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7월 새로 이전, 개장한 인천시립박물관에 ‘김보섭의 화교 이야기’라는 사진전이 열렸다. 사실 여기에 전시된 사진들은 김보섭의 새 작품들은 아니다.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주최하는 국제 심포지엄 ‘화교, 세계화의 주역’(2006.10.20)을 위해 지난 1995년에 전시했던 사진들을 다시 모아 전시한 것이다. 글로벌 시장경제 속에 중국이 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오랫 동안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었다고 할까 더 솔직하게는 다소 천시되기까지 해 왔던 화교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떠오르고 있다. 이른바 화교경제권, 화교네트워크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화교가 경제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한국에서, 동북아의 허브라는 경제적 목표 하에, 각 지역 지자체들이 화교경제 유치에 혈안이 되고 있다. 그런 맥락 속에서, 인천뿐 아니라 부산, 목포, 대구에서까지, 화교는 지역문화의 콘셉트로 새삼스레 ‘발견’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다시 불려나온 십여 년 전의 사진들을 둘러보면서, 마음 한 켠에 어딘가 씁쓸했다. 10년 전 작품전시회 도록 『청관(淸館)』발문에 쓰여 있듯이, 그의 사진은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오마쥬’이지, 세계 경제를 주름잡는다는 화상네트워크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금간 시멘트 벽, 녹슬은 함석 지붕, 오래된 미닫이 문, 때묻은 부엌……. 그 빛바랜 동네, 주름 패인 노인들의 얼굴은 시간의 풍화를 묵묵히 버텨 온 그들의 가난한 삶의 역정을 소리없이 전해준다. 한 때 제물포항의 대외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했다는 이 청국 거상(巨商)의 후손들은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의 패배라는 시련을 거치면서, 중화제국의 몰락과 함께 쇠잔해 갔다. 사진 속 회색 동네, 한 때 번영과 활력으로 들썩였던 청관 거리는 간데없고, 그들의 고된 삶의 흔적만 덩그마니 남아 있다.

그런데 이런 몰락한 청상(淸商)의 이야기가 그의 작품전의 전부는 아니다. 사진전의 매력은 그것을 바라보는 한국인 작가 김보섭의 시선에 있었다. 이국 땅에서 평범하고 고요하게 진행되는 그들의 일상 속에서 작가가 찾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더 나아가 작가는 인천 화교들의 고향인 산동성까지 찾아가 그들의 삶의 뿌리를 담고 싶어했다. 한국의 이국인이자 유일한 소수민족인 화교를 다룬 그의 작품들을 보면, 그들의 주름진 삶 구석구석에 ‘우리’가 묻어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의 고되고 해맑은 삶의 자국은 우리의 삶 속에 패인 주름이다. 낯선 복장과 생활 소품들을 한 이국인의 표정은 어느 틈엔가 친숙하고 편안한 이웃이 되어 인천인의 생활세계로 귀환한다. 그들은 우리가 겪었던 세월을 함께 겪어왔던 것이다. 식민이라는 시련의 세월을 그들도 같은 땅에서 우리와 함께 거쳤고, 전쟁, 분단, 냉전의 어두운 터널을 우리와 같게 혹은 다르게 공유해 왔다. 시간에 풍화되어 화석화되어가는 옛 청관에 대해 작가가 갖는 애잔한 심경은 그저 타인에 대한 동정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연민이기도 하다.

요사이 차이나타운을 살리자는 논의가 활발해진 것은, 지역 내 화교 주민들에게 여러 모로 반가운 소식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논의들이 혹 지역 내 화교를 대상화하고 소외시키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최근 지역문화론이 지역경제 발전을 위한 도구로 동원되면서, 지역 내에 살아있는 문화적 숨결들을 오히려 덮어버리지는 아닐지. 당연히 차이나타운을 살리기 위해서는 화교 상권을 살려야 하고 그런 면에서 경제논리를 떠날 수 없다. 다만 거기에 결락되어선 안 되는 것은, 차이나타운은 화교가 이 땅을 자신의 고향으로 삼기 위한 정신의 안식처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화석화되어가는 청관의 역사를 복원하고 그것이 지역 내 생활 속에서 자유롭고 발랄하게 숨쉴 수 있게 해야 한다. 요즘 자주 회자되는 문화혼종성(hybridity)은 사실 어려운 말이 아니다. 차이나타운은 인공도시가 되어서는 안 된다. 화교의 삶의 이야기를 복원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과 하나로 뒤얽혀 흘러 온 여정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흔적을 기억하는 것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의 정체성(identity)을 만들어나가는 일이다.

백지운(인천문화재단, 연세대 중문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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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파푸아의 양심수 유삭 파카쥐(Yusak Pakage)와 필립 카르마(Filep Karma)의 석방을 촉구한다



사진협조: 경계를 넘어
인도네시아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웨스트 파푸아의 양심수 유삭 파카쥐와 필립 카르마는 2년 전 오늘, 웨스트 파푸아의 국기인 모닝스타를 게양했다는 이유만으로 반역죄로 징역 10년, 15년형을 선고받아 현재 수감 중에 있습니다.

웨스트 파푸아는 43년 전 인도네시아로부터 불법 점령당하면서 온갖 인권침해와 자원 수탈을 당하고 있으며, 이에 웨스트 파푸아 사람들은 자결권 보장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12월 1일은 웨스트 파푸아의 독립선포 기념일이자 유삭과 필립이 체포된 날로, 이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국제 공동행동에 한국의 인권사회단체들도 함께 하였습니다. 12시부터 3시까지 인도네시아 대사관 앞에서 일인시위와 항의 엽서 쓰기를 진행하였습니다.

<공동성명>

우리는 분노없이 43여 년간에 걸친 웨스트파푸아의 식민사를 말할 수 없다.

12월 1일 오늘은, 인도네시아에 의해 27번째주로 강제 편입된 웨스트 파푸아가 네델란드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날이다. 또한 유삭파카쥐와 필립 카르마가 파푸아의 자결을 요구하며 국기 빈땅끄조라를 게양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지 2년째 되는 날이다. 그들은 반역죄로 각각 10년 형과 15년 형을 선고받고 현재 자야뿌라 감옥에 수감중이다.

