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정치살해와 관련된 필리핀 군부의 개입

국제적인 인권문제 당사자인 필리핀 군부에 대한 차량지원의 부당성 지적



최근 필리핀에서 지속되고 있는 정치살해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경계를 너머, 아시아의 친구들, 인권과 평화를 위한 국제민주연대, 참여연대,.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 국제연대 위원회, 환경운동연합 등 이 문제에 대해 대응하고 있는 한국의 시민사회단체들은 오늘 (4월 17일), 한국정부가 지난 4월 11일, 필리핀 군부에 덤프 및 화물트럭 134대, 불도저 7대를 지원 하였다는 뉴스를 접한 후 외교통상부와 국방부에 공개질의서를 발송하였다.

필리핀 정치살해 중단을 촉구하는 한국의 시민사회단체들은 질의서를 통해, (1) 필리핀 정치살해 문제의 심각성, (2) 필리핀 정부가 구성한 독립조사위원회의 보고서 및 유엔인권특별보고관의 보고서를 통해 필리핀 군부가 이 정치살해에 개입한 점, (3)미국 의회에서도 이 문제를 두고 미국정부의 필리핀 군부에 대한 지원이 논란이 되고 있는 점, (4) 유엔인권이사회 이사국이자 현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한 국가로서의 한국정부의 책임성을 이번 질의의 배경으로 밝히고 한국정부의 필리핀 군부에 대한 차량지원이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특히 올해 3월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인권이사회에 필리핀 정치살해와 관련된 유엔 인권 특별 보고관 필립 알스턴(Philip Alston)씨의 보고서가 보고되었음에도 지난 4월 11일 필리핀 언론에 차량지원관련 뉴스가 나온 것에 주목한다. 우리는 이 차량지원이 어떤 경로와 목적으로 이루어졌고 결정 책임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이에 소요된 예산과 필리핀 군부로부터의 대가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하여 질의하였다.

한국정부의 필리핀 군부에 대한 차량지원 관련 질의서

[질의 배경]

○ 필리핀의 인권단체 카라파탄(Karapatan)의 보고에 의하면 아로요 정권이 집권한 지난 2001년 이후, 필리핀에서는 약 900명이상의 시민운동가, 변호사, 성직자, 학생, 농민운동가, 진보정당 활동가, 농민, 노조활동가 등이 무장괴한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필리핀 공산반군이나 무슬림 분리 독립주의자와 직접적 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살해당하고 있으며, 설사 이들이 그런 세력과 관련성이 있다할지라도 재판과정도 없이 필리핀 군부 혹은 군부의 지원을 받는 무장 세력에 의해 살해당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인권문제임을 국제사회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의 시민사회 역시 이문제가 심각한 인권문제임을 인식하고 지난해부터 한국 내 필리핀 이주노동자 단체와 함께 이 문제에 대하여 대응해 오고 있습니다.

○ 이러한 정치살해(Political Killings)에 필리핀 군부가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양한 경로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아로요 대통령의 명령에 의해 이 문제에 대한 조사활동을 벌인 멜로위원회의 보고서 5페이지의 명백한 사실(UNDISPUTED FACTS)에 따르면 “ 군부가 정치살해의 증가원인을 공산반군에 대한 숙청에 돌림으로써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The military establishment itself acknowledges this, by attributing the rise in killings to a 'purge' of ranks by the CPP-NPA)."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최근 유엔인권이사회에 보고 된 인권특별보고관 Philip Alston씨의 보고서에도 ”군의 전투대상순위에 올라있는 상당수의 사람이 군과 경찰이 관련된 사건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볼 때 군 당국의 이러한 행동은 부적절하다(첨부된 알스턴 보고서 4페이지 “Orders of Battle”에서 인용)."고 밝히고 있습니다.

○ 또한 올해 3월 15 필리핀 ABS-CBN 보도에 의하면 미국 상원 외교 분과 동아시아 태평양 소위원회 위원장인 바바라 복서(Barbara Boxer) 의원(캘리포니아주)이 상원외교관계위원회 청문회에서 정치살해의 배후에 필리핀 군부가 있음을 지적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시행정부가 2004년부터 2006년까지 필리핀 군부에 7000만달러의 군사원조를 한 것에 대하여 해명을 요구하였습니다.

○ 한국이 유엔인권이사회의 이사국이자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한 국가로서 국제사회에서 맡은 바 책임이 큰 만큼, 심각한 인권문제의 당사자로 지목되고 있는 필리핀 군부에 물자를 지원한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정당한 재판절차를 무시한 채 무차별적인 살인을 지속하는 필리핀 군부에 한국국민의 세금이 쓰여 지는 것을 우리는 받아들이기 어려우며 신중히 결정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질의 사항]

1. 국제적인 인권문제의 당사자로 필리핀 군부가 지목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는가? 알고 있었다면 차량지원을 결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2. 유엔인권이사회에서 필립 알스턴 특별 보고관의 보고서가 제출된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그리고 그 보고서에 군부가 개입된 점을 확인하였는가?

3. 이번 필리핀 군부에 대한 차량지원은 어떤 경로와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이를 결정한 책임자는 누구인가?

4. 차량지원에 소요된 예산은 얼마이며, 차량지원의 대가는 무엇인가?



* 별첨: 필립 알스턴 유엔 인권 특별보고관의 보고서

시민사회단체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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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17일 최재천 의원실 주최로 국회 헌정기념관 대강당에서 열린 토론회 자료집

토론회 차례

- 축사: 신장범 한국국제협력단 총재

- 사회: 김은미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

- 발제:

(1) 바람직한 ODA의 방향(증액/집행의 효율성을 위한 일원화)

- 권혁주 성균관대 국정관리대학원 교수

(2) 한국의 ODA의 현재와 중장기계획

- 최재철 외교통상부 국제경제국장

(3) ODA현장에서 바라는 발전방향

- 송진호 YMCA 국제협력국장

토론:

- 손혁상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ODA감시팀 팀장

- 김혜경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국제위원장

- 오수용 해외원조단체협의회 사무총장

- 강선주 외교안보연구원 경제통상연구부장

- 안광명 재정경제부 경제협력국 심의관

국제연대위원회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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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고향 네팔에서 NGO석사과정 취득을 위해 한국행을 결정하기까지 참으로 많은 고민을 했다. 그때만 해도 고등 교육을 위해 한국행을 하는 경우가 아주 드물었기 때문에 결정은 더 어려웠다. 하지만 짧은 기간동안 한국이라는 나라가 이루어 놓은 사회, 문화, 정치적 발전, 특히 급속한 경제 발전의 원동력을 이해하기 위한 내 열정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공부에 매진하는 동안 나는 한국의 시민사회를 가까이에서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이해하기로 결심했다. 몇몇 시민단체에서 일하면서 겪은 경험들은 내게는 경이로운 체험이었다. 나는 한국의 시민단체가 이곳의 민주주의, 경제적 평등, 인권, 평화, 정의, 법치에 미치는 영향에 놀라기도 하고, 매혹되기도 했다. 네팔의 시민사회도 이곳과 같았으면!

한국의 시민사회를 공부하면서 나는 문득 한국의 활동가들에 의해 ‘아시아 시민사회’가 형성된다면 어떨까 하는 꿈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와, 그렇다면 아시아인들에게 참 기쁜 소식이 될텐데!

하지만 나의 이런 행복한 꿈에 곧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꿈을 실현하기 위한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했을 때 그 앞에 가로 놓여있는 장애물들에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먹구름과 절망 속에서 빛과 작은 희망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나의 이런 현실적인 깨달음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하였다. 아시아 연대를 이해하는 데 있어 일반 사람들과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위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사실 나의 이 같은 시각이 한국인들에게는 그리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에서 시민활동가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보탬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나에게는 한국 사람들이 과거의 눈으로 아시아 국가를 바라보고 분석하는 문화가 아시아 시민사회를 이룬다는 목적에 있어 큰 방해물이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설사 이것이 사실일지라도 드러내놓고 말하기 민감한 부분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많은 한국인들은 정치적으로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심각하게 미국화, 일본화, 중국화되어 있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요지는, 우리가 아시아인들에게 아시아 연대를 주장하고 이 정신을 확대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독립적이고 우리만의 독창적이고 인간적인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아시아의 지도를 넓혀야 하고, 동아시아를 넘어서 다른 국가들도 이 지도에 포함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실제로 동아시아 국가만이 아시아에서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시아 지역에 대한 그들의 연대를 넓히기 위하여 가난한 아시아 국가의 사람들에게 공적, 비공적 개발원조와 고용 지원 제공을 더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를 통한 한국의 아시아 지역에 대한 국가적 이익과 전략 문제에 대해선 논외로 하고, 나는 이보다는 우리 안에서 다른 사람을 보는 태도와 관점을 바꾸기 위해 애쓰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고 싶다. 단지 몇 번의 회의와 모임에서 아시아 연대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 자신도 한국에서 편견과 인종차별을 느낄만한 상황에 여러 번 놓인 적이 있다.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마다, 한국 사람들은 내 옆에 앉아서 가기를 꺼려하고 먼 거리를 가면서도 기꺼이 서서 가기를 선택한 듯 보였다. 이것은 나에게 모욕감을 주는 행동이다.

좀 망설여지기는 하지만, 여기에 덧붙여 내가 이곳 대학에서 느꼈던 쓰디쓴 경험을 공유하고 싶다. 서방국가 출신의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들을 때, 정말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몇몇 교수들이 - 한국사회에서 가장 지성인으로 꼽히는 - 서구에서 온 학생들 위주로 수업을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마치 강의실에는 아시아 출신 학생들이 한명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 많은 아시아 학생들이 이 같은 경험을 했고 또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런 교수들이 아시아의 연대나 협력에 대해 더욱 자주 열을 올린다는 것이다.

