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한 방송사에서 2006년의 모토로 내걸은 “아시아의 창”이라는 말에 아시아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무척 고무되었던 기억이 있다. 새해 첫날부터 아시아 각국을 연결하여 새해를 맞이하는 각 국가의 표정을 입체적으로 중계하고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소개하는 것을 보며, 그리고 한동안 몇몇 다큐멘터리, 고정 프로그램 등을 통해서 “아시아”라는 단어를 연발하는 것을 보며 “우리나라에도 아시아에 관한 관심이 이만큼 높아졌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왜 아시아인가? 아시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아시아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아시아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 등의 심도 깊은 질문에 대한 답을 이런 프로그램들에서 찾겠다는 희망을 하지는 않았다. 나의 기대수준은 아시아가 방송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되면 관심이 높아지지 않을까 정도였다. 하나 덧붙이자면, 방송의 다양한 시도들을 통해서 우리 눈에 들어오는 아시아가 왜곡되지 않은 모습이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올 한해의 반환점을 도는 시점에서 이 방송사의 “아시아”에 대한 강조가 연초만 못하다는 아쉬움은 이미 접었지만, 그래도 꼭 한가지 이야기는 하고 싶다. 이 방송사에서 꾸준히 아시아를 다루고 있는 한 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이 심야에 방송이 된다는 점도 탓하고 싶지 않다. 지난 몇 달간 이 프로그램에 방송된 내용들을 보면 한주에 방송되는 두세 꼭지 중에 하나는 이런 제목을 달고 있다.

- 중국의 인간변압기, 별걸 다 먹는 남자, 혀로 그림 그리는 남자

- 일본의 로빈슨 크루소, 귀신이 봉인된 그림, 머리카락이 자라는 인형

- 베트남의 난쟁이 가족, 6.8m 장발 할아버지

- 태국의 바위손 아줌마, 휘발유 먹는 남자

- 터키의 네발로 걷는 가족, 박쥐이발관

- 캄보디아의 불개미요리, 말레이시아의 인간자석

물론 “오락성과 정보성을 겸한 새로운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라는 해당 프로그램 웹사이트의 소개처럼 오락성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제들은 아시아 각국, 각지에 있는 흥미위주의 눈요깃거리만 찾아다닌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게 한다.

서양이 처음 동양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럴 거라 생각이 되지만) 자기와 다른 대상을 이해하려는 진지한 관심 보다는 뭔가 이국적인(exotic)인 것에 관심을 두고 시작한 것처럼 지금 한국에서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뭔가 이국적인 것에 대한 흥미위주의 관심은 아닌가 의심해볼 만하다. 인간과 현실에 대한 진지한 관심은 없고 단순한 말초신경적인 재미만 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볼 일이다. 나아가 단순한 흥미위주의 접근이 도를 넘어서 아시아를 요상하고 웃기는 것으로 전형화하지는 않고 있나 생각해 볼 일이다.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의 혼혈인 숫자가 2020년 즈음해서는 167만 명이 될 것이고, 20세 이하 인구 5명중 1명은 혼혈인이며, 신생아 3명중 1명이 혼혈아가 될 것이라 한다. 또 2005년 충북 보은에서 혼인신고를 한 205쌍 중 82쌍(40.4%)은 국제결혼을 한 부부들이다. 2006년 초 통계에 의하면 국내 거주하는 여성 결혼 이민자는 총 6만6천659명으로 재중동포가 41.6%(재중동포도 한민족이라고 하지만 정말 그들을 차별없는 눈으로 보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중국인이 20.1%, 베트남인이 11.1%, 일본인이 10.7% 등으로 이들이 83.5%를 차지하며, 기타 국적도 필리핀, 캄보디아, 태국, 라오스, 인도네시아 등 대부분 아시아 국가들이다.

이미 아시아는 한국 속에 깊이 들어와 있다. 이제라도 단순한 흥미를 넘어서 아시아인들은 누구이며, 아시아는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 속의 그들과 우리가 더 큰 새로운 “우리”가 되어 어울려 살 수 있는 그런 사회를 위해서.
이재현 (한국동남아연구소 선임 연구원,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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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8월 8일 시작된 버마 민중항쟁 18주년을 기념하여 11개 한국 시민사회단체가 2006년 8월 8일부터 12일까지 "버마 민주화를 위한 인권주간"을 진행하면서, 인권주간을 기념하고 향후 버마 민주화와 인권 실현을 위한 홍보를 위해 자료집을 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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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88 버마민중항쟁 18주년-버마민주화를 촉구하는 인권주간 자료집

"버마에 민주화를! 아시아에 평화를!"

<목차>

인사말 __4

인권주간 취지소개 __6

8888 버마민중항쟁이란? __8

1부·버마의 삶과 인권 마주하기

소수 민족 __10

양심수 __12

인신매매 __14

여성 __15

소년병 __16

보건 __17

언론의 자유 __19

강제노동 __20

2부·버마의 오늘과 우리

버마 슈에가스개발 __22

버마와 난민 문제 __26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__30

3부·8888 버마민중항쟁 18주년 인권주간

행사별 세부일정 __31

자전거캠페인 __32

선포기자회견 __32

사진·영상전 __33

버마활동가와의 만남 __33

후원의 밤 __34

공동주최단체·후원단체 소개 및 연락처 __35

발행| 8888민중항쟁 18주년 버마 민주화를 촉구하는 인권주간 공동주최단체

(국제민주연대 /나와우리 /버마행동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 /새사회연대 /아시아인권문화연대 /(사)외국인노동자와함께 /외국인이주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 /인권실천시민연대 /참여연대)

후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외국인이주노동자대책협의회/이주노동자의방송MWTV

집필| 국제민주연대 / 버마행동 / 새사회연대 / (사)외국인노동자와함께 / 참여연대

편집| 새사회연대(02-925-0062)
국제연대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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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에 민주화를, 아시아에 평화를



2006년 8월 8일 오전 10시, 한남동에 있는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버마 8888 민주항쟁 18주년을 맞아 한국 시민사회인권단체는 8월 6일부터 12일까지 '버마 인권 주간'으로 선포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버마 활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이 날을 기념하는 행사를 했지만, 올해는 국내 인권, 시민 단체와 이주노동자 단체들이 공동으로 자전거 캠페인, 사진전, 해외 버마 활동가 초청 간담회, 버마 난민 지원 후원 행사를 준비했다.

