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민주주의를 내것으로"



최근 '시민사회론의 르네상스'라 일컬어질 만큼 세계적으로 시민사회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가운데, 일본에서는 일본의 초기 시민사회, 시민운동론이 재조명을 받고 있다.

일본에서 '시민운동'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60년 안보투쟁을 계기로 해서다. 시민운동은 기존의 사회운동에 대한 대안적인 운동형태로서 제시됐다. 그것은 "진보적 운동 속의 관료주의적 교조주의적 편향"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경제성장과 급속한 도시화에 따라 파편화된 사생활 중심의 대중사회화가 진전되는 데 대한 문제의식을 내포하고 있었다.

'민주주의 수호 투쟁'으로 확대된 안보투쟁

패전 후 일본에서는 전후 민주화의 흐름 속에서 수많은 자발적 결사체들이 조직됐다. 치안유지법이 폐지되고, 공산당, 사회당 등 좌파 정당이 합법적으로 존재하게 됐으며, 직장 단위의 노조 조직률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농민의 조직화도 진전됐고, 학생운동도 부활하여 각 대학, 그리고 대학 간의 연대 조직이 결성됐다. 1960년대까지 사회운동을 주도한 것은 전후에 분출한 이들 진보적 민주단체들이었고, 사회운동의 주류는 이러한 조직 기반을 가진 노동운동, 학생운동이었다.

1950년대 냉전체제가 확립되면서 정치권은 '보수-혁신' 대립 구도로 재편되고, 다양한 자발적 결사체들도 각 정당 아래 계열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노조, 학생조직 등 진보적 단체들은 좌파 정당 아래 계열화되어 그 대중적인 기반이 됐으며 사회운동은 좌파 정당을 정점으로 그 하부에 수직적으로 계열화된 운동 조직들에 의해 이루어진 '혁신세력'에 의해 주도됐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일본의 진보적 사회운동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운동의 논리를 전개한 것이 '시민운동'을 주창한 지식인들이다. 안보투쟁은 기시 정권이 추진하던 일미안전보장조약 개정을 저지하기 위해 다양한 세력들이 연대하여 전개한 대투쟁으로, 1960년 5월19일 집권 자민당이 경찰대를 국회 내에 배치시킨 가운데 단독으로 신안보조약 승인을 강행함으로써 안보조약 개정 반대운동은 집권여당의 비민주적인 폭거에 항의하는 민주주의 수호 운동으로 의미가 확대됐다.

조직화되지 않은 일반 시민 중심으로 탄생한 '시민운동론'

그 이후 한달 가까이 매일 10만 명 이상, 많을 때는 30만 명 가까운 군중이 국회를 둘러싸고 시위를 했다. 안보투쟁도 실질적으로 노조, 학생단체 등이 주도하여 시위 참가자들은 조직을 통해 동원된 경우가 많았으나, 그동안 정치에 무관심했던 사람들, 조직에 속하지 않은 자발적 시위 참가자들도 많았으며, 이들은 직업 정치가들과 직업 혁명가들의 지도자의식이나 행동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안보투쟁이 민주주의 수호 투쟁으로 신국면을 맞게 된 이후 조직화되지 않은 일반 시민 참가자들이 증대했다. 기존의 운동 방식에 대해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가졌던 지식인들 가운데 이러한 새로운 경향에 주목하여, 일본사회의 현실에 맞고 형해화된 민주주의를 실질화하기 위한 새로운 운동의 논리를 모색했다. 즉 안보투쟁을 통해 대두한 새로운 운동 형태의 특징을 포착하여 이를 바탕으로 향후 대안적인 운동을 창출하기 위한 실천적 이론으로서 시민운동론이 나오게 된 것이다.

새로운 운동 논리의 핵심은 주체와 조직에 관한 것이다. 사회학자이자 대표적인 시민운동론자인 히다카 로쿠로는 시민운동 주체인 '시민'의 특징으로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를 들었다: 첫째, 무당무파일 것, 둘째, 정치적 야심을 갖지 않을 것, 셋째, 24시간 활동가가 아니라 직업을 가진 생활인으로서 '파트타이머'적인 참가자일 것, 넷째, 조직의 지령에 의해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참가할 것, 다섯째, 필요 경비는 자신이 부담할 것. 이같은 '시민' 개념은 '조직인'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조직에 매몰되지 않은 자율적인 개인을 강조한다.

"좌·우 양쪽 중앙집권주의 모두에 저항하는 운동"

이러한 시민운동의 주체 개념은 조직론과 밀접하게 연계돼 있다. 기존의 사회운동은 지도부와 이데올로기적인 지도 이념이 있어, 운동의 방침과 구체적인 행동강령은 상층의 핵심 간부들에 의해 결정되어 하부로 전달되고, 조직에 속한 대중은 지도부의 방침에 따라 통일적인 행동을 취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정치학자 이시다 다케시는 이런 정책 결정 방식을 '관료주의적 지령주의'라고 표현했다). 목표 달성을 우선시하여 효율적인 운동을 수행하기 위해 조직과 조직력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연합조직과 각 단위 조직들의 관계는 '전면 포섭'의 관계로서, 모든 점에서 단일한 지도 방침에 따라 획일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런 관계는 필연적으로 조직을 단순한 '세(勢) 집합'으로 만든다. 이런 구조 하에서 같은 운동에 동참하는 주체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일한 계열에 속하는 것을 당연한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 계열에서 자신이 정통적 전위임을 주장하는 사람은 같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신념이 약한 자를 "뒤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과 같은 계열에 전면 포섭되지 않은 조직에 대해서는 '전면 부정'의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이는 "정의를 독점하는 '양심'주의"를 낳는다. '정의로운' 목표 달성을 위해 운동의 효율적인 조직과 세불리기가 중시되는 가운데 운동에 참가하는 풀뿌리 대중 개개인은 자율적인 판단에 의해 움직이기보다는 조직의 논리, 지도부의 방침과 지도 이념에 따라 동원되는 양상을 보였다.

시민운동론자들은 기존의 사회운동의 이같은 조직 구조를 집단주의, 권위주의, 정치주의적인 점에서 보수, 체제측과 공유하는 '일본적 특성'이라고 봤다. 조직 논리가 지배하는 집단주의적, 목표지향적인 운동은 풀뿌리 대중의 주체화를 억제한다. 히다카가 '시민운동'을 "좌로부터의 중앙집권주의에도, 우로부터의 중앙집권주의에도 저항하는 운동"이라고 한 것은 이런 의미를 내포한다. 시민운동론자들이 제시한 '시민' 개념은 하나의 이념형으로서, 개인이 내면에 일관된 의식이나 논리를 형성하고 그에 의거해서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그런 의미에서 '시민성'을 확보한 인간 유형이라 할 수 있다. 한편에는 조직 내지 집단에 매몰된 대중이, 다른 한편에서는 파편화된 사생활에 매몰된 대중이 존재하는 가운데, 어떻게 대중을 주체화하여 정치, 사회에 대해 적극적인 발언과 참가를 하도록 할 것인가- 시민운동론자들은 이를 일본에 민주주의를 뿌리 내리기 위한 과제로 봤다.

조직이 물신화되지 않도록 이슈 중심으로 뭉친다

철학자 쓰루미 슌스케(鶴見俊輔)는 서구에서 시민혁명을 통해 이룬 제도를 들여왔을 뿐인 일본 같은 나라는 '주어진 민주주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새로운 시민혁명"을 거칠 필요가 있다면서, 안보투쟁의 전개과정 특히 1960년 5월19일 이후의 흐름에서 그런 시민혁명적인 성격을 발견한다. 그것은 "일본의 공적 정책이 일본인의 사상의 사적(私的)인 뿌리로부터 새롭게 배태"되는 것으로서 "뿌리로부터의 민주주의(radical democracy)(根本からの民主主義)"이다. 즉 1960년에 등장한 일본의 '시민운동' 담론은 서구와 같은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일본에서 형해화된 근대 민주주의의 실질을 이루기 위한 '근대성'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앞에서 히다카의 운동 주체로서의 '시민' 개념을 소개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개인주의'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시민'은 '다른 사람과 단절되어 자신의 생활에 매몰되는 존재'가 아니라 연대를 추구한다. 단 그것은 집단 활동이 개성의 상실을 가져오지 않는, 즉 자율적 개인으로서의 연대다. 일본의 기존의 조직 구조는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개인이 어떤 조직에 속하게 되면 모든 사안에 대해 동조하고 통일 행동을 취할 것을 전제로 하고, 개별 사안에 대해 다른 행동을 취하는 것은 이단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조직에 속한 모든 개인이 모든 사안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가질 수는 없다.

