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아세안 의장국 인도네시아에 거는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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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가 올해의 ASEAN(동남아국가연합) 의장국이 되었다. 지난 1월 12일에 작년 의장국 베트남으로부터 리더십을 인수받는 의례를 치렀고 바로 이어서 아세안외무장관회담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앞으로 정상회의를 포함하여 300회 이상의 다양한 정부 간 회의가 인도네시아에서 개최된다. 한국정부도 아세안대화상대국으로서 또한 아세안+3과 동아시아정상회의 회원국으로 수십 차례의 관련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인도네시아를 방문하게 될 것이다. 우리 언론이 논평은 고사하고 단신도 내주지 않았지만, 인도네시아의 아세안 의장국 수임은 동남아시아의 인권 신장과 민주 진전을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는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 아세안 심볼 -


아세안 의장국은 국명의 알파벳 머리글자 순서로 수임하므로 올해는 브루나이 차례이지만 일찍이 재작년 4월에 인도네시아가 2011년 의장국을 자원하고 나서서 먼저 하게 된 것이다. 아세안 전체의 절반이 넘는 인구와 광대한 군도에 펼쳐진 영토 덕분에 인도네시아는 아세안의 중심적 위상을 실질적으로 인정받아 왔는데, 공식적 의장국까지 브루나이와 캄보디아를 제치면서 먼저 수임하려 할 만큼 인도네시아의 상황인식은 급박했다. 2015년 ‘아세안공동체’의 역사적인 출범이 목전에 다가왔는데 숙제가 한 참 밀려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당면한 과제를 “People-Centered ASEAN”(국민 중심의 아세안) 형성으로 압축 표현하고 있다. 진정한 공동체를 실현하려면 ‘국가 연합’이 아니라 ‘국민 연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인권 신장과 참여의 제도화가 필요하다는 시각을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이 일찌감치 분명히 하였고, 외무장관 마르띠 나딸레가와도 같은 노선에 입각하여 여러 가지 실행계획을 이번 외무장관회의에서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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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도네시아 외무장관 마르띠(로이터) -


마르띠 외무장관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들을 존중하는 풍토의 조성을 위하여 시급한 당면과제로서 아세안인권위원회(AICHR: ASEAN Intergovernmental Commission on Human Rights)의 내실화를 거론하였다. 2009년에 출범한 아세안인권위원회는 효과적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지만, 아세안인권선언(ASEAN Human Rights Declaration)이 제정되면 합의된 기준을 갖고 체계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면서, 인도네시아정부는 아세안인권선언이 올해 통과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아세안재단(ASEAN Foundation)의 3년 임기 소장에 임명된 마까림 위비소노의 면모 역시 인도네시아의 기획에 부합한다. 위비소노는 유엔의 인권위원회 의장과 경제사회이사회 의장을 역임한 베테랑 외교관으로 국제기구의 인권관련업무 경험을 바탕으로 인도네시아의 아세안 청사진을 실현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아울러 마르띠 장관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이주노동자 권리보호 문제도 중요한 의제로 제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은 송출국의 입장에서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는 수입국의 입장에서 협의에 나서게 될 것이다. 미얀마 인권문제에 대해서도 미국, 캐나다, 유럽연합에게는 별반 효과가 없는 경제제재를 중지하도록 요구하고 미얀마(버마)정부에게는 아웅산 수찌를 포함한 모든 세력의 화해와 국민통합의 과정을 시작하도록 요구한다는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학계, 언론, 시민사회의 의견을 듣고 함께 논의하는 다양한 포럼을 결성함으로써 아세안을 더욱 개방시키자는 의견도 피력하였다.  

 
         


어느 때보다 열의가 높으니 그 귀추가 주목된다. 아세안인권선언은 올 해 제정될 수 있을지, 아세안인권위원회는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물적 인적 지원을 받게 될 것인지, 합의한 인권기준을 위배한 회원국의 처벌까지 가능해 질 것인지, 국제적으로 지탄받는 미얀마 인권 침해문제가 완화될 수 있을 것인지, 이에 따라 아세안의 전통적 운영원리인 내정불간섭원칙은 어느 정도로 약화될 수 있을지, 일종의 ‘인권외교’ 덕분에 인도네시아의 인권수준도 따라서 향상될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한 점이 아주 많다.


그런데 아세안 인권체제 제도화를 위한 인도네시아 정부의 열정은 벌써 냉소적인 반응에 부닥치고 있다. 지역 차원에서나 국내 상황으로나 한계가 뚜렷해 보이기 때문이다. 아세안 회원국들의 정치체제는 다양하다. 미얀마는 군부독재, 베트남과 라오스는 일당지배체제, 브루나이는 술탄왕정체제이다.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는 민주주의 형식을 갖추었지만 정치적 경쟁이 실질적으로 제한되고 있다. 필리핀 민주주의는 최근에 나아지고 있지만 태국의 민주주의는 퇴행하였다. 따라서 일부 회원국들은 아세안의 인권체계를 강화하려는 인도네시아의 노력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을 수 있고 심지어 부당한 간섭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인도네시아가 동남아 최고의 민주주의 수준을 자랑한다 하더라도, 군인들이 파푸아 섬의 민간인들을 고문하여 국제적인 지탄을 받은 최근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여전히 내부적으로 심각한 인권침해가 자행되고 가해자들이 엄벌에 처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인도네시아가 강도 높은 인권기준을 제시할 수 없고 회원국이 인권선언을 위배하더라도 처벌보다는 설득이라는 외교적 방식을 취할 것이라는 예상은 충분한 근거를 지닌다. 그러나 관찰자든 실천가든 공히 흥미진진한 점은 정부 정책과 관료적 언술이 만드는 기회구조에 관한 것이다.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정치적 약속과 실제의 차이는 비판적 개입의 여지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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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카르타의 아세안 사무국 -


동남아 민주주의의 기수 인도네시아가 역내 인권신장을 향한 깃발을 올렸다. 아세안의 지도적 중심국가로서 ‘아세안시민권’을 만들어보겠다는 창대한 기획과 책임 있는 자세에 대해 진심으로 지지와 박수를 보내주자. 그리고 어떻게 진행되는지 열심히 관찰하자. 무엇보다도 이런 호기를 이용하여 아세안 운영이나 회원국의 인권문제에 관한 요구와 해법을 적극적으로 제안하자. 동남아 이웃나라들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염려하는 이들에게 약속과 실제의 차이를 기회로 활용하는 실천적 지혜가 각별히 필요하다 하겠다. 올 해는 아시아 민주연대의 진전에 있어서 중요한 해로 기억될 것이니까.

전제성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부교수)


 * 이 글은 서남포럼 뉴스레터(2011.02.10)에 실린 글입니다.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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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산 수치가 직면한 두 가지 과제

미얀마 총선이 예상대로 군부 쪽 정당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고, 아웅산 수치가 해금되었다. 지난 총선은 2008년 신헌법에 토대를 두고 있다. 민족민주동맹과 국제사회는 이미 2008년 신헌법 처리를 무효라고 주장했기에, 이 신헌법에 근거한 총선을 거부한 것은 일관된 정치노선이었다.
문제는 2008년 신헌법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미얀마 군부는 민족민주동맹의 압승으로 끝난 1990년 5월 선거를 무시했다. 이 때문에 민족민주동맹은 줄곧 1990년 5월 선거 결과에 대한 인정을 요구했다. 미얀마 군부는 모르쇠 전략으로 한치의 양보도 없이, 아웅산 수치를 비롯한 미얀마 민주인사들을 지속적으로 박해했다. 특히 2007년에는 거리에 나선 승려들과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민주주의의 외침을 군홧발로 짓밟은 1988년의 비극이 반복된 것이다.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회원국들은 불간섭주의와 포용을 통한 변화라는 명분을 내걸고 미얀마와 손을 잡았다. 서방은 이를 ‘독재자 클럽’이라는 구태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동남아 국가들의 인권의식의 한계로 받아들였다. 1962년 군부 쿠데타를 계기로 시작된 ‘버마식 사회주의’ 노선을 두고 논란도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1960년대에 주목받던 아프리카 사회주의처럼 식민지 역사로부터 얻은 정신적 외상과 무관하지 않은 비자본주의 실험이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아프리카 사회주의 실험이 그러했듯이 ‘버마식 사회주의’의 고립노선은 정치·경제적으로 파국을 맞았다.

현재 미얀마 군부는 과거 두 개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나는 미얀마를 오랫동안 분할지배해 종족간 반감을 증폭시켰던 제국주의의 교활함이다. 다른 하나는 독립 직후 종족간 내전에 따른 ‘실패 국가’의 경험이다. 물론 이런 해석은 미얀마 군부에 지나치게 관대한 것일 수 있다. 미얀마 군부야말로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또 국가통합이란 이름으로 과거 제국주의 못지않은 잔인한 짓들을 반복해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제사회는 미얀마 군부에 압박을 가했고, 아웅산 수치를 비롯한 미얀마 민주인사들도 헌신적 투쟁을 했다. 그러나 미얀마 군부는 어떠한 균열 조짐도 없이 요지부동의 모습을 보였다. 그렇기에 서방 일각에서는 미얀마에 대한 제재 일변도의 대응이 갖는 효력에 의문을 제기했다. 워낙 고립된 상황에 있던 미얀마라 경제제재의 효과가 미미할뿐더러 오히려 군부의 단합만을 고취했다는 것이다.

7년 만에 해금된 아웅산 수치는 요지부동의 군부를 움직여야 하는 중차대한 과제를 안고 있다. 해금과 동시에 아웅산 수치는 군부와의 대화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대화 제의는 그동안 누차 있었던 것이라 새로운 정치전략으로 보는 것은 속단이다. 하자가 많은 집권 군부세력으로서는 아웅산 수치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극단적으로 그의 자유를 다시 박탈할 수 있다. 그렇기에 아웅산 수치는 미얀마 사회가 활력을 되찾도록 하기 위해서도 자신의 자유를 소중히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 그동안 제기됐던 정치인 아웅산 수치에 대한 다음과 같은 건설적 비판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하나는 군부를 강온파로 분열시키기 위해서도 형식적 대화 제의가 아닌 실질적 대화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웅산 수치의 외국기업들에 대한 ‘투자 유예 요청’은 대화노선과 상충하는 대결노선이었다. 다른 하나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보다 오히려 미얀마의 변화를 유도해낼 수 있는 지렛대를 더 많이 갖게 된 중국, 아세안 회원국들에 좀더 진지하게 다가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포장된 서방 강대국들의 일방주의와, 불간섭주의란 이름으로 포장된 식민주의 경험국들의 국가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인권 패러다임을 아웅산 수치에게 기대해본다.