>>인권주간 일정은 여기를 클릭

8888 민중항쟁이란? 1988년 8월 8일 버마에서 군부독재에 항거하여 일어난 시위를 말한다. 1962년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네윈의 ‘버마식 사회주의’로 인해 1986년 버마의 경제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나빠졌다. 화폐개혁을 통한 경제개혁의 노력이 있었지만 버마인들의 경제상황을 향상시키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고, 이런 경제상황은 군부독재에 대한 국민의 염증과 맞물려 버마인들의 불만을 최고조에 이르게 했다.

8888시위의 발단은 1988년 4월 수도 양곤의 커피숍에서 대학생들간의 싸움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때 문제를 일으킨 한 학생이 집권 BSPP(사회주의자 강령 정당, Burma Socialist Program Party)의 아들이란 이유로 곧 석방되고 이에 대한 항의로 민주화와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가 시작되었다. 군과 경찰은 이 시위를 강경진압했고 그 와중에 41명의 학생이 체포되어 경찰트럭에서 질식사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는 시위를 더욱 부채질했다.

네윈은 7월에 사임을 발표하고 후임으로 경찰총장 세인 르윈을 임명했는데, 그는 ‘양곤의 학살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사람이었다. 학생들은 이에 8월 8일 아침 8시를 기해 전국적인 시위를 일으켰고 이 시위는 6주간 계속되었으며 그 가운데서 아웅산 수찌여사는 8월 26일 집회에 50만명의 인파를 불러모으며 버마 만주화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시위가 확산되자 곧 군은 진압에 나섰고, 이 진압과정에서 약 1만명의 버마인들이 살해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민주화 운동세력은 소수민족들과 손을 잡았으며 버마 민주화 문제가 국제적인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었다.



아래는 기자회견 내용이다.

순서

▷ 사회 : 우삼열(외노협 사무국장)

▷ 개회사 : 최정의팔((사)‘외국인노동자와함께’ 대표)

▷ 8888 소개 : 이창수(새사회연대 대표)

▷ 버마의 현 상황 소개 : 김은영(참여연대 정책팀장)

▷ 버마인들의 발언 : 뚜라(버마행동(한국) 대표)

▷ 민주화촉구 발언 : 문영희(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부이사장), 김병주(민변 국제연대위원회 위원장)

▷ 아시아의 평화를 염원하는 이주노동자들의 발언: 마숨(방글라데시/이주노조 사무국장), 인도네시아 노동자

▷ 인권주간 행사와 일정 안내 : 나현필(국제민주연대 상임활동가)

▷ 기자회견문 낭독 : 석원정(외국인이주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 최철규(인권실천시민연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기자회견문]

버마 군부는 학살-고문-강제노동-강간으로 점철된 폭압정치를 당장 중지하라!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의 감격으로 한국국민들이 올림픽 개최 D-DAY를 세어나가던 그 해 6월, 버마는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버마국민들의 시위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1988년 8월 8일을 정점으로 하여 그해 9월까지 지속된 민중항쟁은 버마의 학생, 승려, 노동자 등 전 민중들이 참여한 대항쟁이었다. 그러나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버마군부는 탱크와 장갑차를 동원한 무자비한 살육으로 짓밟았고, 최소 2,000명에서 최대 20,000여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현재까지 이어진 군부의 폭압정치로 아직까지도 진상규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정확한 사망자수도 파악되지 않고 있다.

버마와 전세계인들은 이날을 8888 민중항쟁이라고 불러왔다.

수만 명의 희생자를 남기고 미완성으로 끝난 8888 민중항쟁이 올해로 18년이 되었다.

그러나 자유와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시효는 없다.

이미 8888민중항쟁은 전세계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쉽사리 잊기 어려운 날이 되었다. 특히 1980년 5월 18일의 대학살의 기억과 1989년 6월 10일 시민대항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의 민주시민사회단체들에게, 이날은 동병상련의 슬픔과 분노를 느끼게 하는 날이 되고 있다.

우리들, 한국의 민주시민사회단체들은,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던 1975년의 김상진 열사의 절규가 비단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만 남겨진 것이 아님을 절감한다.

8888 이후 더욱 가속화한 버마군부의 폭압정치는 끊임없이 국민들의 피를 불러왔고, 8888민중항쟁을, 18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버마와 전세계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상징으로 되살아나게 하고 있다.

오늘날 버마 내에서는 버마정부에 반대하는 의견을 표현하거나 반대의견이 기재된 자료를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중형을 면치 못한다. 민주화를 염원하면서 학생운동에 헌신하는 학생운동지도자들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더구나 2005년 11월, 버마정부가 수도를 이전하면서 수많은 소수민족들을 강제노동에 동원하였고, 그 과정에서 살해, 고문, 강간을 자행하고 있다.

한때 군사독재정부 치하에서 고문과 폭압정치의 끔찍함을 생생하게 체험하였던 한국의 민주시민사회단체들은 버마의 현 상황을 결코 남의 일로 여겨 외면할 수 없다. 폭압정치 아래에서 신음하는 버마인들의 고통은 예전 한국인들의 고통이었다.

그러나 우리들, 한국의 민주시민사회단체들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

수십 년을 강고하게 버텨온 독재정부의 철권정치도 한 순간에 바람 앞의 등불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갈 수 있다는 것을.

수만, 수십만의 버마인들의 피를 머금은 버마의 민주주의가 이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려 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새벽이 오기 전의 어둠이 가장 짙다는 것을.