따라서 시민운동은 조직이 물신화되지 않도록 상설 조직을 갖지 않고, 이슈 중심으로 입장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함께 조직하고, 이슈가 해결되면 운동조직은 해체하는 방식을 추구했다. 지도부와 이데올로기적인 지도 이념이 없이 운동 참가자는 동등한 자격으로 횡적인 유대를 맺으며, 이데올로기나 정치주의적인 관점이 아니라 개인에 내면화된 윤리나 생활의 관점에서 발언하고 행동하는 것, 참가자 개개인이 납득하면서 행동하기 위해 목표 달성 이상으로 논의의 과정을 중시하는 것, 이런 원칙들은 사회운동 자체의 민주성을 확보하는 것이 곧 진정한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길이라는 인식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하겠다.

이상과 같은 일본의 초기 시민운동론은 일본의 역사 속에서 배태된 것이므로, 한국의 시민운동론과 차이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지면의 제약 상 한국과 비교하며그 의미를 짚어볼 여유는 없으나, 이 시기 일본의 시민운동론자들이 제시한 문제의식과 비전은 눈부신 성장을 이룬 가운데 시민운동 내부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시점에 있는 오늘날의 한국 시민운동에 시사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영혜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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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동북아의 동굴에 갇혀 있다!



국제연대위원회는 올 한 해 '아시아'를 주제로 시민, 학생, 활동가들과 서로 생각과 의견을 나누고 배우는 자리로써, 매달 포럼 '우리 속의 아시아, 우리가 꿈꾸는 아시아'를 진행하기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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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첫번째로 4월 6일 저녁, '동아시아를 위한 한국의 선택'이란 주제로, 국가 차원에서 과연 한국은 지금까지 아시아를 어떻게 만나고 있고, 앞으로는 어떻게 미래지향적인 지역 질서 구성에 참여할 수 있는지 이야기를 듣고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초대 손님으로 강원대 교수이자 현재 동아시아공동체연구회에서 활동하는 박사명 선생을 모셨습니다.

박선생은 보통 ‘동아시아’라고 하면 동북아, 중국, 일본만 연상하는데, 이것은 한국이 동북아의 동굴에 갇혀있기 때문이라며, 정부나 학계가 동북아 중심국가를 꿈꾸는 것은 근시안적인 사고라고 일갈하였습니다.

더불어 현재 동아시아공동체를 둘러싸고 논의되는 연대의 목적, 수준과 범위에 대해 설명하고, 현실 정치론에 입각해서 동아시아의 지역 질서에서 한국은 개방주의적인 민족주의, 국제주의 사고로, 중국과 일본의 가교역할, 동북아와 동남아의 가교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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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저녁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였는데, 특히 참여연대 회원이 아닌 낯선 얼굴들이 많아서 반가왔습니다. 예상치 못한 인파로 진행이 조금 매끄럽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국제연대위원회의 첫 포럼에 참여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포럼에도 많은 기대와 관심, 참석을 부탁드립니다.

발표문과 참고자료를 첨부합니다. 더 깊이 알고자 하는 분들은 박사명 선생님의 책을 권합니다. [동아시아의 새로운 모색] (이매진 출판사)

[내용 요약]

○ 한국사회에선 참여정부나 학계나 ‘동아시아’하면 동북아, 즉 한국, 중국, 일본만 연상하는데 이는 고질적인 한국병이다. 동북아 지역의 파트너인 중국과 일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 지금 동아시아공동체 건설 움직임들은 지역연대의 목적이 ‘평화’, ‘번영’, ‘진보’다. 반세기에 걸친 냉전 체제가 와해된 이후 아직도 한반도에는 냉전이 남아있는데 정치 안보 차원의 공동체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 그리고 번영은, 1997년 가을 동남아와 동북아를 휩쓴 경제위기 이후 이 경제금융 부문의 공동체 건설이 강력히 제기되었다. 진보는 경제위기가 준 교훈이 가속적 경제성장를 위한 민족주의적, 중상주의적 경제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경제위기를 통해서 동아시아 여러 나라가 뼈저리게 절감했다. 가속적 경제성장, 지탱가능한 지속적 경제발전을 위해선 정치 안보차원의 지역협력과 사회문화적 협력이 뒷받침되어야 진정한 공동체에 접근하는 것이다.

○ 현재 동아시아 공동체 건설과 관련해서 논쟁의 초점은 연대의 수준이다. 동남아지역에서 1967년 이후 만 50년간 전개되어온 동남아차원의 지역협력 유형은 유럽과 달리 철저하게 국가 주권 차원에서 동아시아 협력으로 멈출 것인가 아니면 유럽이 지향하는 바 국가주권을 극복하는 다른 형태의 지역통합까지 모색하느냐 이것이다.

○ 세 번째는 연대의 범위다. 아세안 10개 나라와 한중일, 즉 아세안+3 이 차원에서 계속 동아시아를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새롭게 거기에 인도, 호주, 뉴질랜드 3개국을 더한 +6 으로 할 것인가. 연대의 범위를 동북아로 국한시킬 것인가 서쪽 인도와 동쪽 호주, 뉴질랜드 추가할 것인가 뜨거운 논쟁이다. 특히 후자는 미국을 의식한 일본의 입장이다. 전자 아세안+3은 중국이 일관되게 추진하고 있고, 한국의 입장도 이에 가깝다. 이에 대한 동남아 각국의 입장은 분열돼있다.

○ 이런 연대의 목적, 수준, 범위를 둘러싸고 논의를 진전시키면서 (일부는 실제 진전) 한국은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 것인가.



서두에 한국의 상식을 바꿔야 할 것이라 했는데 이게 첫 번째 주제다.

한국은 동북아의 동굴에 갇혀 있다

○ 한국은 일본, 러시아, 중국에 갇혀서 그 너머를 모른다. 관광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동굴 현상, 착시 현상 때문에 현재 노무현 참여정부도 동북아시대 부르짖고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없다. 이루어질 수가 없게 돼있다.

○ 동아시아의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유로 동북아 시대를 얘기하는데, 장기적으로 중국을 추월할 것으로 보는 인도는 동북아인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 공간적 조건으로, 동북아 중심에 대해선 일본, 중국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로 탈아입구, 아시아를 벗어나려 했고, 나중엔 대동아공영권이란 깃발 들고 만주 점령하고 동남아, 버마까지 점령했다. 중국은 만주만 동북아로 보고, 천하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최근에 대중화 경제권은 동북아를 떠나서 홍콩, 대만 나아가 동남아 전부를 포함하고 있다. 중국적 시각에서나 일본적 시각에서나 동아시아엔 동남아가 다 포함된다. 오늘날 중국은 국제문제에서 책임질줄 아는 대국을 지향한다.

○ 그런데, 한반도는 전체가 동북아를 말하고 동북아시아를 전부로 생각한다.

※ 표 <동아시아의 정체의식> 참조.

○ 이런 현실에 기초해서, 앞으로 동아시아의 미래 질서는 어떤 질서여야 하나? 서양의 유명 정치학자들은 동아시아의 미래는 지금 진행 중인 유럽의 미래와 너무 다를 것이라고 입 모아 말한다. 즉, 아시아의 미래는 아시아의 과거를 닮거나 유럽의 과거를 닮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 유럽처럼 평화롭고 제도적인 통합은 아니다. 아시아의 과거? 중국 중심의 불평등한 그러나 안정적인 중국 패권 정책으로 갈 것인가, 조공 체계와 같은 안정된 패권 이게 되거나, 유럽의 과거? 엇비슷하게 국력이 강한 서너 나라의 세력이 균형된 상태. 이런 불안정한 유럽의 과거로 갈 것인가.

○ 실제로 아시아의 미래에 대해 아시아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국주의 문화. 대국주의적 세력균형. 키신저, 헌팅턴의 예측과 같다. 중국 너무 크니까 더구나 중국 속셈을 신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

○ 모든 국제관계에서 세계사회는 중앙 정부가 없는 무정부 상태라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니 최악에 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인 현실주의적 시각이다. 근데 방금 말한 것처럼 대륙주의적인 세력균형을 동아시아의 미래로 볼 때, 중국의 성장, 중국과 일본의 갈등과 경쟁, 대결에서 한국이 균형자 역할을 할 수 없다. 동남아는 또 얼마나 큰가. 인구는 현재 25회원국으로 팽창해있는 유럽보다 1억 많다. 유럽은 4억5천만. 동남아는 5억6천만. 한국이 지금 끼어들어 균형자 역할을 한다는 것은 망상이다.

