정치인들은 주로 내각직이나 지역구 예산분배 등과 같은 이해관계에 따라 수시로 정치적 입장을 바꾸어 왔다.

지금은 민주당을 지지하고 있는 PAD의 입장변화도 정국 불안의 또 다른 변수가 될 수 있다. PAD는 포퓰리즘에 기반한 부패정치를 뿌리 뽑기 위해서 현재와 같은 1인 1표에 기초한 민주주의는 태국 실정에 맞지 않기 때문에 임명직 의원 70%, 선출직 의원 30%로 하는 새로운 선거제도로의 개편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이 현 정권 하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PAD는 정치적 지지를 철회 할 수 도 있다. PAD 주장은 궁극적으로는 헌법개정을 통해 실현될 수 있는 데 친 탁씬 세력들은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해 부패혐의로 2년형을 선고 받고 망명 중인 탁씬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또 다른 목적으로 현행헌법의 개정을 요구함으로써 정국 불안이 고조될 가능성이 높다.

경제위기도 정국의 안정을 크게 해 칠 수 있다. 현재의 경제위기는 대외적 요인은 물론이고 국내정치 불안에서 기인한다. 내년 경제성장률은 2%, 실업자는 100만 명이 예상된다. 국제공항 점거사태로 관광, 수출, 수입, 운송, 항공분야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사실상 민주당이 2001년 총선에서 탁신의 타이락타이당에게 참패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경제 문제였다. 민주당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과 구조조정에 반발하는 세력들의 불만을 규합하여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것이 탁신의 타이락타이당이었다. 집권 후 탁신이 실시한 경제정책은 비난도 받았지만 큰 지지를 받은 것도 사실이다. 민주당 정권 출범 직후 태국의 경제사정이 악화될 것이라고 주장한 탁신은 앞으로 경제 CEO 총리였던 자신에 대한 국민적 기대를 다시 불러일으키려 애쓸 것이며 민주당 정권의 경제위기 해결능력은 정국안정에 큰 변수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위의 다양한 정국 불안요인 중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친 탁신과 반 탁신 세력간의 갈등에서 기인한 정치적, 사회적 분열 현상이다. 더구나 지금까지 사회통합의 중심 역할을 해 온 푸미폰 국왕의 역할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은 더 할 수 있다. 이미 반 탁신 세력에 의해서 선점 돼버린 국왕이 갖는 정당성은 과거와 다르게 축소되어 있다.

앞으로 정치 불안은 입헌군주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질서와 체제변화에 대한 요구까지 촉발시킬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얼마 전 이와 관련해 자신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반 국왕파로 몰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 탁신의 언급은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김홍구/ 부산외대 태국어과 교수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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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인도의 9.11, 그리고 야만
인도 민주주의가 실패해온 이유

 
9.11 하면 많은 이들은 2001년, "악마 같은 이슬람" 사람들이 비행기를 낚아채 세계무역센터 건물을 들이받아 3000명을 죽인 폐허더미의 장면부터 떠올릴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범죄로서 전인류에 대한 범죄라고까지 할 수 있다.
 
물론 9.11 테러 사건이 인류에 대한 범죄이긴 했지만, 여기서 내가 기억나는 것은 오래 전 1998년에 파키스탄의 정치가이자 활발한 혁명이론가였던 에크발 아마드(Eqbal Ahmad)가 했던 말이다. 그는 당시 미국에 거의 빌다시피 서아시아에 대한 간섭과 만행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면서, 마치 9.11 사태로 인한 전세계적 재앙을 예견하는 듯했다. 그리고 실제로 9.11 테러의 현장이 그랬다. 생생한 재난의 장면으로 의해 순식간에 중동 국가들은 다 같은 "야만적인 무슬림"으로 치부됐으며, 민주주의와 테러 퇴치라는 명목으로 어마어마한 폭격을 받아 쓸려버렸다.
 
지금 나는 미국식 신제국주의 모델을 재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2001년 9.11 사태의 희생을 불경스럽게 하지 않으면서도 근대사에서 잊혀진 몇 가지 다른 중요한 9.11 사건을 살펴보고자 한다.
 
칠레에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이 라 모네다에 탱크로 밀고 들어가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이끄는 대단히 인기 있던 민주 정권을 붕괴시킨 것 또한 9월 11일 아침이었다. 그것은 남아메리카 역사상 가장 피 튀기는 쿠데타였고, 3000명의 시민이 학살당했다. 이후 피노체트의 독재 치하에서 사형되거나 실종된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칠레 국립체육관은 강제수용소로 바뀌었고, 그곳에서 살해된 수천 명 가운데 대중가수였던 빅토르 하라는 손가락이 모두 잘렸으며, 기타를 치라는 명령을 받고 피범벅이 된 손 바닥으로 기타를 쥐어 들자 바로 총살됐다.
 