우리들, 한국의 민주시민사회단체들은

군사독재정부아래에서 폭압에 신음할 때 자유와 인권은 국경을 넘어, 민족을 넘어 전세계인 모두가 함께 지켜가야 할 지고의 가치임을 알았다.

그리고 오늘, 그 가치를 지켜나가기 위해 자유와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버마인들과 함께 할 것을 밝힌다.

그 하나로,

8888 민중항쟁 18주년을 맞이하여, ‘버마 인권주간’을 선포하고, 버마의 민주화투쟁 중에 희생당한 희생자들에 대해 추모하고 현재진행형인 버마의 민주화운동에 함께 하고자 한다. 그리고 한국의 민주시민사회단체들에게 버마의 민주화를 위하여 함께 할 것을 요청한다.

우리의 요구

1. 8888은 끝나지 않았다. 버마정부는 8888과 뒤이은 대학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희생자들에 대한 사죄의 뜻으로 당장 퇴진해야 한다!

1. 버마 군부는 학살-고문-강제노동-강간으로 점철된 폭압정치를 당장 중지하라!

1. 버마 군부는 하루라도 빨리 민주주의를 위한 절차를 밟으라!

2006년 8월 8일

버마의 민주화를 촉구하는 민주시민사회단체 일동

국제민주연대/나와우리/민변국제연대위원회/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버마행동(한국)/새사회연대/아시아인권문화연대/(사)외국인노동자와함께/외국인이주노동자대책협의회/외국인이주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인권실천시민연대/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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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만 국제연대 활동가인 제게 동티모르는 특별한 기억으로 다가오는 곳입니다. 1999년 8월에 치러진 독립 주민투표 당시 민간선거감시단 자격으로 약 보름간 동티모르에 머문 적이 있거든요. 그런 제게 두어 달 전 동티모르에서 들려온 소식은 당혹스럽고 착잡한 것이었습니다. 25년에 걸친 인도네시아의 침략과 군사점령 하에서 인구의 4분의 1이 희생되면서도 독립의 꿈을 놓지 않았고, 결국은 그 꿈을 이뤄냈던 동티모르 사람들. 도대체 그들의 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고난과 희생 끝에 되찾은 ‘독립’

16세기부터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동티모르는 1974년 포르투갈의 청년 장교들이 파시스트 정권을 몰아낸 뒤 식민지 해방을 약속하면서 독립의 꿈을 품게 됩니다. 그러나 호시탐탐 동티모르를 노리던 인도네시아가 75년 12월 7일, 1만 여 명의 육·해·공군을 동원해 전면적인 침략을 단행함으로써 이 꿈은 물거품이 되죠. 아름다운 동티모르의 바다는 붉은 피로 물들었고, 그 짧은 기간동안 전체 인구 70만 명 중에 약 6만 명이 살해된 뒤, 동티모르는 공식적으로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로 병합되었습니다.

그 당시 강대국들은 인도네시아 침략의 든든한 후원자, 방조자 역할을 했습니다. 동남아시아의 공산화 도미노를 막기 위한 교두보로서 인도네시아의 전략적 중요성을 높이 산 미국은 대통령과 국무장관이 자카르타를 방문해 동티모르 침략을 ‘허가’해주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도 79년 2월에 세계 최초로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합병을 승인해주었습니다. 이 외에도 영국은 전투기를, 네덜란드는 전함을, 프랑스와 캐나다는 탱크와 헬리콥터를, 이스라엘은 기관총을 인도네시아에 판매했습니다. 그 무기들이 동티모르 민중 학살에 쓰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눈 딱 감고 무기 수출에만 열을 올린 거죠.

79년까지 인도네시아 군대가 전개한 포위섬멸작전으로 저항운동은 거의 궤멸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타난 지도자 샤나나 구스망이 조직을 다시 추슬러 민족해방군을 창설하고, 전선운동조직을 재편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라 밖에서는 주제 라무스 오르타(1996년 노벨평화상 수상)와 마리 알카티리를 중심으로 한 망명 활동가들이 온갖 냉대와 모멸을 견디며 국제사회의 지지와 연대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한, 가톨릭 교회와 성직자들은 민중들이 독립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도록 정신적인 기둥 역할을 했습니다.

90년대로 접어들어 국제사회의 여론이 급격히 불리해지자, 인도네시아는 결국 99년 5월, 독립 여부를 동티모르인들이 스스로 결정하는 주민투표 실시에 합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8월의 독립투표에서 98.5% 투표율에 78.5%의 찬성으로 동티모르의 독립이 결정되었습니다. 2002년 5월 20일, 동티모르는 ‘티모르 레스테(Timor Leste)'라는 이름으로 21세기 최초의 독립국가로 탄생하게 됩니다.

신생 독립국 티모르 레스테에 대체 무슨 일이

이제 2006년으로 되돌아와, 한동안 잊혀졌던 동티모르는 반란과 폭동이라는 우울한 단어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되살아납니다. 겉으로 알려진 사건의 발단은 승진, 보수에서 차별을 당했다고 여긴 서부지역(서티모르가 아닙니다) 출신 군인 600여 명이 2월부터 파업을 벌이고, 정부가 이들을 강제전역시키자, 4월 28일부터 정부군 및 경찰과 해직군인들 사이에 유혈사태가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그 뒤, 국방, 내무장관이 잇따라 해임되고, 호주를 비롯한 뉴질랜드, 포르투갈, 말레이시아 4개국 2,700여 명의 다국적군이 파견되었습니다. 결국 6월 26일 마리 알카티리 총리까지 사임한 뒤 7월 8일 주제 라무스 오르타 외무장관 겸 임시조정장관이 새 총리로 지명되면서 사태는 외형상 수습 국면으로 접어들게 됩니다.