이주민 노동자로서 살아가는 아시아 사람들은 많은 한국 산업에서 착취당하고, 학대당하며 그들의 노동권도 누리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그들에게 좋은 사람들인지 깨닫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게 더 낫다고 본다.

'아시아 시민사회' 건설을 주창하는 한국 활동가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다른 아시아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기 전에 사람 사이에 차별을 없애고 국가들 사이에 커져가는 대립을 끝내고 공통의 적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적을 저지하기 위한 효과적인 전략 수립 여부야말로 아시아 시민사회를 향한 우리의 전진에 있어 하나의 평가 기준이 될 것이다.

이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긴급한 것은, 한국 일반 시민들이 서구가 아닌 아시아에 속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일이다. 한국의 시민사회 활동가들이 이를 위해 더욱더 열심히 노력할수록 아시아 시민 사회를 형성하는 일은 그 앞에 많은 도전 과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 국적과, 지역, 문화, 인종, 언어와 상관없이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인간으로서 포옹해보자! 편견없이 서로를 바라보자! 조건 없는 인류애를 실천해보자! 민족적 우월감이나 계급제도(카스트제도), 배척과 불처벌, 부정부패로부터 아시아 지역을 결집시켜 보자! 한국산 자동차와 전자제품, 핸드폰, TV만 수출할 것이 아니라, 조화롭고 평화롭고 민주적인 아시아를 위해 창조적인 생각과 도움의 손길도 수출해보자!

이러한 것들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아시아 시민사회가 진정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아시아 연대를 위해 우리 삶 깊숙이 박혀 있는 위선의 본능을 뿌리뽑아보자!

지번 바니야(아주대 국제대학원 NGO학과 학생)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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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높고, 혁신적인 원조로 유명한 영국의 개발 원조 모델



2006년 5월 31일, 이탈리아와 미국에 의해서 이루어진 OECD DAC(개발원조위원회) 동료 평가 (Peer Review)에 의하면, 영국은 급변하는 개발 협력 세계에서 많은 국가들에게 대표적인 양자원조의 모델로 손 꼽히고 있다.

많은 식민지 경험으로 인한 오랜 역사와 그로 인한 연륜과 체계적인 시스템과 방대한 규모를 지니고 있다는 점, 그리고 동료평가에서도 장점으로 언급된, 분명한 법적 권한과 잘 짜여진 행정 체계로 원조 프로그램을 전략적으로 조직하는 점, 또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국민들의 원조에 대한 이해를 증가시켜 국민들의 합의와 참여를 이끌어 내고 있다는 점, 그리고 1997년에 이루어진 대대적인 제도적인 개혁 노력 등 영국의 원조는 여러 모로 양적 질적 대외원조의 선진화를 추구하고 변화를 꾀하는 현재의 한국에 시사하는 점이 많다.

질 높고, 혁신적인 원조로 유명한 영국의 개발 원조 모델

그렇다면, 여기서는 어떠한 면이 영국으로 하여금 이러한 명성을 얻게 하였는지를 짚어보고자 한다.

먼저 원조의 양에 있어서, 영국은 2005년, 미화 108억달러로 세계 제 3위의 원조 공여국이며, 이렇게 많은 양의 원조를 다루기 위한 충분한 수의 직원과 사무소로도 유명하다. DFID(국제개발부, Department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는 런던과 이스트킬브라이드에 두 개의 본부를 가지고 있으며, 전 세계에 64개의 지역 사무소를 가지고 있다. DFID가 보유한 직원 수는 2,500명이 넘는데 중요한 사실은 이들 중 절반 이상이 현지에서 일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국은 2001년 4월 이래로, 조건부 원조를 모두 폐지하고, 비구속성(Untied) 원조를 실시하고 있다. 2001년의 조건부 원조의 폐지는 이듬해 6월 제정된 국제개발협력법(International Development Act)과도 연관이 깊다. 그 전까지 영국 대외 원조의 기본을 이루었던 1980년에 제정된 개발협력법(1980 Act)은 빈곤퇴치에 중점을 두지 않았고, 영국 대외 원조와 영국산 물품과 서비스의 연계라는 조건부 원조에 관심을 두었었다. 따라서 2002년에 새로 제정된 법은 영국 대외원조의 목표가 경제적 이익 추구에서 빈곤 퇴치로 완전히 넘어왔음을 보여 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영국은 전체 원조의 90% 이상을 저소득국에 배분하고 있다. 지역적으로 볼 때 가장 많은 수혜를 입는 지역은 사하라 이남 지역 아프리카이다. 영국은 다른 국가들이 쉽게 하지 못하는 분쟁 지역의 평화 구축 작업에도 참여하고 있고, 대표적으로 시에라리온, 앙골라, 수단, 콩고 등지에서 일하고 있다. 인도주의적 구호에 있어서도 영국은 이 분야에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돈을 지불하고 있는 국가다.

효과적인 파트너쉽 구축에 있어서도 영국은 타 공여국의 모범이 된다. 세 차례의 백서에서 영국은 지속적으로 파트너쉽과 공동 행동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영국 정부가 자신들의 국제 개발 목표가 DFID만으로는 달성될 수 없으며, DFID 외 다른 영국 정부 부처, 수원국 정부, 국제 기구, NGOs, 학계, 민간 부문들과의 광범위한 공동 협력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자각에서 나온다. 파트너쉽에 대한 영국 정부의 신뢰와 실질적인 행동은 영국의 다자기관 이용에서 엿볼 수 있다. 아래는 1997년 백서에서 인용된 도표이다. 이 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국은 전체 원조의 절반 가량을 세계은행, 유엔, EU 등의 다자 기관을 통해 공여하고 있다. 영국은 백서에서 다자 기관에 많은 원조를 할당하는 이유로, 다자 기관이 국제사회의 빈곤퇴치에 대한 헌신도를 증가시킬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다자 기관과 양자 기관이 상호 보완적이라는 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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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 같은 국제적인 문제에 민감한 영국의 태도도 배울 만하다. 2006년 백서에서 영국은 특별히 '기후 변화에 대한 공동 대응'을 목표로 잡고 있다. 이를 위해 영국 정부는 UN, EU, 다자 개발 은행들과 함께 기후 변화 영향에 대한 개도국의 인식 제고와 개도국의 기후 변화에 적응 노력을 지원할 것을 약속하며, 자연재해 발생에 따른 복구에 엄청난 비용이 소모되므로 재해 발생 전에 대비하는 노력에도 지원을 확대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영국은 영국 대외 원조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내는 일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백서는 전 세계의 상호 의존과 국제 개발의 필요성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를 촉구하고 있으며, 또한 영국의 아이들이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주요한 국제 문제들에 대한 지식이 생기도록 개발 사안에 대해서 모든 아이들이 교육 받을 것을 주장한다. 특별히 1999년 전략 보고서를 통해, 공교육 부문, 미디어, 비즈니스와 노동 조합, 종교계를 주요 핵심 분야로 잡고, 개발의식교육 운동을 벌이고 있다. 영국 국민들의 대외 원조에 관한 태도와 행동을 조사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DFID는 고정적으로 대외 원조에 관한 여론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또한 ODA 모범 사례를 담고 있는 소책자 배포를 통해 ODA 결과를 국민들에게 홍보함으로써 지지를 받아내고 있다.



영국 대외 원조의 행정 체제의 변화: 법적 제도적 틀의 구축


영국이 현재의 모범적인 공여국의 모습을 가지기까지는 많은 변화와 튼튼한 행정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들이 있었다.

실제적인 영국 원조의 역사는 식민지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 가지만, 여기서는 공식적으로 영국이 밝히고 있는 대외 원조 행정 체제의 변화만 살펴보겠다.

영국 원조의 역사는 구 식민지 국가들에 대한 영국의 책임감에서 시작된 식민지 개발법(Colonial Development Act)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61년 원조 프로그램의 기술협력 분야를 위한 기술협력부(Department of Technical Cooperation)가 신설되었고, 1964년에는 첫 독립 대외 원조 기관인 해외 개발부(Ministry of Overseas Development)가 생겼다. 1970년에 이 부서는 사라지고, 외교부로 통합되어 외교부의 기능적 역할을 하는 해외 개발 행정부(Overseas Development Administration)로 격하되었다. 1974년 5월에 정부는 이를 다시 독립 부서인 해외 개발부로 바꾸었지만, 1979년 이 부서는 또 다시 외교부 산하의 해외 개발 행정부로 넘어왔다.

1997년은 영국 대외 원조 역사에 획을 긋는 중요한 시점이었다. 1997년에 들어선 영국 노동당 정부는 집권과 동시에 해외 개발 행정부를 국제개발 원조 전담 부처인 국제개발부 DFID로 바꾸고, 「국제개발에 관한 백서(White Paper on International Development)」를 발간하였다. 영국은「세계 빈곤 퇴치: 21세기의 도전」이라는 1997년 백서에 이어, 2000년도에는「세계 빈곤 퇴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세계화 구상」이라는 두 번째 백서를 발간하였으며, 최근 2006년 7월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거버넌스 구상」이라는 세 번째 백서를 발간하였다. 각각의 백서는 빈곤 퇴치라는 큰 목적 아래 그 목적을 이루는 구체적인 목표들을 잡고 있다. 첫 번째 백서에서는 개발의 도전에 대항하여 파트너쉽 구축, 정책의 일관성, 대외원조를 위한 대중의 지지 구축을 강조했다면, 두 번째 백서에서는 세계화의 도전에 대항하여 효과적인 정부와 효율적인 시장 구축, 인간 개발, 민간 자본에 초점을 두었다. 2006년 백서는 우리 세대의 도전에 대항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국가의 구축, 안전, 일자리와 공공 서비스의 제공,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한 국제적 협력, 21세기에 맞는 국제 시스템 구축에 중점을 둔다.