오늘날 사람들이 이 또 다른 '9.11사태'를 누가 일으켰는지 알기 위해 갑자기 역사학도가 될 필요는 없다. 여전히 '야만적'인 정권을 민주화시키는 것을 중요한 정책으로 삼고 있는 콘돌리사 라이스 국무장관이 일하고 있는 미국 정부가 바로 피노체트 쿠데타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십 년 전 당시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아옌데 대통령이 국민의 지지와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면서 미국 회사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보인 데 대해 "자국민들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스스로 공산주의의 길로 가려는 나라를 옆에서 빤히 보고만 있을 수 없다. 그들 스스로의 결정에 맡겨두기에는 너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라고 좌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기억에서 사라진 9.11은 또 하나 있다. 1906년 남아프리카에서 간디(Ghandi) 의해 최초로 발생한 WMD 사건이다. 여기서 WMD는 대량파괴무기를 뜻하는 'weapons of mass destruction' 이 아니라 'weapon of mass disobedience' 로서, 사티야그라하라고 불리는 인종차별과 식민지화에 대한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말한다. 훗날 간디가 밝혔지만, 남아프리카 정부의 간섭을 꺾고 인도 대륙의 주권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한 사티야그라하 운동이 바로 9월 11일 일어났다. 이로써 다른 영연방 식민지 국가들에도 반 식민화 운동이 비폭력적으로 퍼져나갔고, 1960년대에는 키신져와 라이스와 부시의 나라 미국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선도할 시민권 운동의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여기 전세계에 알려지지 않고 잊혀진 또 하나의 9.11이 있다. 50년 전인 1958년 9월 11일, 간디가 활동했던 바로 그 시대에 인도 대통령은 국회의 '군특수권한법안'에 동의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한 이 법은, 식민지 시대에 영국이 인도의 독립 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군특수권한 조례'를 재현한 것이다. 인도의 북-동부 지역의 대부분은 이 법안으로 의해 군대 통치를 받고 있다. '군특수권한법'은 사실상 무력 통치인 현 상황을 민주 정부의 합법통치가 이루어 지고 있는 것처럼 위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오늘날, 군사권이 강한 동북지역은 연 평균 1000명 가량의 민간인이 살해되고 있다.
 
군특수권한법 설명에 구체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인도 동북지역의 다른 9월 사건을 언급하겠다. 1948년, 새롭게 독립한 인도의 북동부에 위치한 왕후국 마니푸르(Manipur)는 보통선거를 통해 민주의회를 구성했다. 이는 아시아 최초였고, 인도 주정부가 세워지기도 전에 이뤄진 것이었다. 하지만 의회는 오래가지 않았고, 인도는 곧 마니푸르 왕후와 통합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1949년 9월 21일 합병 당일에는 마니푸르의 민주의회의 합법적 동의를 받지 않은 군사적 조치가 강행됐고, 이어서 10월 12일에는 인도육군 일개 대대가 마니푸르 수도에 진입했다. 3일 후인 10월 15일, '합병 조약'이 발효되면서 보통선거를 통해 구성된 국회가 속절없이 해산되고 말았다. 일순간 마니푸르는 헌법에 민주의회까지 갖춘 자주국가에서, 민주주의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최고 지방 행정관들과 군 출신 주지사들이 통치하는 인도 뉴델리(New Delhi) 의 행정 하에 속하게 되었다.
 
다시 1958년 군특수권한법으로 돌아와 보자. 그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군특수권한법은 6장 내외의 법률로서, 아마 2억의 인구를 통치하기 위한 세상에서 가장 짧은 법률일 것이다. 이 법은 동북지역에서 군사활동을 규정지으며, 동북 지역의 '혼란 구역' 내에서 인도군 당국과 장병들에게 특별 권한을 부여한다. 그러나 이 법은 '혼란 구역'을 정확히 명시하지 않는다. 4조a항은 "어떤 군 장교, 준위, 하사관이든 그가 공공 질서 유지에 적합하다고 판단할 시, 그러한 내용에 해당하는 경고를 한 후에는, 발포하거나 기타 무력을 사용하여 저지하도록 허용하며, 심지어 살상하는 것도 허용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4조b항은 군 당국이 판단하기에 주거물을 비롯한 어떠한 건물이든, 그 안에서 무장 공격을 "행할 가능성이 있는", 또는 "어떠한 혐의를 받고 있는 수배자든" 은신처로 사용했던 건물을 파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4조c항은 "이성적으로 곧 명백한 범죄를 저지를 의심이 가는 자"에 대해서 "필요한 어떠한 무력"을 사용해서 영장 없이 체포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이런 조항은 무분별한 체포의 근간이 됐고 엄청난 무력 남용과 많은 민간인이 사살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북동부와 같이 문화적, 지리적으로 외딴 곳에 위치한 지역의 군인들은 대개 '이성적'인 근거 없이 무력을 사용한다. 마지막 조항인 6조에는 "이 법안에 명시되어 있는 권한으로 시행되거나 예비된 어떠한 행동으로 인해, 이 법안에 명시된 사람은 어떠한 법적 처벌, 절차를 거치지 아니한다"고 규정되어, 모든 군인사에게 법적 면제권을 부여한다.
 
이 '군 특수권 법안'이 군사행위에 대해 제공하는 법적 보호 때문에 인도국군에 의한 인권침해는 반복됐다. 그 유형에는 강간, 여성 추행, 민간인을 향한 발포, 작대기와 고춧가루를 이용한 항문 고문과 같은 극한의 고문, 그리고 기타 법에 명시되지 않은 사항들도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가장 의아한 점은 야만적이고 가혹한 군사 통치 법안이 민주국가로 알려진 인도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 해답은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인도대륙 중 동북지역은 영연방이 마지막으로 식민지화한 지역이다. 하지만 식민화 이후 동북지역은 곧 제국의 최전선이 됐다. 동북의 아삼 지역 평원을 지나 구릉지대에 위치한 이곳은 행정권이 제한적으로 미치는 곳으로서 많은 부분 영국의 지배를 수용한 전통 족장들에게 통치가 맡겨졌다. 당시 왕후국이었던 트리푸라와 마니푸르는 속국으로 간주되어 인도 중앙정부 주재관들의 간접 조종을 받았다. 약탈적인 구릉지역의 부족들은 이웃한 버마 왕국의 공격적 성향을 흡수하기 위한 완충지대로 관리되었다. 초기의 식민지 행정관들은 그 언덕 지역을 "악마와 도깨비가 득실거리는 공포의 땅 같다"고 입을 모았다.
 