○ 그렇다면, 유럽과 유사한 다자주의적 시각을 보자. 다자주의는 모든 나라들이 자기 역할을 하는 것이다. 모두가 합해서 제도적, 군사적, 경제적 힘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공정한 제도를 통해서 모두가 합의하는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 시각으로 보면 무정부 상태라는 근본적 속성 때문에 상호 갈등 있으나 상호 의존의 정도가 변하고 확대, 심화된다. 이를 바탕으로 제도 형성이 가능하다.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제도에 의해서. 자유주의 시각에서 보면 동남아는 10개 나라인데, 이 나라들 무시하고 동아시아 질서의 미래를 구축할 수 없다. 나름대로 동남아가 핵심적인 고리역할을 한다. 실제로 동아시아의 현재 대국인 중국, 일본이 동아시아 공동체에 대해 개념을 논할 때나 지역협력을 논할 때나 이들이 먼저 떠올리는 것은 한국이 아니고 동남아다.

○ 동남아시아의 쟁탈전이 중국, 일본 사이에 벌어지고 한국은 디제이 국민정부 시절에 동아시아 공동체 깃발 제일 먼저 들었는데, 노무현 정부에 들어서서 동북아시대로 후퇴했다. 이런 동아시아 전역에서 논의되고 있는 동아시아의 미래 질서에 대한 대국주의적, 다자주의적 접근 방식을 종합적으로 볼 때, 동아시아의 현실은 어쩔 수 없이 대국주의를 바탕으로 하되, 궁극적으로는 이를 극복해서 다자주의적으로 양면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 21세기 들어와 가속도 붙고 있는 동아시아 차원의, 동북아와 동남아를 포괄하는 광역적 지역주의, 공동체 운동에 있어서, 한국은 정부는 물론 학계도 근시안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 유럽 빼곤, 한 지역에 속한 여러 나라들의 협력의 습관, 의식, 구체적으로 협력 정책 이런 것이 장기간 높은 수준으로 발전한 것이 동남아 아세안이다. 다른 지역들은 아프리카, 라틴은 동남아 아세안 지역협력의 경험만큼 못하다. 현실적으로 경험의 축적에 비추어볼 때 동아시아 차원에서 동남아는 대단히 중요한데 막상 동남아 사람들은 일본과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높아졌지만, 자기네가 약소국이니까 완전히 신뢰는 못하고 있다. 중국, 일본 만날 싸운다는 느낌 있어서 미래는 한국과 동남아가 협력하지 않고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한국만이 능동적으로 대처할 준비가 안 돼있어서, 그래서 동남아는 한국에 불만 많다. 한국은 동남아보다는 선진국이지만 일본, 중국보다는 약자이기 때문에 미래의 동아시아 질서를 공정하고 효과적으로 조정하는 역할, 균형자적 역할해야 한다는 게 동남아의 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한국과 동남아의 강력한 연대가 필요하다.

○ 근본적인 차원에서, 과연 규범적, 도덕적으로 지역질서의 미래가 공정한 지역질서가 될 것인가. 동아시아에서 약소국들이 많은 동남아까지 끼어서 미래 질서가 완전하게 절대적으로 평등하리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대국들의 세력균형에 의존하지 않고 제도적으로 지역질서가 이루어진다면, 어떤 형태로든 지역질서 형성 될텐데 그 질서가 약소국에 더 유리한 질서가 될 때, 즉 약소국이 다소 불평등하더라도 수용가능한 질서가 될 때 공정한 질서라고 할 수 있다.

○ 중국과 일본 관계 좋아지면 한국 할 일 없어진다. 그 둘이 너무 배짱 맞아도, 싸워도 딜레마다. 방법은 한국과 동남아의 연대다.

○ 지역질서는 현실적인 차원과 규범적 차원의 결합이다.

○ 현실적 세력균형에 있어서는 중국의 견제 세력이 없다. 미국은 역외국가.

※ 표 <무역규모> 참조

○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위치 무시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전통적으로 호감도 높았으나 중국 위협론으로 동남아 10나라, 미국과 전쟁까지 한 베트남도 중국 견제하려고 미국을 필요로 하고 있다. 현실주의적 시각, 세력균형 시각으로 보면, 미국에 대해선 상당기간 동안 역내 위상을 인정하지만, 먼 미래의 다자주의적, 자유주의적 제도 형성 완성되는 단계에서는 미국의 위상이 줄어들 것이다. 겉으론 미국의 동아시아 역내 위치를 인정하면서도 심리적으론 그렇지 않은 양면성이 있다.

○ 이런 미래상에 비추어볼 때 한국의 역할은?

○ 가교역할이다. 중심을 좋아하는데 중심은 아주 안 좋은 사고방식이다. 중심지향적 사고는 모두가 하고 싶어 하지만 모두가 하면 복잡한 것이다. 민족주의만 가지고는 안되고 개방주의적인 민족주의, 국제주의가 필수다. 한국의 위상 높이기 위해서 민족주의적으로 지역협력을 얘기하면 다른 나라들이 안 봐준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의 가교역할. 동아시아 차원에서 동북아와 동남아의 가교역할을 해야 한다.



국제연대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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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중국은 지리적 명칭이 아니라 젊은이들의 가슴속을 붉게 물들이는 이데아였다. 흐릿하게 인쇄된 마오의 글과 스노의 두터운 책에 심취하면서, 혁명을 이뤄 낸 중국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느 것에도 걸러지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열정을 담고 있었다. 90년대 초, 처음 중국 땅을 밟게 되었을 때 난 마치 오랜 꿈을 이뤄낸 사람처럼 가슴 떨리고 벅찼다.

그러나 베이징 어느 곳에서도, 날마다 마주치는 중국인 누구에게서도 나의 여진처럼 남아있는 경외를 확인하거나 전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 중국은 너무 다른 모습으로 변모하느라 바빴으며, 나 혼자만이 마치 시간이 정지된 채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느낌이었다.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중국에서 사회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낯설었다. 그들은 어느 학자의 비아냥처럼 자본주의 궤도에 진입하기 위해 가속도를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줄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람들을 유혹한다. 30여년을 패배와 질곡에서 미로를 찾아 헤매던 중국이 그 유혹을 받아들인 건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이치인지 모른다. 그러나 중국의 눈부시다는 성장과 괄목할 변화는 등에 진 그림자도 더 깊게 만들었다.

중국의 도시 곳곳은 마천루로 철옹성을 이루고 있지만 그 사이사이에는 철거의 흔적과 파헤쳐져 벌어진 땅덩어리가 쉽게 눈에 들어온다. 강제 철거를 당해 터전을 잃은 사람들의 무력한 지친 모습도 자주 눈에 띈다. 리어카에 걸터앉아 옷은 입은 둥 마는 둥 누덕누덕한 그릇에 짠지를 담아 찐빵하나로 끼니를 때우는 사람들의 모습도 빈번하게 볼 수 있는 거리 풍경 중 하나다.

작년에는 한 농민공 부부가 1,859위안(한화 약 24만원)의 약값이 없어 민(閩)강에 투신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지난주에도 동일한 사건이 장(長)강에서 일어났다. 몇 천만 원이 아니라 19일 동안 입원한 비용 150여만 원이 없어서 부부가 함께 자식도 남겨둔 채 생을 마감했다. 이들이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강대국이 되어간다는 중국에 특히 농촌에 제대로 된 의료보장 제도가 없어서다.

서민들을 위해 가장 필요한 사회보장제도나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필수적인 노동계약법은 아직 실효를 보지 못한 채, 중국기업에 유리하게 작용할 기업소득세법과 사유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물권법이 먼저 올 봄 전국인대를 통과했다. 중국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세계나 한국의 중국에 대한 관심은 경제적 혹은 외교적인 부분에만 쏠려있다. 사람들은 중국하면... 와! 하는 탄성을 지르거나 그 거대한 부상에 두려움이나 의혹의 눈길만을 보낸다. 그 찬사와 놀라운 반응 속에 상대적으로 더 열악한 상황에 처해지는 민초들의 생생한 삶은 없다. 30%가 성공의 깃발을 휘날릴 때 70%는 그 휘날리는 깃발의 흔들림에 어지러워한다. 중국에서 70%는 단지 100의 70이 아니라 13억의 70%인 9억여 명이다. 중국이 평균의 사회주의가 아닌 경쟁의 자본주의로 가는 것의 위험이 여기에 있다.

