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의 조기총선과 정국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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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서는 금년 5월 첫째 주에 의회가 해산된 후 6-7월경 조기총선이 개최될 예정이다. 현재 선거법 수정안이 의회에 상정돼 독회가 진행 중인데 이 절차가 끝나면 정치일정은 더 확실해 질 것이다.
 
원래 현 민주당 정부 임기는 금년 12월까지이나 탁씬 친나왓(Thaksin Shinawatra) 전 총리를 지지하는 프어타이당(Puea Thai Party)과 레드셔츠는 그동안 조기총선을 실시해 정국불안을 해소할 것을 강력히 주장해 왔었다. 하지만 아피씻 총리는 조기총선이 불리하다고 판단해 거부해 왔다. 이런 태도는 2010년 4월 반정부시위를 촉발시킨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김홍구 부산외대 교수

얼마 전까지 탁씬 지지세력들은 조기총선을 실시하면 금방 재집권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상황은 바뀌어 가고 있는 것 같다.

프어타이당은 차기 총리후보조차 정하지 못한 채 당내 파벌투쟁에 시달리고 있다. 민주당(Democrat Party)은 이미 현 총리인 아피씻을 후보로 내세웠지만 프어타이당은 전 상무부 장관 밍콴(Mr. Mingkwan Saengsuwan)을 지지하는 세력과 탁씬의 막내 여동생 잉럭(Ms. Yingluck Shinawatra)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어져 총리후보를 정하지 못하고 있다. 프어타이당 핵심인물 찰름(Chalerm Yoobamrung)은 밍콴이 총리 후보로 거론되는 것을 못 마땅히 여겨 의원직을 사퇴해 버렸다. 프어타이당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는 레드셔츠 세력은 지난 5월 반정부시위가 강제 진압 된 후 지도부 9명이 장기간 구속되었다가 보석으로 석방되는 과정에서 반정부운동의 탄력을 상당부분 상실했을 뿐 아니라 빈번한 시위로 적어도 방콕에서는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외에 프어타이당의 고민거리는 민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품짜이타이당(Bhumjaithai Party)으로부터 비롯된다. 품짜이타이당은 2008년 12월 탁씬 계열의 팔랑쁘라차촌당(Phak Palang Prachachon)이 선거법 위반 혐의로 해산되었을 때 탁씬의 오른팔이라고 불렸던 네윈(Newin Chidchob)이 탈당해서 만든 정당으로 민주당 연립정부 구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더구나 프어타이당과는 동북부 지역의 표밭까지도 겹치고 있다. 민주당 정권 출범 후 프어타이당을 탈당해서 수 명의 의원들이 품짜이타이당으로 입당한 경우도 있었으며 몇차례간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동북부 지역 내 프어타이당의 가장 막강한 경쟁세력으로 부상돼 말 그대로 눈에 가시 같은 존재가 되었다.

프어타이당의 전신격인 타이락타이당 때부터 위력을 발휘했던 대중영합주의 정책도 효력이 떨어지고 있다. 민주당 정부에서도 금년 초 소위 쁘라차윗정책(서민복지정책)을 발표해 민심 잡기에 나섰기 때문이다. 프어타이당은 이 같은 정책을 대중영합주의 정책의 복사판이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민주당과 뚜렷이 차별화된 정책을 선보이지 못하고 있다.

총선에서 프어타이당이 원내 제1당이 돼도 집권하기 위해서 넘어야 할 산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프어타이당 주도 연정에 참여할 영향력 있는 군소정당들이 극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이다. 더 중요한 것은 군부와의 갈등이다. 프어타이당은 2010년 5월 반정부 시위진압 책임을 놓고 군부와의 사이가 틀어 질 대로 틀어져 있다. 그래서 벌써부터 프어타이당이 집권할 경우 또 다시 군사쿠데타가 발생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군부 실세인 육군사령관 쁘라윳(Prayuth Chan-ocha)장군은 2006년 쿠데타의 주역이며 반 탁씬 강경파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프어타이당의 집권을 두고 볼 리 없다는 것이다. 사실상 지금까지 태국에서 군부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민간정권이 성공한 적은 없다. 2008년 선거를 통해서 탁씬이 지지하는 팔랑쁘라차촌당이 집권한 후 총리직에 올랐다가 통산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난 싸막(Samak Sundaravej)총리와 쏨차이 (Somchai Wongsawat)총리는 비근한 예가 되고 있다.



총선정국을 앞두고 민주당은 프어타이당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에 있는 듯 하다. 민주당은 얼마 전 헌법개정을 추진해 민주당에 유리한 선거구도를 만들어 가고 있다. 헌법 개정안에 따르면 기존 선출직 의원 400명과 비례대표 의원 80명은 각각 375명과 125명으로 그 수가 조정되었다. 독회 중에 있는 개정 선거법이 의회를 통과할 경우에 전국 적으로 25개 선거구가 축소되는데 그 중 16개 선거구가 프어타이당 우세지역인 북부 및 동북부 지역에 속해 있기 때문에 민주당에게 유리하다. 뿐 만 아니라 이 지역 선거구가 축소되면서 정당득표수가 감소하면 프어타이당의 비례대표 의원수도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그 동안 민주당이 우세했던 보궐선거나 지방선거의 결과도 총선 승리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작년 9월 Abac Poll에서 전국 4,31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총선 관련 여론조사에서 전체 응답자 중 50.7%가 민주당을 지지했으며 프어타이당은 33%의 지지를 얻었다. 지역별로는 탁씬의 텃밭인 동북부 지역에서 프어타이당이 49%의 지지를 얻었으며 민주당은 32%를 얻었다. 북부지역은 민주당 44%, 프어타이당 42%의 지지율을 보였다. 이 외 중부 및 남부 지역은 절반 이상이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선거결과를 점치기에는 아직 많은 변수들이 도사리고 있다. 특히 선거는 정서적 측면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본격적인 선거 국면에 들어서는 지난 5월 시위 강제진압에 대한 효과적인 정치적 쟁점화와 이에 대한 동북부와 북부지방의 민심의 향배가 가장 중요한 변수들이 될 것이 틀림없다.

민주당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몇 가지 악재도 상존한다. 가장 큰 문제는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품짜이타이당과의 갈등이다. 품짜이타이당은 민주당 연립정부에 참여한 이래 정당의 이해관계에 따라 민주당과 잦은 갈등을 빚어 왔다. 더구나 얼마 전 연립정부 내 제 2당인 품짜이타이당은 제3당인 찻타이팟타나당(Chart Thai Pattana Party)과 정치적 동맹관계를 선언했다. 그 의미는 총선 후 구성될 연립정부에서 정치적 협상력을 제고하려는 것이다. 양 당의 정치적 동맹관계는 현재 연립정권을 구성하고 있는 민주당에 대한 압력이 될 수도 있고 프어타이당에 대해서는 연립정부 구성 가능성을 열어 놓은 것이 될 수 도 있다.