인도네시아는 지난 1962년, 네델란드로부터 독립을 준비중인 웨스트 파푸아를 무력으로 침공했다. 풍부한 자원을 갖춘 파푸아 영토를 강제 편입하려는 인도네시아의 요구와 미국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닿으면서, 파푸아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6년의 인도네시아 지배와 파푸아 독립여부에 대한 국민투표 실시를 내용으로 한 뉴욕협정이 1962년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 사이에 체결됐다. 1969년 진행된 국민투표 ‘Act of Free Choice’는 유엔의 묵인 하에 당초 협정에서 명시한 성인 남녀 전부가 아니라 인도네시아 정부가 선발한 친인도네시아인 1022명만이 참여했다. 선발된 사람들은 온갖 협박에 시달리며 ‘우리는 인도네시아를 원한다’는 선택을 강요당했다. 그 뒤 파푸아는 공식적인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인도네시아는 1969년 식민 지배를 시작한 이래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파푸아를 통제해왔다. 이 과정에서 살해당한 파푸아인만도 10만 명. 인도네시아군은 광범위한 폭력과 살인, 고문과 납치, 강간 등을 자행했고, 군이 지나간 마을은 초토화됐다. 250여 개의 부족이 가지고 있던 문화와 언어, 공동체가 파괴됐으며 땅은 개발이란 명목으로 파헤쳐졌다. 대대적인 학살과 이주정책의 결과 현재 파푸아 거주자 중 절반이 이주자들이다. 파푸아 아이들은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 영양 부족과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하여 파푸아 아이들 중 절반이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영아와 산모의 사망률은 최고 수치에 이른다.

하지만 파푸아인들은 지난 43년간 단 한순간도 자유를 향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파푸아인들의 거센 저항에 인도네시아 정부는 2001년 특별자치법을 제정, 파푸아의 특별자치와 독립의회 구성, 국기게양 등을 인정했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군대는 파푸아 최고 의회 의장이었던 데이스 엘루이(Theys Eluay)를 살해했으며, 반땅끄조라를 게양한 사건과 관련해 많은 사람들을 사살했고, 구속했다. 자결을 촉구하는 집회에 참여했던 여성들은 성폭행당한 후 수장됐다.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광기의 폭력이 아직도 웨스트 파푸아 한복판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누가 이 땅을 침략할 권한을 주었는가? 누가 이들을 학살할 권한을 주었는가? 누가 자결과 인권을 감옥에 넣을 권한을 주었는가? 파푸아인들의 삶을 결정할 권한은 오직 파푸아인들에게만 존재하며, 그들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우리가 할일은 ‘점령과 간섭’이 아닌 연대와 그들의 자결을 쟁취키 위한 국제적 실천뿐이다.

파푸아인들은 모멸스런 삶과 죽음의 공포를 견디며 오늘도 자결을 위한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감옥에 갇힌 필립과 유삭은 감옥 안에서도 빈땅끄조라를 옥상에 내걸며 투쟁하고 있다.

우리의 결단이 늦어진다면 파푸아의 암운을 걷어내는 것은 무망할 것이다. 지금 파푸아인들은 묻고 있다. 인도네시아 당신들의 행위는 정당하냐고. 정의로운 국제사회는 어디에 있냐고.

웨스트 파푸아에 자결을!

양심수 유삭 파카쥐와 필립 카르마에게 자유를!


2006. 12. 1


경계를 넘어/ 구속노동자 후원회/ 국제민주연대/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 나와우리/ 민가협/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인권연구소'창'/ 인권운동사랑방/참여연대/팍스아시아나/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팔레스타인평화연대



<배경설명>

사진협조: 경계를 넘어


웨스트 파푸아라는 나라를 들어보셨나요?

12월 1일은 웨스트 파푸아 사람들이 그들의 독립일로 선포한 날입니다.

또한 2004년 두 명의 파푸인이 국기 게양을 이유로 체포되어 10, 15년을 선고 받은 날이기도 합니다.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파푸아 사람들은 이리안 자야(Irianjaya)로 바꿔 불려왔고 동쪽 파푸아 뉴기니와 마주하고 있는 서쪽 지역, 웨스트 파푸아에서 살고 있습니다. 네델란드의 식민지였던 웨스트 파푸아는 1952년 자결권을 인정 받은 이후, 1961년에는 의회를 구성, '웨스트 파푸아'라는 국가명과 모닝스타라는 국기를 정했습니다.

그러나 웨스트 파푸아 영토를 강제 편입하려는 인도네시아의 무력적 탈환 시도와 미국 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한 개입, 그리고 유엔의 무책임한 각본에 의해웨스트파푸아의 독립의지와 약속은 좌절되었습니다.

독립이 좌절된 이후에도 계속된 웨스트파푸아인들에 대한 인도네시아 정권의 인권침해와자원 수탈, 웨스트파푸아 저항 세력에 대한 인도네시아 정부의 무력진압은 수 많은 파푸아사람들을 그들의 희생과 고통을 감수하며 살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독재자 수하르토가 물러나고 와히드가 대통령이 되면서 웨스트 파푸아 사람들에게도그들의 독립을 상징하는 '모닝스타'국기 게양을 인정받았고 파푸아 사람들은 독립 승인을 위해 최고 의회를 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파푸아 사람들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정치 공간이 열리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군대는 국기 게양 사건과 관련해 수백 명을 사살했고, 파푸아 최고 의회 의장이었던 데이스 엘루이(Theys Eluay)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후에도 동티모르 학살에 연루된 인물들을 경찰 간부로 임명하고 친 인도네시아 민병대를 구성하는 등 웨스트 파푸아에 대한 억압적 통치 구조를 유지하려는 시도는 계속 되었습니다.