버라드(S.G. Burrard) 대령이 쓴 <인도 서베이 기록: 북동지역 전선의 탐험, 제4권>은 영국인의 시각에서 이 지역을 미지와 기지, 원시와 문명 사이에 지리적 대비가 강하게 나타난 지역으로 기술하고 있다. 식민지들의 지리적 이미지는 각 곳의 원주민들의 이미지로 표현됐다. 예를 들면, "아삼 사람들은 사납고 야만적인 성격을 가졌다. 그들은 전쟁을 좋아하고 복수심이 강하며 잔인하고 술수가 많다. 아직 인류애의 부드러움은 아삼 사람들의 형체에 녹아있지 않은 듯하다"고 묘사했다. 뿐만 아니라 식민지 행정관들도 아삼 너머 지역 사람들은 성격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유럽이나 인도 중심부와는 확연히 달라, 그 지역은 불가피하게 식민 계획에서 제외됐고, 그 결과 이 지역은 야만의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아삼 너머 구릉 지역의 야만적인 역사는 오늘날 식민 해방 후 인도에서 그 원시성이 가장 강하게 남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많은 학자와 국제 단체, 그리고 인도 정부는 그 지역을 "군사적 통치 질서"가 군림하며, 불순분자들이 사는 낙후 지역으로 꼽는다.
 
이 같은 시각들이 존재하는 것은, 영국으로부터 권한을 인도 받은 인도정부의 엘리트들의 무지 때문이 아니라, 인도 국민들 인식 자체에 커다란 '공백'이 있기 때문이다. 이 공백은 인도 역사교과서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교과서의 지도에는 아삼 부근 야만 지역이 커다란 공터로 나와있다. 이것은 마치 예전 고대 중국에서 자기 나라에 알려지지 않은 곳은 여백으로 처리해 아예 존재 자체를 알리지 않은 것과 유사하게, 인도 역사교과서에는 아삼 부근지역의 유례를 가르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다윈의 사회진화론의 신화와 전세계를 비 문명화된 절반으로 보는 인종주의적 편견과 유사하게 인도 국민들의 상상 속에서 이 지역은 아리안족의 문명과 지역 우수성에 비쳐 볼 때 낙후되고 가장 이질적인 곳으로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군특수권한법과 같은 정책에 의해서 동북지역이 변화할 수 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인도 국민 의식에 존재하는 이 '공백'와 인종적 차이는 인도 정부의 '통합 거부'에 대한 우려와 인도의 팽창주의 정신이 혼재되어 빚어낸 것이다. (인도는 건국부터 식민 통치 당시까지도 서아시아로 뻗어나가는 민족주의 개척정신을 품어왔다) 불만분자의 봉기와 무력이 북동지역의 특성으로 자리매김 하기 이전부터, 그리고 그 지역에 분리파의 아우성이 들리기 오래 전부터 인도정부 지도자들은 통일이 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50년 11월 7일, 초대 내무장관이 네루 총리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 내용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동북전선의 불명확한 상태와 티베트, 중국에 대한 현지인의 친밀감은 앞으로 우리와 중국 사이에 중대한 도전 요인이 될 것이다. 북방 또는 동북방에 대한 접근은 부탄, 시킴, 그리고 아삼의 다아질링과 부족을 포괄한다. 그러나 이 지역 사람들은 인도에 대한 헌신이나 충성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 북방과 동북지역에서 우리의 전선을 강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행정적 조치들은 네팔, 시킴, 다아질링과 접경 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당시 인도주재 미국 대사 찰스 보울스는 인도인들이 인도-네팔 평화우호조약 체결을 미국이 양대 대륙(미국과 유럽) 사이에 맺은 훨씬 광범위한 조약들보다 대단하게 보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라고 이야기 했다.
 
인도의 민주정치체제가 군사보안당국에 의존한 동북정책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군사주의적 사상에 민주주의가 편승하는 것을 의미한다. 국민들 내부의 서로 다른 차이점을 존중할 수 있는 사회적 기초가 형성되지 않다면 인도의 민주주의는 전혀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북동지방 문제는 인도 본토의 민주진보진영에 중대한 도전이기도 하며, 과거에 늘 인도가 민주주의에 실패했던 원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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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노지트 후세인/ARENA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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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민주화의 과거, 현재, 미래 

책을 표지만으로 평가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책을 서두만 읽고 마지막 장의 내용을 예측할 수는 없다. 의사 또한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효과적인 치료방법을 강구하기 위해서는 겉으로만 드러나는 환자의 증세만을 봐서는 안된다.
 
오늘날 이라크의 상황은 위와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이라크인들이 수십 년간 독재 정권, 부당한 위계질서로 고통 받아야 했던 원인은 어느 특정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종교, 인종, 문화 등의 여러 사회적 측면에서 국민들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권리를 모두 박탈 당했기 때문이다.
 