더 효과적이고, 튼튼한 원조 행정 체계 구축을 위해서 영국이 강조하고 있는 점은 정책의 일관성이다. 이와 관련해서 국무총리, 재무부 장관, 국제 개발 장관 등에 의한 고위급의 정책 지지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는 1997년 백서의 내용 중 중요한 요소이다. DFID는 다양한 이슈들에 대해서 각 부처들과 긴밀하게 협력하여 일하고, 무역, 분쟁 방지, 부채 탕감, 새천년개발목표(MDGs) 실행을 위한 합동 공공 서비스 협정(Joint Public Service Agreement)의 목표들도 각 부처들과 함께 정하고 있다.

2002년 영국은 의회와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바탕으로 국제개발협력법을 제정하였다. 이를 통해 1997년 DFID 설립 이래 지속된 ODA 정책에 대한 개혁이 완성되었고, 이 법이 영국 ODA 정책의 기초가 되고 있다.

영국 ODA 현황

여기서는 가장 최근까지 조사되고, 평가된 영국 ODA의 현 상황을 되짚어 보고 영국 원조의 최근 특성을 알아보기로 하자.

2000년에서 2004년까지 영국의 ODA의 양은 30% 증가했다. 2004년 기준으로 볼 때, 영국은 78억 달러를 지불하여 세계에서 4번째로 많은 양의 ODA를 제공하는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2005년에 프랑스를 누르고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많은 양의 ODA를 제공하는 국가가 되었다. 2005년에 영국의 순 ODA 양은 108억이었고 2004년에 비해 35% 증가했다. 또한 ODA/GNI(국민총소득) 비율은 0.36%에서 0.47%로 상승했다. DFID가 직접 지원하는 국가는 전 세계 150여 국가에 이른다.

영국 원조의 목표는 빈곤 퇴치에 있으며, 부문별로 보면 부채탕감에 가장 많은 비중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국 DFID는 저개발국, 특히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남아시아에 자원을 집중하고 있다.

영국의 원조효과 제고 사항을 보면, 영국은 파리선언과 2006년 국제개발 백서에서 원조 효율성에 합의하고 있다.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영국은 파리 선언의 이행을 위해 다른 국가들과 함께 일하며, DAC의 모니터링 작업을 지원하고 있다. 영국은 2013년까지 원조예산을 0.7%로 늘리기로 결정하고, 개발 재원을 모으는 획기적인 방법을 찾는 일과 국가 차원에서의 장기적이고 예측 가능한 원조를 하는 일에 있어서 다른 원조 공여국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원조의 효과성을 위한 중기계획을 보면, 2010년까지 달성할 국가와 지역, 국제 협력 수준에서의 목표치를 잡고 있다. 영국은 결과 중심 접근법에 근거한 공여국 사업 모니터링과 상호 책임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고안하고, 원조의 조화를 장려하고 있다.

2006년 백서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향후 5년간 영국이 중점을 둘 부분은 바로 공치(Governance) 분야이다. 영국은 빈곤국가의 정부가 국민들을 위해 역량 있고, 책임감 있고, 투명한 정치를 하게끔 만드는데 집중하고 있다. 이를 위해 DFID는 수원국의 거버넌스의 질을 측정하는 틀을 만들고, 여기서 나오는 결과에 따라 원조의 양을 결정하게 된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부패를 근절하기 위한 노력도 경주하고 있다. 영국 정부는 단기 사업보다, 장기적으로 그 나라의 빈곤을 감퇴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 그 나라 거버넌스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일임을 믿고 있기에 양자원조의 50% 가량을 빈곤국의 공공 행정 서비스에 투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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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사례가 주는 시사점

모범적인 원조 국가로서 영국의 사례가 한국에 던져 주는 시사점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파트너쉽의 강조이다.

KOICA(한국국제협력단)도 파트너쉽의 중요성에 대해서 깨닫고, 작년부터 지속적으로 민간과의 파트너십을 강조하고, 이런 저런 많은 만남과 변화를 꾀했다.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타 정부 부처와의 정책 협의는 미비하며, NGO 지원액은 늘었다고는 하지만, 국가와 시민 사회간의 튼튼한 파트너십을 기대하기에는 여전히 턱없이 적다. 한국 개발 협력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한 순간에 증폭되고 있는 시점이기 때문에, KOICA가 마음대로 예산량과 직원 수를 늘릴 수 없는 현실을 감안할 때, 타 정부 부처, NGOs, 국제기구, 학계와 연구소 등과의 파트너쉽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하겠다. 영국 DFID가 엄청난 규모의 재정과 직원 수를 보유하고도, 파트너쉽에 가장 큰 중점을 두는 것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참된 국제개발협력은 한 기관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사회 전체가 하나의 목표 아래 효과적으로 단결하여 움직일 때라야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정부 차원의 국제 개발협력 체제 구축도 한국이 본받고 따라가야 할 부분이다. 영국은 대외원조를 재경부나 외교부의 경제적, 정치적 실익에 의해서 유동적으로 변하는, 시장 개척이라는 물고기를 위한 낚싯밥으로 사용하거나, 정치적 목적을 얻기 위한 선물용으로 생각하는 원조 이념에서 벗어나, 국제 사회에서 가장 큰 사안으로 떠오른 빈곤 퇴치라는 목적을 가장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 단기 사업의 양을 없애고, 백서를 통한 국가 차원의 장기적 목표와 전략을 세우고, 치밀한 계획 아래 세부 목표를 정하고, 세운 계획을 실행하고 있다. 2002년 6월에 제정된 국제개발협력법도 이러한 튼튼한 국제 개발의 협력 체제 구축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러한 참된 원조의 리더십 모델이야말로, 기대되는 새로운 원조 공여국으로 떠오르는 한국이 따라가야 할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대외원조의 목적 또한 한국에 시사하는 점이 많다. OECD DAC의 개발 원조의 목적 세 가지인 정치적, 경제적, 인도적 목적을 그대로 따고 있는 한국과는 달리, 영국은 대외원조의 전반적 목표가 빈곤퇴치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영국은 개발 원조가 필요한 이유를, 세계 인구의 1/5이 절대 빈곤 속에 살며 천만의 아이들이 5세 전에 사망하고, 1억이 넘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는 이러한 인류의 고통과 가능성의 낭비가 비단 양심의 문제가 아닌, 영국 자체의 이익에 위반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세계는 점점 좁아지고 있고, 영국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전쟁, 국제 범죄, 난민, 마약, 에이즈 같은 세계적인 문제들은 가난한 국가들의 빈곤에 의해 심화되기 때문에, 빈곤 퇴치야말로 영국을 포함한 세계 모두를 위한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국의 개발원조는 철저하게 경제적 이익을 대외 원조의 목표로 잡았던 일본의 개발원조 모델을 따라 했기에, 단기적으로는 갑작스런 전환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미 많은 시행 착오를 겪어 지금에 이른 영국 원조 모델을 보고 배운다면, 짧은 시간에 참된 국익과 세계 시민 사회의 일원으로써의 책임감을 위한 한국형 선진 원조 모델을 쉽게 이룰 수 있게 될 것이다.

박수연(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ODA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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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인도네시아 여성운동가



처음으로 쓰는 이 칼럼에서 오늘은 인도네시아 여성운동가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작년 ‘언론자유상’을 수상한 가디스 아리비아(Gadis Arivia)를 지난 주에 다시 만났다. 그는 현재 인도네시아국립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근무하고 있으며 프랑스에서 석사학위를 하고 인도네시아국립대 철학과에서 페미니즘으로 박사학위를 했다. 내가 그녀를 알게 된 것은 1998년 대학원 석사과정시절에 있을 때 그녀가 창간하고 편집자로 있는 [여성 저널](Journal Perempuan)이라는 페미니즘 저널을 발간하는 단체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되면서부터였다.

1990년대 중반 그의 집 뒤편의 조그만 통나무 집 서재에서 탄생한 Jurnal Perempuan은 여성문제에 대한 논의가 전무한 상황에서 토론의 장을 만들어보자는 소박한 의도로 시작되었다. 그렇게 시작이 소박했던 잡지가 이제는 인도네시아의 대표적인 여성 계간지가 되었고 여성문제를 연구하는 사람은 한번쯤 거쳐가는 곳이 되었다. 처음에는 여성문제에 대한 논의를 철학에서 시작하였지만 지금은 정치, 인권, 종교, 빈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여성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녀의 활동은 여성문제를 토론하는 데에 국한되지 않았다. 수하르토 집권이 종말로 치닫던 1999년 초에 그녀는 여성운동가들을 조직하여 [걱정하는 어머니들의 모임](Suara Ibu Perduli)을 결성하였다. 자카르타와 주변 지역의 여성단체들과 함께 만들어진 이 조직은 경제위기로 인한 생활고에 대처하기 위하여, 특히 저소득층과 슬럼가의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더 나아가서는 경제 문제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는 정부의 무능력을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일반 시민들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하여 그를 비롯한 여성 활동가들은 자카르타 시내에서 시위를 하였고 이로 인해 경찰에 연행되어 재판을 받는 등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조직은 여전히 자카르타 슬럼지역 여성들의 자립을 위해 공동체 조직을 설립하고 혼자 설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단체로 건재하고 있다.

[걱정하는 어머니들의 모임]의 시위는 당시만 해도 일반 대중이 독재 정권에 반대하여 거리에 나서길 꺼려하던 상황에서 ‘어머니’들의 단합된 용기를 보여주는 것이었고, 중산층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빈곤층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는 계급간 연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최근에 그녀가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포르노금지법에 대한 반대 운동을 벌이면서부터 였다. 인도네시아의회에서 이슬람정당인 '정의복지당'의 지지로 포르노금지법이 논의되었다. 포르노금지법은 포르노를 금지시키는 것이 주 내용이 아니라, 여성을 억압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데, 예를 들어 여성은 공공장소에서 노출의상을 입을 수 없으며, 이슬람 여성들은 질밥(머리카락을 가리는 스카프)을 써야 하고 밤에 외출을 금지하는 등의 조항을 담고 있다.