민주당의 총선 승리와 집권 가능성에 새로운 변수는 PAD(The People's Alliance for Democracy 국민민주주의연대)와의 갈등에서도 나타난다. PAD는 2008년 12월 민주당 정권 탄생의 일등공신이었지만 태국과 캄보디아 국경분쟁 해결방안을 놓고 강경입장을 고수하면서 민주당을 곤경에 빠뜨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PAD를 모태로 하고 있는 새 정치당(New Politics Party)에게 총선 불참을 촉구하는 동시에 총선이 실시된다면 투표거부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고 있다. 정치권을 불신하고 있는 PAD는 국가의 부정부패 등이 척결될 때까지 국왕에 의해 선출된 총리 및 내각 구성을 요구한다. 하지만 현재 PAD는 총선참여를 주장하고 있는 새 정치당과 갈등을 빚으면서 내분상태에 있으며 과거와 같은 정치적 영향력도 축소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변이 없는 한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과 프어타이당은 제1당이나 제2당이 될 것은 분명해 보이나 어떤 정당이 군소정당과의 연립정부 구성에 성공할 것인지는 아직까지 예측불허이다. 문제는 선거후에도 정국불안은 지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태국은 고질적인 빈익빈 부익부문제, 이념적 갈등, 지역적 갈등으로 분열돼 있다. 그동안 잠복해 있던 이런 문제가 표면화되는 데 원인을 제공한 탁씬에 대한 국왕, 관료, 군부를 비롯한 기득권층의 부정적 시각도 변화의 기미가 없다. 정치적 갈등 시 중재자 역할을 한 고령의 푸미폰 국왕의 역할도 기대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번 총선은 2007년 12월 총선 후 처음 치러지는 선거라는데 의미가 있다. 총선을 통해 국왕이나 군부 쿠데타 같은 외부적 영향력에 의해 정치적 위기를 해결하곤 했던 비민주주의 방식에서 탈피해 정당과 의회를 중심으로 한 게임의 규칙이 적용되는 예측 가능한 정치로 진일보 한다면 그 의의는 과소평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김홍구 (부산외국어대학교 태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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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피싯 민주당 정부가 상원의 중재와 국제사회의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 요구를 모두 일축하고 방콕시내 중앙부를 장악하였던 ‘레드 셔츠’를 유혈진압 하였다. 정부는 레드 셔츠를 테러리스트로 몰아가는 선전전을 계속하면서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지식인들을 포함해 표적이 되는 인물들에 대한 체포와 수색을 하고 있다. 이렇듯 공안정국을 만들면서 아피싯 정부는 평화의 도래를 공언하고 있지만 누구도 타이의 앞날을 낙관하지 않는다.

국가가 대화와 타협이 아닌 폭력을 수단으로 인민의 저항을 압살했을 때 당장 그것이 질서와 안정을 가져올 것처럼 비추어질지 몰라도 ‘패배한’ 인민은 새로운 저항을 준비한다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

이번 이른바 ‘레드 셔츠’의 저항을 두고 많은 얘기가 있을 수 있다. 전통에 대한 근대의 저항, 엘리트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민주주의의 저항, 도시-중산층 동맹에 대한 농촌-빈민층 동맹의 저항 등등.

주지하다시피 레드 셔츠의 주장은 1997년 헌정체제로의 회귀에서부터 조기 총선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스트럼이 폭 넓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점은 민주주의를 선거민주주의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전 수상 탁신을 몰아냈던 이른바 ‘옐로우 셔츠’는 선거를 민주주의의 필수요건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6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현 집권세력인 민주당 역시 쿠테타를 용인하고 선거 결과에 불복한 옐로우 셔츠를 후원하고 레드 셔츠의 조기총선 요구에 소극적으로 대응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선거를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번 유혈진압으로 2006년 9월 쿠테타 이후 ‘반쿠테타’와 ‘반탁신’으로 분열된 타이 시민사회진영의 골은 깊어질대로 깊어졌다. 반탁신운동으로부터 시작해서 군사 쿠테타를 지지하고 2007년 12월 선거 결과에 따른 친탁신세력의 재집권을 왕실과 군대의 힘에 의존하면서 피플파워당 내각을 ‘직접행동’으로 무너뜨린, 1973년 민주항쟁과 1976년과 1991년 쿠테타에 맞섰던 시민사회운동 지도자들의 생각은 무엇인가?

이들 반탁신 시민사회운동 지도자들의 ‘급진민주주의’는 세계화와 부도덕한 ‘자본독재’에 반대하기 위해서는 존왕주의자들과도 제휴할 수 있다는 다분히 편의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탁신계 피플파워당을 궁지로 몰기 위해 타이-국경지대에 위치해 있는 힌두사원 영유권 분쟁을 부추기는데도 앞장섰다. 이들의 편의주의적 발상이 국수주의를 선동하는 양상으로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타이의 위기는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단계에 있는 아시아 국가들에게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민주주의는 공정한 선거 결과에 승복하는 문화에서부터 시작된다. 독재하에서의 정치적 표현이 거리의 투쟁을 불가피하게 했다면 민주주의로의 전환은 1인 1표의 위력을 보여주게 된다. 그러나 존왕주의자들과 제휴한 시민사회진영의 ‘급진민주주의’는 선거에서 표현된 농촌 유권자들의 표를 무시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들은 한때 의회의 70%는 임명제, 나머지 30%는 선출제로 하자는 희한한 발상까지 하였다.

또한 ‘신정치’를 내세우는 이들의 ‘급진민주주의’는 이율배반적이다. 이들은 탁신 집권 시기에 타이 남부 무슬림지역에서 벌어진 인권침해 문제를 비난했지만 2006년 쿠테타 이후 들어선 군정 치하에서, 그리고 아피싯 민주당 치하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타이 남부지역폭력사태와 관련하여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특히 일부 시민사회진영 지도자들은 2006년 9월 쿠테타 직후 민주주의의 파수꾼 역할을 하겠다고 군정에 협력한 변을 늘어놓았지만 타이 남부 무슬림들을 위해 인권변호를 해주던 솜차이 변호사 실종문제조차 제대로 의제화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그저 1997년 헌법을 휴지조각으로 만든 군사정변 주모자들의 들러리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현재 왕실모독죄로 해외에 피신해 있는 쭐라롱껀대 짜이 응파껀 교수는 탁신정부의 독선, 인권침해를 비판하면서도 탁신의 타이애국당이 역대 어느 정당도 시도하지 않았던 정책정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음을 강조한 바 있다. 쿠테타를 지지한 시민사회운동진영을 신랄하게 비난한 그는 탁신의 포퓰리즘을 넘어설 수 있는 대안적 진보정당의 조직화를 역설해왔다. 예컨대 탁신을 총과 탱크가 아닌 투표로 심판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논지였다. 다수정으로서의 민주주의는 분명히 소수자에게 폭력적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선거에서 패한 소수자가 다음 선거에서 다수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는 점에서 최적의 정치제도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주목하자는 것이다.

