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담한 인권 유린…"독재의 역사를 기억하라"



버마(미얀마)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아니 이미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다. 상황은 우리의 1980년 5월 광주를 연상케한다.

88년 유혈 진압, 그래도 투쟁은 계속됐다

버마 군사정권의 야만성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1962년 이후 정치, 경제적으로 실정을 범한 버마 군부는 학생들이 주동이 되었던 1988년 8월 8일 민주항쟁을 유혈 진압한 바 있다. 그로 인해 수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유혈 진압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박이 고조되자 군부는 민주화세력과의 타협책의 일환으로 1990년 5월 총선을 치루었다.

선거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웅산 수지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과 민주화세력의 압승으로 끝났다. 반면 군부는 2%의 의석만을 얻는 대참패를 당했다. 그러나 군부는 파렴치하게 권력 이양을 거부하고 공안정국을 다시 재개하였다. 정당한 절차에 따라 국회의원에 당선된 선량들이 투옥되거나 망명 길에 올라야 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학생들 역시 투옥되거나 무장투쟁에 가담하거나 제3국을 찾았다.

이미 이른바 8888 민주항쟁을 이끌었던 민꼬나잉은 1989년에 투옥된 상태였다. 26세에 군부에 의해 사회로부터 차단된 그는 16년간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이렇듯 '시간이 정지된 땅' 버마에는 민꼬나잉과 비슷한 고난의 시절을 겪었고 또 겪고 있는 30대, 40대의 학생들이 많다.

특히 군부가 대학의 문을 폐쇄하고 수많은 민주인사들을 투옥하거나 망명 길에 오르도록 하는 등 저항정치의 보루를 아예 봉쇄하면서 해외에 기지를 둔 민주투사들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특히 태국은 1990년 총선에서 국민의 종복으로 선출되었던 정치인들의 중요한 투쟁 기지가 되었다. 이들의 해외 활동은 미국과 유럽연합(EU)을 비롯한 서방진영이 버마군사정권에 대해 지속적으로 제재를 가하도록 하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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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도, 한국 '군사정부이건 아니건 상관없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제재, 그 중에서도 특히 경제제재의 효과는 이렇다 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은 아세안 창설 30주년을 맞은 1997년에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동남아시아'라는 기치하에 버마에 아세안 정회원 자격을 부여했다.

이때 아세안은 '건설적 관여'라는 이름하에 '경제교류'와 '개발'을 지렛대로 버마의 정치 변화를 이끌어내겠다는 '의지'(?)를 시사했다. 물론 아세안의 '건설적 관여'는 '내정불간섭주의'를 표방해온 '아세안 방식'의 틀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버마 군사정부의 태도변화가 난망 상태에 빠지면서 서방과 국제인권단체, 그리고 해외에서 활동하는 버마 민주투사들의 압박은 아세안의 불간섭주의를 조금씩 변화시켰다. 대표적인 예로 아세안의 보이지 않는 압력에 따른 버마 군사정부의 2006년 아세안 의장국 지위 포기를 들 수 있다. 이는 직접적으로는 버마의 아세안의장국 지위 반대를 주도한 지역내 인권단체들과 '버마문제를 생각하는 아세안 의원 모임'의 성과로 얘기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은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버마군사정부와의 관계를 돈독히 해나갔다. 심지어 인도까지도 실용적 차원에서 그동안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버마군사정부와의 관계 개선을 꾀했다. 이는 이들에게 개발주의를 천명한 군사정부하의 버마가 실리를 챙길 수 있는 '시장'으로 비추어졌기 때문이다.

한국정부 역시 대우인터네셔날이 버마에서 가스전 개발권을 따냈을 때 민간외교의 쾌거인양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가스개발 사업에 한국가스공사까지 참여하였다.

투자와 민주화는 별개? 버마인들의 피폐한 삶을 보라

1990년 총선 결과에 승복하지 않은 버마 군부는 정치적 정당성의 결함을 아시아 역내 국가들과의 적극적인 경제교류를 통한 경제회생으로 보완하려는 전략을 취하였다. 그간 군사평의회의 명칭을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LROC)에서 국가평화개발위원회(SPDC)로 바꾼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동안 싱가포르, 영국, 태국 등이 최대 투자국이었고 한국, 인도, 중국 등이 부상하는 신생 투자국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번 민주항쟁의 배경이 되었던 석유값과 천연가스값의 앙등은 민생경제의 파탄과 군사정권이 내걸었던 개발주의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사실상 국민들의 삶의 질은 더욱 피폐해진 것이다. 이러한 빈곤의 악화는 개발의 과실이 국민이 아닌 군부의 호주머니로 들어간 결과라고 얘기할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미국에 의한 공격 가능성을 이유로 추진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양곤 북쪽 산악지대로의 무리한 수도이전은 국민경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일련의 현상은 아웅산 수지를 비롯한 버마 민주화세력이 어째서 국제사회를 향해 민주화될 때까지만이라도 투자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던, 그리고 아세안의 '건설적 관여'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던 그 이유를 되돌아보게 한다.

국제사회의 노력 없이 '야만의 시대' 끝날 수 있을까

이번 대규모 민주항쟁에 대한 유혈진압을 계기로 버마군부는 1990년 이후 지성의 산실인 대학을 폐쇄했듯이 버마족의 정신적 스승인 승려들을 향해 총구멍을 겨누고 사찰까지 폐쇄해야할 상황을 맞았다.

승려들의 비폭력 평화적 시위는 1988년 이후 20년 가까이 공포정치 하에서 숨죽여 있던 버마 시민사회를 일거에 회생시켰다. 승려들이 주도한 시위대의 구호는 승려들에 대한 공권력의 파렴치한 폭력 행위에 대한 사과, 연료값 인하, 시위도중 구속된 승려들에 대한 석방 등과 같은 비정치적 이슈에서 모든 물가 인하, 모든 정치범 석방 등과 같은 정치적 이슈로 급격히 발전하였다.

그러나 팍코쿠에서 시작된 승려들의 시위가 수도 양곤과 제2의 도시인 만달레이로 확대되고 여기에 일반 시민들까지 동참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승려들이 아웅산 수지를 거론하기 시작하면서 버마 군사정부의 인내력은 현저히 저하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우려한 바대로 얼마 안 있어 군사정부에 의한 유혈진압이 1988년처럼 다시 자행되었다.

현재로서 버마 국내에서의 비폭력 평화적 시위에 의한 군정 종식의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해보인다. 버마 국민들과 승려들, 민주투사들은 자신들의 에너지를 동원할 수 있는만큼 다 동원하였다. 국제사회가 야만적인 군사정부에 자행되고 있는 참담하기 그지없는 인권유린을 종식시키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버마는 영원히 야만의 시대에 갇힐지도 모른다.