한편, 인도네시아 정부는 2001년 웨스트파푸아에 특별자치를 인정하는 법을 통과시켰고, 이와는 모순적인 웨스트파푸아 3개 도 분리 법안을 독단적으로 시행하기에 이릅니다. 최근까지도 웨스트파푸아 사람들에 대한 인도네시아 정부의 억압정책과 탄압은 계속 되고 있으며, 2004년 12월 1일 독립일선포를 기념하는 자리에서 국기인 모닝스타를 게양했다는 이유만으로 유삭과 필립이 체포당해 10년과 15년 형을 선고 받아 그들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국기 게양이라는 이유만으로 10년과 15년을 선고 받았다는 것은 지금 웨스트 파푸아 사람들이 처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파푸아 양심수 유삭과 필립을 석방하라

그래서 웨스트 파푸아의 자유와 독립을 원하는 세계 각국의 국제연대단체들은 12월 1일 독립선포일을 맞이해 유사크와 필리페의 석방을 요구하는 국제 공동 행동을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단순히 두 사람의 석방을 요구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웨스트 파푸아에서 매일매일 일어나고 있는 인권침해와 자원 수탈, 그리고 군사화를 통한 저항 세력에 대한 인도네시아 정부의 폭력적 지배에 항의하는 의미가 담겨 있기에 이번 국제 공동 행동에 대한 여러분들의 관심과 지지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웨스트 파푸아 사람들의 자유에 여러분의 자유를 보태주십시오.

웨스트 파푸아 양심수 석방을 촉구하는 한국단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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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는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 계류돼있는 한국국제협력단법 일부 개정안 즉, 국제빈곤퇴치기금 신설과 관련해서 의견서를 제출했습니다.
국제연대위원회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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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생활하며 공부하는 건 아주 멋진 경험이다. 고향에서는 결코 체험할 수 없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해주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를 여행한다는 것 자체가 책이나 대학에서 배울 수 없는 지식을 얻게 해준다.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 생활 양식을 직접 배우며 경험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 한 번 시작하면 쉽게 그칠 수 없기도 하다. 그래서 2년간의 유학을 계획하며 한국에 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오래 머물기도 한다.

그러나 어려운 점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오랜 기간 외국에 체류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위협이라 하면 아마도 문화 충격일 것이다. 1958년 인류학자 칼베로 오베르그에 의해 최초로 정의된 '문화 충격'이란 완전히 새로운 문화적 환경에 처한 인간이 느끼는 장기간의 심리적 스트레스를 뜻한다. 예를 들어 내가 경험한 문화 충격은 한국에서 친구를 사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친구가 되는 과정이 다른 나라와는 다르기 때문에 친구를 사귀는 게 어렵다.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친구 관계가 고등학교 또는 그 전의 학교 동창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유일한 예외는 대학 신입생 때라고 할 수 있다. 아는 친구 한 명이 대학에서 1학년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데, 이미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여학생이 수업을 듣는 이유가 궁금했다고 한다.

"재미없지 않아?"

"친구 사귀려고 있는 거예요."

공부를 하기 위해 수업을 듣는 게 아니라는 이런 류의 태도는 대학 신입생들 사이에서 매우 보편적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나이와 상관없이 쉽게 친구를 사귄다. 스스로를 직접 소개하며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소개로 사람을 만나거나 아니면 같은 반 또는 같은 모임에 속해 있다는 상황에 의해 사람을 사귀는 게 일상적이다.

이러한 점은 한국인들이 처음 만나는 사람들을 대할 때 보이는 어색한 모습에서 역력히 찾아볼 수 있다. 생전 처음 만난 한국인이 나에게 불쑥 "어느 나라에서 왔어?"라고 묻는 경우는 셀 수조차도 없다.

하지만 "안녕", "어떻게 지내"라고 묻는다거나 "버스가 언제 올까", " 요즘 날씨가 좀 이상하다 그렇지?" 와 같은 말을 건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왔다고 대답을 하면 그 뒤 연결되는 질문이 없거나 대화를 계속하려는 노력도 없이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갑작스럽게 끝나고 만다.

물론 한국인 친구를 사귀는 게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친구 사귀기가 많이 힘들고 친구의 친구라던가 선생님이었다던가 하는 인맥을 통해야 수월해진다는 거다. 이 같은 차이의 원인이 무엇일까 궁금하지만 이것은 사회학 박사 논문의 주제로 다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로선 그 차이를 인정할 뿐이다.

* 유완또(Yuwanto)는 인도네시아 중부 자바의 주도 스마랑(Semarang)에 있는 디뽀네고로(Diponegoro) 국립대 정치학과 교수다. 한국정치로 논문을 쓰기 위해 서강대 국제대학원에 유학한 지 4년 되었으며, KBS 국제방송국에서 자신의 한국체험을 인도네시아어로 방송하는 일도 하고 있다.
유완또(인도네시아 교수, 한국 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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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민주화 인사 석방 위한 서명운동에 버마 민중 53만명 참여



최근 버마에서 아웅산 수치를 비롯한 민주 인사 석방 서명운동에 버마 민중 몇 십만 명이 참여하였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다. 일상적인 군부의 통제와 감시 속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놀랍기만 한데, 마침 11월 9일부터 11일까지 서울에서 열리는 아시아 시민사회교육포럼에 태국에서 참석한 버마 새사회민주당 (DPNS, Democratic Party for New Society) 아웅 모 저(Aung Moe Zaw) 대표를 15일 초청하여, 국내에서 버마 민주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여러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현재 버마 상황에 대해 자세히 듣는 자리를 가졌다. 아래는 마웅 모 저 대표의 발언과 질의, 응답을 요약한 것이다.



며칠 전 이브라힘 감바리 유엔 정무담당 사무차장이 버마를 방문해서 군부 대표와 아웅산 수치를 만났다. 나는 이 기회를 통해 군부와 대화가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가 있으리란 증거를 나는 아직 보지 못하고 있다. 군부는 여전히 민중을 억압하고 있고, 민주화 운동가들을 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보인다.

얼마 전 학생 운동가가 14-5년 간 수감됐다 석방된 후 다시 구금돼서 이에 대해 항의하는 운동이 버마 내에서 일어났다. 이런 반복되는 구금, 석방으로 미래는 예측하기 어렵다. 더 악화될지 좋아질지 그 사이엔 긴장감이 존재한다. 그래서 지금 상황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이 시점에 좀 더 확고한 전 세계의 지지가 필요하다. 국제사회의 압력 뿐 아니라 버마 내부에서도 운동이 필요하다. 지금 버마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의제로 상정돼 있는데, 안보리의 결의안 통과를 위해선 국제사회의 압력과 지지가 필요하다.