그래서 여성의 사회경제 활동이 자유로운 인도네시아 사회에 큰 논란을 일으켰고, 여성단체들은 이 법안에 반대하는 연대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거리에 나서 시위를 하고, 직접 자신의 이름으로 은행계좌를 열어 포르노금지법에 반대하는 사람들로부터 모금을 시작하여 신문에 직접 3천명의 지지자 이름과 왜 포르노금지법에 반대하는가에 대해 전면 광고를 싣기도 하였다. 신문광고를 내는 생각은 일본 오키나와에서 열린 회의에 참가했다가 현지 단체들의 활동방법을 보고 배운 것이라고 한다. 그녀는 항상 생각이 열려있다. 어디에 가든 배울 것을 찾고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다.

그녀는 노출 의상을 입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가 나서서 여성이 어떻게 행동하고 옷을 입어야 하는지 관리한다는 것은 인권의 침해이며 국가의 월권행위라고 강조한다. 인도네시아는 이슬람 국가가 아니라 세속적(secular) 국가이고 이러한 국가의 정체성(identity)을 지키는 것은 그녀와 같은 시민들의 힘이라고 그녀는 굳건히 믿는다.

그녀의 자그만 체구를 보면 어디에서 그만한 힘이 나오는지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그녀는 이 땅의 어머니로서 자식들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독재와 경제위기로 인한 빈곤에 대항해서 싸우기도 하고 여성 인권을 위해 여성 단체들과 연대하여 포르노 금지법에 대항하여 싸우기도 한다. 계급이 다르고 분야가 달라도 넓은 의미의 인권을 위해 함께 연대하고 투쟁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인도네시아 여성운동이 고립되지 않고 역동적으로 지속되는 비결을 발견할 수 있다.

정은숙(위스컨신대 정치학과 박사과정, 인도네시아 국제정치전략연구소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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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산과 조정의 이중주

스페인은 원조 수행의 질에 있어서나, 원조 규모에 있어 노르웨이, 덴마크와 같은 모범적인 원조공여국이 아니다. 그럼에도 스페인 사례를 함께 공유하고자 하는 이유는 스페인의 원조 역사가 한국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EU가입국임에도 불구하고 1977년까지는 수원국이었다. OECD개발원조위원회(DAC)에 가입한 시점도 비교적 최근인 1997년이다. 수원국에서 공여국으로 탈바꿈한 나라로서 새로운 원조체계를 만들어 가고 있는 스페인 대외 원조의 경험은 1995년 공식적인 수원대상국의 지위에서 벗어나 새로운 원조공여국가로서 역사를 쓰기 시작한 한국이 눈여겨봐야 할 점이다. 또한 스페인도 한국의 경우처럼 독재 정치의 경험이 있는 나라이다. 이런 점에서 프랑크 총통 사후 민주화 경험이 대외원조 정책과 방향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아울러 스페인 사례를 보며 대외원조의 효과적 실행과 관리 제도에 대한 시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스페인이 1998년부터 추진해 온 원조담당 기구의 조정과 통합의 제도 구축 노력은 지난해부터 국무총리실 산하에 ‘국제개발협력위원회’를 두고 대외원조의 통합성을 높이려고 시도하였지만, 그 효과가 지지부진하다고 평가받는 최근 한국의 현실에서 더욱 주목해보아야 할 것이다

EU에 못 미치는 원조 규모와 질

먼저 스페인 대외 원조의 규모부터 살펴보자. 스페인의 원조액은 2005년 기준으로 국민총소득대비(GNI)대비 0.29%이다. 1990년 0.20%, 2003년 0.23%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고, 한국의 0.1%규모에 비해 매우 높지만 EU국가의 평균치를 훨씬 밑도는 규모이다. 2003년 기준으로 노르웨인 0.93%, 덴마크 0.84%, 벨기에 0.6%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치이며, 총액수도 31억불(2005년 기준)로 인구나 경제력 측면에서 규모가 훨씬 작은 스웨덴보다 적은 액수를 집행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스페인 정부는 2002년 바르셀로나 유럽연합회의와 몬트레이회의에서 2006년까지 0.33%달성을 약속하고(현재 최종통계 미확인), 2008년에는 0.5%, 2012년에 0.7%를 달성하겠다고 선언하였다.

한편, 2003/4년 통계를 보면 총원조액수의 58%가 중간소득국가에 집중되어 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스페인의 ODA가 최빈국이나 저소득국가의 극심한 빈곤과 기아 퇴치 등을 목표로 하는 새천년개발목표(MDGs) 달성에 소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현 정부는 2003/4년 12%에 불과했던 최빈국 원조비율을 20%선까지 끌어올리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스페인이 설정한 목표는 OECD국가 중에서 그리스와 미국을 제외하고 가장 낮은 비율이다. 스페인 ODA가 빈곤 감소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못한 이유는 스페인이 역사적으로 라틴아메리카 국가에 원조를 집중해 온 점에서 찾을 수 있다. 2005년 스페인 ODA의 최대 수원국은 니카라과와 온두라스이며, 상위 10개 국가의 반을 남미국가가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2003/4년에는 단 13%만이 가장 원조를 필요로 하는 사하라 남쪽국가에 집행되었을 뿐이다. 스페인 대외원조의 질을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다.

스페인의 구속성 원조 실태도 스페인 대외 원조의 수준을 낮게 평가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즉 스페인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다르게 여전히 스페인의 물자와 서비스를 원조와 연계시키는 구속성원조를 실시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최빈국의 경우에는 비구속성원조 형태로 전환하는 중이라는 점이다. 또한 양자간 원조에서 유상원조의 비율이 높은 점도 국제적으로 많이 지적되고 있다. 스페인의 유상 비율은 92년 80%에서 2001년 36%로 감소하였지만 DAC기준보다 현저히 높다.

스페인은 위에서 지적된 문제를 개선하고자 그동안 대외원조에 대한 평가를 반영하여 ‘개발협력마스터플랜(2005~2008)’, ‘아프리카계획’(2006-8) 등을 수립하여 발표하였다. 일종의 전략적 방향을 제시한 계획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전히 지원대상국에 대한 선정기준이나 재원 배분의 우선순위에 있어 문제가 있어 보인다. 예를 들어 마스터플랜에서 스페인은 라틴아메리카, 북아프리카의 아랍국가, 중동, 역사적 문화적 연계를 가진 나라들을 우선순위로 하여 29개 국가를 지원대상국가로 선정했는데, 이는 지역 전략적,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가 대외원조와 국제협력의 우선순위를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스페인 원조모델 - 분산된 원조 집행 조직

스페인 대외원조 체계에 대해서 살펴보자. 스페인 원조모델의 중요한 특징은 중앙과 지방자치체에 분산된 원조집행조직이다. 외무부, 경제부 등 15개의 중앙행정부와 17개의 지방자치단체가 모두 독자적으로 원조사업을 실행해 온 것이다. 이처럼 대외원조가 분산된 체제 속에서 실행되자, 스페인 의회는 대외원조의 일관된 집행과 효율적 조정을 위해 1998년 국제개발협력법을 통과시켰다.

국제개발협력법은 다른 무엇보다도 각 담당기관의 원조사업 목표의 일관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때 일관된 목표는 ‘빈곤감소’이다. 인권, 지속가능개발, 양성평등, 공정한(equitable) 경제성장을 원칙으로 하여, 최우선 목표인 빈곤타파를 위해 사회경제적 개발, 안보, 평화, 민주주의, 인권의 기본 가치를 천명하고 있다. 특히 기본적인 사회적 요구(basic social needs) 분야에 빈곤감소 노력을 집중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비교적 짧은 시기에 민주화의 제도적 틀을 갖춘 스페인은 다른 어느 국가보다도 민주주의와 인권 등의 가치와 제도 구축의 경험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위치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한편 분산되어 있는 원조 담당 기구를 구속할 수 있는 목표를 법에 명시한 것도 매우 눈에 띄는 점이다. 지방자치정부가 자율적 예산편성권을 헌법으로부터 보장받고 있는 현실에서 모든 원조프로그램에 적용되는 원칙과 목표를 세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스페인의 이런 노력은 ODA집행의 혼란과 비효율을 겪고 있는 한국을 비롯한 다수 국가들에게 모범이 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스페인 원조 기구 개혁의 목적은 당연히 분산화된 원조 기구의 조정 기능을 강화하기 위함이다. 즉 행정부,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등으로 넓게 퍼진 원조 시스템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조정 기능을 향상시키기 위한 목적인 것이다. 통합대외원조법의 위상을 갖는 국제개발협력법에 따르면 외무부는 국제협력연간계획(PACI)과 다년간의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게 되어 있다. PACI에서는 개별국가별 원조목적을 각기 명시하도록 하며, 원조기관, 지역, 무상원조 섹터별로 예산을 배정한다. 이는 지방자치정부나 여러 중앙 행정부서의 원조실행을 하나로 묶어 통괄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외원조의 일관된 집행과 효율적 조정을 위한 기관들