'5월 광주'의 정신을 잇는 '참여정부' 아니었나

우리 한국사회가 이만큼 민주화될 수 있었던 데에는 우리가 군사독재 시기에 있었을 때 외부에서 우리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열렬히 지원해주었던 국제사회의 노력도 큰 몫을 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제 우리 사회도 그 빚을 하나씩 갚아 나가야 한다. 왜 우리가 군부에 의해 인간의 최소한의 기본권인 생명권조차 유린되고 있는 버마로 시야를 넓혀야 하는지 이제는 너무나 명확해졌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위급한 시점에서 보다 힘있게 압박할 수 있는 방법은 정부 수준에서 가능하다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얘기이다. 아직도 현정부가 '5월 광주'의 정신을 잇는 '참여정부'임을 자임한다면, 유엔인권이사국 진출에 성공하고 유엔사무총장을 낸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면, 무엇보다도 버마 군사정부에 압박을 가할 수 있는 강력한 인권외교의 지렛대를 사용해야 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슬픔과 분노로 고통받고 있는 버마 국민과 민주투사들에게 '5월 광주'와 '6월 항쟁'으로 거듭 태어난 우리 사회야말로 진정한 친구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버마 45년 군사독재체제를 종식시키기 위해 우리사회가 버마 민주투사들, 국제사회와 적극 연대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박은홍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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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총칼로 탄압하는 버마군정을 강력히 규탄하며, 한국 정부가 버마 민주화를 위한 인권 평화 외교에 적극 나설 것을 촉구한다

버마 민주화를 위해 평화 시위에 참가했다 군사정권의 총칼에 숨져간 버마 시민의 넋을 기리며 머리 숙여 명복을 빕니다.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를 위해 활동해 온 한국 전역의 450여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는 한국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는, 지난 45년간 군사독재정권의 폭정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3000여명이 희생된 지난 1988년 8월 8일의 무자비한 폭력을 딛고 마침내 오늘 다시 민주화를 위한 큰 걸음에 나선 버마 민중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한국 역시 30여년 가까이 군사독재 정권으로 인한 엄혹한 폭정의 시절을 경험하였기에 버마인들의 고통과 절망,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한 처절한 열망이 그 얼마나 지난한 싸움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의 버마인들의 싸움이, 부정과 부패로 인한 핍박과 빈곤의 고통을 단 일분일초라도 연장시킬 수 없다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걸음이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버마 군사 정권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유혈 진압한 사태에 직면하여 ‘미얀마’의 국명을 버마로 지칭할 것임을 밝힙니다.

미얀마라는 국호는 1988년 민주주의를 촉구하는 수많은 시민을 학살한 군부세력에 의해 불법적으로 변경된 국호입니다. 현 버마 정부은 시민의 손으로 선출하지 되지 않은 군사정부로, 그 정통성을 국제사회가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의 시민사회와 언론이 공동행동을 취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우리는 다수 국민들이 참여한 평화적 시위조차 총칼로 무자비하게 억누르는 버마군사정부에 분노를 표합니다.

현재 UN의 감바리 특사가 버마를 방문 중에 있으나 버마정권은 이를 빌미로 더 무자비한 폭력으로 시위 군중들을 해산시키고 있습니다. 모든 정상적인 언론활동과 정보가 차단된 속에서 이미 희생자가 수백 명에 이른다는 추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폭력으로 사람의 입과 귀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버마정부는 당장 무자비한 폭력진압을 멈춰야 합니다. 아울러 버마정부는 국민들의 입과 귀를 막고 있는 통신규제를 당장 해제해야 할 것입니다. 진실을 총칼로 가둘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경제교역만을 추구하며 버마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외면한 한국정부가 버마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를 지지하는 입장과 정책을 밝힐 것을 강력히 촉구합니다.

한국은 버마에 무기를 팔고 천연자원 개발 사업에 참여해 왔습니다. 이러한 경제활동의 결과 상당 부분은 버마 군부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습니다. 더욱이 한국의 공기업과 민간 기업이 참여한 천연가스 등의 개발 사업은 중국 등 외국에 팔리는 것으로 한국의 에너지 자원 확보와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경제교역을 이유로 한국정부가, 버마 군사정부가 버마 시민의 민주화 요구를 폭력으로 억압하는 행위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국제사회의 웃음거리가 될 뿐 아니라 버마 군부의 공범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정부는 버마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와 총칼을 동원한 무자비한 탄압에 대해 항의하는 공식적인 입장과 정책을 공표하여야 합니다. 나아가 버마 군사정권의 잇속을 채워줄 수 있는 일들을 중단하고 나아가 경제제제를 포함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미 미국, 영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그리고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는 이번 사태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고 버마군정에 대하여 자제를 강력히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번 사태는 지난 45년간 철권통치를 해온 군부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폭압정치에 항의하는 버마민중들의 염원이 하루속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다음을 강력히 촉구합니다.

1) 버마 승려들과 무고한 시민들의 평화적 시위에 대해 총격과 폭력 등 무력진압으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는 버마 정부를 규탄한다.

2) 버마 군사정부는 아웅산 수치 여사를 비롯한 버마의 모든 정치범들을 즉각 석방하고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보장하라.

3) 버마 군사정부는 민주주의와 평화 정착을 위해 나선 버마 시민 및 민주세력과 의미 있는 대화에 즉각 나설 것을 촉구한다.

4) 한국정부는 지금까지의 버마 민주화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를 버리고, 시민들의 평화적 민주화 시위를 무력진압하는 버마군정에 대한 항의 입장을 분명히 공표하고, 경제제재를 포함한 평화와 인권에 기초한 모든 외교적 노력과 중재역할에도 적극 나설 것을 촉구한다.

5) 한국 시민사회단체는 버마의 진정한 평화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다양한 노력과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며, 버마 민주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것이다.


2007년 10월 1일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공동대표 남윤인순 박두규 안정선 양철호 유경희 윤영진 윤준하 이강현

이상진 이학영 임종대 전형수 홍재웅

공동운영위원장 김제선 민만기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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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국민들의 반정부 민주화를 요구하는 평화적인 시위에 대하여 군사정권이 발포를 하여 사망자를 내는 등 유혈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이에 우리는 버마의 민주화 요구를 강력히 지지하며, 그동안의 민주화 요구를 외면하며 유혈사태까지 일으킨 버마군사정권을 규탄한다. 또한 한국정부는 그동안 버마민주화에 대하여 침묵해온 태도를 버리고 버마의 민주화 요구를 지지하는 입장과 정책을 밝힐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버마 군사정권이 지난달 15일 예고 없이 천연가스 가격 5배, 경유 가격 2배, 휘발유 가격 67%를 각각 인상한데 항의하면서 시작된 시위는 군정의 폭압적인 통치에 저항하는 반정부, 민주화 요구 시위로 확산되었다. 승려들과 민주화 단체들이 이끄는 이번 시위는 수주째 계속되어 10여만명으로 늘어났으며 시위대 진압 과정에서 이미 200여명이 체포, 구금되었다.

어제 9월 26일에는 양곤에서 반정부시위를 계속하는 승려와 시민들에 대한 강제진압에 나선 군경이 발포를 하여 승려를 포함하여 최소한 5명이 숨지고 100여명이 부상하는 유혈사태가 발생하였다.

버마군정은 시위대에 대한 무력진압을 당장 중지하여야 한다. 군사정부는 야간통행과 집회 금지령을 내리고 시위대에 발포를 시작함에 따라 3000여명의 희생자를 낳은 1988년 민주화운동 진압 사태가 재연될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의 유혈 사태는 없어야 하며 하루빨리 군부가 물러나고 버마에 민주화가 오기를 강력히 희망한다.

또한 우리는 그동안 경제교역만을 추구하며 버마의 민주화 요구를 외면한 한국정부가 민주화 요구 시위를 지지하는 입장과 정책을 밝힐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이미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는 이번 사태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고 버마군정에 대하여 자제를 강력히 촉구하고 있다.

이번 사태는 지난 45년간 철권통치를 해온 군부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폭압정치에 항의하는 버마민중들의 염원이 하루속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다음을 강력히 촉구한다.

1. 버마군사정권은 평화시위에 대한 무력진압을 당장 중지하라

1. 버마군사정권은 아웅산 수지를 포함한 모든 정치범을 석방하고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보장하라

1. 한국정부는 버마군정의 유혈진압에 항의하고, 민주화를 지지하는 입장과 정책을 밝혀라.