그러나 몇 가지 의문점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로 남습니다. 반란을 일으킨 군인들의 유일한 요구사항이 왜 하필 알카티리 총리의 사임이었을까요? 반란군이 대통령의 요청으로 순순히 무기를 반납하고 대통령은 이들을 처벌하지 않겠다고 한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대통령과 총리가 함께 파병 요청을 하기 전까지는 군대를 파견하지 않겠다’던 오스트레일리아는 왜 갑자기 태도를 바꿔 1,300명이나 되는 군대를 서둘러 파병했으며, 왜 다국적군은 적극적으로 반란군을 진압하거나 질서를 회복하려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들 말입니다.

이에 대해 동티모르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진실은 다른 곳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번 사태는 마리 알카티리 총리를 겨냥한 ‘외부세력을 등에 업은 권력 내부의 쿠데타’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외세를 등에 업은 권력다툼의 내막

먼저, 군대 내의 출신지역에 따른 차별이 진짜 원인이었는가를 짚어보지요. 지금의 동티모르 군대는 총사령관인 타우르 마탄 루악을 비롯해 대다수가 과거의 민족해방군 출신들입니다. 독립운동 당시 동부지역에서 민족해방군의 세력이 더 컸었고, 상대적으로 서부지역은 친인도네시아 민병대 세력이 세긴 했었지만, 민족해방군 내부에 지역, 인종간의 갈등은 없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군대에도 지역갈등의 징후는 없고요. 그렇지만 군 내부에서 알카티리 정부에 대한 쿠데타 시도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있었습니다. 루악 사령관조차도 작년 4월과 올 초, 쿠데타 제안을 받고 거절한 적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를 토대로 짐작해보면, 군 내부의 지역 차별은 처음부터 실재한 것이라기보다는 알카티리 총리를 몰아내고자 하는 그 ‘누군가’에 의해 부추겨지고 왜곡, 과장된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한 것이지요.

그 ‘누군가’의 실체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다만, 동티모르 정부의 권력 내부, 구체적으로는 과거 독립운동을 같이 한 동지들 간에 갈등이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동티모르의 정치 형태는 4권 분립(대통령,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체제입니다. 2001년 8월의 제헌의회 선거에서 전체 88석 중 55석을 차지한 집권당의 알카티리 총리가 헌법상 정부수반으로서 국정을 주도하고, 샤나나 구스망 대통령은 대외관계에서 상징적인 역할만을 하는 체제입니다. 이 때문에 독립운동 지도자로서의 기득권을 내놓았다 해서 한 때 구스망 대통령을 칭송하는 목소리도 있었는데요, 사실 구스망 자신은 강력한 대통령제를 원했다가 뜻대로 안되자 아무런 권한이 없는 대통령직에는 관심이 없다며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으려고도 했다죠.

아무튼, 국정운영권을 쥔 알카티리 전 총리는 재임 기간 중 ‘문 뒤에서 향연을 벌이는 부자들’이 없는 점진적인 개발정책을 취했습니다. 동티모르의 석유와 천연가스를 노리는 오스트레일리아, 미국과도 거리를 유지하려 했고,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의 개발자금을 거부하기도 했죠. 이런 알카티리를 가리켜 구스망과 그의 지지자들은 ‘앙골라 공산주의자’라 부르곤 했습니다(알카티리는 아프리카에서 망명생활을 했습니다). 그에 반해 구스망 대통령은 확실한 친오스트레일리아 노선을 걸었습니다. 그의 수십 년 동지이자 이번에 총리로 지명된 오르타와 함께 말이지요.

오스트레일리아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미국’을 스스로 인정하는 나라입니다. 미국도 그걸 인정하고 있고요. 1999년 독립선거 이후 친인도네시아 민병대의 난동으로 동티모르가 쑥대밭이 되어 유엔 산하 다국적군이 구성될 때도 그랬고, 이번에도 가장 많은 군대를 파병하면서 동티모르의 후견인을 자처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지요. 그런 오스트레일리아가 바라는 것은 단순합니다. 바로 티모르해에 매장되어 있는 석유와 천연가스의 채굴권을 확보하는 것, 그리고 동티모르를 발판으로 동남아시아 역내 주도권과 영향력을 유지, 강화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바로 알카티리 정부는 걸림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호주 최대 일간지 <더 오스트레일리안>의 외신부장 그렉 쉐리던은 이렇게 단언합니다.

“만약 알카티리가 총리직을 유지한다면, 이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무기력함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결과가 아닐 수 없다. 1,300명의 군인들과 50명의 경찰관, 수백 명의 지원인력, 수많은 구호물자를 쏟아 붓고도 이 재앙에 가까운 마르크스주의자 총리를 제거할 만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면, 국익을 증진시킬 능력이 없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강대국 틈에 낀 약소국의 운명

이와 같이 확실한 증거만 없을 뿐, 오스트레일리아가 ‘반알카티리 쿠데타’에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동티모르 권력 내부에서 쿠데타를 실행에 옮긴 그 ‘누군가’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구스망과 오르타? 아니면 제3의 세력? 글쎄요…….

어찌 됐건 알카티리는 이제 총리직에서 물러나 정적제거 음모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는 처지가 됐습니다. 반란군은 총을 내려놓고 복귀를 준비하고 있으며, 내각은 새로운 인물들로 채워졌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이 장갑차를 타고 순찰하는 거리에서는 총소리가 잦아들었습니다. 과거의 끔찍했던 학살과 약탈의 공포를 떠올리며 집을 떠났던 15만 명의 난민들은 다시 하나 둘 집으로 돌아와 예전처럼 하루하루의 끼니를 걱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20만 명의 생명을 역사의 제단에 바쳐가며 동티모르가 그토록 갈망했던 ‘독립된 나라에서의 평화로운 일상’일까요? 오늘의 동티모르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낀 약소국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 이 칼럼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만드는 참여사회> 2006년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최재훈 (경계를 넘어 활동가)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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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드라 무자파 박사 강연회



7월 20일 성공회대학교 강의실에서 동남아시아를 대표하는 저명한 무슬림 지식인 중 학명인 찬드라 무자파 박사를 모시고 '이슬람의 관점에서 본 지구화의 정치와 경제'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가졌다.