현재의 타이 위기는 타이 사회가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기 위한 성장통인지도 모른다. 타이 사회는 탁신의 집권을 계기로 카리스마 있는 정치 지도자의 통치, 즉 막스 베버(Max Weber)의 ‘지도자 민주주의’를 처음으로 경험해보았다. 그러나 이번 레드 셔츠의 저항 과정에서 ‘지도자’ 탁신의 역할은 거의 없었다. 이제 레드 셔츠는 탁신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지도자를 찾아야 한다. 군부와 왕실과 자본에 의존하지 않는 명실상부한 대중정당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왕실모독죄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짜이 응파껀 교수의 꿈이다.

   

      박은홍(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 이 글은 2010.5.25 서남포럼에 실린 글입니다. 박은홍 교수는 국제연대위원회 아시아연대 분야 실행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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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담회후기]

태국 민주주의 위기로부터 아시아는 무엇을 배울 것 인가?
-왜 태국에서는 시위와 쿠데타가 반복되는가?


 

5월 13일을 기점으로 태국 정부군이 시위대에 강경진압을 시작하면서 다시 국제 뉴스의 전면을 채우고 있다. 이 날 참여연대 3층에서는 태국간담회가 열렸다.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인 성공회대 박은홍교수와 태국에 위치한 포럼아시아(Forum Asia)에서 일한 한국인권재단의 이성훈이사가 발제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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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홍교수의 발제>

박은홍교수의 발제는 민주주의 정치원리에서 본 태국 시위 세력의 특성을 분석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현 태국시위는 크게 두 세력이 대립하고 있다. 한 쪽은 반탁신세력이자 왕정을 지지하고 윤리정치를 내세우는 ‘노란셔츠’, 즉 민주주의민중연대(People’s Alliance for Democracy:PAD)이다. 다른 한 쪽은 친탁신, 1997년 헌법수호, 선출된 권력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붉은셔츠’, 즉 반독재민주연합전선(the United Front for Democracy Against Dictatorship:UDD)이다.
 
각 세력은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을까? ‘노란셔츠’는 탁신의 부패와 독선을 혐오하고 국왕의 권위를 숭상한다. 내부 구성원들의 정치적 뿌리를 보면 왕정주의자들과, 군사정권 아래에서 반독재운동을 하던 사람들과 학생운동지도부가 포함된 레디컬(radical) 그룹이 포함되어 있는 좌우동거의 성격을 띄고 있다. 반면 ‘붉은셔츠’는 친탁신세력이자 쿠테타를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 강하다. ‘붉은셔츠’내 특히 친탁신계에도 반독재.학생운동, 사회운동에 몸 담았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갖는 정치원리는 어떤 것인가? ‘노란셔츠’는 ‘좋은 쿠데타(good coup d’éㅇ호tat)라는 이름으로 선거나 민주주의로 정치적 문제가 해결이 안되면 쿠데타로 문제를 해결해도 좋다는 입장이다. 반면 ‘붉은셔츠’는 상대적으로 선거민주주의를 절대옹호하며 어떤 쿠데타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본다.
 
이러한 시민사회의 분열양상은 단순히 탁신이라는 정치지도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넘어, 근본적으로 ‘태국의 시민사회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지금 태국인들은 ‘최소의 민주주의, 최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합의가 필요한 시기이다. 판단하기로는 절차 민주주의에 대한 합의로부터 민주주의를 키워나가야 한다고 본다.
 
덧붙여 시위대를 분리시키고 있는 주제 중의 하나는 ‘지구화(세계화)’이다. 지구화를 찬성하는 탁신정권은 FTA를 추진하고 자유무역을 권장하는 일종의 지구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측면이 있다. 반면 반탁신세력 중에는 물질만능주의를 경계하는 불교문화 옹호론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탁신의 지구화 순응전략에 반대하는 입장을 갖고 있다.
 


<이성훈 이사의 발제>

인권위 이성훈 이사는 태국 사회의 4대 지배블록은 군부, 왕족, 자본가, 관료로 파악하였다. 이들 가운데서도 군부와 왕족변수가 현 상황을 가장 복잡하게 만드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시민사회에서 드러나는 입장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고 보았다. 시위과정에서 나타나는 국가폭력을 비판하고 생명권 존중의 입장을 표명하는 집단, 시위대 양쪽 진영에 대해 뚜렷이 양비론적인 집단, 그리고 어느 한 쪽에 속한 집단으로 보았다. 그리고 모든 정치적 혼란은 쿠데타를 인정하면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정치를 정치로 해결하지 못하고 사법부가 들어오는 상황은 좋지 않아 보인다는 지적을 하였다.
 
 
<토론>


현 사태의 분석을 넘어, 현실적인 연대와 선택의 문제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사회자인 박진영 팀장은 태국에서 온 소식에 의하면 노동운동과 시민운동까지도 모두 이분화되어 연대를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양쪽이 연대할 수 있는 중간 영역을 만들어 낼 수는 없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더불어 차은하 간사는 태국 상황에 대해서는 국가의 폭력이나 생명권과 같은 일차적인 문제만 다룰 수 있을 뿐, 실제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과는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답을 얻기 어려운 것 같다고 하였다.
 
박은홍교수는 다수결의 원리를 따르는 민주주의의 양면성을 지적했다. 절차로서의 민주주의가 수의 게임에 따른 다수의 지배이기에 분명히 폭력성이 있지만 소수가 다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기에 최적의 제도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바, '노란셔츠'의 선거 결과 불복종운동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안착을 어렵게 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시민사회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먼저 묻고 답을 얻어야 할 것이라는 말로 마무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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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경우에도 유혈진압은 정당화 될 수 없다

3주가 넘도록 반정부 시위가 계속되어 온 태국에서 급기야 유혈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4월 11일 시위대와 군경의 충돌로 최소 21명이 사망하고 870여 명이 부상당했다. 태국정부는 자신들이 발포한 것은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지만 일촉즉발의 긴장된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음에도 군대를 시위대 해산에 동원하여 유혈사태가 발생한 것은 명백히 태국정부의 책임이다.

태국 정부는 조속히 유혈사태의 책임소재를 투명하고 객관적으로 책임자를 규정에 따라 처벌함으로써 유사 사태의 재발방지책을 강구해야 한다.

레드셔츠로 대변되는 친탁신 시위대와 옐로셔츠로 대비되는 반탁신 세력간의 충돌은 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발전에 큰 도전과 시련을 던져주고 있다.