1920년도에 구 영연방 제국이 이라크에서 석유를 발견하자 영국은 그곳에 유전회사를 건립했다.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회사 수익의 95퍼센트를 영국, 프랑스, 미국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영국은 그 후 1932년에 이라크 왕정을 설립해 이라크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영국은 그 후 권력을 이라크 수니 엘리트 파에게 넘겼다. 수니 엘리트 파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요르단 왕족들과 혈연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때부터 이라크 시민사회는 수 차례 엘리트 파로부터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힘겹게 싸워왔다. 이라크 국민들은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실권을 얻으려 했으나 그들의 노력은 매번 막대한 영국 군비가 지원되는 왕정의 군부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라크 왕정은 1958년 발생한 군사 쿠데타에 의해 막을 내렸다. 왕정이 소멸하고 나서 권력은 정예 군부로 넘어갔다. 군부는 수십 년간 민주화와 시민참여의 출범을 막아왔다. 오랜 세월, 서양세계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라크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군사 수니 정권까지 이라크 정부는 이라크 국민들을 사회적 부정의로 일관했고 기본권인 정치권조차 짓밟아왔다. 그 동안 서양국가들은 이라크인들의 수난에는 아무 관심도 두지 않았다.
 
1991년 사담 후세인이 자신의 야망을 위해 서양에 비협조하고 쿠웨이트 유전을 공략했을 때, 서양 국가들은 연합을 형성하여 쿠웨이트 해방을 이야기 하며 이라크에 전쟁 선포를 단행했다. 이는 그 동안 후세인의 군대가 수 천명의 이라크 민간인들을 죽이고 수 백 명의 이라크인들이 후세인의 탄압을 피해 이란과 터키로 피난갔을때 서양국가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2차 걸프전 직후 유엔과 서양국가들이 이라크에 가한 경제재제는 이라크 군부의 횡포와 더불어 이라크 국민들의 고통을 배가시키는 것이었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많은 이라크인들은 서양의 공격에 맞서 싸우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서양으로부터 이라크 독재정권을 보호하기를 거부한 것이었다. 이라크 인들은 이라크 정권 붕괴를 기대했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희망으로 여겼다.
 
오늘날 이라크는 외세 주둔의 긴 역사, 복잡한 정계 역사, 여러 소수 민족들과 그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로 인해 이라크 국민들은 제대로 이들의 의사를 사회적으로 표명하지 못하고 사회참여의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이러한 이라크 내부 상황과 문제뿐만 아니라 점차 거세지는 주변국들의 관심과 참견은 이라크가 스스로 성장하는 것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장기간의 군사 독재를 겪은 탓에 대부분의 이라크 인들은 한 가지 목소리를 내고 한 가지 이념만을 내세우는 유일당의 당론을 교육 받아 왔다. 이러한 교육은 이라크인들이 민주주의에 일체 노출되지 못하고 사회활동을 전혀 하지 못하게 했다.
 
이라크인들의 민주주의와 사회참여에 대한 인식의 부재는 후세인의 독재정권이 무너졌을 때 외부 간섭 없이 국민 스스로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했다. 오히려, 시아파와 수니파, 그리고 나머지 이라크 소수 민족들 사이에는 공포와 복수심만이 퍼져갔다.
 
이라크의 과반이 넘는 시아파는 그들이 새 국가의 운영을 도맡을 차례라고 여겼다. 한편 수니-아랍 파는 과거 그들의 전통에 따라 이라크를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소수민족으로서 쿠르드인들은 지난 역사의 소수민족 차별과 민족말살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민족의 안전을 보장받아야 할 입장에 놓여 있다.
 
새로운 이라크의 건설을 위해서는 종교, 민족, 문화에 상관 없이 모든 이라크인이 동등하게 사회 건설에 참여하고 실질적으로 민주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길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라크는 건강한 경제와 평화적인 민주정치를 이룩하기 위해서 교육과 인재양성에 대한 지원과 연대가 필요하다. 한국의 시민 사회가 이러한 역할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이라크에 우호적인 협력을 해나갔으면 한다. 더불어, 이라크 역시 아시아의 한 일권으로서, 아시아권 국가들의 국제 연대가 절실하다. '도움이 필요한 때의 친구야 말로 진정한 친구' 라는 격언이 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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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샴/대학원생·성공회대 MAINS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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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체가 나를 부끄럽게 했다

비행기에 탑승하고서야 자카르타까지 7시간이나 걸리는 걸 확인하였다. 목적지가 어디든 몇 시간이 걸리든 별로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뭔지 모르게 피곤하기만 한 한국에서의 일상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했다. 이렇게 허둥지둥 시작한 인도네시아 방문은 일주일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7시간의 지루할 수 있는 비행시간은 오히려 안락한 휴식이 되어 주었다.
 
한밤중에 자카르타에 도착해 짐을 찾아 세관을 나가려고 하는데, 경찰인지 세관원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박스로 싼 짐을 질질 끌어 내며 뭔가를 요구한다. 어쩌란 말인가 싶어 귀를 기울였더니 결국은 돈을 내라는 애기다. 언젠가 남의 애기를 인용해서 인도네시아의 부패문제를 민주주의와 인권의 걸림돌로 지적한 적이 있었는데, 그 사실을 생생하게 눈 앞에 두고도 그냥 무기력하게 공항을 빠져 나왔다. 뭔가 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자괴감이 한 순간 스치고 지나갔다. 마중 나오기로 한 차는 한참이 지났는데도 오질 않는다. 몇 대의 담배를 피우고 한국에서는 한 가닥씩 하는 일행들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펴 보았다. 모두가 이 상황을 얼마큼은 받아 들이고 있는 듯 하였다. 달리 방도가 없으니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얼마를 더 기다린 후에 차가 도착하고 일행은 공항 근처 호텔에서 하루 밤을 묵게 되었다. 로비에서부터 아늑하게 뻗어 있는 긴 복도를 좌우로 몇 번 돌아서야 겨우 방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가라오케인지 나이트클럽인지 모를 시설이 방과 한 층에 있었다. 클럽 앞에는 한 가지로 유니폼을 입고 어려 보이는 여성 종업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공항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성 종업원들의 미소를 외면한 채 무기력하게 지나쳤다. 일행 중에 과격한 페미니스트가 있었다면 그렇게 무기력하지는 않았을까? 인도네시아에서의 첫날밤은 우리 일행의 정체성과 한계를 분명하게 설명해 주었다. 지금의 생각이지만 뭔가 하지 않는 것이 이유야 어찌되었든 잘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싶다. 내가 보편적이라 믿었던 것들이 어떤 사람에게는 이상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여행하는 동안 여러 차례 느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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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쓰나미로 인해 마을 한 가운데까지 7㎞를 밀려와 정박한 산만한 화물선박. ⓒ김신