나는 여러분들의 의견을 묻고 싶다. 아시아를 비롯한 국제 사회로부터 어떻게 버마의 민주화를 위한 지지를 더 많이 이끌어낼 수 있을지 알려 달라. 한국에서 어떻게 지지 얻어야 할지 알려 달라.

중국, 일본, 한국, 인도, 이 네 나라는 아시아에서 영향력 있는 큰 나라인데, 중국은 군부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고, 인도도 그러려고 한다. 한국은 버마 민주화에 대한 명확한 지지는 없으나 일본은 확실히 지지하고 있다. 나는 그래서 한국 정부의 지지를 받으려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버마 민주화에 대한 지지를 약속했다. 하지만 그동안 한국 정부로부터 확실한 지지 정책을 보지 못했다. 한국 정부가 버마 민주주의에 대한 정책을 내놓길 바란다. 여러분의 노력과 지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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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버마 내에서 활발히 이루어진 서명운동에 대해 말해 달라

지난 1988년 민주화 운동을 이끈 학생 운동가 지도자들이 14-5년간 장기 수감됐다 2004년에 석방되었다. 이들은 석방 후 버마의 민족 화합, 아웅산 수치와 군부의 대화, 버마 민주주의, 화해, 단합 등을 요구하며 평화적으로 운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문제는 군부 정권이다. 아웅산 수치와 대화하는 것도, 민족 화합도 원하지 않는다. 군부는 석방된 학생 운동 지도자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이들 지도자들은 버마 민중으로부터 지지를 받으며 영향력 있는 민주화 운동 지도자들이 되었다. 그래서 군부는 이들을 위험 인물로 간주하고 지난 9월 27일 다시 체포하였다. 이때부터 이들 지도자들, 민 코 나잉, 코 코 기이, 흐타이 키웨, 코 민 제야와 가택연금 중에 있는 아웅산 수치 등 민주인사 석방을 위한 서명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서명운동은 불과 2주 만에 53만명이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두 번째 단계의 캠페인은 이들 지도자들의 체포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흰 셔츠 입기를 벌였다. 이건 1주일 동안 진행하였다. 다음 단계의 캠페인은 기도회로, 지금도 진행 중이다.

군부는 이런 캠페인을 반란을 일으키기 위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어, 이들 캠페인 주도하는 지도자들을 체포하려고 한다. 또, 기도회에 버마 민중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파고다에 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캠페인 운동가들과 군부 사이에 긴장감이 존재한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지 못하겠다. 이 캠페인이 민중항쟁으로 발전할지 아니면 군부의 억압으로 실패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매우 중요하다. 이 캠페인이 더 확대되길 원한다.

53만명이 그렇게 단시간에 참여한 것은 대단한데, 이렇게 전국적인 서명운동이 어떻게 가능했나? 이 캠페인을 조직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서명운동은 전국적으로 일어난 게 아니라, 랭군, 만달레이 등 버마 중심 지역에서만 진행했다. 기간도 (민 코 나잉 생일인 18일까지) 애초 2주간으로만 정한 것이다. 짧은 기간이기 때문에 교통 등 여러 문제로 지방까지 확산시키진 못했다.

버마에는 많은 운동가들이 활동 중이지만, 조직화된 운동 단체가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도 군부 독재 시기에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언론에 나온 ‘88세대 학생 단체’는 단체명이 아니라, 1988년 민주항쟁 세대 학생 운동가들을 지칭한 것이다. 그래서 조직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군부가 사실상 두려워한다. 버마는 학생, 노동자 등으로 이루어진 단체나 모임을 조직하지 못하게 돼있어서, 제도권에서 허용하는 범위에서 또는 지하운동으로 학생, 노동자, 스님, 재야 정치인 등 네트워크를 통해 사람들을 민주화운동에 동참하게 하고 있다. 신문이나 팜플렛을 사람 손으로 거쳐서 직접 배포하고 있는데, 이러한 배포는 매우 위험하다. 한 장 배포로 20년형을 살 수도 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고 민주화 운동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인적 네트워크가 있어서 53만명의 서명이 가능했다. 이미 몇몇 서명 운동 지도자들이 체포돼서 14년형을 선고 받았다. 버마에는 양심수가 최소한 1500명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시골에는 인권 침해가 더 많이 발생하고 있다.

어려운 조건에도 53만명의 서명이 이루어진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이 흐름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양상이 보이나?

아니다. 서명운동은 2주간이라는 시기를 정하고 한 캠페인이라 더 이상 계속하지 않는다.

군부가 53만명이나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서명자 명단 공개가 어려울 텐데..

군부도 53만명이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가만히 있는 이유는 너무나 많은 숫자가 참여해서 잘못 건드렸다가 폭동으로 발전할까봐서다. 그래서 너무 이 운동이 확산되지 않도록 어느 정도 견제하는 차원에서만 막고 있다. 사실 이 서명운동 결과는 유엔 사무차장이 버마에 올 때 전달하려 했는데 군부가 막아서 못한 것 같다.

새사회민주당과 민족민주당과 관계는?

우리는 80년대 후반 학생 운동 조직으로 8888 민주항쟁 당시 함께 참여했는데 쿠데타 후 학생 조직이 금지되어 많은 운동가들이 정당을 만들어서 정치 운동을 했다. 이것을 채널로 해서 당시 학생운동 지도자들은 세 중심 기조로 나누어서 활동했다. 정당 활동(새사회민주당)과 지하운동 조직, 무장 투쟁 조직. 당시 우리 전략은 합법 정치와 동시에 무장 투쟁을 벌이는 것이었다. 1988년 당 만들 때 만해도 학생 조직이라 정치 형태의 정당을 만들지 못했다. 이 세 활동 조직은 긴밀한 협력을 가졌다.

NLD(민족민주당)는 1990년 선거에서 80% 이상 지지를 받았을 때부터 주도적인 정당으로 간주됐으며, 우리는 아웅산 수치를 우리의 지도자로 여기고 있다. 1990년 선거 당시 우리는 선거에 나가지 않고 NLD를 지지하였다. 우리는 정권을 잡기 위한 경쟁 관계에 있지 않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엔, 우리도 선거에 참여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민주주의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아웅산 수치를 우리의 지도자로 여기고 있다.