우리는' 부패한 재벌 정치인의 포퓰리즘 정책에 선동된 일부시위대의 난동'이라는 기사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오랜 세월 소외되었던 태국 민중의 정치경제적 현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태국 정치 역사에서 대다수 사회적 약자와 민중은 시혜와 동정의 대상이었고 기득권 세력 간의 다툼에서 동원되고 희생되어 왔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어떠한 정치적 명분도 군부의 무력 개입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력은 또 다른 형태의 무력을 불러올 뿐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와 원칙에 입각한 대화와 토론, 자유롭고 공정하고 선거, 그리고 권력 분산과 법치에 입각한 민주적 가버넌스가 더디더라도 문제해결의 올바른 접근임을 강조한다.무력에 의지한 권력 획득과 유지는 태국의 민주주의를 과거로 돌리는 처사이며 그동안 민주화 운동의 성과를 부정하는 조치이다.

올해로 광주 민주화항쟁 3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시민사회는 이번 태국 사태를 바라보며 충격과 우려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 여전히 도시 한복판에서 무장한 군인들이 시위대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은 그 이유가 무엇이든, 광주의 아픔이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되풀이 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태국 유혈사태를 통해 민주화는 아시아에서 과거가 아닌 현재진행형의 과정이며 아시아 시민사회 공동의 과제임을 다시 확인한다.

이를 계기로 한국시민사회단체와 시민은 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연대에 나설 것이며 아울러 태국정부에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하나, 태국정부는 유혈사태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

하나, 태국정부는 시위진압에 군대 동원을 금지하고 군대의 정치개입을 금지하라

하나, 언론의 자유롭고 안전한 취재를 보장하고 인터넷 검열을 해제하라

하나, 민의가 제대로 전달되고 반영될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취하라

2010년 4월 14일

군인권센터, 대구참여연대, 민주노동자연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서울경기인천 이주노동자노동조합, 인권과 평화를 위한 국제민주연대,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참여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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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9월 19일 타이에서 일어난 쿠테타는 타이가 이제 민주주의를 차근 차근 뿌리내리고 있다고 믿고 있던 국제사회를 경악시켰다. 당시 쿠테타의 주역들은 탁신의 부패와 그의 분열주의 정치, 헌법상 보장된 독립기관에 대한 침해, 군주제에 대한 위협 등을 들어 자신들의 반(反)헌정적 행위를 정당화하였다. 손티 분야랏글린 육군총사령관을 의장으로 하는 <입헌군주제하의 민주개혁평의회>는 한때 ‘국민헌법’으로까지 격찬을 받던 1997년 헌법을 폐기하였다. 그해 10월 1일에 임시헌법이 공포, 시행되고 전 육군총사령관 수라윳 출라논 추밀원 의원이 과도 수상으로 취임했다.

쿠테타는 1992년 시민항쟁으로 훼손된 군의 자존심과 이들의 정치 개입을 일거에 회복시켰다. 또한 쿠테타를 통해 보수주의자들과 존왕주의자들은 권력 게임의 규칙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군부에 의해 수상직에 임명된 수라윳 장군은 국왕이 제시한 ‘자족경제’ 개념이 정부 경제정책의 기조가 될 것임을 선언하였는데, 이것은 기업가 정신의 제고를 강조하는 탁신의 경제정책과 대조를 이루었다. 특히 수라윳 과도정부는 군부 엘리트와 존왕주의자들로 채워졌다. 그들 중 많은 수가 과거 1991년 쿠테타로 집권한 군사정부에 연루되었던 인물들이었다.
  
결국 탁신정부의 와해를 바랬던 중산층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군부와 보수적 존왕주의자들에게 맡겼다. 그들은 탁신을 지지하고 또 그에게 표을 던진 빈민, 농민들이 아직 민주주의를 누릴만한 시민의식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보았다. 반탁신운동을 이끌었던 보수주의자들은 탁신퇴진운동을 남들이 낸 세금으로 혜택을 받고 그 대가로 탁신을 지지하고 있는 빈민들과의 계급전쟁으로 보았다. 이러한 반탁신운동을 통해 외견상 왕실은 전례없이 강력해졌고 군부와 관료들은 과거 그들이 누렸던 특권을 되찾게 되었다.
 
특히 왕실과 군의 관계가 보다 돈독해졌다. 2006년 쿠테타 이후 군과 왕실에 연을 맺고 있던 보수주의자들이 공직에 임명되었다. 군부가 임명한 과도의회는 2007년도 군 예산을 50% 증액시켰다. 2007년 신헌법에 따라 민정이양이 이루어졌지만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은 계속되었다.  2006년 9월 쿠데타를 국왕이 승인하자 인터넷 사이버 공간에 국왕을 비판하는 글이 오르기 시작했고, 정부당국은 이들에게 최고 15년형에 처해질 수 있는 왕실모독죄를 적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실을 비난하는 인터넷 사이트가 증가하자 정부당국은 이들 사이트 폐쇄에 나섰다. 2008년에는 저명한 원로 사회운동가인 술락 시와락이 왕실모독죄로 입건되었다. 왕립 출라롱껀대 짜이 응빠껀 교수는 왕실을 비난한 저서를 발간했다는 이유로 입건되자 영국으로 피신하였다.

일찍이 타이에서 사회운동과 정당정치가 만개했던 초유의 시기는 1973년 10월 14일 민주혁명과 그 결과로서의 1974년 헌정체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4년 헌정체제’는 군부를 비롯한 우익의 반발로 파국을 맞았다. 1992년 5월 시민항쟁을 계기로 ‘74년체제’의 개혁성을 발전시킨 새로운 개혁적 헌법을 구상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제정된 헌법이 1997년 헌법이고, 시민사회의 의사를 수렴한 가운데 제정되었다는 점에서 ‘국민헌법’으로까지 불렸다. 그리고 ‘97년체제’ 하에서 타이 최초의 정책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 탁신의 타이애국당이 집권할 수 있었다.

급기야 다양한 친서민 정책을 편 탁신의 포퓰리즘은 타이애국당이 민주헌정 사상 최초로 연립없이 단독 집권을 가능하게 했고, 동시에 ‘다수의 횡포’가 절정에 이르렀다. 결국 ‘다수의 횡포’에 따른 배제의 정치가 국가폭력과 인권침해 사례의 증가로 이어지자 일부 시민사회진영은 존왕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탁신 퇴진운동에 나섰다. 친서민정책을 통해 농촌에 절대적 지지기반을 갖고 있던 탁신은 이에 대해 의회해산과 선거로 맞섰다. 결국 수의 게임에 자신이 없는 반탁신진영은 쿠테타까지 ‘초대’하였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현 집권세력인 민주당은 쿠테타를 암묵적으로 지지하였다.  
 