2007년 9월 27일


버마 민족민주동맹(NLD-LA) 한국지부/버마행동/인권실천시민연대/나와우리/참여연대/이주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버마민주화를 지원하는 모임/경계를 넘어/ 거창평화인권예술제위원회/구속노동자후원회/광주인권운동센터/다산인권센터/대항지구화행동/동성애자인권연대/문화연대/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주주의법학연구회/부산인권센터/불교인권위원회/빈곤과 차별에 저항하는 인권운동연대/사회진보연대/새사회연대/아시아평화인권연대/안산노동인권센터/에이즈 인권모임 나누리+/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울산인권운동연대/원불교인권위원회/이주노동자인권연대/인권과 평화를 위한 국제민주연대/인권운동사랑방/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장애우 권익문제 연구소/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준)/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전북 평화와 인권연대/전쟁없는 세상/진보네트워크센터/천주교인권위원회/평화인권연대/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친구사이/한국교회인권센터/한국DPI(한국장애인연맹)/한국 성적소수자 문화인권센터>/인권연구소 ‘창’/(재)5ㆍ18기념재단/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다함께/한국진보연대/아시아태평양노동자연대 한국위원회/한국노동네트워크/오산 노동문화센터/오산 다솜교회/함께하는 시민행동 (총 56개 단체)
국제연대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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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유감



지난 몇 년간 우리가 아시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약방의 감초처럼 끼어들었던 주제가 한류다. 가까운 일본과 중국을 시작으로, 처음에는 동남아시아 국가들로, 중앙 아시아로, 중남미로 확산되었던 한류는 우리 내부로부터 다양한 반응을 이끌어 냈다.

이제 와서 한류에 대해서 한마디 더 거드는 것이 어쩌면 너무 늦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이미 아시아에서 한류가 지는 해라는 관찰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한류의 열풍이 식어가는 문제가 아니라, 한류에 대한 반동으로 일본의 혐한류와 같은 생각들이 서로 모습과 정도를 달리 해서 한류가 확산되었던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정황도 포착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초기의 열풍의 단계를 지난 지금이 오히려 한류에 대해서 더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바라 볼 수 있는 시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세계방방 곡곡에 숨어 있는 한류를 찾아내는 미디어

필자가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도대체 왜 “한류”인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다시 뒤집어 보면, 왜 우리가 흔히 한류라고 부르는 이 흐름에 “대한민국”, “한민족”이라는 민족주의적 꼬리표를 붙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며, 그에 대한 반동으로 한류에서 민족주의적 힘을 빼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의 한류는 지나치게 어깨에 대한민국이란 견장을 차고 힘을 잔뜩 주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한류라는 단어 자체는 “국산”이 아니다. 필자가 알고 있기로는 중국에서 붙은 이름이다. 하지만, 한류라는 이름을 사랑하고 애용하고, 거기에 민족과 대한민국의 꼬리표를 붙인 것은 분명 우리다.

국민 개개인이 한류의 확산을 보고 우리의 문화적 힘이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고 자랑스러워한다. 정부차원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한류의 확산은 우리 대한민국의 경제적 이익은 물론 국가적 자긍심을 높이고, 세계시장에서 국가 브랜드의 이미지를 높이고,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떨친다고 규정하며, 온갖 지원을 아까지 않고 있다.

신문과 방송들은 앞 다투어 세계방방 곡곡에 숨어 있는 한류를 찾아내어 “대한민국~”을 외치기에 앞장서고 있다. 얼마 전에는 인도 북부 마니푸르주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국어로 사랑의 밀어를 나누는 것이 대 유행이고, 한류의 확산 결과라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다. 웬만한 한국사람이면 평생 한번 입에 올릴까 말까 하는 인도의 한 주 이름까지 들춰내며 한류 확산에 돋보기를 들이대고 있다.

인터넷에서도 외국 사람들이 한글이 인쇄된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사진이 화제가 되고 있다. 화제를 넘어서 외국의 유명 배우 누구누구도 한글로 된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며 은근히 자랑스러워하는 눈치다. 새로 나오는 대작 드라마나 제작단계에서 화제를 불렀던 드라마는 모두 한류시장을 겨냥한다. 새로 나오는 가수와 연기자들은 모두 한류 스타를 꿈꾼다. 자 이쯤 되면 은근히 문화적 우월의식이 우리 속에 자리 잡을 법도 하다. 충분히 가능하다.

지나친 자랑은 열등감의 또 다른 표현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본다. 우리가 한류의 확산에 대한민국과 한민족의 꼬리표를 붙이고, 거기서 자부심을 느끼고, 더 나아가 문화적 우월의식을 느끼는 것, 그 자체가 또 다른 열등감의 표현은 아닐까? 생각해보면, 1970-80년대 한국의 안방과 극장을 장악했던 홍콩과 중국의 영화들, 그리고 늘 우리 곁에(?) 있는 헐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영화들, 이런 것들에 대해서 홍류(香流), 중류(中流), 미류(美流)라는 이름을 붙여 본적이 없는 것 같다. 정확하게 그런 명칭은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왜? 굳이 그런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식 속에 중국권인 홍콩과 중국 자체는 원래 대국이다. 미국도 두말할 나위 없이 대국이다. 그런 나라의 영화에 환호하고, 그런 나라의 스타에 환호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왜? 대국이니까. 우리나라보다 큰 나라고 강한 나라니까. 그들의 문화적 상품이 한국으로 들어오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생각되었으니까(물론 그런 수출을 하는 입장에서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 그런 이름을 만들어 내지 않았겠지만).

그럼 뒤집어서 우리의 문화상품이 세계로 나가는 것에 굳이 고집스럽게 “Made in Korea"라는 낙인을 강하고 진하게 새겨 넣는 것은 지금까지 변방에 힘없고 작은 나라였던 한국이 이정도 할 수 있다는 이만큼 커졌다는 인상을 너무 너무 세계에 알리고 싶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지나친 자랑은 오히려 열등감을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우리가 남들보다 못하다는,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보다 못하다는 열등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남들보다 잘났다는 우월의식도 가질 필요가 없다. 우리 스스로에 대한 평가로 자주적이고 자부심을 갖는 다는 것은 우리와 남이 같이 있을 때 평등하다는 생각도 반드시 동반해야 할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자랑스럽다고 해서 남을 폄하할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남들보다 객관적으로 좀 못하다고 해서 열등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이재현(연세대 연구교수, 국제연대위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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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개발원조의 철학부터 공감해야



한국 국민에게는 아직 생소한 공적개발원조(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이하 ODA)에 대한 관심이 최근 급증하고 있다. 한국은 그간 개발원조의 수원국에서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저개발국이나 개발도상국에 원조 자금을 제공하는 공여국으로 위치를 탈바꿈했다. 정부는 OECD 국가로서의 책무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원조 자금을 급속히 증가시키고 있지만, 원조사업을 수행할 만한 통일적 기구가 없다든지, 사업을 수행하는 절차상에 원칙이나 가이드 라인이 없다든지 한다는 점에서 시민사회나 언론들의 비판을 받아 왔다. 특히 버마나 필리핀 등에서 보고되는 ODA의 부정적 영향 사례들의 대응 차원에서라도, 정책 변화의 시급성이 제기되고 있다.