주요 자문 및 조정(co-ordination bodies)을 위한 기관으로는 ‘개발협력협의회’(Development Co-operation Council)를 들 수 있다. 1995년 설립된 자문기구로서 시민사회, 개발전문가, 개발관련 민간기구들의 대화 포럼의 성격을 가진다. 주요 활동은 평가보고서와 마스터플랜이나 개발협력연간계획의 초안을 검토하는 것이다. 일 년에 네 차례 모임을 가지며, 특정분야에 관한 특별실무그룹 설치도 가능하다. 협의회는 16명의 시민사회인사, 10명의 정부인사로 구성되며, 외무부내의 국제협력과 라틴아메리카 차관 (SECIPI)이 의장을 맡으면서 시민사회와 협의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국제협력을 위한 행정부간위원회’(Inter-Ministerial Committee for International Co-operation)도 조정 기관 중의 하나이다. 이 위원회는 1986년에는 중앙행정부의 각기 다른 조직들의 원조정책을 조정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역시 외무부의 국제협력과 라틴아메리카 담당 차관이 의장이며 일 년에 최소 두 번, 소위원회가 최소 3개월마다 열리고, 실무그룹이 필요에 따라 모임을 가진다. 위에 언급한 ‘개발협력협의회’와 협의하면서 마스터플랜이나 개발협력연간계획의 계획서를 검토하고 국무회의에 제출한다. 2000년에는 중앙과 지방정부 원조기관 간 자문, 조정, 협력을 위한 기구로 ‘개발협력을 위한 지역간 위원회(Inter-Regional Committee for Development Co-operation)’를 설립하였다. 한편 스페인 의회에서도 최근 ‘국제개발협력위원회’를 설치하여 관련법이나 마스터플랜, 개별 국가계획을 심의하고 시민사회단체와 협의도 자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원조집행기구 - 중심적 역할을 맡고 있는 외무부

이제 스페인 원조가 어떤 기구를 통해서 집행되는지 살펴 볼 차례이다. 무상원조는 주로 외무부 산하 국제협력과 라틴아메리카 담당 차관과 스페인 국제협력단(Spanish Agency for International Co-operation, AECI)이 담당하고 있는데, 특히 스페인 외무부가 개발협력정책에 중심적 책임을 맡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개발협력과 라틴아메리카 부서가 같이 있을 정도로 라틴아메리카에 집중하고 있는데, 마스터플랜, 연간계획, 다른 전략적 사업과 평가를 모두 이 부서에서 담당하고 있다. AECI는 핵심 실행기구로서 무상원조와 소액금융대부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데, 외무부 산하에 있는 다른 원조담당 부서를 2000년부터 국제협력단으로 흡수통합 중에 있다고 한다.

유상원조는 주로 경제부 산하 무역과 관광 담당 차관이 담당하고 있다. 2000년에 조직개편을 실시하여 6개국에 나눠져 있던 원조업무를 해외무역 담당 사무국에 집중하고 우리나라 대외협력기금과 유사한 개발협력기금(Development Aid Fund, FAD)을 관리한다.

흥미로운 점은 스페인이 한국과 같은 유상-무상 시스템으로 대외원조를 실시하고 있으나, 외무부와 경제부가 모두 유무상 원조를 집행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외무부는 무상 중심, 경제부는 유상 중심으로 원조사업을 실행하고 있으나 국제개발협력법의 규정에 따라 외무부가 중심이 되어 있다. 왜냐하면 계획, 예산배정, 평가를 외무부가 담당하기 때문이다.

분산화된 협력모델 - 지자체의 역할과 NGO의 참여

한편 스페인은 분산화된 협력모델(Decentralized co-operation)을 가지고 있는 나라로 평가할 수 있다. 2000년 통계를 살펴보면 전체 ODA의 16%를 지방자치단체가 집행한 것을 알 수 있다. 양자간 원조는 25%까지 수치가 올라간다. 대부분의 이 기금은 NGO를 통해 집행하는데 이를 통해 시민사회의 대외원조 참여가 활발하다는 것과 대외원조에 대한 스페인 국민의 대중적 지지를 알 수 있다. 2001년 유엔인구기금(UNPF)이 스페인 국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0%가 예산에서 원조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낮다고 답했으며, 2000년 통계청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경제적 부담이 따르더라도 84%의 응답자가 개발도상국에 원조를 해야 한다고 답했다. 1990년의 58%에 비해 국민들의 인식에 많은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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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사례의 시사점

개략적으로 스페인 대외원조 사업의 현황과 큰 특징을 일별해보았다. 거칠게 살펴본 것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대외원조의 경험에서 주목할 것들이 분명하다. 첫째 ‘빈곤감소’라는 대외원조의 일관된 목표가 다양한 원조기관에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직 대외원조의 방향을 규율할 기본 원칙과 철학조차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은 현 한국의 ODA실정에서 다원화된 ODA집행시스템의 정비까지 거론하는 것은 이른 감이 있다고 일각에서 주장할 수 있으나, 그런 현실이기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더불어 실제적인 ODA집행에 있어 분산화된 기관간의 다양하고 활발한 조정의 역할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눈여겨보아야 한다. 현재 한국의 ODA는 외통부와 재경부를 중심으로 집행되고 있으나, 복지부, 과기부, 국방부 등 많은 행정부처와 지자체에서 ODA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적절한 근거법이 없이 추진하고 있는 기관이 대부분이라 어떤 목표를 가지고, 어떤 분야에서 실시되는지,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DAC에서 권고하고 있는 ‘ODA 정책 조정위원회’라도 설치하는 것이 급선무인 한국 현실에서 다양하게 조율되고 있는 스페인의 ODA조정기관의 역할을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또한 구체적 사업내용 중 소액신용금융(micro credit finance)와 공치(Good Governance)도 우리의 주목을 끈다. 스페인은 1998년 마이크로 크래딧 기금(Micro-Credit Concession Fund, FCM)을 법제화하여 최하위층이 기본생활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금융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따라 1999년 볼리비아에서 6만 명이 2,700만 불의 혜택을 받았다고 한다. 이 기금 규모는 전체 유상원조의 25%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ODA 실행에 있어 스페인의 민주적이며 책임성있고, 투명한 제도구축에 대한 노력도 매우 인상적이다. 이는 짧은 기간에 민주화에 성공한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민주화 과정에 있는 국가들에게 입법체제, 행정개혁, 분권화, 세제, 재정, 경찰훈련까지 민주적 제도수립을 지원하고 있는 스페인의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은 빈곤감소를 단지 경제적 차원에서 보지 않고 인권보호의 가치와 민주주의 제도 확립이라는 문제와 연결시키고 있는 독톡한 노력을 전개하고 있다.

현재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의원을 비롯해 각 당에서 대외원조의 이념과 원칙에서부터 원조의 책임 주체와 시기, 평가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담은 법안들을 제출하고 있다. 그동안 각계에서 요구가 높았던 이른바 대외원조기본법 제정의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각 법안에는 그동안 미묘한 차이가 드러났던 대외원조의 목적, 원칙과 논란이 되었던 대외원조업무의 이원화에 대한 나름의 대안들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시점에서 스페인 사례가 던지는 시사점을 검토하는 것은 유의미할 것으로 보인다.

손혁상(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 첨부화일: 뉴스레터 원본
국제연대위원회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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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아씨,

지난 번에 얘기하려던 것을 여기에다 씁니다. 향아씨가 충분히 양해하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 얘기는 6년간의 타국 생활에 대한 신나는 회고라기보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제 모습에 관한 고백임을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국제단체에서 일을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태국 방콕에 도착했던 게 1999년이었으니 벌써 8년 전의 일이네요. 그동안 그곳도 많이 변했겠죠. 방콕은 인구 약 8만명의 우주방주와 같이 큰 도시지요. 길 위에는 차와 주인없는 거리의 개들이 사람들과 함께 넘쳐나고,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국수를 말아파는 사람들이 지나는 큰길 옆으로는 비싼 브랜드옷과 귀금속으로 치장한 비대한 거인마냥 버티고 선 쇼핑센터들도 많죠. 가난하게 산다 할지라도 결코 생활을 허투루하지 않고 가꾸고 멋낼 줄 아는 태국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방콕은 그 규모와 위치의 다른 도시들보다 물가가 싸서 국제단체를 위시해 월급이 나름대로 짱짱한 외국계나 국제 회사에 고용된 이들에게는 천국과 같은 곳이 아닐까 싶어요. 당시 현지의 많은 가난한 노동자들은 한 달 오륙천바트도 안되는 돈으로 생계를 꾸려가야 했지만 외국계 회사나 좀 돈을 버는 이들은 보통은 한달에 십이만바트도 넘는 돈을 받으며 살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이와 같은 혜택은 상당히 많은 국제단체들이 방콕에 주재하려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 또 많은 NGO 활동가들이 방콕을 찾아오는 이유가 되기도 하지요.

그런 천국같은 곳에도 제게는 매일매일 맞닥뜨려야했던 작은 지옥이 있었어요. 어느 거리마다 지키고 앉아 동냥을 하고 있던 걸인들... 태국 각지는 물론, 이웃해있는 나라들인 캄보디아, 라오스, 버마 등지에서까지 온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메트로폴리탄답게 방콕의 걸인들은 정말 각지에서 흘러들어온대요. 개중에는 타의에 의해 인신매매되어 강제구걸을 하는 이들도 많다고 현지 친구가 말해 준 적이 있지요. 걸인들은 도시의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특히 육교에서 흔히 만날 수가 있었어요. 제가 일하던 단체의 사무실도 하루에 한 번은 꼭 육교를 건너야 되는 곳에 위치해 있었죠. 버스에서 내려 사무실로 향하는 길에 한결같이 웅크리고 앉아 있던 걸인. 저는 때로는 동전 몇 닢을 나눠주기도 하고 때로는 그저 고개를 푹숙인 채 앞을 지나쳐 가기도 했는데, 어느 때건 마음이 편치가 않았어요. 걸인들은 그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쇼핑센터 앞이든, 버스정류장 근처든, 식당 앞이든, 가는 곳 어디에나 있었죠. 매일매일, 집회가 있던 날이건, 회의가 있던 날이건, 쇼핑을 하러 가는 날이건, 영화를 보러가는 날이건, 아무일도 없던 날이건, 집밖에만 나가면 어김없이 만났던 그들. 그리고, 그들과 크게 다를 것 없이 살아야 하는 상황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고층빌딩에서 호화롭게 일하는 이들과 유엔 사무실에서 일하는 고위급 국제관료들의 삶과 닮아가고 있는 듯 했던 내 삶을, 그 속에서 커져가는 괴리감이 주는 긴장과 외로움을 저는 견뎌낼 수가 없어졌지요. 그래서 결국, 1년 반 만에 그곳을 떠나고 말았고, 저의 방콕생활은 그렇게 파경에 이르렀답니다. 향아씨는 늘 제게 고생했다고 위로해 주곤 했지만, 이제 고백하지만 저는 위로받을 일을 채 해보지도 못하고, 그저 주변부에서 불편한 마음으로 어슬렁거리다가 그곳을 도망쳐 나왔던 거예요.