탁신 지지세력으로 분류되는 ‘붉은 셔츠’는 오늘날 정국혼란의 근본 원인을 2006년 9월 쿠테타로 본다. 이들은 현 아피싯 정부가 군부로부터 독립적이라고 보고 있지 않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1997년 헌법의 복원을 주장하면서 수의 게임에 자신이 없는 현 아피싯 정부를 향해 의회해산과 총선실시를 압박하고 있다. 그러나 탁신을 부패한 독재자, 교활한 포퓰리스트로, 탁신을 지지하는 서민들을 포퓰리즘에 현혹된 집단으로 보는 지식인과 중산층 중심의 ‘노란 셔츠’의 저항 역시 만만치 않다.  

흔히 민주주의를 갈등의 제도화라고 표현한다. 타이 사례는 이러한 갈등의 제도화에 이르는 아시아 민주주의의 힘겨운 여정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박은홍(성공회대 아시아NGO정보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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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신자유주의와 포복형 권위주의

신자유주의로 규정되던 'MB노믹스'의 '변화'가 얘기되고 있다. '비지니스 프랜들리'를 강조하던 이명박 정부가 민생과 서민을 위한 경제를 강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어찌보면 매우 '합리적'이다.

경제의 정상화를 위해 성장 중심의 경제가 수반하는 '눈물의 계곡'이 불가피했고, 그 '계곡'을 어느 정도 넘어섰다고 판단되자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분배의 정치를 시도하는 위기 해결 경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의 대표적인 케인즈주의 학자가 현 정부의 총리로 임명된 것은 '분배의 정치'로의 변화를 기대하게 한다.

지난 1998년 경제위기 국면 속에서 한국에서 50년 만에 여야 정권 교체가 실현되자 이를 두고 '위기를 매개로 한 공고화'라는 표현을 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지금의 국면에서 일각에서는 위기를 매개로 한 보수적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우려한다.

물론 어느 한 정치학자가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진보 정당과 보수 정당 간의 권력 교환의 안정화'라고 정의하면서 이를 시계추 운동에 비유했을 때, 이 '시계추 효과'의 원리는 집권세력의 경제적 수행 능력에 대한 유권자의 심판이었다. 진보든 보수든 경제 관리에 실패했을 경우 '정적'에게 권력을 내놓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명박 정부의 궤도 수정은 '정치사업'으로서 손색이 없는 기획이다. 그러나 이러한 궤도 수정이 그동안 낮은 포복으로 진행되던 국가권력의 자유권 침해 문제에 대한 반성없이 진행될 경우 이는 'MB노믹스'의 '탁시노믹스화'라고 아니할 수 없다.

탁신의 타이애국당은 2001년에 기존 집권세력인 민주당의 신자유주의노선에 대한 대중적 반감을 등에 업고 제 1당으로 급부상했다. 국내 경제와 세계 경제와의 관계, 서민 경제와 자본주의, 이 두 개의 트랙을 동시에 발전시키겠다는 탁시노믹스(Thaksinomics)는 과거에 찾아 볼 수 없었던 케인즈주의 처방을 동원한 포퓰리즘 노선이었다. 구체적으로 탁시노믹스의 친서민 정책은 농가 채무지불유예, 저가의 기초의료서비스 공급, 농촌개발기금 후원 등이 실행되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탁신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에 대한 호응의 일환으로 민영화와 FTA를 추진하였다. 이러한 복합노선(dual track)의 탁시노믹스는 '사회적 자본주의', '불교사회주의', '사회적 화합' 등과 같은 담론의 지지를 받으며 급부상하였다. 급기야 두 번째 맞는 총선에서 탁신의 타이애국당은 압도적인 의석을 확보함으로써 다수의 지배를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탁시노믹스의 정치는 '사회적 화합'이라는 그럴듯한 이념과는 달리 남부지역 무슬림에 대한 차별과 테러, 마약소탕을 명분으로 한 비사법적 처형, 언론과 시민사회단체에 대한 규율 등 비자유주의적 양태를 점차 강화하기 시작했다. 선거에서의 승리라는 절차적 정당성을 등에 업고 이른바 '포복형 권위주의'(creeping authoritarianism)의 전형을 보여준 것이다.

문제는 이렇듯 '포복형 권위주의' 양상과 같이 진행된 탁시노믹스의 정치적 효과로 인해 시민사회, 지식인과 사회운동세력 내부가 분열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수도인 방콕의 유권자들은 탁신이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도시로부터 세금을 걷어 농촌에 쏟아붓고 있다고 비난했고, 포퓰리즘의 최대 수혜계층인 농촌 유권자들은 탁신의 비자유화 경향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절대적 지지를 보냈다.

반면 지식인과 사회운동진영도 탁신의 권위주의적 행태를 과거 군사독재에 빗대면서 맹공을 퍼붓는 세력과, 탁신의 친서민 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이를 비판하는 이들을 신자유주의자로 규정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특히 직접민주주의와 직접행동을 강조하는 공동체주의자들은 탁신의 '정치적 상술'에 도덕성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고강도의 공세를 폈다.

반면 일부 탁신 지지세력은 직접민주주의를 시대착오적 것으로 간주하면서 절차적 정당성을 갖고 있는 탁신을 매개로 한 공화주의적 정치변혁을 꾀하였다. 마침내 이러한 인식의 격차는 반탁신진영이 탁신을 권좌에서 내쫓은 반헌정 쿠데타를 지지하는 상황으로까지 발전한 반면, 탁신 지지세력은 군부가 휴지조각으로 만든 1997년 헌법의 복원과 탁신의 복귀를 요구하는 직접행동에 나섰다.

탁시노믹스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수용과 사회적 약자의 역량 강화라는 다분히 상충되어 보이는 두 개의 프로그램을 동시에 진행하겠다는 의도를 가진 '사회적 신자유주의'(social neo-liberalism)에 가깝다. 그러나 타이 사회운동은 의회에서의 다수의 지배를 배경으로 '포복형 권위주의'와 함께 진행되는 사회적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의 조직화에,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지적, 실천적 합의에 실패했다.

이제 한국 사회로 눈을 돌리자면 'MB노믹스'의 '합리적' 변화로부터 탁시노믹스와 같은 '포복형 권위주의'와 짝을 이룬 '사회적 신자유주의'가 연상케 됨을 숨길 수 없다. 그러기에 타이에서와는 달리 한국의 사회운동이 사회적 신자유주의와 다수의 지배라는 두 얼굴의 도전을 이겨낼 수 있는 패러다임을 조직해낼 수 있느냐에 아시아 사회운동은 주목하고 있을 것이다.