1997년 버마가 아세안에 들어가는 과정에 많은 논란이 있었다. 지금 보면, 아세안에 들어간 게 좋은지, 배제한 게 좋은지, 어떻게 평가하나? 그리고 서방에서 버마 군부를 압박하기 위해 경제 봉쇄를 하는데 이것이 버마 민주화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가?

우선 군부 독재 정권 스스로 정권을 포기할 리 없다. 그래서 경제 봉쇄라도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경제 봉쇄를 말할 때, 전면적 경제 봉쇄를 말하는 게 아니다. 군부 정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비즈니스만 말하는 것이다. 일반 사람과 관계있는 비즈니스는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전쟁 무기와 관련된 것, 그리고 유노칼, 토탈 같은 큰 석유회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일반인과 관련된 작은 비즈니스는 아니다.

그리고 군부는 확고하고 구체적인 경제 정책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비즈니스란 게 버마에서 잘 작동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억압할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억압하기 때문에 사업을 하지 못한다.

1997년 아세안에 들어갈 때 말레이시아 수상 마하티르가 버마를 끌어들임으로써 민주화 촉진을 하도록 하자했고, 당시 운동가들은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2003년 마하티르는 이제 버마를 아세안에서 축출하자고 한다.

민주인사 석방엔 여러 나라의 국회의원들도 서명운동을 벌였고 한국도 한 것으로 안다. 이러한 것이 실질적인 도움이 되나?

태국,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뉴질랜드, 일본의 국회의원들이 버마 민주화를 지지하는 모임을 결성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임들은 아시아 차원에서 AIPMC(ASEAN INTER-PARLIAMENTARY MYANMAR CAUCUS)라는 아세안 나라들의 국회의원 모임에 합류하고 있다. 한국은 아직 여기에 합류하지 않고 있다. 나는 한국도 국회의원 모임이 만들어지길 바라고, 아시아 내에서 이런 활동들이 군부 정권에 압력을 가하고, 유엔 안보리에도 압력을 가할 수 있길 바란다.

새사회민주당 소개

Democratic Party for New Society (DPNS)는 1988년 미처 완성되지 못한 민주주의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결성된 정당으로 당시 아웅 산 수치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 (NLD)에 이어 두 번째 규모였다. 전국적으로 25만 명의 당원과 120여 개의 지부를 거느린 큰 규모의 정당으로 당시 버마 국민들의 전폭적 지지를 얻었는데 특히 버마 학생 단체들과 젊은이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1990년 5월 27일의 총선거에서 DPNS 는 대중을 지지기반으로 한 민주정당이었지만 NLD 승리를 위해 NLD에 대한 지지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90년 5월 총선에서 NLD가 승리한 후, 군사정부에게 정권이양을 요구한 DPNS에 대해 군사정부는 극심한 탄압을 자행하고 핵심 당원들을 수감했다. 이후 버마 내에서 민주화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DPNS 중앙위원회는 군부에 대한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1991년 당 본부를 태국- 버마 국경지대의 자유지역으로 옮기고 당을 재결성했다.

현재 DPNS는 버마 내에서 인권과 민주주의를 주창하며 시민 사회를 강화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으며 또한 미래 버마에서 자격을 갖춘 정당이 되기 위해 당원들의 교육적, 전문적 자질 향상에 힘쓰고 있다.

아웅 모 저 대표 약력

Aung Moe Zaw 대표는 1988년 8월 민중항쟁 전, 그 해 3월부터 버마 양곤 대학교에서 시작됐던 학생시위를 주도한 학생지도자 중 한 명이다. 그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1988년 10월 14일 결성된 DPNS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현재까지 계속 활동하고 있다. 아웅 모 저 대표는 1997년부터 DPNS 대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버마 연맹 국가 위원회(NCUB) 총무단의 구성원이자 버마 민주주의 포럼(FDB)의 정책 입안자 중 한 명이다. 그는 1986년 양곤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다 영국으로 건너가 2004년 영국 석세스 대학교에서 행정과 개발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2006년 11월 9일부터 11일까지 서울에서 열리는 2006년 아시아 시민 사회 교육 포럼에 초청받아 버마 시민 사회에 대해 강연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포럼 후 한국에 체류 하며 버마 민주화를 지지하는 한국 시민 단체, 기자, 국회의원 등 많은 한국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버마의 상황을 알릴 예정이다. 특히 아웅 모 저 대표는 1988년 민중항쟁으로 수감됐다 석방된 5명의 학생지도자가 다시 체포된 상황을 한국사회에 알림으로써 버마 민주화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한국사회가 더 많은 관심과 도움을 통해 국제적 연대의식을 보여주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정보 제공: NLD 한국지부)

국제연대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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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지난 칼럼처럼 이번에도 TV이야기로 시작을 할까 한다. 바보상자인 TV가 필자에게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도구가 되니 기특한 일이다. 얼마 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방영한 “노예할아버지”, “노예청년” 등의 내용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 방송 후 누리꾼들이 “노예할아버지”, “노예청년”, 그리고 유사하게 “노예어린이집” 등에 관한 이야기와 동영상을 여기저기에 퍼 날랐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학대한 사람들에게 분노를 느꼈고, 이들의 “인권”이 이처럼 유린되도록 방치한 행정당국에 대한 질타도 이어졌다. 무엇이 누리꾼들을 이렇게 바쁘게 만드는가?

한사람의 인간으로 최소한 지켜져야 할 인간 존엄성과 인권이 유린되었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분노는 지극히 정당하다. 흔히 하는 말로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데, 경제적 능력의 차이, 학력의 차이, 연령의 차이, 성별의 차이, 지역의 차이를 막론하고 누구나 동등한 인간으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데 시비를 걸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우리나라도 이제 국가인권위원회도 생기고, 사회적으로 인권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고조되면서 나 자신에 대한 인권 침해나 국내에서 일어나는 인권유린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난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하루가 다르게 높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 고조되는 인권에 대한 관심이 우리나라에서는 국경과 국적이라는 울타리를 넘기는 아직 힘겨운 모양이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국내에도 국경을 넘는 인권문제, 외국의 인권문제에 대해서 걱정하고 행동하는 시민단체들이 다수 있고, 이 시민단체들의 활동을 지지하고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개인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확산의 범위는 아직 그리 넓지 않은 것 같다.