박은홍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자료제공: 한겨레 2010.12.10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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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프레임 전략적으로 활용해야”

“먹으면서 들으셔도 돼요. 저는 밥 굶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하러 온 사람답게 강의 시작 전부터 청중들의 밥 먹을 권리부터 챙긴다. “인권은 다양한 차원으로 이야기 할 수 있다”는 인권에 대한 정의에서부터 강의 보따리를 풀며 2시간 반 동안 다각도로 아시아인권에 대해 접근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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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참여연대 아시아강좌 강연자 이성훈 한국인권재단 상임이사……

<주요 강의 내용> 

아시아의 어원부터 서구 중심적 시각 투영돼…
‘아시아’란 단어는 서양의 눈으로부터 비롯된다. 아시아는 아시리아와 어원이 같다. 그리스 사람들이 동쪽을 볼 때 그 쪽에서 해가 떠 ‘아시리아’란 이름을 붙였다. 서양의 눈을 통해 아시아의 정체성이 규정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도차이나의 경우 인도와 중국이 합쳐진 말이다. 서구 사람들이 보기에 중국과도 비슷하고 인도와도 비슷해 ‘인도차이나’라 불렀던 것이다. 아시아의 경우 유럽이나 다른나라와 다르게 각기 다른 문화와 역사를 지닌다. 딱 하나 공통점이 있다면 식민지 경험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의식이 많고 정체성이 서구에 의해 왜곡되었다.

엘리트들이 말하는 ‘아시아 가치’
‘아시아가치’는 서구민주주의와 아시아민주주의가 다르다고 인식한다. 아시아는 보통 식민지 경험이 많으므로 다양한 시민의 참여보다 소수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민주주의유형으로 나아가자는 것이 ‘아시아가치’이다. 이것은 주로 엘리트들이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요즘 아시아인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 주로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 아시아가치에 대한 대표적인 논쟁이  Lee Kuan Yew와 김대중 전 대통령 사이에 있었던 논쟁이다. Lee Kuan Yew는 엘리트들을 중심으로 민주주의를 배우는게 훨씬 낫다고 주장했던 반면 김대중은 민주주의와 인권이 같이 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당시에 나온 것이 바로 ‘아시아가치’다.

박정희 모델을 보는 다른 시각 가져
대학에 다닐 때 말레이시아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갑자기 없어졌다. 그 이유를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러했다. 80년대 초반까지 말레이시아는 나라를 근대화 시키려고 했는데 이 때 박정희 모델을 많이 생각했다. 그래서 유학생들을 한국에 많이 보냈다. 그런데 87년 이후 유학생들을 다시 돌아오게 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민주화 항쟁으로 뜨거웠고 그것에 물들까봐 우려했던 것이다. 유학생들은 싱가포르로 보내졌다.

88년에 홍콩에 첫 직장 얻어서 갔고, 그 이후도 계속 해외에 많이 갔다. 86년 피플파워 당시 핀리핀에 있었는데 그 때 특이한 경험을 했다. 당시 학생들이 반미 이야기를 실컷 하고, 코카콜라를 마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박정희대통령을 굉장히 존경한다고 말했다. 그들의 얘기인즉슨 마르코스는 나라를 말아먹었는데 박정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나라가 필리핀만이 아니었다. 이 때 박정희정권에 대해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이것은 87년 말레이시아 학생들이 한국에 왔다가 안돌아온 것과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는 50년 대 이후 경제 발전을 시작했다. 다른 아시아국가도 마찬가지였고 그 중 우리나라보다 더 발전된 나라도 있었다. 하지만 현재 이들 중 대부분의 나라가 아직까지 가난하고, 민주주의와 시민사회 이 둘 다를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한국은 이뤘다. 그래서 밖에서 먹혀들었던 것이다. 5·60년대 핀리핀, 미얀마, 스리랑카는 굉장히 잘 나갔다. 하지만 독재를 겪고 떨어졌다. 하지만 한국은 똑같이 독재를 겪고도 발전했다. 이런 상황들을 생각해보니 그들이 우리나라를 훨씬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싱가포르 민주주의 모델, 한국적 민주주의모델
민주주의 발전 모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싱가포르의 경우 경제적으로는 우리나라보다 더 잘산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데 표현하고 나면 자유가 없어진다. 규제를 받는 것이다. 이 나라는 벌금이 아주 많다는 것이 이를 반영한다. 싱가포르에는 PSP, WP, SDP 이렇게 세 가지 정당이 있다. 그들의 별명은 각기 pay and pay(PAP), why pay(WP), so don't pay(SDP)다. 예전처럼 물리적으로 제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제약을 가한다. 자본주의 방식이다. 이것을 지금의 한국이 배우고 있는 것이다.

필리핀의 경우는 시민사회 노하우가 아주 좋다. 그런데 너무 과잉됐다는 생각이 든다. 국가가 할 일을 시민사회가 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엄청 커지고, 관료화된 것이다. 좋든 싫든 국가와 시장은 전제된다. 이들을 대체할 순 없는 노릇이다.

일본의 경우 시민단체들 간에 서로 잘 모른다. 이들은 전국단위의 시민단체가 없다. 하지만 밑바닥 현장으로 가면 어디가나 조직화되어있다. 시민단체의 개념자체가 다르다. 시민단체보다는 주민단체의 개념에 더 가깝다.  일본의 민주주의는 한국과 다르다. 이들은 전쟁에 져서 서구에서 이식된 것이고, 한국은 투쟁을 통해 쟁취한 것이다.

주요 관심모델은 한국과 싱가포르이다. 많은 아시아국들은 싱가포르모델을 선호한다. 통치자 입장에서 보면 싱가포르가 좋다. 하지만 이들은 표현의 자유가 한정되어 있다. 싱가포르는 학교 토론수업에서 제대로 이야기를 못한다. 한국모델의 경우 굉장히 복잡하고 시끌벅적하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나라들이 한국모델을 따라가는 것을 매우 우려한다. 이들 중 어떤 패러다임으로 갈 것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태국을 보면서 시민사회가 아주 취약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촛불집회 당시 이명박 퇴진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한국은 시민입장에서 선거의 룰은 지켜준다. 또한 국가의 입장에선 총을 들면 망한다는 인식이 있다. 한국 민주주의에는 기본적인 룰이 있다. 하지만 태국은 없다. 그래서 이번과 같은 사태가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한국과 같이 룰이 지켜지는 것은 아시아 국가 사이에서는 거의 없다. 이같이 우리의 경험을 아시아의 경험과 잘 엮어서 생각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시민사회는 복합적으로 연결돼
우리는 너무 쉽게 시민사회에 대해 말하지만 다른 나라에서 사용하는 의미와 너무 다르다. 시민이 된다는 것은 국가를 넘어선다는 것, 국가주의를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외국여행을 했을 때 말은 안 통해도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과 개념은 없는데 한국사람인 사람 중 누가 더 가깝게 느껴지는가. (후자 쪽이 시민사회의 의미가 더 짙다는 의미) 아시아 시민사회의 중층 구조다. ‘지역연대’를 말 할 때 이것들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글로벌 리더십, 국내에서 일하고 나면 해외로 나가라
한국 시민사회의 과제는 우선 내재적 국제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시아를 밖에서 찾아다니지 말고 우리 안에서부터 찾아야 한다. 결혼이주여성, 난민, 이주노동자들을 만나며 아시아를 만나라. 그리고 세계로 나가야 한다. 기업은 세계화가 굉장히 빠르다. 그 다음은 정부다. 그런데 시민사회는 아주 느리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분단이다. 그래도 빨리 탈피해야 한다.

국내에서 일하고 나면 해외로 나가라. 내가 지역(regional)시민단체에서 일할 때 인터뷰를 통해 사람을 선발한다. 그런데 인터뷰 보러 오는 사람 중에 한국사람은 거의 없다. 한국의 경우 시민사회의 사법감시체제가 아주 좋다. 그런데 그같은 좋은 점을 우쭐해 하는 데에서 그치고 그것을 국제적으로 내 보내려 하지 않는다. 국제사회로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한류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임을 위한 행진곡’은 아시아 국가에 거의 번역되어 있다. 이것 역시 한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ODA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현 정부에서 ODA를 2배로 늘렸다. 이것을 현장에 가서 모니터해야 한다.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난개발을 통해 오히려 인권을 침해하는 쪽으로 갈 수 있다.

인권은 모든 것을 수렴한다
인권은 다른 것과 달리 다양한 사회문제와의 상호 연관성 때문에 모든 것을 수렴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인권을 모르고서는 얘기가 안 된다. 인권은 모든 것에 기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에서 인권에 대한 이해가 미약하다. 모든 것을 수렴하는 인권의 프레임을 전략적으로 잘 활용하지 못한다.

올해 아세안 정부 간 인권기구가 만들어진다. 이것은 획기적인 사건이다. 국내에서 인권하면 정치적으로만 이해한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공식 헌장언어다. 이같은 상황에서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인권기구가 만들어 졌다는 것은 굉장히 큰 의미이다. 담론의 수준에서 더 이상 인권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식적인 모임의 언어가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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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의 및 응답

Q ODA 의 전략적 활용에 대한 부분을 듣고 감동했다. 그러나 여전히 현실적인 괴리가 있는듯하다. 어떻게 하면 ODA에 대해 시민단체가 전략적으로 접근하고 활용할 수 있을까.

A 이 정부의 ODA가 있으면 이것을 분배할 때 NGO를 통해 분배가 된다. 물론 ODA원조를 직접적으로 실행하는 단체들을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얘기를 못한다. 하지만 받지 않는 시민단체에서는 많이 말한다. 한국정부가 ODA를 하는 목적은 자원외교와 기업외교를 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외교의 한 방편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외교의 목적에 인권이 들어간다.


Q 인권이라는 개념은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하셨다. 나의 시각에서는 인권하면 정치적 자유 보장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 같다. 아세안에서 인권은 어떤 의미인가?

A 아세안에서는 인권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 1967년 아세안이 만들어졌다. 2007년을 전후해서 아세안을 둘러싸고 세계화의 흐름이 일었다. 아세안이 하나로 뭉쳐서 FTA를 성사시키려 했으나 못 했다. 그 이유가 국제법적 지위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 인권 문제가 걸렸다. 그 당시 유럽에서는 국제법적 지위를 얻기 위해 자꾸 인권 관련 조항을 넣으라고 했고, 이에 FTA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권 조항을 넣은 것이다. 넣고 싶어서 넣은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넣은 것이다. 유럽연합에 들어가기 위해 사형제를 폐지해야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당시에 시민사회가 둘로 갈라졌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안의 인권개념에 대해 한 편 에서는 반세계화 단체는 이 자체를 부정했고, 다른 한 편에서는 어쨌든 인권이 들어갔으니 그걸로 뭐든 할 수 있지 않느냐는 입장이었다. 아세안에서 생각하는 인권이라는 것은 유럽에서 말하는 인권을 갖다 놓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얻은 것이 있다면 ‘인권’이란 단어가 공식적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인권’이란 단어 안에 진보성이 있는 것이다.


작성: 김지나(아시아강좌 수강자)


네번째 아시아 강좌는
국제개발협력, 아시아의 눈으로 바라보기 입니다.
현지에서 국제개발협력 분야에 다년간의 경험을 가지고 있으신 송진호 YMCA 기획실장을 모시고 아시아의 눈으로 바라본 개발협력에 대해 들어보는 자리를 마련합니다.