'민중중심의 지속 가능한 개발'을 모토로

2007년 7월 25일, ODA 사업을 하는 아시아 시민사회 단체들의 회의가 필리핀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는 ODA에 대한 정책수립이나 모니터링을 수행하는 15국가의 89명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참가하였다. 이 자리에서 수원국과 공여국의 시민단체들은 자국의 ODA사업 현황이나 영향에 대해 공유하였으며, 바람직한 정책 변화에 대한 의견들을 개진하였다. 요컨대, ‘민중중심의 지속 가능한 개발’을 모토로 하여, 그간 국제기구에서 논의되어 온 ODA에 대한 정책 논의를 실질적, 절차적으로 구축하고, ODA 진행과정에 민중이나 시민사회가 참여할 수 있는 정책과정을 구조화하자는 것이 핵심 논의였다.

2000년 UN이 지구상의 빈곤문제를 경감하기 위해 새천년개발목표(MDGs)를 발표한 것을 필두로, 국제사회는 빈곤 근절이라는 공통과제를 공유했으며, 이를 위해 ODA의 효율적이고 민주적인 수행을 위해 여러 합의를 도출했다. 2002년 멕시코의 몬테레이에서 열린UN 개발기금 정상회의에서는, 선진국은 GNI의 0.7%를 ODA 기금으로 이용해야 한다는데 합의했으며, 2005년 파리선언에서는 공여국의 책무성을 강조하는 구체적인 행동방침 등을 공유했다.

이와 같이 수사(rhetoric)상에서는 국제기구나 국가들의 ODA 이념이나 정책 상에 많은 진전이 있었지만, 최근 ODA의 군사적 이용이나 빈곤국가의 외채 비율 심화 등의 문제들이 불거지면서 ODA 원칙에 대한 재합의나 절차에 대한 불투명성 등의 문제가 쟁점이 되고 있다. 최근 선진국들의 ODA 예산이 양적으로 줄어들고 있다는 것도 문제지만, 사업 내용이나 절차 면에서도 많은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데 핵심적으로 논의되었던 문제들은 다음과 같다.

● 구속성 원조의 문제

우선 공여국들이 원조자금을 지급하면서 제시하는 ‘융자 조건(conditionality)’이 문제되고 있다. 수원국의 하부구조건설이나 재난 복구라는 미명하에 자국 회사들의 건설 참여를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에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일본의 경우, 인도네시아에서 프로젝트 수행시 일본 전문가를 고용하거나 일본 자재를 구입할 것을 선결조건으로 제시했다. 2000년에서 2005년 사이에 필리핀에서 있었던 25개 일본의 ODA 사업 중에 단 3개만이 조건이 없는 프로젝트였다.

● 부채의 문제

OECD의 개발원조위원회의 기준에 따르면 무상원조비율이 25% 이상이 되면 ODA로 인정된다. 유상원조라 하더라도 다른 융자자금에 비하면 이자율이 낮지만 유상원조는 결국 수원국의 부채가 된다. 필리핀의 경우, 1986년에서 2006년 사이에 제공받은379억불 가운데 84%가 차관 형식이었다. 2006년 기준으로 필리핀은 총36조원 가량의 외채가 있는데, 2006년에만 이 외채에 대한 이자로 지급된 액수가 6조 8천억원으로 전체 예산의 32%를 차지했다.

● 하부구조건설 사업에 편중된 ODA

ODA 자금 중 교육, 보건, 주거와 관련된 비중은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하부구조건설 사업에 편중되는 경향이 있다. 2001년에서 2006년 필리핀의 이 부문 원조자금은 67%에 달했다. 원조자금에 부수되는 민영화 정책때문에, 기초 서비스 부문에 대한 일반인들의 부담은 커지고 있으며, 하부 구조 건설 사업과 관련한 빈민들의 철거문제나 환경 파괴 등이 심각해 지고 있다.

● 인권 침해 사례

수원국의 모든 개개인의 지속 가능한 개발을 도모한다는 ODA가 도시빈민, 원주민 등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기본적인 인권을 침해하는 사례 등이 발생하고 있다. 필리핀의 경우, 일본 ODA 자금으로 지어지고 있는 산로케 댐 건설을 반대하던 원주민 대표가 살해되는 사례가 있었으며, 한국 정부에 의한 남부통근철도 사업과 관련하여 이주될 3만가구 이상의 빈민 중에는 정부 기구의 위협과 회유로 인해 지방으로 돌아가거나 기초 서비스 시설이 불완전한 지역으로 옮겨간 이주민들이 대거 발생하고 있다.

● 군사 목적으로의 전환

9.11 테러 이후 선진국들은 공적 자금을 테러 방지나 분쟁지역의 군사력을 강화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가장 큰 ODA를 받고 있는 나라는 이라크이며, 분쟁국가들에 대한 외채탕감을 해 주는 간접 지원이 ODA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아시아 국가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비슷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일본은 인도네시아에 자국의 경비정들을 지원하고 있으며, 호주는 필리핀의 민다나오에서 군사훈련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수행하고 있다.

ODA 정책 걸음마 단계에 있는 한국, 철학부터 공감해야

회의에 참여한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ODA의 근본 취지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 자금이 차관이 아니라 100% 무상원조가 되어야 하며, 또한 공여국의 경제적, 정치적 이익을 대변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ODA가 영향을 미칠 수원국들의 인권문제는, 권고사항이나 고려사항이 아니라 핵심적으로 추구되어야 할 ‘선행 목표’라는 점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인권 실현 중심의 정책변화를 위해서는 시민사회나 수혜자들의 참여가 중요하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한국이나 일본 같은 공여국의 시민사회 단체들은 정부의 정책결정과정이나 시행과정이 민주적이고 투명하도록 견제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갖고 있으며, 수원국들의 시민단체들은 각국의 정부가 주도력을 가지고 다수민중들의 삶을 향상시키도록 견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정부는 ODA에 있어서는 아직 철학과 원칙을 제대로 수립하지 못한 걸음마 단계에 있다. 이러한 절차나 정책상의 변화가 시급하지만, 그보다도 일반 대중이 대외 원조에 대한 철학을 공감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아쉽게도 아직 한국 사회에서는 국민의 세금이 자국 기업의 경제적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하다. 아시아의 새로운 패권국으로서의 등극은, 동시에 ‘가해자’의 반열에 오르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할 때이다.

정법모(필리핀대학 인류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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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아시아 교육의 필요성과 그 실태



“당신은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가

르완다와 부룬디가 잠비아와 짐바브웨가

어떻게 다른지 모릅니다

엘살바도르와 니카라과 과테말라가

그러나 당신은

중국인이나 일본인으로 오인되는 것이 싫습니다”

-이승원의 시 <감성적 독재> 중에서

위의 나라들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면 가까운 곳부터 생각해보자. 일본과 중국. 분명한 차이점을 모두들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가, 캄보디아와 라오스가 어떻게 다른지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바레인과 시리아가, 예멘과 요르단이 어떻게 다른지는? 우리나라와 이들 나라를 이어주고 있는 것은 기껏해야 1년에 한 차례 있을까 말까한 국가대표 축구경기 정도다. 또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외국인 노동자들의 모습에서 그들의 국적을 읽어내려고 할 때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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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우리는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이다. 교과서에 버젓이 잘못된 지식을 늘어놓고서 다른 나라의 교과서가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면 당장에 이의를 제기한다. ‘반크(VANK)’는 한국을 잘못 알고 있는 외국인에게 제대로 된 지식을 전달하고자 만든 선의의 단체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행위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남의 눈에 티는 보면서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일본 군인에게 짓밟힌 우리네 조상들만큼이나 베트남 전쟁 때 한국 군인에게 사살되었던 많은 베트남 민간인들의 영혼도 억울하기는 마찬가지다. 나의 고통은 오래 남지만 타인의 상처는 쉽게 잊어서일까?