 잠을 자는 둥 마는 둥하고 제법 차가운 열대의 새벽 공기를 쐬면서 다시 공항으로 가서 수마트라 섬 최 북부의 아체주로 향하였다. 공식일정이 시작된 것이다. 4시간이 걸려 도착한 아체주 공항은 시골 간이역을 연상시켰다. 공항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냥 나왔다. 쓰나미때 이곳 공항까지 바닷물이 넘쳐 그나마도 공항이 제 기능을 못해 구호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아직 아침인데도 5월의 뜨거운 열기는 피부를 찔러대며 파고들었다. 자카르타와는 다르게 공기는 신선하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상쾌하다. 무엇보다 담배 파는 가게직원이 없어 안달하는 일행에게 피우던 담배를 갑 채로 가지라고 권하는 공항직원들의 여유로움과 친근함이 자카르타와는 사뭇 다르다. 또 택시 호객과 전화카드를 팔려고 젊은 상인들이 진을 치고 있던 자카르타 공항과는 달리 이곳 공항입구는 망고를 팔러 나온 농부 몇 사람과 택시기사 한둘이 전부다. 망고를 팔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자기네끼리 깎아 먹고 노닥거리고 있다. 일행은 마중 나오기로 한 차를 기다리다 망고 한 바구니를 샀다. 노란 속살을 나누어 먹으면서 노닥거리는 사이 차가 도착했다. 역시 두 시간을 기다렸다. 아체의 첫인상은 마중 나오기로 한 차를 두 시간 기다린 것을 빼고는 사람도 공기도 그리고 일행들의 분위기도 모든 것이 자카르타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다.
 
숙소가 분명히 호텔인데 한참을 달려도 호텔은 고사하고 여인숙도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쓰나미가 다 휩쓸어 버린 것인가라고 의아해하고 있는데, 눈앞에 3층의 꽤 괜찮은 호텔이 갑자기 나타났다.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이곳에 호텔이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현지에서 우리 일행의 이동과 프로그램에 대해서 간사역할을 해준 단체는 SIRA(Central Information Referendum of Aceh)인데, 아체주 부지사가 된 나자르(37세)를 대표로 해서 중앙정부와의 분쟁 당시 자치획득을 위해서 주민투표를 추진해왔고, 지금은 정당으로서 변형과정을 거치고 있는 반정당적 성격을 띄고 있었다. 누구와도 영어가 통하지 않은 관계로 SIRA에 대한 많은 애기는 들을 수 없었다. 다만 한국의 경험에 비추어 정치를 하기에는 너무나 순박한 사람들이고 20~30대의 젊은 청년들로 리더십을 구성하고 있으며 어떤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빈곤과 복지가 주요 관심사라는 점이다. 그리고 당원 중에 여성과 노인 심지어 중년의 남성은 단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SIRA뿐 만 아니라 몇 개의 현지 NGO를 방문했을 때도 거리에서도 시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30년 넘는 분쟁으로 수 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그나마도 쓰나미가 휩쓸어 버린 아체의 현실이다. 굳이 쓰나미 피해 현장을 찾아 다닐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성들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이슬람법을 주법으로 삼고 있는 아체의 문화적 요인도 있었겠지만, 전쟁과 재해의 피해자는 언제나 사회적 약자그룹에게 더 가혹한 것이니 남성보다는 여성이 젊은이 보다는 노인의 피해가 심각했으리라. 이러한 사실은 예정에 없던 노동절행사에 동원되었을 때 더욱 더 실감이 났다. 겨우 50여명이 노동절행사를 갖고 있었다. 쓰나미가 파괴한 것은 단순히 자연환경과 삶의 터전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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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체의 노동절 행사 ⓒ김신 

쓰나미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들어온 국제기구, NGO들이 저마다 내건 영문단체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거의 문맹의 상태에서 우리 일행은 스스로의 자치권을 포기한 채 SIRA의 안내에 따라 먼저 나자르 부주지사와 간담회를 가졌다. 부주지사는 과거의 아픈 기억을 자치권 속에서 풀어내는 것을 과제로 안고 있었다. 지난 30여 년 간의 투쟁의 역사를 민주주의의 역사로 정착하고 과거 분리독립세력을 평화의 세력으로 사회화하여 과거의 상처가 민주적 자치권 속에서 인권과 평화의 문화로 거듭나는 아체인의 삶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일행에게 아체인들은 투쟁에 집중한 나머지 한번도 민주적 삶을 살아 보지 못해 민주주의를 피상적으로 알 뿐이라며 한국과의 민주주의 교육 교류를 제안하였다. 순간 부끄러워졌다. 민주주의가 제도만을 애기하는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의 삶 속의 민주주의 애기라면 오히려 아체의 상황이 좋아 보였다. 가부장적이고 이기적인 권위주의가 가정, 직장, 여타 사회 활동을 지배하고 있는 한국에서의 일상에 익숙한 나에게 직원이 있는데도 단체대표가 길거리 상인과 사소한 흥정을 하고 운전기사와 수행직원이 있는데도 고위공무원이 시장에서 산 점심을 담은 비닐봉투를 흔들고 다니고 상인들 간의 사소한 시시비비에 끼어드는 모습은 뭔가 역할이 잘못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새로웠다.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 학력, 무엇보다 나이와 상관없이 자유롭게 주제를 공유하고 뭔가를 토론하는 모습은 여행 내내 자주 볼 수 있었다. 아체인은 태생문화적으로 민주적일 수 밖에 없다는 어느 동남아학자의 말이 생각난다. 그 태생적 문화가 무엇인지는 아직까지 분명하지 않지만….
 