이런 주변자 의식은 방콕을 떠나 말레이시아의 쿠알라 룸푸르에서 지냈던 4년여 동안에도 별로 고쳐지질 못했죠. 말레이시아에서는 일과 함께 공부도 하고, 친구들도 많이 있어서 그만큼 생활의 반경과 깊이가 태국에 있을 때와는 달랐었는데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어요. 제가 어쩔 수 없었던 주변성이었죠. 늘 ‘외국인’이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다녀야 해서 그 사회 깊숙이 참여하고 관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조차 느껴질 때가 많았답니다.

그런 주변자 의식 혹은 주변자 감수성 때문이었을까요. 저와 가장 가까운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거리에서 일상적으로 보게 되는 노동자들, 저와 같은 동네에 단체로 모여 살고 있던 이주노동자들, 가끔 소식을 접하게 되는 농민들을 만날 때 한국에서 이와 같은 이들을 만날 때 느껴지던 강한 유대감과 함께라는 감정이 별로 생겨나지 않았던 거예요. 그 사실을 문득 깨달았을 때 저는 제가 그러고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처음엔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지요. 그들과 저 사이에서 좁혀지지 않던 그 거리감에 당황해 하면서 그곳을 떠나던 2005년 7월, 바로 그 순간까지 도대체 제가 왜 그런걸까 답답했었어요.

한국으로 돌아와 지내던 어느 날, 신영복 선생님의 ‘입장’에 관한 강연을 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신영복 선생님께는 죄송스럽게도 저는 그날 그 ‘입장’이라는 말이 지난 6년간의 제 모습을 돌아보게 한 힘에 취해 강연에는 몰입하지 못한 채 상당시간을 저 자신의 상념에 골몰했습니다. 저와 방콕의 걸인들, 저와 쿠알라 룸푸르의 노동자들과 이주노동자들은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었을까하는 질문이 먼저 떠오르더군요. 그날 가진 상념의 시간 이후 저는 제가 자문하던 질문을 바꿔보기로 했습니다. 왜 제가 그들과 같은 입장에 있다는 느낌을 덜 갖게 되는 것일까를 묻는 대신, 제가 그들과 같은 입장이 아니라고 느끼게 하는 그 기제가 도대체 무엇일까를 묻기로 했죠.

이제와 생각해 보니 제게 필요했던 것은 어쩌면 ‘공감’이었던 것 같아요. 동정과 달리 공감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같은 이해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같은 입장’이라는 감수성이 아닐까 싶어졌어요. 서로 같아서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는 것이 연대라면, 공감은 서로 달라 보이는 서로들의 입장이 사실은 한 토대에 발을 딛고 있음을 깨닫게 해서 더욱 단단하게 연대할 수 있게끔 마음의 길을 터주는 연대의 또 다른 이름은 아닐런지요.

이제 모국으로 돌아와 다시금 ‘내부인’이 된 저는 한국사회 안의 수많은 ‘외부인들’, ‘주변인들’을 보며 제가 갖고 있는 ‘내부인 감성’은 실은 많은 거짓말들로 만들어진 바탕 위에 부실공사된 건물마냥 세워져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성별, 학벌, 부, 성 정체성 등에 기반해 뻔뻔하게 난무하는 차별뿐만 아니라 연고지, 가문, 외모, 나이 등에 기반해 은근히 자행되는 차별 속에서 저는 제가 절대 이 사회의 주류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종종 그 사실을 망각할 때 저는 제 입장을 잊고 잃어, 스스로가 이 사회에서 함께 살고 있는 장애인들, 이주노동자들, 노동자들, 여성들 등과 같은 주변인들 중 하나임을 잊고서 결국 누구와 연대해야 하는지 조차 잊게 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향아씨, 향아씨가 고민하던 것처럼 저도 한동안 우리가 이 땅의 주류가 되는 날까지 싸우며 살아야겠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이 땅에 주류, 비주류라는 관념자체가 없어질 수 있도록 싸우며 살아야겠다고 해야 할지 망설인 적이 있었습니다. 주류들이 가지고 누려왔던 그 기득권을 저 또한 한번쯤 누려보고 싶은 욕망이 있어서였을것 같아요. 문득문득 여전히 그런 욕망이 솟구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향아씨에게 했던 이 고백을 잘 기억할게요.

*글쓴이 주: 이 글은 '향아씨'라는 가상의 인물에 대한 말걸기를 통해 특정인이 아닌 모두에게 말걸기를 하는 글입니다. 얼마 전 있었던 여수 출입국관리소 사건은 저에게 '구별짓기'와 '편나누기'의 폭력성과 우리 모두 더불어 잘 살기 위해 필요한 '공감'과 '연대'에 대한 더없는 갈증을 상기시키고, 저 스스로의 발자취에 대한 반성의 시간을 다시 한 번 갖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칼럼은 지극히 개인적인 고백체로 쓰여졌음을 이 글의 형식으로 인해 읽으시기가 불편하신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박이은실(성공회대 노동대학 담임,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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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는 유럽연합 국가 중에서도 북구의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등과 함께 가장 모범적인 대외원조정책을 수행하고 있는 나라로 알려진 네덜란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미 20여년 전부터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체계적으로 대외원조를 시행하고 있는 네덜란드의 외무부에는, 외교정치경제를 담당하는 장관과 개발협력을 담당하는 장관, 그리고 유럽연합을 담당하는 장관 이렇게 3명의 장관이 있다. 이 중 개발협력 담당 장관이 총괄하고 있는 개발협력국은 네덜란드의 외교정책과 인권정책에 따른 개발협력 정책을 수행하고 있다.

개발협력 정책은 외무부 안에서만이 아니라 타 부처에도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 있는데, 예를 들어, 경제부처에선 2006년에 아프리카의 정부 대표들과 기업 대표들이 모이는 국제회의를 조직해서 아프리카에 투자와 개발정책을 연계시킬 것을 권하고 이를 다른 유럽연합 회원국에도 권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효율적인 개발협력을 위해 최근에 개선한 것으로, 이를 위해 기업, 시민사회, 정부 뿐 아니라 때론 평화유지나 갈등해소를 위해 군까지도 포함해서 이들 다른 부문들이 서로 협력하여 공동 작전을 수행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개발협력 정책의 효율적 수행을 위해 외무부 주변에는 이를 지원하는 다양한 기구와 센터가 있다. IS아카데미는 국제개발원조정책을 하는 전문가 양성소로 개발협력국 안에 설치되어 있고, 글로벌개발센터는 독립기구로서 개발협력국의 씽크탱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설립 30년째를 맞고 있는 개발원조연구이사회(RAWOO) 역시 개발 정책의 오랜 역사를 가진 기관이며 수많은 개발전문가들이 포진하고 있는 곳이다. 1999년부터 시행되는 인권대사제도는 국제개발협력의 협력국들을 순방하며 네덜란드 정부의 인권정책을 알리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들 기관들은 네덜란드 정부가 표방하는 사형제 폐지, 고문방지, 인권옹호자 지원, 표현의 자유, 종교나 신념의 자유, 소수자의 권리, 차별금지, 경제,사회, 문화적 권리 등 인권원칙을 ODA 수행에 드러나도록 잘 조율하고 있다. 대외원조에 관한 기본 법제조차 없는 한국과 비교하면 시스템이 잘 갖추어진 선진원조체계인 셈이다.

원조 정책의 두 가지 특징

네덜란드의 ODA 정책방향은 다른 나라의 전통적인 원조와 조금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1998년에 마련된 가이드라인에서 지속가능한 개발과 환경의 보존을 우선적인 목적으로 삼고, 그외 교육, 물과 환경, 지역개발, 소기업개발(지원)에 중점을 두었다면, 2003년부터 2007년까지는 분쟁(해결), 안보, 개발 이 세 부분에 집중하겠다고 주요 정책을 전환시켰다. 이는 네덜란드 정부가 외교 정책을 통해 국제 평화, 자유, 법치, 번영을 구현하겠다는 목표와 일치한다. 외무부 장관은 이에 그치지 않고 최근 유럽연합이나 OECD 내부에서 안보와 평화유지를 ODA 기준에 넣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시민사회도, 유럽분쟁예방센터(European Center for Conflict Prevention)가 코피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의 보고서를 받아 글로벌 분쟁예방 보고서를 작성하여 유엔에 제출한 활동에서 보듯이, 이렇듯 정부나 시민사회가 다 같이 분쟁해결과 평화유지, 군축의 문제에 주요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평화 활동의 대상지역은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남부, 수단, 서부 발칸지역 등이며 이곳의 활동은 정보부 개혁, 군축, 재활, 평화유지, 경찰력 강화 등이다. 2006년 예산 사용 내역을 보먼, 관타나모 수용소의 인권침해에 대한 미국과의 비판적 협상, NATO(북대서양조약기구)나 유럽연합의 안보정책개선을 위한 지원, 대량살상무기확산을 감시하는 활동 등에 두드러지게 배치하고 있다.