개별 강좌 참여가 가능하오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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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는 5/19~5/20 동안 광주 518기념재단이 주관하는 아시아 포럼에서 국제워크숍 <아시아민주주의: 공고화인가 혹은 위기인가>를 100명의 국내외 활동가들을 모아 진행했습니다. 이번 후기는 5월 20일 있었던 워크숍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광주아시아포럼 주요 내용 요약]


아시아민주주의: 공고화인가 혹은 위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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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2의 발제자인 Ms.Joy Chavez, Mr.Henri Tiphagne, Mr.Sinapan Samydorai(왼쪽부터)


세션 2 지역과 국제 차원에서의 민주적 통제를 위한 아시아 시민사회의 활동
사회: Mr. Adilur Rahman Khan, Secretary, Odhikar 창립자

[발제]
아세안과 시민사회의 대응) 아세안과 인권 ASEAN and Human Rights
Mr. Sinapan Samydorai, SAPA WG on ASEAN
동남아시아의 인권문제와 이주노동자의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아세안헌장으로 인권표준을 설정하고 아세안 정부간 인권위원회라는 인권기구를 통해 인권증진에 초점을 맞추어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남아시아 지역협력연합과 개발협력
Mr. Henri Tiphagne, Executive Director, People’s Watch 상임이사
네팔,방글라데시,인도네시아,파키스탄,스리랑카와 같은 국가들은 많은 부분에 있어 지역적 협력(regional cooperation)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인도네사아로부터 독립한 동티모르에서는 개발과 민주화를 위해 지역 시민사회 수준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미쳤었다.

지구적 경제위기가 아시아의 민주주의에 미친 영향
Ms. Joy Chavez, Senior Research Associate, Focus on the Global South, 조정관
97년 경제위기가 아시아지역에 있은 이후 국제기구를 통해 경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실현은 국가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며 한 기구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토론]
• 지역기구에서의 시민사회의 역할
Mr. Yap Swee Seng, FORUM-ASIA 사무처장
남아시아에서는 시민사회 연대의 특별한 경험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한 동티모르의 경우, 국가의 영역을 넘어 전 시민사회 차원에서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경험이 지역적 차원에서 스필오버(spill-over) 효과로 번저 나가길 기대한다. 광주와 타이완의 민주화 경험도 마찬가지로 번저나갈 수 있을 것이다.

• 글로벌 시대의 시민 사회의 도전
Mr. Kinhide Mushakoji, ARENA 멤버
민주주의를 이야기 할 때, 한 국가의 국민이나 시민들을 중심으로 한 국가적 제도주의를 넘어서는 글로벌 시대의 시민을 대상으로 한 '신제도주의'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이는 지구화된 시장경제와 최근의 지구적인 경제위기, 이민자들의 이동과 착취받는 이민자들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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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3 행정부 감시, 사법부 감시, 입법부 감시 발제 모습(왼쪽부터)


세션 3. 국내에서의 민주주의 신장을 위한 아시아 시민 사회의 노력 – 분과 토론

[행정부 감시]
국가 수준에서 민주주의를 신장시키는 아시아 시민사회의 경험: 방글라데시 사례 연구
Mr. Adilur Rahman Khan, Secretary, Odhikar
방글라데시는 1991년 이후로 민주적인 정부 형태와 문화를 유지하는데 거듭 실패해왔다. 그러나 식민해방 이후 방글라데시 국민들이 벌여온 투쟁을 감안할 때 정치는 이들 국민의식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행정부가 사법부에 가하는 정치 이용과 언론기관 장악은 민주주의를 신장시키기 위해 방글라데시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민주주의를 의미있게 하기: 행정부 통제-인도네시아에서 얻는 교훈
Mr. Danang Widoyoko, Coordinator, Indonesian Corruption Watch
인도네시아는 광범위한 부패가 큰 문제이다. 선거자금, 정부예산과 입찰, 카르텔화 된 정치구조등은 부패의 뿌리이자 원인이다. 특히 인도네시아 정당정치는 당원헌금과 같은 자금자족의 전통을 세우는데 실패했다. 이에 대해 시민사회는 부패.사기 사건에 대한 탐사보고와 공공서비스 분야에 대한 감시를 해왔다.


[사법부 감시]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국민을 위한 사법개혁'이라는 노정
한상희교수,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건국대 법대 
1994년 설립된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는 '국민을 위한 사법개혁'이라는 방향을 설정하고 일상적인 권력감시활동으로서 모니터링을 하고, 사법제도개혁 논의기구에 참여하였다. 또한 검찰개혁운동과 부패 및 권력남용 법조인에 대한 고발운동을 진행해 왔다.


[입법부 감시]
참여연대 의정감시운동 소개
이지현 팀장,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는 국회운영 및 의원감시활동, 국회의원 총선거에서의 낙천낙선운동, 그리고 정치개혁입법을 위한 운동으로 정치자금법.국회법.공직선거법.정당법 등 정치제도 개혁운동, 선거 시기 유권자 운동을 진행해 왔다. 정치개혁을 위해 정치인들이 자신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둔 낡은 정치제도를 개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증거에 기초한 사회적 감사(監査)의 강화
Charas Suwanwela 교수, 태국 출라롱콘 대학
최근 태국에서는 공공정책과 부패, 권력남용을 감시하는 사회단체와 시민단체가 늘어가고 있다. 특히 부패에 대한 사회적 감사가 성공적이었던 4가지 사례는 <모기박멸 약제 건, 끌롱 단 하수처리장 건, 의약품 및 의료장비 구매 건, 도로교통 뇌물 건>등이 있다. 앞으로 사회적 감사의 강화를 위해서 정치중립성을 지향하고, 자료공개에 대한 법적 보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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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션 4에서의 분과보고 발표



세션 4 국내에서의 민주주의 신장을 위한 아시아 시민 사회의 노력
사회: 남부원,  광주 YMCA 사무총장

[각 분과보고]
최경희, 한국 동남아연구소 연구원
한 국가가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 사회 내에서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이 얼마나 존재하는가가 중요한 문제이다. 민주주의는 다층위로 진행되는 것이므로, 동남아 상층부는 얼마나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며 동시에 동남아는 대중적 민주주의를 집행하는데 취약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Loh Kok Wah Francis, ARENA
아시아 민주주의에 있어서 시민중심의 정치, 지속가능한 민주주의의 발전, 헌법은 중요한 개념이다. 또한 정부에 대해 투명성, 책임성을 물을 수 있는 시민의 행동이 필요하며, 다면적 컨트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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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5에서의 공동사회를 맡은 Mr. Yap Swee Seng과 이태호협동사무처장




세션 5 전략 및 향후 계획 논의

Mr. Yap Swee Seng, FORUM-ASIA
우리는 어떻게 아시아 지역의 민주주의를 위해 서로에게 지지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시민사회의 발판을 통해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위해 협력해야 한다. 또한 동시에 지역사회 중심으로 움직여야 한다.

이태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때론 안보와 민주주의가 충돌하고, 삼권에 대해서는 책임성을 묻기 어려운 현실이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후퇴를 막고, 부패와 투명성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제도와 의사소통이 필요하다.외부에서 도입된 제도가 우리의 공동체에 유효한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제도들이 연관성을 가지고 조화롭게 발전하도록 하기 위한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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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글은 태국언론에 보도된 버마 전문 저널리스트
PAVIN CHACHAVALPONGPUN의 칼럼입니다. 이 글을 통해 ASEAN과 버마와의 관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1997년 아세안(ASEAN,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의 멤버가 된 이후, 버마군부는 아세안으로부터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버마를 통치해 왔다. 최근 군부는 국제사회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버마 민주세력(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의 지도자 아웅 산 수지(Daw Aung San Suu Kyi)의 재판을 준비하고 있다.

2008년 5월 초, 버마 이라와디 지역은 나르기스 태풍 (Cyclone Nargis)으로 인해 140,000명의 사망자와 2,000,000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재난 초기 버마군부는 해외 원조를 받기위해 국경을 열어야 하는 상황임에도 문을 열지 않았다. 이유는 서방국가가 이 기회를 이용해 내정 간섭하고 버마에 군인을 보내는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군부의 지나친 피해망상과 국제사회에 대한 두려움을 보여준다. 아세안의 지도자인 수린 사무총장은 버마군부가 해외원조를 수용하도록 설득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수린 사무총장은 나에게 태풍 나르기스 이후 버마 복구를 위해 노력한 아세안의 역할을 기록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나르기스로 인해 피해 입은 곳을 방문하기위해 방콕, 싱가폴, 그리고 랑군 등으로 동분서주했다. 물에 떠다니는 시체들의 모습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다. 아세안은 버마군부에게 인도주의적인 원조의 중요성과 권력의 역할을 설명했다. 당시 아세안은 버마를 위해 의미있는 일을 했다고 믿었고, 버마가 세계를 향해 문을 여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여겼다. 

그러나 버마 내에서 고조되는 불만과 아웅 산 수지의 재판은 버마가 문을 열고 국제사회의 요구에 순응할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을 깼다. 군부는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수지 여사를 감금하고 있다. 현재 군부는 NLD의 참여 없이 내년 선거를 진행할 듯하다. 결론은 아세안이 태풍 나르기스 사태를 통해 버마의 문호를 여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으나 그 과정은 물리적이고 일시적이었을 뿐이다. 지금까지 아세안은 버마군부를 진정으로 개방하지 못했다.

버마의 국경은 열려있지만, 버마 지도자들은 아직도 왜 굳게 닫혀있는가?

첫째, 버마군부는 불안 속에 살고 있다. 군부의 유일한 생존도구는 억압과 협박이다. 권력을 키우기 위해, 그들은 군부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과 외부 세상을 악의 축으로 여긴다. 버마의 지도자들은 민주주의를 따르는 것처럼 가장했지만, 그들은 민주주의를 거부했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사악한 단어일 뿐이다. 그들은 민주주의는 버마의 정치문화와 생활양식에 맞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이 모든 해석은 국내 최고 권력인 버마군부가 만든것이다. 아세안과 국제사회는 버마 의회의 성향을 바꾸는데 실패했다. 가장 큰 이유는 성향을 바꾸기 위해서 권력을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정치권력은 변화하기 어렵다. 방콕의 엘리트들은 그들이 탁신의 위기를 대면했듯이, 권력을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달아야 한다. 그들 또한 막힌 생각을 가지고 있다.