쓰나미 피해 재건현장과 30년 넘게 지속된 오랜 분쟁의 희생자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사회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쓰나미가 파괴한 아체주의 자연환경과 삶의 터전은 국제사회의 원조로 상당부분 복구되고 있거나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다만 마을 한 가운데까지 7㎞를 밀려와 제 멋대로 정박한 산만한 화물선박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안내자는 성룡이 기금을 내서 중국정부가 재건했다는 성룡마을로 우리 일행을 데리고 갔다. 중국식 건축물로 마을 정문을 세우고 거기에 중국어로 "중국과 인도네시아의 우의촌" 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옆으로는 홍보용 비석을 세워 뭐라 장황하게 새겨놓고 있었다. 정문에 들어서자 우뚝하게 세워진 이슬람사원이 눈에 띄었다. 저 멀리 인도양의 수평선에서도 알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지대에 재건된 마을은 5000여 가구는 되어 보였다. 아체의 전형적인 가옥구조 양식을 띄어 빨간색 지붕과 아이보리색 벽으로 지워진 보기 좋게 일률적인 크기와 모양의 가옥들이 장관이었다. 마을 앞으로는 인도양이 내려다 보이고 주변으로는 녹색의 열대 자연이 펼쳐져 있고 마을 끝까지 시멘트로 포장된 잘 정돈된 차도가 지그재그로 엎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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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룡이 기금을 내서 중국정부가 재건했다는 성룡마을. ⓒ김신 

마을은 차도를 따라 형성되었는데, 언뜻 어느 휴양지에 온 기분이었다. 마을까지 차로 오면서도 급경사가 힘들었는데 입구에서 내려 마을에 들어서자 얼마 못 가 주저 앉게 되었다. 어찌 된 일인지 마을 어디에도 사람이 없었다. 마을 입구에서 몇 가지 생필품을 파는 가게 주인과 아이들 서너 명을 본 게 사람의 전부다. 가게 주인에 의하면 교통수단은 없는데 생계를 꾸릴 수단은 멀리 있어서 주민들이 새벽에 나가 저녁 늦게 집에 들어오기도 하고 아예 일터가 가까운 곳에 간이 숙소를 마련하고 산다고 한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학교도 없고, 시장도 없고, 병원도 없어서 이주된 주민들이 다시 원래 살던 곳으로 많이들 빠져나가고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갈 곳이 마땅한 건 아닌데, 이 마을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떠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굳이 주거권에 대한 개념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잘못된 이주정책의 전형적 모습이다. 이주하게 될 주민들의 의견은 들어나 봤을까? 이렇게 만들어진 마을과 사회시설이 아체에 몇 개나 될까? 가게주인도 곧 마땅한 생계거리를 찾아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막막하게 허공을 주시하며 눈시울만 붉혔다. 그 시선을 따라 가보니 하늘은 구름이 한 점 없이 파랗기만 했다.
 
우리 일행도 이제 아체를 떠날 채비를 해야 했다. 도착하자 마자 일그러지기 시작한 일정에 따라 원래의 일정표 상의 순서와 시간은 오간 데 없어지고 그냥 모든 걸 SIRA에 맡긴 채 진행한 이틀간의 아체 여행을 마무리하고 공항으로 향하였다. 자카르타로 가는 비행기가 두 시간 늦게 출발한다고 한다. 왜 모든 게 두 시간인지 모르겠다. 이쯤 되자, 우리 일행 누구도 이것을 문제라고 느끼거나 이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두 시간이 오히려 반가웠다. 아체에서의 이틀 동안 비록 좋아하지 않는 생선을 주식으로 강요당하고, 가끔은 코코넛으로 배를 채워야 했고, 자치정부 수립 이후의 사회 상황을 현지인의 설명 없이 스스로 알아서 살펴 봐야 했지만, 가끔씩 먹여주는 아체 커피의 향긋함에 느긋해 지고, 아무런 경고 없이 데려다 준 해변가, 파도와 바람이 아니면 누구도 침범해보지 못했을 것 같은 백사장에서 누리던 잠깐의 휴식을 생각하면 나의 선택권과 자치권은 싸 그리 무시되었지만 모든 것이 다 그걸로 그만이다.
 
비행기 창 밖으로 보이는 아체의 산과 바다 강줄기를 사진을 찍듯 눈 속에 담았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다음에 다시 오게 된다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유럽의 시티플래너들이 아체에서 그 플랜리란 것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것이 진실로 바른 길이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김신/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국제사업단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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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대에서 1년간 아시아 NGO연구과정을 마치고 참여연대에서 한 달 동안 인턴으로 활동했다. 한국어를 잘 못해 사람들과의 교류가 다소 어려웠지만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소중한 경험으로 남을 것이다.