그동안 성공회대 아시아엔지오정보센터는 성공회대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연구소와 함께 아시아권의 저명한 활동가와 지식인들로부터 지역의 인권과 평화를 향한 모색과 고민을 들어보는 국제 연속 세미나 '아시아의 인권을 찾아서'를 진행했으며, 이번 강연회는 그 다섯번째로, 아시아의 친구들, 경계를 넘어, 참여연대,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가 주최가 되어 열렸다.

이번 강연회는 특히 최근 악화되고 있는 중동 사태에 대해 진보적 이슬람의 시각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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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드라 무자파(Chandra Muzaffa) 박사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말레이시아는 물론 동남아시아를 대표하는 무슬림 지식인 중의 한 명으로, 인권을 보편적 가치로 한 문명간 대화, 강대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넘어설 수 있는 정의로운 세계 질서 구축, 빈곤 타파 등을 주제로 한 저서와 논문을 집필했다. 또 International Movement for a Just World(JUST)의 대표로서 평화롭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국제연대운동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말레이시아과학대학 교수, 말라야대학 문명간 대화연구소 소장, 국민정의당(KeADILAN) 부총재 등을 역임하였다.

대표적인 저서로 “Globalization: the Perspectives and Experiences of the Religious Traditions of Asia Pacific”, “Alternative Politics For Asia: A Buddhist-Muslim Dialogue”, “Religion and Reform - Enhancing Human Dignity through Spiritual and Moral Transformation”, “Subverting Greed - Religious Perspectives on the Global Economy” 등이 있다.

* 강연회 내용은 첨부 화일 참조

국제연대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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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結婚, marriage)이란 것은 지구 위의 짝짓기하는 어떤 다른 동물들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인간 특유의 문화제도이다. 결혼이 단순히 각기 다른 개인이 누군가와 함께 생활하는 형태를 말하는 것만이 아닌 이상 그러할 것이다. 사람들이 결혼을 왜 하는지는 시대마다 또 문화마다 크고 작게 다른 배경과 까닭을 가지고 있다. 이십일세기 남한 사회에서 결혼은 따라서 이십일세기 남한의 정치, 경제, 사회적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문제일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결혼하려는 이들은 누군가? 왜 결혼하려는 것일까? 그들 중 결혼을 ‘못하고’ 남겨지는 이들은 누굴까? 왜 이들의 결혼못함이 사회적 반향을 얻고 사회적 호소가 되어 급기야 범사회적인 ‘신부 수입’ 열풍이 일어나기까지 하는 것일까?

‘남들처럼’ ‘결혼 적령기’에 ‘여자’와 결혼해 집을 사고 차를 굴리고 안정된 정규직 직장을 다니며 6개월이 된 아들을 둔 한 삼십대 중반의 이성애 ‘남자’인 친구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가 문득 떠오른다. 지금 나이가 될 때까지 혼자 사는 남자들은 결혼을 못한 ‘잔여물들’일 가능성이 많고 여자들은 오히려 능력있는 ‘독립인’들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이 여자들과 남자들은 서로 맞을 수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그는 말한다. 나는 그의 의견에 뜻을 함께 하고 안하고를 떠나서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일이라 여겼다. 그는 이런 현상이 여자에게 가해지는 결혼에 대한 사회적 (주로 가까운 ‘가족’들에 의한) 압력보다 남자에게 가해지는 압력이 더 심하기 때문이라고 의견을 댔다. 결혼한 게 후회스럽다고 가끔 투정하는 그는 그러나 아내에게 잘 하고 아이양육에 열심히 참여하는 ‘좋은’ ‘남편’이자 ‘아빠’로 보인다. 그리고, 남한의 많은 남자들이 그러하듯 그도 결혼을 해서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게 많은 것 같다. 그래서일까? 결혼도 ‘못한’ ‘못난 놈’이라 흉을 잡히거나 혹은 노후에 돌봐줄 이 하나 없이 냄새나는 뒷방 늙은이로 살다죽을까 걱정 듣는 남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남자들은, 심지어 남자 동성애자들까지도 우선 결혼은 하고 본다. 남성에게 실질적 보상 (사회적 성인으로서의 인정, 무급 가사노동력 충당, 성욕해소, 재생산, 사회관계용 에스코트서비스, 맞벌이인 경우에는 경제적 보상까지)이 실로 엄청난 결혼을 마다하는 것은 어쩌면 바보나 할 짓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남겨지는’ 남자들은 주로 소외층에 있다. 한편, 여자들은 당연히 이같이 엄청난 내용의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하게 되는 사회적 ‘거래’이므로 안정적인 ‘평생 직장’을 갖기 위해서 현명한 계산을 하게 된다. 국내의 결혼알선업과 고급 중매업의 성행이 이토록 장수하는 것은 결혼이 ‘제도’를 빙자한 ‘거래’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베트남 신부’를 ‘사오는’ 남자들은 국내에서 일어나는 결혼 거래에서 소외된 이들이다. 지역적으로나 계급적으로 혹은 두 가지 모두의 이유로 국내에서 신부를 거래해오지 못한 이들은 가난한 나라들의 값싼 노동력에 눈을 돌리는 다국적기업들마냥 베트남, 중국, 필리핀, 소련 등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동원해 신부를 수입한다. 대체로 상대인 남한의 남자들보다 나이가 훨씬 어려 젊음이라는 권력을 누려봄직도 했을 이 신부의 거래조건은 여느 이주노동자들과 마찬가지다. 본국에 남은 가족들에게 얼마만이라도 생활비를 보내 줄 수 있는 것. 해외취업을 나가는 이주노동자들처럼 이들은 ‘평생직장’을 잡으러 한 두 번의 선을 뵈인 후 경쟁자들 중에서 ‘뽑혀’ 한국으로 ‘사들여져’온다. 한국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재수가 좋으면 본국에서의 자신의 집보다 좀 덜 가난한 ‘남편’의 집에서 하게 될 가사노동, 재생산노동, 남편에 대한 성적 서비스, 어느 경우에는 임금노동을 해서 집안을 되려 먹여 살리는 경우까지 다양한 ‘아내 노동’이다. 소통과 이해가 절대적으로 부재한 상태에서의 고립된 노동.