우리의 근현대사와 발전의 역사에도 억울하게 죽은 혼령들의 넋이 무수히 많으며 이들은 아직도 조선 산하의 구천을 떠돌고 있다. 중국도 내전과 혁명으로 덧없이 죽어가고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있으며, 새로운 중국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이런 저런 의미 없는 명분과 이유로 자기에게 주어진 생을 다 마치지 못한 영혼들이 우리보다 두 배.. 세 배.. 몇 배로 흩어져 있을 것이다.

중국이 거대기업과 권력을 가진 엘리트와 부유층을 중심으로만 움직이는 사회가 된다면, 시장의 힘에 의해 돌이킬 수 없는 자본주의 국가가 되어 미국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간다면, 약자와 실패자들을 안배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체제로 굴러간다면, 공산주의 혁명과 문화 대혁명의 이름으로 희생된 수많은 중국 인민들에겐 중국이 영광의 조국이 아니라 배반의 이름으로 각인되지 않을까. 우리에게도 참여정부가 자랑스러움이 아니라 배반의 이름으로 남으려 하듯이....





김도희(한신대 중국지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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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고향 네팔에서 NGO석사과정 취득을 위해 한국행을 결정하기까지 참으로 많은 고민을 했다. 그때만 해도 고등 교육을 위해 한국행을 하는 경우가 아주 드물었기 때문에 결정은 더 어려웠다. 하지만 짧은 기간동안 한국이라는 나라가 이루어 놓은 사회, 문화, 정치적 발전, 특히 급속한 경제 발전의 원동력을 이해하기 위한 내 열정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공부에 매진하는 동안 나는 한국의 시민사회를 가까이에서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이해하기로 결심했다. 몇몇 시민단체에서 일하면서 겪은 경험들은 내게는 경이로운 체험이었다. 나는 한국의 시민단체가 이곳의 민주주의, 경제적 평등, 인권, 평화, 정의, 법치에 미치는 영향에 놀라기도 하고, 매혹되기도 했다. 네팔의 시민사회도 이곳과 같았으면!

한국의 시민사회를 공부하면서 나는 문득 한국의 활동가들에 의해 ‘아시아 시민사회’가 형성된다면 어떨까 하는 꿈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와, 그렇다면 아시아인들에게 참 기쁜 소식이 될텐데!

하지만 나의 이런 행복한 꿈에 곧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꿈을 실현하기 위한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했을 때 그 앞에 가로 놓여있는 장애물들에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먹구름과 절망 속에서 빛과 작은 희망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나의 이런 현실적인 깨달음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하였다. 아시아 연대를 이해하는 데 있어 일반 사람들과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위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사실 나의 이 같은 시각이 한국인들에게는 그리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에서 시민활동가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보탬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나에게는 한국 사람들이 과거의 눈으로 아시아 국가를 바라보고 분석하는 문화가 아시아 시민사회를 이룬다는 목적에 있어 큰 방해물이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설사 이것이 사실일지라도 드러내놓고 말하기 민감한 부분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많은 한국인들은 정치적으로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심각하게 미국화, 일본화, 중국화되어 있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요지는, 우리가 아시아인들에게 아시아 연대를 주장하고 이 정신을 확대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독립적이고 우리만의 독창적이고 인간적인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아시아의 지도를 넓혀야 하고, 동아시아를 넘어서 다른 국가들도 이 지도에 포함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실제로 동아시아 국가만이 아시아에서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시아 지역에 대한 그들의 연대를 넓히기 위하여 가난한 아시아 국가의 사람들에게 공적, 비공적 개발원조와 고용 지원 제공을 더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를 통한 한국의 아시아 지역에 대한 국가적 이익과 전략 문제에 대해선 논외로 하고, 나는 이보다는 우리 안에서 다른 사람을 보는 태도와 관점을 바꾸기 위해 애쓰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고 싶다. 단지 몇 번의 회의와 모임에서 아시아 연대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 자신도 한국에서 편견과 인종차별을 느낄만한 상황에 여러 번 놓인 적이 있다.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마다, 한국 사람들은 내 옆에 앉아서 가기를 꺼려하고 먼 거리를 가면서도 기꺼이 서서 가기를 선택한 듯 보였다. 이것은 나에게 모욕감을 주는 행동이다.

좀 망설여지기는 하지만, 여기에 덧붙여 내가 이곳 대학에서 느꼈던 쓰디쓴 경험을 공유하고 싶다. 서방국가 출신의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들을 때, 정말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몇몇 교수들이 - 한국사회에서 가장 지성인으로 꼽히는 - 서구에서 온 학생들 위주로 수업을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마치 강의실에는 아시아 출신 학생들이 한명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 많은 아시아 학생들이 이 같은 경험을 했고 또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런 교수들이 아시아의 연대나 협력에 대해 더욱 자주 열을 올린다는 것이다.

이주민 노동자로서 살아가는 아시아 사람들은 많은 한국 산업에서 착취당하고, 학대당하며 그들의 노동권도 누리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그들에게 좋은 사람들인지 깨닫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게 더 낫다고 본다.

'아시아 시민사회' 건설을 주창하는 한국 활동가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다른 아시아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기 전에 사람 사이에 차별을 없애고 국가들 사이에 커져가는 대립을 끝내고 공통의 적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적을 저지하기 위한 효과적인 전략 수립 여부야말로 아시아 시민사회를 향한 우리의 전진에 있어 하나의 평가 기준이 될 것이다.

이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긴급한 것은, 한국 일반 시민들이 서구가 아닌 아시아에 속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일이다. 한국의 시민사회 활동가들이 이를 위해 더욱더 열심히 노력할수록 아시아 시민 사회를 형성하는 일은 그 앞에 많은 도전 과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 국적과, 지역, 문화, 인종, 언어와 상관없이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인간으로서 포옹해보자! 편견없이 서로를 바라보자! 조건 없는 인류애를 실천해보자! 민족적 우월감이나 계급제도(카스트제도), 배척과 불처벌, 부정부패로부터 아시아 지역을 결집시켜 보자! 한국산 자동차와 전자제품, 핸드폰, TV만 수출할 것이 아니라, 조화롭고 평화롭고 민주적인 아시아를 위해 창조적인 생각과 도움의 손길도 수출해보자!

이러한 것들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아시아 시민사회가 진정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아시아 연대를 위해 우리 삶 깊숙이 박혀 있는 위선의 본능을 뿌리뽑아보자!

지번 바니야(아주대 국제대학원 NGO학과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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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인도네시아 여성운동가



처음으로 쓰는 이 칼럼에서 오늘은 인도네시아 여성운동가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작년 ‘언론자유상’을 수상한 가디스 아리비아(Gadis Arivia)를 지난 주에 다시 만났다. 그는 현재 인도네시아국립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근무하고 있으며 프랑스에서 석사학위를 하고 인도네시아국립대 철학과에서 페미니즘으로 박사학위를 했다. 내가 그녀를 알게 된 것은 1998년 대학원 석사과정시절에 있을 때 그녀가 창간하고 편집자로 있는 [여성 저널](Journal Perempuan)이라는 페미니즘 저널을 발간하는 단체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되면서부터였다.

1990년대 중반 그의 집 뒤편의 조그만 통나무 집 서재에서 탄생한 Jurnal Perempuan은 여성문제에 대한 논의가 전무한 상황에서 토론의 장을 만들어보자는 소박한 의도로 시작되었다. 그렇게 시작이 소박했던 잡지가 이제는 인도네시아의 대표적인 여성 계간지가 되었고 여성문제를 연구하는 사람은 한번쯤 거쳐가는 곳이 되었다. 처음에는 여성문제에 대한 논의를 철학에서 시작하였지만 지금은 정치, 인권, 종교, 빈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여성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녀의 활동은 여성문제를 토론하는 데에 국한되지 않았다. 수하르토 집권이 종말로 치닫던 1999년 초에 그녀는 여성운동가들을 조직하여 [걱정하는 어머니들의 모임](Suara Ibu Perduli)을 결성하였다. 자카르타와 주변 지역의 여성단체들과 함께 만들어진 이 조직은 경제위기로 인한 생활고에 대처하기 위하여, 특히 저소득층과 슬럼가의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더 나아가서는 경제 문제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는 정부의 무능력을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일반 시민들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하여 그를 비롯한 여성 활동가들은 자카르타 시내에서 시위를 하였고 이로 인해 경찰에 연행되어 재판을 받는 등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조직은 여전히 자카르타 슬럼지역 여성들의 자립을 위해 공동체 조직을 설립하고 혼자 설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단체로 건재하고 있다.