둘째, 버마군부가 태풍 나르기스 생존자들의 행복을 위해 해외 기부자들에게 문호를 열고 해외원조를 수용했다고 이해하는 것은 큰 오판이다. 아세안은 태풍 나르기스이후 버마군부가 타협했던 경험을 갖고 버마 군부의 중심부에 접근할 수 있기를 바랬다. 그러나 버마군부에게 고통 받고 있는 태풍 나르기스 생존자를 돕는 것과 아웅 산 수지여사를 해방시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수지여사는 버마정권에겐 위협의 대상이다. 그녀는 민주주의의 아이콘이자 합법성의 기호이기 때문이다. 1997년 버마는 자유로운 정치적 사상을 허용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아세안에 전했다. 이 메시지는 태풍 나르기스의 재난 이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셋째, 버마 엘리트들의 닫힌 마음은 아세안 헌장을 시험하고 있다. 버마군부는 아세안 헌장에 멤버 국가의 잘못에 아세안이 개입하고 규제하는 조항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현재 아세안 헌장에는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규정하는 규범이 만들어지고 인권기구가 준비되고 있는 상황이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아세안이 어떻게 버마의 정치위기를, 특히 버마군부의 마음을 열 것인가이다. 푸켓에서 태풍 나르기스 회복을 위해 노력한 아세안에 대한 책을 펴내는 것도 뜻 깊은 일이다. 출판은 아시아지역포럼(ARF)에서 현재 버마에 관한 협의를 하기 위해 적합한 것이었다. 아세안 낙관론자들은 이같은 방법이 버마 정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아세안이 버마와 세계를 연결시키는 브로커 역할로서 말이다.

낙관적인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버마의 정치를 지난 20년 동안 지켜봐왔고, 내가 그 나라의 복잡한 상황을 고찰하듯 현실적인 것이 보다 합리적인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버마의 오랫된 위기는 군부가 고의적으로 그들의 마음을 여는 열쇠를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웃해 있는 태국의 정치 혼란은 버마군부가 민주주의를 더욱 경계하게 할 뿐이다.

아세안이 버마의 변화를 후원하는 것은 아주 바람직하다. 수린 사무총장은, 아주 좁다 하더라도, 버마와 세계를 연결하는 커뮤니케이션의 길을 여는 주목할만한 일을 해냈다. 그러나  태풍 나르기스는 대참사의 에피소드일 뿐이다. 버마와 버마 국민들에게 태풍 나르기스보다도 파괴적인 진정한 재난은, 버마에서 계속되고 있는 군사통치이다.

번역 및 정리: 송수현 국제연대위원회 자원활동가

[원문참고]
http://www.bangkokpost.com/opinion/opinion/20640/아세안-seeks-to-unchain-the-mind-of-burmese-junta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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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에서 관전한 대통령 선거


지난 7월 8일, 인도네시아에서 대통령 선거가 평화적으로 수행되었다. 독재자 수하르토가 1998년에 물러나면서 시작된 인도네시아의 민주화는 1999년의 자유총선과 2004년 사상 최초의 대통령 직접선거를 치르면서 벅찬 과제를 잘 풀어왔고 이번의 대통령 직접선거도 인도네시아의 선거민주주의를 한 층 더 확고한 기반 위에 올려놓는 역사적 전진으로 기록될 것이다.

세계에서 인도, 미국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규모의 민주주의 체제를 운영하는 나라에서 정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선거인 만큼 각종 선거 관련 수치가 어마어마하다. 2억3200만 인구 중에서 등록된 유권자가 1억7600만 명 이상이고 33개 주 471개 시군에 설치된 45만여 개의 투표소(TPS)에서, 일부 악천후 지역을 제외하고, 아침 8시부터 오후 1시까지 일시에 추진되었으며, 투표율은 등록유권자의 72.5% 정도일 것으로 추산되었다. 정말 '거대한' 선택이라 부를 수 있다.

규모가 큰 만큼 문제가 없을 수 없다. 2004년 선거 때 어느 선거관리위원의 말처럼 "문제가 없으면 인도네시아가 아니다". 그렇지만 2004년 선거 때보다 올 해 선거의 관리가 허술하였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려울 것 같다. 선거 유세 막바지에 야당후보가 유권자 등록의 허술함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선거절차의 정당성에 관한 의구심과 함께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측의 폭동이 우려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선거위원회(KPU)와 헌법재판소(MK)가 미등록유권자들도 투표소에서 신분증을 제시하면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대안을 신속히 제시하자 문제를 삼던 후보자들도 이를 즉각 수용하였고, 경찰은 소요혐의자에 대하여 경고 사격 없이 직접 발포 할 수 있는 '1호경계령'을 발동하여, 결국 선거는 평온하게 완수될 수 있었다. 물론 앞으로 한 달 정도 거치면서 선거위원회(KPU)가 최종집계 결과를 발표하고 헌법재판소(MK)가 이를 인준할 때까지 선거관리에 관한 논란은 계속될 것이고 그 결과는 다음 선거의 관리체계 발전을 위한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민주주의 축제'(pesta demokrasi)

인도네시아에서 선거는 '민주주의 축제'로 불린다. 폭동 우려와 경계령 발동에도 불구하고 자카르타 지역에서 선거는 평온하고 즐겁게 이루어졌다. 투표소는 활기가 넘치는 주민들의 회합공간이 된다. 투표소는 마을 주민들에 의해 마을 안에 세워지며 줄이나 휘장으로 안팎이 구분되는 열린 구조물이다. 이렇게 투명한 투표소에서 개표까지 진행된다. 수백명 정도의 유권자를 지닌 소규모 투표소들이기 때문에 이 기초 단위의 개표는 한 두 시간 정도면 완료된다. 마을의 투표관리원이 후보자들의 사진과 이름이 담긴 큰 투표용지를 하나씩 펼쳐 보이면서 선택된 후보의 번호를 외치면 또 다른 임원이 벽에 걸린 현황판에 매직펜으로 표시를 한다. 두 후보 이상을 체크하거나 한 후보에게 두 번 체크한 이상한 표가 나오면 관리위원들과 후보별 참관인들이 모여서 확인하고 무효표로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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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표. ⓒ전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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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표. ⓒ전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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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 ⓒ전제성

우리네 반장 선거 같은 개표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마을 사람들에게 큰 기쁨을 준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후보의 표가 나오면 환호하고 박수를 친다. 아이들도 어른들을 따라한다. 아이들은 각 번호의 후보들 이름을 맞추는 놀이를 하기도 한다. 이렇게 투표소는 정치와 민주주의에 관한 조기교육 현장이 된다. 외국인이 구경 오면 마을 사람들은 더욱 신이 난다. 자신들이 누구를 지지하고 왜 그런지에 관하여 열심히 설명하고 한국의 선거제도나 정치에 대해 묻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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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표를 즐기는 주민들. 지지후보의 표가 검표되자 환호하며 어른들이 박수를 친다. ⓒ전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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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호하는 아이들. ⓒ전제성

안정 속의 개혁을 지지

'민주주의 축제'를 통하여 인도네시아 유권자의 과반수 이상은 현 대통령의 재집권을 지지하였다. 인도네시아의 대통령은 5년 임기로 중임이 가능하며 부통령 후보와 함께 출마해야 한다. 2004년에 결선투표까지 거치며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던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Susilo Bambang Yudhoyono)는 이번에는 경제각료 출신의 부디오노(Boediono)를 러닝메이트로 삼아 출마하였는데, 6개 기관의 투표소 샘플 조사(quick count)에 따르면 60% 정도의 지지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과반수 이상을 득표한 후보가 없을 경우 1위와 2위 후보팀이 결선을 치러야 하는 데, 오차가 있겠지만 유도요노 팀이 과반수를 무난히 넘길 것으로 예상되므로 결선투표 없이 재선이 확정될 듯하다. 따라서 3위에 처한 현부통령 유숩 깔라(Yusuf Kalla) 팀은 물론이고 2위에 오른 전 대통령 메가와티(Megawati Soekarnopurti) 팀에게도 결선 투표를 통한 역전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 같다.

현 대통령에 대한 압도적인 지지를 통하여 인도네시아 유권자의 다수는 안정 속의 전진을 선택하였다. 지난 5년간 다방면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가 큰 허물없이 정치와 경제를 안정적으로 이끌었기 때문에 유권자들은 유도요노에게 5년의 기회를 더 주는 쪽으로 기울었다. 유도요노는 아체의 분리주의 세력과 평화협상을 체결하고, 부패한 전직고위관료들을 구속시키고, 세계적인 경제위기속에서도 경기회복국면을 유지했다는 대통령 재임 중 업적을 근거로 평화, 청렴, 안정의 지속을 호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신중하고 정중한 인성이 잘 돋보이는 유세와 TV토론을 전개하였다.

유도요노-부디오노 팀은 유권자들의 최대 관심사인 경제 문제에서 큰 강점을 보였다. 유도요노는 장군출신이지만 야전사령관이 아니라 주로 행정 정보 업무를 책임졌던 '가방끈이 긴' 장군이었고 보고르농대에서 농경제학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더구나 유도요노는 재무부장관과 중앙은행총재 등 경제 관련 요직을 두루 거친 경제학박사 부디오노를 부통령으로 지명함으로써 경제 정책에 관한 유세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특히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은 유권자들이 유도요노 지지표가 검표될 때마다 "무상교육"이라고 외칠 정도로 매력적인 약속으로 제시되었다.

유도요노는 자신의 정당 민주당(PD)의 후보였지만 부디오노는 특정 정당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 정당 배경이 없는 부통령 지명은 인도네시아 선거정치의 맥락에서 볼 때 특이한 선택이었다. 민주화 이후의 정부들은 서로 다른 정당 출신의 대통령과 부통령의 정당간 연합형식의 정부수반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디오노를 부통령으로 삼은 것은 유도요노의 적실한 승부수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정당간 연합형식의 정부수반은 대통령과 부통령의 갈등을 표출하곤 했는데 지금의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부통령 유숩 깔라는 골까르당(Golkar) 의장으로서 빈번한 독자행보를 취했고 종국에는 대선에 따로 출마하고 말았다. 따라서 정당배경이 없는 부디오노의 부통령선임은 전문적 경제공약의 우위선점에 유리했을 뿐만 아니라 행정전반에 대한 유도요노 리더십의 일관된 관철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어서 다른 팀보다 '강한 정부'에 대한 희구를 충족시킬 수 있고 유도요노의 인기가 굴절 없이 그대로 득표로 연결될 수 있게 하는 비결이었다.

특전사령관의 '민중주의'도, 토착자본가의 '쾌속열정'도 거부

반면에 전 대통령 메가와띠는 2004년 대선에 출마했다가 유도요노에게 패배한 바 있어 신선한 후보가 아니었지만 민주투쟁당(PDIP)은 그녀를 대선 후보로 다시 옹립하였고, 신생 대인도네시아운동당(Gerindra)의 쁘라보오 수비안또(Prabowo Subianto)와 연대함으로써 '새로운 피'를 수혈하였다. 그러나 민주화의 상징인 메가와띠가 수하르토의 사위였으며 민주화에 적대적이었던 특전단 사령관을 지낸 바 있는 쁘라보오와 연대한 것은 너무 지나친 정당연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다수의 정당들이 유도요노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연대할 상대가 적었기 때문이라지만, 정치학자 도디(Dodi Ambardi)의 말처럼, 다음 대선에서 쁘라보오가 메가와띠의 지지를 받아 민주투쟁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은 민주투쟁당의 선명성을 갉아먹었을 것이다. 메가와띠-쁘라보오 팀은 유세연단을 볏짚으로 장식할 정도로 농업을 강조하고 외세가 장악한 천연자원 개발권을 되찾아오자며 강력한 민족주의와 민중 지향 경제 정책을 전면에 내세우는 선동적인 야성을 막판까지 불태웠지만 결국 패하고 말았다.