박은홍(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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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사태에서 나타난 시민사회의 갈등

얼마 전 친 탁신 세력 "붉은 셔츠"의 시위로 방콕 일대에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군 진압작전 중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공식 발표에 따르면 2명이 사망하고 100명이 훨씬 넘는 인명이 부상 당했다.

이 과정에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태국 시민사회의 입장이다. 지금까지 태국에서 군과 민간인이 충돌하는 수 차례의 유혈 사태가 발생할 때마다 시민사회는 한목소리로 군과 정부에 책임을 추궁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그 주된 이유는 시민사회의 중요 세력들이 이미 "붉은 셔츠"로 불리는 독재저항 민주주의 연합전선(UDD)과 "노란 셔츠" 부대 국민민주주의연대(PAD)로 나뉘어져 각각 제편들기 정치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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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친 탁신 세력 "붉은 셔츠"의 시위로 방콕 일대에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군 진압작전 중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AP=뉴시스

PAD는 2005년 초 언론재벌 쏜티 림텅꾼이 중심이 되어 만든 반 탁신 연합세력이다. PAD의 1, 2기 지도부에는 다양한 시민사회 운동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전국공기업노동조합 사무총장 쏨싹 꼬싸이쑥, 민주주의진흥위원회 위원장 피폽 통차이, 빈민회의 고문 쏨끼얏 퐁파이분, 태국전력공사 노조위원장 씨리차이 마이응암, 태국철도공사 노조 임원인 싸윗 깨우완, 여성과 헌법 대표 말리랏 깨우까 등이다. 또 1992년 5월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싸란유 웡끄라짱 같은 인물도 있다. 이외에도 전국노동조합연맹, 불교단체 싼띠아쏙, 변호사, 연예인, 청소년그룹 등이 PAD에 참여하고 있다.

UDD는 2006년 9월 쿠데타 발생 후 이에 반대해서 생겨난 친 탁신 지지 세력이다. UDD에도 시민사회 운동가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은 1992년 5월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학생 대표 짜뚜펀 프롬판, 1976년 쿠데타 후 끝까지 투쟁한 '카오빠 (산에 들어가서 끝까지 투쟁했던 시위대 그룹)' 중 일인인 웽 또찌라깐, '독재가 싫은 토요일의 사람들(끌룸콘완싸오 마이아오파뎃깐)' 창설자이자 대변인 위푸탈랭 팟타나푸미타이등이 있다. 북부와 동북부의 농민단체, 방콕의 노동자·택시기사단체 등도 주요세력으로 참여하고 있다.

PAD를 지지하는 시민사회운동세력들은 탁신 정권을 농촌 유권자들의 무지를 악용한 부패한 포퓰리즘 정권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포퓰리즘 정책에 매수당한 농민과 빈자들은 민주주의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투표권을 제한해야 하며, 의회의 70%는 임명직으로 하고 30%만 선출직으로 구성할 것을 주장한다.

이들은 탁신의 부정부패와 마약과의 전쟁이나 남부 무슬림 분리주의 운동을 무력진압 함으로써 발생한 인권유린 사태를 강력하게 비난했지만, 2006년 9월 쿠데타를 지지했고 2007년 개악된 헌법을 만드는 데도 앞장섰다. 그 주요 내용은 임명상원제도의 일부 부활, 정당정치와 의회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관료체제와 사법부의 권한을 강화시키는 등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것들이다. 개악된 헌법으로 치러진 2008년 선거 후 탁신이 지지한 팔랑쁘라차촌 당(PPP)이 압승을 거둔 후에는 막무가내식으로 정부청사와 수완나품 국제공항을 점거한 채, 군부와 사법부 지지를 받아 두 명의 총리를 쫓아내기도 했다.

대의민주주의 원리를 부정하고 법치를 무시하는 "탱크 리버럴"이라고 비난받기도 하는 이들은 주로 군부, 관료, 방콕을 중심으로 한 중산층, 왕정지지 기득권세력들과 이해를 같이한다.

UDD를 지지하는 시민사회운동세력들은 포퓰리즘 정책을 통해서 농민과 빈자를 보호하고 엘리트 민주주의, 낡은 관료주의 세력을 청산하고 일부 특권층이 아닌 모든 국민이 주인이 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을 주장한다. 이들은 국왕을 정치적으로 선점해 버린 PAD에 의해 공화정 추진세력으로 몰리고 있다.

표방하는 가치만으로 보면 UDD를 지지하는 시민사회운동세력들이 더 민주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들은 탁신이 포퓰리즘 정책을 추진하면서 저지른 인권유린과 사회운동탄압 사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부정부패에 대해서도 그것은 태국정치에 항상 있었던 것이고, 모든 정치인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탁신만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는 옹색한 입장을 보인다. 이들은 북부와 동북부 농민과 도시 빈민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PAD와 UDD에 속해 있는 각각의 시민사회운동세력들은 이번 유혈사태뿐 아니라 이후 부각되고 있는 중요한 정치적 이슈들에 대해서도 상이한 입장을 보인다. 이들은 정치개혁, 헌법개정, 새로운 총선 실시 문제 등에 대해 정파적 이해관계에 묶여 설득력 있는 독자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시민사회운동세력의 분열과 정치화는 태국 민주주의의 발전의 한계성을 노출시키고 있다고 하겠다.

김홍구 부산외대 태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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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가 보는 한국 민주주의 위기

아시아가 한국 민주주의의 퇴보를 우려하고 있다. 한때 한국 민주주의는 아시아 민주주의의 선두 대열에 서있다는 평을 받았지만 이제는 그런 호평을 기대하기 어렵다. 현 정부가 출범한 작년부터 주로 인권 후진국을 상대로 활동을 하던 국제앰네스티나 '포럼 아시아'와 같은 국제인권기구가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의 인권지수 악화를 경고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니 말이다.

물론 필자가 이전에도 강조했지만 '결손 민주주의', '선거 권위주의', '경제 헌정주의' 등으로 표현되는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위기는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특히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행보는 한때 한 나라를 기업화하려고 시도하였다가 파국을 맞고, 마침내 자국의 정치를 악순환의 굴레로 다시 밀어넣은 태국의 탁신 전 수상과 그가 이끈 타이락타이당을 연상케 한다.

태국의 경우 1990년대는 새로운 시민사회가 출현한 중요한 시기였다. 정치적 공간이 확장되고 '저항정치'가 발전하였다. 언론의 자유도 확대되고 토론문화가 확산되었다. 새로운 단체들이 우후죽순 처럼 생겨나고, 보다 다양한 요구가 정치영역에 반영되었다. 더 많은 대중들이 더 많은 자유, 더 많은 참여에 대한 욕구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대자본에 이러한 흐름은 위협적이었다. 과거 침묵하고 있던 농민들이 국가가 자의적으로 도시 성장을 위해 천연자원을 투입하는 것에 반발하고 나섰다. 자유주의적 운동과 공동체주의적 운동은 중앙집권적 국가의 종식과 다양한 사회적 요구에 민감한 정부를 희구하고 나섰다. 이러한 시민사회운동은 1997년 신헌법, 교육 및 보건개혁, 분권화와 같은 의제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탁신은 집권 초기에는 시민사회진영의 개혁 의제에 공감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적대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적대감이 그의 정치이념과 무관한 것이 아니나 그를 둘러싼 대자본의 우려를 반영한 것으로 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탁신은 예전보다는 좀 더 균등하게 성장의 결실을 나눠야만 대중적 지지를 살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식을 시민사회 주도가 아닌 국가 주도적인 것으로 고착시키려고 했다.