[걱정하는 어머니들의 모임]의 시위는 당시만 해도 일반 대중이 독재 정권에 반대하여 거리에 나서길 꺼려하던 상황에서 ‘어머니’들의 단합된 용기를 보여주는 것이었고, 중산층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빈곤층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는 계급간 연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최근에 그녀가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포르노금지법에 대한 반대 운동을 벌이면서부터 였다. 인도네시아의회에서 이슬람정당인 '정의복지당'의 지지로 포르노금지법이 논의되었다. 포르노금지법은 포르노를 금지시키는 것이 주 내용이 아니라, 여성을 억압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데, 예를 들어 여성은 공공장소에서 노출의상을 입을 수 없으며, 이슬람 여성들은 질밥(머리카락을 가리는 스카프)을 써야 하고 밤에 외출을 금지하는 등의 조항을 담고 있다.

그래서 여성의 사회경제 활동이 자유로운 인도네시아 사회에 큰 논란을 일으켰고, 여성단체들은 이 법안에 반대하는 연대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거리에 나서 시위를 하고, 직접 자신의 이름으로 은행계좌를 열어 포르노금지법에 반대하는 사람들로부터 모금을 시작하여 신문에 직접 3천명의 지지자 이름과 왜 포르노금지법에 반대하는가에 대해 전면 광고를 싣기도 하였다. 신문광고를 내는 생각은 일본 오키나와에서 열린 회의에 참가했다가 현지 단체들의 활동방법을 보고 배운 것이라고 한다. 그녀는 항상 생각이 열려있다. 어디에 가든 배울 것을 찾고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다.

그녀는 노출 의상을 입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가 나서서 여성이 어떻게 행동하고 옷을 입어야 하는지 관리한다는 것은 인권의 침해이며 국가의 월권행위라고 강조한다. 인도네시아는 이슬람 국가가 아니라 세속적(secular) 국가이고 이러한 국가의 정체성(identity)을 지키는 것은 그녀와 같은 시민들의 힘이라고 그녀는 굳건히 믿는다.

그녀의 자그만 체구를 보면 어디에서 그만한 힘이 나오는지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그녀는 이 땅의 어머니로서 자식들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독재와 경제위기로 인한 빈곤에 대항해서 싸우기도 하고 여성 인권을 위해 여성 단체들과 연대하여 포르노 금지법에 대항하여 싸우기도 한다. 계급이 다르고 분야가 달라도 넓은 의미의 인권을 위해 함께 연대하고 투쟁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인도네시아 여성운동이 고립되지 않고 역동적으로 지속되는 비결을 발견할 수 있다.

정은숙(위스컨신대 정치학과 박사과정, 인도네시아 국제정치전략연구소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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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아씨,

지난 번에 얘기하려던 것을 여기에다 씁니다. 향아씨가 충분히 양해하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 얘기는 6년간의 타국 생활에 대한 신나는 회고라기보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제 모습에 관한 고백임을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국제단체에서 일을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태국 방콕에 도착했던 게 1999년이었으니 벌써 8년 전의 일이네요. 그동안 그곳도 많이 변했겠죠. 방콕은 인구 약 8만명의 우주방주와 같이 큰 도시지요. 길 위에는 차와 주인없는 거리의 개들이 사람들과 함께 넘쳐나고,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국수를 말아파는 사람들이 지나는 큰길 옆으로는 비싼 브랜드옷과 귀금속으로 치장한 비대한 거인마냥 버티고 선 쇼핑센터들도 많죠. 가난하게 산다 할지라도 결코 생활을 허투루하지 않고 가꾸고 멋낼 줄 아는 태국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방콕은 그 규모와 위치의 다른 도시들보다 물가가 싸서 국제단체를 위시해 월급이 나름대로 짱짱한 외국계나 국제 회사에 고용된 이들에게는 천국과 같은 곳이 아닐까 싶어요. 당시 현지의 많은 가난한 노동자들은 한 달 오륙천바트도 안되는 돈으로 생계를 꾸려가야 했지만 외국계 회사나 좀 돈을 버는 이들은 보통은 한달에 십이만바트도 넘는 돈을 받으며 살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이와 같은 혜택은 상당히 많은 국제단체들이 방콕에 주재하려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 또 많은 NGO 활동가들이 방콕을 찾아오는 이유가 되기도 하지요.

그런 천국같은 곳에도 제게는 매일매일 맞닥뜨려야했던 작은 지옥이 있었어요. 어느 거리마다 지키고 앉아 동냥을 하고 있던 걸인들... 태국 각지는 물론, 이웃해있는 나라들인 캄보디아, 라오스, 버마 등지에서까지 온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메트로폴리탄답게 방콕의 걸인들은 정말 각지에서 흘러들어온대요. 개중에는 타의에 의해 인신매매되어 강제구걸을 하는 이들도 많다고 현지 친구가 말해 준 적이 있지요. 걸인들은 도시의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특히 육교에서 흔히 만날 수가 있었어요. 제가 일하던 단체의 사무실도 하루에 한 번은 꼭 육교를 건너야 되는 곳에 위치해 있었죠. 버스에서 내려 사무실로 향하는 길에 한결같이 웅크리고 앉아 있던 걸인. 저는 때로는 동전 몇 닢을 나눠주기도 하고 때로는 그저 고개를 푹숙인 채 앞을 지나쳐 가기도 했는데, 어느 때건 마음이 편치가 않았어요. 걸인들은 그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쇼핑센터 앞이든, 버스정류장 근처든, 식당 앞이든, 가는 곳 어디에나 있었죠. 매일매일, 집회가 있던 날이건, 회의가 있던 날이건, 쇼핑을 하러 가는 날이건, 영화를 보러가는 날이건, 아무일도 없던 날이건, 집밖에만 나가면 어김없이 만났던 그들. 그리고, 그들과 크게 다를 것 없이 살아야 하는 상황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고층빌딩에서 호화롭게 일하는 이들과 유엔 사무실에서 일하는 고위급 국제관료들의 삶과 닮아가고 있는 듯 했던 내 삶을, 그 속에서 커져가는 괴리감이 주는 긴장과 외로움을 저는 견뎌낼 수가 없어졌지요. 그래서 결국, 1년 반 만에 그곳을 떠나고 말았고, 저의 방콕생활은 그렇게 파경에 이르렀답니다. 향아씨는 늘 제게 고생했다고 위로해 주곤 했지만, 이제 고백하지만 저는 위로받을 일을 채 해보지도 못하고, 그저 주변부에서 불편한 마음으로 어슬렁거리다가 그곳을 도망쳐 나왔던 거예요.

이런 주변자 의식은 방콕을 떠나 말레이시아의 쿠알라 룸푸르에서 지냈던 4년여 동안에도 별로 고쳐지질 못했죠. 말레이시아에서는 일과 함께 공부도 하고, 친구들도 많이 있어서 그만큼 생활의 반경과 깊이가 태국에 있을 때와는 달랐었는데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어요. 제가 어쩔 수 없었던 주변성이었죠. 늘 ‘외국인’이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다녀야 해서 그 사회 깊숙이 참여하고 관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조차 느껴질 때가 많았답니다.

그런 주변자 의식 혹은 주변자 감수성 때문이었을까요. 저와 가장 가까운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거리에서 일상적으로 보게 되는 노동자들, 저와 같은 동네에 단체로 모여 살고 있던 이주노동자들, 가끔 소식을 접하게 되는 농민들을 만날 때 한국에서 이와 같은 이들을 만날 때 느껴지던 강한 유대감과 함께라는 감정이 별로 생겨나지 않았던 거예요. 그 사실을 문득 깨달았을 때 저는 제가 그러고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처음엔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지요. 그들과 저 사이에서 좁혀지지 않던 그 거리감에 당황해 하면서 그곳을 떠나던 2005년 7월, 바로 그 순간까지 도대체 제가 왜 그런걸까 답답했었어요.

한국으로 돌아와 지내던 어느 날, 신영복 선생님의 ‘입장’에 관한 강연을 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신영복 선생님께는 죄송스럽게도 저는 그날 그 ‘입장’이라는 말이 지난 6년간의 제 모습을 돌아보게 한 힘에 취해 강연에는 몰입하지 못한 채 상당시간을 저 자신의 상념에 골몰했습니다. 저와 방콕의 걸인들, 저와 쿠알라 룸푸르의 노동자들과 이주노동자들은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었을까하는 질문이 먼저 떠오르더군요. 그날 가진 상념의 시간 이후 저는 제가 자문하던 질문을 바꿔보기로 했습니다. 왜 제가 그들과 같은 입장에 있다는 느낌을 덜 갖게 되는 것일까를 묻는 대신, 제가 그들과 같은 입장이 아니라고 느끼게 하는 그 기제가 도대체 무엇일까를 묻기로 했죠.