언젠가 안산의 한 지하철 역에서 나이가 지긋하신 아저씨와 중동 출신으로 보이는 외국인 노동자가 한바탕 설전을 벌이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다. “야, 너네 나라로 돌아가. 여기서 뭐하는 거야? 이런 XXX.” 아저씨의 욕설을 그는 또박또박한 한국말로 받아냈다. “아저씨, 술 먹었으면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요. 그리고 나 XXX 아니야.” 그렇다. 그는 하나의 사람이다. 누구나처럼 인격이 있다. TV에 비친 이슬람 근본주의자 모습을 전부의 모습이라 오인하면서 사람들은 때때로 그들에게 인격이 있다는 것조차 잊나 보다.

우리는 아시아를 정말 모른다. 이렇게 우리에게 가깝고도 먼 나라인 아시아 국가에 대해 알 수 있는 계기가 참여연대에 의해 마련되었다. 2007년 7월 19일 저녁에 좁은 강당에 모여 귀에는 익었지만 낯선 아시아에 관한 세번째 이야기를 들으러 사람들이 모였다. 주제는 [한국사회에서 아시아 교육의 필요성과 그 실태]. 우리는 정말로 아시아를 모른다. 게다가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도 모른다. 외국인 100만 시대라고들 한다. 그 중 대부분은 아시아인이다. 이제서라도 아시아를 주제로 한 포럼이 있으니 반가운 마음이 든다. 그 날의 강당 속으로 들어가 보자.

유네스코에서 일하는 이승미 팀장은 한국이 점점 다양해지는 사회구성원들의 문화적, 인종적 배경을 아우를 수 있는 다문화교육과 국제이해교육이 필요하다고 했다. 늘 맹목적인 애국심을 강요하고 반공을 교육의 핵심으로 삼던 시절은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 교육은 단일 민족의 전통을 강조하고 순혈주의 속에 갇혀 있다. 한 민족 안의 통합은 결속력이 강하지만 동시에 배제도 강력하여 자칫 인종주의의 나락으로 빠져들 위험이 있다. 다문화교육은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고 이로 인한 행동과 사고 방식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을 강조하는 교육이다. 배타적인 우리 사회도 문화의 차이는 구획지어 배척할 대상이 아니라 사회 안으로 포섭할 수 있는 대상임을 배워야 한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산업구조가 고도화되면서 인력이 서비스 산업으로 빠져나가 비어 있는 2차 산업의 끝자락을 거의 이주 노동자들이 메우고 있는 실정이다. 돈을 벌려는 이들의 필요와 한국 사회의 변화 양상이 맞물려 진행된 이 상황은 세계화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이해하고 해결할 수가 없다. 이를 위한 교육이 바로 국제이해교육이다.

교육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한국의 상황과 엮어 내 머릿속에 차분히 정리하기가 어려워서인지 집중이 잘 되지는 않았다. 어떻게 교육을 할 것인가의 문제는 손에 잘 잡히지 않는 관념을 논의하기 때문일까? 이승민 팀장이 했던 강연이 아시아 교육의 ‘필요성’이라면 다음 강연자인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 교수의 강연은 ‘실태’에 대한 것이었다. 앞의 것이 ‘어떻게’의 문제라면 뒤의 것은 ‘무엇이’의 문제이다.

카랑카랑하지만 느긋한 목소리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질문에 날카로운 지적을 하면서 내가 미처 알지 못하던 관점과 사실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동북공정에 대해 우리 국민들은 민족적인 적대심을 가지고 있다.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에 편입하는 데 대해 역사 왜곡이라고 반발한다. 그러나 이 교수에 따르면 대부분의 국가는 영토사와 민족사가 각기 다르다. 우리나라는 특이하게도 영토사와 민족사가 일치한다. 오늘날의 국가들은 영토와 민족 모두에 대한 역사를 아우르려 하는데, 중국의 영토사가 우리의 민족사를 자극하게 되어 나타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옛 고구려의 땅은 현재 중국의 땅이다. 고구려 민족은 중국에 속한 민족의 역사라 할 수 없지만 고구려 땅은 중국 영토의 엄연한 과거 모습이다.

이 교수는 우리나라같이 민족과 국가에 대해 통합이 잘 되어 있는 곳에서는 인구의 2~3%정도를 차지하는 외국인들은 사회를 역동적이게 하는 힘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정도에도 우리 정부는 강경 정책을 쓰고 우리 국민은 이를 심정적으로 지지한다고. 프랑스는 이미 외국인 이민자의 수가 10%에 다다라 정치 세력화할 수 있으므로 이를 견제하려 강경 정책을 편다고 한다. 관용의 나라로만 알고 있던 프랑스여서 의아했었는데, 자국의 정체성을 지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이를 이해하게 되었다. 동시에 우리나라 역사 인식과 외국인 정책의 딱딱함에 살짝 몸서리를 쳤다.

이 교수는 세계사와 세계지리 교과서의 오류 수준이 너무 심각하여 따로 하나의 책을 만들려고 모임을 만들었다고 한다. 단일민족 이데올로기와 서구에서 일방적으로 이식된 사관에 의해 다른 나라의 역사적 사실이 심각할 정도로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아랍어 표기에 불과한 알라(Allah)가 일부 교과서에서 “알라 신”이라 표현된다든지, 예언자 무함마드(모하메트)의 초상화를 제작하는 등의 우상 숭배를 끔찍이 싫어하는 이슬람의 특성을 모르고 무함마드의 모습을 교과서에 번듯이 싣는다든지 한다고 이 교수는 비판한다. 어떤 외국 교과서가 독도와 동해를 다케시마, 일본해라고 한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비난하겠지만, 우리나라 교과서에도 아라비아 만 대신 페르시아 만만 표기되어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외에도 소승불교가 대승불교보다 이기적이라는 그릇된 이해, 인도 역사 중 카스트 제도의 성립부터 간디에 이르는 방대한 기간의 누락으로 인한 천박한 인식, 중국 위주의 사관으로 생긴 흉노, 돌궐 등의 유목민 대한 저열한 편견 등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대체로 서구의 관점을 비판과 검증 없이 받아들이거나, 전문가의 충분한 검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문제다. 지금은 비용 때문에 잘못 만들어진 교과서를 회수하거나 제대로 된 교과서를 다시 찍어내기도 힘들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 대한 잘못된 역사적 사실과 그릇된 편견 때문에 사람들의 머리마다 굳어진 이미지들을 벗겨내려면 더 큰 비용이 들지도 모른다.

끝나고 나니 이런 기회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주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좁은 강당임에도 사람이 가득 차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우리 사회와 역사에 아무런 관심 없이 그저 자본의 욕구를 위해 꾸역꾸역 한 몸 바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는 이 사회에서 적게나마 아시아에 대한 관심으로 모인 사람들이 반가웠다. 우리 민족과 역사를 사랑하시는 노신사의 장황한 질문에 사람들이 술렁이기도 했지만, 아시아와 한국의 역사를 탐구하기 위해 늘그막에도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은 멋지다고 생각했다.

우주처럼 넓은 아시아에 별처럼 많은 사람들, 그들에게 조금 더 다가가는 계기가 된 강연이었다. 무지가 화를 부른다고 했던가? 우리와 외국인 노동자와의 갈등은 서로를 모르기에 촉발된 게 아닌가 한다. 그러하기에 아시아를 배우는 것은 단순한 지(知)의 차원이 아니라 선(善)의 차원이리라.