한편 현 부통령이자 거대정당 골까르(Golkar) 의장 유숩 깔라는 군총사령관 출신의 하누라당(Hanura) 의장 위란또(Wiranto)를 부통령으로 지명하고, 자본가 출신답게 "빠를수록 좋다"(lebih cepat, lebih baik)는 슬로건으로 정력적인 캠페인을 펼쳤으나 가장 낮은 지지를 받았다. 깔라는 현 정권의 업적을 계승하면서도 그 한계를 적절히 비판하였고 유세기간중의 TV토론에서도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사업가적 열정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크게 약진할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결과는 전혀 아니었다. 깔라가 술라웨시 태생으로 주도 자바 출신이 아니라서 적은 지지를 받은 탓도 있겠지만, 내가 만난 사람들은 그가 기업인 출신이라는 점을 더욱 우려하였다. 여러 계급계층과 지역의 다원적 이해관계를 복합적으로 고려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밀어붙이는 식으로 정책을 구사할 것을 우려했고, '토착기업인'을 육성하겠다고 외치지만 실제로는 가족과 측근 기업들의 이익을 챙기는데 권력을 사용할 것이라고 걱정하였다. 심지어 "그가 대통령이 되면 그 집의 가정부마저도 기업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인권 운동도 작은 승리를?

이번 선거는 인권 운동 진영에도 작은 승리를 안겨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의 인권운동은 소규모의 비정부기구들(NGO)이 이끌어왔고 전선형태의 대규모 사회운동체를 결성하거나 그들을 대표할만한 정치가를 배출하지 못했다. 이번 대선에 출마한 세 팀이 모두 장군들을 후보로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보면 민주화 11년간 인권 운동의 노력이 무슨 업적이 달성했는지 의구심이 생길만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권 운동 단체들은 온건한 형태의 '낙선 운동'을 전개하였다. 실종자및폭력피해자대책위원회(KontraS)의 조사국장 빠빵(Papang)은 "인권침해범을 뽑지 말자"는 슬로건을 내걸었다면서,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이었다고 자평했다.

메가와띠는 대통령 재임기에 아체지역의 여성과 아동의 생명권을 위협하는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쁘라보오는 수하르토 말기에 특전단 사령관으로서 당시 자행된 반정부활동가 납치실종사건과 1998년 5월 반화인 집단폭력의 배후로 지목된 바 있고, 위란또는 분리독립을 결정한 동티모르 주민선거 직후에 친인도네시아 민병대가 자행한 폭력행위에 책임이 있다고 지목받고 있다. 인권 운동 단체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기억하자는 "망각에 대한 저항" 전시회와 토론회를 개최함으로써 선거 국면에 관여하는 실천 활동을 전개하였다. 심각한 인권침해 혐의를 받는 전직 장성들이 이번 선거에서 뽑히지 않았으니 인권운동가들의 바람도 결국 실현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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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각에 대한 저항 전시회. ⓒ전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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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회를 관람하는 필자. ⓒ전제성

패자의 길?

민중주의나 경제민족주의 슬로건을 내걸었던 후보들이 패배함으로써 앞으로 인도네시아의 경제정책 기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들을 비롯한 외국인 투자자들에게는 희소식일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한인사회는 유도요노의 장인이 한국 초대대사를 지냈다는 인연으로 오래 전부터 유도요노에 대한 호감을 지녀왔다. 그러나 메가와띠 진영에서 계약직 및 외주노동에 대한 규제를 강하게 요구했고 유도요노의 개방적인 경제정책이 '신자유주의적'이라는 비판을 제기하였고, 깔라 측에서 경제성장을 위해 자본친화적인 정책의 신속한 실현이 필요하다는 비판을 제기한 바 있어서 이런 좌우의 비판을 어떻게 경제정책에 반영할 수 있을지는 의문으로 남아있다.

한 편 정당정치와 정부-의회 관계에서는 약간의 변화가 발생할 수도 있다. 특히 패주한 골까르당이 야당의 길을 갈 것인지 여부가 관심을 끈다. 민주투쟁당은 이미 유도요노 정권 하에서 야당의 길을 일찍이 선언했지만, 수하르토 시대부터 여당 노릇을 해 온 골까르당은 현 정권에도 연립으로 참여했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의 정당정치는 '카르텔'이라고 불릴 만큼 선거 이후에 대다수의 정당이 여당이 되는 일종의 '대연정'의 정치를 펼쳐왔다. 패배한 정당은 자동적으로 야당이 되는 것이 아니라 향배를 정하기 위한 고뇌의 과정을 거친다. 30여년의 역사와 광대한 조직을 자랑하는 골까르가 민주투쟁당처럼 야당의 길을 택한다면 의회의 정부견제력은 지금보다 훨씬 막강해질 것이다. 상대적으로 유도요노 팀은 5년 동안 급성장한 신흥 민주당과 다양한 군소정당들의 지지를 받는 일종의 '무지개연립' 상태이다. 물론 패자들의 일부 분파들이 집권세력의 편으로 넘어갈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대선 패배 이후 골까르의 위상설정은 인도네시아의 정당정치의 향배와 정부-의회 관계를 재편하는 중요한 변수로서 흥미롭게 지켜볼 만한 사안이다.

따져봐야 할 것이 많고, 미흡하고 아쉬운 점도 많지만, 이번 선거가 인도네시아 국민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언급할 만하다. 원심력이 강한 세계최대의 군도국가에서 적도하의 자연적 장애들도 극복하고 거대한 규모의 선거를 큰 분쟁과 사고 없이 치러냈다는 사실은 인도네시아 국민들의 민주주의 체제와 제도에 대한 자긍심과 신뢰성을 높이는데 기여하였을 것이다. 나아가 인도네시아의 선거는 초국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번 선거의 성공을 통하여 지난 5년이 그랬듯이 앞으로도 인도네시아는 아세안(ASEAN) 역내 인권신장과 인간안보의 증진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동남아 민주주의의 기수로서 역할을 한 층 강화할 것이며, 이슬람과 민주주의 접합의 세계적인 모범으로서 계속 회자될 것이다.

전제성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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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이상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만 얘기할 순 없다

지난 2월 23일 아시아에서 개최되는 많은 국제 회의중 유일하게 아시아 애드버커시(advocacy) 활동가들이 조직해서 만든 모임인 Solidarity For Asian People's Adcocacy(이하 SAPA)에 참석했다. 2008년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는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초국가적인 이슈를 국내에 소개하고 티베트의 평화 및 버마 민주화를 위한 연대 활동을 했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와 한국의 지리적 거리만큼, 뜨거웠던 한국의 촛불 거리에서 아시아는 아직 먼 나라 이야기였다. 아시아 활동가들을 만난다면 그 거리감을 좁힐 방법들을 찾을 수 있을까? 한국 사회에서 아시아 시민사회의 연대활동을 직접적으로 접하기는 쉽지 않은지라 기대감을 가지고 방콕행 비행기에 올랐다.

SAPA 는 2006년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 등 30개의 동남아시아 시민사회·인권 애드버커시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당시 동남아시아는 아세안(ASEAN)을 중심으로 국가간 협력과 교류가 확대되어 가는 시기였다. 이러한 정부간 교류가 활발해지자 아세안 가입 국가들의 시민사회들은 더욱 활발한 연대와 협력을 모색하게 되었다. 따라서 아세안지역 인권, 노동, 평화, 이주노동 분야에서 애드버커시 활동을 하는 활동가들은 자발적으로 모여 정보를 교류하면서 스스로의 역량을 키우는 자리로 네트워크를 활용했다.

현재 SAPA는 동북아시아를 포함해 아시아지역 60여개 비정부기구(NGO)의 100여 명의 시민사회 활동가들로 구성된 가장 큰 아시아 시민활동가 네트워크로 성장했다. 올해 3회를 맞는 SAPA는 아시아 각국의 지역 이슈를 논의하고 공동의 의제와 애드버커시 전략을 모색하는 단계에 있다. 내가 참석한 이번 모임은 SAPA의 회원단체 뿐만 아니라 아시아 시민사회활동가들에게 열린 자리로서 2009년 SAPA가 다룰 의제와 전략을 논하는 자리였다.

최근 아세안 시민사회의 핫이슈는 아세안에 인권 기구(Human Right Body)를 신설하는 것이다. 인권기구 설립은 2007년 아세안 헌장에 언급되어 있고 아세안 국가간에도 설립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 과정에 시민사회는 인권기구 설립을 위해 아세안의 논의 과정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SAPA의 아세안(ASEAN)과 남아시아(South Asia) 워킹그룹은 아세안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큰 축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아세안에 시민사회의 공동의 개입전략을 찾고자 열띤 논쟁이 펼쳤다.

반면, 몽골, 중국, 한국, 일본, 대만으로 구성된 동북아시아 워킹그룹(Working Group on North East Asia)은 각 시민사회의 공동의 의제를 찾는 것부터 논의가 시작됐다. 동북아시아 시민단체의 경우는 아세안과는 달리 SAPA 모임에 참여하는 NGO 단체도 적었을 뿐만 아니라 네트워크도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올해는 약 10개의 시민단체가 모여 각 나라별 주요 이슈를 소개했다. 한국은 최근 표현의 자유 침해, 자유무역협정(FTA) 등 통상 무역문제를 제기하고 몽골은 황사와 같은 환경 문제와 여성의 인권 침해 문제를 논했다. 중국은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를 주요하게 제기했으며 표현의 자유 침해 문제에 대한 인식은 적어 보이기까지 했다.

몽골과 중국은 이주민을 송출하는 국가이고 일본과 한국은 이주민을 주로 수입하는 국가이기 때문에 이주민 문제를 접근하는 방향이 달라 공통점을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논의가 진전될수록 서로의 문제를 발견하고 문제간의 연결 고리를 파악해 가는 시간이었다. 동북아시아 시민사회의 연대 활동은 서로의 다른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고 정보를 교류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때라고 여겨졌다.

아시아 시민사회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SAPA는 효율적인 애드버커시 활동전략을 공유한다. 올해는 유엔 애드버커시 활동을 주요한 전략으로 소개했다. 대부분 독재정권의 성격이 강한 아세안 국가들은 국가인권위원회가 있어도 재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이 다반사이다. 아세안도 각 회원 국가간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운영이 되다보니 아세안 시민사회가 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활동을 국내에서 하기에는 운신의 폭이 매우 좁다. 이러한 현실에서 대부분의 아세안 인권 활동가들은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를 활용하여 애드버커시 활동을 하거나 서방세계의 국제 인권단체들의 지지를 받아 자국의 변화를 꾀하는 우회적 방법을 쓰고 있다. 반면 한국은 1987년 민주화를 국내에서 이룬 경험을 가지고 있어서 시민·사회운동의 역량이 강한 편으로 재정과 역량이 많이 투여되는 국제 애드버커시 활동은 상대적으로 소홀히해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한 면에서 서방세계의 물적, 인적지원을 쉽게 받을 수 있는 아세안 지역이 한국보다는 국제연대를 하는 토대가  훨씬 풍부하고 다양했다.