한국인을 직접 사귀면서 한국에 대한 인상도 많이 바뀌었다. 한국인들은 수줍으면서도 친절하고 공손했다. 한국인의 수줍음은 아마도 언어장벽 때문이라고 생각되지만 이런 점이 내게 큰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때로는 그저 미소나 목례를 교환하는 것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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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2월, 참여연대 제14차 총회에서 제시카

성공회대에서 공부할 당시, 동네에서 여러 친구들을 사귀었다. 중국음식을 배달하던 친구, 동네 세탁소를 운영하던 친구, 조그마한 가게를 운영하던 이웃 아저씨와 아줌마도 있었다. 이들과는 쉬운 영어와 한국어, 손짓으로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하루는 세탁소 아주머니와 10 여분 동안이나 더듬더듬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헤어질 때쯤 서로를 잘 이해했다는 충만한 느낌은 인상적이었다. 그와의 대화는 즐거웠다. 그는 지금쯤 내가 필리핀으로 돌아가리란 것을 떠올릴 것이다.

이런 개인적인 경험을 말하는 이유는 언어 장벽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돕는 것에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아시아 연대는 무엇이고 어떻게 가능한가. 이 질문과 동시에 떠오르는 것은 ‘아시아란 무엇인가?’, 즉 아시아의 정체성이다. 아시아 연대는 아시아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공부한 아시아 활동가 중에는 아시아라는 정체성마저도 서양 제국주의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이라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아시아의 정체성을 말할 때 먼저 우리는 각 아시아 국가들이 갖는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다양성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광범위한 개념이지만, 어떻게 하면 아시아 연대를 할 수 있는지 아시아 활동가의 한 사람으로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중심으로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아시아의 민주주의 과제

아시아 민주주의 모델은 여전히 개념을 만들어가는 단계에 있다. 서양의 민주주의 모델은 실패작으로 보이고, 아시아는 선거 민주주의와 굿 거버넌스에 관해서 순탄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여전히 많은 국가들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소수 엘리트 민주주의가 행해지고 있으며 일반인들은 선거공간에서나 그들의 목소리를 내는 수준이다. 시민들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약속하는 공약은 시종일관 깨지거나 힘을 가진 정치인들에 의해 방향이 바뀌기도 한다.

말레이시아는 아직도 민주적인 선거시스템을 이루기 위해 투쟁하고 있으며 반면, 필리핀, 한국, 인도네시아, 태국은 민주적인 선거체계로 전환되었다. 물론 그 선거개혁은 미완성이고 정치 개혁은 더욱 그렇다. 중국의 민주주의는 그들의 모델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관망하는 정도이다. 싱가폴이나 브루나이 같은 국가는 시민 사회 단체의 정치적 압박을 받지 않고 있는데 이는 시민의 자유라는 화려한 수사보다는 경제적 안정이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가져온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시아 각국에서 진정한 민주적 변화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계급제도는 철폐되어야 하고 동시에 개혁에 대한 전체론적 접근이 필요하다. 대다수의 빈민과 소외된 자들의 이익을 대표하지 못하는 자들이 계속 선출되는 이상, 현실은 매우 어두울 것이다. 높은 선거비용과 일부 특권층을 위해 작동되는 선거는 불공평한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민주적인 선거체계를 갖추지 못한 국가의 유권자는 부패한 정치가에게 투표권을 행사하기 쉽다. 불균등한 민주적 권리가 작용하는 선거의 장은 오직 엘리트와 힘을 가진 자에게만 유리할 뿐이다. 설령 일반 국민들이 투표에 의해 그들의 의사를 표명하더라도 소수의 정치적 기득권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결과를 바꿀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민주적인 정부가 정착한지 20년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많은 과제가 남아 있으며 민주적 변화의 움직임은 위협받고 있다. 민주적인 시민참여가 이어지지 못한 채 시민참여는 오히려 견제 받고 있다. 민주적인 정부 체계의 작동원리인 ‘견제와 균형’은 결여되어 있거나 매우 미미한 수준이다. 태국이나 필리핀의 활동가의 경우는 권력감시자로서의 과제와 동시에 급변하는 정치적 환경 앞에서 활동가 집단의 독자적인 의사결정이나 전략수립을 유보한 채, 공동대응을 해야 하는 때도 많다. 또한 진보세력의 분열도 문제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엘리트권력에게 힘을 더해주는 셈이다.
 

인권이 왜 중요한가

사회운동단체와 NGO가 인권에 주목하는 이유는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인권유린과 폭력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40년대 서부식민지에 대항하는 해방운동, 60년대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전평화운동, 70년대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진행된 독재권력에 대항하는 민주화 운동이 이어져왔다. 이러한 운동의 역사가 말해주는 시대적 책무를 민주주의와 인권존중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지도자들이 이해하고 따르도록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많은 아시아 국가의 정부는 인권에 대해 서구적 개념으로 파악한다. 즉, 아시아적 가치를 존중하기 보다는 오히려 해체시켜 재정립해야 할 것으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여전히 진행 중인 인권과 아시아의 가치관 논쟁에 대한 내 의견은 이렇다. 

인권의 핵심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아시아의 가치와 문화에서 인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정부가 정치적 신념이나 민족, 성적선호, 자유로운 표현과 연대활동을 이유로 국민을 죽이고 있다면 인권은 실종된 것이다. 아시아는 아시아가 갖는 핵심적인 가치에서 인권을 물려받았다. 다만 문제는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에 있는 몇몇 소수에 의해 인권의 가치가 잘못 해석되는데 있다. 인간 존중의 가치를 왜곡하는 것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잡으려는 욕망 때문이며, 인권침해를 정당화하는 변명으로서의 서부의 개념을 만들어간다고 생각한다.