이정봉 (희망제작소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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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2월 1일 네팔 갸넨드라 국왕은 총리를 파면하고 국회를 해산시켜 네팔을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다. 국왕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여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 때부터 그의 행보에 대항하는 네팔 민중의 시위가 일어났다. 2006년 4월 21일까지 민중의 거센 저항은 계속되고, 수도인 카트만두에서 시위에 참여하는 군중도 10만명에서 20만명으로 늘어났다. 마침내 국왕은 2006년 4월 24일, 해산시킨 하원을 다시 복원시키고 대국민연설을 통해, 7개 정당 연합으로 하여금 새로운 총리를 지명하도록 했다. “이제 네팔의 행정권을 국민에게 돌려준다. 앞으로 7개 정당 연합이 정부 운영의 책임을 질 후임 총리를 추천해주길 바란다.” 이는 네팔 민중에게 있어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2006년의 이 역사적인 움직임과 정치적 변화 후, 네팔은 빠른 시일 내에 새로운 네팔을 건설하기 위해 많은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역사적인 움직임(Jana Andolon)은 네팔 민중에게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평화에 대한 많은 희망을 안겨 주었다. 네팔은 가시적인 민주화 과정을 포함한 몇 가지 성과를 이루었는데, 괄목할 만한 것으로는 7개 당과 마오이스트들 사이에 체결된 8개의 합의와 행동강령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7개 당과 마오이스트들 사이의 역사적인 합의와 네팔 정부와 마오이스트들(CPN-Maoist) 사이의 포괄적인 평화적 합의를 담고 있는데, 특히 무기와 군대 행정을 감시하고, 임시 헌법 제정, 마오이스트를 포함하는 임시 과도 정부 구성 등을 담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업적은 네팔이 밝은 미래로 향하고 있다는 조짐이다. 정당 역시 새로운 네팔을 위한 길을 닦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난 6월 중순 제헌 의회 선거가 실시되지 못하고연기되면서 많은 네팔 민중은 실망과 좌절을 겪기도 했다. 세계의 갈등 해결 역사와 비교하면, 네팔의 갈등 해결의 추이와 속도는 빠른 편이다. 그러나 네팔 동부(Tarai)의 최근 움직임과 분열, 불안정성의 증가는 정부에 큰 도전이 되고 있다. 비록 제헌 의회 선거가 마오이스트와 네팔 정부의 주요 의제라 해도, 동부 네팔인(Madhesi), 불가촉민(Dalits), 토착민, 여성 그리고 그외 다양한 집단의 요구에 귀 기울이지 않은 채 선거를 실시한다면 좋은 결과를 맺지 못할 것이다. 민주주의 건설 이후 네팔 정치에서 제헌 의회 선거는 가장 중요한 이슈였다. 하지만, 제헌 의회 선거를 위한 적절한 운영방식과 선거체제도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다.

네팔 동부지역의 불안정과 혼란은 앞으로 정부에게 가장 큰 도전으로 자리할 것 같다. 네팔 전체의 발전이란 측면에서, 우리는 21세기의 권력이 단지 한 정당이나 집단이 아닌 민중에게 있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네팔에는 많은 이해 집단들이 있다. 네팔은 오랫동안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불균형을 경험했다. 네팔에는 그간 무시되고 억압받고 소외된 많은 집단들이 있다. 네팔 정부의 목표인 ‘신 네팔 건설’을 방해하는 주요 문제는 뿌리깊은 계층간, 성별간, 언어간, 지역간 불균형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금 네팔은 기회를 맞고 있다. 선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문제가 다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모든 집단들의 요구를 더 잘 해결해야 한다는 도전도 한편에 있다.

무엇이 행해져야 하는가?

첫째, 무엇보다도 정당들이 단합해야 한다. 현재 신 네팔 건설의 진전을 방해하려는 구시대적이고 반동적인 요소들이 아직 많다. 따라서 모든 정당들은 그들을 분열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이 세력들을 잘 파악해야 한다. 만약 정당들이 이 세력들의 함정에 빠진다면, 네팔은 전쟁터가 될 것이며, 아무도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고, 국가 자체가 분열될 지도 모른다. 따라서 정당들은 서로 잘 협력하여 신 네팔의 기틀을 다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한다.

둘째, 사람들의 열망을 잘 실현하고 대중 운동의 성과를 제도화하기 위해서 정부, 정당, 시민사회가 서로 협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동부 네팔인(Madhesi), 불가촉민, 토착민, 여성 그리고 또 다른 동요하고 있는 집단의 요구가 다뤄지도록 즉각 포괄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따라서 특별히 수세기 동안 배제되고, 소외되고, 착취당해 온 사람들을 올바르게 대표할 수 있는 선거체계를 만들기 위해 현 선거체계를 재검토해야 한다. 그들이 앞으로 있을 의회선거에서 제대로 대표되지 않는다면, 헌법 작성과정은 국민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포괄적이지도 않고, 민주적이지도 않으며, 대표성을 띨 수도 없다. 이 문제가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는다면 더 극심한 무정부주의와 분쟁이 나타날 것이고 결국 이는 내전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셋째, 대부분의 정당들이 이번 선거를 통해서 네팔에 공화제를 수립할 것을 소리 높여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어떤 정당도 공화정의 뚜렷한 형태와 운영방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오랫동안 공화정을 위해서 투쟁해왔다고 하는 네팔 공산당 마오이스트들도(CPN-Maioist) 마찬가지다. 모든 정당들은 매우 투명한 공화제 국가의 형태와 그들의 발전 패러다임, 그리고 그 추진 일정을 제시해야 한다.

넷째, 최근 네팔은 좋지 못한 의도를 가진 세력으로부터 간섭을 받고 있으며, 이는 네팔의 평화와 민주화 과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여기서 나는 네팔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변화를 위해 국제사회의 어떤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우리는 그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네팔 사람들은 외부세력의 과도한 개입이 네팔의 평화를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네팔이 국제사회로부터 현재 필요로 하는 것은 그들의 친절한 마음과 연대이다. 그러므로 국제 세력은 네팔 국민의 열망을 존중하여 다가올 11월 선거를 통해 그들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 국제사회가 네팔에게 지금 줄 수 있는 도움은 네팔이 자유롭고 공정하고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선거를 치룰 수 있도록 네팔 정부를 돕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네팔인들이 그 도움에 대해 감사해 할 것이다.

이런 조치들 만으로 새로운 네팔 건설이 충분히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조치들이 성공적인 선거를 치를 건설적인 환경을 만들 것이며, 바로 여기에 네팔의 미래가 달려 있다.
지번 바니야 (아주대 국제대학원 NGO학과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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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으로 '선심성 뚜쟁이'가 된 지자체



얼마 전 지자체 농어민 국제결혼 지원 사업이 화제의 뉴스가 되고 이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진 바 있다. 찬반의 논리 이전에 이런 사업이 실시되고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몰랐던 필자는 일단 그 규모와 확산 범위에 먼저 놀랐다.

올 5월 현재 3개 광역시도(경남, 경북, 제주)와 전국 60여개의 기초자치단체에서 이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전국 지자체의 1/4에 해당하는 수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경남(95%)과 경북(83%)에서는 대다수의 기초자치단체가 이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예산의 규모도 2007년 약 25억 5천만 원이 책정되어 지자체 마다 다르지만, 1인당 500여만 원의 지원을 받아 국제결혼 업체를 통해 신붓감을 찾고 있다.