최근에 ‘베트남 신부 수입’에 대한 반인권적 내용의 광고들에 대한 한국의 인권단체들과 베트남 내부의 비판적인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해도 너무했기 때문이다. 신부를 거래하듯 사오는 것까지는 눈감을 수 있겠으나 너무 적나라하게 광고를 했기 때문이었을까? ‘절대 도망안감’같은? (사실 거래내용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거래를 맺은 이들이 결과가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나오면 당연히 따져서 재거래를 할 수 있거나 혹은 거래 자체를 파기하고 돌아설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늙은 여자인 노모의 가사노동과 감정노동에 의지해 살아가는 혼자 생활할 능력을 키우지 못한 ‘남겨진’ 남자들인가? 혹은 결혼제도 안에서의 성만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성이라고 인정해주는 분위기인가? 아니면 결혼안한 혹은 못한 이들은 죽어서도 제삿밥을 얻어먹을 수 있는 ‘가족신’이 되지 못할 거라는 믿음, 세상에 태어나 제 핏줄하나는 만들어놓고 죽어야 한다는 핏줄계승주의 뭐 이런 것들인가? 결혼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똑같은 사회경제적 혜택이 주어진다면, 결혼하지 않은 이들에게 아무런 비하나 호기심 혹은 동정의 시선이 쏟아지지 않는다면, 남자들이 어려서부터 스스로 생활을 챙길 수 있도록 교육받았더라면 굳이 가까이에서 나란히 생애를 함께 보내고 싶은 이들을 이렇게 ‘사와야’ 할 일이 생겼을까? 본국에 남은 ‘가족’들의 생계를 돕자고 ‘평생직장’을 찾아 이주해온 이 여자들도, 이국땅까지 건너가 신부를 ‘사 오게’ 된 이 남자들도 내게는 같은 맥락에서 보인다. 무엇이 나빴던가? ‘가족’관계가 될 여자들을 마치 강제노동을 하게 될 노예 대하듯 써 내린 적나라한 광고였던가? 허풍과 거짓약속으로 신부를 사온 (몇몇?) 남자들인가? 거래를 하고서도 약속한 기일을 채우지 않고 도망간 여자들인가? 아니면 강제적 이성애 ‘결혼제도’ 그 자체인가? 가난하고 소외받으며 사는 우리에게 따로 혹은 함께 살아갈 또 다른 방법들은 없는가?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가능성들에 대한 상상과 실천을 방해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다시 질문의 소용돌이 속에서 머릿속이 얼얼해 온다.

박이은실(성공회대 노동대학 담임,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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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에 차별 시정 진정서 제출



몇 년 사이에 아시아 여성과 한국 남성이 결혼하는 비율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국제결혼중개업체가 성업하고 있다. 이에 따라, 중개업체가 상업 목적으로 내거는 곳곳의 현수막을 비롯한 여타 광고물은 경쟁하듯 선정적이고 인권침해적인 요소를 부각시키고 있으나, 이런 광고들은 아무런 규제도 받고 있지 않다. 이처럼 반인권적인 상황에 대한 방치는 또 다른 이름의 폭력이며 차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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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1일자 조선일보에 <베트남 처녀들, "희망의 땅, 코리아로">라는 기사가 보도된 후 ‘나와우리’를 비롯한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아름다운재단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언니네트워크,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민주노동당 여성위원회는 [차별적 국제결혼 광고 대응을 위한 공동행동]을 결성하고, 5월 20일 대학로에서 '여성을 상품화하는 국제결혼광고 반대' 캠페인을 진행하였다. 이후 6월 16일부터 7월 10일까지 온라인 공간 ‘우리는 선의의 파파라치’에서 각종 인권침해 광고물(신문광고, 현수막, 포스터 등) 사진을 수집하고, 이런 광고물에 대한 반대서명 작업’을 진행하였으며, 오늘 7월 11일 오전 11시,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여러 사회인권단체들과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국가인권위에 차별 시정을 위한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기자회견문] 성차별ㆍ인종차별적 국제결혼 광고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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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이 사회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또 하나의 주체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그 권리에 대해 함께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제까지 우리 주변에서 무수히 보아왔던 국제결혼 광고가,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조장하고 인간의 존엄을 모독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국제결혼을 통해 우리나라에 체류 중인 결혼 이민자는 7만5천여명에 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매년 증가하고 있는 국제결혼은 지난 2005년 13.6%에 이르러, 100명중 13명이 외국인과 결혼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에 따라 국제결혼 중개업체도 크게 증가하여 등록업체만 600여개에 이르며, 미 등록업체를 포함하면 천여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부분의 중개업체들은 더 많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 반인권적이고 여성을 상품화하는 광고를 무차별적으로 내걸고 있습니다.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후불제, 환불 가능,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

이제는 이런 문구들이 더 이상 낯설지 않습니다. 국제결혼 중개업체들의 광고는 현수막, 신문 광고 등에서 가장 자주 접할 수 있지만, 사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생활정보지 및 공공장소의 광고판, 중개업체의 홈페이지 등 정보를 확산시킬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가리지 않고 잠식해가고 있습니다.

오직 업체의 수익 증대를 위해 노골적으로 여성을 상품화하며 무분별한 광고를 게재하는 것은 반인권인 행위로서 마땅히 즉각 중지되어야 합니다. 이는 그 나라 여성들의 인권을 침해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조장하는 문제로 여성전체의 문제이며, 나아가 인간의 존엄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또한 많은 업체들은 해당 국가의 문화를 폄하하거나 의도적으로 왜곡함으로써 국제결혼을 하는 것이 한국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일인 양 광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국제결혼으로 이 사회에 정착하게 될 가족들에 대해 또 다른 편견을 조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광고들은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인권에 대한 인식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를 당연한 일상의 풍경처럼 받아들여지도록 방치해두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라도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라도 성차별ㆍ인종차별적 국제결혼 광고가 적절한 규제를 받을 수 있도록 적절한 조치가 취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이러한 반인권적인 행위가 중단될 수 있도록 아래와 같이 주장합니다.