국내에서 또는 “우리나라 사람”을 대상으로 일어나는 인권유린과 차별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의 생각으로 떨쳐 일어나 비난을 하면서도 국내에 있는 많은 이주노동자의 인권문제, 그리고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권 유린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눈을 감아버리거나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 자신부터 생각해 볼 문제다. 다양한 핑계로 인권외교에 미온적인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많은 개인적 차원의 인권에 대한 관심도 국경을 넘는 순간, 국적이 달라지는 순간 한없이 약해지는 것 같다.

우리가 생면부지의 노예할아버지, 나와 사돈에 팔촌에 구촌에 무촌(?)도 아닐 것 같은 노예청년의 인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들이 한국인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들도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인권이란 단어는 말 그대로 인간으로서 가지는 최소한의, 당연한 권리다. 그리고 인간은 어디에 살건 모두 같은 인간이다. 인간이라는 명칭에는 국경도 국적도 없다. 인권에도 국경과 국적이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우리의 인권에 대한 관심과 행동이 대한민국이라는 민족국가, 한국인이라는 국적에 매어 있을 단 하나의 이유도 필자는 찾을 수 없다.

우리의 인권에 대한 관심과 인식을 국경과 국적으로부터 해방시키자. 우리의 해방된 인권에 대한 관심과 인식은 전 세계 도처에서 지금 이 시각에도 자행되고 있는 더 큰 규모의, 더 악랄한 인권유린에 눈을 뜰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순간에도 버마(미얀마)에는 300만명에 달하는 난민이 고통받고 있고, 7만명의 소년병이 가혹한 훈련과 억압에 시달리고 있으며, 군에 의한 강제노동과 성매매, 성범죄(성범죄 피해자의 30%는 바로 살해된다고 한다)가 일상적으로 자행된다. 그리고 지구상에 버마처럼 “인간”이 고통당하고 있고, 인권이 유린되는 나라는 얼마든지 있다. 이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눈물 흘리고 아픔을 나누기 위해서 국경과 국적에 갇힌 우리의 인권에 대한 관심을 자유롭게 풀어놓아야 하겠다.

이재현(한국동남아연구소 선임 연구원,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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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통상부, 코이카에 대한 질의입니다.
국제연대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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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명절이 되면 전국 곳곳에서 아시아 외국인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들을 위한 행사가 개최되고 있고 올 추석도 거르지 않았다. 10년 전만해도 우리는 아시아로부터 온 외국인들이 왠지 거북하여 거리를 두거나 서먹서먹해 했지만 지금은 서로 상당히 가까와진 느낌이 든다. 이렇게 우리는 아시아 이주민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는 과정에 있다.

1990년에 2만 명이 못되던 우리나라 외국인노동자가 2004년 말에 42만 명을 넘어섰다. 출신국가별로 보면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리핀, 태국, 방글라데시, 몽골, 우즈베키스탄, 파키스탄, 스리랑카 순으로 이어지는 아시아 사람들이다. 한편 국제결혼은 1993년 전체 혼인신고의 1.6%에 불과했지만 2005년에는 13.6%로 늘어났다. 농어촌지역 혼인은 국제결혼인 경우가 35.7%나 된다고 한다.

이러한 아시아 이주노동자와 결혼이민자여성의 한국러시와 그에 대한 한국사회의 책임의식은 백여 개에 달하는 외국인노동자 및 이주민인권운동단체들을 출현시켰다. 처음에 우리는 이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다양한 아시아인들과 공존할 수 있게끔 우리 사회가 다문화적으로 재편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문화다양성이 곧 글로벌 시대의 경쟁력이라는 논리까지 제기되고 있다. 아시아 이주자들이 우리를 부담스럽게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를 풍요롭게 해주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다다른 것이다. 참 멋있는 발상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러한 생각을 실천할 수 있을까? 생각만 전환적으로 한다고 될 일은 아닌 듯하다. 우리를 다문화적으로 만드는 기획은 명절 때마다 아시아인들에게 한복을 입히고 한과를 먹고 한국예절을 배우는 자리를 만드는 것으로는 달성되기 어렵다. 물론 한국을 알게 하는 일은 이들에게 즐거운 일이자 꼭 필요한 일이므로 계속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들의 위상을 교육과 실천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재조정하는 기획 또한 즐겁고 꼭 필요한 일이다.

그들이 사회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며 의문을 품는 이들도 있겠지만 일부 단체들이 이미 선례들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외국인노동자센터는 외국인노동자와 한국인이 함께 아시아문화를 학습하는 소모임을 결성하였는데, 외국인노동자들이 자기 나라의 문화, 언어, 예절, 종교를 다른 나라 출신의 외국인들과 한국인들에게 가르치는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또 다른 외국인노동자단체에서는 아시아 소식을 아시아 각국의 언어로 게시하는 웹사이트를 만들었는데 그 사이트의 내용을 채우는 이들이 바로 외국인노동자들이다. 외국인노동자로 구성된 밴드가 외국인노동자의 고통과 희망, 연대의 필요성을 노래하여 우리 민중문화운동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의 기획과 실천이다.

우리를 아시아의 다양한 문화로 이끌고 그 속에 담긴 풍요로운 지혜로 인도하는 교사가 바로 이주노동자들과 결혼이주여성들인 것이다. 이러한 발상을 실현하려면 우리의 아시아 친구들을 수동적 수혜대상에서 능동적 기획주체로 인식하고 역할을 부여하는 기획, '그들을 위한 자리'인 동시에 '우리를 위한 자리'여서 '함께 하는 자리'로 만드는 기획과 실천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이 글은 [열린전북]에 실린 글입니다.
전제성(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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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ODA정책감시 뉴스레터 9호