이제와 생각해 보니 제게 필요했던 것은 어쩌면 ‘공감’이었던 것 같아요. 동정과 달리 공감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같은 이해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같은 입장’이라는 감수성이 아닐까 싶어졌어요. 서로 같아서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는 것이 연대라면, 공감은 서로 달라 보이는 서로들의 입장이 사실은 한 토대에 발을 딛고 있음을 깨닫게 해서 더욱 단단하게 연대할 수 있게끔 마음의 길을 터주는 연대의 또 다른 이름은 아닐런지요.

이제 모국으로 돌아와 다시금 ‘내부인’이 된 저는 한국사회 안의 수많은 ‘외부인들’, ‘주변인들’을 보며 제가 갖고 있는 ‘내부인 감성’은 실은 많은 거짓말들로 만들어진 바탕 위에 부실공사된 건물마냥 세워져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성별, 학벌, 부, 성 정체성 등에 기반해 뻔뻔하게 난무하는 차별뿐만 아니라 연고지, 가문, 외모, 나이 등에 기반해 은근히 자행되는 차별 속에서 저는 제가 절대 이 사회의 주류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종종 그 사실을 망각할 때 저는 제 입장을 잊고 잃어, 스스로가 이 사회에서 함께 살고 있는 장애인들, 이주노동자들, 노동자들, 여성들 등과 같은 주변인들 중 하나임을 잊고서 결국 누구와 연대해야 하는지 조차 잊게 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향아씨, 향아씨가 고민하던 것처럼 저도 한동안 우리가 이 땅의 주류가 되는 날까지 싸우며 살아야겠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이 땅에 주류, 비주류라는 관념자체가 없어질 수 있도록 싸우며 살아야겠다고 해야 할지 망설인 적이 있었습니다. 주류들이 가지고 누려왔던 그 기득권을 저 또한 한번쯤 누려보고 싶은 욕망이 있어서였을것 같아요. 문득문득 여전히 그런 욕망이 솟구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향아씨에게 했던 이 고백을 잘 기억할게요.

*글쓴이 주: 이 글은 '향아씨'라는 가상의 인물에 대한 말걸기를 통해 특정인이 아닌 모두에게 말걸기를 하는 글입니다. 얼마 전 있었던 여수 출입국관리소 사건은 저에게 '구별짓기'와 '편나누기'의 폭력성과 우리 모두 더불어 잘 살기 위해 필요한 '공감'과 '연대'에 대한 더없는 갈증을 상기시키고, 저 스스로의 발자취에 대한 반성의 시간을 다시 한 번 갖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칼럼은 지극히 개인적인 고백체로 쓰여졌음을 이 글의 형식으로 인해 읽으시기가 불편하신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박이은실(성공회대 노동대학 담임,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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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필리핀에서는 아로요 집권 2001년부터 지금까지 인권활동가뿐 아니라, 노동자, 농민, 학생, 언론인, 종교인 등 그 대상을 가리지 않고 납치와 살해가 만연해, 그 수가 800 여명을 넘어서고 있다. 사안의 심각성에 비해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이번 글에서 소개한다. 자세한 내용은 [평화/국제] 면이나 시민단체 공동 블로그

htttp://blog.naver.com/stopkillings를 참고


정치적 살해에 관한 UN의 전문가 필립 앨스톤(Philip Alston)이 민다나오 지역에서 최근에 발생된 살해 사건에 관한 10일간의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정부 진상조사위원회(Melo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공개할 것을 요구하자, 필리핀이 다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필리핀 군부나 정부가 깊이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국내외의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데다 금년 5월에 총선을 앞둔 상태여서 일련의 정치적 살해가 필리핀 정국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필리핀 현 대통령인 아로요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 동참하겠다고 선언한 이후, 묘하게도 필리핀에서는 농민, 노동조합, 토착민 지도자, 진보 정치인, NGO 활동가, 인권변호사, 여성 운동 활동가, 언론인 등에 대한 저격이 계속되고 있다. 일주일이 다르게 사상자의 통계 수치는 갱신되고 있다. 검정 헬멧을 쓴 오토바이 저격단(death squad)으로부터 총격을 받아 숨지는 일들이 이제는 언론을 통해서도 빈번히 보도됨으로써 일반인들에게도 공공연히 회자되고 있다.

이러한 대부분의 테러는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그 잔학성과 피해자 숫자는 필리핀 역대에서도 가장 빈번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어, 국가가 연루된 테러는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계엄령시기(1972-1986년) 이후 최악이라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2001년 아로요 대통령 집권 이후 정치적 살해 희생자는 일간지인 ‘필리핀 데일리 인콰이어(Philippine Daily Inquirer)’의 추산으로는 2007년 2월 19일 현재 261명이며, 인권단체인 카라파탄(KARAPATAN)의 통계로는, 사망자 821명, 실종자가 180명에 달한다고 한다.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의 집계에서도 2005년 66건, 2006년 9월까지 51건의 정치적 살해가 있었다고 한다. 통계수치가 조사한 대상에 따라서 매우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살해가 좌파 공산주의 운동 집단(NPA: New People's Army)에 집중되어 있었던 사실에 기인한다. 산간 지역에 무장 세력이 남아 있는 정치적 현실이 이러한 살해 사건에 대해 무디게 느끼거나 특정 세력에 대한 문제로 치부되었던 것에 비하면, 현재는 언론이나 국제단체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킬만한 사안이 되었다.

정치적 살해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농촌지역, 산간지역의 지도자들이나 조직자들이었다. 2004년 11월에는 루손섬 북부의 딸락(Tarlac)의 하시엔다 루이시타(Hacienda Luicita)라는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다가 7명의 농민들이 시위 저지선 밖의 발포로 살해된 사건은, 아로요 정부에 의한 대규모 학살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2005년 11월에는 레이테의 팔로에서 47명의 농민들이 모임 중에 군인들이 이들을 포위, 총격하여 9명이 현장에서 사망했으며, 18명의 실종자가 발생했으나 모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군부는 시위 참가자들이 공산주의 무장계열인 NPA 소속이었다고 이야기했을 뿐, 군인들 중 누구도 이 사건으로 조사받거나 처벌되지 않았다. 2005년의 통계에 따르면 가장 많은 사상자들은 농민이나 토착민들로서(전국농민조직인 KMP, 이고롯/아그타/모로 등의 토착민), 토지개혁이나 농장과 관련된 문제에 저항하던 사람들이었는데, 군부는 이들이 공산 게릴라나 이슬람 분리주의자들과 연계를 맺고 있었다고 한다.

농민 이외에 무슬림들도 주요한 목표가 되고 있는데, 이들은 무슬림 테러집단인 ‘아부 사야프(Abu Sayaf) 소속원이라는 혐의를 받고 정부 권력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

한편 좌파 정치인들도 이러한 암살의 표적이 되고 있는데, 아로요 집권 이후 95명(2006년 6월 현재)의 정치지도자들이 암살됐고, 이들은 주로 정당명부제(party list) 선거에서 농민, 여성 등을 대표하는 좌파 정당인, 바얀 무나(Bayan Muna), 가브리엘라(Gabriela), 아낙 파위(Anak Pawi) 등의 멤버들이다. 직선 시의원이었던 바얀무나의 Alelardo Ladera는 대낮에 총격을 당해 사망했으며, 최근에는 정권을 비판하는 언론인, 종교인들까지도 이 사망자 대열에 오르고 있다. 국제기자연맹(International Federation of Journalists)은 2001년 이후에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들만 50명이 살해되었다고 한다(2007년 2월 현재).

백주 대낮에 벌어지는 이러한 살해는 상대적으로 눈에 안 띄거나 쉽게 정보를 차단할 수 있는 산간지방이나 농촌지역에서 많이 일어났다. 중부 루손지방, 남부 타갈로그, 중부 비사야, 비콜, 북부 민다나오, 일로코스-코르딜레라 지역이 주요 사건 발생 지역이었다. 그러나 2006년 이후로는 수도인 메트로 마닐라에 거주하고 있는 정당 지도자, 언론인, 법조인, 학계 종사자 등으로 사건이 확대되고 있다.