○ 정부는 무분별하게 난립하고 있는 국제결혼중개 업체의 실태와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여 적절히 규제하라!

○ 정부는 국제결혼중개업체들의 반여성적이고, 반인권적인 현수막, 신문광고 기타 홍보활동을 즉각 중단하도록 강력한 행정 지도에 나서라!

○ 국제결혼중개업체들은 여성을 상품화하고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를 중단하고 업체 스스로 자정노력을 기울여라!


그리고 차별시정 진정서와 함께 그동안 모니터링해온 차별적 광고물의 실태, 이 광고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서명 목록 등을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출할 것입니다.

이 진정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성ㆍ인권ㆍ시민단체들의 높은 관심과 많은 시민들의 격려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광고뿐만 아니라 국제결혼 자체를 둘러싸고 저질러지고 있는 억압이나 폭력 등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높여가야 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월성이 아닌 다양성으로서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고,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이주여성들과 함께 살아가는 길에 시민사회가 함께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2006년 7월 11일

진정인 및 연명단체 일동

결혼이민자가족지원연대, 경계를넘어, 나와우리, 다산인권센터, 목적별신분등록법제정을위한공동행동, 민주노동당 여성위원회,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 여성복지위원회,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 베트남평화의료연대, 성매매근절을위한 한소리회, 성적소수문화환경을위한모임 연분홍치마, 아름다운재단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언니네트워크, 외국인이주노동자대책협의회, 이주ㆍ여성인권연대, 이주노동자인권연대, 인권운동사랑방,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참여연대,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장애인연합, 한국여성의전화연합,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함께하는 시민행동



국제연대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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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de of Asia"! 한국의 아시아적 정체성을 강렬하게 드러내는 이 구호는 2002년 월드컵 당시 광주경기장에서 한국과 스페인이 8강전을 벌일 때 붉은악마 응원단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던 카드섹션의 구호였는데,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토고를 꺾고 프랑스와 극적인 무승부를 이루면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16강 진출이 유력시되자 국내외의 언론보도에서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아시아팀이 전반적으로 부진할 경우에 월드컵 본선진출 자리수를 줄인다고 하니 더더욱 한국의 선전은 아시아의 이익과 결부되는 상황이 연출된 듯하다. 그런데 월드컵 이외의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아시아의 이익과 명예를 대표하고 아시아 나라들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는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아시아를 대표한다는 의미보다는 서양의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은 욕망이 더 강한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볼만 하다.

이와 관련하여 얼마 전에 미셸 위가 골프경기를 위해 한국방문에 나섰을 때 한 방송사는 ‘정복은 계속된다’면서 미셀 위를 마젤란과 같은 정복자들에 비유하는 광고를 내보냈던 일이 떠오른다. 마젤란은 바로 8강전의 상대국이었던 스페인의 선단을 이끌고 세계일주에 나서 뱃길로 세계를 일주한 탐험가로 추앙받고 있지만 그의 항해는 탐험뿐만 아니라 황금의 가치를 지닌 아시아의 향신료산지들을 장악하기 위한 여행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스페인의 필리핀 식민통치를 낳았다. 또한 마젤란은 오늘날 필리핀 영토에 속하는 막탄(Mactan) 섬에서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아 사망함으로써 그의 배 빅토리아호만이 일주를 완수한 꼴이 되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마젤란은 알아도 마젤란을 죽인 아시아인은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1521년 4월 27일에 마젤란을 죽인 사람은 막탄 섬의 추장 라푸라푸(Lapulapu)였고 그는 “유럽의 침공을 막아낸 첫 번째 필리핀인”으로 현지인들에게 추앙받고 있다. 우리가 라푸라푸를 모르는 이유 중에 하나는 마젤란을 주인공으로 삼는 교육풍토와 지식세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균형은 우리나라의 교육이 서구 중심적이고 아시아에 대한 교육을 한다 하더라도 중국과 일본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아시아연대 담론도 같은 방식으로 검토해 볼 수 있다. 일반인들이 한국의 축구나 골프가 세계무대에 나선 것을 자랑하듯 한국의 사회운동가들도 한국의 민주화와 개혁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아시아 민주주의와 인권의 진전을 위한 한국의 적극적 역할을 설정하는 진취적인 자세를 갖게 되었다는 점은 대단히 긍정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아시아 각국의 사회운동에 대해 공부하고 그들의 실천으로부터 배우려는 태도를 겸비하지 못한다면 아시아연대담론은 근대화론의 한국판 변종을 낳을 수도 있다. 한국 활동가들이 연수대상지로 아시아보다 서구를 더 선호하는 실태나 아시아언어가 가능한 활동가를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은 이러한 우려를 더욱 심화시킨다.

아시아연대를 추진하려면 우리는 행동뿐만 아니라 성찰과 학습도 필요하다. “검은 피부”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하얀 가면”을 쓰고 있는 아프리카인들의 심리학을 분석한 프란츠 파농이 피부색깔로 인하여 끊임없이 질문하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피부색깔이 담고 있는 세계사적 변형과 심리적 모호함에 대해 질문하는 아시아인이 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이 세계인이 되기 위한 추상적인 노력과 함께 병행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런 취지에서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는 “아시아 생각” 칼럼을 필두로 하여 활동가, 지역전문가, 국내아시아인들이 아시아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고 서로 배우는 마당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만남과 사유와 네트워킹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노력이 아시아연대의 의미와 아시아의 진짜 자존심에 대한 성찰의 출로를 발견하길 기대한다.