한국의 인권 현실이 한해가 다르게 후퇴되어 감을 개탄하고 있지만 SAPA의 논의를 살펴보면 한국이 더 이상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만을 이야기할 위치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아세안 시민사회는 한국의 이주민 정책방향이 각 송출국인 아시아 국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한국 시민사회의 활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또한 내재적으로 민주화를 이룬 한국의 시민사회진영이 성공적으로 수행해 왔던 성과들을 그들과 논하고 아시아 시민사회의 담론과 역량을 넓히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기대했다.

한국 정부도 속내는 다를지라도 '국제사회 기여외교'를 이야기 하는데 시민사회 진영은 현실적으로 어느 지점에 서있는지 짚어보게 된다. 한국 시민사회 내부에서 아시아의 인권과 민주화, 아시아 담론과 전략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논하고 있는지. 아시아 지역차원에서 한국 시민사회의 역할을 얼마나 심도 있게 고민했는지, 오히려 아시아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답보상태에 있었던 것은 아닌지. 현실적인 한계라는 핑계로 아시아연대 활동을 소홀하지는 않았는지 여러 질문이 떠오른다. 최소한 활동가인 내가 어느 정도 애정을 가지고 아시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시간이었다.

차은하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간사

참여연대와 경희대 인류사회재건연구원은 오는 26일부터 11월까지 매달 1회, 총 8회에 걸쳐 아시아인의 생존과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초국가적 문제를 논하는 '아시아 포럼'을 개최한다.

인간 안보, 해양 테러리즘, 난민, 탈북 여성, 에너지, 식량 위기 등 다양한 문제가 논의될 예정이며, 이번 행사를 후원하는 <프레시안>과 참여연대 홈페이지를 통해 발제문이 소개된다.

포럼의 구체적인 일정은 다음과 같다.

2009년 연속기획 아시아 포럼 <국경, 아시아, 시민사회>

1회: 초국가적 인간 안보 문제와 아시아
발제: 이재현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일시: 2009년 3월 26일(목) 오후 4시 30분, 경희대학교 본관 2층 대회의실

2회: 아시아 해양 영유권 문제와 시민사회의 대응
1부: 아시아 해양 도서영유권 분쟁과 시민사회의 과제
발제: 강성호 경희대학교 인류사회재건연구원 객원연구원
2부: 해적과 해양 테러리즘
발제: 라미경 순천향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
일시: 2009년 4월 16일(목) 오후 4시, 경희대학교 본관 2층 대회의실

3회: 태국 국경거주 버마 난민들의 적응양상과 과제
발제: 이상국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연구교수
일시: 2009년 5월 7일(금) 오후 4시, 서울 COEX

4회 : 탈북여성의 제3국 체류현황 및 과제
발제: 이금순 통일연구원 북한인권연구센터 선임연구위원
일시: 2009년 6월 11일(목) 오후 4시, 경희대학교 본관 2층 대회의실

5회: 이주아동의 인권현황과 시민사회의 과제
발제: 김성천 중앙대학교 아동복지학과 교수
일시: 2009년 7월 9일(목) 오후 4시, 경희대학교 본관 2층 대회의실

6회: 에너지 위기와 시민사회의 과제
발제: 전가림 호서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일시: 2009년 9월 17일(목) 오후 4시, 경희대학교 본관 2층 대회의실

7회: 아시아의 식량위기와 대응
발제: 김병률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미래정책연구실장
일시: 2009년 10월22일(목) 오후 4시, 경희대학교 본관 2층 대회의실

종합토론: 아시아 국경지대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한국시민사회의 연대
일시: 2008년 11월 19일(목) 오후 4시, 경희대학교 본관 2층 대회의실

문의: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02-723-5051)
silverway@pspd.org
blog.peoplepower21.org/internatio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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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퇴하는 동북아 인권, 연대로 막자"
점차 커지는 '동북아 연대'의 필요성

현재 동남아시아 인권단체들 사이에서는 아세안 (동남아 국가연합, ASEAN) 내에서 시민 사회의 목소리를 높이기 위한 논의가 한창이다. 아세안이 처음 출범한1967년에는 아세안의 주된 관심이 단지 안보와 경제 개발에만 집중되었지만 1993년 비엔나 세계 대회를 거치면서 아세안 정상들은 비엔나 인권 선언을 기반으로 아세안 내에서도 인권 관련 기구를 설립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견을 모았다.

그렇지만 그 이후, 1998년 하노이 Action Plan에 이르러서야 아세안 내에서의 인권에 대한 논의가 다시 시작된다. 이후 2004년, 비엔티엔 Action Programme 에서 특히 여성과 아동의 인권과 관련해 구체적으로 아세안 내부의 인권 기구 설립에 관한 논의가 이뤄진다. 이와 관련해 2004년, 아세안 내부에서는 아세안 지역의 여성 폭력 금지를 위한 선언 (Declaration on the Elimination of Violence Against Women in ASEAN Region), 여성과 아동에 초점을 맞춘 인신매매 금지 선언(ASEAN declaration against Trafficking in Persons particularly Women and Children),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의 권리 증진과 보호를 위한 아세안 선언(ASEAN Declaration on the Protection and Promotion of the Rights of Migrant Workers)과 같은 인권 관련 선언들을 제정했다.

2007년에 이르러 아세안 국가들은 드디어 아세안 헌장(Charter)을 채택하였다. 무엇보다도 아세안 헌장 제 14조는 인권을 보호하고 증진시킨다는 아세안의 설립 목적에 걸맞게 아세안 인권기구를 설립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비록 헌장을 만들어 가는 과정은 모두 비공개로 진행되었고 따라서 시민사회도 실질적 기여를 할 기회가 없었기에 결과적으로 형식적인 인권 및 민주주의에 대한 언급과 신자유주의에 중심을 둔 헌장이라는 문제점이 지적되었지만 헌장 제14조는 ASEAN Human Rights Body를 설립하는 기반이 되었다.1) 현재 ASEAN human rights body는 2009년 12월 설립을 앞두고 있으며 아시아 시민사회들은시민사회의 목소리를 그 안에 담기위해 적극적인 로비활동을 벌이고 있다. 특히 2007년 초 출범한 아시아시민사회연대회의(Solidarity for Asian People's Advocacy·SAPA) 산하 아세안 실무그룹(Working Group on ASEAN)에서는 ASEAN Human Rights body의 설립을 담당하고 있는 ASEAN High Level Panel 그룹에게 시민사회의 요구사항을 담은 문서를 2008년 11월 7일에 제출하기도 했다.

이처럼 동남아시아 시민 사회들은 아세안 설립 과정에 있어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목소리를 개진하며 그 안에서의 인권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 끊임없는 연대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렇지만 이에 비해 아시아 내에서 동북아시아 시민사회의 연대의 목소리는 약한 편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포럼아시아 동북아시아 팀에서 다루고 있는 국가들은 몽고, 남한, 북한, 일본, 중국, 대만, 티벳 이렇게 총 8개 국가이다. 동북아시아 지역 연대가 약한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그중에는 아세안과 같은 지역적 기구의 부재, 대부분의 국가들이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언어 소통의 문제, 지역 내에서의 인권 갈등 (예를 들면 중국, 티벳 그리고 대만), 그리고 시민사회들 사이의 정보 및 소통 부족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동남아시아보다 동북아시아는 인권 상황이 조금 더 낫다는 인식, 그리고 경제적으로 다른 국가들 보다 조금 더 풍족하니 당장 급한 불은 껐다라는 생각이 동북아시아에 대한 지속적 관심과 연대를 부족하게 하는 주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제 더 이상 한 국가의 문제가 그 국가의 인권 문제로만 끝나지 않는만큼 동북아시아 내에서도 시민사회의 연대가 필요하다. 더욱이 아세안과 같은 지역적 기구가 부재하는 만큼 시민사회간의 연대의 중요성이 더 강조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촛불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동안 일어났던 표현의 자유 침해 문제는 현재 대만에서 경찰들이 Wild Strawberry Movement에 참가한 인권옹호자들을 진압하는 모습에서도 똑같이 발견되고 있다. 또한 현재 한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인터넷 상에서의 표현의 자유 억압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중국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으며 프라이버시 침해의 문제도 한국, 중국, 대만, 일본 등 여러 동북아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동북아 지역은 이주자 문제에 있어서도 송출국과 유입국이 공통적으로 존재하는만큼 이에 대한 시민사회의 연대적 고민이 더욱더 필요하다.

2008년은 동남아시아보다 더 안정적이라고 생각되었던 여러 동북아 국가들에서 인권이 후퇴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던 한해였다. 일본에서만해도 적어도 15건의 사형이 행해졌으며 몽고에서는 7월에 있었던 부정 선거 반대 시위에서 4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우리나라에서도 촛불 시위동안 수많은 인권옹호자들이 부상당하고 연행되는 일들이 일어났다.

인권 옹호자로써 각자의 나라에서 열심히 활동하며 국내 인권상황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지만 이와 동시에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인권 상황에도 항상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지며 연대의 목소리를 보내는 것도 중요하다. 단순히 공동 성명을 발표하고 일회성으로 회의에 참가해서 의견을 나누는 것을 넘어서 좀 더 지속적인 교류와 지속적인 관심, 그리고 지속적인 연대가 필요하다. 결국 인권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후퇴하는 것이고 이를 막기 위해 아시아 인권 옹호자들의 끊임없는 연대는 더욱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좋은 원동력이 될 것이다.

1) 아세안 헌장 제 14조: ASEAN Human Rights Body
(1) In conformity with the purposes and principles of the ASEAN Charter relating to the promotion and protection of human rights and fundamental freedoms, ASEAN shall establish an ASEAN human rights body,
(2) This ASEAN human rights body shall operate in accordance with the terms of reference to be determined by the ASEAN Foreign Ministry Meeting.


백가윤 포럼아시아 동북아시아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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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 헌장과 시민사회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ASEAN) 국가들이 아세안 헌장 비준 문제로 고민 중이다. 1967년에 출범한 아세안은 작년 11월 20일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제13차 정상회의에서 ASEAN헌장(Charter)을 채택하였다. 헌장은 헌법과 같은 것으로, 일단 발효되면 아세안은 유럽연합(EU) 처럼 국제법적 지위를 가지게 된다. 헌장 채택은 아세안이 40년간의 '동거'생활을 마치고 '결혼'하기로 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약혼식'으로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필요한 10개국의 비준이 결코 쉬워보이지 않는다.
 