정부는 지난 9월 27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2006년~2010년 국가재정운용계획안을 확정하면서 공적개발원조에 중점을 두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2007년도 대외 무상원조 예산도 전년 대비 약 16.8% 증가한 2,230억 원으로 책정하였다. 작년에 비해 320억 가량이 증액되었지만 국제기준으로 볼 때는 갈 길이 너무 멀다. ‘국력에 맞는 선진외교’, ‘새천년개발목표(MDGs)를 달성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동참’운운하며 소리를 높여도 국민소득대비 ODA규모는 2005년도 OECD 국제원조위원회 0.33%의 1/3 수준인 수준인 0.09%에 불과한 것이다. 한국인 최초 UN사무총장의 등장을 앞두고 세계 12위 경제규모에 걸맞게 국제사회에 대한 기여를 확대하겠다며 UN분담금(세계 11위) 체납분에 대해서는 외교 예산 중 우선순위를 두는 정부가 왜 한국의 경제력에 미치지 못하는 국가들보다 더 초라한 ODA규모에 대해서는 진정으로 부끄러워하지 않는 건지 의아하기만 하다. 당장 지난 4월, 노무현 대통령은 아프리카를 순방하며 현재 3,200만 달러 수준의 ODA규모를 1억 달러로 늘이겠다고 공언하고 돌아왔는데, 지금 확보된 예산으로 과연 약속을 지킬 수 있는지 걱정이다. 이번 정기국회에 열린우리당 정의용 의원이 국제선 항공권에 국제빈곤퇴치기금을 설치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발의한 <한국국제협력단법> 개정안 외에는 재원동원방안이 전무하다.

이처럼 개도국 빈곤문제 해결에 기여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나 ODA규모를 확대하겠다는 목표가 구체적인 예산으로 뒷받침되지 못하는 문제보다 더욱 근본적인 것은 대외원조규모 증액 목표가 터무니없이 낮다는 것이다. 선진국들은 2000년 유엔에서 새천년개발목표(MDGs)가 채택된 이후 2005년 밀레니엄+5 유엔 특별정상회의에서 GNI대비 ODA비율을 0.7%수준으로 확대하기로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이런 목표를 이미 달성한 덴마크, 노르웨이 외에 많은 나라들이 2010년까지 최소한 0.5%수준으로 확대하거나 추가 공여를 약정하고 있는데, 한국정부의 야심찬 계획은 고작 2009년까지 0.1%수준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2011년에 잡았던 목표를 조기에 달성하겠다고 각오를 밝힌 셈이지만, 우리 국민들이 느끼는 부끄러움을 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MDGs 달성 마지막 해인 2015년에는 우리 정부가 가입하겠다고 밝힌 OECD DAC(개발원조위원회) 회원국 2010년 평균치로 예측되는 0.36%수준으로 확대하는 것을 검토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지속개발가능위원회의 권고안인 2010년 0.2%확대 목표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 모습이 보일 때에야 비록 정부가 누누이 강조하는 ‘경제력에 상응하는 원조규모’수준에는 못 미치더라도 우리 국민들이 비로소 이해해 줄 것이며, 수백억에 달하는 개도국 무역 흑자규모에도 불구하고 대외원조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다는 세계 시민들의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대외원조의 양적 규모에 관해 살펴본 것처럼, 정부는 지난해 말 <대외원조 개선 종합대책>이라는 장밋빛 청사진을 내놓고 의욕을 보인 것과는 달리 전향적인 변화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만약 열심히 계획대로 추진하고 있는데도, 실적이 대단한데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들이 그 변화를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다면 그 역시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지난 3월 국제개발협력위원회가 구성되어 한차례 회의를 하고 6월에 실무위원회가 역시 한차례 열린 것 정도가 가시적인 움직임이다. 하지만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제개발협력위원회가 구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NGO를 비롯하여 학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공통적으로, 꾸준히 지적해온 ‘국제개발협력의 통합적 이념이나 목표, 전략 부재’의 상황이나 유,무상 사업간 사전 협의 및 조율 미흡 등 ‘조정 및 통합기능’의 취약성은 여전해 보인다. 참여연대가 지난 9월 ODA 평가 사업 모니터를 위해 국제개발협력위원회에서 2006년 상반기 중 구성하기로 계획되어 있는 평가소위원회의 활동에 대해 문의를 하였을 때, 평가소위는 구성조차 되어 있지 않았으며, 그 이유는 부처 간의 의견 조정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답을 들었다. 사업평가지침을 만드는 일에 어떤 부처 간에, 무슨 이견이 있다는 것인지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그동안 대외원조 사업을 추진함에 있어 드러났던 유, 무상 정책 및 시행 부처 간 협의, 조정체계의 강화를 위해 추진시스템 정비를 담당하는 국제개발협력위원회는 구성된 지 6개월이 넘도록 평가소위 하나 구성을 못하는지 반문하고 싶었다. 이는 국제개발협력위원회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며, 국무총리의 역할을 해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기본적인 ODA 추진 시스템조차 갈피를 못 잡고 있는 판이니, 무상원조(2003년 기준 46.0% / DAC 평균 86.1%)및 구속성 원조 비율(2003년 80.6% / DAC 평균 6.8%, 다시 말해 DAC 회원국은 ODA 90%이상을 비구속성 원조로 제공)과 최빈국 원조 비율(GNI대비 0.01%수준 / DAC 0.08%)을 대폭 늘려 대외 원조의 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과제들은 더욱 오리무중이다. 자체적으로 개발 원조를 시행하고 있는 중국이나, 우리보다 ODA규모가 큰 터키 (GNI대비 0.11%)등에 ODA를 지원하는 반면, 빈곤의 대명사격인 아프리카에 고작 5.5%만의 ODA가 지원되는 현실이나 비민주적인 미얀마에 ODA가 지원되어 해당 국민들의 인권을 더욱 유린하거나, 베트남 모 대학 건설사업이나 필리핀 사우스레인 사례처럼 개발의 후유증을 남기는 문제, 적절한 사업타당성 검토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선정되거나, 빈곤 퇴치라는 원래의 목적과 달리 정치 외교적 고려에 따라 불투명하게 사업을 선정하는 방식, 원조 효과를 떨어뜨리는 유무상 사업간, 부처 간 연계 부족과 전문성 부족 등 산적한 과제는 그저 <대외원조 개선 종합대책>의 평가 내용으로만 전락한 듯하다. 9월 중에 2006년도 계획에 대한 추진상황 중간점검을 한다고 했는데, 정부는 중간성적을 어떻게 매길지 성적표가 궁금하다. 민간 전문가들은 벌써 중간평가를 마치고 토론회 등을 통해 공론화 작업에 들어갔는데, 언제나 그렇듯 정부의 행보만 느리다.