그러기에 탁신은 1990년대 내내 성장해온 자유주의운동, 공동체주의 운동과 부닥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탁신정권은 의회내 절대의석을 기반으로 그동안 확장되어온 정치적 공간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일부 비판적 지식인들은 '1976년 민중학살' 직후 시기를 제외하고 가장 강력한 언론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느끼까지 했다. 반대자들을 협박하고 길들이기 위해 군이 정치적으로 다시 활용됐다. '마약과의 전쟁'에 따른 대량 살상은 군사독재 시절 처럼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고 있으면서 이를 언제든지 악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저항적 행동'은 여지없이 채찍을 맞았다. 무슬림이 많이 사는 남부지역에서는 촌락 지도자들이 살해되거나 실종되었다. 심지어 인권 변호사까지 실종되었다.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공공연하게 모욕을 당하거나 말단 공무원들로부터 협박을 받았다. 비판적 지식인들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탁신에게 민주주의는 성장의 도구일 뿐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그는 법치를 '경영'의 종속변수로 보았다. 주로 법안을 통해서 혹은 과거 '안보국가'가 행했던 낡은 수법인 은밀한 방식으로 저항정치를 압박하였다. 또 규칙과 돈과 공권력을 수단으로 언론매체를 통제하였다. 특히 뉴스 내용에 대한 치밀한 관리를 통해 반대 목소리를 차단했다.

한마디로 탁신은 나라를 '기업'으로, 통치를 '경영'이라고 사고하였기에 국민들을 권리, 자유, 열망을 갖고 있는 시민이 아닌 소비자, 주주, 생산요소로만 간주하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그러기에 탁신은 시민사회로부터 아시아 민주주의의 선두대열에 있던 태국 민주주의를 반세기 전으로 되돌려, 또다른 일당국가체제를 만들려고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를테면 2003년에 인권 문제에 관련한 유엔의 비판이 있자 탁신은 "우리는 독립국가이고, 어느 누구한테도 머리를 숙이지 않을 것이다. 태국 국민은 단결해야 한다"는 식으로 맞대응했다. 그렇지만 시민단체들은 탁신정부가 "빈곤과의 전쟁"이 아닌 "빈민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2002년 초에는 22명의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44명의 외국인 활동가들이 조직범죄를 다루는 '돈세탁방지청'의 수사를 받고 있음이 드러났다.

탁신은 거듭해서 반정부성향의 시민단체들을 부당한 수법으로 해외 후원금을 챙기는 말썽꾼으로 묘사했다. 그는 자신들의 정책에 동조하는 시민단체들과는 협력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시민단체들은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식의 발언을 해댔다. 같은 해 초 정부는 시위 단속을 위한 보다 강력한 법적 장치를 모색하였다. 구체적으로 사전에 허락받지 않은 시위를 범죄시하는 법안을 만들려다가 여론에 밀려 포기하였다. 이미 폐지된 반공법과 유사한 보안법을 입안하려 하다가 이 역시 여론에 밀려 중단되었다. 그럼에도 탁신정권은 반테러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보다 큰 불만은 방송, 신문분야로부터 나왔다. 대표적인 예가 아이티비(iTV)의 예이다. 아이티비(iTV)는 1996년에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방송매체로 출범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1997년 금융위기 직전에 자금압박에 시달리면서 결국 탁신 가문 소유의 회사에 넘어가게 되었다. 2001년 총선 직전에 아이티비(iTV) 방송사 기자들이 탁신의 선거 보도 간섭에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자 즉시 20여명이 해고됐다. 2003년 9월에도 정치적 간섭에 반발하였다는 이유로 또다른 아이티비(iTV) 직원들이 해고됐다. 방송의 성격은 점점 오락 프로그램 중심으로 바뀌었다.

탁신의 언론매체 간섭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TV 방송사들이 기업인들의 사기를 북돋는 차원에서 부정적 뉴스는 줄이고 좀 더 긍정적 뉴스를 보도할 것을 주문하였다. 마침내 보도범위를 정부사업에 맞추고 정부에 부정적인 보도는 뺄 것을 요구하는 메모가 모든 라디오, TV 방송사에 보내졌다. 하나의 예로 메모 중에는 "민영화 반대는 방송되어서는 안된다"는 문구도 있었다. 자연히 모든 방송사들이 뉴스 프로그램을 줄이고 대신 정부행정, 범죄, 인물 등을 다루는 프로그램을 늘렸다. 당연히 저항정치나 비제도권 정치가 보도될 수 있는 여지가 좁아졌다. 반면 오락 프로그램, 특히 게임 쇼 프로그램이 늘어났다.

그러나 이렇듯 의회내 절대의석을 갖고 오만과 독선의 정치를 펴던 탁신정권도 '애국'을 기치로 내걸었으면서 자신은 세금 한 푼 안내고 어마어마한 액수의 주식을 외국기업에 판 '배신' 행각이 발각되자 방콕시민들의 거센 저항에 봉착했다. 그리고 마침내 군부 쿠테타로 붕괴하였다. 이때 절대의석을 기반으로 독선을 일삼았던 탁신과 타이락타이당은 지식인과 대중들에게 절차적 민주주의, 선거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을 깊게 남겼다. '좋은 쿠테타'도 있을 수 있다는 지극히 위험한 발상까지 횡행하게 됐다.