혹자는 이 제도가 우리나라 농촌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제도라고 하며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취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엉뚱하게도 외국의 신부들이 들어오면 한국사회가 그 만큼 다양해지고 다문화 사회가 되지 않겠는가, 그러니 오히려 장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한다. 필자는 분명히 이것이 장려할만한 사업은 아니라 생각한다.

중앙정부는 왜 입다물고 있는가

물론 외국의 신부들(혹은 신랑들)이 한국사회로 들어오는 것은 폐쇄적이고 타문화에 배타적인 한국사회를 바꾸는데 큰 도움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유입이 자발적이지 않고, 중계를 통한 것이라면 장려하기에는 좀 쑥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반대할 만한 사안도 아니다. 단, 다음과 같은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적어도 현재 지자체의 사업들을 봤을 때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는 우려를 씻기 어렵다. 따라서 필자는 지금 현재의 사업에 반대한다.

우선 현재 지자체들이 벌이는 사업은 불법과 탈법, 의혹으로 얼룩져 있다. 이 사업들은 지자체를 통해서 지원을 받은 농어촌 남성들이 국제결혼중개업체를 통해서 외국 신부들을 만나 결혼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일부 국가(베트남과 필리핀)에서는 상업적인 결혼중개 행위 자체가 불법이다. 따라서 지자체의 예산과 이름으로 농어촌 남성들이 외국에 나가서 불법행위를 버젓이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또 지자체와 결혼중개업체간의 돈거래도 전혀 투명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일부 지자체에서는 결혼중개업체로 지원금을 직접 입금하는가 하면, 1인당 성사비용도 중개업체의 이윤을 보전해주기 위해서 인상되었다는 의혹이 있다. 다시 말하면 지자체에서 세금으로 조성된 예산을 가지고 결혼중개업체에 금전적 특혜를 주고 있다는 말이다.

두 번째로 제도적 차원에서도 일부 지자체는 “이혼 또는 배우자의 거주지 무단이탈 시 지원금을 환수”하는 조항을 두어 결혼에 문제가 있을 경우 책임을 당사자 개인에게 묻는다. 부부관계와 결혼의 유지라는 것을 돈을 미끼로 하여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지원금을 받은 죄로 이혼도 하지 못한다. 또 이미 한국에 들어와 살고 있는 외국인 신부들이 한국사회에 정착하도록 하는 지원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외국인 신부들을 들여오는데 정착지원의 여섯 배에 해당하는 예산을 쏟아 붓고 있다. 들어와서는 어찌 되었든지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지자체에서 이런 사업들을 벌이고 있는 것에 대해서 중앙정부는 실태 파악이나 하고 있었는지? 한 정당과 시민단체들이 이 제도의 문제점을 다룬 토론회를 개최하고 언론에 이 사안이 보도된 이후에도 중앙정부에서 이에 대한 어떤 의견을 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해남군 공문에 "베트남 여성은 몸매가 환상적"

세 번째의 문제점은 필자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다. 이 사업을 시행하고, 그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이 사업에 대해서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문제다. 지방정부가 다음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한 “선심성 뚜쟁이”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백번 양보하여 농촌의 현실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이유로 봐주기로 하자. 우리가 낸 세금이 농어촌 남성들이 배우자를 찾는데 쓰이면 그것도 사회복지 차원의 문제가 아닌가라고 우리 자신을 설득해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이 사업이 단순한, 그리고 선의의 뚜쟁이 사업이 아니라, 국제결혼이란 탈을 쓴 “인신매매”가 아닌가 의심스럽다.

얼마 전 국내 일부 결혼중개업체들이 외국인 신부에 대해서 모욕적인 단어들을 동원하여 광고하면서 국제적, 국내적 비난을 산 것을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이건 돈에 눈이 먼 사기업들의 한심한 작태라 치자. 하지만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도 아닌 지방자치단체도 그런 비슷한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어떨까? 해남군의 한 지방의회 의원이 공개한 이 사업 관련 지자체의 ‘공문’은 우리를 경악케 한다. 해남군의 국제결혼 협조 공문에 “베트남 여성은 남편을 하나님처럼 모시고 사는, 지구상의 마지막 남은 순수함을 지닌 천사”, “남편에게 헌신적이고, 몸매가 환상적이며, 소식하는 식문화를 가지고 있어 살이 찐 여성이 거의 없다”라는 문구가 있다. 일전에 비난을 샀던 결혼중개업체의 광고내용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시각을 가진 지방자치단체가 추진하는 국제결혼 중개는 ‘인신매매’의 다른 형태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 공무원들의 더 낮아질 수 없을 정도로 한 없이 낮은 인식수준이 개탄스럽다. 이런 인식 하에 진행되는 국제결혼지원사업을 어떻게 환영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 농촌사회의 문제가 심각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농촌에는 노인층만 남아 있고, 그나마 남은 젊은 세대들, 특히 남성들은 결혼하여 농촌에 살려는 배우자감이 없어서 결혼적령기를 훌쩍 넘겨버리고, 농촌에서는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지 않으며 농촌학교들은 하나 둘씩 폐교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는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대책이 있었던가? 어쩌다 농촌의 문제가 언론에 불거지기라도 하면 땜빵식, 대증요법식의 짜깁기 대책만이 난무해왔다. 이 국제결혼 지원사업도 문제의 근원을 파고들어 해결하는 대책이 아닌 짜깁기 대책의 전형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업을 발상한 기본적인 인식에 있어 매우 큰 문제를 안고 있는 그런 사업이다. 지금이라도, 좀 시간이 걸리더라도 농촌문제에 관한 종합적인 긴 호흡의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재현(한국동남아연구소 선임 연구원,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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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연대사업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완성시켜가는 또 다른 길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결정적 전환점이자 정점이었던 5.18 민중항쟁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민족의 통일과 인류의 평화를 실현하는데 헌신하고자 설립된 5.18기념재단은 뜻을 같이하는 일반국민과 광주시민의 기금을 포함해 5.18 피해자들이 정부로부터 받은 보상금 일부 출연으로 1994년 8월 30일 설립한 비영리 재단법인이다. 초기 출범 당시에는 재정여건 상 5.18기념행사를 중심으로 기념사업을 전개하였으나, 1998년 광주광역시에서 보관하던 국민성금이 출연되고, 20주년이 되던 해인 2000년도부터 사업비의 일부를 국가로부터 지원받으면서 관련 기념사업이 성장해 왔다.