그러나 평화유지문제에 대해 네덜란드의 이러한 이니셔티브는 다양한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작은 나라인 네덜란드가 목표에 비해 실천 영역에서 과연 얼마나 효율적으로 국제조정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 외에도 이러한 예산 분배가 전통적인 식량지원이나 보건, 교육부분의 예산을 감소시킨다는 비판도 있고, 군까지 가세한 협력추진은 효율성을 높인다는 장점도 있지만 이 때문에 다른 지역과 국제기구의 역할이 위축된다는 우려와 투명성의 담보가 없다는 비판도 동시에 나왔다. 특히 평화유지를 위한 크루즈 미사일, 헬리콥터 등 무기 구매는 정책의 투명성이 담보되지 않는 국방의 영역이라 군축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네덜란드 시민사회는 이에 반발하고 있다. 민간부분의 평화교육 노력이 군의 개입으로 인해 무시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빠지지 않고 있다.

대외원조정책의 특징 또 하나는, 기업과 정부, 시민사회가 함께 추진체가 되어, 한 지역의 빈곤퇴치와 평화유지, 갈등해소, 기업의 투자로 이어지는 지역사회개발과 시민사회의 프로그램을 시행하는 집중 정책을 권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사협동협약(Public-Private Partnership Agreement)’이라 불리는 계약이 2005년에만 41개가 체결되었고 이 중 24개가 아프리카에 집중되었다. 그런데 이 계약을 위해 마련된 기금 5억1천5백만 유로 중 정부 출연은 9천7백만 유로에 불과하고 비영리단체가 조성한 돈이 2/3를 차지하는 3억1천만 유로에 달해 이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즉 대외원조라는 국제사업에 네덜란드의 정부, 개인 할 것 없이 참여하는 취지는 좋으나, 정부의 출연부분이 지나치게 작다는 비판이 일기도 하는 것이다.

집중과 선택

네덜란드의 대외원조 대상국은 36개국으로 제한되어 있다. 이 역시 1990년대 많은 나라에 소액지원하던 방침을 바꾸어 제한된 대상에 집중 지원하여 효율성을 높이려는 정책과 맞물려있다. 협력국가들은 아프리카에 15개로 많이 몰려있고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 유럽에 각각 6~8 나라씩 있다. 대부분 유럽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나 예멘과 같은 분쟁국이거나, 스리랑카, 방글라데시와 같은 최빈국이다. 네덜란드보다 훨씬 작은 액수의 돈으로 주요 공여대상국이 55개국에 이르는 한국정부에 시사점을 주는 지점이라 할 것이다.

또한 네덜란드는 대외원조의 선진국이라 할만한 규모와 질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유지한다는 정책을 가지고 있다. UN 권고기준을 넘는 GNI(국민총소득) 대비 평균 0.8%대를 유지하며(현재 0.7% 권고수준을 유지하는 나라는 노르웨이, 덴마아크, 스웨덴 등 여섯 나라에 불과하다), 예산규모는 OECD 개발원조위원회(DAC) 가입국 중 6위로 51억6천6백만 달러(2006)수준이다. 예산집행의 세부사항을 보면 이중의 반은 최빈국이 집중된 아프리카에 지원되며, 0.8% 중 1%는 환경분야에 할애된다.

예산과 재원

네덜란드의 국제협력기금은 HGIS(국제개발 통합예산)라 불리며 여기에는 ODA예산과 일반 외교정책의 예산이 함께 책정되고 외무부 장관과 개발협력국 장관이 이를 조정한다.

2006년의 HGIS 예산은 총 57억7천130만 유로에 이르며 외무부 정책과 같은 기준으로 다음 9개 분야에 쓰인다. 국제법치강화 8천710만, 평화안보 확립과 분쟁조정 8억7천270만, 유럽통합 4억9천110만, 더 많은 번영-더 작아지는 빈곤 14억4천470만, 인간과 사회개발 14억7천820만, 환경보호와 개선 4억1천170만, 재외 네덜란드인 복지와 안녕 1억2천290만, 네덜란드 대외홍보와 이미지 제고 7천510만, 기타 7억8천780만 유로.

외무부의 기금 중 하나인 ORET(개발관련 수출거래)기금은 개발협력을 위한 기금으로 2002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자금원은 네덜란드 개도국투자은행(NIO Bank)이며, 네덜란드 개발기금(FMO)에서 지원받고 있다. 이밖에도 에이즈, 결핵 말라리아 기금과 국제단체들과 함께 전략적 연합사업(SALIN)을 수행하는 기금이 있다.

네덜란드의 대외원조와 개발협력사업에 대한 평가는 개발협력평가조사원(IOB)이라는 독립된 기구에서 다른 모든 네덜란드 외교사업에 대한 평가와 함께 이루어진다. IOB의 평가보고서는 차기 정책수립에 참고자료로 사용된다.

네덜란드는 오랜 역사와 제도 변천, 시행착오를 거쳐 현재 상대적으로 잘 구축된 대외원조 체계를 가지고 있다. 또한, 유럽연합 차원의 공동 촉진(즉, ODA의 공동목표 설정과 이에 대한 점검으로 회원국들이 평균 수준의 대외원조를 유지하도록 촉진)과 OECD DAC 차원의 대외원조 상호비교(peer review)를 통해 네덜란드의 앞선 대외원조는 더욱 발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앞서 캐나다의 경우에서 본 것처럼, 정세의 변화와 정책의 변화에 따라 공여 대상국의 원조에 대한 방향을 공여국이 일방적으로 주도할 때 대외원조의 효과는 장기적으로 부정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네덜란드의 원조정책은 현재 매우 공세적이고 적극적이나 이러한 원조정책의 모델이 반드시 다른 나라에 적절한 것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한국으로서는 앞에 나열한 외무부 내 협력기관, 독립적인 평가기관, 확보된 충분한 예산, 국회와 시민사회의 참여와 감시와 협력기능들이 아직도 따라잡아야 할 선진 모델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양영미(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 첨부화일: 뉴스레터 원본
국제연대위원회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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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여금의 목적, 용도를 특정하고, 투명한 운용 방안이 보완되어야

무엇보다 대외원조의 기본방향 확립과 통합적 집행체계, 재원마련방안시급



지난 3월 6일 국회 본회의 의결로, 올 하반기부터 5년간 국내 공항을 통하여 출국하는 모든 내ㆍ외국인들의 국제선 항공권에 1천원을 부과하는 국제빈곤퇴치기여금 제도가 시행된다. 통칭 ‘항공권 연대기여금’이라 불리는 이 제도는 개발도상국가의 빈곤과 질병 퇴치에 사용되며, 이미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시행 중이거나 제도 도입을 추진 중이다. 참여연대는 국제빈곤퇴치기여금 제도가 도입되어 국제사회의 빈곤 퇴치 노력에 동참할 수 있게 된 것을 환영한다. 이를 계기로 대외원조(ODA) 사업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국제사회에 대한 책임감과 연대의식이 높아지기를 기대한다.

국제빈곤퇴치기여금 제도가 제대로 시행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제도의 취지보다는 국민들의 추가적인 경제부담만 부각되는 일이 없도록, 기여금의 취지와 용도, 사용 현황, 기금 지원으로 인한 효과 등을 적극 홍보하고 구체적인 집행 내용을 공개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기여금이 효과적이고 실속있게 사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법안에 추상적으로 명시된 ‘개발도상국’이라는 기여금 지원 대상 국가를 ‘빈곤, 질병 퇴치가 시급한 국가’ 등으로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사용 용도도 가급적 특정하는 등의 보완 작업이 필요하리라 본다. 특히, 기여금의 운용에 있어 투명성, 독립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외교통상부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국제빈곤퇴치기여금 운용심의위원회’에 전문가 그룹과 시민사회단체 인사 등을 포함시켜 기금이 목적에 충실하게 그리고 독립적이고 투명하게 집행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간 우리 정부는 세계 10위권이라는 경제 규모에 걸맞지 않게 대외원조 정책에 있어서는 OECD 국제원조위원회 국가들의 평균 0.33%의 1/3 수준으로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지난 해부터 정부는 개도국의 빈곤 문제 해결에 기여하여 국제사회에서 책임성을 높이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밝히고 국무총리 산하에 국제개발협력위원회를 설립하는 등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아직 대외원조 정책의 기본 방향조차 확립되지 않는 등 기대에 미치지 못하다. 국제빈곤퇴치기여금은 정부의 대외원조 재원 마련의 하나의 방안일 뿐이므로, 대외원조 정책과 재원 마련에 대한 적극적인 개선안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국제빈곤퇴치기여금이 시행되기 전에 이러한 제도적 정비가 우선되어야 국민적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국제연대위원회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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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필리핀에서는 아로요 집권 2001년부터 지금까지 인권활동가뿐 아니라, 노동자, 농민, 학생, 언론인, 종교인 등 그 대상을 가리지 않고 납치와 살해가 만연해, 그 수가 800 여명을 넘어서고 있다. 사안의 심각성에 비해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이번 글에서 소개한다. 자세한 내용은 [평화/국제] 면이나 시민단체 공동 블로그

htttp://blog.naver.com/stopkillings를 참고


정치적 살해에 관한 UN의 전문가 필립 앨스톤(Philip Alston)이 민다나오 지역에서 최근에 발생된 살해 사건에 관한 10일간의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정부 진상조사위원회(Melo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공개할 것을 요구하자, 필리핀이 다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필리핀 군부나 정부가 깊이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국내외의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데다 금년 5월에 총선을 앞둔 상태여서 일련의 정치적 살해가 필리핀 정국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필리핀 현 대통령인 아로요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 동참하겠다고 선언한 이후, 묘하게도 필리핀에서는 농민, 노동조합, 토착민 지도자, 진보 정치인, NGO 활동가, 인권변호사, 여성 운동 활동가, 언론인 등에 대한 저격이 계속되고 있다. 일주일이 다르게 사상자의 통계 수치는 갱신되고 있다. 검정 헬멧을 쓴 오토바이 저격단(death squad)으로부터 총격을 받아 숨지는 일들이 이제는 언론을 통해서도 빈번히 보도됨으로써 일반인들에게도 공공연히 회자되고 있다.