ASEAN 헌장 제정은, 2005년 12월 제 11차 쿠알라룸푸르 정상회의에서 헌장 제정에 합의한 지 2년만에 '초고속'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전직 대통령, 수상 또는 장관으로 구성된 저명인사그룹 (Eminent Persons Group·EPG)은 약 1년간을 광범위한 의견 수렴과 자체 토론을 통해 헌장의 목적과 원칙 그리고 다루어야 할 주요 내용 등 밑그림 작업을 한 후 2007년 1월 세부에서 열린 제 12차 아세안 정상회의에 권고안을 제출하였다.
 
아세안 정상은 이를 토대로 고위급초안작성위원회 (High-level Task Force·HLTF) 를 구성하여 헌장 초안 작성에 *착수하기로 결정하였다. 아세안 각국 정부를 대표하는 직업 외교관으로 구성된 초안작성위원회는 불과 10개월 만에 초안을 만들어 싱가포르에서 열린 정상회의에 제출하였다. '상호 내정불간섭과 합의제' 원칙으로 인해 의사결정과정이 비효율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온 아세안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이렇게 급조된 헌장은 현재 절차 뿐 만 아니라 내용에서도 정당성과 실효성에 많은 결함과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이전에 시민사회는 아세안을 '이빨 빠진 호랑이(toothless tiger)', 또는 현실과 유리된 '엘리트 클럽' 으로 간주하여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여 시민사회단체는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2007년 초 출범한 아시아시민사회연대회의(Solidarity for Asian People's Advocacy·SAPA) 산하 아세안 실무그룹(Working Group on ASEAN) 은 저명인사그룹의 간담회에 참석하여 인권, 경제, 발전, 환경, 노동 등에 관한 시민사회단체의 의견을 제출하였고 초안작성위원회가 주관한 간담회에도 참석하였다. 그러나 시민사회 뿐만 아니라 언론의 거듭되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헌장 초안 작성은 비공개로 진행되었으며 정상들이 서명을 한 후에야 헌장의 내용이 비로소 공개되었다. 따라서 시민사회는 물론 각국의 의회 또한 헌장의 내용을 알 수 없었고 실질적인 기여를 할 기회가 없었다.
 
싱가포르 정상회의 2주 전에 열린 제3차 아세안시민사회회의 (ASEAN Civil Society Conference III)에 참가한 약 150명의 시민사회 대표자들은 아세안헌장의 채택을 연기할 것을 요구하기로 결의하였다. 주된 이유는 시민사회의 의견 수렴 미비와 작년 발생한 버마의 대규모 인권 침해와 민주화 운동 탄압에 대한 의미있는 대책 부재였다. 한편 참가자들은 시민사회의 비전과 열망을 담은 민중헌장 (ASEAN People's Charter)을 제정하기로 결의하였다.
 
정상회의 약 10일 전 태국 인터넷 언론사는 태국의 국회의원을 통해 자체적으로 입수한 아세안 헌장 초안을 공개하였다. 초안 원문을 접한 시민사회단체의 반응은 대체로 매우 비판적이었다. 인권, 민주주의에 대한 언급이 있었으나 형식적이었고 '국가주의와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언어과 관점이 지배적이다는 것이 중론이었는데 구체적으로 아세안 헌장은 '유럽연합과 미국 등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세계 자본주의경제에의 편입을 가속하기 위한 국제법적 기반을 만들기 위한 법적 수단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많은 공감을 받았다. 한마디로 헌장의 내용이 아세안의 비전인 "나눔과 돌봄의 공동체(Sharing and caring community)"와 부합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일단 싱가포르는 약혼식 주최국 답게 올해 1월 초 가장 먼저 비준동의서를 자카르타에 있는 아세안 사무국에 제출하였다. 아세안의 인구 대국인 인도네시아 의회는2월 초 처음으로 비준 문제에 대한 논의를 하였지만 찬반 양론으로 나누어져 결론을 맺지 못하였다. 필리핀은 아웅산 수치 여사가 가택연금에서 풀리기 전에는 비준할 수 없다는 입장을 이미 천명한 바 있다. 말레이시아 내각은 헌장을 비준하기로 결의하였다. 태국은 2006년 9월 군사 쿠데타에 의해 해산된 상원이 2월 말 현재 아직 상원이 구성되지 않아 비준 논의를 못하고 있다. 아세안을 창립했던, 비교적 정치적으로 민주화되었다는 5개국의 상황이 이렇다보니 마지못해 헌장에 서명했던 나머지 나라들도 다른 나라들의 눈치를 보면서 시간끌기 작전을 구사하고 있다. 이렇듯 김이 빠진 듯한 분위기하에서 싱가포르 정상회의에서 약속했듯이 올해 말 태국에서 열리는 제 14차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아세안 헌장 비준안이 통과될 지 불확실하게 되었다.
 
이런 딜레마에 처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아세안이 작년 설립 40주년을 맞이하여 불혹의 나이를 넘기지 말아야 한다는 심리적 강박관념으로 너무 서둘렀기 때문이다. 아세안은 형식으로는 정부간 기구(inter-governmental)이지만 내용으로는 시민사회의 제도적 참여를 의미하는 공치(共治·governance)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엘리트적 성격과 관료적 관행을 지속해왔다. 참여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은 과정이 다소 더디고, 시끄럽지만 결과의 정당성과 실효성을 보장하는 필요조건이다. 국제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세안은 이제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앞으로 아세안이 구시대적 '관료독재'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면 아세안 헌장도 유럽연합의 헌법처럼 한동안 우여곡절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이성훈(아시아인권발전포럼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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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

아세안(ASEAN, 동남아시아국가연합)은 초창기에 동남아 5개국가(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 싱가포르)가 상호협력과 안보를 목적으로 창설한 기구로, 그 후로 브루나이를 포함하고, 1997년에는 버마(미얀마), 라오스, 베트남을 아우르고, 1999년에는 캄보디아까지 포함하여 현재 동남아시아 지역에 있는 동티므로까지 포함한 11 나라 중에서 10 나라를 회원국으로 두고 있다. 아세안(ASEAN)의 버마문제에 대한 입장은 아세안의 내적 질서를 규정하는 불간섭(non-intervention)주의와 만장일치제에 의해 많은 제약을 받고 있다.

아세안의 불간섭주의는 회원국의 내정문제에 관해서는 개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만장일치제는 아세안 차원에서 어떤 결정이나 결의를 할 때는 회원국 만장일치의 원칙에 따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서 아세안은 지금까지 버마의 민주화 문제와 아웅산 수찌 여사의 석방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 의견표명을 한 적은 있지만, 단순한 염려를 넘어서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지는 못한다. 구체적으로 1991년에 아세안은 필리핀 외무장관을 버마에 파견하여 현지 사정을 조사한 적이 있고, 2003년에는 인도네시아 전 외무장관인 알리 알라타스(Ali Alatas)가 특별대사로 미얀마를 방문한 적이 있으며 같은 해 6월에는 장관급 회담에서 버마문제에 관해 아세안 국가들이 염려하고 있다는 성명서를 발표한 바 있다. 또 개별국가 수준에서 말레이시아 의회에는 버마문제에 관한 의원모임이 있기도 하다.

아세안이 버마문제와 직접적 관련을 맺게 된 것은 1997년에 버마를 아세안의 회원으로 받아들이면서다. 인권문제와 아웅산 수찌 여사 감금문제로 국제적인 압력을 받고 있던 버마를 아세안에 받아들이면서 아세안은 미국과 유럽 등으로부터 많은 국제적 압력에 직면하게 되었다. 특히 유럽은 버마가 아세안에 가입한다면 아셈(ASEM)과 같은 유럽과 아시아의 대화를 전면 거부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아세안은 자신의 행동을, 버마를 끌어들여 함께 하며 버마문제의 해결을 모색하는 건설적 개입(constructive engagement)이라고 합리화 했으나 그 후로도 간헐적 성명서를 넘어서는 구체적이고 강력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

2005년에 들어서는 버마의 아세안 의장국 문제가 논란의 핵심이 되고 있으며 차츰 수위를 높여가는 ASEAN+3 이라는 광범위한 지역협력체제에 버마를 참여시키는 문제에 관한 논란도 등장하고 있다. 아세안의 의장국은 알파벳 순서에 의해 회원국들이 돌아가며 담당하고 있다. 2005년에는 말레이시아가, 2006년에는 버마(미얀마)가 의장국을 담당하게 되어있다. 이에 버마 문제를 염려하는 국가들과 사회단체들에서는 버마가 의장국을 담당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버마의 민주화를 이끌어내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말레이시아 의회, 인도네시아 외무부, 싱가포르 외무부, 필리핀 외무부 등 몇몇 국가는 이 문제에 관해 염려하고 있으며 버마 군사정권에게 민주화방향으로 가시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버마의 의장직 수행이 곤란하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특히 버마의 아세안 가입에 적극 앞장섰던 말레이시아의 입장변화가 눈에 띈다. 하지만 2005년 4월에 열린 아세안 외무장관 비공식 회동에서는 버마의 민주화문제를 압력이나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하지 않고 스스로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더 주기로 결정했다.(이후 버마 정부는 외교적 압력에 결국 2006년 의장국 자리를 포기했다.)

아세안 국가들은 자신들이 버마문제에 대하여 압력을 행사할 경우 이런 행동이 서방국가들의 압력에 의한 결과로 비쳐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리고 일부 아세안 국가들이 버마문제에 대해서 염려를 표명하더라도 그것이 진정으로 버마 민주화 문제에 관한 관심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아세안이라는 기구의 대외적인 이미지 실추라는 문제가 더 걱정스러운 듯 하다.

중국과 인도

버마는 중국과 인도라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두 거대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중국에서 인도로, 그리고 인도에서 중국으로 사이를 잇는 가교역할을 해왔다. 따라서 오래 전부터 중국, 인도와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버마의 군사정권이 서방으로부터 민주화 압력에 놓임에 따라서 버마는 주변의 국가들 특히 중국과의 관계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들이 서방으로부터 받는 압력을 잠재적으로 상쇄해줄 수 있는 국가가 중국이라는 이유에서다.

반면에 중국은 한편으로 버마의 북쪽 국경지대를 통해 들어오는 마약이 중국 내 많은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있어서 버마와 불편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현재 약 80%에 달하는 버마에서 생산된 마약이 중국 남부를 통해 유통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마약중독과 HIV/AIDS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한 중국관리는 버마에서 들어오는 헤로인이 약 64만 3천명의 중국 수요자에게 공급된다고 밝히고 있다. 버마 측에서 마약의 재배와 유통을 억제하려는 노력이 있기는 하지만 중국에서 바라는 요구를 맞추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중국은 자신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버마에서 급격한 정치변동이나 정치적 혼란이 나타나는 것을 또한 바라지 않는다. 항상 주변 국가에서의 정치변동이나 혼란이 자국의 정치안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은 버마가 급격한 정치변동을 겪게 하지 않기 위해서 일정 정도 현재 버마의 군사정권과 협력하는 동시에 경제적으로도 미얀마의 경제가 일정한 속도로 성장할 수 있도록 우호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 결과로 최근들어 중국은 버마의 부채의 압력을 줄여주고, 경제 발전을 위한 원조와 경공업-사회간접자본 건설을 위한 차관을 공여하는 가장 중요한 동반자의 관계에 있다. 또한 중국은 버마에 가장 많은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국가로 알려져 있다.