5.18기념재단의 여러 사업 중 국제연대사업은 2000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됐는데, 아시아 지역의 인권관련 희생자와 가족, 관련 활동가를 초청하여 연대와 경험을 나누는 시간을 갖던 ‘아시아민주희생자 광주네트워크’ 행사로 시작된 된 국제사업은 스리랑카 실종자 행사를 지원하면서 그 규모가 더해져, 2004년에는 광주국제평화포럼(구 광주국제평화캠프)행사가 처음 조직되었으며, 2007년 올해에는 약 100명의 아시아지역 시민사회단체 활동가와 50여명의 국내단체 국제연대 활동가가 모여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5.18항쟁 직후 외롭고 힘겨운 진실규명 투쟁 뒤에는 언제나 세계도처에서 오월광주를 지지하는 성원과 후원이 더욱 큰 용기를 얻게 되었으며, 명예를 온전히 회복한 지금의 시점에서 이를 다시 되돌려 줄 수 있는 길을 5.18기념재단은 아시아에서 찾았다. 특히 금년 광주국제평화포럼 행사를 통해 5.18기념재단은 가칭‘아시아민주화운동 네트워크 출범을 위한 추진위원회’사무국이 되어 그동안 광주가 아시아 민주주의와 인권운동의 네트워크를 위한 공간을 제공하던 역할을 넘어 광주를 중심으로 아시아의 상시적이고 구체적인 형태의 협력과 연대활동을 연결하는 역할로 성장하기 위해 준비 중이며, 이를 계기로 재단의 국제협력사업도 새로운 변화와 발전을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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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와 같은 준비모임을 추진해오기까지 5.18기념재단은 그 단계와 과정을 한 걸음 한 걸음 거쳐 왔다. 특히 아시아지역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관련 사업들은 2004년부터 전국적인 단위의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토론과 심의에 의해 진행되었고, 재단 역시 추진위원회의 결과를 전폭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러나 5.18에 대한 자료제공과 국제적인 활동가를 위한 네트워크 공간 제공이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 국제사업의 형식은 참여하는 활동가들에 의해 보다 구체적이고 더 높은 수준의 연대 활동과 지원을 요구받게 되었으며, 2007년 행사를 기점으로 변화를 꾀하게 되었다.

2007 광주국제평화포럼의 의미

1999년 재단은 5.18기념행사 주간에 ‘아시아민주희생자 광주네트워크’라는 명칭으로 아시아의 인권관련 희생자 가족과 활동가를 꾸준하게 초청하여 그들의 경험을 듣고 5.18민주화운동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아시아인권위원회(상임대표 : 바실페르난도, 2001년 광주인권상 수상자)의 추천을 받아 소규모 초청행사에서 시작된 이 네트워크 모임은 2004년에 ‘광주국제평화캠프’라는 명칭으로 바뀌게 되었고, 행사의 규모도 국제적인 관련 활동가들의 네트워크 공간으로 발전하였다. 2004년부터 개최된‘광주국제평화캠프’행사는 행사추진을 위한 추진위원회를 전국 관련 단체에서 구성하여 준비하였으며, 그동안 ‘아시아인권과정,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학살문제, 전쟁, 국가폭력, 개발과 인권, 아시아의 분쟁과 NGO의 평화만들기’라는 주제들을 다루었다.

2007년에는 국제협력팀의 올해 사업목표를 반영하기 위해 행사명칭을 ‘캠프’에서 ‘포럼’으로 변경하여 지난 5월 15일부터 18일까지 개최하였다. 아시아지역 인권시민사회단체 활동가 90여명과 국내참가자 40여명등 130여명의 참가자가 참여한 이번 행사는 특히 태국에 위치한 포럼아시아(사무총장 이성훈)의 ‘동아시아인권포럼’ 행사와 함께 공동으로 개최되어 명실공히 5월기념행사 기간에 개최되는 대표적인 국제행사로 치러졌다.

한편, 국내시민사회단체 국제사업 활동가를 위한 프로그램이 그동안 행사 기간 중에 편성되어 있었으나, 형식적인 편성에 그쳐 구체적인 이슈나 사안을 가지고 논의와 협의가 없었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래서 올해 평화포럼 행사에는 별도의 국내단체 활동가 워크숍을 진행하게 되었다. 비록 참가자와 단체의 숫자는 많지 않았으나, 한국인권재단의 양영미 상임이사의 진행으로 워크숍에 참여한 각 단체의 국제 사업내용들이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되었고, 각 단체에서 사전에 보내온 활동내용을 담은 자료집이 배포되었으며, 이 모임을 통해서 앞으로 국내 단체 간의 네트워크를 활성화 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아시아 민주화운동 네트워크

그동안 평화캠프 등 우리재단에서 개최했던 크고 작은 국제 행사에 참여한 아시아지역 시민사회활동가와 전문가들은 광주가 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더 많은 역할과 지원을 해줄 것을 요구해 왔다. 최근에 들어 한국에서 개최하는 여러 국제행사들의 후속조치가 미비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재단의 행사 역시 이러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것은 사실 아시아의 대표적인 인권도시라는 거창한 명제에 사로잡혀 자칫 또 다른 오해를 불러 올 수 있다는 데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해가 지날수록 아시아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을 위한 네트워크 공간을 제공하는 역할을 넘어서는 수준의 요구를 받기에 이르렀고,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관련 부서 역시 재단 내부에서 국제협력사업의 내용이 한층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위해서는 이와 같은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별도의 내부적인 근거 수립이 매우 절실했다. 이에 지난해 10월과 금년 2월에 우리재단의 사업과 연관된 아시아 지역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과 준비모임을 가졌고, 2007 광주국제평화포럼 행사를 통해 민주화운동 네트워크와 관련된 논의를 공식적으로 진행하기에 이르렀다.

2007 광주국제평화포럼이 남긴 것

2007 광주국제평화포럼 중 아시아 민주화운동 네트워크에 참여한 40여명의 국내외 인권시민단체 관계자와 활동가들은 토론을 통해 발전적이고 상호간의 시너지 효과를 모색하며, 행동으로 실천하고 이슈나 사안에 대해 즉각적인 조치를 할 수 있는 협의체 기구를 구성하는데 의견을 모으고, 10여개 지역단체와 네트워크 단체가 참가하는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1차 회의를 개최하여 명칭과 기구의 성격, 활동내용 등에 대해 결정하기로 하였다. 이 추진위원회 회의는 5.18기념재단의 지원하에 2007년 하반기에 아시아국가(태국의 방콕, 필리핀의 마닐라 또는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지역적 협의회를 개최하기로 하였으며, 5.18기념재단은 추진위원회의 간사역할과 함께 필요한 재정적 지원을 하기로 하였다.

한편, 평화포럼 행사를 통해 네트워크 추진위원회에서 다루어질 의제로는 첫째, 총체적인 인권침해와 필리핀에서의 법외살인에 대한 면책과 같은‘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에 대한 직접적인 행동, 둘째, 민주주의 투쟁 또는 인권침해 관련 희생자들에 대한 지원, 셋째, 능력개발과 경험이 적은 법률가 또는 인권 활동가들에 대한 훈련과 교육, 민주화투쟁에 대한 기억들을 세대 간의 소통을 위하여 그리고 젊은 세대들에게 또는 다가올 세대들에게 기억을 전달하기 위하여 문서화와 보존 사업 실시 등이 그것이며, 여기에 덧붙여 필리핀과 스리랑카의 강제실종, 인권변호사와 관련 활동가들에 대한 정치적 암살, 버마의 군부 독재하에서 자행되고 있는 모든 형태의 탄압과 인권침해의 사례들을 우선적인 대상으로 하여 국제적인 연대활동과 캠페인을 전개하는 것에 대해 의견을 나눌 예정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국내 민주화를 완성하지 못한 처지에서 해외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해 연대 사업을 진행하는 것에 대해 마뜩찮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5.18기념재단이 추진해온 아시아 지역의 민주주의와 인권과 관련한 연대사업과 지원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완성시켜가는 또 다른 길이기도 하다. 우리 이웃의 인권과 민주주의 발전 없이 우리의 인권과 민주주의가 성장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광주라는 지리적 불리함과 여러 가지 어려운 한계를 극복하고 추진해온 5.18기념재단의 작지만 소중한 국제연대활동은 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증진시키는 또 하나의 경계에 서있다고 볼 수 있다.

김찬호 (5.18기념재단 국제협력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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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내용>

- 필리핀 군부의 정치살해 관여를 입증한 두 보고서

- 필리핀 총선의 전후

- 필리핀 군부에 차량을 지원한 한국정부
국제연대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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