전제성 (한국동남아연구소 연구위원,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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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를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새로운 ‘활동거소’ (site)로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이 점차 세를 얻어가고 있다. 주로 아시아권에서 유입되는 이주노동자들의 권리보호 운동은 한국 시민사회운동에서 하나의 확고한 영역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경제적 위상에 걸맞은 공식개발원조(ODA), 특히 아시아에서의 ODA 문제를 시민사회의 핵심적인 이슈로 부각시켜야 한다는 움직임도 상당히 활성화되고 있다. 경제 지구화에 전향적으로 대처하는 하나의 방안으로 글로벌 민주주의의 구축에 나서야 하고 그것의 적합한 활동 중심은 역시 아시아라는 생각의 흐름도 존재한다.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 더 나아가 역내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서도 아시아 시민사회 간의 연대와 소통이 사활적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모두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서 한 가지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관점은 안과 밖, 국내와 국제, 우리와 세계를 가르는 전통적인 이분법이다. 한국에 이미 들어와 있는 이주노동자가 백만 명을 헤아리고, 공장과 공사판과 식당과 지하철에 ‘우리’와 구분되지 않는 얼굴의 ‘외국인’들이 넘쳐 나는 현실 속에서 과연 이런 이분법이 적실한 관점일까? 한국 기업들의 역내 해외투자가 이미 국내 투자를 훨씬 상회하는 현실 속에서 과연 이것이 가능한 관점일까? 이미 국내와 국제를 억지로 구분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현실인데 해석으로만 인위적인 구분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문제의식 위에서 나는 한국 시민사회가 아시아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국 시민사회를 위해서라도 아시아가 필요하다는 관점이다. 우리가 더 이상 한국 사회만을 중심에 놓고 생각해서는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현실을 포착할 수도 없고, 또 그 미래가 밝지도 않다. 왜 그런가?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고 이미 아시아로 외연이 확장되어 있는 지역 내의 상호의존적 사회관계를 직시해야 우리 시민사회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또한 우리 사회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새로운 시각과 아이디어도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국 아시아에 주목하자는 말은 우리 사회가 어느새 처해 있는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현실을 바로 보자는 말이며, 그러한 달라진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참여연대 본연의 사명과도 부합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이때 ‘우리’라고 하면 우리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물리적·정신적 의미의 ‘타자’를 모두 받아들인다는 뜻이며, 타자의 눈으로 우리 스스로를 볼 줄 아는 ‘상대화된 우리’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미 ‘우리’는 과거의 ‘우리’가 아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우리’라는 정체성의 본질을 묻는 작업을 오래 전에 시작했어야 했다. 특히 시민사회운동 진영은 더욱 그러하다. 이것은 이미 엄연한 현실이며 이 점을 부정하는 것은 현실에 눈을 감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우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시민사회가 장기적으로 살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각전환을 단행할 때 ‘우리’는 국내와 국외 운동을 가르는 인위적인 경계를 넘어서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된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현 단계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가능한 최선의 방안은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우리의 아시아’를 재인식하고 그것을 진정한 ‘우리’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전환이다. 아시아에 주목하고 아시아와 연대하는 것이 한국 시민사회의 자폐적인 ‘자기응시’ (navel-gazing)에서 벗어나는 현실적인 방안이 될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시민사회단체로서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아시아 시민사회가 참여연대에 거는 기대가 이만저만 높은 것이 아니다. ‘우리’ 시민사회를 가꿔나가기 위해서라도 참여연대를 포함한 한국 시민사회가 아시아에 응답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조효제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겸 NGO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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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첫발을 버마 민주화를 위한 노력으로 내딛기를



오늘 우리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전환점이 된 518 광주 민주항쟁 25돌을 맞이하였다. 당시 서슬이 시퍼런 군사독재정권에 대항한 광주 민중들의 항쟁은 현재도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를 향한 우리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힘이 되고 있으며, 한국 뿐 아니라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시민사회에서도 그 상징하는 바가 크다. 특히 현재도 군사정권의 폭압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버마와 같은 나라의 민주화운동가들에게 한국은 자신들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나라로서 적극적인 연대의 손길을 기대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이제 한국은 518 광주민중항쟁의 정신을 계승하여 한국의 민주주의뿐 아니라 우리 가까이에 있는 이웃 나라들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 정부는 아시아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외면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버마민주화운동가들의 난민 인정 신청 거부가 대표적이다. 자신들의 생명과 활동을 보호받기 위해 버마 민주화운동가들은 한국 정부에 난민 인정 신청을 하였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들은 난민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5일 이내 한국을 떠날 것을 종용받았다. 현재 이들은 3개월의 출국 유예기간을 갖고, 힘겹게 한국 정부를 상대로 난민 인정 신청 거부 취하를 위한 행정 소송을 준비 중에 있다. 이들이 한국에서 쫓겨가면 돌아가야 할 그들의 나라 버마는 그들을 환영하지 않을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와 국회는 이런 버마와 돈독한 경제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와 같은 동남아시아 국회의원들은 버마 민주화를 지원하는 의원모임을 자발적으로 결성해 순번제로 돌아오는 아세안(ASEAN) 의장국을 버마가 맡게 되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1990년 이후 국제 사회가 버마 군사정권의 종식과 경제착취를 중단하기 위해 원조와 투자를 중단하거나 줄여가는 압박을 진행하며 한국의 경제외교를 중단할 것을 요구해왔음에도, 한국 정부는 외국자본 우대를 강조하는 버마에 발맞춰 경제협력 조치를 강화하고, 국제노동기구(ILO)에서 버마의 강제노동에 대한 제재안을 결정할 때도 기권한 바 있다.

이제 한국 정부와 국회는 지금까지 아시아의 이웃들을 혹시 한국 경제의 발전을 위한 대상으로만 여겨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한국이 518 광주 민중과 수많은 민주인사들의 희생 위에서 오늘날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온 만큼 이제 같은 고통을 지니고 있고 민주주의의 여정을 힘겹게 걷고 있는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서도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지금 버마를 비롯한 아시아는 역동적인 시민사회의 발전을 통해 제도적인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한국에 바로 이것을 기대하고 있다. 우리는 그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된다. 참여연대도 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국제연대위원회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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