인도의 경우 1988년 버마의 민주화 운동 이후 버마의 망명자를 받아들이고 군사정권을 비난하면서 버마 민주화의 강력한 지지자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이런 인도의 태도는 1990년대 들어서면서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인도는 버마 민주화에 관한 관심을 아주 버린 것은 아니지만 1993년부터 “전략적 개입(Strategic engagement)”이란 태도를 취하여 버마에 좀더 가까이 다가갔다. 여기서 더 나아가 1996년에는 불간섭원칙을 확인하고 버마 민주화의 문제는 버마 ‘내부사정’이란 입장을 천명했다. 이후 버마와 인도의 경제, 군사, 안보적 협력은 갈수록 심화되었다. 버마와 인도는 마약문제에 관해서 공조하고, 버마는 인도 국경지대에 인도 반정부 민병대 소탕작전에 협력했다. 또한 버마가 인도에 천연가스를 수출하는 것을 고리로 하여 에너지 문제에서도 협력적 관계가 증가했으며 버마는 인도에서 군사물자를 수입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인도정부의 이런 접근과는 달리 의회와 시민사회에서는 여전히 버마 민주화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1996년에는 아웅산 수찌 여사가 네루 평화상을 수상했고 1998년에는 여섯 개의 정당이 버마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확인했다. 또한 여러 정당 출신의 75명의 의원들은 NLD가 주장하는 1990년 선거에 의한 의회구성을 촉구하는 청원에 서명하기도 했다. 2004년 9월에는 인도국민회의 대변인인 아닐 샤스트리는 인도국민회의는 앞으로도 여전히 버마 민주화문제에 관심을 가질 것이며 버마 내의 민주화 운동세력에게 전적인 지지를 보낼 것이라고 발표했다.

UN, ILO, IPU

UN은 버마 군사정권의 인권탄압과 관련하여 가장 강력한 비판자 중의 하나이다. 1991년 이후로 UN 총회는 매년 SPDC에 의한 버마인의 인권탄압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해왔다. 최근의 예로 2004년 11월 UN 총회는 결의안을 통해서 버마에서 계속되는 조직적인 인권침해, 초법적인 살인, 고문, 성범죄와 군에 의한 주거환경과 삶의 파괴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 심각한 우려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 결의안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절적한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한 제안들을 했다. 또 UN 경제사회이사회(Economic and Social Council)는 버마의 인권상황을 조사하기 위한 특사를 파견하여 특사에 의한 버마상황에 관한 자세한 보고서가 출간되었다.

이런 UN 총회의 움직임과는 상반되게 더 구체적이고 강력한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UN 안전보장이사회는 아직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2004년 미국 상원은 UN 안정보장이사회가 버마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라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또한 의장국이었던 필리핀 역시 의장의 지위를 이용하여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버마문제를 거론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하지만 어떤 구체적인 입장이나 행동도 취해지지 않았다.

여타 UN 기관으로 또 버마문제에 관여하고 있는 것 중 중요한 것이 UNHCR(UN난민고등판무관, UN High Commissioner for Refugees)과 UNCHR(UN인권위원회, UN Commission on Human Rights)이다. UNHCR은 주로 난민문제를 다루는 데, 버마와 관련해서는 태국과 버마 국경지대에 버마 난민들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폭넓게 진행하고 있다. 다음으로 UNCHR은 인권문제를 다루는 UN 기관으로 거의 매년 버마의 인권문제에 관한 결의안과 보고서를 내고 있으며 인권문제를 조사하기 위한 UN 특사를 파견하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특히 버마의 강제노동과 관련하여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ILO는 1998년 버마의 강제노동을 조사하기 위한 대표단을 파견하고, 그 보고서를 토대로 하여 광범위한 강제노동이 실시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이에 관한 시정을 요구하는 결의안과 성명서를 채택한 바 있다(1999, 2000). 또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ILO 대표단은 2000년 버마 당국과 회담을 한 바 있으며, 2001년에도 ILO 대표단을 버마에 파견하였다. 가장 최근에는 한국의 정의용 의원을 포함한 ILO의 대표단이 버마를 방문했다. 이 방문단은 2004년 11월 ILO 이사회에서 버마의 강제노동 폐지를 위한 버마 당국의 노력을 평가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그러나 이 대표단은 버마정부의 보이콧으로 인하여 제대로 된 조사활동을 벌이지 못했다.

국제의원연맹(IPU)도 버마의 인권과 민주화 문제에 관하여 거의 매년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있다. 특히 IPU는 1990년 선거와 관련하여 선거의 결과를 버마 군사정부가 인정할 것과 그에 따라 의회를 소집하고 의회민주주의를 복원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2004년 통과된 결의안에서는 UN 특사에 버마당국이 협력하지 않은 것을 비난하면서, 버마군사정부가 소집한 국민회의(National Convention)가 1990년 선거결과를 무효화하려는 시도이며 국민의 뜻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라 지적하고 있다. 특히 IPU의 이 결의안은 2004년 현재 아직도 투옥중인 17명의 국회의원을 조속히 석방하고 Depayin 학살에 대해서 철저히 진상을 조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

미국은 버마의 인권과 민주화에 관해서 가장 활발하게 버마 군사당국에 다양한 방법으로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 국가 중 하나이다. 미국은 정부차원에서 1997년부터 버마 군사정부에 대한 다양한 제재 조치를 취하고 있다. 미국 노동부와 국무부는 버마의 인권, 민주주의, 강제노동에 관한 보고서를 매년 발간하고 있다. 또한 의회차원에서도 계속 버마 군사정부에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면 2000년에는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만들어진 버마문제에 관한 결의안이 각각 상원과 하원에서 통과되었으며, 2003년에는 버마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관한 법(Burmese Freedom and Democracy Act)이 통과되었는데, 이 법은 버마 군사정부를 제재하고, 버마의 민주세력을 지원하며 특히 NLD를 버마인들의 합법적인 대표자로 인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법은 버마의 생산품을 미국에 수입하는 것을 금지하며, 미국 비자를 받을 수 없는 버마 인사의 범위를 USDA(버마 친정부 정당)에 관련된 사람들까지 확대했고, 국제금융기관들이 버마에 원조하는 것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미 의회는 2004년 7월 이 법을 연장했다.

또 2003년 7월에는 미 대통령령으로 버마정부가 미국 내 가지고 있는 재산에 대한 접근을 막고 동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시행령이 선포되었다. 이 시행령에 따르면, 버마정부의 고위관료, SPDC의 고위관료, 또는 USDA의 고위관료와 관련된 미국 내 재산이나 향후 유입되는 재산들, 그리고 미얀마 경제은행(Myanmar Economic Bank), 미얀마해외무역은행(Myanmar Foreign Trade Bank), 미얀마 투자-상업은행(Myanmar Investment and Commercial Bank)과 관련된 미국내 재산에 대해서 그들이 접근하는 것을 차단했다. 또한 미국시민들이 버마에 투자하거나 외국인이 버마에 투자하려는 행위를 돕는 행위를 금지했으며, 미국인이 버마에 대한 투자에서 주로 수입을 내는 제 3세계국가의 기업에 투자하거나 주식을 사는 행위를 전면 금지시켰다. 2004년에는 인신매매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미국 정부가 버마에 행하는 원조의 일부를 중단했다. 2004년 10월에는 먼저 미국 상원에서 그리고 하원이 이어서 UN이 버마 문제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 행동을 취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가장 최근의 미국의 버마에 대한 조치로 미 대통령은 미국이 버마에 대해서 취하고 있는 제재 조치를 2005년 5월에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EU

EU(유럽연합, European Union)는 국제사회에서 버마의 민주화와 인권문제 개선을 위해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1996년 이후로 EU는 버마군의 학정을 통해 이익을 보는 자들과 인권과 민주화 문제에 관한 국가적 문제해결을 방해하는 자들에 대해서 제재하는 것에 관한 공동입장을 계속 표명해 오고 있다. 현재 EU는 버마의 인권문제와 민주화 문제로 인하여 어떤 양자관계도 맺지 않고 있다. EU가 버마와 관련되어 진행하고 있거나 진행했던 사업은 인도적인 지원에만 엄격하게 제한되고 있는데, 1999년과 2001년에 UNHCR에서 주관한 난민정착사업에 지원을 한 바 있다.

EU는 버마의 1990년 총선 결과가 버마 군부에 의해서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 이래로 2005년 4월까지 총 44차례의 EU council, EU 의회, 그리고 EU Presidency를 통해서 공동입장, 성명서, 선언서, 그리고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2004년 EU의 공동입장은 버마의 민주화로의 평화로운 이행을 지지하고 있다. 이 결의안에서 EU는 버마의 평화로운 민주화로의 이행은 전적으로 버마의 군부의 행동에 달려 있다고 보고, 아웅산 수찌 여사의 석방으로부터 시작하여 인권문제에 대해서 버마 군부가 실제적인 행동을 취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 EU의 공동입장은 1990년에 처음 시행된 무기수출금지, 1991년에 실시되기 시작한 방위협력의 중단을 연장한 것이며 추가로 엄격한 의미에서 인도적인 지원을 제외한 모든 양자간 지원관계를 중단하고, 버마군 관계자, 정부관계자, 고위 군인사와 그의 가족들에 대한 버마비자 발급을 중단하는 것이다. 또한 EU의 고위관계자들의 버마 방문을 금지하고 있다. EU의 공동입장은 1996년에 처음 발표되어 1998년, 2000년, 2003년에 버마에 대한 제재조치를 계속 강화시켜왔다.

또한 EU는 2004년 ASEM 회의를 통해서 버마 군부의 실력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EU의 최후통첩을 전달한 바 있다. 이 최후 통첩에 따르면 SPDC가 아웅산 수찌 여사를 조속히 석방하지 않고, NLD의 활동을 계속 방해하며 국민회의(National Convention)가 의미있고 자유로운 대화를 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면, EU는 현재 EU가 버마에 대해서 취하고 있는 제재조치를 더욱 강화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 후 버마의 군부가 EU의 최후통첩에 반응하지 않자 EU는 다음과 같은 제재조치를 2004년 10월에 발표했다. 제재조치의 내용은 1) 현재 EU의 비자를 받지 못하는 인사의 범위를 버마 군의 준장과 그 가족까지 확대하고 2) EU내의 기업과 단체들이 대출과 투자를 통해서 버마 내에 있는 기업에 자금을 대는 것을 전면 금지하며 3) 국제기관들이 버마에 차관을 공여하는 것은 EU차원에서 조직적으로 반대한다는 것이다. 2005년 4월 EU는 이 제재의 내용을 일년간 더 연장하는데 합의했다.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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