이러한 대부분의 테러는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그 잔학성과 피해자 숫자는 필리핀 역대에서도 가장 빈번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어, 국가가 연루된 테러는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계엄령시기(1972-1986년) 이후 최악이라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2001년 아로요 대통령 집권 이후 정치적 살해 희생자는 일간지인 ‘필리핀 데일리 인콰이어(Philippine Daily Inquirer)’의 추산으로는 2007년 2월 19일 현재 261명이며, 인권단체인 카라파탄(KARAPATAN)의 통계로는, 사망자 821명, 실종자가 180명에 달한다고 한다.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의 집계에서도 2005년 66건, 2006년 9월까지 51건의 정치적 살해가 있었다고 한다. 통계수치가 조사한 대상에 따라서 매우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살해가 좌파 공산주의 운동 집단(NPA: New People's Army)에 집중되어 있었던 사실에 기인한다. 산간 지역에 무장 세력이 남아 있는 정치적 현실이 이러한 살해 사건에 대해 무디게 느끼거나 특정 세력에 대한 문제로 치부되었던 것에 비하면, 현재는 언론이나 국제단체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킬만한 사안이 되었다.

정치적 살해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농촌지역, 산간지역의 지도자들이나 조직자들이었다. 2004년 11월에는 루손섬 북부의 딸락(Tarlac)의 하시엔다 루이시타(Hacienda Luicita)라는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다가 7명의 농민들이 시위 저지선 밖의 발포로 살해된 사건은, 아로요 정부에 의한 대규모 학살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2005년 11월에는 레이테의 팔로에서 47명의 농민들이 모임 중에 군인들이 이들을 포위, 총격하여 9명이 현장에서 사망했으며, 18명의 실종자가 발생했으나 모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군부는 시위 참가자들이 공산주의 무장계열인 NPA 소속이었다고 이야기했을 뿐, 군인들 중 누구도 이 사건으로 조사받거나 처벌되지 않았다. 2005년의 통계에 따르면 가장 많은 사상자들은 농민이나 토착민들로서(전국농민조직인 KMP, 이고롯/아그타/모로 등의 토착민), 토지개혁이나 농장과 관련된 문제에 저항하던 사람들이었는데, 군부는 이들이 공산 게릴라나 이슬람 분리주의자들과 연계를 맺고 있었다고 한다.

농민 이외에 무슬림들도 주요한 목표가 되고 있는데, 이들은 무슬림 테러집단인 ‘아부 사야프(Abu Sayaf) 소속원이라는 혐의를 받고 정부 권력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

한편 좌파 정치인들도 이러한 암살의 표적이 되고 있는데, 아로요 집권 이후 95명(2006년 6월 현재)의 정치지도자들이 암살됐고, 이들은 주로 정당명부제(party list) 선거에서 농민, 여성 등을 대표하는 좌파 정당인, 바얀 무나(Bayan Muna), 가브리엘라(Gabriela), 아낙 파위(Anak Pawi) 등의 멤버들이다. 직선 시의원이었던 바얀무나의 Alelardo Ladera는 대낮에 총격을 당해 사망했으며, 최근에는 정권을 비판하는 언론인, 종교인들까지도 이 사망자 대열에 오르고 있다. 국제기자연맹(International Federation of Journalists)은 2001년 이후에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들만 50명이 살해되었다고 한다(2007년 2월 현재).

백주 대낮에 벌어지는 이러한 살해는 상대적으로 눈에 안 띄거나 쉽게 정보를 차단할 수 있는 산간지방이나 농촌지역에서 많이 일어났다. 중부 루손지방, 남부 타갈로그, 중부 비사야, 비콜, 북부 민다나오, 일로코스-코르딜레라 지역이 주요 사건 발생 지역이었다. 그러나 2006년 이후로는 수도인 메트로 마닐라에 거주하고 있는 정당 지도자, 언론인, 법조인, 학계 종사자 등으로 사건이 확대되고 있다.

필리핀 전역에서, 어떤 층을 막론하고 확대되는 이러한 폭력행위에 대하여, 소수의 현장 목격자들이 있지만 이 ‘저격단(death squad)’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이들에 대해서는 군이나 경찰에 의해서도 조사된 바가 거의 없다. 군부나 정부에서는 이들이 무장공산주의 계열이나 무슬림 무장단체에 의해서 자행되고 있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인권 단체들은 이러한 정치적 살해가 군대가 집중되어 있는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점과 살해 방법 등을 이유로, 이 집단이 군부와 연루되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테러집단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거나 계파간의 분쟁일 것이라고 일축하던 예전의 여론과는 달리, 정부나 군부와 깊이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만연되고 있다. ‘팔파란(Palparan)’이라는 사령관 이름은 ‘처형자(executioner)'로서 항간이나 언론에서 ‘명성’을 높이고 있다. 현재 중부 루손지방의 필리핀군 사령관인 조비토 팔파란(Jovito Palparan)은 이미 여러 진보진영으로부터 ‘대량 살해’에 대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그 책임에 대하여 부인하고 있으며, “오히려 이런 초사법적 살해가 필리핀군이 반정부 세력들을 소탕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라는 언급을 하기도 하였다. 그가 사마르섬이나 민다나오 지역 책임 사령관으로 있었을 때에 이어, 중부 루손지방으로 보직을 옮긴 이후 중부 루손지방의 정치적 살해 사건이 급속하게 증가하였다. 필리핀 신문, 인콰이어에 따르면 2006년 전체 정치적 살해 사건의 1/4이 팔파란 장군의 관할 지역인 중부 루손에서 자행되었다고 한다.

필리핀 대통령과 경찰은 범행자들을 색출하여 처벌하겠다는 공표를 했지만 아직 처리된 사건은 없다. 경찰이나 군부가 목격된 사건에 대해서 정부는 희생자들이 공산게릴라나 무장이슬람세력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입장을 반복한다. 이러한 정부의 태도는, 일련의 살해 사건이 최근 더 강화된 반정부세력에 대한 진압정책과 관련되어 있다는 혐의를 갖게 한다.

미국의 부시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아로요 대통령이 이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선언했으며, 2004년 46억 달러를 미국이 필리핀의 군사, 경제 계획을 위해 지원했고, 3천만 달러의 반란 진압 군사훈련 비용을 지원했다. 아로요대통령은 ‘Oplan Bantay Laya'라는 이름하에 국내 치안을 위한 군비 증강이나 미군의 파견을 허락하였다. 아로요 대통령의 강경한 노선은, 그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진 것과 연관이 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아로요는 주지하다시피, 2000년 제2차 민중혁명을 통해 부정 축재를 했던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을 탄핵하고 추대된 대통령이다. 민중의 지지를 받던 대통령이 존립 자체까지 흔들리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아로요 대통령은 민중들의 기대와는 달리, 신자유주의 정책 하에 각종 분야에 대해서 민영화를 단행했으며, 공교육이나 공립병원에 대한 예산을 삭감하고, 부가가치세 등의 간접세 비율을 대폭 인상했다. 2005년까지 100조에 달하는 채무를 지고 있으며, 외채를 갚는 데만 국가 예산의 30%가 소요되고 있다. 인구 8500만중 800만 이상이 해외에서 일을 하면서 송금한 돈이 1년에 12조 5천만 달러에 달하지만, 외채를 줄이는 데는 기여하고 있지 못하다. 심지어 아료요 대통령은 2004년 5월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의 부정 혐의와 남편을 비롯한 측근들의 부정 축재 등으로 인해서 탄핵 절차에까지 오르기도 했다.

아로요 정부는 군사계획과 관련하여 많은 재정적 지원을 미국으로부터 받고 있다. 그리고 무슬림 테러 집단인 아부 사야프에 대한 무력 진압 등은 위와 같은 예산 증가의 구실로 삼고 있다. 2003년 미국 국방부의 Paul Wolfowitz는 필리핀의 ‘테러와의 전쟁에서의 제2전선’이라고 칭했다. 2002년부터 필리핀군은 미군과의 합동 작전 훈련을 확대했으며, 민다나오에 대규모의 미군들이 주둔하고 있다. 미군은 이슬람 세력이 많은 민다나오뿐만 아니라, NPA 숫자가 많은 중부 루손지방에도 미군을 파견하고 계속적인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급기야 국민들의 탄핵요구가 거세지던 2006년 2월 아로요정부는 ‘국가 비상사태(State of Emergency)'를 선포하였고, 이 기간 중에 59명의 국회의원, 군인장교, 사회비평가 등에 대해 체포령을 내렸다.

비상사태는 해지되었고 아로요 대통령은 개헌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려 하고 있다. 이 와중에도 연일 정치적 살해는 일어나고 있으며 필리핀 인권단체들은 최근 유엔의 인권위원회에 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근래에 들어서는 해외에서도 이와 같은 반인권적 상황에 대한 개선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치적 탄압과 독재로 인해 ‘공공의 적’으로 규정되어 축출되었던 마르코스 대통령과는 달리, 현 정부의 폭력은 ‘일상’에 숨어 수면에 드러나 있지 못했다. 초국가적 시민사회의 대응이 이 정국의 흐름에 어떻게 영향을 줄 수 있을 지가 주목되는 상황이다.

정법모(필리핀대학 인류학과 박사과정)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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