필리핀 전역에서, 어떤 층을 막론하고 확대되는 이러한 폭력행위에 대하여, 소수의 현장 목격자들이 있지만 이 ‘저격단(death squad)’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이들에 대해서는 군이나 경찰에 의해서도 조사된 바가 거의 없다. 군부나 정부에서는 이들이 무장공산주의 계열이나 무슬림 무장단체에 의해서 자행되고 있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인권 단체들은 이러한 정치적 살해가 군대가 집중되어 있는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점과 살해 방법 등을 이유로, 이 집단이 군부와 연루되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테러집단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거나 계파간의 분쟁일 것이라고 일축하던 예전의 여론과는 달리, 정부나 군부와 깊이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만연되고 있다. ‘팔파란(Palparan)’이라는 사령관 이름은 ‘처형자(executioner)'로서 항간이나 언론에서 ‘명성’을 높이고 있다. 현재 중부 루손지방의 필리핀군 사령관인 조비토 팔파란(Jovito Palparan)은 이미 여러 진보진영으로부터 ‘대량 살해’에 대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그 책임에 대하여 부인하고 있으며, “오히려 이런 초사법적 살해가 필리핀군이 반정부 세력들을 소탕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라는 언급을 하기도 하였다. 그가 사마르섬이나 민다나오 지역 책임 사령관으로 있었을 때에 이어, 중부 루손지방으로 보직을 옮긴 이후 중부 루손지방의 정치적 살해 사건이 급속하게 증가하였다. 필리핀 신문, 인콰이어에 따르면 2006년 전체 정치적 살해 사건의 1/4이 팔파란 장군의 관할 지역인 중부 루손에서 자행되었다고 한다.

필리핀 대통령과 경찰은 범행자들을 색출하여 처벌하겠다는 공표를 했지만 아직 처리된 사건은 없다. 경찰이나 군부가 목격된 사건에 대해서 정부는 희생자들이 공산게릴라나 무장이슬람세력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입장을 반복한다. 이러한 정부의 태도는, 일련의 살해 사건이 최근 더 강화된 반정부세력에 대한 진압정책과 관련되어 있다는 혐의를 갖게 한다.

미국의 부시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아로요 대통령이 이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선언했으며, 2004년 46억 달러를 미국이 필리핀의 군사, 경제 계획을 위해 지원했고, 3천만 달러의 반란 진압 군사훈련 비용을 지원했다. 아로요대통령은 ‘Oplan Bantay Laya'라는 이름하에 국내 치안을 위한 군비 증강이나 미군의 파견을 허락하였다. 아로요 대통령의 강경한 노선은, 그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진 것과 연관이 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아로요는 주지하다시피, 2000년 제2차 민중혁명을 통해 부정 축재를 했던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을 탄핵하고 추대된 대통령이다. 민중의 지지를 받던 대통령이 존립 자체까지 흔들리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아로요 대통령은 민중들의 기대와는 달리, 신자유주의 정책 하에 각종 분야에 대해서 민영화를 단행했으며, 공교육이나 공립병원에 대한 예산을 삭감하고, 부가가치세 등의 간접세 비율을 대폭 인상했다. 2005년까지 100조에 달하는 채무를 지고 있으며, 외채를 갚는 데만 국가 예산의 30%가 소요되고 있다. 인구 8500만중 800만 이상이 해외에서 일을 하면서 송금한 돈이 1년에 12조 5천만 달러에 달하지만, 외채를 줄이는 데는 기여하고 있지 못하다. 심지어 아료요 대통령은 2004년 5월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의 부정 혐의와 남편을 비롯한 측근들의 부정 축재 등으로 인해서 탄핵 절차에까지 오르기도 했다.

아로요 정부는 군사계획과 관련하여 많은 재정적 지원을 미국으로부터 받고 있다. 그리고 무슬림 테러 집단인 아부 사야프에 대한 무력 진압 등은 위와 같은 예산 증가의 구실로 삼고 있다. 2003년 미국 국방부의 Paul Wolfowitz는 필리핀의 ‘테러와의 전쟁에서의 제2전선’이라고 칭했다. 2002년부터 필리핀군은 미군과의 합동 작전 훈련을 확대했으며, 민다나오에 대규모의 미군들이 주둔하고 있다. 미군은 이슬람 세력이 많은 민다나오뿐만 아니라, NPA 숫자가 많은 중부 루손지방에도 미군을 파견하고 계속적인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급기야 국민들의 탄핵요구가 거세지던 2006년 2월 아로요정부는 ‘국가 비상사태(State of Emergency)'를 선포하였고, 이 기간 중에 59명의 국회의원, 군인장교, 사회비평가 등에 대해 체포령을 내렸다.

비상사태는 해지되었고 아로요 대통령은 개헌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려 하고 있다. 이 와중에도 연일 정치적 살해는 일어나고 있으며 필리핀 인권단체들은 최근 유엔의 인권위원회에 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근래에 들어서는 해외에서도 이와 같은 반인권적 상황에 대한 개선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치적 탄압과 독재로 인해 ‘공공의 적’으로 규정되어 축출되었던 마르코스 대통령과는 달리, 현 정부의 폭력은 ‘일상’에 숨어 수면에 드러나 있지 못했다. 초국가적 시민사회의 대응이 이 정국의 흐름에 어떻게 영향을 줄 수 있을 지가 주목되는 상황이다.

정법모(필리핀대학 인류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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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수 출입국관리사무소의 화재로 숨진 분들의 명복을 빌면서, 참담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화재의 원인이야 어찌되었든, 그런 위급한 순간에 수용자들을 제대로 탈출시키지 못한 출입국 관리소의 한심하기 짝이 없는 관리 상태와 구조 체계의 미비를 강력히 비난하며, 하루속히 적절한 대응책을 세울 것을 강력히 촉구하는 바이다.

그러나 일개 출입국관리소의 수용시설에 대한 개선과 몇몇 책임자에 대한 징계 등은 미봉책에 불과할 것이다. 출입국 관리소와 기타 불법외국인 노동자의 수용시설 전반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인권유린의 문제를 이번 기회에 근본적으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외국인 노동자는 이미 우리 사회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그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한국에 들어왔지만, 이제 우리 경제는 그들의 노동력 없이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그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들이 우리 경제구조에서 차지하고 있는 부분을 내국인 노동력으로 대체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국내에서 누구도 그 역할을 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국내에서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한, 노동자로서 누려야 하는 최소한의 권리를 국가는 보장해야 한다.

최근 외국인 노동자를 들여오는 방법이 산업연수생 제도에서 고용허가제로 바뀌었고 이는 이전보다 진일보한 정책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여전히 개선되고 있지 않은 부분은 바로 불법 이주노동자에 대한 우리 정부의 정책과 우리 사회의 싸늘한 시선이다. 그리고 이런 정책의 부재와 사회의 무관심이 이들에 대한 인권 유린이 계속 자행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많은 나라들이 불법 이주노동자의 입국과 체류를 용납하지 않는다. 불법체류자의 문제는 주권국가의 국경과 주권 보호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는 그런 불법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단속과 수용이 얼마나 합법적으로 인권을 존중하면서 행해지는가라는 문제이다.

형법상 범죄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단속과 검거가 행해지고, 수용기간 중에도 일상적으로 폭언, 폭력과 강압이 행사되며, 외부와 연락을 하거나 자신의 법적 권리에 대해서 적절한 조언을 구하지도 못하는 것이 불법 이주노동자 인권의 현주소이다. 그리고 이런 일상적인 인권유린이 자행되는 데는 불법 이주노동자들을 단속하고 수용하고 본국으로 송환하는 모든 과정과 절차에 대한 법적 규정들이 너무 모호하고 포괄적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한다. 이런 법적 미비점으로 인해 불법 노동자들은 법률의 자의적 해석, 관리자 개인판단에 의한 임의적 처분 등의 인권 유린에 노출된다.

인권이란 가치에는 국경도 국적도 없다. 한국인이 외국의 감옥이나 수용시설에서 이런 비극적인 일을 당했다고 가정하면 온 나라가 떠들썩한 이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나라 국민이 아니고, 이주노동자라는 이유로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자행되고 있는 그들에 대한 인권유린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정부의 재발방지 대책과 법적 보완은 물론이고 우리 시민 한사람 한사람의 각성이 요구된다.

국제연대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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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15일 오전 10시경, 번화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늘 조용하고 한적하던 태국 주재 한국 대사관 앞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50여명의 시위대가 민주노총의 깃발을 앞세우고, 태국어와 영어로 된 피켓을 들고 구호를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다.