사회운동가들은 인권신장과 보호를 위해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국가의 민주주의 상황은 인권옹호활동을 지체시키고 복잡하게 만든다. 많은 국가에서 인권침해를 교묘하게 벌이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론 무장저항단체가 인권 학대를 범하는데도  비난없이 그냥 넘어가고 있다. 이는 인권활동을 하는 활동가들이 받는 중요한 도전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정부가 이미 서명하고 비준한 인권 협정과 조약에 책임을 지도록 지속적인 활동을 해야 한다. 시민들은 더 많이 알고, 주장하고, 자신의 인권을 최대한 향유해야 하며, 이를 위한 우리의 노력도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부의 몫이다. 이것은 여전히 정부의 책임이고 시민사회단체와 NGO도 감시하고 대안을 제시하면서 힘을 보태야 한다.  즉, 정부 시스템과 정치영역이 올바로 기능하도록 압력을 가해야 하는 것이다. 시스템들이 제대로 기능할 때, 비 정부 기구와 사회 단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우리의 노력은 국민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는 데 있어 더 많은 결실을 맺을 것이다.  

아시아 활동가로서 우리는 각자의 나라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동시에 버마 같은 다른 아시아 국가의 민주주의 투쟁에 연대하고 지지해야 한다. 단순한 연대성명이 아닌 의미 있고 전략적인 정치적 지지로 격려했던 지난 경험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직접 대면을 통해서만 회의하고 교류하던 시절은 지났다. 이제 우리는 웹사이트와 전자우편으로 국경을 넘어 지속적으로 교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각종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연대활동의 전부는 아니다. 연대란 구체적인 실천과 행동으로 이어질 때 가능하고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아시아에서의 진정한 연대를 바란다면 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보다 많은 독창성과 지속성과 인내심으로 함께 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 제시카 우마노스 소토 (참여연대 인턴, 성공회대 아시아NGO학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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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부는 티베트인들에 대한 인권 탄압을 즉각 중단하라
3월 31일 1차 국제공동행동의 날에 부쳐

참여연대는 티베트인들의 평화적인 시위를 중국 정부가 무력으로 진압하고 있는 것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으며, 티베트인들에 대한 탄압과 인권침해를 속히 중단할 것을 중국 정부에 다시 한 번 엄중히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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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중국 정부의 진압 과정에서 140여명이 살해되고, 100여명이 실종되었다고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중국정부는 시위자 검거와 색출을 위해 시위대가 있는 티베트 사찰에 물과 식량을 동결하는가 하면, 티베트인 가구 당 1명씩을 강제 연행하고 동부 유목 지역에는 대규모 군대까지 파견하는 등 탄압의 수위를 높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항의에 중국은 내부 문제이니 간섭하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군대가 민간인을 상대로 총을 휘두르는 것은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서건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평화로운 의사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를 무력으로 탄압하는 중국 정부는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참여연대는 유엔 경제사회이사회의 엔지오 협의 지위를 갖고 있는 단체로서, 아시아의 인권단체들과 함께 지난 7차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이번 티베트 유혈 사태에 대한 특별 회의를 열 것을 촉구한 바 있다. 그러나, 유엔 반기문 사무총장이나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이 신속하게 중국 정부에 평화적인 사태 해결을 촉구하고 나섰음에도 특별 회의는 성사되지 못했으며, 진상조사단 파견 등 인권이사회의 적극적인 대응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는 지난 해 버마 사태에서 유엔이 보인 태도와 다르다. 참여연대는 유엔이 안이한 태도를 버리고 속히 티베트인들의 인권 침해를 조사할 수 있는 진상조사단 파견 등 적극적인 대응을 할 것을 촉구한다. 유엔이 중국 정부의 반인륜적 무력 진압을 묵시한다면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실현해야할 본연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한국 정부 또한 더 이상 침묵으로 일관해서는 안 된다. 한국이 오늘날 인권과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국가가 되기까지 국제사회의 지원이 큰 몫을 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한국이 아시아에서 갖는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국제적 책무성은 절대 적지 않다. 정부는 이번 티베트 사태에 대해 정치, 경제적 이해득실을 떠나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유엔 인권이사회의 이사국으로서 최소한의 목소리라도 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이명박 신정부가 강조한 한국의 국제 위상을 높이기 위한 외교 정책의 시작일 것이다.

이미 세계 각지에서는 티베트 사태를 규탄하며 일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항의 시위를 조직하고, 베이징 올림픽 성화 봉송에 맞춰 릴레이 시위, 개막식 불참 등 연대 활동을 벌이고 있다. 한국의 시민사회단체, 종교단체들도 중국 대사관에 항의 서한을 전달하고, 매주 촛불집회를 여는 등 티베트 사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평화적인 해결을 위한 연대 활동을 벌이고 있다. 참여연대도 이에 뜻을 같이하며, 다음을 촉구한다.


1. 중국 정부는 티베트에서 중국군을 철수시키고 티베트인들의 인권을 보장하라! 

1. 중국 정부는 티베트인들의 평화로운 의사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를 허용하라!

1. 중국 정부는 티베트인들에 대해 법적 절차 없이 자의적인 강제 연행, 처형이나 고문을 해서는 안 된다!  

1. 유엔은 중국 정부의 학살에 대한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고 평화적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라!

1. 한국 정부는 중국 정부의 무력 탄압을 외면하지 말고 평화적 사태 해결을 위해 책임있는 자세를 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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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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