현재 태국 사회는 친탁신 진영과 반탁신 진영으로 두 동강 나 있다. 왕실과 군부의 위상이 다시금 현저히 높아진 상황 속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실종됐다. 주목할 것은 적지 않은 이들이 이렇듯 '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재앙의 기원을 "국가가 회사이고, 회사가 국가이기에 경영방식도 같다"는 최고경영자(CEO) 발상으로 독선과 전횡을 일삼던 탁신정권의 과오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 아시아 국가들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리고 그 우려의 대상에서 한국 민주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현 정부와 집권 여당은 정치적 소수자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시민사회에 대한 통제를 능사로 여기는 식의 '기업가적 발상'으로 국가를 경영하였다가 전면적인 대중적 저항에 직면하면서, 결국 자국 민주주의의 시계를 거꾸로 되돌려버리고, 스스로도 파국을 맞고 만 태국의 탁신 전 수상과 타이락타이당의 대과(大過)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박은홍/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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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신은 물러나고 민주당이 집권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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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콕의 수완나품 국제공항을 점거한 채 시위를 벌이던 국민민주주의연대(PAD) 소속 반정부 시위대원들이 지난 3일 점거 농성을 풀고 공항을 떠나면서 환호하고 있다. ⓒ신화=뉴시스

2008년 1월 팔랑쁘라차촌당(PPP) 집권 후 태국 정국은 극도로 불안했다. 반 탁신 세력 국민민주주의연대(PAD)는 탁신의 대리인 정권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해서 총리 퇴진 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여 왔다. 정부청사 점거, 비상사태 선포, 헌법재판소의 싸막 총리 직위 박탈 판결, 쏨차이 총리 취임, PAD의 국제공항 점거, 헌법재판소의 PPP 등 집권 3개 여당 해체 판결 등 정국은 바람 잘 날 없었다.

집권당 해체라는 미증유 사태 후 태국 의회는 임시회를 열고 민주당의 아피시트 웨차치와 총재를 제27대 총리로 선출했지만 그 전도는 밝지만은 않다.

단기적으로 민주당 정권은 이전보다는 안정적으로 정국을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국불안의 최대변수였던 PAD뿐 아니라 왕실, 군부, 사법부, 기득권층의 심정적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 보면 정국 불안요인은 도처에 깔려 있다.

무엇보다 친 탁신파와 반 탁신파 간의 갈등을 들 수 있다. 양 측은 지역적으로 친 탁신 세력이 우세한 북부, 동북부와 반 탁신 세력이 우세한 기타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고, 계층적으로는 농민, 도시빈민층과 중산층, 왕정파로 나뉘어져 있다.

지금까지는 PAD가 정국 불안의 제일 변수였다면 이제부터는 독재 저항 민주주의 연합전선(UDD)같은 친 탁신 세력이 주요 변수로 대두될 전망이다. 이미 탁신 지지자 수 백명은 아피시트 민주당 총재의 총리 선출 소식이 전해지던 날 그것이 불법임을 주장하며 의사당으로 통하는 길목을 막고 의원들이 탄 차의 유리창을 깨뜨리는 등 폭력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사실상 친 탁신 세력으로서는 민주당 정권의 출범은 용납하지 못 할 일이다. 2008년 초 PPP가 총선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두고도 탁신의 대리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두 차례 씩이나 총리가 물러나고 정당해산까지 당했으며 여전히 의회 내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립정부 구성에 실패했으니 그 억울함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탁신도 군부의 지지를 통해 출범한 민주당 정권의 불법성을 지적하고 나섰다. 군부는 이전부터 PPP 정부에 대해서는 비우호적이었다. 사막과 솜차이 총리가 두 차례씩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PAD 해산을 명했지만 따르지 않아 결과적으로 정권퇴진에 기여했을 뿐 만 아니라 민주당 주도 연립정부 구성과정에서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 것이 사실이다.

연립정부 구성도 정국 불안의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PPP 당보다 의석수가 훨씬 적은 민주당 정부는 구 집권 여당인 찻타이당, 마치마티빠따이당, 루엄짜이타이 찻파타나당, 프어팬딘당 뿐 아니라 PPP 당 일부 파벌과 연정을 구성했다.

과거부터 만성적 정국불안 요인 중 한 가지는 다당제에서 기인하는 연립정부의 취약성이었다. 과반수를 차지하는 절대 다수당이 부재한 가운데 소수당과의 불안정한 내각 구성으로 연립정부의 평균수명은 1년 남짓이었다. 2007년 12월 총선에서 민주당이 차지한 의석수는 165석(총 480석)이었으며 PPP 는 232석이었다. 비록 PPP는 소수당과 연립내각을 구성했지만 과반수에 육박하는 의석수를 차지했다.

민주당 연립정부는 235석(총 437석)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5개 정치파벌과 연립함으로써 취약성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이번 정부 구성에서 나타난바 같이 태국 정당들은 당파의 이해에 따른 이합집산이 격심하다. 정당과 정치인들은 주로 내각직이나 지역구 예산분배 등과 같은 이해관계에 따라 수시로 정치적 입장을 바꾸어 왔다.

지금은 민주당을 지지하고 있는 PAD의 입장변화도 정국 불안의 또 다른 변수가 될 수 있다. PAD는 포퓰리즘에 기반한 부패정치를 뿌리 뽑기 위해서 현재와 같은 1인 1표에 기초한 민주주의는 태국 실정에 맞지 않기 때문에 임명직 의원 70%, 선출직 의원 30%로 하는 새로운 선거제도로의 개편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이 현 정권 하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PAD는 정치적 지지를 철회 할 수 도 있다. PAD 주장은 궁극적으로는 헌법개정을 통해 실현될 수 있는 데 친 탁씬 세력들은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해 부패혐의로 2년형을 선고 받고 망명 중인 탁씬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또 다른 목적으로 현행헌법의 개정을 요구함으로써 정국 불안이 고조될 가능성이 높다.

경제위기도 정국의 안정을 크게 해 칠 수 있다. 현재의 경제위기는 대외적 요인은 물론이고 국내정치 불안에서 기인한다. 내년 경제성장률은 2%, 실업자는 100만 명이 예상된다. 국제공항 점거사태로 관광, 수출, 수입, 운송, 항공분야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사실상 민주당이 2001년 총선에서 탁신의 타이락타이당에게 참패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경제 문제였다. 민주당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과 구조조정에 반발하는 세력들의 불만을 규합하여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것이 탁신의 타이락타이당이었다. 집권 후 탁신이 실시한 경제정책은 비난도 받았지만 큰 지지를 받은 것도 사실이다. 민주당 정권 출범 직후 태국의 경제사정이 악화될 것이라고 주장한 탁신은 앞으로 경제 CEO 총리였던 자신에 대한 국민적 기대를 다시 불러일으키려 애쓸 것이며 민주당 정권의 경제위기 해결능력은 정국안정에 큰 변수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위의 다양한 정국 불안요인 중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친 탁신과 반 탁신 세력간의 갈등에서 기인한 정치적, 사회적 분열 현상이다. 더구나 지금까지 사회통합의 중심 역할을 해 온 푸미폰 국왕의 역할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은 더 할 수 있다. 이미 반 탁신 세력에 의해서 선점 돼버린 국왕이 갖는 정당성은 과거와 다르게 축소되어 있다.

앞으로 정치 불안은 입헌군주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질서와 체제변화에 대한 요구까지 촉발시킬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얼마 전 이와 관련해 자신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반 국왕파로 몰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 탁신의 언급은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김홍구/ 부산외대 태국어과 교수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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