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계 기업의 횡포와 부당노동행위에 맞서 노동자들이 해외 주재 한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는 것은 아주 낯선 풍경은 아니다. 그런데, 웬 민주노총 깃발? 사정인즉, 이들은 자신들의 사안이 아니라, 국제연대, 구체적으로는 2006년 11월 15일로 예정된 민주노총의 총파업 투쟁을 지지하고, 한국 정부의 노동 운동 탄압에 항의하는 시위를 조직한 태국 노동자들이었다.

“노조 탄압 중지하라, ILO 권고를 즉각 이행하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를 인정하라, 수감된 노동운동가들을 석방하라”

대사관에서 나온 담당자는 회의 참석 차 방콕에 갔다가, 그 집회에 참석할 수 있었던 민주노총 산하 모 연맹 부위원장과 멱살잡이 비슷한 몸싸움을 하고, 상대의 명함은 요구하지만, 자신의 성명조차 밝히기를 거부했다.

집회는 한국의 대통령의 사진을 태우는 것으로 절정에 달했다. 화장(火葬)이 일반적인 장례 문화인 태국에서 사진을 불에 태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 지 그 대사관 관계자가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에 대해 매우 불쾌해 했다.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쓸데없는 내정 간섭이라는 단어가 들리기도 한 듯하고. 이날의 집회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항의서한을 전달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월차 휴가는 없고, 대부분 일당으로 임금이 지급되는 태국의 노동 관행을 고려할 때, 이들 노동자들은 한국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을 지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반나절, 혹은 하루치의 임금을 기꺼이 포기하고 그 자리에 모인 것이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대사관 앞으로 모여들게 만든 것일까? 집회를 준비했던 “민주 노조 연대 (Alliance of Democratic Trade Unions)”의 의장 소묫 프룩사카셈석(Somyot Pruksakasemsuk)은 간단하게 정리한다. “우리의 힘은 작고 약하지만, 한국의 노동 운동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다. 한국의 노동 운동이 잘 싸워서 좋은 사례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예들은 우리한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노동자들의 의식에 그리고 대정부 교섭에서....”

위의 이야기는 태국의 노동 운동 속에 한국의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이는 다른 나라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의 운동은 특히 노동운동은 강력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전투적인 운동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 공통된 인식이다. 이에 따라, 한국의 운동 세력에 대한 기대 역시도 크게 나타나고 있다. 실제, 태국의 한 활동가는 “한국의 노동운동이 아시아 노동 운동을 전략이든, 실천이든, 재정이든, 도덕이든 모든 면에서 리드해야 하고, 그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까지 말한다. 많은 부분 논쟁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한국의 운동에 대한 기대를 보여주는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운동은 아시아의 이웃들과 나눌 준비가 되어 있는가?

객관적인 조건은 형성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한류가 그것이다. 한류의 열풍이 거세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동아시아든, 동남아시아든 한국에서 왔다고 소개하면, 보통 나오는 이야기는 한국의 영화, 드라마 혹은 연예인 이야기이고, 이는 남아시아까지 서서히 번져가고 있다. 자본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이러한 한류에서 자본주의의, 더 나아가 제국주의의 냄새를 맡기란 어렵지 않다. 한국 드라마 혹은 영화가 얼마에 팔렸네, 한국 드라마의 유행 이후 해당 국가에서 한국 상품이 얼마 더 팔렸네 주판알 튕기는 소리가 들리는 한편에서는, 뛰어난 한국의 문화 상품들이 아시아 각국의 안방을 점령하고 있다는 문구가 버젓이 받아들여지고 있으니 말이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다른 나라와 경쟁하고 상품 수출하는데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는데 무슨 말이 많으냐고 한다면, 정치관, 경제관, 세계관의 차이로 받아들이고 더 이상 논쟁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 한 것은 이러한 성격의 한류에 대해 한국의 소위 진보적인 세대들도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기존의 흐름에 대응하는 카운터의 흐름을 만들지 않는다면, 한국의 진보적 세력들 역시도 기존의 한류가 생산해 내고 있는 한국과 이웃 나라에 대한 편협한 인식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즉,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며, 그 속에서 이윤을 얻는 생산자로서의 한국과 단순 수용자, 소비자로서의 이웃 나라라는 이분법적인 도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아시아 연대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한국이, 특히 한국의 진보 세력이 아시아 이웃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에 있어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아시아 연대에서 한류를 만들어 간다면 그 내용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선,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 노동자, 여성 등 한국의 주변화된 집단의 목소리로부터 연대가 시작되어야 한다. 그 목소리가, 이웃의 주변화된 목소리와 만날 때, 그것은 큰 울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생산자와 소비자의 이분법에서 탈피하여, 연대하고자 하는 상대가 필요한 것들을 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한국과 아시아의 이웃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아닌, 연대의 쌍방이며,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나누는 관계일 것이다.

멍석은 깔렸다. 그 위에서 어떻게 노느냐 하는 것은 아시아 연대를 고민하는 자들의 몫이다.

*사족

최저임금에 준하는 임금을 받으면서, 얼굴도 모르는 먼 나라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을 지지하기 위해 하루치의 임금을 기꺼이 포기한 태국 노동자들의 연대의 마음을 우리는 언제 배우고 실천할 수 있을까? 인도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 현대 자동차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 그 날을 우리는 볼 수 있을까?
박진영(전 아시아여성위원회 프로그램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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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노동시장은 도이머이(혁신) 정책을 시행한 이래 가장 큰 변화를 맞고 있다. 그 동안 베트남은 값싸고 말 잘 듣는 노동력이 풍부한 곳으로 인식되어 왔다. 불과 3-4년전 만 하더라도 다국적 기업의 공장에서 일을 하기위해 연줄을 동원하고 소개비까지 지불하려는 인력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호치민과 같은 대도시나 인근에 위치한 일부 노동집약적 공장에서 인력 부족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직률도 증가하고 있다.

동시에 대도시 공장노동자의 불만은 개방정책 이래 최고조에 달해 있다. 베트남 노동조합은 다가오는 음력설에 역사상 가장 많은 파업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베트남은 이제 값싸지만 말 잘 안 듣는 노동력마저 부족한 곳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지도 모른다.

이러한 변화에는 몇 가지 복합적 원인이 있다. 베트남은 고공비행을 거듭하고 있는 경제성장률과 국제무역기구(WTO) 가입 덕택에 외국자본이 앞 다투어 들어오고 있다. 외국자본이 붕따우-바지아나 메콩델타와 같은 농어촌지역에 공장을 건설하면서 대도시에 집중되었던 노동력이 분산되고 있다.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대도시로 이주하던 농촌의 노동력이 고향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대도시에서 비싼 생활비를 지불하며 생활하던 노동자가 귀향하는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급속히 팽창하고 있는 서비스-유통 부문의 임금상승도 공장노동의 매력을 감소시키고 있다. 전문 인력이 필요한 금융부문은 물론이고 우후죽순처럼 늘어가는 점포들이 공장노동에 상응하는 임금을 지불하는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인 주재원들은 이전과 달리 웃돈을 주어도 능력 있는 운전기사와 가정부를 찾기가 쉽지 않다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베트남 대도시 공장에서 인력난이 시작되고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더딘 임금상승 때문이다. 비약적인 경제성장과 세계시장에의 급속한 편입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대도시 공장노동자의 임금은 7-8년 전에 비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실질임금은 계속 하락하고 있다. 더딘 임금상승은 노동력 부족은 물론이고 파업의 결정적 원인이 되고 있다.

요즘 한국에서 장기간 이주노동자로 일하다 귀국한 베트남인을 면담하고 있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한국인 업주의 부당노동행위에 익숙한 필자를 당혹시키는 것은 이들이 한국에 다시 가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들이 진정으로 그리워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이다. 임금이 한국의 십분의 일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베트남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많은 이주노동자를 보면서 베트남 사회주의의 현 주소를 묻게 된다. ‘노동자의 국가’를 자처하는 베트남이 언제까지 저임금을 유지할 수 있으며 이것이 정당한 것인가에 대해 물음을 던져 볼 시점이 왔다.

베트남을 들락거린 지 10년이 넘었지만 하루가 다르게 변모해가는 호치민의 거리를 걷고 있노라면 상념에 빠지곤 한다. 수많은 주검 위에 세워진 베트남 사회주의는 이미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들은 무엇을 위해 지난한 전쟁을 벌인 것일까? 베트남의 일상은 이미 시효가 지나버린 이런 질문을 되씹어보게 한다.

채수홍(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교수)
Posted by 영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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