정부는 2006년도를 우리의 개발경험과 비교우위분야에 중점을 둔 한국형 국제개발협력의 원년으로 삼겠다고 포부를 밝히고, 91년 이래 처음으로 유, 무상 원조사업을 포괄하는 종합적인 성격의 계획을 야심차게 수립하였다. 정부의 발표대로 그야말로 종합적인 진단과 대책이라 국민들은 약간의 미진함은 뒤로 밀어놓고 그 찬란한 계획이 빛을 발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2006년 10월 지금의 현실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사항이라 할 수 있는 ODA의 통합적 이념과 목표, 전략을 담을 그릇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정부의 진단대로 기관(국제협력단법), 기금(대외경제협력기금법) 설치를 목적으로 한 현행 법률체계는 전반적인 국제개발협력 목표, 관리시스템, 조정 기구 등을 규정하기가 어렵다. ODA의 이념과 가치, 원칙을 제대로 담기에 한계가 많은 것이다. 세간에는 ODA헌장 제정을 주장하고 있는 재경부와 가칭 국제개발협력법을 주장하는 외통부 사이의 이견 때문에 ODA의 통합적인 이념과 목표와 유무상 원조를 통합하는 내용을 주요하게 담을 법안 제정이 계속 무산되고 있다는 얘기가 떠돌고 있다. 국민들은 법이든, 헌장이든, 아니면 정책문서이든 형식보다도 그 형식에 담길 지구촌 좋은 이웃이 되고자 하는 아름다운 희망과 전 세계 빈곤타파와 인권 증진이라는 연대의 가치, 그리고 서로 생각을 나누며 제대로 된 ODA정책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회적 합의를 소중히 생각한다. 마치 우리 국민들이 ODA의 양적 규모의 수치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본말이 전도되지 않아야 한다.

독자들은 우리가 뉴스레터 창간호에서 ODA도 민주적 통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동안 누구도 관심 갖지 않았던 ODA는 국제환경의 변화와 시민의식의 성숙에 힘입어 서서히 그 전모가 드러나고 있다. ODA에 대한 국민여론조사 결과에서도 볼 수 있듯이 바야흐로 사회적 합의와 참여로 ODA를 추진할 조건이 마련된 것이다. ODA의 기본 방향과 운영기조, 전략을 마련하는 출발부터 사업을 평가하는 마무리단계까지 모든 과정마다 시민적 참여가 확대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2006년 상반기 ODA관련 정부 정책은 아무리 완벽한 계획을 수립되었다 할지라도 시민 참여와 사회적 합의 없이는 결국 구호로 끝나 버릴 수 있다는 교훈을 던져주었다고 할 수 있다.

박영선(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 뉴스레터 원본 첨부
국제연대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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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9일 태국에서 일어난 쿠테타는 안정 궤도에 들어섰다고 평가되던 태국 민주주의 파국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현재 태국에서 ‘좋은 쿠테타’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태국은 1992년 민주화 이전까지 17번의 쿠테타가 있을 정도로 ‘쿠테타의 나라’로 불리웠다. 많은 사람들은 쿠데타로부터 쿠데타로 이어지는 ‘태국식 민주주의’의 악순환이 1992년 민주항쟁으로 군사정권이 무너지면서 종결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1997년 경제위기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태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에 따라 긴축정책을 폈다. 그 결과 기업파산과 실업자가 급증하였다. 이 와중에 일각에서 외세의 간섭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영리하게 읽어내고 ‘타이사랑당’이라는 이름으로 지지층을 조직화낸 정치가가 다름 아닌 억만장자 탁신이다. 타이사랑당은 강력한 정당의 출현을 제도적으로 보장한 1997년 신헌법하에서 처음 치루어진 2001년 선거에서 압도적 의석을 차지하였다. 이로써 탁신은 유례없이 막강한 정치적 지지를 등에 업은 민간 수상이 되었다.

그러나 탁신은 절대적 지지 속에서 독재자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언론통제, 강경진압으로 일관한 ‘마약과의 전쟁’, 남부 무슬림지역에 대한 홀대와 무슬림 민간인 학살 등은 현지 남부 무슬림인들은 물론이고 비판적 지식인층과 시민사회의 분노를 샀다. 태국 사회에서 지존의 존재인 국왕도 탁신의 권위주의적 통치 행태에 우회적으로 불만을 표시하였다.

하지만 탁신의 독선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그런데 올해 1월 탁신 일가가 19억달러에 이르는 자신들의 주식을 해외에 매각하는 과정에서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은 ‘반애국적’ 행각이 발각되었다. 이에 방콕 시민이 분노하고 연일 거리로 나왔다. 탁신은 수상직 사임 의사를 밝혔으나 이후 이를 번복하는 태도를 보였다. 오는 11월에 재선거가 예정되었으나 탁신의 농촌진흥정책의 수혜자라고 여기는 대다수의 농촌지역은 여전히 탁신의 표밭이었다. 야권은 난국해결을 위해 국왕이 새로운 수상을 임명해줄 것을 요청하고 나섰다.

이러한 와중에 국왕에 대한 충성과 탁신의 비리 척결을 명분으로 한 군부 쿠테타가 일어났다.

한마디로 이번 쿠테타는 금권민주주의의 독단적 행태, 부정부패가 불러온 반민주적 정변이다. 15년전에도 군부는 민선정부의 부정부패를 이유로 쿠테타를 일으킨 바 있다. 쿠테타 초기 국민들은 쿠테타를 일으킨 군부에 대해 지금처럼 큰 반감이 없었다. 그러나 군부가 더 이상 정치개입을 않겠다는 애초의 약속을 어기자 엄청난 규모의 반군부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이번에도 쿠테타를 주도한 세력은 쿠테타 직후 조기 민정이양을 약속했다. 역사가 또다시 반복될 것인지, 향후 태국군부의 행태와 시민사회의 대응이 주목된다.



* 이 글은 <대학주보>에 실린 글입니다.
박은홍(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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